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7호 - 2024.07.03 수요일(음력 : 05.28)
잠시 쉽시다.
6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angelo@nownforever.co.kr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자수성가한 사람 중 가장 솔직한 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말 힘들게 정상에 도달했지요. 한 걸음마다 게을러지려는 자신과 싸웠고, 나의 무지를 깨우쳐야 했거든요. ―J.T.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까치설
세배할 때 인사말
설날의 백미는 역시 세배다. 가족 간의 정과 웃음이 오가는 곳이 세배하는 자리다. 그런데 세배를 할 때도 언어 예절이 있다. 종종 세배를 드리겠다고 어른에게 “절 받으세요”, “앉으세요”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올바른 예절이 아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어른이 자리에 앉으면 말없이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이 옳다.
다만 나이 차가 많지 않은 어른인 경우에는 절 받기를 사양하는 경우가 있다. 절 받기를 사양하는 것도 일종의 예절이고, 절 받기를 권하는 것도 예절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절 받으세요”, “앉으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
절을 하면서, 또는 절한 후 곧바로 어른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배할 때는 절하는 것 자체가 인사이기 때문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와 같은 인사말은 없어도 되고, 무엇보다도 어른에 앞서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냥 공손히 절만 하고 어른의 덕담이 있기를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예법인 것이다.
세배 받는 어른은 절한 사람에게 덕담을 한다. “소원 성취하게”가 정형적인 덕담이라 할 만하고, 그 외 상대방 처지에 맞게 “건강하게 자라거라”, “올해 좋은 인연 만나야지”와 같이 적절히 덕담을 할 수 있다.
절을 한 사람도 어른의 덕담이 있은 뒤에 “올해에도 등산 많이 하세요”, “늘 재미있게 사세요”처럼 상대방 처지에 맞게 적절히 인사말을 한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인사말이 가능한데, 어떤 것이든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진심이 담겨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세배 인사말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노랗네’와 ‘노랗니’의 명암
“색이 노랗네.”
이 말은 표준어일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노랗네’는 표준어가 아니었으며 ‘노라네’가 표준어였다. ‘노랗다, 빨갛다, 동그랗다, 조그맣다’ 등은 ‘ㅎ’ 불규칙용언으로서 어미 ‘-네’가 결합하면 ‘ㅎ’이 탈락하여 ‘노라네, 빨가네, 동그라네, 조그마네’가 된다.
그런데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해 보면 오히려 ‘노랗네, 빨갛네, 동그랗네, 조그맣네’가 몇 배쯤 많이 쓰인다. 규범과 달리 현실 언어에서는 ‘ㅎ’을 탈락시키지 않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지난해 12월에 ‘노랗네, 빨갛네, 동그랗네, 조그맣네’ 등도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결과적으로 ‘노라네, 노랗네’ 둘 모두 표준어가 되었다.
“색이 노랗니?”
이 말도 표준어일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노랗네’와 달리 이 ‘노랗니’는 표준어가 아니며 ‘노라니’만 표준어이다. 의문형 어미 ‘-니’가 결합한 말은 여전히 ‘ㅎ’이 탈락한 ‘노라니, 빨가니, 동그라니, 조그마니’만 표준어로 삼고 있는 것이다. ‘노랗니, 빨갛니, 동그랗니, 조그맣니’도 널리 쓰이지만 아직 표준어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아서일 것이다.
다만 ‘노랗네’는 표준어인데 왜 ‘노랗니’는 표준어가 아닌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노라네, 노라니’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규칙활용을 따르는 것이고, ‘노랗네, 노랗니’라고 말하는 화자는 규칙활용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노랗네’만 표준어라고 한다면 뭔가 짝이 맞지 않는 느낌을 받게 된다. ‘노랗네’처럼 규칙활용을 인정한다면 같은 맥락의 활용형인 ‘노랗니’도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이 좀 더 쉽고 편한 정책이 아닐까 싶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
|
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달 - 천상병
달을 쳐다보며 은은한 마음
밤 열시경인데 뜰에 나와
만사를 잊고 달빛에 젖다.
우주의 신비가 보일 듯 말듯
저 달에 인류의 족적이 있고
우리와 그만큼 가까워진 곳
어릴 때는 멀고먼 곳
요새는 만월이며 더 아름다운 것
구름이 스치듯 걸려 있네.
∼∼∼∼∼∼∼∼∼∼∼∼∼∼∼∼∼∼∼∼∼∼∼∼∼∼∼∼∼∼∼∼∼∼∼∼~~~~~~~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러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흉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줄이 완급(緩急)을 잃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호수 2 - 정지용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
애정지둔(愛情遲鈍) - 김수영
조용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신 사랑이 생기었다
굵다란 사랑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우스운 이야깃거리다
다리밑에 물이 흐르고
나의 시절은 좁다
사랑은 고독이라고 내가 나에게
재긍정하는 것이
또한 우스운 일일 것이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이 생기었다
생활의 백골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무서운 이야깃거리다
다리밑에 물이 마르고나의 몸도 없어지고
나의 그림자도 달아난다
나는 나에게 대답할 것이 없어져도
쓸쓸하지 않았다
생활무한
고난돌기
백골의복
삼복염천거래
나의 시절은 태양 속에
나의 사랑도 태양 속에
일식을 하고
첩첩이 무서운 주야
애정은 나뭇잎처럼
기어코 떨어졌으면서
나의 손 우에서 신음한다
가야만 하는 사람의 이별을
기다리는 것처럼
생활은 열도를 측량할 수 없고
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
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
애정지둔
<1953>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한단지몽(邯鄲之夢)
邯:땅 이름 한. 鄲: 땅 이름 단. 之:갈 지(…의). 夢:꿈 몽.
[동의어] 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之夢), 일취지몽(一炊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粱之夢)
[출전] 심기제(沈旣濟)의 ≪枕中記≫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榮華)의 헛됨의 비유.
당나라 현종(玄宗)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하북성(河北省)내]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서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서울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 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은 포박 당하는 자리에서 탄식하여 말했다.
“내 고향 산동에서 땅뙈기나 부쳐먹고 살았더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애써 벼슬길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걷던 때가 그립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칼을 들어 자결하려 했지만 아내와 아들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년 후 원죄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는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고하고 하단을 떠났다.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3. 움직이는 8기생들
그러면 어째서 박정희는 굳이 정군운동에 불을 지르려 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쯤에서 박정희란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 점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이 44세.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불혹의 연륜이었다. 1960년을 기준으로 해서 말할 때 40대가 된 세대는 현대사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세대라 하는가? 이 세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을 받고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징병이란 이름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총알막이가 되어야 했고 또 징용이란 이름으로 끌려가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는 수모는 겪지 않았지만 대신 그는 스스로 자진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을 다하는 길을 택했다. 그가 청소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탓으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국비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택하기 위해 사범학교로 진학을 해야만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싫든 좋든 간에 의무적으로 3년간 국민학교 훈도(訓導)로 봉직을 해야만 했다. 국비로공부를 했으니 빚을 갚으라는 뜻에서였다. 박정희는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자 문경 공립 보통학교에서 의무 연한 3년 동안 훈도로서 봉직을 했다. 이 의무 연한이 끝나자 그는 곧 만주로 건너갔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국가 권력을 한 손아귀에 거머쥐고 나자, 어떤 쓸개 빠진 어용작가는 <박정희 장군은 문경 공립 보통학교에 재직중, 학교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視學:지금의 장학사)이 하도 자리에서 그 자를 두들겨 패주고 만주로 달아나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기술한 바있다. 이렇게 당치도 않은 수작으로 미화시켜 놓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보통학교 훈도가 언감생심, 시학이 거드름을 피운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두들겨 팰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런 사건은 일제 35년간의 통치 기간 중 단 한 건도 없었다. 민족저항운동과 관련되는 그런 문제는 쉽게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터무니없는 수작으로 창작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용작가는 어떻게 돼서 그런 허무맹랑한 날조극을 창작해 가슴 속에도 민족주의 사상은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961년이라고 하면 해방된 지 아직 세월은 15년밖에 흐르지 않았을 때이다. 일본에 대한 국민적인 증오심은 여전했다. 그런 때인데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서 충성을 다한 자가 통치권을 거머쥔다고 하는 것은 국민 감정이 결코 용납 못할 일이었다. 물론, 박정희는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강변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는 분명히 친일파로서의 길을 걷고 있지를 않았는가. 그는 만주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을 했다.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뛸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좋은 북지(北支)에서 복무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결코 독립운동 진영으로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용작가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곁들여야겠다. 박영만(朴英晩)이란 작가가 있다. 라디오 방송극도 서너 편 쓴 일이 있는 작가다. 중경(重慶:중국 사천성 동부에 있는 도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광복군 선전처에서 과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한 경력의 소유자다. 이 작가가 [광복군(光復軍:상.하권 1967년 간행)]이라는 실록소설을 썼다. 실록소설인 만큼 등장 인물을 실명(實名)으로 썼다. 이 소설에 박정희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서 제3지대의 지하공작원인 이용기(李龍基)가 일본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박정희와 접선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광복군의 비밀요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광복군 출신자는 단 한 사람도없다. 박정희가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본이 항복을 한 뒤였다. 그때 광복군 제3지대에서 일본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한적(韓籍) 장병을 초모하자, 그때 비로소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경력만을 가지고 얘기하다 보니까 그에게는 전혀 민족주의 사상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으로 해석할지는 모르지만 그에게도 민족주의 사상은 있었다.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 박정희는, 그 무렵의 조선 지식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진로 문제를 놓고 번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이 번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상북도 김천(金泉)에서 동아일보 지국을경영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해 있던 황태성(黃泰成)을 가끔 찾아가 의논을 했다고 한다. 이 황태성이란 인물은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대권을 잡고 나자 김일성의 밀사로서 남파되어 왔던 인물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기로 한다.
