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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9호 - 2024.07.15 월요일(음력 : 06.10)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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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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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거짓말은 마른 땅 위에 오른 큰 물고기와 마찬가지. 그것은 안달을 하며 날뛰어 몹시 성가시지만 당신을 해칠 수는 없다. 가만히 놓아 두면 제풀에 죽고 마는 법. ― 조지 크랩(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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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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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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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봬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교사들이 국어 시간에 받아쓰기 시험을 보게 한다. 받아쓰기를 시키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국어의 맞춤법을 알려주기 위함인데, 한글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은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각 형태소의 본 모양을 밝혀 적는다는 말인데, 예를 들어 ‘꽃이’가 [꼬치]로 소리 나지만 이를 소리대로 ‘꼬치’로 적는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본 형태소 모양대로 명사인 ‘꽃’과 조사인 ‘이’를 분리해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대생들이 남자 친구에게 가장 실망했을 때가 맞춤법에 틀린 내용으로 문자 메시지를 받았을 때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것처럼 맞춤법은 교양인이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맞춤법 실수가 난무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감기 빨리 낳으세요” “진짜 어의가 없다” “이 정도면 문안하죠” “있다가 뵈요” 같은 내용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기 빨리 나으세요” “진짜 어이가 없다” “이 정도면 무난하죠” “이따가 봬요”가 바른 표현이다.
특히 “있다가 뵈요”는 가장 흔한 맞춤법 실수인데, ‘있다가’는 ‘머물렀다가’의 의미이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이따가’로 고쳐야 하고 ‘뵈요’는 어간 ‘뵈-’ 뒤에 연결어미 ‘-어’가 빠졌기 때문에 ‘뵈어요’로 적거나 줄여서 ‘봬요’로 적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실수로 “너무 오래 되서”, “명절 잘 쇠라”, “바람을 쑀어요” 등이 있는데, ‘되어서’, ‘쇠어라’, ‘쐬었어요’로 적거나 줄여서 ‘돼서’, ‘쇄라’, ‘쐤어요’로 적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가없는’ 어머니 은혜
어버이날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다.
이 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로 끝난다. ‘가이 없어라’는 요즘 잘 쓰는 말이 아니라서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가엾어라’를 곡조에 맞게 늘여 부르느라 ‘가이 없어라’가 된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런 해석도 일리가 있는 것이 자식을 위해 밤낮으로 희생하는 어머니 모습이 딱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하니 가엾다는 말로도 뜻이 통한다.
‘가이 없다’는 옛말에 쓰이던 형태가 굳어진 것으로 현대 국어에서는 비표준어이다. 표준어로는 ‘가없다’인데, 이 말은 ‘끝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노래 가사는 어머님의 희생과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이 크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가없다’의 ‘가’는 ‘바닷가, 강가, 우물가’ 등에 쓰인, 가장자리를 뜻하는 ‘가’이다. 옛말에서 이 ‘가’는 ‘ㄱㆍㅅ’ 또는 ‘ㄱㆍㅿ’이었는데, 나중에 받침소리가 없어지면서 ‘ㄱㆍ’가 되었다가, 다시 오늘날의 ‘가’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옛 문헌에는 ‘끝이 없다’는 뜻으로 ‘가없다’와 ‘가이 없다’가 둘 다 나타난다. ‘가이 없다’의 ‘가이’는 ‘가’에 주격조사 ‘-이’가 붙은 말이다. 받침이 없는 말에는 주격조사 ‘-가’가 결합하므로 ‘가가 없다’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근대 국어 이전에는 주격조사에 ‘-이’만 있었고 ‘-가’는 없었다. 그래서 ‘가이 없다’는 말이 생겨난 것인데 이것이 노랫말 같은 데 일부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이하선염’과 ‘귀밑샘염’
봄철을 맞아 예년처럼 어린이들 사이에 유행성 이하선염이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이 병은 전통적으로 ‘볼거리’라고 하는 것으로, 귀 밑의 침샘에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다.
그런데 ‘이하선’은 무슨 뜻일까? 이는 ‘耳下腺’ 즉 ‘귀 밑의 샘’이라는 말이다. ‘샘’은 우리 몸에서 물질을 분비ㆍ배출하는 조직이다. 한자로는 ‘腺(샘 선)’인데 ‘누선, 갑상선, 내분비선, 전립선’ 등에 붙어 쓰인다. 그런데 ‘누선’을 ‘눈물샘’이라고 하듯이 ‘이하선’을 쉬운 말로 바꾼 것이 ‘귀밑샘’이다. 아직까지 더 익숙한 말은 ‘이하선염’이지만 적잖은 신문에서 ‘귀밑샘염’을 괄호 안에 함께 쓰는 것을 보니 당분간 두 단어의 경쟁 관계가 이어질 것 같다.
한편 ‘이하선염’은 어떻게 발음할까? 일부 방송에서 [이하서념]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올바른 발음은 [이ː하선념]이다. ‘솜-이불, 내복-약, 늑막-염’ 등 합성어 및 파생어에서 앞말이 자음으로 끝나고 뒷말의 첫음절이 ‘이, 야, 여, 요, 유’인 경우에는 ‘ㄴ’ 음을 첨가하여 [니, 냐, 녀, 뇨, 뉴]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즉 [솜니불, 내봉냑, 능망념]으로 발음한다.
‘늑막염’처럼 ‘-염(炎)’이 결합한 병명은 거의 모두 이 원칙에 따라 ‘ㄴ’을 첨가하여 발음한다. 즉 ‘복막염, 결막염, 관절염, 방광염’ 등의 표준 발음도 [봉망념, 결망념, 관절렴(관절념→관절렴), 방광념]이다. 그런데 ‘늑막염’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능망념]보다 [능마겸]이라는 답이 더 많다. 그만큼 이 단어들을 ‘ㄴ’ 첨가 없이 발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표준 발음을 익혀 둘 필요가 있다. ‘귀밑샘염’도 [귀믿쌤념]으로 발음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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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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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크레이지 배가본드 - 천상병
1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담배를 빤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물을 마신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 꽁초 토막.
∼∼∼∼∼∼∼∼∼∼∼∼∼∼
3
문득, 영혼안에 외로운 별이
바람처럼 일은 회한에 피어오른다
바다 1 - 정지용
고래가 이제 횡단 한 뒤
해협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흰물결 피여오르는 아래로 바둑돌 자꼬 자꼬 나려
가고,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종달새...
한나잘 노려보오 훔켜잡어 고 빨간살 뻐스랴고.
미역닢새 향기한 바위틈에
진달래꽃빛 조개가 해ㅅ살 쪼이고,
천제비 제날개에 미끄러져 도-네
유리판 같은 하늘에.
바다는-속속 드리 보이오.
청대ㅅ닢처럼 푸른
바다
봄
*
꽃봉오리 줄등 켜듯한
조그만 산으로-하고 있을까요.
솔나무 대나무
다옥한 수풀로-하고 있을까요.
노랑 검정 알롱 달롱한
블랑키트 두르고 쪼그린 호랑이로-하고 있을까요.
당신은 (이러한 풍경)을 데불고
흰 연기 같은
바다
멀리 멀리 항해합쇼.
~~~~~~~~~~~~~~~~~~~
더러운 香爐(향로) - 김수영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와같이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같이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
그리고 모든것에서부터
나를 감추리
검은 철을 깎아 만든
고궁의 흰 지댓돌 우의
더러운 향로 앞으로 걸어가서
잃어버린 애아를 찾은 듯이
너의 거룩한 머리를 만지면서
우는 날이 오더라도
철망을 지나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보다는 훨씬 급하게
스쳐가는 나의 고독을
누가 무슨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잡을 수 있겠느냐
향로인가보다
나는 너와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원인을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한 것은 과오였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하여보는
향로가 이러하고
내가 그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살아있는 향로
소생하는 나
덧없는 나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티끌도 아까운
더러운 것일수록 더한층 아까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 취하여보는
이 더러운 길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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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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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2편 중도의 세계
제1장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
2. 색공의 세계
1) 색즉공(色卽空)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로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 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그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2) 4차원의 세계
또 요즘 흔히 4차원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4차원(四次元)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의 공간 세계는 3차원의 세계인데 여기에 시간의 차원을 더하면 4차원이 됩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 볼 때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이 존재하지만,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4차원의 세계에서는, 보기를 들어 금고 속의 돈을 금고 문을 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으며, 또한 문을 닫아 둔 채로 문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해인사에 앉아서 천리만리밖에 까지도 갈 수 있는 자유자재한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4차원의 세계를 신통자재한 홍길동의 이름을 따서 '홍길동의 세계'라고표현하고 있습니다.
4차원의 세계가 처음 제창된 것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이지만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완전한 체계를 세워 공식화한 사람은 소련의 민코프스키 H.Hinkow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보기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라고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 변을 떠나서 양 변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곧,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 초심리학
시간과 공간이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이른바 4차원의 세계인데, 이것은 결코 가공의 상상 속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자꾸 개발하여 가면 실제로 그런 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런 행동을 할 수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이 방면에 대해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심리학에서는 초심리학 Parapsychology이라는 분야에서 이것을 연구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한 많은 실증적 연구 보고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타임지에서 이에 관한 특집기사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는 100여 개 대학에서 초심리학에 대한 정식 강좌를 열어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 소련은 유물론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160억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여 4차원의 과학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군사 방면에서 잠수함이 바다 깊은 곳에 잠수했을 때 정신력으로 그 잠수함에 어떤 지시를 해보면70퍼센트는 성공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정신력으로 무슨 지시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70퍼센트의 성공율이라면 대단한 것입니다. 한편, 소련 땅의 서쪽 끄트머리인 모스크바와 동쪽 끄트머리인 블라디보스톡 사이에서 정신력에 의한 통신을 시도하였더니 서로 통하였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습니다. 더우기 이 정신력에 의한 통신이 오히려 무선(無線) 통신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하고 전달이 빠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능력이 있어서 이를 자꾸 개발하면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실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무한한 정신력
무한한 정신력을 이용한 초능력의 보기는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영국의 캐논 경 Sir Alexander Cannon 의 캐논보고서에서 그런 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디 정신과 의사인데 영국 국가에서 주는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 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의 다섯 나라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잠재력 The PowerWithin]이란 제목의 캐논보고서에서 소개한 몇 가지 실험에 대하여 여기에서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이런 실험을,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서, 때로는 커다란 홀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거나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은 눈을 감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눈알이 빠져버린 사람은 더더구나 볼 수가 없습니다. 눈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볼 수 있으며, 눈 감고 무엇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 지닌 본디의 능력, 본디의 시력은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눈을 떠야만 볼 수있고 감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은 의식 세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눈을 뜨거나 감거나, 눈이 있거나 없거나에 관계가 없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두 눈이 빠져 버린 사람도 무엇이든 다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본래의 시력이라고 캐는 경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두 눈에 철판을 대고 수건으로 겹겹이 둘러 싸맵니다. 그런데도 무엇이든 다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모두 알아 보는 것입니다. 철판을 눈에 대고 보는데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천안통(天眼通)이라고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보면 천안이 가장 뛰어난 아나율(阿那律 ; Aniruddha) 존자라는 스님이 계시는데 그는 수행할 때에 너무 졸음이 많이 와서 그것을 없애려고 전혀 잠을 안 자고 공부를 계속하다가 결국 두 눈이 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눈 곧 육안(肉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에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이 열려 삼천대천세계, 백억세계를 손바닥의 구슬처럼 환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아나율 존자의 천안에 견주면 요즈음의 200인치 망원경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서 아나율 존자는 비록 육신의 눈은 없지만 천안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캐논 경은 눈이 없거나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되어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고 오직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면 눈이 있고 없는 것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힘을 사용하면 남의 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합니다. 캐논 경은 이것에 대해서도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말이나 글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머리 속에서 생각으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캐논 경이 말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머리속에서 자기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으면 캐논 경은 그 사람의 직업을 말하고 또 나아가서 현재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일까지도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어김없이 다 맞는다 고 합니다.
