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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2호 - 2024.07.18 목요일(음력 : 06.13)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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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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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가 풍족하면 병아리들은 모이를 놓고 서로 싸우지 않는다. 우리 인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 돈 마키스(美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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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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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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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가 30% 할인되셔서 2만 원이세요
지난 4일 KBS가 주최한 ‘어린이 말하기왕 선발대회’에서 대구삼육초등학교 5학년 정가희 학생이 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정가희 어린이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피자 가게에서 종업원들이 손님들에게 “피자가 30% 할인되셔서 가격이 2만원이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종업원들의 잘못된 높임말 사용을 주제로 100초 말하기를 하였다.
종업원들이 피자를 높여서 말하는 이유는 손님들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해 주어가 사물인데도 무조건 ‘-시-’를 붙여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사물에도 ‘-시-’를 붙여서 말하게 되면 듣는 사람도 어색하고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에 “피자가 30% 할인돼서 가격이 2만원이에요”라고 바르게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가희 어린이의 말대로 가게의 종업원이 손님에게 공손해 보이기 위해 물건까지 높여서 말하곤 하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높임법이다. 동사나 형용사에 붙는 선어말어미 ‘-시-’는 사물이 아닌 사람을 높일 때 쓰인다. 그래서 “커피 나오셨습니다” “그 가방은 품절되셨습니다” 등은 “커피 나왔습니다” “그 가방은 품절됐습니다” 등으로 고쳐 말해야 한다.
다만 상대방의 신체 부분과 성품, 심리, 소유물과 같이 상대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을 높임으로써 상대방을 간접적으로 높이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키가 크시네요” “걱정이 많으시죠?” “선생님, 넥타이가 멋있으시네요”처럼 ‘키’와 ‘걱정’, ‘넥타이’가 상대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에는 ‘키’와 ‘걱정’, ‘넥타이’를 높여 말함으로써 상대방을 간접적으로 높일 수 있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괴발개발, 개발새발
요즘엔 직접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많지 않다. 문서 작성은 물론이고 편지 보내기까지 이메일로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펜이나 연필보다는 자판을 더 편안해 한다. 특히 젊은이들 중에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또박또박 쓰는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악필’인 사람들이 많다.
삐뚤빼뚤, 되는 대로 글씨를 아무렇게나 써 놓은 모양을 나타내는 우리말 표현은 무엇일까? ‘개발새발’ 아니면 ‘괴발개발’? 우리말 관련 퀴즈 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제되던 이 문제의 답은 예전에는 ‘괴발개발’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둘 다 정답이다. 본래는 ‘괴발개발’이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쓰는 ‘개발새발’도 최근에 표준어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괴발개발’은 고양이의 발과 개의 발이라는 뜻이다. ‘괴’는 고양이의 옛말로 지금은 ‘괴 밥 먹듯 하다’나 ‘괴 목에 방울 달고 뛰듯’ 같은 몇몇 속담들에만 남아 있다. ‘괴발개발’이란 말은 형편없이 써 놓은 글씨가 마치 고양이와 개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발자국을 찍어 놓은 모양 같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괴’가 고양이를 뜻하는 말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뜻 모를 ‘괴발개발’ 대신 뜻도 분명하고 발음도 쉬운 ‘개발새발’을 더 많이 쓰게 되어 결국 두 낱말이 복수 표준어가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쓰는 ‘쇠털’이 있다. 주로 ‘쇠털 같이 많은 날’처럼 쓰이는데, 이때 ‘쇠털’을 ‘새털’로 잘못 알고 쓰는 사람들이 있다. ‘새털’도 많기는 하지만 ‘쇠털’(소의 털)에 비할 바는 아니고 아직은 ‘쇠털’과 ‘새털’이 분명히 구분되어 쓰이므로 ‘새털 같이 많은 날’처럼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새털’은 대신 ‘새털 같은 발걸음’처럼 아주 가벼운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펑더화이’는 누구?
올해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언론에는 이를 조명하는 다양한 기사들이 보이는데, 그 중에 등장하는 인물로 펑더화이가 있다. 기사에서 그는 모택동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려 홍위병에게 타살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펑더화이’는 누구일까? 바로 한국전쟁의 참전 장군으로 잘 알려진 ‘팽덕회(彭德懷)’이다. 장년층 이상은 ‘아, 그 사람’ 하고 바로 알 만한 이름이다.
이 ‘펑더화이’처럼 오늘날 중국인 인명은 원지음에 따라 적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다고 ‘공자, 이태백, 조조’까지 모두 그렇게 적기는 어려워서 일정한 기준이 필요한데, 그 기준은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현대인은 원지음에 따라 표기하는 것이다. 신해혁명(1911) 이전에 사망한 이는 과거인, 그 외는 현대인이다. 펑더화이는 현대인이므로 당연히 원지음에 따라 적는다.
그런데 현대인이라고 해도 ‘마오쩌둥(毛澤東),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루쉰(魯迅),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장징궈(蔣經國)’는 우리 한자음 이름이 워낙 익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택동, 등소평, 유소기, 노신, 손문, 장개석, 장경국’으로 적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
나머지 인물들은 ‘펑더화이’처럼 원지음에 따라서만 적어야 한다. 즉 ‘성룡, 주윤발, 공리’ 등은 더 이상 표준적인 표기가 아니며 ‘청룽, 저우룬파, 궁리’가 올바른 표기이다. 이것이 꽤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므로 복수안을 넓히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이후의 인물인 ‘장쯔이, 시진핑’ 등은 원지음에 따른 인명만 통용되는 것을 보면 새로운 표기 방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는 느낌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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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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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불혹의 추석 - 천상병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
3
문득, 영혼안에 외로운 별이
바람처럼 일은 회한에 피어오른다
홍역 - 정지용
석탄 속에서 피여 나오는
태고연히 아름다운 불을 둘러
12월 밤이 고요히 물러 앉다.
유리도 빛나지 않고
창창도 깊이 나리운 대로-
문에 열쇠가 끼인 대로-
눈보라는 꿀벌떼 처럼
닝닝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홍역이 척촉처럼 난만하다.
~~~~~~~~~~~~~~~~~~~
나비의 무덤 - 김수영
나비의 몸이야 제철이 가면 죽지만은
그의 몸에 붙은 고운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둥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
그러나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다
나는 노염으로 사무친 정의 소재를 밝히지 아니하고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에 밀려내려간다
등잔은 바다를 보고
살아있는 듯이 나비가 죽어누운
무덤 앞에서
나는 나의 할 일을 생각한다
나비의 지분이
그리고 나의 나이가
무서운 인생의 공백을 가르쳐주려 할 때
나비의 지분에
나의 나이가 덮이려 할 때
나비야
나는 긴 숲속을 헤치고
너의 무덤을 다시 찾아오마
물소리 새소리 낯선 바람소리 다시 듣고
모자의 정보다 부부의 의리보다
더욱 뜨거운 너의 입김에
나의 고독한 정신을 녹이면서 우마
오늘이 있듯이 그날이 있는
두겹 절벽 가운데에서
오늘은 오늘을 담당하지 못하니
너의 가슴 우에서는
나 대신 값없는 낙엽이라도 울어줄 것이다
나비야 나비야 더러운 나비야
네가 죽어서 지분을 남기듯이
내가 죽은 뒤에는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는 이다지도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단다
<1955.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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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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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2편 중도의 세계
제 2 장 중도의 원리
1. 초전법륜
지금까지 이야기한 '불생불멸'이라든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무애법계'라고 하는 이론들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불생불멸의 뜻을 전하는 화엄 및 법화사상은 대승경전의 말씀들인데, 이 경전들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수백 년이 지나서 편집된 것이므로 더러 잘못된 것이 없나 하는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설령 부처님이 살아 계시던 무렵에 편집되었다 하더라도 더러 잘못 듣거나 잘못 기록하여 오전(誤傳)이 있을 수가 있거늘, 하물며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수백 년 뒤에 편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틀림없는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좀 억지스럽지 않은가 하는 의혹이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습니다. 학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한 결과, 한때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직설(直設)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게되었습니다. 이름하여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 대두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대신에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곧 성립된 경전인 [아함경]에서 부처님의 사상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과연 [아함경]을 열심히 연구해보니 처음에는 이 경전에서 표현된 부처님의 사상은 대승불교의 사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듯이 보였습니다. [아함경]을 부처님의 사상 그대로라고 한다면, 대승불교는 그 [아함경]에서 발달된 사상일 뿐이지 실제의 부처님 사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뭏든 뒤에 연구를 거듭해나가 보니 [아함경]에도 부처님의 친설(親設)이 아닌 것이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이름난 권위자들이 더욱 깊이 연구를 한 결과, 원시 경전인 팔리어 경전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한 것이라는 증거를 가진 초기의 법문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돌 무더기 속에서 금이나 옥을 발견해낸 것과 같았습니다. [아함경]중에서도 [잡아함경] 같은 데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은, 당시 인도의 여러 사상을 종합해 볼때, 틀림없는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부처님의 생활을 기록해 놓은 율장에서 그에 대한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전법륜(初轉法輪)은 부처님께서 맨처음으로 법문하신 것인데, 깨달음을 성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동시에 교단을 조직하신 그 출발점부터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신 뒤에 혼자만 좋은 법을 알고 있을 수는 없기에 그 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좋은 법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서 그들도 함께 깨닫고 자신과 같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수행하던 중에 고행이 결코 도(道)가 아님을 알고 방향을 전환하였을 때에 부처님을 떠나버린 다섯 비구를 맨 처음에 찾아갔습니다. 처음에 그들 다섯 비구는, 부처님이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을 찾아오고 있는 부처님에게 인사도 하지 말자고 약속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처님이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자, 스스로 한 약속을 잊어버리고, 대법(大法)을 성취한 만덕종사(萬德宗師)이신 부처님께 오체투지(五體投地)로, 곧 온몸을 땅바닥에 대고 머리가 깨어지도록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을 자리에 모셔놓고 "어찌하여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을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것을 맨먼저 그들에게 소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무엇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하였다"고 그 제일성(弟一聲)을 토하셨습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하며,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 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모두 상대적(相對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善)과 악(惡)의 상대, 시(是)와 비(非)의 상대, 유(有)와 무(無)의 상대, 고(苦)와 낙(樂)의 상대 등, 이렇듯 모든 것이 서로 상대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현실 세계는 그 전체가 상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이 현실 세계에서는 모순과 투쟁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상대의 세계 곧 양 변의 세계에서는 전체가 모순 덩어리인 동시에 투쟁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세계는 불행에 떨어지고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행에서 벗어나고 투쟁을 피하려면 근본적으로 양 변, 상대에서 생기는 모순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是非)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이른바 사바고해(娑婆苦海)인 까닭에 그 양 변을 여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정등각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은 바로 그 모든 양변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곧 나고 죽는 것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도 버리고, 악하고 착한 것도 버리고, 옳고 그른것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 버리면 시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절대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상대의 모순을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대자유이며 성불인 것입니다.
