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46호 - 2024.8.28. 수요일(음력 : 7.25.)
angelo@nownforever.co.kr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진실의 색은 단연 灰色(회색) - 앙드레 지드
|
|
글나눔 → 말글
|
|
|
간지 난다?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돼 독립을 이루었다.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1987년 독립기념관을 개관했고 1995년에는 일제 지배를 상징하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35년 동안의 일제 지배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지만 정작 우리의 얼을 담고 있는 말에서 일제의 잔재가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에서 일본어 표현들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맨 겉에 입는 웃옷을 흔히 ‘마이’라고 표현하는데 ‘마이’는 ‘단추가 한 줄로 달린 겉옷’을 뜻하는 일본어 ‘가타마에(かたまえ, 片前)’에서 온 말이다. 또한 소매가 없는 윗옷인 민소매 옷을 ‘나시’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소매 없는 옷을 뜻하는 일본어 ‘소데나시(そでなし, 袖無し)’에서 온 말이다. 의상에 주로 사용하는 물방울무늬를 ‘땡땡이무늬’라고 하는데 여기서 ‘땡땡이’는 ‘몇 개의 점’을 뜻하는 ‘텐텐(てんてん, 点点)’에 ‘이’가 붙은 것이다. 또한 줄무늬 티셔츠를 ‘단가라 티’라고 하는데, ‘단가라’는 ‘계단 무늬’를 뜻하는 ‘段柄’의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또한 ‘어깨가 넓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가다가 좋다’라는 말에서 ‘어깨’를 뜻하는 일본어 ‘가타(かた, 肩)’가 사용되었고
‘멋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간지 난다’라는 표현에서는 ‘느낌’을 뜻하는 일본어 ‘칸지(かんじ, 感じ)’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간지 난다’는 말의 어원을 알게 됐다면 앞으로 ‘멋있다’의 의미로 ‘간지 난다’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팥이’와 ‘팥을’의 발음
인접한 두 소리 가운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닮아 그와 비슷하거나 같은 소리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밥물’이 [밤물]로, ‘신라’가 [실라]로, ‘종로’가 [종노]로 발음되는 것이 그 예이다. ‘입천장소리되기(구개음화)’도 이런 축에 끼는 음운현상이다.
맏이 → [마지] 굳이 → [구지] 갇히다 → [가치다] 밭이 → [바치].
이 예들에서, 첫 음절의 받침으로 쓰인 ‘ㄷ’과 ‘ㅌ’은 잇몸소리(혀끝이 윗잇몸에 닿았다가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인데 이것이 입천장소리(혓바닥이 입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인 ‘ㅈ’이나 ‘ㅊ’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입천장소리되기(구개음화)’라고 한다. 물론 ‘ㄷ ㅌ’이 아무 때나 ‘ㅈ ㅊ’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ㄷ ㅌ’ 뒤에 ‘-이’ 또는 ‘-히’가 나올 때만 바뀔 수 있다. 모음 [ㅣ]가 입천장소리와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를 닮아서 입천장소리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이런 규칙을 잘 지켜서 발음한다. 그런데 때로 ‘입천장소리되기’를 잘못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
쟁기로 밭을 갈다, 팥으로 죽을 쑤다, 솥에 밥을 안치다
이 예들에서 ‘밭을’ ‘팥으로’ ‘솥에’는 각각 [바틀] [파트로] [소테]로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을 [바츨] [파츠로] [소체]로 소리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입천장소리되기’는 ‘ㄷ’이나 ‘ㅌ’이 모음 /ㅣ/를 만날 때에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른 모음을 만날 때에는 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소리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이들을 [바슬] [파스로] [소세]와 같이 소리 내는 경우도 많다. ‘ㅌ’이 ‘ㅅ’으로 변한 셈인데, 이 또한 표준 발음이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
|
시나눔 → 우리시
|
|
|
넋 - 천상병
넋이 있느냐 라는 것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거나 같다.
산을 보면서 산이 없다고 하겠느냐?
나의 넋이여
마음껏 발동해다오.
내 몸의 모든 움직임은,
바로 내 넋의 가면이다.
비 오는 날 내가 다소 우울해지면
그것은 즉 넋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내 넋을 전세계로 해방하여
내 넋을 널찍하게 발동케 하고 싶다.
∼∼∼∼∼∼∼∼∼∼∼∼∼∼~~~~~~~~~~~~~~~~~~~~~~~~~~~~~~~~
나무 - 정지용
얼골이 바로 푸른 한울을 우러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 !
어느 모양으로 심기어졌더뇨? 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여 !
오오 알맞는 위치 ! 좋은 우아래 !
아담의 슬픈 유산도 그대로 받었노라.
나의 적은 연륜으로 이스라엘의 이천년을 헤였노라.
나의 존재는 우주의 한낱 초조한 오점이었도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어 입을 잠그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발의 성혈에 이마를 적시며-
오오 ! 신약의 태양을 한아름 안다.
~~~~~~~~~~~~~~~~~~~~~~~~~~~~~~~~~~~~~~~~~~~~~~~~~~~~~~~~~~
기자의 정열 - 김수영
사면의 신문 위에 육호활자가 몇천개 박혀있는지 모르지만 너의 상상에서는 실제의 수십배는 담겨있으리라
이 무수한 활자 가운데에
신문기자인 너의 기사도
매일 조금씩은 끼이게 되는데
큰 아름드리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너는 네가 한 신문기사를 매일아침 게시판 위에서 찾아보는 버릇이 너도 모르게 어느덧 생기고 말았다
생각하면 그것은 둥근 옹이같이 어지러웁기만 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초점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이 초점을 바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낭만적 위대성을 잊어버린 지 오랜 네가 인류를 위하여 산다는 것도 거짓말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래도 누가 읽어줄지 모르는 신문 한구석에 너의 피가 어리어있는 것이
반가워서 보고 있는 것인가
기사라 하지만 네가 썼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가히 무관한 것
그러기에 한결 가벼운 휴식의 마음으로 쓰고 있을 수 있었던 것
오랜 피곤도 고통도 인내도 잊어버리고
새사람 아닌 새사람이 되어
아무도 모르고 너 혼자만이 아는
네가 쓴 기사 위에
황홀히 너를 찾아오는 아침이여
번개같이 가슴을 울리고 가는 묵은 생명과 새 희망의 무수한 충돌 충돌......
