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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8호 - 2024.07.14 일요일(음력 : 06.09)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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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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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녀를 갖기에 족할 만큼 성숙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혼의 가치는 어른들이 자식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고 아이가 어른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 피터 드브리스(美 작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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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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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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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와 틀리다
20세기 현대사상의 거두라고 불리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질성의 포용’이라는 책에서 상대의 이질성(異質性)을 상대방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상대방과의 친화를 도모하는 것을 ‘이질성의 포용(inclusion)’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21세기 철학의 화두로 삼았다. 이처럼 상대방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이질성의 포용’은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겪고 있는 이념 간,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의 갈등상황을 치유하는 치료약이 될 수 있다.
이질성의 포용은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필요한데, 예를 들어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해 잘못 사용하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남녀의 목소리가 서로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르다’를 써야 하는 상황에 ‘틀리다’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데, ‘다르다’와 ‘틀리다’는 품사부터가 서로 다르다. ‘다르다’는 품사가 형용사로서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라는 뜻이고 ‘틀리다’는 품사가 동사로서 ‘사실 따위가 그릇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단어를 혼동해 많은 언중들이 ‘다르다’를 써야 할 곳에 ‘틀리다’를 쓰고 있는 것은 자기와 같은 생각, 이념, 모습은 옳고, 자기와 다른 생각, 이념, 모습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은연중에 심어줄 수 있다.
이는 마치 색연필의 살구색 이름을 ‘살색’이라고 표현해 우리와 같은 피부색인 살구색만 살색이고 우리와 다른 피부색인 검은 색은 살색이 아니라는 선입견을 학생들에게 심어준 것과 같은 경우인데, ‘이질성의 포용’을 위해 ‘다르다’와 ‘틀리다’를 서로 구별해 사용해야겠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미쉐린’에서 발간하는 ‘미슐랭’ 가이드
‘미슐랭 가이드’는 1900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최고 권위의 레스토랑 안내서이다. 파리, 뉴욕, 도쿄 등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도시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올해 안에 서울편도 발간된다고 한다. 이 책은 본래 타이어 회사인 ‘미쉐린’에서 무료로 나눠 주던 것이었다. 자동차 여행자들에게 주유소의 위치나 근처의 식당, 숙소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책자가 지금의 맛집 안내서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왜 ‘미쉐린’사에서 만든 책 이름이 ‘미슐랭’ 가이드일까. 이것은 프랑스어 이름인 Michelin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의 혼란에서 비롯됐다. Michelin은 이 회사 창업자의 성으로,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미슐랭’으로 적는다. 그러면 ‘미쉐린’은 이 이름의 영어식 표기일까? 그렇지 않다. 영어 발음에 따른 외래어 표기는 ‘미셸린’이라고 써야 한다. ‘미쉐린’은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법인을 설립할 때 등록한 한글 이름이다. 고유명사이기에 표기법에 맞지 않지만 공식 표기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1980년대에 ‘미슐랭’이라는 책 이름으로 처음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이후 1990년대 초에 타이어 회사가 ‘미쉐린’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두 이름이 너무 달라 서로 관계가 있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10여 년 전 신문에는 ‘미쉐린의 총수인 프랑수아 미슐랭’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기도 하다. 사실 알고 보면 ‘미슐랭’이라는 사람 이름을 따서 만든 ‘미쉐린’사에서 ‘미슐랭’이란 책을 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미슐랭’으로 통일해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한 외국어 이름에 대응하는 두 가지 다른 한글 표기, ‘미슐랭’과 ‘미쉐린’은 그 말이 우리 사회에 소개될 당시의 맥락과 역사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청춘하세요
요즘 모 제약회사 광고 중에 “대한민국 청춘하세요!”라는 문구가 있다. 청춘의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제품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청춘하세요’는 국어의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다. ‘하다’가 단어를 만드는 힘은 매우 크지만 ‘청춘하다’라는 말까지 만들 수는 없다. ‘운동하다, 정리하다, 생각하다’에서 보듯이 ‘하다’는 동사성의 의미를 지닌 말과 결합하여 새 동사를 만든다.
하지만 ‘청춘’은 동사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생하다, 노년하다’라는 말이 없듯이 ‘청춘하다’라는 말도 만들어질 수 없다. 물론 ‘밥하다, 나무하다’처럼 동사성이 없는 말에 ‘하다’가 붙어 된 말도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밥을 하다, 나무를 하다’와 같은 표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쓰이면서 단어가 된 경우이다. ‘청춘하다’는 ‘청춘을 하다’라는 말이 없으므로 이런 예도 아니다.
아마 이 말을 만든 사람도 ‘청춘하다’가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일부러 어법에 어긋난 말을 씀으로써 대중의 눈길을 끄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또 유행처럼 일부 계층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보는 글이라는 점에서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하다’를 억지스럽게 붙이는 말은 이전에도 일부 광고에서 쓰였다. 식품 광고의 ‘연두해요’, 전자제품 광고의 ‘쿠쿠하세요’, ‘액스캔버스하다’ 등은 제품명에 ‘하다’를 결합하여 동사로 쓴 경우이다. 모두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는 예들이다.
물론 이런 말들이 광고 전략 면에서는 성공 사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고도 공익을 생각한다면, 참신하면서도 우리말의 질서에 맞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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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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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봄소식 - 천상병
입춘이 지나니 훨씬 덜 춥구나!
겨울이 지나고 봄 같으니,
달력을 아래위로 쳐다보기만 한다.
새로운 입김이여
그건 대지의 장난인가!
꽃들도 이윽고 만발하리라.
아슴푸레히 반짝이는 태양이여
왜 그렇게도 외로운가.
북극이 온지대가 될 게 아닌가.
∼∼∼∼∼∼∼∼∼∼∼∼∼∼
바다 5 - 정지용
바둑 돌 은
내 손아귀에 만져지는 것이
퍽은 좋은가 보아.
그러나 나는
푸른바다 한복판에 던졌지.
바둑돌은
바다로 각구로 떨어지는 것이
퍽은 신기 한가 보아.
당신 도 인제는
나를 그만만 만지시고,
귀를 들어 팽개를 치십시오.
나 라는 나도
바다로 각구로 떨어지는 것이,
퍽은 시원 해요.
바둑 돌의 마음과
이 내 심사는
아아무도 모르지라요.
~~~~~~~~~~~~~~~~~~~
거미 -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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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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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2편 중도의 세계
제1장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
1. 불생불멸(不生不滅)과 등가원리.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
一切法不生 (일체법불생)
一切法不滅 (일체법불멸)
若能如是解 (야능여시해)
諸佛常現前 (제불상현전)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으로 불교의 골수를 드러내 보이는 말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 안에 부처님 말씀이 그렇듯 많고 많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불생불멸을 깨치셨으니,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 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만물은 모두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원리를 따릅니다. 곧,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세상에 한번 태어난 것은 결국 없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이라 하여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닙니까? 거짓이 아니라면,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그 까닭을 분명히 제시해야 되지 않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완전히 깨쳐야만 합니다.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수 없습니다. 일체 만법, 곧, 모든 것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의 이 우주를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하는데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是法住法位 (시법주법위)
世間相常住 (세간상상주)
여기에서 말하는 '이 법'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합니다. 곧,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萬象)이 모두가 불생불멸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늘 머물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내용에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을 또 화엄경에서는 부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곧, 한없이한없이 연기할 뿐 그 본디의 모습은 모두가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만번 변화를 거듭하더라도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며 아울러 불교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불교에 대해서 영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산중에 들어와 눈감고 앉아서 참선을 하거나 도를 닦아야 하는데, 그것이 또한 문제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요즘은 과학만능시대이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의 도리를 과학적으로 근사하게 풀이해 보일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이 과학하고 무슨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하여서 요새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쉬타인 Einstein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쉬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입니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요즈음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사실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곧 질량이란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素粒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서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도 못하던 일입니다.
50여년 전 아인쉬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E = mc2)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이 수 십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우리가 다 아는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 시켜보면 거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원자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거꾸로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 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히 분리하여 별개의것으로 보았지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환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나오고 수소탄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앤더슨 Carl D.Ander-son 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세그레 Emilio Segre 라는, 뭇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간 유명한 이탈리아의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이것은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은 없어진 것입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인 것입니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대성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量子論)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에너지가 완전히 질량으로 전환하고 질랑이 완전히 에너지로 전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쌍생쌍멸(雙生雙滅)이라고 합니다. 모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할 때 언제든지 쌍(雙)으로 변하는 현상을 쌍생성이라고 합니다. 엔더슨의 실험에서도 광(光)에너지를 물질로 전환시킬 때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양전자와 음전자를 합하니까 완전히 쌍으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할 때는 쌍생(雙生)이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할 때는 쌍멸(雙滅)이 됩니다. 이것은 중도의 공식, 곧, 쌍으로 없어지고 쌍으로 생기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 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할 때 음전자와 양전자가 쌍으로 나타나니까 쌍생(雙生)이 되고, 이것은 곧 쌍조(雙照)에 해당합니다. 또 유형인 질량 곧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없어지면서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니까 쌍멸(雙滅)이 되고, 이것은 곧 쌍차(雙遮)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쌍으로 없어지면서 한 쪽이 생기고, 또 쌍으로 생기면서 한 쪽이 없어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쌍차쌍조의 공식이 에너지와 질량이 전환하는 이론으로 완전히 증명이 됩니다.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의 무리학자들은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곧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에, 이런 표현을 그대로 말하지는 못해도, 그 내용은 꼭 같은 말로서에너지와 질량 관계가 보존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곧, 법계라고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이며 상주법계입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연계 곧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쉬타인의 등가원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불생불멸은 거짓말로 남아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慧眼)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임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때문에 3,000여년 동안을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면서 증감이 없음을 마침내 알아냄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기에 이르른 것일 따름입니다. 지금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 원리인 불생불멸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다. 이것만을 보아도 이 불교 원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과학이 불교 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 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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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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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8. 동상이몽 (2/2)
제2공화국 헌법 제69조.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되, 민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단 대통령이 민의원에서 동의를 얻지 못한 날부터 5일 이내에 다시 지명하지 아니하거나 2차에 걸쳐 민의원이 대통령의 지명에 동의를 하지 아니할 때에는 국무총리는 민의원에서 이를 선거한다. 전항의 동의나 선거에는 민의원 의원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지명한 때에는 민의원은 그 지명을 받은 때로부터 24시간 이후 48시간 이내에 동의에 대한 표결을 하여야 하며, 제1항 단서에 의하여 국무총리를 선거할 때에는 그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선거를 하여야 한다. 대통령은 민의원 의원 선거 후, 민의원이 집회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국무총리를 지명하여야 한다.
