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27호 - 2024.07.13 토요일(음력 : 06.08)
angelo@nownforever.co.kr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다수란 때로 바보들이 한쪽에 많이 몰려 있기 때문에 형성되는 것. ― 클로드 맥도널드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졸리면 쉬어야 되지 말입니다”
KBS 2TV 수목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지난주 최종회 시청률 38.8%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막을 내렸다. 드라마 속 유시진 대위(송중기)와 의사 강모연(송혜교), 서대영 상사(진구)와 윤명주 중위(김지원)는 각각 ‘송송커플’과 ‘구원커플’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최종회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특히 ‘태양의 후예’는 주연 배우들의 솔직하고 담백한 대사들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유시진 대위가 강모연에게 “그 때 허락 없이 키스한 것 말입니다.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라고 말했고 이후 강모연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묻는 유시진에게 “저 안 가요. 대위님이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방금 나 고백한 것 같은데, 사과할까요?”라고 말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또한 극중에서 유시진 대위가 말끝에 ‘~ 말입니다’를 붙이는 군대식 말투는 시청자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실제로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예방하는 안내문에 “졸리면 쉬어야 되지 말입니다”라는 문구가 사용되기도 했다. ‘~ 말입니다’에서 ‘말’은 주로 ‘말이야’, ‘말이죠’ 등의 꼴로 쓰여서 어감을 고르게 할 때 쓰는 군말로, 상대편의 주의를 끌거나 말을 다짐하는 뜻을 나타낸다. 군말은 ‘하지 않아도 좋을 군더더기 말’이기 때문에 “졸리면 쉬어야 됩니다”가 어법상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지만 상대편의 주의를 끌거나 말을 다짐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인기 드라마의 대사를 활용해 친근감을 주기 위해 “졸리면 쉬어야 되지 말입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있으시다, 계시다
“이어서 회장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행사장 같은 데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인데 어딘가 어색하다. 높임말이 잘못 쓰였기 때문이다. ‘자다’의 높임말이 ‘주무시다’인 것처럼 ‘있다’의 높임말은 ‘계시다’이므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계시다’ 대신 ‘있으시다’를 써야 한다.
‘있다’에는 동사와 형용사 두 가지 쓰임이 있는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높임말이 ‘계시다’가 되지만 형용사로 쓰일 때는 ‘있으시다’를 써야 한다. 동사와 형용사는 활용형의 차이로 구분한다. 동사 ‘있다’는 ‘있어라/있자’처럼 명령형이나 청유형 어미와 자유롭게 결합하지만, 형용사일 때는 그런 어미와 어울리지 못한다. 예문을 통해 살펴보자. 우선 ‘동생이 집에 있다.’라는 문장을 보자. 이때의 ‘있다’는 ‘집에 있어라/집에 있자’처럼 명령형과 청유형으로 활용하는 게 자연스러우므로 동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의 주어를 동생에서 아버지로 바꾸면 ‘아버지가 집에 계신다.’가 된다. 한편 ‘영수야, 우산 있어?’ 또는 ‘우리 언니는 돈이 좀 있어.’같은 문장을 살펴보자. 여기 쓰인 ‘있다’는 ‘우산 있어라’ 또는 ‘돈이 좀 있자’처럼 쓸 수가 없다. 명령형이나 청유형 어미와 결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형용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높임말을 쓸 때는 ‘아주머니, 우산 있으세요?’ ‘우리 할머니는 돈이 좀 있으셔’처럼 써야지, ‘우산 계세요?’나 ‘돈이 좀 계셔’는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그렇다면 ‘말씀’의 경우는 어떤가. 우산이나 돈의 경우처럼 ‘말씀이 있어라/말씀이 있자’ 등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있다’가 형용사로 쓰인 것이므로 높여 말할 때에는 ‘회장님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로 써야 함을 알 수 있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곤색’ 정장
“곤색 정장에 물방울무늬 분홍색 넥타이 차림의 김 대표는….”
이는 지난주 총선 투표가 끝난 직후 어느 정당의 모습을 보도한 한 언론 기사이다. ‘곤색’은 일본어에서 온 말이다. ‘감색(紺色)’의 ‘紺’이 일본어로 ‘곤’이다. 우리말 속의 일본어는 대부분 과거 일제 강점기의 산물이다. 그 시기에 잃어버린 우리말을 찾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광복 직후인 1948년 정부는 “우리말 도로 찾기”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는데, ‘도시락’도 이 책에서 제안되어 결국은 ‘벤토’를 이겨낸 말이다. ‘곤색’을 우리말로 바꾸기 위한 노력 역시 적지 않았으나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필자의 십대 딸아이도 이 말을 쓰는 걸 보면 꽤나 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 같다. 물론 일본어라고 하여 무조건 배격할 필요는 없지만 ‘곤색’은 고유한 문화적 의미를 지닌 것도 아니어서 굳이 두고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의 대안도 많다. 그 가운데 널리 쓰이는 것은 ‘감색’이다. 또 ‘진남색’(진한 남색)이나 ‘검남색’(검은 빛이 도는 남색)이라는 순화어도 있다. 무엇보다도 ‘감색’처럼 이미 자리 잡은 말이 있다면 ‘곤색’은 더더욱 피해야 할 말이다. 그래서 위 기사는 유감스럽다. 반면에 같은 기사의 ‘물방울무늬’는 반가운 말이다. 이 역시 일본말에서 온 ‘뗑뗑이’가 적잖이 쓰이기도 한다. 또 영어에서 온 ‘도트 무늬’도 종종 쓰인다. 이 가운데 ‘물방울무늬’가 여러 모로 가장 예쁜 말이다.
‘곤색’과 ‘물방울무늬’가 한 문장 안에 있는 것은 어색해 보인다. 그보다는 “감색 정장에 물방울무늬 분홍색 넥타이 차림”이 더 자연스럽고 좋은 표현 아닐까. ‘곤색, 뗑뗑이’와 같은 일본말, 이제는 사라졌으면 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3. 주막에서
희망 - 천상병
내일의 정상을 쳐다보며
목을 뽑고 손을 들어
오늘 햇살을 간다.
한 시간이 아깝고 귀중하다.
일거리는 쌓여 있고
그러나 보라 내일의 빛이
창이 앞으로 열렸다.
그 창 그 앞 그 하늘!
다만 전진이 있을 따름!
하늘 위 구름송이 같은 희망이여!
나는 동서남북 사방을 이끌고
발걸음도 가벼이 내일로 간다.
∼∼∼∼∼∼∼∼∼∼∼∼∼∼
바다 4 - 정지용
후주근한 물결소리 등에 지고 홀로 돌아가노니
어제선지 그누구 쓰러져 울음 우는듯한 기척,
돌아서서 보니 먼 등대가 반짝 반짝 깜박이고
갈매기떼 끼루룩 비를 부르며 날어간다.
울음 우는 이는 등대도 아니고 갈매기도 아니고
어덴지 홀로 떨어진 이름 모를 서러움이 하나.
~~~~~~~~~~~~~~~~~~~
나의 家族 - 김수영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안에서
나의 위대한 소재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없는 우리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1954>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2장 천당과 극락
5. 기독교 무신론.
