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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6호 - 2024.9.19. 목요일(음력 : 8.17.)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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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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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시간도 충분치 않은데, 증오할 시간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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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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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게? 수케? 수게!
봄에는 암게의 살이 차고 가을에는 수게의 살이 차서 봄은 암게가 제철이고 가을은 수게가 제철이라고 한다. 그래서 요즘 수게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수게’를 적을 때 ‘숫게’ 혹은 ‘수케’ 라고 적거나, 발음할 때에도 [수께] 혹은 [수케]라고 발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수게’의 정확한 표기와 발음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게’의 정확한 표기는 ‘수게’이고 발음 역시 표기대로 [수게]로 발음해야 한다.
‘수게’를 ‘수케’ 혹은 ‘숫게’로 잘못 적는 이유는 개의 수컷을 ‘수캐’로 적고 염소의 수컷을 ‘숫염소’라고 적는 데 따른 영향으로 보인다. 중세국어에서 ㅎ이 덧붙는 ‘ㅎ 곡용어’의 잔재로 ‘살’에 ‘ㅎ’이 덧붙어 ‘살코기’가 된 것처럼 ‘수(암)’ 역시 ‘ㅎ’이 덧붙어 ‘수(암)캐’가 되었다. 이처럼 접두사 ‘수(암)’에 ‘ㅎ’이 덧붙는 표기가 허용된 단어는 ‘수(암)캉아지’ ‘수(암)캐’ ‘수(암)컷’ ‘수(암)키와’ ‘수(암)탉’ ‘수(암)탕나귀’ ‘수(암)톨쩌귀’ ‘수(암)퇘지’ ‘수(암)평아리’ 등 18개 단어다. 나머지는 모두 ‘수(암)게’ ‘수(암)개미’ ‘수(암)거미’처럼 ‘ㅎ’이 첨가되지 않은 형태로 써야 한다.
또한 염소의 수컷을 ‘수염소’가 아닌 ‘숫염소’로 적는 이유는 언중들이 이를 [순념소]로 발음해 사이시옷과 비슷한 소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숫’을 접두사로 사용하는 단어는 ‘숫양’ ‘숫염소’ ‘숫쥐’ 등 3개 단어뿐이다. 나머지는 접두사 ‘수’를 써서 ‘수소’ ‘수게’ ‘수놈’ ‘수나비’처럼 적어야 하고 발음도 표기대로 발음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바’의 띄어쓰기
“평소에 느낀 바를 말해라”에서 ‘바’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쓰고, “위 사람은 품행이 방정한바 이에 상장을 수여함.”에서 ‘-바’는 어미 ‘-ㄴ바’의 일부이므로 붙여 쓴다. 둘을 어떻게 구분할까?
먼저 의존명사, 즉 띄어 쓰는 ‘바’를 알아보자. 의존명사는 앞에 꾸미는 말이 있어야 하며 뒤에 조사가 붙을 수 있다. “우리가 나아갈 바를 밝혀 주십시오”에서 ‘바’의 앞에는 수식어 ‘나아갈’이 있으며 뒤에는 조사 ‘를’이 쓰였다. 따라서 여기서 ‘바’는 의존명사로서 띄어 써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바’는 ‘것, 줄, 경우’ 등과 같은 다른 의존명사들과 의미가 비슷하다. “예절을 모른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것이) 있겠느냐?”, “나는 어찌할 바를(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그렇게 억지를 부릴 바에는(경우에는) 다 그만두자.”
이번에는 어미의 일부, 즉 붙여 쓰는 ‘-바’를 알아보자. 어미는 앞에 오는 어간과 한몸이 되어 한 단어를 이루며 원칙적으로 뒤에 조사가 붙을 수 없다. “네 죄가 큰바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에서 ‘-ㄴ바’는 어간 ‘크-’와 결합하여 한 단어가 되고 뒤에 조사를 붙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ㄴ바’는 어미로서 붙여 써야 한다. 그리고 어미 ‘-ㄴ바’는 앞에 오는 어간의 종류나 시점에 따라 ‘-는바, -은바, -던바’ 등으로 바꿔 쓸 수 있으며, ‘-(으)므로, -(으)니까, -(었)는데’ 등과 같은 다른 어미들로 대체할 수 있다. “진상을 들은바(들으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인부들을 휘몰아 공사 기간 단축을 강요했던바(강요했으므로) 자연히 인부들이 불만을 가지게 됐다.” “서류를 검토해 본바(검토해 봤는데) 몇 가지 미비한 사항이 발견됐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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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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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 천상병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
비로봉 - 정지용
담장이
물 들고
다람쥐 꼬리
숱이 짙다.
산맥 우의
가을ㅅ길-
이마바르히
해도 향그롭어
자팽이
자진 마짐
흰들이
우놋다.
백화 홀홀
허울 벗고,
꽃 옆에 자고
이는 구름,
바람에
아시우다.
~~~~~~~~~~~~~~~~~~~~~~~~~~~~~~~~~~~~~~~~~~~~~~~~~
자(針尺) - 김수영
가벼운 무게가 하늘을
생각하게 하는
자의 우아는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재어볼 수 있는 마음은
아무것도 재지 못할 마음
삶에 지친 자여
자를 보라
너의 무게를 알 것이다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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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26~30) - 이해인
26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 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27
가을이 파 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을 긷습니다.
두레박 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 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 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28
여름의 꽃들이 조용히 무너져 내린 잔디밭에 작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새도 즐기는 이른 새벽의 침묵의 향기
- 새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비켜 갔습니다.
29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을 쉬게 하고 싶습니다.
피곤에 지친 당신을 가을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눕히고,
나는 당신의 혼(魂)속으로 깊이 들어가 오래오래 당신을 잠재우는
가을바람이고 싶습니다.
30
가을엔 언제나 수많은 낙엽과 단풍의 이야기를 즐겨 듣습니다.
페이지마다 금빛 지문(指紋)이 찍혀 있는 당신의 그 길고 긴 편지들을
가을 내내 읽고 또 읽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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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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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1장. 지를 기른다
8.'배운다는 것'은, 배우는 자세를 '흉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버지가 기른 키신저 외교
유태인의 성전인 <탈무드>에서는 '돈을 빌려주는 것은 거절해도 되지만 책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거절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유태인들이 독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랍비'인 토케이어 씨는 한가한 시간이면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데, 이제 겨우 다섯 설인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흉내를 내면서 '공부하는 척'을 한다고 한다. 아이는 서재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꺼낸 다음 의젓하게 앉아 페이지를 넘기면서 눈을 치켜 뜨는 아버지의 폼을 흉내낸다. 물론 아직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아버지란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어린 그의 가슴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그의 정신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책 읽는 모습을 흉내내면서 성장한 어린이 중에 세계적인 명사가 된 사람이 있다. 그는 유태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의 직위에까지 오른 헨리 키신저 박사로서, 그는 어렸을 때 매일 아버지와 함께 공부를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 루이는 독일 여학교 교살로 재적하고 있었는데, 그의 일가가 살던 아파트는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화려한 기록을 남긴 키신저 외교의 이면에는 19세기 유럽 외교사에 대한 그의 넓은 지식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 정설인데, 그가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그를 깊은 학문 속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린이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른들을 '흉내낸다'
일본어로 '배운다'의 어원은 '흉내낸다'와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 나는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들 유태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운다는 것은, 흉내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유태인과 일본인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아버지들은 어린 자녀들이 흉내내도 좋을 만큼 모범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따금 일본인 가정에 초대되어 그들 생활의 단면을 보게 되는데,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전용 책상이나 책꽂이조차 없다는 것은 유태인의 눈으로 보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회사나 바깥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에서까지 책상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자녀들한테는 '공부하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닌가. '아무리 공부를 하라고 타일러도 우리 애들은 통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아야'라고 탄식조로 말하는 아버지, 그 탄식은 자녀들이 흉내낼 만한 아버지 상을 가지고 있지 못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교육은 모방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부모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지 않고서는 자녀들의 올바른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9.배움을 중지하면 20년 배운 것도 2년 내에 잊게 된다
돈은 빌려주지 않더라도 책은 빌려줘라
유태의 속담 중에 '현인은 없으나 현명하게 공부하는 사람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한평생 배우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유태인이 지닌 인간에 대한 기본 시각이다. 아무리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배움을 중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년 걸쳐서 배운 것을 2년 내에 잊어버린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배움을 중지하면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을 한순간에 모두 잃게 된다. 인간에게 '현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인간'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배우고 있느냐', '배우지 않느냐'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즉 '배우지 않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성서 신명기 6장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라는 구절이 있다. 이 성경 구절 가운데 '마음에 새기고'란 말은, 히브리어로 '조각하다'라는 의미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자녀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먼저 배우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즉, 매일 매일 배우는 일에 정열을 쏟음으로써 비로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녀들의 모범적인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탈무드>의 율법이 말하고 있듯, 책이란 만인의 공유물이며, 만인은 배울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탈무드> 한 권을 읽으면 축하파티를 ...