꽤나 긴 헌법 조문이었다. 하여간에 이 헌법이 명시하는 데 따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뽑힌 윤보선은 5일 이내에 국무총리를 지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있는 민의원 의사당(지금의 시민회관 별관)양원 합동회의에서 거행되었다. 한데, 윤보선이 헌법 제54조에 명시한 대로, "나는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고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고 선서한 다음 참의원 의장 백낙준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주는 무궁화대훈장을 목에 건 후 막 취임 인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글쎄 하필이면 새공화국의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려는 순간에 전기가 나가버릴 것이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황송스럽게도 대통령더러, "지금 전기가 나가서 그러니, 전기가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불길한 징조야?" 의석에 앉아 있는 의원들 가운데에는 순간 상서롭지 못한 느낌이 든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군사 쿠데타를 당하게 되자, 이날에 있었던 불길한 예감을 털어 놓았다. 윤보선은 정전이 됐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지 미리 작성된 연설문을 천천히 읽었다.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영예의 당선을 얻은 어제 나의 감격은 선서식을 거행하는 오늘에는 영광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변해졌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취임 연설문은 뭐 그리 특이할 만한 것은 못 되었다. 이런 경우의 이제 윤보선이 대통령 취임 선서까지 마쳤으니 그가 할 일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국무총리를 지명하는 일이었다. 민주당 구파는 처음부터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모두 다 차지하자는 것이었던 만큼 국무총리는 김도연을 지명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김도연은 지명됐을 때에 대비해서 벌써부터 반도호텔에 방을 얻어 득표공작을 벌였다. (민주당은 오만에 빠져 있어. 정치에 오만은 금물이야. 오만한 자의 콧대를 꺾어 놔야 돼.) 이렇게 생각한 것은 이제 무소속의 보스가 된 이재형이었다. 그는 35세에 상공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장관사에 있어서는 최연소 장관의 기록을 세워놓고 청년이라고 하면 아직도 청년이라 할 수 있는 그 나이에 닭의 머리격밖에 안 되지만 어쨌거나 무소속의 보스가 되어 있었다. 장관을 지냈다는 경력과 그리고 그에게는 웬만큼 쓸 수 있는 정치 자금을 댈 능력도 있었다. 그리고 보면 대한민국에서는 한 정치파에 보스가 되는 데 있어 장관을 지냈다는 경력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줄로 안다. 이재형은 무소속 의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민주당 신.구파에게 무소속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재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어요. 우리 무소속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이상에 너희들 신.구파는 어느 쪽도 정권을 맡지 못한다는 것을 각성시켜 줄 필요가 무소속으로서 민주당 신.구파에 대해서 정책질의를 했으면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겠죠?"
보스의 생각에 대해서 감히 왈가왈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은 또한 무소속으로서는 바람직한 일이기도 했다. 무소속에서는 즉시 정책질의를 하는 공함을 민주당 신.구파에 각기 띄웠다.
-4월혁명 과업의 완수방안은 무엇인가?
-원내 소수파의 권한 보장 방안은 무엇인가?
-거족적 구성 및 국방, 업무의 독립성 유지방안은 무엇인가?
-경제정책 심의회의기구 구성에 대해서 알고 싶다.
-농어촌 경제안정 대책이 어떤 것인지
이상 다섯 가지에 대해서였다. 무소속에서 보내 온 이 정책질의서를 훑어본 김도연은 (핵심을 찌르기는 찔렀는데 이 시점에서 이런 정책질의서를 보내 온 이유가 뭐야? 무소속도 한몫 끼고 싶다 그건가?)라고 생각하며 풀썩 웃었다. 무소속의 속셈이 무엇인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따. 그는 이것을 23인위원회로 돌렸다.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서였다. 그에게는 그것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23인위원회는 김도연이 지명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전제하에 이면에서 활발한 득표 공작을 벌이고 있었던 때였다. 23인위원회에서는 물론 무소속의 정책질의서에 대해서 답변을 해보냈다. 조영규가 김도연과 상의 끝에 간략하게 답변서를 작성해서 보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답변서는 성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만했다. 구체적인 설명 없이 단 한 줄씩으로 요약해서 기술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구파의 답변에 비해 신파의 답변서는 꽤 구체적이었다. 신파의 답변서는 정책위원회 의장인 주요한이 김영선과 상의 끝에 작성된 것이었다. 내용이 구체적이었던 만큼 꽤 성의가 있다고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무소속이 도울 파벌은 구파가 아니라 신파야.) 이재형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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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까지 새 정부를 세워서 정권을 이양토록 한다는 것이 허정의 계획이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허정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다. 대통령에 취임한 윤보선이 아직도 국무총리 지명권을 행사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조해 하는 것은 정당이 아니라 국민이었다. 어서 하루속히 정식 정부가 들어서기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무총리 지명이 늦어지자 항간에는 별의별 소문이 다 나돌고 있었다. <대통령이 지명권을 행사치 않고 있는 것은 구파에서 김도연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다.> 갖가지 소문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서 가장 그럴싸한 소문이 이것이었다. 무소속을 포섭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라는 해석이었다. 있을 법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조영규 발언>으로 해서 토라진 무소속이었다. 그들을 달래서 설득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법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신파가 가만히 있다면 모를까, 절대로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구파는 요직을 독점해서 분당해 나가려 하고 있다. 민주당의 분당은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정국의 안정을 기하려면 우리 신파의 주장처럼 요직을 안분해서 분당부터 막아야 한다. 고로 구파의 김도연 박사를 지명하더라도 절대로 인준을 해 주어서는 안 된다.> 이런 명분론으로 무소속 공작을 벌이고 있을 것은 틀림없는 경회루에서 8.15 경축 파티가 있었던 그날 저녁 8시쯤 허정은 경무대로 윤보선을 찾아갔다. 제3자가 있다면 모를까 단 둘이 마주 앉으면 <하게>를 할 만큼 두 사람의 친분은 두터웠다.
"이 시점에서 파벌의 이익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먼저 생각해야 할 걸세. 구파에서는 요직을 독점하자는 것이 기본 정략인 모양일세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으리 만큼 혼란에 빠지게 될 걸세."
허정은 먼저 자기의 견해부터 털어놨다. 윤보선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 누굴 지명할 생각인가?" 하고 허정은 물었다. 윤보선은 여전히 무겁게 침묵만 지켰다. "해위, 민의원 의장에는 중도파인 곽상훈 씨가 당선되었고 대통령은 구파에서 나왔으니 국무총리로 신파의 장면 씨를 지명하는 것이 정치도의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니 대통령으로서 파벌을 초월해서 지명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걸세."
윤보선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감돌았다.
"장면 씨는 안 돼! 당내 공기도 그렇고......."
"무슨 소릴 하고 있나? 이건 장면 씨 개인 문제가 아냐. 개인적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도의상의 문제야.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모두 구파에서 차지하는 법은 없어. 정치는 타협이 아닌가?"
허정의 말투는 좀 거칠었다. 열었다.
"해위, 혹시 내가 장면 씨하고 친하니까 이런 권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친한 면으로 말한다면야 내가 김도연 박사하고 더 친하지 장면 씨하고 더 친하겠나?"
윤보선은 여전히 또 침묵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때 비서가 들어와 김도연, 유진산, 조한백 세 사람의 방문을 고했다. 구파의 간부들이 찾아왔다는 말에 허정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윤보선한테서 아무런 시원한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헌법 제69조의 규정에 따라 국무총리로 김도연 씨를 지명하오니 동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윤보선이 서명하고 국무총리 허정과 내무부 장관 겸 국무원 사무처장 이호가 부서(副署)를 한 국무총리 인준요청서가 국회 사무처에 접수된 것은 8월 16일 오전 11시 25분이었다. 민의원 사무처에서는 즉시 이것을 본회의에 보고케 함으로써 발의했다. 윤보선은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한 직후 담화를 발표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생각한 끝에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는 항일투사일 뿐만 아니라 원만한 인격, 종용한 과단성, 조예 깊은 경제 경륜은 이 난국을 담당할 제1인자라 생각되기 때문에......."
신파가 발끈해졌을 것이라는 것은 다시 지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십중팔구 추측하고 있으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한 가닥이란 정치도의였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정국 안정이 가장 다급한 때가 아닌가? 국민의 여망인 정국 안정을 도외시하고 분당론자인 김도연 박사를 지명했다는 것은 대통령의 양식(良識)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윤대통령은 반드시 그 저의가 무엇인지를 밝혀라."
이것은 민주당 신파 내의 소장파인 김재순의 공박성명의 한 구절이지만 민주당은 그들의 노여움을 성명 따위로만 표현하지를 않았다. 그들은, 공작으로 돈을 쓰고 있으며, 그 중 한 의원은 5백만환을 주겠다는 약속하에 우선 2백만환을 보증수표 두 장으로 받은 사실이 있다" 하고 폭로전술을 쓰기까지 했다. 윤보선이 정치도의를 무시하고 김도연을 지명했다고 해서 길길이 뛰며 그를 성토하는 성명발표쯤은 이해할 수 있지만 포섭 공작에 뿌린 정치자금을 문제삼아 폭로전술을 쓴다는 것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럼 그들은 장면의 인준을 위해서 무소속 포섭에 돈을 쓰지 않을 것이란 말이었단 말인가? 이건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신파에서도 무소속 포섭을 위해서 돈을 뿌렸다. 그랬던 그들 신파가 자기들은 마치 고고한 자세로 정치를 하는 양 <돈> 문제를 가지고 폭로전술을 썼으니 되지 못했다. 그것을 그들은 어째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까? 또 언급하게 되지만 어떤 경우에든 정치자금을 가지고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답답하기만 한 일이었다. 한데, 국무총리에 지명을 받은 김도연은,
"5일 이내에 거국내각을 조각할 생각이거니와 조각의 원칙이 거국적이며 거당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구파를 초월해서 인물 본위로 등용하겠다" 고 말했다. 구상을 밝힌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의 의욕은 단 몇 시간도 못 돼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혔다. 그 장애란 다름이 아니라, 대통령이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하자, 무소속의 민정구락부는 이날 밤 김봉재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조영규 발언은 또 그렇다고치고 우리 무소속을 대하던 김도연 의원의 그 태도가 뭐예요? 우리가 낸 정책질의서에 대해서 이 따위로 성의 없게 답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재형은 구파에서 보내 온 답변서를 흔들어 보이며 김도연을 성토했다. 하긴 김도연이 성토당할 만하기도 했다.민정구락부에서 낸 정책질의서 중 소수파의 원내 활동문제와 법무.국방의 정치적 중립 유지방안에 대해서는 성의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정구락부는 김도연 의원의국무총리 인준을 거부키로 합의했다는 것을 성명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그와 함께 민정구락부의 행동 통일을 기하기 위해서 같다는 정준 의원의 제의에 따라 그 자리에 참석한 무소속 의원 25명 전부가 서명을 했다. 그 명단을 다음과 같다.
