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2호 - 2024.07.08 월요일(음력 : 06.03)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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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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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인생 이니까 함부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변명. ― 빌 코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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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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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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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모두 바둑에서 온 말이었구나!
최근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 대국이 지상파 방송 등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국민들 사이에 바둑 붐이 일고 있다. 필자처럼 바둑을 못 두는 문외한들도 바둑을 통한 사람과 인공지능의 흥미로운 대결을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바둑의 묘미를 느끼게 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바둑 중계방송에서 접할 수 있는 상당수의 바둑 용어들이 우리가 평소 일상생활에서도 널리 사용하고 있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거저 더 얹어준다’는 의미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덤’이라는 말이 바둑에서도 사용되는데, 바둑 대국에서 먼저 두는 흑돌이 유리하게 때문에 나중에 두는 백돌에게 몇 집을 더 주는 일을 ‘덤’이라고 한다. 또한 포석(布石)은 ‘중반전의 싸움에 유리하도록 초반에 돌을 벌여 놓는 일’을 말하는 바둑 용어인데,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행동’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석(定石)이라는 말도 바둑에서 ‘예로부터 공격과 수비에 최선이라고 인정한 방식으로 돌을 놓는 법’을 말하는데, 일상적으로 ‘수학의 정석’처럼 ‘어떤 일의 정형화된 순서와 방식’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사활(死活)이라는 말도 ‘돌과 돌이 살고 죽는 싸움’을 총칭하는 바둑 용어인데 일상에서 ‘목숨을 걸만큼 매우 중요한 문제’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 자충수(自充手-자기가 놓은 돌로 자기의 수를 줄여 자멸을 자초하는 수), 악수(惡手-잘못 두는 나쁜 수), 강수(强手-무리함을 무릅쓴 강력한 수), 묘수(妙手-생각해 내기 힘든 좋은 수), 승부수(勝負手-판국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수)도 모두 바둑의 기술에서 온 일상 속 용어들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알파고
온 인류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세기의 대결’이 마침내 끝났다. 이세돌 9단과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 얘기다. 모두들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측에 여념이 없는 중에 ‘신흥 바둑 명문, 알파고엔 어떻게 진학하나요?’라는 뜬금없는 우스개가 눈에 띄었다. 알파고의 ‘고’를 고등학교의 ‘고(高)’라고 착각했다는 건데, 아닌 게 아니라 바둑 프로그램에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알파(alpha)’는 그리스 자모의 첫째 글자인 α의 이름이다. 영어에서는 대개 여러 개의 연속물 중 첫 번째 것을 가리키는 말로 잘 쓰인다. 말하자면 ‘제1호’ 정도의 뜻이다. ‘고(Go)’는 영어로 바둑을 뜻한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이 말은 19세기 일본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둑을 뜻하는 한자 ‘기(棋)’를 중국어에서는 ‘치’, 일본어에서는 ‘고’라고 읽는데, 이 말의 일본어 발음을 따라 영어 단어가 만들어졌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니는 바둑은 본래 중국에서 탄생했다. 이후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그러나 일본을 통해서 서방 세계에 알려졌기에 일본어가 그대로 영어 단어가 된 것이다.
‘인삼’의 영어 명칭인 ‘진셍(ginseng)’도 일본어를 통해 영어가 되었으리라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진셍’은 17세기 중엽의 중국어 발음을 따라 만들어진 말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런선’, 일본어에서는 ‘닌진’과 비슷하게 발음된다.
우리말에서 영어 단어가 된 대표적인 단어는 ‘온돌(ondol)’이다. 방바닥 아래로 불기운이 지나게 하는, 우리 고유의 난방 방식을 말한다. 영어 문헌에서는 1930년대에 처음 쓰였다고 한다. ‘김치(kimchi)’도 대부분의 영어 사전에 올라 있다. 앞으로 또 어떤 말이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통해 영어 단어가 될지 기대가 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빌려주다
다음 중 띄어쓰기가 올바른 것은 무엇일까?
① 책을 빌려 주었다.
② 책을 빌려주었다.
정답은 2번이다. ‘빌리다’는 ‘남의 물건 따위를 돌려주기로 하고 가져다 쓰다’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 뜻의 단어는 원래 ‘빌다’였고, ‘빌리다’는 그 반대로 ‘나중에 돌려받기로 하고 남에게 제 물건을 내주다’의 의미였다. 그런데 점차 ‘빌리다’가 원래 뜻으로는 쓰이지 않고 ‘빌다’를 대신하여 쓰이게 되자, 익히 알듯이 1988년 표준어 규정에서 ‘빌리다’를 표준어로 삼고 ‘빌다’는 비표준어로 처리하였다. 즉 남의 물건을 가져다 쓰는 뜻으로 ‘빌다’는 사라지고 ‘빌리다’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면 ‘빌리다’가 원래 쓰이던 자리, 곧 제 물건을 내주는 의미로는 어떤 말이 쓰이는 것일까? 바로 ‘빌려주다’이다. “책도 빌려주고, 돈도 빌려주고, 쌀도 빌려주고”처럼 쓰인다.
이 ‘빌려주다’는 한 단어로서, 붙여 쓴다. 만일 위 1번처럼 ‘빌려 주다’로 띄어 쓰면, 제 물건을 내주는 의미가 아니라 남의 물건을 가져다 쓰는 의미가 되고 만다. 즉 ‘(짐을) 들어 주다, (노래를) 불러 주다, (아기를) 업어 주다’가 들고, 부르고, 업는 것이듯이 ‘(책을) 빌려 주다’는 ‘빌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빌려주다’는 그 속에 제 물건을 내준다는 ‘빌리다’의 원래 의미가 녹아 있다. 아마 그런 의미로 쓰이던 시기의 ‘빌려 주다’가 굳어져 단어 ‘빌려주다’가 되었을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도 처음에는 이를 표제어로 올려놓지 않았지만, 현재는 한 단어로 올려놓고 있어 ‘빌려주다’가 단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작은 띄어쓰기 문제 하나지만, ‘빌려 주다’와 ‘빌려주다’에 관한 관심 하나가 우리말을 더욱 가다듬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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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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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나무 -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
풍랑몽 1 - 정지용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끝없는 울음 바다를 안으올때
포도빛 밤이 밀려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물건너 외딴 섬, 은회색 거인이
바람 사나운 날, 덮쳐 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래십니가.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물건너 외딴 섬, 은회색 거인이
바람 사나운 날, 덮쳐 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창밖에는 참새떼 눈초리 무거웁고
창안에는 시름겨워 턱을 고일 때,
은고리 같은 새벽달
부끄럼성 스런 낯가림을 벗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외로운 졸음, 풍랑에 어리울 때
앞 포구에는 궂은비 자욱히 들리고
행선배 북이 웁니다, 북이 웁니다.