'책의 민족'이라고 불리는 유태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이 있다. 유태인 비지니스맨들 중에는 아침 통근차 안에서 <탈무드>를 공부하고 퇴근길에도 <탈무드>를 읽으며, 안식일에는 마음놓고 몇 시간씩 <탈무드>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한평생을 다 읽어도 읽지 못할 책이지만, 한 권이라도 독파한다는 것은 우리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한 권을 독파하면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다가 축하파티를 열 정도로 유태인은 학문에 대한 정열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생각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동양인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배움을 멀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대학생의 경우에도, 입시 관문을 뚫고 난 다음에는 해방감에 사로잡혀 스포츠나 오락 따위로 세월을 보내는 학생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배움을 직업을 얻거나 결혼을 위한 패스포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 비싼 등록금을 주고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학문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이 어린이 교육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잃은 학문을 자식을 통해 되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그러나 배우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는 부모가 자녀들의 장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포인트!
배우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는 부모가 자녀들의 장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10.상상력에도 한계는 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란다
어린이들이 가장 호기심을 갖고 있음에도 도저히 이해시키기 어려운 관념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예를 들어, 가까운 친척이나 어른들이 죽으면 어린이들은 그 이유를 물어본다.
"왜 죽었어요?"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대답할 말이 없다. 젊은 나이에 죽었을 경우에는 '응, 큰 병이 들었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그게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다시 추궁한다.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응,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란다."
유태인은 저승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어린 자녀들에게 들려주려 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의 상상력은 그들 자신이 자유롭게 펼치거나 비약시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부모들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앞의 예처럼 대답할 수 있지만, 어린이들이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관념,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답하는 각도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 딸이 세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딸아이가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마마, 하느님이 뭐야?"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지. 공기 속에도 계시고, 우리가 먹는 과일 속에도 계시고, 또 ..."
그러자 딸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야, 나 하나님 먹는다'하고는 무슨 보물이나 얻은 듯 뽐내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무리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사고의 방향을 잘못 잡아 어린이들의 미숙한 상상력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단계로까지 어버이 멋대로 이끌어 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항상 명심해야 될 것은 첫째, 어린이에게는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둘째, 어린이에게는 절대로 공포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들은 '하나님은 저 어딘가에 살고 계시단다'라는 식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혼내주신다'라는 공포감을 자아내는 말도 하지 않는다.
심한 자극은 어린이에게 해롭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어려운 관념에 대해 질문하는 어린이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 명료하게 대답해 주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그 근원을 캐어보면 그러한 전통이 구약성서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매우 간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향년 175세다.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사후의 거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신에 아브라함의 업적과 가르침이 '그 열조(백성)에 돌아가니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다'라는 뜻이다. 죽음이라든가 하나님에 대해 억지로 꾸며내거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어린이들을 일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어린이들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흐려놓는다면 어찌되겠는가. 유태인들은 업무에 골몰한 나머지 가정을 내팽개쳐 버릴 정도의 주관적 자세를 싫어하며, 식욕, 성욕, 음주, 금전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탐하지 않는다. 이런 성격은 관념이라는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자극을 주거나 흥분을 자아내는 것들은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 부모들은 어린이의 상상력을 무시한 지나친 요구를 절대 하지 않으며, 적당한 자극을 통해 어린이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개발시켜 줌으로써 구김살 없이 키우려는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것이 포인트!
어린이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념에 대해 얘기할 때는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절대로 공포감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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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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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그러나 웅장하고 화려했던 '트라야누스 포룸'의 전모와 이 포룸의 건설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황제들의 포룸'의 전모를 1900년이 지난 오늘날 상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우선, 무솔리니가 독일인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불가능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군사 퍼레이드를 히틀러에게 보여주고 싶은 일념으로 개설한 넓은 도로가 '황제들의 포룸'을 양분해버렸다. 오른쪽에 포로 로마노, 왼쪽에 황제들의 포룸, 정면에는 콜로세움이 바라다 보이는 도로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다. 그것은 알지만, 좌우의 녹지까지 배치한 이 넓은 도로를 개설함으로써 로마시대 유적 보전에 힘쓴 무솔리니의 공로에 결정적인 흠이 생겨버렸다. 오늘날 좌우 양쪽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황제들의 포룸 거리'(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라고 명명한 이 도로를 철거하지 않는 한, 로마 시대의 중추부를 완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의 '평화 포룸은 주변 건물에 파묻혀버렸고, 트라야누스 신전도 그 위에 서 있는 건물들을 철거하기는 불가능하다. 고고학은 이런 상태에서 연구를 진행해야하는 숙명을 타고난 학문이다. 연구나 조사로 얻는 지식은 필수 불가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지식을 토대로 한 상상력이 무엇보다 많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곳 유적을 방문했을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상식적인 것을 세 가지만 말해보기로 하겠다.
첫째, 로마인이 세운 건물은 모두 인간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는 점. 콜로세움도 그 내부를 5만 명이 가득 메웠다고 상상하면 왜 그 규모가 원형경기장으로서 적당한 규모였는지를 납득할 수 있다. 컴퓨터 그래픽도 '상자'만은 추체험시켜주지만 '상자' 더하기 '인간'까지는 추체험시켜주지 않는다. 둘째. 오늘날 주거지역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5미터 이상 낮은 곳에 서 있지만, 포로 로마노도 황제들의 포룸도 원래부터 그런 저지대에 세워 전 것은 아니라는 점.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1천 년 동안 무너진 건물의 유물인 돌멩이나 토사가 쌓이고 쌓여 지표면이 높아지고, 그래서 생긴 지표면에 후세의 건물들이 세워지고 도로도 깔렸기 때문이다. 유적도 묻혀버렸지만,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발굴로 그 일대만 왕년의 모습을 드러내 것이다. 요컨대 고대 로마 시대에는 지상 1층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지하 1층이 되어버렸다. 셋째,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오랫동안 비바람 같은 자연 재해로 피해를 입은 결과가 아니란 점. 유적은 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건축자재를 채취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으로 변했다. 떼어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떼어냈다. 조상도 원기둥도, 다채로운 색깔의 대리석판은 떼어내기가 간단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떼어간 것으로 보아도 틀림없다. 석재도 원래부터 반듯반듯하게 잘려 있기 때문에 떼어내면 그대로 건축자재로 활용할 수 있었다.
로마 시대의 원기둥을 보고 싶으면, 유적보다 기독교 교회로 가는 편이 빠르다. 유적보다 교회에 있는 원기둥이 훨씬 많은 게 현재 실정이다. 고대의 부흥을 주장한 르네상스 시대에도 고대 건축자재의 활용은 별개였는지, 유적이 건축자재 채취장으로 이용되는 것은 다름이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목욕탕 중아 부분을 그대로 교회로 변형시킨 미켈란젤로가 당시에는 오히려 이례적이었다. 콜로세움조차 왕년의 3분의 1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떼어갈 수 있는 거라면 모조리 떼어가고 남은 잔해이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로 굳힌 벽돌만은 남아 있지만 그것은 떼어갈 수도 없고, 설령 떼어간다 해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상태대로 벽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경기장(오늘날의 나보나 광장) 주변의 아파트들은 경기장 관중석을 떠받치고 있던 벽을 그대로 아파트 벽으로 이용하고 있다. 실용적인 로마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실용적이라고 평가받는 트라야누스인 만큼, 그가 시행한 공공사업은 모두 실용적인 것뿐이다. 수도 로마 이외의 지역을 살펴보면, 우선 오스트아 항만 공사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내륙에 위치한 로마는 테베레 강어귀에 항구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우선은 오스티아를 외항으로 삼았지만, 원래 강변에 생긴 도시인지라 배가 피난할 항구가 없다. 또한 테베레 강을 떠내려오는 토사로 해안선이 바다 쪽으로 계속 뻗어나간 탓에, 오스티아에 배를 대려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결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리엔트나 아프리카에서 오는 대형 선박들은 나폴리 근처의 푸테올리(오늘날의 포추올리)에 기항하고, 그곳에 하역된 물산은 아피아 가도를 북상하여 로마로 운송되었다.