누구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어오던
무색의 생활자가 네가 아니던가
자유여
아니 휴식이여
어려운 휴식이여
부르기 힘드는 사람의 이름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너무나 무거운
너의 짐
그리고 안락, 안이, 허위......
모두다 잊어버리고 나와서
태양의 다음가는 자유
자유의 다음가는 게시판
너무나 어려운 휴식이여
눈물이 흘러나올 여유조차 없는
게시판과 너 사이에
오늘의 생활이 있을진대
달관한 신문기자여
생각하지 말아라
「결혼윤리의 좌절
-행복은 어디에 있나?-」
이것이 어제 오후에 써놓은 기사대목으로
내일 조간분 사회면의 표독한 타이틀이 될 것이라고 해서
네가 이 두 시간의 중간 위에 서있는 것이라고 해서
어려운 휴식
참으로 어려운
얻기 어려운 휴식
너의 긴 시간 속에 언제고 내포되어있는 휴식
그러한 휴식이 찬란한 아침햇빛 비치는 게시판 위에서 떠돌아다니면서
희한한 상상과 무수한 활자를
너에게 눌러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아예 놀라지 말아라
너는 아예 놀라지 말아라
<1956>
~~~~~~~~~~~~~~~~~~~~~~~~~~~~~~~~~~~~~~~~~~~~~~~~~~~~~~
가을 편지 - 이해인 (6~10)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 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있는 것 -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
|
독서실 → 수필
|
|
|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꽃처럼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꽃을 감상할 때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은 그 향기이다. 꽃향기에는 재스민처럼 강렬하고 뚜렷한 것들도 있고 라일락처럼 미묘한 것이 있다. 또 난초처럼 더없이 맑고 고상한 내음을 가진 것도 있다. 그러나 꽃향기 중의 제일은 역시 맑고 은은한 것이라 하겠다. 두 번째로는 꽃의 빛깔과 모양의 아름다움이다. 이것 역시 천차만별한데 어떤 것은 풍만한 처녀를 연상시키고, 어떤 것은 청초하고 풍취가 깊어 침착한 숙녀를 연상시킨다.
어떤 것은 그 미모로서 유혹하려 하고, 어떤 것은 교만에 겨워 스스로 만족하는 듯한 몸매를 지녔다.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가 하면 얌전하고 조심스런 심성을 은은하게 표출하는 꽃도 있다. 이러한 꽃들은 우리에게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과 계절을 연상시키곤 한다.
장미는 화사한 봄날을, 연꽃은 시원한 여름날의 아침을 떠오르게 한다. 물푸레나무는 가을의 달과 한가위를 보여주고, 국화는 늦가을에 먹는 꽃게를 떠올린다. 매화는 흰 눈을 그리워하게 하고 그 곁에는 수선화가 함께 있어야만 한다. 이처럼 어느 꽃이나 그에 어울리는 환경에 있어야만 그 참맛이 느껴진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계절과 사람과 정경을 떠올리는 데 가장 쉬운 도구일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몇 가지 꽃에 대하여 그 감상을 말해보고자 한다. 난초와 국화, 연꽃은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어딘지 모르게 고상하여 사랑을 받고 있다.
또 모란은 그 빛깔과 꽃잎의 풍만함으로 부귀와 행복의 상징이 되었으며, 매화는 시인의 꽃, 차분하고 청빈한 선비의 자세로 상징되고 있다. 곧 모란은 물질이요 매화는 정신의 표상이다. 모란은 특이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당나라 때의 일이다. 측천무후가 그 과대망상적인 변덕을 일으켜 한 겨울에 궁정의 꽃 전부에게 일시에 피어날 것을 명령하였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단지 황제의 권위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꽃들이 순종하였지만 모란만이 몇 시간 늦게 피어서 무후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화가 난 무후는 궁궐의 모란을 모두 뽑아 낙양으로 옮겨 심도록 했다. 일종의 추방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선비들은 이런 모란의 지조를 극구 예찬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일화로 낙양은 모란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난초는 모란과는 달리 스스로 고독의 미를 즐기는 미덕이 있다. 이 꽃은 산중에 살다가 사람들의 마을로 옮겨지면 자신의 독특한 특성에 따라 재배되지 않으면 곧 말라죽기 십상이다. 이러한 까닭에 난초는 예로부터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군자의 상징, 우정의 상징으로 불려져 왔다. 능금꽃과 비슷한 해당화는 다른 꽃들과 마찬가지도 시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데 시인 중의 두목 격인 두보만이 이 꽃에 대하여 한 마디도 읊지 않았다. 그 이유는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어머니의 이름이 해당인 까닭에, 효성으로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꽃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철쭉은 예쁘고 맵시 있는 아름다움과는 달리 비극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뻐꾸기의 피눈물에서 싹튼 꽃이라고 알려져 있다. 계모에게 학대받고 집을 쫓겨난 형을 찾는 소년이 뻐꾸기로 변한 것이라고 알려진다.
