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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4호 - 2024.9.17. 화요일(음력 : 8.15.)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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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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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행은, 자기의 富를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富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 벤저민 리즈레일리(英 정치가, 1804~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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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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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적기
홍보의 시대이다 보니 길거리에 나서면 온갖 현수막들이 보인다. 손 씻기를 강조하는 공익 광고부터 가게 홍보 등 그 내용도 다양하다. 그 가운데 특정한 행사 개최를 알리는 내용이 상당히 많은데, 그런 현수막의 경우 보통 아래에 개최 일시를 적어 놓는다. 그런데 이 경우 반복되는 문제가 있는데, 다음 예에서 그 문제점을 찾아보자.
때: 2016. 9. 23(금) 14:00
여기에는 세 가지 문장 부호가 있는데, 우선 쌍점(:)은 위 예의 ‘때:’와 같이 표제 다음에 해당 항목을 들거나 설명을 붙일 때, ‘14:00’처럼 시와 분을 구별할 때 쓸 수 있다. 다음으로 소괄호(( ))는 위 예의 ‘(금)’처럼 보충적인 설명을 덧붙일 때 쓸 수 있다. 그러니 이 두 문장 부호 사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마침표(.)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아라비아 숫자만으로 연월일을 표시할 때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3ㆍ1운동이 일어난 때는 ‘1919. 3. 1.’과 같이 적는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날짜 다음에도 마침표를 꼭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마침표는 ‘년, 월, 일’이라는 말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만일 날짜 다음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1919년 3월 1’과 같이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앞에서 낸 문제의 답은 분명하다. 날짜 ‘23’ 다음에 마침표를 빠뜨린 것이다. 그런데 곳곳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듯이 이와 같이 연월일을 표시할 때 날짜 다음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오히려 제대로 찍은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할 정도이다. 마침표, 작은 점 하나지만 이제부터라도 잊지 말고 꼭 찍자.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나중에 뵈요?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직접 만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면대면 의사 소통방식이 줄어들고 휴대전화의 문자나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통해 서로 의사를 교환한다. 즉 말보다 글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맞춤법에 맞게 얼마나 정확하게 글을 쓰느냐가 그 사람의 교양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실제로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80%가 넘는 대학생이 맞춤법을 자주 틀리는 이성 상대에 대해 ‘호감도가 떨어진다’고 답했다.
국어의 맞춤법은 가장 기본적인 소양인데, 이런 맞춤법을 자주 틀린다는 것은 상대에게 소양이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는 조사 결과다. 일반적으로 흔히 틀리는 맞춤법 실수를 하나 꼽으라면 “이거 먹어도 돼요?”라고 적어야 할 것을 “이거 먹어도 되요?”라고 적는 것이다. 그럼 왜 ‘돼요’를 ‘되요’라고 잘못 적는 것일까. 동사 ‘되다’의 의문형은 ‘되다’의 어간인 ‘되’에 종결어미 ‘어’와 존대의 보조사 ‘요’를 함께 붙인 ‘되어요’가 맞고 이를 줄여 ‘돼요’라고 적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되요’라고 적는 것은 종결어미 ‘어’를 생략하고 존대의 보조사 ‘요’만 적은 것으로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나중에 뵈요”도 역시 틀린 표현이다. 동사 ‘뵈다’의 청유형은 ‘뵈다’의 어간인 ‘뵈’에 종결어미 ‘어’와 존대의 보조사 ‘요’를 함께 붙인 ‘뵈어요’가 맞고 이를 줄여 ‘봬요’라고 적어야 한다.
“집에서 명절을 쇠요” “함께 바람을 쐬요”라는 문장도 “집에서 명절을 쇄요” “함께 바람을 쐐요”로 고쳐 적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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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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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것만이 아니다 - 천상병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
장수산 1, 2 - 정지용
4
산그림자도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장수산1
벌목정정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
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
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장수산2
풀도 떨지 않는 돌산이오 돌도 한덩어리로 열두골을 고비고비 돌았세라
찬 하늘이 골마다 따로 씨우었고
얼음이 굳이 얼어 드딤돌이 믿음직 하이 꿩이 기고 곰이 밟은 자옥에
나의 발도 놓이노니 물소리 귀또리처럼 직직하놋다
피락 마막하는 해ㅅ살ㅇ 눈우에 눈이 가리어 앉다
흰시울 알에 흰시울이 눌리워 숨쉬는다 온산중 나려앉는 휙진 시울들이
다치지 안히! 나도 내더져앉다
일즉이 진달래 꽃그림자에 붉었던 절벽 보이한 자리 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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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球儀(지구의) - 김수영
지구의의 양극을 관통하는 생활보다는
차라리 지구의의 남극에 생활을 박아
라고난이 풍선같이이 바람에 불리거든
너의 힘을 알리는 신호인줄 알아라
지구의의 남극에는 검은 쇠꼭지가 심겨있는지라
무르익은 사랑을 돌리어보듯이
북극이 망가진 지구의를 돌려라
쇠꼭지보다도 허망한 생활이 균형을 잃을 때
명정한 정신이 명정을 찾듯이
너는 비로소 너를 찾고 라웃어라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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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16~20) - 이해인
16
때로는 이해할 수 업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이 가을엔 꼭 찾아 얻게 하소서.
꽃이 죽어서 키워낸 열매, 당신이 죽어서 살려낸 나,
가을엔 이것만 생각해도 넉넉합니다.
17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우산도 채 받지 않고 길을 가는 이들의 적막한 얼굴 속에서
나는 당신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삶은 비애를 긋고 가는 한 줄기 가을비일까」
혼자서 나직히 뇌어보며
오늘은 더욱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을 닮고 싶었습니다.
18
언제나 한(恨)과 눈물이 서린 듯한, 그러나 나를 낳아 준 모국의 정든 산천.
하루도 근심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쓸쓸한 이마를 보면 눈물이 핑 돕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해
살아서도 이미 죽음의 순간을 맛보는 나의 이웃들을
지금은 그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그토록 힘이 없어 보입니까.
