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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4호 - 2024.07.20 토요일(음력 : 06.15)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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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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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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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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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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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端午)의 유래
올해 6월 9일은 단오떡을 해먹고 부녀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널뛰기를 하며 남자는 씨름을 하는 명절인 단오이다. 단오(端午)는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뜻의 사자성어 ‘거세개탁(擧世皆濁)’의 지은 이로 알려진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나라가 망하자 이를 한탄하며 자결한 것을 기리는 제사에서 유래되었는데, 매년 음력 5월 5일 초나라 지역이었던 중국 남동부에서 굴원을 기리며 경주를 하고 만두 등의 음식을 해먹는 행사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단오가 되었다.
단오(端午)의 단(端)은 ‘처음’, ‘시초’의 의미이고 오(午)는 오(五), 곧 ‘다섯’의 의미이기 때문에 단오는 ‘초닷새’로 음력 5월 5일을 뜻하는 말이다. 음양 사상에서 홀수를 양(陽)의 수라 하고 짝수를 음(陰)의 수라고 해서 양의 수를 상서로운 수로 여겼는데, 단오는 양의 수인 5가 겹치는 날로서, 대표적인 길일(吉日)로 알려져 있다. 단오처럼 홀수의 월일이 겹치는 날은 예로부터 길일로 여겨져 왔는데, 음력 1월 1일인 설날, 음력 3월 3일인 삼짇날, 음력 7월 7일인 칠석(七夕),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重陽節)이 모두 홀수의 월일이 겹쳐 예로부터 어떤 일을 해도 탈이 없는 길일이라고 여겨왔다.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에 제비가 강남으로 갔다가 삼짇날인 음력 3월 3일에 강남에서 돌아온다고 하며 칠석에는 은하의 서쪽에 있는 직녀와 동쪽에 있는 견우가 까마귀와 까치가 머리를 맞대어 은하수에 놓은 다리인 오작교(烏鵲橋)에서 일 년에 한 번 만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정월 초하룻날인 설날에는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하며 덕담을 나누는 풍습이 전해진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장님 코끼리 만지듯 대신 ‘주먹구구식’으로
최근 어느 미용사가 뇌병변 장애를 앓아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요금을 내게 한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에게 차별 대우로 상처를 준 데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꼭 그런 행동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 표현으로도 상처를 줄 수 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뜻이 담긴 말들이 있다. 이런 말을 쓰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예전과 달리 요새는 ‘병신’이나 ‘불구자’ ‘절름발이’ 같이 장애인을 직접적으로 비하하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그런 말을 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정착된 듯하다. 굳이 장애인을 가리켜야 할 때에도 ‘장님’이나 ‘벙어리’ 대신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등 법정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비유적 표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데서도 ‘벙어리 냉가슴’이니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니 하는 표현들을 흔히 쓴다. 어딘가 구색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나타낼 때에는 ‘절름발이 위원회’ 같은 비유를 곧잘 한다. 그러나 이런 것도 쓰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쁜 의도는 전혀 없으며 예전부터 사용하던 속담이나 관용 표현을 쓴 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런 표현에 상처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피하는 것이 옳다. 굳이 장애에 빗댄 표현을 쓰려고 하지 말고 ‘말 못할 고민에 빠졌다’든가 ‘주먹구구식’ 등 다른 표현을 찾아보려 애쓸 필요가 있다. 장애인을 차별하고 비하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말들을 계속 사용하기보다는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표현들을 궁리해 봐야 하겠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다운로드’의 발음
우리말의 ‘ㄹ’은 꽤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소리이다. 이 소리는 그 앞에 ‘ㄹ’이 아닌 다른 자음이 오지 못한다. 그래서 ‘신라’는 앞의 ‘ㄴ’ 소리가 ‘ㄹ’로 바뀌어 [실라]로 발음된다. 앞의 자음을 바꿀 수 없으면 자기가 변해 버린다. 예를 들어 ‘종로’는 ‘ㅇ’을 바꾸는 대신 ‘ㄹ’ 자신이 ‘ㄴ’으로 바뀌어 [종노]로 발음된다.
그나마 ‘ㄹ’ 뒤에는 ‘불고기, 놀다, 꿀밤’처럼 다른 자음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데, ‘ㄴ’ 만큼은 ‘ㄹ’ 뒤에도 올 수 없다. 즉 ‘ㄹ’과 ‘ㄴ’은 특히 어울리지 못하는 짝이다. 그래서 ‘신라, 천리, 난로’ 등에서 [ㄴㄹ]은 [ㄹㄹ] 소리로 바뀌고, ‘칼날, 달나라’ 등에서 [ㄹㄴ]도 [ㄹㄹ]로 발음된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말의 발음 규칙이 외래어에서 흔들리고 있다. 예들 들어 ‘다운로드’는 우리말 발음 규칙에 따르면 [다울로드]이거나 [다운노드]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다운로드]로 발음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ㄴㄹ] 발음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도 과거에는 [올라인] 아니면 [온나인]이었으나, 지금은 [온라인]의 발음이 매우 많아졌다. 연예인 ‘헨리’도 방송에서 흔히 [헨리]로 발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언젠가는 [ㄹㄴ] 발음도 늘어나 ‘엘니뇨’도 [엘리뇨]가 아닌 [엘니뇨]로 발음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이는 영어의 영향이다. 영어 원음에 가깝게 발음하려는 경향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더 복잡해져 버린 이들 발음을 정리해 줄 필요가 있는데, 아직 외래어의 표준 발음이 정해져 있지 않다. 서둘러서 [다울로드]인지, [다운노드]인지, 아니면 [다운로드]인지 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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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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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소릉조 (70년 추일에) -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3
문득, 영혼안에 외로운 별이
바람처럼 일은 회한에 피어오른다
사계를 죽임 - 정지용
한밤에 벽시계는 불길한 탁목조 !
나의 뇌수를 미신바늘처럼 쫏다.
일어나 쫑알거리는 (시간)을 비틀어 죽이다.
잔인한 손아귀에 감기는 가녈핀 모가지여 !
오늘은 열시간 일하였노라.
피로한 이지는 그대로 치차를 돌리다.
나의 생활을 일절 분노를 잊었노라.
유리안에 설레는 검은 곰 인양 하품하다.
꿈과 같은 이야기는 꿈에도 아니 하랸다.
필요하다면 눈물도 제조할뿐 !
어쨌던 정각에 꼭 수면하는 것이
고상한 무표정이오 한 취미로 하노라 !
명일! (일자가 아니어도 좋은 영원한 횬례!)
소리없이 옮겨가는 나의 백금 체펠린의 유유한 야간
항로여 !