결국 이로 미루어 볼 때 남의 마음뿐만 아니라 미래도 알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달을 향하여 쏜 로케트나 우주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개척한 결과 우주선을 개발하여 이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달나라에까지 간 것이지, 미국사람만 타고 오라고, 소련 사람만 타고 오라고 하나님이 보내준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있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더 큰 능력을 개발하게 될지 우리 인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또 다른 실험으로 육체적으로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시체를 넣는 곽(棺)처럼 생긴 나무상자를 준비하고 상자의 앞, 옆,위,아래의 사방으로 구멍을 뜷어 놓고 이상자 속에 피실험자가 누우면 뚜껑을 덮고 뚫어 놓은 구멍 속으로 칼을 찌릅니다. 그 상자는 보통사람의 크기보다 약간 작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그 속에 들어가 있는한, 결코 칼날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오장육부가 모두 칼날에 구멍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심지어 심장에 꽂힌 칼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 칼이 오르락내리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칼을 빼고 상자를 열어 보면 그 안의 사람에게는 아무 상처도 없는 것입니다. 칼을 찌를 때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칼 상자보다 더 놀랍고 사람의 초능력의 깊이를 깨우쳐주는 실험으로 생매장(生埋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실험에서는 피실험자가 죽은 듯이 삼매에 들어갑니다. 의사가 검진하여 맥박도 끊어지고 호흡도 끊어지고 뇌파 검사에서 뇌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을 단단히 밀납 포장하여 땅을 파서 묻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아둘 것은 설사 죽지 않았다고 하여도 사람은 서너 시간만 땅에 묻어 두면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한 시간이 아니라 불과 수 분이 지나도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는 시체를 묻어 놓고는 며칠, 몇 달 또는 일년 동안이나 계속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년이 지난 뒤에 미리 정해놓은 시간에 파 보면 일년 전에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받은 그 사람이 옷을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이 생매장 실험을 사람이 많이 모인 홀에서 실시 하였습니다. 무대 위에 모래를 수십 짐을 져다놓고, 그 속에 사람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기다렸습니다. 과연 미리 지정한 대로 15분이 지나자 모래더미에 묻어둔 사람이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귀신도 탄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험들을 통하여 볼 때 인간의 근본 정신은 육체를 떠나 활동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호흡이 끊어지고 맥박도 뇌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는데 어떻게 시간을 알고 깨어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근본적인 정신 작용은 뇌신경 세포의 활동에 관계없이 독립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언제나 깨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본디 무의식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죽지 않습니다. 설사 몸뚱이가 죽어 화장을 한다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없어져도 영혼은 독립해 있어서 윤회를 하고 환생을 하는 것입니다.
5) 정신감응
인간의 정신 능력은 한 개인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나니라 타인에게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브로체프스키라는 소련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정신과 정신 간에 서로 통할 수도 있다는 데에 착상하여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피실험자가 있는 곳에서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이 피실험자가 자기 집으로 오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만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로체프스키의 실험에서 피실험자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제 집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듯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피아노 치던 것을 멈추고 밖으로 몇 번 들락 날락하더니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감시하던 사람들이 따라가 보니 과연 그 여자는 자기를 오도록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이 었습니다. 간절히 했던지 그만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맑은 날에 우산을 들고 나오라고 상대방에게 정신 반응을 보내면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우산을 갖고 나오는 실험까지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 실험으로 한쪽에서 어떤 생각을 강하고 간절하게 하면 그 정신의 반응이 상대편에게까지 도달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을 텔레파시 Telepathy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정신감응(精神感應)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신감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일본에서 의사들이 한 실험입니다.
흰쥐 스무 마리에게 장질부사균을 치사량으로 주사해 놓고, 그 가운데 열 마리는 약으로 치료하고 나머지 열 마리는 정신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약으로 치료한 흰쥐는 모두 죽었는데 정신요법으로 치료한 열 마리 중에는 세 마리가 죽고 일곱 마리가살았다고 합니다. 또 죽은 세마리도 해부를 해보니 회복기에 들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사람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도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동물에게 최면술을 거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는 작용하지 않는다면 최면술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악어나 사자, 호랑이 따위의 동물에게 최면술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은 써커스나 묘기시범에서 쉽사리 알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정신적으로 동물에게 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면 옛날 우리나라의 도인들이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 전혀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정신반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릴때 많이 해보던 실험이기도 합니다. 실 끝에 돌이나 쇳덩어리를 매달고서 그것에 정신을 한참 동안 집중시키고 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움직이라 하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앞으로, 뒤로, 원형으로 모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것을 관념운동이라고 합니다. 또 유리겔라라고 하는 사람이 정신반응으로 숟가락을 휘게 하고 시계를 정지시키는 실험을 하는 것이 보도된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정신감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한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6) 분신
이 밖에도 가장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분신(分身)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백, 수천의 장소에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합니다. 지구에 계시면서 저 세계에도 가고 이 세계에도 옵니다. 또 신라시대의 원효스님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6처열반(六處涅槃)을 하였습니다. 곧 여섯 곳에서 똑같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분신'이라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해인사에 있는 사람이 분신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진주에도 한 사람, 부산에도 한 사람, 서울에도 한 사람씩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한 날, 한 시에 열 명도 되었다가 백 명도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실험에 의해 그런 분신에 성공한 예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요기하는 요기 Yogi들이 분신을 해보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7) 육근호용(六根互用)
불교에 육근호용(六根互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을 서로 바꾸어가며 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귀는 듣는 것인데 귀로 보고 또 눈은 보는 것인데 눈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육근호용이라고 합니다. 어제 어떤 신문에는 중국 사천에 사는 열한살 된 어린이가 모든 것을 귀로써 본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눈을 아무리 가려놓아도 무엇이든지 다 보며, 또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이는 귀로써 모든 것을 보는데, 이것은 밝고 어두운 것도 사실은 없음을 말해 줍니다. 눈으로 보든 귀로 보든 그것은 문제가아닙니다. 눈으로 본다고 해도 되고, 귀로 본다고 해도 됩니다. 오장육부가 다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그 아픈 데가 어디고 빛깔이 어떤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위의 한두 사람만이 본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마다 보도된 것입니다. 귀로써 보고 눈으로 듣는다(耳見眼聞;이견안문)는 이 말은 본래 불교에 있는 말입니다. 오조 법연 선사도 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지 실제로 그렇게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번뇌 망상으로 육근이 서로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 도달할수 없을 뿐이지, 실제로 부사의(不思義)한 해탈경계를 성취하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그런 경계가 나타나 육근이 서로서로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육근호용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근호용이 되어 모든 것에 무애자재한 경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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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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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9. 장면 정권 출범 (1/2)
장면이 새 정부의 국무총리로 인준을 받음으로써 허정의 과도정권도 이날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허정은 8월 19일 이날,
"오늘 새로 선출된 국무총리에게 나의 과도적 소임을 대과 없이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물로나는 소감을 피력했지만 과도정권을 이끌어 나왔던 허정의 팔자도 따지로 보면 기구하다 할수밖에 없었다. 허정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았던 것은 4월 과도정권의 시기로 치면 꼭 116일 집권한 셈이 된다. 이 사이에 그는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두 번 내놔야 했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어 이것을 공고하게 되자 개정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 권한대행은 국회의장인 곽상훈에게 물려줘야만 했었다. 개정 헌법에는 <대통령 유고시에는 국회의장이 그 권한을 대행>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는 다행히 곽상훈이 국회의장직을 내놓고 허정으로 하여금 대통령직을 대행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다시 또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또다시 그 대행직을 내놓아야 했었다. 허정으로서야 그까짓 대통령직에 머물러 역사의 창조 과정에서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보니 한 가닥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그가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재선거를 실시하게 된 종로 갑구의 보궐선거에 출마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물리쳤던 것도 정치 와중에서 겪어야 했던 권력 무상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건 그렇고 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획득함으로써 제2공화국은 탄생되었다. 역사의 한 장은 막을 내렸고, 이제 새로운 역사의 장이 막을 연 것이다. 장면이 각부 장관을 임명해서 국무원만 구성이 되면 희망찬 내일을 향해 닻을 올리면 되었다. 그런데 이것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장면이 막상 국무원을 구성하려고 하자, 그의 앞에는 넘어야 할 험준한 산이 잇달아
"총리, 나에게 내무를 맡겨 주십시오."
"총리, 나는 법률가이니만큼 나에게는 법무를 맡겨 주십시오."
"총리, 우리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경제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차대한 문제를 내가 책임지고 수행할 테니, 나한테는 재무부를 맡겨 주십시오."
