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55호 - 2024.9.18. 수요일(음력 : 8.16.)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나는 독서를 못하는 왕이 되기보다는 비록 초라한 골방이지만 책이 가득찬 방이 있는 가난뱅이가 되겠다. - 머코리
|
|
글나눔 → 말글
|
|
|
ㅎ종성체언
한글의 우수성
한글날이 다가오면 우리말을 잘 가꾸고 다듬어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런데 가끔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라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500여 년 전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것은 한글, 곧 우리말을 적기 위한 문자이지 언어가 아니다. 제아무리 천재라도 사회적 산물인 언어를 하루아침에 발명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세종께서 한글을 직접 지으신 이유도 중국과는 다른 우리말을 한자로는 적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한글이 뛰어난 ‘문자’라고 할 수는 있지만, ‘언어’라고 하면 잘못이다.
그런데 한글의 어떤 점이 훌륭하다는 걸까. 어떤 이들은 ‘새 소리, 바람 소리’ 등 세상의 소리들을 모두 적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리를 적을 수 있는 것은 한글뿐 아니라 로마자나 키릴문자 등 표음문자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성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그 ‘과학성’과 ‘체계성’에 있다. 글자를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글은 과학적이다. ‘ㅁ’은 입술의 모양, ‘ㅇ’은 목구멍 모양, ‘ㅅ’은 이빨 모양에서 본뜨고,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한글이 체계적이라는 것은 자모를 따로따로 만들지 않고 기본 글자를 먼저 만들고 나머지는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즉 기본자인 ㄱ에 획을 더해 ㅋ을 만드는 식이다. 모음의 경우도 ‘하늘, 땅, 사람’을 형상화한 ‘ㆍ, ㅡ, ㅣ’를 기본 글자로 하고, 나머지는 기본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거나 조합해서 만들었다.
한글은 이처럼 과학적 원리에 따라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년에 하루 한글날만이라도 우리글의 장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겠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
|
시나눔 → 우리시
|
|
|
한 떨기 구름 - 천상병
삼월 사월 그리고 오월의 신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던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있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
백록담 - 정지용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처럼 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엄고란, 환약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백화 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앟는 한모롱이, 도체비꽃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척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움매- 울었다.
마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회파람새 회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는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기여가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를 피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출 석용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여 산맥 우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면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
꽃(二) - 김수영
꽃은 과거와 또 과거를 향하여
피어나는 것
나는 결코 그의 종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움의 귀결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설움이 없기 때문에 꽃은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은
완전한 공허을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단과 연속과 해학이 일치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
견고한 꽃이
공허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
<1956>
~~~~~~~~~~~~~~~~~~~~~~~~~~~~~~~~~~~~~~~~~~~~~~~~~
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21~25) - 이해인
21
사랑할 때 우리 모두는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기다림에 깊이 물들지 않고는 어쩌지 못하는 빨간 별,
별과 같은 가슴의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22
버리기 아까워 여름 내내 말린 채로 꽃아 둔 장미꽃 몇 송이가 말을 건네 옵니다.
"우린 아직 죽은 게 아니어요." 그래서 시든 꽃을 버리는 일에도
용기가 필료함을 깨닫는 아름다운 가을의 소심증.
23
세수를 하다 말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놀라워서 들여다보는 대야 속의 물거울.
'오늘은 더욱 사랑하며 살리라'는 맑은 결심을 합니다.
그 언제가 될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세수도 미리 기억해 보며,
차갑고 투명한 가을 물에 가장 기쁜 세수를 합니다.
24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 보듯이 -
25
노을을 휘감고 묵도하는 11월의 나무 앞에 서면
나를 부르는 당신의 음성이 그대로 음악입니다.
이별과 죽음의 얼굴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 가을의 끝.
주여, 이제는 나도 당신처럼 어질고 아프게 스스로를 비우는
겸손의 나무이게 하소서. 아낌없이 비워 냈기에 가슴 속엔
지혜의 불을 지닌 당신의 나무로 서게 하소서.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1장. 지를 기른다
5.배움은 벌꿀처럼 달다
즐거움을 못 느끼는 동양식 교육
어린이가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책임의 태반은 어른인 부모에게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학교나 유치원은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당연히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의무인 만큼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공부이고, 또한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곳이 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공부를 좋아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이 싫다'고 고개를 적으면, 어른들은 대개 '공부를 안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강요만 한다. 이렇게 되면 어린이는 더욱 공부가 싫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유태인의 눈에는 이런 일들이 이상하게 보여진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본디 인간에게 있어서 배운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즐겁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의무교육으로 하고 있는데, 그 부모들이 이 '의무'란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여기서의 '의무'는, 부모가 어린이를 교육받게 할 의무인지는 몰라도, 어린이가 '좋은 성적을 올릴' 의무는 아닌 것이다.
배움이란 '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유태 초등학교에서는 공부란 '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란 사실을 어린이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이스라엘서는 초등학교 신입생이 선생님과 처음 만나는 등교 첫날, 공부란 '달콤한 꿀과 같다'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준다. 선생님은 1학년 학생들 앞에서 히브리어의 알파벳 22자를 벌꿀이 묻은 손가락으로 써나간다. 그러곤 '이제부터 너희들이 배우는 것은 모두 여기 쓴 22자에서 출발하게 되며, 더구나 그것은 벌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또 신입생 모두에게 케이크를 주는 학교도 있다. 흰 설탕이 덮인 맛있는 케이크 위에는 히브리어 알파벳이 역시 설탕으로 씌어져 있다. 어린이들은 선생님에게 이끌려 설탕의 알파벳을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면서 단맛을 빨게 된다. 이 역시 '배움이란 꿀처럼 달다'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좋은 방법이다. 외국에 있는 유태인 학교 입학식 때에는 알파벳 대신 유태민족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그린 케이크를 나누어준다. 그리고 학생들은 '별'을 그린 손가락을 빨아가면서 배움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이로 하여금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공부이고,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곳이 학교라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하려면, 배움이 달콤한 꿈과 같다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6.싫으면 그만 두라, 그러나 하려면 최선을 다하라
'무엇이 되라'는 식의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서 엉뚱한 꿈이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예를 들어, '너는 앞으로 의사가 될 각오로 공부하라'는 식의 말은 결코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공부를 잘하라고는 말하지만, '의사나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잘하라는 것은 아니다. 학문 자체가 목적이지 수단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장래의 선택은 어린이 자신들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어른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부 이외의 어떤 예능이든, 전혀 강요하거나 권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하면 가르치고, 싫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즉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가르쳐야 되겠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싫은 것은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라'는 것으로 족하다. 만약 어린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고 싶다고 할 때는, 그렇게 하기 위해 후회 없는 노력을 하라고 충고해 줄뿐이다. 이처럼 어린이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어버이가 멋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유태인 부모들의 교육 방식이다.
러시아계 유태인으로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영화음악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부친은, 아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자 이웃에 사는 한 여선생에게 1시간에 1달러씩 주기로 하고 레슨을 받게 했다. 레너드는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병약한 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의지로써 그것을 극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용돈을 아껴 레슨비를 내면서까지 열심히 배워 마침내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흥미 있는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일곱 살 때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레슨 시간이 길고 지루해서 1년만에 집어치웠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아인슈타인이 처음 바이올린을 시작했을 때 강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도 그만두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 후 2-3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 아인슈타인은 다시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평생 바이올린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린이는 스스로의 능력을 끝까지 추구한다
어린이는 부모들이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 주면, 공부를 할 때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의욕을 갖게 된다. 그 한 가지 예로,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는 열 살 때부터 남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선생님도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를 들고 나와 선생을 곤경에 빠뜨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렇듯, 자기 자신의 능력을 추구하는 데 지나치리만큼 열성적인 유태 어린이들은 부모의 희망을 받아들일 때도, 자기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유명한 정신의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열 일곱 살 나던 해에 빈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의학부에 적을 두었지만, 개업의사가 되는 것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곤 13년 동안 연구실에 틀어박혀 과학으로서의 의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명한 정신분석학도 결국은 개업의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 추구에 열중한 결과였으리라. 우리는 어린이들의 장래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감을 갖거나, 꿈을 그리는 식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월권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어디까지나 어린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능력에 의하여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만이 최선의 결과를 얻는 방법인 것이다.