~~~~~~~~~~~~~~~~~~~
映寫板(영사판) - 김수영
고통의 영사판 뒤에 서서
어룽대며 변하여가는 찬란한 현실을 잡으려고
나는 어떠한 몸짓을 하여야 되는가
하기는 현실이 고귀한 것이 아니라
영사판을 받치고 있는 주야를 가리지 않는 어둠이
표면에 비치는 현실보다 한치쯤은 더
소중하고 신성하기도 한 것인지 모르지만
나의 두 어깨는 꺼부러지고
영사판 우에 비치는 길잃은 비둘기와같이 가련하게 된다
고통되는 점은
피가 통하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비둘기의 울음소리
구 구 구구구 구구
시원치않은 이 울음소리만이
어째서 나의 뼈를 뚫으고 총알같이 날쌔게 달아나는가
이때이다-
나의 온 정신에 화룡점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영사판 우의 모오든 검은 현실이 저마다 색깔을 입고
이미 멀리 달아나버린 비둘기의 두 눈동자에까지
붉은 광채가 떠오르는 것을 보다
영사판 양편에 하나씩 서있는
설움이 합쳐지는 내 마음 우에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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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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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2편 중도의 세계
제 2 장 중도의 원리
3. 중용과 변증법
중국에는 [중용(中庸)]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불교의 중도와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유교사상에서의 중용이란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음을 말합니다. 이를 테면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은 지나쳐 버리기 쉽고 모르는 사람은 너무 미치지 못하므로, 과(過)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中)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결국이 '중(中)'은 단순한 중간의 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는 서구 세계에서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인들이일찌기 중용사상을 펼쳤는데, 그들도 중간 사상을 가지고 중용사상이라 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들의 이른바 중용사상은 양 변을 완전히 버리고 동시에 양 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사상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양 변을 융합한다는 것은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도사상과 중용은 결코 혼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계에서도 근대에 이르러 언뜻 보기에 불교의 중도사상과 비슷해보이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바로 헤겔의 변증법(辯證法) 사상입니다. 정(正), 반(反), 합(合), 이 세 가지가 변증법의 기본 공식으로 정에서 반이 나오면 그것을 융합시켜서 합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논리는 중도와 비슷한 듯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보기를 들어 정(正)이라는 사상이 나와서 이것에 모순이 생기면, 다시 반(反)이라는 사상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것이 서로서로 종합이 되어서 합(合)이라는 사상이 나온다는 이론입니다. 이와 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말하는 헤겔의 정, 반, 합 이론도, 정과 반을 완전히 버리고 정과 반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도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변증법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괴테와 헤겔이만났는데, 괴테가 헤겔에게 그 변증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헤겔은 그것은 모순의 논리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곧 정과반의 모순, 시와 비의 모순, 선과 악의 모순을 말하니, 이것은 양 변이 서로 모순이므로 서로 통할 수가 없으니 이 이론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도사상이니, 팔만대장경 전체가 여기에 입각해있으며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모든 말씀이 바로 중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사상을 떠나서 불교를 설명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에 대한 반역(反逆)인 것입니다. 불교를 설명한 많은 것들의 그 진위(眞僞)를 가리려면 중도논리(中道論理), 중도정의(中道定義)에 위배되는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에 위배되는 사상은 결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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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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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3권
1. 국정의 제1지표 (1/2)
누가 세월에 매듭을 지어 놓았을까?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삼백예순닷새가 걸린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은인으로 간주해야 마땅하다. 이 삼백예순닷새를 다시 열둘로 나누고 그 열둘을 다시 평균 서른 날로 나눈 사람의 지혜는 그저 경탄스럽기만 하다. 그랬기에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세월을 약으로 치부하며 실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이다. 세월에 매듭이 우주여행을 할 만큼 과학이 발달한 오늘에 있어서도 어느 누구도 매듭지어진 세월에 수정을 가할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것이 너무나 과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도 새 세월이 시작될 때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어쩌고 저쩌고 하며 새 세월에 희망을 거는 말을 한다. 세월에 매듭을 지은 사람이 정치하는 사람들더러 선량한 백성을 회유하는 데 써먹으라고 세월에 매듭을 지어 놓은 것을 아닐 텐데, 그것을 정치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활용하고 있으니 아마도 지하에 있는 당사자는 꽤나 기가 찰 노릇일 게다. 그야 어쨌든 4.19로 어수선했던 1960년 새해는 신축(辛丑)년이었다. 한데, 새해를 맞으면 관공사는 새해 첫머리 사흘 동안을 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도 장면을 위시한 각료들은 쉬지를 않았다. 내각책임제는 소걸음처럼 느린 정치제도이니까 가능하면 시간을 아껴가며 능력있는 정부를 만들어 나가자 해서였다. 아닌게 아니라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내각책임제였던 만큼 무엇 하나 하려고 해도 민의를 완전히 수렴한 다음에라야 가능했기 때문에 국정처리가 밀려 쌓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새해 첫날에 제일 먼저 우리가 처리해야 할 문제는 군(軍) 처우개선 문제에 대해서외다. 그동안 자유당 정권에서는 재원의 빈약을 이유로 군대의 그래서 새 공화국에서는 새해 첫머리에 이 문제를 처리함으로써 군인들이 안심하고 국토방위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해줍시다."
국무회의가 열려 군의 처우문제를 상정시켜 놓은 장면은 이렇게 말했다. 군 처우개선 문제라고는 하나 직업군인의 봉급을 대폭 올려주지는 못했다. 그건 물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돈이 없었다는 표현은 걸맞지 않다. 국고가 바닥이 나 있었던 것이다. 자유당 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치루며 국고금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모조리 긁어서 선거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고만 비어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방, 그러니까 정부 각 부처마다 빚을 것이다. 이 빚만 갚으려 해도 몇 년이 걸려야 청산이 될지 아득하기만 했다. 이런 판국에 직업군인의 봉급을 올려주면 얼마나 올려주겠는가. 하지만 정부는 국토방위의 최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고 있는 직업군인의 생활보장을 위해서 성의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날 각의에서는 군인의 처우개선 문제만을 처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무회의를 연 김에 <부정선거 처벌법에 관한 법률>도 공포를 했다. 이 법을 공포하기에 앞서 장면은 이런 소감을 피력했다.
"나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소급법 같은 것을 만들어 정치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급법을 만든 생각을 하면 오직 부끄럽다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소."