박순천, 김상돈, 김선태 하면 모두가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해서 앞장서 온 사람들로, 그들은 아예 장면의 면전에서 장관 감투를 요구했다. 소장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다음날, 즉 8월 20일 이철승, 김재곤, 김재순, 신중하, 함종빈, 우희창 등은 중앙청 국무총리실로 장면을것을 요구했다.
"소장파한테 두 자리를?"
장면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우리 소장파한테도 응분의 안배를 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소장파에선 어떤 자리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요?"
그 물음에 대해서는 김재순이 대꾸했다.
"박사님께서도 익히 잘 아시고 계시겠지만 지금 군부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군부를 휘어잡자면 군부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이 국방부 장관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철승 의원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국방의원으로 있었으니 말씀입니다."
살펴보더니 결연히 말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원내 안정세력 확보요. 그러니 철저히 논공행상(論功行賞)할 자리가 없소."
논공행상을 할 자리가 없다는 것은 소장파를 입각시킬 수 없다는 거절의 표현이었다. 장면은 소장파의 입각을 거부할 경우 그들이 반발할 것이라는 것을 십분 숙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해서 그들에게 각료 자리를 배분해 줄 수는 없었다. 구파에서도 개별적으로 입각을 희망해오는 인물이 없지는 않았다. 신각휴(申珏休)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겠다"고 요청해 왔다. 여기에 대해서 장면은,
"농림부는 어렵고 체신부나 보사부를 맡겠다고 한다면 고려해 보겠다"고대답했다.
그러나 신각휴는 농림부가 아니면 싫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구파 골수분자라 할 수 있는 그가 어째서 신파 내각에 입각하기를 희망했던 것일까? 이때 그의 나이 65세,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자 <장관님> 소리라도 한번 들어보고 인생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구파에서 이탈하려 했던 것일까? 장면을 괴롭게 만드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이북 출신자를 쓰지 말라>는 압력이었다. 장면의 귀에 대고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손바닥만한 땅덩어리에 살고 있으면서 이북, 이남을 가리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태조(李太祖) 성계(成桂)의 유훈 10조에도 <관서 사람을 쓰지 말라>는 조목이 하나 들어 있다. 이씨 왕조 5백년을 통해서 이 유훈은 금과옥조로 지켜져 왔다. 그 때문에 관서지방 인물치고 벼슬길에서 큰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불행한 일이었는데 20세기 후반에서 또 어째서 그런 악폐를 재현하려 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북 사람, 곧 관서지방 사람들이 욱하는 성미에다가 반골 정신이 강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해방 뒤, 그 욱하는 성미가 숱한 암살사건을 빚어내었다. 여운형을 암살한 이필현(李弼顯:일명 韓指根), 장덕수(張德秀)를 암살한박광옥(朴光玉),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安斗熙), 김창룡(金昌龍)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허태영(許泰榮), 부통령 장면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김상붕(金相鵬) 등은 공교롭게도 모두 관서, 특히 평안도 출신자들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북 사람을 쓰지 말라>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장면을 괴롭히는 문제가 또 있었다. 그것은 그의 참모들의 지나친 용훼였다. <××부에는 갑이 적격자이고, OO부에는 을이 적격자니 꼭 이 사람들을 쓰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장면이 달가워하거나 말거나 일선에서는 오위영(吳緯泳)과 김영선, 주요한, 조재천 등이 1급 참모였고 정계 이면에서는 신부 김철규(金喆圭)와 한창우(韓昌愚) 두 사람이 1급 참모들이었다. 그들은 장면의 자문에 응한다던가 건의에 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얍력>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면의 주변 환경이 그런데다가 그가 처해져 있는 정치적 여건이 단독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더 조각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원내 안정세력을 유지한다?) 장면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이것이었다. 원내 안정세력을 유지하자면 하는데 신파만으로는 2분의 1일 조금 웃도는 의석수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장면은 구파하고 제휴해서 내각을 구성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구파를 내각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는 집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정치인도 인간이다. 때로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공인(公人)이다. 공인의 감정적인 처사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가 없다. 공인의 감정적인 처사는 국가와 국민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슬기가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민주당 구파의 처사를 평가한다면 이 무렵의 민주당 구파는 공인으로서의 자세가 낙제점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국가라는 전체를 생각하기에 앞서 구파라는 부분의 이익에만 집착해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제 집권의 꿈이 깨어진 구파가 그들의 파벌의 이익을 위해서 어떻게 움직였나를 살펴보자. 집권의 꿈이 깨어졌다고 해서 구파는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한숨만 내쉬고 있지는 않았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이 품고 있던 한결같은 계산이었고 아니었다. 도각(倒閣), 그것이었다. 내각을 쓰러뜨리면 되었다. 장면 내각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싫다고 해도 정권은 구파한테로 굴러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어떻게 해야 장면 내각이 쓰러질 것인가? 구파는 그것을 위한 1차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획득한 8월 19일 오후 늦게 그들 구파의 23인위원회는 관훈동의 민모 씨의 집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총선거 때는 선거에 대비해서, 국회가 구성된 후에는 집권을 위해서 구파의 작전참모부 역할을 맡고 있던 23인위원회는 이제는 <도각>을 위해서 그들의 머리를 쥐어 짜내기 시작했던 말했다.
"이제 우리는 패배를 현실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내 생각은 그렇소. 건전한 보수 야당제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신파하고는 완전히 결별하고 무소속과 제휴해서 야당으로 새 출발하는 것이 옳다고 말이오."
무소속과의 제휴가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무소속과 이탈자 없이 제휴만 할 수 있다면 과반수는 확보하고도 남기 때문에 도각은 식은 죽 먹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소속도 신파한테 기대려는 면이 있기 때문에 무소속과 제휴해서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숙제라고 할 수밖에 그도 그럴 것이 이 무렵 이재형을 중심으로 한 무소속은 <장면 인준 부결>을 결의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장면이 인준되자, 그가 <거국내각 조직>을 천명했던 것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무소속 입각을 위한 막후 절충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갈라져야 되겠다. 갈라져야 되겠어> 하고 신파와 결별을 운위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총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부터 갈라서기로 공언해 왔던 그들이었다. 그러므로 구파에 속해 있는 인물치고 분당에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지 않은 인물은 거의 없는 형현이었다. 물론 장관 감투의 매력에 끌려 신파 쪽에 가담해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우선은 별도의 교섭단체 등록에 필요하니, 우선 여기 모인 의원들부터 서명을 하도록 해주십시오."
유진산의 요청에 따라 참석자들은 그 자리에서 서명을 했다. 그들은 분당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할 경우 국가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생각해 보지를 않았다. 그들 구파는 그저 어떻게 해야 신파의 정권을 쓰러뜨릴 수 있느냐 하는 데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전업회관에 모인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도 한시바삐 신파하고 결별, 야당으로서 새 출발할 것을 결의했다.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파는 처음부터 분당에 반대였지만 그에 동조해서 중도파가 분당에 한사코 반대를 하고 있었다. 이 중도파는 윤택중(尹宅重), 정재완(鄭在浣) 등이 중심이 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수는 고작 18명. 더구나 이름이 중도파지,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친신파, 친구파가 될 수 있는 결합체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권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분당에 부채질하는 무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승만 밑에서 초대 법무부 장관직을 지낸 이인(李仁)이었다. 그는 구파 23인위원회에서 분당으로 건전 야당을지향하기로 결의했다는 소식을 듣자, 결성한다는 것은 국가의 앞날을 위해 경하할 일이다"라고 전제한 다음, "분당해서 나오는 사람들의 정책과 이념이 합치만 된다면 한데 규합해서 한 당을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과거의 우리 정치인들의 정치적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인은 분당해서 나오는 사람들의 정책과 이념이 합치만 된다면 어쩌고 했다. 민주당 구파가 분당해서 나온다고 해서 정책이나 이념이 다른 것은 무엇이겠는가? 민주당이 내세우고 있던 정책이나 이념이 구파 신파의 정책이요, 이념이었다. 그것을 분당을 했다고 해서 구파가 정책이나 이념을 180도로 전환시켜 버릴 것이라고 그것은 상식이다. 그것을 정책, 이념 운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집 참 잘 탄다. 그 집 다 타버리고 나서 새 집 짓게 되면 나도 투자를 할 테니 같이 짓도록 하자>고 제의하는 어리석음과 똑같은 행위였다. 이렇듯 이 무렵의 정치인들이라는 것이 민주당의 분당을 국가적 차원에서 생각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개인, 또는 파벌의 이익이라는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무리로 둘러싸여 있는 민주당 정권이 용 빼는 재주가 없는 한 정권 지탱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루어진 것은 8월 20일 아침이었다. 아직 월급쟁이들의 출근시간 전이었다. 이 모임은 장면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구파가 원내에 별도의 교섭단체를 등록하기로 하고 그 명칭을 <구파민주당(舊派民主黨)>으로 호칭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자, 장면은 어떻게 해서든 분당도 막고 조각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서 전날 밤 느지막하게 사택(私宅)으로 백남훈을 찾아갔던 것이다.
"선생님, 이제 신.구파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소?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구파가 합심해서 국가를 위해서 이바지하도록 해 봅시다. 난 내가 국무총리가 됐다고 해서 신파 일색의 내각을 조직할 생각은 없어요. 또 그래 가지고는 난국 수습도 안 될 의논 상대라도 좀 돼 주시오."
장면의 얘기를 듣고 난 백남훈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현실적으로 볼 때 구파의 협조 없이 신파 단독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구파가 끝까지 고집을 부릴 경우, 정국은 또 어떤 방향으로 치닫을지 가늠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장면에게 내일 아침에 김도연과 함께 반도호텔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8월 20일 이날 아침에 김도연을 찾아갔다. 황해도 장련(長連) 태생인 백남훈은 1885년생이니까. 만 75세. 한국민주당 창당 멤버인 그는 이 무렵 유일한 원로였다. 그에게는 정치적 운이 없었던지 7.29 총선거에서 겨우 민의원 의석을 차지할 수 밀양이었다. 그로서는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이었으나 그의 맏아들 명기(命基)가 6.25 당시 밀양으로 옮겨간 수도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한 일이 있었고 제대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 땅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연고에 의지해서 밀양을 선거구로 택했던 것이다. 막대기라도 꽂으면 표를 찍어 주는 <민주당 바람>이 아니었던들 어쩌면 그의 당선은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산, 수고스럽지만 나하고 같이 가서 장 박사를 좀 만나 봅시다."