소도 로마 근처에 대형 선박이 마음놓고 기항 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하다고 깨달은 사람은 클라우디우스 황제다. 이때의 공사에 관해서는 제7권에서 자세히 서술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겠지만, 이 항구도 반세기 뒤인 트라야누스 시대에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개조할 필요가 생겼다. 트라야누스(또는 아폴로도로스)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항구 안쪽에 육각형의 후미 모양의 선착장을 신설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육각형의 각 변은 모두 배를 댈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 선착장을 따라 창고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로써 바람을 완벽하게 막아주는 대피항이 되는 동시에 강을 따라 떠내려오는 토사의 퇴적도 피할 수 있고, 많은 배와 물동량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항구가 된다. 하역된 화물은 작은 배에 실려 운하를 통해 테베레 강으로 나가서, 그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로 운반되는 체계로 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이 항구도 방치되어, 지금은 '클라우디우스 항구'는 완전히 메워졌고, '트라야누스 항구'도 육각형의 연못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트라야누스 항구'에서 테베레 강으로 나가는 운하도 형태만 남아 있고, 근해에서 잡은 물고기를 실은 소형 어선이 오가고 있다. 지중해 최대였던 항구에서는 지금도 로마인들이 먹는 물고기 정도는 하역되고 있다.
트라야누스는 실용적인 인물이었던 만큼, 오스티아 항구를 완비한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해결책이 하나뿐이면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는 항구를 세 개 대 만들었다. 두 개는 이미 어항 정도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포구를 본격적인 항만으로 개조한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아무 것도 없었던 지역을 항만으로 개발한 것이다. 첫 번째는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이다. 칼리굴라와 네로가 태어난 황제 별장이 있는 곳이니까 소규모 항구는 이미 있었지만, 트라야누스는 그것을 대피항으로 만들었다. 지중해는 풍향이 계속 바뀌었고, 당시 조난사고의 주요 원인은 폭풍이었기 때문에, 거센 바람을 무릅쓰고 오스티아 항구까지 와야 하는 선박들에 피난처를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타라키아(오늘날의 테라치나) 항구에는 대피항 이외에 하역항의 역할도 주어진다. 테라치나에서 로마까지는 거의 직선으로 아피아 가도가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두 항구는 로마 남쪽에 있지만, 로마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아우렐리아 가도 연변의 켄툼켈라이(오늘날의 치비타베키아)는 트라야누스가 처음 개설한 항구다. 이곳도 대피항과 하역항을 겸한 항구로서, 켄툼켈라이라는 이름 자체가 '100개의 창고'를 뜻한다. 이 항구가 생긴 덕분에, 당시 수도 로마에 밀을 공급하고 있던 코르시카나 사르데냐 섬에서 오는 화물선은 가까운 켄툼켈라이 항구로 들어와 짐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하역된 짐을 거기서 아우렐리아 가도를 통해 로마로 운송되었다. 이로써 오스티아 항구의 부담은 줄어들고, 그만큼 오리엔트나 북아프리카에서 오는 배들이 오스티아 항구를 많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효율성을 중시한 트라야누스는 로마 역사와 나란히 걸어왔다 해도 좋은 전통에 손을 대는 것조차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로마인들이 '가도의 여왕'이라고 부른 아피아 가도를 복선화한 것이다.
기원전 312년에 아피우스가 착공한 최초의 로마식 가도인 '아피아 가도'(비아 아피아)는 로마에서 테라치나를 거쳐 카푸아에 이르면, 역시 로마에서 내륙지방을 지나 남하해온 라티나 가도와 합류한다. 그리고 카푸아부터는 내륙지방 들어가서 베네벤툼(오늘날의 베네벤토)과 베누시아(베노사)를 거쳐 타란토에 이르고,k 거기서 동쪽으로 70킬로미터 떨어진 브린디시에서 끝난다. 오늘날에도 7번 국도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서기 107년 당시 트라야누스가 생각한 것은 베네벤토에서 브린디시까지의 구간을 복선화하는 것이었다. 새 가도는 베네벤토에서 남하하는 아피아 가도와 헤어져, 동쪽의 아드리아 해를 향해 나아가다가 카누시움(오늘날의 카노사)을 거쳐 브린디시에 이른다. 아피아 가도가 베네벤토를 지난 뒤에는 줄곧 산간지방을 지나는 반면, '아피아-트라야나 가도'(비아 아피아-트라야나)로 명명한 이 가도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으면 풀리아 지방은 평야로 나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 가도는 줄곧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남하해온 가도와 바리 부근에서 합류한다. 이로써 로마는 오리엔트로 가는 간선도로를 두 개 갖게 되었다. 또한 로마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발레리아 가도를 통해 아드리아 해에 이른 다음 해변을 따라 브린디시 쪽으로 남하하는 길을 합하면, 오리엔트 가는 길은 세 개가 된 셈이다. 내친 김에 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트라야누스는 바닷가 절벽 때문에 우회할 수밖에 없었던 아피아 가도를 단축하기 위해 테라치나의 산허리를 깎아낸다. 꼭대기에서 수직으로 깎아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그 절벽에 서면, 감탄사가 나오기보다, 또 하셨군요 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피우스와 트라야누스의 가도라는 뜻의 '비아 아피아-트라야나'의 기점이 된 베네벤토에는 가도 개통을 기념한 개선문이 세워졌다. 트라야누스가 이곳을 지나 개선한 것도 아니니까, 이 개선문만은 실용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아무리 실용이 목적이라도, 기분좋게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아치형의 개선문은 가도의 장식이다. 그리고 그 가도를 건설한 사람의 업적을 선전하는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 베네벤토의 개선문에는 육영자금(알리멘타)을 정책화한 트라야누스가 아이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트라야누스가 시행한 공공사업 가운데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만 추려보아도 대충 이 정도다. 질과 양이 모두 대단하다. 제국 전역으로 범위를 넓히면, 너무 많아서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질 정도다. 그래서 한 가지 예만 들기도 하겠다. 대표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라면 역시 에스파냐의 '알칸타라 다리'일 것이다.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그것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로마인이 만들면 이런 다리가 되나 하고 진심으로 감탄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다리도가도의 연장인 동시에 가도의 장식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이 다리는 로마인의 건축이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기본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알칸타라를 흐르는 타호 강(타구스 강)에 놓은 이 다리는 오늘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접경 근처에 있는 탓도 있어서 왜 이런 시골에 다리를 놓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시대에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빠지는 간선도로가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가데스(오늘날의 카디스)에서 북쪽으로 히스팔리스(오늘날의 세비야)와 트라야누스의 출생지인 이탈리카, 루시타니아 속주의 도읍인 아우구스타 에미리타(오늘날의 메디다), 알칸타라를 지나 브라카라 아우구스타(오늘날 포르투갈의 브라가)에 이르는 가도다. 가도가 지나는 도시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이베리아 반도의 간선토로 가운데 하나였다. 강물이 불었을 때에도 끄떡하지 않는 다리를 알칸타라에 놓을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유명한 이 다리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건설한 것 이 아니다. 비문에 따르면 건설자는 율리우스 라케르였고, 다리를 건설할 때 트라야누스한테 받은 원조에 감사한다고 되어 있다. 원조란 자금 지원이 아니라 엔지니어라도 보내준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제 고향에 이익을 주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은 트라야누스였지만, 동향 출신 황제를 본받아 공공사업에 손을 대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진심으로 환영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솔선수범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는 수법의 달인은 아우구스투스였지만, 어쩌면 트라야누스도 초대 황제를 본받았는지 모른다. 솔선수범하려면 왕성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점에서도 트라야누스는 충분하고도 남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 트라야누스를 본받은 사람들 가운데 문헌이나 비석 등으로 그 업적이 후세에까지 남는 행운을 누린 몇 사람을 소개하고 싶다. 그것도 자금을 원조한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공공시설을 기증한 사람만 예로 들겠다.