이 말은 장면의 가식 없는 양심의 소리였다. 이승만 정권은 4.19라는 민중혁명에 의해 무너졌지만 정치개혁은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민주주의의 창달로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장면이 지향하고 있던 정치이념이었다. 그런 정치이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이학생들의 국회의사당 점거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정치보복이라 할 수 있는 <부정선거 관련과 처벌법> 같은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로서는 가슴을 앓을 만도 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면이 부상학생들의 분노를 이해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돼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배움의 길에 있던 학생들이 아니던가. 적에게 불구가 됐으면 그나마 덜 억울하겠는데, 그들은 적도 아닌 동포의 손에 의해서 불구의 몸이 되지를 않았는가. 어찌 이성을 잃고 국회의사당을 점거할 만한 폭거를 저지를 만큼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점으로 볼 때에는 기성정치인으로서 책임감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어떻게 성립될 수 있었던 민주당 정권이었던가? 학생들이 순수한 정의감에 사로잡혀 목숨을 걸고 순수한 정의감을 불사르지 않았던들 민주당 정권의 창출이란 요원하기만 한 일이었다. 이렇듯 학생들에게 큰 빚을 진 장면으로서는 덮어놓고 법을 따를 수만도 장면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장면의 고민은 정치형태의 이중성 때문에 더욱 크기만 했던 것이다. 국무회의를 끝내자 장면과 그의 각료들은 간담회에 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적자재정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럴 때에 외무부 직원이 달려와 외무부 장관 정일형에게 쪽지를 건네 주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장관님, 일본 정부에서 경제사절단을 파견하겠다고 통고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경제사절단을 파견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왜 갑자기?) 정일형은 잠시 일본의 속셈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 다음 그 쪽지를 옆에 앉아 있는 장면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아마도 일본 정부가 우리 민주당 정권이 안정됐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쪽지에 눈길을 주고 있던 장면은, 그 말을 듣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일형이 물었다.
"환영한다고 통고하라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동의하는 장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궁즉통이라고 직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정일형의 말마따나 일본 정부는 이제 한국의 장면 정권이 안정이 됐으니 경제사절단을 파견해서 한국의 경제 재건을 도와주면서 <장면 정권을 친일 정권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구상할 법도 한 일이었다. 척하면서 우린 우리의 실속을 차리도록 할 테니까.> 어쩌면 장면은 이런 생각이 들어 부지불식간에 미소를 지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장면이나 그의 각료들은 사회도 이제는 어지간히 안정됐겠다, 그래서 신정 연휴까지도 반납해 가면서 국정에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새해 첫머리부터 엉뚱한 데서 사고가 빚어져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었다. 국회에서 특별검찰부장으로 선임된 오완수(吳完洙)가 특별검찰부장 취임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소급법을 만들어서 과거의 문제까지 들추어 가지고 처벌하려 들다니, 이것은 남기게 되면 그런 불행한 일이 되풀이될 우려가 있어. 법률을 배운 사람으로서 소급법을 적용하는 재판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야!"
오완수는 이런 이유를 내세우며 특별검찰부장 취임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3.15 부정선거의 원흉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특별재판소나 특별검찰부의 장은 국회에서 투표로써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민의원에서는 상이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원흉들에 대한 재판을 서둘러야 되겠다 해서 묵은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31일의 본회의에서 특별재판소장에 문기선을, 오완수는 미군정 때 대구 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지낸 대쪽 같은 법조인이었다. 그를 특별검찰부장으로 민 것은 민주당 소장파인 이병하(李炳夏)였다. 민의원 원내총무이기도 했던 그가 오완수를 특별검찰부장으로 추천을 하자, 소장파 전원이 밀어줌으로써 오완수는 특별검찰부장으로 선출될 수가 있었다. 그랬는데 막상 선출해 놓고 나니까 취임을 거부하고 나섰으니 민주당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체면도 체면이지만 부정선거 원흉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두 달밖에 남지 않았었다. 조서를 다시 꾸미고 기소를 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런 처지에 오완수가 특별검찰부장 취임을 않을 수가 없었다. 상이학생들이 또 몰려와 부정선거 원흉 처단이 늦어지는 것을 힐책이라도 하는 날엔 변명할 길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거중 조정에 나서야겠군.) 민의원 의장 곽상훈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1월 5일 이병하가 오완수와 더불어 삼청동에 있는 의장 공관으로 찾아왔다.
"아이구, 이거 반갑소. 그렇잖아도 내 한번 선생을 만나야 되겠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주시니 고마운 말씀 뭐라 사뢰어야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곽상훈은 오완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제가 오늘 의장님을 방문한 것은 국회를 존중하는 뜻에서외다. 불초한 나 같은 황송하기도 하고, 어쨌거나 저는 법률가로서의 양심상 검찰부장에 취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퇴서를 써 갖고 찾아뵈 온 것이외다."
오완수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끄집어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 손을 곽상훈이 황급히 잡았다.
"선생, 선생의 법률가로서의 그 고매한 자세는 나도 존경을 하오. 한데 우리가 소급법을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은 아니지 않소. 저간의 사정은 선생도 익히 잘 아시는 바이고......."
"아니외다."
이완수는 곽상훈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장님, 상이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소급법을 만들었다 그 말씀이신데, 그러면 만들라고 하면 그 법률도 만들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가 되는 게 아니겠소? 그래가지고 어찌 진정한 민주정치를 발전시킬 수 있단 말이외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는 소급법은 정치적 보복이라 믿고 있기에 부장 취임을 승낙할 수가 없소이다."
오완수의 결심은 단호했다. 그러한 오완수의 자세에 곽상훈은 오히려 속으로 흐뭇함을 느꼈다. 감투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정치하는 무리들에 비해 이 얼마나 고결한 인품의 법조인인가 말이다. 그러기에 곽상훈은 더욱 오완수를 놓치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대안을 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검찰부장에 취임하셔서 검찰부 구성만 끝내 활동을 개시할 수 있겠소이다만?"
"소급법 자체가 불법인데도 그 불법을 자행하려는 기관에 나더러 협조하란 말씀이시오? 내 양심을 속여 가면서 말이외다!"
오완수는 어이없다는 듯 허허허 웃기까지 했다. 오완수가 이렇게 나오자 곽상훈은 입맛이 썼다.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도 자꾸만 그에게로 끌리는 미련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저런 사람을 검찰부장에 기용을 해야 하는데.) 곽상훈은 기회가 있으면 장면에게 강력히 추천해서 오완수를 등용하도록 해야겠다고 보았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결국 곽상훈은 1월 12일(1961년) 민의원을 소집해서 김용식(金龍式)을 새로이 특별검찰부장으로 선출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자꾸만 오완수에게 끌리는 마음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설 무렵의 실업자수는 3백만 명을 상회하고 있었다. 물론 이 숫자는 완전실업에 잠재실업까지 합친 숫자였다. 남한 전체 인구의 거의 1할이 실업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장면은 집권을 하자, <경제 제일주의>를 국정의 제 1지표로 내세웠다. 초미의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6.25 남북전쟁이 휴전으로 매듭지어진 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미국의 원조로 파괴돼 버린 산업시설을 복구하기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새발의 피나 다름없던 미국의 원조로 산업시설을 복구한다는 것은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실업자가 3백만 명에까지 이르고 있었던 이유는 이런 까닭에서였다. 장면이 집권을 하자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이 급하다고 해서 경제 제일주의를 국정의 최고지표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재간이 있어서 이런 지표를 내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목표를 세워 놓고 여기에 정치력을 총집중시켜 보자 해서였다. 했으나 참으로 막연하기만 했다. 정부가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켜 주자면 그 방법은 산업을 일으켜서 일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는 것이었는데, 돈이 있어야 산업을 일으킬 수 있을 게 아니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고는 이미 바닥이 나 있었고, 국고만 바닥이 나 있던 것이 아니라 정부의 빚도 산더미 같았다. 자유당 정권이 어디에다 돈을 쓰느라 그렇듯 엄청난 빚을 졌는지 모르지만 민주당 정권이 그 모든 빚을 떠안고 갚아주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외국에서 재정차관을 얻어서 사업을 벌여보려고 해도 빚을 갚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돼야 외국도 차관을 주는 것이었던 만큼 외국의 재정차관을 얻는다는 것은 한낱 몽상에 절망적이었다. 여기에 장면 정부를 괴롭히는 일이 또 제기되었다. 미국 정부에서 <환율을 올리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를 올리라고 강요했던가? 1,000대 1로 올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1960년 현재 환율은 600대 1이었다. 그것을 갑자기 66% 이상이나 올리라고 강요하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재무부 장관 김영선은 미국측과 참으로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했다.