서정원, 박권희, 이재형, 조종호, 김성숙, 송영선, 박재환, 송능운, 박병배, 서태원, 신준원, 정해영, 전형산, 김갑수, 김석원, 이찬두, 윤길중, 이정석, 김세영, 김봉재, 정준. 무소속 의원들의 원내 교섭단체인 민정구락부의 반발이 구파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협조 없이는 김도연과 민의원 인준은 거의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8월 17일은 민의원에서 김도연의 국무총리 인준이 표결에 붙여지는 날이었다. 민의원 의원들은 장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적잖이 어안이 벙벙해졌으리라 여겨진다. 적지 않은 인파가 의사당 밖으로 몰려와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냥 호기심에 몰려와 있던 인파는 아니었다. <민주당 구파 정권 독점을 반대한다.> <독재와 싸운 인사 다시 지명하라.> 이런 구호를 쓴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일단의 아낙네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한켠에는 <질서 없는 곳에 민주주의 없다>는 구호를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일단의 사나이들이 역시 목이 터져라고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김도연을 인준하라>는 패거리와 <김도연을 인준해서는 안 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던 패거리들은 마침내 저희들끼리 맞붙었다.
"야아 이 쌍년들아, 계집년들이 집안에 틀어박혀 살림이나 하고 있을 일이지 뭘 안다고 거리로 뛰쳐나와 떠들고 있는 거야?"
아낙네들한테 먼저 욕설을 퍼부은 것은 사나이들이었다.
"야아 뭐이 어드레? 뭘 하나 더 달고 있다고 해서 다 사나인 줄 알아?"
아낙네들도 지지 않고 입을 놀렸다. 입씨름에는 사나이들이 아낙네들한테 당하기 마련이다. 사나이들의 무리 속에서 한 사나이가 뛰쳐나와 아낙네들한테로 달려가더니 그 중 한 아낙의 따귀를 때렸다. 와아 하고 아낙네들이 몰려들어 뺨을 때린 사나이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가 하면 머리채를 움켜쥐고 요동을 쳤다. 그러나 사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와아 몰려오자 아낙네들한테 발길질을 해대는가 하면 머리채를 휘어잡고 땅바닥에 메다꽂기도 했다. 마침내 사나이들과 아낙네들의 집단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죽여라, 죽여!"
아낙네들은 죽이라고 하며 사나이들한테 대들었다.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알어?"
주먹질, 발길질이 난무했다. 아낙네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했다. 아낙네들이 입고 있는 옷고름이 뜯겨나갔는가 하면 치마가 갈기갈기 찢겨지기도 했다. 어떤 아낙네는 될 곳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이 소동은 경찰이 출동해서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민의원 의사당 내에서 김도연 인준에 대한 투표가 시작된 것은 장외의 소란이 가라앉은 직후였다. 투표가 시작된 의사당 안은 흡사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구파 소속의원들이 무소속을 상대로 마지막 득표공작을 벌이느라 법석댔기 때문이었다. 2시간이 채 못 되어 투표 결과는 밝혀졌다. 재적 227명 중 총 투표자 수는 224명이었고 가(可) 111표, 부(否) 112표, 무효 1표였다. 결국 김도연은 민의원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재적 227의 과반수는 114였다. 그러니까 인준에 실패했던 것이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와아 하고 함성을 질러댄 것은 신파 의원들이었다.
"꼴 좋다. 저게 무슨 꼴이야? 대통령께선 완전히 스타일 구긴 꼴이 되고 말았잖어?"
이건 정치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는 민중의 관전평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좀 점잖치 못한 표현이지만 대통령 윤보선은 완전히 스타일이 구겨진 셈이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지 이제 며칠이 되었던가? 고작 닷새밖에 더 되었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처음으로 행사한 묵사발이 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으로서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따지고 보면 대통령으로서의 위신에 손상을 입게 된 원인을 윤보선 스스로가 유발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순리대로 정치만 했더라도 윤보선은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에 손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순리의 정치!>란 정치도의를 의미한다. 김도연을 지명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더라도 일단은 장면을 지명했어야 옳았다. 그것이 정치도의이기도 했거니와 여론이기도 했다. 국민은 민주당이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구파가 요직을 독점해 버리고 나면 분당을 반대하던 신파도 이제는 어쩔 수 그 경우 원내 안전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구파가 무슨 힘으로 정치를 해 나간단 말인가?
과욕.
구파는 너무 과욕을 부렸던 것이다. 오랫동안 권력에 굶주려 있어서 그랬던 것인가? 그렇더라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 하지 않았던가! 김도연에 대한 인준이 부결되자, 무소속 의원들 가운데에는 백낙준을 국무총리로 옹립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도 물론 구 자유당 출신자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서인호를 옹립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그저 조금 움직이다가 말았다. 몇몇이 논의하다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정신 나간 작자들!"
그런 움직임이 있을 때, 같은 무소속에서도 그들에 대해서 냉소를 퍼부었다. 정신 나갔다고 하기보다는 도무지 정치가 뭔지도 모르는 백치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 같다. 원내에 기반이 없는 사람을 옹립해서 무슨 재간으로 국무총리를 시키겠다는 것인지 도시 옳은 정신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그렇게 정치감각이 무딘 인물들이 어떻게 민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헌법 제 69조의 규정에 따라 제 2차로 장면 씨를 국무총리로 지명하오니 동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국무총리로 지명한 것은 8월 18일이었다. 윤보선은 장면을 지명해 놓고 이번에도 담화를 발표했다. <장면 의원의 반공.반독재의 저항 생애는 현 난국 담당의 적임자이기에 국민의 상식적인 견해를 존중해서.......> 장면을 지명한 것이라고 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는 하지만 신파는 신바람이 났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이 인준을 받도록 하자>며 밤을 새가며 득표 공작에 열을 올렸다. 그들의 득표 공작의 대상은 물론 무소속이었다. 대상 인물과 친분 관계가 있는 사람을 동원해서 득표공작을 벌였다. 김도연이 지명되었을 때 길길이 뛰다못해 폭로전술까지 썼던 신파였지만 그랬던 그들도 막상 장면이 지명되자, 1인당 백만환에서 3백만환까지의 돈을 뿌렸다. 한편 구파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한 번 더 기회를 잡기 위해서 장면 인준을 결사적으로 부결시키자!> 구파도 장면의 인준 저지를 위해서 밤을 새가며 인준 부결 공작을 벌였다. 장면에 대한 인준이 부결되면 그땐 민의원에서 국무총리를 선출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구파에서는 장면의 인준을 부결시켜 버리면 한 번 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장면의 인준 부결공작을 밤을 새가며 벌였던 것이다. 한데, 괴이하기 짝이 없는 것은 무소속, 곧 민정구락부 소속 의원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밤 무소속의 25의원은 또다시 김갑수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이날 밤에 무엇 때문에 모임을 가졌던가? 그것은 장면에 대한 인준도 거부하자는 결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 25의원은 전번에 김봉재의 집에서 모임을 가질 때 거기에 참석했던 똑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장면에 대한 인준을 부결시키기로 하고 역시 또 서명을 했다. 그리고는 뭐라고 했던가?
"2차에 걸친 국무총리 인준 부결로 정국이 불안정 상태에 빠지더라도 그것은 민의원 의석의 9할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의 책임이다. 민주당의 신.구파 알력은 정책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며 같은 위협적인 시위로 정권 장악의 도움으로 삼으려는 어느 편에도 협조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하에 부표를 던지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대안을 제시했던가 하면 그렇지가 않았다. 이 얼마나 답답한 얘긴가. 장면마저 인준을 얻지 못하게 될 경우 국무총리는 어쩔 수 없이 민의원에서 뽑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과연 파란 없이 일이 진행될 것인지, 도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 정치인의 병폐는 바로 이런 데에 문제가 있었다. 현실이 어떻다는 것은 고려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파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바로 이것이 병이었다. 무소속 25명의 의원이 장면의 국무총리 꿈을 버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여기 천군만마의 힘에 필적할 만한 원군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과도정권 수반 허정이었다. 그도 이날 밤 친분 관계가 두터운 무소속 의원 20여 명을 신교동 자택으로 초청을 했다. 여기에는 구파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도 몇 끼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경상남도 출신 의원들이었다.
"내가 여러분들을 내 집으로 초청한 것은 여러분이 소아를 버리고 대의를 위해서 일해 주십사 하는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예요. 나는 윤 대통령에게 구파가 요직을 독점하려는 것은 정치적 탐욕이다, 그러니 그 탐욕을 버리고 대국적 견지에서 장면 씨를 지명해야 한다고 권고를 물리치고 김도연 씨를 지명했던 게 아니었겠소. 이번에 또 장면 씨 인준이 부결되는 날엔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만은 여러분이 파벌이나 이해 관계를 떠나서 장면 씨가 인준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소."
허정은 어째서 스스로 장면을 돕고 나섰던 것일까? 인맥(人脈)으로 따지면 허정은 신파를 도우려 할 것이 아니라 구파를 도우려 했어야 옳았다. 그는 한국민주당 창당 때 8총무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구파가 아닌 신파를 돕고자 스스로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허정 자신이 밝히지 않는 한 없을 것 같다. 장면에 대한 인준 투표는 8월 19일 오후 1시에 시작되었다. 결과는 재적 228명 중 225명이 투표에 참가했다. 김도연에 대한 인준 투표를 할 때는 224명이었던 것이 이날 4명이나 늘어났던 이유는 그 사이에 재선거를 실시한 선거구에서 4명의 당선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장면은 마침내 인준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228의 과반수는 115였다. 그에게 던져진 가표는 117표였고 부표는 107표였다. 무효표가 역시 1표였다. 장면이 인준을 획득하자, 신파는 <만세>를 불렀고 구파는 더욱더 침울해졌다. 참고로 내각책임제 정치제도하에서의 국무총리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어떤 제2공화국의 헌법을 중심으로 한 것임을 밝혀 둔다).
-국무총리는 그를 포함해서 국무원(國務院)을 조직한다.
-국무총리는 국회의원이 과반수인 국무원(8인 이상 15인 이내)을 임명한다.
-국무총리는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이 된다.
-국무총리는 국무회의의 결의에 따라 행정 각부를 지휘, 감독한다.
-국무총리는 법률에서 인정한 범위를 정하여 위임을 받은 사항과 법률을 실시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에 관해서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국무원령을 발할 수 있다. 명령이 위법 또는 부당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이를 중지 또는 취소하고 국무회의에서 국무원의 방침을 결정하게 할 수 있다.
-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을 대표하여 의안(議案)을 국회에 제출한다.