경상북도 상주(尙州) 태생인 황태성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 전신)를 나온 인텔리, 더구나 그는 조선공산당에 몸담고 사상운동을 전개하고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님, 저는 만주로 갔으면 합니다만."
"만주로? 만주로 가서 뭘 하게?"
"만주로 가서 군사교육을 받고 싶습니다.군사교육을 받고 나면 독립군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합니다."
"그거 아주 훌륭한 생각일세, 암 훌륭한 생각이구 말구. 눈앞이 똑바로 박힌 조선청년이라면 의당 그래야 하지. 그래야 하구말구."
황태성은 박정희를 적잖이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세계 정세, 동양의 정세, 일본의 장래 등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보는 견해를 말해주고, 말 걸세. 그때 박정희 군과 같이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필요하게 될 걸세. 의지를 꺾지 말고 소신을 관철해 보도록 하게"라고 조언했다. 박정희는 그가 뜻하고 있던 바대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서 좀더 전문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군사교육을 받고 났으면 처음 계획하고 있던 대로 북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을 기화로 독립운동 진영으로 탈출해서 독립운동 대열에 섰더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180도로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종전이 되는 그날까지 일본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일본 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초급 장교로서. 제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했던 박정희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6월이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3개월 뒤에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 모집에 응모, 같은 해 9월에 입교함으로써 또다시 군인의 길을 택했다. 군관학교 생도 생활을 포함해서 5년간 군대 생활을 했고 보면 군대 생활이 지겨울 만할 것도 같았으나 그는 다시 또 군인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을 다했으니 속죄의 뜻으로라도 국가의 간성이 되어야 되겠다고 해서 군인의 길을 택했다면 우리는 그의 애국심에 경의를 행적을 통해서 볼 때, 애국심이 아닌 다른 목적에서 군인의 길을 택했던 것이 아니냐 하는 느낌이 적지 않게 든다. 왜냐하면 박정희는 2개월간의 사관 후보생 과정을 마치고 임관과 함께 사관학교에서 생도대장으로 봉직하게 되자, 이 사이에 남로당 연락부 책임자인이재복(李在福)에 의해 남로당 군사부장에 임명되어 국방경비대 내의 남로당 세포조직을 통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박정희가 조국으로 돌아왔을 당시의 그의 주변 환경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돌아온 1946년 6월은 남로당으로서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때였다. 그럴 때에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남로당의 고위 간부로서 눈부신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성이란 인물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등교육도 받고 또 일제 때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그런 경력이 높이 평가되어 조선공산당(남로당 전신)이 주동이 되어 소위 인민공화국 정권을 세웠을 때 황태성은 20명의 후보 인민위원회의 한 사람으로서 발탁되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전까지는 3개월이라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이 사이에 황태성한테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들의 무리 속으로 지목되는 인물이 또 하나 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다. 박상희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으나 대단히 총명하고 지도력도 있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해다고 하나 일제시대에는 초등교육만 받고도 면서기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갖춰졌었다. 더구나 총명했다고 하니 그만하면 사상 문제쯤에 십분 눈을 뜨고도 남음이 있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박상희를 공산주의 운동 진영으로 끌어넣었던 것도 황태성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일제시대에 황태성은 김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고, 박상희는 구미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친숙해졌고 더군다나 박상희와 아내 조씨와는 황태성의 중매로 결혼한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이 모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해 있었고 보면 박정희가 공산주의에 기울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박상희의 죽음이 박정희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공산주의에 기울게 되는 충분한 조건이 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박상희가 죽은 것은 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동사건 때였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때 박상희는 구미면의 인민위원장이었다. 그 신분이 탄로되어 박상희는 진압차 출동한 경찰에 의해서 즉결처분 당했다. 박정희는 위로 세 형이 있었으나 셋째 형인 박상희를 형을 잃었으니 박정희의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감정적으로라도 공산주의 진영으로 기울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10월 20일, 여수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남로당은 결과적으로는 자기들의 조직을 세상에 드러내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때 남로당조직책임자인 이중업(李重業)과 군부 연락책임자인 이재복이 체포당함으로써 군대 안에 거미줄을 쳐놓고 있던 군부 내 세포조직은 백일하에 폭로되고 말았다.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부장이라는 사실은 이때 밝혀졌던 것이다.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무기형을 언도받았다. 그런 그는 조사받는 과정에서 밝혀 주었기 때문에 군부 내 적색분자들을 일망타진하는 데 공헌했다고 해서 얼마 뒤, 형집행정지를 받고 석방되었던 것이다. 군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실의에 차 있었을 이때의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20대에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만 했고, 입지(立志)를 해야 할 나이 때인 30대는 공산주의 무리와 연루되었다고 해서 군복을 벗어야만 했으니, 그는 무척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했으리라 본다. 그는 남로당 군사부 부장까지 역임했다고는 하나 공산주의 사상이 그의뇌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에게 만일 공산주의 있었다면 그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남과 동시에 월북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월북을 하지 않은 것은 공산주의 사상이 그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를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월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보수(無報酬) 문관(文官)으로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를 했다. 보수가 없는 문관이니 그의 생활은 조반석죽이어야 할 만큼 어려웠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과장이었던 유양수(柳陽洙)는 정보비에서 일부를 떼고 또 과원들의 봉급에서 얼마씩을 떼서 그의 생활비로 보태줘 왔다고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정규 코오스를 밟은 박정희가 남의 봉급에서 얼마씩 떼주는 동정금으로 느끼고 있었겠는가. 그의 가슴 한편 구석에서는 대상 없는 분노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어떤 결의를 다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무보수 문관으로 보람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박정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은 것은 장도영이었다. 평안북도 용천(龍川) 태생인 장도영은 일본 동양문학 문학부 2학년에 재학중일 때 학병으로 끌려나갔던 인물이다. 그것이 1944년 1월이었으니까 일본군에 있어서의 군 경력은 박정희한테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뒤처져 있던 후배였다. 나이도 박정희보다는 여섯 살이나 아래였다. 계급도 박정희는 중위로서 종전을 맞은 데 비해 장도영은 겨우 풋내기 소위로서 종전을 맞았었다. 돌아왔던 장도영은 해방된 그 해 12월에 월남, 다음 해 2월에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가 개설되자, 이것저것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여기에 지원해 입교했다. 1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된 것은 1946년 3월이었다. 박정희도 좀더 일찍 돌아와서 군사영어학교를 거쳤더라면 진급에 있어 장도영을 앞질렀을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장도영이 학병 출신인데 반해 박정희는 정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6.25가 발발한 1950년 7월,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후퇴했을 때의 일이다. (장교가 부족한 이때에 박정희를 그냥 문관으로 놔둘 것이 아니라 현역으로 이렇게 생각한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장도영은 즉시 육군 총참모장인 정일권(丁一權)을 찾아가 부탁을 했다.
"박정희 문관을 현역으로 복직시켜 주십시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복직을 시키면 쓸데없는 말썽이 일지 않겠소?"
정일권은 걱정스럽게 반문했다. 육군의 최고책임자인 정일권으로서는 충분히 이유 있는 걱정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요? 침략해 온 공산당하고 전쟁을 하고 있는 때가 아닙니까? 이런 전시에 좌익으로 낙인이 찍혀 무기언도를 받았던 사람을 현역으로 복귀시키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모두가 두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서있었다. 이런 항변으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었다.
"지금 전쟁 때문에 모두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박정희 문관에 대해서 신경을 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장도영은 집요하리 만큼 정일권을 설득하려 들었다. 정일권이 장도영의 동료애에 감동이 되었던가.
"어디 좀 두고 생각해 봅시다."
이쯤 되면 반 승낙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장도영은 생각했다. 그는 강문봉(姜文奉), 이기건(李奇建)에게도 박정희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일권이 아무리 박정희를 현역으로 장애가 되는 것은 군 인사법(人事法)이었다. <파면 전과자는 만 2년을 경과하지 않으면 현역으로 복귀할 수 없다.> 이것이 당시의 군 인사법의 한 조문으로 삽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현역으로 복귀하려면 형이 확정되었던 날부터 2년이 경과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장도영은 어떻게 해서든 박정희의 현역복귀를 도와주고자, 이번에는 복직심사위원장(復職審査委員長)인 황헌친(黃憲親)을 설득했다.
"상사(上士)를 현지 임관시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마당에 박정희 같은 군사학에 밝은 유능한 인재를 썩혀 놓을 수가 있소? 박정희에 대해서 딱 한 번만 박정희에 대한 장도영의 그것은 전우애라는 군인 특유의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극한 애정이었다. 모두가 장도영의 애정에 감복을 했다. 마침내 정일권이 군 인사법을 무시하고 국방부 장관 신성모(申性模)에게 상신을 했다. 그래서 복직이 이루어졌다. 장도영이 박정희의 신세를 딱하게 여겨 현역복귀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박정희의 인생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도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창조되고 있을 것이었다. 군복을 벗을 때 박정희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그는 현역으로 복귀할 때 소령계급 그대로 복직할 수가 있었다.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랬는지 그의 마음에는 더욱더 강렬한 의지가 불붙고 있기만 했다. 그 강렬한 의지란 말할 것도 없이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한번 세상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1952년에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벌어지자, 그는 육군 총참모총장인 이종찬을 찾아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승만의 야욕은 저지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군사 쿠데타를 건의했었다. 그러나 이종찬은 박정희의 건의를 한마디로 물리쳐 버렸다.
