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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8호 - 2024.07.24 수요일(음력 : 06.19)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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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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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뭣으로 바쁜지 얘기해 주면 당신이 어떤 인물의 사람인지 나는 곧 알아맞힐 수 있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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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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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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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쓰기의 원칙
띄어쓰기만 보아도 그 사람의 국어 실력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띄어쓰기는 국어의 맞춤법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문이다. 국어의 달인을 뽑는 KBS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에서 우리말 달인을 검증하는 마지막 문제가 띄어쓰기 문제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띄어쓰기는 어떤 원칙으로 하는 것일까?
한글맞춤법의 제1장 ‘총칙’의 제2항에 보면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단어는 독립적으로 쓰는 말의 단위인데, 문장 내에서 단어를 단위로 해서 띄어 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인 것이다. 국어에서 단어는 기능과 형태, 의미에 따라 9가지의 품사, 즉 명사, 대명사, 수사, 조사, 동사, 형용사, 관형사, 부사, 감탄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품사로 분류되는 단어들은 모두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9개의 품사 중에 ‘조사’는 다른 말에 의존하여 쓰이는 형태소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그 앞의 단어에 붙여 쓴다. 예를 들어 ‘3년 만이다’에서 ‘만’은 (의존)명사이기 때문에 띄어 쓰지만 ‘웃기만 하다’에서 ‘만’은 조사이기 때문에 앞말에 붙여 쓴다.
또한 ‘부모와 자식 간’에서 ‘간’은 (의존)명사이기 때문에 띄어 쓰지만 ‘한 달간’에서 ‘간’은 조사이기 때문에 앞말에 붙여 쓴다. 그렇다면 ‘집을나선지십분만에주먹만한빗방울이떨어졌다’는 어떻게 띄어쓰기를 해야 할까? ‘나선 지’와 ‘십 분 만’에서 ‘지’와 ‘만’은 (의존)명사이기 때문에 띄어 쓰고 ‘주먹만 한’에서 ‘만’은 (보)조사이기 때문에 앞말에 붙여 쓴다. 따라서 ‘집을 나선 지 십 분 만에 주먹만 한 빗방울이 떨어졌다’가 바른 띄어쓰기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붙이다’와 ‘부치다’
‘붙이다’와 ‘부치다’는 소리만 같은 것이 아니라 어원도 같다. 둘 다 옛말 ‘븥다(붙다)’에서 비롯한 말이다. 그런데 왜 어떤 것은 ‘붙이다’로 적고, 어떤 것은 ‘부치다’로 적을까? ‘부착, 접촉, 덧보탬, 사귐’ 등이 ‘붙다’가 지닌 뜻인데, 이런 뜻이 살아 있는 경우에는 그 형태를 드러내어 ‘붙이다’로 적는다. 이렇게 적으면 ‘붙다’와 관련된 말이라는 것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붙다’의 뜻이 남아 있지 않다면 어원을 밝혀 적더라도 어차피 뜻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냥 소리대로 ‘부치다’로 적는 것이다.
‘붙이다’는 사동의 접미사 ‘-이-’가 붙어서 된 말로, ‘붙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이다. ‘메모지를 벽에 붙이다, 연탄에 불을 붙이다, 계약에 조건을 붙이다, 공부에 흥미를 붙이다, 친구에게 말을 붙이다, 상품에 번호를 붙이다, 흥정을 붙이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모두 ‘붙다’의 본래 의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언뜻 봐서는 ‘붙다’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사실을 알기가 어려운 경우, 즉 ‘옮김, 넘김, 의탁’ 등과 같은 뜻일 때는 ‘부치다’로 적는다. ‘짐을 외국으로 부치다, 임명 동의안을 표결에 부치다, 회의 내용을 극비에 부치다, 삼촌 집에 숙식을 부치다, 한글날에 부치는 글’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봉투에 우표를 ‘붙여서’ 친구에게 편지를 ‘부쳤다’.”라고 적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부치다’가 몇 가지 더 있는데 함께 알아 두면 좋을 듯하다. ‘힘에 부치다(미치지 못하다)’ ‘남의 땅을 부치다(농사를 짓다)’ ‘빈대떡을 부치다(기름을 둘러 음식을 익히다)’ ‘부채를 부치다(바람을 일으키다)’ 등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사돈어른
얼마 전 ‘또 오해영’이라는 연속극이 인기리에 종방되었다. 그 밝고 경쾌한 분위기에 끌려 필자도 내내 재미있게 시청하였다. 그런데 극 중에 여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장차 사위 될 남자 주인공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남자 주인공의 남동생이 ‘사돈어른’의 음식 솜씨가 좋다며 너스레를 떤다.
이 예처럼 시동생이 형수의 어머니를 가리켜 ‘사돈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른’은 높임말이니 얼핏 가능할 듯도 싶다. 그러나 ‘사돈’은 기본적으로 같은 항렬의 사람끼리 부르거나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혼인한 두 집안의 부모들끼리 “사돈, 안녕하셨어요?” “사돈이 떡을 보내셨네”와 같이 말한다. 이 경우 ‘사돈어른’은 주로 바깥사돈에게 쓰는 말이다.
상대방 집안의 위 항렬의 사람에 대해서는 ‘사장(査丈)어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사위나 며느리의 조부모는 위 항렬의 사람이므로 “사장어른, 손주가 결혼해서 좋으시죠?” “사돈, 사장어른도 건강하시죠?”와 같이 부르거나 가리키는 것이다.
동기 배우자(즉 형수, 제수, 매형, 매부, 올케, 형부, 제부)의 부모도 나에게는 위 항렬의 사람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사장어른’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어머니, 사장어른 오셨어요.”와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앞서 연속극의 등장인물은 ‘사돈어른’이 아니라 ‘사장어른’의 음식 솜씨가 좋다고 말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진 집안에서 같은 항렬의 부모끼리는 ‘사돈’ 위 항렬의 사람에 대해서는 ‘사장’으로 구별하여 부른다. 우리말은 이처럼 호칭어·지칭어까지 경어법에 따라 세분화되는 특징이 있으므로 잘 익혀 쓸 필요가 있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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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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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한 가지 소원 - 천상병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똥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 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 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
유리창 2 - 정지용
내어다 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앞 잦나무가 자꼬 커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쫏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소증기섯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라ㅅ빛 누뤼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뺌은 차라리 연정스레히
유리에 부빈다. 차디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
머언 꽃 !
도회에는 고운 화재가 오른다.