모든 대립 가운데에서도, 철학적으로 보면, 유(有) 무(無)가 가장 큰 대립입니다. 중도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닙니다. 이것을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하니, 곧 있음과 없음을 모두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 납니다(亦有亦無). 그 뜻을 새겨 보면 이러합니다. 곧 3차원의 상대적인 유와 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 원에 가서 서로 통하는 유무가 새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有蕪合故名爲中道]."
불생불멸의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有卽是無, 無卽是有)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을 그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니 그들은 짧은 시일 안에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초전법륜입니다. 이렇듯이 초전법륜의 근본 골자는 중도에 있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완전히 버리고, 옳음과 그름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버린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완전히 걷히면 밝은 해가 나오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는 광명이 있을 뿐입니다. 유와 무를 완전히 버리면 그와 동시에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세계, 곧, 융통한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눈을 감은 세계에서는 있고 없음이 분명히 상대가 되어 존재 하지만, 눈을 뜨고 보면 유와 무, 곧, 있고 없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동시에 유와 무가 완전히 융합해서 통하게 됩니다. 이렇듯 중도의 세계란 유, 무의 상대를 버리는 동시에 그 상대가 융합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양 변을 버리는 동시에 양 변을 융합하는 이 중도의 세계가 바로 모든 불교의 근본 사상이며, 그리고 대승불교 사상도 여기에 입각해 있습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
一卽一切
一切卽一
[화엄경]에서 말하는 이 사상도 중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와 일체라는 것은 양 변입니다. 하와 일체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중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엄사상이며 곧 불교 전체의 사상인 것입니다.[법화경]이나 [화엄경]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일진법계(一盡法界)를 말한 것은 모두 중도에 입각해 있는 사상입니다. 대승경전이 시대적으로 보아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몇 백년 뒤에 성문화된 것이라고 하여도 그 근본은 부처님의 사상 그대로인 것입니다. 대승경전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거나 부처님의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 중도에 있는 것과 같이, 화엄과 법화 또한 중도를 그대로 전개시킨 것이니, 그것이 곧 초전법륜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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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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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10. 단군 이래의 첫 민주정권 (2/3)
유진산, 그는 어떤 것이 민주정치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정치가였다. 여담이지만 5공화국 시절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의 전당대회 의장이자 국회의원인 송원영(宋元英)의 5.16 군사 쿠데타 이전까지의 꿈은 유진산과 함께 정치를 해보는 것이었다. 그는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자 그에게 자리를 옮겨 앉기 전까지 줄곧 경향신문사 정치부 일선 기자로서 활약해 온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가까이에서 유진산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유진산이야말로 정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유진산과 함께 정치를 해고는 것을 하나의 꿈으로 새겨왔다. 거듭 또 되풀이 언급하지만 유진산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장면과 마주 앉아 있을 때 장면 내각에 협조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혀놓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8월 31일, 구파의 등록할 때부터 누구나가 유진산을 가리켜, <구파의 국무총리>라 일컬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구파의 보스는 유진산이라는 뜻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구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그만큼 커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파 전체가 그가 생각하는 대로 따라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장면이 경무대 4자회담의 합의 사항을 뒤집어 버리고 신파 단독내각을 조직했다는 것은 정치적 신의를 저버린 행위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장면에 대해서 <비상시국임을 감안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협조를 하도록 하자> 한다고 해서 과연 구파가 유진산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은 비관적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동원예식장에서 구파의 의원총회를 긴급히 열었다. 유진산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장면 내각에 협력하는 문제를 끄집어내자 모두가 한결같이 장면의 신의 없는 행위를 규탄하며 협력에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조영규는, "신파는 이제 남이에요. 남의 집안 일을 애써서 거들어 준들 이제 저들의 정치 역량은 드러났는데 무슨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이오? 더구나 결과가 재미없게 되면 그들하고 같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그래 진산은 그들하고 실정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겠단 말이오?" 하면서 대들었다. 해질 무렵에 열린 의원총회는 자정이 가까울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80여 명의 의원들이 모두 한 마디식 하는 참이라 말을 일일이 참을성 있게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여망에 부응해서 제2공화국의 헌정을 정상화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믿고 있소. 이것은 내 신념이오. 당보다는 먼저 국가를 생각해야 할 게 아니겠소? 시국의 중대성에 비추어 장 정권을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오. 4.19 정신을 계승하고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입장에서 이번에도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자세인 줄로 아오. 여러분은 장면 씨의 신의문제를 운위하고 있지만 그 집안은 그 집안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게 아니오? 우리 이렇게 좋은 면으로 해석을 하도록 합시다."
나용균이 첫번째로 조건을 내걸었다.
"장면 내각을 처음으로 백지환원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협력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를 조영규가 이었다.
"장 총리는 구파한테 다섯 자리를 줄 모양인데 현재 사표를 낸 장관은 넷밖에 안되지 않소? 그리고 우리 구파한테 다섯 자리를 준다 하더라도 장 총리 마음대로 자리를 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구파가 마음대로 차지하고 싶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해주십시오."
이런 제의에 대해서 유진산을 이렇게 대꾸했다.