"군인이란 국토방위가 주어진 임무야!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쿠데타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어! 군인의 본분은 정치적 중립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이종찬의 일갈로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의 야욕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상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야망까지를 단념했던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인의 정치 관여는 금기 사항으로 되어 있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에서 <문관 우위>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한데, 육군 대령 박정희는 어떻게 해서 군사 쿠데타 같은 엉뚱한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지난 몇 해 동안 걸어온 길이 너무나 굴욕적인 길이었고 인간으로서 감내해 내기 어려운 형극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그는 좌.우익의 사상투쟁의 와중에서 그가 가장 존경하던 형 박상희를 잃었다. 골육의 정은 사상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아끼고 사랑하던 형을 그놈의 사상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은 처절한 비극이었다. 이런 비극이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그 자신도 그놈의 사상 때문에 모진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가 어떠한 동기에서 남로당의 비밀당원으로서 밝혀진 일은 없으나, 그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은 너무나 명명백백했다. 만일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면 6.25 동란 발발과 함께 국군이 패퇴할 때 북으로 넘어갔지 무보수 문관의 서러움을 당하고 있으면서 육군본부 정복국 요원들과 피난길에 올랐을 리가 없다. 한데, 박정희는 현역으로 복귀한 뒤에도 갖가지의 굴욕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그놈의 사상관계 전과가 무슨 꼬리처럼 노상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애를 먹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일선 지휘관 보직에서도번번히 제외되기만 했다. 직업군인이 위를 향해서 뻗어나가려면 일선 지휘관 경력은 절대적인 필수 요건이었다.
주어지지를 않았다. 그럴 때의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 엎어 버렸으면속이 후련하겠다.> 이런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올라 몸을 떨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냐, 두고 보자. 내가 군복을 입고 있는 한 언젠가는 이놈의 세상 한 번은뒤집어 엎어 버리고 말 테니.> 이런 다부진 결심을 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박정희의 군생활을 하는 동안에 있어서의 그의 일관된 자세와 대인관계는 이런 추리를 가능케 한다. 그는 철저하리만큼 청빈을 고수했다. 모두가 재물에 눈이 부정을 외면했다. 군인 사회란 단세포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사회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박정희의 청빈이 소문이 되지 않을 리가없었다.
"박정희야말로 군인으로서의 귀감이다."
박정희의 청빈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누구나가 이렇게 칭찬하기를 마지 않았고, 그 칭찬은 어느덧 존경으로 바뀌어져 나갔다. 그의 대인 관계 또한 남달랐다. 6.25동란과 함께 현역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2군단 포병사령관(1953년), 3군단 포병사령관(1953년), 2군단 포병사령관(1954년), 육군포병학교장(1954년), 5사단장(1956년), 1군 참모장(1958년), 6관구 사령관(1959년), 군수기지 사령관(1960년) 등을 거치는 동안 그가 거느렸던 부하들에 대해서는 꼭 잊지 않고 안부 편지 또는 연하장 등을 보내며 친분을 유지하도록 했다. 좀 쓸 만하다고 생각되었던 부하한테는 그의 생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축하카드를 보내 줄 정도로 인간 관리에 신경을 썼다. 그는 어째서 이다지도 지독하다 할정도로 인간 관계를 철저히 해왔겠는가? 그건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마음에 다짐해 둔 계획을 실천에 옮길 때 유용하게 써먹고자 해서였다고 해석할 도리밖에 없다. 이른바 <5.26 정치파동> 때 육군 건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박정희는 그랬다고 해서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59년에도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었다고 김덕승(金德勝)은 증언하고 있다. 그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박정희는 1952년에 품었던 군사 쿠데타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60년도에 들어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은 좀더 구체화되었다. 그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단단히 한몫 해줄 수 있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김종필(金鍾泌)이었다. 그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김종필과는 쉽게 의기투합되었다. 좋은 협력자를 구했으니 간직해 두었던 계획을 실천해 보려 했음직한 일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영시(零時)의 횃불]의 저자인 김종신(金鍾信)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박 장군 등이 불의에 항거하여 칼집에 손을 댄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불의에 양심을 팔지 않기로 결의한 고급 장교들은 박 장군을 선봉장으로 벌써 오래 전에 군사혁명의 거사일자를 잡고 있었다......
이 저자는 <이미 말했듯이>라고 전제해 놓고 있지만 박정희가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군사 쿠데타를 모의하고 전혀 언급이 없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서술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이 [영시의 횃불]이라는 책이 박정희 집권 기간인 1966년 10월에 출간된 것으로 보아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치 않을 수가 없다. 이미 군사 쿠데타 거사일자를 잡아놓고 있었으나 4.19 의거로 중단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럼 4.19 의거가 터져서 이승만 정권이 쓰러졌으니 박정희는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종래 마음속 깊이 품어오고 있던 군사 쿠데타의 의욕을 버렸던가? 그는 결코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버리기는 커녕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더욱 다져나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정군운동에 대해서 끊임없이 정군운동은 군사 쿠데타를 성사시키기 위한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 스스로 나서서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내 물러가라고 대갈일성을 질렀던 것도 그 나름의 계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는 1958년 6월 17일에서 이듬해인 1959년 7월 1일까지 만 1년간 1군 참모장을 역임했는데, 이때의 1군 사령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송요찬이었다. 만 1년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어쨌거나 만 1년간 상사로 모시고 있던 사람한테 아무리 편지라고는 하지만 <군의 부정선거 관련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박정희가 얼마나 수 있거니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박정희의 마음속에 다져놓고 있던 군사 쿠데타의 꿈은 그만큼 철석 같았던 것이다.
처음 박정희는 송요찬에게 물러가라고 편지를 낸 사실이 군부 내에 알려지게 되면 소장 장교측에서 적지 않은 동요가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동요가 일어나게 되면정군운동에서 몸을 뺐던 사람들도 다시 정군운동파 쪽으로 기울어 줄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같다. 화제가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거참, 박정희 장군 대단한 인물인 걸, 어떻게 그렇게 감히 내놓고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고 할 수 있지?"
"그러게 말일세. 장군치고 그만한 배짱을 갖고 있는 장군도 드물걸세."
편지사건에 대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혀를 차면서 감탄해 하기를 마지 않았으나, 그러나 정군운동파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젊은 장교는 아무도 없었다. 박정희가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냈던 5월 8일 바로 그날 밤, 서울 신당동에 있던 김종필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 모인 얼굴들은 주인인 김종필을 비롯해서 길재호, 옥창호, 석창희, 최준명, 오상균, 김형욱 등 8명이었다. 이들은 가볍게 한잔벌일 것인지를 의논했다.
"정군운동이 무슨 혁명을 하자는 운동도 아닌 바에야 정정당당히 정공법으로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어?"
"정정당당히 나간다는 것도 역시 방법이 문제가 아니겠어? 덮어놓고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서 이러이러한 장군은 부패무능한 장군이니 옷을 벗기고 내보내 버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구!"
"정군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내면 어떨까?"
4.19 직후부터 이놈의 연판장은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동대문 경찰서 서원들도 연판장을 작성해서 서장을 내몰려 했고 또 법원의 법관들도 연판장을 작성해서 대법원장 이하 대법관들을 내몰려 공보실(公報室)에서는 이놈의 연판장으로 동료직원을 내몰려 했던 사건도 벌어졌었다. 김종필이 단안을 내렸다.
"역시 방법은 연판장을 제출하는 길밖에 없겠어."
이렇게 서두를 꺼낸 그는,
"하지만 우리 여덟 명의 이름만으로는 효력을 보기가 어려울 걸세. 그러니까 좀더 많은 동지를 획득해서 다수의 힘으로 정군운동을 밀고 나가도록 해야 할 걸세."하고 덧붙였다.
그건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여덟 명만의 이름으로 연판장을 작성해서 제출해 보아야, "이놈들 무슨 불평불만이 있기에 이 따위......"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의논을 거듭한 끝에 한 사람당 10명씩의 동지를 규합해서 정군운동을 전국적 규모로 하며, 연판장은 김종필이 초안해서 전원이 재검토를 가해서 확정짓고, 연판장 제출일을 5월 18일 경으로 한다는 이런 내용의 결의를 하고 이날 밤은 흩어졌다. 그러니까 이제 이들이 할 일은 10명씩의 동지들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종필은 구상에 구상을 가다듬은 끝에 연판장에 첨부할 <건의서>를 작성했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청년 장교들
만약 네로가 조짐만 보고도 재빨리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을 때 그리스 여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라인 강이나 팔레스타인 지방처럼 문제가 끊이지 않는 지역을 시찰하는 것이 지금은 그리스 여행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베네벤토의 음모'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피소 음모'에 비하면 소규모였고, 싹이 자라기 전에 잘라버렸기 때문에 네로는 걱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 단순한 사후처리가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 사건은 로마군의 주력인 군단이 처음으로 네로와 반대하여 일어날 조짐이었기 때문이다. 주모자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가진 도시의 이름을 따서 '베네벤토의 음모'라고 부른 서기 66년의 이 음모는 군단의 청년 장교들이 모의한 네로 암살 계획이다. 그들도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변경에서 오래 근무했다고는 하지만, 젊은 나이에 군단장이나 대대장을 지내고 있는 이들은 로마군의 엘리트다. 장차 4개 군단 이상을 지휘하는 사령관 자리가 약속되어 있는 그들은 29세인 네로와 같은 세대에 속했다. 네로는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한테도 황제에 어울리지 않는 부적격자로 평가받은 것이다. 우국지심에 사로잡힌 이들 젊은 장교들의 지도자는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 해결의 진짜 공로자인 코르불로의 사위 비니키아누스였다. '베네벤토의 음모' 주모자들은 네로를 죽이고 코르불로를 제위에 앉히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결정한 '모양'이라고 말한 것은, '피소 음모'와는 달리 이 '베네벤토의 음모'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전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네로는 '피소 음모'의 심문기록은 공표했지만, 청년 장교들이 꾸민 음모의 심문기록은 공표하지 않았다. 구태여 공표할 것까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네벤토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있는 일당을 일망타진하고 보니 모두 군인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로마군 최고상령관인 네로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그 맹세를 병졸보다 앞장서서 지켜야 할 장교들이었다. 요즘 같으면 군사법정에서 다루는 분야에 속한다. 고대 로마에서도 이것은 사람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재판 범위에 속하지 않았다. 재판도 하지 않고 일당을 모조리-그래봤자 10명도 채 안되었던 모양이지만-처형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났다. 그리고 네로는 계획대로 그리스 여행을 떠났다.
