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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3호 - 2024.07.20 토요일(음력 : 06.15)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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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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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상을 대했을 때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가지고 자신의 나이를 판단할 수도 있다. ― 존 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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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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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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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상이다? 십상이다!
흔히 틀리기 쉬운 맞춤법 실수 중에 ‘~하기 쉽상이다’라는 것이 있다. “돈을 손에 들고 다니다가는 도둑에게 빼앗기기 쉽상이다.” “돈뭉치를 그대로 꺼냈다가는 의심받기가 쉽상이다.”가 잘못된 맞춤법의 예이다. 여기서 ‘쉽상’은 ‘십상의 잘못이기 때문에 ‘~하기 십상이다’로 고쳐 써야 한다. ‘십상(十常)’은 한자어로서 ‘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을 의미하는 ‘십상팔구(十常八九)’에서 온 말이다. 십상팔구는 ‘십중팔구(十中八九)’와 같은 의미를 지녀 “전화를 해도 그가 자리에 없을 것이 십상팔구이다.” “늦게 일어났으니 지각은 십상팔구이다.” 등으로 쓰이는데, 보통 줄여서 ‘십상’으로 사용한다.
‘십상’을 ‘쉽상’으로 잘못 쓰는 이유는 ‘~하기 쉽다’의 형태에 익숙하다 보니 ‘~하기 십상이다’를 ‘~하기 쉽상이다’로 잘못 유추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맞춤법을 틀리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벌써 실증이 난다.” “진실은 언젠가는 들어난다.” “무리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등이 대표적인 맞춤법 오용 사례들이다. 이 경우에는 “벌써 싫증이 난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로 고쳐 써야 한다.
맞춤법은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써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물의’가 비록 [무리]로 발음되지만 본래의 의미인 ‘어떤 사람의 처사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논평하는 상태’를 나타내려면 어법에 맞게 ‘물의(物議)’라고 써야 한다. ‘싫증’ 역시 [실쯩]으로 발음되지만 본래의 의미인 ‘싫은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싫증(-症)’이라고 써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뒤처리, 뒷정리
일의 마무리를 뜻하는 말에 ‘뒷정리’와 ‘뒤처리’가 있다. 단어의 구성과 뜻이 비슷한데 ‘뒷’과 ‘뒤’로 구분해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끔 ‘뒷처리’로 잘못 쓴 표기가 눈에 띄는 걸 보면 이들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뒷정리’는 ‘뒤’와 ‘정리’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이때 중간에 들어간 ㅅ받침은 ‘사이시옷’으로 부른다. 사이시옷은 두 개의 명사가 합쳐져 새로운 말이 만들어질 때, 뒤에 결합하는 말의 첫소리가 된소리가 되거나 ‘ㄴ’ 소리가 덧나는 등의 사잇소리 현상이 있을 때 쓴다. ‘나룻배’나 ‘나뭇잎’같은 예가 전형적이다. ‘나룻배’는 ‘나루’와 ‘배’가 합쳐진 말인데, 발음이 ‘나루배’가 아니라 ‘나루빼’ 또는 ‘나룯빼’로 난다. ‘배’의 첫소리인 ‘ㅂ’이 된소리화되어 ‘ㅃ’소리로 나는 것이다. ‘나뭇잎’도 ‘나무입’이 아니라 ‘나문닙’으로 발음된다. 중간에 없던 ‘ㄴ’소리가 첨가되었다. 이처럼 사이시옷은 합성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발음의 변화를 표기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뒷정리’로 돌아와 보면, 이것도 ‘뒤쩡리/뒫쩡리’처럼 발음되므로 사이시옷을 넣어 ‘뒷’으로 적는다. ‘뒷일’을 예로 들어 보면 ‘뒨닐’로 ‘ㄴ’ 소리가 덧나므로 사이시옷을 넣는다. 그런데 ‘뒤처리’에는 그런 발음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이시옷을 받쳐 적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리하면 ‘뒤처리’처럼 합성명사를 구성하는 뒤의 요소가 이미 된소리(ㄲ, ㄸ, ㅃ, ㅆ, ㅉ)나 거센소리(ㅋ, ㅌ, ㅍ, ㅊ)로 시작하는 경우에는 사이시옷을 적지 않는다. 발음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뒤풀이, 뒤뜰, 뒤탈’ 등 모두 마찬가지다. 요새 ‘뒷모습이 특히 아름다운 사람’의 뜻으로 ‘뒤태 미인’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때도 ‘뒷태’가 아니라 ‘뒤태’로 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그, 느, 드’라는 글자 이름
필자의 학생 한 명은 (3ㄱ)과 같은 예를 ‘삼 기역’이 아니라 ‘삼 그’라고 읽는다. 물론 (6ㄴ)은 ‘육 느’, (12ㄷ)은 ‘십이 드’와 같이 읽는다. 그는 중국 흑룡강성 출신 조선족 유학생이다. 가족 모두 조선어를 사용하는데다가, 고등학교까지 조선족 학교를 다녔으니 한국어는 모국어나 다름없다. 그러니 한국어에 서툴러서 ‘삼 그’라고 읽는 것은 아니다.
이 학생이 나고 자란 흑룡강성은 일찍부터 북한 어문의 영향을 받은 곳이다. 북한의 한글 자음자 이름은 남한과 다르다. 우리는 ‘ㄱ 기역, ㄴ 니은, ㄷ 디귿,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옷, ···’으로 부르지만, 북한은 ‘ㄱ 기윽,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이라고 한다.
둘 모두 ‘이으’를 기본으로 하여 해당 자음자를 초성과 종성에 붙이는 방식인데, 우리의 경우 ‘기역, 디귿, 시옷’은 이 규칙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이 불편하다고 하여 한글 맞춤법 개정 당시 ‘기윽, 디읃, 시읏’처럼 규칙적으로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이와 달리 북한은 처음부터 ‘기윽, 디읃, 시읏’으로 하여 한 가지 방식으로 통일하였다. 그리고 이마저도 어렵다 하여 ‘그, 느, 드, 르, 므, 브, 스, ···’와 같은 또 하나의 이름을 정하였다. 즉 북한의 한글 자음자 이름은 두 가지인 셈이다.
북한의 이러한 한글 자모 이름은 중국의 동포 사회에 그대로 이어졌다. 앞의 학생은 학창 시절 내내 ‘기윽, 니은, 디읃’, 또는 ‘그, 느, 드’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이름이 이제 한국의 남쪽 대학의 한 강의실에 등장한 것인데, 글자 이름 하나에서 새삼 분단의 역사가 느껴진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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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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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마음 마을 - 천상병
내 마음의 마을을
구천동이라 부른다.
내가 천시요 구천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비록 동네지만
경상남도보다 더 넓고
서울특별시도 될 만하고
또 아주 조그만 동네밖에 안될 때도 있다.
뉴욕의 마천루 같은
고층건물이 있는가 하면
초가지붕도 있고
태고시대의 동굴도 있다.
이 마을 하늘에는
사시장철 새가 날아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흰구름이 왕창 덮인다.
이 마을 법률은
양심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재판소밖에는 없다.
여러 가지로 지적하려면
만자도 모자란다.
복잡하고 복잡한 이 마음 마을이여.
∼∼∼∼∼∼∼∼∼∼∼∼∼∼
3
문득, 영혼안에 외로운 별이
바람처럼 일은 회한에 피어오른다
비극 - 정지용
(비극)의 흰얼굴을 뵈인 적이 있느냐?
그 손님의 얼굴은 실로 미하니라.
검은 옷에 가리워 오는 이 고귀한 심방에 사람들은 부
질없이 당황한다.
실상 그가 남기고 간 자취가 얼마나 향그럽기에
오랜 후일에야 평화와 슬픔과 사랑의 선물을 두고 간
줄을 알았다.
그의 발옮김이 또한 표범의 뒤를 따르듯 조심시럽기에
가리어 듣는 귀가 오직 그의 노크를 안다.
목이 말러 시가 써지지 아니하는 이 밤에도
나는 맞이할 예비가 잇다.
일즉이 나의 딸하나와 아들하나를 드린 일이 있기에
혹은 이밤에 그가 예의를 갖추지 않고 오량이면
문밖에서 가벼히 사양하겠다 !
~~~~~~~~~~~~~~~~~~~
矜持(긍지)의 날 -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개의 번개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195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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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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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2편 중도의 세계
제 2 장 중도의 원리
2. 대승불교 운동
대승경전이 성립되기 전에 소승경전이 많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부파(部派)불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파불교시대에는 부처님의 중도 사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순전히 유와 무, 곧, 양 변의 유, 무사상을 가지고 싸움을 일삼았습니다. 어떤 파는 유를 가지고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라고 하고, 어떤 파는 무를 가지고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라고 주장하니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들 각 파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편집할 때 자기들이 본 대로, 자기들의 주장대로 부처님 경전을 편집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소승불교의 근본이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오히려 망각되고 왜곡되어 버린 것입니다. 대승경전보다 앞서 성립되었다는 팔리어로 쓰여진 소승경전은 유, 무에 입각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완전히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성립된 대승경전은 전체가 중도사상에 입각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사상을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그것은 소승불교에서 발달된 사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사상이 아니라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중도대승(中道大乘), 중도일승(中道一乘)에 있음이 입증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 사상은 부처님 사상을 그대로 전한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 운동은 부처님의 근본불교 복구 운동이라고 합니다. 근본불교를 복구 시킨다 함은 부처님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디의 말씀대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대승불교가 근본불교의 복구 운동임을 밝히는 데에서 가장 앞선 선구자가 바로 용수보살입니다. 용수보살은 많은 저술을 내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이 있습니다. [대지도론] 100권은 그 사상을 자세하게 펼친 것이고 [중론]은 간략하게 요약한 것인데, 그 내용은 똑같습니다. 특히 [중론]은 내용이 요약되어 그 사상의 골수를 잘 드러내 보이는데 이름을 '중론'이라 한 까닭은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 중도에 있음을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오직 중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파불교 시대에 불교가 잘못 전해져, 유다 무다, 생이다 멸이다 하면서 싸우기를 그치지않으니 그러한 싸움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근본 사상인 중도를 바로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해서 저술한 책이 바로 [중론]입니다.