꽃을 즐기는 멋
꽃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꽃의 향기를 즐기고 외모를 바라보는 것은 생활의 풍요로움이면서 한가한 즐거움일 것이다. 여기에 꽃꽂이의 즐거움이 더한다면 한결 예술적인 흥취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온 기쁨의 한 가지이다. 19세기 초에 씌어진 책 "한정기취"에서는 꽃꽂이의 기술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가을이 되면 국화를 열렬히 사랑한다. 한데 나는 국화를 화분에 심기보다는 꽃병에 꽂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화분에 심는 것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집에 뜰이 없기 때문이다. 한데 시장에서 사오는 꽃은 손질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국화를 꽃병에 꽂을 때는 짝수가 아니라 홀수로 꽂아야 하고, 어느 병에나 한가지 빛깔만을 꽂아야 한다. 꽃병의 주둥이는 꽃을 한꺼번에 쉽게 꽂을 정도로 넓어야만 한다. 하나의 꽃병에 꽂은 꽃이 여섯 송이건 수십 송이건 한결같이 꽃병의 주둥이에 똑바로 서도록 꽂아야 한다. 너무 한쪽으로 몰려도 안 되고 흩어져서 너무 넓게 되어서도 안 된다. 꽃병 주둥이에 기대어 꽂는 것도 금물이다. 이렇게 위치를 정하는 것을 뿌리맺음이라고 한다. 꽃은 고상하게 똑바로 서 있는 일도 있고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기도 할 것이다. 너무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꽃봉오리를 곁들여 일종의 분위기 있는 불균형을 살려 꽂는 것이 좋다. 잎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되고, 줄기는 너무 딱딱해서는 안 된다. 줄기를 바늘로 붙들어 맬 때는 바늘 끝이 드러나면 잘못된 것이니 긴바늘을 잘라 버려야 한다. 이른바 병 주둥이는 깨끗해야 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접이나 큰 접시를 이용할 때는 꽃은 옆으로 기울게 하는 것이 좋고, 복판에서 비죽 내밀게 해서는 안 된다. 줄기와 잎이 맞붙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꽃이 달린 가지를 꺾어 병에 꽂을 경우에는 미리 가지 손질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항상 자기가 직접 가지를 꺾어올 수 없고, 남이 꺾은 가지로는 만족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우선 그 가지를 손에 들고, 전후 좌우 여러 방향으로 살펴보고서 어느 방향이 가장 아름다운지 확인한다. 그 다음 늘씬하고 색다른 가지 모양을 위해 쓸데없는 잔가지를 잘라 버린다. 그리고 나서 줄기를 어떤 상태로 꽃병에 꽂을까, 줄기를 꽃병에 꽂았을 때 잎이나 꽃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려면 어떤 상태로 줄기를 구부리면 좋을까 생각한다. 만일 되는대로 묵은 가지를 손에 쥐고서 그 곧은 부분을 병에 꽂는다면, 줄기는 뻗어 나오고 가지는 너무 빽빽하여 꽃이나 잎이 다른 쪽을 향하게 되어 매력이며 표정 등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곧은 가지를 구부리려면 줄기의 한 가운데쯤에 칼로 상처를 내고 그 상처에 깨진 기와나 돌멩이의 부서진 작은 조각을 끼워 넣는다. 그렇게 하면 곧은 가지는 알맞게 구부러진다. 큰 가지가 너무 약할 때는 두세 개의 바늘을 꽂아서 단단하게 한다. 이 방법을 쓰면 단풍잎이나 대나무 가지, 또 그 밖의 가시나무까지 훌륭한 장식이 된다. 몇 개의 구기자나무 열매에 푸른 대나무의 작은 가지를 곁들이거나, 고상한 풀잎에 몇 개의 가시나무 가지를 배합해도 배치만 잘 되면 참으로 우아한 정취를 낳을 것이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교양 있는 사람이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나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좋아해야 할 것과 싫어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싫어해야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식견이 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이론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태도나 인격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우리는 자주 접하곤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학식은 있으나 판단력이 전혀 없는 존재들이다. 가령 한 역사책이 최대의 학자적인 양심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할지라도 그의 통찰력이나 식견 때문에 사건이다 인물에 대한 독창적인 이해의 깊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기실 사실을 수집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에 근거한 상황의 판단은 오로지 그것을 다루는 인물의 식견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교양 있는 사람이란 좋은 것, 싫은 것에 대한 태도가 분명한 사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식견이다. 식견을 갖기 위해서는 사물에 대한 깊은 탐구와 판단의 독자성, 어떤 방면의 기만적인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성인들의 세계에는 많은 거짓과 굴복이 담겨 있다. 명성이나 재력, 애국심, 정치, 신앙, 문학 등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마찬가지의 기만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누구라도 잘못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소한 잘못된 그들에게 감탄하고 위압당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가나 문인들은 유년 시절부터 지성에 용기가 있었으며,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분야에 아무리 위대한 인물들이 있을지라도 절대 감명 받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속에서 납득하는 것이 아니면 그가 누구이든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납득했다면 호탕하게 승복하곤 했다. 이와 같은 지적 용기와 판단의 독립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어린이다운 소박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사수할 수 있는 자신감이다. 공자는 사려 없는 학식이 학식을 수반하지 않는 사려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우더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사물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생각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져 위험하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종신 재무관
재무관은 공화정 때부터 존재한 관직으로,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을 지낸 사람이 선출되고, 집정관보다 더 권위있는 자리로 여겨지고 있었다. 임기도 다른 관직은 1년인데, 재무관은 1년 반이다. 본래의 임무가 국세조사였기 때문에 임기도 길었다. 재산과 병역 해당자를 조사하는 것이 국세조사의 주요 목적이니까, 공정한 조사를 위해서라도 모든 공직을 거쳐서 출세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이 재무관을 맡는 것이 타당하게 여겨졌다. 재무관에게는 국세조사 외에 다른 권한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국가 시책에 따른 공공사업을 발주하는 일이다. 최초의 로마 가도인 아피아가도는 기원전 312년에 재무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건설했다. 이 사람은 로마 최초의 상수도를 건설하기도 했다. 재무관은 그밖에 국가의 풍기를 바로잡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풍기를 바로잡는 임무를 부여받은 재무관이 국가의 상부구조인 원로원 의원에게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당연하다. 재무관에게는 사회 지도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된 원로원 의원의 의석을 박탈할 권한도 주어져 있었다. 일단 원로원에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의석을 빼앗길 염려가 없는 원로원 의원을 그 자에서 좇아낼 수 있는 권한은 재무관만이 갖고 있었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는 이처럼 몇 겹으로 견제 기능을 마련하여 권력 남용을 방지하고 있었다. 