~~~~~~~~~~~~~~~~~~~
水煖爐 (수난로) - 김수영
견고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팔을 고이고 앉아서 창을 내다보는
수난로는 문명의 폐물
삼월도 되기 전에
그의 내부에서는 더운 물이 없어지고
어둠이 들어앉는다
나는 이 어둠을 신이라고 생각한다
이 어두운 신은 밤에도 외출을 못하고 자기의 영토을 지킨다
- 유일한 희망은 겨울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이 가치는
왼손으로 글을 쓰는 소녀만이 알고 있다
그것은 그의 둥근 호흡기가 언제나 왼쪽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보나
그의 머리 위에 반드시 창이 달려있는 것은
죄악이 아니겠느냐
공원이나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이
여름이면 그의 곁에 와서
곧잘 팔을 고이고 앉아있으니까
그는 인간의 비극을 안다
그래서 그는 낮에도 밤에도
어둠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둠과는 타협하는 법이 없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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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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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3 편 영혼과 윤회
제 2 장 윤회는 있다
2. 차시환생(借屍還生)
또 전생기억 외에 차시환생(借屍還生)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나는 것이 아니고 제 몸뚱이는 아주 죽어버 리고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곧, 몸을 바꾸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니다. 다음은 1916년 2월 26일자 중국 신주일보(神州日報)에 보도된 사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최천선(崔天選)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무식한 석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서른두살이 되던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장사 지낼 준비를 다 마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관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사람 기척이 났습니다. 부랴부랴 관을 깨고 풀어보니 관 속의 사람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쳐다보는 것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다."
그 부모와 처자식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는 식구들을 하나도 못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깨어나더니 정신착란이 되어서 집안 식구들도 못 알아보고 말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가보다고 식구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또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기운을 차리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구들을 못 알아보고 또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퍽 답답한 것 같았습니다. 마침 주위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을 보더니 종이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본래는 일자무식이던 사람이 글을 아주 잘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써놓은 글의 내용을 보니 이 사람은 중국 사람이 아니고 안남(인도지나)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남 지방에서도 말은 다르지만 글은 한자를 씁니다.
"나는 안남 어느 곳에 사는 유건중(劉建中)이라는 사람인데, 병이 들어서 치료하느라고 어머니가 두터운 이불을 덮어 씌워줘 땀을 내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여기 이렇게 와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위와 같았습니다. 곧 그 몸은 죽어 버리고 그 대신에 안남 사람의 혼이 산동으로 온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입니다. 전생이란 것이 반드시 몸뚱이가 죽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나는 것만이 아니고 죽은 육신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데 영혼만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시환생'이라고 합니다. 곧 남의 육체를 빌려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뒤에 중국말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자 중국말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전생에 살던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널리 소문으로 퍼졌습니다. 중에는 북경대학에서 데리고 가서 여러가지로 정신감정을 해보고 치료도 해보았습니다만, 정신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 그가 말하는 안남에도 사람을 보내어 조회를 해보았습니다. 과연 유건중이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또 그가 말한 전생의 일이 모두 다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죽었다 깨어 났으나 안남의 유건중의 혼이 최천선의 몸을 빌어 환생하였다는 것이 완전히 증명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참 희귀한 일이라고 하여 정부에서 는 이 사람에게 내내 연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3. 연령역행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당사자가 전생기억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심리학에서도 전생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최면술을 이용하여 그 사람의 전생을 알수 있는 방법이 연구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연령역행(年齡逆行)이라고 합니다. 실험 대상자에게 최면을 걸어놓고 그 상태에서 사람의 연령을 자꾸자꾸 거꾸로 역행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무살 되는 사람을 최면을 걸어서 열살로 만듭니다. 그러면 열살 먹은 사람이 되어 그때의 행동이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또 네살이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네살 때의 노래를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한살로 만들 놓으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합니다. 연령역행 Age Regression은 심리학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학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는데 아무래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령역행을 시켜 그 원인을 조사해 보니 19년이나 29년쯤 전에 그 병의 원인이 되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간첩이 잡혔을 때에도 이용합니다.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럴 때에 최면술을 이용하여 연령역행을 시킵니다. 그러면 이전에 간첩이 되기 위해 교육받던 것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물어보면 꼼짝없이 자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생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최면 상태에서 연령역행을 하여 한살로 만들어 둡니다. 그러면 사십대, 오십대의 어른도 손발을 바둥거리고 빽빽 울면서 어린아이의 몸짓만 할 뿐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나서 묻습니다.
"네가 태어나기 일년 전, 이년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
그러면 주소 성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보기를 들어 여기 해인사 골짜기에 사는 사람을 연령역행을 시켜서 한살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다시 태어나기 3년 전을 묻습니다. 그러면 주소 셩명이 바뀌어 전라도 어느 곳의 누구라든지, 일본의 어느 곳 사람이라든지 하며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전생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학에서 전생회귀(前生回歸)라고 합니다. 전생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한 생뿐만이 아니고 이생, 삼생... 여러 수십생까지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3. 연령역행
1) <<브라이드 머피를 찾아서>>
최면 상태에서 연령역행을 시켜 전생을 알아보는 전생회귀에 대해 연구를 한 사람 중에 미국에 모리 번스타인 Morey Born-stei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루스 시몽 부인이라는 스물 아홉살의 여자를 연령역행시켜 그 여자의 전생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19세기에 아일랜드의 코우크시에 살았던 브라이드 머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최면 상태에서 자기가 코우크 시에 살았던 시절의 여러가지 생활 모습이나 신앙생활에 대해 자세히 말했습니다. 모리 번스타인은 이것을 녹음하고 정리하여 그 여자가 말한 곳에 가서 실제로 조사를 해 보았더니 과연 녹음한 내용이 사실과 맞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미국의 98개 신문에서 일제히 게재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그리하여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모리 번스타인이 이 실험을 한 것은 1952년 11월 29일이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브라이드 머피를 찾아서 The Searching for Bride murphy]라는 제목으로 195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 후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자(死者)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또 휴즈 박사라는 사람은 열두살 된 자기 딸을 연령역행시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것은 이집트의 고어(古語)였습니다. 그 말은현대의 이집트인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전문학자에게 부탁하여 통역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역사기록을 통해 알아보니 딸이 한 말이 역시 사실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프로이노이라는 제네바대학의 심리학 교수는 열여섯살 되는 소녀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 소녀도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는데 나중에 그 기록을 가지고 언어학자들에게 의뢰한 결과 500년 전의 인도말인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열여섯살 먹은 소녀가 오늘날의 인도말도 아닌 500년 전의 인도말인 범어(梵語)를 안다는 것은 결국 최면상태에서 완전히 500년 전의 인도 사람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생회귀의 사례들이 속속 사실로 밝혀지자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영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듯이 자꾸 윤회를 한다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학계를 움직인 근본적인 대사건 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례가 증명되기 시작하자 가장 곤란해진 것은 서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영혼이 있어서 기독교를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뿐이지 환생이나 윤회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브라이드 머피의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그러한 주장이 거짓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브라이드 머피라는 사람은 아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천당에 가지 못하고 시몽 부인으로 미국에서 다시 태어났으니 문제는 아주 심각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측에서는 브라이드 머피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라디오, TV, 신문 등을 통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생회귀의 사례는 브라이드 머피뿐만이 아니라 그 뒤로도 진실을 밝혀 보려는 학자들에 의해 속속 수집되기 시작했습니다.
3. 연령역행
2) 한번 이상 사는가?