용수보살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바로 세우고 널리 펼치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완전히 복구시킬 수가 있었으며, 그러한 사상이 지금까지 불교를 지배해 오게 되었습니다. 이즈음에는 어떤 학자든지 대승불교가 근본불교 -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복구한 운동 - 이지 결코 뒤에 변질되거나 새롭게 발전시킨 사상이 아님을 총결론으로써 의심없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의심을 일으켜 의논이 분분하였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전법륜에서 중도만을 말씀하셨지만 진여(眞如)라거나 연기(緣起)라거나 법계(法界)라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전법륜에서 중도를 말씀하시고 난 뒤에 [잡아함경]과 같은 조그만 경전이 편집되면서 중도를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곧 그곳에서는 중도가 바로 진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여라고 하는 것은 절대입니다.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여는 양 변을 여윈 절대의 세계입니다. 동시에 진여는 법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여법계(眞如法界)는 일체연기법(一切緣起法)에 의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도, 진여, 법계, 연기 이 네 가지는 대승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이들을 빼버리면 대승불교의 사상은 존재할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실 때는 간단히 중도라 하여 양 변을 버린 것이라고 말했지만, 뒤에 가서 부연하여 중도를다양하게 설하셨습니다. 중도를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연기가 따라오고, 법계가 따라오고, 진여가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진여, 법계, 중도,연기 이것을 버리고 불교를 찾으려 함은 마치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중도라는 것이 과연 부처님께서 최초로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인도 사상에서 이미 있었던 것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인도 사상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에는 대개의 학자들이 그것은 부처님의 독창적인 깨달음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곧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시대적 연관 위에서 성립된 것이지 부처님의 독창적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이전과 그 당시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살펴본 결과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중도를 내용으로 하는 사상은 다른 데에서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중도사상은 부처님의 새로운 발견이며 독창적인 새 출발이라고 학자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도 사상을 총괄하여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심(唯心)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유물(唯物)사상입니다. 유심사상은 전변설(轉變說)로 되어 있고, 유물사상은 적집설(積集說)로 되어 있습니다. 전변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 나가고 적집설은 고행주의로 나가는데, 유심과 유물, 전변설과 적집설, 수정주의와 고행주의들이, 말하자면, 부처님 이전에 인도 사상을 통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유심도 유물도버리고, 전변론도 적집론도 버리고, 수정주의도 고행주의도 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실지로 수행하여 유심과 유물을 버려야만 중도를 정등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도사상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깨달으신 새 발견인 동시에 불교만의 독창적인 사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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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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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10. 단군 이래의 첫 민주정권 (3/3)
6대 사건에 대한 형량이 뜻밖에 너무나 가벼운 데에 놀란 것은 다름아닌 피고 자신이었다. 발포명령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았던 홍진기나 곽영주 또는 백남규 등은 사형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장 부통령 저격배후사건 관련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임흥순, 이익흥, 김종원, 장영복, 박사일, 오충한 등 이들도 10년 이상은 먹게 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고, 최소한 무기까지는 먹여야 한다는 것이국민 감정이었다. 그것이 홍진기의 경우 겨우 징역 9월이었고, 이익흥, 김종원의 경우는 무죄가 언도된 것이다. 장 부통령 저격배후사건의 경우 그때의 내무장관이었던 이익흥이나 치안국장이었던 김종원이 틀림없이 관련돼 있다고 국민은 심증을 굳혀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서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가슴을 조이며 어떤 형벌을 받게 될지 몰라 조마조마해 하던 피고들이 의외로 형량이 가벼운 데에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놀랐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과연 국민이 법원의 판결을 승복할지가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한데, 마산 시민들은 정치인들이 걱정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망국 역적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 <특별법을 제정하라!> 마산 시민들은 일각의 여유도 지체하지 않고 언도 공판이 있었던 10월 8일 오후 4시 조금 지나 앞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마산은 4.19 의거의 진원지였다. 4.19 의거는 마산 시민들에 의해서 항거의 불길이 당겨졌던 것이다. 그 마산 시민들이 6대 사건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7천여 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뛰쳐나온 것이다. 짙었다. 서울에서도 마산 시민의 항의데모에 호응하듯 8일 <4월혁명 유족회>, <민주학생 총연맹> 등에서 판결을 도저히 묵과할 수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특별법을 제정할 때까지 데모를 벌이겠다고 공언했다. 장면이 이제 좀 본격적으로 일을 해볼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하며 마음을 먹고 있을 때에 생각지도 않고 있던 곳에서 방해의 요인이 툭 터졌으니 죽을 지경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내무부 장관 이상철과 법무부 장관 조재천을 불러 지시했다.
"이것 자칫 잘못했다간 아무래도 또 한 고비 홍역을 치르게 될 것 같소. 이래 가지고야 어디 무슨 일들을 할 수 있겠소? 주시오."
장면이 그런 지시를 내렸다고 해서 두 사람한테 당장에 어떤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우려하던 사태는 마침내 벌어지고야 말았다. 6대 사건 판결 내용에 불만을 품고 국회 민의원 앞에서 데모를벌이고 있던 <4월의 부상자>들이 의사당 안으로 밀고 들어와 단상을 점거해 버린 것이다.
"당신들 민주당 신.구파 싸움이나 하라고 우리가 독재에 항거한 줄 알아?"
"당신네들같이 정쟁이나 일삼는 국회의원은 필요없어. 이런 놈의 국회는 당장 해산해 버려!"
부상자들 중에는 흰 가운 차림이 많았다. 그들은 아직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단상을 점거한 부상자들은 저마다 6대 사건 판결에 불만을 토뢍며 정치인마저 싸잡아 성토했으나 국회의원들로서는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능력이 없었다. 그저 어안이 벙벙해져 부상자들의 노호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부상자들이 의사당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잠시 피신했던 의장 곽상훈이 부상자들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의 울분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6대 사건의 판결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도 적잖이 놀라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혁명입법을 서둘러야 되겠다고 3부(입법, 행정, 사법)가 합의를 했으니, 조금만 시간적인 여유를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뜻에 반드시 부응하도록..."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듯이 하며 부상자들을 달랬다.
"좋아요. 혁명입법을 하지 않을 때는 결코 우리가 용서치 않을 것이오. 그리고 민주당 신.구파의 싸움 좀 집어치우란 말이오. 지금이 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요. 정신나간 놈들 같으니."
부상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민주당을 성토하였다.
"잘 알겠소. 싸움도 이제 그치도록 하겠소."
곽상훈은 정쟁을 지양할 것도 다짐했다. 그랬더니 한 부상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돼! 말로만의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어. 당장 이 자리에 민주당 신.구파 대표를 불러요. 그래가지고 우리들 앞에서 곽상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민주당 신.구파 사람을 각기 한 사람씩 불러 그들 앞에서 화해의 악수를 시키고 정쟁을 지양할 것을 약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11. 불길한 징후
하얀 환자 가운을 걸친 사이 학생들 앞에서 민주당 신.구파 대표 각기 한 사람씩이 선생님에게 꾸중 듣는 어린이 자세를 하고 서 있었다. 그 중, 한 상이 학생이 오연한 자세로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악수를 하렷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손을 풀지 말고 그 자세대로 있어."
"상이 학생은 이렇게 소리치고, 오늘 이후의 민주당 신.구파는 정쟁을 지양하고 오로지 국사에만 전념하겠는가?"
"네."
두 사람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명령을 내렸던 상이 학생이 두 눈을 부릅떴다.
"좀더 큰 소리로 대답하지 못해? 의사당 안이 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대답을 하란 말야!"
"네에!"
두 사람은 기운껏 소리치듯 길게 대답했다.
"좋아, 그래야지. 두 사람은 분명히 맹세한 것이렷다?"
"네에!" 했다.
"만일,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를 하고도 다시 또 장마 뒤의 개구리 떠들듯 시끌시끌 정쟁만 일삼고 있으면 그땐 절대로 용서 않겠어. 알겠는가?"
"네에!"
두 사람은 다시 또 기운껏 소리치며 길게 대답을 했다. 상이 학생들 위력은 대단했다. 명색이 10만 선량이라는 국회의원들이 그들 앞에서 꼼짝없이 정쟁을 지양하겠다는 맹세를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한 토막 희극이었다. 대학생이라고 하면 신분은 배움의 길에 있는 학생이지만 그러나 명색이 어엿한 지식인이다. 지식인의 대변기관인 의사당을 점거하고 국회의원을 앞에 놓고 않을 것만 같아 꺼림칙하기만 했다. 하여간에 이 사건으로 혼줄이 빠졌던 국회의원들은 그제야 번쩍 제정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특히 민의원 법제 사법위원회 위원들은 밤을 새워가며, 민주 반역자들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 처리법안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날이 밝자, 서둘러 이것을 본회의에서 상정했다.
"의원동지 여러분은 이 법안이 얼마나 화급을 요하는 법안인가를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2.3 독회를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를 보던 국회의원 곽상훈이 아예 2.3 독회를 생략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본회의에 상정된 법률을 독회도 거치지 않고 가.부를 물은 것은 아마 대한민국 상이 학생들의 의사당 점거라는 전무후무했던 사태에 민의원 의원들은 어지간히 혼줄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새에 만들어진 법률안이 다음날에 벌써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것도 처음 있는 기록이었다. 제5대 국회(민의원)는 이렇듯 많은 기록들을 세워 놓고 있었다. 전문 5조로 되어 있는 이 법안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 반역자에 대한 재판 절차를 특별입법이 이룩될 때까지 정지한다.
둘째, 그 재판에 회부된 피고들은 형사소송법 상의 구속기간 제한을 받지 않는다.
셋째, 재판 결과 석방된 자들도 즉시 구속한다.
참의원도 이 법안의 통과에 대해서 이의가 없었다. 참의원이 이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10월 13일이었다. 참의원이 통과 즉시 이 법안을 정부로 이송하자, 장면 내각은 다음날인 10월 14일에 공포했다. 참으로 빨랐다. 민의원, 참의원, 정부 모두가 쫓기는 심정에서 법안을 입안했고 통과시켰으며 공포했다. 법률안 하나를 단 사흘 만에 입안해서 국회를 통과, 공포시켰던 일은 아마도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것은 1960년 10월까지를 한계로 해서 하는 얘기다. 군사 쿠데타 직후에는 그보다 더 빨랐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정부에서 이 법안을 공포하자, 무죄선고와 함께 석방했던 민주반역자들을 다시 잡아들이기 위해서였다. 한데, 상이 학생들이 의사당을 점거했을 때, 그들은 민주당 신.구파간의 정쟁을 지양시키고자 신.구파 대표를 불러세운 다음 <정쟁을 하지 않겠다>고 악수를 시키고 맹세를 시켰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국회의원들이 학생들 앞에서 <서약>을 했다는 것은 이유야 어찌 됐든 국회의 위신을 스스로 격하시키는 행위였다. 10만 선량이 학생들 앞에서, "앞으로는 정쟁을 하지 않고 오손도손 국사를 의논할 것을 서약합니다" 하고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고 맹세를 해야 했던 일도 아마 세계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을 그런 추태를 연출해야 했다면 부끄러움을 느꼈어야 옳았다. 설혹 신.구파 사이가 칼 끝에 피묻은 원수지간이었다 하더라도 <혁명입법>의 법률에 따라 원흉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자중했어야 옳았다. 그래야 옳았는데, 이 신.구파 사람들은 맹세를 한 그 순간뿐이었다.
"오늘 부상학생들에 의해서 의사당이 점거당하는 사태를 빚어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장 정권의 실정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파는 장 총리에 대해서 불신임안을 제안함으로써 장 총리의 실정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부정선거 원흉과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벌은 현행법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하면서 특별입법을 반대한 것이 누굽니까? 바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장면 내각에 대해서 오늘의 사태를 빚어내게 된 데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섰던 것이 누구였던가? 양일동, 신인우(申仁雨) 등이었다. 특히 신인우는,
"장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안하더라도 그의 결단성 없는 인간성에 비추어 물러나려 할 리가 없으므로 차라리 우리 의원들이 물러나도록 하자"며 의원 총사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상이 학생들이 의사당을 점거했던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날 아침에 소집된 구파의 확대 간부회의에서 양일동, 신인우 등은 그렇듯 강경한 주장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되었더라면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 그건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고 또 언제 끝날지도 모를 입씨름만을 벌이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구파 의원들의 강경한 주장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 유진산이었다.