재무관이 두 명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정 시대에 들어오면,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인 티베리우스와 함께 재무관에 취임한 것이 선례가 되어, 황제가 재무관을 겸임하게 된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도 티베리우스도 클라우디우스도,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도 재무관에 취임하긴 했지만, 겉으로는 국세 조사를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고, 원로원 의원의 의석 박탈권이라는 '무기'는 끝내 칼집에서 빼지 않은 채 임기를 마쳤다. 전가의 보도는 칼집에 그대로 넣어두어야만 보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이 선례가 깨진다. 서기 83년 가을, 제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뒤에 그는 동료 한 명과 함께 재무관에 취임했다. 그리고 1년 반의 임기가 끝난 서기 85년 봄, 이번에는 종신 재무관에 취임했다. '종신 독재관'(딕타토르 페르페투아)은 율이우스 카이사르가 새로 마련한 자리였고, '종신 재무관'(케소르 페르페투아)도 도미티아누스가 새로 마련한 관직이다. 물론 동료가 없이 혼자 취임했다. 원로원이 긴장한 것도 당연하다. 대규모 공공사업은 황제의 지위와 이름으로 얼마든지 시행할 수 있고, 국세조사도 10년 전에 실시했다. 로마 제국의 국세조사는 오늘날의 세금 확정신고와 비슷하지만, 조사가 어렵기 때문에 30년에 한번꼴로 실시하는 게 보통이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가 재무관 취임에 집착하는 것은 공공사업이나 국세조사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원로원 의원이 아니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종신 재무관에 취임한 뒤에도 도미티아누스는 손에 넣은 '무기'를 좀처럼 빼들지 않았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가 그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이 '무기'를 빼들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 속주 총독 켈리아리스가 역모를 꾸민 협의로 결석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건이 일어난 서기 87년부터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사건도 일어났다. 이 두 사건은 원로원 내부의 황제 반대파가 군단 지휘권을 가진 속주 총독을 부추긴 결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무렵 도미티아누스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건설하고 도나우 강 북쪽의 야만족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전선과 수도를 오가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40세 안팎의 나이에는 분노를 억제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기'를 뺐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 숙청에 앞잡이로 이용한 것이 바로 '델라토르'였다. 클린턴 대통령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스타 특별검사가 의회의 공화당 간부들을 표적으로 삼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면, 서기 90년대 이후 도미티아누스의 뜻을 받들어 움직이는 '델라토르'들과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 사이에 존재했던 팽팽한 긴장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로원 의원인 타키투스의 붓이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증오감에 물든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는 고귀한 태생도 아니었다. 인간은 왠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사람한테는 너그럽고, 고귀한 혈통도 아니고 고귀하게 자리지도 않은 사람이 강권을 휘두르면 신경질적으로 반발하는 경향이 있다. 도미티아누스를 비난하는 타키투스의 언급 가운데 '고귀한 혈통도 죄로 간주되었다'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고귀한 혈통도 아닌데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은 티투스처럼 "좋은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날은 하루를 손해본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할 만큼 착해야 하고, 베스파시아누스처럼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좋아하지만 황제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 작은 도시에 이익을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만큼 사심이 없어야 한다. 플라비우스 씨족은 전통의 명문 귀족인 율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 씨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할아버지 대에는 무엇으로 생계를 꾸렸는지도 알 수 없는 지방 출신 가문에 불과하다. 그런 지방 출신이 종신 재무관에 취임하여 원로원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원로원에는 최근 감소 추세가 뚜렷하긴 하지만 아직도 명문 귀족 출신 의원들이 건재해 있었다. 게다가 도미티아누스는 토지가 한정되어 있는 도심의 팔라티노 언덕에 웅장한 궁전을 신축했을 뿐 아니라, 알바에는 산장을 짓고 치르체오에는 해변 별장을 짓고 잇다. 토지에 제한이 없었기 때문인지, 치르체오 별장은 지금 남아 있는 유적으로 상상해보아도 유난히 규모가 컸다. 이 정도는 되어야 로마 황제의 휴식처로 어울린다는 느낌마저 든다. 별장이라기보다 궁전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할 만큼 웅장하고 화려하다. 이곳에 틀어박힐 때면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에게 아부하는 글 조차도 신랄한 풍자로 톡 쏘는 맛을 내지 않고는 성이 풀리지 않는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를 데려가는 게 보통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카프리 별장도 치르체오 별장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정도다. 이 '별장'보다 웅장하고 규모가 큰 황제 별장은 그로부터 40년 뒤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티볼링에 지은 '별장'뿐이다. 도미티아누스는 말할 것이다. 시민을 위한 공공사업은 하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공적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해서 사적으로 무슨 짓을 하든 괜찮은 것은 아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도미티아누스보다 젊은 시절에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보다 언행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암살
서기 96년 9월18일,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암살되었다. 15년하고도 닷새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에, 45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맞은 죽음이었다.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가 음모를 꾸민 결과는 아니다. 네로 황제 말기에 갈리아 속주 총독 빈덱스가 황제를 규탄했을 때처럼 속주에서 불만이 터져나온 것도 아니다. 그런 불만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황제에 대한 군단의 충성도 확고했다. 네로 황제의 경우에는 군단병이 자기네 사령관을 화제로 추대한 것이 실각의 발단이 되었지만, 도미티아누스의 경우에는 7년 전에 딱 한번 마인츠에서 그런 일이 있었을 뿐 그후로는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안전과 식량은 보장되고, '서커스'도 이따금 열리는 야간경기를 포함하여 충분히 제공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도 불만이 없었다. '델라토르'를 이용한 원로원 탄압도 서민들에게는 강 건너 불이었다. 오늘날의 우리가 정치인들의 권력투쟁에 무관심한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것이 황제에게 불만을 품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요컨대 원로원도 시민도 군단도 속주도 도미티아누스 암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현직 황제를 살해하는 대담무쌍한 계획을 세우고 결행했을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도미티아누스는 아직 황제의 아들이었을 무렵 그와 동갑이거나 조금 나이가 많은 도미티아(네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의 딸)에게 반하여, 이미 남편이 있었던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성공했다. 