7.아버지의 권위는 자녀들의 정신적 기둥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인 유태인 가정
유태인 사회는 부계 사회이다. <탈무드>에 부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아버지가 먼저 등장하고, 어머니만 등장하는 경우는 한 군데밖에 없다. 이 성전에는, 부모가 함께 물을 요구할 때는 아버지에게 먼저 가져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먼저 가지고 가더라도 어머니는 남편인 아버지를 존중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머니 손에서 아버지 손으로 건너가고 말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히브리어로 아버지는 '교사'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 이렇듯 유태인들에게 있어 아버지의 권위는 자녀들에게 마음의 기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역시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로 인해 성공한 사람 중하나이다. 그는 어렸을 때 수학 성적이 아주 형편없어 낙제까지 한 적이 있었다. 보다못한 담임선생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러는 공부를 시켜봐야 별 수 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양화점 견습공으로나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런 권고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계속 학교에 보내 수학공부에 전념케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태인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인 만큼, 아들러도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아들러는 수학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어려운 문제를 칠판에 써놓고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누가 이 문제를 풀어볼까?"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아들러가 대답했다.
"제가 풀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열등생인 아들러는 도저히 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클래스메이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문제를 손쉽게 풀어나갔다. 그 뒤로 그는 수학 성적에서만큼은 클래스에서 손꼽히는 존재가 되었다. 아들러는 나중에 심리학의 새로운 체계를 이룬 ' 개인심리학'을 내놓아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저명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권위가 사람을 만든다
요즈음 동양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잘 아는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은 탄식조의 넋두리를 하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내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들은 남편을 단순히 돈이나 벌어들이는, 이를테면 '꿀벌' 같은 존재쯤으로 여긴다. 그뿐 아니라 어린 자녀들 앞에서도 그런 내색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린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아비를 지도자로서, 가장으로서 존경할 뿐 아니라 어떤 일이건 최종 결정권을 남편에게 맡기는 유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더없이 존경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갖게 되고, 또한 이것이 유태인 가정에 흐트러짐 없는 정연한 질서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항상 이상적인 아버지 상을 추구하면서 자아 형성을 도모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유태계 작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는 이런 부자관계가 농도 짙게 그려져 있다. 아버지의 정사와 아들의 사업상의 실패가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 희곡은,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있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핵심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유태 어린이들을 정신적으로 조리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이 포인트!
아버지를 더없이 존경하는 어머니를 보고자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태인 가정에 정연한 질서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공공사업
인간이 일을 진행하는 방식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첫째, 일을 한 가지씩 끝내고 다음 일로 넘어가는 방식.
둘째, 모든 일을 시야에 넣고, 그 모든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나가는 방식.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를 예로 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후자에 속하고 미켈란젤로는 전자였다. 물론 이들 두 사람이 매사를 그런 식으로 진행한 것은 아니니까, '기본적으로' 라는 단서가 붙는다. 로마의 오현제 가운데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가 가장 중요한 황제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지만, 이들 두 사람도 그런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미켈란젤로 타입이고, 하드리아누스는 레오나르도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미켈란젤로 타입이 훨씬 쓰기 쉽다. 그런데 '사인'인 예술가의 경우에는 그 차이가 주로 당사자의성격에 기인하지만, '공인' 인 황제의 경우에는 오로지 성격에만 기인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다른 문제가 없으면 일을 한 가지씩 마무리해갈 여유를 가질 수 있지만,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도 일어나면 그 문제를 먼저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가 즉위했을 당시유프라테스 전선에 먹구름이라도 끼어 있었다면 다키아 문제 해결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 두 현제가 누린 최대의 행운은 전임황제들이 책무를 완수해준 덕분에 자기 성격에 맞게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인이면서도 사인처럼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전쟁이 끝난 뒤 어떤 일을 했을까. 트라야누스와 동시대 철학자인 클리소스토무스가 말한 ◎마 황제의 3대 책◎를 상기해보라. 그것을 현대식으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1) 안전보장.
(2) 내치.
(3) 사회간접자본 정비.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문제를 해결하고 그에 따라 도나우강 방위선을 확립했으니까, (1)의 책무는 일단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의 책무는 일의 성질상 트라야누스가 아무리 빨리 끝내고 다음 일로 넘어가고 싶어도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 분야다. 제위에 있는 동안 꾸준히 해나갈 수밖에 없는 책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3)의 책무뿐인데, 실제로 트라야누스는 서기 107년부터 112년까지 약 6년 동안 사회기반시설 정비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제반상황도그 일을 하기에 알맞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1) 방위선을 유지하는 데에도 돈이 들지만, 전쟁을 하려면 훨씬 많은 돈이 든다. 다키아 전쟁을 끝낸 뒤 로마 제국은 막대한 군사비 부담에서 해방되었다.
(2) 다키아 주민한테 속주세를 징수하는 것은 당분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민이 거의 완전히 교체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생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세금을 걷을 수 없다. 또한 다키아에 계속 사는 것을 허락받은 다키아인들도 전란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주민이나 마찬가지다. 제대한 뒤 이주한 노병들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니까 속주세 과세 대상이 아니었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에는 갓 속주화한 지방이나 경제 사정이 나빠진 지방, 지진이나 화재나 홍수로 피해를 입은 지방에 대해서는 수입의 10퍼센트인 속주세를 몇 년 동안 면제해주고, 5퍼센트의 관세와 1퍼센트의 매상세도 3분의 1이나 2분의 1로 줄여주는 제도가 있었다. 다키아 속주에도 이 제도가 적용되었을 것이다. 당분간이라 해도, 다키아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은 그곳에 주둔하는 1개 군단의 경비조차 충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다키아 정복은 그 이상의 커다란 경제적 이익도 가져다주었다.
(3) 다키아 지방은 매장량이 풍부한 금광과 은광으로 유명하다.
(4) 다키아왕 데케발루스가 남긴 엄청난 양의 보물. 트라야누스가 전념하기로 결정한 수많은 공공사업의 재원은 (3)과(4)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요인인 (5)는 트라야누스가 세운 수많은 공공건물을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웅장한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5) 아폴로도로스를 비롯한 건축가와 엔지니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키아 전쟁이 끝난 덕분에 이들을 도나우 강변에 묶어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식민도시(콜로니아) 건설이나 보통 규모의 기반시설 공사는 군단에 딸린 기사나 병사들만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걸친 공공사업 러시였다. 그 규모와 수량은 조사하는 나도 질려버렸을 정도다 그것을 모두 적으려면 20쪽도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그 중에서 유명한 것만 언급하는 데 그치겠지만, 50대의 황제와 역시 50대인 건설총감독의 열의와 기력과 실행력에는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대하 도나우강에 놓은 '트라야누스 다리'는 뛰어난 기술, 웅장함에 대한 취향, 실용성에 대한 집착, 기타 등등의 결정체다. 그것이 이번에는 제국 전역에서 발휘된 것 같다. 트라야누스라는 사내는 공공사업에 대해서도전쟁을 수행할 때와 똑같은 기개로 맞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주도한 공사는 대부분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것은 속주와의 격차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트라야누스의 정책이 모두 그렇듯이, 수도 로마는 제국의 모든 도시의 본보기이고 본국 이탈리아는 모든 속주의 본보기여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결과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문헌 자료가 극히 적은 것이 트라야누스의 특색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도한 공사가 서기 107년부터 112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을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제정으로 바뀐 뒤 로마에서는 직업의 분업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물론 현대 기업에 비하면 수공업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지만, 가족단위로 자급자족하는 단계는 완전히 졸업했다. 