전생회귀의 사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영국의 브록샴 테이프 Brozham Tapes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유명한 최면 요법사인 아아널 브록샴 Arnall Broxham이라는 사람이 최면을 통한 연령역행으로 20여 년 동안 약 400명의 전생을 조사하여 테이프에 녹음을 한 것입니다. 그 테이프는 아직도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가지가지의 전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갖가지 사례가 알려지자 브록샴 씨의 전생회귀는 큰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문이 퍼지자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신뢰도가 높다는 영국의 국영방송인 비비씨 BBC의 과학부 기자 두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조사를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막상 조사를 시작해보니 그것은 참으로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조사를 해나감에 따라서 그것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게 되자 더 큰 관심을 가지고조사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약 1년 동안 테이프에서 전생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말한 지명을 찾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가 보았습니다. 또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역사학자, 고고학자, 심리학자들을 만나 일일이 확인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1년 동안이나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브록샴 테이프의 전생 조사는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이 조사 작업은 BBC TV에서 특집으로 방송되었고, 1976년에는 [한번 이상 사는가? More Lives Than One?]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도 뒤에 <부록 2>에 간략하게 소개됩니다. 브록샴의 테이프에 나오는 사례 중에서 자기의 다른 전생을 여섯가지나 이야기한 가정 주부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 관해서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제인 에반스라고 합니다. 맨 처음에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영국에서 통치자의 아이를 가르치는 가정 교사의 아내로 살았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1190년 영국 요크 시에서 유태인 여성으로 살았고, 세번째는 1451년 불란서 부르스 시에서 꿰르라는 사람의 하녀로 살았고, 네번째는 앤 여왕의 재위 시절에 런던에서 바느질로 품팔이 하는 소녀로 살았고, 그리고 가장 가까운 전생인 여섯번째는 미국의 메릴랜드 주에서 수녀로 살다가 1920년에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제인 에반스라는 여인의 전생은 서로 겹치지 않았으며,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는 시간의 간격이 가장 짧은 것이 20년 안팎이었습니다. 전생 조사에 대한 실제의 보기가 이렇게 속속 출현하자 이제 이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독교계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전생을 부인하고만 있을 수 없게 되자, 이 사실을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보고 교리와는 상관없이 연구해보고자 하여 관심을 갖는 신부나 목사도 더러 나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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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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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풀을 씹는 사람이 되라
나는 현재의 인류에서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의 두 모습을 보고 있다. 본능적인 투쟁의 기질과 다정한 기질 말이다. 초식 동물적인 사람은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 동물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남의 생활에 참견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권투나 통나무 굴리기, 줄다리기를 즐겨하며, 사람을 배신하거나 기선을 제압하는 일에서 절대적인 기쁨을 느낀다. 이런 것들은 물론 진정한 흥미와 실력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기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다. 전투적인 사람은 그런 본능을 향락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동시에 참된 창조적인 재능, 즉 자신의 일을 하고 자신의 문제를 깨닫는 재능에서는 그리 두각을 보이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고상한 선비들과 교수들이 경쟁의 무대에서 소외되어 있는가. 하지만 그 사람들은 진실로 예찬받을 자격이 있다. 세계의 모든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기보다는 자신의 일을 생각하고 고양시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즉 초식 동물적인 것이다. 인류의 참된 진보는 먹는 본능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초식 동물적인 인간을 많이 길러내는 일이다. 물론 현재는 육식 동물들의 지배하에 있음은 분명하다. 강인한 근육을 신봉하는 저차원의 세계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들은 자연스런 식욕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을 잉태하는 시작인 까닭이다.
오직 인생만을 사랑하라
흔히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우주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고상하고 빛나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써 상대성 이론을 창시한 아인슈타인이라든지 축음기를 발명한 에디슨, 멀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르기까지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정신이란 고상하기보다는 애교가 있다고 하는 편이 낫다. 만일 보통 사람들의 정신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만들어져서 죄도 약점도 하나 없는 존재가 되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시시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노변에 구르는 자갈만큼이나 멋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불합리성도 있고 모순도 있으며, 축제일에는 취하여 이리저리 쏘다니고, 편견과 옹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으며, 게다가 건망증까지도 있다. 한데 인간의 재미는 바로 이런 점에 있지 않을까? 만일 두뇌가 완전하다면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해의 마지막 날에 일년을 회고해 보면 실행한 것과 못한 것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간 생활의 장점이다. 전체가 완벽하게 계획대로 실행되고 이루어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질 것이 뻔한 게임을 벌이는 사람은 없다. 또 소설을 읽을 때 그 결론을 알면서 읽는 것처럼 맥빠지는 경우는 없다. 인간 정신의 매력이란 거기에 불합리성이 있고, 구제하기 힘든 편견이 있고 변덕스러움과 예측 불가능의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정신 속에 아직도 원숭이와 같은 목적이 없는 암중모색의 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본래 위험을 발견하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기관이다. 이 정신이 마침내 논리학이나 정확한 수학의 방정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정신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음식물의 냄새를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문득 추상적인 방정식을 풀어낼 수도 있게 된 것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정신의 기능이 사고에 있다는 오해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대한 편견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굉장한 의미를 두고 있는 것과 같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정신은 현재와 같이 무엇인가 애교 있고 불합리한 편이 좋다. 완전무결한 이성적 세계를 꿈꾸지 말라. 과학적인 진보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인군자처럼 완벽함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오직 인생과의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을 믿지 않는다.
뜨겁게, 더욱 뜨겁게
줄리어스 시저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 때문에 이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영광과 애써 차지한 로마 제국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선지자 모세는 시내 산에서 40일이나 기도하여 얻은 신성한 석판을 황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동족의 행위에 격분한 나머지 깨뜨려버렸다. 공자는 손님이 오면 집에 없는 체했고 그가 돌아가려고 하면 그제서야 자신이 집에 있음을 알리려고 2층에서 노래를 불렀다. 괴테는 열 아홉 살 난 아들을 옆에 세우고 아내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과연 이런 위인들의 행동이 이성적이었던가?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보다도 저열이다. 이는 뻔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므로 위에 열거한 위인들에게 사랑스런 인간성을 부연한 것은 그들의 이성이 아니라 그들의 '이성의 결여'는 아니었을까. 영국인들은 건전한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윤리는 별로 신통치는 않지만 위험을 발견하고 대처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를 관찰해 보면 실제 논리적인 모습은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이 대학이나 헌법, 교회 등은 최초에는 실로 별볼일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위대한 대영제국의 힘은 기실 영국인들의 판단이 옳고 자신들의 능력만이 최고라는 편협된 정신에서 초래된 것이다. 만일 영국인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강렬한 자기 신뢰를 상실한다면 그 순간 제국은 붕괴할 것이다. 자신에게 의혹을 품은 존재가 타인의 세계를 욕심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또 영국인들의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란 알고 극히 빈약하고 순진한 애정에 불과하다. 그 결과 국왕은 국민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눈치껏 적당하게 행동해야만 왕조를 가까스로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또 영국은 어느 시대에도 적당한 적에 대해 적당한 동맹국과 더불어 적당한 측에 서서 적당히 전쟁을 해 왔다. 이러한 연기는 분명 논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이며 정열이다. 그러므로 나는 과학의 정복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인간의 지능이 자연계나 인간 관계 이외의 문제를 다룰 때의 능력이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 문제를 다루는 비판 정신이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의문이다. 개인으로서 인류는 고도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사회의 집단으로서는 여전히 원시적 욕정에 사로잡혀 야만적인 본능을 때때로 노출한다. 그것은 또 광신과 집단적 히스테리에 공격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류는 자신들의 과거사를 좀더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는 동물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 또 동물에 아주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동물과 같은 어느 정도 자제가 되지 않을까. 우리들은 동물 우화나 수필, 즉 "이솝 우화" 초서의 "새들의 이해"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을 읽으면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깨닫는다. 이런 우화들은 이솝 시대에도 훌륭한 것이었지만 4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공감을 사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정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차가우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철저하지 못하다. 이성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오직 중용적 사려분별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그것은 온정에 불타고 정서가 풍부하며 직관적인 사고 방식으로, 인간을 그 조상의 형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뿐이다. 인간의 생활이 본능과 조화되도록 해야만이 인간은 구제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이 사상보다는 감각과 정서를 중시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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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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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5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서기 69년 12월 21일~ 79년 6월 24일)
