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53호 - 2024.9.16. 월요일(음력 : 8.14.)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대화를 잘하는 으뜸가는 비결은 다음 어떤 말이 나올지 아무도 알아 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
|
|
글나눔 → 말글
|
|
|
장염, 간염, 폐렴
장의 점막에 염증이 생기는 병을 ‘장염(腸炎)’이라고 한다. 그런데 ‘장염’의 바른 발음은 [장:염]이 아닌 [장:념]이다. 표준발음법 제29항을 보면 “합성어 및 파생어에서, 앞 단어나 접두사의 끝이 자음이고 뒤 단어나 접미사의 첫음절이 ‘이, 야, 여, 요, 유’인 경우에는, ‘ㄴ’ 음을 첨가하여 [니, 냐, 녀, 뇨, 뉴]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장염’은 ‘장’과 ‘염’의 합성어이며 ‘장’의 끝이 자음이고 ‘염’의 첫음절이 ‘여’이기 때문에 ‘ㄴ’ 음을 첨가해 [장:념]이라고 발음하는 것이다.
그럼 ‘간염(肝炎)’의 경우에도 [간:념]이라고 발음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간염’은 ‘장염’과 동일한 음운 환경이지만 글자 그대로 [가:념]으로 발음한다. 이는 어떤 단어들은 'ㄴ'을 첨가해 발음하지만, 어떤 단어들은 표기대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즉 음의 첨가는 모든 환경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어서 'ㄴ'이 첨가된 경우에는 사전에 그 발음을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백분율(百分率)’의 발음은 [백분뉼]이지만 ‘환율(換率)’의 발음은 [화:뉼]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럼 ‘폐렴(肺炎)’은 왜 ‘폐염’이 아닌 ‘폐렴’으로 표기하는 것일까? ‘炎’의 원래 음은 ‘염’이지만, ‘폐렴’에서는 ‘렴’으로 음이 달라져 쓰이게 됐고, 이런 쓰임이 인정돼 ‘폐렴’과 같이 적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달라진 음을 ‘속음(俗音)’, 원래 음을 ‘본음(本音)’이라고 하는데, 한자어를 ‘본음’이 아닌 ‘속음’으로 표기하는 예에는 유월(六月), 시월(十月), 초파일(初八日), 대로(大怒), 모과(木果), 의논(議論), 의령(宜寧), 허락(許諾) 등이 있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햇것
|
|
시나눔 → 우리시
|
|
|
어두운 밤에 - 천상병
수만년 전부터
전해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
또 하나 다른 태양 - 정지용
온 고을이 받들만 한
장미 한가지가 솟아난다 하기로
그래도 나는 고와 아니하련다.
나는 나의 나이와 별과 바람에도 피로웁다.
이제 태양을 금시 잃어버린다 하기로
그래도 그리 놀라울리 없다.
실상 나는 또하나 다른 태양으로 살었다.
사랑을 위하얀 입맛도 잃는다.
외로운 사슴처럼 벙어리 되어 산길에 슬지라도-
오오, 나의 행복은 나의 성모마리아 !
~~~~~~~~~~~~~~~~~~~~~~~~~~~~~~~~~~~~~~~~~~~~~~~~~
눈 - 김수영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1956>
~~~~~~~~~~~~~~~~~~~~~~~~~~~~~~~~~~~~~~~~~~~~~~~~~
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11~15) - 이해인
11
가을엔 가장 작은 들꽃의 웃음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남 몰래 앓고 있는 내 이웃의 작은 아픔까지도 깊이 이해하며
그를 위한 나의 눈물이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2
15년 전부터 내가 아껴 쓰던 열두 빛깔의 색연필을 깍아 이글을 씁니다.
이 연필들이 나의 손에 길들어져 조금씩 닳아 가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길들어지며 담백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13
가을엔 내가 잠을 자는 시간조차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좀더 참을 걸 그랬지, 유순할 걸 그랬지.'
남을 언짢게 만든 사소한 잘못들도 더 깊이 뉘우치면서 춧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만,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가을밤.
당신 안에 만남을 이룬 이들의 착한 얼굴들을 착한 마음으로 그려 봅니다.
14
가을 길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처럼 내 마음 길에 수없이 한들대는 시심(時心)의 꽃잎들.
'따지 말고 그냥 두면 더한 아름다움일 것을'
- 이러한 생각이 시 쓰는 나를 괴롭힐 때가 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15
가을엔 지는 노을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조심스런 눈빛으로 매일을 살아갑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저 노을처럼 짧게 스쳐 가는 황홀한 순간과,
보다 더 긴 안타까움의 순간들을 남겨 놓고떠납니다.
그러나 오십시오. 아름다운 당신은 오늘도 저 노을처럼 오십시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1장. 지를 기른다
1.'남보다 뛰어나게' 아니라 '남과 다르게'
아인슈타인은 여덟 살 때까지도 저능아
유태인 어머니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교육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영어의 'Jewish Mother(유태인 어머니)'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자녀들에게 배움의 필요성을 지겹도록 강조하는 극성스런 어머니'란 뜻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을 어머니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19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야곱은 유태인의 조상이다. 하나님이 후세에 유태인의 일상생활의 기본이 되는 십계를 가르치라고 모세에게 명령한 이 성경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아주 부드럽게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매우 엄하게 이 말을 되풀이했다는 사실이다. 이 일로 인해서 십계의 구상은 먼저 여성에게 전해졌고, 다음에 남성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랍비(유태교의 율법사)들은 생각했다. '야곱의 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이 감돌게 발음되는데, 이것으로도 짐짓 수긍이 간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먼저 듣게 된 여성은 그것을 가족들에게 전달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 어머니들은 여성이야말로 최초의 교육자이며, 자녀들은 가르치는 의무는 당연히 여성이 지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바로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어머니들과 유태인 어머니들과는 약간의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이웃집 어린이가 피아노 레슨을 받는다거나 일류학교 진학을 지상목표로 삼는다고 해도 유태인 가정에서는 그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한 '남보다 뛰어나라, 남들을 앞질러라' 하고 어린이들을 달달 들볶지도 않는다. 일류학교이든 이류학교이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대학은 어느 대학에 가야만 된다는 식의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엄마들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여덟 살 때까지 저능아였다'는 사실을 유태인 어머니들은 잘 알고 있었다. 유태인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세계적인 물리학자이다. 그러나 네 살이 되도록 말을 못하자,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그를 '저능아'라고 체념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머리 회전이 늦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아서, 1학년 때 담임선생은 '이 아이에게서는 어떤 지적 열매도 기대할 수 없다.'는 신상기록을 남겼다. 또한 그가 학교에 계속해서 다닐 경우, 다른 학생에게 방해가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리만큼 아인슈타인은 저능아였다.
다른 아이와 다른 점, 즉 개성을 중요시한다.
내 여동생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늘 '너는 츠바이슈타인이야!'라는 칭찬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아인'은 독일어로 'l'을 의미하고 츠바이는 '2'를 의미한다. 즉'아인슈타인 다음으로 머리가 좋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의미의 농담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들먹인 진짜 이유는, 커 가는 어린이에게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각자 타고난 개성에 따라 긴 안목으로 지켜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이다. 이것이 바로 유태적인 교육을 하는 어머니들의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다른 집 아이들과 똑같이 뛰어 놀고 함께 공부하면 행동하는 스테레오 타입(고정적인 틀)에 속해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어린이와는 어딘지 다른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성장하는 것이 좋은 장래를 약속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열을 다투는 경우 승자는 언제나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저마다 남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모든 인간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아인슈타인은 담임 선생으로부터 저능아 취급을 받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 다섯 살 때까지 유클리드, 뉴튼, 스피노자, 그리고 데카르트를 독파했다. 후일 그는 '나는 강한 지식욕을 품고 있었다'고 지난 일의 일들을 술회했으리만큼 속마음이 꽉 차 있었지만, 그 당시 그의 심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가 다른 어린이들과 똑같이 되기를 강요했더라면 그의 재능을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열세 살 난 딸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어학에 특히 재능이 있어서 모국어인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영어, 불어, 일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늘 '너는 어학에 재능이 있으니 통역관이 된다면 아주 좋겠구나'하고 부추켜준다. 대신 '너는 어학을 잘하니까 수학도 잘한다면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없겠지'라는 식으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유태인 어머니들은 예외 없이, 다른 집 어린이와는 무엇인가 다른 자기 자녀만의 특성을 찾아서 그것을 신장시켜 주는데 전력투구한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히브리'라는 말의 원래 뜻은 '혼자서 다른 쪽에 선다'이다. 자기만의 개성을 충분히 키워준다는 것은 유태인의 생활방법 전반에 걸친 원칙인 셈이다.
2.'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성적인 어린이는 잘 배우지 못한다
동양의 어머니들은 대개 '댁의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얌전하고 착한 가요?'라는 말로 칭찬하기 일쑤인데, 유태인들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집 아이들이 만약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나는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얌전하다, 착하다.'라는 말은 '진취성이 없어 공부를 잘할 수 없다'라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속담에 '내성적인 어린이는 잘 배우지도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성적인 아이는 공부를 잘 못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수줍음을 잘 타서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성격이라면 참다운 학문을 깊이 터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는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닥치는 대로 질문하도록 길들여져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러시아 문제 연구가이고, 러시아혁명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진 폴란드 태생의 아이자크 도이처는 불과 열세 살에 랍비가 될 만큼 천재소년이었다. 그가 부모로부터 지겹도록 들어왔던 충고는,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고 할말이 정해졌다면 똑바로 서서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랍비'의 자격을 얻기 위하여, 겨우 열세 살의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거리의 많은 군중 앞에서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대 연설을 했다. 청중은 어린 소년의 말이지만 완전히 매혹되어 감동 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조리 있는 연설을 들은 약 1백여명의 랍비들이 논의한 결과 그는 랍비에 임명될 수 있었다. 유태인 사회에서 제일 존경받는 대상인 랍비가 되려면, 내성적이거나 얌전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덕이자 절대적인 조건이다. 내가 동양사람과 이야기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대화 도중에 곧바로 침묵이 찾아오는 일이다. 사실 나는 유태인으로서는 그다지 수다쟁이가 아닌데도 나 혼자만 계속 지껄이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나는 말에 의해서 배우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침묵이란 배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에 대한 욕구의 결여라고 생각한다. 매사를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남에게 '나는 진정 배우고 싶다'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듣기만 한다면 앵무새가 될 뿐이다
나는 언젠가 어느 동양인 엄마에게 '당신은 자녀가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무슨 말을 해서 보냈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돼요,라고 했지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교실에서 하나같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을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정말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수업방식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그냥 일방통행 식으로 듣게 할뿐이고, 선생님의 말이라면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고 무조건 따르다 보면 독창성이 없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태인의 교육은 다르다. 유태인 엄마들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의심나는 것은 주저하지 말고 물어봐야 돼요'라고 일러서 보낸다. 어린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암기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고 학생들은 그것을 풀면서, 의심나거나 모르는 점은 끝까지 질문하도록 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것이다. 유태인의 성전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말이 있다.