"남의 집에 일을 도와주러 간 사람이 맡아하겠다고 할 수야 없는 일 아니오?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왕에 도와주고자 마음먹은 일, 조건 없이 도와주는 것도 미덕이 아니겠소? 우리, 우리가 장 내각의 입장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서라도 아예 벌거벗고 도와주도록 합시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구파에는 이른바 원로라 일컬을 수 있는 인물들이 제제다사였다. 백남훈, 김도연, 나용균, 양일동,서범석 등. 그런데 유진산이 입을 열기만 하면 지금껏 게거품을 토하면서 반대를 하던 사람들까지도 끽 소리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유진산이 신체가 건장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의 입은 열기만 하면 반대론자들을 눌러 버렸다. 파견할 인물 선정을 유진산, 김도연, 백남훈에게 일임한다는 결의까지 했다. 밤이 늦었으나 세 사람은 구파에서 파견할 5명의 장관 인선에 착수했다. 유진산은 그것을 다음날 아침 반도호텔로 가지고 가서 장면에게 내밀었다. 구파에서 입각시키고자 선정한 인물은 권중돈, 나용균, 김우평, 박해정, 신각휴 등이었다. 장면은 명단을 훑어보고 나서, "진산, 언젠가도 말했지만 진산이 들어와 주시오. 진산이 희망하는 부처를 맡기도록 하겠소" 하며 유진산이 입각하기를 성심으로 요청했다. "박사님, 말씀은 감사하나 만일 내가 입각을 해 보십시오. 남의 말하기를 장관 감투가 쓰고 싶어서 신파 내각에 협조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유진산은 이렇게 좋은 말로 사양을 하고 덧붙였다. "구파에서 다섯 사람을 보냅니다만 협력의 조건은 구파의 별도 교섭단체를 인정해 줄 것과 필요할 땐 언제든지 5명의 장관을 소환할 수 있다는 이 두 가지뿐입니다." 그런데 장면이 막상 개작에 착수하기는 했는데 조그마한 문제가 생겼다. 장면이 구파에서 보낸 신각휴에게 체신부를 맡기려 하자 그는, "나한테는 농림을 맡겨 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신각휴는 개인적으로 농림부 장관을 시켜달라고 감투운동을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을 장면이 보사부나 체신부라도 좋다고 한다면 고려해 보겠다고 했었다. 그랬는데 신각휴는 농림부가 아니면 싫다고 하면서 제물에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신각휴는 집요하게 농림부를 요구했다. 어차피 구파의 협조를 바라고 구파 다섯 사람에게 장관 감투를 안겨줄 생각을 한 이상에는 체신이나 농림이나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었다. 신각휴가 농림 정책을 맡았다고 해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바에는 희망하는 대로 안겨줄 법도 한 일이었으나, 이 경우 장면은 고집을 부렸다. "싫소이다." "그러시지 말고 체신부를 맡아 주십시오." "싫다고 하지 않소?" 신각휴는 고집을 부렸다. 어느 한쪽이 고집을 꺾어야만 하루속히 개각 발표를 할 수가 있는데 어느 쪽도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으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사흘이 걸렸다.
결국 장면은 신각휴한테 안겨주려던 체신부는 보류해 놓은 채 발표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각에 착수한 지사흘 만인 9월 13일 장면은 개각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외무부 정일형(유임), 문교부 오천석(유임), 내무부 이상철, 부흥부 농림부 박제환(유임), 법무부 조재천(유임), 상공부 주요한, 국방부 권중돈(구파), 보사부 나용균(구파), 교통부 박해정(구파), 국무원 사무처장 정헌주, 무임소 김선태(유임) 신현돈. 체신부는 우선은 그냥 공석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보류해 두었던 체신부 장관 자리는 다시 구파의 천거를 받아 조한백에게 그 자리를 안겨주었다. 그럼 이제 구파를 내각에 끌어들였으니 장면은 마음놓고 정치를 해나갈 수 있게 되었던가? 그렇지를 못했다. 이번에는 국무원 사무처장 자리를 내놓은 오위영이 장면에게 반발할 자기 세력 규합을 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행가 출신인 오위영은 신파의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태반이 경상남도 출신 국회의원들이었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기만 하면 족히 한 파벌은 이룰 수 있을 만한 숫자는 되었다. 애당하는 마음에서 국무위원 감투를 헌신짝 내던지듯 깨끗이 내던졌던 오위영이 어째서 장면에게 반발하고자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인가?
앞을 가로막는 험준한 산, 그 산을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넘으면서도 국무총리 장면의 일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그는 몸 속에서 돌고 있는 피를 온통 다 말려가고 있었다. 1시 전에 퇴정해 본 일이 없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7시면 출근을 했다. 총리가 이 모양이니 여타 장관들도 그 본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그는 점심시간이 되어도 나가서 외식한번 하지를 않았다. 반드시 집에서 도시락을 날라다 먹었다. 끼니란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먹어야 맛도 나도 소화도 잘 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장면은 집에서 도시락을 날라다가 그것을 책상에 펼쳐 놓고서 먹었다. 그러면 왜 집에서 날라다 먹었겠는가? 그는 밥술을 입에 떠 넣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이 나라, 이 국민을 보다 잘 살 수 있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장면은 그의 내각의 목표를 <경제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는 옛말과 같이 무엇보다도 경제 건설이 급선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무렵의 한국의 경제 실정은 파탄 일보직전에 놓여져 있었다.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잠재 실업가가 3백만 명에 이르는 형편이었다. 우선 먹이고 입히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시정의 최고 목표로 설정해 놓은 것이 경제 제1주의였다. 이 시정목표에 따라 재정 경제 2개년 계획이 세워졌다. 또 경제부흥을 위한 제1차 5개년 계획도 세웠다. 농촌의 빈곤 구제를 위한 고리채(高利債) 계획도 세워 놓았다. 국토의 종합적인 건설을 위해서 여기에 투입될 인력은 병역 기피자의 노동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 무렵 병역 기피자, 미필자의 수가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 태반이 잠재 실업자 군상을 이루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기간을 정해서 국토건설 사업에 참여케 함으로써 병역 의무를 상쇄시켜 주어 떳떳하게 인생을 영위케 하자는 것이 정부의 배려였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무엇 하나 해놓은 것이 없는 반면에 장면 정권이 이만한 청사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그들의 열의가 어떠했느냐 하는 것을 짐작케 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여담이지만 민주당 군사정권에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들은 마치 그들 자신이 그런 청사진을 만들어낸 양 선전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숫자 하나 시정함이 없이 그대로 시행했었다. <민주주의 정부란 정부가 하고 있는 일, 또 하고자 하는 일을 숨김없이 국민에게 알리도록 해야 한다>는 공보비서관 송원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KBS 프로그램 가운데 <정무보고(政務報告)> 시간을 마련, 한 달에 한 번씩 국민에게 정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물론 이 정무보고는 장면이 직접 KBS 마이크를 통해 방송을 했다. 한두 달 뒤에 송원영이 다시, "한 달에 한 번만의 방송으로는 국민이 정부가 하는 일을 소상히 알기는 어려우니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자, 장면은 이 건의도 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저녁 6시 30분을 아예 <정무보고> 시간으로 못박아 놓고 방송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송은 여.야에 관계없이 공정해야 하며 정치의 예속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문가들로 하여금 <방송의 중립화 법안>을 연구해서 만들도록 하기도 했다. 또 경찰 역시 집권자의 사병(私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경찰의 중립화 법안>을 만들도록 했다. 특히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는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를 만들어 경찰의 독립을 도모하기도 했었다. 교과서에 그대로의 정치제도와 정치풍토를 건설하는 것이 장면의 정치 이상이었다. 군대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남달리 신경을 썼다. 당초 민주당은 10만 감군(感軍)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북한과의 군사적 균형이 깨진다고 해서 많은 비판이 일었지만 국군문제에 있어 장면은 수보다는 질에 무게를 두고 정예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10만 감군을 공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방장관 권중돈은 구파에서 파견한 인물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장면과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는 장면의 생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헤아려 정군(整軍)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었다. 극비로 작업이 진행된 이 정군 계획의 첫째, 직위를 이용 부정축재를 한 장성은 예비역에 편입시킨다. 둘째, 부정선거에 관여하여 현저하게 악질적으로 행동한 지휘관 등은 예편시킨다. 셋째, 퇴역장성 중 유능한 인물을 선발, 국방 자문기관을 신설, 수용토록 한다. 대강 이런 내용의 정군 원칙을 세웠다. 세부적으로 삼성 장군(중장) 이상에 대해서는 총리 책임하에 거의 전원을 예편, 인사의 적체에 숨통이 트이도록 하며, 소장 이하 준장에 이르기까지는 부정축재, 부정선거에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자만을 골라서 예편 또는 이동을 시킨다는 세부원칙도 세워 놓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가려내는 정군 원칙에 그들에 대한 처벌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장성으로서 정년까지 봉사를 하지 못하고 중도에 옷을 벗는다는 것이 곧 처벌이 아니겠소. 그러니 그들의 죄질이 얼마나 크든 그것으로 그들에 대한 처벌은 끝난 셈입니다."
장면은 아무리 부패한 장성이라 해도 6.25 때의 그들의 공로를 참작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던들 오늘 이 나라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총리 장면이 이 지론에 따라 정군 대상자에 대해서 이렇듯 관대이 취급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방부에서 정군에 대한 논의가 극비리에 장도영(張都暎)이 사표를 제출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그도 자신이 정치장군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지 아직 정군 요강이 확정되기도 전에 미리 사표를 내 버렸던 것이다. 국방장관 권중돈은 이때 두말 않고 장도영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와 함께 예편을 시켜버렸어야 했다. 그것을 권중돈이 <아직 정군 요강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하니>라는 이유로 육군 참모총작에게 명해서 그 사표를 반려토록 했다. 참 기막힌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역사를 가정해 본다는 것처럼 부질없는 것도 없지만 한번 가정을 해볼 경우 어떤 역사적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버렸더라면 군사 쿠데타의 리더인 박정희(朴正熙)를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이때 박정희는 어쩔 수 없이 예편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 그것을 장도영이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감으로써 구제해 준 꼴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아찔했던 역사의 한순간을 들여다볼 때마다 인간에게 운명(運命)이라는 것이 있듯이 국가에도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냐 하는 느낌이 자주 일곤 한다.