건설 현장을 예로 들면, 필요한 자재들은 각각 그것을 전문으로 만드는 공장에서 조달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건물의 골격은 벽돌이다. 기원전 2세기에 이미 콘크리트 제조법을 개발한 로마인은 벽돌을 쌓고 그 사이를 콘크리트로 굳혀서 건물의 골격을 세우는 것을 건축의 기본 방식으로 삼고 있었다. 이 골격 위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거나 대리석판을 붙이면 벽면이 완성된다. 이렇게 벽돌 수요가 많으면 벽돌공장이 번창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런 벽돌공장들은 제품의 질을 보증하는 의미에서 어느 공장 제품이고 언제 제조되었는지를 기록한 각인을 벽돌에 찍는다. 요컨대 상표 다 벽돌이 아직 부드러운 상태일 때 찍어서 구우니까, 벽돌이 부서지지 않는 한 상표도 남게 된다. 물론 모든 벽돌에 일일이 상표를 찍는 것은 아니고, 한 무더기의 벽돌 가운데 한 개에만 찍었을 거라고 상상 할 수 있다. 상표가 찍힌 벽돌의 수가적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의 벽돌에 찍힌 상표만 연구한 논문도 몇 개 있는데, 그들 의 연구에 따르면 '상표'가 찍힌 벽돌은 기원전 1세기 중엽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부터 눈에 띄게 되었고, 제정으로 바뀐 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플라비우스 왕조'를 거치면서 점점 늘어나 서기 2세기의 오현제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3세기에 접어들면 쇠퇴하기 시작하여 4세기에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수요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분업화가 진행되는 것은 경제발전의 척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기독교의 대두는 경제 번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세보다 내세를 중시하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현세를 중시한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인들에게 사회 기반시설 공사 러시는 자신감의 폭발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벽돌에 찍힌 상표로 제조된 해는 알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실제로 건축에 사용된 해까지는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건축 시기를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즘 말하는 '재고'라는 현상을 생각하면 이 의문은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병원 하나를 짓는 데 30년씩 걸리는 현대 이탈리아인과는 달리 고대 로마인은 솜씨가 빨랐다. 콜로세움도 불과4년 만에 완성했다. 도나우강에 놓은 '트라야누스 다리'는 순수한 공사 기간만 따지면 1년 만에 완성했다. 벽돌은 재고로 쌓일 틈도 없이 공장에서 건설현장으로 직행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제조된 시기와 사용된 시기의 차이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착공에서 완공까지의 기간이 10년 이상 걸린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것은 세부 장식이 끝났을 때까지 계산한 경우다. 준공식은 건물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까지 공사가 끝났을 때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왜 로마인의 공사 기간이 짧았는가 하면, 그들은 유난히 능률이나 효율을 중시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로마인을 '효율 벌레'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기서는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트라야누스의 공공사업 가운데 유명한 것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트라야누스 목욕탕'이다. 이 목욕탕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에스퀼리노 언덕 서쪽에 붙어 있는 오핑 언덕 전체에 걸쳐 있다. 바로 남쪽에는 티투스 황제가 세운 '목욕탕'이 있었는데, 이 두 목욕탕이 건설도 이 덕분에 네로 황제가 세운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의 본체 부분은 완전히 지하에 묻히게 되었다. 로마식 '목욕탕'은 되풀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목욕시설 이외에 각종 오락시설까지 갖춘 위락 센터다. 로마인은 하루를 '일'(negotium)과 '여가'(otium)로 양분하는 생활방식을 지켰고, '목욕탕'은 여가를 즐기면서 위생도 유지하는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켰다. '트라야누스 목욕탕'은 2년 만에 완공되었다. 목욕탕에는 많은 물이 필요하지만, 네로가 '황금 궁전'에 쓰기 위해 끌어들인 물줄기만으로도 충분해서 수도관을 새로 부설할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트라야누스는 수도관을 새로 부설했다. 서쪽에서 로마로 들어오는 아우렐리아 가도를 따라 부설된 이 수도관의 목적은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테베레 강의 오른쪽 연안은 나중에 바티칸이 생기고 그 남쪽은 '테베레 건너편'을 뜻하는 '트라스테베레'라는 서민층 주거지역이 되지만, 로마 시대에는 강변에 늘어서 있는 부자들의 저택을 제외하면 칼리굴라 황제가 세운 경기장과 수공업자가 많이 사는 동네가 차지하고 있었다. 트라스테베레 지역에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저수지가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그 북쪽, 오늘날의 바티칸 동쪽, 당시에는 바티카누스라고 불린 지대에 인접하여 저수지를 또 하나 만들었다. 테베레 강 서쪽에 펼쳐진 공장지대 진흥책인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저수지와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일단 저수지에 모은 뒤에 끌어다가 쓰는 물이니까, 음용수가 아니라 공업용수였다. 그래도 원래 마실 수 있는 물을 끌어오는 것이므로, 저수지로 직행하는 물 외에는 음료수로 사용되었다.
이런 유형의 저수지를 로마인들은 '모의 해전장'(naumachia)이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투스가 저수지 완공을 축하하여 거기에 배를 끌어다 놓고 모의 해전을 벌여서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도 초대 황제의 흉내내어 모의 해전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44년 치세 동안 모의 해전을 한번밖에 개최하지 않았다. 저수지보다 '나우마키아'라고 부르는 편이 즐거우니까 이 명칭이 정착되었을 뿐. '아우구스투스 모의 해전장'도 '트라야누스 모의 해전장'도 평소에는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였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수도 로마에 세운 공공건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트라야누스 포룸'일 것이다. 포로 로마노 근처에 세워진 황제들의 포룸 가운데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축물이고, 규모도 가장 크다. 그 세부를 완전히 머리에 집어넣고 유적을 둘러보면, 큰 것은 좋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서 웃음이 난다. 트라야누스와 아폴로도로스가 손을 잡으면 이런 결과로 끝나는구나 싶어 절로 웃음이 나온다. '트라야누스 포룸'은 웅장할 뿐 아니라 화려하기도 하다. 위용에 압도당하는 동시에 건축미에도 압도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포룸' 안에 부조로 다키아 전쟁을 서술한 '원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날 '황제들의 포룸'이라고 불리는 이 일대가 포로 로마노와 함께 제국 통치의 중추적 기능을 맡게 된 것은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확장 공사를 한 뒤였다. 공화정 시대에 국가의 중추기관은 아이밀리우스 회당과 원로원을 북쪽 가장자리로 하는 포로 로마노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우선 원로원 회의장을 재건한다. 그리고 그 북쪽에 '카이사르 포룸'을 지었다. 원로원과 아이밀리우스 회당 사이의 길은 수부라라고 불린 서민층 주거지역과도 통해 있었다. 라틴어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언어로는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모르는 '포룸'이라는 명칭을 사전에서는 "고대 로마의 도시 한복판에 있었던 대광장으로, 정치, 경제, 사법의 중심이며, 상거래나 재판, 민회에도 이용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공공광장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뜻을 확대하여 단순한 대화의 마당도 '포룸'이라고 부른다. 위의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포로 로마노에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원로원 회의장(쿠리아), 재판과 상거래에 이용되는 회당(비실리카), 지하에 국고가 보관되어 있었던 신전(템플룸), 집회를 위한 연단(로스트룸), 그리고 장식품 역할도 맡고 있는 개선문이나 승전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따라서 무슨 일만 있으면 모이는 장소였다.
카이사르가 창안했고 따라서 로마의 독자적 건축양식이 된 '포룸'은 포로 로마노가 갖고 있던 이런 기능들을 한 곳에 모은 것이었다. 기본형은 직사각형이다. 한쪽 변에는 신전이 놓이고, 지붕을 씌우고 이중으로 시중을 세운 회랑이 나머지 세 변을 둘러싼다. 회랑 안쪽에는 상거래를 위한 사무실이나 점포들이 늘어선다. 학원 형태의 학교로 이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전과 회랑으로 둘러싸인 내부는 광장이고, 공장 한복판에는 이 포룸을 만든 사람의 기마상이 세워진다. 신전 앞 계단은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연설하는 연단이 되기도 한다.
최고권력자가 세운 건물이니까 신성한 곳이고, 평소에는 위병이 지키고 있어서 아무도 근접할 수 없고, 정숙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그런 곳은 결코 아니었다. 제의가 거행되는 날만은 분위기가 엄숙하지만, 평소에는 남녀노소가 분주하게 오가는 곳이 포로 로마노였고, 카이사르가 바란 '포룸'이기도 했다. 이런 개념으로 건설된 '율리우스 포룸', 즉 카이사르 포룸은 카이사르의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후계자들에게 계승된다. 카이사르 다음으로 '포룸'을 건설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였고, 그의 포룸은 물론 '아우구스투스 포룸'이라고 불렸다. 규모는 카이사르 포룸의 두 배 가까이 되지만, 적어도 규모에서만은 선임자를 능가하고 싶다는 허영심의 발로일까. 하지만 그 정도 허영심은 용납해주어도 좋을 것이다. '에세드라'(반원형 광장)를 좌우에 덧붙여 형태는 조금 달라졌지만, 기본형은 같았다.
다음으로 이곳에 '포룸'을 세운 것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다. 네로 황제가 죽은 뒤 내전을 치르고 유대 반란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포룸에 제 이름을 붙이지 않고 '평화 포룸'이라는 명칭을 택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아들이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아버지가 세운 '평화 포룸'과 '아우구스투스 포룸'사이의 길쭉한 공간을 '포룸'으로 만든다. 이곳은 원래 수부라 지구에서 포로 로마노로 가는 길목이었지만, 단순한 통행로에서 신전과 회랑으로 둘러싸인 포룸으로 승격한 것이다. 이로써 우선 외관은 아름답게 변모했다. 통행로는 마름 돌로 포장하지만 '포룸'이 되면 대리석판이 깔린다. 로마의 서민들도 포로 로마노에 갈 때는 마치 대저택의 홀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가죽 샌들로 대리석 바닥을 밟고 가게 되었다. 이 길쭉한 '포룸'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진데다 완공이 늦어져서 다음 황제인 네르바 시절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네르바 포룸'으로 불린다.