19
오늘은 빨갛게 익은 동백 열매 하나 따 들고 언덕을 오르며,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 또한 이 작은 열매처럼 하도 잘 익어서
'툭'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20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내 하얀 머리수건 위에 올려 놓은 바람.
그리고 손에 쥐어 보는 유리빛 가을 햇살.
잠자리 날개의 무늬처럼 고운 설레임으로
삶을 더욱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당신의 가을 햇살 - 잊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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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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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1장. 지를 기른다
3.머리를 써서 일하라
머리가 좋아지도록 만들어진 교육환경
사람들은 대체로 '유태인은 머리가 좋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미국에서 아이비 리그(동부지역 명문대학군)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하버드, 예일, 칼럼비아, 프린스턴 등의 일류 대학교수진의 30%가 유태인이라고 한다. 또 1905년부터 1973년까지의 노벨상 수상자 310명 중 유태인이 43명으로, 전체 수상자의 10% 이상이 유태인이거나 유태계라고 한다. 물론 이런 사실들이 곧 유태인은 선천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능의 우열은 결코 인종과 민족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유태인은 어려서부터, 유태인답게 살아가려면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머리를 써서, 즉 두뇌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일해야만 된다고 항상 배워왔다는 사실이다. 또 유태인이 어려서부터 받아온 학교나 가정교육 시스템은 머리 쓰는 일에 알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유태인에게는 아주 자연스런 일로 인식되어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활 환경 모두가 머리 쓰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통계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이 육체노동을 천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시에 두 초등학교를 다닌 토케이어 씨
마빈 토케이어 씨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1936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동시에 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는 미국 초등학교에 다니고, 이곳에서 수업이 끝나면 버스로 40분이나 걸리는 다른 학교로 달려가야 했다. 그는 그 학교에서 네 시간 동안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유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학교를 다닌 습관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 반까지는 미국인들의 학교에 다녔고, 그 수업이 끝나면 다시 유태대학인 예시버 대학엘 다녔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케이어 씨는 힘은 들었지만 동시에 두 개의 대학 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밖에도 그는 스포츠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는데, 특히 야구를 아주 잘해 대학팀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뛰어난 소질을 발견한 어느 프로 야구팀에서는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손가락 모양이 특이해서 직구를 던질 때도 자연스럽게 공이 처져서 아무리 잘 치는 타자라도 여간해서는 홈런을 칠 수 없는 변형 구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프로 야구단의 입단 교섭에 마음이 쏠려 아버지와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아버지는, '야구도 좋지만 그것은 네게 적당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두 학교에 다녔을 만큼 머리 쓰는 일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선천적으로 특이한 '황금 손가락'을 가진 그였지만 빈틈없는 두뇌 교육과정을 밟아온 그에게 프로 야구선수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적합치 않다고 그의 부친은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프로 야구팀의 유혹을 뿌리치고 랍비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머리를 써라'
이는 어느 유태인 어린이건 간에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항시 듣는 말이다. 또한 유태인 엄마들은 어린이를 꾸짖고 때릴 일이 있으면 뺨을 때릴망정 절대로 머리는 때리지 않는다고 한다. 뇌가 상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게다. 그러므로 유태인의 머리가 좋은 것은 선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머리를 잘 쓰는 방법을 어릴 적부터 훈련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라면 누구나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
그런데 똑같이 머리를 쓰는 방법이지만, 직접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과 지식을 터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후자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태인의 속담에 '물고기를 한 마리 준다면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지식'이란 말과 바꿔놓고 본다면 이 속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만이 우리 어른들의 임무는 아니다. 그와 더불어 배우는 방법까지도 가르쳐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은 대부분 어떤 일정한 양의 지식을 학생들 머리 속에 넣어주고, 어떻게든 시험에 통과하는 능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요구한다. 즉 대부분의 부모들은 상급학교에 입학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어떻게 물고기를 잡을 것인지는 가르치지 않고, 당장에 먹을 한 마리의 물고기를 나눠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보다는 지식의 체계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흡수하느냐 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되면, 학생들은 그것을 다른 일에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학문에 대한 흥미를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학교 교육에는 문외한인 나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유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제출시킬 경우,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그 수집된 자료들을 적절히 종합, 분석, 정리해서 자신의 머리로 리포트를 작성하게끔 이끌어준다. 그리고 리포트의 평가 기준은 그 내용이 아니라, 자료를 다룬 솜씨가 중요 포인트가 된다. 이렇게 유태 아이들은 최대한 머리를 활용하는 환경 속에서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물고기를 한 마리 준다면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4.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의지할 것은 오직 지혜뿐
유태인의 격언 중에,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남고 싶다면 먹는 것으로도, 마시는 것으로도, 춤을 추는 것으로도, 또는 일하는 것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지혜를 가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유태인은 그야말로 온갖 박해를 받으며 생존해 왔다. 그런 유태인에게 만약 지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중세 유럽 시대의 유태인은 토지의 소유를 금지당했고, 직능별 조합인 '길드'에마저 가입할 수 없었다. 유태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은 오직 의사나 상인뿐이었다고 한다. 고등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어 편히 살거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지혜를 터득해서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길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전 <탈무드>에는 '유태인의 유일한 재산은 지혜'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우화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한 가지를 들어보자.
거부들만 타고 있는 배에 '랍비' 한 사람이 편승하고 있었다. 부자들이 서로의 재산을 비교하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랍비'가 말했다.
"가장 유복한 사람은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는 보여드릴 수가 없군요."