-국무총리는, 내우외환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상의 위기에 대해 대통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취한 긴급조치와 재정상 필요한 처분을 집행하기 위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진 명령을 발할 수 있다. 명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보고해서 승인을 얻지 못하면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국무 및 군사에 관한 문서에 관계 국무위원과 부서를 해야 한다.
이것이 제2공화국 때의 국무총리에게 주어진 권한이었다. 대통령에서 국무총리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민은 비로소 멋있는 정치는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처음 피부로 느꼈다.
"민주주의 정치란 곁에서 구경하기에도 신바람이 나는걸. 진작 이런 정치 제도를 도입했던들 4.19 같은 비극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신바람이 나 있으면서도 4.19를 생각하고는 우울해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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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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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반격이 시작되다
수도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혼란을 수습하고 통제력을 장악한 무키아누스는 갈리아 사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반격 작전에는 본국 이탈리아의 5개 군단, 에스파냐의 2개 군단, 브리타니아의 1개 군단, '라인 군단' 중에서 유일하게 무사했던 빈도니사(오늘날의 빈디슈)의 1개 군단, 합해서 9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9개 군단은 모두 평소와 달리 보조병을 제외하고 군단병만으로 구성되었다. 갈리아 제국의 주력이 로마군 보조병이기 때문에, 그들과 내통할 우려가 있는 보조병은 에스파냐인이든 브리타니아인이든 모두 배제시킨 것이다. 그래서 9개 군단의 총병력은 5만 4천 명. 내전으로 줄어든 인원을 보충할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실제로는 4만 명 안팎이었을 것이다. 무키아누스는 수도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에, 9개 군단을 지휘할 장수로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켈리아리스와 갈루스를 골랐다. 한겨울인데도 군단 파병 명령서를 휴대한 전령이 빠른 말을 타고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로 떠났다. 속주병이 반기를 들었는데 로마가 반격에 나서지 않을 리는 없다. 게스만계 '율리우스'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가 내전을 수습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 것이 키빌리스를 비롯한 '율리우스'들의 오산이었다. 로마의 반격도 로마인답게 단호하고 철저했지만, '율리우스'들의 꿈을 쳐부순 것은 사실 또 다른 '율리우스'들이었다. 내가 앞에서 세 번째 부류로 분류한 갈리아계 '율리우스'가 그들이다.
이 갈리아계(그리스식 명칭은 켈트계) 갈리아인들은 처음에는 게르만계 갈리아인이 제의한 공동투쟁에 동조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갈리아 제국이 수립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갈리아계 유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회의는 전통적으로 친로마적인 레미족의 본거지에서 열렸다. 여기서 그들은 갈리아 제국에 참가할 것이냐, 아니면 로마 제국 쪽에 남을 것이냐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한테도 인심좋게 자신의 씨족 이름을 나누어준 사람이다. 갈리아인은 그가 정복한 라인 강 서쪽의 주요 민족이니까, 갈리아의 유력자들에게는 모둔 다 '율리우스'를 나누어주었을 게 분명하다.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에 해당하는 레미족 땅에 모인 갈리아 유력자들은 거의 다 '율리우스'였다. 실제로 레미족의 부족장이자 회의 주최자의 이름은 율리우스 아우스피케다. 게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개방 노선을 채택한 결과, 그들 대다수는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이기도 했다.
이들은 갈리아 제국이 명칭은 '갈리아 제국'이지만 실제로는 '게르만 제국'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된 로마의 갈리아 지배는 갈리아인을 게르만족의 공격에서 지켜주었다. 갈리아의 유력자들은 갈리아인이 입은 이 혜택을 상기했다. 그 전에는 갈리아 부족들이 서로 다투는 틈을 타서 라인 강을 건너 서쪽으로 쳐들어온 게르만족이 갈리아를 제멋대로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갈리아인들은, 로마가 없으면 갈리아는 조만간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카리사르의 단언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로마인이 라인 강에 버티고 있어준 덕분에 지금까지는 게르만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 120년 만에 갈리아인은 또다시 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회의에서 내려진 결론은 갈리아 제국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갈리아계 '율리우스'들이 게르만계 '율리우스'들에게 '노'(NO)라고 대답한 것이다. 참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로마군의 보조자로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무키아누스는 로마인의 불상사는 로마인이 해결하겠다면서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라인 강에 인접한 저지 게르마니아 속주와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이 로마 편에 서기로 결정한 것은 사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국 이탈리아에서 오는 군단도,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에서 오는 군단도, 전쟁터가 될 라인 강 연안으로 가려면 갈리아를 지나가야 한다. 행군의 안전만이 아니라 군량을 확보하는 문제에서도 갈리아가 로마 편에 섰을 때의 유리함은 헤아릴 수 없다. 갈리아인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후방 지원을 로마인에게 약속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 왔다. 로마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브리타니아의 세 방향에서 라인 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로마군 보조부대를 지휘할 당시에는 로마식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염도 깨끗이 면도했지만, 지금은 길게 기른 머리가 바람에 나부끼고 수염도 게르만식으로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그가 내건 기치는 갈리아 제국이지만, 이것은 로마 역사상 수 없이 되풀이되었고 앞으로도 수없이 되풀이될 로마와 게르만의 대결이었다. 외모를 게르만식으로 바꾼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알맹이까지 게르만식으로 바꿀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게르만족은 여자 점쟁이를 중용한다. 싸우러 나갈 것이냐 말 것이냐도 그네들의 점괘에 따라 결정한다. 로마에서도 공격에만 몰두한 공화정 시대에는 싸우러 나가기 전에 새점을 치는 것이 유행했지만, 군단의 주요 임무가 방어로 바뀐 제정 시대에는 새가 모이를 쪼아먹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방식은 쓰지 않게 되었다. 쳐들어오는 야만족을 격퇴하는데, 새점의 결과에 따라 싸우러 나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중용한 점쟁이는 벨레다라는 젊은 여자였다. 라인 강 동쪽의 브룩테리족 출신인 벨레다는 로마군을 파멸시키면 게르만족이 서방을 지배할 수 있다고 예언한 여자였다. 지극히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라인 강 연안의 6개 군단 병사들에게 강제로 갈리아 제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받아낸 키빌리스는 벨레다의 예언이 미래를 예고한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키빌리스는 붙잡은 로마 군단장 한 명을 죽이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신에게 산 제물을 바칠 때 끄라고 벨레다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루페르쿠스라는 이 군단장은 호송되는 도중에 자살을 택한다. 키빌리스는 게르만식 행동은 포로에 대한 처우에도 나타났다. 키빌리스는 포로가 된 로마 군단병을 어린 아들의 장난감으로 주었다. 같이 놀라는 게 아니라 꽁꽁 묶어놓은 병사를 칼로 찌르면서 놀라는 것이다. 이것은 게르만족의 기세를 올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갈리아인들에게는 게르만족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그리고 로마인은 동포를 비인간적으로 다룬 자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민족이기도 했다. 로마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는 소식만 듣고도 켈트계 갈리아인들은 게르만족에 맞서 행동을 개시했다. 갈리아 제국에 가담한 링고네스족의 남쪽에 사는 세콰니족이 맨 먼저 움직였다. 세콰니족의 우두머리도 '율리우스'였고, 레미족이 주최한 부족장 회의에 참석한 사람이었다. 로마 편에 남겠다는 의지를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게다가 율리우스 사비누스가 이끄는 링고네스족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갈리아 제국의 한귀퉁이가 무너졌다. 패장이 된 사비누스는 도망치는 데 성공하지만, 9년 뒤에 로마인들은 숨어 있던 사비누스를 찾아낸다.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후손을 자칭한 이 사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갈리아 제국'은 한귀퉁이가 무너졌을 뿐이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바타비족과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을 이끌고 라인 강 어귀만이 아니라 라인 강 동쪽에서부터 쾰른, 본, 마인츠에 이르는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뱀 앞에서 오금이 굳어버린 토끼처럼 몸을 움츠린 채 꼼짝도 못하는 상태였다. 한편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와 율리우스 투토르가 이끄는 트레베리족은 라인 강 서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집트에 머물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를 대신하여 로마군의 반격 작전에서 두뇌역할을 맡은 무키아누스는 실제로 지휘를 맡을 사령관이나 군단장을 고를 때에도 냉철함을 보였다. 지난 1년 동안 등장했다 사라진 세 황제 가운데 누구 밑에서 싸웠는지는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저지 게르마니아나 고지 게르마니아에서 근무한 경험만이 선정 기준이 되었다. 사령관 안니우스 갈루스는 고지 게르마니아 주둔군에서 군단장을 지낸 경험이 있다. 원주민이라서 지형이며 그밖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더구나 그들의 땅에서 싸우는 것이다. 원주민 못지않은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다. 로마군 병력은 통틀어 9개 군단이지만, 이탈리아와 스위스, 에스파냐, 영국에서 모여들고 있다. 전형적인 야전 사령관 타입인 켈리아리스는 병력 집결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폐허가 되고 병력도 얼마 남지 않은 마인츠에 도착했을 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이탈리아에서 데려간 5개 군단뿐이었다. 켈리아리스는 그 5개 군단만 이끌고 트레베리족 땅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에스파냐나 영국이나 스위스에서 모여들 나머지 군단은 갈루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전투하기에 좋은 계절인 봄도 조금 있으면 막바지에 접어든다. 봄이 한창인 이 시기를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2만 명이라도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병의 전투력은 압도적이었다. 마인츠에서 트레베리족의 본거지인 트리어까지는 로마 가도가 뚫려 있다. 다만 산악지대라서 평지만큼 빨리 갈 수는 없다. 그래도 시속 5킬로미터로 하루에 9시간은 행군했다. 하루 5시간이 로마군의 통상적인 행군시간이니까, 9시간은 강행군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휴대한 짐이 적었기 때문이다. 트레베리족의 서쪽에 사는 레비족의 '후방 지원' 덕분이었다. 이렇게 하여 로마군은 모젤 강변에 있는 트레베리족의 본거지 트리어에 도착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트리어 공략에 성공했다. 승리한 병사들은 트리어 전체를 파괴하고 불지르고 주민을 몰살하자고 주장했다. 트리어는 보쿨라를 비롯한 로마군 장교들을 죽인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와 율리우스 투토르의 고향이 아니냐. 전리품이나 포로를 팔아치우는 것은 승자의 권리지만, 그런 이익은 필요없으니까 모든 것을 불태우고 주민들도 모조리 죽여서, 트리어라는 도시 자체를 지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승리와 관용