다음의 경우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신관(神觀)의 변화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신학대학이 주최가 되어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신부,목사, 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기독교의 신관(神觀) 연구'라는 제목으로 토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토의된 내용이 1966년 11월1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는데,그 기사 첫머리가 "오늘날 신은 새로운 도전과 시련 속에서 재창조 내지 재발견을 강요당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당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장인 서 남동(徐南同)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신은 죽지 않고 변모한다 - 거듭나지 않으면 매몰운명(埋沒運命)-'이라는 표제가 붙여져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기독교는 갱신(更新)이냐, 혁명이냐의 기로(岐路)에 섰다...기독교 무신론(無神論)의 급진적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천 년 동안의 기독교 초월신은 사라졌다. 신화적인 사고방식이나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떠나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실재(實在)라고 하는 현대의 존재론(存在論)이 발전함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기독교 무신론의 신학자들은 성부(聖父)가 죽고 성자(聖子)로 나타났고, 다시 성자(聖子)는 죽고 성령(聖靈)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이 새로운 양태(樣態)로서 나타났다. 역사적 예수가 또 형태 변화를 해서 만인의 얼굴과 손으로 분신화신(分身化身)하는 성령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의 시대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시대가 된다... 현대는 우주시대다. 기독교는 과학 및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견해 온 현대에 적응하기 위해 형태 변화를 해야 한다. 이 새 환경에서 기독교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역사적 기록보관소의 종교목록대장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오늘의 급진적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약성경 약속이 카톨릭, 프로테스탄트에 다음가는 제3의 기독교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한번의 출애굽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에 따르면 그들의 하나님 곧 신은 절대자이며 전지전능한 분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은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관된다고 믿어 왔습니다. 이 믿음이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탱해온 기반입니다. 그러나 우주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화적 신은 더 이상 절대자나 전지전능자로 용납될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론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은 신은 결코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일 수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에 기독교가 옛날처럼 계속해서 신화적인 신만을 고집 한다면 기독교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한갓 기록으로나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신화적 신이 아닌 새로운 신을 재발견하거나 재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성령론(聖靈論)입니다. 성령론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죽어서 없고 예수도 죽어서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죽고 없지만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형태 변화를 해서 성령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신화신(分身化身)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 사람마다 다 성령이 있으니 이 성령 속에서 하나님을 찾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에 대해서는 기독교 내에서도 서로 다른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여기서는 절대적인 하나님 곧 초월신이 아닌, 인간에 내재한 내재신(內在神)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이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절대성이 들어 있음을 말 합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불성(佛性)이 있다 하는 것과 통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 무신론을 주장하는 진보적, 급진적 신학자들에 대해 보수 교단의 목사들은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오늘날에도 초월적인 신의 존재만을 계속 주장한다면 기독교는 언젠가는 이 현실 사회에서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대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한번의 출애굽을 해야 한다고 서 남동 교수는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압박 받던 유대 민족이 모세의 지도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으로 탈출하였듯이, 오늘의 기독교도 새롭게 해석된 신을 재발견하고 기독교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원룡(姜元龍)목사라고 하면 종교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권위 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분이 어느 잡지에 '과학 앞에 사라진 신(神)'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저 푸른 허공을 아무리 쳐다보고 쳐다보아도 거기에는 천당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말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노인'이라고 표현하면서 성격에서 말씀한 하나님을 보려고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눈을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해 본 결과 신이 저 허공에는 없다는 것 만은 분명하니 거기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또 죽은 송장에게 매달리듯 사라진 신에 연연해하지 말고 예수교의 나아갈 길을 달리 모색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면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미국에서 신부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조사해 보니 90퍼센트 이상이 신에 대해 회의를 느껴 많은 이가 성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들은 그 전에는 하나님이 천당에 계시는 줄 알고 자신 있게 '하나님이 천당에 계시니 믿으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신자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강원룡 목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았듯이 남을 위하여 사는 정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을 위하여 노력하고 살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천당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변화는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서는 더욱 심각하여 현대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문제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일이 또 있습니다. 타임Time지가 '신은 죽었는가'하는 표제로 실은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글은 '신은 없다'하여 무신론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타임 지는 이 글을 발표하기 위하여 3년 동안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곧 그 동안 세계의 유명한 신학자들을 방문하여 많은 의견을 듣고 종합한 결과 신은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 기사는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도 함께 실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신이 있고 없음은 인간의 차원을 떠난 문제인 만큼, 과학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공연히 무신론(無神論)을 주장하지 말라. 우리들 인간은 무조건 신을 믿는 것이다. 믿기만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찌되었든 그 때에 타임지가 낸 그 특집기사의 지배적인 주장은 "하나님은 없다"는 내용이어서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각 신문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었고, 기독교 내에서도 '기독교 무신론'이라는 부제를 붙여서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실을 떠난 절대 세계나 현실을 떠난 초월신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떠난 절대 세계라든지 현실을 떠난 초월신을 주장하던 종교 사상은 점차로 그러한 논리를 버리고 교리를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재 창조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 철학자인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말하여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기독교 사회에서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신이 완전히 죽어서 없어졌다는 그의 선언은 퍽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본디부터 없던 신을 있는 것으로 잘못 믿어 오다가 뒤늦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 낸 것뿐인데, 마치 신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듯한 그런 말은 사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살아있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뒤늦게나마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 전까지의 잘못된 믿음을 버리기만 하면 될 터인데 말 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신이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으며 신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삼 "신은 죽었다"는 선언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볼 만큼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상(假想)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해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신을 그릴때 사람 모양을 그린다고 합니다. 만약 개나 소에게 신을 그리라고 하면 개나 소 모양으로 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깁니다. 결국 신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쓸데없는 환상을 일으켜서 관념 속에서 신을 만들어 놓고 이런 저런 식으로 해석해서 혼란을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처음부터 없는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인 줄 알면서 거짓을 고집 한다면 그것은 실지로 파멸과 자살로 이끄는 행동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든지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그 사상을 포기하고 다시 전환하여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6. 극락설.
그렇다면 불교도 역시 종교인데,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방법에는 불합리한 점이 없는지, 그래서 요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납득이 안되는 믿음을 강요하는 점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리 우주과학 시대라고 하더라도, 또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불교 자체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구애받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종교는 그릇되었다 말하면서 자신의 종교인 불교만 옳다 한다고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불교가 펼쳐 온 사상이 허위에 차고 거짓투성이라면, 기독교가 절대신을 부정하였듯이, 불교도 마땅히 팔만대장경을 버리고 다시새로운 터를 닦아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라고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의 경전에도 거짓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라 하여 무지한 중생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 방편으로 '극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자꾸가면 그곳에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을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하늘 위에 있다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서쪽으로 가면 있다는 극락세계는 진짜인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극락세계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망원경을 이용하여 찾아보든지 어떻게 하든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옳지 않으면 믿지 않아야 할 터이고, 만일에 옳다면 누구든지 그곳으로 가서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극락세계를 자세하게 설명한 불교 경전으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중에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있으며 또 무량수의궤경(無量壽儀軌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저 서방세계를 지나 끝없이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 삼계화택(三界火宅), 사생고해(四生苦海)의 사바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부지런히 염불을 하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극락세계의 장엄은 참으로 대단하여 천당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런 극락세계에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만 지극하게 부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여기에 한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5역죄(五逆罪)를 지은 사람, 곧, 부모를 죽이거나 대 성인을 죽인 사람 또는 교단 화합을 파괴하거나 바른불법을 비방한 사람 등은 아무리 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갈 수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는, 그와 달리, 극락세계를 아홉 등급(九品)으로 나누고서 5역죄를 지은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한 사람이라도 극락세계에 갈 수는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가장 낮은 등급인 하품하생(下品下生)에 간다고 말합니다. 또 '무량수의궤경'에서는 5역죄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 죄를 지었다 해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상품상생(上品上生)의 가장 좋은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하는 극락세계에 가는 자격에 대해서 제각기 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5역죄를 지은 사람은 극락세계에 못 간다고 해 놓았는데, '관무량수경'에서는 하품하생에는 갈 수 있다고 한다. '무량수의궤경'에서는 상품상생에까지도 갈 수 있다고 해 놓았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의 끝 부분을 보면 "서쪽으로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부처님은 법계장신(法界藏身)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계(法界)란 시방(十方)의 법계이니, 곧 부처님몸이 시방 법계에 가득 차서 그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극락세계가 서방(西方)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東方)에도 있고, 북방(北方)에도 있고, 남방(南方)에도 있고 땅 밑이나 하늘 위나 없는 곳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고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是心是佛, 是心作佛)'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이 아미타불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부처님인 것이지 마음을 내놓고 달리 부처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얼음을 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부처인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육단심(肉團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에 가득차 있어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똑같이 갖고 있는 그 마음을 말합니다. 곧 유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고 무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것이 곧 법계장신(法界藏身)이며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어서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고 밝히지 않고, 왜 서방(西方)에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갈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빙빙 돌려서 말씀했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방편설(方便說)입니다.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그 지혜의 정도에 맞추어서, 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또 그 사람의 지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부득이 사실과 꼭 같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 가면서 지혜를 자꾸자꾸 향상시켜 가면 마침내 참말을 이해할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그 때에는 지금까지 한 말은 참 말을 알게 하기 위한 거짓말임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방편가설(方便假說)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이대로가 극락이라고 하면, 그는 미친 소리라고 비웃거나 아니면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여기가 극락이라니 마치 사람을놀리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현실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것은 거짓된 말이라고 부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저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으니 부지런히 아마타불을 외고 수행하면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부르며 수행에 열중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염불을 부지런히 외면서 수행에 힘쓰다보면, 그러는 사이에 지식이 늘고 지혜가 향상되면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힘이 차츰차츰 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얼마 뒤에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때에 이르면, 앞에서 일러 준 말은 방편일 따름이요, 사실은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이며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이니 유정과 부정이 모두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비로소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7. 일승법.
그 방편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법한 말씀의 총 결산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가장 골자가 되는 것이 바로 '방편품(方便品)'입니다. 거기에 보면 "시방세계 국토 중에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十方國土中唯有一乘法]."고 하고 있습니다. 일승법이란 이 세상에 부처님 아닌 것이 없고,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원하기 위해 2승(二乘), 3승(三乘)의 방편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방편설은 비록 사실 그대로의 참말은 아니지만 수단으로서 인정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일승을 말씀하시기 위해 2승과 3승을 설하신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육조(六祖)스님도 극락세계에 대해 "부처님이 극락세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일에 사실이라면, 동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서방의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서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아직 지혜가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방편설을 쓰셨지만, 나는 지혜가 발달된 사람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방편을 쓰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 결국 육조스님의 뜻은 서방 극락세계는 실재하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 그대로가 극락세계이며, 자성(自性) 그대로가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도 내 마음 속에 있고 아미타불도 내 마음 속에 있으니, 서방이든 동방이든 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속에 있는 극락세계를, 마음속에 있는 아미타불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행복을 달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종교는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는 방편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방편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옆으로 가는 극락은 참말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요즈음에는 아이들도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면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는 교리를 바꾼다느니 새 시대에 맞게 그 뜻을 재해석한다 하지만, 불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동안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써왔던 방편가설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방편가설을 버리면 남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일승(一乘)인데 그곳으로 바로 들어가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극락세계이고 천당이며, 중생 모두가 하나님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음을 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곧, 불교의 기본 태도는 일승법인데, 현실 이대로가 절대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면 우리는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바로 부처님 법 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8. 동상이몽 (1/2)
"누굴 찍었나?"
"누굴 찍었을 것 같나?"
"민주당?"
"물론이지. 민주당 아니고야 찍어줄 놈 있어?"
"민주당 후보하고 잘 아는 사인가?"
"알긴 뭘 알아! 더구나 그 사람은 외지(外地) 사람인데, 민주당이라니까 찍어 줬지. 민주당 말고 찍어줄 놈이 누가 있어?"