그로부터 얼마 후, 해적의 습격을 받게 되어 부자들은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마침내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그는 학생들을 모아 학교를 만들었다. 그러곤 단번에 거부가 되었다. 함께 배를 타고 왔던 부자들은 이미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 있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랍비'가 한 말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라는 속담처럼, 지혜를 갖지 못한 자의 부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지혜 있는 자 모든 것을 갖춘 자
다음의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유태인은 지혜를 갖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거침없이 버리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유럽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 사이에 미국으로의 이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독일 바바리아 지방 바이에르스 돌프촌에 파니 셀리란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녀들을 부자유스런 생활환경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 보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기초작업으로 장님인 조세프를 대학에 진학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직공생활을 하고 있던 남편 데비드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다며 반대했다. 하는 수 없이 파니는 그 동안 남모르게 모아두었던 돈을 털어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조세프를 에드란켄 대학에 입학시켰다. 대학에서 그는 그리스어, 영어, 프랑스어를 익힌 결과 이미 알고 있던 독일어, 히브리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조세프는 졸업 후 17세가 되던 해에 '약속의 땅'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그의 주머니 안에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미국 지폐 1백 달러가 전부였다. 조세프는 그 후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뉴욕에 'J&W 셀리그먼 컴퍼니'란 은행을 설립하고 어학 실력을 마음껏 발휘, 국제 금융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고, 이민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셀리그먼 산(Mount Seligman)'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그의 모친 파니가 교육이라는, 즉 어학이라는 '지혜'를 터득케 해서 조세프를 신대륙에 보낸 결과였다. 이렇듯 유태인들은 '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라는 속담과 '지혜 있는 자 모든 것을 갖춘 자'라는 격언을 굳게 믿고, 어린이들을 그렇게 되도록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이 세상에서 진정 살아남고 싶다면 먹는 것으로도, 마시는 것으로도, 춤을 추는 것으로도, 또는 일하는 것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지혜를 가져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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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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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전후 처리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 왕국을 합병하여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도나우강 이북의 위험 요소를 아예 지상에서 깨끗이 없애버릴 작정이었다. 전쟁 초기에 재빨리 투항하여 복종을 맹세한 다키아인들은 다키아 땅에 그대로 눌러 살 수 있었지만, 항쟁하다 패배한 다키아인들은 노인도 아녀자도 모두 카르파티아 산맥 북쪽으로 추방되었다. 게다가 5만 명이나 되는 다키아인들이 포로나 노예로 고국을 떠났다. 다키아 땅은 거의 전역이 텅 비어버린 셈이다. 텅 빈 다키아 땅에는 주변 지역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것도 한 지방이 아니라 많은 지방에서. 이리하여 다키아 주민은 완전히 교체되었다. 풍습도 언어도 다른 민족의 혼합체가 된 다키아에는 공통어로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가 침투해 들어간다.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언어가 라틴어를 모체로 삼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런 라틴계 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루마니아의 언어도 라틴어 계열에 속한다. 이탈리아어를 알면 루마니아어를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루마니아는 과거의 다키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유명인사들의 삶을 대비하여 저술한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서기 50년 전후에 태어나 120년경에 죽은 그리스인이다. 서기 53년에 태어나 117년에 죽은 트라야누스와는 그야말로 동시대 사람이다. 게다가 플루타르코스는 전기를 쓰기 위한 조사 때문인지 로마를 자주 방문하여 오랫동안 머물곤 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를 직접 목격한 현장 증인이었다고 해도 좋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이 플루타르코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패자조차 자신들과 동화시키는 로마인들의 생활방식이야말로 로마가 융성한 요인이었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제패와 속주화에 성공한 것, 그리고 그 후 갈리아가 로마 속주화의 우등생이 된 것은, 승자인 카이사르가 패자인 갈리아인의 존속을 인정하고, 알레시아 전투에서 그에게 맞선 자들까지 용서하고, 갈리아의 모든 부족이 '본적지'에 그대로 눌러 사는 것을 허락하고, 그런 도시들을 서로 연결하는 형태로 로마 가도를 건설하고, 부족의 유력자 계급에는 세습권인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부족장들에게는 원로원 의석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 이름인 율리우스를 인심좋게 나누어주어 자신의 일족으로 만들어버리는 정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암살되었지만 그의 생각은 후계자들에게 계승되어, 이 개방노선은 로마 제국의 속주 통치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 요컨대 패자도 승자도 로마 제국이라는 공동운명체의 일원으로 보는 정책이 정착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의 패자의 피를 이어받은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오르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카르타고를 멸망시켰을 때 로마는 도성 안에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고 주민은 모두 노예로 삼아 끌고 갔지만, 제정으로 바뀐 뒤에는 그런 일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패자 쪽인 플루타르코스로 하여금 승자인 로마인을 칭송하게 만든 요인은 제정 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건재했다. 그런데 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주민을 완전히 교체하는 비동화 정책을 강행했을까. 로마는 이제 융성기를 벗어나 절정기에 이르렀다는 승자의 교만일까. 아니면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맛본 굴욕감에서 로마인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다키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다키아를 황무지로 만드는 방법뿐이라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말에 트라야누스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트라야누스와 동시대 사람인 플루타르코스나 타키투스도 주민을 완전히 교체하는 형태로 다키아를 속주화한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 비난도 하지 않았다. 비난하기는커녕 트라야누스의 정치 전반에 대해 호의적이다. 남프랑스 속주 출신의 로마인으로 원로원 의원이었던 타키투스도, 그리스 남부 태생으로 평생 그리스인이었던 플루타르코스도, 출생지나 민족이나 사회적 입장을 초월하여 공동운명체인 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그러나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라도 역시 여기서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후 처리와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후 처리의 배경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를 고찰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카이사르가 상대한 것은 100개 가까운 부족이 난립해 있는 갈리아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활용하여 라인 강 동쪽에서 침입을 되풀이하는 게르만족의 존재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런 말로 갈리아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다가 결국 게르만족의 노예가 되겠는가. 아니면 로마의 동화정책 밑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쪽을 택하겠는가."