보복을 주장하는 부하 병사들에게 사령관 켈리아리스는 말했다. 이제 로마인끼리 싸우는 내전은 끝났다. 어린애도 알 만큼 유명한 로마 군단병의 투지는 외부의 적에게로 돌려져야 한다. 이렇게 말한 켈리아리스는,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트리어로 끌려온 뒤에도 비참한 상태로 살고 있던 로마 군단병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초라한 오두막이나 천막에 갇혀 있던 이들은 우군이 트리어 공략에 성공했는데도 달려나오지 않았고, 해방된 기쁨을 터뜨리며 동포들과 얼싸안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위험과 공포는 사라졌을 텐데도 여전히 오두막이나 천막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런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는 천하 일품의 솜씨를 보이는 타키투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햇빛에서도 달아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켈리아리스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때다 하고 생각한 켈리아리스는 병사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을 버리고 야만족의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것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하다. 그들의 불명예스러운 행위와 그후의 비참한 처지도 원인을 따져보면 그들의 사령관이나 군단장 몇 명이 황제 자리에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용한 적의 악의에 우롱당한 결과다. 그러니 모든 것은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된다. 그들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황제(베스파시아누스)도 사령관인 나(켈리아리스)도 문제삼지 않고, 없었던 일로 할 작정이다. 귀를 기울이는 병사들에게 켈리아리스는 말을 이었다. 트리어 공략을 위해 건설한 로마 군단 숙영지에 과거의 배신자들을 맞아들여라. 그러고는 그들을 비웃거나 모욕하거나 냉대하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병사들은 비참한 동료들에게 해진 옷을 벗고 몸을 씻고 군단병의 새군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켈리아리스는 트리어에 있다가 붙잡힌 트레베리족과 링고네스족의 유력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페틸리우스 켈리아리스는 9년 전인 서기 61년에 당시의 네로 황제에게 브리타니아의 제9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서기 70년에는 50대였을게 분명하다. 야전 경험이 풍부한 이 장수의 연설은 타키투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나 개인은 언변이 뛰어난 정치인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다. 로마 시민의 존재 이유를 말이 아니라 무기로써 인정시키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대들의 현재 상태(패배자의 신세)를 생각하면 변변찮은 내 이야기라도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것이다. 이제 트레베리족이나 링고네스족과 로마의 싸움은 끝났다.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냉정하게 듣고 생각할 때일 것이다. 그대들의 땅만이 아니라 다른 갈리아인의 땅(즉 라인 강에서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갈리아 전역)에 애당초 로마인이 들어온 것은 로마인의 정복욕 때문이 아니라 당신네 조상이 초청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카이사르가 정복하기 이전의 갈리아는 수많은 부족들이 허구한 날 싸움을 일삼고, 그 때문에 자멸 직전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카이사르도 갈리아인의 요청을 받아 갈리아에 들어왔지만, 다른 부족들은 게르만족인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게르만족은 그 기회에 갈리아를 수중에 넣으려고 마음먹었다. 로마인이 게르만족과 얼마나 많은 싸움을 치러야 했는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를 생각하면, 게르만족의 전투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로마인은 라인 강을 방위선으로 확립하는 정책을 취했다. 물론 이것은 본국 이탈리아를 방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리오비스투스(카이사르에게 패한 게르만족 장수)의 자손이 갈리아 전역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대들은 키빌리스가 이끄는 바타비족이나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이 카이사르 시대에 살았던 그들의 조상과는 달리 갈리아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따뜻하게 대할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이다. 그로부터 130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도 게르만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쳐들어올 기회를 노리면서 갈리아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민족과 융화하기를 싫어하고, 다른 민족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정착을 싫어하는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풀 한포기 나지 않는 불모지가 남을 뿐이다. 그런 게르만족이 비옥한 갈리아의 주인 자리를 계속 노리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게르만족이 갈리아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상투적으로 써먹는 말은 언제나 자유와 독립이다. 하지만 잊지 말라. 남을 지배하려는 민족치고 이 두마디를 기치로 내걸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다는 인간 세계의 냉엄한 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카이사르가) 이땅을 로마법의 지배하에 귀속시킬 때까지 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노골적인 힘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복자가 된 우리 로마인은 승자의 권리를 제국 전체의 평화 수립을 위해 사용했다. 물론 그대들에게는 속주세를 낼 의무를 부과했다. 하지만 민족간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병사가 필요하고, 병사에게는 급료를 주어야 하고, 급료를 주려면 세금을 징수할 수 밖에 없다. 로마가 갈리아에 요구한 것은 속주세뿐이다. 다른 것은 모두 그대들의 자치에 맡겼다. 뿐만 아니라, 동화정책을 창시한 카이사르 시대부터 이미 로마군의 요직에도 많은 갈리아인들이 등용되었다. 속주 총독까지도 갈리아 출신에게 맡겼지 않은가(네로 시대의 율리우스 빈덱스를 말한다)차별도 하지 않고 문호도 닫지 않는다는 게 로마의 방침이다.(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개혁 이후 속주 출신에게도 원로원 의석을 준 것을 가리킨다).
훌륭한 황제는 속주민에게도 이익을 주지만, 그것은 우리 로마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됨됨이가 좋지 못한 황제의 경우에는 가까이에 있는 우리 로마인이 그 폐해를 직접 받게 된다.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거나 반대로 비가 너무 많이 내리거나 하는 자연 재해를 인간인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됨됨이도 우리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됨됨이가 좋지 못한 황제가 백성을 방치하든 탐욕을 부리든, 참을 수 있는 동안은 참을 수 밖에 없다. 트레베리족 출신인 투토르나 쿨라시쿠스가 통치하면 모든 게 좋아지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 그들도 자기네 부족의 안전을 보장하려면 게르만족이나 브리타니아인에 대한 방위책을 강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로마인을 갈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물론 그런 일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겠지만, 만약 허락한다면 어떤 상태가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제국 전역은 끊임없는 전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로마는 무려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행운을 활용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확고한 규율을 부과하고, 파괴하려는 자를 타도함으로써 자신과 남을 위한 평화를 쌓아올렸다. 만약 이 평화가 무너진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사람은 당신네 갈리아인다. 전쟁을 유발하는 최대 원인은 황금과 부에 대한 욕망인데, 지금은 그것이 당신네 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결단을 내려주기 바란다. 평화를 누리면서 안전하게 번영하고 있는 당신네 도시와 마을을 생각하고, 거기서는 정복자도 피정복자도 평등한 권리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그것이 사랑하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주기 바란다. 그대들은 다른 갈리아인과 달리 로마에 반대하는 봉기를 체험했다. 그 체험을 근거로, 그대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게 뻔한 반란에 계속 가담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 로마인에게 돌아와서 공존과 공영을 함께 누리는 동지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 주기 바란다."
트레베리족과 링고네스족의 유력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켈리아리스의 이 연설만으로 충분했다. 로마 제국 영토인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만계 갈리아인도 '갈리아 제국'을 떠나 로마 제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뒤에 남은 것은 게르만족뿐이다. 이래서는 '갈리아 제국'을 자칭할 자격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도 사태가 심각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트레베리족 출신인데도 반로마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와 함께 켈리아리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켈리아리스가 갈리아 제국 황제가 될 마음이 있다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로마 장수는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그래도 키빌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켈리아리스에게 보낸 편지 사본을 수도 로마에 있는 도미티아누스에게 보낸 것이다. 도미티아누스의 고발을 듣고 일선 사령관의 배신을 염려한 무키아누스가 캘리아리스를 해임하여 본국으로 소환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젊은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보내온 그 편지를 일단 읽기는 했지만, 당장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켈리아리스는 라인 강 서쪽을 다시 산하에 넣은 뒤. 라인 강 어귀를 향해 진격했다. 한편 갈루스가 맡은 4개 군단도 집결을 끝냈다. 이제 키빌리스와 클라시쿠스는 켈리아리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갈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맹공에 직면하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퇴각을 계속하면서도 용감하게 저항했다.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와 율리우스 투토르는 격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아내와 누이는 로마군에게 사로잡혔다. 게르만족은 가족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키빌리스는 궁지에 몰렸다. 어떻게든 겨울까지만 버티면 한숨 돌릴 수 있었겠지만, 과감하게 공격하는 켈리아리스는 그럴 시간도 주지 않았다. 바싹 추격당한 바타비족 지도자는 로마군 사령관에게 회담을 요구했다. 두 사람의 회담은 라인강 어귀의 여울에 떠 있는 섬에서 이루어졌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와 페틸리우스 켈리아리스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었나 싶다. 둘 다 10년 전인 서기 60년까지는 저지 게르마니아군에서 각각 군단장과 보조부대장으로 함께 복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빌리스는 61년부터, 켈리아리스는 62년을 전후한 몇 년 동안 휘하 병사들과 함께 브리타니아에 파견되어 브리타니아 제패에 참가했다. 그후에는 두 사람의 길이 갈라져서, 키빌리스는 다시 저지 게르마니아로 돌아가고, 켈리아리스는 도나우 전선으로 보내졌다. 나이도 열살 이상은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키빌리스는 군대 경력도 오래 되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먼 친척인 켈리아리스도 베스파시아누스처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사람이니까 병영에서 잔뼈가 굵은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로마군에서는 로마인 장교만이 아니라 속주민 출신인 보조부대장도 총사련관이 소집하는 작전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서로 적이 되어 싸우고 있지만, 키빌리스가 켈리아리스와 직접 회담하기로 결심한 이면에는, 그리고 켈리아리스가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고 키빌리스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면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회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타키투스의 '역사'는 키빌리스가 막 이야기를 시작한 단계에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타키투스가 거기서 붓을 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다음 페이지가 중세를 거치는 동안 소실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알려져 있다. 바타비족은 몰살당하지도 않았고 노예가 되지도 않았다. 로마에 반기를 들기 전과 똑같이 로마의 동맹부족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속주가 된 것은 아니니까 속주세를 낼 의무도 없다. 속주세를 내는 대신 로마군에서 보조병으로 복무하는 것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처형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에 맡고 있던 바타비족 부대장 자리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그후 그의 소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든 갈리아인 베르킨제토릭스나 테우토부르크 숲에서 로마의 3개 군단을 섬멸한 게르만인 아르미니우스의 뒷 소식에 대해서는 여러 권의 역사책이 그들이 최후까지 추적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유독 키빌리스만은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처형당했다면 누군가가 기록했을 텐데 그것도 없다. 또한 생존을 증명하는 사료도 남아 있지 않다. 평범한 개인으로 돌아가 라인 강 동쪽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았을까. 로마군에 사로잡힌 그의 아내와 누이도 그에게 돌려보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후의 소식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키빌리스가 중용한 점쟁이 벨레다는 이탈리아로 보내져,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낮에도 컴컴한 숲의 나라에서 눈부신 햇빛의 나라로 옮아가면, 게르만의 신들을 섬기는 무당도 위력이 약해질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 게르만족 무당은 이탈리아에서 점집을 개업했는데 상당히 번창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갈리아 제국'은 반 년도 지나기 전에 무너졌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바타비족을 이끌고 반란의 봉화를 올렸을 때부터 헤아려도 1년도 채 안된다. 하지만 이 '갈리아 제국' 문제에 대한 로마인의 대처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 로마를 배신하고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군단병들을 '지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한마디로 용서했다. 이들은 로마시민으로서 조국을 배신했을 뿐 아니라, 로마의 정규병으로서 로마군의 규율을 어겼다. 요즘 같으면 군법회의감이다. 둘째, 로마 제국의 속주민으로서 게르만족의 유혹에 넘어가, 갈리아 제국을 세워 로마로부터 독립하고자 한 트레베리족과 링고네스족에 대해서도 전혀 죄를 묻지 않았다. 전사자를 빼면, 이들 두 부족의 유력자들 가운데 처형당한 사람은 반란 주모자인 율리우스 발렌티누스뿐이었다. 셋째, 바타비족에 대한 처우다. 반란의 주동자 역할을 맡은 이 부족에 대해서도 로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방침으로 일관했다. 이 일련의 현상에 '보복'이라는 낱말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인은 '승자의 권리'(유레 빅토리아이)를 행사하기보다 '관용'(클레멘티아)을 택했다. 휴머니즘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라, 그쪽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행각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켈리아리스 독단으로 이루어졌을까.