민심이 이랬다. 그러니 막대기를 꽂았어도 표를 얻었을 것이었다. 유권자의 바람이었다. 그 덕분에 민주당은 1960년 8월 1일 현재로 167석이라는 압도적인 의석수를 확보했다. 이 숫자는 물론 난동으로 투표함 등이 소각되어 재선거를 치르게 된 선거구를 제외한 숫자였다. 재선거를 치르게 되면 의석수가 불어나게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167석만으로도 3분의 2가 넘는 숫자였다. 의석수 233석의 3분의 2는 154, 그러고 보면 13석이 많다는 계산이었다. 이제 민주당은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말고는 불가능이란 없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환원할 수도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신.구파가 합작하지 않는 한 그것은 꿈조차 꿀 수 국민이 얼마나 민주당에 기대를 걸고 있었으면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던 것일까? 그런데 참 묘한 일이었다. 1960년 8월1일 현재로 민주당이 얻은 의석수를 파벌별로 구분해 볼 것 같으면 구파가 84석이었고 신파가 83석이었다. 신파가 구파보다 한 자리가 부족했다. 그러니까 총선거에 있어서는 일단 구파가 승리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재선거에 따라 이것이 뒤집힐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구파가 신파보다도 몇 자리 더 많다든가, 신파가 구파보다 몇 자리 부족하다든가 하는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양파의 세력이 백중하다는 데 있었다. 어차피 신.구파 어느 쪽도 정파의 협조를 얻어야만 집권이 가능했다. 1960년 8월 1일 민주당 이외의 당선자 분포를 볼 것 같으면 무소속 24석, 구 자유당계 11석, 기타 2석으로 모두 37석이었다. 그러니까 신파든 구파든 이 무소속의 협조를 얻어야만 비로소 집권의 틀을 마련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국 안정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훨씬 세력이 기울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정국은 파탄 없이 자연스럽게 제2공화국 정부의 돛을 올릴 수가 있었다. 그것이 이렇게 신.구파의 세력이 백중하다 보니 아무래도 정국의 앞날이 심상치가 않을 것 같았다.
선거 결과를 보고 신파에서는 대통령직은 구파한테 주고 국무총리를 차지함으로써 정했다. <어차피 분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인데 그것을 전제로 한다면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서는 두 요직을 다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구파의 생각이었다. 내세우는 이유는 참 그럴싸했다. <책임정치 구현?> 그렇지, 그것이 바로 정당정치니까. 하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구파의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그 사정이란 다름이 아니라 구파에는 집권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 윤보선과 김도연이 바로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국무총리는 자신이 맡음으로써 정권을 담당하겠다고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 중 어느 한, 구파는 또 자체 내에서 세포분열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매듭을 지어두자 하는 뜻에서 모인 것이 8월 3일 일이다. 민모 씨의 집에 21명이 참석했다. 윤보선, 백남훈, 김도연, 안동원, 송필만, 이영준, 유진산, 서범석, 소선규, 김의택, 김산, 강영훈, 조영규, 조한백, 윤제술, 양일동, 민관식, 유옥우, 백해정, 이충환, 정중섭 등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구파의 진로에 대해서 확연한 태도를 정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회의 주재는 원내총무인 유진산이 맡아 진행했다. 그는 구파의 총참모장 격이었다. 유진산은 이렇게 의제 문제를 끄집어내고 조영규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더러 분당론에 대해서 설명하라는 눈신호였다. 조영규는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분당론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메모해 둔 것을 끄집어 들었다.
"우리 분당은 운명적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운명적이냐!"
조영규는 분당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민주당의 신.구파가 합작할 경우 원내 의석 3분의 2를 초과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민주당의 일당 독재를 우려하게 보수야당 제도를 이룩할 수 없다. 셋째,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신.구파가 합작해서 억지로 조각하는 경우 국무회의에서도 신.구파가 대립하게 될 것은 필연적인 것이므로 정책 수행에 차질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당을 해야 한다."
이것이 조영규의 분당론의 명분이었다. 이론적으로 옳았다. 명분도 뚜렷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21명은 모두가 구파의 집권을 기정사실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천 당선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파보다 1석이 부족했으나, 공천에서 떨어져 무소속으로 입후보 당선된 의석을 합하면 오히려 신파보다 1석이 많았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또 자유당계 11석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이들의 표를 구파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고 있자 윤보선이 단서를 달았다.
"내가 보기에도 분당은 피할 수 없어요. 하나, 지금 당장 분당을 단행하기보다는 대통령 선출, 국무총리 인준 등 일련의 정치적인 문제가 매듭지어진 다음에 분당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곧 있을 정치 일정에 우리 구파에서도 단단히 대비를 해두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대통령하고 국무총리 문제를 협의해 두는 것이 좋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탄없는 의견을 말씀해 유진산이 대통령하고 국무총리 문제를 꺼내자 윤보선, 김도연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보다는 국무총리에 군침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두 사람이 없다면 모를까, 두 사람의 면전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듯한 발언은 거북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윤제술이 입을 열었다.
"우리 구파로서야 대통령, 국무총리로 내세울 분이 상산 선생하고 해위 선생 외에 달리 누가 있겠소? 그러니 이 두 분 가운데서 어느 한 분은 대통령으로 모시고 해야겠는데, 어떻소, 이 문제는 당선자 총회에서 한번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유진산이 윤제술의 의견에 반대를 하고 나섰다.
"오늘 이 자리에서 대체적인 윤곽을 잡아 놔야 일사분란하게 밀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유진산은 무소속 공작상 미리 내정을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백남훈이 불쑥 김도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상산, 상산이 양보해요. 다음에도 기회는 있을 거니까."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나야 언제나 당명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오? 당명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소이다."
참으로 대범한 마음가짐이었다. 당명에 따르겠다는 그 말 이외에 어떤 군소리도 늘어놓지를 않았다. 좌중 인사들은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백남훈이 어째서 김도연더러 양보를 하라고 했던가? 그것은 그에게는 재력(財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무총리 인준을 받자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것이라고 백남훈은 계산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었다. 구 자유당계를 비롯한 대 무소속 포섭공작을 벌이자면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은 새삼 운위할 필요조차 포섭공작을 벌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청빈한 생활을 고집해 온 김도연이 그 막대한 자금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저녁, 구파는 마침내 신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내각책임제하에서 건전 야당이 없는 이정국에서 너무 비대해져 있는 민주당은 두 개의 정당으로 갈라져야 하며, 강력한 국정의 수행은 뜻맞는 인사들끼리의 책임을 지는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신파와의 결별 선언에 내걸은 명분이었다. 뜻맞는 인사들끼리의 책임지는 정치란 무엇을 의미했는가? 대통령뿐 아니라 국무총리까지도 구파가 독점해서 정권을 표현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분당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신파에 대한 구파의 결별 선언에 누구보다도 쌍수를 들어 환영한 것은 무소속과 재야 세력이었다. 국회에 의석을 차지한 무소속 의원 가운데는, "이거 잘만 하면 나한테도 장관 감투 하나쯤은 돌아올지도 모르겠는걸" 하고 허허거리기조차 했다. 물론 이 무소속 의원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시시덕거렸던 것이지만 그런 신.구파가 갈라서게 되면 어차피 무소속으로 제휴를 해야만 집권은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감투 욕심보다는 무소속이나 재야 세력이 구파의 분당론에 환영을 했던 이유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두고 신.구파의 싸움을 지켜봐 왔기 때문이었다.
"신.구파는 도저히 동거하지 못할 부부야. 너무 때늦은 감이 있어. 진작 갈라 섰어야 했던 거야."
이것이 무소속이나 재야 세력의 반응이었다. 하긴 그랬다. 갈라질 바에는 진작 갈라졌어야 옳았다. 최소한 선거전이 벌어지기 전에 갈라졌어야 옳았다. 그랬더라면 신.구파 모두 233개 선거구에 지금과 같은 진통을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모든 선거구에 신.구파가 각기 집권을 하도록 했더라면 정국수습은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신.구파의 각기 비슷한 숫자를 공천해서 내세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이런 진통을 겪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신.구파 가릴 것 없이 민주당으로서는 큰실책이었다. 민주당이 단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 벌써 이때에 싹텄다 할 수 있었다. 민주당에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 그토록 없었던가? 신.구파가 공천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가지고 동수의비율(신파가 7명 더 많았지만)로 내세울 때, 선거 결과 어떤 결과가 빚어지리라는 얘기였다. 그토록이나 단견(短見)이었다니! 한편 구파의 결별 선언에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장면은 급기야 노여움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 사람들 지금의 시국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국민이 우리 민주당에 투표해 준 것이 분당을 하라고 표를 몰아주었단 말인가! 설혹 분당할 의사가 있다면 먼저 책임있는 이가 당의 공식 기구에 제의를 하고 난 연후에 분당을 선언해도 선언했어야 할 게 아닌가! 내가 알기에는 구파 안에도 분당론에 반대하는 인사가 많을 줄로 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하고 손을 잡고 분당을 막겠으며, 조각에 있어 신.구파의 부응토록 할 것이다."