김도연은 좀 의아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 갑자기 장 박사는 왜요?"
"아무래도 구파 협조 없이 신파 내각은 어렵지 않겠소? 가서 장 박사가 어떤 것이 좋을 것 같구려."
"그러지요."
백남훈은 황해도 사람의 특성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우선 성품이 정직하다 못해 우직할 정도였다. 대인 관계가 부드럽고 관대했다. 7.29 총선거 때 서울 성동(城東) 을구에서 입후보하기로 작정을 해놓고 있던 그는 조병옥의 아들 조준형(趙俊衡)이 입후보한다고 하자, 아예 공천 경쟁조차 해볼 생각을 않고 밀양으로 선거구를 옮길 만큼 그는 동지끼리 다투는 것을 싫어했다. 정치에 뛰어들었으니 권력욕이 있을 법도 했으나 그는 그것도 없었다. 그가 민주당 최고위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원로로서 추대하니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러나 그의 의지만은 굳건했다. 이것이 황해도 사람의 특성이었다. 반도호텔로 찾아간 백남훈, 김도연 두 사람은 829호실에서 장면과 마주 앉았다. 829호실은 장면의 조각본부였다. 7.29 총선거가 끝나고 민의원 집회가 가까워오자, 장면은 이 829호실에 진을 치고 국무총리 득표 공작을 벌여 왔던 것이다.
"지금 정국이 어떻다는 것을 김 박사나 해온(海溫:백남훈의 아호) 선생남께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김 박사한테는 전화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 신.구파의 싸움도 끝났으니 혼연히 정국 수습의 길로 나서 주셨으면 합니다. 그 길은 신.구파가 것뿐입니다. 그러니 신.구파가 다시 합작하도록 하십시다."
장면의 말투에는 진정이 어려 있었다. 그의 고충을 말투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합작에는 이의가 없어요."
김도연은 이렇게 전제하고,
"합작을 하는 데는 이의가 없는데, 아무래도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장 박사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그걸 좀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하며 먼저 전제 조건을 밝혀주기를 요구했다. 어떤 기록에는 김도연을 가리켜 그가 배타적인 파벌색이 짙다고 기록해 놓고 있지만 그것은 김도연을 옳게 평가하지 못한 것 같다. 김도연이란 인물은 성격이 못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당초 총선거 직후, 구파가 정권문제를 놓고 김도연을 대통령으로, 윤보선을 국무총리로 정해 놓고 있었던 것도 그가 파벌이나 경쟁의식에 초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타적이고 파벌색이 짙다>면 어느 정도 권모술수에 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 김도연은 권모술수에 있어서도 백지에 가까웠다. 그가 조금이라도 권모술수에 능했던들 단 3표 부족으로 국무총리 인준에 쓴 잔을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도연이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구파를 이끌어 나갔던 것은 유진산이었다. 그는 지모가 남달리 출중했다. 더구나 그는 유석(維石) 조병옥 밑에서 정치 훈련을 쌓은 조병옥의 수제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짜내졌고 유진산은 스스로 짜낸 전략에 따라 구파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도연은 그저 구파의 상징적인 보스로서 유진산한테 업혀 있었다고나 까. 그건 그렇고 김도연이 신.구파 합작의 전제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자, 장면은 조각의 대원칙을 제시했다.
"신파 5, 구파 5, 무소속 2의 비율로 내각을 조직하고자 생각하고 있소."
백남훈이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내 생각으론 그렇소. 신파 5, 구파 5라면 연립내각이라 할 수 있을 게 아니겠소? 연립내각이라면야 구파에서 굳이 마다할 것이 없는 것 같소만" 하면서 김도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까닭이 무엇이겠소?"
김도연은 이렇게 긍정적인 의사 표명을 하고 나서도 뭔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하나, 그건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이고, 일단은 구파 중진들하고도 의논을 해봐야 어떤 최종적인 결론이 내려질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니 그에 대한 해답은 일단 구파 중진들하고 의논해 보고 난 뒤에 다시구체적으로 협의하도록 하십시다."
두 사람이 물러가고 나자 장면의 참모인 오위영, 조재천이 길길이 뛰었다.
"신파 5에 구파 5의 비율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만일 구파가 무소속하고 제휴해 보십시오. 국무회의는 밤낮 왈가왈부만으로 시종하게 되고 맙니다."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경우, 항상 의견이 대립되어 효과적인 국정 요리가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조재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총리의 고충은 저도 잘 압니다만, 동수 비율은 절대로 안 됩니다. 꼭 구파를 입각시켜야만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겠다 생각하신다면 두서너 자리만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야만 국무회의를 원만히 이끌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조재천은 국무회의의 원만한 진행을 구실로 구파에게 5개의 장관 감투를 배분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의 속셈은 딴 데 있었다. 장관 감투를 요구하는 자천타천의 인물들이 너무나 많았다. 장관 감투가 백 개라도 희망자 전원에게 씌워 주기는 부족할 형편이었다.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신파에게 한 개라도 더 씌워 줌으로써 단 한 사람이라도 불평불만자를 줄이자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조재천이 하도 강하게 반대하므로 장면도 어쩔 수가 없었던가?
"구파에서 어떤 태도로 나오는지 귀추를 봐 가면서 우리의 태도를 정합시다."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라는 유행가의 한 구절 같은 것이 장면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장면은 한나절을 목을 늘이고 기다렸다. 그러나 김도연이나 백남훈에게서는 아무런 (구파는 신파한테 절대로 협조할 수 없다. 그 배포가 분명하군.) 이런 생각이 들자, 장면의 마음도 조금 더 조급해졌다. 자꾸만 조각을 질질 끌 수도 없었다. 한나절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신파 참모들의 독촉은 성화 같았다.
"그만했으면 구파의 배포가 어떻다는 것은 알조가 아니겠습니까? 어서 조각을 서둘도록 하십시다."
참모들은 과연 그들한테 어떤 장관 감투가 배당될지 몰라 조급증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각이 늦으니 나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조급증이 나오. 하나 어떡하겠소. 구파의 협조가 없이는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가 어려운 것을!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장면은 참모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해가 저물어도 구파한테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자, 장면은 상도동 유진산의 집으로 특사를 파견했다. 이 특사의 임무를 맡은 것이 누구냐 하는 데 대해서는 밝혀진 일이 없다. 다만 추측으로 그 임무를 맡은 것은 장면의 재야 참모인 한창우일 것이라는 설만이 있을 뿐이다. 이 특사에게 주어진 사명은 유진산을 설득해서 대통령 윤보선의 힘을 빌리자는 데 있었다. 구파의 총참모장격인 유진산이 장면의 특사에게 설득당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가? 장면은 특사에게<유진산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고자 내정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도록 미끼를 옥계(玉溪:유진산의 아호) 유진산은 1905년생이니까 이때 그의 나이 55세. 그는 타고난 성품과 지략이 뛰어난 데다가 조병옥 밑에서 정치를 익혔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 스타일은 흡사 조병옥 그대로였다. 그는 내무부 장관 감투가 탐이 나서가 아니라 조병옥이 일찍이 간파했듯이 <빈대잡기 위해서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는 고사에 따라 요청을 쾌락했던 것으로 그의 측근자들은 회고하고 있다. 이래서 세칭 열리게 된 것이 <경무대 4자회담>이었다. 유진산의 결단이 아니었던들 역사상에 경무대 4자회담은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경무대 4자회담이 열린 것은 8월 21일이었다. 대통령 윤보선의 초청 인사는 장면을 비롯해서 민의원 의장 곽상훈(중도파)과 구파의 총참모장 유진산이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윤보선은 예배당에 나가야 하는 것을 마다하고 초청인사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회담 장소는 경무대 뒤뜰이었다. 일체 외부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운석께서 조각의 원칙을 5, 5, 2로 하기로 했다던데, 이 원칙에 변동은 없소?"
"변동이 있을 리가 있겠소?"
장면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조각 원칙을 5, 5, 2로 정했다면 명실공히 거국내각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니 구파에서도 조각에 참여해서 이 난국을 수습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예, 국가 장래를 위해서 장 박사께서 아주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유진산은 이렇게 장면을 추켜 세우고 난 다음,
"하나, 우리 구파가 거국내각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한 가지 조건?"
장면은 조건이 있다는 유진산의 말이 언뜻 납득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곽상훈이 조급히 물었다.
"진산, 그 조건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민주당에서는 젊은이고 늙은이고 유진산을 곧잘 <진산>이라 불렀다. 진산은 그의 이름이었으나 어느 사이엔가 그에 여담이지만 유진산의 본명은 영필(永弼)이었다. 그것을 유진산이 해방이 되고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실시한 제헌국회에 진출하고자 입후보할 때, 그가 태어난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5.16 군사 쿠데타 전에는 금산군은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 향리의 지명을 따라 스스로 유진산이라는 이름을 써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산이 장면과 곽상훈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 조건이란 다름이 아니외다. 우리 구파는 이미 분당을 선언했고, 또 원내에서 별도의 교섭단체로써 활동하기로 결의까지 해놓았습니다. 그것을 조각에 응한다고 해서 지금 그 결의를 번복하기는 어려운 활동하는 것을 인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건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윤보선은 장면에게 물었다.
"어떻소? 신파에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장면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윤보선이 덧붙였다.
"거국내각이라고 한 이상에는 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를 형성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소? 오히려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했으니까, 거국내각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것 같소."
장면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유진산이 제시한 조건을 거부할 경우에는 거국내각의 꿈도 무산되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신.구파의 합작은 수월하게 소속의원들이 이 합작을 수락하겠느냐 하는것이 문제였다. 유진산은 이번에는 구파 설득공작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던 경무대 4자회담은 거의 1시간 만에 끝났다.
"경무대 4자회담에서 구파가 당 내각에 협조하겠다고 언약했다면서?"
"그렇다더군. 장 총리가 신.구파 동수 비율로 각료 자리를 배분해 주기로 확약을 했다더군."
"그게 무슨 소리야? 장 내각에 협조 않기로 결의한 게 언젠데?"
누구의 입에서 4자회담의 비밀이 새나갔는지 모르나 정오가 지나면서 구파 의원들 사이에 회담 내용이 퍼지기 시작했다. 구파의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그는 경무대 4자회담의 내용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한 다음,
"어제 우리는 이 자리에서 구파의 나아갈 길에 대해 결의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의원동지 여러분, 우리는 먼저 파벌보다는 지금 정국이 처해져 있는 상황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면 내각에 우선은 협조하기로 합의를 했으니 그 점 양해하시고 대국적 견지에서 찬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무슨 당찮은 수작이야?"