"여러분은 특별입법을 하지 않았던 것이 마치 장 총리나 조 법무의 책임인 양 성토하고 있지만 그건 두 분의 책임이 아니에요.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정치를 하는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입니다. 웬지 아시겠소? 특별입법을 하려면 이승만 박사가 물러난 직후에 했어야 옳았다 그 말씀입니다. 그때에 우리 국회에서 과도정권에 요구해서 속히 혁명입법을 만들라고 촉구했어야 했어요. 과도정권에서 의원입법이라도 했어야 옳았어요. 그것을 우리는 하지 않지를 않았소! 법률을 만들든 뭘 만들든 다 때가 있는 법인데, 행차 뒤에 나팔 격으로 장면 정권한테 책임을 묻자고 하니 이게 도시 말이나 되는 소리요?"
뜻하지 않았던 유진산의 브레이크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장면 정권에게 정치 공세를 취할 좋은 미끼가 생겼는데 무슨 놈의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 하고 힐난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럼, 총무께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양일동이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이미 명백하지 않아요? 혁명입법에 공동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해서 4.19 말이오."
유진산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에게는 누르는 힘이 있었다. 장면 정권 타도에 호기도래라며 가슴이 설레어 설치던 친구들은 유진산의 단호한 태도에 그만 머쓱해지며 쑥 들어가고 말았다. 무소속의 모임인 민정구락부에서도 장면 정권에 대해서 정치적 공세를 취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구파가 빼어 들려고 하던 칼을 미처 빼어 보지도 않고 내던져 버리고 말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주저않고 말 수밖에 없었다. 반민주 행위자에 대한 재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부터가 벌써 <반민주 행위>였다. 홍진기 등 49명의 민주 반역자에 대한 10월 8일의 판결이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형량이기는 했다. 3.15 선거 당시 법무부 장관에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에게 씌워진 죄목은 살인교사, 무고교사, 선거법 위반, 허위 공문서 작성과 동 행사 등 무려 네 가지나 되었다. 이 네 가지의 죄목을 종합하면 <사형감>이라 해서 검찰에서도 사형을 구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죄목으로 구속 기소되었던 홍진기에게 내려진 선고는 <징역 9월에 처한다>였다.
"도대체 재판을 어떻게 했기에 징역 그래 가지고 무슨 놈의 혁명재판이라는 거야?"
세상이 온통 비분강개해져 재판장 장준택을 성토하고 매도했지만 재판은 어디까지나 적법했다. 재판장인 장준택도, "아무리 혁명 정신에 입각하더라도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무죄를 유죄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고 답변했다. 세상의 비난에 대해서 항의했지만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이상의 형법을 줄 수 없다고 하는 이상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엄격히 책임을 따져야 한다면 그것은 유진산의 말과 같이 <정치인 모두의 책임>이었다. 먼저 이승만의 하야와 함께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 입법회의부터 구성했어야 옳았다. 학생을 현실 정치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4.19 의거의 주체가 학생들이었던 만큼 전체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도 학생대표를 포함한 비상 입법회의를 구성해서 <혁명과업 수행의 기틀>을 마련했던들 학생들이 의사당을 점거하는 것과 같은 불행한 사태는 빚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판결까지 내렸던 재판을 무효화시키고 혁명입법을 해서 <민주 반역자>에 대한 재판을 다시 하려면 헌법부터 고치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있는 이상, 한번 없었기 때문이다. 헌법을 고치자면 제2공화국 헌법 78조에 의거해서 민의원 의원 3분의 1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제안할 수가 있었다. 이때의 민의원 의원수는 233명이었으니까, 3분의 1은 78명이었다. 헌법 개정안은 민의원 법사위원회에서 마련했다. 이 개정안 하나 마련하는 데도 이러쿵 저러쿵 여러 말이 많았으나, 10월 17일 마침내 민의원 법사위원장 윤형남(尹亨南)의 117인의 찬성 서명을 받아 곧 발의되어 그날로 정부에 이송 공고토록 했다. 개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헌법 시행 당시의 국회는 단기 4293년 관련하여 부정 행위를 한 자와 그 부정 행위에 항의하는 국민에 대하여 살상, 기타 부정 행위를 한 자를 처벌 또는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특정지위에 있음을 이용하여 현저한 반민주 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으며,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자에 대한 행정상 또는 형사상의 처리를 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전 2항의 규정에 의한 특별법은 이를 제정한 후 다시 개정하지 못한다. 이 헌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한데, 바로 이날 구파 안에서 다시 한번 들썩해졌다. 어떻게 해서 구파 안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됐느냐 하면 유옥우가 어떤 사석에서 정치인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는 금품수수설을 말함으로써 이 말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유옥우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합작파에서 신파한테 1천만환씩이나 돈을 받아 먹었다더군. 그뿐인 줄 아는가, 신파에선 합작파 한 사람당 2백 명씩 취직을 책임지고 알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거야."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 말이 소문이 되어 퍼져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모두가 돈에 궁색해져 있던 참이라 구파 잔류파 의원들은 합작파가 아니라 2백 명씩이나 취직 알선을 확약했다고 하니 군침 흐르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잠재실업자까지 합해서 3백만이나 되는 실업자가 우글거리고 있을 때였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취직을 부탁하는 선거구민으로 해서 여간 골치를 썩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2백 명을 취직시켜 줄 수 있다면 취직을 부탁하는 선거구민 모두의 소원을 풀어주고도 남는 숫자였다.
"돈도 궁하고 선거구민에 시달리느라 죽을 지경인데 나두 합작파에 합류해 버릴까?"
국회의원이기는 하나 변변한 당직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별볼일 없는 구파 인물 가운데에는 이런 생각을 갖는 합작파란 무엇인가? 그것은 구파가 신당을 발기하자 민주당에 남기를 희망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이 민주당에 남기를 희망하고 있으면서도 혹시 변절자라는 오해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유진산이,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민주당 정권에 협력하는 것은 변절이나 배신이 아니다. 누구도 그들의 민주당 입당을 제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한 마디에 용기를 얻어 그들은 구파의 신당에 가담하지를 않고 민주당에 남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초 이들은 합작파가 아니라 분당 반대자들이었다. 그 수가 자그만치 구파의 절반 가량이나 되는 32명이었다. 이들은, 갈라지는 것을 반대했었다. 그러다가 구파가 기어이 갈라서겠다고 별도의 교섭단체로서 등록을 하는가 하면 신당 발기를 착수하자, 유진산의 고무적(?)인 말에 용기를 얻어 민주당에 남기로작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파가 신당을 발기할 즈음에는 이들의 수는 32명에서 25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세상에서는 이들 25명을 합작파라 부르고 있었다. 하여간에 유옥우의 말에 발끈해진 민관식은 개헌안이 발의된 10월 17일,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정식으로 <합작파 금품수수설>을 문제삼았다.
"나는 오늘 의원직 사퇴서를 써서 곽상훈 의장에게 맡겼소."
민관식은 단상에 서자 먼저 이렇게 곽상훈에게 갖다준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왜 의원직 사퇴서를 써서 의장에게 맡겼는가? 유옥우 의원은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합작파가 신파로부터 1천만환씩 돈을 받았고 또 2백 명 한도로 취직 알선 보장을 받았다고 했다기에 이 문제는 내 개인의 명예와도 관계가 되기 때문에 이미 의원직 사퇴서를 써서 의장에게 맡겨 놓은 것이오. 만일 내가 유옥우 의원의 말처럼 돈을 받아먹은 일이 있다면 나는 깨끗이 물러나겠소. 조사 결과 유 의원이 허위에 낭설을 퍼뜨렸다면 유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해야 마땅할 것이오. 그러니 법사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가려주도록 하시오."
민관식이 이렇게 금품수수설을 문제삼고 등도 가세하고 나섰다. 유옥우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박해충의 발언 내용은 더욱더 강경했다. 유옥우가 해명에 나섰다.
"내 말은 근거 없는 조작이 아니오. 나는 합작파로 알려져 있는 모 의원한테서 들었어요. 이 문제를 법사위에서 다루게 되면 그 자리에서 제시할 것도 있고 요구할 것도 있어요. 그리고 나는 특정인을 지적해서 말한 일은 없었소. 그건 지상에서 민 의원을 들먹였지, 내가 민 의원 이름을 들먹인 일은 없어요. 지상에서 민 의원 이름을 들먹이게 된 것은 민 의원의 요즘 행동이 수상했기 때문에 그랬을 게 아니오. 그러므로 그 책임은 민 의원 스스로가 질 일이지, 내가 질 일이 아니오." 하고 신.구파 가릴 것 없이 이 문제는 법사위에 회부해서 조사하라고 아우성을 쳤다. 보다 못해 유진산이 등단했다.
"우리가 상이 학생들 앞에서 신.구파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것이 언제요? 불과 엿새밖에 안 되지 않았소? 그런데도 여러분은 벌써 그때의 수치심을 잊었단 말이오? 금품수수설은 이쯤에서 덮어둡시다. 돈을 받았든 안 받았든 이런 것을 따지고 조사한다고 하는 것은 정치하는 우리 모두의 수치란 말입니다. 누워서 침뱉기나 다름없는 말이외다" 하고 법사위 회부를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금품수수설은 법사위에 회부해서 조사하기로 하고 구파 이 금품수수설은 뜻하지 않은 후유증을 낳았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그래도 하고 주저하고 있던 구파동지회 소속 의원과무소속 가운데서 이제는 내놓고 민주당 교섭단체에 등록하는 의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덕분에 1960년 10월 22일 현재로 민주당은 125석이라는 과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수를 확보할 수 있었고 반면에 구파동지회는 62석으로 줄어들엇다. 민정구락부 30석에 순무소속 10석을 합해도 야당은 108석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이제 장면 내각은 한시름 푸욱 놓고 정치를 해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4.19 이후의 정국을 이런 말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정국이 널 뛰듯 하니 사회도 덩달아서 널 뛰듯 했다. 그러던 정국이 점차 안정되어 가자, 거기에 따라서 사회도 진정되어 갔다. (안 되겠어. 서둘러야지.) 사회가 진정되고 점차 틀을 잡아 나가기 시작하자, 이것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육군 소장 박정희였다. 이미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조직에 착수하고 있던 박정희로서는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은 그의 목적을 위해서는 차질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가 요사이 마음이 더욱 초조해 있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수뇌부에서 국군 수뇌부에 끈질기게 압력을 넣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미군 수뇌부에서는 젊은 장교들을 선동해서 정군운동을 일으키도록 한 배후인물이 박정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정군에 반대를 하고 있던 미군 수뇌부에서는 배후인물만 제거해 버리면 정군운동은 제풀에 가라앉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박정희의 예편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이 대가 약한 인물이었다면 미군 수뇌부의 압력에 쉬 손을 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한국군의 총책임자는 나야. 당신들이 우릴 좀 대추 놓아라 할 수 있어? 그 따위 간섭은 일체 받아들일 수 없어!"
최경록의 뚝심은 대단했다. 미군 수뇌부의 압력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우리는 간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군 내부에서 정군이다 뭐다 해가지고 압력이 일게 되면 사기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 우방 국민이 혼돈 속으로 말려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미군 수뇌부의 압력은 집요했다.
"염려 말아. 우리한테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슬기가 있으니."