죽음
서기 79년 6월 24일. 베스파시아투스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난생처음 병에걸린 황제는 고향 온천에 가서 요양도 해보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채, 황제니까 일어나서 죽어야 한다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다가 숨을 거두었다. 향년 70세. 황제로서 10년을 지낸 뒤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 익살스러운 무인출신 황제는 제국 재건자로서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죽었다. 손을 대긴 했지만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은 맏아들 티투스와 둘째아들 도미티아누스가 차례로 제위에 올라 마무리해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제국이 발행하는 금화와 은화 및 동화는 액면가치와 소재가치를 일치시켜 건전한 경제 활성화를 실현하는 기축통화 구실을 맡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황제의 업적을 제국 전역에 알리는 효과적인 선전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앞면에는 황제의 옆얼굴, 뒷면에는 그 업적을 상징하는 도안이 새겨지는게 보통이지만, 약자화된 문장이 새겨지는 경우도 많았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발행된 통화에 새겨진 문장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황제에 의한 평화 회복'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아들들에 의한 영속적인 평화 확립' '국가에 대한 군대의 충성회복' '베스파시누스, 시민의 자유의 수호자' '황제의 공정한 통치' '로마 시민인 것은 더없는 행운' '로마 시민이여, 영원하라!'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에 오를 때 공약한 대로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고 그것을 유지했다. 게다가 기존 지배층 밖에서 태어난 몸으로 r 일을 해냈다. 베스파니아누스가 죽었을 때,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본국에서는 제2계급인 '기사계급' 출신이었다는데 거부반응을 보인 사람은 원로원 계급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불쌍하게도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군"하고 말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죽은 뒤 그의 '걱정'대로 신격화되었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신이 되는 것조차도 업적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니 재미있다. 아들 티투스의 제위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황제법'에 따라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제국을 다스리는 동안 거의 줄곧 공동 통치자로서 쌓아온 업적이 인정받은 것도 무시할수 없다. 또한 로마인들이 종교 문제가 아니라 속주민 반란으로 처리한 유대 전쟁을 해결한 당사자 였다는 점도 티투스가 갖고 있는 유일한 카드였다. 로마인의 역사를 더듬어갈 때 , 제국 안전보장의 최고 책임자는 황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로마 황제에게 군사에 대한 지식과 능력과 업적이 문제되는 것은 '임페라토르'(총사령관, 황제)라는 라틴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6부 티투스 황제(재위:서기 79년 6월 24일~81년 9월 13일)
39세에 즉위한 티투스만큼 좋은 황제가 되려고 애쓴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다. 당시에도 공복이라는 표현이 존재했다면, 티투스야말로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철저한 공복이 되려고 애썼을게 분명하다. 백성이 원치 않으면 평생의 사랑까지도 포기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인술라'(insula)라고 불린 공동 임대주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그가 태어날 당시에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사회적, 경제적 형편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받은 교육은 일반 서민층의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에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측근인 해방노예 나르키소스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소년 티투스는 황제의 측근인 해방노예나르키소스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소년 티투스는 황제의 아들인 브리타니쿠스우와 함께 교육을 받았다. 날마다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 가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논리학에서부터 변론술, 무예, 기마술, 악기 연주까지 배웠다. 빈약한 체격은 아니지만 키가 작달막하고, 풍채나 행동거지에서 고귀함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볼수 없었지만, 성품이 온후하고 순수해서 남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누추한 셋집에서 호화로운 궁전으로 통학하는 생활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이 황제 아들의 측근이 되기보다는 군단에서 현지 교육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임지에 아들이 동행하는 것은 로마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소년 티투스는 어머니의 슬하와 로마를 떠나 아버지의 임지인 라인 강 연안의 군단기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임지가 브리타니아로 바뀌면 아들도 브리타니아로 따라갔다. 그후에는 다시 북아프리카로 이동한다. 이렇게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티투스는 현지 경험을 쌓아갔다. 그동안 군무 경험을 쌓은 것은 물론이다. 28세 되던해, 유대 전쟁 총사령관에 임명된 아버지 휘하에서 처음으로 1개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이 되었다. 그리고 황제에 추대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30세의 나이로 예루살렘공략전을 총지휘하게 된 티투스는 그 임무도 충실히 수행했다.
좋은 황제가 되고 싶어한 티투스에게는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나이도 경험도 업적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공동 통치자로 참여한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의 선정 덕분에, 강권을 휘둘러 억압하지 않으면 안될 반대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의에 넘치는 티투스 황제의 치세는 거듭되는 재난으로 물들게 된다. 서기 79년 6월 24일-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사망. 티투스가 제위에 오르다. 두달 뒤인 8월 24일-베수비오 화산 폭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오늘날의 에르콜라노)을 비롯한 나폴리 만 동부 해안 일대의 도시들이 매몰되다. 사망자 5천 명. 이듬해인 서기 81년 봄-수도 로마의 도심에서 대화재가 일어나다. 그 이듬해인 서기 81년 여름-수도를 비롯한 본국 이탈리아 전역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망자를 내다. 같은해 9월 13일, 티투스 황제는 생명의 불꽃이 다 타버리기라도 한것처럼 숨을 거둔다. 향년 40년. 겨우 2년 남짓한 그의 치세는 대재난의 사후 처리에 밤낮으로 몰두하다가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폼페이
여기서 나는 유대 전쟁을 기술할 때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로마 역사에서는 숱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일이 후세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은 사건으로 변모하는데, 그런 사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서기 66년 여름에 일어나, 70년의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절정에 이르고, 73년 봄의 마사다 옥쇄로 끝나는 유대 전쟁은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오늘날에도 그 사건을 다룬 연구서나 역사서, 전기, 역사소설 따위는 수없이 많다. 현대 이스라엘인에게 마사 요새 유적은 성지가 되어 있다. 서기 79년 여름에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매몰된 사건은 본국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슬프고 불행한 사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1천 년이 넘는 로마사에서는 로마인들이 견뎌야 했던 수많은 불행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그곳이 매몰된 지 1800년이나 지난 19세기에 발굴이 시작되어, 20세기인 오늘날에는 가장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을 만큼 유명해졌다. 포로 로마노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폼페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시대를 살았던 타키투스의 기술에는 폼페이라는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다. 20세기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진 폼페이도 동시대인에게는 '캄파냐 지방의 풍요로운 도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폼페이는 로마 제국 시대에 수없이 존재한 전형적인 지방도시인 채로 봉인되어 있다가 2천 년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발굴 작업을 계속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로마인 이야기'를 전체 제목으로 삼은 로마 통사를 쓰고 있다. 이런 내 입장에서는 그 사건이 당시 로마인에게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서술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폼페이를 덮친 그 불행을 상세히 서술한다면 당시 로마의 통치기구가 내포하고 있던 온갖 문제점을 밝혀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그 사건을 상세히 서술할 것이다. 그러나 폼페이 비극의 경우는 '고베 대지진'과 달리 100퍼센트 천재지변이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직후에 적절한 대책으로 희생자 수를 줄이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폼페이가 너무나 유명해졌기 때문에, 폼페이의 비극을 다룬 저술은 바닷가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통사와는 반대로 단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 글을 '모노그래프'라고 하는데, 폼페이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숱하게 존재하는 모노그래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꼭 필요한 점만 기술하기로 하겠다.