~~~~~~~~~~~~~~~~~~~
未熟한 盜賊 (미숙한 도적)- 김수영
기진맥진하여서 술을 마시고
기진맥진하여서 주정을 하소
기진맥진하여서 여관을 차저 들어갔다
옛날같이 낯선 방이 그리 무섭지도 않고
더러운 침구가 마음을 괴롭히지도 않는데
의치를 빼어서 물어 담거놓고 들어 누우니
마치 내가 임종하는 곳이 이러할 것이니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든다
옆에 누은 친구가 내가 이를 뺀 얼골이 어린 아해 갔다고 간간대소하며 좋아한다
이 친구도 술이 취한 얼골을 보니 처참하다
창을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를 들어도 불안하지도 않고
도회에서 태어나서 도회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젊은 몸으로 죽어가는 전선의 전사에 못지않게 불상하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생각을 함으로써 하로하로 도회의 때가 묻어가는 나의 몸을 분하다고 한탄한다
친구가 일어나서 창밖으로 침을 뱉고 아래로 내려갔다 오드니 또 술을 마시러 나려가자고 한다
기진맥진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서
차가운 이를 건져서 끼고 따라서 나려간다
그중 끝의 방문을 열고보니 꺼먼 사람이 셋이나 앉었다
얼골은 분간할 수도 없는데
술 한병만이 방 한가운데
광채를 띠우고 앉어 있다
나는 의치를 빼서 호주머니에 넣고 앉자
선뜻 인사를 하고
음시를 한바탕 읊었드니
여간 좋아들 하지 않는다
나이를 물어보기에 마흔여덜이라고 하니 그대로 곧이듣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였다
눈알에 백테가 앉은 사람같이
보이는 것이 모두 몽롱하다
청한지 반시간만에 떠다 주는 냉수를 한 대접 마시고
계단을 내려와서
어제ㅅ밤에 술을 마시든 방을 드려다보니 이불도 벼개도 타구 하나 없이 깨끗하다.
「도적질을 하는 것도 저렇게 부지런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이게 무어야, 빨리 나가서 배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세.」하고 친구가 서두른다
「그러니까 초년생도적이지」하고 쑥스러운 대ㅅ구를 하면서
기진맥진한 머리를 쉬일 곳을 찾아서 친구의 뒤를 따라서 걸어나왓다.
우리의 잔등이에는「미숙한 도적」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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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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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지몽(華胥之夢)
華:빛날 화. 胥:서로 서. 之:갈 지(…의). 夢:꿈 몽.
[유사어] 화서지국(華胥之國). 유화서지국(遊華胥之國).
[참조] 호접지몽(胡蝶之夢). [출전] ≪列子≫〈黃帝篇〉
화서의 꿈이란 뜻으로, 좋은 꿈이나 낮잠을 이르는 말.
먼 옛날 중국 최초의 성천자(聖天子)로 알려진 황제[黃帝:공손헌원(公孫軒轅)]는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놀러 가 안락하고 평화로운 이상경(理想境)을 보았다. 그곳에는 통치자도 신분의 상하도 연장(年長)의 권위도 없고, 백성들은 욕망도 애증(愛憎)도 이해(利害)의 관념도 없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도 초연하다. 또 물 속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 죽지 않으며, 공중에서 잠을 자도 침대에 누워 자는 것과 같고 걸어도 땅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또한 사물의 미추(美醜)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고 험준한 산골짜기도 보행을 어렵게 하지 않는다. 형체를 초월한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 충만한 이상경인 것이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번뜻 깨닫는 바 있어 중신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지난 석 달 동안 방안에 들어앉자 심신 수양에 전념하며 사물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려 했으나 끝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소. 그런데 짐은 이번에 꿈속에서 비로소 그 도(道)하는 것을 터득한 듯싶소.”
그 후 황제가 ‘도’의 정치를 베푼 결과 천하는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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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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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5. 민주당의 집안싸움 (2/2)
분란이 그치지 않는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 한다. 서로 자파의 이익을 전제로 해서 정략을 세우다보니 신.구파 사이에는 분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 분란은 신파가 구파의 정략에 일패도지하게 되자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정.부통령 선거부터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파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를 꿰뚫어 본 구파는 자유당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 선개헌(先改憲) 총선거를 통해서 시국을 수습하도록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버렸던 것이다. 신파는 구파의 날쌘 행동에 책상을 치면서 통분해 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파로서는 도무지 손 쓸 겨를도 없었고 손을 쓴대야 자유당 온건파한테 먹혀 들어갈 리도 없자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는 원외(院外)의 소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변영태, 고정훈(高貞勳) 등은 내각책임제 반대여론을 일으켜 보고자 무진 애를 썼으나 여기에 호응해 오는 여론은 없었다. 특히 고정훈은 이 일로 해서 신파는 고정훈한테 2천만 환이나 되는 자금을 주어 했다는 모함을 받게 되었다. 고정훈이 신파한테서 2천만환의 자금을 먹었는지의 여부는 가려낼 길이 없다. 이 문제는 고정훈 본인이 입을 열어야만 진상은 밝혀질 수가 있다. 돈을 먹었다면 모함이랄 수는 없고 먹지 않았다면 모함이된다. 하여간에 그건 나중에 있었던 일이다. 구파한테 보기 좋게 한 대 얻어맞은 신파는 원의(院義)를 받아들이려 하기 전에 최후의 안간힘을 써서 정치 공세를 취했다. 선개헌 후총선의 결의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4월 27일, 조재천은, "어제 국회가 개헌 후, 해산을 결의했지만 많은 의원들이 동조한다면 26일의 결의는 재론할 수도 있다. 현 3.15 선거에서 투표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국민이 그 투표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총궐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이번 정.부통령 선거에 한해서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하는 것이 영예로운 혁명의 의의를 살리는 길이다" 하고 여론에 호소하려 들었다. 주요한도 한마디 했다.
"4.19 사태는 혁명이다. 그러므로 현행 헌법은 기능이 정지돼야 하고 국회도 해산해야 한다. 학도, 교수단, 서울 변호사협회, 편집인협회, 공명선거 추진위원회 대표, 비자유당계 대표 등으로 <비상 입법의회>를 구성,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는 전혀 메아리가 없었다. 메아리가 있어야 그나마 어떤 당선시켜 정권을 잡아 보겠는데, 어느 한쪽 구석에서도 메아리가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사이에 들어선 허정의 과도정권에서는 8.15까지는 정권을 이양토록 한다는 정치 일정을 짜놓고 그대로 밀고 나가고 있었으니 싫으나 좋으나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1960년 6월 15일이다. 그리고 과도정권에서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7월 29일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정치 일정을 잡아 놓았다. 과도정권의 이런 정치 일정에 맞추자면 당으로서도 서둘러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이 총선거에 입후보할 공세를 펴고 있던 신파는 장면이 <국회의 결의를 존중해서 내각책임제 개헌, 총선거의 정치 일정을지지한다>라고 담화를 발표하자 어쩔 수 없이 또 구파와 이마를 맞대고 당면한 문제를 협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동지였으니까. 그러나 눈 앞에까지 굴러 들어왔던 정권을 잡으려는 순간 놓친 꼴이 된 신파는 구파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이 원한을 푸는 방법으로써 구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한창 공천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당내에 이런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강영훈(姜永薰) 의원이 이기붕의 비서한테서 백만환을 받아 먹었다면서?" 송인상(宋仁相)이란 놈한테 백만환이나 되는 돈을 받아 먹었다던데 뭘!" "송인상이란 놈 조영규 의원한테만 백만환을 준 게 아니래, 조한백(趙漢柏), 유홍(柳鴻)한테도 30만환씩 따로 주었다는 거야!" 이런 말이 누구의 입에서 먼저 발설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돈을 받아 먹었다는 의원들이 모두 구파이고 보면 신파의 어느 누군가의 입에서 발설된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조병옥이 수술차 미국으로 떠날 때 자유당이 비용에 보태 쓰라고 준 5백만환도 말썽의 씨앗이 되었다. "구파하고 자유당하고 어떤 묵계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야 정적한테 내놓을 리가 있어?" 듣고 보면 그럴싸했다. 이승만한테 대적하려는 정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 했던 것이 자유당의 기본 태도였다. 그런 놈들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이승만에게 맞서려는 조병옥한테 5백만환씩이나 되는 자금을 비용으로주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떤 정치적 묵계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하고 신파가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 만한 일이었다.