유진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교섭단체를 등록하기로 결의한 지 1년이 되었소, 2년이 되었소? 바로 어제 이 자리에서 결의했는데 불과 24시간도 못 돼서 전체가 결의한 것을 뒤집어 놓더란 말이오? 그러고도 당신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오?"
당연히 제기될 법한 시비였다. 시비를 제기한 의원들 가운데에는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니까, 그 현실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갑론을박이 장장 4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래도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유진산이 마침내 단안을 내렸다.
"어제 결의한 것을 오늘 뒤집어 엎는다는 나도 십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제 결의한 것을 오늘 뒤집어야 하는 내 심정을 이해 못해 주겠소? 만일 장면 내각이 약체 내각이 돼 가지고 지금의 이 비상시국을 이끌어나가게 될 때, 과연 장 내각은 혼자의 힘으로 이 난국을 수습해 나갈 수 있으리라 보고 있소? 중요한 것은 정국의 안정입니다. 우선은 장 내각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틀을 잡아주자 그거예요. 그런다음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갈 길을 갈 수 있을 게 아니겠소!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장 내각에 각료를 보내기로 했다고 해서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에요. 첫째, 구파 민주당은 예정했던 대로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할 것이며, 둘째는 구파의 총의에 따라 구파 각료는 언제든지 소환할 한해서 입각시키자는 조건부로 장 내각에 협력하기로 했으니까 장 내각에 협조하기로 한 데 대해서 양해를 해주었으면 고맙겠소."
갑론을박으로 소란스럽기만 하던 총회의장이 비로소 조용해졌다. 유진산은 지체하지 않고 가부를 물었다. 태반의 의원들이 신파 내각에 협조하는 데 대해서 찬성을 해주었다. 유진산은 곧 김도연과 더불어 중앙청으로 향했다. 그때 시계는 벌써 1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진산은 그제야 시장기를 느꼈다. 저녁도 거른 채 그는 동분서주 했던 것이다. 장면은 그때까지도 퇴정을 하지 않고 구파로부터 전갈을 고대하고 있었다. 1급 참모들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총리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장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급히 묻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었소?"
유진산이 대꾸했다.
"우리는 조각에 협력하기로 했소."
"그래요?"
장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러면 서둘러 입각시킬 의원의 명단을 주었으면 좋겠소만."
"알겠소. 입각자에 대해선 우리끼리 다시 협의를 해야 할 테니까, 늦어도 내일 아침 10시까지는 명단을 수교토록 하겠소."
유진산은 이상의 간단한 대화만을 교환하고, 김도연을 재촉해서 총리실을 명단을 제시하기로 한 만큼 밤을 새는 한이 있어도 입각자 선정을 해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서 협의한다지?) 유진산은 2층 계단을 내려오며 머리속에서 협의할 장소를 물색해 보았다. (아, 그렇지 해온 선생 댁으로 가야겠군. 아무래도 셋이서 협의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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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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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라인군단'재편성
서기 1세기 후반의 '라인군단'은 브리타니아에 일부 병력을 파견한 탓도 있어서, 1세기 전반의 8개 군단보다 하나가 적은 7개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지 게르마니아에 3개 군단, 고지 게르마니아에 4개 군단이 주둔해 있었다. 이들 7개 군단 가운데 '갈리아 제국' 소동에서도 무사했던 것은 현재의 스위스 취리히 부근에 있는 빈도니사(오늘날의 빈디슈)를 기지로 삼고 있던 제1군단뿐이다. 이 군단이 무사했던 진짜 이유는 비텔리우스의 명령으로 이탈리아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산텐을 기지로 삼고 있던 제5군단도 같은 이유로 군단 해체라는 불명예를 면했다. 이 군단도 대부분 이탈리아에 가 있었기 때문에,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병사는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창설했다는 영예에 빛나는 군단을 그렇게 간단히 해체해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군단만은 도나우 강 유역의 모에시아 속주로 근무지가 바뀌었다. 해체되지 않은 군단이 또 하나 있다. 마인츠를 기지로 삼고 있던 제22군단이다. 이 군단의 군단장 보쿨라는 '라인군단' 산하의 군단장들 중에서 유일하게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임무에 헌신하다가 속주병에게 살해되었다. 제22군단을 존속시킨 이유는 앞으로 열심히 임무를 수행해서, 군단장이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한 죄를 씻으라는 것이다. 이 군단의 은독수리 깃발에는 그후 보쿨라의 문장이 붙여졌다. 나머지 4개 군단은 모두 해체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대로 남겨두면 또 다시 불상사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 아니라, 로마 군단병이면서 다른 민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불명예스러운 행위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다만 군단은 해체하되, 군단병을 제대시키지는 않고 새로 편성된 군단에 조금씩 나누어 배치했다. 달리 갈 곳이 없는 2만 명이나 되는 군단병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면 사회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전력인 군단을 보조하는 보조부대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바타비족조차도 반란 이전 상태로 돌아갔으니까, 다른 속주 출신 병사들이 병영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 분야에서도 다소 변경된 점이 있었다. 반란 이전에는 부족의 유력자가 자기 부족민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했지만, 반란 이후에는 지휘관을 로마인이나 다른 부족 출신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 조치는 몇 연도 지나기 전에 다시 원래 방식으로 돌아갔다. 역시 불편했기 때문이다. 같은 부족 출신이 지휘하는편이 병사들을 통솔하는 데에도 한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갔는데도, 그후 200년 동안 속주병이 군단병을 공격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서기 70년 당시의 관용정책이 효과적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한다. 하지만 제국 서방에서는 이렇게 관용정책으로 일관한 로마인이 제국 동방에서는 정반대로 대처했다. 갈리아 사태의 유대 문제는 같은 시기의 사건인데도, 두 사건에 대한 로마인의 대처는 정반대였다고 해도 좋다. 그 이유는 두 사건의 성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유대문제
서기 66년 여름에 일어나 73년 봄에 마사다 옥쇄로 끝나는 '유대 전쟁'은, 로마 제국 내의 속주민이 패권자 로마에 저항하여 일으킨 독립운동이라는 점에서는 바타비족 반란으로 시작된 갈리아 사태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두 사건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유대 전쟁은 당연히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지배자 로마가 아무리 선정을 펴려고 애써도, 그것은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는 정도의 효과밖에는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은 불가피했고, 유대인과 로마인의 사고방식, 즉 문명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것은 숙명적인 대결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유대 민족의 첫번째 특수성은 그들의 거주지역인 팔레스타인 일대가 전통적 강국인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선상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팔레스타인의 흑해 동해안 지방에라도 있었다면 유대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통로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시리아 쪽에서도 이집트 쪽에서도 항상 팔레스타인을 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시리아도 이집트도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두번째 특수성은 그들이 대단히 우수한 민족이라는 점이다. 지배자로서는 우수한 민족이 다스리기 어렵다. 우수하지 않으면, 밑바닥에 억눌려도 저항할 능력이나 기력도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 특수성은 고대 그리스인에 비견될 만한 유대인의 이산 경향이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대규모 유대인 사회를 비롯하여 모든 도시에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그리스인과 다른 점은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본국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교도는 어디에 살든 1년에 2드라크마의 봉납금을 예루살렘 신전에 바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유대 민족과는 반대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그리스 식민도시였던 시라쿠사나 타란토의 주민이 자기 몸 속에 그리스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은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에 출전할 때뿐이었다. 코린트가 멸망해도, 코린트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의 자손인 시라쿠사 주민은 일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멸망하면,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유대에 사는 유대인보다 해외의 그리스계 도시에 사는 유대인이 수적으로는 훨씬 많았다고 한다. 네번째 특수성은, 유대인은 다른 민족을 지배해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유대인도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처럼 독립을 누린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국 안에 존재한 독립국가였고,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제국은 창설해본 경험이 없다. 게다가 독립을 누린 시기도 그들의 전체 역사로 보면 아주 짧고, 바빌론 유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이집트나 시리아의 헬레니즘 왕조, 즉 그리스계 국가의 지배를 받다가 결국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다. 오랫동안 타민족에게 지배당한 역사를 가진 민족은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핍박받은 민족이고, 따라서 동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오랫동안 핍박받은 역사를 갖는 것은 정신구조에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자위본능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신의 유연성을 잃고 완고해진다. 또한 매사에 과민하게 반응하기 쉽다. 그리고 가혹한 현실을 참고 견디며 꿋꿋이 살아가야 할 필요성 때문에 꿈에 의존한다. 유대교에서는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섯번째 특수성은 유대인과 종교의 관계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특수성이 아닐까. 그리스나 로마의 다신교 신들은 인간을 지켜주고 도와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이 신봉하는 일신교의 유일신은 인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명령하고, 그 명령을 어기면 벌을 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존재다. 그렇다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다신교 민족의 경우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는 반면, 일신교 민족의 정치체제는 종교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신권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대인은 바빌론 유수 시대처럼 강제로 외국에 이주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외국에 나가 살면서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을 종교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유대인이 생각하는 국가는 신이 다스리는 국가, 즉 신권정치(이탈리아어로는 Teocrazia. 영어로는 Theocracy) 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에는 신권정치를 뜻하는 낱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대 로마인은 인간의 분야인 정치에 신이 개입하는 정치체제를 생각한 적도 없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모든 유대인이 신권정치를 바랐다면, 신권정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로마인과 충돌하기는 할망정 유대인끼리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도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종교 우선을 외치는 파리사이파(바리세인)와 정치 중시를 주장하는 사두카이파(사두개인)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는 장소에 따라서도 유대 안에 사는 유대인과 해외의 그리스계 도시에 사는 유대인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유대 안에서도 내륙에 사는 유대인과 해안지역에 사는 유대인, 예루살렘 안에서도 빈곤층과 부유층으로 나뉘어 있었으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것을 일괄하여, 가난한 유대인은 로마에 대해강경파, 부유한 유대인은 온건파로 양분하고 잇다. 물론 알렉산드리아에 구멍가게를 가진 유대인이 갈릴라이아(갈릴리) 구릉지대에서 양을 치는 유대인에 비해 풍족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지배자 로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는 빈부차이보다 오히려 이민족과 접촉하거나 함께 살아야 할 필요성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결정된 게 아닐까. 도시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필요성이 높았기 때문에, 선민사상의 영향으로 본디부터 폐쇄적 경향이 강한 유대인이라도 개방적이고 온건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이처럼 특수하고 복잡한 유대 민족에 대해 로마는 어떻게 대처해왔을까. 이 문제는 제 7권에서 칼리쿨라 황제를 서술할 때 '로마인과 유대인', '그리스인과 유대인', '티베리우스와 유대인', '칼리굴라와 유대인'등의 항목에서 다루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서술할 때에도'유대 문제'라는 항목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후세가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르는 300년 동안 유대를 지배한것은 그리스인이었다. 이들을 대신한 로마인은 그때까지 피지배자였던 유대인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오리엔트를 양분하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경제 환경을 대등하게 바꾸었다. 필로 같은 개명한 유대인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시작되는 로마제정을 높이 평가한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인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만 제국 동방의 경제적 번영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둘 다 우수한 민족이고, 그래서 자칫 적대관계에 빠지기 쉽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두 민족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에만 충실한다는 것이 로마의 방침이었다. 지배자인 로마인에게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똑같이 피지배자다. 제7권에서 소개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알렉산드리아인에게 보내는 편지')은 이런 로마의 입장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유대인이 주장하는 그들의 '특수성'을 인정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
(2) 1년에 2드라크마의 봉납금을 예루살렘 신전에 계속 보낼 수 있도록 허용한다.