교사는 혼자만 알고 떠들어대서는 안 된다. 만약에 학생이 잠자코 듣기만 한다면 많은 앵무새를 길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가 이야기하면 학생은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건 교사와 학생 사이에 주고받는 말이 많이 오가게 된다면, 교육효과는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다. 내가 알고 있는 랍비 중 한 사람인 마빈 토케이어 씨는 <일본인과 유태인>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유태 붐을 타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어, 일본의 여러 지방에서 초청을 방아 강연을 하러 다녔다. 그런데 그는 그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열띤 강연을 끝내면 청중들은 박수만 쳤지, 누구 한 사람 강연한 내용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침묵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태인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유태인의 모임이라면 이런 초청강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연자가 쩔쩔맬 정도의 질문이 사정없이 날아드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연 내용을 되풀이 질문함으로써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끈질긴 탐구욕인 만큼,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학습법이 아닐까?
<탈무드>가 가르치는 두 가지 학습법
<탈무드>에 유태인의 탐구욕에 대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나그네가 있었다. 두 사람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길을 걷다가 외딴집을 찾아냈다. 그 집안은 텅텅 비어 있었는데, 다행히 높은 천정에 과일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그러자 한 사나이가 벌컥 화를 내면서 집에서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남은 한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꼼짝하기 싫을 만큼 허기진 상태였지만 그는 그 바구니를 보고 '이는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힘을 내어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사다리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사다리로 올라가서 과일이 든 바구니를 내려 맛있게 먹었다. 유태인이라면 언제나 후자의 방법을 모범으로 삼는다. 뭔가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의 눈앞에 있는 물건에 가만히 손만 내밀 뿐 그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짓은 절대로 사절한다. 말하자면 유태인의 어린이들은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과일을 손에 넣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경우, 사다리를 찾아 한 칸씩 타고 올라가 기어코 과일을 손에 넣듯이, 한 가지씩 질문을 하면서 문제를 풀어 가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배움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유태인이 많은 것을 발명하고 항상 지적인 개척자의 지위를 지켜온 비결은, 오랜 옛날부터 이런 방법으로 교육받아 왔고 도전적인 질문을 그치지 않는 자세를 몸에 익혀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지의 체계화를 서서히 이룩하고, 그것이 곧 위대한 업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이 많은 것을 발명하고 항상 지적인 개척자의 지위를 지켜온 비결은, 옛날부터 도전적인 질문을 그치지 않는 자세를 몸에 익혀왔기 때문이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흑해에서 홍해로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에 대한 다키아왕의 공작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파르티아와 맞닿아 있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주요 임무가운데 하나는 파르티아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첩자를 잠입시키는 따위의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동양에서 파르티아를 거쳐 들어오는 물산의 최대 고객이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교역상들이 전하는 정보를 모아서 분석하는 작업만 게을리하지 않으면 상황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국경은 어디서나 닫힌 국경이 아니라 열린 국경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파르티아와 접한 국경은 다른 어느 국경보다도 열려있었다. 파르티아에 대한 다키아왕의 공작이 실패로 끝난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그리고 그 사실을 역이용하려고 생각했는지, 이 시기에 트라야누스는 아라비아 합병에 착수한다. 로마인들이 아라비아라고 부른 지방은 후세의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다. 향료와 몰약과 진주의 산지로 이름난 풍요로운 아라비아 반도 남부 지방을 로마인들은 '아라비아 펠릭스' (축복 받은 아라비아)라고 불렀지만, 수식어 없이 그냥 아라비아라고 부르면 오늘날의 요르단을 가리켰다. 트라야누스의 지령을 받은 시리아 속주 총독 코르넬리우스 파르마는 휘하의 1개 군단만 거느리고 이 지방을 합병한다. 나바테아 왕국은 이미 과거의 위세를 잃어버려서, 파르마는 구태여 전쟁에 호소할 필요도 없이 합병에 성공했다. 1개 군단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파르티아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르단 합병으로 로마 제국은 흑해에서 홍해까지 이르는 방위선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방위선은 흑해에서 시작하여 아르메니아 왕국과의 국경을 계속 남하하면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나아가다가, 유프라테스 강이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지점에서 강을 떠나 그대로 계속 남하하여 팔미라와 다마스쿠스, 보스트라(오늘날의 부스라), 필라델퍼아(오늘날 요르단의 수도 암만), 그리고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던 페트라 근처를 지나 홍해에 면해 있는 아카바에 이른다. 로마 제국에 속주로 합병된 지방에서 로마인이 맨 먼저 하는 일은 고대의 고속도로인 로마식 가도를 뚫는 일이다. '아라비아 나바테아속주'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된 현재의 요르단 지방에도 간선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에서 부스라와 암만을 거쳐 아카바에 이르는 가도가 된다. 요르단을 종단하는 이 가도는 현대에 발굴된 표석에 따르면 서기 114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아라비아 속주의 도읍은 암만이 아니라 부스라로 결정되었다. 전선에 더 가깝다는 게 이유였다. 부스라에는 제3군단이 상주하게 되었다. 훗날 아과바를 공격한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건너야 했지만, 로마 시대였다면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는 것은 마찬가지라 해도 아카바까지 잘 포장된 가도를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요르단 정부는 암만에서 아과바까지 고속도로를 놓았다고 한다.
고대와 현대의 타임 터널을 오락가락하는 느낌으로 이야기가 계속 탈선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로마사를 공부하면서 사회간접자본 정비의 중요성과 그로써 인적 교류가 쉬워진 것을 강하게 느끼고, 그 느낌을 독자들과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는 가능했던 일이 왜 그 후 오랫동안 불가능했는가.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중 한 사람이 조사한 결과를 소개하고 싶다 로마 제국의 한쪽 끝인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하여 반대쪽 끝인 예루살렘까지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시뮬레이션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바닷길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과거의 로마 가도만 이용한다. 로마 가도에는 1로마마일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으니까, 그것을 존중하여 로마마일로 표시된다. 1로마마일은 1.478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에 세워진 성벽 근처의 글래스고에서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지나 군단기지가 있었던
요크까지-222로마마일.
73에서 런던까지-227.
런던에서 도버까지-67.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의 불로뉴까지-45(바닷길) .
불로뉴에서 아미앵을 지나 랭스까지-174.
랭스에서 리옹까지-330.
리옹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의 밀라노까지-324.
밀라노에서 로마까지(아이밀리아 가도와 플라미니아 가도를 이용)-426.
로마에서 아피아 가도를 지나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 브린디시까지-360.
브린디시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 오늘날 알바니아의 두러스까지- 40(바닷길).
두러스에서 비잔티움(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까지-711.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283
앙카라에서 로마 가도를 따라 지중해 연안의 타르수스까지-301
타르수스에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오늘날 터키의 안타키아)까지-141.
안티오키아에서 레바논의 티루스(오늘날의 티레)까지-252.
티루스에서 예루살렘까지-168.
합계하면 4,071로마마일이 된다. '여권'을 제시할 필요도 없는 6천 킬로미터의 여행이었다. 다키아왕 데케발루스도 이 로마 문명권에 편입되는 운명을 감수했다면 제2차 다키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긍지 높은 다키아족은 거기에 맞서는 쪽을 택했다. 또한 왕의 품에는 황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다키아지방은 금과 은이 나는 광산이 풍부했다. 게다가 전제국가에서는 권력만이 아니라 국부도 군주에게 집중된다. 로마 제국과 동방 군주국의 차이는, 로마 제국이 상비군을 두고 군사력유지에 힘쓰는 반면 동방 군주국은 필요할 때만 돈으로 용병을 긁어모은다는 점이었다.
제2차 다키아 전쟁
서기 105년 봄, 강화를 파기하고 공세를 취한 것은 다키아 쪽이었다. 다키아는 수적 우세를 믿고, 다키아 영토 안에 있는 로마군 숙영지와 가도를 건설하고 있는 제7군단, 그리고 도나우강 하류의 로마영토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6월 4일, 트라야누스 황제는 수도 로마를 떠난다. 다키아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에 대한 서술도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새겨진 장면을 추적하는 형태로 진행하고자 한다.
(46)'원기둥'에 새겨진 제2차 다키아 전쟁의 서술은 이탈리아 중부의 항구도시 안코나에서 트라야누스가 배를 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곳이 안코나라는 것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비너스 신전과 항구 근처에 세워진 개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개선문은 제1차 다키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국한 트라야누스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다.
(47)수많은 군선에 나누어 타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는 로마군 노를 젓는 것은 갑옷을 벗? 발치에 내려놓고 투니카만 걸친 병사들이다. 그중 한 척의 고물에서는 붉은 망토를 걸친 트라야누스가 큰 소리로 노젓는 박자를 맞추고 있다. 파도 사이에 돌고래 떼가 묘사되어 있는 것은 함대가 난바다를 항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8)아드리아 해를 건너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해안에 상륙한 트라야누스와 병사들. 마중 나온 주민들이 모두 로마식 토가 차림이고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은 달마티아속주의 도읍인 살로나나 그 바로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스플리트로 여겨진다
(49)투니카에 망토를 걸친 가벼운 차림의 트라야누스가 말을 타고 내륙으로 향한다 그 일행을 길가에서 배웅하는 시민들. 아녀자들의 모습도 섞여 있다
(50)덩굴과 꽃을 엮은 목걸이로 장식한 소를 몇 마리나 제물로 바치는 제사 장면. 전선으로 달려가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일 텐데, 신들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일은 로마인에게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병사들도 시민들도 모두 의식에 참여한다.
(51)강을 건너고 있는 것일까. 배와 돌다리를 이용하여 진군하는 병사들.