"환율을 올리게 되면 인플레가 돼서 가뜩이나 어려운 균민 경제생활을 더욱 압박하게 될 텐데, 어떻게 갑자기 66%씩이나 올린단 말이오?"
배짱도 튕겨보고 또 때로는 읍소도 태도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에 민주당 정권에서도 어쩔 수 없이 1960년 10월 25일에 환율을 1,000대 1로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환율이 오르고 보니 국민 경제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국측에서도 환율을 올려야 할 요인이 생겼기 때문에 올리라고 강요하게 되었던 것이겠지만, 이 요인이라는 것이 자유당 정권 때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요인이 제기되더라도 이승만은 미국의 압력을 배짱 하나로 물리쳤었다.
"좋소. 환율을 올린 테니 미국의 원조를 배로 올리시오. 그러면 환율 인상 문제를 고려해 보도록 하겠으니."
이승만은 이렇게 배짱을 부리며 미국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장면은 그런 배짱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배짱이 없으니 결국은 미국의 강요를 물리치지 못하고 끝내는 저들의 요구대로 올려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위기를 무슨 방법으로 극복해야 한단 말인가?) 장면은 골치가 아팠다. (나라살림을 꾸려간다는 것이 이렇듯 어려운 일이던가.) 절로 탄식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지금의 재정위기를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일 회담을 서두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한.일 회담을 열어서 대일 청구권 문제만 타결되면 지금의 재정위기를 능히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을 이것이 일석이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건의를 한 사람은 오위영(吳緯永)이었다. 그 밖에도 이유는 또 있었다. 일본은 지난날의 한민족의 원수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일본을 외면하고 살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첫째는 자유세계의 단결이라는 국제정치적인 요망이 언제까지나 원수 사이로 놓여 있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런 요망으로 해서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를 절실히 바라고 있는 것은 한국민 자신보다도 바로 미국이었다. 또 한국의 입장으로서도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일본과 선린관계를 맺어 놓았다고 우리에게는 국교정상화의 전제 조건 중의 하나인 <재산청구권>이라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어느 정도의 선에서 이 <재산청구권>을 인정해 줄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당장은 플러스가 될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위영이 <국교정상화>라는 대의명분하에 한.일 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촉구한 이면에는 그 나름대로의 속셈이 따로 또 있었다. 그것은 <일본 자본을 끌어들이자>는 것이었다. 오위영은 일본땅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일본 재계, 정계의 거물들과도 자주 접촉을 했고, 어느 부분에 투자를 하라고 하면 일본 자본가들이 응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타진해 보았다. 재개를 촉구하면서,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없는 우리의 형편으로서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산업경제를 부흥시키는 길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앞서 해결해야 할 것은 국교정상화입니다.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고는 일본 자본가들이 투자할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지다" 하고 곁들여 헌책을 했다. 장면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일본 정부가 장면 정권의 탄생을 축하해 주고자 외무대신 고자까(小坂)를 보내는 등 성의를 보이는 것을 보자 잘만 하면 한.일 회담은 조기타결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일본 정부가 외무대신 고자까를 한국에 정권이 성립된 지 꼭 열흘 만의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친선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외무대신을 파견했던 것이다. 참으로 발빠른 조치였다.
한.일 회담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네 번에 걸쳐 열렸다. 그러나 회담은 질질 끌기만 했을 뿐 양국간에 무엇 하나 타결을 보지 못했다. 한.일 회담이 막을 올리자 한간에서는 <이승만이 일본 정부에 대해서 32억 불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없는 낭설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낭설이 소문으로 나돌게 진행된 한.일 회담에선 <얼마를 내놓으라>고 구체적으로 액수를 제시했던 일은 없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진행된 한.일 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측에 제시했던 요구사항은 다음의 8개항이다.
(1) 조선은행을 통해서 반출된 지금(地金) 24,963,361그램 및 지은(地銀) 675,417,722그램을 반환하라.
(2) 1954년 8월 9일 현재의 일본 정부의 대 조선총독부 채권을 반제하라.
가. 체신국 관계
1. 우편저금, 진체(振替)저금, 위체(爲替)저금 등
2. 국채 및 저축채권 등
4. 해외 위체저금 및 채권
5. 태평양 미육군사령부 포고 제3호에 의해서 동결된 한국 수취금(收取金)
나.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인이 한국 각 은행으로부터 인출한 예금 이다. 한국에서 수입된 국고금 중의 이부자금(利付資金)이 없는 세출에 의한 한국 수취금 관계. 조선총독부 도쿄(東京) 사무소의 재산
마. 기타
(3) 19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으로부터 진체 또는 송금된 금품의 반환 청구.
가. 8월 9일 이후 조선은행 본점으로부터 재일본 도쿄 지점에 진체 또는 송금된 금품 금융기관을 통해서 일본에 송금된 금액
다. 기타
(4) 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권 사무소가 있던 법인(法人)의 재일 재산의 반환청구.
가.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965호에 의거 폐쇄청산(閉鎖淸算)된 한국 내 금융기관의 재일 지점 재산
나. 연합군 최고사령부 지령 965호에 의거 폐쇄된 한국 내 본점 소유법인의 재일 재산
(5) 한국 법인 또는 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일본 국채.공채, 일본 은행,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반제청구
가. 일본 유가증권
다. 피징용 한국인 미수금
라.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
마. 한국인의 대 일본 정부청구 은급(恩給)관계
바. 한국인의 대 일본인 또는 법인 청구
(6) 한국인(자연인.법인)의 일본 정부 또는 일본에 대한 개별적 권리행사에 관한 항목
(7) 전기 제(諸) 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발생한 제 과실의 반환청구
(8) 전기의 반환 및 결제의 개시 및 종료시기에 관한 항목
우리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한.일 회담은 아주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어떠한 태도로 나왔던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일제 36년 동안 일본이 한국에서 빼앗아간 물건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금과 은이었다. 금이 24톤이나 되었고, 은이 675톤이나 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것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일본 정부는 뭐라고 했던가?