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캄파냐 지방 사람들은 지진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폴리 서쪽에 펼쳐져 있는 무역항 포추올리, 고급 피한지인 바이아, 군항 미세노에서 이스키아 섬에 걸친 일대는 곳곳에 온천이 솟을 정도니까 화산지대다. 또한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베수비오 산과 그 기슭에 있는 폼페이에 이르는데, 네로 시대인 17년 전(서기 62년)에는 강한 지진이 폼페이 일대를 덮쳤다. 서기 69년 당시의 폼페이는 17년 전의 지진 피해를 거의 복구한 상태였다. 하지만 베수비오 산이 분화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900년이 넘도록 한번도 분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화산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능선은 꼭대기까지 울창한 수목으로 덮여 있어서, 기원전 1세기에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이 검투사에게 호응한 노예들이 도망쳐 들어갈 수 있었을 정도였다. 휴화산이나 활화산 특유의 거친 바위나 흙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사망자 수를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누구나 여느 때의 지진이 또 일어났다고 믿고, 진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집안에 숨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의 진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진동에 뒤이어 불덩어리 같은 돌멩이가 비오듯 쏟아졌다. 낱개로는 가볍지만, 겹겹이 쌓이면 지붕을 짓누른다. 지붕이 무너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집에서 탈출할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화산이 폭발한 지 대여섯 시간이 지난 뒤였다. 분화가 시작된 것은 오후 1시께였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탈출을 결심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쏟아지는 돌멩이도 더욱 커지고, 낙하 속도도 빨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옷가지나 쿠션으로 머리를 가리 채, 초롱불빛에만 의지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난민들의 숨통을 끊은 것은 그후 소리도 없이 덮쳐온 화산재였다. 화산재를 잔뜩 머금은 안개구름이 낮게 깔리면서 사람들을 질식시켰다. 불운하게도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아무리 도망쳐도 이 안개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후세는 이 안개구름을 서지(surge)라고 부르게 되었다. 폼페이에서 5킬로미터쯤 남쪽에 있는 스타비아이(오늘날의 스타비아)에서도 서지로 인한 희생자가 나왔다. 폼페이에서도 헤르쿨라네움에서도 희생자들은 대부분 질식해서 죽은 듯하다. 8월 24일 오후 1시에 시작된 이 비극은 이튿날인 25일 아침에는 이미 끝나 있었다. 폼페이도 헤르쿨라네움도 4미터 높이로 쌓인 돌멩이와 화산재 밑에 매몰되어 있었다. 게다가 막판에는 화산재가 섞인 비까지 내렸기 때문에, 이 돌멩이와 화산재 더미는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희생자 수는 2천 명이라는 사람도 있고 5천 명이라는 사람도 있다. 폼페이 인구는 1만 5천 내지 2만 명이었던 모양이다. 바닷가 피한지인 헤르쿨라네움에서는 주민 대다수가 해변으로 달아났지만, 지진으로 바다도 거칠어져 배가 접안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화산재가 섞인 구름은 이들도 감싸버렸다.
현장 증인
서기 79년 여름의 이 비극에는 리포터가 한 사람 있다.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쯤 가면 낭만적인 호수 코모에 이른다. 호반도시 코모의 기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퇴역병을 이주시킨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곳 코모에서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가 태어난 것은 네로 황제 시대인 서기 60년이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해에는 18세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기 때문에 독신인 외삼촌의 양자가 되어, 화산이 폭발했을 당시에는 외삼촌의 근무지인 군항 미세노에 머물고 있었다. 미세노는 나폴리 만을 사이에 두고 베수비오 산과 마주보고 있다. 어머니의 오빠였던 외삼촌은 37권에 달하는 '박물지'(Naturalis Historia)의 저자로 유명한 플리니우스 세쿤투스다. 이 방대한 저서는 티투스 황제에게 헌정되었다. 서기 23년에 코모에서 태어난 그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을 때 56세가 되어 있었다. 역사에서는 이들 외삼촌과 조카를 '손위' 플리니우스와 '손아래' 플리니우스로 구별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대 플리니우스와 소 플리니우스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다. 구별할 필요는 있었다. 외삼촌도 조카도 국가 공무원이었고, 글의 소재는 달랐지만 둘 다 저술가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에서는 공직 경력을 쌓으면서 저술에서도 전문가적 솜씨를 보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아니, 이런 생활방식이 고대 로마에서는 오히려 보통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지방 출신으로 큰뜻을 품고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수도로 나와서 면학에 힘쓰는 젊은이의 전형이었던 대 플리니우스는 라인 강 연안의 군단에 딸린 기병부대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다음에는 황제 재무관으로 남프랑스 속주에 부임한다. 재무관은 속주세를 비롯한 세금 징수 책임자니까, 요즘 같으면 지방 세무서장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그의 근무 성적이 높은 평가를 받은 듯, 북아프리카와 에스파냐에 이어 갈리아 북부에도 황제 재무관으로 부임한다. 수도 로마로 돌아온 뒤에도 요직을 역임하다가, 결국 미세노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직무의 성격상 직속 상관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는 지위에 관계없이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플리니우스가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조사와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 저술 활동이 직무에 지장을 주는 일은 전혀 없다고 말하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빙긋이 웃으면서 "알았어, 알았다구" 하구 대꾸한다. 실제로 직무 이외의 모든 시간을 연구에 바치는 모습을 보면, 함께 살고 있는 조카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의 공직 경력은 외삼촌과는 좀 다르다. 군단 대대장으로 출발하여 군단에 딸린 회계감사관을 지낸 뒤에는 수도로 돌아와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그후에는 원로원에 들어가 국가 재정 책임자로서 세출을 담당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등장하면서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속주 총독에 취임했는데, 이 기간에 트라야누스 황제와 플리니우스 사이에 오간 편지는 당시의 로마 제국을 아는 데 중요한 사료로도 유명하다. 제국의 전성기를 살았던 이 온화한 낙천주의자가 같은 시대에 살면서 매사를 비관적으로 보는 성향이 강했던 타키투스와 어떻게 친구 사이가 되었는지는 불가사의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자기보다 열 살이나 연상인 타키투스의 재능을 깊이 존경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 플리니우스에게는 동업자든 아니든 재능이 풍부한 사람에 대한 질투심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둘 다 변호사이기도 했고, 한번은 둘이 공동으로 변호를 맡은 적도 있었다. 서기 79년 여름의 베수비오 분화를 기록한 유일한 현장 증인이 바로 소 플리니우스다.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하니까 대 플리니우스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려달라는 타키투스의 부탁을 받고 소 플리니우스가 보낸 두 통의 답장에 그의 목격담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가 씌어진 시기는 타키투스가 '역사'를 준비하기 시작한 서기 100년께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지 20년 뒤에 이루어진 '증언'이 되는 셈이다. 이 두 통의 편지 전문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베수비오 분화와 폼페이의 최후에 관한 서책은 수없이 많으니까,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하나의 사건에만 초점을 맞춘 역사 저술을 모노그래프라고 부르는데, 통사를 쓸 경우에는 한가지 사건을 그렇게 상세히 서술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긴 하지만, 편지 전문을 번역하는 이유는 현장 증인의 증언을 소개하는 것 외에 또 하나가 있다. 이 편지들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두 사람, 아니 대 플리니우스를 포함한 세 사람이 지식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편지