소 플리니우스-고향인 코모 시에 신전과 도서관을 기증.
그의 장인인 칼푸르니우스 파바투스-코모 시에 열주회랑을 기증.
서기 113년도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고향인 코르피니오에 공중목욕탕을 기증.
페트로니우스 모데스투스(기사계급)-트리에스테의 반원형극장 개조 비용을 전액 부담.
트라야누스를 모신 해방노예 울피우스 베스비우스-이탈리아 중부의 체르베테리 시에 학교를 기증.
에스파냐 출신 원로원 의원-고향인 코르도바에 회당을 기증.
트라야누스의 측근 제1호인 리키니우스 술라-고향에 이익을 주지 않는 황제를 대신하여 타라고나와 바르셀로나를 잇는 가도에 개선문을 건설 .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원로원에 들어간 소아시아 출신 2명-공동으로 에페수스에 도서관을 기증
도서관 기증이 눈에 띄게 많은 것은, 당시의 책은 손으로 일일이 베껴야 하기 때문에 값이 비싸서 서민층은 좀처럼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혜택받은 자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후세에 '노블레스 오블리제'라고 불리게 되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이것이 지도층인 원로원계급에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과거에 노예였다 해도, 출생지나 노후를 보낼 작정인 지방도시에 공공건물을 기증할 수 있었다. 요컨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재산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트라야누스를 본받을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다. 선제 네르바의 제안으로 지방자치단체도 개인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이 성립되어 있었다. 육친 이외의 사람이 유산을 상속하면 5퍼센트의 상속세를 내야 하지만, 공공기관에 유증할 때도 상속세가 부과되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상속세나 증여세의 세율이 높으면 논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5퍼센트밖에 안되면 지방자치단체도 선선히 내지 않았을까. 이런 조건들이 두루 갖추어졌기 때문에 트라야누스 시대는 공공사업러시로 들끓게 되지만, 공공 목적의 사업이라면 덮어놓고 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티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소 플리니우스가 푸르사(오늘날 터키의 부르사)에 목욕탕 건설을 허가할지 말지를 편지로 문의하자, 트라야누스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 건설비가 푸르사 시의 재정에 지나친 부담을 줄 염려가 없고, 완공된 뒤의 운영비도 보증할 수 있다면, 공중목욕탕 건설은 허가해도 좋을 것이다. "
소 플리니우스는 니카이아(오늘날 터키의 이즈니크) 시가 지은 극장까지 딸린 체육 센터에 대해서도 황제의 의견을 물었다. 규모가 너무 크고 공사에 부실한 점이라도 있었는지,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몇 군데가 허물어지기 시작했으니 어찌 하오리까 하고 여쭌 것이다. 그러자 트라야누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말로 그리스인은 체육관이라면 넋을 잃는 민족이다. 그래서 대규모 체육관을 짓기 시작했겠지만, 그들도 자기네 필요에 맞는 규모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공공사업과 속주 통치를 분리할 수 없었던 로마시대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다음 편지를 소개하고 싶다.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니코메디아(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 주민은 수도관 공사에 이미331만 8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쏟아 부었는데도 여태 완공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래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곳곳이 심하게 붕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2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들여 또 다른 수도공사를 시작했지만, 이것도 중도에 포기한 상태입니다. 낭비의 결과라고는 하지만, 이 사람들한테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현지에 가서 살펴보니, 수원지의 물은 깨끗하고 풍부해서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물을 어떻게 도시까지 끌어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역시 처음에 시도했듯이 아치를 늘어놓은 고가교를 건설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처음 공사할 때 세운 아치들 가운데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습니다. 그래서 다시 세울 수밖에 없지만, 처음 공사 때 사용한 석재는 그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공사가 쉽고 비용도 싸게 먹히는 벽돌을 써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낭비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도와 건설 전문가를 보내달라고 부탁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 임무는 단 하나, 폐하의 치세에 이루어진 공공사업이 폐하의 위광에 어울리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니까요."
"트라야누스 황제가 플리니우스에게
니코메디아 시내에 물을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납득했다. 전력을 다해 이 일에 매달려주기 바란다. 그와 동시에, 이 불상사를 초래한 책임자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왜 중도에 포기했는지. 여기에 대한 조사 보고를 기다리겠다. "
트라야누스는 공사를 발주한 쪽과 수주한 쪽 사이에 부정이 저질러진 것을 의심했다. 로마71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공공사업을 할 때 발생하는 부정에 대해서는 항상 감시의 눈을 번득여야 했다. 트라야누스는 속주민의 부정부패에만 불만을 품은 게 아니라, 지나치게 고지식한 부하 플리니우스에게도 이따금 불만을 터뜨렸다 수도와 건축 전문가를 파견해 달라는 비티니아 속주 총독에게 황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건축가가 부족할 턱이 없다. 그 방면의 전문가가 없는 속주는 제국 안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에서 전문가를 파견해 달라니. 일부러 그리스에서 전문가를 불러들여 일을 시키고 있는 것이 로마의 현재 실정이다. "
소 플리니우스가 부임한 비티니아 속주는 흑해와 마르마라 해에 면한 소아시아 서북부 지방으로, 역사적으로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지방이다. 그리고 공공사업 부문에서 트라야누스의 오른팔이었던 아폴로도로스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태생이긴 하지만 그리스인이었다.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제국 동방에 부임했으니까, 건축기사는 거기서 찾으라는 것이다. 중후한 표정의 초상만 남긴 트라야누스 황제의 맨 얼굴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리스인이 없이는 로마의 공공사업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해도 좋을 만큼 이 분야에서 크게 확약한 그리스인들이 로마인과 공동 작업을 할 경우에는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자기들끼리 하면 그렇지 못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페리클레스나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그리스인은 상상력과 진취성은 누구보다 풍부하지만 조직력이나 효율성에서는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는 민족이었다. 하늘이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지 않는다면, 각자 뛰어난 분야에서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로마 황제의 책무에는 안전보장과 사회간접자본 정비 이외에 내치도 빼놓을 수 없었다. 내치라 해도 로마 제국에서는 제국 전역의 통치를 의미하고, 단적으로 말하면 속주 통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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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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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16화 조카딸의 아들로 환생한 콜리스
트란짓트인들 중에 빈센트라는 사람은 죽기 1년쯤 전에 그의 누이의 딸, 곧, 조카딸인 초트킨 부인에게 강한 친근감을 보이면서 그녀의 아들로 환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는 지금의 자기처럼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꼭 같은 흉터를 갖고 있을 터이니 그것이 자기의 환생증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등에 있는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또 코 오른쪽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그것도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가 죽고 8개월이 지난 1947년 12월에 초트킹 부인은 아들을 낳고, 그를 콜리스 초트킹 2세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빈센트가 죽기 전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점과 흉터를 코와 등에 갖고 있었다. 콜리스가 말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물으면 '카코디'라고 하였다. 그것은 빈센트가 속해있던 부족 이름인데,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이름인 '카코디'로 알려져 있었다. 콜리스는 그것을 완전한 트란짓트의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숙모가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콜리스가 태어나기 좀 전에 빈센트가 초트킹에 와서 살게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콜리스가 두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빈센트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 부인을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빈센트와 친척 사이인 사람들을 몇 명 알아보았다. 그는 빈센트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생전의 빈센트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배의 구조를 받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빈센트로서 자기 부인과 함께 현재의 콜리스씨 집을 방문했을 때에 잠자던 방을 기억해낸 것이다. 콜리스의 어머니가 놀란 것은 그가 보여준, 빈센트와 흡사한 몇 가지행동의 특징이었다. 콜리스는 머리를 빗을 때 언제나 이마쪽으로 머리를 내려 빗었는데 그것은 빈센트와 똑같은 습관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모가 빗어주던 머리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또 빈센트는 아주 심한 말더듬이었다. 환생해서는 말더듬이었다. 유달리 신앙심이 깊은 것도 같았다. 빈센트처럼 콜리스는 배와 해상생활을 좋아해서 바다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빈센트가 왼손잡이였듯이 콜리스도 어린시절에는 그랬었다.