"무슨 당찮은 요구를 하고 있소? 당시의 조선은행법 제 71조 7항(지금, 은의 매매 및 화폐의 교환)에는 금과 은을 외국 화폐로 매매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단 말이오. 그 법규에 따라 우리 일본은 일본 화폐를 조선은행에 지불하고 금.은을 사왔던 거요. 우리가 무상으로 가져왔거나 또는 채무를 지고 가져왔다면 반환을 사온 것인데 어째서 반환하라는 거요?"
일본 정부는 돈을 주고 사왔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한국은 우리가 지불한 그 돈으로 세계 시장에서 석유다, 휘발유다, 고무다 해가지고 사다 쓰지를 않았소? 그래놓고 이제 와서 금.은을 돌려달라? 좋소, 돌려 드리지요. 그럼 그때 우리가 준 일본 화폐를 돌려주시오. 그러면 금.은을 돌려주도록 하겠소."
일본 정부로서는 그렇게 주장할 만한 일이었다. 총독정치시대에 조선은행권이 아닌 일본 화폐로 셰게 시장에서 물건을 사왔던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해 본 일이 없지만 한.일 회담 한국 대표들은 제기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었다. 한.일 회담이 막을 올렸던 것은 6.25 동란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1951년 10월 20일이었다. 이때의 대표단은 수석대표가 양유찬(梁裕燦)이었고, 교체 수석대표는 김용식(金溶植)이었다. 여기에 신성모, 갈홍기(葛弘基), 임철호, 유진오(柳鎭午), 임송본(林松本), 홍진기 등이 대표로 참가해서 활약했는데, 이들 대표들은 그런 중요한 회담에 참석하면서도 무엇 하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었다. 6.25 동란통에 기본 자료가 될 만한 걸 모두 분실해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그렇다면 회담을 서둘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료를 충분히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 돈을 주고 금.은을 사왔다. 이제와서 금.은을 돌려달라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하고 일갈하자, 그만 끽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하는 궁색한 처지에서 무슨놈의 회담이 성사될 수 있겠는가? 일본측은 한국 대표들의 입을 아예 봉해 버리기 위해 이런 궤변도 늘어놓았었다. "금.은을 돌려달라는 것을 보니 우리가 한국에서 사다 먹은 쌀도 내놓으라고 주장할 것 같소. 그래 그것을 사다가 먹은 사람들은 모조리 죽고 없는데, 어디 가서 토해 내라고 해야 옳겠소?" 한국 대표들은 그저 꿀먹은 벙어리였다.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은행 지하실 창고에는 일본 화폐가 산더미처럼 쌓여 유엔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그놈의 돈이라도있었더라면 모조리 일본으로 싣고 가서 <자 너희 나라 돈 여기 있다. 이걸 돌려 줄 테니까 우리 나라에서 가져간 금.은을 내놔!> 이렇게 호통을 쳐볼 만한 일이었는데,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 조선총독부 채권의 반제청구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나왔던가? 여기에는 각종 국공채(國公債), 체신국 관계의 각종 저금, 간이 생명보험 등을 위시한 기타 여러 가지 채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측은, "좋아요, 갚아 드리지요. 한데, 우리 나라에는 거기에 관한 증빙서류가 없으니 반제를 요구하는 당신네가 증빙서류를 일본 정부는 증빙서류를 요구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그것을 제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38선으로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있으니 절반쯤은 북한에 있을 것이고, 또 38 이남에 있던 것은 전쟁으로 모조리 잿더미가 돼버렸을 것이 틀림없는데 <제놈들이 무슨 재간으로 증빙서류를 제출하랴> 하고 아주 뱃심 좋은 속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대표단이, "당신네들이 그에 대한 증빙서류를 갖고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증거 인멸을 획책하기 위한 그런 엉뚱한 수작은 늘어놓지 말라"고 항면하자, "우리는 우리 동포들하고 관련된 피우는 것이었다.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서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에 대한 보상 요구에 있어서도 그랬다. 도대체가 한국 대표단은 여기에 대한 기초 자료조차 준비하지를 않았었다. 그래가지고 무슨 놈의 보상을 청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러고 보니 회담에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질질 끌면서 그저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때에 진행되었던 네 차례에 걸친 한.일 회담의 전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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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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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5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서기 69년 12월 21일~ 79년 6월 24일)
인간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평화 포룸'(포룸 파케스)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고, 당장 공사를 시작했다. 포룸(Forum)이란, 오늘날에도 남아 잇는 포로 로마노 유적으로도 알 수 있듯이,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치, 경제, 행정 등의 기능이 모여 있는 지역의 총칭이다. 로마 시대의 도시라면 어디에나 있지만, 포로 로마노의 라틴어 명칭인 '포룸 로마눔'은 '로마의 포룸'이라는 뜻으로서, 제국의 중추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공화국 시대에는 포로 로마노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로마 제국의 영역이 확대되자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포로 로마노 북쪽에는 '카이사르 포룸'을 건설하여, 국가 운영에 필요한 기능을 모아놓은 장소를 확대한 것이다. 제5권에서도 말했듯이, 카이사르가 창안한 '포룸'은 말하자면 '축소판' 포로 로마노다. 포로 로마노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는 신전도 있고, 재판이나 경제활동에 사용하는 회당(바실리카)도 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당시에는 두루마리 책)을 모아놓은 공립 도서관도 있다. '엑세드라'라고 부르는 반원형 구역에서는 사설 학당이 열리기도 했으니까, 도시 생활에 필요한 많은 기능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평화 포룸'도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의 포룸과 같은 목적으로 지어졌다. 최고 지도자가 시민들에게 제고하는 공공생활의 터전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에서는 공공 건축물에 그것을 지은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 포룸'이라고 불러도 비난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평화 포룸'이라고 불렀다. 평화의 회복과 유지야말로 황제가 된 자신의 최고 목표임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다. '베스파시아누스 포룸'이라고 부르지 않은 데에는 또 하나 숨은 이유가 있었다. 지방 출신에다 기존 지배층에도 속하지 않는 그는, 수도 출신의 명문 귀족인 카이사르나 그의 양자가 된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귀골'이 아니다. 누구나 납득하는 두 '신격'의 포룸 옆에 자기도 포룸을 세우는 것은 좋지만, 그 포룸에 신격처럼 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삼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베스파시아누스가 자신의 낮은 신분을 부끄러워한 것은 아니다. 황제가 된 그에게 아첨하는 자가 있었다. 폐하의 출신지인 리에티 근처에 헤라클레스 신이 다녀갔다는 땅이 있고, 서민들이 참배하는 사당까지 있으니, 폐하께서도 그 헤라클레스 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게 어떠냐고 말한 것이다. 로마 건국 때부터의 명문 귀족 출신인 카이사르는 , 트로이 함락 때 그곳을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망명했기 때문에 로마인의 선조가 된 아이네아스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따라서 아이네아스의 어머니인 베누스 여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널이 알려진 사실이었다. 독재자 술라도 베누스 여신의 혈통이라고 공언한 사람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헤라클레스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말하면 서민들은 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건전한 상식인'이었다.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 아첨의 말을 물리쳤다. 만약 받아들였다면 원로원 의원들한테 비웃음만 샀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건장한 체격에 찐빵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얼핏보기만 해도 서민적인 풍모였다. 그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화려한 궁전도 짓지도 않았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화려한 내부 장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 네로 황제의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유대 전쟁 때 아내가 죽어서 지금은 독신이었지만, 황후를 맞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애인은 있었지만, 로마의 상류층 여자가 아니라 노예 출신인 소싯적 친구였다. 그는 이 여인을 황후 자리에 앉히려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떤 일에도 참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상생활도 전과 다름없이 검소했다. 황제가 된 뒤에도 여전히 군인이라는 게 그의 자랑이었다. 황제와 접견할 사람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 여부를 미리 검사 받는 것이 보통이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제도마저 폐지했다.
