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41호 - 2024.07.27 토요일(음력 : 06.22)
angelo@nownforever.co.kr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교양이란 화를 내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은 채 어떤 얘기라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 로버트 프로스트(美 시인)
|
|
글나눔 → 말글
|
|
|
‘썩히다’와 ‘삭히다’
‘썩다’의 옛말은 ‘석다’이다. ‘삭다’의 기본뜻은 ‘물건이 오래되어 본바탕이 변하여 썩은 것처럼 되다’이다. ‘썩다(<석다)’와 ‘삭다’가 본래 한가지에서 나온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썩다’와 ‘삭다’는 각각 두 가지의 사동사를 취한다. 사동사란, 문장의 주체가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남에게 그 행동을 하게 함을 나타내는 동사를 말하는데, ‘썩다’에 대해서는 ‘썩히다’와 ‘썩이다’가, ‘삭다’에 대해서는 ‘삭히다’와 ‘삭이다’가 그것이다. 대개의 동사들이 사동사를 하나만 취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예: 울다-울리다, 웃다-웃기다, 입다-입히다, 속다-속이다)
‘썩히다’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세균에 노출시켜 부패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풀을 썩혀서 거름을 만들다’ ‘음식을 썩히지 않으려면 냉장고에 넣어 두어라’와 같이 쓸 수 있다. 둘째는 ‘활용하지 않고 묵히거나 내버려두다’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이다. ‘좋은 재주를 썩히지 마라’ ‘값비싼 장비를 활용하지 않고 썩히고 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썩이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애타게 하거나 괴롭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친구 술버릇이 잘못 들어 골치깨나 썩이는군.’과 같이 쓸 수 있다.
‘삭이다’에도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소화시키다’라는 뜻이다. “돌도 삭일 나이에 그렇게 소화를 못 시켜서 어떻게 하냐”와 같이 쓸 수 있다. 둘째는 ‘어떤 감정이나 생리 작용을 가라앉히다’라는 뜻이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다’ ‘가래를 삭이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삭히다’는 ‘음식을 발효시켜 맛이 들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삭힌’ 홍어는 먹을 수 있어도 ‘썩힌’ 홍어는 먹지 못하는 것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옥상’의 ‘일광욕 의자’
여름 하면 떠오르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긴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이다. 필자는 그 의자를 무어라 부르는지 궁금했었는데, 최근 그 이름이 ‘선베드’라는 것을 알았다. 여름 휴가철 용어로 이와 같이 낯선 외래어는 또 있다. ‘풀빌라’는 전용 수영장이 딸린 숙박업소, ‘루프톱’은 야외 카페 등이 있는 건물 옥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역시 필자에게는 생소한 말들이다.
가뜩이나 무더운 여름, 이런 외래어들은 뭔가 거추장스러운 옷 같다는 느낌이다. 다행히 최근 국립국어원은 이 세 가지 여름 휴가철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어 선보였다. ‘선베드’는 ‘일광욕 의자’, ‘풀빌라’는 ‘(전용) 수영장 빌라’, ‘루프톱’은 ‘옥상’으로 다듬은 것이다. 그 말들로 대화를 한번 꾸며 보았다.
“김 대리, 이번 여름휴가 어디로 가나?”
“네, 저는 가족끼리 전용 수영장 빌라(←풀빌라)에 가 보려고요. 과장님은요?”
“아, 나는 어디 가까운 빌딩 옥상(←루프톱)에 가서 일광욕 의자(←선베드)에 누워서 잠이나 푹 잘 거야.”
이렇게 쉬운 말을 쓰면 시원스럽게 뜻이 통하지 않는가? 괄호 속의 ‘풀빌라, 루프톱, 선베드’의 낯선 말보다는 ‘전용 수영장 빌라, 옥상, 일광욕 의자’가 가볍고 편한 느낌이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재충전하면서 이 말들도 한번쯤 생각해 보자.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
|
주막에서 - 천상병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장 쥬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한디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해협 - 정지용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선창으로
눈썹까지 부풀어오른 수평이 엿보고,
하늘이 함폭 나려앉어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투명한 어족이 행렬하는 위치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라ㅅ속 같이
소란한 무인도의 각적을 불고-
해협 오전 두시의 고독은 오롯한 원광을 쓰다.
서러울리 없는 눈물을 소녀처럼 짓쟈.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 !
다음날 항구의 개인 날세여 !
항해는 정히 연애처럼 비등하고
이제 어드매쯤 한밤의 태양이 피여오른다.
~~~~~~~~~~~~~~~~~~~~~~~~~~~~~~~~~~~~~~~~~~~~~~~~~~~~~~
國立圖書館(국립도서관) - 김수영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당시의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고
누구나 어른들은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 우열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구태여 달관하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에
샘솟아나오려는 이 설움은 무엇인가
모독당한 과거일까
약탈된 소유권일까
그대들 어린 학도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연령의 넘지못할 차이일까......
전쟁의 모든 파괴 속에서
불사조같이 살아난 너의 몸뚱아리-
우주의 파편같이
혹은 혜성같이 반짝이는
무수한 잔재속에 담겨있는 또 이 무수한 몸뚱아리-들은
지금 무엇을 예의 연마하고 있는가
흥분할 줄 모르는 나의 생리와
방향을 가리지 않고 서있는 서가 사이에서
도적질이나 하듯이 희끗희끗 내어다보는 저 흰 벽들은
무슨 조류의 시뇨와도 같다
오 죽어있는 방대한 서책들
너를 보는 설움은 피폐한 고향의 설움인지도 모른다
예언자가 나지 않는 거리로 창이 난 이 도서관은
창설의 의도부터가 풍자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1955. 8. 17>
~~~~~~~~~~~~~~~~~~~~~~~~~~~~~~~~~~~~~~~~~~~~~~~~~~~~~
6월엔 내가 - 이해인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유월
6월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생명을 향해
하얗게 쏟아 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6월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더욱 살아
산기슭에 엎드려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1 장 오매일여
3. 태고스님
지금까지 중국의 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선문 가운데에 태고(太古)스님이 계십니다. 태고스님은 공부한 지 20여년 만인, 나이 마흔에 오매일여가 되고 그 뒤 확철히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당시 고려의 큰스님네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인가해 줄 스님도 없고, 자기 공부를 알 스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임제정맥을 바로 이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 스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점점 오매일여한 때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
(漸到寤寐一如詩 只要話頭心不離)."