그건 그렇고, 역사의 줄기를 앞에 놓고 살펴볼 때, 우리는 때론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쳐 당황하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정군파 장교들의 움직임에 이른바 주체들이라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환전된 일이지만 그들은 <새로운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육군 참모총장의 경질문제가 대두되자, 정군파 장교들은 국방장관 현석호와 면담, 정군을 단행할 참모총장의 임명을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라고 했는데 이 대목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이들은 이러한 결의를 9월 9일 오후 6시 30분에 했다는 것이다. 이날의 이들의 움직임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9월 9일, 오후 6시 30분. 충무로에 있는 충무장에는 정군파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장소를 바꿔 충무로에서 회합을 갖지 않고 이태근, 중령 김종필 두 사람의 지프와 택시 한 대에 나눠 타고 한강으로 달렸다. 당시 방한중인 월남 장교단 환영 행사를 가져야 했던 이태근은 하차하고 나머지 장교들은 한강에 도착, 놀잇배 위에서 다시 정군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은 후에 헤어졌다. 첫째, 현석호 장관을 만나기 위해 내일 9월 10일 오전 10시 30분까지 국방부 앞 2층 다방에 개별적으로 집합한다. 둘째, 장관을 만나면 모든 3성 장군의 예편을 건의한다. 셋째, 만약 3성 장군을 참모총장에 임명한다면 나머지 모든 3선 장군은 예편하고 신임 총장도 1960년 12월 조건부로 할 것을 건의한다. 넷째, 앞으로 참모총장, 차장을 모두 2성 장군으로 보하도록 한다. 이상이 이른바 군사 쿠데타 그룹의 주체들이 훤전하고 있던 정군의 결의 내용이다. 이런 그들의 주장이 전혀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현석호가 장면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기용된 것은 8월 23일, 그는 엿새 만인 8월 29일에 이미 육군 참모총장을 갈아치웠다. 최영희는 연합참모본부(聯合參謀本部:지금의 합동참모회의) 총장으로 전보를 하고 후임에 최경록을 기용했던 것이다. 있으면서 한 일이라고는 이 육군 수뇌부의 인사이동 한 가지뿐이었다. 그랬는데 <만약 3성 장군을 참모총장에 임명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또 9월 10일에 국방장관 현석호를 만나기 위해서 운운하고 있지만 이때 이미 현석호는 장면의 개각 방침에 따라 사표를 낸 뒤였고 후임 장관이 임명된 것은 9월 12일 오후였으니까, 이때 국방장관은 공석이었다. 그랬는데 이날 장관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가기까지 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도무지 무슨 놈의 꽹꽹이 놀음인지 모르겠다. 이들이 신문.방송을 접하기 어려운 일선 근무자였다면 글쎄 그랬을까? 하고 의심을 하면서도 일단 수긍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아니었다. 바로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 근무자들이었다. 장면 내각의 개각문제에 대해서 신문.방송이 연일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현석호가 국방장관직을 내놓았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 판국이었는데 군사 쿠데타의 주체라는 사람들이 그런 믿기 어려운 얘기를 만들어 퍼뜨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본 속담에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적군(賊軍)>이란 말이 있다. 총칼로 권력을 잡았든, 물로 권력을 잡았든 잡은 자가 땡이다. 그래서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곧 정의(正義)다>라고 갈파하지를 않았던가! 하여간에 그건 나중 일이고, 김종필 등 이른바 정군파 장교들은 9월 10일 서울 충무로에 있는 충무장(忠武場)이라는 왜식 음식점에서 모임을 가졌다. 물론 극비의 집회였다. 이날 음식점에 모인 인물들은 김종필을 비롯해서 오치성(吳致成), 길재호(吉在號), 옥창호(玉昌鎬), 석정선(石正善), 신윤창(申允昌), 석창희(石昌熙), 이택근(李澤根), 김달근(金達勤) 등 8기생 출신 9명이었다. "우리가 애국애군하는 마음에서 정군운동을 펴 왔소만 도무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니, 이 아니 딱하오." 약간의 허스키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김종필은 자못 침통한 듯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우리의 정군운동을 도 그렇다 하고 나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그들 자신이 알아서 정군을 해주겠지 했더니 전혀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고......." 김종필은 이쯤에서 말을 뚝 끊고, 동기생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성급한 기대는 금물이에요.실망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정군운동을 펴 나가느라면 빛을 볼 날도 있을 게 아니오?" 김종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여기에서 주저앉고 말자 그거요?"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어떤 결말을 봐야 할 게 아니겠소?" 오치성이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이오.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았다가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칼집에 꽂을 수야 없지 않소? 우리 이 자리에 모인 김에 방법론이나 한번 연구해 보도록 합시다." "방법론은 없어요." 김종필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방법론이 없다면 오늘 우린 여기에 왜 모였지?" 신윤창이중얼거렸다. "방법론이 있다면 딱 한 가지가 있을 뿐이에요." 김종필이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호히 "어떤?" "쿠데타." "쿠데타?" 모두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순간 숨소리를 죽였다. 시간까지도 뚝 정지한 것 같았다. "그것이 가능할까?" 석정선이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히틀러는 일곱 명의 나찌망을 만들어 가지고 정권을 잡았어. 우린 그것보다도 두 명이나 더 많잖아? 더구나 우린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이야. 우리가 치밀하게 계획만 세워서 추진한다면 불가능이 어디 있겠어." 김종필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자신으로서는 숨막히는 듯한 한순간이기도 쿠데타에 반대한다면 그가 지금껏 박정희와 세워온 군사 쿠데타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고 봐야 했기 때문이다. "우린 맨주먹이야. 병력을 거느린 지휘관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휘관을 포섭해야지." "지도자는?" "지도자는 있어. 우리가 합의를 보이기만 하면 지도자의 이름을 밝히겠어." 오치성이 식탁을 탕 치며 말했다. "나는 찬성이야. 정군운동 방법을 아무리 모색해 봐도 방법은 없어. 이놈의 고리타분한 정권을 확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 관철의 길이야." "실패하는 날엔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걸?" 아냐? 이까짓 목숨 아까울 게 뭐가 있어?" 오치성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6.25 운운한 것이 모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모양이었다. 모두가 한 마디씩 결연히 의사표시를 했다. 김종필은 빙긋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박정희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고 거사를 하도록 합시다." "박정희 장군?" 그들은 박정희가 어떤 인물이냐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6관구 사령관에서 1960년 1월에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던 박정희는 불과 반 년만에 1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어 광주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군대 안에서는 꽤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소문이 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그럼 부서를 정하도록 합시다." 의논 끝에 총무 김종필, 정보 김형욱, 정문순(鄭文淳), 인사 오치성, 경제 김동환(金東換), 사법 길재호, 작전 옥창호, 신윤창, 우형룡(禹瑩龍)으로부서가 짜여졌다. 한데, 운명인가? 이들이 충무장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의한 바로 다음날인 9월 11일 박정희는 1관구 사령관의 한직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영전이 된 것이다. 육군의 작전 지휘권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는 작전참모부장으로 영전이 됐으니 김종필의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쿠데타는 반드시 성공하고 말 것이라는 신념이 굳어지게 되었을 것은 <중이 고기 맛을 알게 되면 절간에 빈대가 없어진다>고 했다. 권력에 매료되어 쿠데타를 도모하고 있는 사람들의 계획이 성공되는 날 이 나라의 역사는 어느 방향으로 치닫게 될 것인가? 이렇게 역사는 누구도 의식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면 정권은 많은 청사진을 만들어 놓았다. 그 청사진들은 모두가 실현성이 있는 것들이었다. 현실을 무시하고 전시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엉터리로 만들어 놓은 청사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있다가 군사 쿠데타라는 비극에 봉착하게 되지만 이 모든 청사진이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가 눈에 뜨이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을 시행하기는 했으나 지지부진 일이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장면 정권이 일하기 어려웠던 몇 가지의 큰 요인만 들었지만 그 밖에도 일하기 어려운 요인은 얼마든지 있었다. 첫째는 언론의 무정견한 비판이었다. 장면 정권에서 어떤 청사진을 제시하면 언론이라는 것들이 <반대를 하기 위한 반대>만을 일삼았다. 그런데 그놈의 신문 통신이라는 것들이 어쩌면 그다지도 많이 출현하는지 자고 나면 새 신문사요, 새통신사가 생겨났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기관 설립의 자유까지도 허용해 놓고 있었다. 콧구멍만한 사무실 하나에 등사기 한 대 갖다 놓고 <통신사> 간판을 내걸었는가 하면, 인쇄 시설을 갖추지 못한 녀석들이 <일간 신문사> 간판을 내걸어 놓고 장면 정권을 마구 후려치는 신문을 발간하고 있었다. 그런 신문과 통신사야 독자층이라는 것이 별로 보잘 것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신경쓸 것은 못 되었지만, 이 무렵의 언론의 난맥상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을 이런 측면에서 가늠해 보기에는 좋은 예가 될 줄로 여겨 필자가 미국의 실정을 잘 모르는 관계로 여기에서는 장면의 공보비서관이었던 송원영의 지론을 <미국 같은 안정된 나라에서도 새 정부와 의회, 신문은 6개월의 밀월 기간을 갖는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새 정부가 들어서면 6개월 동안은 그 정부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는 줄지언정 두들겨 패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6개월 밀월>은 당연에 속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틀도 마련해 놓기 전에 왜 일을 못하느냐고 나무라거나 다그친다면 그 어떤 기대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언론에서는 연일 장면 정권을 비판하고 두들겨 팼다. 꼭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하지 못했던 분풀이를 장면 정권에 대해서 하는 것 같았다. 장면 정권이 청사진을 마련해 놓고 아직은 일하기 위한 터전을 차분히 닦고 있을 때 구파가 갈라져 나갈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신당 발기 준비위원회의 구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섯 사람을 신파내각에 협조하라고 해서 입각시킨 지 열흘도 못 된 9월 22일의 일이었다. 어차피 구파는 민주당이라는 한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가 쓴 외 보듯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당을 한다고 해도 사실에 있어서는 서로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다만 장면으로서는 완전히 결별을 함으로써 꼭 필요할 때 협력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 한이었을 것이다. 한데, 막상 분당 작업에 들어가자 몇 구파이면서도 구파를 따라 신당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집권당인 신파에 기대고 싶어서 구파를 따라 신당으로 가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소인배였다면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뭐라고 했을까? <이런 덜 돼 먹은 놈들! 그래 동지를버리고 권력을 쥔 놈측에 붙겠다 그거야? 그러고도 정치인이야? 배신을 떡 먹듯이 일삼으면서도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느냔 말야?> 하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매도하려 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구파에서는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 인물에 대해서 입에 담지 못할 원색적인 욕설로 매도하는 무리가 없지도 않았다. 유진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정국의 안정을 위해 민주당 정권에 협력하는 것은 절대로 변절이나 배신이 아니오. 오히려 정국 안정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신파에 남기를 원하는 동료가 있다면 그를 격려해서 장 내각에 협조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오. 그러므로 누구도 그들의 입장을 저지해서는 안 되오."