-플리니우스가 타키투스에게 삼가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외삼촌의 죽음을 좀더 정확하게 후세에 전할 필요가 있으니까, 가까이에 있었던 내가 그것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신의 붓을 통해 후세에 전해진다면, 외삼촌의 죽음도 불멸의 영광을 얻을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먼저 그 점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외삼촌이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그 일대 도시들의 파편 밑에서 남몰래 죽었다 해도, 그 잊을 수 없는 재난으로 죽은 사람들이나 매몰된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기록게 남길 만한 존재임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외삼촌은 자신의 저술을 통해 이미 후세에서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 해도, 거기에 당신의 글이 보태진다면 그분의 영광은 반석처럼 탄탄해질 것입니다.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 기록에 남길 만한 행위를 하는 재능이나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재능 가운데 하나를 신들로부터 부여받은 사람은 참으로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큰 행운은 그 두 가지 재능을 다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외삼촌은 자신의 저술로 두 번째 행운을 획득했고, 첫 번째 행운은 이제 당신의 붓을 통해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요구에 흔쾌히 응하겠습니다. 아니, 당신께 그런 요구를 받은 덕분에 조카인 내가 외삼촌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함대 지휘를 맡고 있던 외삼촌은 해군기지가 있는 미세노에 계셨습니다. 8월 24일 오후 1시께였습니다. 맨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거대한 먹구름이 보인다고 외쳤습니다. 외삼촌은 일광욕과 냉수욕을 끝내고 침실에서 간단한 점심을 드신 뒤 평소 때처럼 책상 앞에 앉아 계시다가, 어머니 말을 듣고는 실내화를 신고 베란다로 나가셨습니다. 바닷가 높은 언덕에 서 있는 관저의 베란다는 이 이례적인 현상을 관찰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화산이 뿜어내는 먹구름 같은 연기가 높고 크게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멀리서(미세노 곶에서 4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 바라보아서는 어느 화산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게 베수비오 화산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베수비오 산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연기는 소나무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긴 줄기가 상공을 향해 높이 치솟은 다음, 꼭대기에서 사방으로 큰 가지처럼 갈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폭발 때문에 맹렬한 기세로 솟아오른 뒤, 폭풍의 기세가 가라앉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연기 자체의 무게 때문인지, 중앙에서 좌우로 퍼질수록 색깔도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곳은 하얗고, 어떤 부분은 잿빛이고, 또 다른 부분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 색깔은 밀려 올라간 화산재나 돌멩이가 뒤섞인 정도에 따라 달라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매사에 호기심과 탐구심이 왕성한 외삼촌은 이 이례적인 현상을 좀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소형 쾌속선을 준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나에게도 함께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외삼촌이 내준 숙제를 마저 끝내고 싶으니까 집에 남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관저를 떠나 군항으로 가려던 외삼촌에게 타스쿠스의 아내인 렉티나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베수비오 산 기슭에 있는 그들의 별장에도 위험이 닥쳐와, 달아날 길은 바다밖에 없다는 하소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외삼촌의 마음은 당장 박물학 연구자에서 함대 사령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외삼촌은 함대를 당장 출항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외삼촌도 그중 한 척에 올라탔습니다. 잘 아는 사이인 렉티나만이 아니라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언저리(아마 헤르쿨라네움)는 기후가 쾌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별장도 많고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미세노 항을 떠난 함대는 동쪽으로 항로를 잡았습니다. 피난민을 가득 싣고 도망쳐 오는 배들과 엇갈렸지만, 미세노 함대에 소속된 배들은 위험한 곳을 향해 곧장 나아갔습니다. 베수비오 화산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창 폭발하고 있는 베수비오 화산의 무시무시한 전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갑판 위에는 벌써 화산재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화산재는 함대가 다가갈수록 뜨거워지고 양도 많아졌습니다. 뒤이어 숯처럼 검게 타버린 돌멩이며 아직도 숯불처럼 타고 있는 돌멩이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해안에 접안하기는 불가능해졌습니다. 해안으로 다가갈수록 파도가 거칠어졌고, 게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여울이 항해를 방해했고, 흘러내린 용암이 벌써 바닷가에까지 이르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본 외삼촌은 잠시나마 망설인 모양입니다. 구조를 포기한 채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조타수에게 "행운은 용기있는 자를 돕는다"고 말하면서, 폼포니아누스의 별장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조타수는 나중에 그때 있었던 일을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폼포니아누스의 별장은 거기서 남동쪽인 스타비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토록 잔잔한 나폴리 만 전체가 그 무렵에는 거친 바다로 변해 있었습니다. 폼포니아누스의 별장에 있던 사람들은,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금방 닥쳐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배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하인들이 옮겨 실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직 선착장에 묶여 있었습니다. 역풍이 가라앉자마자 출항할 작정이었겠지요. 그때 외삼촌이 도착했지만, 풍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습니다. 폼포니아누스는 겁에 질린 나머지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외삼촌은 친구를 격려하고 기운을 북돋워주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면 평상심을 되찾지 않을까 싶어. 친구와 함께 목욕을 하고 마사지도 받은 다음 저녁식사를 즐겼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베수비오는 용암으로 능선이 붉게 물들고,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밤의 어둠을 등지게 된 뒤로는 분화구에서 뿜어나오는 불길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지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외삼촌은 저건 산장 주인이 깜박 잊고 등불을 끄지 않은 채 대피해서 일어난 화제라고 말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후 외삼촌은 잠을 자러 갔습니다. 걱정거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깊이 잘들었다고 합니다. 비만한 외삼촌은 코를 심하게 골았기 때문에 침실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침실이 면해 있는 안뜰이 요동치기 시작하고, 지표면 자체가 솟아올랐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화산재와 벌겋게 타오르는 속돌은 양도 점점 많아지고 속도도 계속 빨라졌습니다.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면, 침실문까지 쌓인 돌멩이와 화산재 때문에 외삼촌은 두 번 다시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외치는 소리에 깨어나 밖으로 나온 외삼촌을 한숨도 자지 못한 폼포니아누스와 사람들이 맞이했습니다. 다들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습니다. 이대로 별장에 머무를 것이냐, 아니면 밖으로 대피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별장도 정원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지진은 대지를 뒤엎기라도 할 기세여서, 서 있기도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진동은 멀어졌나 하면 다시 돌아오면서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대피한다 해도, 무게는 가볍지만 열기를 머금은 돌멩이가 쏟아지고 있어서 위험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방법 중에서는 그래도 밖으로 대피하는 쪽이 덜 위험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베개나 쿠션을 머리에 올려놓고 긴 끈으로 묶었습니다. 이것으로 탈출 준비를 끝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미 아침이 되어 있을 터였습니다. 하지만 베수비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게 된 지역 사람들은 아직도 여느때의 밤보다 더욱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베수비오가 뿜어내는 엄청난 화염과 섬광도 그 어둠을 몰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초롱불을 켜들고 어둠을 밝히면서 선착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배를 띄울수 있을지 어떨지 확인하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다는 전날보다 더욱 거칠었고, 게다가 바람은 여전히 역풍이었습니다. 이래서는 별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별장으로 돌아온 외삼촌은 타일 바닥에 시트를 깔고 누웠습니다. 그러고는 누운 채 두 번 냉수를 청하여 마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코를 찌르는 유황냄새와 화산재를 머금은 대기가 소리도 없이 집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외삼촌도 하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곧 쓰러져서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상상하건대, 분화로 발생한 유독가스에 질식하여 호흡곤란을 일으킨 듯합니다, 평소에도 외삼촌은 폐와 기관지가 약했습니다. 햇빛이 다시 돌아온 것은 외삼촌이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 지 사흘 뒤였습니다. 별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쓰러졌을 때와 똑같이 누워 있는 외삼촌을 발견했습니다. 손상된 부위도 없고, 옷도 그때 입었던 그대로 흐트러지지 않았고, 시체라기보다는 잠들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답니다. 그동안 미세노에서 어머니와 나는...아니, 이런 이야기는 역사와 관계없고, 당신이 알고 싶어한 것은 외삼촌의 죽음에 대한 진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만 붓을 놓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덧붙여두겠습니다. 내가 여기서 말한 것은 모두 나 자신이 현장에서 목격한 사실이거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직후에 나에게 들려준 것뿐입니다. 이런 사실들 중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는 당신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편지를 쓰는 것과 역사를 쓰는 것은 다릅니다. 친구에게 쓰는 것과 대중을 상대로 쓰는 것은 다른 게 당연하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두 번째 편지