게르만족의 위협이라는 '카드' 외에도 카이사르에게는 또 한 장의 카드가 있었다. 그것은 갈리아인이 많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통일성 없는 집합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불리해진 부족이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을 불러들인 것이 게르만 침입의 원인이었다. 갈리아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1년에 한번 열리는 부족장 회의에 이해관계의 조정을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각 부족의 세력이 엇비슷하면 조정이 난항을 겪는 것도 당연하다. 카이사르는 1년에 한번 열리는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정복한 뒤에도 존속시켰다. 하지만 의장, 즉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은 로마인이 맡도록 했다. 로마군이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주게 된 뒤, 그때까지 수렵민족이었던 갈리아인은 안심하고 한곳에 정착하여 일할 수 있는 농경민족으로 바뀌었다. 트라야누스에게는 카이사르가 이용한 카드가 없었다. 다키아인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강대한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다키아는 한사람의 유능한 지도자가 이끄는 통일국가였다. 패자에 대한 카이사르의 동화정책과 트라야누스의 비동화정책은 수법이라는 점에서는 정반대다. 하지만 결과에서는 두 정책이 똑같이 성공했다. 다키아는 1개 군단밖에 상주시키지 않았는데도 로마 중앙정부를 걱정시키는 일이 거의 없는 속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단순히 다키아 정복만으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트라야누스는 전쟁이 끝난 뒤 도나우강 방위선을 재편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선 다키아 속주 서쪽에 인접해 있는 라인 강 방위선. 라인 강어귀에서 레겐스부르크까지 이르는 '게르마니아 방벽'이 제국의 국경으로 확정된다. 도나우강 방위선은 그 동쪽에서 시작된다. 도나우강의 흐름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까지 로마 군단기지가 이어져 있다. 덧붙여 말하면, 로마인이 말하는 '수페리오르' (superior)와 '인페리오르'(inferior)는 각각 강의 상류와 하류, 또는 고지와 저지를 의미하지만, 로마에서 가까운 곳과 먼 곳을 의미하기도 했다.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판노니아 수페리오르)-군단기지는 빈도보나(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빈에서 30킬로미터 하류에 있는 카르눈툼(오늘날 오스트리아의 페트로넬), 브리게티오(오늘날 헝가리의수니) 등 세 곳 헌 판노니아 속주' (판노니아 인페리오르)-군단기지는 아퀸쿰(오늘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가까운 모에시아 속주' (모에시아 수페리오르)-군단기지는 싱기두눔(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과 비미나키움(오늘날의 코스트라크)의 두 곳. 헌 모에시아 속주' (모에시아 인페리오르)-군단기지는 노바에(오늘날 불가리아의 스비슈토프), 두로스토룸(오늘날 불가리아의 실리스트라), 강어귀 근처의 트로에스미스등 세 곳. '다키아 속주'-군단기지는 아풀룸(오늘날 루마니아의 알바이울리아). 군단기지는 모두 열 군데, 주둔하는 군단도 10개. 4개 속주에는 각각 1명의 원로원급 총독이 상주한다. 주전력인 군단병만 해도 6만 명. 보조병을 합하면 12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도나우강 중류에서 하류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다키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르미제게투사는 '사르미제게투사의 트라야누스 식민도시'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다키아 전쟁에 참전한 만기 제대병들이 대거 이주했다. 다키아 속주의 경제발전에 핵심 역할을 맡고, 여차하면 방위에 보조 역할을 맡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라야누스는 도나우 강어귀 근처에 있는 아담클리시의 언덕 위에 도나우강 너머로 북쪽을 노려보는 승전기념비도 세웠다.
이런 조치에 따른 성과는 다음 형태로 나타났다.
(1)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 확립.
(2) 역사적으로 다민족의 도가니라는 특색을 지닌 발칸 지방의 안정.
(3) 흑해 서안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오리엔트와 중부 유럽의 물류
중계기지로 활성화된 점. 유럽과 아시아는 이제 도나우강을 통해서도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속주화된 다키아에도 로마의 가도망이 그물처럼 쳐지기 시작한다. 이 다키아는 250년 뒤에 찾아온 야만족의 대이동 시대에도 로마제국의 방파제 역할을 맡게 된다. 다키아 전쟁이 끝난 뒤, 트라야누스에게는 일반 시민의 지지, 원로원의 지지, 군대의 지지, 속주의 지지가 집중되었다. 속주 출신이라는 약점도 오히려 장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트라야누스 자신이 이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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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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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11화 전생에서 환생을 약속한 마르따
1917년 10월에 스물 여덟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아 준아리아데 오리베이로는 브라질의 돈 페리시아 마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두번이나 연애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폐병으로 죽었다. 특히 그녀의 두번째 애인이었던 후로징호가 주위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충격은 더욱 컸던 것이다. 마리아가 죽고 열달이 지난 1918년 8월 14일, 이 지방의 학교 교사인 로렌쯔 부부 사이에 열 두번째의 아이인 마르따가 태어났다. 그녀가 두살 반이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에, 그 부모는 즉시 이아이는 마리아 준아리아의 환생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마르따가 한살이 되기 조금 전에 그녀의 전생의 아버지인 오리베이로가 로렌쯔 씨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녀는 오리베이로 씨에게 안기려 하며'아빠'라고 부르는 듯하였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의 전생이름을 '마리아' 라고도 하고 또 '싱하'라고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이름 하나는 '준아리아'라고 하느냐고 그의 아버지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녀의 전생이야기는 사망한 싱하의 아버지 오리베이로 씨의 농장의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소와 양들이 많이 있고 오렌지가 많이 열렸다고 하며, 우물물을 먹었다고 했다. 또 어머니의 말 안장을 보면서 자기와 함께 산 것이라고 했다. 싱하와 이다는 사이가 좋아서 사실 그랬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가 싱하였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것은 마을 축제에 구경갔다가 심한 비를 맞은 이후부터였다고 했다. 싱하는 폐병으로 죽었다. 싱하의 임종 직전에 문병을 갔었던 마르따의 어머니이다는 그때 일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다 곁으로 다가와서 그 귀에 속삭이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난 꼭 환생할 거야, 당신의 딸이 되어서. 그리고 지금의 나의 생애 의 여러가지를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나 그때 싱하가 겨우 한 말은 "난, 난 약속해…"하는 말이었다. 이 '마지막 약속'은 마르따가 전생 발언을 시작하기까지는 로렌쯔 부부만이 알고 있었다. 싱하의 장례식은 폐병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겨우 몇 사람만 참석했는데 마르따는 그때 참석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 소리질렀다. 세리카가 "싱하, 싱하" 하면서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리카의 환상(幻想)을 본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세리카의 죽음이 전해졌다. 세리카가 죽은 시각은 마르따가 환상을 본 시각과 꼭 맞았다. 세리카는 싱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다는 싱하에게 물어보았다.