참으로 기가 막힌 얘기였다. 우리는 참된 민주 정치가의 참모습을 유진산한테서만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속이 넓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파의 인물이 떨어져나가려 하면 소매를 붙들고 만류하기 마련이다. 파벌이 약세화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을 유진산은 파벌의 내각책임제하에서 원내 세력이 과반수가 못 되면 언제나 도각의 위협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신파 내의 소장파가 구파의 소장파와 제휴해서 <장면 내각 도각>을 소리높여 외쳐대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런 판국에 이제는 장면의 정적으로 돌아서게 된 유진산이 때를 만났다 하고 박장대소하기 전에 장면내각의 안정세력 구축을 위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지원사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이런 행동을 감히 범인이 할 수 있겠는가? 유진산이 남고 싶은 사람은 남으라고 하자, 구파 소속 의원 가운데서 25명이나 신파로 옮겨 앉았다. 25명이라는 숫자는 능히 국회의 교섭단체를 구성하고도 남는 숫자였다. 국회법에 따르면 20명 그것이 25명인 것이다. 한 정당에서 25명이나 되는 소속 의원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소맷자락을 붙들기는 커녕 도리어 격려를 해서 보내주었던 것이다. 웬만큼 대범한 인물이라 해도 흉내도 못 낼 만큼 경탄 또 경탄할 수밖에 없는 쾌거를 유진산이 해낸 것이다.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구파에서 신당 발기에 서명을 한 민의원은 65명에 참의원 17명이었다. 그들 구파들은 이제 신당을 발기하기 위해 서명 작업을 끝내고 신당을 만들기 위한 터전을 닦아가고 있었다. 신당 발기를 위한 서명 작업이 끝난 10월 초, 유진산은 반도호텔로 장면을 찾아갔다. 할 수 없었다.
"진산, 고맙소. 진정으로 고맙소."
장면이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되풀이했다. 유진산 덕분에 신파는 25명의 구파 소속의원을 맞아들임으로써 과반수에 육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33석의 과반수는 117석, 구파 25명을 합해서 신파는 115석을 확보해 놓을 수가 있었다. 과반수에서 2석이 모자랐으나 그 2석의 값어치에 대해서는 임기응변으로 정치력을 구사하면 될 판국이었다. 장면이 유진산에게 곡두재배로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진산은 쓰디쓴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오늘 내가 찾아온 것은 치하를 받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몇 가지 건의할 일이 이렇게 전제한 다음,
"첫째, 비상시국 선언을 하고, 둘째는 경제 재건을 위한 광범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며, 셋째는 법치질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등의 세 가지를 건의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유진산이 제의한 첫째 항목 말고 둘째, 셋째는 이미 장면이 혼신의 힘으로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첫째 항목인데 <비상시국 선언>을 할 것 같으면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해야 할 판이었다.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한다는 것은 국민에게 주어진 자유를 속박한다는 얘기가 되었다. 장면이 첫째 항목에 대해 난색을 표명했다. 나가라는 말씀인데, 그렇게 해서 정권 유지를 한다면 자유당 정권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소? 국민에게 모든 자유를 안겨주기 위해서 자유당 독재정권들하고 싸워왔던 게 아니었소? 나는 정권 유지를 못하면 말지 물리적 힘으로 정권을 유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유진산은 딱하기만 했다.
"지금 경찰이 아직도 위축에서 벗어나고 있지를 못합니다. 특히 데모만능의 사태를 그냥 내버려두었다간 어떤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진산, 지금의 사태를 나는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소. 그동안 국민은 너무도 억눌려 왔던 거예요. 그 억눌려 있기만 했던 불평불만을 지금 한꺼번에 쏟아버리고 있는 제풀에 가라앉고 말리라고 봅니다."
"민주주의 원리원칙에서 벗어난 정치는 하지 않겠다 그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이제 우리는 완전히 민주주의를 되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교과서에 기록돼 있는 그대로를 실현시켜야만 합니다. 그것이 나의 정치 이상이기도 하고요."
유진산은 장면의 정치철학이 무엇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비상시국 선언에 대해서는 그 이상 권고를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교과서에 기록돼 있는 그대로를 실현시켜야만 합니다>라고 한 장면의 말은 유진산의 뇌리에 깊숙이 못박혔다. 먼저 그의 뇌리에 떠오르곤 했었다.