-플리우니스가 타키투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외삼촌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힌 지난번 편지에서 하다 만 이야기를 계속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미세노에 남은 내가 어떤 불안에 시달렸고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를 마저 이야기해 달라고 말입니다. 내 마음에 슬프고 끔찍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해도 감히 이야기하겠습니다.(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인용). 외삼촌이 배를 타고 떠난 뒤, 나는 해질녘까지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외삼촌을 따라가지 않은 것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공부를 끝낸 뒤, 평상시처럼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잠을 자러 갔습니다. 선잠이었습니다. 지진이 잠을 방해했기 때문이지만, 지진이 드물지 않은 캄파냐 지방인데도 그날 밤의 지진은 특별했습니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무너져내릴 것 같은 격렬한 진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머니가 내 방으로 달려오셨습니다. 나도 어머니한테 가려고 침상에서 막 일어난 참이었습니다. 우리는 둘 다 같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직 자고 있다면 깨워야 한다고. 어머니와 나는 안뜰 한구석에 앉았습니다. 그곳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해안이었습니다. 용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무모했기 때문인지(어쨌든 나는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나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책을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그것도 그냥 읽은 게 아니라 요점을 메모하면서 읽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 와서 관저에 머물고 있던 외삼촌 친구가 안뜰에 앉아 있는 어머니와 그 옆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보고는 분개하여, 나한테는 어떻게 그처럼 태연할 수 있느냐고, 어머니한테는 저런 아들을 그냥 두다니 어떻게 그처럼 무사태평할 수 있느냐고 비난했습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침 햇살은 아직 희미하고 어스레했습니다. 그 햇빛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집들은 대부분 무너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저택은 주위에서 높은 지대에 있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크고 튼튼한 구조였지만, 무너진 다른 집들을 분 뒤로는 이 집도 안전할 것 같지 않다고 하인들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밖으로 대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일행이 저택을 나와 교외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어쩌면 좋을지 몰라 허둥대던 인근 주민들도 우리를 따라왔습니다. 공포 속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기보다 남의 판단에 따르는 편이 현명하게 여겨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인들을 거느린 우리 일행 뒤에는 긴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집들이 늘어서 있는 시가지를 막 벗어난 곳에서 우리 일행은 일단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거기서도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 우리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길은 평탄한데도, 귀중품과 당장 필요한 물품을 가득 싣고 따라온 우리 짐수레가 요란하게 흔들려, 가만히 세워둘 수가 없었습니다. 바퀴 양쪽을 돌로 고정시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바퀴 양쪽을 돌로 고정시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눈 아래 펼쳐져 있는 바다도 여느 때와 달랐습니다.바닷물이 난바다까지 물러간 뒤 모래밭에는 죽은 물고기와 조개들이 잔뜩 널려 있었습니다. 그 저편은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시커멓고 거대한 구름에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연기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화염에 붉게 물들어, 마치 캄캄한 밤에 빛나는 거대하고 강렬한 번갯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 눈을 빼앗긴 채 우두커니 서 있던 어머니와 나에게 아까 말한 외삼촌 친구가 다가와서 외쳤습니다. "부인께는 오빠이고 자네한테는 외삼촌인 플리니우스가 살아 있다면, 두 사람의 안전을 무엇보다 걱정할 거요. 불행하게도 플리우니스가 죽었다 해도,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시 두 사람의 안전일 거요. 빨리 대피할 생각은 않고 뭘 망설이고 있는 거요?" 어머니와 나는 외삼촌 소식을 알 때까지는 우리 두 사람의 안전을 걱정할 수 없다고 대답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우리 곁을 떠나 혼자 대피했습니다. 곧이어 화산에서 뿜어나온 연기가 땅으로 내려오고 바다를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카프리 섬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이제는 가까운 미세노 곶조차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나에게 달아나라고 말했습니다. "너는 젊으니까 달아날 수 있어. 나이도 많고 몸도 늙은 내가 같이 가면 너마저 죽을지 몰라. 나 때문에 너까지 죽게 할 수는 없다. 어서 떠나거라. 네가 안전하게 대피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편안히 죽을 수 있어." 어머니는 애원하다시피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함께가 아니면 나 혼자 살아나고픈 생각이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급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간신히 따라왔지만, 걸음이 느린 건 당신 탓이라면서 계속 자책하셨습니다. 그 무렵에는 화산재까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마치 강에서 넘쳐나온 물이 땅을 서서히 덮어가듯 짙은 안개 같은 것이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길에서 벗어납시다. 뒤따라오는 사람들한테 밟히지 않도록." 우리는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달아나는 군중한테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야 겨우 몸을 쉴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다가와 우리를 덮쳤습니다. 하지만 여느 밤과는 달랐습니다. 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구름이 잔뜩 낀 것도 아닌데 마치 불빛 하나 없는 밀폐된 방에 있는 처럼 기묘한 느낌이 드는 밤이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여자들의 울부짖음과 아이들의 울음소리. 남자들의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를 찾는 소리, 자식을 소리쳐 부르는 소리, 남편이나 아내를 불러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쳤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덮친 운명을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죽도록 겁에 질린 사람들은 차라리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 팔을 쳐들고 신들에게 기도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신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 이 어둠은 영원히 계속되어 세상의 종말에 이를 거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공포와 절망 때문에 왜곡되어 전해진 정보가 진정한 해악을 끼친 예도 적지 않았습니다. 미세노의 한 건물이 무너지고 또 다른 건물은 화염에 휩싸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둘 다 거짓 소문이었지만, 그 때는 누구나 믿었기 때문에 절망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주위가 조금 밝아졌습니다. 하지만 아침이 찾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화염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화재는 멀리서 멈췄습니다. 하지만 재가 내려왔습니다. 다음에는 짙고 무거운 화산재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리는 자주 일어나서 화산재를 털어내야 했습니다. 그것을 게을리하면 당장 화산재에 뒤덮여, 그 무게에 짓눌려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당시의 내 나이를 생각하면, 그때 내가 사람들의 공포에 감염되어 동요한 나머지 군중 틈에 섞여 피난하지 않은 것, 그리고 비탄에도 잠기지 않고 절망의 소리도 지르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을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짧은 일생을 마칠 거라는 생각, 앞으로의 긴 인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가능성도 모두 여기서 나와 함께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으니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살기보다 죽는 쪽이 훨씬 편했을 텐데 말입니다.