미군 수뇌부의 압력이 아무리 집요해도 최경록은 눈썹 한번 까딱하지를 않았다. 최경록과 미군 수뇌부의 관계가 원만할 리가 없었다. 박정희가 옷을 벗지 않고 여전히 현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최경록의 두둑한 뱃심 덕분이었다. 1960년 11월 당시 박정희의 보직은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이었다. 그것은 요직 중의 요직이다. 군사 쿠데타를 계획해 놓고 있는 박정희로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자리만은 고수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쿠데타군의 작전이 용이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박정희는 최경록이 육군 참모총장직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군 수뇌부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한 데다가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임에는 이한림(李翰林)이 유력하다면서?"
임명권자의 입에서는 아직 아무런 언급도 없었으나 시정에는 벌써 후임 인물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돌고 있었다. (서둘러야겠어. 총장이 바뀌기라도 하는 날엔.......) 박정희는 미군 수뇌부와 죽이 맞는 자가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되게 되는 날엔 자기의 예편은 지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그만큼 그는 미군 수뇌부의 눈밖에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더없이 초조해져 있는 박정희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국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사건이었다. 1960년 11월 11일, 월남 공화국의 공정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것이다. 처음 월남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접하자, 박정희는 꽤나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었다. (그놈의 고딘 디 엠 정권도 썩을 대로 썩어 있다더기 드디어 군인이 궐기했군.) 그는 그 귀추가 어찌될 것인지 가슴을 조이며 주목했었다. 그랬는데 그놈의 쿠데타는 그만 하루 반도 채 넘기지 못해서 정부군에 백기를 들고 만 것이다. (실패의 원인이 뭐지? 썩은 정부를 뒤집어 엎겠다는데 어째서 여타의 부대는 쿠데타에 호응을 하지 않은 거야?) 박정희는 마음이 침통해지기조차 했었다. 못했던 데 있어.) 이렇게 결론을 내린 박정희는 월남 공화국의 쿠데타가 완전히 진압된 11월 16일 밤, 장견순, 한웅진 두 사람을 그의 자택으로 불렀다. 두 사람 모두 육군 준장, 이미 박정희에게 포섭되어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날 밤, 그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혹시 월남 쿠데타 실패에 자극을 받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두 분, 월남 쿠데타 실패의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시오?"
박정희가 물었다.
"확실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조직이 너무 미약했던 게 아닙니까? 공정대 단독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던 모양인데 그래 전군적인 지지가 있어야 성공을 기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웅진이 월남 쿠데타를 개괄적으로 본 평가였다.
"옳은 말씀이오. 쿠데타의 성공은 역시 전군적인 지지가 있어야 해요."
박정희는 한웅진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며,
"한데, 그 조직의 일환으로 우리의 계획을 좀더 확대시켜 나가야겠는데 두 분 장군, CIC 대장직이나 인근 9사단장직을 맡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육군 방첩대장직의 TO는 육군 준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육군 준장이었으나, 그 중 누구 하나가 조직 확대가 용이할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만일의 경우,군사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누설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를 정권 담당자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차단시킬 수가 있었다. 또 거사의 경우, 정권에 대해서 충성을 다짐하고 있는 지휘관은 그 어떤 방법으로든 지휘권을 박탈해서 쿠데타군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었다. 서울 근교 모 지구에 주둔해 있는 9사단의 경우도 그러했다. 이 무렵, 박정희는 아직 쿠데타에 동원할 병력을 확보해 놓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 병력으로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 9사단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소, 두 분 장군, 이 두 개의 보직을 차지하기 위해서 한번 뛰어 보겠소?"
박정희는 두 사람의 의향을 타진했다. <좋다, 뛰어 보겠다>고 할 것 같으면 두 사람의 마음은 확고부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해보죠."
두 사람은 두말 않고 응락을 했다. 그 말을 듣자, 박정희는 속으로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앞날은 험난하기만 했다. 자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만주주의가 광란의 춤을 추고 있을 때, 멀리 태평양 건너 한국에 자유 민주주의의 사상을 주입시키고 그 뿌리를 내리게 도와주었던 미국에서는한국에서 4.19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 벌써 대통령 선거전의 막은 올라 있었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끝에 마침내 43세의 민주당 출신 후보인 존 에프 케네디가 현직 부통령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 리처드 닉슨을 누르고 당당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참 멋있다, 멋있어!"
미국 대통령 선거전을 멀리 바다 건너에서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유쾌하기만 했다. 그 나라에서는 도대체가 부정선거란 조그마한 선거부정 사건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소식은 귀를 씻고 들을래야 들을 길이 없었다.
"멋있다 멋있어! 과연 자유 민주주의 나라라고!"
찬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어떤 기가 막힐 만한 축제에 참가했다고 해도 이렇게 유쾌한 마음은 경험해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한국도 배워야지, 배워서 남 주나? 배워야 돼. 미국을 배워야 한다!"
"암 배워야지, 배워야 하고말고. 미국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렵대. 그런 정치 의식이 팽배한 나라에서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에 취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고!"
젊은이들은 마냥 미국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러워하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았다.
(우리들의 세대에는 반드시 미국을 능가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말 테야) 하고 마음에 다짐을 주고 있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은,
"거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가 천주교 신자라면서? 그렇다면 장면 국무총리도 천주교 신자이니만큼 한.미간의 유대가 잘 이루어지겠는걸" 하면서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건 그렇고, 1960년 11월 한 달은 4.19 의거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달이기도 했다. 달에 학생들이 건의한 4.19 의거를 혁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자못 뜻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달 23일에 개헌안이 민의원을 통과했다. 11월 23일은 <신의주 학생사건> 기념일이기도 했다. 이날 개헌안이 통과되었다는 것은 우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학생들한테는 남다른 감회를 안겨주기에 족했다. 이 개헌안에 따라 마련되었던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안>과 <특별재판소>, <특별검찰부> 조직법안이 민의원을 통과한 것은 11월 30일이었다. 이제 3.15 부정선거 관련자를 처벌할 법률도 마련되었고 또 그놈들의 죄를 다룰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도 마련되었으니 일이었다. 4.19 의거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이런 일련의 작업이 벌어지고 있을 때 물론 조그마한 말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15 부정 선거의 원흉의 하나인 장경근이 병보석으로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일본으로 도망을 친 사건이 벌어졌다. 1960년 11월 12일의 일이었다. 그는 아내와 더불어 부산으로 내려가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구파로서는 얼씨구나 좋다고 춤을 추며 좋아할 만큼의 일이 생긴 셈이었다. 장면 정권에 대해서 정치 공세를 펼 구실이 생겼으니 말이다.
"도대체 장면 정권은 부정선거 원흉 하나 똑똑히 감시하고 있지 못할 만큼 무능한 정권한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가 있어? 당장 정권을 내놓고 물러가 버려!"
구파는 당장 요절이라도 내버리고 말려는 듯이 아우성을 쳤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도무지 귀청이 따가울 정도였다. 참 해도 너무했다. 경찰관 열 명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도망을 칠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놓고 덤비는데야 경찰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만일 구파가 정권을 잡았다 가정하고 장경근 도피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라.
"쯧쯧....... 이거 우리 구파 정권이 큰 실수를 저질렀는걸. 이건 우리 구파 정권의 무능을 표징하는 거야. 그러므로 우리 구파는 이렇게 나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정권을 내놓으려 하다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을 그들이 어째서 장경근 도피사건을 정치문제화 해가지고 물고 늘어졌던가? 그것은 <신파 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여형약제(如兄若弟), 피를 나눈 한 형제 사이처럼 오손도손한 사이는 못 되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민주당이라는 한 울타리 속에서 5년을 같이 정치를 해 나왔으면 조금은 이해심을 발휘할 법도 했다. 그런데도 구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발의 피만큼의 거리만 생겨도 물고 늘어지려고만 들었다. 아아, 하늘이여! (그래 좋다, 내가 물러나지.) 내무부 장관 현석호는 스스로 정치적 미련 없이 장관 감투를 벗어 던져 버렸다. 장면은 현석호의 퇴진이 못내 아쉬웠다.
"장관이 책임질 것까지야 없지 않소? 장경근의 감시를 맡았던 경찰을 문책하면 될 일인데."
그의 퇴진을 만류했다.
"아니올시다. 구파에서 정치적인 책임을 물으니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합시다. 우리 신파 정권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깨끗이 책임을 질 줄 안다는 것을 저들 구파나 국민한테 보여줘야 합니다."
현석호는 장관 감투 따위에는 조금도 미련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신파 동지들이 모두 현 의원 같다면 얼마나 정치를 해나가기가 용이하겠소? 한집안 식구이면서도 감투를 없는 말 있는 말 다 쏟아 놓으며 자해 행위를 하려 드니......."
장면은 크게 한숨을 쉬며 현석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의 후임에는 무임소 장관인 신현돈을 앉혔다. 불과 4개월 사이에 장관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내각책임제 정치제도하에서는 내무부 장관 자리는 마가 끼어 있는 감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장경근 도피사건에 대해서는 정치적 책임을 졌으니 한동안은 구파한테 시달림을 받지 않아도 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문제가 터졌다. 그 문제란 다름이 아니었다. <국군통수권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중 어느 쪽에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문제였다. 헌법상으로는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는 것 같았으나 내각책임제하에서는 정치적인 책임은 국무총리한테 있으니 실질적인 통수권은 국무총리한테 있는 것 같기도 해서 해석이 저마다 구구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명확한 선을 그어두자 해서 거론한 것이 민정구락부 소속의 이찬우였다. 그는 11월 26일의 민의원 예산결산위원회에서 국방부 예산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국방부 장관 권중돈에게,
"헌법에는 국군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것으로 명문화되어 있는데 내각책임제 정치제도한에서는 정치적 책임이 국무총리에 있으니만큼 대통령한테 통수권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모순이 여기에 대해서 권중돈은,
"내각책임제하에서는 실질적인 국군통수권은 국무총리에게 있다는 소신 밑에 지금 정부에서 국군 조직법 개정안을 준비중에 있다" 하고 답변했다. 그러자 구파 소속 의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당치 않은 소리요. 권 장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민우(李敏雨)는 미처 발언권도 얻기 전에 반박을 늘어놓았다.
"내각책임제 정치제도이기에 오히려 정당 소속을 갖지 않는 대통령에게 통수권을 귀속시키는 것이 헌법상의 규정으로나 국군의 엄정중립을 위해서나 타당하단 말입니다."
벌어졌다. 구파는 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었고, 신파는 또 신파대로 국무총리에게 통수권이 있다고 악을 썼다. 양측이 모두 자기편에게 유리하도록 논리를 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어떤 결론이 내려질 수가 없었다. 그러자 구파에서는, "통수권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기 전에는 국방부 예산은 심의할 수 없다" 하고 전가의 보도를 뽑아들었다. 그렇다고 신파가 수그러졌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좋아, 예산 심의권을 방패삼아 횡포를 부려 보려거든 얼마든지 부려 보아라. 우린 본회의에서 원의로 여기에 대한 결론을... 국군통수권 문제는 애매하다면 애매하다 할 수 있었다. 헌법상 국군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명문화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대통령 윤보선은 군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장면이 최영희를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전보하고 그의 후임으로 최경록을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할 때 대통령 윤보선은 일체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그것은 곧 <헌법상 국군통수권은 곧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으나 실질적인 권한만은 국무총리에게 있다>고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국무회의 석상에서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있었던 설전 내용을 국방장관 권중돈한테서 소리>라고 구파의 주장을 일축하고 통수권은 엄연히 국무총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헌법상 대통령에게 통수권이 주어져 있다고 하나 대통령에게는 계엄령 선포거부권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고 그 밖에는 의례적인 통수권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에요. 군의 인사, 작전 등 행정면에서는 총리에게 통수권잉 있다는 것을 각료 여러분도 명심해 두기를 바라겠소."