정군파 젊은 장교들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곁들여 둘 조그마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소위 <16인 하극상 사건>이라는 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뒤, 이른바 주체들은 이 16인 하극상 사건을 무슨 큰 사건이나 됐던 것처럼 환전을 했는데, 알고 보면 그렇게 대단한 사건도 아니었다. 사건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전보된 최영희가 미국방성 군원국장인 육군대장 파머를 초청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파머의 최영희가 파머를 무엇 때문에 초청했는지는 물어보나 마나한 일이었다. 파머는 한국을 방문하자, 한국에 주둔해 있는 유엔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매그루더하고도 만났을 것은 자명한 일이고, 이때 두 사람 사이에는 한국 정부와 한국군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 얘기가 오고갔던 모양이었다. 이 파머가 한국을 떠날 때 곱게 떠났으면 말썽이 일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귀국길에 오르면서 이례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는 뭐라고 했던가? <정군 계획은 전투경험이 있는 유능한 장성들을 잃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빚게 되고 또 감군 감군 계획은 민주당의 선거공약이었다. 7.29 총선거에 즈음해서 민주당은 10만 명을 감군하겠다고 선거공약으로 내걸었었다. 그러므로 이 감군 계획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일이니까 그다지 문제될 것은 못 되었다. 요는 정군계획이었다. 이 정군 계획은 정부에서 알고는 있었으나 파머가 한국을 방문했다 떠나는 9월 20일 현재 세상에 공표된 바가 없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민주당 정권에서는 정군 계획에 대해서 유엔군 총사령관한테 통고했던 게 아닌가 짐작된다. 그렇지 않고야 극비리에 작업을 하고 있는 정군 계획에 대해서 파머가 알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의 최대의 우방국이자 미국방성의 군원국장이 정군과 감군을 반대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 삼을 것은 못 되었다. 좋게 보아 우정어린 충고라고도 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그것을 육군 참모총장인 최경록이,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원조를 해주었다고 해서 내부문제에 지나친 간섭을 함으로써 한국을 소국으로 생각케 하는 일이 있다면 엄연한 주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민의 국민성이 용서치 않을것이다"라고 반박을 했던 것이다. 파머의 성명 내용이 내정간섭이라고까지 할 것은 못 되었다.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해주고 있는 미국의 국방성 군원국장쯤 되고 보면 총고를 겸해서 그쯤의 말은 할 수 있었다. 듣기 거북하면 한쪽 귀로 듣고 국방성의 일개 국장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미국의 대한 정책이 바뀔 것도 아닌 다음엔 조그마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벌일 것은 못 되었다. 그것을 최경록이 반박성명을 내는 등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 장교들의 관심을 끄는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최영희 장군은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파머 대장을 불러다가 정권의 의미를 왜곡해서 설명한 게 틀림없어. 그런 식으로 국군의 자존심을 망칠 수가 있어?" "그 따위 짓은 미국측의 환심을 사서 개인적인 영달을 꾀하려는 비열한 행위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돼서 파머가 그 따위 성명을 냈는지 이것은 최영희 장군을 최영희를 성토하던 정군파 장교들은 그를 찾아가서 따지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따지자면 어떻게 따져야 하는가? 첫째, 파머 성명에 대해서 연합참모본부 총장의 소신 여하. 둘째, 육군 참모총장의 대 파머 반박성명에 대한 견해 여하. 셋째, 정군문제에 대한 연합참모본부 총장의 소신 여하. 넷째, 연합참모본부 총장의 사퇴에 대한 견해 여하. 이상 네 가지를 따지기로 했다. 이들은 필동이 있는 연합참모본부로 찾아가 최영희를 만났다. 그들은 따지러 갔으니만큼 살기등등해져 있었을 것 같았고 그래서 분위기가 자못 살벌해져 있었을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찾아가기 직전의 격앙되어 있던 분위기와는 달리 그들은 오손도손 아주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파머 성명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질문했도 정군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 중 한 가지만은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연합참모본부 총장 최영희의 진퇴에 대한 것이었다. 육군 중령과 육군 중장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젊은 장교들이 아무리 정군에 대해서 열기를 뿜고 있었다 하더라도 육군 중장을 면전에 놓고 <우리는 각하의 용퇴를건의합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내용이란 쿠데타 주체들은 어째서 이 사건을 마치 무슨 큰 사건이나 저질렀던 것처럼 훤전했던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모두 붙잡혀 들어가서 조사를 받는 동안 얼마간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군 수사기관에 연행돼 간 것은 다음날인 9월 24일이었다. 최경록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승진하면서 차장으로 기용되었던 김형일(金炯一)이 젊은 장교들이 파머 성명을 트집잡아 최영희를 찾아가 따졌다는 보고를 받자 격노해 버렸던 것이다.
"군대란 위계질서가 생명인데 하급자가 상급자를 찾아가 따진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그들을 당장 잡아다가 구속해 버려!"
김형일은 헌병감 심흥선(沈興善)에게 정군운동을 펴려 하는 젊은 장교들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군기확립>이라는 측면에서는 김형일의 조치가 마땅했다. 그러나 그냥 묵살해 버렸다면 군사쿠데타의 구실은 하나를 덜 수가 있었다. <구속당하는 시련까지를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정군운동을 폈던 것이나 이러한 우국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부득불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럴싸한 구실 하나를 더 보태주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군사 쿠데타 그룹의 주체들이 <16인 하극상 사건>을 대단했던 사건인 양 훤전했던 속셈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장면은 흡족했다. 115석이면 그럭저럭 원내 안정세력을 확보한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두 달 동안 겪어야 했던 숱한 고초도 이제는 꿈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원내 안정세력도 구축해 놨겠다. 일을 해야지, 그래 본격적으로 일 좀 해야겠어.) 장면은 새로운 의욕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이미 마련해 놓은 청사진을 하나하나 시행하기만 하면 한국의 장래는 한껏 더 밝기만 할 것 같았다. 민주당 정권이 애쓴 보람으로 한국의 장래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나갈까 하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마냥 가슴이 뿌듯해졌다.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지? 군부에서까지 동요를 일으켜서는 안 될 텐데.......) 장면이 군부문제에 대해서 깊이 걱정해 볼 겨를도 없이 국방장관 권중돈이, "연합참모본부 총장인 최영희 장군이 사표를 냈으니 후임으로 누굴 임명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보고를 해왔다. 장면도 군부의 인물에 대해서는 백지나 다름이 없었다. "후임자에 대해서는 장관이 알아서 하게." 아예 권중돈에게 일임해 버렸다. 최영희가 사표를 제출한 것은 10월 7일이었고, 다음날인 10월 8일 아침에권중돈이 최영희의 후임으로는 김종오(金鍾五)를 임명하겠다고 통보해 추천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바로 그날 사건이 터졌다. 데모대가 국회 민의원 의사당을 점거했던 기가 막힌 사건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회의사당은 민의를 반영하는 정치의 현장이다. 그 현장을 데모대가 점거한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가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위해서 1932년 2월 27일 한밤중에 국회의사당을 불지르는 정치음모극을 연출했던 사건은 있었지만 데모대가 민의의 대면기관인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따위의 사건은 세계 의회 민주주의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처음 있는 사건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한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데모대가 국회 민의원 의사당을 점거하게 된 원인은 서울 지방법원에서 언도하면서 검찰의 공소를 파기하고 발포 관계자인 유충열(柳忠烈)에게만 사형을 언도하고 나머니 피고인들에게 대해서는 거의가 무죄 아니면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벼운 형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6대 사건에 대한 언도공판이 있었던 것은 10월 8일이었다. 재판장은 서울 지방법원 형사 제1부 부장판사인 장준택(張俊澤)이었다. 이제 이날 6대 사건의 피고들에 대해서는 어떤 법률 조항이 적용되었으며 얼마만큼의 형량이 내려졌었는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괄호 안은 검사의 구형 형량이다). -발포(發砲)명령사건 적용. 징역 9월(사형) 조인구(趙寅九):전 치안국장, 무죄(징역 3년) 유충열:전 시경국장, 사형(사형) 곽영주:전 경무대 경찰서 경무관, 징역 3년(사형) 백남규(白南圭):전 서울시경 경비과장, 무기(사형) -장 부통령 저격배후사건 임흥순:전 서울시장, 징역 5년(사형), 추징금 3억 2천333만 6천환 이익흥(李益興):전 내무부 장관, 무죄(사형) 김종원(金宗元):전 치안국장, 무죄(사형) 장영복(張永福):전 치안국 정보과, 징역 8월, 1년간 집행유예(사형) 중앙분실장, 징역 3년(사형) 오충환(吳忠煥):전 서울시경 사찰과장, 징역 8월, 1년간 집행유예(사형) -정치깡패사건 신도환:전 반공청년단 단장, 무죄(징역 7년) 임화수(林和秀):전 반공예술인 단장, 징역 2년 6월, 추징금 3천3백만환(징역 10년) 유 지광(柳志光):화랑동지회, 징역 5년(징역 10년) 박호(朴虎):징역 10월, 단 2년간 집행유예(징역 2년 6월)
임상억(林相億):징역 3년(징역 5년)
강승일(姜昇一):징역 2년 6월(징역 5년)
문장주(文狀柱):징역 2년(징역 5년)
신동호(申東鎬):징역 3년(징역 5년)
주요한(朱耀翰):징역 2년 6월(징역 5년)
김성종(金聲鍾):징역 2년(징역 5년)
오윤석(吳允錫):징역 10월(징역 1년 6월)
김태련(金泰鍊):징역 2년 6월(징역 5년)
홍영철(洪榮喆):징역 1년(징역 3년)
이정식(李政植):징역 2년 6월(징역 5년)1
이경수(李景洙):무죄(징역 3년)
조열승(曺烈承):징역 10월, 단 2년간 집행유예(징역 5년)
김복록(金福祿):벌금 3만환(징역 1년 6월)
최창수(崔昌洙):징역 1년(징역 2년)
*백청일(白靑一):징역 단기 1년 6월, 장기 2년
*원민수(元敏洙):징역 2년
*김재운:징역 2년
*강효상(姜孝相):무죄
(* 이상 5피고에 대한 구형량은 징역 단기 3년, 장기 5년이었음.)