제17화 데자․뷰에 의해 전생을 기억한 노먼
노먼은 1944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서너살쯤 되던 어느 날 부모와 함께 고향에서 50km쯤 떨어진 외딴 바닷가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노먼은 갑자기 흥분하여 자기는 이 바닷가에서 훈제소를 하고 있었고 나중에 장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흥분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노먼의 이 말은 그의 할아버지인 헨리 데스피스 1세의 생애와 두가지 사실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업에 종사하며 이 바닷가 에서 훈제소를 갖고 있었다. 1935년에 여든다섯살로 죽었는데 마지막 4년 동안은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1930년에 이 훈제소를 버렸고, 노먼이 그곳에 간 1947년에는 말뚝 몇개가 남아 있을 뿐 훈제소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것으로써 노먼은 할아버지가 환생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노먼은 시력이 약해서 열네살 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다. 심한 근시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나 또 그의 네 형제들은 시력에 아무 장애가 없었다. 이 사례에서처럼, 처음보는 상황이 과거 어느 때에 체험한것 같다는, 일종의 착각 현상인 데자뷰(Deja-Vu) 경험에 의해 환생을 말하는 사례는, 구체적인 자료는 적으나, 세계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환생 사례이다.
제18화 누님의 아들로 환생한 지미
지미 스벤손은 1952년 11월 22일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두살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전생에 현세의 엄마의 동생이었으며 크러쾅 마을에 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트카에서약 160km쯤 떨어진 크러쾅에는 엄마의 동생인 존 시스코가 이전에 살았었다. 지미는 화가 날 때면 곧잘 "나는 크러쾅에 가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이렇게 이삼년 동안 전생 이야기를 하다가 그 뒤로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1961년에 이 사례를 조사했는데 그때 아홉살이던 지미는 이미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록은 그의 부모와 형제들의 간접증언에 의한 것이다. 지미의 외삼촌 존 시스코가 죽은 것은 1950년 여름으로 스물다섯 살 때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여인과 함께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에 뱃놀이를 나갔는데 몇 시간 뒤에 보트만 발견되었다. 그의 사망이 단순한 사고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두 여인의 질투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지미는 자기는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배에는, 태어날 때부터,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네개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그밖에는 몇개의 환생기억을 이야기했다. 자기는 존이지 지미가 아니라 하면서 크러쾅에 가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뒷날 크러쾅에 갔을 때마을사람들이나 장로에게 강한 친밀감을 보였으며, 시스코의 친구였던이를 만나서는 고기잡이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외삼촌 한스시스코에게 "나는조카가 아니고 동생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전생기억은 네살 때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19화 전생의 총탄 흉터를 가진 헨리
헨리 엘킨은 1899년에 앙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가슴과 등에는 모반이 있었는데, 서로의 위치로 볼 때에 총탄이 앞뒤로 관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해 전생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앙군의 공회당에 갔을 때에, 건물 안의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서 예전에 외할머니를 자주 보았다" 고 말한 적이 있을 뿐이다. 1880년 이전에는 여자들이 이 공회당에 모여 전쟁에 나간 남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헨리는 여덟살 때에 전생에 대한 일을 문득 기억해냈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진 두 사람을 구해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그런 사건은 있었지만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라고 했다. 헨리의 이런 기억들을 확인할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그의 진술에 의거할 뿐이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 바다에서의 사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말했다. 곧 부모에게서 "그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줄 무렵에는 아직 너의 누이가 살아 있었고 누이는 그때 아버지의 배에 타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누이란 아직 헨리가 어렸을 때 열 두어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이야기에서 볼 때 이누이가 죽었을 때 그는 대여섯살쯤 되었으리라고 보면, 헨리는 1899년에 태어났으니, 누이의 죽음은 대략 1905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때가 열두어살 때였다고 한다면, 그녀는 1892년에 출생한 셈이다. 이누이가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것은 대여섯살 이후였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문제의 인명구조 사건은 1897년 쯤의 일이다. 헨리가 1899년에서 불과 2년 앞선 일이다. 헨리의 전생기억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전생경험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면 이런 기억들을 그가 환생하기 이전의 중간적 생애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사례는 트란짓트인의 사례 조사에서 중간적 생애에 대한 전생기억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20화 여자로 환생한 그나나틸리카
그나나틸리카는 1956년 2월 14일 스리랑카(실론)의 헤두나훼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살이 조금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종합해 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는 우편배달부다. 어머니는 뚱뚱하다. 다아다사라는 형이 있는데 개에 물린 적이 있다. 누이 한 사람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자주 땔감을 샀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마을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약 30km떨어진 탈라와켈레에 갔다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돈을 주고 땔감을 산다는 얘기는 전에 그나나틸리카가 말했던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 마을사람의 애기를 듣고 그녀의 아버지는 속으로 깜짝 놀랬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마을 사람의 이야기가 그나나틸리카를 강하게 자극한 듯했다. 그때부터 더욱 상세하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생에 탈라와켈레에 살았다. 거기에는 야자나무가 없다. 학교갈 때 기차를 타고 간다.누나인 수두아카도 학교에 간다."
그나나틸리카가 네살 때에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탈라와켈레에 찾아갔다. 전생의 집이 있었다는 우체국까지는 잘 찾았는데 막상 그 집은 찾지 못했다. 그곳은 건물이 없는 빈터였다. 그녀가 전생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데라 스님은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그녀의 전인격(前人格)을 찾아냈다. 그는 탈라와켈레에 살았던 소년으로, 틸레케라트네라고 했고 1954년 11월 9일 열세살로 죽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듣고서 텔레케라트네가 다니던 중등부의 교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나나틸리카는 금방 그 선생님을 알아보면서 이름도 기억해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는 한번도 꾸중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을 한번도 야단친 일이 없는 특이한 교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부처님이 고행에서 성불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었다. 또 그나나틸리카가 "기차를 타고 학교에 통학했고 긴 터널을 지나갔다" 고 한 전생 발언도 이 선생님의 방문으로 입증되었다. 틸레케라트네는 햇튼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학교 가는 길에 실론에서 가장 긴 터널이 있어서 그는 학교를 다니느라 하루에 두 번 이 터널을 통과하였던것이다.