신파는 어떻게든 분당만은 막자는 것이 기본 태도였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신파든 구파든 무소속하고 제휴를 해야만 정권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무소속하고 제휴를 한다는 것은 곧 연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럴 경우 구 자유당계 인사가 입각하게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신.구파가 제휴해서 내각을 구성하는 것이 보다 더 국민 여망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구파의 결별 선언에 제일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은 중도파인 태완성, 윤중, 서정귀 등이었는데 이들은 "지금은 신.구파가 합심해서 정국 타개에 할 때가 아니다"라며 분당 반대를 표명하고, "우리는 구파 대통령에 신파 국무총리, 어느 쪽이든 균형의 원칙을 전제로 해서 정권을 담당해 주기를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중도파에서 분당을 반대하고 나서 주었다는 것은 신파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파에서는 즉시 구파에 대해서 정치적 공세를 취했다. 신파에서는 끝까지 신.구파 균형의 원칙을 견지해서 구파의 윤보선 씨를 대통령으로, 그리고 신파의 장면 씨를 국무총리로 추대해서 새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구파의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고 하자, 구파에서도 동요하는 빛이 완연했다. 구파가 중도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분당을 강행할 경우, 구파의 집권은 어렵게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놈의 신.구파 싸움이 어떻게 될 것인가?"
벌어져 나가고 있는 사태를 그 누구도 가늠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사람도, 또 팔짱을 끼고 구경을 하고 있는 국민도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혼미 속에서 민주당 신.구파는 각기 따로 당선자 총회를 열었다. 8월 6일의 일이었다. 신파는 대명관에서, 그리고 구파는 아서원에서 각기 당선자 총회를 언론에서는 <어느 쪽에 더 많은 당선자가 모일 것이냐?> 해서 촉각을 세웠다. 그러나 어느 쪽에 몇 사람 더 많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정국의 앞날을 점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개인적 사정으로 참석치 못한 사람도 있고 또 개중에는 어느 한쪽에 기우는 것을 꺼려 양다리를 걸쳤던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에서 단정했듯이 <세력 분포가 뚜렷이 판명된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가 구파의 최경식과 김명운의 신파총회 참석이었다. 그럼, 구파 당선자 총회에 신파 소속의 당선자가 참석한 일은 없겠느냐 했을 때, 이것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간에 신파 당선자 총회에서는 밀도록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고, 구파 당선자 총회에서는 대통령, 총리 후보 문제를 23인위원회에 일임한다는 것과 분당 선언을 추인하는 정도로 이날의 모임을 마무리지었다. <이승만 정권 타도>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민주당이라는 한울타리에서 5년 동안이나 동지로서 같이 살아온 신.구파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팽팽하게 평행선만 치닫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민주당 안에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파를대표하는 장면과 구파를 대표하는 윤보선, 이 두 인물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좀 그릇이 컸던들 민주당은 이렇게까지 티격태격은 하지 않게 되었을는지도 장면, 윤보선 두 사람 모두 <온실 속의 꽃>처럼 자란 인물들이었다. 온실 속의 꽃처럼 자랐으니 그릇이 클 리가 없었다. 소갈머리도 작기 마련이었다.좋은 보기가 8월 9일의 외교 구락부에서의 장면과 윤보선의 몸가짐이었다.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이번 총선거에서 당선된 기독교인 의원들을 축하 격려도 할겸 원수처럼 반목만 거듭하고 있는 민주당 신.구파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보자" 해서 이날 장면, 윤보선을 비롯한 기독교인 당선자들을 외교 구락부에 초청해 오찬회를 베풀었었다. 이 회식 자리에서 공교롭게도 장면과 초청자의 배려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장면과 윤보선은 이웃해 있으면서, 단 한마디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참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그토록 옹졸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고도 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까?
"해위(윤보선의 아호), 우리가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뭉쳤던 사람들이 아니오? 우리 어떻소, 그때의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파에서는 자꾸 분당을 하겠다 고집하고 있는데 분당을 해가지고는 난국 수습은 어려워요. 그러니 난국 수습이라는 차원에서만이라도 분당은 포기해 주시오. 그 대신 구파에서 먼저 집권을 해봐요. 그랬다가 힘들다고 생각되거든 우리한테 있겠소? 우리도 어렵다고 느껴지거든 그땐 신.구파가 합작을 해서 정권을 이끌어 나가도록 해봅시다 그려."
"아니 윤석(장면의 아호), 정권은 먼저 신파에서 맡도록 해봐요. 세상에선 신.구파라 일컫고 있지, 구.신파라 일컫고 있지는 않지 않소. 그러니 정권은 먼저 신파에서 맡도록 해봅시다."
왜 좀 이렇게 대인(大人)다운 아량을 베풀지를 못했느냔 말이다. 정권이 어디 딴 데로 달아나기라도 하려고 하던가? 천하는 이제 어김없는 민주당 것이었다. 국민은 총선거에서 3분의 2 이상이나 되는 의석수를 안겨 주지를 않았던가! 한 2년씩 교대로 해봐도 되고 2년이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으면 1년씩 당장 정권을 잡지 못하게 되면 숨이라도 넘어갈 듯이 조급증을 부렸으니.......
이날 장면과 윤보선은 이 회식 자리에서 2시간 동안이나 이웃해 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얼마나 옹졸한 처사였던가! 지도자의 그릇이 작았다는 것, 아무래도 이것도 민주당비극의 한 원인으로 꼽아야만 할 것 같다. 지도자란 역시 투쟁을 통해서 단련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정치에 정략이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정략이 치사스럽거나 비겁한 술수여서는 안 된다. 정정당당한 도마 위에 오른 정권을 놓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던 신.구파 두 파벌이 마침내 더티 플레이를 시작했다. 더티 플레이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총선거를 앞데 놓고도 한판 단단히 겨루었던 일이었다. <신파의 아무개가 자유당의 아무개한테서 얼마를 먹었다.>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듯 하지마라. 구파의 아무개는 부정축재자인 아무개한테 얼마를 얻어먹었다고 하더라.> 이때 정치자금 수수를 놓고 벌였던 신.구파의 싸움은 아직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터에 이번엔 구파에서 <매수설>을 가지고 신파에 대한 선제 공격에 나섰다. 사람인 조영규가 엉뚱하게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최근 4,5일 동안에 20여 억환의 자금이 금융기관으로부터 모측에 방출되어 정치자금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내사해 보기로 했어요. 의원 한 사람 앞에 천만환에서 5천만환까지 뿌려졌다는 게 아니겠어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풍설이지만요."
조영규는 분명히 풍설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명색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 풍설을 가지고 세상에 공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영규가 비록 풍설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하더라도 그가 시장 잡배의 부류가 아니라 책임있는 공당의 무게 있는 그의 발언은 비상한 방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파는 구파의 협조를 얻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고 구파 또한 신파의 협조를 얻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이상 무소속을 상대로 정치자금이 살포되리라는 것은 짐작되고 있던 일이었다. 이것은 신.구파가 똑같은 상황이었다. 어느 쪽이고 무소속 포섭 없이 정권을 쥐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똑같은 조건의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 조영규는 신파에서 무소속을 포섭하기 위해서 돈을 뿌렸다고 폭로한 것이다. 물론, 조영규는 돈을 뿌린 것이 신파라고 못박지는 않았고 또 자금살포의 대상이 무소속이었다고 못박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때, <신파가 무소속한테 돈을 뿌렸다>고 한 것만은 어김이 없었다. 조영규의 이 발언에 발끈한 것은 신파보다도 무소속이었다.
"이건 우리 무소속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야. 조 의원의 발언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려내야 돼. 누가 얼마를 먹었는지 증거 제시를 요구해야 한단 말야."
무소속 의원들은 발끈하다 못해 길길이 뛰면서 조영규에게 따지리라 결의를 다졌다. 미리 설명해 둬야 하는 건데 순서가 좀 뒤바뀐 감이 있지만, 제2공화국 탄생을 위한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은 8월 8일 개원했다. 이날 민의원에서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신.구파가 의견의 일치를 보아 부의장으로는 신파에서는 무소속의 이재형을, 구파에서는 이영준을 밀었었다. 그런데 결과에 있어서는 곽상훈과 이영준이 예상했던 대로 당선이 되었으나 신파에서 민 이재형이 낙선되고 구파에서 민 서민호가 당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 서민호도 무소속이었으나 그가 한국민주당 출신이었고 보면 친 구파계라 할 수 있었다. 신파에서 이재형을 부의장으로 밀었던 이유는 그가 무소속을 리드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정권담당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무소속표를 끌어들이자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파에서 민 이재형이 부의장 선거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선거에 던져진 표가 곧 국무총리 인준 때 나타날 표로 간주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신표는 초전에서 구파에게 일패도지했다고 할 수가 있었다. 이재형 개인으로 말하더라도 신파가 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파의 반대로 부의장 선거에서 낙선되고 보니 구파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건 추측이지만 그도 사나이였다. (좋아! 구파가 나를 반대했겠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거기에 대한 은혜를 갚도록 하지.) 하여간에 조영규가 <신파에서 무소속을 매수했다>는 뉴스가 풍기는 발언을 한 것이 바로 국회가 개원된 다음날이었다. 다음날인 8월 10일, 마침내 조영규의 민주당 신파인 함종빈과 무소속의 계광순, 김봉재 등이 조영규의 발언을 문제삼은 것이다. 특히 김봉재는 <금전수수설의 진상 조사위원회> 구성안을 제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거인에게 내가 규탄받을 일을 할 때에는 내 목을 치라고 했어요. 무소속 의원이 고깃덩이 모양으로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고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런 엄청난 풍설을 신문에 퍼뜨리니 내 꼴이 뭐가 되겠어요? 그렇잖아도 내 선거구의 유권자들이 지금 서울에 올라와서 여관에 묵고 있는데, 조영규 의원의 발언은 기어이 진상을 가려서 책임을 물어야만 하겠습니다."