이 한 마디에 스님의 공부가 다 들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여 오매일여한 경계, 잠이 아무리 들어도 일여한 8지 이상의 보살 경계, 거기에서도 화두를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몽중일여도 안 된 거기에서 화두를 다 알았다고 하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 하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다면 이것이 가장 큰병입니다. 이 병은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고치려 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좋은 약을 가지고 와서, '이 약만먹으면 산다' 하며 아무리 먹으라 해도 안 먹고 죽는다면 억지로 먹여서 살려낼 재주 없습니다. 배가 고파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만반진수(滿盤珍羞)를 차려와서 '이것만 잡수시면 삽니다' 해도 안 먹고 죽으니 부처님도 어찌 해볼 재주가 없습니다. 아난이 부처님을 30여년이나 모셨지만 아난이 자기 공부 안 하는 것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입니다만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하여야만 실제로 바로 깨쳤다고 할 수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 되고, 몽중일여도 안 된 그런 깨침은 깨친 것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해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쳐야 합니다. 그래야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생각으로만 깨쳤다고 하는 것은 생사에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깨침이 아니라 불교의 병이요, 외도(外道)입니다. 참선의 근본요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공부는 실제로 오매일여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목숨을 던져놓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목숨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스님, 저는 화두를배운 지 십년이 지났습니다만 공부가 안됩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공부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은 결국 공부를 안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서울에 꼭 가고 싶으면 자꾸 걸어가야 끝내는 서울에 도착하게 되듯이, 십년 이십년을 걸어가도 서울이 안 보인다는 말은 서울로 안 가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4. 불등 순 선사
불등 순(佛燈詢)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조 법연 선사의 손제자(孫弟子)되는 분으로, 대혜 선사와는 사촌간이었습니다. 불감 근(佛鑑懃) 선사 밑에서 약 삼년 동안 공부하였는데 불감 근 스님께서 가만히살펴보니, 이 스님이 근기는 괜찮은데 게을러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불감 근 스님이 한번은 불등 순 스님을조용히 불러 "네가 내밑에서 얼마나 있었느냐?"라고 물으니, "삼년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삼년 동안 공부한 것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불동 순 스님은 큰일이 났습니다. 삼년 동안 밥이나 얻어 먹고 낮잠이나 자고 공부는 안 했으니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불감 근 스님께서 공부에 대해 한 마디 물어 보았으나 도무지 캄캄하여 대답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불감 근스님은 "이 도둑놈, 밥도둑놈아.삼년 동안 내 밥만 축냈구나. 삼년을 공부했다면 어찌 이것을 대답 못해? 밥만 축낸 밥도둑놈, 이런 놈은 하루 만 명을 때려 죽여도 인과도없어" 하고는 마구 패는 것이었습니다. 불등 순 선사는 가만 있다가는 아주 맞아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안 맞아 죽으려고 도망을 쳤습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도망가다가 처마 밑에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코도 입도 몸뚱이도 불감 근 선사와 똑같은데 왜 저 스님은 두들겨 패고, 나는 맞아야 하는가? 어째서 저 스님은 도를 성취했는데 나는 이루지 못하는가?' 이렇게 반성하며 다시 절로 들어가서는 자신이 스님에게 한마디 대답도 못하고 밥도둑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쫓겨났으니 바로 깨치게 될때까지라도 자지 않고 눕지도 않고 오직 서서만 지내겠다고 대중에게 선언했습니다. 정진은 계속 되었습니다. 밤이 되었는지 낮이 되었는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잊은 채 계속 정진하였습니다. 불감 근스님이 이를 보고는 용맹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불등 순스님은 화두 하나만 갖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루는 불감 근스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불등 순스님은 겁은 났지만 부르는데 안 갈 수가 없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스님앞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불감 근스님이 무슨 법문을 해 주시는데, 그 법문을 듣는 순간 불등 순스님은 무슨 법문을 해 주시는데, 그 법문을 듣는 순간 불등 순스님은 그만 확철히 깨쳤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인가를 받았습니다. 정진을 시작해서 도를 성취하기까지의 기간을 헤아려 보니 사십 구일 동안이었습니다. 사십구일 동안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는 것,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직 서서 공부만 했던 것입니다. 불등 순스님은 실제로 용맹정진을 했고, 그리하여 깨쳐서 인가를 받은 것입니다. 불감 근스님의 사형되는 분에 원오 극근 선사가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는 찾아왔습니다.
"그까짓 며칠 동안 공부한 것 가지고 뭘 안다고 인가를 해줘. 사람을 죽여도 푼수가 있지. 내가 봐야겠으니 그놈 오라고 해."
이렇게 불등 순스님을 불러서는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산모퉁이를 도니 절벽이 나오는데, 절벽 밑에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에는 깊은 소(沼)가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는데 원오스님이 그를 절벽 밑의 폭포 속으로 확 밀어넣더니 공부한 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물길이 깊어 발이 땅에 닿지도 않고, 입으로 코로 마구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데다가 폭포소리가 요란하여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정신을 잃게 해 놓고는 법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등 순스님은 마치 방안에 앉아서 대답하듯 묻는 말에 척척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을 본 원오스님은 "그놈 죽이기는 아깝구나. 끄집어 내줘라"라고 말했습니다.
|
|
독서실 → 수필
|
|
|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우리는 나그네이다.