"싱하는 내가 농장에 갔을 때 어떻게 나를 대해주었지?"
"커피를 준비하고 집앞의 돌 위에 축음기를 장치하고서 집밖에 나가 기다렸지요."
사실이었다. 이다의 집과 싱하의 농장과는 12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싱하는 이다가 오는 날을 미리 알고는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싱하도 마르따와 같이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르따는 자기 집에 온 싱하의 첫번째 애인을 알아보았다. 또 사촌도 알아보았다. 어느 날 부친의 상(喪)을 당한 마을 여인이 마르따의 집에 왔을 때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생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이예요. 나를 보세요. 나도 죽었었지만 이렇게 아직 살아 있잖아요." 마르따는 열두살 때 오리베이로의 농장에 갔다. 가면서 농장으로 가는 도중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전생의 집안에 들어가서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시계 뒤에 금색으로 자기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고 했다. 벽에서 떼내어 보니 과연 금색으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라는 싱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흑인 노예의 이야기, 집에 있던 고양이 따위에 대한 전생기억은 모두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싱하는 일부러 병사(病死)한 여인이다. 그녀의 최후는 목과 폐를 앓아서 거의 말도 하지 못했었다. 마르따도 어릴 때부터 기관지염을 잘앓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잠겼다고 한다. 또 마르따는 피와 비에 대해 거의 병적인 공포를 갖고 있었다. 그 후 쉰살이 더 지나도록 싱하의 자살한 애인 후로징호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제12화 언니가 죽어서 남동생으로 환생한 파우로
파우로는 앞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르따의 남동생이다. 그는 마흔세살에 피해망상증으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자살하였다. 파우로 역시어느 인물의 환생이었다. 곧 로렌쯔 집안에는 형제들 중에 환생한 아이가 둘이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렌쯔 씨에게는 파우로 위로 열두명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맨 위의 누이가 '에미리아'라고 했다. 그녀는 열 아홉 살이던 1921년 10월 12일에 약물자살을 하였다. 로렌쯔 씨가 심령문제를 연구하였듯이 그의 아내도 심령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영매(靈媒)의 역할을 하여 영혼과 직접 교신을 하기도 했다. 에미리아가 자살한 얼마 후에 모친은 에미리아의 영혼에게서 통신을 받았다. 그녀는 자살한것을 후회하며 남자아이로 환생해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런 예언이 있은 뒤에 에미리아가 자살한 지 약 1년 반이 지난1923년 8월 3일에 파우로가 태어났다. 파우로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하고만 놀고 남자와는 놀지 않았으며, 또 인형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리고 옷도 바지를 입지 않고 스커트만을 입으려고 하였다. 음식 먹는 데 있어서 그에게는 흥미로운 버릇이 있었다. 빵을 먹을 때에는 아무리 새로 만든 부드러운 빵이라고 가장자리를 뜯어내고 먹었다. 이것은 에미리아와 같은 버릇이었다. 네살 때에는 배운 적도 없는 재봉틀을 사용하여 바느질을 하였는데, 집에 있는 재봉틀을 보고 자기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재봉하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것은 에미리아의 재봉 수업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에미리아가 동생들 중에서 로오라를 가장 귀여워했듯이 파우로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였다. 에미리아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불만을 품어왔다. 20세기초의 브라질에서는 여자에게는 여러가지 제약이 있었고, 특히 미혼여성이 혼자서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미리아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동생들에게 자주 말했던 큰 이유중의 하나는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파우로도 여행을 무척 좋아하였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만난것은 그가 서른아홉살이었을 때인데 그는 그때까지도 여성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교수는 그에게 일종의 심리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것은 동성애의 남자와 여자를 테스트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파우로는 여성경향도를 보여주었다. 이때 그는 독신이 었고 결혼할 뜻도 없는 듯하였다. 그는 여행 등의 자유에 대한 희망과 여성적인 경향의 두 가지 이유로 독신으로 지내다가 마흔세살 때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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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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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學問)에 대하여 - 베이컨(Bacon)/이종근 옮김
학문은, 즐거움과 장식(裝飾)과 능력(能力)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 주로 즐거움으로서의 학문의 효용(效用)은 혼자 한거(閑居)할 때 나타나고 장식으로서의 그것은 담화(談話)를 할 때 나타나며, 능력으로서의 효용은 일에 대한 판단과 처리에서 나타난다. 일에 숙달한 사람도 일을 하나 하나 잘 처리하고, 개별적(個別的)인 부분을 잘 판단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에 대한 전반적(全般的)인 계획(計劃), 구상(構想), 정리(整理)에 있어서는 학문있는 사람이 제일 낫다. 학문에 지나친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태만(怠慢)이다. 그것을 지나치게 장식으로 쓰는 것은 허세(虛勢)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학문적인 법칙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학자들의 버릇이다.
학문은 사람의 천품(天稟)을 완성하지만, 사람의 경험(經驗)에 의하여 학문 자체도 완성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의 천부적(天賦的)인 능력은 마치 천연 그대로의 식물과 같아서 학문으로 전지(剪枝)해야 할 필요가 있고, 또 학문도 사람의 경험에 의하여 제한되지 않으면, 그 제시(提示)하는 방향이 너무 막연하게 되기 때문이다. 약삭 빠른 사람은 학문을 경멸(輕蔑)하고, 단순한 사람은 숭배하며,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이용(利用)한다. 곧 학문의 용도(用途)는 학문 자체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학문을 떠나 학문을 초월(超越)한 관찰로서 얻어지는 것으로, 이는 사람의 지혜에 속하는 문제인 것이다.
반대하거나 논박(論駁)하기 위하여 독서하지 말라. 또는, 믿거나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혹은 담화나 논의의 밑천을 마련하기 위하여 독서하지 말라. 오직 재량(裁量)하고 고찰(考察)하기 위하여 독서하라. 어떤 책은 그 맛을 볼 것이고, 어떤 책은 그 내용을 삼켜버릴 것이고, 어떤 소수(少數)의 책은 씹어서 소화할 것이다. 이는 곧 어떤 책은 다만 그 몇 부분만을 읽고, 어떤 소수의 책은 정성껏 주의해서 통독(通讀)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책은 또 대리(代理)로 하여금 읽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발췌한 것을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은 내용, 저급한 종류의 책에 한한 이야기다. 이 밖의 경우, 개요(槪要)만을 추출(抽出)한 책은 마치 보통의 증류수와 같아서 무미 건조한 것이다.