5백만환은 당시의 금액으로는 큰 돈이었다. 쌀 한 가마에 1만 7천2백환을 했으니까, 오백만환이라면 얼마만큼 큰 돈인지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타계해서 이 세상에는 없지 않은가.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생존시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따지자면 코너에 몰리게 될 것은 구파가 아니라 신파였다. <이 친일파놈들! 너희놈들 일제 침략자의 앞잡이가 되서 벼슬을 산 놈들 아냐? 우린 적어도 항일운동을 벌여온 애국자들이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뭣이 어쩌고 어째?> 하고 반격에 나서기라도 할 것 같으면 신파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은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어떤 묵계가 있었는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생존시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점잖치 못한 행위였다.
"9월 26일에 이승만이 하야하기 전에 신파는 이승만 하야운동의 무마공작비로 자유당한테서 수억환의 돈을 받았다더군."
"그뿐이면 또 괜찮게, 신파에서 그 돈 가운데서 2천만환을 떼어 고정훈한테 주어 개헌반대운동을 펴도록 부탁했다는 거야."
"김훈(金勳) 의원도 자유당 입당조로 1천만환을 받아먹은 일이 있다는 거야!"
이쯤 되면 <장군, 멍군>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김훈의 경우 와이셔츠를 세탁소에 맡겼는데, 그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1천만환짜리 수표와 자유당 입당원서가 나옴으로써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는 주석까지 달려 있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 매수공작을 벌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1959년 10월 9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조정훈(趙定勳)이 민주당을 탈당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을 효시로 해서 10월 15일에는 김주묵(金周默)이, 23일에는 송영주(宋榮柱)가, 25일에는 유승준(兪昇濬)이, 11월 9일에는 김삭(金朔)이, 24일에는 홍순희(洪淳熙)가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했다. 1960년에 들어서자 1월 6일 허윤수(許潤秀)가, 8일에는 권오종(權五鍾)이, 26일에는 김규만(金圭晩)이, 2월 1일에는 구철회(具喆會)가, 3월 2일에는 박창화(朴昌華)가 각각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했다. 이들이 자유당에 매수당한 액수는 2천만환 또는
"더러운 자식들, 그래 이 자식들아! 정치를 한다는 놈들이 고작 2,3천만환의 돈에 지조를 팔더란 말야?"
"계집은 정조, 사나이는 지조라고 했어! 그래 명색이 사나이요, 정치를 한다는 놈들이 어디 지조 팔아먹을 데가 없어 망조가 든 자유당놈들한테 2,3천만환의 돈에 지조를 팔아? 때려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을 놈들아!"
민주당을 탈당한 10명의 변절자들을 매도하는 소리는 혹독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들 10명의 국회의원은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저 어쩌다 국회의원이 되기는 되었으나 원내에서 발언 한마디 제대로 하던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런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을 자유당이 빼내 가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 10명을 자유당이 돈으로 매수해서 빼내 간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선전적인 목적>을 위해서였다.<민주당은 신.구파의 파벌 싸움으로 해서 정당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없어 탈당을 결심하게 되었다>라는 그들의 한결같은 탈당 이유만 보더라도 선전목적을 위해 매수공작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훈의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1천만환짜리 수표와 자유당 입당원서가 나왔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김훈이 그런 인물이었어?"
"기왕에 팔려갈 것이라면 남들처럼 하다 못해 2,3천만환에 팔릴 일이지 그래 고작 이쯤 야유하는 말이 퍼지게 되면 김훈의 인격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정치생명은 끝장이다."
그러기에 김훈의 노여움은 열화 같았다.
"고담룡(高湛龍)이 이놈, 네놈이 나하고 무슨 원수진 일이 있다고 그따위 허튼 수작을 부리고 다녀?"
김훈의 생각 같아서는 고담룡을 씹어먹고 싶었을 것이다. 김훈에 관련된 발설자는 구파에 속해 있는 고담룡이었던 것이다. 김훈은 6월 13일 국회 본회의 때에 신상발언을 통해, 자기는 자유당으로부터 1천만환을 받은 일도 없거니와 자유당에 입당하고자 한 일도 없다고 해명하고 사회자인 부의장 이재형(李載灐)에게, "고담룡이 무슨 까닭으로 내게 대한 해명하고 피해자인 나한테 사과를 시키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의 집안 싸움은 마침내 의사당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한데 이재형은 김훈의 요구에 대해서,
"고 의원이 의사당 내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모를까, 고 의원이 자진해서 해명하려 하기 전에는 사회자가 해명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훈의 요구를 거절해 버렸다. 동료들 앞에서 누명을 벗고자 했던 김훈의 기도는 좌절되고 만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받힌 김훈은 단상에서 내려가 고담룡이 앉아 있는 의석으로 다가가 다짜고짜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해명해. 해명을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말겠다."
김훈의 서슬은 퍼랬다. 당장에 요절을 내버리고 말 것처럼 길길이 뛰었다. 그때 구파의 유진산이 발언권을 얻어 단상으로 올라갔다.
"김훈 의원의 천만환 건은 고담룡 의원이 발설한 것이 아니에요. 바로 민주당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나온 말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대한 해명은 위원장인 임문석(林文碩) 의원한테 요구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선 고담룡을 감싸고 돌았다. 이어서 유진산은,
"나는 조병옥 박사로부터 5백만환을 받은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측에서는 조내가 다시 넘겨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앞으로 이 문제는 마땅히 당이나 사직당국에서 밝혀야 할 일인 줄로 압니다" 하고 핏대를 돋구었다. 유진산이 감싸주자 용기가 생겼는지, 김훈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고담룡이 발언권도 얻지 않고 단상으로 달려 올라왔다.
"김훈 의원이 날더러 자진 해명토록 하라고 하니 해명하겠습니다."
그가 미처 말끝도 맺기 전에 이재형이 가로막고 나섰다.
"고 의원, 여기가 민주당 의원 총회장인 줄 아시오? 발언을 하려거든 발언권을 얻고 나와야 할 게 아니오?" 하고 고담룡을 호되게 나무랬다. 그런 다음 이재형은
"의원 동지 여러분, 여기는 민주당의 의원 총회장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둡니다. 그러므로 정치자금문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발언권을 주지 않겠습니다."
의사당에서 벌어질 듯하던 민주당의 집안 싸움에 이재형은 한마디로 쐐기를 박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의사당 내에는 폭력이 난무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글쎄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창피한 놈들! 민주당놈들은 좀 낫겠지 했더니 자유당놈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어."
"누군데? 그놈들도 이승만한테서 잔뼈가 굵은 놈들이 아냐."