(52)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에 입성한 황제와 병사들. 또다시 소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거행하는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의 상륙 지점이 스플리트라면, '원기둥'에 묘사된 이들 도시는 오늘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도시들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본국 이탈리아와 가깝다고는 하지만, 로마 시대에 이 발칸 반도일대의 높은 문명도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53)하지만 도나우강 전선이 다가올수록 원경에 묘사되는 건물도 석조 요새가 많아진다. 그것을 옆으로보면서 질주하는 로마기병대. 선두를 달리는 트라야누스 황제를 인근 주민들이 모두 나와서 맞이한다. 옷차림이나 머리 길이로 보아, 아녀자들도 섞여 있는 그들이 다키아족임을 알 수 있다 로마 제국은 국경 바깥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도 평화롭게 일상의 노동에 종사하기만 하면 로마 영토 안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했다
(54)그러나 로마식 복장을 한 주민도 많다. 다민족 국가인 로마 제국 의 주민 구성은 전선 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둘러싸여 제단에 포도주를 부으며 신들에게 로마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트라야누스. 이런 일만 하고 있어도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바야흐로 전쟁터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에 신들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것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55)장면이 바뀌자마자, 방패를 옆에 내려놓고 투니카 차림으로 나서서 나무를 베어 숲속에 길을 내는 병사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매번 통감하는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 군대는 다소 불편해도 기존 도로를 이용하는 반면, 로마군은 편리한 길을 만들면서 진군하는 차이점이 있다.
(56)장면이 완전히 바뀌어, 도나우강 남쪽의 로마군 기지를 공격하는 다키아 병사들이 묘사된다. 다키아 병사는 지위가 높아도 저고리와 바지만 입을 뿐 흉갑도 대지 않는다. 몸을 지키는 것은 대형 방패뿐이다. 공격하는 다키아군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수염을 기르고 모자도 쓴 다키아의 유력자다. 로마와 싸우자는 데케발루스 왕의 호소에 다키아족 전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것을 알 수 있다.
(57)하지만 수비하는 로마 병사들도 지고 있지는 않았다. 로마 제국의 어느 방위선보다도 긴장을 강요당한 것이 도나우강 방위선의 병사들이다. 기후나 지형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가혹한 환경이 평범한 병사들을 정예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구름처럼 몰려오는 다키아군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응전한다.
(58)그러나 전투는 기지의 방벽을 사이에 두고 치러진 것이 아니라, 로마군이 기지 밖으로 나가서 다키아군을 맞아 싸운 모양이다. '원기둥'에는 몇 장면에 걸쳐 치열한 백병전이 묘사된다. 그 형상은 당시의 박진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만큼 걸작이다.
(59)전황은 조금씩 로마 쪽에 유리하게 전개된다. 그것은 장면이 진행될수록 땅에 쓰러진 다키아 병사가 늘어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역시 로마의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트라야누스가 이끌고 온 기병대의 도착이었다. 다키아 쪽은 많은 시체를 내버려둔 채 도나우강 이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절은 여기서 가을로 접어든다. 로마군이 도나우강을 건너반격에 나서는 것은 이듬해 봄까지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유럽의 겨울은 혹독하다. 이듬해 봄의 반격을 앞두고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줄 필요가 있었다. 다키아왕 데케발루스는 로마 제국을 궤멸시킬 작정으로 로마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처럼 다키아 쪽에 유리한 강화를 맺고, 그럼으로써 도나우강 이북에 일대 왕국을 세우는 것이 그의 야망이었다. 따라서 그는 도대체 본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공격과 강화 제의를 되풀이한다. 하지만 데케발루스는 오판을 저질렀다. 로마인은 상대편에게만 유리한, 즉 자기편에는 불리한 협약을 계속 감수할 민족이 아니었다.
로마군이 가도를 건설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공사 현장이 도나우강 남쪽의 로마 영토였는지 북쪽의 다키아 영토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다키아군은 가도 공사를 하고 있던 제7군단을 습격했는데, 다키아와 강화를 맺은 뒤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찌른 게 주효하여 군단장과 열 명 안팎의 로마 병사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다키아왕은 이 '카드'를 이용해서 유리한 조건으로 로마 황제와 강화를 맺기로 마음먹었다. 포로로 잡힌 군단장은 롱기누스. 도나우강 연안의 코스트라크 기지에 주둔하는 제7군단을 오랫동안 지휘했고, 제1차 다키아 전쟁 때도 트라야누스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은 활약을 보인 무장이다. 게다가 수도 로마의 명문 출신이고, 조상 대대로 원로원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런 인물을 모른 체하면 원로원의 반감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 속주 출신인 트라야누스가 그런 위험을 무릅쓸 리는 없다고 다키아왕은 생각했을 것이다. 롱기누스는 포로가 되었지만 쇠사슬에 묶이지도 않았고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다. 다키아군의 요새만 벗어나지 않으면 그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데케발루스는 그에게 민중과 어울리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시중을 들어주는 해방노예까지 거느리고 자유롭게 산책할 수도 있을만큼 롱기누스가 너그러운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트라야누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편 다키아왕은 로마 군단장을 불러 로마 황제의 군사작전에 대해 캐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롱기누스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아서, 모른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도나우강 하루의 로마군 기지에 대한 공격도 실패로 끝나고, 데케발루스가 아니더라도 이듬해 봄에 로마군이 반격해올 것은 뻔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 겨울, 다키아왕은 드디어 자기가 갖고 있는 카드를 써먹기로 결심했다. 다키아 쪽이 요구한 강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도나우강에서 흑해에 이르는 도나우강 이북 전역을 다키아 영토로 삼는 것을 인정할 것.
둘째, 로마와 싸우는 데 사용한 전쟁 비용을 변상해줄 것.
이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면 롱기누스와 열 명의 포로를 송환하겠다. 그리고 이 조건으로 강화를 맺도록 트라야누스를 설득하는 역할은 롱기누스가 맡는다. 왕으로부터 이런 조건을 통고받은 롱기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야누스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승낙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하인인 해방노예를 시켜 독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행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독약을 구할 수 있었다. 롱기누스가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데케발루스는 라틴어를 알고 있었다니까, 그가 모르는 그리스어로 편지를 썼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편지를 트라야누스에게 가져가는 역할은 자기 하인이 맡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트라야누스도 하인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게 롱기누스가 내세운 구실이었다. 그리고 편지를 휴대한 해방노예가 안전지대에 이르렀을 무렵, 로마 군단장은 독약을 마셨다. '카드'를 잃어버린 다키아왕은 격분했지만, 그래도 로마 황제한테 양보를 받아내는 것을 단념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데케발루스가 직접 트라야누스에게 편지를 쓴다 모든 것을 알면서 그런 행동을 한 괘씸한 해방노예를 넘겨주면, 롱기누스의 유해와 열 명의 포로를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트라야누스에게 가져가는 역할은 열 명의 포로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백인대장이 맡았다. 트라야누스는 강화 제의도 무시했고, 포로 교환 제의도 무시했다. 해방노예도 백인대장도 그대로 로마 진영에 머물렀다. 로마 군단의 척추라고 일컬어지는 백인대장은 어엿한 로마 시민권 소유자다. 하지만 해방노예는 로마 시민이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방노예한테도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지만, 자식이 있고 3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전선에는 혼자 부임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사령관 밑에서 오랫동안 하인으로 일한 사람이 유부남이었을 리는 없다. 주인의 온정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긴 했지만, 로마 시민권까지는 갖지 않은 '해방노예' (리베르투스)가 아니었을까. 로마 시민도 아닌 해방노예를 다키아왕의 요구대로 넘겨주면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출신인 원로원 의원의 유해가 돌아온다. 그리스 사람이지만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속주 총독까지 지낸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이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트라야누스는 롱기누스에게 무덤을 주는 것보다 로마 제국의 존엄을 지키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원기둥'에는 이 에피소드는 새겨져 있지 않다. 제2차 다키아 전쟁을 서술한 부조에는 지난해 여름 도나우강 하류에서 다키아군을 격퇴한 장면에 이어, 이듬해인 서기 106년 봄에 시작된 로마군의 반격이 묘사되어 있다. 트라야누스가52세 때였다.
(60) '트라야누스 다리'의 기점이 된 폰테스에 집결한 로마 군단. 주전력인 군단병은 언제라도 전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완전무장을 하고있다. 그들에게 둘러싸인 트라야누스는 제단에 술만 바치는 약식 제사를 거행한다. 그 배경을 웅장한 '트라야누스 다리'가 메우고 있다
(61)다리 건너편의 드로베타에서는 인근의 부족장들이 황제 일행을 마중한다. 다키아왕의 위세가 높았을 때는 다키아 쪽에 붙어야 할지 로마 쪽에 붙어야 할지 망설이던 사람들이지만, 이번만은 그들의 눈에도 로마의 결연한 의지가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62)줄지어 다리를 건너는 로마 군단병의 행렬 그리고 군기의 행렬. 각 부대의 선두에 선 백인대장들 기병대의 선두에 선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다. 원경에는 로마 병사들이 지은 요새가 보인다. 여기까지는 로마군이 제1차 전쟁 때와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3)제1차 전쟁이 끝난 뒤 다키아에 남겨두고 왔고, 그래서 지난해다키아군의 공격을 받은 부대와 황제의 재회. 하지만 이 병사들도 황제를 따라온 병사들도 하나같이 원기 왕성하다하다 질서정연하게 행군한다. 트라야누스의 결의를 병사들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볼을 부풀리며 피리와 나팔을 부는 군악대가 이 병사들의 진군을 격려한다.
(64)높은 연단 위에서 참모들을 거느리고 연설하는 트라야누스.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병사들의 진지한 표정. 연설하는 황제 뒤에 서 있는 참모들 가운데 한 사람은 트라야누스의 후임 황제인 당시 30세의 하드리아누스라고 한다.
(65)석조 방벽을 둘러친 견고한 요새 안에서 황제를 둘러싸고 작전회의가 열린다. 로마군의 작전회의에는 참모나 군단장만이 아니라 속주민으로 편성된 보조부대 지휘관도 참석하고, 하사관인 백인대장 중에서도 상급자는 참석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야전 지휘관의 의견이 '참모본부'에 소속된 고급 장교의 의견보다 중시되었다.
(66)언제라도 전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투구까지 쓰고 진군하는 병사들. 그 저편에서는 말고삐를 쥔 병사들이 군량을 가득 실은 짐마차를 같은 방향으로 몰고 간다.
(67)여기서부터 부대는 둘로 나뉘어 다른 길로 행군한다. 트라야누스가 포위 섬멸 작전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것을 보여준다.