그녀는 또 아직 보지도 못한 햇튼 시(市)의 거리 모습을, 특히 학교와 역을 중심으로, 정확히 그려보였다. 또 그녀의 오빠가 어느 큰 행사때에 춤을 보이러 탈라와켈레에 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행사는 실론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영국 여왕의 방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여왕이 타고 있던 기차의 창너머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본 일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이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생전의 틸레케라트네는 인간은 죽어서 환생하는가를 묻고 환생할 때에 남자가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1961년 초 그나나틸리카가 다섯살일 때 그녀는 다시 틸라와 켈레에왔다. 그녀는 부모와 스님, 그리고 선생님들이 모인 곳에서 전생 가족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모두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 때 특기할 것은 틸레케라트네가 좋아했던 누이에게는 특별히 친밀감을 보이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불상(佛像)을 깨뜨린 형에게는 반감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틸레케라트네의 전생의 태도와 상응하는 것이다. 그 후 열네살이 될 즈음 그녀는 극히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머리 모양이나 체격 등 어디로 보나 남자의 환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여자 아이였다. 그러나 언제나 파란 하늘 빛깔을 좋아했다. 그것은 틸레케라트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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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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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기의 환자 - 램/양병석 옮김
<전략> 병에 걸린다는 것은 군주의 대권(大權)을 향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비교해 보라 ― 조심스런 그 발걸음, 눈짓 하나로도 대령하던 공손한 그 시중과, 병세가 호전되었을 때 동일한 간호원이 취하는 부주의한 그 행동(문을 쳐 닫거나 열어 놓는등), 함부로 병실을 출입하는 그 불손을 ― 그러면 병실의 침대(차라리 왕좌라 해 두자.)에서 회복기의 안락 의자로 옮겨 앉는다는 것은 권위로부터의 몰락이요. 왕좌로부터의 축출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회복의 차도에 따라서 사람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위축되어 버리는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혼자서 독차지하던 그 영토는 이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가 누워서 전제 군주의 몽상을 실천하던 알현실(謁見室)이요, 왕권의 현장이던 그 병실이 이제 얼마나 평범한 침실로 격하되고 말았는가! 침대가 말끔히 손질되어 있는 것조차 어쩐지 하찮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침대가 매일 정돈될 수도 있다니, 거친 파도처럼 구겨진 좀 전의 모습에 비하면 사정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때는 침대 손질이란 3, 4일 만에 한번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 때마다 환자는 슬프고 괴로웠지만 잠시 동안 들려나와 그 달갑지 않은 청소니, 정돈이니, 하는 침범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아귀가 어긋난 몸뚱이는 그 화(禍)를 면해 주기를 애원했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침대로 옮겨져 3, 4일의 유예 기간 동안 몸부림치면 침대는 다시 흐트러지곤 했다. 침대 덮개에 새로 생긴 주름살 하나하나는 자세를 고쳐 누웠다든지, 억지로 돌아눕기 아니면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부림쳤던 역사의 기록이요. 쭈글쭈글해진 살갗인들 그 구겨진 침대 덮개만큼 환자의 고통을 진실하게 전하진 못했다.
그 영문 모를 한숨, 그 신음 소리, 얼마나 큰 고통이 들어 있는 동굴에서 터져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끔찍하기만 했던 그 소리들도 이제는 잠잠하다. 그 레르나의 고통도 이제 사라지고, 병고의 수수께끼도 풀려 필록테스트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게 되었다.
자기 존대에 대한 환자의 몽상은, 어쩌면 가끔 찾아오는 의사나 간호원의 문안 속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 또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변해 버렸는가! 이 사람이 그 사람일 수가? ― 새로운 소식이며, 잡담이며, 이야기며, 의학과 관계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말해 주던 그 사람인가? 이 사람이 조금 전에 환자와 그의 잔인한 적인 죽음 사이에 끼여들어 조물주가 보낸 사자의 엄숙한 사명을 띤 양 높다란 중재자(仲裁者)의 위치에 우뚝 서 있던 그 사람일수가 있을까? 체! 이 사람은 어느 노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병고를 호사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모든 것이 그대에게 하직을 고한다. 온 집안을 숨죽이게 했던 그 마력, 집안 구석구석 스며든 그 황량한 정적이며, 묵묵히 시중들어 주던 일, 표정만으로 문병하던 일이며, 자기만을 돌보던 보다 부드럽고 미묘한 기분이며, 세상 생각이란 철저히 배제되고 아프다는 것에만 고착된 병고에 대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눈이며, 온 세상이 매달렸던 인물, 그가 누렸던 그 독무대가 ―
한 점, 작은 티끌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병고의 물살이 빠져 나가기는 했지만, 건강이라는 확고한 땅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먼, 회복기의 펑퍼짐한 늪 속에 들어 있을 때, 존경하는 편집자여, 당신의 원고 청탁서를 받게 되었소. ‘죽어가는 순간에 무슨 글이냐’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무언가 어려운 일이요, 또 핑계가 구차스럽기는 하오만 이렇게라도 강변을 늘어놓고 나니 한결 해방이 된 기분이오. 원고 청탁이 시의(時宜)에 맞지 않기는 했지만 이 호출이 깡그리 잊고 있었던 사소한 인생사에 나를 다시 연결시켜주는 것 같소. 대단치 않은 것일지는 몰라도 이것은 활동에의 조용한 초대요, 자기도취의 터무니없는 몽상과, 병고라는 허황스런 자만 상태에서의 탈출을 뜻하는 것이었소. 사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잡지라거나 혹은 군주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또 법률이라거나 문학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상태로 너무 오랫동안 드러누워 있었소. 이제 그 병적인 팽만한 상태도 가라앉고 있소. 또 내가 공상 속에서 차지하고 있던 ― 환자란 오직 아프다는 골똘한 생각 하나로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자신을 신화 속의 티티우스와 같은 거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까 ― 그 넓은 땅도 한 뻠으로 줄어들고 있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듯 오만한 거인이었소만, 이제 다시 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보잘것없는 수필가인 그 여위고 깡마른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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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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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10장 독일 사절의 시기. 피사 전쟁과 탈환 1/2
소데리니 곤팔로니에레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고 좀더 나아진 경기 덕분으로, 피렌체는 다시 번영하였으며, 지도자가 훌륭하고 현명하며 정치를 잘 해나갈 때 그 나라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도시가 파탄 지경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는, 자신의 사적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사에서도 극도의 절검 정책을 실시하는 등, 무엇보다도 재정을 일으켜 세우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유능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4년 뒤, 재정 상태가 개선되면서 국가의 신용은 되살아났고 세금은 경감되었다. 그는 시민을 신뢰하였고 시민들 역시 그를 믿었다. 반면에 그에 대한 일부 유력 시민들의 의심과 증오는 더욱 켜졌다. 알라만노 살비아티와 조잡바티스타 리돌피 등을 앞장세우고 있던 이 소수의 유력자들에 대해 그는 그리 적절하게 대처하기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랬다. 곤팔로니에레는 소위원회들에서 그들의 분별력과 명성이 자신을 앞서는 것을 보고는, 정무위원회나 80인회를 통해 국정을 처리해 나가는 쪽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곳은 좀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의 관직이 주는 권위와 공무상의 경험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결국 유력 시민들의 의심과 원한은 더욱 증폭되어 이제는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사사건건 반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소데리니는 자신의 계획이 그들의 반대에 부딪힐 때면, 거의 언제나 더 쉽게 찬성을 얻을 수 있는 쪽에 기대어 고집스러울 정도로 그것을 참아내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곤 하였다.
이미 얘기했듯이, 곤팔로니에레를 향한 이러한 증오는 동시에 마키아벨리에게도 쏠리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곤팔로니에레의 도구이자 거간꾼이라는 의미에서 만네리노 mannerino(아참꾼, 정탐꾼 등의 뜻을 가짐 - 옮긴이)라고 불렸다. 조금 앞서 알라만노 살비아티가 그를 (건달)이라고 우아하게 부른 것도 이 근사한 별명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마상 시합에서 주인뿐 아니라 종자 역시 어느 정도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앞의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목격한 바 있으나, 또 다른 타격이 곧 뗠어질 것이었다.
줄리오 2세는 잠시 조용한 상태였으나 이탈리아의 평화는 1507년초 제노바의 반란으로 깨어져 버렸다. 물론 반란을 프랑스 왕이 개입하여 신속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있은 프랑스 왕과 개입하여 신속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있은 프랑스 왕과 아라곤 왕 간의 회담은 아무런 결실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두 왕이 이탈리아를 떠나자, 막시밀리안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그는 콘스탄츠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망령과 독일의 명에를 부추김으로써,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프랑스 왕을 롬바르디아에서 쫓아내고 로마에서 황제의 보관을 수여 받는 데 충분할 정도의 군대와 돈을 약속받고 있었다.
피렌체인들에게 막시밀리안의 명성이란 거의 비웃음 거리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땅에 떨어져있었다. 그는 선군이자 용맹스럽고 당당한 군주로서의 품성을 과시하기엔 영토상의 거리에서나 기세에서나 피렌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들이 본 것이라고는 단지 황제가 원대환 계획과 그에 따라주지 않는 수단 사이에서 헛되이 방황하는 좋지 못한 모습뿐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최근 그에게 했다는 약속의 소식이 들려오자, 지금까지 분열되어 있던 세력들이 독일의 자존심이라는 이름 아래 갑자기 결집될지도 모르며, 그러한 세력을 손에 넣은 막시밀리안이 더욱 대담하고 결단력 잇게 나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피렌체인들은 그의 준비 상황과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그가 이탈리아로 들어오려 할 대 그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면 과연 돈이 얼마나 들 것인지를 파악할 만한 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와의 선린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자신이 믿을 수 잇는 사람을 원했던 곤팔로니에레는 이 일에 마키아벨리를 선임하였다. 하지만(그가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때) 늘 있던 반대파로부터 (피렌체에는 그 일을 할 만한 능력 있는 청년들이 많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결국 매번 언제나 그들과 싸울 수만은 없었던 소데리니는 양보 할 수밖에 없었다. 임명 내용이 변경되었고, 6월 27일 프란체스코 베토리는 (협상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하지 말고, 단지 지켜보고 보고하라는 ) 일반적인 임무를 가지고 황제에게 파견되었다.