독서는 충실한 사람을 만들고, 담화는 재치있는 사람을 만들고, 문필(文筆)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그러므로 글을 적게 쓰는 사람은 기억력이 강해야 하고, 담화를 별로 않는 사람은 임기 응변(臨機應變)의 재치가 있어야 하고, 독서를 적게 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보일만한 간교(奸巧)한 꾀가 있어야 한다.
역사는 사람을 현명하게 하고, 시(詩)는 지혜롭게 하며, 수학은 치밀하게 하고, 자연 과학은 심원하게 하며 윤리학은 중후(重厚)하게 하고, 논리학과 수사학(修辭學)은 담론(談論)에 능하게 한다. 학문은 발전하여 인격이 된다. 뿐만 아니라 적당한 학문으로 제거할 수 없는, 지능의 장해(障害)란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육체의 질병에 대하여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적합한 운동이 있는 것과 같다. 예컨대 투구(投球)는 결석병(結石病)에 좋고, 사격은 폐(肺)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만일 머리가 산만하면 수학을 배우게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실제로 수학을 풀 때 머리가 조금이라고 헛갈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식별력(識別力)이 없고 차이를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스콜라 철학자(哲學者)들을 연구하게 하는 것이 좋다. 그들은 머리털 하나라도 갈라보려고 하는 치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고 한가지를 증명 또는 예증(例證)하기 위하여 다른 것을 제시할 능력이 불충분하다면, 법(法)의 판례(判例)를 연구하게 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이 모든 정신적 결함(缺陷)에는 거기에 알맞는 각각의 특수한 요법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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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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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9장 마키아벨리와 피렌체사. 줄리오 2세에 대한 두 번째 사절 시기 (1/2
문필가에서 갑자기 군사를 다루는 위치에 서게 된 마키아벨리를 두고, 역사가든 전기 작다든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의 애국심을 노래하고 있다. 나라고 남보다 앞서 그의 이러한 덕성을 부정하는 인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대인들조차도 인정했던 대로, 자신의 조그만 도시국가와 자신의 자유를 향한 애정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로서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았던 더 넓고 큰 조국 (이탈리아를 말함 - 옮긴이)에 대한 애국심을 당시의 다른 이탈리아인 누구보다도 더 확실히 보여준 인물로서 그를 지목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좀더 공평하게 평가하자면, 피렌체의 서기장이 민병대에 기울인 열성과 관심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재능을 믿고, 더불어 반대자들에 의해 그토록 심하게 공격당한 계획을 성사시키기코자 한 한 인간으로서의 열성과 관심이었다고 보는 쪽이 더 나을 거이다. 우선 스스로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손상될 순간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운명과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는 그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불꽃 같은 열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어떤 이론, 어떤 생각은 곧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타고 그토록 열성적으로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모습에서 알수 있듯이, 새로운 것을 향한 쉴 줄 모르는 욕망은 그로 하여금 서기국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보다 군인을 모병하는 일이 더 즐겁다고 느끼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만사에서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던 당시, 그에게 조그만 행복감을 가져다준 것은 (십년기)의 출간이었다. 그가 무젤로에서의 모병을 끝내고 만 카센티노로 가고 있을 때였다. 그 작품은 서기보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자신으 돈으로 출판한 것인데, 그는 여기에다가 지금까지도 훨씬 더 비중 있게 대우 받을 만한 몇몇 피렌체인들에 바치는 헌사를 붙여놓았다. 여기서 그는 그 작품을 칭찬한 뒤에, 그것이 피렌체인들에 대해 저자가 지고 있는 빚을 이제 갚기 시작하는 데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즉 (그는 빚을 다 갚기 위해 지금 일터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더 큰 놈을 두들겨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문맥으로 보아, 그는 여기서 마키아벨리가 지금 좀더 큰 규모의 역사 저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냥 막연하고 가정적이 아니라 생생하고 실제적인 어투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의 일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작업은 지금까지 피렌체 서기장들이 써왔던 전통적인 연대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 작품은 원사료 수집과 함께 벌써 착착 진행중인 상태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왜 그렇게 많은 공문서 필사본과 발췌본들이 굳이 바로 그 (십년기)의 시기에 맞추어 나타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자료들 중에는 마키아벨리의 자필도 있고 그의 서기보들이 쓴 것도 있다. 이러한 필사본과 발췌본들은 분명히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지, 그가 메디치 추기경의 의뢰오 자신의 피렌체사를 쓰게 될 (오랜 시간 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십년기)가 당대인들에게 바쳐진 것이라면 장래의 피렌체사는 후대인들에게 바쳐질 운명이라고 친구인 아고스티노가 말했을 때, 그는 예언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후대들은 이 (십년기)에 대해서도 감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 리가 스스로 그 작품 속에 남겨놓은 것 때문에, 그가 쏟았던 애정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첫 출판물이 그에게 가져다준 조그마한 행복감 때문에 그러하다. 그는 책이 나오자 곧 친구들과, 자신이 공무로 만나는 높은 신분의 인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인사 치레가 아닌 진짜 찬사의 말을 들었다. 그 작품의 우아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누구보다도 칭찬한 사람은 피렌체군의 지휘관이었던 데르콜레 벤티보리오였다. 그는 1506년 2월 25일 찬사의 말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 소책자가 큰 인기 속에 널리 퍼져나간 것은 어떤 찬사보다도 해적판 덕분이었다. 그것은 첫 판이 간행 된지 대략 20일도 채 되지 않아 시중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베리가 이 해적판의 간행 소식을 들은 것은 카센티노에서의 모병 작업중 2워 28일 포피에 도착해서였다. 그는 즉시 자신의 서기보와 편집자인 베스푸치에게 연락을 취했다. 베스푸치는 전략을 기울인 끝에 경우 안드레아 기를란디 피스토이아란 출판업자르 찾아낼수 있었다. 그는 세르 안토니오 투비니의 동업자였다. 이 두 사람은 베스푸치에게보다는 근 현대의 서지학자들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다. 베스푸치는 이들이 찍은 책 한 부를 확보하고는 마키아벨리에게 (인쇄가 형편없다)고 편지를 썼다. (이건 완전히 사기야, 행간도 없고 종이크기도 너무 작은 데다, 책 앞뒤에 여백 페이지도 없어 활자는 또 어떻고, 온통 잘못투성이네.)