트라야누스는 자기도 '포룸'을 짓기로 결심했지만, 포룸을 세울만한 곳은 아우구스투스 포룸의 북서쪽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남서쪽은 카이사르 포룸이고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메워져 있었고, 북동쪽은 서민층 주거지역인 수부라다. '평화 포룸'남동쪽은 그 연장선상에 콜로세움이 있고, 따라서 그 사이의 공간은 너무 좁았다. 아우구스투스 포룸 북서쪽에 짓는다 해도, 땅이 너무 좁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퀼날레 언덕 능선이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어느 황제보다도 큰 '포룸'을 짓고 싶다는 트라야누스의 소망을 건축가 아폴로도로스가 실현한다. 퀴리날레 언덕 능선이 저지대로 내려오는 부분을 모조리 깎아내는, 대답하기 이를 데 없는 방책을 단행한 것이다. 도나우강 연안의 암벽을 깎아내어 거기에 길을 낸 것도 그렇고,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테라치나의 산허리를 깎아내어 아피아 가도를 단축한 것도 그렇고, 장애물에 부닥치면 후회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택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이 두 사람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런 방법으로 아우구스투스 포룸보다 다섯 배나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과거의 어느 황제보다도 큰 포룸을 원했을 뿐 아니라, 선임자들의 포룸이 갖지 못한 기능까지 갖춘 '포룸'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아폴로도로스는 완전히 충족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포룸을 빠져나오면 그 앞을 늘어선 기둥들이 막아선다. 그 기둥들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대리석으로 깔린 드넓은 광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게다가 광장의 세 변은 이중으로 기둥을 세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둥근 기둥은 많이 늘어설수록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둥 안쪽에는 사무실이나 점포들이 늘어있다. 좌우에는 반원형 구역인 에세드라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다. 그리고 몇 단 높은 정면에 우뚝 서 있는 '울피우스 회당은 지붕을 씌우고 바닥에 여러 색깔의 대리석을 깔아서, 햇볕이나 비를 피해 상거래를 하거나 재판을 열 수 있다. 울피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가문의 이름이다. 이 회당 너머에는 도서관이 있다. 벽을 따라 늘어서 있는 책꽂이에는 두루마리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도서관은 좌우 두 곳을 나뉘어 있어서, 한쪽은 그리스어, 또 한쪽은 라틴어 서적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돋을 새김으로 다키아 전쟁을 묘사한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이 두 도서관 사이에 세워졌다. 많은 사람이 멀리서도 볼 수 있는 광장 한 복판에 세워진 게 아니다. 바로 밑에서, 또는 회당이나 도서관의 계단에 오라가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받침대를 제외해도 높이가 40미터나 되는 원기둥 꼭대기에는 군장을 갖춘 트라야누스의 동상이 서 있다. 기독교 시대가 된 뒤 이 동상은 성 베드로의 동상으로 바뀌었다. 원기둥 밑에는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의 유해를 안장할 곳도 마련되었다. 그리스 본토만이 아니라 그리스인이 정착한 소아시아 서부에서는 옛날부터 공공건물 지하에 그 건물 기증자의 무덤을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스인이었던 아폴로도로스는 그 방식을 '트라야누스 원기둥'에서 부활시킨 것이다.
이 '원기둥' 뒤편에는 역시 삼면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신전이 세워지게 되지만, 신전은 신격 트라야누스에게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은 후임 황제의 일로 넘겨진다. 하지만 로마 황제는 어지간하면 죽은 뒤에 신격화되었으니까, 트라야누스도 자신의 신격화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임자가 당장 신전을 지을 수 있도록 부지도 다듬어 놓고 아폴로도로스의 설계도면까지 남겨놓았으니, 정말 용의주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폴로도로스는 천부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도나우강에 놓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의뢰인인 트라야누스의 이름을 영원히 남을 만한 일을 해낸다. 깎아낸 퀴리날레 언덕 비탈에 몇 단의 인공 테라스를 만들어 거대한 상업 센터를 건설한 것이다. 비탈 활용법으로는 오늘날까지도 건축가들에게 힌트를 주는 방식이다. 이 일대를 오늘날에는 '트라야누스 시장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퀴리날레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지만, 비탈 위에 세워져 있어서 그 아래의 '포룸'에서도 잘 볼 수 있었다. 이리하여 어떤 선임자도 지은 적이 없는 '포룸'을 세우고 싶다는 트라야누스의 소망은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회당과 도서관이 있고, 다키아 전쟁을 서술한 원기둥 기념비도 있고, 거대한 상업센터까지 갖춘 광대한 포룸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광장 한복판에는 네 필의 말이 이끄는 전차를 모는 트라야누스의 동상이 서 있었다. 로마 시대의 광장은 군사 퍼레이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 일이나 공부 같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다. '포룸'이야말로 그런 생활의 터전이라는 게 로마인의 사고 방식이기도 했다.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13화 손자가 되어 환생한 윌리엄
다음에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는 알래스카와 카나다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는 트란짓트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이들은 모두 가명을 썼는데 남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다는 관계자들의 희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월리엄 죠오지 1세는 훌륭한 어부였다. 그는 다른 트란짓트인과 마찬가지로 환생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으며, 죽음이 가까와짐에 따라 환생하고 싶은 소망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자기 아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세째 아들과 며느리에게 자기가 만일 환생한다면 그들의 아들로 환생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있는 두개의 반점을 가리키면서 그 아이는 이와 똑같은 모반(母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니 이 표시로써 자기가 환생한 것인 줄 알라는 것이었다. 그 두개의 반점을 하나는 왼쪽 어깨에, 또 하나는 왼쪽 팔꿈치 옆에 있었다. 윌리엄 죠오지1세는,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금시계를 아들에게 주면서 그 시계를 잘 보관해 두라고 하였다. 훗날 환생할 것임을 나타내보이겠다고 했다. 그러고서 몇 주일 후인 1949년 8월에 그는 자신이 일하던 어선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그 뒤에 얼마 안 가서 셋째 며느리는 임신을 하여 1950년 5월 5일 아기를 낳았다. 이 아이는 아홉번째 아이였다. 윌리엄 죠오지 1세의 실종이 있은 지 9개월이 경과한 뒤였다. 며느리는 출산시의 진통 중에 꿈을 꾸었다.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빨리 자기 아들과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꿈에서 깨어난 뒤, 마치 시아버지가 있는 것 같은 환각에서 주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녀가 꿈속에서 본 시아버지는 죽기 전의 어른 모습 그대로였다. 태어난 아기에게는 시아버지의 경우처럼 왼쪽 어깨와 왼쪽팔에 검은색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기에게는 윌리엄 죠오지 2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성장하면서 그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죠오지 1세의 환생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도록 하였다. 1세와 얼굴이 닮은 것은 물론이고 걸음걸이와 성격까지도 비슷하였다. 그리고 고기잡이나 배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어느 만(灣) 부근이 제일 좋은 어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어선의 그물 사용법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아는 듯이 보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보석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방에 우연히 들어 왔다가 금시계를 보더니 "이건 내것이야" 하면서 자기가 갖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후 열살 쯤 되면서부터는 전생기억들이 거의 없어졌다.