-민주당 전복음모사건
신언한(申彦瀚):전 법무부 차관, 징역 10월, 2년간 집행유예(징역 2년)
이태희(李台熙):징역 10월(징역 4년)
김시현(金始縣):형 면제(징역 8월)
유시태(柳時泰):형 면제(징역 8월)
-소위 제3세력 제거음모사건
이정재(李丁載):징역 10월, 단 2년간 집행유예(징역 10년)
-서울시 및 경기도 선거사범사건
최응복(崔應福):전 서울시 부시장, 공고기각(징역 2년 6월) 면소(免訴)(징역 5년)
강남희(姜南熙):전 서울시경 사찰과장, 징역 2년 6월(징역 5년)
최헌길(崔獻吉):전 경기도 지사, 징역 3년(징역 7년)
이순구(李舜九):전 경기도 내무국장, 무죄(징역 3년)
고종엽(高鍾燁):전 경기도경 사찰과장, 징역 2년(징역 5년)
고상원(高尙遠):전 서울시경 보안과장, 징역 2년(징역 3년)
이상국(李相國):전 치안국 특정과장, 공소기각(징역 3년)
이 밖에 3.15 부정선거 원흉인 최인규, 한희석, 박만원, 박용익, 정존수, 유각경, 이강학, 최성우, 최병환, 신현확, 이근직, 손창환, 김일환, 구용서, 최재유, 임철호, 이재학, 정기섭, 이중재, 김영찬, 김진형, 김영휘, 배제인 등 29명의 피고인에 대한 언도공판은 3월 25일에 개정할 예정으로 있었다. 이들 29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는 9월 26일의 구형공판에서 최인규, 이성우, 이강학, 최병환 등 4피고인에 대해서는 사형이, 그리고 나머지 25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는 10년에서 15년까지의 구형이 내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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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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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예루살렘 함락
예루살렘은 5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함락되었다. 8월 10일, 대신전에 불이 붙었다. 9월 8일, 시내에서의 저항도 겨우 수그러들었다. 9월 20일, 저항은 모두 끝났다. 희생자는 몇 명이나 될까, 타키투스는 사망자와 포로를 합쳐 60만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세푸스에 따르면 포로의 수는 유대 전쟁을 통틀어 9만 7천 명,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태반이 유대인이었지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유월절을 기리기 위해 유대 전역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왔다가 전란에 휘말린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사망자도 로마군 병사에게 살해된 사람보다는 돌림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게 요세푸스의 주장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인데다, 다섯 달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하지만 공방전 당시 예루살렘에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현장 증인인 요세푸스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림잡아 270만 명은 있었다는게 요세푸스의 추정이지만, 당시의 예루살렘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지 않았을까. 어쨌든 희생자가 엄청난 수에 달했다는 것을 확신하다. 로마인은 항복하는 자는 용서하지만 저항을 계속하는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실행했다. 게다가 항복 시기는 '숫양'이 활동을 개시하기 전까지였기 때문에, 그후에 투항한 자는 '용서 대상'에 들지 못하고 전리품과 다름없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에서 열릴 개선식을 위해 젊고 잘생긴 남자만 남겨두고,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 가운데 일부는 노역에 종사하도록 이집트로 보냈지만, 대부분의 포로는 노예가 되어 각 속주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16세 이하의 남녀는 병사들에게 분배되었고, 병사들은 상여금을 받은 셈치고 그들을 노예상인에게 팔아치웠을 게 분명하다. 예루살렘 대신전을 불태우고 파괴한 사건은, 로마가 앞으로는 유대교도에게 유대교의 총본산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의 성인 남자가 어디에 살든 해마다 2드라크마의 봉납금을 바치는 제도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후 봉납금은 예루살렘 신전이 아니라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에 바쳐졌다. 돈의 흐름을 막으면, 그동안 돈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높았던 위세와 힘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본심을 드러낼 수는 없으니까, 겉으로는 다른 명분을 내세웠다. 유대인에게만 부과된 이 세금은 그후 '유대인세'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세금이 라는게 그 '명분'이었다.
예루살렘에만 존재한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었다. 70명의 제사장으로 구성되어 예루살렘의 자치기관 구실을 했던 '70인회'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1개 군단과 거기에 딸린 보조병을 합쳐 1만 명의 병력이 상주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된 로마의 유대 관용노선이 120년 만에 크게 바뀐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이전까지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에만 충실했던 로마인이 처음으로 유대인과 직접 대결한 '유대 전쟁'의 결과였다. 그렇긴 하지만, 로마인이 이처럼 무자비하고 엄격한 조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끝까지 로마에 반항한 유대인뿐이었다. 반항하지 않은 유대인,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대우는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또한 다신교 민족인 로마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유대인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농성하던 이들이 거의 다 자살함으로써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고, 유대 전역에서 반란의 불길이 모두 꺼진 지 3년 뒤인 서기 73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과 오늘날의 텔아비브 사이에 있는 얌니아라는 도시에 유대문화연구소 설립을 허가했다. 유대인에게 문화는 곧 유대의 종교이고, 구체적으로는 율법서 연구다. 로마인은 유대교를 금지할 생각이 없었고, 반유대주의도 아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평소부터 반유대 감정이 강했던 그리스인들이 기세를 올렸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뒷, 티투스가 들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야외극장에서 티투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유대계 주민을 안티오키아에서 추방하라고 진정했다. 그러나 티투스는, 유대계 주민을 추방해도 그들의 조국은 이미 황폐해졌고 또한 달리 받아줄 곳도 없다면서 그리스계 주민들의 요구를 일축했다. 그래도 그리스계 주민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로마의 명령으로 유대계 주민의 권리를 새겨놓은 청동판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티투스는 이 요구도 거부했다. 인종 청소라는 야만적 이데올로기는 로마인과는 인연이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매사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일을 처리하는 로마인의 경향은 군사적으로 제압한 유대에 대해서도 발휘되었다.
유대 북동부-전과 마찬가지로 유대 왕가의 아그리파 2세가 통치하니까, 유대인의 자치지역. 유대 서부의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항구도시-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 사이의 중재자 역할. 이 방식은 유대 이외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외국 도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루살렘과 내륙지역-주민의 태반이 유대인인 이 지방에서는 로마의 직할통치 확립. 요컨대 종전처럼 시리아 속주 총독의 부하인 장관이 다스리는 게 아니라, 유대 속주 총독이 다 스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유대에도 제국의 다른 속주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고속도로인 로마식 도로망이 깔리게 되었다. 이런 정책적 포석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티투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떠났다. 봄을 기다려 배를 타고 로마로 떠나기 위해서다.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전망이 섰을 때 이미 로마로 출발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세 군데 요새가 아직 유대인 수중에 남아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에 있는 마카이로스, 그리고 사해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마사다. 이들 요새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달아난 급진파가 틀어박혀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 요새들을 공략하는 데에는 예루살렘에 주둔시킬 1개 군단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티투스는,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한 나머지 3개 군단을 시리아와 도나우 강 연안의 원래 주둔지로 돌려보냈다. 어쨌든 이번은 공략을 서둘러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헤로디온과 마카이로스 요새는 곧 함락되었지만, 마사다 요새를 공략하는 데에는 3년이 걸렸다. 아녀자를 포함하여 수백 명에 불과한 농성군을 수천 명이 공격하는데도 3년이나 걸린 것은 물론 농성군이 완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이지만, 공격하는 쪽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 전쟁'은 예루살렘 함락으로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기 70년의 '유대 전쟁'은, 반항하지 않는 유대인은 존속할 수 있지만, 반항하는 유대인을 기다리는 운명은 죽음이 아니면 노예 신세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후 반 세기 동안 유대에서 반로마 운동의 불길은 꺼져 있었다. 그것이 다시 불을 뿜는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인 서기 116년이다. 파르티아에 원정 중인 트라야누스 황제의 배후를 찔렀으니 로마가 화를 낸 것은 당연하다. 이때의 반로마 운동은 이따금 제압되긴 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까지 끈질기게 이어진다. 서기 130년, 유대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 전역을 군사적으로 제압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로마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아무도 취한 적이 없는 강경책을 택한다. 예루살렘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고, 앞으로는 유대교도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한 것이다. 할례도 금지했고, 범죄자에게 할례를 하는 방식으로 유대교에 대한 멸시를 분명히 했다.