그리스 여행
로마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도 네로만큼 바깥 세상을 보지 않은 황제도 없다. 서쪽으로는 브리타니아에서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북쪽으로는 라인 강어귀에서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까지 펼쳐져 있는 광대한 로마 제국, 통치하는 민족의 수만 600개에 이르는 로마 제국의 최고통치자인데도, 네로는 그때까지 자기 눈으로 본 곳은 로마와 나폴리뿐이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광대한 로마 제국의 동서남북을 두루 돌아다니며 싸운 율리우스 카이스르는 예외라 해도, 책상 앞에서 전략을 짜는 사람의 인상이 강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되기 전의 내전 시대부터 황제가 된 이후에도 여러 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55세가 된 뒤에야 황제에 즉위한 티베리우스는 그때까지 바깥 세상을 지나칠 만큼 충분히 경험했다. 칼리굴라도 4년이 채 안되는 통치 기간에 라인 강과 도버 해협을 자기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소년 시절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오리엔트를 여행한 경험도 있다. 클리우디우스 황제는 외국을 모른 체 황제가 된 사람이지만, 브리타니아 정복이 진행되고 있을 때 현지에 갔다. 이런 선조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제국을 물려받고도 네로의 외지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그리스로 떠날 때까지 네로의 통치 기간은 12년이나 되었다. 12년 동안이나 황제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본 땅은 로마나 나폴리뿐이었던 것이다.
여행은 정보를 얻기보다, 현지를 자기 눈으로 보고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 고장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네로는 이것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순수한 호기심도 부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황제니까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실행할 수 있고, 변경 방위에 종사하는 군단병들도 기꺼이 맞아주었을 게 분명한데도 여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로는 천성적으로 겁이 많은 성격이었던 듯싶다. 여행은 미지와의 만남이다. 아무리 세밀한 계획을 세워도, 반드시 예정에 없는 일과 마주치게 마련이다. 네로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새로운 일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로마 올림픽'을 주최한 것도, '도무스 아우레아'를 세워 로마의 도심을 개조하는 것도, 일찍이 아무도 하지 않은 새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그가 '예정한 일'에 속했다. 네로는 한번도 즉흥연설을 한적이 없다. 자작시를 노래하는 가수로 데뷔할 때도 성공할 게 확실한 나폴리를 데뷔 무대로 선택했다. 로마에서 가진 공연도 응원단을 조직하여 성공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견실한' 준비 절차를 밟은 뒤에야 결행했다. 동경하던 그리스 여행은 황제의 속주 순행이 아니라 자작시를 노래하는 가수로서의 솜씨를 시험해보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아우구스티아니'라고 불리는 응원단도 데려가게 되었다. 올림피아 제전이나 코린트 제전은 4년마다 한번씩 열렸으니까, 서기 66년은 제전이 열리는 해가 아닌데도 황제의 명령으로 개최되었다. 올림피아 제전에는 원래 음악 경연 종목이 없었지만, 네로는 음악 경연을 종목에 추가시키기까지 했다. 자기가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이 양대 제전 외에도 네로는 그리스 각지에서 제전을 열게 하고, 그 대회에 모두 출전했다. 응원단의 성원과 노래하는 황제를 보고 싶어 모여든 그리스인들의 박수갈채 덕분에 네로는 출전할 때마다 우승하여 황금 월계관의 수를 늘려갔다. 보통 월계관은 월계수 가지로 만들지만, 이때만은 네로를 위해 특별히 황금으로 만든 모양이다.
그래도 네로는 그리스를 여행할 때 황제다운 일을 몇 가지 했다. 그중 하나는 코린트 지협을 뚫어서 운하를 만들어 이오니아 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공사였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가는 시간과 거리를 단축하는 것이 이 토목공사의 목적이었다. 이 공사를 처음으로 기획한 로마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지만, 그후의 황제들은 아무도 거기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지중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공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린트 지협을 배로 지나갈수 있게 되면, 군사적 이익은 별로 없지만 경제적 이익은 막대했다. 로마 제국 전역으로 인재가 빠져나가 두드러지게 쇠퇴한 그리스 본국의 경제를 진흥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사도 네로의 죽음으로 중단되었고, 그후에는 잡초만 무성한 채 방치된다. 이 운하는 수에즈 운하 등으로 사람들이 이런 공사에 관심을 갖게 된 19세기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1천 800년 뒤에 공사를 재개하고 보니, 네로 시대에 암석을 깎아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수없이 획득한 월계관에 답례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리스를 동경하는 마음의 증표를 남기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스 각지를 '순회공연'하며 돌아다니던 네로는 그리스인들이 가장 기뻐할 만한 선물을 주었다. 그리스 전역을 '자유도시'로 선언한 것이다. '자유도시'는 내정의 자치를 인정받고 속주세도 면제받는 특전이 주어진 도시를 말한다. 이제까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이 특전을 누리고 있었다. 인류 문명에 대한 이 양대 도시국가의 공헌을 로마인들이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똑같은 특전을 그리스 전역에 주겠다고 선언했다. 수입의 10퍼센트인 속주세가 면제되면, 그리스인인 아니더라도 누구나 환영할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네로를 최고의 황제로 찬양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자유도시 선언은 네로가 죽은 지 2년도 지나기 전에 백지화된다. 건전한 상식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속주들을 차별 대우하는 것은 제국 전역을 통치하는 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과 냉철함을 유지해야 하는 통치는 서로 다른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특별 대우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것도 '정치'다. 그렇긴 하지만 네로도 때로는 실패에서 배우기도 한 모양이다.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처음부터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전권을 주었다.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할 때는 지휘계통을 이원화하는 바람에 10년 세월을 허비했지만, 이번에는 그 전철을 밟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도 네로의 언동은 지리멸렬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유대 진압의 전권을 준 반면, 로마 제국의 안전보장을 일선에서 담당하고 있는 군단병들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만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청년 장교들이 꾸민 '베네벤토의 음모'에 대해 사후처리를 할 셈이었겠지만, 이 무렵에는 평온한 상태였던 로마군의 분위기가 그후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아도 네로가 그리스를 여행할 때 취한 조치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사령관들의 죽음
로마는 라인 강 방위선에 8개 군단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상류에서 중류까지의 방위는 고지 게르마니아군이 담당하고, 한 사령관 밑에 4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다. 중류에서 하류까지를 방위하는 것은 저지게르마니아군이고, 역시 한 사령관 밑에 4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다. 25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로마군 중에서도 라인 강을 방위하고 있는 8개 군단이 가장 막강하다는 게 모든 사람의 일치된 평가였다. 이 시기의 사령관은 우연히도 스크리보니우스 집안의 두 형제였다. 둘 다 오랫동안 전선에서 근무한 베테랑 사령관이다. 네로는 이 두 장수를 그리스로 불러들였다. 이와 같은 무렵,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유프라테스 강 방위선을 지키고 있던 코르불로도 그리스로 불러들였다. 세 장수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이기 때문에, 또한 네로의 편지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내용으로 차 있었기 때문에, 티끌마한 의심도 품지 않고 두 사람은 서쪽에서, 한 사람은 동쪽에서 그리스로 갔다. 그러나 그리스에 도착한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황제의 초대장이 아니라 죽음의 통고였다. 네로는 그들을 만나보지도 않고 죽음을 명령했다. 라인 강에서 온 두 사람은 네로가 마중하러 보낸 티겔리투스 휘하의 근위병에게 둘러싸여 자살을 강요당했고, 코르불로는 역시 네로가 마중하러 보낸 근위병한테서 자살을 명령하는 네로의 친서를 받았다. 누구보다 상세한 기록을 남긴 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 이 시기 이후의 기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 해결의 진짜 공로자인 코르불로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려주는 확실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어떤 심정으로 자결했는지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칼로 제 몸을 찌른 것만은 확실하다. 이들 세 장수가 정말로 '베네벤토의 음모'에 가담했는지, 아니면 혈기왕성한 청년 장교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뿐인지는 알 수 없다. 진상은 여전히 어둠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네로가 로마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전선인 라인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오랫동안 지켜온 베테랑 장수 세 명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죽인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그들에게 충성스런 부하들이 모여 있는 근무지에서 멀리 떼어놓은 뒤에 죽음을 명령하는 비열한 방식을 사용했다. 학자들은 그래도 군단이 네로에 반대하여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황제에게 아첨하는 분위기가 로마군 내부에 만연해 있었다는 게 그것으로 증명되기라도 한 듯한 말투다. 사령관이 죽은 뒤에도 부하병사들은 궐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네로에 반대하여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네로에게 반감을 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로마군의 주력이고 로마 시민이기도 한 군단병들이 네로를 보는 눈은 사령관의 죽음을 계기로 달라졌다. 그렇지 않다면 그로부터 1년도 지나기 전에 일어난 그들의 궐기를 설명할 수가 없다. 네로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세 사령관을 죽임으로써 로마군 전체를 적으로 돌려버렸다. 경솔했다기보다는 어리석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버려두면 네로는 언제까지나 그리스에 눌러앉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인 이상,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가 로마를 비운 동안 내정을 맡고 있던 해방노예 헬리우스가 성가시게 재촉하는 바람에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1년 반 만에 귀국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 브린디시에 상륙한 것은 서기 68년 1월 하순이었다. 네로의 귀족은 제딴에는 개선장군의 귀국이었다. 따라서 개선장군처럼 나폴리와 로마에 입성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