행동거지도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었고, 당시 교양의 대명사였던 그리스어는 이해한 모양이지만 듣는 사람을 감탄시키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다만 이 시골뜨기 황제에게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유머 감각이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출신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자기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꺼이 만나주었다. 이제는 소수파가 되었지만 아직도 공공연히 제정 타도를 외치는 공화주의자들과도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수도 로마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황제 앞에서 공화정 복귀를 주장하자. 한동안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처형당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소리든 지껄일 작정인 모양인데, 하지만 나는 깽깽 짖는다고 해서 그 개를 죽이지는 않소."
그후 철학자들은 '견유학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병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살아왔기 때문에, 병으로 쓰러지자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불쌍하게도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군."
죽은 황제의 신격화는 이제 관례가 되어 있었다. 로마인에게 신은 이 정도 존재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결코 단순한 호인이 아니었다. 친정을 시작한 서기 70년 가을부터, 아니 황제를 자칭한 69년 여름부터 이미 두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는 생각과 황제권을 법제화하겠다는 생각을 명확히 밝혔다. 제위계승자를 명시해두면 제위를 둘러싼 다툼의 싹을 잘라버릴 수 있고, 법제화를 통해 황제권을 명쾌히 해두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과 원로원의 관계를 특징지은 불화의 원인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 '건전한 상식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생각이었다.
'황제법'
베스파시아누스에게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의 제위계승권을 명확히 한 것은 물론 아버지로서의 애정이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에서 도미티아누스에 이르는 '플라비우스 왕조' 다음에는 역사상 '오현제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등장하는데, 이 시대의 다섯 황제가 선정을 베푼 가장 큰 이유는 양자계승제도에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어쨌든 이 다섯 황제 가운데 네 사람은 친아들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양자가 제위를 계승했지만, 다 자란 친아들이 있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친아들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친아들을 가진 사람이 세습이 유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그 시절에는 지도자 양성기관으로서 가정의 중요성이 높았기 때문에 세습은 제삼자를 쉽게 납득시킬 수 있는 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습권을 확립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네로의 말로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후계자가 될 티투스에게 실적을 쌓을 기회를 주었다. 그때까지 유대 전쟁을 수행했던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고, 유대 전쟁의 총결산인 예루살렘 공략의 총지휘를 아들 티투스에게 맡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로의 비극적인 말로가 남긴 교훈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원로원이 황제 부적격자라는 낙인을 찍으면, 다시 말해서 다수의 찬성으로 황제를 '로마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면, 황제도 당장에 보통사람이 되어버린다. 원로원의 불신임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어머니를 통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우쭐대던 네로도 불신임을 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출신은 네로와 비교할 수도 없고, 로마 지배층에서는 신참자다. 그런 자신이 황제 노릇을 하려면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그 기반을 굳히는 의미에서 황제의 권력을 명쾌하게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생각했다.
둘도 없는 협력자인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이 생각을 정확하게, 게다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재빠르게 실현한다. 비텔리우스 황제가 살해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은 서기 69년 12월 말에 수도에 들어온 무키아누스는 당장 원로원을 소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에게는 원로원 소집권이 없었기 때문에, 소집권이 있는 법무관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를 통해 원로원을 소집한 뒤, 의원들에게 다음 두 가지를 의결해달라고 요구했다. 제위 세습과 관련하여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제위계승자 문제는, 내 아들들을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다시 무정부 상태로 돌아갈 것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1년에 황제가 세 명이나 등장했다 퇴장하는 것을 경험하고, 그때마다 사후 승인밖에 하지 못한 원로원 의원들은 심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정국 안정으로 이어지는 제위 세습에 찬성표를 던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음은 황제권을 명문화하는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로마의 카피톨리노 미술관에 남아 있는 비문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법' (Lex de imperio Vespasiani)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분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그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어느 나라와도, 어느 군주와도 동맹이나 우호조약을 맺을 권리를 가진다.
(2)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을 소집할 권리, 원로원에 법안을 제출할 권리, 법안을 원로원으로 되돌려보낼 권리를 가진다.
(3) 황제가 소집한 임시 원로원 회의에서 가결된 법안도 통상적으로 가결된 법안과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4) 본국 이탈리아의 행정을 맡는 법무관, 재무관, 집정관 등의 공직이나, 속주 통치를 담당하는 황제 속주 총독, 원로원 속주 총독, 이집트 장관이나, 세무를 담당하는 황제 재무관 등의 공직을 선출할 때, 황제의 추천을 받은 자는 그에 상응한 배려를 받는다.
(5) 수도 로마의 거주구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을 경우,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도 그 권리를 가진다.
(6)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국가의 존엄성과 이익에 맞다고 판단될 경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어떤 것도 제안하고 실행할 권리를 갖는다.
(7)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원로원 회의나 민회의 결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 제6권 '팍스 로마나'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것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자기한테 집중시킨 권리와 똑같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사실 그렇다.
(1)은 황제라는 칭호를 얻으면 자연히 따라오는 권리다. 로마군 최고 사령관이 황제니까, 군사와 거기에 수반되는 외교는 황제의 임무다. (2)와 (7)의 권리는 '호민관 특권'을 가지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다. (3)과 (6)의 권리도 일부러 명문화하지 않아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이 실제로 행사한 권리다. (4)는 요컨대 황제와 연줄이 있는 자는 선거에서 배려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사람을 쉽게 등용하기 위한 방책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한다 해도 굳이 법제화까지 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낮은 신분과 그에 따른 천박함이 드러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100년 전에 제정을 창설한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노골적인 표현으로 자기 권력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에는 아직 군주정에 대한 로마인의 거부감이 심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것만 보아도 그 거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서기 70년, 로마식 군주정은 그 동안 착실히 실적을 쌓았고, 그에 따라 지배자인 로마 시민과 피지배자인 속주민의 컨센서스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노골적으로 표현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극소수의 이상주의자들뿐이었다. 그리고 무인답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좋아하는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뒤에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아무도 불평할 수 없도록 명쾌하게 법제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비텔리우스가 살해되어 유일한 황제가 된 시점에서 이미 원로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권한을 인정받고 있었다. '로마군 최고 지휘권', '호민관 특권', '최고 재판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 '제일인자'. 앞의 세 가지는 권력이고, 뒤의 두 가지는 권위를 나타낸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법'을 굳이 성립시키지 않아도 권력과 권위는 이미 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법'은 누가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요컨대 아무도 불평할 수 없도록 그것을 법제화한 데 불과하다. 하지만 이 '황제법'의 진짜 목적은 맨 마지막에 그 권한들을 총괄하듯 덧붙어 있는 '상티오'(Sanctio)였다. 의역하면 '면책특권'이다. 그리고 이 조항의 복선이라고 할 수 있듯 제6항, 즉 국익에 맞다고 판단될 경우 황제에게는 어떤 일도 허용된다는 조항이 이 '면책특권'과 연동하여 더욱 강력해진다.