자유인, 집 없는 선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찬미하곤 한다. 왜인가? 사람은 어떤 사슬에 묶여 끌려 다니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날 유럽의 개인주의적 전통이 시간이 갈수록 잊혀지고 동양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이 각광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한 해답일는지도 모른다. 모든 종류의 집산주의가 발흥하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인간이 인간적 반항성을 잊어 그것을 상실하고, 개인의 위엄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모든 형태의 인간적 사고를 압도하는 경제 문제와 경제 사상이 버티고 있으므로, 개인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미가 담긴 지식, 인간미 넘치는 철학 따위에 대하여 우리는 무지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위궤양 환자가 언제나 위에 대한 것만 생각하듯이, 경제적으로 문제성이 있는 사회는 언제나 경제만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 개인이란 전혀 무관심한 존재가 되고, 자기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가 되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인간다움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은 자동인형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란 존재보다는 톱니바퀴의 톱니 하나로서, 조합이나 계급의 일원으로서 또 소시민의 일원으로서, 자본가로서, 노동자로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인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환경에 맞서 대담하게 싸우는 소질조차 흔적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개성 대신 맹목적인 힘이 있고, 개인 대신 인간의 활동 일체를 제약하고 예시하는 사상만이 있다. 결국 모두가 개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 과학에 기울어지면서 집단화되고 개인은 수학의 방정식처럼 갈아치울 수 있는 숫자가 되어버린 지금에도 외계에 대한 개개인의 반응력은 물질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생명 발전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은 마치 현명한 의사가 환자의 기질과 개인적 반응이 투병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론적으로 회생이 불가능한 환자가 순식간에 완쾌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두 명의 환자에 대하여 똑같은 치료를 한 다음 동일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의사가 있다면 일종의 사회적 위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의사에 못지않게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개인을 잊고 저마다 다른 반응력을 잊고 자유분방한 인간의 행동을 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범주에서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을 긍정하고 지향해야 한다. 그것은 살맛 나는 인생을 위한 필수 요건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제도와 사상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경우든 간에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진 개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개인이란 생명의 궁극적인 실체이다. 그러므로 철학조차 개인에서 시작되어 개인에서 끝난다. 개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것은 인간 정신이 다른 것을 창조하게끔 하는 수단이 결코 아니다. 어떤 제도나 사상, 제국이나 법이란 것까지도 개개인의 나름대로 행복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거꾸로 인간이 한 국가나 제도를 위해 생활하는 존재라고 고집하고 있다. 그런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은 병적으로 그릇된 정신의 산물임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이러한 문제를 인간 문화의 면에서 바라보자. 나는 온갖 형태의 문화에 대하여 최종적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 문화가 빚어내는 남녀의 타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월트 휘트먼은 모든 문명의 최종 목표로써 개성주의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한 나라의 시가와 미학 등이 무엇 때문에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주로 그것들이 그 나라의 여성과 남성에 대해 개성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재료와 암시를 주고, 무수히 유효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개성에 대해 궁극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이 가장 건전한 마음일 때 의식 있고 뚜렷하게 높은 사상이 있다. 일체 의지하지 않고 홀로 있으며 별처럼 조용하게 영원히 빛나는데, 이것이야말로 본체론의 사상이다. 네가 누구건 네 것은 네 것, 내가 누구건 내 것은 나의 것. 그것은 언어를 초월한 기적 중의 기적이며 지상의 꿈 중에서 가장 심령적이며 막막하고, 게다가 가장 엄연한 기초적 사실이다. 온갖 진리로 통하는 문이 그 경건한 황홀 속에 있다. 우리가 거기에 심취하고 그 경이를 받아들인다면 대체 그보다 깊고 깊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천지의 중추에 내가 앉았거늘. 옛부터 내려온 신조나 전통도 모조리 힘을 잃고, 이 간단한 자아의 관념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만다. 환상이 진실로 빛나는 곳에 자아의 사상은 홀로 존재하여 광채를 발한다. 그는 이야기 속의 난쟁이처럼 한번 자유를 얻어 지상을 떠나면 천지에 퍼지고 천상에까지 이른다.'
결국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간혹 신문의 부고란을 보면 같은 시대 같은 날에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본다. 즉 같은 환경 속에서 그처럼 많은 변화로운 삶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열성적이고 확신을 가진 직업에 종사하며 행복을 발견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고생했지만 어떤 목표를 앞두고 좌절하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일을 가다가 지나가는 자동차에 치여 졸지에 세상을 하직하기도 한다.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 생활을 고도로 발달한 산업시대에서도 어이없을 정도로 기묘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동안에는 이런 갖가지 양상에 부딪친다. 이것이 한편으로 보면 바로 인생의 묘미인 것이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공공사업(1)
무엇이 언제 착공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정확한 사료가 없기 때문에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황제가 된 직후에 도미티아누스는 세 가지 공공사업에 착수했다. 첫째는 중세 이후 나보나 광장으로 탈바꿈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 불타는 바람에 사용할 수 없게 된 이상,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서민 전용 체육시설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기장만은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뒤에도 계속해서 '스타디움 도미티아니'(Stadium Domitiani)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름을 바꾸지 않은 것은 경기장 건설을 고맙게 여기고있던 평민들이 원로원 결의에 항의하면서까지 건설 당시의 명칭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가 착공하여 형이 준공한 콜로세움이다. 아직도 맨위층은 미완성인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초 계획대로 완성시키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기도 한 도미티아누스에게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세 번째는 '네르바 포룸'이다. 이 일대를 포룸으로 개발한 것은 도미티아누스였지만, 그가 죽은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다음 황제인 네르바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고, 따라서 지금도 '네르바 포룸'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대는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포룸과 베스파시아누스가 지은 '평화 포룸' 사이에 끼여 있는 세로 120미터, 가로 45미터의 길쭉한 것으로서, 이곳을 빠져나가 카이사르 포룸 옆을 지나면 포로 로마노에 이르기 때문에, 수부라와 포로 로마노를 잇는 통로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수부라는 활기에 차 있긴 하지만 서민들이 사는 지역이다. 한편 포로 로마노는 로마 제국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로서 그 위상을 점점 높여가고 있었다. 이 두 지역을 잇는 일대가 서민층을 상대하는 포장마차나 노점, 이를 뽑아주거나 수염을 깎아주는 가게들로 점령되어 있는 상태는 개선해야 한다고 도미티아누스는 생각했다.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포룸'은 사면 가운데 한 면에는 신전을 세우고, 나머지 삼면은 모두 회랑으로 에워싸는 것이다. 회랑 뒤쪽은 가게나 사무실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건축양식은 로마인이 좋아한 공간 활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는 모두 수도 로마의 주인을 위한 사업이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황제가 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임페라토르'라는 칭호에 부끄럽지 않도록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최고 책임자의 면모를 보이는 것이 로마 제국 황제에게는 필요불가결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황제는 적이 쳐들어온 뒤에 격퇴할 게 아니라, 미리 방위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어 야만족의 침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그 일을 단행할 시기가 왔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방위체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착수하기 전에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나는 병사들에 대한 처우 문제였고, 또 하나는 게르만족 문제였다.