(68)군량을 요새 안으로 옮기는 병사들. 그 앞을 진군하는 갑옷 차림의 군단병, 가죽 흉갑을 댄 보조병, 반나체 차림의 게르만 병사,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옷을 입고 화살 통을 등에 멘 오리엔트 궁사들. 로마군이 다민족 혼합체였음을 보여준다. 로마 군대는 로마 제국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69)무장을 한 채 낫을 들고 열심히 보리를 수확하는 군단병. 서기 106년도 어느덧 여름철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장면은 다른 사항을 짐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보통은 공격당한 쪽이 군량을 비축하기 위해서나 적에게 식량을 77W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질러 수확을 끝내버리는 법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수도 사르미제게투사까지 이르는 다키아 땅이 모두 로마 병사로 메워져 있었기 때문일까. 연구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제2차 다키아 전쟁에 제1차 때보다 많은 13개 군단을 투입했다고 한다. 보조전력을 합하면 15만 명을 웃도는 대군이다.
(70)선발대인 보조부대와 다키아군의 첫 번째 접촉 다음 장면에서는 로마군의 접근을 알고 성채 안팎에서 격렬한 동요를 보이는 다키아 병사들이 묘사된다.
(71)다키아 성채 앞에서 벌어진 로마 병사와 다키아 병사의 격돌. 다키아 진영도 용감하게 싸우지만, 시체를 밟으며 싸운 백병전은 로마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72)로마군의 '그물'은 착실히 당겨지고 있었다.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지키기 위해 그 주위에 건설된 견고한 성채 하나를 둘러싼 공방전이 묘사된다. 맹렬히 공격하는 로마 병사, 성벽 위에서 돌덩어리를 던지며 방어하는 다키아 병사 성벽 밑에는 로마 병사의 화살에 맞아떨어진 다키아 병사의 시체, 이와 같은 공방전은 다른 요새에서도 전개되었을 것이다.
(73)공방전 사이에 참모를 거느리고 전쟁터를 시찰하는 트라야누스. 그 너머에 다키아의 성벽이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다키아-족의 성벽은 짓는 법이 로마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식은 직육면체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반면, 자갈을 채워넣고 그 위를 널빤지나 석판으로 누르고 그 위에 다시 자갈을 채워넣는 식으로 몇 단씩 쌓아올리는 것이 다키아씩 축성법이다. 요소마다 탑을 세우는 점은 양쪽이 마찬가지지만, 그 제조법이 다르다. 다키아식은 도시를 둘러싸는 성벽에는 적당한 방법이었겠지만 대규모 건조물에는 부적당하고, 다리를 그런 식으로 놓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길게 이어져 있는 높은 성벽을 그대로 놓아두고는 성을 공략 할 수 없다. 밑에서 공격하기보다는 위에서 방어하는 쪽이 단연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포는 존재하지 않는 시대였다. 공성전을 벌일 수밖에 없을 때 로마군이 채택한 전법은 세 가지였다.
(1) 성벽 아래까지 갱도를 파고, 목재로 둘러싼 그 부분에 가연물질을 쌓아놓고 불을 지른다 목재가 타올라 생긴 공간으로 그 위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기를 기다린다.
(2) 성벽 높이까지 목재를 쌓아올려 보루를 만들거나 성벽과 같은 높이의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 올라서 공격한다. 공격자와 수비자의 높이가 같아지기 때문에 밑에서 공격하는 불리함이 사라진다.
(3)지름이 30센티미터나 되는 돌멩이를 포탄처럼 쏠 수 있는 공성기로 성벽을 파괴하는 한편,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거북등 진형으로 몸을 지키면서 성벽에 접근한 병사들이 파괴된 곳으로 쳐들어간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족의 성채에 대해 (1)도 (2)도 사용할 필요가 없고, (3)의 방법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다음 장면에는 집결한 병사들 뒤로 운반되는 공성기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74)하지만 다키아 진영도 가만히 앉아서 함락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성밖으로 몰려나와 싸움을 건다. 앞장서서 로마군 진영으로 쳐들어오는 다키아 장수에게 로마 병사들도 잠시나마 기가 죽은 것 같다.
(75)성벽 밖에서 벌어진 백병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마군은 마침내 성벽 안으로 쳐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쳐들어가는 군단병과 원호사격이라도 하듯 적에게 덤벼드는 보조병들.
(76)마침내 성채가 함락되었다. 참모들을 거느리고 입성한 트라야누스 앞에 무릎을 꿇은 다키아족 유력자들. 이런 광경은 수도 방위를 위해 세워진 그 밖의 많은 성채에서도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공격의 고리는 계속 좁혀졌다
(77)그리고 마침내 수도 사르미제게투사가 로마군의 시야에 들어온다. 이 도시의 성벽만은 석재를 쌓아올린 로마식 축성법으로 지어져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왠지 성벽을 사이에 둔 공방전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시내 곳곳에 불을 지르는 다키아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함락은 이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수도를 고스란히 넘겨주기는 싫었던 게 분명하다.
(78)불타오르는 시내에서 절망에 빠진 다키아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이 묘사된다. 두 팔을 벌리고 자신들에게 닥친 운명을 저주하는 사람머리를 감싸안고 땅바닥에 엎드린 사람. 침착하게 독약을 마시는 사람. 이미 독이 몸에 퍼져 쓰러진 동료를 안아 일으키려는 사람. 집단자결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그 광경을 치밀하게 묘사해낸 솜씨는 부조의 걸작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
(79)집단자결 장면이 계속된다. 이번에는 차림새도 체격도 당당한 장수인 듯한 사람이 독약이 든 항아리를 옆에 놓고 서 있다. 그를 항해 손을 내밀면서 독약을 달라고 애원하는 병사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수 독배를 건네주는 장수. 이 장수의 배후에는 벌써 독약을 마셨는지 벌렁 쓰러진 젊은 병사가 보인다. 이 병사의 유해를 두 팔로 안고 있는 것은 아버지일까.
(80)그러나 도주를 택한 다키아인도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이 데케발루스 왕이다. 그것은 패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혼란스러운 도주였고,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짜서 추격에 나서는 로마군의 여유와는 대조적이다.
(81)적의 수도가 함락된 뒤, 트라야누스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다키아인들. 로마 병사들은 적이 버리고 달아난 시내에서 전리품을 실어낸다
(82)다음 장면에는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트라야누스에게 대대장한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 경례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병사들이 트라야누스에게 '임페라토르!'(승리자)라는 칭호를 바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로마 병사들은 이 단계에서 이미 제2차 다키아 전쟁의 승리가 결정되었다고 확신한 것이다.
(83)승리가 확정되었어도 로마군은 여전히 로마군이다. 군단병들은 또다시 석재를 짊어지고, 이제 전략 요충이 된 지점에 요새를 짓는다. 나무를 베어 숲속에 길을 내는 공사도 계속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좁은 강에도 급조한 다리를 놓으면서 패잔병을 추격하는 일도 계속되고 있었다. 적은 계속 북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84)그렇다고 해서 다키아 병사들이 도망만 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야음을 틈타 로마군 숙영지를 습격하는 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을 맞아 싸우는 로마 병사들. 다키아 병사가 용맹하다는 평판은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 광경을 숲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데케발루스.
(85)그러나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섰는데도 다키아 쪽의 전황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북쪽으로의 도주는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배후를 걱정하면서 도망치는 다키아 병사들.
(86)추격을 계속하면서도 병사들에 대한 격려를 잊지 않는 트라야누스.
(87)장면이 바뀌고, 강물 속에 숨겨져 있던 다키아왕의 보물이 인양되어, 로마로 가져가기 위해 말에 싣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88)숲속에 아군 병사들을 집결시킨 데케발루스가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격려 연설을 하고 있다.
(89)하지만 다키아 병사들은 이제 왕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사람. 스스로 가슴을 찔러 자살을 꾀하는 사람. 죽여 달라고 동료 앞에 목을 내미는 사람. 그 부탁을 받고 칼을 쳐드는 사람. 그리고 트라야누스의 진영에서는 투항한 다키아 장로들이 복종을 맹세하면서 목숨을 구걸한다. 다키아 왕국은 무너졌다.
(90)이어지는 것은 데케발루스 왕이 주위에 남은 소수의 기병만 거느리고 계속 도망치는 장면이다. 그 뒤를 쫓는 로마 기병대. 추격 상황은 몇 장면에 걸쳐 묘사된다 장면이 진행될수록 창에 찔려 낙마하는 다키아 기병의 수가 늘어난다
(91)데케발루스를 따라잡아 사방팔방에서 다가가는 로마 기병대. 말을 버린 다키아왕은 나무 아래 무릎을 꿇고 단검을 제 가슴에 들이댄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로마 병사들. 무사의 인정이었을까. 하지만 그 직후에 왕은 목이 잘려버렸다
(92)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포로들과 젊은 여자가 끌려가는 장면. 젊은 여자는 왕의 딸일까. 몸차림이 단정하다
(93)장교 두 사람이 받쳐든 커다란 은쟁반에 놓인 다키아왕 데케발루스의 목이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다. 로마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왕국을 세우겠다는 데케발루스의 꿈은20년도 지탱하지 못했다.
(94)패잔병을 사냥하는 로마군. 다키아 쪽에 붙어 로마와 싸운 주변의 소부족들에 대해서도 용서가 없었다.
(95)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끌려가는 포로들. 원경에 묘사된 산들로 보아, 소탕작전은 다키아 북부의 산악지대에까지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96)방화로 불타오르는 마을과 도시들.
(97)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다키아인들. 죽지도 않고 포로가 되지도 않았지만, 이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사는 것을 금지 당했다. 난민이 되어 고향을 떠나는 노인과 아녀자들의 긴 행렬. 이들에게 끌려가는 소와 돼지, 양, 염소 무리‥‥‥ 서기 106년 여름, 다키아 전쟁은 끝났다.
53세의 승리자 트라야누스의 개선은 수도 로마를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다키아 왕국의 멸망은 지난 몇 해 동안 만만찮은 세력으로 성장한 적의 소멸을 의미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굴욕적인 강화도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5만 명에 이르는 포로와 엄청난 양의 왕실 보물은 로마인들에게 오랜만에 승리의 쾌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는다고 공포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금지한 이후 로마 제국은 침공보다 방위를 주목적으로 삼았지만, 새로 속주에 편입된 나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정으로 바뀐 뒤에 속주가 된 나라로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갈라티아, 카파도키아, 콤마게네, 팔레스타인의 유대, 북아프리카의 마우리타니아, 그리고 브리타니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반란 진압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은 유대와 브리타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모두 군주 자신이 나라를 로마에 양도하거나 하여 평화적으로 속주가 된 나라들이다. 또한 이런 왕국들은 로마의 동맹국이라는 이름의 실질적인 속국이었기 때문에, 본디부터 로마의 패권 아래 놓여 있었다. 따라서 속주가 되었다 해도로마로서는 별로 새로운 맛을 느끼지 못했다. 브리타니아를 속주화한 것만은 군사력으로 정복한 결과지만, 정복에 40년이나 걸렸고 제국의 북단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겨우 속주로 삼았을 때도 여태껏 거기서 전쟁을 하고 있었나 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정복은 제1차와 제2차 전쟁을 합해도 실제 전투기간은 2년에 불과하다. 로마인들이 받은 인상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가 안겨준 인상과 상당히 비슷했다. 카이사르는 8년 동안에 걸쳐 트라야누스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오늘날의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남부, 독일 서부와 스위스를 아우르는 '갈리아'를 정복해버렸다. 다키아 정복은 오랜만에 로마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할 수 있는 승리였고 속주화였다.