제14화 부족 전쟁에서 전사 후 환생한 찰스
이 사례에서는 어린 시절에 전생기억을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당사자가 자기의 전생을 이야기하였다. 1961년 스티븐슨 교수가 조사할 당시에 찰스 포터 씨는 쉰살이 넘은 사람으로서, 이제는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며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로써 자기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사례는다른 것과는 좀 다른 특징을 갖는다. 어린 시절에, 그는, 트란짓트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싸우다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해당한 장소와 죽인 상대바의 이름, 또 자기의 전생의이름 등도 말했다는데, 전생에 자기를 죽였다는 사람은 그의 외숙부였으며 당시에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찰스가 자기의 죽음에 관해 말할 때는 오른쪽 배를 가리키며 창에 찔려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처가 있는 줄을안 것은 성장한뒤에라고 말했다. 그의 오른쪽 배의 늑골 바로 밑에 검은색 반점이 있는 것을 스티븐슨 교수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자리를 창으로 찔린다면 간장을 상해서 즉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찰스 포터는 1907년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 살위인 누이의 말에 의하면, 찰스가 부족 전쟁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 시기는 1909년에서 1915년 경의 일이다. 그리고 그를 죽인 사람이라고 한 노인이 아직 살아 있었다. 가령 이 노인이 1910년에 적어도 예순다섯살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1845년에 출생한 셈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트란짓트인이 보족 전쟁에서 점차로 창을 사용하지 않게 된 시기는 1852년에서 1882년 사이일 것이라고 한다. 1845년에 태어난 사람이 장성하여 창을 쓰는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는 것이다. 부족 전쟁중에 창으로 살해되었다는 찰스의 말은 이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다. 이미 아흔살이 넘은 찰스의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전인격(全人格)이 살해되었다고 하는, 문제의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이나 참가 인물 등의 일을 이 이상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스트븐슨 교수는 그 뒤에도 62년, 63년, 65년, 72년에 각각앨러스타의 그를 방문하였고, 때로는 편지연락도 했다. 1972년 예순다섯살인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기독교인의 교리와 환생신앙이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15화 창검에 대한 공포를 가진 데레크
1852년(또는 1853년)에 알래스카의 시트카와 랑겔 두 지역의 트란짓트인들 사이에는 화평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시트카 측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랑겔의 대표자 사십여 명을 살해했으며 그 중 몇 명만이겨우 랑겔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 일이 있는 뒤로 1918년에 새로이 화평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양 부족 사이에는 반목이 계속되었다. 데레크가 출생한 것은 1918년으로, 그 참극이 있은 지 60여년이나 지나서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에 모반(母]斑)이 하나 있었는데, 그자신은 어릴 때부터 이 점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조상 중 어떤 한 사람의 신상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것은 서른여덟살이 된 1955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웬 할머니가 그 모반을 보더니 랑겔의 토착민인 '쿠'라는 사람이 입은 치명상과 똑같은모양을 하고 있다고 일러준 것이다. 데레크는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쿠'라는 사람은 앞서말한 참사가 일어났을 때, 자기 부족인들을 죽이려거든 자기를 먼저 죽이라고하며 맨손으로 당당하게 대항하다가 가장 먼저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데레크 자신은 전생의 기억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쿠에대한 전생기억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와 쿠와의 사이에서 깊은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첫째가 어린 시절부터 칼, 총, 창 등에 특별한 공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소년 시절에도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가지고 놀거나 하지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군대에 입대했으나 총검의 훈련을 아주 싫어 했다. 또 자신의 아이들도 칼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그의 병적인 공포증은 총과 같은 다른 무기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고 칼날이 달린 무기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랑겔 태생인데 시트카 사람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시트카에 거주하면서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의 조직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 두 지역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좌절과 실망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에 대한 그의 행동에서, 화평 교섭을 위해 시트카에까지 원정을 가서 생명을 잃은 쿠와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이 지나고 장년기에 이르도록 칼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식사 때에 나이프를 쓴 적이 없다고 하였다. 또 데레크 자신을 긴장했을 때 가끔씩 배에 통증을 느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전생과 질병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
|
독서실 → 수필
|
|
|
모자 철학 - 가드너/이창배 옮김
일전(日前)에, 나는 모자에 다리미질을 하려고 어느 모자점에 들어간 일이 있다. 그 모자는 비바람에 시달려서 털이 부하게 일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새 것처럼 반들거리게 보이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광을 내는 것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모자점 주인(主人)은 자기가 정말로 흥미(興味)를 가진 문제(問題)―모자와 머리의 문제 ― 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한 어떤 말에 이렇게 대답을 하더니,
“머리의 모양이나 크기에는 놀랄 만한 차이가 있습니다. 선생의 머리는 보통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보통의 얼굴에 언뜻 그만 실망(失望)의 빛이 어리는 것을 보았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제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머리는 비정상(非正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머리에 따라서는 ―자, 저기 있는 저 모자를 보십시오. 저것은 머리가 매우 우습게 생긴 분의 것입니다. 길고, 좁고, 혹투성이의 ―아주 비정상적인 머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크기로 말하면 참 놀랄 만큼 차이가 심합니다. 저희는 변호사들과의 거래(去來)가 많습니다만, 그분들의 머리는 참 놀랄 만큼 큽니다. 아마 선생께서도 놀라실 것입니다. 그분들의 머리가 그렇게 커진 것은 아마 생각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기 저 모자는 ○○씨(유명한 변호사의 이름을 대면서)의 것인데, 엄청나게 큰 머리입니다. 7인치 반, 이것이 그분의 머리 크기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중에는 7인치 이상 되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말을 계속했다.
“제가 보기에는요, 머리의 크기는 직업(職業)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에 어느 항구 도시(港口都市)에 있었는데요, 그 때 많은 선장(船長)님들의 일을 해 드렸지요. 그분들의 머리는 보통이 아니었어요. 아마 그것은 그분들이 많이 걱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조수(潮水)며 바람이며 빙산(氷山)이며, 기타 여러 가지를 걱정하자니…….”
나는 필경, 그 모자점 주인(主人)에게 빈약한 인상(印象)을 주었으리라는 사실(事實)을 의식(意識)하면서, 나의 보통의 머리를 떠받들고 모자점을 나왔다. 그 모자점 주인에게는, 내가 경우 6⅞인치 크기의 인간(人間)밖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따라서 대단치 않은 인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속에다 보석을 지닌 머리는 반드시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주고 싶었다. 물론, 위인 중에는 머리가 큰 사람이 왕왕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비스마르크의 크기는 7¼인치, 글래드스턴도 그러했으며, 캠벌배너먼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反對)로, 바이런은 머리가 작았고, 뇌가 대단히 작았다. 그런데 괴테는 말하기를, 바이런은 셰익스피어 이래 유럽에서 나온 가장 우수(優秀)한 두뇌의 소유자(所有者)라고 하지 않았던가? 보통의 경우라면 동의(同意)할 수 없지만, 작은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이 문제(問題)와 관련하여 괴테의 말을 주저 없이 받아들인다. 홈스의 말과 같이, 중요(重要)한 것은 뇌의 크기가 아니고 그 회전의 빠름이다(지금 생각해 보니, 홈스는 머리가 작았던 모양이다.). 하여간, 나는 그 모자점 주인(主人)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내 머리는 비록 작을 망정 내 뇌의 회전 속도는 최상급(最上級)이라고 믿을 수 있는 충분(充分)한 이유(理由)가 있다고. 나는 물론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지금 그 일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하여,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특유(特有)의 창구멍으로 인생(人生)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든 것은 모자의 크기를 통해서 세상(世上)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경우였다. 그는, 조운스가 7인치 반을 쓴다 해서 그를 존경(尊敬)하고, 스미드가 6¾인치밖에 안 된다고 해서 무시(無視)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직업적(職業的)시야(視野)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재단사는 제군(諸君)의 의복(衣服)을 훑어보고서 그 재봉 솜씨와 광택의 정도에 따라 제군을 측정(測定)한다. 그에게 있어서 제군은 다만 옷걸이에 불과(不過)하고, 제군의 가치는 제군이 입고 있는 의복에 정비례(正比例)한다. 제화공은 제군의 신을 보고서 그 신의 질과 손질을 한 상태에 따라 제군의 지식(知識)이나 사회적(社會的), 경제적(經濟的) 정도를 잰다. 만일, 제군(諸君)이 굽이 닳은 신을 신고 있으면, 제군의 모자가 아무리 번들거려도 제군에 대한 그의 평가는 변하지 않는다. 모자는 그의 시야(視野)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평가 기준의 일부(一部)도 되지 않는 것이다. 치과 의사(齒科醫師)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세상(世上)의 모든 일을 이로써 판단한다. 제군의 입 속을 잠깐 들여다보기만 하고서도, 제군의 성격(性格)이나 습관이나 건강 상태, 지위(地位), 성질(性質) 등에 대하여 확고 부동(確固不動)한 자신(自信)을 가진다. 그가 신경(神經)을 건드리면 제군은 몸을 움츠린다. 그러면, 그는 ‘아하, 이 친구, 술과 담배가 차나 커피를 지나치게 하는군.’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가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것을 보면, “가엾게도 이 사람은 아무렇게나 자랐구나.”하고 혼자 말한다. 또, 치아가 등한시(等閑視)된 것을 보면, “칠칠치 못한 친구로군, 쓸데없는 데에 돈을 다 써 버리고 식구(食口)는 돌보지 않은 것이 확실(確實)해.”한다. 그리고 제군(諸君)에 대한 진찰이 끝날 무렵에는 제군의, 이에 나타난 것만으로 해서도 제군의 전기(傳記)를 쓸 수 있을 것같이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대부분(大部分)의 전기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릇된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업가(實業家)는 회계실(會計室)의 열쇠 구멍으로 인생(人生)을 내다본다. 그에게 있어서는 세계(世界)가 하나의 상품 시장(商品市場)이고, 그는 이웃 사람들을 그들의 가게 문 유리의 크기로써 평가한다. 그리고, 금융업자도 마찬가지다. 로드차일드 집안의 한 사람이, 그의 친구 하나가 죽었을 때, 백만의 돈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저런 저런! 그 친구, 꽤 잘 사는 줄 알았더니…….”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단 유사시(有事時)를 위해서 겨우 백만밖에 저축(貯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생(一生)은 실패(失敗)라는 것이다. 대커리는 그의 한 작품(作品)에서, 이런 생각을 아주 잘 나타냈다. 오즈번 영감은 조지에게 “수완이 있고, 부지런히 일하고, 판단이 현명(賢明)하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나와 나의 예금 통장을 보아라. 돌아가신 불쌍한 세들리 할아버지와 그분의 실패를 보아라. 그렇지만, 20년 전에는 그분이 나보다 나았단다. 아마 2만 파운드는 우세(優勢)했겠지.”하고 말했던 것이다.