봉급인상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무려 110년 만에 병사 급료를 인상했다. 남아 있는 사료로는 군단병, 그것도 직책이 없는 일반 병사의 봉급밖에 알 수 없지만,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20년이라는 복무 기간은 그대로였고, 만기 제대한 뒤에 받을 수 있는 퇴직금 3천 데나리우스도 변화가 없었던 모양이다. 비숙련 노동자의 하루 벌이가 12아시스였던 시대지만, 군단병에게는 의식주가 보장된다. 게다가 다른 직업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퇴직금도 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질병이나 부상으로 휴직해도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와 만나기 위한 '집'이나 외출할 때의 '옷'과 '식사'가 병사들의 주머니에서 지출된 것은 당연하다. 도미티아누스가 결정한 봉급 인상에 대해 원로원은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황제가 돈으로 병사들의 지지를 사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플레이션이 없었던 시대라 해도, '팍스 로마나'가 정착된지 100여 년 동안 생활 수준은 확실히 향상되었다. 그동안 제국의 경제규모가 확대된 것을 생각하더라도, 봉급 인상은 충분히 허용될 수 있는 시책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도미티아누스는 병사 1인당 봉급은 인상하되 로마군 병사의 총수를 줄이기로 작정하고 치세 말기에 그것을 실현했다. 요컨대 그는 군대의 정예화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평화가 100년이나 지속되면. 그리고 그 동안에도 사회 간접자본은 계속 정비 되었으니까. 제국 전역에서 경제가 활성화한 것은 당연하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군단에 자원입대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젊은이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후 100년. 직업을 가져야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젊은이들도 군대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얼마든지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 전체의 질을 유지하고 싶으면 보수를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미티아누스는 젊은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약삭빠른 재주를 보인다. 봉급은 인상하되. 그 인상분은 군단 소속 회계감사관에게 맡겨서 적립한 뒤. 만기 제대할 때 퇴직금과 함께 적립금을 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늘날 말하는 '사내 조합금' 과 비슷하지만. 병사들은 도미티아누스의 이 조치를 납득했다. 퇴직금은 만기까지 복무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지만. 이 적립금은 만기가 되기 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해도 그 병사의 근친자에게 지급하기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 이전에도 만기가 되기 전에 사망한 병사들에 대해서는 사령관이나 군단장이 유가족에게 약간의 보상금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들의 개인적인 배려였고. 퇴직금처럼 제도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받은 사람도 있지만. 받지 못한 병사도 많았다. 도미티아누스는 그것을 국가 시책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게르마니아 방벽'
군단병에 대한 처우를 개선한 뒤. 도미티아누스는 그들을 동원하여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를 건설했다. '게르마니아 방벽'의 필요성을 이해하려면. 지도를 펴놓고 살펴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이라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상류가 모이는 이 일대가 방위에서는 가장 취약하다. 강은 상류로 갈수록 산악지대로 들어간다. 험한 산악지대에서 인간이 통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강 연안뿐이다. 게다가 두 강의 발원지 근처에는 낮에도 어둡다는 뜻에서 '검은 숲'. 즉 '슈바르츠발트'라고 불리는 넓은 숲이 가로놓여 있었다. 로마군 병사들은 적과 마주보고 싸우는 회전에서는 압도적인 우세를 자랑했지만. 제국의 북쪽 방위선 너머에 살고 있는 것은 미개척지의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해오는 게르만족이다. "숲은 게르만의 어머니"라고 공언할 정도니까. 숲으로 도망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들이 훨씬 강했다. 브리타니아의 숲에서는 이길 수 있었던 카이사르도 게르마니아의 숲에서는 감히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방위선을 연결하여 두 강의 상류와 슈바르츠발트를 포함한 일대를 제국 영토 안에 넣어버리자는 생각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 문제가 아니었을까. 티베리우스 황제는 벌써 그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도미티아누스 이전에 라인 강과 도나우 강에서 싸워본 경험이 있는 황제는 티베리우스뿐이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는 문학이나 시보다 티베리우스가 남긴 명령서나 정책 입안서를 더 관심있게 읽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가 엘베 강까지 진격하여 게르마니아 중부를 로마 영토에 편입시키자는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을 배제하고. 게르마니아 서부와 중부를 가르는 라인 강을 방위선으로 확립하려고 애쓴 황제였다. 그런 티베리우스가 '검은 숲'을 방치해두는 위험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이후의 황제들이 그의 관심을 이어받지 않은 것은. 티베리우스가 라인 강 방위선을 철벽처럼 다져둔 덕분에 게르만족의 침입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험이 닥치지 않으면 대책을 가구 하지 않는 것은 로마인도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게르마니아 방벽'을 건설하려면 종래의 방위선인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족 거주지까지 진격해야 했기 때문에. 그 땅에 사는 게르만족을 평화적으로 굴복시키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전투에 호소해서 굴복시키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그래서 원로원은 필요도 없는데 쓸데없는 전쟁을 했다고 도미티아누스를 비난하게 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필요가 생기기 전에 선수를 치는 정책을 결행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이 방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더욱 보강하는 데 열심이었다. 트아야누스 황제가 도나우 강 방위선을 강화하는 일에 전념 할 수 있었던 것도 '게르마니아 방벽'이 기능을 발휘한 덕분에 라인강 방위선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는 구체적으로는 어떤 형태로 어디에 만들어졌을까.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로마 제국 시대의 변경 방벽은 잉글랜드와 스코들랜드의 경계선에 남아 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다. 영국인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이 방벽을 '헤이드리언스 월'이라고 부른다. 요소요소에 우뚝 솟아 있는 요새들은 석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로마 시대의 방벽은 모두 이런 것이었나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이런 형식의 '리메스'(변경 방벽)는 고대에 브리타니아라고 불린 오늘날의 영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변경을 지킨다는 목적은 같지만. 구조는 제각각 다르다.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도 다르고. 사막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처해야 했던 유프라테스나 북아프리카의 방위선은 또 달랐다. '게르마니아 방벽'에는 400미터 내지 700미터의 거리를 두고 사방 40미터의 석조 요새가 세워졌다. 각 요새 사이의 거리는 그것이 세워지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전망이 탁 트인 평지라면 간격이 길어지고. 복잡한 지형이라면 짧아지는 식이다. 각 요새 사이는 석벽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룻밤 밖에 지내지 않을 숙영지에도 깊이가 3미터나 되는 해자를 파고 돌은 발견할 수 있지만 나무는 썩어서 흙으로 변해버렸고. 해자도 2천 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건재했던 시대에는 V자 모양의 해자가 길게 이어져 있었을지 모르고. 그 안쪽에는 울타리가 이어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해자와 울타리가 길게 이어져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로마 군단에 딸린 기병대에는 게르만족이 많이 기용되었다. 이 기마민족의 말 다루는 솜씨는 예로부터 유명했다. 로마가 막아야 했던 것은 장사나 그밖의 평화적인 목적으로 로마 영토에 들어오는 게르만족 개개인이 아니라. 무장하고 쳐들어오는 게르만족 기마 집단이었다. v자 모양으로 깊이 판 해자와 몇 미터 높이의 울타리만으로도 기마 집단의 습격을 곤란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새를 지은 것은 거기에 틀어박혀 적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적의 내습을 알자마자. 좌우의 요새나 약간 후방에 자리잡고 있는 보조부대 기지에 연기나 봉화로 적의 침입을 알린다. 말을 타고 달려가서 전하는 경우도 있다. 도미티아누스는 후방기지와 요새 사이만이 아니라 요새와 요새 사이의 연락을 위해서도 염주처럼 요새들을 연결하는 도로를 요새 바로 밑에 건설했기 때문이다.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병만으로 부족하면.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군단이 후방 기지에서 출동한다. '게르마니아 방벽'에서는 오늘날의 독일 마인츠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그리고 스위스의 반디슈에 군단이 주둔해 있었다.