베스푸치는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친구의 명예를 손상시킨 데 대해 분노와 열성이 뒤섞인 상태에서 그 (형편없이 인쇄된 책자)를 흔들어대며, 8인감찰위원회로 달려가 기르란디에 대하여 항의했을 뿐 아니라, 이어서 대주교 대리에게 투비니 사제의 일을 고하였다. 양쪽 다에서 그가 이겼다. 문체의 판본은 원래 판매가 금지되었다. 대주교 교리는 투비니르 심하게 질책하면서, (이 사제에게 벌을 내리고) 그가 행한 (여타의 사행(사행)까지도 후회하도록)만들겠다고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이러저러한 사실들을 베스푸치의 유쾌한 편지에서 읽는 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또한 서지학자들은 이 편지로부터 몇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잘 알려진 바가 없는 이 두 개의 (십년기) 판본에 관해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명의 출판업자에 대한 약간의 정보도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안토니오 투비니 사제가 범한 (여타의 사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여전히 가라않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복수를 한 마키아벨리는 눈으로 뒤덮인 산중의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포피에다 본부를 차려놓은 뒤 카센티노에서 모병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신병에게 지급할 무기가 늦어 도착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무기와 갑옷을 만든는 피렌체의 대장장이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3월 5일 그는 10인위원회에 다 (만약 무기가 제때 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아물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함므로) 빨리 서둘러달라느 편지를 보냈다. 하여튼 이러한 상황이 곤혹스러웠던 그는 큐시 지역에서의 모병 작업을 당분간 포기하였다. 그곳은 넓은 구역이라 (눈이 어지간히 오고 난 후에 가는 것으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눈밭을 뒤고 하고 돌아와 다시 서기국 일에 매달렸다. 이제 3월도 끝나가고 있었고, 지난 10월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화약으로 더 굳건해진 니탈리아의 평화는 그렇게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펠리페 대공(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1506년 카스티야의 왕이 된 미남왕 펠리페 1세를 가리킨다.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이자 페르난도 2세의 사위 - 옮긴이)은 카스티야를 통치하고 페르난도 다라곤과 왕국을 분담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가버렸다. 페르난도 다라곤(가톨릭 와 페르난도 2세를 가리킨다. 그는 1504년 16년에 페르난도 3세로서 나폴리를 통치했다. - 옮긴이)은 나중에 이탈리아로 와서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게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사태 변화에 대한 논의와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더 당면한 전쟁의 위험은 마키아벨리가 (십년기)에서 예견했듯이, 그 경박하고도 변덕스러운 막시밀리안의 존재와,
상처받은 교회를 되살려놓기를
원하는 줄리오 2세의 계획에 있었다. 그는 교황이 도기 전까지는 (언제나 원모(원모)로 가득 차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즉위 후에는 그 꿈이 다소 사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바뀌지 않았다. 단지 힘을 비축하고 자금을 모으면서 (권력을 다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1506년 봄, 서기국에서 작성된 공한들이 주로 다루고 있던 문제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얼마나 예리하게 이 문제들을 논하고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는 6월 중순 당시 피사 공략을 전담하고 있던 조반니 리돌피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속에서 이를 피력하고 있다. 항상 그렇듯이, 군대로써 펜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하는 법이며, 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렇게 될 때까지는 펜이 군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법이다. 모두의 기대대로 먼저 군대를 움직인 쪽은 교황이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졌다. 줄리오 2세는 피렌체인들에게 자신의 목적이 (폭군의 제거)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용병 대장인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의 부대를 벤티볼리오를 치기 위한 그의 작전에 참여시키라고 요구하였다. 공화국으로서는 이 요구가 별로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당장 피사로부터 전력을 빼와야 한다는 것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곤팔로니에레는 교황으 거스르지는 말되 초대한 시간을 끌어보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는 조밤바티스타 리돌피의 지지를 받아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이 임무는 마키아벨리에게 맡겨졌다. 그는 이제 이러한 임시변통성 임무에 익숙해 있었다. 그락 줄리오 2세에게 그 대가로 준 것은 (그의 선하고도 경건한 의도를 칭찬하는) 듣기 좋은 말 한 보따리였다. 마키아벨리는 8월 25일과 26일 사이의 밤에 출발하여, 27일 테리에서 교황 일행과 만났다. 그는 전날 대규모의 추기경, 조신,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에서 그곳으로 오던 길이었따. 마키아벨리는 치비타 z,스텔라나에서 그를 접견하여 멋진 논변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선 찬사와 감축의 말으 놀어놓은 뒤 콜론나의 참전이 어려운 이유를 그 어느때보다도 힘 있게 설명하였다. 그의 열성은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그의 말을 (주의깊게 그러면서도 유쾌한 기분으로)들었다. 그리고는 대답하였다. 자신이 듣기로 피렌체인들은 세 가지 점을 걱정하는 듯이 보이는데, 그것은 첫째 프랑스가 이 작전에 동참하고 있지 않으며, 둘째, 그 스스로가 이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있지 않으며, 셋째, 결국은 벤티볼리오를 쫓아내지 않고 그와 협정을 맺든지 혹 쫓아낸다 해도 그를 다사 복귀시키리라는 것이었다.