(3)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사형 이외의 법집행을 할 수 있도록 사법 자치를 허용한다. 다만 이 조치는 제국 동방의 유대인 사회에만 한정 되었다.
(4) 병역을 비롯한 국가의 공직을 면제한다. 다만 원하는 자에게는 문호가 열려 있었다.
(5)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용한다.
로마인에게 휴일은 신들에게 바치는 축일이고,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휴일은 아니다. 그런 로마인들 눈에는 토요일만 되면 일손을 놓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유대 교도의 관습이 기이하게 보였다. 하지만 로마인은 유대인이 토요일마다 엄격히 지키는 안식일을 축일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다신교도인 로마인은 자기네 종교이외의 축일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의 안식일도 존중해 준 것이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소맥법'에 따라 밀을 무상으로 배급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수도에 사는 가난한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권리인 무료 배급은 '빵과 서커스'의 '빵'에 해당하고, 후세에는 나쁜 평가밖에 받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회복지와 유권자 대책을 겸한 정책이었다. 밀은 한 달에 한번씩 배급되는 게 보통인데, 배급일과 토요일이 겹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유대계 주민은 마르스 광장 한모퉁이에서 배급되는 밀을 받으러 올 수 없다. 안식일에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 배급을 맡고 있는 당국은 밀을 받으러 올 수 없는 유대계 주민의 몫을 이튿날까지 남겨두기로 했다. 유대인이 다섯 명이나 열 명 정도라면, 수만명을 상대해야 하는 당국이 이런 조치를 강구할 리가 없다. 이는 유대교도이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유대인이 수도 로마에도 꽤 많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인 동시에, 로마인은 자신들과 다른 풍습도 존중해주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로마인은 칼리쿨라 황제가 말기를 빼고는 로마가 직접 지배하게 된 서기 6년부터 60년 동안 유대인에 대해 위와 같은 방침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신권정치를 수립하는 것만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허용하면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한테까지 영향이 미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권정치 수립을 인정하지 않은 대신, 로마는 유대 땅을 유대인 왕이 다스리는 통치체제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헤롯 대왕 시대처럼 세습 왕권이 확립되면 신권정치에 대한 지향성을 억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신권정치를 수립하는 것이야 말로 정통 유대교도가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었다. 이래서야 로마가 아무리 양보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두 민족은 '자유'라는 말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로마인에게'자유'는 군사력으로 보장된 평화와 법에 의해 보장된 질서 속에서 각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60년 동안 로마는 유대인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 유대를 통치했고, 이런 효과는 '자유'에 대한 유대교도의 소망이 활활 타오르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불씨는 꺼진 게 아니라 재 속에 묻혀 있었을 뿐이다. 60년 뒤에 폭발한 유대인 반란은 펠릭스, 페스투스, 알비누스, 플로루스로 이어지는 역대 유대 장관들의 악정에 원인이 있다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말했다.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플로루스 시대까지는 유대인의 인내가 계속되었다. 플로루스가 장관이었던 시기에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 네 사람이 유대 장관을 지낸 것은 서기 52년부터 66년까지 14년 동안이다. 이 14년 동안 계속된 로마 행정관의 악정이 유대 반란의 원인이었다면, 로마 중앙정부는 가장 문제가 많은 유대에서 왜 14년 동안이나 지방 장관들의 악정을 허용했을까. 이들 네 사람은 모두 네로 황제 시대의 장관이었다. 네로는 여러면에서 실정을 했지만, 외치에서는 상당한 식견을 보여준 황제다. 네로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유대를 제외하면, 그가 통치한 14년 동안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속주는 하나도 없다. 속주 통치를 직접 맞고 있는 총독이나 사령관이나 장관을 인선할 때는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가 구축한 인재 네트워크를 그대로 활용하면 되었지만, 네로는 그것을 활용하는데 상당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다만 네로는 황제의 중책을 혼자 짊어진 티베리우스도 아니고, 황제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끝에 자신까지 불태워버린 클라디우디우스도 아니었다. 네로는 황제의 책무에서 벗어나는 일, 예컨대 자작시를 지어서 노래를 부르거나 로마 도심을 녹지화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황제였다. 유대 장관이 실책을 저질렀을 경우, 티베리우스라면 당장 소환해서 재판정에 세우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물론 대신 파견할 장관은 전보다 훨씬 신중하게 골랐을 것이다. 황제의 책무는 네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모는 것과 비슷하다. 그중 한 마리라도 고삐를 잘못 다루면, 전차는 경기장 관중석에 충돌하여 전차도 마부도 산산조각날 것이다. 네로에게는 이런 긴장감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랬다 해도 네로가 고삐를 잘못 다룬 것이 유대에서만 표면화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14년 동안 네 명이 연달아서 악정을 펼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타키투스의 다음 문장이 해답이 되지 않을까.
"유대인이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존재인 까닭은, 제국의 다른 주민과 유대인은 다르다는 그들의 집요한 주장 때문이다."
제 7권에서도 말했듯이 정복자 로마인은 피정복자들을 동화시켜 로마제국이라는 공동운명체의 일원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그리스인도 에스파냐인도 갈리아인도 북아프리카인들도 로마의 동화정책을 찬동하고 참여했는데, 유독 유대인만은 일신교를 이유로 동화를 거부했다. 동화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신권정치 수립을 끝까지 고집하고,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로마에 끊임없이 반발했다. 그리스인에게는 본디부터 반유대 감정이 있었지만, 그리스인과는 달리 사회적 지위나 직업에서 유대인과 경쟁관계에 있지 않았던 로마인은 반유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유대인과 직접 접촉한 지 60년이 지날 무렵에는 로마인도 반유대 감정을 지니기 시작한게 아닐까. 유대인을 싫어하게 되면, 그들이 하는 짓도 모두 혐오 대상으로 바뀐다. 타키투스도 말했듯이 할례는 유대인과 타민족을 구별하기 위한 의식이고, 일신교는 다른 신들에 대한 경멸감에서 생겨난 신앙이며, 병역이나 공직을 거부하는 것은 제국에 대한 애국심이 없음을 나타내고, 인구를 늘리는데 열심인 것은 타민족을 앞지르려는 생각에서 나왔고, 인간의 형상을 본뜬 신상을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부르면서 거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경멸이고, 춤도 추지 않고 운동경기도 없는 유대교의 종교의식은 음침하고 음울해서 인생을 절망하게 한다는 식이다. 타종교를 믿는 자와 결혼을 금지하는 것도 유대인의 폐쇄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네 명의 유대 장관도 이런 반유대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네 사람은 제국 서방에 있어서 유대인과 무관할 수 있었던 타키투스와는 달리 밤낮으로 유대인과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고, 그 유대인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은 장관이었다. 시위를 진압하는 기동대장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위대를 해산하는 것이 아니라. 부하 기동대원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내버려두면 시위대의 도발로 생긴 증오감에 사로잡혀 야수처럼 시위대에 덤벼들 것이다. 이것을 제어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고삐를 다루는 솜씨가 중요하다. 네 명이나 되는 유대 장관의 통치가 혹독해진 이면에는 장관들의 초조감도 작용한게 아닐까.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시기에 일어난 유대인의 저항을 일일이 열거하면 그것만으로도 몇 페이지가 메워질 정도다. '시카리오이'(살인자)라고 불린 테러 집단은 유대 전역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또한 대신전 복구공사가 끝난 2년 전부터는 예루살렘에 많은 실업자가 생겨나 있었다. 신권정치 수립이라는 대의명분. 실업으로 인한 생활 불안, 중근동이 아니고는 경험할 수 없는 무더위, 이런 것들이 겹치면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직접 통치를 맡고 있는 사람에게는 전보다 더한 신중함이 필요했다. 하지만 네로 황제는 이들 지방장관의 임무 수행을 계속 감시하는데 머물지 않고 선수를 쳐서 대책을 세우기에는 확고하고 지속적인 책임감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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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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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치술령 - 애절한 그리움 깃든 산
[망부석]
치술령 경주 망부석에서 바라 본 풍경
박제상 부인의 망부석