민주당 인사들 태반이 이승만 밑에서 벼슬을 한 자들이었지만 잔뼈가 굵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민주당은 신.구파 가릴 것 없이 여론에 귀를 좀 기울여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론에 귀를 기울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너무 지나치게 싸움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정치 자금문제는 어느 나라나 말썽의 씨앗이 되고 있지만, 그러나 정치를 하는 사람끼리는 그것을 캐려 들지 않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로 되어 있다. 하물며 <아무개가 아무개한테 얼마의 돈을 받았더라>라고 공개한다는 것은 그런데도 민주당 신.구파는 이 정치자금문제를 가지고 서로 상대방을 비방했고 중상을 했다. 그래 가지고 얻는 소득이란 무엇인가? 서로가 상처를 입는 소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정치를 한다는 민주당 신.구파 인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녹아웃 시키고자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였다. 마침내 정치자금문제를 둘러싼 싸움은 제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싸움의 발단은 백두진(白斗鎭) 때문이었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백두진 하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잘 알고 있다. 그는 황해도 신천(信川) 태생, 일본 도쿄 상과대학을 이사를 역임했다. 그에게는 고향과 얼킨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신천군민회(信川郡民會)라는 친목단체가 있다. 명칭 그대로 여기의 회원들은 신천군 출신자들이다. 공산 치하가 된 고향땅을 버리고 남하해 온 실향민들인 만큼 그들의 우애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백두진이 박 정권에 붙어서 한창 득세하고 있을 때, 신천군민회 간부들이 찬조금을 얻으러 갔다. 1년에 한두 번씩 모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군민회에서는 그 비용에 좀 보태 쓸까 해서 찬조금을 얻으러 갔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고향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간 좀 보태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군민회 간부가 찬조금을 조금 희사해 줄 이 말을 들은 백두진은 펄쩍 뛰었다.
"이 사람들 무슨 소릴 하고 있어? 고향 사람들 위해서라니? 내 고향이 어째서 황해도 신천이야? 내 고향은 충청도 대전이야!"
백두진은 고향이 대전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단 한푼도 찬조하지 않았다. 좀 창피한 꼴이 된 군민회 간부들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고향을 이북이라고 하면 출세에 지장이 있다 이거지. 그렇거든 차라리 경상북도 구미요, 할 일이지 대전은 또 뭐 말라 비틀어진 대전이야? 치사스러운 작자 같으니!"
그의 말마따나 고향이 황해도 신천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더라도 신천에서 몇 해 실향민들을 위해서 조금이나마 보태 주었던들 <치사스러운 작자>라는 욕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백두진이라는 인물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인물이 민주당에 공천을 신청한 것이다. 당원도 아니었던 그가 경기도 이천에서 출마을 하겠다고 공천을 신청한 것이다. 백두진이 민주당에 공천 신청을 냈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는 황해도 신천에서 월남해 오자, 처음에는 이범석(李範奭)과 손을 잡고 청년운동을 벌였다. 민족청년단 재정부장으로서 그는 정계로 입문하는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 그가 1951년 3월에는 이승만에 의해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고작해야 청년단의 발탁되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고 그로서는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인 1952년 10월에는 국무총리 서리를 겸임했고, 다시 1953년 4월에는 정식으로 국회의 인준을 받아 국무총리로 영정했었다. 황해도 신천 군민들은 <우리 고을 출신이 재상이 되었다>고 해서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모른다.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고 하면 한국 정계에서는 거물 중의 거물이라고 할만 했다. 장면이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또 부통령 후보로 지명될 수 있었던 것도 국무총리를 역임했다는 관록 때문이었다. 그런데 6월 3일 의원총회에서 조영규, 민관식(閔寬植), 공천 신청을 문제삼아 신파에서 정치적 공세를 취했다.
"백두진 그 사람이 누구야? 그 사람 저 유명한 중석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아니오. 여러분은 그런 인물을 우리 당에서 받아들여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민관식이 포문을 열자, 김의택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가 이 정권의 독재하에서 10여 년간을 고생을 했고 학생들이 피를 흘려 나라를 구했는데, 이제 와서 다 지어 놓은 밥에 수저를 들고 덤벼들다니 이게 도시 말이 되는 소리요? 신파도 어째서 이 따위 인물을 끌어들였는지 이실직고 해주기를 요구하오. 내가 듣기로는 백씨가 신파의 수천만환의 정치자금을 제공해 주고 그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흑백을 분명히 해주십시오."
신파는 도시 꿀먹은 벙어리였다. 조영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쳤다.
"백씨가 신파에게 수천만환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말은 나도 듣고 있어요. 유성권(劉聖權) 의원, 당신이 다리를 놓았다면서?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진상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어서 이 자리에서진상을 공개하도록 하시오!"
난처해진 것은 유성권이었다. 뭐라고 해명을 해야만 옳단 말인가? 조영규가 이름까지 대면서 해명을 요구하자, 유성권은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사실이나 정치자금 제공 운운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다만 민주당의 문호개방 정책에 따라 백씨를 입당시키고자 했을 뿐이에요" 하고 앉아 버렸다. 구파에서는 한동안 신파를 성토하는 화살을 쏘아댔다. 그런 다음 정성태(鄭成太)가 백두진 입당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동의(動議)를 했다.
"첫째, 백두진 씨의 입당을 거부하는 건의를 중앙상무위원회에서 한다. 두 번째, 입당 심사규정에 의한 정당한 절차를 밟았는가 하는 것을 해명한다. 셋째, 정당한 심사규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천에 공천 신청을 낼 수 있었는지 중앙상위는 해명하도록 합시다."
이 동의는 신파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신파는 구파의 정치 공세에 두 손을 들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자금문제를 둘러싼 제2라운드는 좀 싱겁게 끝난 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이것은 태풍을 예고하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놈들아, 언제까지 파벌싸움을 끌어갈 생각이야? 그렇게 질질 끌면서 파벌싸움을 벌일 바엔 차라리 갈라서라, 갈라서!"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뜻이 안 맞는데 동거하고 있는 게 뭐야? 차라리 갈라서고 말 일이지!"
정치싸움도 구경할 맛이 날 때가 있다. 정치싸움이 없다면 민주주의란 곧 싫증이 나고 권태로워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싸움이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래야 민주주의에 대해서 싫증이나 권태를 느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무슨 놈의 개수작을 늘어 놓느냐고 쌍심지를 켤 독자가 있을는지로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싸움이 없는 사회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세상이 삭막하겠는가. 다만 정치싸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싸움의 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데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혹자는 눈을 부라릴지도 모른다. "정치싸움에 무슨 놈의 질이 있어?" 하고.있다. 양질의 정치싸움은 멀찍이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신바람이 난다. 깨끗한 매너로 벌였던 운동경기를 구경했을 때처럼 가슴이 후련해진다. 예를 들면, 미국의 민주.공화 양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전, 또 양당 후보가 겨루는 대통령 선거전 같은 것이 양질의 정치싸움이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싸움이지만 그 싸움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후련해진다. 거기에 비해서 악질의 정치싸움을 목격하게 되면 구역질이 솟구친다.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이 바로 대표적인 악질의 정치싸움이었다. 아무개가 누구한테서 얼마만큼의 정적한테 이런 중상모략을 했다면 또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한 집안 식구끼리 이 따위 식으로 서로 물고 뜯고 했으니 구경꾼으로서야 구토증을 일으키지 않을래야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빌어먹을! 이놈들아, 언제까지 파벌싸움을 끌고 갈 생각이야?" 하고 대중이 역정을 일으켰겠는가. 매스껍고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었다. 싸움을 벌여도 그런 식의 치사스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바에야 서로 갈라서는게 나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민주당 신.구파는 갈라설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사실에 있어서는 그것이 표출되지 않았을 뿐, 이면에는 갈라서고자 해서 움직였던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는 (민주당 신.구파는 어차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운명, 도리없이 갈라질 수밖에 없다면 선거를 치르기 전에 갈라지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한 조영규는 어느 날 아현동으로 김도연을 찾아갔다. 조병옥이 타계한 뒤로 구파의 리더는 어느덧 윤보선한테로 넘어가 있었다. 당의 서열로도 윤보선이 최고위원인데 반해 김도연은 중앙위원회 의장이었던 관계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윤보선이 정치자금의 파이프 라인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병옥이 생존시에는 파이프 라인을 고흥문(高興門)한테 맡겨 놓고 있었지만, 조병옥이 타계한 뒤로 윤보선이 이것도 서서히 거머쥐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당에 라인을 쥐고 있는 자가 왕이었다. 실질적으로 당수 다음의 서열이라 할 수 있었다. 김도연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박사였지만 청빈한 생활을 즐겨온 그는 정치자금에는 일체 무관심했다. 그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보면 정치자금을 만들 능력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는 아예 의식적으로 외면을 했다. 아마도 지사적(志士的) 기질이 돈과는 거리를 멀리하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중국 북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조영규는 독학으로 의사시험에 합격한 이를테면 좀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윤보선보다는 김도연을 인간적인 면에서
"웬일로 우리집엔?"