그리스 여행에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한 응원단이 각지 플래카드를 하나씩 들고 앞장섰다. 싸움에 이기고 개선한 장군은 대개 플래카드를 앞세우는데, 이 플래카드에는 승리를 거둔 전투 장면이 그려져 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 때문이지만, 네로의 개선식 플래카드에는 그가 자작곡 경연대회에서 가수로 우승한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우승으로 얻은 황금 월계관을 받쳐든 사람들이 플래카드 대열을 뒤따른다. 월계관의 수가 무려 1,808개에 이르렀다니까, 플래카드의 수도 이것과 같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선장군 네로가 등장한다. 그는 전통에 따라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있다. 금실로 수놓은 진홍빛 망토를 걸친 사람은 전통에 따른 것이지만, 초록빛 올리브 관을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전통과 달랐다. 승리에 빛나는 개선장군은 황금으로 만든 월계관을 쓴다. 개선 행렬이 지나는 길도 포로 로마노에 도착할 때까지는 전통에 따랐지만, 포로 로마노를 빠져나간 다음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가서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에 들어가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전통은 따르지 않았다. 행렬은 포로 로마노로 들어가자 왼쪽으로 구부러져, 팔라티노 언덕으로 올라간다. 거기에 서 있는 아폴로 신전에 개선식이 최종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아폴로 신은 예술의 수호신이다. 네로는 자신의 승리가 전쟁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술에서 얻은 것이므로, 감사를 드려야 할 대상은 아폴로 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서민들이 네로의 개선식에 열광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재미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즐긴다. 파격적인 개선식은 신기한 구경거리였고, 의기양양한 네로의 모습도 볼 만했다. 그러나 개선장군은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돌아온 사람이다. 리라를 켜면서 자작시를 노래하는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로마 서민들의 열광이 급속히 식어버렸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로는 불만이었다. 로마인은 너무나 비문화적인 민족이라고 개탄하고, 그가 생각하기에 문화에 향기가 짙은 나폴리로 가버렸다. 로마에서는 올림픽 때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지만, 나폴리에서는 언제든지 어느 극장에서나 노래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나폴리에 있는 네로에게 날아들었다.
우국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 이름만 들어도 당시 로마인들은 그가 어떤 처지에 있는 인물인지 당장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생각하면, 2천 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이해할 수 있다. 빈덱스라는 성만 보아도 갈리아인이 분명한 이 사나이의 이름 가이우스는 율리우스 씨족의 남자에게 흔한 이름이고, 율리우스라는 가문 이름은 100년 전에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부족장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빈덱스라는 성은 그가 갈리아의 한 지방인 아퀴타니아(오늘날의 아키텐) 출신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갈리아인은 아버지 때부터 로마 원로원에 들어갔다. 콜라우디우스 황제가 서기 48년에 그 유명한 법률을 제정하여 갈리아인에게도 원로원 의석을 주기로 결정한 덕분이다. 당시에는 우선 로마와 오래 전에 우호관계를 맺은 하이두이족에게만 원로원 의석을 주기로 하고 이법을 제정했지만, 한 부족이 권리를 인정받은 이상 언젠가는 다른 부족들도 같은 권리를 인정받게 되리라는 것은 입법 당시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빈덱스의 아버지는 하이두이족이 아니라 아퀴타니아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빈덱스도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갈리아 속주 가운데 하나인 '갈리아 루그두넨시스'(남프랑스 속주)에 비하면 문명화가 뒤떨어져 있다고 로마인이 생각한 '장발의 갈리아'(프랑스 중북부)의 유력자가 원로원에 들어오는 것을 인정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법이 성립된 지 불과 2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정복자 로마가 피정복자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동화 노선을 추진한 속도는 특필할 만하다. 동쪽으로는 라인 강, 북쪽으로는 도버 해협,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피레네 산맥과 지중해에 접해 있는 갈리아 전역은 모두 5개의 속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남프랑스 속주만 원로원 관할 속주였고, 나머지 4개 속주는 모두 황제 직할 속주였다. 다만 로마 군단이 상주해 있는 것은 4개 속주 가운데 '게르마니아 속주'뿐이었다. '벨기카'와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와 '아퀴타디아'는 황제 속주지만, 로마군 병영도 없다. '장발의 갈리아'의 수도인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에 2개 대대(1천 명도 안된다)를 상주시키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로마인들은, 20년 전에는 원로원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속주 출신자에게 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속주 통치를 맡겼을 뿐 아니라, 1천 명이 채 안되지만 군사력도 맡기고 있었던 셈이다. 로마의 개방 노선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시작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재확인했다. 빈덱스는 이 노선이 거둔 '성과'였다. 그런데 이 '성과'가 네로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보통이라면 빈덱스는 동포들에게 이런 격문을 띄웠을 것이다.
"네로는 황제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네로를 황제로 받들고 있는 로마인은 갈리아 민족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갈리아인이 100년 만에 로마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격문에서 빈덱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로는 제국을 사유화하고, 제국의 최고책임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행에 도취해 있다. 어머니를 죽이고, 제국의 유능한 인재까지도 국가반역죄로 죽였다. 게다가 가수로 분장하여 서투른 리라 연주와 노래 솜씨를 보이고는 기뻐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지도자로는 어울리지않는 이런 인물은 한시라도 빨리 퇴위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갈리아인과 로마인을, 아니 제국을 구해야 한다."
빈덱스에게는 당장 10만 명에 이르는 갈리아인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갈리아인이라기보다 로마인으로서 궐기한 이 리옹 속주 총독은 에스파냐 동북부의 속주 총독이니 갈바에게도 궐기를 호소했다. 당신이야말로 네로 대신 로마 제국의 '제일인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서. 하지만 리옹의 빈덱tm가 에스파냐에 있는 갈바에게 보낸 친서가 피레네 산맥을 넘기도 전에 라인 강 연안에 주둔해 있는 고지 게르마니아 군단은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라인 강을 지키는 8개 군단에는 강 건너편에 있는 게르만족의 침입에 대비하는 임무와 함께 배후에 있는 갈리아의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도 부과되어 있다.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사령관은 황제에게 훈령을 청할 필요도 없이 군단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밑바닥부터 올라간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였다. 빈덱스에게 10만 명의 갈리아인이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루푸스는 군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설령 10만 대군이라 해도, 갈리아인은 로마군 정예부대의 적수가 못되었다. 로마군은 그들을 간단히 진압해버렸다. 갈리아측 사상자가 2만 명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하지만 네로 타도를 기치로 내건 속주민의 반란을 진압한 뒤, 로마 군단병들은 사령관인 루푸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황제가 될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갈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하긴 했지만, 네로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은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루푸스는 거절했다. 군인으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그 서약에 어긋나는 결심을 할 수 없었을까. 아니면 밑바닥부터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 겨우 '기사계급'이 되었지만, 원로원 의원도 아닌 처지에 바랄 수도 없는 중책을 짊어지기가 망설여졌을까. 하지만 어쨌든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궐기
빈덱스의 호소를 받은 갈바 총독은 루푸스와 달리 망설이지 않았다. 갈바는 조상 대대로 원로원 계급인 명문 출신이다. 8년에 걸친 그의 속주 통치는 선정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공직자로서도 뒤가 켕기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고작 20년 전에 원로원에 들어간 갈리아인도 그토록 나라를 걱정하는데, 로마인 중의 로마인이 거기에 질 수는 없다고 갈바는 생각했다. 오늘날 이베리아 반도는 에스파탸와 포르투갈로 나뉘어 있지만, 로마 시대에는 3개의 속주로 나뉘어 있었다. 북부와 동부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남부 일대는 '베티카', 서부는 '루시타니아'다. 그런데 이베리아 반도에 상주하는 3개 군단은 모두 갈바가 다스리는 타라코넨시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세 명의 총독 중에서는 갈바가 가장 연장자였다. 갈리아인의 반란이 간단히 진압되고 빈덱스가 자결했다는 소식도 갈바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속주 총독은 황제가 아니라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갈바는 선언했다. 이것은 반네로 선언이기도 했다. 서기 68년 4월 2일, 네로가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로 승리를 얻은 것을 경축하는 개선식을 거행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인 오토가 갈바를 지지하고 나섰다. 베티카 속주에 주재하는 회계감시관이자 총독 대리인 카이키나도 지지의 뜻을 전해왔다.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네로에 반대하여 일어난 셈이다. 갈리아인인 빈덱스의 궐기에는 동요하지 않았던 네로도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인 갈바의 궐기에는 깜짝 놀랐다. 어쩔 수 없이 네로는 나폴리를 떠나 수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지 게르마니아의 4개 군단은 루푸스 사령관의 거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저지 게르마니아의 4개 군단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네로는 사태를 낙관하게 되었고, 원로원의 태도는 애매해졌다. 원로원은 갈바 총독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에스파냐에서 갈바가 1개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만 들어갈 수 있는 군단은 우선 최고사령관인 황제의 허락을 얻고, 최고사령관의 요청을 맏은 원로원이 승인해주어야만 편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갈바의 행위는 원로원의 주권 침해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주곡인 밀을 실어와야 할 수송선이 네로의 명령으로 경기장에서 쓰이는 모래만 가득 싣고 온 사건이 네로에 대한 그들의 불만에 불을 붙였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지만,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국민의 '안전'과 '식량'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로가 '안전'을 실제로 맡고 있는 군대도 통제하지 못하는데다 '식량'을 보장하는 데에도 무신경한 모습을 보이자 시민들도 화가 났다. 원로원은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갈바와 은밀히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갈바는 이미 수도에 심복을 보내놓았기 때문에, 갈바와 원로원은 네로에게 들키지 않고 연락을 겁듭할 수 있었다. 원로원은 로마 사회에서 혜택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30세인 네로보다는 72세인 갈바가 황제 자리에 앉는 편이 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갈바는 일선 사령관을 지낸 경험도 풍부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국 통치의 최고책임자로는 누구보다도 갈바가 적임자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제국 통치를 맡겨볼 때까지는..." 이 갈바가 에스파냐에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원로원과 시민들은 태도를 결정해버렸다.