치술령은 그리움의 산이다. 바다를 건너가서 죽은 지아비에 대한 아내의 애타는 마음이 깃든 산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신라의 충신 박제상(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은 왜국에 볼모로 잡힌 신라의 왕자를 탈출시키고 그곳에서 잡혀 죽는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가눌 길 없어 동해가 바라보이는 이 산위에 올라 통곡하다가 죽어간다. 이런 슬픈 전설이 깃든 이 산은 경주시 외동면의 남서쪽에 있는 해발 7백65m의 험한 산이다. 산 위에는 박제상의 아내가 앉아서 바다 멀리 왜국을 바라보았다는 망부석이 있다. 이 산은 금오산맥이 이룬 묏부리 중에서 가장 높고 험한 산으로 경주시 외동면 녹동리에 위치한다. 불국사역에서 울산 쪽 국도를 따라가면 입실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계속 국도를 따라가다가 모화리에서 서쪽 도로로 꺾어든다. 석계리를 지나 한참 달리면 녹동이라는 마을에 닿는다. 치술령은 마을 서편에 서 있다. 이 마을에서 두 시간의 등산을 하면 정상에 닿는다. 산은 귤참나무와 물푸레나무 등 잡목으로 덮였다. 중턱부터는 으름과 다래덩굴이 온통 뒤덮인 가운데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산 위에 오르면 서북쪽으로 태백, 소백의 연봉이 멀리 바라보이고, 동남쪽으로는 울산만을 지나 동해의 짙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청명한 날은 대마도가 바라보인다고 한다. 이곳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제단이 있다. 망부석은 산 정상의 바로 동편 아래쪽에 있는 거대한 화강암이다. 이 바위는 상부가 편편하여 사람이 앉기에 편하게 되어 있다. 그밖에 이곳에는 신모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새가 되었다고 한다. 산의 정상에서 서편기슭을 약 두 시간 정도 내려간 기슭에는 그 새가 날아 들어갔다는 은을바위가 있으며, 그곳을 기념하여 세운 은을암이라는 절이 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치술신모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신모사는 그 때문에 세워졌던 것 같다. 치술신모에게 빌면 가뭄에 영험이 있다 하여 이 산 정상의 기우제는 예부터 이 일대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지난 여름의 가뭄 때에도 이 산 정상에서는 성대한 기우제가 벌어졌다. 그런 만큼 이 산은 이 일대의 영산으로서 오랜 옛날부터 숭앙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망부석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름 모를 새들이 골짜기에서 울어대고, 산의 숨소리와도 같은 바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흡사 치술신모의 한서린 한숨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장렬한 충절의 죽음 삼국유사에 실린 '내물왕과 김제상'의 얘기는 장렬한 충신전으로 유명하다. 그의 얘기는 삼국사기의 '열전'에도 나온다. 신라 17대 내물왕 36년(391년) 왜왕은 신라와의 화친을 위해 미해왕자를 사신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 나이 열 살인 미해왕자를 보냈으나, 왜국에서는 왕자를 볼모로 억류하여 30년이 지나도록 신라로 되돌려보내지 않았다. 내물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눌지가 19대 임금으로 올랐다. 그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419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 내물왕의 왕자 보해를 화친의 뜻으로 고구려에 보낼 것을 간청, 보해왕자는 고구려로 갔다. 장수왕 역시 보해왕자를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즉위한 지 10년이 지난 후 눌지왕은 왜국과 고구려에 잡혀 있는 두 아우를 가슴 아프게 그리워했다. 그래서 신하들과 의논하니, 제상이 이에 자원했다. 제상은 당시 삽라군(지금의 경남 양산)의 태수였다. 제상은 변장하여 고구려로 가서 왕자 보해와 접선, 모의하여 왕자를 빼내어선, 신라로 돌아온다. 이어서 제상은 곧장 말을 달려 율포(밤개라고도 하며, 현재의 울주군 청간면 표리)바다를 통해 왜국으로 건너간다. 그리하여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그는 탈출 시간을 지연시키다가 잡힌다. 왜왕은 제상의 변절을 요구했으나 제상은 끝까지 '나는 신라의 신하임'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발바닥의 가죽을 벗긴 다음 갈대를 베어낸 위를 걷게 해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벌겋게 달군 철판 위에 세워도 그는 굴하지 않아, 마침내 불태워 죽임을 당한다. 제상의 장렬한 죽음과 굴하지 않는 충절에 크게 감화, 신라왕은 나라 안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는 한편 제상의 아내에게는 '국대부인'의 작위를 내린다. 그의 딸은 왜국에서 돌아온 미해의 부인이 된다. 이러한 장렬한 얘기는 바로 신라인들에게 충성의 본보기로 채택됐다. 당시 고구려와 왜국에 대하여 신라는 당당하지 못했음을 이 이야기는 드러내고 있다. 왕자 보해와 미해를 국가의 권위로서 떳떳하게 데려오지 못한 것은 당시의 신라 국세로 봐서 부득이했던 듯하다. 그런 가운데 제상의 슬기와 용기는 특히 돋보인다. 이러한 슬기와 용기 및 강인한 충성심은 바로 화랑도 단체를 통해 확대되고 높여졌다. 그리하여 곧이어 오는 신라의 융성과 삼국통일의 성취를 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작용될 수 있는 것으로 국가에 의한 충성의 전형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장사'와 '벌지지'
이와 더불어 삼국유사는 박제상과 그 아내와의 정이 돋보이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적고 있다. 당시 제상이 율포로 나갔을 때 그의 아내는 지아비를 보기 위해 뒤따랐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망덕사 절문 남쪽의 모랫벌에 나가누워 길게 울었다. 그래서 그 모랫벌을 '장사'라 했다. 친척 두 사람이 겨우 그를 부축하여 되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펄쩍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일어나려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를 다리를 뻗었다 하여 '벌지지'라 했다는 것이다. 망덕사는 경주 배반리의 낭산 남쪽에 있었던 절로 절터만 전하고 있다. 장사는 이 절터의 남쪽 남천가에 있었던 모래밭이었는 듯하다. 현재 남천은 제방이 쌓여져 모래밭이 옛 같지 못하다. '벌지지' 역시 남천과 망덕사지 사이에 있었던 듯하나,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망덕사지 곁을 흐르는 남천변의 제방 위에는 이 지역이 장사와 벌지지의 현장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옛날 경주와 울산 가의 왕래는 낭산 남쪽으로 해서 불국사역 쪽으로 빠져나갔음을 이 이야기를 통해 상상할 수 있다. 어쨌든 제상과 그 아내의 사랑은 죽음을 같이한 슬프고 아름다운 얘기이다. 제상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치술령을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며 울다 죽었다. 그 한스러운 죽음 때문에 결국 그녀를 치술신모로 떠받들어 모시게 됐다고 할 수 있다.
[화랑교육원에서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을 지나면 문천(蚊川 : 남천)을 건너가는 화랑교(花郞橋)가 있다. 여기에서 남쪽을 보면 논 가운데 당간지주와 목탑지 그리고 금당터가 남아 있는 망덕사터가 있다. 이 망덕사터 앞의 들판을 벌지지(伐知旨) 즉 ‘양지버들’이라 하며 그 일대의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사천왕사지 - 문무왕의 자주의지 깃든 호국가람
사천왕사의 위치
낭산의 서남쪽 기슭에는 사천왕사가 있었다. 사천왕사에서 1백m 떨어진 서남쪽 남천가에는 망덕사가 있었다. 경주박물관에서 남편으로 1km쯤 떨어진 곳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사천왕사터 입구에서 통일전으로 가는 길과 불국사로 가는 길이 갈린다. 사천왕사터의 서쪽, 불국사로 가는 도로를 건너면 배반들이 남천을 따라 펼쳐진다. 들의 중간에 전신주가 남북으로 쭉 서 있는 곳으로 옛날 길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은 경주시내에서 사천왕사 앞을 지나 망덕사 서쪽을 돌아 남천을 건너 불국사 앞들로 해서 울산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그 길은 논으로 변해버렸다. 지금의 새 도로가 굳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그 길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좌상- 왼손에 칼을 든 신장 하단, 우상-왼손에 칼을 든 신장상, 좌하-왼손에 칼을 든 신장, 중하- 활과 화살을 든 신장, 우하-오른손에 칼을 든 신장]
월명스님이 달을 멈추게 한 곳
사천왕사 앞을 지났던 그 옛길에서 한때 달이 잠시 가던 길을 멈춘 적이 있었다. 이 꿈 같은 얘기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월명스님의 설화 속에 나온다. 월명스님은 화랑도요, 이름난 향가의 작가인데다 탁월한 음악가였다. 그는 특히 젓대(피리)를 잘 불었다. 하루는 달밤에 사천왕사 문 앞의 큰 길을 젓대를 불며 걸어갔다. 그 소리에 달은 가던 길을 멈추었다는 것. 그래서 그 길이 월명리라 불렸고, 그 때문에 그도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곳의 지형과 잘 맞아떨어지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신라 때만 해도 이 일대는 신유림의 숲이 덮이고, 그 속에 웅장한 사천왕사가 단청빛을 아롱이며 서 있었다. 그 서남쪽 가까이에는 망덕사의 큰 절이 서 있었다. 망덕사 아래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천이 고운 모래 위로 흘러내렸다. 내 건너편에는 부용꽃처럼 벌어진 남산이 펼쳐졌다. 길은 그 중간으로 나 있었으니 달밤의 경치가 어떠했겠는가. 월명의 이 설화는 바로 소리(젓대)와 산천과 풍류(화랑도인 월명의 풍류)가 혼연일체를 이룬 융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월명의 향가는 두 편이 전해온다. 도솔가와 제망매가가 그것이다.
생사길이란/여기 있으려 하나 있을 수 없어/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버리는가/어느 가을날 이른 바람에/이리저리 떨어질 나뭇잎처럼/한 가지에서
떠나선/가는 곳 모르는구나/아아, 미타찰에서나 만나리니/내 도 닦아
기다리리라
'제망매가'이다. 죽은 누이를 애통해하는 심정이 넘쳐흐른다. 그러면서도 구도자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노래는 전래되어 오는 향가 중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의 또다른 노래인 도솔가는 천재지변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적인 것이다. 즉 경덕왕 19년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떠서 10여 일간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산화공덕(부처 앞에 꽃을 뿌려서 부처를 공양하는 일)을 해서 재액을 풀고자 했다. 때마침 그 의식장 옆을 월명스님이 지나갔다. 그리하여 인연 닿는 중이라 하여 월명은 왕에게 불려가 도솔가를 지었다고 한다.