화산재를 머금은 짙은 안개도 결국에는 희미해져 단순한 안개구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후에야 비로소 햇빛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태양 자체도 어슴푸레해서, 일식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풍경이 너무나 달라져 있어서 우리는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모두 눈에 덮인 것처럼 깊이 쌓인 화산재 밑에 파묻혀 있었으니까요.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하인들을 재촉하여 미세노로 돌아갔습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지친 몸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도 공포와 희망이 뒤섞인 기분으로 보냈습니다. 지진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 데 대한 공포, 이보다 더 심해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는 역시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느 때라면 남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지진의 조짐 따위는 웃어넘겼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도 어머니와 내 마음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외삼촌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자고. 소식이 올 때까지는 절대로 여기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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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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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백률사 - 순교자 이차돈
백률사와 자추사의 관계
경주 북쪽 금강산 기슭에 백률사가 있다. 금강산은 신라시대에 5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떠받들여진 산이다. 이 산은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이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순교했을 때, 그의 목이 날아와 떨어진 산이기도 하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차돈의 죽음을 슬피 여겨 이 산의 좋은 터에 그를 위하여 자추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이 산에 대한 신라인의 산악신앙이 합쳐져, 금강산은 신라인의 큰 숭배를 받았다. 이차돈을 위한 절인 자추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금강산 기슭에는 백률사 외에는 뚜렷한 절터가 발견이 안 되고 있다. 그래서 백률사가 바로 옛 자추사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긴다. 권오찬 씨에 의하면 '자추'는 '백률'과 뜻이 같다고 한다. 즉 '자'는 '잣'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며 '추'는 '밤'의 일종이라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추사는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기영 씨(한국불교연구원) 등이 집필한 '신라의 폐사 I'에 보면 자추사지는 백률사가 있는 금강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30m쯤 내려간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곳에는 마애삼체석불이 있다. 이 석불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바람과 비에 깎여 나가 심하게 마멸되어 손모양과 얼굴모습이 식별이 안 될 만큼 이즈러졌다. 이곳밖에는 절터가 발견 안 되는 걸로 봐서 이곳이 자추사터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백률사가 이차돈을 기리기 위한 절이었음은 분명하다. 이곳에 이차돈공양석당(국보 16호)이 있는 걸로 봐서 그 점은 명백해진다. 이 석당은 1.06m의 높이에 6면으로 된 것으로 1면에는 이차돈 순교에 대한 글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이 석당은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백률사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자추사가 백률사였다면 창건 연대가 법흥왕 때까지 올라간다. 한편으로는 삼국유사에 백률사 대비상 조성 얘기와 이 대비상에 얽힌 영험담이 효소왕 2년(69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는 걸로 봐서 이 절이 신라통일 전후에 세워진 것이라고 짐작되기도 한다.
관음상의 영험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절에는 관음상이 하나 있는데 참으로 영험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불상은 중국의 신장을 만들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 관음상의 영험담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서기 692년 효소왕은 부례랑을 구선(화랑의 우두머리)으로 삼았다. 그 문도는 1천 명이나 되었는데, 부례랑은 그중에서도 안상이라는 화랑과 친했다. 693년 3월에 부례랑은 무리를 거느리고 금란(현 강원도 통천)에 눌러갔다가 말갈족에게 잡혀갔다. 무리들은 당황하여 되돌아왔는데 안상만이 홀로 그를 뒤쫓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왕은 놀랐다. 더욱 그 직후에 천존고에 있던 보물인 현금과 신적(만파식적)이 감쪽같이 없어져버린 일이 일어났다. 왕은 "내가 복이 없어 국선을 잃고 두 보물까지 잃게 되었다"라고 탄식하고, 두 보물을 찾는 사람은 1년 조세로써 상금을 주겠다고 공포했다. 그해 5월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의 부처 앞에서 며칠 동안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향이 놓인 탁자 위에 난데없이 현금과 신적이 놓여지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나타났다. 놀라는 부모에게 부례랑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부례랑이 잡혀가 그곳 대신의 집 말먹이가 되어 들에서 방목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스님 한 사람이 손에 현금과 신적을 들고 와 그를 위로했다. "고향에 가고 싶다"고 부례랑이 말하자, 스님은 그를 바닷가로 데려가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을 각각 타게 하고 스님은 현금을 타고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그 스님은 바로 관음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이 얘기에는 신라인의 믿음과 통한다. 이 대비상에서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다른 관음신앙의 설화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분황사의 천수대비관음에게 빌어 눈먼 아이가 눈을 떴다는 얘기, 아이를 얻었다는 얘기 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금동약사여래상
이러한 얘기를 간직한 백률사 대비상은 임진왜란 때 없어진 듯하다. 이 절에는 이 대비상 외에 금동약사여래상이 전해왔다. 이 금동약사여래상(국보28호)은 불국사의 비로자나불. 아미타불과 함께 현존하는 신라 3대금동불상으로 꼽힌다. 높이는 1.79m인데 1930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겼으며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절에서는 그 동안 이 금동약사여래상을 돌려달라는 청원을 몇 차례나 관계기관에 했다. 그러나 한번 박물관에 들어간 불상은 영영 나올 줄 모르고 있다. 백률사는 그 동안 몇 차례 중건을 해왔다. 현재의 법당은 임진왜란 직후에 경주 부윤 윤승순이 중수한 건물이다. 오래된 법당이라 이 건물은 현재 보수가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이 절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과 탑을 양각한 돌조각 등이 남아 있으며, 대웅전의 동편 암벽에는 신라시대에 조각된 3,5m 정도의 높이로 3층탑이 음각된 것이 남아 있다. 또한 이 바위 끝에는 삼국유사에도 소개된 관세음보살의 발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발자국을 만지면 큰 복을 받는다는 신앙이 이 절의 신도들에겐 여전히 통한다.
[백률사 / 금동약사여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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