장면은 국무회의에서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11월 30일의 기자회견석상에서 되풀이 강조했다. 대통령 윤보선을 의식해서였다. (만일 내 견해가 틀렸다면 어디 반박해 보라) 해서였다. 반응도 없었다. 통수권이 주어져 있는 대통령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야 구파에서 뭐라 또다기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결국 통수권 문제는 이쯤에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구파 출신 대통령이라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 실질적인 권한을 대통령에게 안겨주고자 안간힘을 쓰던 구파만이 스타일 구기는 꼴이 되고 말았었다. 안정되니,4.19 이래 집요하게 대남 선전공세를 펴고 있는 북한 괴뢰정권에 대해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구휼을 위해서 쌀을 보내줄 용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게도 되었다. 4.19 직후부터 김일성 도당은 <남북 연방안>이라는 그럴싸한 제의를 하며 끈질기게 대남 선전공세를 펴오고 있었다. 생리가 어떻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인데 그들의 대남 선전공세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중에 정치가 다소 안정되고 제 궤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우선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딱한 정경을 생각하면서 쌀 원조를 제의하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북한 괴뢰당에서는 일언반구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누가 말했던가? <한국을 망치는 자는 바로 한국인 자신이다>라고. 사회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진이 빠져 기진맥진한 탓이었을까? 정치도 사회도 안정이 되어 점차 틀을 잡아나가고 있었다면 모두가 새로운 각오와 열의로써 새나라 건설에 동참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국민은 어느 곳에서도 그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바로 12월 12일에 실시된 지방 의회의원, 지방장관 선거결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얼마나 갈망하던 자유 민주주의였던가. 이 자유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서 4.19 의거에 그렇듯 많은 햐생들이 피를 흘렸던 게 아닌가? 완전한 자유 민주주의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함으로써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비롯해서 각도 의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것은 12월 12일이었다. 그리고 19일에는 시.읍.면 의회의원 선거, 26일에는 시.읍.면장 선거, 29일에는 서울특별시장을 비롯한 각도의 지사 선거가 잇달아 실시되었다. 지방장관까지도 내 손으로 뽑는 이 선거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마땅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며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어야 옳았다. 그래야 4.19 의거에 피를 흘린 의사들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안심하고 영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 참 또 기가 막히다는 표현밖에 달리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렵다. 축제는 고사하고 도시 관심조차 기울이지 경우가 더욱 심했다. 지방의회의원 선거의 투표에 참가한 사람은 지방의 경우 65퍼센트에 이르고 있었는데 서울의 경우는 45퍼선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열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 반이 무관심했다는 것은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 문제가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아 이놈들아, 우리가 너희놈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거늘, 이놈들아 그래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 가꿀 생각은 않고 무관심으로 있어? 이런 죽일 놈들 같으니, 한국을 망치는 놈들은 바로 너희들 한국놈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렷다.> 4.19 영령들은 이렇게 원성을 터뜨리며 통곡을 했을 게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지방의회의원 선거가 군사법정에서는 세칭 <16인 하극상 사건>의 피고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사건이 사건 같지도 않았고 또 선거가 있어서 그런지 일반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여간에 16명의 피고 가운데서 대령 김동복(金東複)을 제외한 나머지 15명에 대해서 무죄판정이 난 것이 이렇듯 정국이 안정되고 사회질서가 점차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1960년 12월 12일이었다. 이들 16명의 사건을 처음에는 하극상 사건 어쩌고 하며 떠들어댔으나, 심리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덧 죄명도 <부대 내 무질서 사건>으로 죄명이 바뀌어 불리고 있었다. 태산명동에서 서일필이라더니 꼭 그 꼴이었다. 이들에 대한 군재는 무려 인물이었던 최영희가 증언에서,
"그들은 항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파머 성명의 배경을 들으러 왔기 때문에 군의 선후배로서 대화를 나눈 데 불과했다"고 증언함으로써 무죄판정을 받고 풀려나온 것이다. 한데 미리 밝혀두지만, 이 사건은 해를 넘긴 다음해에 다시 <사건>으로 재연되었다. 16명 중 오직 한 사람 <상관 불경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김동복이 혼자만 유죄선고를 받은 것이 좀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해를 넘긴 다음해인 1961년 1월 30일 재심을 청구하는 탄원서를 관계 요로에 제출했다.
"첫째, 16명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는 김종필, 석정선 중령인데 본인은 억울하게 인물은 군 장성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편파적으로 관련 장성에 대한 조사를 일체 하지를 않았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
그러니 재심을 하도록 해달라 하는 것이 김동복의 탄원서의 골자였다. 이 탄원서에 따라 군 수사기관에서는 즉시 재수사를 개시했다. 그 결과 김종필, 석정선 두 사람은 또다시 구속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재수사를 해봐야 두 중령은 물론이고 여타의 장교들에 대해서도 사건이 될 만한 혐의 사실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말썽을 부리려 했던 점은 인정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형벌을 가할 만한 죄목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자 국방장관 현석호는, 예편시켜 버려" 했다. 김종필, 석정선이 구속에서 패제되어 예편을 한 것은 1961년 2월 8일이었다.
10만 감군(減軍). 이것이 민주당의 선거공약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 감군문제를 놓고 장면 정권은 주한 미군 수뇌부와 논란이 많았다. 감군 반대. 이것이 주한 미군 수뇌부의 한결같은지론이었다. 그러나 양보다는 질에 무게를 두고 징병주의를 지향하고 있던 장면 정권이 주한 미군과 끈질긴 협의를 거친 1960년도 저물어가는 12월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장면 정권은 12월 27일까지 감군을 완료했다. 당초 육군본부의 중령급 젊은 장교들은 정군에 대해서 집요하리만큼 물고 늘어졌지만 장면 정권은 정군이란 이름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 인물의 군복을 벗기는 수법을 쓰지 않았다.
"군부 내에 3.15 부정선거 관련자, 부정축재자가 현저히 많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한 지탄의 대상이 된 인물들은 당장 옷을 벗기거나 의법 처단을 한다면야 모두들 속이 후련해 하겠지. 하나, 이런 식으로 정군을 단행해서 군에 주는 이익이 무엇인가? 정군 대상 인물들은 지금은 지탄의 대상일지 모르나 그들은 막아낸 영웅들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것이 국무총리 장면의 일관된 지론이었다. 옳은 생각이었다.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킨 영웅들. 그렇다. 그들은 진정 영웅들이었다. 그들이 없었던들 오늘의 조국은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것이다. 국가에 이바지한 그들의 공로와 해독을 끼친 과오가 상쇄하자는 데 무슨 이론이 있을 수 있느냐. 그래서 장면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게, 명예롭게 퇴진하는 길을 열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12월 27일까지 진행된 감군에서 1,534명의 직업군인이 전역을 했다. 대령 506명, 중위.소위 188명, 준위 53명, 상사 157명, 중사 39명 등이었다. 이들 전역하는 직업군인들에게는 1년분의 봉급과 똑같은 액수의 연금을 특별급여금으로 지급해 주었다. 연금제도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이때에 이만큼이라도 생활대책을 마련해서 내보냈다는 것은 <잘한 일이다>라고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었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낙인 찍혔던 김종필, 석정선도 따지고 보면 이 감군 계획의 일환으로서 예편되었던 것이다. 혐의 사실을 발견하기는 어렵다고 하나 그렇다고 말썽꾸러기를 그냥 군에 머물러 있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럴 바엔 예편으로 명예롭게 퇴진시켜 주자 해서 받들어 두 사람을 예편시켰던 것이다. 어떤 기록에는 <수사당국은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협상과 절충의 편법으로 사건을 매듭짓고자 해서 군복을 벗는다면 사건을 확대치 않고 종결짓겠다고 제의, 두 중령도 제의에 동의함으로써 이들은 1961년 2월 8일에 석방되었던 것이다>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다른 조직도 아닌 군대에서 협상과 절충의 편법을 썼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군인이 무슨 장사꾼인가? 협상과 절충을 해서 군인의 죄과를 묵인한 군대라면 그놈의 군대를 어디다 써 먹겠는가? 어떤 국가 유공자라 하더라도 역사를 왜곡시키는 행위나 글을 남겨서는 안 된다. 역사의 진실을 위해서. 나이 만 34세였다. 어떤 기록에는 <대학2학년 때인 1947년 3월, 고향에서 날아온 한 장의 전보가 그의 생을 커다랗게 바꿔놓은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했지만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부친 사망이라는 한 장의 전보가 교직자가 되겠다는 김종필의 장래 설계를 산산히 허물어뜨리게 되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종필은 이른바 국대안(國大案)으로 부르고 있는 국립 서울대학교 안에 반대하다가 서울 명동에 있던 <대동강 동지회>에 잡혀가 구타를 당한 것이 다니고 있던 서울 사범대학 자퇴의 이유라고 했다.