이 일로 인한 굴욕감이 서기장보다는 곤팔로니에레에게 더 컸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건 직후, 당시 사절로 나가 있던 필리포 다카사베키아와 알레싼드로 나시는 마키아벨리에게 이 일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그를 위로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피비차노에 나가 있었던 필리포는(독일의 승리(마키아벨리의 virus에 반대한 알라만노의 이름 뜻이 원래 독일 혹은 독일인 alamanno=alemanno임을 빗댄 말 - 옮긴이)에 대해 참을성 있게) 대처하면서 그를 저지했다고 뽐내는 사람들에게 너무 괘념치 마라고 말했다. 카쉬나에 있었던 알레싼드로는 (친애하는, 그리고 결코 불행하지 않은 마키아벨리)가 (제국 사절이라는 것을 배설함)으로써 무언가 알 수 없는 병으로부터 회복한 것을 축하하며, 자신을 마키아벨리가 독일로 가지 않고 피렌체에 머무르는 쪽이 그들 위해서나 도시를 위해서난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8월 9일 마키아벨리가 다시 길을 떠나게 된 것은 역시 독일건 때문이었다. 교황은 카르바할 추기경을 막시밀리안에게 사절로 보냈는데, 그가 가는 길에 피렌체를 거쳐 가야 했으므로 10인위원회는 서기장을 보내 그의 수행원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시에나는 그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먼저 시에나로 갔다가가,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 다음에는 산 킈리코 드르차로 갔다. 그는 10인위원회에 세 통의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이 거느린 마소와 사람 수를 알린 뒤, 세련된 피렌체인의 입장에서 (그들 대부분이 마치 감방에서 막 나온 듯이 궁상스런 모습)이라며 교황청 조신들의 저질스러움을 거듭 입에 올렸다. 더불어 자신이 입수한 정보도 첨부하였다. 즉 교황 사절단은막시밀리안에게게 만일 비무장 상태가 아니라면 이탈리아로 들어오지 말라고 전하라는 훈령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머리가 빠른 판돌포는 그가 오리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서기장은 (가장 가까운 길을 따라 천천히)집으로 되돌아왔다.
황제의 남하 소식이 더욱 잦아짐에 따라, 시민들의 정신 상태와 의견 다툼도 가열되어 갔다. 피렌체의 오랜 전통에 따라 친프랑스적 경향이 강한 곤팔로니에레는 상례적인 반대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중에서도 알라만노는 그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독일인 alamammo이 독일 Alemagn을 지지한다는 뜻 - 옮긴이)) 결코 독일에 정식 사절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그리고 점점 더 사태의 촉박함을 알리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편지들이 전해져 오는 가운데, 결국 공물조로 막시밀리안에게 보낼 돈에 대한 새로운 훈령을 내리기로 결정되었다. 황제는 원래 오십만 두카토를 원했으나 지금은 그 액수가 많이 내려가 있었다. 하지만 베토리를 그다지 믿지 않았던 곤팔로니에레는, 이 일은 매우 중요한 데다 혹시 편지가 잘못되더라도 말로 그 내용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당시 그 악명 높은 돈 미켈레의 후임으로 민병대 지휘관을 맞을 인물을 물색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일찍이 발로리를 보강하기 위해 그를 프랑스로 보냈을 때 내세웠던 것과 똑같은 핑계가 소데리니로 하여금 정적들에게 이 조그만 앙갚음을 하도록 해주었던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았다. 즉 일정한 지급 조건 아래 최고 오만 두카토까지 지급 가능하지만, 우선은 삼만 두카토로 협상을 시작하며, 그 대라고 피렌체의 주권으 제한하는 일체의 유보 조건 없이 모든 영토를 복구하여 보전케 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지 않은 시기의 좋지 않은 여행이었다. 12워 17일 길을 떠난 그가 열악한 도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초대의 속도로 롬바르디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이미 전쟁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프랑스 군은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사절을 (세밀하게 조사하고는) 더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 겁났던지 그가 지닌 훈령과 편지를 빼앗아 찢어버렸다. 크리스마스 동안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던 그는 그곳에서 10인위원회로 가는 간단한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황제의 궁정과 베토리가 있는 볼차노롤 방향을 잡은 끝에 1508년 1월 11일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처럼 시간이 많이 걸린 데 대해, 여행 거리가 길었고 날씨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말은 지쳤고 돈도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하였다. 사실 그는 떠날 때 받았던 110두카토를 가는 중에 남김없이 써버린 상태였다. 그는 크게 우회할 수밖에 없었던 기 여정 속에서도 3일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며칠도 그냥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위스 땅에서 네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각별히 군사적 관점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며 또 어뗜 유의 사람들인가)를 관찰하여, 볼차노에게 10인위원회에 보낸 첫 편지에서 그것을 극히 통찰력 있는 필치로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오는 도중에 만난 모든 사람들과 쉼없이 자신의 끝없는 탐구심을 시험한 결과 얻어낸, 황제의 계획에 대한 정보들도 알려주었다. 콘스탄츠에서 그는 (두오모(이탈리아에서'Duomo'란 주교좌가 있거나 또는 가장 주요한 위치에 잇는 성당을 가리킴 - 옮긴이)의 두 밀라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피렌체에 아내를 둔 유명한 음악가 아자하를 찾아본 다음, 사보야 공의 대사 한 명과 저녁을 하며 담소하였는데,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당신은 내가 몇 달 걸려서도 알아내지 못한 일을 단 두 시간안에 알고 싶어하는군요)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차노에 도착하여 압수됭 찢겨버린 서류의 내용을 베토리에게 말로 전한 뒤, 곧 황제를 알현하고자 나섰다. 이탈리아인들은 언제나 칭호에 관대한 편이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그를 로마인들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는 황제를 만나 삼만 두카토를 세 번에 나누어 지불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이 제의가 말도 안 된다고 즉석에서 거부당하자, 그는 돈을 사만으로 올렸다. 그제서야 막시릴리안은 만족의 빛을 보이며 다음날 대답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측근을 한쪽으로 불러, (방금 왔던 그 서기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오고, 또 10일이 더 지나가도 왕은 답을 주지 않았다 마친내 1월 24일 베토리를 부른 막시밀리안은 제의된 돈이 너무 적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조공 액수는 자신이 포 강변에 도착했을 때 피렌체 사절들과 논의하기로 하고, 지금 즉시 25,000두카토를 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는 돈은 확실히 나가지만 언제 돌려받을지는 확실치 않은 제의였다. 베토리는 이를 거절하고 피렌체에 새로운 훈령을 청했다. 피렌체 정부와 돈 문제로 합의를 보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고, 더욱이 이번처럼 먼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절들로서는 더 힘든 문제였다. 물론 그러한 사정이 10인위원회로서는 종종 사태를 관망하여 궁지를 벗어나는 기회로 활용되기는 했지만, 하여튼 이번 경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귀머거리끼리의 대화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 사절 임무에 관한 편지들은 거의 다 마키아벨리가 직접 자필로 작성한 것이었다. 베토리는 단지 서명만 했을 분이며, 기껏 해보았자 자필로 몇 줄 덧붙인 데 지나지 않았다. 그 자신 문필가로서의 자질이 결코 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므로, 그을 동료에게 맡긴 것이 그냥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인지, 또는 서기의 봉사를 받는 것이 좋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키아벨리가 자신보다는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두 피렌체인이 스스로가 취할 태도와 보고 내용에 관해 서로 의논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보고서 속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한 대목에서 베토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니콜로와 저는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다른 한 대목에 가서는, 자신의 동료 없이는 (어떤 동료인데!)(일을 잘 알지 못했으리라)는 점을 실토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추정해 보건대, 일의 처리 과정에서 더 비중이 컸던 인물은 직위는 낮지만 눈의 예리함과 연륜에서 앞선 쪽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다른 경우에 니콜로는 비록 대사 직함은 가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역할만은 그러하였던 적이 종종 있었으나, 이번 경우에는 그러한 역할조차도 부여받지 못한 처지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앞장서 남을 이끄는 성품을 타고 났고, 이 편지들에서 베토리 필적이지만 사실은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그의 역할을 단지 글을 받아쓰는 것 이상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에서 둘 중 누구의 몫이 얼마만큼인가를 판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 사절 임무 그 자체는 마키아벨리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리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이 일은 다니지 그가 독일 세계와 접촉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비록 그러한 접촉의 시간이 매우 짧았던 에다, 관습과 사고 방식이 크게 달랐을 뿐 아니라 말까지도 다른데서 오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을 열어주는 또 하나의 창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그가 카이사르의 안내로 프랑스에 갔다면 독일여행에서 그를 안내해 준 인물은 타키투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와 같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5세기에 태어난 한 피렌체인에게는 그 광대한 영토까지도 틀림없이 매우 야만적으로 보였을 한 나라 중에서도, 그가 본 것은 타키투스의 기술에 따르자면 알프스의 험지에서 가장 인접한 스위스와 티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북쪽의 대도시들이 누리고 있던 부와 문화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항상 일을 정치와 군사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그로서는 그러한 지식이 별 쓰임새도 없긴 하였다. 