이 '상티오' 조항은 다른 부분과 달리, 어떤 오해도 허용하기 않기 위해 한마디 한마디에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전체 문장의 뜻이 오히려 불명료해지고 말았다. 법제처에 법안을 만들게 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전형적인 법률가의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항목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황제가 민회나 원로원의 의결에 반하는 일을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2) 황제에게는 벌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3) 민회나 원로원의 의결에 반하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이유로 황제를 고발하거나 탄핵재판에 회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인정되지 않는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둘도 없는 협력자였던 무키아누스는 이렇게 황제의 권한을 명확히 밝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법'을 황제 제출 법안, 말하자면 황제 입법으로 의결하지 말고, 원로원 입법이라 해도 좋은 '원로원 권고' 형식으로 의결해줄 것을 요구한다. 요컨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원해서가 아니라 원로원이 자발적으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법제화하는 형식을 취해달라는 것이다. '상티오'를 추가한 '황제법'에서 제안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법을 채택하고 서명한 이상 당신들한테는 황제를 탄핵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로서는 원로원의 불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네로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황제법'의 성립은 제정의 중대한 전환을 뜻했다. 원로원은 이제 황제를 탄핵재판에 회부하거나 다수결에 따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여 정권 담당자를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원로원은 제정 창시자인 아우구스투스도 인정했던 황제 견제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그것까지 요구한 것은 제정 100년의 실적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일까. 아우구스투스가 그것까지 요구하지 않은 것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는 미묘한 시기에 제정에 대한 로마인의 거부감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베스파시아누스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그도 역시 그런 면책특권을 요구했을까. 로마 역사에서 '원로원'은 거의 로마 자체라고 해도 좋지만, 로마의 발전과 더불어 그 기능도 변화해왔다.
왕정 시대에는 명문 집안의 우두머리들이 모여 왕에게 조언하는 기관이었다. 정원은 처음부터 300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기원전 509년에 로마가 공화정으로 바뀐 뒤, 원로원은 정원도 왕정 시대와 같고 유력자 집단이라는 점도 같았지만, 단순한 자문기관이 아닌 집행기관으로 탈바꿈한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를 오늘날의 기업에 비유하면, 시민은 평사원이고 원로원은 300명의 임원으로 구성된 중역 회의와 비슷하다. 이 300명 가운데 해마다 두 명이 사원 투표로 선출되어 1년 임기의 사장을 맡는다. 두 명이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은 국내를 담당하고 또 한 사람은 국외를 담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화정 시대의 '국외'는 패권 확장을 위한 전쟁을 지휘하는 것을 의미했다.
제정 시대에 들어오면 사장에 해당하는 황제는 이제 중역들 중에서 선출되지 않고 전임 사장의 아들에게 세습되거나, 전임 사장의 양자로 지명된 사람이 종신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민회도 시민들이 경기장에 모여 환호성으로 찬성의 뜻을 표하거나 반대하는 소리를 지르는 형태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전사원의 투표로 사장을 선출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런 형태로 바꾸려고 맨 처음 시도한 사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지만, 그 참뜻은 로마라는 기업이 이제 세계적인 규모를 가진 국제적 대기업으로 성장한 이상 그 우두머리가 해마다 바뀌는 것은 곤란하고, 300명이나 되는 임원의 합의제는 운영면에서 충분한 기능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정은 통치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변화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카이사르의 이런 구상을 실현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사장이 부적격자일 경우 탄핵할 수 있는 기능을 중역회의에 남겨두었다. 제정에 대한 견제 기능을 원로원에 맡긴 것이다. 하지만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원로원은 단순한 견제 기관이 아니었다. 국가 요직에 앉을 인재들을 모아두는 기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어울리는 권한을 주어야만 더욱 충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인간 심리로 보아도 충분한 기능을 기대하려면 충분한 권한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기 때문이다. 군사력으로 '원로원 체제'를 무너뜨린 카이사르조차도 원로원을 폐지하지 않았다. 폐지하기는 커녕 정원을 늘리기까지 했다. 다만 카이사르가 생각한 체제는 공화정 시대처럼 원로원이 주도하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황제가 주도하는 정치체제였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되면, 원로원은 인재 집합소의 역할만이 아니라 황제를 도와서 국가를 운영하는 기관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다.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부적격자로 판단될 경우에는 불신임할 권한도 있었다.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법'에는 황제가 부적격자로 판단되는 경우에도 불신임할 수는 없다고 명기되어 있다. 상상하건대, 아우구스투스가 베스파시아누스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 해도 '황제법'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자가 부적격자로 여겨질 경우 황제를 불신임할 권한-당시의 로마에서는 탄핵재판에 회부할 권한-을 빼앗긴 원로원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암살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로원에서 황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면 황제는 자살할 수 밖에 없으니까. 자살이든 암살이든 마찬가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기'를 갖고 있어도 쓰지 않는 것과 '무기'를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내가 국가 지도자로서 베스파시아누스의 역량에 최고점을 줄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은 법제화해봤자 어차피 완전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을 굳이 법제화했기 때문이다. 법률에도 그것을 발의한 사람의 인격이 반영되는 법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제 안심하고 황제 자리를 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법률의 첫번째 희생자는 그로부터 26년 뒤에 암살된,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아들 도미티아누스였다. 위험을 배제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위험에 발목이 붙잡힐 위험도 커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위험이 있으면 긴장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무의식중에도 궤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 황제라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항상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황제법'에서 볼 수 있듯이 제정의 전제화를 크게 진척시켰지만, 흥미롭게도 9년에 걸친 그의 치세는 온당한 통치로 일관했다. 원로원의 불신임권을 박탈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선정이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특기할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 특기할 만한 사건이 없었던 것은 선정과 행운이 겹쳤기 때문이지만,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의 출신과 평소의 서민적인 행동거지, 그리고 건전한 상식이 그의 인상을 부드럽게 해주었을 것이다. '서민 황제'가 베스파시아누스의 모습이었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거기에 만족하고, 그 효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특기할 만한 사건이 없다는 것은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쓰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본국으로 돌아온 뒤 베스파시아누스의 업적을 추적해보면, 내전으로 피폐해진 조국 재건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어서 흥미롭다. 그것을 연대순이 아니라 항목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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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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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무열왕릉과 재매정 - '화장 해프닝'의 장소
가장 확실한 신라의 왕릉
신라 왕릉 중 그 소재가 가장 확실한 것이 무열왕릉이다. 대구에서 경주로 들어간 국도변 경주 서편을 흐르는 서천을 건너기 직전 왼쪽편에 있는 이 왕릉은 이 일대 서악리고분군 중의 하나이다. 왕릉 앞 도로 건너편에는 두 개의 무덤이 보인다.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이다. 무열왕릉 뒤편으로는 네 개의 거대한 무덤이 늘어서 있다. 이 들 무덤의 오른편인 선도산 기슭에는 진흥왕릉과 헌안왕릉, 진지, 문왕왕의 합장릉 등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있다. 이들 외에도 이 일대에는 대소 고분들이 많아 신라시대의 중요한 장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열왕은 진골출신이다. 무열왕 때부터 신라의 왕릉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뀐다. 서악리고분군은 경주의 진산인 선도산과 관련된 진골출신 왕족들의 무덤터였다. 무열왕릉에는 유명한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이 비는 문무왕 원년(661년)에 세워졌다. 현재 이수(거북 모양의 조각 위에 세우는 비석)와 귀부(거북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만 남아 있는 이 비는 고개를 쳐든 거북이가 금방이라도 기어나올 것만 같은 생동감 넘치는 걸작품이다. 이수는 여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조각을 정교하게 했다. 이수의 앞면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의 글자가 두 줄로 새겨졌다. 이 글씨는 그의 둘째 아들이자 당대의 명필이었던 김인문의 필적이라 전한다. 무열왕릉이 확실하다는 것은 이 비석에 쓰여진 글씨 때문이다.