미모와 기품을 두루 갖춘 도미티아는 아내와 사별한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도, 유대 공주에 대한 사랑을 체념한 뒤에는 독신을 고집한 티투스 시대에도 로마 궁정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실상의 '퍼스트 레이디'였고, 도미티아누스가 30세에 지위에 오른 뒤에는 황후였다. 그녀만큼 완벽한 '퍼스트 레이디'는 당시에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었을 것이다. 권력을 등에 업고 오만하게 굴지도 않고, 그렇다고 경박하게 서민 흉내를 내지도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이다. 그야말로 '황후'(아우구스타)라는 존칭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우아한 취미를 가진 완벽한 여인이었다. 도미아누스도 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어릴 때 죽었지만, 그것도 두 사람의 사랑에 그늘을 드리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지 3년에 최초의 '그늘'이 드리워지게 되었다. 당시 도미티아누스는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 때문에 라인 강 전선에 머물 때가 많았고, 카티족과의 전투까지 겹치는 바람에 로마를 오래 비우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돌아온 황제를 맞이한 것이 황후가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었다. 상대는 비극배우인 파리스라고 한다. 32세의 도미티아누스는 깊이 조사해보지도 않고 소문을 곧이들었다. 파리스는 살해되고, 황후는 이혼을 당하고 황궁을 떠났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혼자 오랫동안 산책하기를 무엇보다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가 이렇게 저녁시간을 보내는 버릇도 이 무렵부터 시작된 모양이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에는 카프리 섬 절벽 이에 솟아 있는 별장을 찾아가는 황제가 하나도 없었지만, 도미티아누스만은 이따금 그곳에 가서 머물렀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게 사실인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고독이 젊은 황제의 반려가 된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고독을 벗삼아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불과 2년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티투스에게는 율리아 플라비아라는 딸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에게느 조카딸이다. 율리아는 남편을 여의고 친정에 돌아와 있었다.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는지, 숙부인 도미티아누스가 사는 궁전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숙부와 질녀의 관계가 언제부터 남녀 관계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궁전에 살면서도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한테도 눈치채이지 않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좋다고 생각지 않은 것은 도미티아누스 쪽이었다. 어떤 경위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1년도 지나기 전에 그는 이혼했던 황후와 재결합했다. 도미티아는 다시 궁정의 여주인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율리아도 궁전에 계속 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끝내 재혼도 하지 않았다. 이 율리아가 갑자기 죽었다. 이 돌연한 죽음을 계기로 처첩이 한 집에 동거했다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율리아가 임신하자 도미티아누스가 낙태를 강요했고, 그 때문에 율리아가 죽었다는 소문이 하인들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갔다.
도미티아가 분노와 굴욕감을 씹으면서 남편의 연애를 그냥 참고 넘겼다면, 라이벌의 죽음으로 문제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율리아가 죽은 것은 서기 88년 무렵이니까, 도미티아누스가 피살된 96년보다 8년 전이다. 그 8년 동안 도미티아누스 주변에 아내 이외의 여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이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라이벌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여자끼리의 문제지만, 한쪽이 죽으면 남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여자가 라이벌이 된다. 교양 있고 성격도 드세고 자존심도 강한 여자에게, 남자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라이벌만큼 힘든 상대는 없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여자의 가슴 속에 솟아나는 증오는 라이벌의 그림자를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에게 돌려지는 법이다. 게다가 율리아가 죽은 뒤로는 원래 내성적이었던 도미티아누스가 더욱 마음을 닫게 되었고, 별장에 갈때에도 혼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알바 산장에서는 호수를, 치르체오별장에서는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뒤에 남은 아내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 남자 옆에서 사는 여자의 속마음은 고뇌와 증오가 뒤엉키면서 그대로 얼어붙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충성스런 측근들까지 납득시키기에는 근거가 너무 개인적이었다. 하지만 율리아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서기 95년에 측근들까지 동조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만 황후의 심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고뇌와 증오였지만, 그녀의 측근들이 품은 것은 공포였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라는 두 아들말고도 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플라비아. 삼남매 가운데 맏이였던 모양이다. 플라비아가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편과의 사이에 역시 플라비아라는 딸을 두었다. 남편의 신원이 확실치 않은 것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 즉 제국의 방위를 담당하는 10명 내지 20명의 군단장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을 때 결혼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이상, 황제의 외손녀인 플라비아의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결국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으로서 내전 기간에 피살된 사비누스의 손자인 클레멘스가 결혼 상대로 선택되었다. 불쌍하게 죽은 율리아도 클레멘스의 형과 결혼했으니까, 한 집안에서 근친결혼을 되풀이한 셈이다. 이것은 플라비우스 씨족이 제위를 계속 잇게 하겠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결심을 반영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플라비아와 클레멘스 사이에는 두 아들이 태어났다. 티투스는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아들도 어릴 때 죽었다. 제위에 오른 뒤 도미티아누스의 조카딸이 두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름도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로 바꾸고, 제국의 지도자 예비군을 위한 '교육 과정'을 작성한 퀸틸리아누스에게 이 소년의 교육을 맡겼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두 젊은 제위계승자의 친부모인 클레멘스와 플라비아가 둘다 어느 종교에 귀의해버린 것이다. 종교 문제에 괸대한 당시 로마에는 종교가 수없이 많았지만, 그들이 귀의한 종교는 기독교였다는 게 초기 기독교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로마 제국의 국교였던 다신교가 아니라 오리엔트에서 건너온 일신교였던 것은 분명한 듯싶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본받아 '세기제'를 거행하고, 로마의 전통 종교를 진흥하여 제국 통합에 이바지하려 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로서는 난데없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교를 믿는건 자유지만,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의 친부모가 로마의 전통 종교를 버리고 이교를 선택했다면, 이는 그냥 내버려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와는 별개 문제다. 