로마군에서는 전통적으로 일선 사령관에게 거의 무제한의 재량권이 주어졌다. 한니발과 강화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독단으로 결정했고, 갈리아를 제패한 카이사르도 독단으로 전후 처리를 진행했다. 네로 황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력을 맡겼는데도, 코르불로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르지 않고 강화를 맺기로 결정해버렸다. 다만 이들 일선 사령관의 결정을 먼 훗날까지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하려면, 즉 국가 정책으로 확립하려면 원로원의 의결과 시민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렇긴 하지만, 부결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켈리아리스는 위에서 예로 든 명장들처럼 로마 역사에 빛나는 거물은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강대한 적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속주민에 불과했다. 9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단계에서 이미 로마 쪽에는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승리만 명확해지면, 전후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도 분명해진다.
내 상상이지만, 켈리아리스는 본국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이미 무키아누스한테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자리를 굳히는 작업을 전념하고 있던 무키아누스가 택한 방식이야말로 '보복'이 아니라 '관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냉철한 정치가는 패자에 대한 처우를 잘못했기 때문에 패자의 원한을 산 비텔리우스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그리고 비텔리우스에게 보복하겠다는 일념으로, 비텔리우스 편에 선 크레모나를 불태우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여 크레모나의 참극을 빚은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를 교묘하게 좌천시켜버렸다. 보복으로 응수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자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무키아누스는 또한 원로원을 통해 전쟁터가 된 북이탈리아 주민이 입은 피해를 보상해주기로 결정했는데, 그 대상에는 비텔리우스 편에 선 크레모나 주민도 포함되어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방침은 본국 이탈리아에서도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비텔리우스파 사람들 가운데 처형된 것은 친동생인 루키우스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싸운 병사들 중에도 처형단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 해도 잘하지 못하는 법이다. 켈리아리스도 수키아누스의 생각에 동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복을 주장하는 부하 병사들을 통제할 수 있었고, '배신자'인 군단병들도 순순히 원상태로 돌아가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속주민도 다시금 로마의 패권을 인정할 것을 승낙하고 주모자였던 키빌리스가 저항을 포기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키아누스와 켈리아리스가 보복보다 관용을 택한 이유는 또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바타비족 반란에서 갈리아 제국 수립에 이르는 이 사태의 진정한 책임은 로마 쪽에 있다고 로마인 자신이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타키투스도 "로마인끼리 싸운 내전의 여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년 사이에 황제가 세 명이나 바뀌고, 군단병들이 편을 갈라 서로 격돌하는 혼란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속주병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인 자신이 무능함을 보이지 않았다면, 속주민이 로마인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갈리아 제국 소동은 당연히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다. 이런 사정을 무키아누스와 캘리아리스도 충분히 알고 '관용'을 베푼 게 아니었을까. 따라서 이 두사람에게 관용과 냉철함은 모순된 것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g나다'는 방침으로 일관한 켈리아리스의 다음 임무는 동료 칼루스와 협력하여 라인 강 방위선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냉철함'이 필요한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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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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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남천 - 신라인의 광명사상을 끌어안은 하천
여성적인 신성한 내
남천은 경주정신의 한 흐름이다. 또한 옛 서라벌의 정취를 싸안고 흐르던 풍류의 내이기도 했다. 남천은 삼국유사를 보면 상류를 사등이천이라 부르며 중류로 내려오면서 모래내, 모기내, 해내 등으로 불리다가 하류로 오면 황천으로 불리는 등 다채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천의 길이는 21km. 이 하천은 하류에서 서천으로 합류되며, 알천을 더하여 영일만으로 들어가는 형산강의 지류이다. 그 근원지는 토함산 서북 계곡이다. 동산령 서남계곡의 신계와 마석산 동쪽을 흘러내리는 시리계 등 두 갈래 물이 합쳐서 상류를 이룬다. 남천은 알천과 더불어 경주인들에게는 퍽 유서 깊은 내이다. 남천의 이름이 사등이내, 해내 또는 사천 등으로 불리워진 것을 보면 사천의 '사'는 원래 '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서'는 동쪽을 의미한다. '동'은 곧 '빛'을 의미하며 '밝다'는 뜻을 갖는다. 사등이내는 '동쪽 봉우리 내'라는 의미를 갖는다. 문천은 잘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사천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대로 '몰개'('모래'의 방언)로 불러 그것이 '모갱이'('모기'의 방언)로 전이되면서 생긴 이름인 듯하여 원래의 이름(사내)에서 많이 벗어난 뜻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남천은 '밝은 내'라는 의미 그대로 신라인의 광명사상과 닿는 신성한 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내는 알천과 퍽 대조적이다. 알천은 그 물길이 밋밋하고 물 흐름의 속도가 '빠른 남성적인 내인데 비해, 남천은 냇길이 구불구불하고, 물 흐름이 완만한 여성적인 내이다. 알천은 자갈이 많으나 남천은 모래가 많다 알천은 수시로 범람하여 경주인들에게 애를 먹였으나 남천은 그지없이 조용하다. 남천은 불국사를 감싸안고 흐르면서 내동평야를 지나, 배반, 인왕들을 거쳐 남산 아래로 흐른다. 그 다음 반월성을 지나 서쪽으로 몸을 틀며, 오릉을 빠져 서천으로 들어간다.
남천의 다리에 얽힌 일화
남천은 그 주위에 숱한 절들을 갖고 있었다. 남천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설화도 꽤 많다. 인왕사, 임용사, 영묘사, 담엄사, 천관사 등의 지금은 사라진 절들이 모두 이 내를 끼고 세워졌다. 이 내에 놓인 다리도 꽤 많았던 듯,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남천이 반월성을 끼고 있는 만큼 남산과 반월성을 잇는 다리가 많았다. 신라 당시 남산에 세워진 남산성은 경주의 군사요충지였으며, 궁성의 피난처였다. 또한 남산은 신라인이 불국토를 꾸미려고 숱하게 절을 세웠던 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경주시가지와 반월성은 남천을 건너 남산과 빈번하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현재 추측되는 다리터는 경주박물관 서편의 효불효교, 반월성 남편의 일정교와 월정교 등과 오릉 북쪽의 남정교 등이 있다. 이중 일정교는 남산과 반월성을 잇는 다리로, 반월성 남쪽 성벽이 움푹 팬 것으로 보아 그쪽에 놓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정교 자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월성 반대편 언덕에 교대(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기둥)로 보이는 석축이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일정교는 춘양교라고도 불렸다. 월정교는 일정교의 서편에 위치했다. 이 다리는 남산 쪽에서 계림 앞을 지나 경주시내로 통하는 다리였으며, 옛부터 유교 또는 문천교로 불리기도 했다. 월정교의 흔적은 비교적 뚜렷하여 다리가 있었던 양쪽 냇가에 석축이 남아 있다. 또한 기초되는 초석이 내를 가로지른 채 그대로 놓여 있다. 초석을 통해 추측해보면 이 다리는 넓이가 14m, 길이가 63m나 되는 큰 다리였다. 다리 사이에는 12.6m 간격으로 교각을 돌로 짜 올렸다. 그 위에 목재로 무지개 다리를 가설한 듯하다. 무지개 다리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고려 때의 시인 김극기의 시 중에 '반월성 남쪽 토끼재 가에 무지개 다리 그림자가 문천에 거꾸로 비쳐있네'라는 귀절로 봐서 틀림없는 듯하다. 월정교는 이 시로 봐서 고려 대까지 남아 있었던 듯하다. 월정교 다리 위에서 신라 태종무열왕 때 승려 하나가 뛰어내려 물에 빠졌다.
[월정교 야경]
그는 다름아닌 원효였다. 다리 건너편에는 요석궁이 있었으며 그 궁전 안에는 무열왕의 딸인 공주가 거처하고 있었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구실로 요석궁에 들어가 요석공주와 동침한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신라의 석학 설총이 태어난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바로 남천이 맺어준 인연이기도 했다. 경덕왕이 충담사를 만난 것도 월정교 다리 부근이었다. 충담사는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고 내려오던 길에 경덕왕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충담사는 유명한 향가인 '안민가'를 부른다. 이 향가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절로 태평하리라'는 끝구절이 유명하다. 박물관 서편에 있었던 효불효교도 현재 흔적만 남아있다. 이 다리는 속칭 '칠성다리'라 불린다. 이 다리에는 과부어미와 그 자식들간의 애틋한 이야기가 서려 있다. 신라 때 일곱자식을 둔 과부 어머니가 살았다.
그녀는 수남이라는 곳에 사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래서 아들들이 깊이 잠든 밤에 남천물을 건너 그 남자와 어울렸다. 이 사실을 아들들이 알았다. 아들들은 의논했다.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시니 자식의 마음이 편하겠니"하고 자식들은 어머니를 위해 돌다리를 지어주었다. 이에 그 어머니가 부끄러워 행실을 고쳤다고 하여, 그 이름을 효불효교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후대에 꾸며진 얘기라는 느낌이 든다. 신라 당시의 정조 관념은 조선 때와 다르다. 그 당시만 해도 남편없는 여자는 자유로왔던 경우가 삼국유사 중에 많이 나온다. 이 얘기는 아마 삼국유사 속에 유교적인 교훈이 끼여 들어서 생긴 설화인 듯하다.