귀부는 머리 부분과 발의 조각이 실물과 같고, 이마와 턱의 보상화를 아로새긴 무늬와 등의 귀갑문과 테둘레에 조각된 운비문의 아름다움이 뛰어났다. 비신은 없어졌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조선 때 경주 부윤으로 있던 이정의 한 관속이 무열왕의 비신을 깨뜨려 자기 선영에 쓰려하는 것을 당시 풍기 군수로 있던 퇴계가 엄히 금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미루어보면 비신은 퇴계가 죽은 다음 없어진 듯하다. 1935년 그 비신의 일부(파편)가 작고한 최남주 씨에 의해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화장 해프닝의 장소인 재매정
[재매정]
무열왕은 이목이 수려하고 외교 수완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는 당나라와 고구려, 일본 등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국제외교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왕이 되어서는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전형적인 정치가였다. 그의 이름은 춘추였으며, 성은 김씨로 문흥대왕으로 추존된 용수(또는 용춘)각간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이었고, 그의 아내는 천명황후 문희이다. 문희는 곧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교우는 각별했다. 명장 김유신은 일찍부터 김춘추의 사람됨을 간파하고, 그와의 관계를 결속하려 했다. 유명한 '화장 해프닝'은 이렇게 하여 연출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김유신의 집 앞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공을 차고 놀았다. 김유신은 공을 차는 척하며 김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떼어버렸다. 그리곤 집 안에 들어가서 고름을 꿰매자고 하여 김춘추를 유인, 누이동생 문희로 하여금 옷고름을 달게 했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김춘추는 자주 김유신의 집에 들락날락했다. 결국 문희는 아이들 뱄다. 김유신은 짐짓 문희에게 '네가 부모에게 고하지도 않고 잉태한 것은 무슨 일이냐"고 꾸짖으며, 그녀가 잉태한 사실을 서라벌 일대에다 퍼뜨렸다. 그런 다음 선덕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날을 택해 뜰 안에 나무단을 쌓고는 불을 절러 연기가 솟구치도록 했다 왕이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좌우의 신하들이 "아마 유신이 그 누이를 태워 죽이나 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묻자 신하들은 "남편없이 아이를 밴 까닭"이라고 대답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묻자 옆에 있던 김춘추의 얼굴이 빨개졌다. 왕이 그걸 보고는 "네 소행이군. 빨리 가서 구해 주어라"라고 했다. 김춘추는 왕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그 일을 중지시킨 후, 혼례를 올렸다. 이리하여 김춘추는 김유신의 매부가 되어 확실한 관계를 맺게 된다.
김춘추와 김유신과의 이러한 결속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영웅으로서의 웅지의 날개를 펴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김유신은 진흥왕 때 폐망한 가야국 출신인만큼, 중앙정계에의 진출에 장애가 많았다. 김춘추와 김유신과의 관계는 그러므로 가야국과 신라가 확실한 결합을 이루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결합은 곧이어 김춘추가 왕으로 등극하면서 백제를 멸망시키는 추진력이 된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공을 차고 놀았고, '화장 해프닝'이 벌어졌던 곳은 재매정 앞의 터였다. 재매정은 경주시 교동 91번지 반월성 서편 5백m 지점인 남천가에 있다. 반월성에서 남천을 따라 내려오다가 최근 생긴 교촌교 다리를 지나면 바로 닿는다. 이곳은 김유신의 집터로 지금은 재매정이라는 우물과 김유신의 유허비만 남아 있다. 우물은 비각 바로 옆에 있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올리고, 그 위로 네 변에 장대석을 이중으로 쌓아올린 다음, 맨 위에 ㄱ자 모양의 장대석 두 개를 정사각형으로 짜맞추었다. 재매는 김유신의 어머니의 택호였다. 재매정 바로 앞은 남천이 흘러내리고 내 건너편으로는 남산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보이는 남산 기슭에는 천관사지가 있었다. 김유신의 애인인 천관과의 슬픈 사연이 깃든 곳이다. 재매정은 김유신이 출정하는 길에 집 앞에서 차마 집으로는 못 들어가고 집 앞 우물의 물을 길어 물맛으로 집 안에 별일 없다고 생각, 전장으로 떠났던 유명한 일화가 깃든 바로 그 우물이다. 그 우물은 지금도 맑은 물맛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김춘추는 654년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으로 추대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53세였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왕권을 강화, 진흥왕이 닦았던 위대한 '삼국통일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먼저 중앙집권적 율령 국가를 세움과 동시에, 당나라와의 연합을 계획, 추진한다. 이러한 정책은 당의 구미를 당겼다. 당은 마침 동방정책을 구상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국을 통일하려는 신라의 야망과 당의 야심찬 동방정책이 동상이몽을 이룬 가운데 마침내 나당연합이 성립돼, 백제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김춘추는 백제를 멸한 이듬해 6월에 58세의 나이로 아깝게 병사한다. 그 후 그의 꿈은 그의 아들 문무왕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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