마인츠는 '리메스'와 가깝지만. 라인 강 상류에 잇는 스트라스부르와 '리메스' 사이에는 슈바르츠발트가 가로놓여 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검은 숲' 중앙을 가로지르는 로마식 가도를 건설했다. 낮에도 컴컴한 숲속을 로마식 도로가 관통한다는 것은 요즘 같으면 고속도로를 뚫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태까지는 좁고 구불구불해서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야생동물의 통로가 게르만족이 이용한 길이었다. 그런데 로마인은 거기에 고속도로를 뚫어버린 것이다. 마름돌을 평탄하게 깔아서 포장한 5미터 너비의 길 양쪽에 배수용 도랑까지 갖춘 로마식가도다. 게다가 깔린 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돌 밑으로 뿌리를 뻗을 위험이 있는 나무는 모두 잘라버린다. 길 양쪽의 나무를 폭넓게 베어 낸 데에는 방위상의 이유도 있었다.
로마식 가도를 뚫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나 말이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낮에도 어둡고. 그래서 숲의 민족인 게르만족의 요새였던 거대한 숲에 로마식 가도를 뚫는다는 것은 그 숲까지도 로마화하겠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슈바르츠발트에는 아우토반(독일의 고속도로)이 몇 개나 뚫려 있지만. 2천 년 전에 '아우토반'을 본 갈리아인과 게르만족은 로마인의 기술력에 눈이 휘둥그래졌을 것이다. 이로써 배후의 갈리아를 감시할 임무도 있었던 스트라스부르 군단은 기지를 옮기지 않고도 최전방인 '리메스'로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스위스 빈디슈에 군단기지를 둘 필요는 이제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게르마니아 방벽'은 어디에 건설되었을까. 저지 게르마니아와 고지 게르마니아의 경계선. 즉 오늘날의 본과 코블렌츠의 중간에서부터 마인츠 북쪽까지는 라인 강을 따라 나아가지만. 거기서부터는 라인 강을 벗어나 동쪽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네카어 강까지 품에 안으면서 곧장 남하하여 로르히에 이르면. 거기서부터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동쪽으로 나아가 레겐스부르크에서 도나우 강 방위선과 합류할 때까지가 '게르마니아 방벽'이었다. 전체 길이는 542킬로미터. 이로써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이라는 제국 북쪽의 양대 방위선은 서로 연결되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력으로도 제국의 북쪽 변경을 효율적으로 방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때까지 8개 군단이 필요했던 라인 강 방위선은 이제 6개 군단만으로도 충분히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감시용 요새와 보조부대 기지. 군단기지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망 참으로 로마 가도는 모든 면에서 로마 제국의 동맥이었다. 이 '게르마니아 방벽'이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였다. 악명이 높았던 황제. 게다가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된 황제가 착수한 일이라 할지라도.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면 주저없이 그 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보강한 로마 지도자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게르마니아 방벽'은 2천 년 뒤의 군사 전문가조차도 방위체계의 걸작이라고 평가하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 건설하는 것은 아니니까. 건설에 앞서 건설 예정 지역에 살고 있는 게르만족과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것은 당연하다.
카티족
동쪽에서 라인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가운데 마인 강이 있다. 이 강의 남쪽 일대에 사는 부족은 게르만족 중에서도 약소 부족인 마티아키를 수렵할 수 있는 부족과는 우호관계를 맺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전략에 따라 로마인에게 생산물을 팔러 오는 등 로마인과 교류를 계속한 부족이다. 하지만 이 마티아키족은 그들의 거주지를 동쪽과 북쪽에서 에워싸고 있는 강력한 카티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카티족은 로마인과 줄곧 적대 관계에 있었던 부족이다. 도미티아누스의 생각은 이러했다. 우선 마티아키족을 로마 제국에 포함시킨다. 그런 다음 마티아키족의 거주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리메스'를 건설한다. 그로써 카티족은 우선 마인 강 유역에서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종합적인 방위체제라고 생각해도 좋은 '리메스'를 건설하는 이상 그것이 건설되는 곳에서는 군사설비를 우선하는 게 당연하다. 사방 40미터의 요새. 사방 400미터의 보조부대 기지. 그 사이를 그물눈처럼 연결하는 도로망 게다가 이 도로망은 주전력인 군단의 주둔지와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을 다 건설하려면 넓은 토지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마티아키족은 거주지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니까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었던 곳에 계속 눌러살 수는 있었지만, 소유지를 많이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무상으로 몰수하지 않았다,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징발하는 대신, 경제 원조를 해주었다. 다시 말하면 사들인 것이다. 마티아키족은 패자가 아니니까. 로마인이 토지 일부를 국유화하는 형태로 승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티아키족은 게르만족이다. 같은 게르만족인 카티족과 결별하고 로마쪽에 붙는 이익을 납득시키는 것이 이민족을 지배할 때의 원칙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마티아키족을 로마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방위체제 확립은 그 대상이 된 부족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카티족은 눈앞에서 시작된 '리메스' 건설을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리메스'를 건설한다는 사실은 공표하지 않은 채, 갈리아 지방의 국세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현지에 가 있던 도미티아누스가 군대를 총지휘하게 되었다. 원래 도미티아누스는 '임페라토르'를 강하게 의식한 나머지, 그 이름대로 군대를 지휘하여 전공을 세우고 싶어했다, 제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카티족과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게 되자, 32세의 황제는 피가 끓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실전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로마군은 카티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깨끗한 승리는 아니었다. 바꿔 말하면 구경꾼의 박수갈채를 받을 만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가 카티족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여 수도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고, 게르만족을 재패한 자를 뜻하는 '게르마니쿠스'를 자칭하기 시작하자, 원로원 의원들은 냉소를 보냈고 일반시민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만약 카티족에게 압승을 거두었다면, 도미티아누스는 주목적인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건설을 잊어버리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깊이 발을 들여놓았을지도 모른다. 첫단계는 네카이 강과 평행으로 '리메스'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제1단계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제2단계 작업도 공사를 맡은 군단 소속 기사들에게는 벌써 완성된 모양이 눈에 보일 정도로 진척되어 있었다. 이것이 완벽한 형태를 갖춘 것은 오현제 시대에 접어든 뒤였다. 이 '게르마니아 방벽'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수도에 살고 있어서 최전방의 형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뿐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자들의 전형인 원로원 의원들은 패한 카티족에게 도미티아누스가 관대한 조치를 취한 것까지도 비난거리로 삼았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상류 일대를 '리메스'로 둘러싸면,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은 철벽이 된다. 하지만 아직 도나우 강이 남아 있었다. 이쪽 방면을 철벽으로 만드는 일은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도나우 강 북쪽 연안의 야만족들이 단결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움직임은 점점 구체화하고 있었다. 도미티아누스가 다음에 수행해야 할 군사적 과제, 아니 로마 방위체제 전반의 다음 과제는 이 도나우 강이었다.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이자 오늘날 유럽의 양대 하천인 이 두 강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두 강의 나라별 별칭이다.