서울 법정전문학교를 비롯해서 서울 광업전문학교, 그리고 예전의 경성제국대학 등을 합쳐 국립 서울대학교로 만들자는 다음해인 1946년 9월이었다. 미군정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면 무조건 반대부터 하는 것이 좌익의 생리였다. 이래서 국대안 반대투쟁이라는 것이 역사의 한 귀퉁이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김종필이 이 국대안 반대투쟁 대열에 섰던 까닭으로 해서 <대동강 동지회>에 잡혀가 린치를 당하는 결과를 빚었다. 해방 직후, 공산당의 학정에 못 이겨 서울로 월남해 온 북한 출신 청년들은 동향의 인연으로 끼리끼리 뭉쳐 청년단을 조직해 놓고 있었다. <압록강 동지회>, <대동강 동지회>, <황해 청년회>, <황남 청년회>, <함북 청년회> 등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들 청년단체들은 나중에 <서북 청년회>로 일이고, 이들 청년단체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좌익을 때려잡는 일이었다. 공산 학정에 못이겨 월남해 온 젊은이들이라 좌익이라고 지목되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감정을 폭발시켰다. 국대안을 반대하던 좌익계열의 학생들은 국립 서울대학교가 발족한 뒤에도 이 투쟁을 끈질기게 벌였다. 그들 좌익 계열 학생들이 끈질기면 끈질길수록 월남해 온 청년단체들도 눈에 핏발을 세웠다.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고 좌익이라 하면 불문곡직 그들의 사무실로 납치해다가 린치를 가했다. 이렇듯 월남 청년단체들이 공산당 타도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지도 않았다. 좌익 사상에 물들지도 않는 청년학생들을 잡아다 족치는 바람에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시절의 김종필이 사상적으로 좌경화되어 있었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본인이 해명을 하지 않는 한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국대안 반대투쟁에 가담했었다는 것과 그의 실형인 김종익이 고향인 충청남도 부여에서 좌익단체의 위원장을 했던 일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다분히 동경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간다. 김종필의 실부인 김상배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었던 것도 월남해 온 청년단체가 좌익단체의 위원장으로 있는 김종익의 집을 덮치게 됨으로써 그 충격을 받아 쓰러지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1946년 시점으로 김종필의 나이 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가정환경이 그로 하여금 사상적 동경심을 일으키게 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대동강 동지회에 끌려가 린치를 당한 김종필은 당시 온양에 주둔해 있었다던가? 국방경비대 제13연대 사병으로 입대를 했다. 국방경비대 초기에는 교육은 미국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간 장교나 사병들이 일본군 촐신자들이 태반이어서 그랬던지 기합이 여간 심하지가 않았다. 사나이들의 조직체가 군대이기 때문에 거칠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철권제재란 일본군의 악습이었다. 지원병이나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 나갔다 돌아온 자들이 배워가지고 왔다는 것이 고작 이놈의 철권제재였다. 하루라도 먼저 입대한 자는 톡톡히 선임자 구실을 하고자 주먹을 휘둘렀다. 그야 맞을 짓을 했다면야 제재를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비거리도 되지 못하는 일 가지고 주먹을 휘두르니 김종필은 같은 지식청년이 견뎌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입대 일주일 만에 탈영을 해버렸다. 육군사관학교에서 8기생을 모집한 것은 1948년 12월이었으니까,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의 일이다. 그가 13연대를 탈영한 뒤, 제8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전까지 1년 반 남짓한 세월을 어디서 무얼 했는지는 소상치가 않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육군본부 정보국 북한과에 배속되었다. 그가 박정희를 알게 된 것이 박상희의 딸 영옥(榮玉)과 혼인함으로써 혈연을 맺게 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혼돈의 세월을 걸어온 두 사람의 발자취에는 비슷한 점이 없지도 않다. 사상적인 고초를 겪어야 했던 두 사람의 쓰라린 인생풍파가 두 사람을 친밀케 해주는 끈이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혈연까지 맺게 해주는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간에 군부에서 중령 계급으로서 대령 계급까지 포함한 영관급들을 움직여 정군운동을 폈던 김종필은 그것으로 두각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이제 군부에서는 <김종필>이라는 그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장교는 없게 된 셈이었다. 이제 그가 박정희와 더불어 계획한 목적을 위해서 자유로운 위치에서 용트림을 하려고들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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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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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5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서기 69년 12월 21일~ 79년 6월 24일)
로마로 가는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향한 베스파시아누스가 본국 이탈리아의 동족 현관이라 해도 좋은 이탈리아 남부의 브린디시에 상륙한 것은 서기 70년 8월이었다. 5년 동안이나 얼굴을 못 본 둘째아들 도미티아누스가 19세의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마중 나와 있었다. 60세의 베스파시아누스는 70년 1월 1일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이미 '제일인자'로 승인되었다. 그런데 귀국을 열 달이나 미룬 것은, 공식 발표로는 풍향이 좋지 않아서 알렉산드리아를 출항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전망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군 통수권자인 황제의 지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개선장군이 되어 본국에 귀환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결국 베스파시아누스는 서기 69년 7월에 동방 군단이 그를 황제로 추대했을 때부터 헤아리면 무려 1년 2개월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대기'한 셈이 된다. 하지만 그 동안 그가 대기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간 무키아누스한테 계속 보고를 받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물론 두 사람 사이의 거리와 당시의 정보전달 속도로 보건대 보고가 그렇게 빈번히 이루어지지는 못했겠지만, 그 동안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집트에서 로마 원로원에 보낸 편지 내용은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서기 70년 5월부터 시작되어 9월 말에 끝난 예루살렘 공략전의 전황도 총지휘를 맡은 맏아들 티투스한테서 상세히 보고를 받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는 직선거리로 600킬로미터가 채 안 된다.
그렇다고 베스파시아누스가 매사를 일일이 참견하지는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남자는 아니었다. 전권을 위임받고 수도 로마로 간 무키아누스가 거의 무한한 재량권을 행사했듯이, 예루살렘 공략전을 지휘하는 티투스도 아버지한테 시시콜콜한 지시를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티투스는 30세의 젊은 나이에다 총사령관 경험도 없지만, 그의 곁에는 역전의 노장인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가 보좌하고 있었다. 게다가 휘하 병력은 유대 전역을 제압할 때 동원된 3개 군단에 1개 군단을 더한 4개 군단이다.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면, 엄정한 지휘계통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로마 군단은 무적의 전투력을 자랑한다. 예루살렘이 아무리 난공불락의 천연 요해지에 서 있고, 그 안에 설령 백만 명이 틀어박혀 있다 해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 함락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시간이었다. 카르타고 공략에 걸린 3년이라는 기간은 그러나 예루살렘 공략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비텔리우스가 죽어 유일한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가 언제까지나 본국을 비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베스파시아누스가 '대기' 장소로 이집트를 선택한데에는,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밀을 장악함으로써 비텔리우스파가 버티고 있는 본국 이탈리아에 '군량 보급을 차단'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주식을 수입에 의존하게 된 뒤, 본국 이탈리아에서 필요한 주식의 3분의 1은 이집트에서 수입하는 밀이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를 손에 넣는 것은 강력한 무기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뛰어난 점은 이 '칼'을 칼집에 넣은 채, 빼려는 시늉조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로원에 보낸 편지에서도 여기에 대해서는 냄새조차 피우지 않았다. 무언의 압력을 주는 데 그쳤다. 하지만 타키투스도 이 '무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로마인에게는 설명할 필요도 없는 무언의 협박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은 '유언'의 압력에는 반발하지만 무언의 협박에는 반발할 수도 없다. 순수한 무인으로만 여겨졌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사실은 인간 심리에 대해 상당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기하는 동안 베스파시아누스가 한 일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로마가 있는 서방에서는 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동방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효력을 발휘하는 퍼포먼스가 된다. 하루는 장님 하나와 앉은뱅이 하나가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왔다. 불구를 고치려고 이집트 신전에 참배했더니 베스파시아누스가 만져주면 고칠 수 있다는 계시가 내렸다면서, 눈과 다리를 만져달라고 부탁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기적 따위는 믿지 않는 현실적인 로마인이다. 두 불구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에는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저항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계속 권유했다. 미신이라고 물리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로마 황제는 제국 동방의 사람들에게도 황제였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그들을 만져주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대자마자 장님은 눈을 뜨고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났다. 기적이다!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고, 장님과 앉은뱅이는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며 베스파시아누스의 발등에 키스를 퍼부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기적'은 이집트 전역에 퍼지고 팔레스타인에도 퍼져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누군가가 연출한 '속임수'였을 테지만, 그보다 4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도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이 아니었던가. 내장의 질병을 고치는 기적은 기적으로 부적당할 것이다. 병을 고치는 퍼포먼스도 누구나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면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기적을 행한 셈이 된다. 하지만 같은 로마 제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방은 동방과 달랐다. 똑같은 기적의 퍼포먼스를 연출해 보여도, 서방에서는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정도의 효력밖에는 발휘하지 못한다. 서방은 지도자에게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요구한다.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면서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도 본국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에는 기적을 행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보다 더욱 어려운 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제국을 재건하는 일이다.
제국의 재건
그렇다 해도 베스파시아누스는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바타비족 출신 보조병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갈리아 제국 창설에 이르기까지 차츰 고조되던 라인 강 방위선의 불상사는 가을이 오기 전에 해결되어 있었다. 4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일어난 유대인 반란도 거의 수습되었고, 그 클라이맥스인 예루살렘 공략전은 다섯 달 만에 끝났다. 쾌속선으로 전해진 예루살렘 함락 소식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도로 북상하는 길에 이미 그에게 도착했을 것이다. 제국 서방의 라인 강과 동방의 유대 땅에서 일어나 로마인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사건이 둘 다 해결되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두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상태로 수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가 본국을 비우고 있는 동안에 무키아누스가 시행한 정책들도 훌륭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열 달 동안 사실상의 황제 역할을 한 것은 무키아누스였다. 무키아누스가 단행한 일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그 일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하나씩 처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동시에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시작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일들은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을 만큼 하나같이 긴급한고 중요한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갈리아 제국 창설을 기치로 내건 게르만계 갈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국 서방에 주둔하는 모든 군단을 총집결하다시피 한 9개 군단을 투입했다. 영단이라 해도 좋은 결단이다. 그 덕분에 반란이 일어난 지 1년 남짓만에, 반란군이 갈리아 제국 창설의 기치를 내건 시점부터 헤아리면 불과 두세 달 만에, 라인 강 방위선은 궤멸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 대책이 베스파시아누스가 귀국할 때까지 미루어졌다면, 반란 주모자 율리우스 키빌리스에게 동조하는 움직임은 라인 강 서쪽과 동쪽으로 퍼져갔을 것이다. 적어도 게르만계 갈리아인이 사는 라인 강 서쪽 연안과 동쪽연안(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독일 전역)에 반란이 파급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로마 제국은 130년 전의 카이사르 시대와 똑같은 상태로 돌아갔을 테고, 방위선을 확립하기 위해 또다시 게르만족과 정면 대결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서기 69년부터 70년에 걸친 정황으로 보면, 군단병만으로 구성된 9개 군단의 5만 4천 병력을 투입할 필요까지는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키아누스는 대군을 투입하여 단번에 해결하는 전법을 택했다. 전투 상태가 오래 갈수록 적과 아군에 증오심이 증폭되게 마련이다. 단기간에 해결하면 그것을 피할 수 잇다. 그리고 전후 처리나 대책도 원한에 좌우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대부분의 로마 장수들이 지니고 잇는 공통된 특징은 무인다운 허영심과 인연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군으로 소수의 적을 공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군으로 공격하면 문제를 조기에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과 아군의 희생을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500명 정도가 수비하는 마사다 요새를 공격하는 데 그 열 배나 되는 병력이 투입된 것을 두고 경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로마 장수의 정신을 모르는 사람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쟁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로마군의 전법은 병력이나 무기가 군량 보급 같은 불확정 요소는 맨 마지막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서는 이 불확정 요소가 가장 중시되었다. 일본이 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게르만계 갈리아인의 반란을 재빨리 해결한 뒤의 조치도 훌륭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방침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반란에 불을 댕긴 바타비족조차 항복한 뒤에는 반란 이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갔을 정도다, 갈리아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저지른 로마 군단병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는 이렇게 관대한 조치를 내린 이유를 명확히 했다. 반란은 로마인끼리 황제 자리를 둘러싸고 싸운 불상사의 여파니까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상대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게 아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이리하여 바타비족도, 갈리아 속주민도, 그리고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로마 군단병도 죄의식에서 해방된 상태로 로마 제국의 우산 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방침은 패배한 비텔리우스파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가 끝난 뒤 패자를 잘못 대우한 것이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의 원인이 된 것을 무키아누스는 잊지 않았다. 비텔리우스파에서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것은 군대를 이끌고 항전한 비텔리우스의 동생과 아직 어린 두 아들뿐이었다. 비텔리우스의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추방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원로원의 비텔리우스파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다. 비텔리우스가 휘하의 '라인 군단' 병사들을 발탁하여 편성한 근위대 병사들도 해고되지 않았다. 하지만 근위대는 본국 이탈리아에 배치된 유일한 군사력이다. 전 황제인 비텔리우스를 지지한 병사들만으로 구성된 근위대를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다. 그래서 무키아누스는 비텔리우스가 15개 대대 1만 5천 명으로 증강한 근위대를 다시 9개 대대 9천 명으로 줄인다는 이유를 들어, 제국의 방위선을 맡고 있는 각 군단에 조금씩 나누어 배치했다. 그래서 이 일만은 단번에 해결할 수 없었다. 근위병들을 몇 차례에 걸쳐 조금씩 군단병으로 돌려놓는 작업과 9개 대대 9천 명의 근위병을 모두 베스파시아누스파 병사로 교체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 모양이다.