이것이 조영규가 찾아오자, 그에게 던진 김도연의 첫마디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안도 통과됐고,그래서 머지않아 선생님이 정권을 잡을 것 같아서 잘 보여 둘려구요."
이때 조영규는 46세였고, 김도연은 환갑이 막 지난 61세였다. 나이차이가 15년이나 되었으나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치를 하는 두 사람이 마주앉은 지라 화제는 자연 시국에 대해서였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조영규는 분당문제를 끄집어냈다.
"서로 심한 상처를 입고 갈라서기보다는 아직 상처가 깊지 않을 때 갈라서는 것이..."
호호야인 김도연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조 의원, 나도 신.구파는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것을 느끼고는 있지만 갈라질 명분이 없는 게 아니겠소? 정치에는 명분이 따라야 한다는 것, 조 의원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내세울 명분은 있습니다. 보수(保守) 양당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됩니다. 이보다 더 뚜렷한 명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분당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지금 자유당 의원들이 신당을 만들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분당을 하게 되면 자유당의 신당운동도 자연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을 설정해 놓는 조 의원의 버릇은 여전하군, 허허......."
김도연은 잠시 웃으면서 생각을 가다듬는 눈치였다. 이윽고 중얼거렸다.
"어려운 문제군, 어려운 문제야."
"절대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구 해두 그러십니다. 오히려 쉬운 문젭니다."
조영규는 말을 끊고 김도연의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공천 심사과정에서 정치자금문제를 가지고 서로 물고 뜯고한 저희들이 아닙니까? 그런 형편인데 이제 정권이 앞에 놓여 있어 보십시오. 어떤 중상모략이 난무하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분당의 적기라고 하며 조영규는 힘주어 강조했다.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분들하고 상의를 해봐야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
김도연은 다음날 안국동 윤보선의 집에서 구파 중진들이 모였을 때, 이 분당론을 끄집어냈다. 윤보선이 펄쩍 뛰었다.
"분당? 언제고 분당을 아니할 수야 없겠지. 하지만 총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먼저 분당론을 제기해 보십시오. 아마도 신파는 이 분당론을 선거전에 최대로 활용하려 들 것이외다."
그런 윤보선이 보는 견해가 옳았다. 총선거에 내걸 공약이란 분당을 하더라도 대동소이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공약의 문장 표현의 차이 정도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뭘 가지고 상대방을 공격할 것인가? 분당론이 신파의 좋은 공격의 무기가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이 시점에서 분당론은 윤보선의 한마디로 기가 꺾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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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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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비텔리우스 황제
시리아 총독 무티아누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를 차례로 기술한 뒤에 베스파시아누스를 서술할 차례가 되면, 무능한 장수가 지휘하는 전투를 서술하다가 명장이 지휘하는 전투를 서술하기 시작할 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의 세 사람은 속된 말로 표현하면 일단 판을 벌여놓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런 전투를 서술하려면 골치가 아프다. 타키투스의 혐오감도 이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갈바나 오토 비텔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베스파시아누스도 불과 1년 전까지는 자기가 황제를 자칭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유대 전쟁 때 포로로 잡은 유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당신은 황제가 될 거라고 예언했을 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갈바가 즉위했을 때는 지지와 축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맏아들 티투스를 로마로 보냈다. 갈바가 살해되고 대신 오토가 제위에 올랐을 때에도, 전쟁 중이라 군단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지지의 뜻은 전해두었다. 오토가 우군으로 여기고 있었던 군사력에는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의 3개 군단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토가 죽고 비텔리우스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축하의 뜻도 전하지 않았고 지지 의사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베스파시아누스는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해, 일단 판을 벌여놓고 보자는 식이 아니라 용의주도한 작전을 펴나간다. 그렇긴 하지만 제국 동쪽의 방위를 맡고 있는 군단들이 처음부터 베스파시아누스를 옹립하기로 뜻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새 황제 비텔리우스에게 원한을 품고 근무지로 돌아온 '도나우 군단' 병사들의 감정이 다른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래 '도나우 군단'의 7개 군단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하여 그 동쪽의 소아시아 방위를 맡고 있는 시리아의 4개 군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을 뿐 아니라, 동방 전선에서 병력을 증강할 필요가 있을 때는 '도나우 군단', 그중에서도 특히 도나우 강 하류를 방위하고 있는 모에시아 속주의 3개 군단에서 지원병력이 파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네로 황제 시대에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명장 코르불로 밑에서 싸운 병력 중에는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코르불로가 살아 있었다면, 그들은 비텔리우스와 경쟁할 인물로 주저없이 코르불로를 추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략 전술의 재능만이 아니라 피를 흘리지 않고 전과를 올리는 외교적 재능까지 겸비한 이 장수는 2년 전 네로 황제가 품은 근거없는 의혹 때문에 자살 명령을 받았다. 그래도 코르불로는 휘하의 걸물로 꼽히는 무키아누스가 4개 군단을 지휘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건재해 있었다. 밀사가 무키아누스의 의사를 타진하는 임무를 띠고 도나우 강 유역에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떠났다.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무키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가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이가 나빴고,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애쓴 덕분에 공동투쟁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이 말도 일리는 있다. 제국의 서쪽 방위를 맡고 있는 '라인 군단'의 최고위 장성이 고지 게르마니아군이나 저지 게르마니아군의 사령관이라면, 제국의 동방을 지키는 최고위 장성은 시리아 주둔군(시리아 속주는 강대국 파르티아와 인접해 있으니까, 시리아 주둔군은 파르티아의 강 이름을 따서 '유프라테스 군단'이라고 해도 좋다) 사령관이다. 따라서 유대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나이는 무키아누스보다 많았던 모양이지만 군대 내에서의 지위는 무키아누스보다 낮았다. 그러나 무키아누스는 코르불로 덕분에 우호관계가 확립된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의 동향을 감시하는 게 전부였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전쟁을 치르고 있어서 명성을 얻기에는 유리한 상태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2년 전인 서기 67년부터 시작된 유대 전쟁도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네로의 죽음으로 전쟁이 중단될 때까지 유대 전역을 거의 다 제압했고, 남은 것은 예루살렘 공략뿐이었다.