내각
로마 황제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문제 해결을 위임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미티아누스는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제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젊었고, 위선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황제와 원로원이 함께 제국을 통치한다는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니고는 쓸 수 없는 가면이고, 실제로 통치하는 것은 황제라고 도미티아누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구태여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는 요즘 말로 하면 '내각'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일인자 보좌위원회(Concilium Princepium)를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6권에서 말했듯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이 기관은 당초에는 2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곧 26명으로 증원되었다. 구성원은 '제일인자(프린캡스)인 황제, 1년 임기의 집정관 2명, 오늘날의 각 부처 장관에 해당하는 법무관, 회계감사관, 재무관, 안찰관,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추천으로 선발된 20명이다. 황제가 집정관을 겸하는 해가 많고, 재무관을 두지 않는 해도 있고, 재무관을 두는 경우에도 대개 황제가 겸임하기 때문에 구성원 수는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이 '내각'이 실제로 제국을 통치하는 것은 창설자 아우구스투스의 참뜻이었고, 그후 100년동안 계속된 현실이었다. 도미티아누스의 개혁은 원로원 몫으로 주어진 20명을 줄이고, 그 대신 기사계급 출신을 등용한 것이다. 로마사회에서 '기사계급'은 원로원 계급에 버금가는 제2계급이고, 원로원 계급이 국정을 독점한 공화정 시대에는 경제 활동에 전념한 '재계'였지만, 제정은 이들에게 관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등 제국을 통치했다고 말할 수 있는 황제들은 모두 기사계급 출신을 등용하는 데 열심이었다. '기사계급'이라는 명칭을 공화정시대에 기병으로서 조국방위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지만, 이제 그 '알맹이'는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제정 시대에 들어오자마자 황제가 임명하는 행정관료로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대항 세력인 원로원과 맞서기 위해서라도, 황제에게는 손발이 되어 움직여줄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장관, 각 속주의 황제 재무관, 오늘날의 서울 시장에 해당하는 수도 행정장관, 수도 경찰청장, 근위대장, 상하수도 최고 책임자, 지방자치단체 의회 의장 등은 거의 다 기사계급 출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제정이 정착단계에 접어들면서 각 군단장도, 여러 개의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도 기사계급 출신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을 등용한 황제들이 현명했던 것은, 기사계급 출신들을 원로원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키우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원로원에 들여보내 조상 대대로 원로원 계급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의 반발을 억제한 점이다.
이들을 원로원에 들여보내는 것은 간단했다. 회계감사관이나 호민관을 지내면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의석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회계감사관이나 호민관에 당선시키면 된다. 또는 원로원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업적을 쌓은 사람을 황제가 추천하기만 하면 된다. 기사계급 출신도 원로원에 들어가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베스파시아누스를 비롯하여 제8권에 등장하는 인물의 절반이상이 기사계급 출신인 원로원 의원이다. 공화정 시대에는 국정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에게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지위를 준 것이다. 그러나 '내각' 에서 원로원 몫을 줄이면서까지 기사계급 출신을 집어 넣은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처음이었다. 그로서는 이제 기사계급이 제국 통치의 일각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원로원이 기꺼이 찬동할 개혁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로원의 반발은 적어도 이 시기에는 아직 표면화하지 않았다. 기사계급 출신을 받아들인 '내각'이 기능을 아주 잘 발휘했기 때문이다. 상상하건대, 도미티아누스가 개혁한 로마 제국의 '내각'은 국회의원이 장관에 기용되는 내각책임제의 내각보다는 원외 인사들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대통령 중심제의 행정부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도미티아누스의 '내각'에서 원로원 몫인 20명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기사계급 출신이 '입각' 한 것 자체가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황제의 권력 남용으로 보였다.
도미티나누스는 이른바 '관저'를 조직화하는 일도 단행했다. 황제에게 집중되는 엄청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비서관 체제를 정비한 것이다. 각 비서관의 담당분야는 이 체제를 처음 채택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와 같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의 비서관 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도 평판이 나빴던 것은 노예 출신의 이른바 해방노예들을 기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도미티아누스는 비서관 전원을 기사계급에서 등용했다. 그리고 이 비서관체제가 좀더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려는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황궁을 로마황제라는 지위에 걸맞게 바꾸고 싶었는지, 도미티아누스는 팔라티노 언덕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 그것은 사저라기보다 관저였고, 시민들을 초청하여 경기도 벌일 수 있는 본격적인 '스타디움'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이 궁전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까지는 다른 사람도 살고 있었던 팔라티노 언덕이 이제는 황제의 전용 구역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기사계급 출신밖에 중용하지 않은 것 같지만, 원로원 의원을 홀대한 것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시작한 의원회방식은 이제 제국의 통치체제로 정착해 있었고, 티베리우스 황제의 본보기로 생각한 도미티아누스는 필요하면 당장 다섯 명의 위원을 뽑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위원회방식을 활용했다. 위원회 의원은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선정되는 게 관례였다.
사법
도미티아누스는 꼼꼼한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질서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질서를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모든 것이 제자리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질서를 좋아했던 것이다. 이런 성격이 극장이나 경기장에서 앞좌석을 제공받는 원로원의원이나 기사계급의 석차를 명확히 하는 정도에 머무른다면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엄정한 법집행이라는 측면에서 이 성격이 발휘되면, 때로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로마에는 건국 당시부터 신성한 불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여사제 조직이 있었다. 30년 임기동안 그녀들은 처녀성을 지킬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어긴 경우에 주어지는 처벌은 생매장이었다. 사회적 지휘가 높은 이 여인들은 포로 로마노 남동쪽에 마련된 거처에서 생활한다. 평생을 처녀로 지내는 것은 아니라 해도, 소녀 시절부터 여사제가 되는 그녀들은 한창 나이에 독수공방을 해야 한다. 이들의 남자관계가 드러난 적도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는 어느 황제도 예로부터 내려오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는 그 법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남자관계가 드러난 사람이 하필이면 여사제들을 통솔하는 지위에 있는 여제사장이어서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여제사장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법에 따라 생매장을 당했고, 상대남자는 대중 앞으로 끌려나와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했다. 하지만 질서를 존중하는 성향은 인간사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미성년자의 매춘을 엄금하고, 미성년자에게 매춘을 시킨 자를 엄벌하는 법률을 처음으로 제정한 것은 도미티아누스였다. 로마에서는 17세 이하를 미성년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도미티아누스가 무엇보다 싫어한 것은 속주 통치 담당자들의 부정행위였다. 로마에는 공화정시대부터 임기가 끝난 속주 총독을 속주민이 부정부패등으로 고발하는 제도가 있다. 속주 총독은 모두 원로원 의원이지만. 속주민을 대리하여 전직 총독을 고발하는 것도 대개는 원로원 의원이다. '오라토르'라고 불린 로마 시대 변호사들은 원고측에 서는 경우도 있고 피고를 변호하는 경우도 있는데, 변호사 수임료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정한 1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상한선이 그대로 내려 오고 있었다.