그의 조사위원회 구성 결의안은 신파의 그런데 문제는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안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파에서 그런 발설을 했으니 진상이야 어떻든 구파에 대한 무소속의 감정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 속담에 <방귀 뀐 놈이 먼저 성낸다>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의원 상호간의 불문율로 되어 있는 정치자금을 놓고 운운했으니 이런 발언이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냐는 것을 조영규는 한번 깊이 생각해 본 연후에 발설했어야 할 일이었다. 뒤에 김도연이 총리지명 인준을 받게 되었을 때 그의 발언이 투표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 것은 1960년 8월 12일이었다. 대통령중심제가 내각책임제로 바뀐 이때의 헌법에는 대통령을 민의원과 참의원의 합동회의에서 뽑도록 되어 있었다. 이날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구파의 보스인 윤보선이 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뽑혔다. 재석 259표 중 208표를 얻었었다. 나머지 51표는 김창숙에게 표를 던졌던 것이다. 김창숙, 이때 나이 81세, 호는 심산.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서 마지막 남은 거물이었다. 물론 그는 이때 야인이었다. 백범 김구가 암살당하자,
"백범(김구의 아호)을 죽인 것은 김구 암살의 배후 인물을 이승만이라고 단정" 한 그는 경무대 쪽을 향해선 오줌도 누지 않을 만큼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를 않고 오로지 이승만 타도를 위한 <반독재 투쟁>만 벌여온 인물이었다. 그는 1962년에 타계했다. 정당 관계를 일체 하지 않고 있던 야인 김창숙이 어떻게 해서 이때 대통령 선거에 그의 이름 석 자가 튀어나오게 됐던 것인가? 그것은 민주당 구파에 대한 무소속 반발의 결과였다.
"조영규 의원은 우리가 신파한테 매수당했다고 했는데, 김봉재 의원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는 고깃덩이가 아니에요. 우리 이참에 보여줍시다."
이런 제의를 한 것은 이재형이었다. <조영규 발언>에 모두 분통을 터뜨리고 있던 무소속 의원들이었던지라 그의 제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무소속의 기개를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민주당 신.구파가 똑같이 지지하고 있는 윤보선에 부표를 던지는 소극적인 행위를 지양하고 김창숙을 밀기로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아예 묻혀 있던 김창숙은 엉뚱하게도 조영규 발언의 덕분에 제2공화국 대통령 선출시에 무소속에 의해서 대통령 후보로 옹립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이미 소개했듯이 민주당 구파에서는 대통령에 김도연, 국무총리에 국회전략을 숙의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윤보선으로 바뀌게 되었던가?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었다.
민주당 신파에서는 대통령직은 구파에게 주고 신파는 국무총리직을 맡아 정권을 담당토록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일관된 구상이었다. 구파가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모두 독점하겠다고 벼르고 있던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기야 구파는 분당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신파는 <절대로 갈라지지 않겠다>고 고집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구상을 하게 되었던 것일 것이다. 하여간에 구파는 그런 구상 밑에서 구파와의 정치적 협상을 모색했던 것이나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신파의 몇몇 사람이 그만 비위사 상해졌던 것이다.
"정치는 대환데, 그래 한 집안 식구끼리 대화조차 않겠다는 것이 무슨 수작이야. 좋아! 대화하기 싫으면 그만 두라고! 우리한테도 생각이 있어!"
잔뜩 화가 난 그들은 차라리 과도정권 수반인 허정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자며 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신파의 보스인 장면도 결코 반대를 하지 않았다. 구파가 끝까지 싫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대안으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신파의 일부 의원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보였던가?
"나는 신파의 일부 의원들이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 처지에 내가 대통령 옹립문제에 싫다 좋다는 의사표시를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이것이 허정의 공식적인 반응이었지만 신파가 통틀어 대통령 옹립에 나선다면 결코 사양을 하지 않겠다는 눈치였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구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8월 11일에 열린 23인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예의 검토했다. 23인위원회란 구파의 당선자 총회가 있던 그날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문제에 대해서 매듭을 짓기 위해 각 시.도 대표 한 사람씩을 뽑아 23명으로 구성했던 임시적인 이날 모임에서 유진산이 이렇게 말했다.
"신파에서 우리 구파한테 대통령직을 주겠다고 하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파 일부에서는 허정 씨를 대통령으로 옹립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 선거에 있어 혼란이 야기될 것은 필지의 사실이고, 그러니 대통령에 관한 한 신파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원내 전략을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국무총리 지명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만큼 우리 구파 인사가 대통령이 될 것 같으면 의당 우리 구파 인사를 국무총리로 지명해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해 놓고 있던 구파의 기본적인 구상이 앞서와 같은 이유에서 윤보선을 대통령에,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갑자기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윤보선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 탄생의 기틀은 마련되었다. 흔히들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고들 말하고 있지만, 제2공화국의 대통령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물론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만큼의 권력은 없다 하더라도 크게는 국군 통수권, 긴급 재정처분권, 외교권, 계엄선포권, 국회에 대한 임시집회 요구권, 헌법개정안 발의권과 같은 정치 권력과 작게는 계엄선포 거부권, 정당소추에 대한 승인권, 주어져 있었다. 이러한 권력이 주어져 있었다면 결코 <상징적 존재>라고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공격당하는 로마군
라인 강 양쪽의 게르만 부족들을 거느릴 만큼 증강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반란군은 그제야 비로소 로마 군단기지를 정면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카스트라 베테라(베타라 군단 숙영지)라고 불린 베테라(오늘날의 크산텐) 기지를 공격한 것이다. 군단기지가 염주알처럼 늘어서 있는 라인 강 방위선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기지는 제5종달새군단과 제15 무적군단의 주둔지이기도 했다. 다만 서기 69년 가을에는 이 두 개 군단의 정예가 비텔리우스를 지지하여 이탈리아에 가있고. 잔류 병력은 5천 명을 밑돌았던 모양이다. 로마군 보조부대의 부대기를 받쳐든 반란군은 이 기지를 포위했다. 그리고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기지에 사절을 보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크산텐 기지에 남아 있는 군단병으로서는 비텔리우스 황제를 지지하여 이탈리아에 가 있는 전우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지지할 수는 없다. 당연히 그들은 거부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지휘로 정면의 라인 강을 비롯한 전후좌우 사방에서 일제히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저지 게르마니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며칠 뒤에는 고지 게르마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기지인 마인츠에 도착했다. 마인츠에 주둔해 있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플라쿠스는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이었던 비텔리우스가 이탈리아로 간 뒤에는 고지 게르마니아만이 아니라 저지 게르마니아 방위도 떠맡은 최고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크산텐 기지를 지키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노령에다 병약한 이 인물은 휘하 병사들이 비텔리우스를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에 거기에 동조했을 뿐, 본심으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플라쿠스 휘하의 군단장들 중에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고지 게르마니아의 3개 군단에서는 장교와 일반 병사들의 생각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아직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크산텐 구원군을 편성하는 작업은 미묘하게 지연되었다. 그래도 결국 구원군은 편성되었다. 마인츠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제4군단과 제22군단을 북상시키고, 본에서 제1군단, 노이스에서 제16군단이 합류하여 모두 4개군단이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전략이다. 다만 4개 군단이라 해도 정원인 2만 4천 명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이탈리아 내전에 동원된 병사들을 빼고 나면, 어림잡아 1만 2천 명도 안되는 병력이 아니었을까. 구원군 총사령관은 플라쿠스가 맡는 게 당연하지만, 그는 노이스까지만 동행하고 실제 지휘는 젊은 티베리우스 보쿨라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보쿨라는 마인츠에 주둔하고 있는 제22 무적군단의 군단장이다.
그러나 마인츠에서 라인 강을 따라 크산텐으로 가는 행군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군량 확보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란이 일어날 게 뻔하다고 생각한 농민들이 수확물을 감춰버렸기 때문에, 돈을 주어도 식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굶주림이 계속되면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게 된다. 장교와 일반 병사들 사이에 이미 존재했던 감정의 골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병사들은 규율을 무시하는 것으로 지휘관에 대한 불신을 표출했다. 그래도 보쿨라의 고생이 열매를 맺어, 구원군은 크산텐 기지에서 하루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로마군 기지를 공략하기는 상당히 어려워진다. 하지만 바로 그때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 결과가 전해졌다. 10월 25일에 끝난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 진영이 패했다는 소식이 라인 강 하루인 크산텐에 도착하려면, 빠른 말을 갈아타고 달린다 해도 한 달은 너끈히 걸린다. 공격하는 속주병과 수비하는 군단병이 비텔리우스 황제가 재기 불능의 타격을 받은 사실을 안 것은 11월 말이나 12월 초였을 것이다. 라인 강 하류 일대에서는 들짐승조차도 움직임이 둔해지는 엄동설한. 독일의 겨울은 추위가 혹독할 뿐 아니라 비까지 내린다. 자기들이 옹립한 비텔리우스가 완패한 사실을 알게 된 '라인 군단' 병사들의 기분이 북쪽 나라 독일의 겨울 날씨처럼 음산해졌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사기는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 결과.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입장도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 황제가 비텔리우스에서 베스파시아누스로 바뀌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아내겠다는 명분으로 로마군 기지를 공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마 군단병은 누가 황제가 되든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할 의무가 있다. 비텔리우스파였던 '라인 군단' 병사들도 언젠가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을 서약할 게 뻔하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이제까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이때부터는 누가 보아도 속주병과 로마군의 전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라인 군단' 병사들의 사기는 심하게 떨어져 있었다. 자신들이 옹립한 비텔리우스가 패한 것을 알고 낙담했기 때문이지만, 장교들에 대한 불신은 분노로 변했다. 저놈들은 비텔리우스가 패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성난 병사들은 플라쿠스의 막사를 습격하여, 늙은 사령관을 침상에서 끌어내려 죽여버렸다. 보쿨라는 노예로 변장하여 달아났기 때문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바로 그때 마인츠 기지가 적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을 부추겨 마인츠를 공격하게 한 것이다 .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로마군단을 유명하게 만든 엄격한 규율이 되돌아왔다. 보쿨라도 다시 진두지휘를 맡았다. 그는 마인츠를 구원하기 위해 제 1군단, 제4군단, 제22군단을 이끌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 마인츠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라인 강 방위선은 완전히 무너지기 때문이다. 마인츠를 지키는데는 성공했지만, 그사이에 게르만계 갈리아인에 대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설득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군사적인 성과를 먼저 보여준 다음에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키빌리스의 방식이 옳았다는 게 입증되었다. 갈리아에서는 유력한 부족인 트레베리족과 링고네스족이 공동투쟁을 제의해 왔다.