하지만, 경쟁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반드시 서로 적대한다는 타키투스의 인간관에는 동의할 수 없다. 경쟁심은 우열을 다투는 의식일 뿐, 상대를 적으로 보는 적대심과는 다르다. 특히 두 당사자가 재능을 타고난 경우에는 상대의 능력도 서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질투는 자기가 상대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후 무키아누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끝까지 협력한 것으로 미루어보아도, 젊은 티투스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성립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티투스의 중재를 받아들여 서로 손을 잡고 공동투쟁 전선을 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우선 '도나우 군단'에서 황제로 추대하겠다는 뜻을 전달받은 것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아니라 무키아누스였다. 만약 무키아누스가 경쟁자인 베스파시아누스를 좋지 않게 여기고 능력도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유대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본국 이탈리아로 진격하는 것은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가능성을 싹부터 잘라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키아누스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도나우 군단'의 지지를 베스파시아누스 쪽으로 돌리려고 애쓴다. 외 그랬을까?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무키아누스는 로마 제국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을 서기 69년 당시에 이미 알아차린 소수의 로마인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새로운 시대라 해도 제정을 다른 정치체제로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심정적으로는 공화주의자인 타키투스조차 드넓은 로마 제국을 다스리려면 제정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을 만큼, 제정은 정치체제로서 훌륭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누가 그 체제의 최고 권력자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카이사르부터 시작된 '율리유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네로를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즉, 수도 로마에 '본적'을 둔 명문 귀족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황제가 된다는 원칙은 이제 깨져 있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수도 로마의 명문 귀족인 갈바를 제위에 앉혔으나, 이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어서 황제가 된 오토는 수도 태생도 아니고 명문 귀족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버지 대부터는 원로원 의원이다. 로마 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신분인 원로원 계급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오토 대신 황제가 된 비텔리우스도 아버지 대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한다.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버지도 직업도 확실치 않고, 군단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출세한 사람이다. 게다가 출신지는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자치단체에 불과한 리에티다.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군인을 직업으로 택한 경우에도 유리했다. 원로원 의원 아들은 얼마간의 견습 기간이 끝나면 당장 대대장에 기용된다. 처음 얼마 동안은 경험이 없어도 충분히 대대장 노릇을 할 수 있다. 그 밑에 있는 10명의 백인대장이 노련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단 경력은 도나우 강 유역에서 대대장을 지낸 것부터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대대장이 되었을 리는 없다. 일개 졸병부터 시작했거나, 적어도 백인대장은 거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정이 된 뒤에는 로마군에서도 출신보다 실력을 존중하게 되긴 했지만, 아무 기반도 없는 젊은이가 느닷없이 대대장으로 발탁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진급 속도도 느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빠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명성도 로마군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코르불로에게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유대 전쟁을 치르는 방식 하나만 보아도, 좋게 말하면 견실하고 나쁘게 말하면 평범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느 모로 보나, 평상시에 황제를 자칭하고 나서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게 분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에게는 장점도 있었다. 참으로 건전한 상식인이었다는 점이다. 무키아누스는 서기 69년 내전을 종결시키고 제국을 재건하려면 건전한 상식인이 적임자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네로의 죽음으로 시작된 국가의 혼란은 새로운 체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기존 체제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20년 전처럼 새로운 체제를 창조해야 할 경우라면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천재형 인물이 필요하지만, 서기 69년 내란을 해결하는 데에는 그런 유형의 인물이 필요없다. 상상력은 좀 모자라더라도 지금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밝은 눈으로 직시하고 실행할 수 있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충분하다. 무키아누스 자신도 상당한 교양을 가진데다 변경에서 오래 근무한 경험으로 현실 인식 능력도 뛰어났을 게 분명하다. 그런 사람이 제국을 다시 통합할 기수로는 기존 지배계층에 속하는 자신보다 그 바깥쪽에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은 흥미롭다. 자칫 영악해지기 쉬운 도회지 출신인 자기보다 지방 출신다운 순박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적임자라고 판단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에는 베스파시아누스가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한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그 사람은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다. 아니, 출신은 유대지만 보통 로마인보다 훨씬 로마적인 유대인이었다.
이집트 장관 알렉산드로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오래 전에 이집트 제1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한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큰아버지는 '유대의 플라톤'이라는 평판을 들을 만큼 박식한 철학자 필로였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제7권에서 칼리굴라 황제를 다룰 때 이미 소개했다. 그의 집안은, 예루살렘을 빼고는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알펙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집안이었다.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은 카이사르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또는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한테 받았을 것이다. 제3대 황제 칼리굴라도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지만, 제7권에서도 말했듯이 칼리굴라와 유대인의 관계는 험악했기 때문에, 그가 유대인에게 자신의 씨족 이름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학자 필로(그리스식으로 읽으면 필론)는 평생을 유대인으로 보냈지만, 그 씨족의 한 사람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로마 시민이 되는 길을 택하여, 서기 44년 까지 유대 왕이었던 아그리파 1세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했다. 따라서 유대 전쟁 때 로마 편에 서서 유대를 제압한 아그리파 2세는 이 사람의 처남이다. 필로의 친동생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도 이름이 보여주듯 로마 시민이 되는 길을 택한 유대인이다. 이 사람은 금융업으로 성공하여, 이집트를 비롯한 오리엔트 일대에 흩어져 있는 황제의 사유재산을 운용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이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데 아들은 유대인이 장기로 삼는 경제계로 진출하지 않고, 자기 재능을 시험하는 곳으로 군대를 택했다. 당시 군인의 길을 택한 유대인은 이 티베리우스가 거의 유일했다.
출신은 유대인이지만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가졌고, 게다가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력한 가문에 속해 있다. 군단 경력도 대대장부터 시작했으니까.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로마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큰아버지 필로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 대표로 로마에 가서 칼리굴라 황제에게 선처를 요구했을 당시, 이 유대 젊은이는 로마 군단에서 1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대대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후의 출세도 눈부실 정도여서, 6년 뒤인 서기 46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발탁으로 유대 장관에 임명되어 2년 동안 일했다. 아그리파 1세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그리파 2세가 아직 16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유대를 다시 로마의 직할령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유대 장관에 임명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사드로스가 워낙 통치를 잘해서, 그에게 유대를 맡기고 있던 시기에는 로마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유대교를 버린 동포를 원래의 이교도보다 더 증오하는 것이 유대인이다. 게다가 당시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군사만이 아니라 민사에 대한 재능도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후 한동안 그의 소식은 로마사에서 사라지지만, 서기 60년대에 접어들면 당시 로마군 최고의 명장으로 적국인 파르티아까지도 인정해준 코르불로 휘하의 장수로서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1개 군단의 군단장이 아니라, 4개 군단으로 구성된 코르불로 군대의 병참 책임자로 등장한 것이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을 만큼 로마인은 병참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병참 최고 책임자라면 군단장보다 지위가 높다는 뜻이다. 동년배로 여겨지는 무키아누스와는 코르불로 휘하에서 고급 장교로 같이 근무한 동료 사이이기도 했다. 이 로마화한 유대인은 큰아버지인 필로 영향 때문인지, 무키아누스 못지않은 교양인이었다. 코르불로가 네로 황제의 명을 받고 자살한 뒤 오리엔트에서는 무키아누스가 시리아 총독이 되었다. 한편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시리아 다음가는 제국 동방의 요지인 이집트 장관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영어식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린다. 클레오파트라 시대까지는 그리스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였고, 당연한 일이지만 정복 민족인 그리스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정복자가 로마인으로 바뀐 뒤에도 그리스계 주민의 비중은 여전히 높았다. 이 대도시에 그리스 민족과 마찬가지로 이산 경향이 강한 유대인이 이주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주민은 원주민인 이집트계와 이주민인 그리스계,유대계로 삼분되어 있었지만, 경제력에서는 그리스계와 유대계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황제의 명을 받아 로마에서 부임해오는 이집트 장관은 임무를 수행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제국의 다른 속주들과는 달리 이집트만은 로마 시민이 황제에게 직접 통치를 맡긴 형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 통치 책임자는 '총독'(프로콘술)이 아니라 '장관'(프라이펙투스)이라 부르고, 그 임명권은 원로원이 아니라 황제에게 있다. 속주 '총독'은 원로원 의원으로 집정관을 지낸 사람만 맡을 수 있지만, '장관'은 그런 자격 조건이 없다. 따라서 황제 직속으로 제국 통치의 실무를 담당하는 당시의 '관료'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가 바로 이집트 장관 자리였다.