'문천도사'의 경치
이처럼 남천은 숱한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김유신이 애인 천관의 집에 갈 때도 이 내를 건넜을 것이다. 임금이 즉위하여 신궁에 참배할 때와 포석정에 거동할 때도 이 내를 건너갔을 것이다. 특히 남산의 많은 절을 참배할 때는 경주인들이 떼를 지어 이 내를 건너가야 했을 것이다. 월정교의 다리 자리가 큰 것은 이처럼 사람의 왕래가 심했기 때문이며, 더불어 남산성으로 무기와 군량미를 수송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남천은 활짝 핀 부용처럼 펼쳐진 남산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고즈넉히 흘러내린 그림 같은 내였다. 반월성을 지나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유명했던 천경림과 남정숲 사이를 남천은 꿈결처럼 흘러내렸다. 더욱이 그 모래의 고움은 옛부터 유명했다. 그래서 옛부터 문천도사라 일컬어졌다. 이 말은 물의 흐름이 완만하여 고요히 흐르는 물에 금빛모래가 치오르는 듯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냇바닥이 높아지고 제방이 쌓여져 옛 정취는 많이 없어졌다. 더욱이 논으로부터 농약이 흘러들어 내 주변이 공해로 시들어가, 신라 후예들의 의식에서도 내의 신성한 의미가 사려져가고 있다.
가슬갑사지 - 화랑도 '세속오계'의 전수장
'가슬갑사유적지'
청도의 거찰 운문사 입구에서 동쪽으로 5km쯤 비포장도로를 따라 간다. 후미진 산골길을 거슬러 오르면 삼계리라는 산골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동쪽의 문복산에서 쏟아져내리는 계곡물이 요란하다. 이 마을에서 좁은 산길을 따라 문복산을 오른다. 4km쯤 가파른 산길을 걸어 폭포로 이어진 계곡을 따라 오르면 산의 중턱 가까운 바위 계곡 옆 잡초로 덮인 길가에 자그마한 비석 하나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가슬갑사유적지'라 새긴 글씨가 뚜렷하다. 70년대 중반에 청도 출신의 모 인사가 세웠다는 이 비석은 높이가 1m정도. 주위엔 절터 특유의 대나무들이 솟아 있다. 참나무 등 잡목들이 우거져 옛 절터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절터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이 일대 1천여 평의 넓이는 흙에 묻혀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 쌓은 듯한 축대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 흔적들은 잡목과 잡초, 낙엽들 속에 묻혀 조심해서 살피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다. 절터 바로 옆에는 두 개의 폭포가 쏟아져내려 그 물소리가 이 일대를 덮고 있다. 이곳은 절이 사라진 이래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원시의 절경을 조금도 손상이 없이 가지고 있다.
세속오계의 현장
가슬갑사는 7세기 초에 신라의 고승 원광스님이 머물렀던, 유명한 '세속5게'의 현장이다. 원광은 이곳에 머물면서 신라의 중견지도자(화랑도)들을 수련하게 했다. 그런 만큼 이 일대는 화랑들의 수도장이며 삼국통일의 웅지를 폈던 신라 젊은이들의 호국의 장소이다. 당시 청도군 운문면 일대에는 5갑사가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소작갑사(일명 대비갑사), 북쪽에 소보갑사가 그것이다. 이들 5갑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운문사에 소장되어 있는 운문사 사적에 의하여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5갑사는 원광이 중국에서 본국(신라)에 돌아온 서기 600년(진평왕 22년)이전에 이미 창건된 듯하다. 운문사 사적에 따르면 5백 57년 (진흥왕 11년)에 신승이 금수동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을 수도하다 절을 짓기 시작, 7년 만에 5갑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오갑사가 창건된 해는 560년이 된다. 이때는 원광법사가 환국하기 40년 전이 된다.
[1718년에 간행된 ‘청도군 호거산 운문사사적(淸道郡虎踞山雲門寺事蹟)’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의 작은 암자에서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오갑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오갑사는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총칭하는 것이다. 오갑사와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원광법사이다. 원광 스님의 속성은 설씨 혹은 박씨라고 하며, 신라 왕경인이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 등에서 “성품이 허무와 정적을 좋아하고 말 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으며 얼굴에 성내는 기색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25세에 중국 진나라 수도 금릉(지금의 남경)으로 유학을 떠났었는데, 어느 날 장엄사 승민 스님의 제자에게서 법문을 듣고 감화되어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승려가 되기를 청하였다. 일반 유학생에서 유학승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운문사를 중심한 5갑사의 성격은 일반 사찰과는 달랐던 듯하다. 운문사 사적기에 이곳을 '복국우세지장'이라 부르고 있다.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돕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들 사찰들은 신앙으로서의 사찰과는 다른 목적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깊은 산 속에 절을 지은 데다 이들 5개의 절들이 신라통일 직후에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있다. 이러한 '미스터리'는 왜 생겼을까. 삼국유사에는 귀산과 추항이라는 젊은이가 가슬갑사에 찾아와 세속오계를 전해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속오계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며, 싸움에 임해서 물러나지 않으며, 생물은 가려서 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5계의 설정은 비불교적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원광이 '가슬갑사에 점찰보를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점찰보는 점찰경에 의한 법회를 말한다. 점찰경은 지장보살이 나무쪽을 던져 길흉과 선악을 점치는 법을 밝힌 것인 만큼 불교 본래의 신앙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이들을 통해볼 때 5갑사는 신앙보다는 교육을 위한 시설이며, 특히 군사교육을 위한 시설이었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위장된 화랑교육장
이 절들이 세워질 무렵은 신라의 발흥기였다. 신라역사상 가장 현명한 왕으로 꼽히는 진흥왕은 즉위함과 동시에 삼국통일이라는 거창한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선 각 지방별로 세력을 가지고 있던 6부장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힘을 왕실에 묶어두기 위해 불교를 공인하여 그것을 정신의 구심점으로 삼아 왕권부터 강화시켰다. 그 다음 원화에 이은 화랑의 청소년집단을 구상하여 이들 집단을 통해 전체 국민의 충성심을 뽑아냈다. 이러한 작업들은 확실히 그 후의 문무왕에 의한 삼국통일에 기초를 마련한 위업들이었다. 5갑사의 창건은 실로 이러한 구상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5갑사가 청도군 운문면 일대에 세워진 까닭은 이곳이 깊은 산골이라 들킬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당시의 신라군사기지의 요충지였던 언양과 양산이 이곳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운문산은 경주에서도 가깝다. 가슬갑사에서 경주로 통하는 산길은 삼계리에서 월성군 산내면을 거쳐서 가는 길이 있다 또한 동쪽 문복산록을 넘으면 언양과 산내면을 거쳐 내남면을 지나 경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길임은 그 연도에 지금도 단련장, 채공지, 숙영지, 소규모의 돌성 도요지 등이 흩어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교육도장이자 수도권방위상의 요충으로 중요한 곳이었을 듯하다. 더욱이 이곳은 해발 1천2백m의 높은 운문산록인만큼 백제와 고구려에 들키지 않는 은밀한 지점이며, 왜구의 침공 위험도 없는 곳이라 군사교육장 같은 국가시설을 짓기엔 안성마춤이었을 것이다.
통일후 5갑사가 폐쇄된 이유
그렇다면 신라통일 후 5개의 갑사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들 절들은 왜 삼국통일과 더불어 똑같이 폐사가 됐을까. 이들 절들이 삼국통일과 더불어 동시에 폐사된 것은 전란이나 천재지변으로 돌릴 수 없는 '미스테리'이다. 추측해본다면 이들 절들은 삼국통일을 위한 인재교육 목적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만큼 삼국통일이 되어 그 임무를 다하자 자동적으로 철거된 것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이곳은 가슬갑사를 중심으로 절로 위장된 또는 후국불교적인 발상에서 세워진 거대한 교육도장이었으며 이 도장의 특수임무가 달성되자 자연히 폐쇄된 것이리라. 이 절들의 폐쇄와 함께 신라 젊은이들의 숨결도 이 골짜기에 묻히고 폭포물소리에 덮혀 잊혀져 버렸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들은 거의 추측에 의해 5갑사터임을 밝히고 있을 뿐 확실한 증거는 없다. 5갑사 중 현재 남아있는 절은 대작갑사와 소작갑사뿐이다. 이들 절은 후대에 폐사된 자리에 재건한 절들이라 옛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운문사 경내 중심부에 '작압전'이라는 자그마한 암자가 남아 있어 그나마 어렴풋이 옛 사실을 떠올려 줄 뿐이다.
불국사와 그 주변 절터 - 신라인의 이상세계인 불국토
불국사는 석굴암과 더불어 신라의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전생과 현생의 양부모를 위해 건립한 절이다. 김대성과 관계있는 유적으로는 이밖에도 장수사와 웅수사, 몽성사 등이 있다. 이들 절들은 모두 토함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불국사와 석굴암뿐이며, 장수사지에 3층석탑이 서 있을 뿐이다.
전생과 현세의 부모 위한 절
김대성은 신라 신문왕 때 사람으로 원래 모량리에서 살았다. 그는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하며 머리모양이 성처럼 새겼기 때문에 대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어머니와 함께 남의 밭을 부쳐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마침 흥륜사에서 육륜회라는 법회를 열기 위해 시주를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현세의 가난을 벗고 내세에는 복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에서 고용살이해서 겨우 마련한 밭을 선뜻 보시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대성은 죽었으나 바로 재상 김문량의 집에 점지가 되어 다시 그 집의 아들로 환생한다. 대성은 이 기이한 인연 때문에 모량리에 있던 전생의 어머니와 현생의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자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서 곰을 잡았다. 그날 밤 산밑에서 자니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그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대성은 놀라서 곰을 위해 절을 세우겠다고 약속,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를 지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의 신앙심은 깊어졌다. 그리하여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석굴암)를 세웠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이다. 일연은 "한 몸으로서 두 세상에 걸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듣기 드문 일'이라고 '착한 보시'의 영험을 찬탄하고 있다.
김대성의 삶은 불교적인 인연관계가 두드러진 삶이다. 그가 보시한 한 뙈기의 밭은 큰 복전을 이루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며, 동시에 두 부모를 모시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삶은 삼라만상의 정령들과도 통해 있는 기이한 삶이었다. 곰과의 관련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석굴암을 지을 때는 천신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그의 의식은 인간과 하늘 및 자연을 관통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지극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세운 절이 불국토를 염원한 신라인의 꿈과 닿아 있는 것이라면 그의 삶은 그 자체가 바로 신라인의 꿈이며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인에 의해 '김대성 설화'가 구성된 것은 곧 신라인들이 이 허망한 삶의 한계를 벗어나 걸림없는 경계에 들고자 한 염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상은 남산을 절과 불상으로 온통 덮어 청정한 극락세계로 꾸미려고 구상했던 그 의식과 통한다. 그 의식은 전생, 현생, 그리고 내생 등 3세의 세계는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 공존하며 같은 궤도 안에서 순환한다는 신라인의 현실사상 및 낙천성과도 이어진다.