생각건대, 나도 또한 사물(事物)을 직업적(職業的)인 눈으로 보는 모양이어서,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행동을 가지고 하지 않고, 언어(言語)를 사용하는 기교(技巧)를 보고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화가(畵家)가 우리집에 오면 벽에 걸린 그림으로 나의 인물(人物)을 평가하고, 마찬가지로, 가구상(家具商)이 오면 의자의 모양이나 양탄자의 질(質)로써 그 위치를 결정(決定)지으며, 미식가(美食家)가 오면 요리(料理)나 술로써 판정(判定)을 내린다. 만일 그에게 샴페인을 내면 우리를 존경(尊敬)하고, 만일 호크를 내면 평범(平凡)한 사람 속에 넣고 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요컨대, 우리들 모두가 인생(人生)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각자(各自)의 취미나 직업(職業)이나 편견(偏見)으로 물든 안경을 쓰고 가는 것이고, 이웃 사람들을 우리 자신(自身)의 자로 재고, 자기류(自己流)의 산술(算術)로 그들을 계산(計算)한다 하겠다. 우리는 주관적(主觀的)으로 보지, 객관적(客觀的)으로 보지는 않는 것이다. 곧,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실(事實)이라고 하는 그 다채(多彩)로운 것을 알아 보려고 할 때, 수없이 실패(失敗)를 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
|
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
|
|
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9장 마키아벨리와 피렌체사. 줄리오 2세에 대한 두 번째 사절 시기 (2/2
저녁 무렵, 마키아벨리가 (이 요새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교황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을 때, 교황은 그를 불러 아침에 했던 자신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마키아벨리가 이에 대해 공화국의 원군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안심시키자, 그는 자신이 지금 가진 군대와 앞으로 더 늘어날 군대의 규모를 설명한 뒤, (자신의 주머니에는 병사들이 가득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 베네치아가 좋은 조건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이 자신과 피렌체에 손실을 입히고 이미 교회로부터 빼앗아간 영토를 양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교황의 말은 프랑스 원병이 오기 전에 콜론나를 소환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게 만들었고, 이는 피렌체에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조용히 지나갔고, 마키아벨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교황궁을 따라 아주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교황은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카스텔 델라 피에베,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를 거쳐 편안한 발걸음으로 페루자를 닿았고, 그곳에서 잠파올로 발리오니로부터 첫 번째 셈을 청산받았다. 사실 이 셈은 이미 끝난 것과 마친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잠파올로가 오르비에토에서 그의 빚쟁이를 만나, 그에게 무릎을 꿇고는 요새와 인질을 비롯한 다른 모든 것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양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9월 13일 막상 페루자에 입성하자, 마키아벨리는 잠파올로와 같은 악한의 손아귀에 잡힌 쪽은 오히려 교황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이 일로 그는 10인위원회에 거의 매일같이 편지를 오렸는데, 그 중에서 발리오니가 교황과 추기경단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 잇다는 관측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자신의 나라를 빼앗으러 온 사람에게 맛서 해 되는 아무런 행동도 않는다면, 그는 분명 훌륭한 인품과 인간성을 갖춘 인물일 터이겠습니다만, 이 일이 결국 어떻게 맺어질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끝은 좋앗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의 이 유명한 말에 놀랐겠지만, 그의 판단이 빗나간 것은 쉽게 말해서 그가 이 사태를 두 군주 간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 냉정하게 따져보는 정치가의 입장에서 보았다는 데 연유한다. 두 군주간이라 한 것은, 교황이 교황이 아니라 햔 명의 군주로서, 그것도 다른 군주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 온 군대의 선두에서 잇는 군주로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귀차르디니 역시, 훨씬 더 깊은 숙고 끝에 쓴 저술에서, 당시 (그보다 더 사소한 일에서도 배신의 악명을 휘날렸던) 잠파올로가 (어떻게 그처럼 큰 사건 속에서 세상을 다시 떠들썩하게 만들지) 못했는지 놀라워하였다. 배신은 떡 먹듯 하는 그와 같은 인물이 그처럼 행동한 것은 자신의 비겁함 때문이지, 결코 양심에 찔려서 또는 존경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의 말은 이 축소판 발렌티노가 그 호전적인 교황을 감금하리라는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할 만한 힘이 그의 수중에 있었으며, 교황은 분별없이 그를 믿고 있었다는 뜻이었을 뿐이다. 당시 잠파오로가 줄리오에게 감히 하지 못했던 행동을, 사정은 좀 다르지만 뒤에 콜론나 가가 클레멘테 7세에게 하게 될 것이었고, 그때도 마키아벨리는 교황이 (천명의 병사보다 펜에 묻은 잉크 한 방울을 더 믿는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조롱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교황의 승리는 거의 마키아벨리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합리성에 대한 불합리성의 승리였을 뿐 아니라, (비르투 virtu) (비르투란 덕성을 뜻하는 현대 영어의 (Virtue)에 대응되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말이다. 하지만, 현대어 용법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이 말을 윤리적 의미에서보다는 용기, 과감성, 결단력 등 남성적 (활력)을 뜩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비르투와 포르투나(운명)의 대결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그 기초로 삼고 있는 세계관이다 - 옮김이)에 대한 운명 fortuna의 승리이기도 하였다.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소데리니에게 보낸 그 유명한 글 (기리비치 Ghiribizzi)는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1506년 9월 13일에서 21일 사이 가벼운 집답 조로 페루장게서 써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초고 형태의 편지를 가리킨다. 이를 각별히 (리리비치)라고 부르는 것은 이 편지의 서두에 적힌 (Ghiribizi scripti in Perugia al Soderino)란 말 때문이다. 교황의 페루자 무혈 입성을 지켜보며 인간과 운명의 관계를 숙고하게 된 마키아벨리는 이미 여기서 나중에 (군주론)25장에서 피력할 유명한 체세론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잇다 - 옮긴이). 지금까지 이 소데리니는 당연히 곤팔로니에레인 피에로 소데리니하고 생각되어 왔고 또 그렇게 생각할 수 박R에 없었으나, 사실을 조반 바티스타 소데리니(그는 패에로의 조카이자 마키아벨리으 친구이다-옮긴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비록 답장을 썼지만 내심으로는 숙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젊은 소데리니가 마키아벨리에게 가벼운 잡담 조의 편지 한 통을 쓰자 (1506년 9월 12일자 편지, 이장 주 19를 볼 것 - 옮긴이), 마키아벨리 역시 농담으로 가득 찬 글로 이에 답했던 것이다.
이 (기리비치)는 (리비우스 논고)나 (군주론)을 예켠케 하는 주제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미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되어나갔는가를 연구 하는데 매우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자료로 간주되고 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주제들은 그의 이러한 대작들이 개념화되고 저술되기 직전에야 발상 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이러한 발상의 시점을 무려 6년이나 앞당길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보이니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앞서의 잘못된 판단(줄리오 2세와 잠파올로 발리오니에 대한 자신의 빗나간 평가를 가리킴 - 옮긴이)에 충격과 당혹감을 느낀 마키아벨리는 이 글을 통해 이간의 행동을 선도하고 역사의 형성에 작용하는 힘을 이론적이고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하고 있다. 세상사란 것이 (수단보다는 결과에 의해 판단되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왜 그렇게 다양한 체세 방식들이 때로는 똑같이 성공하고 때로는 똑같이 실패하게 되는지)를 숙고한 끝에 그는 (비르투)와 (포르투나), 즉 운명 사이의 본질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성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성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포르투나는 인간을 지배하여 스스로의 멍에 아래 가두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생각들은 그 힘과 표현에서 거의 다를 바 없는 정도로 수 년 후 마키아벨리의 주장들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한 곳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포르투나와 한번 부딪혀보라. 그녀는 젊은이를 좋아한다) (교황은 늙었지만, 젊은이들 못지않게 일에 급하고 대담했다.) 다른 곳에서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칼 쓰는 법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앞 뒤 가리지 않는 행동에 오히펴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일을 신중히 계산한 끝에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교황은 상황의 경중을 재어볼 생각도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군세도 갖추지 않은 채, 적절한 준비과정과 충분한 군사력으로도 해내기l 어려운 일을 절묘한 기회 포착을 통해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만! 아직은 그가 이러한 일을 딱히 성취한 것은 아니니까.