알렉산드리아에 많이 살고 있는 그리스계 주민은 걸핏하면 유대계 주민과 대립한다. 그런 알렉산드리아에 부임하는 이집트 장관으로 유대계 로마인을 고른 것도 재미있다. 게다가 2개 군단의 지휘권까지 맡겼다. 이것도 실력만 있으면 속주 출신이라도 거리낌없이 기용한 로마의 정략을 보여주는 예지만, 어쨌든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 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이집트 장관'이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로마화한 유대인은 금의환향할 기회를 베풀어준 로마인의 기대에 훌륭히 부응한다. 칼리굴라 황제의 초조감이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배려가 먼 옛날의 일처럼 여겨질 만큼, 이집트와 그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는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두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의 최종 경력은 수도 경찰청장이다. 황제 자리를 확실히 굳힌 베스파시아누스가 그를 수도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 이 자리에 앉은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황제가 되기 위한 베스파시아누스의 전략은 당사자인 베스파시아누스와 무키아누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함께 생각하고 추진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순조로운 제위 계승 문제를 고려하여,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도 끌어들였는지 모른다. 60세의 베스파시아누스, 50대 후반의 무키아누스와 알렉산드로스, 그리고 30세의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의 능력과 성격으로 미루어보건대, 베스파시아누스가 두뇌 역할을 맡아서 나머지 세 사람을 수족으로 부린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경험도 풍부하고 성숙한 장년의 세남자가 냉철하게 의논하여 결론에 도달한 다음, 젊은 티투스를 끌어들여 실행에 옮긴게 아닐까. 이 네 사람의 역할 분담은 볼 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명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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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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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꿈 - 구르는천둥 / 체로키 족
대지의 꿈 : 구르는천둥(롤링 썬더) - 체로키 족
"인간은 대지를 소유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이 대지의 소유이다."
우리 인디언은 대지를 지키는 자이다. 우리는 우리가 대지를 소유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대지를 소유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이 대지의 소유이다. 어떤 사람은 문서를 작성해 자신이 그 땅의 소유자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대지의 소유자가 아니며,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없다. 대지의 소유자는 위대한 정령이며, 다만 우리에게 그 권한이 부여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대지를 보호하는 자이다. 이 대륙의 어느 곳을 여행하든지 그곳에 아직도 인디언들이 생존해 있다면 당신은 삶과 땅과 공기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리 인디언은 어머니 대지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 편에 서서 일할 뿐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문명인들에게 유럽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인디언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주고 함께 삶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이 한 장소를 더럽히면 그 더러움은 전체로 퍼진다. 마치 암과 종양이 신체의 여러 부위로 번지는 것과 같다. 대지는 지금 병이 들었다. 인간이 대지를 잘못 대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많은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큰 자연재해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들은 대지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 대지 위에 세워진 많은 것들이 대지에 속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체에 침투한 바이러스처럼 대지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이물질들이다. 당신들은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으나, 머지않아 대지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시도로 크게 몸을 뒤흔들 것이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지구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의지를 가진, 보다 높은 차원의 인격체이며, 따라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가 있고 병들 때가 있다. 사람이 자신의 신체를 존중해야 하듯이 지구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 상처를 가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가하는 일이며,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가하는 것이 곧 지구에게 상처를 가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문명인들은 이것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해란 책이나 선생이 가르치는 어떤 사실을 아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해는 사랑과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위대한 정령을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위대한 정령은 풀이나 바위나 나무 등 세상 만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 그 자체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은 하나의 느낌이나 자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다. 우리 자신과 주위 생명체들에 대한 인간의 의무이다.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야만인들이 아니다. 미국의 헌법은 뉴욕에 살던 이로콰이 족 인디언의 헌법을 기초로 작성되었으며, 문명인들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약품들도 인디언들에게서 얻어간 것이다. 테레빈, 키니네, 장뇌, 코카인 등이 그것이다. 페니실린조차도 우리가 참나무에서 추출한 것이며, 문명인들이 이 대륙에 들어오기 훨씬 오래 전부터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 왔다. 그밖의 많은 비법들을 우리는 아직까지 비밀로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태양을향해춤추다(썬댄스)'라는 이름의 늙은 인디언 주술사가 살았었다. 그는 문명인 의사들도 고치지 못하는 암과 당뇨병 치료의 일인자였다. 모르몬교 목사들을 비롯해 유타 주 전역에서 환자들이 그를 찾아왔으며, 그는 많은 사람을 치료했다. 그러자 미국 의학협회에서 소송을 걸어 그에게 다른 주로 떠나든지 감옥에 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당시 그는 여든일곱 살이었다. 법정에는 그를 변호하기 위해 구름떼처럼 사람이 모였지만 판사는 단 한사람도 증언대에 세우지 않았다. 이제 그 노인은 세상을 떠났으며, 백인들은 노인이 사용하던 약품을 전부 수거해 두 대학에서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대지의 법칙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한 형제라고. 우리는 가치 있는 것들을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때가 되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비법들을 세상과 나눌 것이다. 문명인들이 어리석은 법률로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다면 그 시기는 더욱 빨리 찾아올 것이다.
문명인들의 삶은 남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얻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들은 자연을 자연의 방식이 아닌,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 몰두한다. 그들에게서 영적인 힘이 주어진다면 결과는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인디언 스승들이 아직까지 많은 비밀들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문명인들은 자신들이 대단히 앞선 문명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문명의 기준에서는 그들은 훨씬 뒤떨어진 문명을 살고 있다. 그들은 기본적인 진리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삶의 기본 진리란 남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생명이 포함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지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모든 존재는 고귀한 것이고, 또한 생의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는 힘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곧 영적인 힘이다. 인디언 부족의 아이들은 열두 살이 되면 특정한 장소로 가서 금식을 행하고 명상에 잠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이 자기에게 준 목적을 깨닫는다.
지금 문명인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려고 애쓰고, 삶에서의 자신의 장소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나는 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노력하지만 타인의 삶을 위해서도 깨달음을 높여갈 것이다. 가치 있는 것을 남과 나누는 일 - 이 삶에서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그것이다. 우리 인간 모두는 많은 생을 산다. 모두가 수많은 전생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생을 산다. 그리고 때로는 지나온 과거의 생들을 다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흘러가며, 따라서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이란 형태를 바꾸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문명인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믿는다. 전에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그렇게 믿음으로써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당신이 어떤 것을 줄곧 믿으면 그것은 하나의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식으로 그들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믿음을 이 대륙에 가져왔지만 우리 인디언은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거짓된 가르침이라 부른다. 그들은 우리에게 내세에 대해 두려움을 심으려 한다. 두려움이 깊어지면 결국 정신병자밖에 되지 않는다.