사실 다키아를 합병한 트라야누스 시대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어진 시대다. 그래서 공화정 말기에 로마 영토를 크게 넓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를 흉내내어 트라야누스도 <다키아 전쟁기>를 썼을 것이다/ 황제에 즉위했을 당시에는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임을 의식해서인지매사에 겸손하고 수수하게 처신했던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에 승리한 뒤에는 그런 태도를 버렸다. 서기 107년 초에 거행된 개선식도 그 규모와 화려함으로 로마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몰고, 금실을 넣어 짠 보라색 망토에 초록색 월계관을 쓴 당당한 i71구의 트라야누스는 로마인들의 눈에는 제국의 운명을 떠맡기에 가장 적임자로 보였을 것이다. 앞서가는 짐수레에 묶인 다키아 고위층의 모습은 불과 10년 전 만해도 포로 송환 대금으로 1인당 2아시스를 로마로부터 받아낸 다키아의 현재 모습이었다. 로마인은 원한을 오랫동안 품는 민족은 아니었지만,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을 쾌감으로 느끼지 않는 민족은 아니다.
몇 대나 되는 짐수레에 나누어 실어야 할 만큼 많은 다키아왕의 보물. 그것을 트라야누스는 모두 공익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검투대회나 볼거리도 제국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였다. 콜로세움에서 열린 검투대회에는 1만 명의 검투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 대부분은 포로가 된 다키아 병사들이었다. 검투사 양성소에서 날마다 기량들 갈고 닦은 프로 검투사와 대결하여 목숨을 잃은 포로도 있었다. 또한 포로들끼리 싸우는 고뇌를 맛보면서 죽은 사람도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야수끼리, 또는 야수와 인간의 대결도 펼쳐졌는데, 다키아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통틀어 1만 1천 마리의 야수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런 볼거리는 123일 동안 계속되었고, 그동안 수도 로마는 승전 분위기로 충만해 있었다. 검투사나 야수와 대결하여 죽은 다키아 포로의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포로의 총수는 5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목숨을 건진 자에게는 노예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9화 불교인 가정에 태어난 영국인 조종사 란지스
란지스는 스리랑카의 콧테에서 1942년 순수한 스리랑카인 가정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실버는 란지스가 확실한 전생기억 같은 것을 상당히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그의 행동은 스리랑카인의 아이라기보다 영국 아이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이곤 하였다. 그가 두살 무렵에구토증을 느끼고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스리랑카 사람들은 구토증이 나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국식의 구토촉진술이다. 또 음식에 대한 취향도 마치 서양 사람 같아서 쌀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먹을 때에도 서양식으로 먹었다. 빵에는 서양인처럼 두텁게 버터를 발라 먹기를 좋아 했다. 그는 사용한 적이 없는 포오크와 나이프를 호텔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다루었고 사용하는 방법도 다른 형제와는 달리 서양식이었다. 그가 부모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놀랄 정도로 빨리 영어를 습득한다는 것이었다. 스리랑카는 15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들을 기회가 많고 또 실버의 가정에서도 영어와 실론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놀라운 영어 습득능력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카메라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 당황하면서 도망을 쳤다. 부모를 부를 때에도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라고 하는데 그는 '부모'라고 불렀다. 실론의 어느 아이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가족내에서 뚜렷하게 고립적인 태도를 나타내보인 것은 서너살무렵이었다. 그는 엄마와 형제들을 보고 "모두 나의 엄마나 형제가 아니다"고 하며, "나의 부모, 나의 가족은 영국에 있다"고 말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는 그의 전생기억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전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대강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영국인이다. 나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형제 중에 톰, 짐, 마가렛이 있다. 아버지는 큰기선을 타며 파인애플을 선물로 사 왔다. 기선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은 언덕 위의 외딴 집이다. 저어지나 오버코트를 입는 일도 있었다. 마당이나 길에 얼음이 어는 추운 날 아침에는 불 옆에서 몸을 녹였다. 길의 얼음을 치우러 차가 온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인이지 불교인이 아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다. 그 때에는 내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형제들을 태우고 갓다."
얼음을 치우러 오는 차가 모터가 달린 차인지 아니면 말이 끄는 것인지를 묻자 그는 마차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어떤 옷을 입었는가라는 물음에 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다고 했으며, 어떤 과일을 먹었는가하고 물으니 포도와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이런 란지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얼음이나 마차는 실론에는 없는 것들이다. 란지스가 네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지방 방송국에 부탁해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전문을 영어로 방송해 달라고 부탁했다. 누이가 미 리 그에게 "오늘 오후 5시 영국에서 엄마가 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말을 방송해 온다"고 일러두었다. 시간이 가까와지자 가족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았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 앉았다. 잠시 후 여자 아나운서가 영어로 "란지스의 생일 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나팔같이 만들어서 라디오에 대해 "엄마, 나 실론 사람의 집에 있어, 그리로 데려가줘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생일축하'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역시 엄마야. 엄마는 나를 '다아링'이라 하고 가끔 '스위트 하트'라고 했어." 곁에 있던 숙부가 "어떻게엄마 목소리인 줄 알았지?" 하고 묻자, 그는 "엄마는 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처럼 천천히(softly) 애기하니까"라고 대답했다. 라디오에서는 분명히 말을 천천히 했다. 그러나 실론 사람이 영어로 '천천히'를 말할 때는 slowly라고 하지 woftly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방송 사건은 란지스를 우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란지스가 전생 일을 빨리 잊어버릴수 있도록 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동안 란지스도 전생 이야기를 하지않았다.
란지스가 십대가 된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자동차 수리공장에 취직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는 그의 소원을 허락했고 그는 자동차 수리공장에 일하러 나갔다. 그러자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자동차의 구조와 운전에 숙달되었다. 이리하여 그가 열여 덟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영국으로 보내주었다. 그가 자동차 엔지니어가 되었으면 하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영국에 머물었는데, 영국인과 친숙하게 사귀었으며 런던이나 그 근교의 거리가 옛날부터 익숙한 장소인듯이 느끼곤 하였다. 그리고 훗날 그는 영국에서 보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자동차 관계 회사에 근무하였는데, 1970년 11월 스물다섯살 때에 이안 스티븐슨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영국인 조종사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 비행기가 내가 태어난 콧테 근방에 추락해서 죽었고 거기에서 지금의 집에 환생한 것 같아요." 2차대전 중 콧테에는 영국 공군기지가 있었고 그 주변에서 죽은 영국인 조종사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전생 이야기 중에는 조종사로서의 전생을 조사할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구체적 자료가 불충분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란지스의 경우는 좋은 실례가 된다 하겠다.
제10화 전생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이맷드
이멧드 에라와르는 1958년 12월 22일 라일 레바논의 코오나엘에서 모하멧드 메라와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오나엘은 베이루트에서 동쪽으로 2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도루스교도들의 유일한 거주지이다. 이맷드가 자라면서 처음 걷기를 배우고 또 말을 하게 되자 그는 곧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걸을 수있게 되어서 정말 행복해."
그의 이런 말은 그의 어머니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살 반에서 두살이 될 무렵 '쟈이레'와 '마하모드'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하였다. 전생 발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고는 보우햄지 가(家)의 가족과 함께 크리비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사람의 이름도 말했다. 크리비이 마을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손짓까지 해가면서 "아주 먼곳에 있다"고 하였다. 실은 코오나엘 근처에 같은 이름의 마을 이 있었지만 그가 손짓까지 하는 그 '먼곳'의 마을은 아닌 듯 싶었다. 또 손가락을 두개 가지런히 해 보이면서 쌍동(雙胴)의 총을 갖고 있었 다고 했다. 이맷드가 두살이 되던 어느 날 할머니 손을 잡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한 남자쪽으로 달려가더니 그의 다리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의아해했다.
"아가야, 이 아저씨를 아니?"
"그럼요, 우리 마을 사람인 걸요."
그는 사림 아슈라고 하며 이맷드가 말하던 '먼곳', 곧, 크리비이 마을 사람이다. 사림은 코오나엘에 있는 처가집에 왔던 것이다. 이맷드가 네살이 되던 해 가을, 이맷드의 집을 방문한 마셀쇼프 마을의 여자가 있었다. 쇼프 마을은 크리비이에 가까운 곳인데 그녀는 이맷드가 말한 이름의 사람들이 실제로 크리비이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코오나엘로 시집온 딸을 찾아온 것이다. 이 여자는 이맷드와 함께 그의 부모와 대화를 하다가 말했다. "아가야, 네가 말하는 케말 조움브랫드 씨는 벌써 죽었어." 케말은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 따르면 그의 전생의 친구였다. 이 말을 듣고 이맷드가 하도 슬픈 표정을 짓기에 그 여자는 이맷드에게 자기가 거짓말로 그렇게 해 보았다고 말하자 그는 성난 얼굴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나가, 이 거짓말쟁이야." 이것은 그의 부모가 처음으로 본, 전생에 대한 아주 강한 감정의 반응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맷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동안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이렇게 추정하였다. "이맷드의 전생은 크리비이 마을의 마하모드 보우햄지이고 쟈미레라는 아내를 갖고 있었다."