교황은 자신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를 즐기면서 9월 22일까지 페루자에 머물렀다. 그로부터 거의 한달이 지났으나 일은 별 진척이 없었다. 그는 망설이며 프랑스의 원병을 기다렸다. 그들은 피렌체 원병까지도 끌어 올 것이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이탈리아로 다시 들어오려고 준비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왕은 병사를 보내는 대신 조언이랍시고 몇 마디 말만 전해 왔을 뿐이었고, 이는 일에 대한 열성으로 몸이 달아 있었던 교황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것이엇다. 평소 마키아벨리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교황은 이미 9월 12일, 만일 프랑스가 자신을 응호하고 더불어 황제의 진군이 사실이 아니든가 또는 금방 실현될 것이라면, (그는 교회든 다른 누구든 어떤 손실과 위험에 처하 든간에, 그 자신의 수치만은 결코 참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줄리오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궁정과 군대를 이끌고 구삐오와 우르비노르 거쳐 체세나로 이동하였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마침내 프랑스 왕이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이에 힘을 얻은 교황은 이미 자시니 볼로냐를 얻은 양 생각하고는 다른 큰 일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10월 3일, 그는 벤티볼리오의 사절단에 d\대해 매우 의기양양한 어조로 이제 자신은 (보로냐 따위가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를 떨게 만들 수 있는 군세를 가지고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 군이 오고 있는 사이, 10월 5일 그는 체세나에서 자신이 보유한 군대의 사열을 실시하였다. 군사 문제에 깊이 몰입해 있던 마키아벨리가 그 행사에 빠질 수가 있겠는가! 그는 전문가의 눈으로 그것을 지켜본 뒤 10인 위원회에 올린 보고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만일 위원님들께서 우르비노 공과 난니의 이 병사들을 본다면, 결코 위원님들의 민병대를 부끄러워하거나 그것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친구인 보아나코 시는 바로 그 당시 보낸 편지에서, (당신들의 위하여)라는 식의 어조로 씌어진 이 말들을 장난스럽게 빗대어 (민병대 문제에 관해 이 제 배에다 동물 기름을 슬쩍 한 겹 바른 격이로군 그래)라고 썼다. 하지만 민병대 호의 항해는 키잡이가 이처럼 오래 빠져 있는 동안에도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친구인 비아조는 수시로 그에게 향해 일지의 주요 사항들을 적어 보내주었다. 더욱이 그가 종종 공식 전달 사항들과 함께 넣어 보내는 사신(사신)들 속에는 온갖 종류의 정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카스티야의 왕이 왕국의 쓴맛 단맛 채 보기도 전에 세상을 뜬 이야기라든지, 매일 같이 이럴까 저럴까 하며 주사위만 굴리고 잇는 막시밀리안의 그 영원한 방황 같은 정치 소식도 있었고, 교황의 궁정에서 (일에 눌려 줄을 지경에 있을) 마키아벨리를 이제 소환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있은 후, 벌써 사무실 부하 직원들은 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에 (구석에 처박혀 꿈을 꾸고) 있다는 등, 시(시)와 서기국에 대한 소식들도 있었다. 그는 또 알라만노 살비아티가 몇몇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키아벨리를 건달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그와 곤팔로니에레가 이제 서로를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이것이 (십년기)의 헌정에 대한 그의 보답이었던 셈이다.
(배에 바른 동물 기름)에 대한 편지는 10월 11일자로 되어 있고 윗 머리의 착신지도 (포를리 또는 악당이 있는 곳)이라고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10월 9일 이후 포를리에 있었다. 여기서 교황은 이미 7일 체세느에서 선포한 금령에 덧붙여 벤티볼리오를 겨냥한 초강경 교서를 발효하였다. 이 교서만으로는 볼로냐를 공략하기가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차에 프랑스 군이 지척에 접근하자, 교황은 마키아벨리를 불러 지금이야말로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의 군대가 필요한 대임을 알렸다. 그의 말인즉,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원병이 마지막 줄에 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었고, 이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다 이 사실을 알이기 위해 즉시 전령을 보냈다. 그는 필요한 시일을 꼽아보았다. 그것은 급한 성격의 교황에게는 (너무 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월 16일 마키아벨리는 클론나가 이미 군령(군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참전시 필요한 비용까지도 수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황을 알현하였다. 줄리오의 입이 찢어졌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10인위원회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리고는 그가 베네치아의 영토를 피해서 피렌체 영토를 경유한다고 결정을 내리자, 마키아벨리는 그에게 요청하여 자신이 한 걸음 앞서 가 이 볼품없는 나라를 지나는 교황 및 그의 궁정과 병사들을 위해 준비해놓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하였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서기장은 스스로 병참 장교가 되어, 카스트로카로, 모딜리아나, 마라디, 팔라추올로 등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교황을 보위하였다. 그가10인위원회에 보낸 몇 통 안 되는 편지들은 그 길이도 짧은 뿐 아니라 내용도 정치보다는 시락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팔라추오롤에서 그는 다시 줄리오 2세의 행적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만일 볼로냐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더 큰 일을 모색함에 있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판단컨대, 지금이 아니면 이탈리아가 스스로를 삼키려 해왔던 자들을 응징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20일 이몰라에 도착한 볼로냐의 사절들은 교황과의 면담을 기다리던 중에, 피렌체가 그들의 군주와 싸울 군대를 보낸 데 대해 마키아벨리에게 (정중히)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피렌체인들에게 (시류에 따라 움직이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다름아닌 볼로냐의 군주였으므로,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해야 할 대상은 피렌체인들의 정책이 아니라 피렌체가 스스로의 희생을 감하며 그로부터 배웠던 바로 그 행동 방식이라고 말하였다. 벤티볼리오가 발렌티노의 시대에 했던 일을 빗댄 이러한 응답은 정말 일품이었다. 바로 폐부를 찌르는 그의 농담 방식은 과연 마키아벨리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파르티아의 화살인 셈이었다.(마지막으로 남긴 독설이라는 뜻으로, 마키아벨 리가 사절을 그만두고 곧 돌아가게 된 것을 가리킴 - 옮긴이). 며칠 전 교황청 사절로 선임된 프란체스코 페피가 10월 26일 이몰라에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벤티보리오가 떠난 도시가 함락되고 11월 11일 교황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곳에 입성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대가 도착한 후에도 이틀 더 이몰라에 머물러 있다가 만성절(만성절, Ognissanti : 11월 1일을 말한 - 옮긴이)에 맞추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이제 연례 행사가 된 새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애정 어린 민병대 일에 전념하였다. 보오나코르시의 비유를 계속 빌리자면 민병대 호(호)는 이제 암초 지대를 벗어나 돛을 한껏 펼치고 갑자기 대해로 나선 형국이었다. 12둴 6일에는 9인 피렌체군령 및 민병대 관제위원회 Nove ufficiali dell'lrdinanza e miliaia fiorentina가 창설되었는데, 당시 이는 국가의 업무를 안정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직제였다. 크든 작든 이 모든 것이 마키아벨리에 의해 구상되고 추진되었다. 위의 9인관제위원회에 대한 법령 역시 그가 초안한 것이었다. 그의 명석학도 훌륭한 저술 (피렌체 군사조직론 Discorso dell]ordinare lo stato di Firenze alle armi)은 이 법령이 막 통과되던 무렵에 씌어졌다. 그는 글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일반적인 것에서 시작한 뒤, 이에 신제도의 세부 사항들을 논의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잇다. (지휘관이라 함은, (...) 사법적 권위를 가지고 군대를 통할하는 사람을 뜻한다. 피렌체에 사법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소수이며, 군대는 전무하다.)
9인관제위원회라는 새로운 직제에는 서기관이 한사람 필요했고 이를 맡을 인물을 마키아벨리 외에는 없었다. 물론 제2서기장직과 10인위원회 서기관직은 그대로 겸임한 상태였다. 하지만 겸직에도 불구하고 봉급은 관직 하나에 대해서만 지급되었는데, 이는 지금과 비교하면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당시로서는 아직 다른 방도가 모색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피렌체의 서기장은 봉급을 많이 받는 쪽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물론 받는 만큼 쓰기 위해서이긴 하지만,(그에 못지않게 명성과 찬사 역시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또 바로 이러한 자신의 업적 때문에 관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누구보다 더 열성인 사람은 소데리니 추기경이었다. 새로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이 도시가 이처럼 가치 있고 짜임새 있는 일을 한 적은 우리가 알기로도 꽤 오랫동안 없었던 듯하네.(...) 이른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신의 선물일세.)
최근 불로냐로 파견된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도 그곳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축하의 말을 하고 나서, 이미 10인위원외에서 그렇게 하고 잇듯이 자신을 9인관제위원회의 서기보로 써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또한 페피가 소환 요청을 올렸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다시 교황청 사절로 복귀하리라는 소문을 전해 주었다. 나는 이 소문이 실제 소문 이상으로 진행되었는지 어떤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마키아벨리는 아직 초창기 상태였던 새로운 제도를 확고히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을 이제 막 시작된 그 일로부터 떼어내려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특유한 열성으로 1507년 3월 14일부터 4월 17일까지 34일 동안 피에베 산토 스테타로, 앙기아리, 발 디 키아날, 키안티, 포치본시, 콜레, 산 지미냐노, 포마란체 등지를 돌면서 병사들을 모았다. 5월이 되자, 그는 군대 사열을 위해 사나 지미냐노로 돌아왔으며, 아마 방금 말한 다른 지역에서도 사열이 있었을 것이다.