변호사를 겸하고 있던 역사가 타키투스의 재정 형편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1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을 가져야만 들어갈 자격이 있는 원로원에 의석을 갖고 있었으니까 부유층에 속했을 게 분명하다. 타키투스의 친구인 소 플리니우스는 원래 풍족한 집에서 태어난데다 베수비오 분화 때 사망한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의 유산도 물려받았으니까, 부자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오라토르'를 수없이 맡은 것은, 법률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정에서 피고를 고발하거나 변호하는 것이 상류층에 속하는 자의 책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는 속주 통치의 성과를 법률로 판가름하는 이런 재판에 자주 참석했고, 도미티아누스도 그들을 본받았다. 황제의 가십에만 관심을 기울인 수에토니우스도 공정한 속주통치를 위해 애쓴 도미티아누스를 칭찬하고 있다. 속주 통치의 선악은 제국 전반의 통치를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황제들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황제가 다스리는 통치방식을 혐오한 타키투스도 여기에 대한 인식에서는 황제들과 마찬가지였다. 서기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수도 로마를 나타낸 지도를 보면, 400년 전에 건설된 공공 건조물이 건축 당시의 형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알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역대 황제들이 수리를 게을리하지 않고, 유지 보수에 신경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아피아 가도는 서기 300년 당시에 이미 600년이 넘은 도로였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수도'(카푸트 문디) 로마에 당연히 있어야 할 대규모 학교나 병원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여러번 말했지만, 지극히 로마적인 '민생'의 결과라는 게 내가 세운 가설이다.
그런데 그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니 로마에 끝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드넓은 제국을 운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행정관료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지역, 요즘으로 말하면 관청가다. '세계의 수도' 로마에는 관청가가 없었다. 요즘에 비하면 관료체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마 제국은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으로는 후세의 어떤 나라보다 넓은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추측해보자. 관청가가 없었다는 것은 곧 독립된 관료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독립된 관료조직을 갖지 않고 어떻게 그 넓은 제국을 운영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특히 고고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지방자치
로마인은 이탈리아 반도밖에 영유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이미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을 병립시킨 민족이다. 그 시대의 '중앙'은 승자인 로마계 및 에트루리아계 도시였지만, 그 당시부터 이미 로마는 '중앙'이 해야 할 일과 '지방'에 맡겨도 되는 일을 분리시키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광대한 지역을 영유하게 된 제정 시대에도 본국과 속주의 관계로 형태를 바꾸어 계승된다. 현실적인 로마인들이 이 노선을 계승한 것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제국을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은 자칫하면 이율배반이 되기 쉽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은 중앙집권만으로 운영된 나라가 아니라,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을 교묘히 병립시켜 양쪽의 장점이 더 잘 발휘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중앙'은 안전보장과 세제 정비 및 사회간접자본 확충 같은 국가적 사업만 맡고, 그 밖에 '지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지방'에 맡겨져 있었다. 로마인이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라고 부른 도시나 읍에는 축소판 원로원이라 해도 좋은 의회가 있고, 지방의회 의원은 선거로 선출되었다. 폼페이 유적에 남아 있는 벽보가 보여주듯, 민회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인 수도 로마보다 지방의 선거운동이 오히려 활발했다. 제정으로 바뀐 뒤에는 지방자치단체가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속주에도 수없이 많았지만, 자치를 인정받아도 재원이 없으면 자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 지방분권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재원을 확보하여 재정 자립을 이루어야 한다. 당시는 지방세라는 게 존재하지 않은 시대였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 점을 배려하지 않은 것은 제정 수립을 무엇보다 우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제정을 확립할 의무를 부여받은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와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본국만이 아니라 속주에서도 각 지방자치단체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시대에도 이 일은 계속 추진되었다. 따라서 이 일은 '게르마니아 방벽'처럼 도미티아누스가 착수한 사업을 후임 황제들이 완벽하게 마무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도미티아누스가 이 문제에 특히 열성적으로 대처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처음으로 지방자치단체가 무엇을 재원으로 삼고 있었는지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비문 등의 기록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나 사무실, 점포 등의 임대료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포룸'의 회랑 뒤쪽에 가게를 갖고 싶으면 소유주인 지방자치단체에 임대료를 내는 것이다. 그밖에 공중목욕탕이나 상수도에서도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다. 로마 시대의 '고속도로'는 무료였지만, 수돗물은 돈을 받았다.
하지만 지방세도 없는데다 공중목욕탕 사용료도 정책 가격이라 아주 싸고, 수돗물도 시내 곳곳에서 온종일 흘러나오는 샘물을 사용하면 공짜다. 자책에 수도를 끌어들인 사람한테서 받는 수도요금은 재원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 재원으로 지방자치단체가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오늘날에는 지방자치단체의 임무로 여겨지는 일을 그 당시에는 대부분 개인의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사재를 내놓는 것은 혜택받은 자의 책무인 동시에 명예로 여겨지고 있었다. 새 가도나 다리를 건설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였지만, 그것을 유지 보수하는 일은 그 가도나 다리가 통과하는 지방의 역할로 되어 있었다. 사재를 내놓아 그 일을 해냈다고 자찬한 비문은 수없이 발굴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로마 제국 전체가 공동체와 개인의 협력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 같다. 국가로서는 발달하지 않은 상태일지 모르나, 뜻밖에도 기능을 잘 발휘했으니 재미있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현풍 비슬산 - 관기와 도성의 만남
옛불교의 성지
비슬산은 신라 때 포산이라 불리었다. 해발 1천84m의 이 산은 최근 대구 광역시에 편입된 달성유가 현풍의 동편에 우뚝 서 있다. 8~9세기에 들어서자 이 산에는 절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비슬산의 남서편 골짜기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찰이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특히 신라 흥덕왕 2년에 창건된 유가사는 신라 유가종의 총본산이었던 만큼, 이 산 일대는 향을 피우고 독경하는 소리로 가득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에는 지금도 옛 절터가 많이 산재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포사2성'설화도 이 산의 절터 속에 묻혀 있다. 두 성인은 관기와 도성이라는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행적은 삼국유사 외에는 전혀 나오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이 설화는 한때 비슬산의 보당암에 기거했던 일연스님이 이 산에 전해오는 설화를 채록했다가 삼국유사에 수록한 듯하다.