1963년 12월 이맷드가 다섯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크리비이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코오나엘에서24Km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보우햄지 가의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고 이내 돌아왔다.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발언 중의 하나가 자동차 사고였다. 그는 버스 사고와 트럭 사고를 생생하게 말했다. 또 아주 어릴때부터 대형 자동차를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무서워하였다. 이맷드의 아버지가 장례식 때문에 크리비이에 갔을 때, 그 장례를 치르는 셋드 보우햄지라는 사람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이맷드는 '셋드라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고 이어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는데, 그들이 친척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셋드가 사실은 이맷드 본인일 것이라고 여기게되었다. 이맷드가 다섯살 하고 삼개월이 되었을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우연하고도 다행스럽게도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이 사건의 조사를 직접 진행할 수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크리비이 마을에 처음 와서는 이맷드의 전인격은 트럭 사고로 죽은 셋트 보우햄지라고 한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셋드는 1943년에 트럭 사고로 죽었다는 것과 작년에 죽은 셋드와는 친구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전생의 친구라고 한 '유셀프 하리비'를 만나서 그가 셋드와 친구였다고 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셋드의 아내는 쟈이레가 아니라는 것과 마하모드 보우햄지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셋드의 아들 하페츠를 만났을 때 그의 부친이 환생한 인물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시리아의 같은 도루스 교인에게 시집 간 셋드의 여동생의 아들로서 스레이만이라는 사람이다. 셋드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스레이만은그 반년 후에 출생하여 지금은 스무살이 되었다고 한다. 이 스레이만의 출현으로 인하여 이맷드의 전인격(前人格)은 공중무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페츠는 말했다.
"그 아이가 말한 것 중에서 부친의 생애와 꼭 부합되는 것은 트럭 사고뿐입니다. 그 아이는 사냥도 좋아하고 총도 가지고 있었으며 집앞의 도로는 가파른 고갯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전혀 틀립니다. 또 부친은 쟈미레라는 여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도 이미 알지 않습니까?"
사실 그랬다. 하페츠가 지금 사는 집은 셋드가 살고 있던 집 그대로 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맷드가 말하던 집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셋드가 사고로 인해서 부상을 입고 그 후에 치료받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이맷드가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에, 이것이 하페츠로 하여금 보우햄지가(家)의 인물 중에서 이맷드의 전인격을 다시 찾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셋드의 사촌 이브라힘을 생각해내었다.
"이브라힘이라는 사람도 트럭 사고로 죽었습니까?"
"아니요, 그는 페병으로 죽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다른 점에서는 모두 합당해요."
하페츠는 즉시 우리를 창가로 안내하여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한 채의 집을 가리켰다.
"저기 벚꽃나무가 보이지요?"
분명히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서는 집에 벚꽃나무가 있었고 그 근방은 가파른 경사길이었다. 또 셋드와 친구인 하리비가 이브라힘과도 친구사이인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맷드의 전인격을 이브라힘이라고 본다면 그의 전생 발언은 맞는 셈이다. 이브라힘은, 1949년 9월 18일에, 그전에 일년 정도 요양원에서 치료하다가 스물다섯살에 사망했고 그것은 이맷드가 출생하기 9년쯤 전의 일이다. 셋드의 아들 하페츠의 증언으로 일단 이맷드의 전인격은 이브라힘인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그러나 큰 의문점이 남아 있다. 이멧드가 보여준 자동차 공포증이며 또 걸을 수 있는 일의 행복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 일까? 또 하나의 새로운 의문으로, 이맷드는 "트럭 사고는 운전수와의 싸움 뒤에 일어났는데 운전수는 일부러 치어 죽이려 했다"고 말했지만, 하페츠는 싸움이 있었을 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당시의 재판 기록에서도 운전사의 단순과실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다른 점에서는 모두 정확한 이맷드의 전생 발언이 왜 여기서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이브라힘의 임종에 대한 하페츠의 설명에 의하면 이브라힘은 일년 정도 결핵요양원에서 지내다가 스물다섯살에 죽었다. 마지막 반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다가 죽기 이틀 전에 자택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임종은 자택에서 하고 싶다는 희망에서였던 것 같다. 하여튼 젊고 원기 왕성하던 그가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강요당했으니 걷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희망했겠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 자동차 사고는 어떻게 된 일인가? 트럭 사고와 버스사고에 대한 이맷드의 발언에 대해 많은 증언을 모은 결과 그의 발언에는 틀린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입증하기 곤란한 것은, 트럭 운전수와 싸웠는데 그 운전수가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싸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재판기록에는 충돌사고는 단순과실이라고 되어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게서 셋드가 죽을 때의 상황을 전생기억으로 확인했다. 그는 셋드로서의 자신이 사고가 나기 전에 싸웠다는 것은 현재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이맷드의 전생기억이 틀린 것이다. 셋드는 사고 후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셋드의 자동차 사고는 이브라힘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다. 자기집안에서도 버스와 트럭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버스 사고 후에는 운전을 두려워하여 죽을 때까지 버스를 운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브라힘의 대형 자동차 공포증은 스티븐슨 교수가 만난 다섯살 무렵에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스레이만도 모든 차에 대해서 심한 자동차 공포증을 보였는데 그것은 열한살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여러가지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이브라힘은 트럭과 자동차의 두가지 차 사고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맷드의 전생기억 중 가족과 친구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전생에 '후다'라고 하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가 어릴때 태어난 여동생의 이름을 '후다'라고 하자고 부모를 졸랐다. 또 그는 '셋드'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형제라고 했다. 그들은 이브라힘의 사촌이거나 가까운 친척들이다. 케말 조우므브랫드는 쇼트 마을의 여자가거짓으로 죽었다고 말해서 이맷드가 화를 내었던 그 사람이다. 그는 이브라힘과 셋드와 공통의 친구로 도루스 교도 중에서는 유명한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다.
이맷드의 전생이 셋드가 아니고 이브라힘이라고 추정한 후에 스티븐슨 교수는 그를 크리비이로 데리고 왔다. 우선 처음에 셋드의 전생집 (지금은 하페츠가 사는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무 것도 분별하지 못했다. 사진첩을 보여주며 몇몇 사람을 지적했지만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페츠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에는 셋드의 집을 나와 이브라힘의 생전 집으로 갔다. 이브라힘이 죽은 뒤에 그 집은 폐쇄되어 있었다. 이맷드의 전생 발언대로 마당에는 벚나무가 있고 집 앞은 가파른 언덕길이 뻗어 있었다. 여동생 '후다'는 알아보았지만 어머니는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 10여년 동안에 너무 많이 늙어버린 것이다.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진의 인물은 바로 자기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이브라힘의 사진이었다. 그의 전인격을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결정적인 발언이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는 남동생인 '파우드'라고 하였다. 자기가 마지막 이틀 동안 누워 있던 침대를 알아보았다. "아가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했어?" 하고 후다가 물었다. "후다, 파우드를 불러줘"라고 말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락은 두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의 칸막이를 가리키며 거기에 총을 감추어 두었다고 했다. 이브라힘은 사냥을 무척 좋아하여 법으로 금지된 라이플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 벽 칸막이에 총을 숨겨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 뿐이었다. 이맷드는 이전부터 "총을 다락방에 숨겨두었다"고 말했다. '갈색' 개를 '밧줄'로 매어 둔 것도 말했다. 이 지방에서는 보통 쇠사슬에 매어두지 밧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맷드가 집에 대해 말한 것도 거의 맞았다.
"집에는 우물이 두 개 있다."
"내가 죽을 무렵 정원을 고쳤다. 벚나무와 능금나무를 새로 심었다."
"차고가 둘 있었다."
"기름난로가 있었다."
한편 이맷드가 어릴 때부터 항상 말해오던 쟈이레라는 미인이 있는데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대개 이런 여자이다.
"나에게는 쟈이레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인이다. 옷입은 맵시가 예쁘고 하이힐을 신었다. 빨간색의 옷을 잘 입었고 또 자주 사주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하이힐을 신는 여자는 도루스 교도 중에는 퍽 드물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하페츠로부터 쟈이레에 관해서 어느 정도 정보를 들었다. 그녀는 이브라힘이 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 그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이웃 동네의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맷드가 크리비이에 왔을 때 스티븐슨 교수는 쟈이레가 어느 마을에 사는지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맷드는 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는쟈이레가 살던 마셀 쇼프 마을 방향을 정확히 지적해보였다. 그러나 이맷드가 코오나엘에서는 그녀의 일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며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쇼프 마을에 좀더 가까운 크리비이에 와서는 그녀에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전생에서의 연애사건을 가족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심리적 측면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후 쟈이레가 결혼하여 이웃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맷드는 열살이 되었을 때 엉뚱한 발상을 갖고 있었다. 자기는 쟈이레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된 그녀와는 결혼할 수없으니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생과 현생에서 죽음의 단층(斷層)을 넘어서는 참으로 기구한 사랑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맷드는 열살이 지나서도 상당한 전생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열살 때에 처음으로 마하모드 씨를 만났다. 이브라힘의 삼촌으로 그의 전생기억에서 맨 처음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이 때 마하모드 씨는 수염이 없었지만 수염이 있는 사진을 보여 주니 금방 알아보았다. 또 마하모드 씨와 함께 크리비이 마을의 큰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군인을만났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프랑스 군대에 입대했다고 말했다.이브라힘이 프랑스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맷드도 학교공부 중에서 특히 프랑스어를 잘하였다. 한편 이맷드는 한때 다하르엘아하르에서 산 일이 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그것은 이브라힘과는 다른 생애이다. 그러나 그의 중간적 전생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증멸하거나 조사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는 1973년에 열다섯살이 되어 정상적인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에서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셋드 보우햄지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그의 환생인 스레이만은 같은 해 12월 3일에 시리아의 라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셋드의 여동생으로, 같은 도루스교도의 집안에 시집온 것이다. 스레이만은 말을 하게 되면서 자신은 셋드의 환생이라고 하였다. 서너살 무렵에 처음 크리비이 마을에 왔다. 당시 열한살쯤 되었던 하페츠의 말에 의하면 스레이만은 혼자서 셋드의 집을 정확하게찾았다. 셋드의 사고와 죽음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하페츠 등 아이들을 알아보며 이름을 말했다. 또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에게 부친다운 태도를 보이며, 자기의 어머니를 '여동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페츠 자신도 어린 시절 크리비이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분간했던 것, 마을의 밭이나 포도밭의 경계를 정확히 지적했던 일, 셋드의 소유인 권총과 웃옷 등을 구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
|
독서실 → 수필
|
|
|
희우정기(喜雨亭記) - 소식(蘇軾)/김도련 옮김
정자를 비(雨)로써 이름함은 기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옛날에 기쁜 일이 있으면 곧 그것으로 물건의 이름을 지었으니, 이는 잊지 않을 것을 나타내려 함이다. 주공(周公)은 벼를 얻고서는 그것으로 책의 이름을 지었고, 한무제(漢武帝)는 보정(寶鼎)을 얻고는 그것으로 연호(年號)의 이름을 지었고, 숙손(叔孫)은 적(敵)을 이기고 그것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 기쁨의 크고 작음은 같지 않으나 그 잊지 않음을 나타냄은 똑같다.