몇 해 전 오클라호마에서 인디언들의 모임이 있었다. 대륙 전역에서 온 추장들과 주술사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며, 더러는 남아메리카에서도 왔다. 그런 대규모의 영적 모임은 1백 년 만에 처음이었다. 모임의 마지막 날 참석자들은 큰 원을 그리고 앉았다. 원은 위대한 정령의 상징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원이다. 세상도 하나의 원이고, 원자도 원의 형태이다. 바위에 적힌 고대문자에서도 원이 발견되며, 모든 형태 속에 원이 깃들여 있다. 오클라호마에 모인 우리는 인디언 부족의 대표들로 하나의 큰 원을 그리고, 태양에게 평화의 담배를 바쳤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 우리의 모든 부족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부족의 대표들은 원을 그린 상태에서 손을 잡았다. 그것은 형제애와 우정의 상징이었다. 이 원은 곧 세상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개민들레 풀씨가 바람에 날리듯 그 원은 세상 모두에게로 퍼져나가 마음의 진정한 평화를 심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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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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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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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서출지 - 보름약밥의 유래 간직한 곳
서출지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름찰밥의 유래를 밝힌 '거문고의 갑을 쏘다(사금갑'의 전설을 간직한 못이다. 유사에는 이 못이 '남산동쪽 기슭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월성에서 남천을 따라 남산동편을 거슬러 오르면 오른쪽으로 부처골, 탑골, 미륵골 등의 계곡이 나타난다. 임업시험장을 지나면 화랑의 집이 나오고 조금더 오르면 통일전이 나타난다. 통일전의 동남편에 연못과 고옥이 눈에 뛴다. 이 못이 서출지라 알려져 있는 못이다. 이 못에 임해서 세운 정자는 1664년 임칙이 세운 이요당으로 그 마당에는 석조와 석등, 그리고 연화대석 등이 보인다. 이 못은 사적 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서출지는 원래 이 못이 아니라, 이곳에서 남쪽으로 2백m 떨어진 못(양기못이라 불리운다)이라는 설이 이 일대 주민들에게 구전이 되고 있어 혼란을 느낀다.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이 일대 남산리는 옛부터 풍천 임씨의 취락지였다. 현재의 서출지가 있는 마을은 큰집이고 양기못이 있는 마을은 작은집이 자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 당시 문화재를 등록할 때 원래의 서출지인 양기못이 너무 초라하여 현 이요당이 있는 못을 서출지로 잘못 등록해버렸다는 것이다.
'경주시지'(71년 발간)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즉 '이 서출지는 지금 남산록 이요당전의 연못에 의정되고 있으나 구비에 의하면 거기서 남쪽 1백m 되는 곳에 있는 양기못(통사에는 양벽제)이 그것이라 한다. 양기는 양피의 음전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거기가 바로 피촌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근거해서, 그리고 현지주민들의 주장에 따라 현 서출지는 잘못 지정되어 있다는 주장이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현 서출지는 통일전 옆에 있어서 학생들과 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사소한 일 같지만 서출지의 원래 위치가 이곳이 아니라면 자칫 후손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까마귀가 일러준 비밀
정확한 서출지를 찾기 위해서는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신라 21대 비처왕 10년(488년)에 왕이 천천정에 행차했다. 이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잘 살피시오" 왕이 곧 기사에게 뒤쫓게 했다. 기사가 가는 남쪽 피촌(지금의 양피사촌이니 남산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두 돼지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길에서 헤매고 있으니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다. 그 겉봉에는 '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급히 돌아와 왕에게 드리니 왕은 '두 사람이 죽느니 한 사람이 죽는게 낫다'고 떼어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일관(좋고 나쁜 징조를 미리 예측하는 직책)이 "두 사람은 백성을 가리키나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떼어보니 '거문고의 갑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의 갑을 활로 쏘니 그곳에는 내전에서 분향하던 수도승이 궁녀와 몰래 간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사형을 당했다. 이때부터 해마다 음력 정월 15일을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노인이 나왔던 그 못은 서출지라 불렸다. 이 얘기에 의하면 서출지는 피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피은편을 보면 염불사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 얘기도 이 지역과 관계가 있다. 이 얘기에 의하면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그 마을에 피리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 중이 있었는데 항상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그 소리가 성 안까지 들렸다. 그래서 그를 염불사로 불렀다. 그가 죽은 후 그가 있던 피리사는 염불사로 이름을 고치고 그 절 옆에 있는 절 이름을 양피사라 했다. 이런 설화를 종합해보면 서출지는 피촌(양피사촌)에 있었으며 양피서출지보다는 양기못이 원래의 서출지라는 설이 더 타당성을 갖는 것 같다. 양기못은 '양피제(양피못)'로 쓰는데 이는 양피사의 관련되어서 후대에 붙은 이름인 듯하다. 양기못의 바로 서쪽에는 거대한 3층 석탑 2기가 서 있다. 이 탑은 양피사지를 나타낸다. 이 탑은 경주 남산리 삼층 석탑(보물 제124호)이라 불리는데,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대립한 특이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동탑은 모전석탑의 일종으로서 큰 지대석 위에 8개의 석괴로써 입방체의 단층기단을 형성했고,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이며, 표면에는 장식이 없다. 서탑은 일반형 석탑으로 2중 기단 위에 3층석탑이다. 면석의 각면에 팔부신중상을 한 구씩 양각한 것이 특색이다. 이 절터에서 3백m 가량 떨어진 남쪽에는 역시 부서진 탑 2기가 있다. 이곳은 염불사지로 추정된다. 한국불교 연구원에서 간행한 '신라의 폐사 II'(1977년 간)에 보면 앞의 절터를 남산사지, 뒤의 절터를 개선사지로 추정하고 있으나 근거없는 추정인 듯하다.
서출지로 추정되는 양기못
10여 년 전 필자가 이곳에 들렀을 때 이 마을에 사는 임복식 씨(당시 64세)는 "양기못은 양피못으로 불려왔다는 얘기를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이 못이 신라 때 못이라는 얘기도 전해 왔다고 말했다. 이 못은 원래 자그마한 연못이었으나 일제침략기에 2배 정도 확장하여 증축된 것이다. 양피사지 옆 문수암 선원에 있는 스님들도 "이 못이 원래 서출지였다는 말을 평소 주민들에게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양기못은 원래 나무도 없고 정자도 없어 초라했고, 이요당이 있는 못은 주위에 나무도 있고 정자도 있어서 그럴듯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곳으로 잘못 정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요당이 있는 못이든 양피못이든 모두 같은 문중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드러내놓고 양기못이 진짜 서출지라는 말을 하기를 꺼리는 듯 보였다. 자칫하다가는 문중간 갈등을 초래할까 겁내는 눈치가 역력했다. 양기못가에는 현재 산수재라는 암자가 있다. 이 암자는 마을에 있다던 것을 해방 후 이곳에 옮겨 지었다고 한다. 현 서출지로 정해진 이요당 마당의 석조와 석등 등은 모두 양피사지에서 옮겨온 것인 듯하다.
서출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사금갑'의 전설은 민속학뿐만 아니라 불교학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 설화이다. 이 설화에 의하면 소지왕 때 이미 신라에는 불교가 유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된 것은 23대 법흥왕 때였다. 소지왕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소지왕의 앞 임금이 자비왕이였는데 '자비'라는 말은 불교용어이다. 이 설화에 나오는 궁은 내궁으로 내제석궁을 일컫는다. 이 궁은 궁중의 별전으로, 불교 공인 전에 벌써 불교가 궁중에 침투되어 거기서 분수행사를 비공식적으로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궁은 안압지와 반월성 사이에 있는 인왕파출소 바로 뒤쪽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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