두 성인은 이 산에 숨어 살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관기는 산의 남쪽 재에 암자를 짓고 도성은 산의 북쪽 굴에 거처했는데, 서로는 10여리나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친해서 자주 왕래했다. 삼국유사에는 그 찾아가는 모습을 "구름을 헤치고 달빛에 휘파람을 불며 찾아갔다"고 적고 있다. 도성이 관기를 찾으려면 산의 모든 나무가 남으로 굽어 흡사 관기를 맞으려는 듯했으며, 관기가 도성을 찾으려면 반대로 나무들이 일제히 북으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두 성인의 설화는 이렇듯 짧은 얘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짧은 얘기 속에는 나무를 통해 그리움을 주고받은 두 성인의 도의 폭을 떠올려주고 있다. 그것은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그리움이며, 비슬산의 정상을 바람 속에 떠다닌 삶의 투명한 자취를 보여주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들 두 사람의 그리움은 일반 속인의 그리움과는 다른 도반끼리의 것이라 더 각별했을까. 삼국유사에는 이 설화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짧은 얘기를 덧붙이고 있다. 도성은 처소의 뒤 높은 바위 위에 항상 자리를 펴고 앉았다가 어느 날 바위틈으로 몸을 뚫고 나가서 전신이 공중으로 올라가버렸으며, 관기도 역시 뒤를 이어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이름으로 그 유지가 전해진다고 적고 있다.
두 성인 내왕한 능선길
이들 두 사람의 자취는 지금도 이 산의 거친 풀덤불 속에 남아 있다. 관기가 머물렀던 암자는 관기봉 남편에, 도성이 머물렀던 처소는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다. 관기봉은 천왕봉의 남쪽 4km 밖에 돌출한 바위 봉우리이다. 그 아래에 있는 관기암은 절터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다. 도성암은 지금도 여전히 암자가 남아 유지가 소속암자로 되어 있다. 도성암의 뒤편에는 도성이 앉아 있었던 바위로 전해오는 '도통바위'가 우람하게 서 있다. 도성암에서 보면 관기봉의 봉우리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도통바위와 관기봉은 여전히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관기봉에서 대성사까지 두 성인 '달빛에 휘파람을 불며' 오갔다는 길은 비슬산의 정상을 넘는 약 두 시간의 능선길이다. 관기봉은 현풍에서 가재라는 비슬산 중턱의 마을을 지나 소재사를 거쳐 약 한 시간을 걸어 올라가면 닿는다. 관기봉에서 천왕봉까지의 능선 도중에 대견사지가 있다. 대견사에도 관기가 머물렀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런 만큼 관기가 도성을 만나러 간 길은 대견사를 지나 갈대와 싸리덤불이 우거진 광활한 평원을 가로질러 비슬산 천왕봉의 정상을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관기암은 갈대덤불에 덮여 그 흔적이 겨우 남아 있다. 관기암터를 지나 능선반 계곡반으로 한 시간을 걸으면 대견사지가 나온다. 대견사는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지은 절이라고 한다. 현재 축대가 남아 있으나 절터는 주춧돌만 갈대숲 속에 묻혀 흩어져 있을 뿐 완전히 버려진 느낌이 든다. 절 오른쪽 바위 끝에는 부서진 석탑의 잔해가 흩어져 있다. 이 탑은 원래 9층탑이었다는데 현재는 3층 정도의 탑석만 남아 있다. 탑은 기단의 길이가 2m 가량 된다. 절 주위에는 바위가 병풍을 치듯 둘러처져 있다. 절 앞으로는 현풍들을 지나 낙동강이 펼쳐지고, 멀리 가야산이 눈에 들어온다. 대견사지 뒤 낮은 언덕을 오르면 수백만 평의 광활한 평원이 펼쳐진다. 비슬산 정상까지 약 2km가량 펼쳐진 평원은 갈대숲과 싸리덤불로 우거져 장관을 이룬다.
평원의 동쪽 능선으로 난 산길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청도군 풍각면이,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펼쳐진다. 낙동강 너머로는 가야산과 지리산의 연봉이 아슴하게 보인다. 더불어 산 능선을 따라 세찬 바람이 일정한 방향도 없이 불어대고, 구름이 산 능선을 휘감기도 해 옛날 관기가 '구름을 헤치고' 걸었다는 그 길이 실감난다. 약 한 시간을 걸어 평원을 지나면 작은 바위 봉우리들이 나타나고, 그 봉우리들을 넘으면 천왕봉 정상이다. 정상에서 서북쪽 계곡을 내려다보면 바로 밑에 도성암이 보인다. 그러나 도성암에 이르는 산길은 너무 가팔라 다시 한 시간을 조심스레 내려가야 한다. 도성암은 신라 혜공왕 때 창건됐다고 하며 현재 대웅전과 선원의 건물이 있다.
도통바위
도성암 뒤에 서 있는 '도통바위'는 옛날 도성이 이 바위 위에서 도를 통했다는 전설 때문에 이 일대에서는 신성한 바위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인근의 무당들이 이 바위에서 치성을 드리려고 많이 오지만 절에서는 일체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삿된 도'는 영험이 없다는 것이다. 대성암에서 바라보면 멀리 관기봉이 마주보인다. 대성암의 대웅전 앞뜰에는 신라 때의 3층석탑(기단 폭 1백 60cm, 높이 2m)이 있어 그나마 옛자취를 남겨두었을 뿐 관기와 도성의 자취를 찾기는 힘들다. 비슬산은 워낙 깊은 데다 인적이 별로 없었던 곳이다. 그래서 이 산에 전해오는 얘기들은 수습되지 못하고 바람에 흩어져버린 안타까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비슬산은 정성대왕이라는 산신이 주재하는 성지라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지만, 많은 절터가 사라지고 지금은 천왕봉 북쪽의 용연사와 대승암 바로 밑의 유가사가 겨우 남아 있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산세의 위용은 대단해서 관광지로 각광을 받을 날이 멀지 않은 듯 보인다.
[비슬산 도통바위 전경]
달성군 유가읍 음리에 있는 비슬산 도통바위의 모습이다. 「도통 바위 전설」은 '금물녀'가 도성암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앉자 득도를 하여 도통을 이었다고 하여 도통 바위로 불리게 되었다는 암석 전설이다. 또한 금물녀라는 여인에 대한 인물 전설이기도 하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