하지만 피렌체로 돌아온 뒤 하루만에 쓴 그의 (독일 보고서 Rapporto delle cose dell'Alemagna)는 글이 착상된 환경으로 미루어 오히려 자연스러운 오류와 생략과 편견들이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직관력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마키아벨리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번뜩임인 것이다. 이 (독일 보고서)는 뒤에 (독일 관찰기 Ritratto delle cose della Manam)로 발전하는데, 그는 여기서 문체와 체제만을 개선했을 뿐 그 이사상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독일 서적상들이 무언가를 문의한 사실로 보아 그가 독일에 관한 어떤 자료들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보통은 베네치아의 보고서가 이 피렌체인의 것보다 낫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베네치아 사절들은 사건의 외양을 세밀히 기술하는데 힘쓰는 반면, 마키아벨리는 일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포착한다고 말하는 쪽이 더 사실에 가깝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티롤에 마련한 자신의 조그만 관측소에서 탐색하고 숙고하면서, 사보야 공의 대사가 두 달이 결려서도 알아내지 못한 내용을 정말로 단 이틀만에 파악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독일 민족의 힘과 그 정치적 취약성 사이에 놓인 영원한 간격을 꿰뚫어봄으로써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잡고 길을 찾아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비극적 현실을 거의 예감하기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좋지 않은 정치 환경 아래서 막시밀리안은 불행히도 당분간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회가 약속했던 돈과 군대의 일부조차도 모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두 피렌체인들 역시 자국의 인색함과 (비스킷도 제대로 없이 갤리선을 탄) 황제 사이에, 그리고 10인위원회의 불분명한 훈령과 그보다 더 불확실한 황제의 태도 사이에 끼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만약 막시밀리안이 정말 침입을 결행하리라고 판단된다면 액수를 오만이나 육만까지 올릴 수도 있다는 훈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이럴지 저릴지는 베토리도 마키아벨리도 모르는 일이었고, 어욱이 막시밀리안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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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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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도망가기
누구나 싸워서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 겁쟁이라는 말을 듣기보다 용감한 사이라는 말을 더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싸우다 힘이 부치면 ‘겁쟁이’ 소리를 듣더라도 줄행랑을 놓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스 작가 메난더가 “도망치는 사람만이 훗날 다시 싸움을 도모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은, 용감한 것이 비겁한 것보다 훨씬 좋지만 신중함이 무모하고 경솔한 것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분하고 억울하더라도 이성을 잃지 말고 냉정히 행동하여야 한다. 싸우다 질 것 같으면 무조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라. 버마제비가 제 분수도 모르고 수레바퀴와 대결하다 죽는 ‘당랑거철’의 만용을 부리다가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와신상담
중국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여 죽게 되었다. 그는 아들 부차를 불러 복수할 것을 명령하고 죽었다. 와신이란 말은 부차가 오나라로 돌아와 월나라를 쳐서 없앨 때까지 섶나무 위에 누어잤다 해서 생겨난 말이다. 부차는 절치부심 힘을 길러 월나라 구천의 군대를 대파하고 구천의 항복을 받아냈다. 오왕 부차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한 구천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쓸개’를 옆에 두고 쓸개를 핥으면서 12년 동안 절치부심하였고, 마침내 힘을 길러 오왕 부차에게 복수를 하였다. 상담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오왕 부차난 월왕 구천이 패배 당시 무모하게 맞부딪쳤더라면 ‘와신상담’이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한신 장군
한신은 소년 시절 의지할 데 없는 고아로 가난 때문에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어려울 때 마을의 건달 하나가 시장 바닥에서 한신에게 싸움을 걸었다. 건달은 “야 이놈아 몸뚱이만 커가지고, 칼을 차고 있으면 다냐, 속은 겁쟁이면서”하며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놈아 용기가 있으면 나를 찔러봐. 그럴 용기가 없으면 내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라.”고 놀려댔다. 한신이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엎드려 그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갔다. 온 시장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후에 한신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한나라 최고 장군이 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였다. 옛날에 그에게 모욕을 주었던 건달은 한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겨울 삭풍에 사시나무 떨듯’떨면서 목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가 한신 장군 앞에 끌려왔다. 한신은 “내가 그때 너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너를 죽이면 내가 살인자가 되어 도망다녀야 하므로 내가 이루려는 꿈을 못 이루기 때문에 참았다“고 말하며 ”수치를 안고 치욕을 참아야만이 큰 일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신은 벌을 받을까봐 떨고 있는 그를 안심시킨 후 동네 치안을 담당하는 직책에 임명하였다. 손자병법에 이르길 ‘적의 실력을 알아낸 후에 진격하고, 이길 자신이 확실할 때 회전한다.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는 이길 것 같이 대들면서 즉각 물러나야만이 후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맹자 역시“적의힘을 헤아려 본 후에 싸운다“고 하였다. 싸우다 힘이 모자라면 젖 먹던 힘을 다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날쌔게 도망가라. 지지부진한 사업도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정리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물귀신 작전에 글려들어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빠질 이유가 없다.
싸우다 힘이 딸리면 도망가라.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He who figths and runs away, may live to fight another day.)
사람을 따를까, 진리를 따를까
의법불의인이란 말이 있다. 사이비 목사의 허황된 사기 행각을 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예수의 구원의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다든지, 스님들이 사찰에서 각목으로 난장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들이 설법하는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진리까지 버리지는 말라는 말이다. 진리를 전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약점이나 잘못을 보고 이에 실망하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전하는 진리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이겠다. 신흥 종교나 유사 종교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큰 까닭은 종교 진리 체를 믿고 따르기보다 전하는 사람(교주)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 때문이다. 예수는 유태의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유태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따르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하지 실천하지 않는다.“
전하는 진리 자체에 의존해야지 전하는 사람의 위선적인 행위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이다. 자식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하면서 자신은 자식보다 더 늦게 일어나면 자식이 그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듣는 대로 행하라’는 뜻으로 “아비 행동은 따르지 말고 아비가 하는 말은 진리이니 따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솔선수범보다는 못하지만 말이다.
사람을 따르지 말고 진리를 따르라. (Do as I say, not as I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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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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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 권수환
봄비 그친
텃밭에
저마다 뾰족뾰족
이름표를 달고 나왔다.
상추, 아욱, 당근, 쑥갓......
모두모두
세상 구경 나왔다.
나들이 나온 바람도
귀여뭐 머리 한번 쓰다듬고
모든 것이 사랑스런
해님도
꼬옥 품에 안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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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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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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