서기 95년 가을로 접어들 무렵, 클레멘스와 플라비아 부부는 고발당했다. '델라토르'들이 증거를 굳히기 위해 활약한 결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식 재판을 거쳐 클레멘스는 사형, 플라비아는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유배지는 판다타리아(오늘날의 벤토테네) 섬이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불륜을 저지른 딸 율리아를 귀양보내고,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역모를 꾸민 며느리 대 아그리피나를 귀양보낸 섬이다. 치르체오에서 남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니까, 망망 대해에 떠 있는 외딴섬은 아니다. 또한 황족의 유배지가 된 뒤로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조에서부터 물고기를 가두어두는 수족관까지 완비되어 있어서 생활에도 큰 불편이 없었다. 위험분자를 격리해두는 것치고는 좋은 대우였다. 하지만 황족인 클레멘스는 사형에 처해졌다. 플라비우스 씨족은 신흥계급에 속하기 때문에, 일가붙이가 처형당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 않다. 게다가 죽인 사람도 죽은 사람도 같은 씨족의 일원이다. 플라비우스 씨족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공포에 사로잡혔을 게 분명하다. 이 공포와 황후의 증오가 뒤섞인다면... 테러 행위는 측근에 있는 사람이 결행할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침실에서 자고 있는 도미티아누스를 덮친 것은 도미티아 황후를 모시는 스테파누스라는 해방노예였다. 하지만 황제는 나이도 40대 중반이고, 게다가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스테파누스 혼자 결행할 수는 없었을 테고 당연히 동지가 있었을 테지만, 그들의 이름이나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암살자들이 침실에 침입하자마자 안쪽에서 빗장이 걸렸다. 황궁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하인과 호위병들이 있었을 텐데, 황제의 침실에서 사투가 벌어지는 동안 현장에 달려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곡절이 있었던 것일까. 더구나 무방비 상태에서 여러 명의 습격을 받았다면, 아무리 건장한 도미티아누스라도 힘이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일이 끝난 뒤에는 뒤처리도 빨랐다. 그제야 호위병들이 달려왔고, 그들은 암살자들을 현장에서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러고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집정관을 지낸 적도 있는 원로원 의원 네르바에게 당장 사람을 보냈다.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원로원은 횡재라고 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당장 회의가 소집되고, 그 자리에서 모든 대책이 결정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근위대만이 아니라 국경을 지키는 군단에도 인망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누구의 의향에 따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로 지명된 네르바에게는 즉석에서 황제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한이 인정되었다. 공식으로 로마 황제로 승인한 것이다. 게다가 죽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기록말살형'에 처한다는 결의까지 해버렸다. 근위대나 군단의 움직임을 미리 봉쇄하자는 것이 '기록말살형'의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황제 암살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문제삼지도 않았다. 네로와 마찬가지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이상, 도미티아누스를 황제묘에 장사지낼 수는 없다. 아무도 인수할 사람이 없는 시신을 인수하여 몰래 화장한 사람은 도미티아누스의 유모였다. 어머니 대신 도미티아누스를 키웠고, 그후에도 바로 곁에서 온갖 시중을 들면서 보살펴준 여자 노예였다. 그런데 이 여인은 도미티아누스가 신격화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모시기 위해 세운 플라비우스 신전 한구석에 도미티아누스의 유해를 매장할 때 이상한 행동을 했다. 도미티아누스의 유해를 먼저 매장되어 있던 율리아의 유해와 섞어서 매장한 것이다. 도미티아누스는 '기록말살형'으로 묘비조차 세울 수 없게 되었지만, 무덤속에서는 율리아와 함께 잠들 수 있었다. 이리하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이은 두 번째 세습 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도 27년 만에 무너졌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뒤 도미티아누스가 죽을 때가지 27년을 세 황제가 다스린 셈이다. 로마 제국의 직면한 위기를 수습하고, 제국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고, 게다가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정책을 시행하여 제국의 활력을 되찾고, 로마 제국이 번영으로 나아갈 기반을 쌓은 것이 '플라비우스 왕조' 황제들의 최대 업적이라는 게 현대 역사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다만 이 평가는,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보다 그 인물이 국가(Res publica)를 위해 무엇을 이룩했는가를 중시해야만 내릴 수 있는 평가다.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3 장 신심(信心)이 성지(聖地)다
2. 농산행
일본 비예산(比叡山)은 천태종 본산으로 여기네 연역사(延曆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천태종이 전교(傳敎) 대사에 의해 그곳에서 개종한 지 약 1,200년이 되었는데, 1,200년을 계속 내려 오면서 12년을 단위로 농산행(籠山行)이라는 수행을 합니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영리하고 가장 신심있는 사람을 골라서 12년 동안 비예산 정토원(淨土院)이라는 절에 앉혀두고 공부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농산행이라고 합니다. 12년 만기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공부 방법이 1,200년 동안 한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습니다. 12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대를 잇고 또 12년이 지나면다른 사람이 들어가기를 100명째 계속 해온 것입니다. 들어가는 첫째 조건은 대승계를 받는 것인데 그 때의 계는 부처님에게서 직접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부처님에게서 받느냐 하면 기도를 간절히 하면 부처님께서 나타나 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상(瑞相)을 본다'는 것입니다. 농산을 할 때는 반드시 기도를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느냐 하면 하루에 삼천배씩 절을 합니다. 이 때삼천 불명경이란 것이 있어서 이것을 펴 두고 부처님 명호를 한번씩 부르면서 절을 하는데,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아주 정성껏 해야 하며, 절을 한번 하고는 가루 향을 한번씩 사루고 다시 절을 해야 합니다. 아주천천히 하루종일 스물네 시간 동안 절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백련암에서 삼천배씩 절을 시켜보면 어떤 사람은 제트기가 날아가듯 빨리 하여서 세 시간이나 네 시간만에 끝내는 사람도 있습니다.그러나 농산행을 할 때는 이렇게 아주 시간을 많이 들여 천천히 절을하되 부처님께서 직접 나타나서 계를 주기 전에는 그칠 수가 없습니다. 삼천배를 마치고 나서는 또 쉬는 것이 아니라, 가사 장삼도 벗지 못하며 앉고 눕지도 못하고, 변소 갈 때 이외에는 언제나 장좌(長坐), 곧그대로 앉아 지내며 누워서 자지도 못합니다. 2년이든 3년이든 부처님이 나타나서 계를 줄때까지는 그치지 않고 삼천배를 하면서 온 정성을 다 바쳐 기도하며 고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몇 달만에 부처님이 나타나는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년 이 걸리기도 합니다. 1,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농산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서상을 못 본 채 12년 동안 농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 해 전에도 12년 동안 농산을 하여 성취한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습니다. 그는 지극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니 부처님이 나타나서 계를 설하더라고 했습니다.