내가 부풍(扶風)에 부임한 다음 해에 비로소 관사를 손질하며 당(堂)의 북쪽에 정자를 짓고 못을 그 남쪽에 파고는 흐르는 물을 끌어 오고 나무를 심어 휴식하는 장소로 삼았었다. 그 해 봄에 기산(岐山) 남쪽에 보리를 뿌리니 그 점괘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이윽고 한 달이 되도록 비가 오지 않아 백성들이 바야흐로 걱정을 하였다. 3월 을묘일 (乙卯日)에 비가 오고, 갑자일(甲子日)에 다시 비가 내렸는데 백성들은 아직도 부족하게 여겼다. 정묘일(丁卯日)에 큰 비가 내려 사흘만에야 그치니, 관리들은 서로 뜰에서 경하(慶賀)하고, 상인들은 서로 시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농부들은 서로 들에서 손뼉치며 기뻐하여, 근심하던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병든 사람들은 병이 나았는데, 내 정자가 이 때 마침 이루어졌다. 이에 나는 정자 위에서 술잔을 들어 손님들에게 권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닷새를 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괜찮았을까요?”
“닷새를 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보리 농사가 안 되었을 테지요.”
“열흘을 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괜찮았을까요?”
“열흘을 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벼농사가 안 되었을 테지요.”
“보리도 없고 벼도 없어지면 이 해는 장차 거듭 흉년이 들 것이요, 옥송(獄訟)이 크게 일어나고 도적이 더욱 들끓을 것이니, 내 여러분들과 더불어 비록 이 정자에서 한가히 놀며 즐기려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늘이 이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어 처음엔 가물다가 비를 내려주셔서 나와 여러분들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한가히 놀며 이 정자에서 즐기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비의 덕택이라, 그 또한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이것으로 정자의 이름을 짓고 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하늘이 구슬을 뿌린들 추운 사람들 그것으로 옷을 마련할 수 없으며, 하늘이 옥(玉)을 뿌린들 굶주린 사람들 그것으로 곡식을 삼을 수 없네. 한 번 비가 사흘이나 온 것은 그 누구의 덕일런가? 백성들은 태수 덕분이라 하나 태수는 그렇지 않다 하고는 그 덕을 천자(天子)에게 돌렸네. 천자께서 그렇지 않노라 하시며 그 덕을 조물주에게 돌렸네. 조물주는 자기 공이라 하지 않고 그것을 태공(太空) 에게 돌리니, 태공은 아득하고 아득하여 이름할 수 없으니, 내 이로써 정자의 이름을 희우(喜雨)라 하노라.”
<고문진보(古文眞寶)>
|
|
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
|
|
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8장 두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첫 (십년기 ) 민병대 (2/2)
전기 작가로서는 할 수 없는 간략하게 다룰 도리밖에 없지만, 이 첫 (십년기)는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잇다. 첫째 (신곡)에 대한 그의 오랜 연구와 강한 애정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데, 그것은 단순히 테르차 리마 Terza Rima(11음절구 3행 시절 - 옮긴이)를 취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테로부터 여러 가지 표현법이나, 형식, 반구들을 빌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마키아벨리는 시를 쓸 때보다 산문을 쓸 때가 더 시인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시라는 것 자체가 이 경우과 같이 역사와 정치를 논할 때는 적절치 못한 형식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마키아벨리의 신랄하고도 현실주의적인 문체가 시의 운율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시행들이 없지 않고, 당시 인기가 높아서 아예 속담처럼 사용되기에 이른 날카로운 격언 조의 말들도 다수 보인다. 바로 이러한 격언들, 다부진 생각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애정과 같은 것 때문에, 이 조그만 시 작품은 마키아벨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여기서 내면의 불꽃과 영원한 냉소를 지닌 생생한 자화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십년기)에서 정치는 시라는 베일에 감싸여 있지만, 알라만노 살비아티에 대한 그 작품의 헌정사 역시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살비아티는 아레초 반란의 시기 공화국을 구했던 인물이다. 사실 원대한 군사적 개혁을 꿈꾸고 계획하던 마키아벨리로서는, 조밤바티스타 리돌피를 비롯한 여러 유력 시민들과 함께 반소데리니파의 수장격이었던 그를 고려에 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계획에는 너무 많은 난관이 따랐기 때문에 10월 말경에는 곤팔로니에레 자신도 가을 바람만큼이나 열성이 식어버렸다.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로마에서 돌아온지 정확히 아홉 달 만에 태어난 새 아들에게 또다시 대부가 되어준 추기경조차도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자신이 개입된 데 대해 형에게 사과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용기를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냉담함을 스스로의 열정으로 메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기운은 물방울이 떨어지듯 조금씩 빠져나갔네.
그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피렌체인들과, 특히 반대자인 살비아티에게 자신의 군사 계획을 지지해 주도록 애타게 호소하였다.
하지만 길은 쉽고 가까울 수도 있으리니
만일 당신이 마르스의 신전을 다시 열기만 한다면.
이 두 시행은 거의 민간의 별점처럼 그 정치적 예언을 끝내는 (십년기)의 마지막에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마키아베리가 한것이므로, 그로 하여금 그 감미롭던 이탈리아 땅이 조만간 전쟁의 풍파에 휩싸이리라고 예언케 했던 이유들을 하나한 뒤따라가보는 수고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교황이 바라는 바,
상처받은 교회를 되살려놓는 것.
자식 하나를 가진 황제는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보이고 싶어하네.
갈리아는 고통으로 가득한데.
피렌체와 베네치아 또한 각자의 몫을 주장하였다.
두려워하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마르코여,
전쟁이냐 평화냐 망설이고 있구나.
그리고 (피렌체여) 피사를 향한 당신의 탐욕 또한 너무 크나니
(상처 받는 교회를 살리려는) 교황의 압박아래 (전쟁이냐 평화냐)의 기로에 선 산 마르코 San Marco(성 마가는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 - 옮긴이)는 그와 잠깐 동안 우호 조약을 맺었다. 화친과 전생 사이에서 베네치아는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에게 뒷돈을 대어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피렌체를 공격할 목적으로 콘살보의 깃발을 떠나 페트루치, 비텔리 가 미치 잠파올로 발리오니와 동맹한 인물이었다. 피렌체인들은 결국 피사를 향한 바로 그 (너무 큰 탐욕을 )을 앞세우다가, 1505년 3월 27일 폰테 아 카펠레세 근처에서 피사에 대패까지는 아니지만 힘빠지는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그 당시 마키아벨리는 서기국이 늘 그렇듯이 연일 편지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의 이러한 공신 서한들이 아니라 이 시기에 쓴 극소수의 사신(사신)들이다. 그중에는 여전히 교회 성직록을 얻고자 애쓰고 있던 동생 토토의 편지 한 통이 끼어 있다. 또한 니콜로 발로리가 보낸 매우 정감 어린 편지도 남아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주고받은 편지들에게서 언제나 그랬듯이 편지를 보내도 도대체 답이 없다고 불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은 좀 지나친 면이 있어서, 마키아벨리의 막내아들에게 대부가 되어주었던 것이 그에게는 우정을 돈독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섭섭한 감정을 가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프랑스 사절의 일에 싫증이 난 발로리는 피에로 소데리니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귀국을 주선할 말한 사람에게 기대였다. 그는 프랑스 궁정에서는 (머리가 총명하면서도 과묵한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친구인 마키아벨리를 바로 자신의 후임자로 삼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프랑스로 가지 않았다. 그는 페루자의 군주 잠파올로 발리오니가 있는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로 파견되었다. 발리오니는 피렌체와 용병 계약을 체결해 놓고도 뒤늦게 자국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의 방어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다는 변명과 함께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공화국의 입장에서 그와의 용병 계약을 대단히 중요한 일인 데다가 이미 카펠레세의 패배로 힘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갑작스런 변절로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일이 적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다. 어떤 난관에 봉착하여 무언가 확실한 사정을 알고 싶을 때면 늘상 그래왔듯이, 피렌체인들은 마키아벨리로 보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어뗳게든 잠파올로를 구슬러서 계약을 되살리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이 좀더 좋은 조건을 얻어내려는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은밀한 이유가 있는 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길을 떠난 마키아벨리느 4월 11일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만찬을 전후하여 세 시간 이상 발리오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흡사 고양이를 만남 쥐 같았다.) 마키아벨리가 이 긴 논쟁에서 하도 (그를 이지저리 몰아세우는) 바람에, (그의 안색이 여러 번 바뀔) 정도였다. 한 대목에서 그가 많은 페루자의 법률가들과 의논했다고 말하자, 마키아벨리는 (이 문제는 법률가들이 아니라 군주가 결정할 일이며, 갑옷을 입고 명예를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의를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없을 분 아니라, 그가 볼 때 지금 발리오니가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모두가 그를 (비틀거리는 망아지)정도로 보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는 말을 바꿀 힘이 없다는 힘이 없다는 듯이 결심에 변함이 없었지만, 마키아벨리는 그를 넘겨짚기도 하고 찔러보기도 하면서 두 번이나 그의 내심이 드러나는 말들을 하도록 유도했다. 마키아벨리와 10인위원회는 이를 그곳에서 알아낸 정보들과 맞추어본 끝에 발리오니, 오르시니 가, 판돌포, 루카인 들 사이에 모종의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잠파올로는 상황이 어떤지를 감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이미 (두달 동안 노심초사하면서 한번도 스스로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정보원들이 그에게 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마도 마키아벨리로부터 (어느쪽으로 택할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만 하며, 그 결과 페루자 전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이후 더 웃음을 잃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피렌체는 군사력의 부족에다 누가 적인지를 소상히 인지한 때문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더욱 고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다 말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니콜로 덕분이었다. 피렌체인들은 알비아노를 고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였다.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인물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지킨다는 계획은 매우 교활하긴 하지만 그만큼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대신 그들은 만토바 후작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와의 협상이 난항에 부딪혔으므로, 5워 4일자 훈령에 의해 마키아벨리가 만코바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든 누구든 그 협상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없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곤팔로니에레는 그를 나폴리로 보내 콘살보와 협상케 하는 일을 거론하였다. 그른 해로를 통해 피사로 보병을 실어 나르고 있었으므로 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알비아노를 저지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다른 인물이 그를 대신해서 파견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시에나로 가는 것까지 반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여정은 400밀리오((miglio)란 영어의 마일과 같다. 그러나 그 길이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 보기를 들자면, 고대 로마에서는 약 1,480m였으나, 그뒤로 로마에서는 1,460m, 피에몬테에서는 2,466m 등으로 바뀌었다. 현재 영미 1마일은 1,069m 정도이다 - 옮긴이)가 아니라 40밀리오였고, 그가 이러한 맞바꿈을 흔쾌하게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태는 이러했다. 판돌포 프트루치로부터 알미아노가 피렡체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경고의 말이 전해졌다. 폭풍우가 그쪽에서, 그것도 곧 닫치리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음모들을 처음부터 꾸미고 또 그 속에 가담한 당사자인 판돌포가 왜 갑자기 피렌체의 안위에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절의 임무는 그의 전갈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명목에도 불고하고 이 놀라운 회심의 이유를 캐는 데 그 본위가 있었다.