조국을 잃은 유대인들이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것을 두고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이산은 서기 70년에 티투스가 아니라 서기 130년에 하드리아누스의 강경책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이다. 오현제의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단행한 정책의 산물이다. 그래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교를 금지하지는 않았고,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사회가 인정받고 잇던 그들만의 독특한 관습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로마는 로마에 반대하지만 않으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강경책이 주효했는지, 그후 유대인의 반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작년(1998년)에 로마의 포로 로마노 남쪽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 앞에서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가 이스라엘 건국 5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벌였다. 로마 제국은 멸망했는데 유대인은 아직도 건재해 잇다는 의미를 담은 축하 행사였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유대인의 존속을 축하하고 싶다면 티투스 개선문 앞이 아니라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판테온 앞에서 축하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무대 효과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건축상의 가치는 별문제로 하고, 판테온은 타민족의 신도 용인하는 다신교 정신을 나타낸 건물이다. 타민족의 신을 용인하지 않는 유대교의 축하 행사장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역시 티투스 개선식을 본뜬 돋을새김- 병사들이 7개의 촛대를 비롯한 유대교도의 성물을 어깨에 메고 행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남아 있는 개선문 앞에서 축하 행사를 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기독교도가 순교한 적이 없는 콜로세움에서 해마다 로마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자축하는 교황 미사를 올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유대를 정복한 뒤, 유대 정책은 기원전 47년에 카이사르의 유대 민족 처우개선 정책으로 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 칼리굴라를 제외한 로마의 역대 황제들을 일관되게 관용 노선을 추구했지만, 그것도 서기 66년부터 시작되어 서기 73년에 마사다 함락으로 끝난 유대 전쟁 때문에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하지만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도, 실제로는 유대교도에 대한 '관용'의 내용이 전보다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종교의 자유는 인정한다. 유대교 교리에 따른 유대인의 독자적인 생활 관습도 모두 인정한다. 다만 여기에는 '로마 제국에 반항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공략도, 서기 130년대에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강제 추방한 것도 반란 진압일 뿐 신앙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남의 신앙을 인정하는 다신교 민족인 로마인으로서는 자기모순이 전혀 없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유대교는 남들이 믿는 신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일신교다. 이 가르침을 받드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살든 살지 않든, '보편'을 추구하는 로마 제국 안에서 '특수'이기를 바라고, 계속 '특수'로 남아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대교도는 로마 제국 안의 이방인이기를 바랐고, 마지막까지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같은 일신교도이면서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얼마 전부터 유대교와 차별성을 분명히 한 기독교도는 이것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은 로마 제국안의 '특수'가 아니라 '보편'으로 바뀌려 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서기 3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표면에 드러나는 현상이니까, 그 시대를 다룰 때 상세히 서술할 작정이다. 어쨌든 서기 1세기 후반에 일어난 유대 전쟁은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끝났기 때문에 더욱더 동시대 로마인의 관심을 유대민족에게 돌리는 효과가 있었다. 역사에서 이 사건을 다룬 타키투스는 전쟁을 서술하기 전에 유대 민족의 역사를 모세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 자체의 서술보다 그 이전의 역사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 정도다. 반대로 유대인의 역사책에서는 자기 민족의 역사만 기술하고, '적' 로마에 대한 서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특수'를 표방하는 민족의 특징이 아닐까. 그런데 타키루스는 '적'을 알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유대교를 "미신일 뿐 종교는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사전에는 미신이 '잘못된 신앙'으로 풀이되어 있다. 남이 믿는 것을 인정해야만 올바른 신앙이라고 확신하는 다신교도인 로마인이 보기에 남이 믿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 일신교는 잘못된 신앙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1,800년이 지난 1870년, 역사가 부르크하르트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이렇게 말했다.
"콘스탄티누스에서 테오도시우스에 이르는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않았다면, 로마인의 종교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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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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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호원사지 - 호랑이와 인간의 슬픈 사랑 전설
[경주 홍륜사]
처녀로 변한 호랑이
삼국유사의 신주편에 나오는 '김현감호' 설화는 한국 호랑이 민담의 전형이다. 호랑이는 아름다운 여자로 변신하여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인간인 남자와 호랑이인 여자의 사랑은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비극적인 종말을 갖는다. 이런 식의 도식으로 짜여진 호랑이 민담은 근래까지 갖가지 줄거리로 변용되어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왔다. '김현감호' 설화는 신라 원성왕시대(785~798)에 서라벌의 서쪽 내를 배경으로 펼쳐진 슬픈 사랑의 얘기이다. 이 설화의 현장은 경주 동북편에 있는 황성공원 일대이다. 황성공원의 서편으로는 북천이 흘러 서천과 합류된다. 서천변 현 경주공고 자리에는 흥륜사가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김현이라는 청년은 흥륜사에서 호랑이로 변신한 처녀와 만난다. 신라의 풍속에 해마다 2월(음력)이 되면 초8일부터 보름까지 사람들이 흥륜사의 탑을 도는 풍습이 있었다. 원성왕 시대에 김현이라는 청년이 밥 깊도록 탑을 돌았다. 그때 아름다운 처녀가 그와 함께 염불하면서 탑을 돌고 있음을 그는 보았다. 김현은 가슴이 떨림을 느꼈다. 새벽까지 둘이서 탑을 도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사랑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새벽에 처녀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김현은 처녀를 따라가려고 요청했으나 처녀는 사양했다. 그러나 김현의 끈질긴 요청에 처녀는 할 수 없이 그를 집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호랑이굴이었다. 처녀는 김현을 구석진 곳에 숨겼다. 조금 있자 호랑이 세 마리가 으르렁대며 집 안에 들어오더니 "집안에 비린내가 난다. 마침 요기 때가 되었으니 다행이군"하며 덤벼들려고 했다. 그들은 처녀의 오빠들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너희들이 해치기를 즐기니 마땅히 너희 중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겠다."
죽음으로 보답한 호랑이
이에 처녀는 김현에게 말했다. "숨김없이 말씀드리지요. 저는 호랑이입니다. 비록 저와 낭군(김현)은 같은 종류는 아니나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나누고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이제 세 오빠의 악은 하늘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벌을 제가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긴 싫습니다. 당신의 칼에 죽겠습니다." 그러고는 내일 시내에 들어가 사람들을 해치면 나라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으므로 임금이 반드시 높은 벼슬로서 사람을 모집하여 호랑이를 죽이려 할 것이니, 김현더러 겁내지 말고 자기를 따라 성 북쪽 숲속에 오라고 했다. 그러나 김현은 주저했다. 비록 짐승이긴 하지만, 서로는 부부의 의를 맺은 사이가 아닌가. 김현은 "내 어찌 배필의 죽음을 팔아서 한 세상의 입신출세를 바라겠느냐"고 거절했다. 그러나 처녀는 그것은 하늘의 뜻임을 알리고 죽고 나서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 사후의 좋은 과보를 얻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김현과 처녀는 그날 밤을 새도 된다, 안 된다 하며 옥신각신하다가 새벽이 되어 울며 헤어졌다. 다음날 과연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와 마구 사람을 물었다. 누구도 호랑이를 막지 못하자 원성왕은 "누구든지 범을 잡는 사람은 2급의 벼슬을 주겠다"라고 공표했다. 김현은 그 일에 자원했다. 김현이 호랑이와 약속한 숲에 들어가자 범은 이내 여자로 변해 어젯밤의 언약을 확인하고 "오늘 제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모두 흥륜사의 솔잎을 상처에 바르면 곧 나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현은 차마 죽이지 못했다. 그러자 처녀는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처녀의 시체는 곧 범으로 변했다. 신라인들은 그의 용기를 치하했다. 김현은 벼슬을 하게 되자 서천가에 호랑이를 위해 절을 짓고 호원사라고 이름지었다. 이 설화와 함께 일연은 나쁜 호랑이의 설화를 덧붙여 대비해 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연은 짐승도 이처럼 사람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인간으로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더불어 김현이라는 평범한 사람이 지성으로 탑돌이를 함으로써 큰 보답을 받았음을 강조하여 탑돌이의 공덕과 인과응보의 불교사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어쨌든 짐승과 사람간에 사랑이라는 주제로 관계를 맺어놓은 이 설화는 그 비약적인 얘기구성과 비극적인 종말 때문에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호원사의 위치
이 설화에 나오는 호원사는 어디였을까. "동경잡지"에는 그 절이 서천가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 이상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절의 위치는 현재 확실하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 황성공원 서편의 절터가 호원사지가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황성공원 부근에는 5층 석탑과 김후직의 묘 등 유적들이 많다. 일제침략 당시 학자들은 호원사지도 황성공원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황성공원에서 남쪽으로 2백m 지점(황성동 403의 1번지)에는 절터가 있다. 부서진 탑조각과 석재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서 꽤 큰 절이 이 자리에 있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탑은 두 개의 거대한 옥개석만이 나란히 엎어진 채로 남아 있다. 절터는 민가로 바뀌었다. 이 자리는 30년 전에 과수원을 일구면서 집이 들어섰다고 한다. 10여 년 전에 과수들을 베어내어 절터는 콩밭으로 바뀌었다. 이 자리는 뒤로 금강산이 펼쳐지고 북쪽에는 황성공원의 독립산이 서 있으며 앞으로는 북천이 서천에 합류되는 것이 보이는 곳이다. 내 건너편으로는 경주 시가지를 지나 옛 흥륜사지 쪽이 바라보인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보면 흥륜사의 전탑이 눈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호랑이와 김현의 사랑은 금강산록에서 황성공원 기슭을 잇는 무성한 송림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북천 건너편에도 역시 송림이 우거졌다고 전해져 냇물과 잘 어울리는 이 일대의 절경은 짐승과 인간 사이의 기막힌 사랑의 배경으로 멋지게 떠오를 수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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