피렌치인들이 이 세가지 점을 우려하고 있으며, 군대의 손실보다는 그것을 참전의 더 큰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선 첫째번의 경우, 그들로서는 벤티볼리오를 자신의 후견 하에 둔 프랑스 왕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나머지 두 가지 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지금까지 우호 관계로 잘 지내오던 이웃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사실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을뿐더러, 만일 교황의 무관심이나 관용으로 인하여 벤티볼리오가 뒤에라도 자신의 영토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면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사절에게 이 일에 찬성하고 도와주겠다는 프랑스 왕의 편지를 보여주며, 첫 번째 문제를 안심시켰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그 스스로가 앞장서서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상태가 아니냐면서 그의 열성을 의심치 말라고 하였다. 또 세 번째 문제의 경우에도, 벤티보리오는 일개 (사인)으로서 볼로냐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다른 조치는 생각지 않고 있다면서 염려를 불식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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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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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역발산 기개세 힘과 기개가 세상에서 당할 사람이 없던 초나라 왕 항우, 그는 자기보다 힘이 강하지 못한 유방에게 해하 싸움에서 져서 오구란 곳까지 쫓겨가게 되었다. 강 건너는 자신의 고향인 강동 땅이었다. 향우는 자신의 애첩 우미인을 위해 마지막 연회를 베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불렀다.
힘은 산을 뽑아낼 정도로 세고, 용기는 이 세상을 덮고도 남는데 때는 불리하고 추는 달릴 일이 없구나. 추가 달릴 일이 없으니 너를 어이할거나. 내 사랑 우야 우야 너를 또한 어찌 할거나.
추는 항우가 타던 얼룩빛 명마이다. 항우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작시를 읊조리자. 우미인은 그의 노래에 맞추어 이 세상 마지막 춤을 추었다. 그녀는 항우의 노래가 끝나자 “천한 계집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하고는 항우의 보검으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 항우는 고향에 돌아가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라는 오구 면장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강을 건너서 서정길에 올랐을 때 강동 출신의 귀여운 자제 8천명과 같이 왔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없다. 내가 강동에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모를 볼 수 있겠는가? 하늘이 나를 버리시니 강 건너는 것을 그만 두겠다“ 하였다. 그는 추격해 온 한나라 군대를 향해 쳐들어가 옥쇄 작전을 펴다 큰 부상을 입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다윗과 골리앗
힘이 형편 없이 모자라서 질 게 뻔하다고 생각되던 사람이 상대를 거꾸러 뜨린 경우, 으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견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어권의 나라에서는 이 말이 지금 숙어화되어 ‘서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a David and Goliath situation'을 사용하고 있다. 가드(Gath) 사람 골리앗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거인으로 놋으로 된 투구를 쓰고, 57kg에 달하는 놋 갑옷을 입고,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찼으며, 놋창까지 들고 다녔다. ‘역발산 기개세’의 항우보다 힘이 더 세었던 모양이다. 그와 대항하는 다윗을 보자. 그는 혈색이 좋고 눈에 총기가 흐르며 하프를 잘 연주하던 소년으로, 전쟁이나 싸움을 모르는 양치기 목동이었을 뿐이었다. 이스라엘의 용맹한 장수 여럿이 골리앗에 의해 차례로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골리앗을 처치하겠다고 공언한 후, 그는 시냇가로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개를 골라 담고, 양을 칠 때 사용하는 지팡이와 물매만 기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갔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더니 “녜가 나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느냐?”하고 비웃었다. 골리앗이 다가오자 다윗은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집어 물매에 넣어 골리앗을 향해 날렸다.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꽂혔고 골리앗은 땅에 쓰러졌다. 다윗은 넘어진 골리앗에게 뛰어가서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자만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며 사는 것이 좋다. 항우와 골리앗처럼, 강하다고 해서 항상 싸움에 이기란 법 없고, 머리 좋다고 해서 시험에 항상 1등으로 합격하란 철칙은 없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 언제 불행을 당할지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한다. 우리를 기다리는 운명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빨리 달린다고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며, 강하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r the battle to the strong.)
아들과 딸
전통적인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지금 우리나라의 초·중등학교에서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성비불균형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여자 아이가 없이 남자 아이들만 있는 ‘홀아비 반’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들이 자라서 결혼 적령기에 이르면 사회생태학적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하다. 여자들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짝을 찾지 못한 ‘홀아비’들이 터져나오는 욕구를 해결하려면 홀아비 여럿이 한 여자를 공유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홀아비’를 ‘고아수출’ 하듯이 외국에 수출하거나, 외국에서 ‘신부들’을 수입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일부일처가 아니라 다부일처의 사회가 될까 두렵다. 몽고 어느 지방에서는 형제들이 한 여자를 마누라로 삼는 다부일처제가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적은 것과 모자라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하라‘는 공자의 말씀은 이런 사태를 우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자. 딸 집에 간 부모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아들 집에 간 부모는 버스비도 어렵게 타서 집에 온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서양에서도 아들은 결혼 전까지만 아들 노릇하는 데 비해 딸은 일생동안 딸 노릇을 한다 하여 딸을 더 선호한다. 시드니 교민 사회의 소식에 따르면 장인과 장모를 초청한 집안은 오손도손 잘 사는데 비하여, 시부모를 초청한 집안은 서로 싸워 갈라서는 집안이 약 80% 이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딸’이 아들보다 부모에게 잘해주고 부모 생각을 많이 해주는데 ‘아들 아들’ 타령을 하고, 병아리 성감별하듯 딸이면 낙태 수술을 한다니, 그런 사람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회생태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남녀 차별이 바람직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아들 집에 가면 버스비 타기 힘들지만, 딸 집에 가면 비행기 타고 온다.
(My son is my son till he gets him a wife, but my daughter is my daughter all the days of her life.)
훌륭한 사람 흠집내기
‘햇빛이 더러운 기름더미를 비추어도, 햇빛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리스 철인 디오게네스가 한 말이다. 그는 바르고 정직한 사람은 누구에게 중상모략을 당해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그는 햇빛과 인연이 많은 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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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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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네- 김철민
겨우-내
꽃씨로 숨었다가
'바람 햇살'
눈길 주지 않아도
제멋대로
고개 들고
재채기 한다
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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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산 - 박유석
봄의 산은
투정부리는
아기이다.
펑펑
흰 눈을 날리다가도
주룩주룩
봄비로 눈물 흘린다.
그래도
애틋한 마음으로
꽃을 피워 낸다
새침떼기지만
다정스런
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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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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