당군 물리치기 위해 건립된 사찰
월명스님의 얘기를 간직한 현장인 사천왕사는 현재는 절터뿐 황량하다. 그러나 신라 때에는 대가람이었음을 현재 남아 있는 초석들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사천왕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당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일년으로 지은 호국의 가람이다. 이 절이 세워진 낭산은 신라인들과 각별한 관련을 맺었던 해발 1백4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다. 흡사 언덕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낭산은 낮지만 신령스러운 산으로 신라인의 숭앙을 받았다. 낭산은 경주시 보문동과 배반동 일대에 걸쳐 있으며,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일대에는 사천왕사를 비롯하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효공왕릉 등이 있으며, 문무왕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있다. 이곳은 경주의 7처 가람터의 하나인 신유림터로 선덕여왕 때에 도리천이라고 하여 신성시되었다. 선덕여왕은 죽으면서 "도리천에 나를 묻어달라"고 유언했으며, 그곳이 바로 현 낭산의 기슭임을 지적했다. 여왕이 죽은 지 30여 년 만에 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자 비로소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사천왕이 주거하는 하늘(세계)은 바로 도리천의 아래에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리천은 욕계 6천 중 두번째이며 삼십삼천이라고도 한다. 수미산 꼭대기에 있으며, 이곳을 지배하는 신이 바로 제석천이다.
삼국유사에는 사천왕사의 창건은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668년 삼국을 통일했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곳곳에 점령지구의 군정기관인 도호부와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의 자주권을 침해했다. 당은 신라마저 손에 넣으려는 계략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문무왕 14년, 당나라는 신라가 저들의 도독부군사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9만 대병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해왔다. 이에 당군을 불타의 힘으로 퇴치하기 위해 세운 절이 바로 사천왕사이다. 삼국유사에는 당나라 군사들이 배를 타고 쳐들어온다는 보고에 급히 절을 짓고, 월명스님을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 비법을 쓰니, 바람과 물결이 이러 당나라배가 모두 침몰했다고 적고 있다. 당은 곧이어 다시 5만 명의 군사를 보냈으나 역시 그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
철로에 잘린 성지
사천왕사는 통일 후에 나타나는 가람배치인 쌍탑가람의 형식을 갖추었음을 절터의 주춧돌들은 보여준다. 초석을 보면 금당을 중심으로 목탑인 동탑과 서탑이 있고, 금당의 뒤로는 좌우에 각각 경루가 있었으며, 그 뒤로 강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앞쪽은 중문이 있어서 이 문의 좌우로 화랑이 둘러져 강당과 이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금당을 중심으로 한 쌍탑배치는 통일이후에 보이는 양식인데, 목탑이면서 쌍탑양식은 사천왕사에 처음 보인다. 석탑으로 쌍탑을 배치한 것으로는 감은사가 유명하다. 이밖에 이 절에 남아 있는 유물은 머리가 잘린 거북돌 2기와 당간지주 하나가 있다. 당간지주는 절의 입구에 있다. 거북들은 절의 동남쪽 보리밭 사이에 있다. 이 거북돌은 그 사실적인 조각 수법과 등에 새겨진 무늬의 음각이 탁월해 신라시대 거북돌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중 서쪽 거북돌은 '문무대왕릉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거북돌은 원래 머리를 북쪽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사천왕사터는 훼손이 많이 되었다. 일제 때 무책임한 행정당국에 의해 강당터의 일부가 잘리면서 동해남부선인 기차선로가 놓여졌다. 그래서 사천왕사는 지금도 철로에 의해 두동강으로 절단된 채 풀 속에 묻혀 있다.
망덕사지와 비파암 - 지혜로 위난넘긴 신라인의 얼 담긴 곳
망덕사의 건립 목적
사천왕사지 앞의 망덕사지와 남산 비파골의 석가사지는 전신석가가 현신한 설화가 얽혀있는 전설의 현장이다. 망덕사를 창건하게 된 것은 사천왕사를 당나라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짓고 비법으로 그들을 물리치게 되자, 당나라에서는 그 사실을 알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 이때 신라조정에서는 급히 망덕사를 지어 이 절이 바로 사천왕사라고 속였다. 번번이 싸움에 패한 당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우리는 절을 지어 당나라 황실의 만수를 빌었다"라고 거짓 구실로 당의 사신을 속였던 것이다. 그런 만큼 망덕사는 거짓구실로 당의 사신을 속여 나라의 위난을 극복한 신라인의 지혜와 호국의 얼이 담긴 절이다. 망덕사는 문무왕 11년(671년)에 창건했으나 삼국유사에는 효소왕 즉위년(692년)에 망덕사를 낙성했다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아마 문무왕 11년에 당의 사신을 위해 절을 급조로 창건한 후 서서히 절을 중수하여 효소왕 때에 낙성재를 베푼 것일 듯하다. 망덕사터는 사천왕사터의 서남쪽 2백m 지점의 남천가에 있다. 절터에는 당탑, 보랑 및 목조탑이 세워졌던 흔적들이 풀숲에 묻혀 있다. 초석과 목조탑의 흔적 등으로 봐서 이 절은 상당히 큰 규모였던 듯하다. 이곳에는 높이 2.5m의 당간지주만이 외롭게 솟아 있다.
진신석가 현신 설화
효소왕 8년, 망덕사의 낙성재가 베풀어지던 날, 왕은 친히 이 절에 가서 공양을 베풀었다. 그때 외양이 누추한 한 중이 허리를 구부리고 그 재에 참석하기를 청했다. 왕은 그에게 말석에 앉도록 했다. 재를 마칠 때쯤 왕은 그 중에게 농담삼아 물었다.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예, 저는 비파암에 살고 있습니다."
왕은 다시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지금 나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노라는 말을 하지 말게나"
왕의 이 말에 그 중은 웃으면서 응대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옵소서"
말을 마치자 그 중은 몸을 솟구쳐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동쪽산에 달려올라가 중이 사라진 쪽으로 절하고, 신하들에게 그가 간 곳을 찾게 했다. 그 중은 남산 삼성곡(또는 대적천원)이라는 곳에 이르러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발우(스님들의 식기)를 놓고 숨어버렸다. 시자가 이 일을 고하자 왕은 석가사를 비파암 아래에 세우고 그의 자취가 없어진 곳에는 불무사를 세웠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이다. 희롱삼아 던진 말 한마디로 임금이 창피를 당한 이 얘기는 드러난 바깥 모습만으로 그 삶을 평가하려는 속된 사람의 짧은 소견을 비웃는 내용이 들어 있다. 눈에 드러난 현상 속에 감추어진 가치의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진리를 나타낸다는 것은 불교의 세계인식의 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허망한 현상계에 집착하는 중생들의 짧은 소견을 경계하고, 현상 속에 감추어진 진리의 진면목을 투시해야 한다는 교훈이 깃들어 있다.
진신석가 사라진 비파암
이러한 설화의 현장인 비파암은 남산의 비파골에 있다. 비파골은 서쪽 남산의 약수계 다음 골짜기이다. 경주교도소가 있는 약수계 입구에서 1km쯤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비파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큰 골짜기가 비파골이다. 비파골을 타고 한 시간 정도 좁은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비파암에 닿는다. 이 골짜기는 중간의 잠늠골과 상부의 사롱골 등의 작은 골짜기가 모여 이룬 골이다. 일제침략기에 조선 총독부가 발간한 "남산의 불적"을 보면, 석가사는 잠늠골 입구에 서 있는 삼각형의 봉우리 밑에 있으며, 그 아래로 내려가 비파골의 입구 부근에 불무사가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곳에는 지금도 절터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있다. 그래서 지금도 석가사와 불무사의 절터는 이 두 곳으로 확정지어져 있다. 77년에 발간된 '신라의 폐사 II'(한국불교연구원)에도 그렇게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현지를 답사해보면 석가사와 불무사는 비파골의 상류에 있으며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것이 허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잠늠골을 지나 풀덤불을 헤치고 계속 골짜기로 들어가면 사롱골 입구에서 몇 개의 골짜기가 갈라지며 눈앞에 화강암의 기이한 바위들이 꽉 들어찬 광경을 보게 된다. 골짜기의 경사는 갑자기 급해진다. 바위들을 타면서 올라가면 흡사 비파의 모양을 한 큰 바위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 바위는 높이가 5m정도 되며 윗부분이 뾰족하고, 아랫부분은 동그스름한 게 완연히 비파악기의 모양이다. 비파암은 바로 이 바위를 가리킨 것이 틀림없구나 하는 확신이 당장 들 정도이다.
비파암 1백m 아래 남쪽 계곡 옆의 풀덤불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찾아보면, 절터가 틀림없는 석축이 발견된다. 이 절터가 바로 석가사지이다. 삼국유사에는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지를, 중이 지팡이와 발우를 놓고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불무사는 비파암 부근이 틀림없다. 비파암의 위쪽 1백m쯤을 올라가면 큰 바위가 연이어 서 있다. 그중의 한 바위는 큰 바위 위에 몇 개의 바위들이 얹혀 있고, 그 위는 제법 너른 평지를 이루고 있다. 바위 아래와 위의 평지에는 신라시대의 기와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지역에 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산의 경사가 심해 절이 설 때라고는 바위 위의 평지뿐이다. 그러므로 불무사는 이 바위 위에 조그만 암자 형태로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바위 위에 서보면 바로 아래 비파암이 있고, 그 아래 석가사지가 눈에 들어온다. 또한 왼쪽으로 비파골의 상류인 사롱골의 골짜기가 눈에 들어오며 그 위에는 남산의 정상 가까운 묏부리이다. 사롱골의 능선을 누비면 삼층탑으로 보이는 탑석들이 능선 위에 흩어져 있어, 이 골짜기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꽤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일제의 절터 고증은 허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석가사지와 불무사지가 잘못된 것이며 비파암을 중심한 이곳이 옳다고 보는 근거는 또 있다. 삼국유사에는 중이 사라진 곳을 삼성곡이라 했으며, 일연은 '삼성을 혹은 대적천이 발원하는 곳'이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비파암에서 올려다보면 능선 위 산의 정상 가까운 묏부리에 '3형제바위'로 불리는 세 개의 바위가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이들 바위는 지금도 인근마을 사람들의 기도처로, 촛불을 밝힌 흔적들을 보여 주고 있다. '삼성'의 '성'은 경상도 방언으로 '형'일 가능성이 많아 '삼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골짜기는 '삼성골'로 불리기 이전에 '삼형제바위골'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대적천'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의 골짜기가 급하기 때문에 비가 오면 갑자기 물이 불어 급히 골짜기로 쏟아져 내리며, 그때 이 산에 많은 화강암의 부스러기(모래)들이 골짜기에 쌓이게 되어서 생겼을 가능성이 크며, 이 대적천이 발원하는 곳이 곧 비파암 부근이 되는 것이다. 일제당시에 추정된 절터는 이 골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만큼 이러한 사실과 전혀 부합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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