서기 71년, 유대 전쟁을 끝내고 귀국한 티투스가 개선식을 마쳤을 때, 무키아누스는 이 황제의 아들을 근위대장에 취임시킨다. 근위대장은 대대로 원로원 계급에 버금가는 '기사계급' 출신이 맡는 게 관례였기 때문에, 많은 권한을 아버지와 공유하고 있어서 거의 '공동 황제'라 해도 좋은 티투스가 근위대장에 취임한 것은 격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도 무키아누스도 형식을 따지기보다는 실질을 중시했다. 그리고 반감이나 원한이 생기지 않도록 비텔리우스파를 근위대에서 제거한 것은 지배자가 바뀔 때 생기기 쉬운 사회 불안의 씨도 제거해주었다. 되풀이 말하지만, 근위대가 갖는 진정한 힘은 병사의 질이나 양이 아니라, 수도에 병영을 두고 본국 이탈리아에 주둔해 있는 유일한 군사력이라는 데 있었다. 내전으로 피해를 본 지방자치단체나 개인들에게 손해를 보상할 때도 무키아누스는 승자와 패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전쟁터가 된 포 강 유역, 승리한 병사들의 무질서한 행군으로 피해를 본 플라미니아 가도 연변의 도시들, 그리고 비텔리우스파 군대가 반 년 가까이나 눌러앉아 있는 것을 참아야 했던 수도 로마의 시민들, 보상을 요구하는 지방자치단체나 개인들의 수와 보상액은 상당했을 것이다. 무키아누스는 이 문제만 전담하는 위원회를 내전이 끝난 직후인 서기 70년 1월에 이미 출범시켰다. 황제가 세 명이나 바뀐 서기 69년의 내란은 본국 이탈리아가 전쟁터가 되었다는데 특징이 있었다. 그 손해 보상도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확립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본국 유권자가 상대인 만큼, 빠른 시일 내에 끝낼 필요가 있었다.
무키아누스는 이런 일들을 추진하는 동시에, 내전 중에 불타버린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구하는 공사도 일찌감치 착수했다. 로마의 많은 신들 중에서도 유피테르(그리스어로는 제우스)는 최고신이고, 이 신에게 바쳐진 신전은 로마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개선장군들이 승전의 감사 기도를 바치는 곳이었다. 화려한 개선식은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으로 엄숙한 기도로 끝나는 것이 관례였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개선행진을 하는 동안 군주의 갈채를 한몸에 받은 개선장군도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 최고신 유피테르 신전 앞에 도착하면 당장 전차에서 내려, 신전으로 통하는 하얀 대리석 층계를 붉은 망토자락을 끌면서 혼자 올라가곤 했다. 로마인들이 이렇게까지 경의를 바친 유피테르 신전이 다름 아닌 로마인들이 내던진 횃불로 불타버린 것이다. 멀리 떨어진 라인 강 유역의 속주민까지도 신들이 로마 제국을 버렸다고 믿고 '갈리아 제국' 창설까지 치달았을 정도다. 미신적인 서민들은 제국의 장래에 불안을 품었다. 그 불안은 시급히 없애버릴 필요가 있었다. 유피테르 신전 복구공사는 황제의 귀국도 기다리지 않고 시작되었다. 귀국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도 석재를 짊어지고 카피톨리노 언덕을 오르는 인부들의 행렬에 가담했다.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에서는 통치자가 백성들의 존경과 호의를 얻기 위해 벌이는 퍼포먼스도 이렇게 다르다. 동방에서는 기적이 효과가 있지만, 서방에서는 인부 흉내를 내는 게 효과가 잇다. 동방 사람들이 석재를 짊어지고 인부들과 함께 언덕을 올라가는 황제를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렇긴 하지만, 모든 일이 무키아누스의 배려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본국에 돌아온 베스파시아누스가 줄곧 인부 흉내만 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방 사람들은 최고 지도자에게 초능력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행운은 무키아누스라는 둘도 없는 협력자를 얻은 데 있었다. 그 첫째 이유는, 무키아누스가 열 달 동안 시행한 모든 정책이 황제로서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짐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키아누스 자신의 처신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귀국하자, 이 둘도 없는 협력자는 이제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는 듯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배턴을 넘겨주고 물러났다. 그렇다고 해서 집정관 자리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의 비텔리우스(황제가 된 비텔리우스의 친아버지)처럼, 집정관보다 더 높은 관직으로 여겨진 재무관에 황제와 함께 취임하는 영예도 요구하지 않았다. 집정관이나 재무관에 현직 황제와 함께 취임하면 그 권위와 권력이 여느 때보다 더 높아진다. 그러나 무키아누스는 제위를 세습하기로 결정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뜻을 받아들여, 이 집정관과 재무관 자리를 베스파시아누스의 두 아들에게 양보했다. 무키아누스의 협력이 없었다면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되지도 못했을 테니까, 무키아누스가 굳이 그 자리를 원했다면 베스파시아누스도 거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키아누스가 집정관이나 재무관에 취임하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무키아누스가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공직에는 취임하지 않았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마이케나스처럼 다시 말하면 무엇이든지 의논할 수 있는 개인 고문 같은 존재로 베스파시아누스의 치세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치세 후반이 되면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아들 티투스의 중요성이 조금씩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키아누스는 지리를 다룬 책도 몇권 집필했다.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있지만, 창의성도 문장력도 평범한 작품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하지만 평범한 책을 쓴 인물이라고 해서 능력도 평범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실무능력도 문장력도 초일급이었던 카이사르가 오히려 예외적인 존재이고, 초일급 실무자였던 아우구스투스도 문장력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글을 쓰게 했다면, 베스파시아누스도 평범한 저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을지 모른다. 그래도 네로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이 휘말린 혼란을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와 무키아누스가 둘다 일급 실무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아우구스투스가 내전을 수습하고 로마인 전체를 재통합하는 책무를 부여받았듯이, 베스파시아누스도 내전이라는 상처를 입은 로마 제국을 재건해야 하는 중책을 부여받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그 일을 결행한 시대에 비하면 일하기가 훨씬 쉬웠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에는 로마인에게 익숙지 않는 제정이라는 정치체제를 로마인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늘 따라다녔다. 반면에 제9대 황제가 된 페스파시아누스는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1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로마인들도 처음에는 마지못해 받아먹은 약이 굉장한 특효약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제정에 대한 컨센서스가 이제는 확고해져 있었다. 따라서 로마 제정의 위기는 황제 통치체제의 위기가 아니라, 황제가 된 사람의 자질이 낳은 위기였다. 새로운 체제를 창조하려면 카이사르와 같은 선견지명과 창의력이 필요하고, 이 새로운 체계를 확립하려면 아우구스투스 같은 초일급 정치력이 필요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짊어지게 된 제국 재건이라는 과제는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책임감만 확고하면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과제였다. 그리고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건전한 상식만 있으면 충분했다. 창의적이지도 않고 뛰어난 능력도 없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한마디로 평하면 건전한 상식인이다. 하지만 어떤 체제도 오래 지속되면 일종의 피로 현상 비슷한 위기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로마 제정도 한 세기가 지난 이때, 그 불가피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건전한 상식으로 돌아가서 재출발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서기 70년 당시의 로마는 시대의 요청에 맞는 지도자를 얻은 셈이다.
그리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과거와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공식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가 되었다. 카이사르가 창시하고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네로를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설계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로마 제정은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시자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어받았다. 그후로는 누가 황제가 되든, 로마 제국 황제의 공식 이름에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붙는 것이 관례가 된다. 황제 부적격자는 배제되어도 황제 통치 체제는 계속된다는 로마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서 맨 처음 한 말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정치를 계승하겠다는 것이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를 악덕 황제로 매도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말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로마인이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칼리굴라와 네로, 그리고 차례로 바뀐 갈바와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해주기 바란다. 이 황제들은 동시대인한테도 황제 부적격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치세는 '동방 군단' 병사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한 서기 69년 7월 1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서술한 여러 사정 때문에 실제 통치는 70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때부터 죽음을 맞은 79년 6월까지가 그의 치세 기간이었다. 나이로 치면 61세부터 70세까지다. 변경의 군단기지 생활밖에 몰랐던 장수가 드넓은 제국 전역을 시야에 넣어야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정치가로 변모한 세월이다.
군단에서 잔뼈가 굵은 이 황제가 내건 목표는 평화와 질서였다. 질서가 흐트러지면 평화를 유지하기도 어려워지니까 '팍스 로마나'를 다시 기치로 내세웠을 뿐이지만, 내전의 국난을 1년 반이나 경험한 뒤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의 동의를 얻기도 더욱 쉬웠을 것이다. 그는 우선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게 했다. 두 개의 머리로 표현되는 야누스 신을 모신 신전 문이 열려 있으면 로마가 전쟁 상태에 있다는 표시이고, 문이 닫히면 평화가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로마인이라면 일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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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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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설총 유허지 - 이두를 집대성한 석학의 성장지
[서악서원]
외래문화의 주체적 수용
설총은 한자에서 우리말을 찾아낸 국학의 개조이다. 신라 10현의 한 인물로 추앙받아온 그는 소성거사를 자처한 원효의 아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불교일색이었던 당시 신라사회에서 유학을 고수, 구경을 처음으로 구결로 강론했다. 특히 그는 우리말로 경서를 읽는 새 방법을 발견, 외래문화의 주체적인 수용태세를 보였다. 그렇다고 설총이 이두를 창제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과대평가이다. 설총이 출생하기 이전인 진평왕과 선덕여왕대엔 이미 이두로 된 서동요, 혜성가, 풍요 등 향가가 있었다. 그 이전인 진흥왕대에 세워진 북한산 순순비에도 이두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설총은 이두문의 창작자가 아니라 기왕의 것을 정리체계화한 집대성자였던 것 같다. 설총은 경서와 역사에도 능통한 대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방음(우리나라말, 곧 이두)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풍속과 물명에 통회하고 육경과 문학을 훈해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몽고, 여진의 언어도 연구했으며, 이들 언어로 된 물건이름도 모두 우리식 발음으로 적었다. 그는 불교의 거봉인 원효와 함께 이 땅에 유학을 열어, 2대에 걸쳐 유불의 위대한 봉우리를 형성한 특이한 가계를 보여준다. 더욱 이들 두 부자는 각기 '우리'라는 굳건한 주체성 위에다 불교와 유교를 수용, 전개함으로써 그 위대성이 더 한층 돋보인다.