농산행을 할 때는 그 먼저 농산행을 한 사람이 스승이 됩니다. 그것은 실제 부처님에게서 계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자신들이직접 체험했으니 다른 사람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1,200년 동안 농산행을 계속하여 이어내려왔으니,농산행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일본의 모든 불교 단체와 불교도가 다 아는 일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부처님이 돌아가셨으니 그만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못 본다고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눈 감은 봉사가, 누군가가 "해가 참 밝고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눈앞이 캄캄하다고 해서 그를 미친놈이라고 욕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진리의 눈을 뜨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천태 지자(天台智者) 선사가 혜사스님을 찾아가서 공부를 하고 바로깨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영산회상이 엄연부산(儼然不散)함을 자기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 말은 곧 영축산에서 부처님이 상주하여 수많은 대중을거느리고 법을 설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수천 년인데 지금도 영축산에서 법문을 설한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느니죽느니 하는 것은 꿈속에 사는 눈 먼 중생들이 하는 말이요, 참으로 꿈을 깨어 눈이 뜨이게 되고 귀가 열리면 부처님이 항상 계시면서 법을 설함을 보고 들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백억의 몸으로 나투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다니시며 중생을 구하십니다. 그래서 설사 꿈을 깨지못한 사람이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을보려 하면 누구든지 다 볼수 있는 것이니,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정성이 부족한 탓입니다. 우주 전체의 중생들이 정성만 지극하면 한 날 한시에 다같이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 병을 고친 사람, 큰 액난을 면한 사람, 죽을 것을 살아난 사람등 그밖의 여러가지 기적이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신통력 갖추고
널리 지혜 방편 닦아
시방 모든 국토에
어느 곳에든 헌신 않는 곳 없다.
具足神通力 (구족신통력)
廣修智方便 (광수지방편)
十方諸國土 (십방제국토)
無刹不現身 (무찰불현신)
달이 뜨면 천 개, 만 개 강에 달 비치듯이(千江有水 千江月), 부처님은 시방세계 어느 곳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현신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아주 돌아가 없어졌으면 모든 기적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 그 정성의 정도에 따라 가피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꿈속의 중생들이 대하는 부처님이어서 잠깐 동안입니다. 그러나 꿈을 깨어 법(法)의 눈을 밝게 뜨면 부처님을 항상 안 볼래야 안 볼 수없는 것이니 부지런히 공부해서 속히 마음의 눈을 뜰 것입니다. 흔히 염기염멸(念起念滅)하는 것 곧 생각이 일어났다가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하는데, 이러한 생멸하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해탈이라고합니다. 염기염멸하는 그 생각이 없으면 생사도 없습니다. 이것이 철저하여, 제8아리야식의 근본무명, 무시무명(無始無明)까지 모두 끊어지면 미래겁이다하도록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를 참으로 잘 믿으려면, 불교의 근본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눈 먼 망아지가 요령소리만 듣고 따라가다가는 똥구덩이에 빠지고 흙구덩이에 처박히고 덫에도 걸리고, 심지어는 죽기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목표는 생사해탈에 있습니다. 해탈이란 일시적인 자유가 아니라 영원한 자유입니다. 영원한 자유라 함은 생전사후(生前死後)를 통해서 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해서 영원히자유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보기에서도 보았듯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결코 전설이나 신화가 아닙니다. 실제로 영원한 자유가 없다면 굳이 부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욕심대로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면 아무도 고생하면서 수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자유, 영원한 해탈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고행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천자(天子)보다 더 높은 이라도 죽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그만이 아닌 영원한 자유를 구하기 위해천자도 내버리고 참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
|
독서실 → 수필
|
|
|
모리의 마지막 수업 - 모리 슈워츠
다섯, 기억의 끈
과거와의 화해
과거를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그냥 과거로 받아들이십시오. 과거에 대해 회상을 하는 것은 좋으나 과거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요컨대 과거에 붙들려서는 안 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심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가슴 가득 과거에 대한 후회는 채우고 잇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내가 그때 이렇게만 했더라면..."
"그 여자랑 결혼만 했어도..."
"그때 그 직업을 택하는 건데..."