'갈리아 제국'
트레베리족은 모셀라(오늘날의 모젤) 강 주변에 사는 부족으로 ,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지 100년이 지났다. 그들의 본거지인 트라이어의 예 이름이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롬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라인 강 방위선의 배후기지로 중시되면서 로마인의 손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덕분에 트레베리족은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링고네스족의 거주지는 트레베리족의 거주지 남쪽에 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피워 올린 반란의 불길이 어느새 갈리아의 한복판까지 바싹 다가온 것이다. 트레베리족을 대표하여 반로마 전선에 참가한 것은 율리우스 클라시쿠스, 율리우스 투토르, 율리우스 발렌티누스 세 사람이다.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이 보여주듯, 세 사람 다 자기 부족의 유력자들이다. 링고네스족의 대표는 율리우스 샤비누스. 이 인물은 120년 전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제패하고있을때 친밀한 관계를 맺은 여자의 아들. 즉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다 .개인 이름까지 카이사르와 같은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 사람의 정식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시스 사비누스다. 제 사생아의 자손이 로마에 반기를 든 것을 알았다해도 , 카이사르라면 껄껄 웃으면서 그건 좀 곤란한데 하는 정도로 받아넘겼을지 모른다. 어쨌든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선 반란 지도자들은 모두 다 카이사르가 지신의 씨족 이름을 하사한 자들의 후손인 '율리우스'들이었다 . 이들은 모두 로마군에서 오랫동안 보조부대장을 지낸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 두명은 제1차베드리아쿰 전투에도 참가했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를 비롯한 이들 다섯명의 '율리우스'는 쾰른에서 비밀 회합을 갖고 공동전선을 펴기로 맹세했다. 회합장소로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오늘날의 쾰른)를 선택한 것은. 이곳이 라인강 연안에 사는 속주민의 도시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 주민인 우비족이 자기네 편에 붙으면. 속주'병'과 로마군의 대결이 속주'민'과 로마군의 대결로 바뀌게 된다. 민간인을 끌어들여야만 비로소 이 반란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임을 내세울 수있다. 회합에는 우비족 대표도 참석했다. 이점에서도 트레비리족과 링고네스족이 부족 규모로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타키투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지략이 뛰어난 인물임을 보여주다.
이 쾰른 회담에서 처음으로 '갈리아 제구'(임페리운 갈리쿰) 창설이 결정되었다.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과 서쪽의 게르만계 갈리아인, 그리고 거기서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갈리아 전역의 주민을 포함한 대 제국을 건설하여 로마 세력을 알프스 남쪽으로 몰아낸다는 웅대한 계획이었다. 후세에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식민 제국에서 일어난 식민지 독립운동과 비슷하지 않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현되면 알프스 이북은 유릴우스 카이사르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회담에서 사용된 언어도 라틴어이고, 갈리아 제국을 뜻하는 '임페리움 갈리쿰'이라는 말도 라틴어였다는 점이다. 이 점도 종주국 언어를 반종주국 운동에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후세의 식민지 독립운동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율리우스' 들의 독립운동이 좌절된 것은 후세의 식민 제국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원인 때문이다. 어쨌든 '갈리아 제국' 건설의 의지를 천명함으로써 지도자인 '율리우스'들의 기세가 더 한층 올라간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 직후에 갈리아 제국 탄생을 미리 축하하는 듯한 소식이 전해졌다.
12월 19일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화재가 일어나 신전이 불탔다는 소식이었다. 로마인들이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유피테르 신전이 불탄 것을 두고, 게르만족이나 게르만계 갈리아인들은 신들조차 로마제국을 버린 징조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도 이제 틀림없이 실현할 수 있다고 의기양양했다. 냉철한 키빌리스 자신은 이런 미신을 믿지 않았겠지만, 동지들이 미신을 믿고 사기가 오른다면 나쁠 것도 없다. 그리고 율리우스 키빌리스도 로마 제국이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피톨리노 화재 소식은 라인 강 유역의 로마 군단병들에게도 전해졌다. 뒤이어 비텔리우스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낙담하여 의욕마저 잃어버린 병사들을 지휘하는 보쿨라의 고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라인 강 방위선 전체를 사수해야 하는 책임이 보쿨라의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방위선의 요충인 마인츠와 본, 노이스, 크산텐에 있는 군단기지를 사수해야 한다. 본과 노이스 사이에는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선동을 받아 침입한 게르만족에게 사실상 점령되어 있는 쾰른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보와 명령을 전달하는 일에서부터 병사 수송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편리하게 이용했던 라인강 함대도 적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그래도 보쿨라는 마인츠 기지를 방위하는 데 성공한 뒤, 다시 병력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다. 오래 전부터 농성전을 벌이고 있는 크산텐 기지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는 병력을 일단 노이스 기지까지 데려가는 데에는 성공했다. 로마군에서 군단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에게만 지원 자격이 있는 군단병의 집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통은 군단병과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말미암아 보조병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서기 69년부터 70년까지 '라인 군단' 산하의 각 군단에는 게르만계가 아닌 갈리아인 보조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군에는 군단병만이 아니라 보조병의 군장도 통일되어 있었다. 군장 면에서는 군단병이 중무장, 보조병은 경무장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주전력과 보조전력이니까, 군장을 구별하는 것은 전술상으로도 당연하다.
이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동지가 된 트레베리족 지도자 율리우스 클라시쿠스는 군장이 같은 점을 이용하여 보쿨라 휘하에 로마 군단에 자기 부하들을 침투시켰다. 로마인은 모든 분야에서 라틴어 사용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군단 내부의 용어만은 라틴어로 통일되어 있었다. 출신 부족이 다른 병사를 침투시켜도, 언어 때문에 정체가 탄로날 염려는 없었다. 노이스 기지에서 보쿨라는 크산텐을 구원하러 떠나기 전에 여느때처럼 병사들에게 연설을 했다. 병사들의 침울한 심사를 헤아려, 로마 제국에 대한 병사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비통한 어조의 연설이었다. 귀를 기울이는 군단병과 보조병들 틈에는 클라시쿠스의 부하들도 섞여 있었다. 보쿨라의 연설을 비웃고 야유를 퍼부어 결국 연설을 중단시킨 것은 이들이었다. 게다가 사태는 연설 중단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놀라서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 사이를 뚫고 연단까지 돌진한 그들은 보쿨라를 연단에서 끌어내려, 보조병이 사용하는 장검을 보쿨라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연단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군단장도 보쿨라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지휘관을 잃고 혼란에 빠진 군단병들 앞에 율리우스 키빌리스와 율리우스 클라시쿠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반로마 운동의 지도자인 두 '율리우스'는 로마 시민인 군단병들에게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이 무렵에는 군단기지에 침입한 반란군 병사들이 이미 군단병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로마 역사상 최초의 치욕
비텔리우스 옹립이 실패로 끝난 데 낙담하고, 속주병 반란 때문에 겨울철에 라인 강 연안을 여러 차례 행군하고, 이제는 지휘관마저 잃어버린 군단병들의 가슴 속에는 절망과 피로와 체념밖에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하려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핑계를 찾는 법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군제를 개혁한 이후, 속주민인 보조병도 25년 동안 복무하고 제대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로마 시민권도 세습권이다. 따라서 보조병이던 사람의 아들이라도 로마 군단병에 지원할 자격을 얻는다. 라인 강을 제국의 방위선으로 재확인하고, 그 전략에 따라 라인 강 유역의 크산텐과 노이스, 본, 마인츠가 항구적인 군단기지가 된 것은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였다. 서기 69년 당시 '라인 군단' 산하의 7개 군단은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한두 군단을 제외하면 티베리우스 이후 반 세기 동안 거의 교체되지 않았다. 라인 강을 지키는 군단병들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이긴 했지만, 그들의 몸 속을 흐르는 피는 속주민의 피였다는 얘기다. 본국 이탈리아 출신인 군단병도 만기 제대한 뒤에는 기지 주변에 사는 속주민의 딸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이것이 변경에 근무하는 군단병의 평범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원래 로마 시민이니까, 이들이 속주민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도 당연히 로마 시민이다. 군단병에 지원할 자격이 있다는 얘기다. 이 경우, 군단병의 몸 속을 흐르는 로마인의 피는 아들 세대에는 2분의 1, 손자 세대에는 4분의 1로 줄어든다. '라인 군단'은 로마군에서 최강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지만, 그것도 실제로는 게르만족이나 갈이아인의 피 덕분이었다. 이처럼 속주민의 피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군단이 여전히 로마 군단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버리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피를 이어받은 것까지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로마인을 존경하고 그 로마인과 어떤 식으로 든 관계를 가진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동안에만 국한된 일이었다. 서기 69년에 로마인끼리 싸운 내전은 로마인의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속에서 로마인에 대한 존경심을 없애 버렸다.