설총의 출생을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날 원효는 춘의가 발동하여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주려나/하늘 받칠 기둥을 찍어내려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법사가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구나.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이익이 그보다 더 클 수가 없지" 그는 '자루없는 도끼'가 여자의 생식기를 뜻함을 간파한 것이다. 그때 요석궁에 홀로된 공주가 있었다. 무열왕은 관리를 시켜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했다. 그때 원효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반월성 서편에 있었던 다리)를 지나다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이 함빡 젖게 했다. 왕명을 받은 관리는 그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옷을 말리도록 했다. 이리하여 원효는 요석궁에서 유숙, 공주와 동침했다. 그 일로 태어난 아들이 설총이다. 원효는 '하늘 받칠 기둥'으로 설총을 낳았지만, 설총은 불교보다는 유교를 택함으로써 원효의 기대를 어긋나게 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출생이 아버지의 파계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큰 오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출생 컴플렉스 때문에 그는 그의 뿌리인 불교에 반항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유교를 택했지만 그것으로 그는 이미 '하늘 받칠 기둥'이 되었다.
압량면 유곡
그의 유허지는 현재 확실하지 않다. 그의 위패는 김유신 최치원과 더불어 경주의 서악서원에 모셔져 있다. 해방 직후 그의 묘소가 경주시 보문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아직 확실한 고증은 안 되고 있다. 서악서원에서는 음력 3월과 8월의 정일(두번째 정일)에 춘추향사가 후손들에 의해 치러지고 있다. 지난 76년초 경산시 압량면 유곡동의 설곡사 부근에서 설총의 신도비가 발견돼, 잠시 학계를 긴장시킨 적이 있었다. 이곳은 원효의 출생지라는 추측이 강하게 일고 있는 곳인 만큼 설총의 성장지일 가능성이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 신도비는 1913년에 세워진 것이며 그 비와 똑같은 비가 가까운 경산시 압량면 여천동에도 있음이 밝혀져 다소 김이 새고 말았다. 현재 경산시 남산면 하대 1리에 있는 도동재 뒤편에는 그의 묘소가 비와 함께 세워져 있는데 그 묘는 가묘로 된 설단이다.
유곡동의 설곡사라는 이름은 바로 설총이 살았던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절 뒤의 산봉우리는 경주봉이라 불린다. 설총이 어릴 때 이 봉우리 위에서 즐겨 글을 읽었는데, 글읽는 소리가 경주까지 들렸다는 설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 일대에는 설총의 어머니 되는 요석공주가 친정에 오는 길에 바로 이 유곡동에서 설총을 급하게 낳았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다. 아마도 이 설화는 원효대사의 출생이야기가 와전되어 이루어진 설화인 듯하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효의 출생지는 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인 율곡의 사라수 아래였다고 한다. 사라수라고 한 유래는 원효의 집이 원래 율곡의 서남쪽인데 그의 어머니가 임신한 채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되어 급한 김에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휘장을 치고 그 안에서 분만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원효는 나중에 출가하자 그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를 짓고 그가 출생한 사리수 나무 곁에도 절을 지어 사라사라 했다고 한다. 초개사와 사라사의 위치는 현재 확실하지 않으나 이곳 유곡동과 경산군 자인면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임금을 깨친 화왕계
설총을 모신 도동제는 유곡동에서 20리 떨어진 곳이다. 이 재실에는 좌우로 명일헌과 해경당의 현판이 붙어있다. 사당 뒤쪽의 홍유후설선생신도비는 설곡사에 있는 비와 형태나 내용이 똑같다. 다만 이 비는 설곡사의 것보다 10년 뒤에 세워졌을 뿐 비문을 쓴 이나 글을 쓴 사람은 동일인물이다. 이 사당은 이 일대의 유림에서 설총을 추모하여 건립한 것이다. 설총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전해오는 것이 거의 없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신문왕에게 모란, 장미, 할미꽃을 비유로 들어 진언한 '화왕계' 설화를 그의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 임금님이 총명하시고 사리를 잘 아시는 줄 알고 왔더니 뵈온 즉 틀렸습니다. 무릇 임금되시는 분 중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분이 적은 까닭에 맹자도 종신토록 불우했고 빙당랑도 숨어 센머리로 늙었는데 예로부터 이와 같으니 낸들 어찌하겠습니까'라는 대목은 이 화왕계의 압권이다. 설총은 이처럼 현실을 비판하며 참가하며 당대 지식인으로서 양심에 거리낌없는 참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그는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의 3문장으로 꼽혔으며, 신라 10현으로 추앙된다. 그의 학문의 위대성은 고려에 가서 홍유추로 추봉되어 문묘의 윗자리에 배향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진흥왕릉 - 신라 최대의 영주를 모신 곳
초라한 왕릉
신라 최대의 영주로 꼽히는 진흥왕,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강조하고, 국토를 확장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진흥왕은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곧잘 대비되는 영웅이다. 그는 한강유역에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서해안까지 이르도록 하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뚫었다. 또한 낙동강유역의 가야제국을 정복했다. 안으로는 국사를 편찬하고, 화랑제도를 창설했으며, 불교를 일으키고 음악을 장려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이처럼 걸출한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그에 대한 대접은 소홀한 듯하다. 그의 왕릉(사적177호)은 신라사 최대의 왕의 능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하다. 경주의 서쪽 진산인 선도산 기슭, 태종 무열왕릉에서 북쪽으로 5백m쯤 떨어진 호젓한 산 중턱에 그의 능이라 전하는 무덤이 있다. 이 일대는 신라시대의 장지였는 듯 많은 무덤들이 있으며, 진흥왕릉 바로 아래에도 헌안왕릉(사적179호)과 진지왕, 문성왕의 합장릉(사적 178호)등이 있다. 진흥왕릉은 이 일대의 무덤들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산 속에 있을 뿐 아니라, 그 크기도 왜소하고 초라하며 능비 조차 서 있지 않다. 인적이 많지 않는 곳이라서 그런지 다른 왕릉에 비해 능을 보전하는 손길도 닿지 않은 듯 바람 속에 버려진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 초라한 능이 정말 진흥왕릉인가. 그의 업적으로 봐서, 신라인들이 이렇듯 소홀한 대접을 했을 리가 없다. 그의 능은 신라 최대의 규모를 갖추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들이 떠오른다. 이곳 선도산 기슭의 이 그의 능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그렇게 전해올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에 진흥왕릉이 세워진 사실을 의문시하기도 한다. 신라유물의 발굴과 연구에 평생을 바치다 최근 작고한 최남주 씨는 진흥왕릉이 경주시내 중심인 노동동고분군 중의 하나인 봉황대(사적38호)로 보기도 했다. 노동동고분군은 경주시청 바로 뒤편에 있는 금관총과 서봉총, 봉황대 등의 무덤군을 가리킨다. 이중 봉황대는 밑지름이 82m, 높이가 22m나 되는 신라의 능묘 중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최남주 씨는 "조선조 후기 권이진(1608~1734)이 경주 부윤으로 재임하던 중 경주의 각 고분을 둘러본 뒤 당시까지 무명총이던 선도산 중턱의 고분을 아무런 사증도 없이 진흥왕릉이라 단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경주시 노동동고분군의 서봉총을 22대 지증왕릉으로, 금관총을 23대 법흥왕릉으로 봉황대를 24대 진흥왕릉으로 추정했다.
그 이유를 최남주 씨는 "금관총 발굴 당시 연꽃무늬가 새겨진 찻잔이 발견됐는데, 이런 사실은 불교가 법흥왕 때 공인된 사실과 부합하며, 서봉총에선 그런 류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봉분의 크기로 봐서 진흥왕의 치적과 맞아떨어진다는 것. 이러한 사실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상당한 호소력을 갖기도 한다.
[진흥왕릉]
진흥왕릉의 위치
고고학적으로 볼 때 고신라시대의 무덤은 경주 평지에 세워지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고신라의 편년은 7세기 반경까지이며 진흥왕(540~576)도 이 시기에 해당된다. 이은창 교수(전 효성대박물관장)는 경주시내 평지의 고분들(황남동고분군, 노동동고분군 등)은 대부분 7세기 이전 왕들의 무덤이며, 그 이후의 무덤은 경주 외곽지대의 구릉이나 산기슭으로 옮아간다고 말했다. 노동동고분군의 경우 이미 발굴된 금관총, 서봉총 등의 구조로 봐서 4~5세기의 왕릉으로 추측되고 있다. 선도산 남편에 즐비한 서악리고분군은 태종무열왕(654~661) 이후와 삼국통일 이후 골품제도가 바뀔 때(무열왕 때 성골이 진골로 바뀌었다)진골출신의 왕족들이 집중적으로 무덤을 쓴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진골 이전이 성골출신 왕족들의 무덤은 경주의 중앙평지일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있다. 더욱 고신라기에 신라왕릉은 석실무덤이 아니 적석무덤이었다. 고신라의 편년도 무덤의 이러한 구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은창 교수는 "신라왕릉 중 본격적인 석실분은 통일 이후에 나타나는데, 그 무덤은 경주주변의 산과 구릉지대로 옮아가는 경향이 현저하다. 특히 서악리고분은 전형적인 석실분이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면 진흥왕릉이 경주시내의 평지에 있었을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이 죽은 후 '애공사 북봉에 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며 앞의 주장을 반박한다. 애공사의 절터는 경주 효현리에 있다.
대구에서 경주로 오는 국도변의 무열왕릉 못 미쳐 왼쪽 동네가 효현리이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도 진흥왕릉이 '부(구박물관)의 서쪽 서악리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고려중기 이후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을 수습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다. 그보다는 고분의 구조와 시대적인 고증이 더욱 신빙성을 갖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확실한 고증이 없는 한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 진흥왕릉이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은 문화재당국이 귀를 기울여야 하며 확실한 위치를 바로잡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흥왕순수비]
진흥왕의 업적
진흥왕은 7세에 즉위했다. 그래서 한때 왕태후가 섭정을 했다. 그가 즉위한 시기는 신라가 미약했던 국세를 펴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0국력신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재위 6년(545)에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케 하는 등 자주적 역사의식이 이전이 왕들에 비해 높았다. 또한 그는 551년에 개국, 568년에 대창, 572년에 홍제라는 연호를 사용, 자주적인 국가의식을 내외에 선양했다. 그의 국가의식 및 통일의식은 투철했다. 삼국통일은 문무왕대에 완성되지만, 그 발상은 진흥왕대에 구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원대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불교를 진흥하고, 화랑도를 창설했다. 불교진흥은 순수한 종교적인 수용이기보다는 정치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는 감이 짙다. 즉 당시까지 짙게 남아 있던 6부장의 세력으로 권력이 각 지방 호족들에 분산되어 있어서 왕권이 미약했다. 그리하여 종래의 정신적 가치관을 버리고 불교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도입, 국민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는데 성공,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다. 그런 다음 화랑도라는 청소년집단을 창설, '충성'이라는 구호 밑에 국민의식을 단합시킨다. 이러한 작업은 이후 국토확장과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밑받침이 되는 것이다.
그는 55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공격하고 죽령이북의 넓은 지역을 확보한다. 그 여세를 몰아 백제가 점령했던 한강하류마저 점령, 중국과의 교류를 도모할 통로를 뚫는 데 성공한다. 남쪽의 대가야까지 정복한 그는 1백 20년간 유지해온 나제동맹까지 와해시키면서 한강일대의 지리적 우위를 독점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지를 뚜렷이 내보였던 것이다. 그가 세웠던 순수비는 그의 통일염원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흥륜사를 중건하여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했다.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났을 때는 스스로 중이 되어 머리를 깎기도 했다. 그는 45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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