7월 17일 성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시에나에 도착한 마키아벨리는 (이제 막 잠에서 깬) 판돌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잠파올로 발리오니보다는 더 똑똑한 적수였다. 그의 목적이 당시 위험에 처한 피렌체가 몬테풀차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데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원조의 약속과 조언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지금 협상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주시시키려고 애쎴다. 그는 10인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연스럽게든 우연히든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있음은, 제 생각으로는 이 협상이 매우 혼란스러워서 제가 앞으로 가야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도 모를 지경임을 그에게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대는 대로 그에게 부딪혀 갔다. 그는 8 동안 이 문제에 관해 무려 7통의 편지를 서기국에 보냈다. 마침내 7월 24일, 인내심도 돈도 한계에 다다른 그는 귀국 허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미 그의 친구 보오나코르시는 곤팔로니에레로부터 귀국과 돈을 모두 허락받아 놓고 있었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알비아노와의 협상과 함께 그에 뒤이은 알비아노의 움직임 때문에 서기국은 끊임없는 일거리와 이야기 거리로 바쁘게 돌아갔다. 비는 왔지만 천둥까지 치지는 않았다. 8워 17일 산 빈첸조 부근에 이른 알비아노는 에르콜레 벤티볼리오가 이끄는 피렌체군을 만났고, 긴 각축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그의 군대가 거의 모두 포로로 잡히거나 무기를 빼앗겼고, 수송기구와 군기들을 잃었다. 피렌체인들은 이 승리로 자못 의기양양해졌다. 이로 인해 곤판로니에레는 대담해졌고 벤티볼리오와 계약 중재자인 자코미니는 사기가 올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피사 공략이 결정되었다. 콘살보의 원병과 우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작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전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작전의 행로는 그들이 품었던 희망과는 같지 않았다. 9월 6일 성벽 밑에 진용을 갖춘 군대는 다음날 대포로 성벽에다 큰 구멍을 둘씩이나 뜷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보병들은 돌격을 감행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피렌체에 아무런 성과도 안지 못하고 그곳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남긴 것이라고는 이탈리아 군대의 치욕스런 무능의 오명밖에 없었다.
용병대의 이러한 무능함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주장을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곤팔로니에레와 그의 친구들은 그의 말에 솔깃하였다. 그들이 의심을 버리고 그 실행 방법을 논하게 되자. (그와 같은 이일 이름값을 하면서 지속되려면)이 문제가 대평의회에서 다루어져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특히 소데리니는 쵠그느이 반대와 의혹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데다 몇 몇 유력 시민드이 과연 찬성해 주겠느냐는 의심이 겹쳐, 관례대로 평시민들의 동의를 받아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일이리 새롭고도 이례적인 것이라, 평시민들에게 먼저 시범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에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는 다른 상의 없이 오직 정무위원회의 권한만으로 무젤로와 카센티노같이 그래도 제일 군대 기질이 두드러진 지역에서 사람들을 징집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는데, 이제 그 일을 총괄하게 된 마키아벨리는 이에 적당한 인물을찾아내었다. 그는 바로 발렌티노의 악명 놓은 부하였던 돈 미켈레였다.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사로잡혀 교황에게 넘겨졌으나 그에게 고분고분하게 군 덕분에 결국 방면된 전력으 가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잔인하고도 무시무시하며 공포를 주는 인물) 아래에서 로마냐의 농민들이 군인을 변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무젤로와 카센티노의 농민들을 병사로 키우는데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인물있다.
수단보다는 목적에 더 관심이 있는 곤팔로니에레를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자의 악명과 발랜티노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을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더욱이 선량한 소데리니에게 보르자의 악행을 답습할 인물이라는 의혹이 일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현실이 아닌가! 마키아벨 리가 조밤바티스타 리돌피, 피에로 귀차르디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의향을 슬쩍 떠보았지만 모두가 반대쪽이었으므로, 곤팦ㅍ로니에레는 더 이상의 조언이 없이 그 안건을 80인회의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반대자들으 분개했지만 결과를 기다리른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구성된 민병대가 관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 것인가는 여전히 두고 봐야 될 사항이었지만, 마키아벨 리가 자신의 대전투에서 이미 승리했다는 점은 혹실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방핼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병을 위해 무젤로로 갔다. 1506년 새해 초하루, 그는 이 새로운 제도를 빨리 실행에 옮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는 혹독한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1월 2일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자신이 전날 뽑은 사람들에 대해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익살스러운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저를 이리저리 걸어 돌아다니게 만드는 걸 보니 제가 위원님들과 이 삭풍에게 잘 보였나봅니다.)
10인위원회는 찬사와 격려의 편지로 이에 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따로 격려가 필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농민들의 저항을 잘 무마해서 기꺼이 무기를 들게 만들었음을 본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 아래에는 과세와 관련된 어떤 계산된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마을과 마을, 파벌과 파벌 간의 적대심을 잘 다스리고 있음도 본다. 며칠 만에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곧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다시 물젤로로 간다. 1월 27일이 되면 그는 폰타씨에베에서 그곳 사람들의 모병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디코마노와 산 고덴초로 갔다가, 새로이 구성된 보병대를 시찰하기 위해 다시 폰타씨에베로 되돌아온다.
이 병사들은 (흰 방한 조끼에다 흰색과 붉은색이 섞인 바지를 입고, 흰 군모를 쓰고 군화를 신고 쇠로 만든 가슴가리개르 착용한 채, 일부는 창을 들고, 일부는 총을 가지고)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들을 (스위스식으로 훈련받도록)하였다. 즉 독일식이라는 뜻이다. 피렌체에서 의 첫 사열식는 1506년 2월 15일 사육제에 맞추어 정무궁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른바 현인으로 불리는 유력 시민들은 기분이 상한 나머지 (이 행사를 크게 비난하였다). 하지만 평시민들은 환호하였다. 훌륭한 시민이었던 란두치가 그 광경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일기 Diario)에다 써놓은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이른바 현인들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피렌체 시에서 열렸던 어떤 행사보다 더 장관이었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
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작은 냄비
“참새가 숲속에 둥지를 튼다 한들 나무 한 가지면 족하고, 생쥐가 큰 강의 물을 마신다고 해도 작으 배 하나 채우는데 불과하다.“ 장자가 한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없이 욕심을 내고 또 제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촉새’와 같이 화를 낸다. 그래서 공자는 ‘그릇이 작은 사람들을 어찌 다 셀 수 있을 것인가’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은 편협하고 못난이들이다. 작은 냄비가 빨리 뜨거워지듯 이런 자들은 당장 분노를 터뜨리며 쉽게 다툼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이 좁은 자를 상대할 때는 살얼음 밟듯 조심해야 한다. 이들의 비위를 건드리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것마냥 길길이 더 뛰기 때문이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것은 불을 끄는 방법이 아니지 않는가?
견문발검
지혜로운 사람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쉽게 나타낸다. 견문발검이란 앵앵거리는 모기에 노하여 칼을 휘두른다는 뜻이다. 새 대가리 같이 생각이 좁고 쓸데없는 일에 화를 잘 내는 사람을 풍자한 말이다. 속이 좁은 사람은 사람을 후하게 대할 때 박하게 대하고, 인정을 베풀어야 할 때 베풀지 못하고, 자신의 형제나 부모까지 박하게 대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 하지 않는다. 세익스피어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아량이 적지도 않고 조그만 일에 불꽃같이 성질을 내지 않는다. 나의 이빨은 나의 입술로 꼭 덮여 있기 때문이다.
작은 냄비가 빨리 뜨거워진다. (A little pot is soon hot.)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 수 있듯이, 무슨 일이나 그 일을 시행해 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무슨 일이나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하면 일이 이루어지나, 쉬운 일이라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 될 거라는 약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해보면 자신의 능력에 놀라게 될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자신감’을 높이 산다. 한국 사람은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자체가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단점이기도 하지만 장점으로 더 크게 작용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맨손에서 오늘과 같은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 원동력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산을 향해 ‘여기 저기로 옮겨 가라‘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 못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하여 우리에게 자신감을 갖고 행동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나 해보기도 전에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자신감을 잃지 말고, 목표를 세워 하나 둘 실천하여 보자. 마라톤 선수는 전 코스를 달릴 때 처음부터 최종 목표 지점까지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힘이 들어 중간에 포기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저기 저 지점까지 10km, 저기 큰 다리까지 20km, 저기 빌딩까지 30km 등의 단계별 목표로 ‘거기까지만’하는 주법으로 달린다. 이렇듯 목표를 설정하되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을 정하고 나면 구체적으로 실질적인 목표가 설정되어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
서경에는 ‘할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을 갖고 임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종교는 기적이 있어 난치병을 고치기도 하고 물 위로 걷기도 하고 폭풍우를 잠재울 수 있으며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내는 일은 기적이 없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일은 모두 진취적인 생각, 개척 정신, 열정적인 노력을 계속해서 쏟아부어야 이루어진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 (You never know whatyou can do till you try.)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부딪쳐 보자.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경주와 싸움에서 이기는 법
세상 일을 보면 힘이 세다고 항상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잘 달린다고 해서 달리기 경주에서 항상 1등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
시나눔 → 동시
|
|
|
실비- 강정안
실비 금비 내려라.
잔디밭에 내려라.
실비 꽃비 내려라.
꽃송이에 내려라.
실비 싹비 내려라.
가지마다 내려라.
실비 떡비 내려라.
못자리에 내려라.
실비 은비 내려라.
연못 속에 내려라.
------------------------------------------------------------
4월 - 김재수
춥지?
춥지?
벗은 가지에
찬바람이 감기며
자꾸 물어도
눈 꼭꼭
입 꼭꼭 말이 없더니
대답 대신 파랗게
싹이 돋았네.
대답 대신 예쁜
꽃이 피었네.
김재수 : 1973년 동시 <겨울 일기장>과 <가로등>이 월간 '소년'에 당선되어
동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창주아동문학상과 한정동아동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펴낸 책으로는 <겨울 일기장> 등이 있습니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