네로 시대 말기에 처음으로 네로를 반대하고 나선 로마 고관은 갈리아의 리옹 속주 총독 율리우스 빈덱스다. 이 또 한 명의 '율리우스'는 그러나 갈리아가 네로 같은 황제를 떠받들고 있는 로마 제국에서 벗어나 독립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네로는 로마 제국에도 적합하지 않은 황제라고 공언했으니까, 그는 갈리아인으로서가 아니라 로마인으로서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서기 69년 말까지 살아 있었다면, 1년 반 전과 다름없이 우국충정에 사로잡힌 로마인으로 행동했을까. 어쩌면 그도 키빌리스나 클라시쿠스 같은 '율리우스'들과 함께 갈리아 제국을 창설하여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자는 생각으로 기울지 않았을까. 이런 의미에서도 서기 69년의 내전은 로마 제국의 기반까지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위기였다. 존경심은 무력보다 효과적인 전쟁 억지력이 될 수 있다.
노이스 기지에 있던 로마 군단병들은 키빌리스의 강요에 따라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 사건을 두고 독일의 역사가 몸젠은 "로마 역사상, 칸나에나 카라이나 테우토부르크 숲에서 전멸당한 것은 노이스에서 일어난 이 불상사에 비하면 오히려 훌륭한 일이었다"고 개탄했다. 이 말에는 나도 공감한다. 한니발에게 완패한 칸나에 회전(제2권 참조). 파르티아의 궁수에게 우롱당한 카라이 전투(제4권 참조). 게르만족의 술책에 빠져 테우토부르크 숲에서 궤멸당했을 때(제6권 참조)는 1년 동안이나 로마인의 무능이 노출되지 않았다. 로마인은 로마인이라는 데 자부심을 가졌고, 속주민도 그런 로마인을 존경하고 로마인이라는 자신들의 깊은 관계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칸나에나 카라이나 테우토부르크에서 당한 패배는 순전히 군사적인 패배였다. 그렇기 때문에 패한 뒤에도 승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포로가 되는 쪽을 택했다. 노이스 기지에서 일어난 일은 크산텐 기지에서도 되풀이되었다. 크산텐 기지의 군단병들은 절망적인 농성전에 지쳐 있었다. 마인츠 키지를 지키고 있던 군단병들도 동료들의 뒤를 이어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 눈사태 현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의 스위스 취리히 근처의 기지에 있던 1개 군단뿐이었을까. '라인 군단' 산하의 7개 군단 가운데 무려 6개 군단이 게르만계 속주병에게 굴복한 셈이다.
타키투스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치욕"이라고 개탄한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이들 군단병은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는데도 포로 신세를 면치 못했으니, 그런 치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충성을 맹세한 로마군 병사들은 트레베리족의 근거지인 트리어로 끌려갔다. 충성 서약을 거부한 일부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라인 강 연안의 로마 군단기지는 모두 반란을 일으킨 속주병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북쪽 국경인 라인 강 방위선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래 처음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서기 69년부터 70년까지 1년 동안, 로마 제국의 안전보장체제를 뒤 흔든 사건은 둘이었다. 하나는 바타비족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갈리아 제국 창설에 이른 이 사건이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폭동으로 시작되어 마사다 요새의 옥쇄로 끝나는 유대 전쟁이다. 갈리아의 속주병 반란은 69년 여름에 일어나 70년 가을에 결말이 났으니까 1년 동안 지속되었고, 유대 전쟁은 66년 여름에 시작되어 73년 봄까지 이어졌으니까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후세의 연구자들은 로마 제국과 유대 민족의 대결이라는 관점을 중시하기 때문인지, 유대 전쟁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다. 갈리아 사태는 로마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빼고는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진 것 같다. 그러나 이때부터 30년 뒤에 씌어진 타키투스의 역사에는 갈리아 사태를 다룬 부분이 80쪽인 반면, 유대 전쟁을 다룬 부분은 10쪽밖에 안된다. 요컨대 로마 시대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갈리아 사태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았다는 뜻이다. 유대 전쟁의 결과가 로마 제국의 안전보장에 주는 영향은 간접적인 반면, 갈리아 사태의 결과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는 제국 동방의 안전보장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인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에게는 유대도 역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유대 문제에서 로마인이 두려워한 것은, 우선 유대 이외의 땅에 사는 유대인한테까지 문제가 파급되는 것이고, 둘째로는 유대 민족이 파르티아를 부추겨 로마에 반기를 들게 하는 사태였다. 당시 로마에 부여된 과제는 이 두 가지가 실현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유대는 본국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에 비해 갈리아 사태의 중요성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야망이 실현되면, 로마 제국은 라인 강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에서 동쪽으로는 엘베 강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을 적에게 넘겨주게 된다. 알프스 북쪽에 적을 갖게 되는 셈이다. 제국의 북쪽 방위선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제국의 북쪽 방위선은 알프스 산맥이 되고, 산맥 너머에 잇는 적이 언제 이탈리아로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게다가 유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격찬했듯이 유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로마 군단은 여전히 건재하고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반면, 로마군 최강이라고 평판을 받았던 '라인 군단'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유대 전쟁보다 갈리아 사태가 울린 경종이 로마인들에게는 훨씬 가까이에서 크고 강하게 울려퍼진 것도 당연하다. 로마인들이 이 두 사건에 보인 관심의 차이는 그것이 기술된 30년 뒤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갈리아 사태의 관계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갈리아 제국을 건설하여 로마로부터 독립할 것을 목표로 삼은 부류. 라인 강 서안에 사는 게르만계 갈리아인, 키빌리스가 속해 있는 바타비족처럼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게르만계 부족, 라인 강 동쪽에 살면서 로마인과는 늘상 적대관계에 있었던 게르만계 부족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둘째, 이들 게르만족이 반기를 든 대상인 로마인. 셋째, 벨기카 속주, 루그두넷시스 속주, 아퀴타니아 속주에 사는 갈리아인. 여러분이 쉽게 머리에 떠올릴 수 있도록 오늘날의 지명으로 분류하면, 첫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것은 네덜란드와 독일, 두 번째는 이탈리아, 세 번째는 벨기에와 프랑스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 이탈리아인의 조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고대 로마인은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가진 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대책을 일찌감치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알천 -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곳
[벚꽃이 만개한 알천]
신라인의 얼서린 냇물
알천은 신라의 흥망에 큰 영향을 준 하천이다. 초기에 6부의 조상들이 회의를 하다가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곳이 알천냇가이며, 38대 원성왕 때에는 즉위를 둘러싼 왕위계승 문제가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기도 했다. 이 왕위 계승 싸움은 37대 선덕왕이 죽자 일어났다. 선덕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군신들은 왕의 친족인 주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주원의 집은 알천 건너편에 있었다. 마침 큰비로 알천의 물이 불어 주원은 건너오지 못했다. 그 사이에 왕의 아우인 경신이 보좌에 올라버렸다. 이때 물론 누군가가
"왕위는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큰비는 주원에게 보좌를 전해주지 않으려는 하늘의 뜻일 것이다"라는 제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원이 냇물을 건너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며, 경신은 중신들의 발의에 따라 '하늘의 명에 의해'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경신은 곧 원성왕이 된다. 삼국유사에서는 원성왕의 등극에 알천 신의 가호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주원은 재상, 경신은 주재상이었다. 경신은 꿈을 꾸었다. 사모를 벗고 갓을 쓰고 12줄의 현금을 안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꿈이었다. 꿈을 깬 뒤 점을 치니 '사모를 벗은 것은 실직할 징조이고, 현금을 안은 것은 형을 받을 징조이며, 우물에 든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에 경신은 극히 조심하여 출입을 삼갔다. 그때 여삼이란 자가 그를 찾아와 새로운 꿈풀이를 했다. 즉 '사모를 벗은 것은 더 높은 사람이 없는 것이요.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고, 12현금을 안은 것은 12대손까지 대를 전할 징조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징조'라는 것이었다. 곧 왕이 될 대길몽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경신은 "위에 주원이 있지 않느냐"라고 묻자 여삼은 "몰래 북천(알천)의 신에게 제사하라"고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리하여 선덕왕이 죽자 경신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알천의 물 때문에 임금자리를 빼앗긴 주원은 원한을 품고 명주(지금의 강릉)로 퇴거했다. 원성왕은 그에게 명주군왕이라는 허울좋은 감투를 내렸다. 그러나 이때의 원한은 계속 이어져 뒷날 주원의 아들 헌창의 반란과 헌창의 아들 범문의 반란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이후 신라왕실에는 왕위쟁탈의 내분이 계속되어, 이 사건이 신라쇠망의 촉진제가 되기에 이른다.