'국가의 적'
네로는 내리막길을, 아니 가파른 비탈을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다. 믿고 있던 근위대장 티겔리누스는 어딘가로 도망쳐버렸다. 티겔리누스를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본국 이탈리아의 유일한 군사력인 1만 명의 근위병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 한 사람의 근위대장인 니피디우스는 재빨리 갈바 쪽으로 돌아섰다.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쳐 나가는 쥐들처럼, 호위병은 물론 심부름하는 노예들까지도 네로의 주위에서 모습을 갖추었다. 이집트로 도망치려고 준비해둔 배도 선원들도 모두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무인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네로에게 결정타를 가한 것이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제일인자'인 로마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승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정당한 통치권을 얻는다.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자, 그것을 뒤쫓듯 이제 니피디우스 한 사람의 지휘를 받게 된 근위대도 갈바를 '황제'에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근위대도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어엿한 유권자다. 네로는 원로원과 시민에게 버림을 받고 제국 통치의 정당성을 잃었다. 병사들에게 체포될 사람은 이제 네로 쪽이었다. 그래도 네로는 자살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특별 대우를 해준 그리스로 도망치기만 하면, 그리스인들이 따뜻하게 맞아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때는 파르티아로 망명하는 것까지도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네로를 곁에서 끝까지 지켜준 것은 불과 네 사람이었다고 한다. 모두 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하인이었다. 네로는 그중 한 사람인 해방노예가 교외에 소유하고 있는 집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 집은 수도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살라리아 가도와 노멘타나 가도의 중간에 있고, 로마에서는 6킬로미터의 거리에 있다. 교외라서 인가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 그 집으로 들어간 네로의 귀에 근위대 영에서 병사들이 지르는 "갈바 황제 만세!"라는 환호성이 동풍을 타고 들려왔다. 이 사태를 전후하여 네로가 보여준 꼴사나운 행동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어 퍼져갔고, 그 소문이 그대로 굳어져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 집에까지 체포의 손길이 뻗친 것을 안 네로가 절망 끝에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 에술가가 죽는구나!" 그의 마지막 말도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재치있는 말을 하기 좋아했던 네로니까, 정말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네로가 생각하는 재치있는 말은 '도무스 아우레아' 완공을 눈앞에 두고 내뱉은 한마디-"이제 드디어 인간다운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와 마찬가지로 항상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실밖에 하지 않았다. 제5대 황제 네로는 이렇게 죽었다. 서기 68년 6월 9일, 30세 5개월 20일의 생애였다. 17세도 안된 나이에 황제가 된 뒤, 14년이 지났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황제묘'에 매장되는 것은 바랄수도 없는 상태였다. 네로의 유해도 제3대 황제 칼리굴라와 마찬가지로 '황제묘'가 아닌 다른 곳에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네로를 어릴 적부터 키워온 유모와 네로의 첫사랑이었던 여자노예 아크테가 네로의 유해를 화장한 뒤, 네로의 본가인 도미티우스 씨족의 묘소에 유골을 매장했다. 이 묘소가 마스 광장에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마르스 광장의 어디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칼리굴라의 무덤과 달리 네로의 무덤에는 철마다 꽃이나 과일을 바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꽃과 과일이 늘 싱싱하고 양도 많은 것을 보면, 바치는 사람이 아크테나 유모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로마의 서민들도 죽은 네로에게 동정적이었다. 황제였다는 사실만 잊어버리면, 네로는 기발한 이벤트를 베풀어주는 유쾌한 젊은이였다. 그리고 선정과 전혀 인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선정을 베풀긴 했지만 그게 지속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선정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는 지도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긴 하지만.
네로를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시조로 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무너졌다. 100년 동안 지속된 뒤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왕통의 단절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한 '교묘한 속임수'로서의 제정이 붕괴된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칼리굴라 황제가 암살되었을 때, 원로원과 시민들은 왕통-아우구스투스의 피-을 조금이라도 물려받은 사람을 찾아내어 제위에 앉히는 데 반발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크라우디우스가 순조롭게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무력을 가진 근위대의 위협이 효과를 발휘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만으로 원로원과 시민들을 13년 동안이나 계속 억누를 수는 없다.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콘센서스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칼리굴라와 마찬가지로 네로한테도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조금이라도 물려받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딸이나 누나의 가계를 더듬어 내려가보면,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에 출가한 여자도 있었고, 역시 명문 귀족인 유니우스 씨족에 출가한 여자도 있었다. 제위를 노리는 경쟁자로 여겨져 칼리굴라나 네로에게 숙청당한 사람은 많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보장해준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아직도 갖고 있었다면 제위에 앉힐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을 찾아내어 제위에 앉혔다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아이밀리우스 왕조'로서 아우구스투스식 제정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로우너은 네로를 버리고 아우구스투스의 '피'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갈바 쪽으로 돌아서는 데 티끌만한 저항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군단병이든 민간인이든, 시민들도 저항감을 갖지 않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공식적으로 로마의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칼리굴라가 죽었을 때는 우두머리만 갈아치우는 것으로 끝났는데, 네로가 죽은 뒤에는 갈바를 제위에 앉히는 것으로도 사태가 수습되지 않고 1년 반 동안 내전이 계속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면 왜 100년이 지났을 때 그 왕조가 부적격 판정을 받았을까. 비교적 소수라 해도 여러 사람이 통치권을 갖는 공화정과는 달리, 한 사람에게 통치권이 집중되는 군주정의 결함은 견제 기능 미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제정이든 왕정이든, 인류가 경험한 군주정은 대부분 견제 기능이 부족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로마의 제정만은 견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불명료한 권력구조를 고안해내지 않았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을 창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제정을 창설한 것은 광대한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데에는 소수지도체제인 공화정보다 제정이 적합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이사르가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불과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확신이 옳았다는 사실은 그후 제국의 통치기능이 훌륭하게 작용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황제 한두 명의 실정에도 제국은 끄떡하지 않았다. '평화'는 계속 유지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인간'(호모 폴리티쿠스) 자체였던 아우구스투스는 그 정치체제가 '교묘한 속임수'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체제의 키잡이에게는 고도의 정치적 능력이나 재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의 정치력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갖는 것이 얼마나 드문 행운인지는 인류 역사가 보여주는 인간성의 현실이다. 그래서 속임수이긴 하지만 교묘하지는 않은 군주정을 선택한 나라에서는 세습제를 채택하기로 했다. 우두머리가 고도의 정치력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 주변에 고도의 정치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실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두머리가 바보 천치라도 '피'의 연속성만은 보장되고, 그것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것이 고도의 정치력을 가진 사람의 역할이다. 우두머리에게 권위는 인정하되 권력은 주지 않는 것으로, 견제 기능이 없는 약점을 보완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이런 군주정과는 인연이 없는 민족이었다. 로마에서는 권위와 권력이 항상 동일인에게 집중되었다. 로마인은 혈통보다 실력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왕정 시대부터 세습제가 아니었다. 이런 로마인이 세습제를 받아들이게 하려면 견제 기능을 마련하여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습제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로는, 우선 도시인이었던 카이사르와 달리 지방에서 태어난 그가 가족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창업자가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고 싶어하는 따위의 사적인 야심은 아니었다. 제위를 둘러싸고 일어나기 쉬운 내전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긴 하지만 로마인은 최고통치자의 세습제에 전통적으로 익숙지 않다. 그래서 황제가 되려면 '혈통'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군단도 충성을 맹세한 경우에만 황제를 최고사령관으로 인정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언급일 뿐, 실제로는 제6권에서도 말했듯이 아우구스투스의 교묘한 권력 배합으로 말미암아 황제에게 절대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거나 권력을 사용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권력이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에 고개를 쳐드는 것이 바로 공식적인 규정이다. 원로원과 시민들이 권력 위임을 철회하고 군단이 충성 서약을 거부하면, 어제까지의 황제도 한순간에 보통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네로의 말로가 그 전형적인 예다. 이렇게 되면 '피'는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내가 상상하기에, 로마인이 생각하는 혈통은 요즘 말하는 부가가치였던 것 같다. 로마인은 어디까지나 실력이 중시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로마인에게 '피'는 실체가 있었야만 비로소 가치를 낳는 것에 불과했다. 네로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을 제위에 앉히지 않은 것은, 그 시대의 로마인들이 더 이상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갖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부가가치가 없는 실력들이 공화정 말기처럼 정면 대결하는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굴라 황제가 암살되었을 때는 하루 만에 결말이 났지만, 네로가 죽은 뒤에는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1년 반 동안의 내전을 거쳐야 했고, 그동안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라는 세 명의 황제를 거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 낙착될 때까지 혼미를 겪어야 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율리우스 씨족이나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갈바나 오토나 비텔리우스 같은 로마 출신 원로원 게급에도 속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직업조차 확실치 않은 지방 도시 출신으로, 갖은 고초를 겪으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피'와 결별한 로마인들도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제정과는 결별하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하고 티베리우스가 반석처럼 튼튼하게 만들고 클라우디우스가 손질한 제정은, 심정적으로는 공화주의자였던 타키투스조차도 제국의 현재 상황에 적합한 정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훌륭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이데올로기의 민족이 아니었다. 현실과 싸운다는 의미에서의 현실주의자 집단이었다. 서기 68년 여름부터 1년 반 동안 계속된 혼란도 정치체제를 모색하는 혼미는 아니다. 앞으로도 제정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콘센서스가 이루어져 있었다. 문제는 누구를 '유일한 통치자'로 할 것인가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고심한 결과였던 제정의 견제 기능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게 되었다. 아니, 황제 암살이 견제 기능으로서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마음이 담겨 있는 길 - 돈 후앙 - 야키 족
"오직 당신 자신에게만 이 한가지를 물어 보라.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는가?"