그러나 이처럼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차라리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자문하는 것이 낫습니다. '과거의 그 경험에서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까? 실제로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그 경험이 지금 내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환자와 그 주변의 사람들, 특히 환자와 간호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다면, 환자나 간호하는 사람 모두에게 투병은 두배 이상 힘겨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환자와 간호하는 사람 사이의 화해는 투병의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과거에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병이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그 사람에 대함 미움의 감정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의 좋지 않았던 관계에 얽매여 미움의 감정을 품은 채 환자를 간호한다면, 간호하는 사람과 환자 모두 더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인간 관계는 매우 복잡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그 사람과 얽힌 과거사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병에 걸리기 전에 그 사람과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한동안 감정을 접어 두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을 열고 사랑을 담아 환자를 돌보기 위해 반드시 모든 감정을 깨끗이 정리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환자가 먼저 이야기하게 하고 간호하는 사람은 거기에 대답을 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환자들 중에는 과거에 대해 전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과거의 일 중에서 일부만 선택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과거에 대해 전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제삼자에게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병에 걸렸을 때 자기 배우자나 그 밖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병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환자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가능한 한 부드러운 말로 질문을 하고 환자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는 여러분의 방식과 환자의 방식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환자의 방식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용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용서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억울한 생각을 없애 주며, 죄책감을 녹여 줍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나머지,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자신을 책망합니다. 이를 극복하는 첫 번째 단계는 꼭 해야 했던 일을 하지 않은 '자신'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러 저린 '자신'에 대해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기 내부 깊숙한 곳에 있는 죄책감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별로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용서는 과거와 화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운 후, 과거에 대한 깊은 후회나 슬픔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예전에 어떤 직장 동료를 비열하게 대했던 일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지냈습니다. 그와 나는 같은 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와 함께 그룹을 이끌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그에게 불친절하게 굴었으며, 나중에야 그것이 부당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20년 동안 이 짐을 지고 있었네. 그때 내가 자네에게 했던 말, 했던 행동 때문에 나는 정말 괴로워하고 있어. 진정으로 자네의 용서를 구하고 싶네."
그러자 그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아, 그런 일에 너무 신경쓰지 말게. 내가 사람들에게 퇴짜를 맞은 것 같아서 우울해하고 있을 때, 자네가 나를 끌어안고 위로해 줬던 걸 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네." 그가 너무나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안도감을 느낀 나머지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기억의 끈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해 온 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성공적으로 해냈던 일들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십시오. 과거 속에서 뒹구는 것과 과거를 이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옛날에 내가 아주 못된 인간을 만나서 나도 같이 못되게 굴었던 것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렇게 못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타나 못된 짓을 하도록 부추길 때, 이제 나는 그 경험을 되살려 그때와는 다른 반응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를 이용하는 기본 방법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과거의 성공에서 위안을 얻고 실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병상에 누워 있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고, 뒤엉켜 버린 관계는 풀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은 매듭을 짓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여섯. 적극적인 삶
또 하나의 나
여러분이 흥미를 갖고 있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혹은 염려하고 있는 일들에 몰두하십시오. 정열적으로 그 일에 전념하십시오. 세상에는 평생 동안 어떤 일에도 정열적으로 몰두하지 못하고 마치 백일몽을 꾸는 것처럼 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정열적으로 몰두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일에든지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앉아서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진정으로 애정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지, 인생의 추진력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과연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모든 역할들이 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여러분은 그 역할들 이상의 존재인가요? 사회학자 어빈 고프만은 양파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 가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해체주의자들도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속의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 핵심 자아라고 일컬을 수 잇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각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자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도 공동체와 타인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존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주변의 세상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쓸모 없는 존재란 없다.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의 끝에는 우울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으십시오. 중병을 앓고 잇는 사람들에게 닥쳐오는 심각한 위험 중의 하나는 삶의 목표를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의합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엣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나는 그저 그날 그날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가? 목표가 없는 사람은 금방 우울해져서 왜 아침마다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위해 목표를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목표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보관해 두고 싶었던 신문 기사를 오려 두는 것을 그날의 목표로 삼아도 좋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손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처럼 다소 거창한 일을 목표로 삼아도 좋습니다. 혹은 읽고 싶었던 책을 읽겠다는 결심도 훌륭한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목표가 크면 클수록 여러분은 죽어 가면서도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커다란 동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나는 목표를 여러 개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을 친밀하고 사랑스럽게 대하는 것이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 밖에도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듣고 싶은 음악도 많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목표조차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표를 찾아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 목표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언젠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전혀 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나 역시 이제 곧 침대에 누워 잇는 것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가능한 한 활동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말을 하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도 나는 내적인 평화를 느끼며,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적극적인 삶을 살거나 자신의 흥미 분야를 바꾸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처리하기엔 너무 때가 늦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루게릭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직후에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병에 걸린 나 자신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내 자아를 보고 싶었고, 이로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최초의 동기입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 경험하는 것들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쓰기 시작한 얼마 후에 나는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내 친구들에게도 알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친구인 슈타인에게 내 글을 보냈습니다. 그 글을 읽어 본 후에 슈타인은 가족과 친구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쓴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건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 거야. 아픈 사람들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슈타인은 [보스턴 글로브]지의 논설 위원인 앨런 버거에게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 내가 쓴 원고에 대한 기사를 써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부추겼습니다. 그리하여 앨런은 잭 토머스에게 연락을 했고, 토머스는 세 번이나 나를 찾아와서 인터뷰를 한 뒤에 [보스턴 글로브]지에 기사를 썼습니다. 보스턴에 살았던 [나이트라인]의 프로듀서인 리처드 해리스는 [보스턴 글로브]지에 실린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이트라인]과 인터뷰를 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날 녹화 팀이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8시간인가 10시간 동안 내 가족들과 우리 집, 나를 도와주고 있는 간병인과 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 후에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천만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었습니다. 천만 명이라면 브랜다이스 대학의 내 강의에 참석했던 그 어떤 청중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이 기뻤고, 내가 평소 때의 나 자신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나는 원래 수줍음을 잘 타는 편이라서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텔레비젼에 출연하는 것은 내게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나는 [나이트라인]이 방송된 후 약 150면의 사람들에게서 내 말에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내가 했던 그런 경험은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텔레비젼에 출연해서 인터뷰를 하거나 책을 쓸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남들을 위해 무언가 기여할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유쾌하지 못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가족에게 격려의 의미로 미소를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가족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