알천의 위치
알천은 신라인에게는 남쪽을 흐르는 남천과 더불어 중요한 물길이었다. 알천은 동천 또는 북천으로도 불리는 형산강의 지류이다. 알천은 경주에서 보문단지를 지나 감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 황룡산에서 발원하여, 덕동호를 지나 보문호에 머물렀다가 경주시의 동편을 흘러 서천과 합류, 형산강으로 들어간다. 물길은 길이가 21km나 된다. 냇물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상류의 여러 골짜기 물을 합해 갑자기 경주평야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 물길이 곧잘 거센 급류를 이루어 옛날에는 다리를 놓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더욱이 홍수라도 지면 곧잘 범람하여 걷잡을 수 없이 시가지를 적셨다. 주원이 등극하지 못한 것도 이 냇물이 폭우로 홍수가 졌기 때문이었다. 주원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사에 '북천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 알천의 하류에 있었던 듯하다. 알천의 물길은 홍수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 경주인들은 알천의 물길을 잡는데 애를 먹었던 듯하다. 현재의 알천은 어느 정도의 변동이 있었으나 거의 원래의 물길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알천의 한 지류가 구황동의 분황사 옆으로 해서 안압지 북쪽을 흘러 계림의 미추왕릉 뒤로 빠져 경주공고 뒤편으로 흘렀음이 추측되고 있다. 이러한 추측을 근거로, 이 물길이 바로 6부장의 족장들이 냇가에 앉아 회의를 가졌던 그 알천일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향토사학자들도 있다. 현재의 알천과 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까지는 거리가 퍽 멀다. 나정에서 가까운 하천은 남천이 있을 뿐이다.
6부장들이 지금의 알천 가에 모여 회의를 했다면 나정에 말이 끓어 앉아 있는 것이 보일 리가 없을 만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얘기의 앞뒤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6부장이 모인 곳은 바로 남천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한때 많이 나왔다. 그러나 알천의 지류에 대한 추측으로 이를 해석하려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알천의 물길이 신라 당시에는 분황사 동편으로 해서 안압지 동편을 흘러 남천에 합류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주원의 얘기와 모순된다. 알천의 물길이 경주시내를 동서로 관통했다는 흔적은 지금도 꽤 남아 있다. 일제 때 경주시 성동리에 있는 전랑지(사적 88호)의 발굴 당시, 이곳에 있었던 궁성의 일부가 범람하는 알천의 물길로 잘려나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경주고등학교 뒤편으로는 당시 쌓았던 제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알천은 이 지역에서 한 지류가 생겨 경주시가지 쪽으로 흘러갔음을 이 유적은 보여주고 있다. 혁거세의 배필인 알영부인이 태어났을 때 그 입술을 씻긴 곳이 월성(반월성) 북쪽 하천이라 했는데, 아마 안압지부근의 알천지류가 아니었는가 싶다.
알천의 범람
알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경주인들은 많은 고심을 해왔다. 조선초기에는 이 범람하는 물이 봉덕사를 삼켜버렸을 정도로 해마다 피해가 컸다. 그래서 고려 때는 알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3도의 병사들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조선 때에는 연일 등 인근의 백성들을 매년 동원하여 제방쌓기에 힘썼다. 그러나 먼 곳의 백성들을 동원하기가 곤란하여 각 고을에서는 노임의 대가를 현금으로 경주에 납입하여, 경주부에서 일꾼을 사서 제방을 쌓기도 했다. 이 돈을 이 지방에서는 '물 아랫돈'이라 했다고 한다. 경주 아전들이 빚장이에게 졸리면 으레 '물 아랫돈이 올라오면 갚겠다'라고 했다는 데서 연유하여 지금도 이 말이 이 지방에서는 속담 비슷하게 전해온다. 이처럼 골치 아팠던 알천도 지금은 제방시설이 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방 아래 고수부지가 조성되어 공원화 되었다. 또한 상류의 덕동댐과 그 밑의 보문호가 생겨 홍수의 걱정은 없어졌다. 봄이면 분황사에서 보문호로 이어지는 알천변에 흐드러지게 피어 오르는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알천은 경주분지를 흐르는 하천 중 수량이 가장 많다. 그래서 상류에는 경주시민의 식수해결을 위한 덕동댐이 조성되었고, 그 아래 다시 보문호가 조성되어 거대한 위락단지를 이루었다.
도림사 - 동화 같은 경문왕의 비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도림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경주 들판을 불고 간 바람은 천년의 세월 동안 숱한 절들을 흙 속에 묻어 버렸다. 도림사라는 절로 바람 속에 사라져버린 절 중의 하나이다. 이 절은 바람과 대나무와 산수유나무의 관계 속에 펼쳐지는 동화 같은 얘기 하나를 간직했던 절이다. 신라 말기의 왕인 경문왕은 마누라를 잘 얻은 덕분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귀가 커지기 시작하여 꼭 당나귀 귀 같았다. 그래서 늘 귀를 감추어 왕후와 궁인은 물론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다만 복두(신라 진덕여왕 때부터 처음으로 머리에 쓰기 시작한 관리의 모자)를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 장인은 왕의 비밀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비밀을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마침내 죽을 때가 되어서 그는 홀로 도림사의 대숲 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들을 보고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후 바람이 불면 도림사의 대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이에 놀란 경문왕은 대나무들을 베어 버리고 대신 산수유를 심었다. 그 뒤로는 바람이 불면 그 숲에서 다만 이렇게 소리가 났다. "임금님 귀는 길기도 하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이야기와 흡사한 것에 희랍의 '마이다스 왕'이야기가 있다. 마이다스 왕의 얘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전세계 어린이들이 동화책을 통해 알고 있다. 마이다스 왕의 얘기는 경문왕의 얘기와 신기할 정도로 거의 똑같다. 마이다스도 경문왕과 같이 귀가 당나귀 귀 같았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궁중에 전속된 이발사뿐이었다. 이발사는 왕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기로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갈대밭으로 나가 구덩이를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토설한 후 구덩이를 매워 버린다. 그러나 그후 그 구덩이에서 솟은 갈대가 바람이 불면 그 사실을 발설하게 된다. 경문왕과 마이다스 왕의 얘기는 퍽 문학적이다. '하고 싶은 말'을 토해 놓는 것을 문학에서는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갖는 '정화'와 '배설'의 의미를 가지며, '아리스토텔레스'이래로 문학의 한 요소로 대단히 중시되어왔다. 이 이야기는 또한 사실을 숨기거나 금기하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도림사의 위치
이 이야기의 현장인 도림사의 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는 '도림사는 도림입구에 있었다'라고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도림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태종 춘추공'조에도 보인다. 성부산 이야기에 보면 '이산(성부산)이 도림의 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성부산은 경부 고속도로 경주 톨게이트의 남쪽에 있는 망산의 바로 곁에 위치한 산이다. 그런 만큼 도림을 천경림과 오릉이 있었던 남정숲을 지칭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도림은 경주의 동쪽, 북천(알천)의 서편에 있었던 숲이었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다. '도경잡기'에 보면 동천(북천을 말한다)가에 '오리숲'이 있어 숲이 5리 뻗쳤다고 적혀 있다. 이 오리숲이 바로 도림일 것이라는 추측을 많이 하고 있다. 이 숲은 옛날 알천의 수해방지를 겸해 심어졌던 것이다. 지금 그 숲은 흔적도 없다. 논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직 보문리의 경주 수조 저수지 밑에 '숲머리'라는 마을이 남아 있어 숲의 동쪽 끝이 이 마을부근이었음을 추측할 뿐이다. 이 숲은 이 마을에서 알천내를 따라 현재 분황사가 있는 곳까지 뻗쳐 있었던 듯하다.
1930년경 일본인 '오사까 긴따로'씨는 분황사 동쪽 들판에서 '도림'이라 새겨진 기와조각 하나를 주웠다. 현재 분황사 동편 들에서 있는 제사공장 서편이다. 이 기와 파편이 단서가 되어 이 일대가 도림의 입구에 해당하는 만큼 현 제사공장이 있는 경주시 구황동 들판이 도림사의 절터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명문기와 파편은 그 후 정적이 묘연해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도림'이라는 명문 기와조각이 발견된 들은 분황사와 황룡사지의 동편 산업도로 건너편 들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절터가 발견되었다. 제사공장 옆에는 모전 석탑 터가 있으며, 제사공장 남편에서 낭산에 이르는 들에는 여러 개의 절터들이 논 속에 묻혀 있다. 그래서 도림사터는 이들 절터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해볼 수 있을 뿐이다.
뱀과 함께 잠잔 임금
도림사의 대나무를 베어버린 경문왕은 일상생활에 기이한 면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잠자리에는 날마다 저녁이면 무수한 뱀들이 모여 들었다. 궁인들이 놀라 뱀들을 몰아내려 하면 왕은 "나는 뱀들이 없으면 편히 잘 수가 없다. 그냥 두라"고 했다. 왕은 늘 뱀과 함께 잤으며 왕이 잘 때면 뱀들은 혀를 낼름거리며 왕의 가슴을 뒤덮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얘기들은 기이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뱀과 논다'는 것은 어쩌면 궁중에서 벌인 '섹스 파티'를 상징한 것이 아니었을까. 뱀은 성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경문왕은 그 전 왕인 응렴왕의 맏공주에게 장가를 든 사람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둘째 공주에게 더 맘이 있었다. 맏공주는 못 생기고 둘째공주는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이 있어 맏공주를 취해 그 때문에 보위에 오르게 되며, 보위에 오른 후 둘째 공주도 품안에 넣는다. 그런 만큼 그는 섹스에도 퍽 관심이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귀 이야기'나 '뱀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이 임금은 탄로나면 곤란한 비밀들이 퍽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궁중 안의 일들이 궁중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퍽 겁냈던 듯하다. 경문왕은 신라 말기 때의 임금이다. 신라는 말기에 이르면서 이런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경문왕 다음 대의 왕인 헌강왕 때에만 해도 용의 아들인 처용이 궁중에 들어오며, 왕이 포석정에 거동했을 때는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기도 했다. 또한 금강령에 거동했을 때는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기도 했다. 신라 말기의 이러한 기이한 조짐들은 바로 신라 쇠운의 조짐들이라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타진하고 있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