어떠한 길도 다만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당신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당신 자신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전혀 무례한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관찰하라.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시도하라. 그런 다음 오직 당신 자신에게만 이 한 가지를 물어 보라.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길이다. 한쪽 길은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며, 그 길을 계속 걸어가면 당신은 그 길과 하나가 될 것이다. 다른 쪽 길은 당신으로 하여금 인생을 저주하게 만들 것이다. 한쪽은 당신을 강하게 해주고, 다른 쪽은 당신을 힘없는 인간으로 만든다. 지자가 되는 길은 전사의 길과 같다.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면 서툴고 나약해져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지자가 되기 위해선 가볍고 유동적이어야 한다. 진정한 지자는 '보는 것'과 '바라보는 것'의 차이를 안다.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평범한 방식을 뜻하는 반면, 보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을 지각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본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보는 것'을 편애한다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지. 지자는 보는 것을 통해서만 앎에 이르고 있기 때문일세."
"어떤 것을 본다는 겁니까?"
"모든 것."
"하지만 나는 지자가 아닌데도 역시 모든 것을 보는 걸요."
"아니. 자네는 보는 게 아닐세."
"나는 본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자네는 보지 못하네."
"돈 후앙,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요?"
"자네는 단지 사물의 표면만을 바라볼 뿐이지."
"그렇다면 지자들은 모두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실제로 그 본질까지 꿰뚫어본다는 뜻입니까?"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닐세. 지자는 자기가 편애하는 것이 있다고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 다만 내가 편애하는 것은 '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앎에 이른다는 것이라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것을 행하지."
"예를 들면 어떤 것들이 있죠?"
"내 친구 사카테카의 예를 들어볼까. 그는 지자인데, 그가 편애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지. 그는 춤을 통해 앎에 이른다네."
"그렇지만 춤추는 것이 어떻게 사카테카가 무엇을 알게 되는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 그가 춤추는 것은 자네가 춤추는 것과 같다기보다는 내가 '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는 당신이 보는 것처럼 보기도 합니까?"
"그렇지. 그는 내가 '보는 것'처럼 춤을 추지."
"사카테카는 어떻게 춤을 춥니까?"
"그것을 설명하기 어렵네. 앎에 이르기 위해 춤을 출 때면 그는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추지.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자네가 지자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춤추는 것이나 보는 것에 대해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야."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든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 눈이 그것을 보게끔 훈련시킨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미리 가지고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진정으로 보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바라보는 것에 대해 생각을 앞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생각을 버리고 바라볼 때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웃기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만 이 세상의 우스운 것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 눈이 진정으로 보게 된다면, 모든 것이 다 똑같기 때문에 우스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돈 후앙,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겁니까?"
"그것을 알려면 보는 법을 배워야 하지. 내가 말해 줄 수는 없는 걸세."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입니까?"
"아닐세. 그저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
"왜지요?"
"설명해도 자네는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한번 설명해 보십시오. 어쩌면 내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니야. 자네는 그것을 스스로 알아내야 하네. 자네가 일단 앎에 이르게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지."
"그렇다면 당신은 더 이상 세상의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진 않겠군요."
"나는 양쪽으로 다 볼 수 있지. 세상을 그저 바라보기를 원할때면 나도 자네가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다네. 그러나 내가 어떤 것을 진정으로 보겠다고 원하면 나는 내가 아는 방법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다른 식으로 그것을 지각하게 되는 것이지."
"당신이 바라볼 때마다 사물을 항상 똑같이 보입니까?"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네.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이 변할 뿐이지...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사실은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네. 우리는 사물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그저 바라볼 뿐이지. 자네의 눈은 단지 겉모양을 바라보는 법만 배웠을 뿐이야."
인간으로서 우리의 숙명은 배우는 것이며, 지식(지혜)을 배우려는 자세는 마치 전투에 나가는 전사와 같아야 한다. 세상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지자의 삶에는 공허함이란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은 동등하다. 나에게는 승리도 패배도 그리고 공허함도 없다. 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는 아이가 아니라 전사가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거나 불만을 늘어놓거나 머뭇거려선 안 되며, 그때가 되면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욕심을 무로 낮추는 법을 배움으로써 가능하다. 자신이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한 그의 삶은 지옥과 같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무로 만들어 버리는 방법을 배운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얻게 될 가장 작은 것도 진정할 선물이 될 것이다. 가난하다거나 부족하다는 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미움이나 배고픔, 또는 고통받는 것 역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나는 그 기술을 터득했다. 그 힘이야말로 우리가 세속적인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 힘이 없다면 우리는 쓰레기일 뿐이다. 바람에 날리는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백인들이 와서 나의 아버지를 죽였을 때 나는 그들을 파멸시키고야 말겠다고 맹세했었다. 나는 수년 동안 그 약속을 간직했다. 그러나 이제 그 약속은 바뀌었다. 나는 누구를 파멸시키는 데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평생을 두고 지나가는 수많은 과정들은 모두가 똑같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결국 가서 만나게 되며, 오직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인생이 그 두 사람 모두에게 너무도 짧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슬프다고 느끼는 것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내가 슬프게 느끼는 것은 그들이 인디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인디언처럼 살았고 인디언처럼 죽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해준다. 세상은 정말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불가해하고 물리칠 수 없는 세력들에 둘러싸인 무력한 존재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세력들이 설명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모르면서도 인간의 행동이 조만간에 그것들을 설명해 주고 변화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끝없이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실, 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우리 자신과의 대화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자신에게 말하기를 멈춘다면 세상은 비로소 그것이 지녀야 하는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려고 노력한다.
지자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멈추자마자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상이 이런저런 모습인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세상의 모습을 그렇게 말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세상이 이렇고 저렇다고 말하는 것을 멈춘다면, 세상은 더 이상 이런저런 모습이 아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서히 세상과 연결된 자신의 끈을 풀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은 불가해하다. 우리는 세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비밀들을 절대 파헤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해야만 한다. 완전한 신비 그대로!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상은 결코 신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은 나이가 들게 되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 확신하게 된다. 자기가 세상을 소모해 버린 게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하는 일을 소모해 버렸을 뿐인데도! 그렇지만 어리석기 때문에 그는 세상이 자기에게 더 이상 신비스러운 것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지자는 이런 어리석음을 알고 있으며, 사람들이 행사는 일이 어떤 상황 아래서도 이 세상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지자는 이 세상을 끝이 없는 신비로,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는 일을 끝이 없는 어리석음으로 여기는 것이다.