곤팔로니에레는 그 어느 때보다 마키아벨리에게 믿음을 보여주었고, 이 덕분에 서기장은 이 일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언이든 그를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j. 하지만 일안 더 쉽게 해나가도록 하는데는 그의 동생인 소데리니 추기경의 도움이 컸다. 그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자신의 (우정) 보여주는 데 인색함이 없었으며, 나아가 1506년 3월 4일자 편지에서 마키아벨리에게 더 큰 일을 약속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추기경은 슬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국의 안녕과 위엄을 위하여 (자신의 손으로 그처럼 가치 있는 일을 성사시켰으니, 자네의 기쁨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 믿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군사조직론)을 보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자네가 쓴 이 작품은 분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만한 것이네. 그리고 자네의 말이나 우리의 믿음이나 모두 그러하듯이, 이번 일 때문에 자네의 힘이 깡그리 소진된 것이 아니라면 자네의 지력을 모두 쏟을 만큼 가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나)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있겠는가?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
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알렉산더 대왕
그리스 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기도 하였던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의 서양에 알려졌던 세계를 모두 다 정복한 임금이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임금으로 재임한 기간(336~323) 중에 벌인 전쟁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20세에 즉위하여 선왕 필립의 유지를 받들어 기원전 333년 페르시아를 무너뜨렸고332년에는 타이어를 정복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여세를 몰아 그는 이집트와 바벨론을 정복하였고 인도원정(327~325 B.C)을 하여, 인더스강을 건너가 지금의 푼잡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군대의 건의에 따라 귀국하다가 바빌론에서 그 일생을 마감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는 용기와 학식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학문에 깊은 조예를 갖고 많은 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그가 어느날 시내를 행차하다가 길거리 모퉁이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디오게네스를 보자 그의 앞에 가서 “디오게네스여, 소원이 있으면 무엇이나 다 들어줄 터이니 말해주시오”하고 물었다. 자기가 정복한 나라의 반이라도 떼어달라면 줄 생각으로 말이다. 디오게네스는 “현명한 대왕이시여. 현재 대왕께서는 따뜻한 햇빛을 가로막고 계십니다. 나의 소원은 제가 햇빛을 쬘 수 있도록 대왕께서 비켜주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로마의 시인 터틀리언은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추어 주어도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고하였다. 훌륭한 사람은 진흙 속에 있는 진주와 같아서 주위 환경에도 오염되지 않으며, '군계일학‘처럼 금방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훌륭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 행위의 순수성과 동기에 대하여 떳떳하게 밝힌다. 따라서 꾸며대거나 거짓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또 어쩌다 저지른 실수는 바로 시인한다. 그만큼 그릇이 커서 그의 권위는 훼손되지 않는다. '사람이 비록 해와 달과 인연을 끊으려 해도 그것이 해와 달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공자는 말하였다. 우리가 해와 달을 보지 않으려 해도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훌륭한 사람을 중상비방하여도 훌륭한 사람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을 욕해봐야 그들은 아무론 해도 입지 않는다.
(The sun loses nothing by shining into a puddle.)
여자와 배
로마의 극작가 프라우투스(251~184 B.C)는 “누구든지 많은 걱정과 근심을 하고 싶은 사람은 배나 여자를 소유하라”고 하였다. 그는 여자를 물건으로 취급할 정도의 남성우월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는 여자와 배는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의 생각과 비슷한 동양의 옛말로는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힘이 든다.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는 말이 서경에 있다. 그래서 여자와 소인은 너무 가까이도 또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자의 유래를 밝히는 성경 이야기를 보자.
하느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빗대 하나를 뽑아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 후 아담에게 데려왔다. 아담은 그녀를 보자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여자라 부르리라. 남자로부터 왔으니!”
이리하여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쳐지고, 그 둘은 한 몸이 되었다고 한다. 프라우스트에게 충고하여 주고 싶은 말이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은 깨끗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의 힘이 아니면 어떻게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여자와 배가 없으면 걱정과 근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와 배가 없으면 인류의 종족번식은 어떻게 하고, 바다는 무엇을 타고 건너갈 것인가?
여자와 배는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A woman and a ship ever want mending.)
그러므로 여자와 배는 항상 관심을 갖고 잘 다독거려 주고 고쳐 주어야 한다.
제비 한 마리와 여름
그리스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마리 제비가 오거나, 하루 날씨가 화창하다 해서 봄이 온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제비 한 마리 봤다 해서 겨울이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좋은 징조가 한 번 나타났다 해서 모든 일이 잘 됐다고 판단하지 말고 여러 주위 증거를 종합하여 판단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푸라기를 하늘에 던져보면 바람부는 방향을 알 수 있고 서리가 오고 나면 얼음이 어는 겨울이 오듯이 세상일에는 조짐이 있게 마련이다. 예수는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씨가 좋겠다고 말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씨가 좋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날씨를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알지 못한다.“고 마태복음에서 말했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을 보고 빙산 전체를 알아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서울의 카바레의 제비는 한마리가 나타나도 적색경보를 올려야 한다. 특히 무도장에서 스텝을 밟아 밑바닥이 뜨거워져야 밥맛이 나고 살맛이 나면서 잠이 잘 오는 춤꾼 여자들은 호랑이 꼬리를 밟듯, 봄철 살얼음을 걷듯 조심하여야 한다. 그런데 ‘춤꾼’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이러한 위험부담까지 감수하면서 꼭 춤을 춰야 직성이 풀리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이러한 ‘스릴’ 때문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들겠지만 말이다. 요사이 이러한 ‘제비’에 대항하기 위해서 ‘꽃뱀’이 카바레에서 ‘먹이감’을 찾고 있다 한다. 특히 춤 좋아하는 ‘남자 제비’들이여, ‘통째’로 먹히지 않으려면 조심하기 바란다. 뱀은 먹이를 뜯어먹지 않고 ‘통째’로 삼키기 때문이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여름이 된 것이 아니다.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 제비는 철새로서 4월인 봄에 영국에 왔다가 9월인 가을에는 남쪽으로 간다. 그러므로 여름보다 봄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2. 행동의 방향을 밝히는 충고
밤새도록 곡하고 나서 누가 죽었냐고 물어본다
한국에 대형사고가 나면 관련부서나 장관이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고 새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책임이 있는 현직 장관이 사고 뒷처리를 하여 수습하게 하고 일이 정상화가 된 후 장관을 바꾼다.
복수하는 방법
사람들은 남에게서 은혜를 입으면 곧 갚으려 하지 않지만 피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바로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머는 일리어드에서 ‘복수는 달다’고 하였다. 그는 그 당시 ‘깨소금’은 없고 꿀만 있어서인지 ‘복수를 하면 사람 마음 속에 꿀샘이 넘쳐 흐르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복수는 음식을 식혀서 먹듯이 시간이 지난 후에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도 있다. 천천히 생각해 보란 이야기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격한 감정은 가라앉고 이성이 지배하므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자식이나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자식이나 학생에게 체벌을 가할 때 반드시 자식이나 학생 자신에게 회초리를 갖고 오도록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존 밀튼(1608~1674)은 <실락원>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복수는 처음에는 깨소금같이 고소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쓴 물로 다시 되돌려 받는다. 피는 피를 부르듯이 복수는 복수를 부르므로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는 방법은 용서밖에 없다. ‘네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러면 너의 원수는 머리에 숯불을 올려 놓는 것같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것이고 너는 하느님에게 상을 받을 것이다‘고 하였고, 네 자신이 직접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이 그 일을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라‘고 성경은 말하였다. 원한은 올바름과 덕으로 갚으라고 하였다. 노여움이 크더라도 남에게 그것을 풀지 않는 사람이 되자.
복수는 천천히 하는 것이 좋다. (Revenge is a dish that can be eaten cold.)
|
|
시나눔 → 동시
|
|
|
봄에게- 박종현
봄은
맑은 마음이 되고파
시냇물 찰랑대며 손발을 씻고
봄은
더운 가슴 되고파
따사로운 햇살 따라 얼구을 들고
봄은
밝은 웃음 되고파
꽃잎에 속사이며 달려서 온다.
봄이여
자랑스러워 어때동무하는
푸른 날들이여.
------------------------------------------------------------
봄 들녘에 나가면 - 민홍우
아롱아롱
아지랑이가 그물을 짜 펼쳐 놓는다.
바람 한 점
구름 한 덩이
걸릴 것 같지 않은 그 곳에
목련 꽃망을 터지는 소리도 걸리고
진달래 함박웃음도 걸렸다고
봄바람이
귀에다 속사이고 지나간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