신라인이 그린 불국토 재현
이처럼 '김대성 설화'를 낳을 정도로 신라인의 꿈과 닿아 건립된 불국사는 언제 세워졌을까. 신문왕대(681__692년)의 김대성이 창건했다고 하나 기실 기록에 의하면 법흥왕 15년 (서기528년)에 창건됐다고 한다. 이 해는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확실한 증거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없다. 김대성이 설화는 그렇다면 완전히 허구일까. 학계에서는 김대성의 설화는 창건설화 형식을 띠고 있으나 기실은 중창설화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김대성은 기왕의 불국사를 중창했으며, 이때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 설화의 중요성은 곧 불국사를 향한 신라인의 꿈과 염원이 그만큼 컸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큰 허물은 아니다. 불국사가 자리잡은 곳은 경주인들이 동악으로 떠받들던 영산인 토함산의 서쪽 기슭이다. 앞으로는 조양, 모화의 평야가 펼쳐지고, 그 너머 남산(금오산)이 활짝 핀 부용꽃처럼 벌어진 것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더불어 영산 토함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위치하며, 그 장엄한 자리잡음이 인간이 자연과 맺을 수 있는 조화미의 한 극치를 이루고 있는 예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이상적인 세계 즉 불국의 상징이다. 이 절은 세 개의 공간으로 대별되어 이상 세계를 그리는 신라인의 세가지 의식모형을 드러낸다. 대웅전과 극락전 및 비로전의 구성이 그것이다. 대웅전은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 부처의 사바세계 불국토이다. 극락전은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미타부처의 극락세계 불국토이다. 비로전은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부처의 연화장 세계 불국토이다. 이들 세계의 주불은 모든 사람의 마음의 본래 모습 또는 마음이 귀의하는 고향을 상징한다. 이들 세계와 현세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석단의 위는 이들 세계가 있는 불국토이다. 아래는 보통 인간의 세계이다. 보통 인간의 세계와 불국토는 각각 33개의 계단을 가진 돌다리인 청운, 백운다리와 연화, 칠보다리를 통해 연결되고 있다. 청운, 백운다리는 석가여래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과 연결되고, 연화, 칠보다리는 아미타여래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된다. 세속의 보통인간은 수련을 거쳐 이 다리를 올라가야 부처의 나라에 이른다는 것을 이 계단과 무지개다리는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다리 위의 33계단은 33천을 상징한다. 이 다리는 부처의 경지인 성역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다리이다. 그러므로 이 다리는 바로 희망과 환희와 축복이 뒤범벅이 된 그런 다리라 할 수 있다. 청운, 백운다리를 지나 자하문의 관문을 통과하면 곧 찬란한 부처의 몸인 석가, 다보탑이 보이고 대웅전의 부처님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 돌다리는 현재 철창으로 굳게 막혀 있어, 일반인들은 옆으로 돌아 동쪽회랑에 내놓은 문으로 출입해야 한다.
곰 위해 세운 절
한편 불국사 이외에 김대성의 유적으로는 석굴암이 있으며, 장수사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곰을 잡았던 곳에 장수사를 세웠다고 했으나, 불국사의 역사를 담은 '불국사고금창기'에는 그가 곰을 발견한 곳에 장수사를 세웠고, 곰을 잡은 곳에는 웅수사를, 꿈을 꾸었던 곳에는 몽성사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웅수사 자리는 토함산 정상인 석굴암 위쪽 편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절도 사라지고, 흔적도 희미하다. 그 자리에는 일제침략기 당시까지도 세 개의 불상이 있었다고 전해 왔으나 두 개는 사라지고 한 개는 현재 석굴암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장수사지는 월성군 내동면 마동의 속칭 탑골, 탑마을 혹은 장수골로 불리는 마을 남쪽에 있으나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장수사의 석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거의 동일하나 신라초기의 탑은 아니다. 이 절은 1593년에 병화로 불탔으며, 그 후 중건됐으나 조선말기에 폐사됐다고 한다. 몽성사터는 현재 없으나, 석굴암을 오르는 차도 중간에 몽성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이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의 궁성들 - 흔적조차 없는 천년영화
모두 사라져버린 신라 궁성들
1천 년의 역사를 누린 신라임에도 불구하고, 경주에는 신라의 궁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궁성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확실한 궁터로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궁궐터가 그 위치조차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터는 창림사터인 초기의 궁궐터와 반월성, 동궁이었던 안압지뿐이다. 이밖에 금성, 만월성 등과 요석공주의 거처지인 요석궁 등은 그 위치를 대강 추측하고 있을 뿐, 확실한 고증이 안 되고 있다. 그외 영창궁, 영명신궁, 예궁, 청연궁, 본피궁, 사량궁, 양궁, 선천궁, 회궁, 남하소궁, 북궁, 적반궁, 고찰궁, 남도원궁, 복원궁 등 많은 궁궐들의 이름이 전해오고 있으나 거의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위치가 확실한 반월성과 안압지의 경우, 아직까지 궁궐의 규모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어, 경주 유적은 핵이 빠진 채 보존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신라의 첫 대궐은 지금의 창림사터이다. 오릉을 지나 남산 서쪽 계곡으로 접어들면 나정과 남간사지로 통하는 골짜기가 있고, 그 다음이 창림사지이다. 이곳에는 높이 7m의 거대한 3층석탑이 있고 산라명필 김생이 글씨를 썼다는 비의 받침인 돌거북 한 쌍이 엎드려 있다. 이곳에서는 창림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곳은 신라의 첫임금 박혁거세가 머물렀던 대궐로 원래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공의 집이었다. 이 궁궐은 통일 신라시대에 와서 없어져버렸으며, 8세기 말에 창림사절이 세워졌다. 그런 만큼 궁궐의 흔적은 전혀 없다.
그 다음에 생긴 궁궐이 금성이었다. 금성은 박혁거세 즉위 21년 만인 BC 37년에 6촌의 중심인 양산촌(현 경주 시내) 중앙에 쌓은 궁성이었다. 이 성은 둘레가 729.4m(2천 4백 7자)가 되는 자그마한 성이었는데 동, 서, 남, 북으로 네 개의 문이 열린 토성이었다. 금성은 서기101년 파사왕이 궁성을 반월성으로 옮긴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성의 위치는 현재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금성 서쪽 시림에서 한 닭이 울어 김알지가 탄생했다' 또는 '금성 동남쪽에 월성을 쌓았다'라고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부(구 박물관)의 동쪽 4리에 금성터가 있다'라고 했다. 이상의 기록들의 종합하면 금성이 위치는 경주의 쪽샘과 첨성대 사이에 있은 듯하다. 현 미추왕릉 동편 도로를 건너면 민가들 사이에 토성터의 일부가 남아 있어 이를 밑받침하고 있다.
[안압지]
천혜의 요새 반월성
그 다음 생긴 성이 월성(반월성)이다. 삼국유사에는 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석탈해가 어릴 때 토함산에 올라 바라보니 경주시내의 한 봉우리가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게 눈에 들어왔다. 산을 내려와 찾으니 곧 호공의 집이었다. 탈해는 몰래 호공의 집 둘레에 대장간 숯을 묻어두고 호공에게 찾아가 이곳이 자기의 할아버지 집이었다고 주장, 관에 소송을 걸었다. 관에서 탈해에게 "네 집이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했다. 탈해는 "우리는 본시 대장장이였다. 당시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빼앗겼다. 땅을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보니 과연 대장간 숯이 나왔으므로 그 집은 드디어 탈해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기지로 반월 언덕을 빼앗은 석탈해는 곧 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이어 4대 임금이 된다. 탈해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5대 파사왕은 이곳에 궁성을 쌓고 성 이름을 월성이라 했다.
그리고 월성 안에 새 궁성을 짓고, 왕 22년에 이사했다. 이 성은 둘레가 1천7백m되는 언덕의 동, 북, 서의 3면을 성벽처럼 가파르게 깎고, 남는 흙을 다시 언덕 위로 치올려서 높이 약 10m 전후되는 넓은 토대를 만들고, 그 둘레에 돌을 쌓아 담을 짠 특이한 궁성이다. 남쪽으로는 남천을 끼고 있어 강을 방패로 삼았다. 또한 남산의 심장부인 남산성의 망대인 해목령을 마주보고 있어, 유사시에 대처하기 좋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밖의, 성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근 반월성을 발굴하자는 얘기들이 많이 나왔으나 여러 어려운 사정 때문에 보류되어, 후세인에게 발굴을 넘기기로 했다. 다만 동쪽 성문의 일부가 발굴되었을 뿐이다.
이 성은 여덟 곳의 성문이 있었던 듯 성문터가 남아있다. 경덕왕이 충담 스님을 만난 귀정문은 반월성 서쪽에 있었던 큰 문이었는 듯하다. 이 성의 동쪽 임해전(안압지)과 통하는 곳에는 임해문이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 성 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 전각들의 이름들은 알 수 없다. 다만 월상루라는 누각이 성이 서쪽 끝 언덕에 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월상루가 성 동쪽에 있다고 추측되는 것은 '헌강왕 6년(서기 881년)에 왕이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 서울거리를 보니 17만8천9백36호나 되는 집들이 모두 기와집으로 처마가 잇닿아 있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유추한 것이다. 당시 도시는 배반리와 성건리 일대에 널려 있었던 만큼 이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월성 동쪽 언덕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반월성 터]
만월성터 경주고 부근
이밖에 서라벌 최대의 규모를 가졌던 성인 만월성이 있었으나 그 위치가 확실하지 않다. 이 성의 둘레는 2858.09m로 둥글게 쌓은 토성이었다고 한다. 만월성은 지금의 경주고등학교 서북쪽 편에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곳에는 곱게 다듬은 주춧돌이 줄지어 있어 규모가 큰 건축터임을 보여주고 있다. 만월성은 초기의 금성과 월성이 규모가 작아 후대에 그 규모를 늘려서 궁성을 만든 것이다. 이 성은 당나라의 서울을 본받아 쌓은 궁성으로, 여기서 반월성 쪽으로 주작문가도를 내고 그 좌우로 바둑판처럼 작은 길을 내어 완벽한 도시계획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근화여고 부근과 경주여중 부근의 길이 바둑판처럼 설계되어 있는 것은 옛 서울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동궁은 원 이름이 달못으로 알려진 안압지이다. 이 곳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인공정원이다. 이 궁은 문무왕 14년(647년)에 조성했다. 이 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과 나라에서 잔치를 베풀던 임해전의 정원을 겸했다. 이 궁터는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발굴조사에 의해 일부 건축의 규모와 못의 본래 형태가 밝혀졌으며, 못은 거의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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