|
|
독서실 → 수필
|
|
|
목마른 계절 - 전혜린
오랫동안 나이를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지금 내 나이 이십구세 - 그러니까 액년이다. 그러나 올해 나는 특별히 재앙이나 불행을 겪지 않고 지났다. 만성적 재앙으로 침체를 들 수 있을 뿐이다. 직업이나 모든 면에서 올해는 무발전의 해였다. 꽤 미신가인 나는 올해 초부터, 소위 아홉자가 든 올해를 두려워하면서 무슨 카타스트로프를 예상하고 있었으나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어느 해나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흘러갔다. 연령의 중량도 지금 내 펜에 쓰이는 대상으로서만 비로소 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정도로 매우 바쁘고 피곤한 한 해였다. 생각해 보니 피로가 심했던 것이 올해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수레에 끼워진 바퀴처럼 자기 자신이나 주위에 대해 신선한 흥미를 잃고 타성처럼 회전하고 있었던 생활이 단적으로 말해서 내 일년간의 생활이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도대체 커다란 흥미가 없어지고 만 것 같다. 이것이 곧 내가 삼십대 여인으로 되어가고 있는 징후일 것이다. 전과 비할 것 같으면 나 자신의 본질이나 현실이나 미래에 별로 강렬한 호기심이 안일어나고,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에 대한 권태기 - 어느 정도의 포만과 반복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갖다 주는 탄력 상실의 시대......이러한 징후는 확실히 이미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나이를 잊고 사는 생활, 바쁜 일과로 찬 직업 생활, 비교적 안정된 가정생활, 자기에 대한 호기심의 고갈, 미래에 대한 강렬한 흥미의 결여, 과거에 대한 냉잠과 비감상주의......이런 여러 가지 징후가 삼십대라는 선의 전후로 여자에게 수반하는 보편적인 만성의 징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어떤 정상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든지 한 번은 모두 겪는 단계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우리에게는 마치 어느 가능성으로든지 길은 다 열려 있는 것처럼, 세계는 커 보였고 중요했고 자기 자신이 신비스러웠다. 매일 매일의 생활이 마치 그림이 잔뜩 들어 있는 그림책같이 수수께기와 신선한 흥미에 넘쳐 있었고 싫증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도 사는 것이 신비했고 재미있었다. 공부도 책읽는것도........ 모든 것이 여학교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조금씩 좁아져 갔다. 시야가 한계를 긋기 시작했다. 이유없는 모순감과 고뇌가 싹텄고 무서운 인식욕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었다. 파우스트처럼. 그리고 마음의 벗이 생겼다. 주혜는 폐쇄적이고 건조한 성품인 나와 반대로 조화적이고 다정하고 건조한 소녀였다. 우리는 별로 얘기는 안 했으나 늘 편지를 교환했었다. 학교에서 매일 얼굴을 대하면서도 매일 편지를 써야만 했다. 우리는 같이 공부를 했다. 노령의 한문 선생을 괴롭히고 방과 후에 같이 논어를 배웠고, 역사 선생님에게 따로 삼국사기를 배웠다. 이런 공동 인식에의 정열과 탐욕스러운 지식욕이 그 때의 나와 주혜를 무섭게 굳게 맺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주혜화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지상의 양식」을 읽고 나서 우리는 그 속에 있는 한귀절「나타나엘이여, 우리는 비를 받아들이자」에 감동해서 폭우 속을 우산 없이 걸어 다녔다. 이 버릇은 많이 완화된 채 아직도 나에게 남겨져 있다. 또 마르땡 듀 가아르의 「회색 노트」를 읽고는 주혜와 나는 당장에 회색 노우트를 교환하기로 하여 매일 한 사람이 집에 가져가서 일기를 쓰고 다음날 그 노트를 상대방의 책상속에 넗넣고 있었다. 이 노우트를 우리는 몇 년이나 교환했었다. 그 당시 그 노트와 주혜는 나의 전 생활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주혜도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다. 재능에 대한 정당한 회의를 어린 연령과 또 열렬한 지식욕이 가려 덮고 있었다. 하늘은 넓었고 우리는 얼마든지 날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문학, 철학, 어학(영ㆍ독ㆍ불ㆍ한문ㆍ한글)에 대한 광적일 정도롤 열렬한 지식욕과 열성, 그리고 주혜와의 모든 것을 초월한 가장 순수한 가장 관념적인 사랑으로 완전히 일관되어 있었던 나의 여학교 시절은 확실히 아직도 미래에 대해서 꿈을 그릴 여백이 얼마든지 남아 있었던 동화의 나라와 현실 사이의 완충 지대이기도 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참된 의미의 현실이 시작된 것 같다. 입학부터 내 의사가 아니었고 법률가였던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장녀가 그렇듯이 나도 매우 부모에 의뢰하고있고 부모를 무서워하면서 밀착하고 있는 편이었다. 또한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음에 들고 싶다는 욕망이 의식 밑에도, 또 의식 표면에도 언제나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이 실현되는 때마다 나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했었다. 이 욕망은 아직도 내 의식 밑의 심층에 남아 있다. 아마 일생동안 나는 이런 의미로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광적인 지식욕도 유전문제도 별도로 생각하더라도 결국 아버지가 내의식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에 그렇게도 커다란 환희와 인내와 노력을 경주하고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의식의 세계에서 나는 결국 언제나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식을 쌓아올렸던 것 같다. 마치 제단 앞에 향불을 갖다 쌓듯. 주혜는 자기가 선택한 학교에 들어갔다. 나와 주혜는 과는 달랐으나 같은 서울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늘 주혜의 학교에 가서 오오든이나 엘리어트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했었다. 그리고 곁딜 수 없는 법학에 대한 반감을 반추하고 있었다. 나의 재능은 다른 데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일년이 지나고 우리가 대학교 이년생이 되었을 때 주혜는 뜻밖의 일가 전원과 함께 도미하게 되었다. 나는 미치게 슬펐다. 주혜는 뜨거운 여름날 가족과 함께 불행한 모습으로 그러나 새로운 생활에의 기대에 넘쳐서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의 더위, 비행장(지금같이 해사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풀밭이었다)의 우거진 풀, 먼지, 아마 일생 내 기억에서 안 떠날 것이다. 삼년을 마친후 나는 출발했다. 남독의 대도시인 뮌헨에서 뮌헨대학 문리과 대학 제 일학년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반년 후에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뜻밖에 후에 나의 남편이 된 T가 뮌헨에 왔다. 그간 두집 사이에는 교류가 생겨 우리를 결혼시킬 것을 합의하고 있었다. 어느 신혼부부에게나 있는 두 개의 개성이 달아서 둥글어질 때까지의 마찰은 물론 우리에게도 있었다.그러나 우리는 젊었고 대체로 행복했다. 먹거나 입는 것보다는 책을 사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을 중시하고 좋아하는 우리의 근본적 공동요소는 그대로 허용되고 유지되었다. 그 점에서는 우리는 언제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해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가령 수입의 반을 넘는 책 한 권 사기를 우리는 한번도 주저해 본 일이 없다. 그대신 언제나 가난했고 가난이 우리에게는 재미있었다.
1956년 독일의 어느 잡지에 사강의 [어떤 미소]가 연재되었다. 나는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T에게 말하면서 스토리를 늘 얘기해 줬다. T의 주선으로 한국에서의 출판이 결정됐다. 번역이라는 일도 또 사강도 그렇게 탐탁치는 않았으나 그렇게 되어서 항공편지에 작은 글씨로 번역해서 보냈고 책으로 되어 나왔었다. 그 후 [안네 프랑크 - 한 소녀의 걸어온 길]도 그와 같은 경위로 아저씨네 출판사에서 책으로 되어 나왔고, 그 이후의 나의 책들은 모두 우연이 계기가 되어서 선배나 동무나 지기의 우정으로 햇빛을 보게 된 우연과 우정의 산물이다. 내가 원동력이나 계기가 된 일은 한번도 없었고 언제나 피동적인 것이 최근 수년간의 생활에서의 나의 근본 태도였다.
처음에 그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던 것 같은 자신과 포부 - 그리고 내 운명은 내 손안에 있다는 낙천주의 시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 버렸고, 어느새 어떤 기성품의 현실이 열망됨 없이 자기에게 주어져서 그 테두리 속에들어가 고정되어 버린 것이 나의 회고가 다시금 시인하는 결론인 것 같다. 즉 내가 미치도록 그것이 될 것을 원했던 것으로 되는 대신에 자기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가장 이외의 방향으로 어느새 자기가 형성되어 버린 것을 발견한다. 크게 보아서 내가 중학교때 썼던 글 속에 있는 한귀절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된다]라는 소망겸 졸렌(Sollen 爲당위)이라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형성되어진 것 같다.
그 사실에 대해서 나는 때때로 스스로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심지어 결혼에 관해서도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막혀 있다.그 당시의 나는 모든 불행은 사람이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온다고 믿고 있었고 니체의 결혼에 관한 경구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관념에 투철한 맑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느 결혼이나 시민적 생활을 피해야 한다고 확신했었다. 중학교 때의 나의 글에 역설을이루려는 듯 나는 지금 가장 평범한 과정을 밟은 가장 평범한 아내, 어머니로서 가장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나는 내 피부속에서 불안을 느낄때가 있다. 좁은 껍질속에 감금되어 있는 정신의 중량이 확 느껴지고 파괴의욕을 느낄 때가 있다. 무언지 일격이 내 머리위에 떨어질 것을 기다릴 때는 그런 때다. 이 반무의식의 상태를 활짝 개인 의식상태로 바꿔주고 이 반소망된 생활을 열렬히 소망된 생으로 만들 무엇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 요술 지팡이를 기다리듯,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삼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니면 대학교 일학년때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또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증발하는, 그리고 혀에 이끼가 돋아나고 손이 얼음같이 되는, 그리고 눈이 빛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이런 완전한 순간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그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다. 완전한 환희나, 절망, 무엇이든지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에 의해서 뒤흔들려 보고 싶다. 뼈속까지. 그런 순간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있다. 내가 지닌 여러 가지 제한이나 껍질에 응결당함이 없이 내 몸과 내 정신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무한 속에 내던지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 여태까지 그냥 주어지기만 했었던 생을 앞으로는 내가 의식적으로 형성하고 싶다. 내 운명에 능동적으로 작용을 가하고 보다 체계화에 힘쓰고 싶다. 서른이라는 어떤 한계선을 경계로 해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피동에서 능동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다 열렬하게 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 밀폐된 내면에서의 자기 수련이 아니라 사회와 현실 속에서 옛날에 내가 가졌던 인식애와 순수와 정열을 던져 놓고 싶다.
1962. 12월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