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0호 - 2024.06.24. 월요일(음력 : 05.19)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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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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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물려 줄 최상의 유산은 자립해서 제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
― 이사도라 덩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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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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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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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하다’ ‘나지막하다’
서양의 ‘브런치(brunch)’ 문화가 어느새 우리 사회에도 널리 퍼지고 있다. ‘아침 겸 점심’을 뜻하는 우리말 ‘아점’이 다소 속된 느낌, 놓친 끼니를 때운다는 느낌이 드는데 비해 영어인 ‘브런치’에서는 품격과 여유가 느껴진다면 이 또한 문화적 사대주의 탓일까? 아무튼 매일 아침, 시간에 쫓기는 맞벌이 주부인 나에게 여유롭게 즐기는 ‘느지막한 아침식사’는 바람일 뿐이다.
‘느지막한 아침식사’에서 ‘느지막하다’를 ‘늦으막하다’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늦다’는 뜻과 연관시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지막하다’도 ‘낮다’는 뜻을 떠올려 ‘낮으막하다’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말들은 ‘느지막’ ‘나지막’이라는 어근에 ‘-하다’가 붙어 생긴 말로 ‘느지막하다’ ‘나지막하다’가 맞는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느지막’과 ‘느즈막’, ‘나지막’과 ‘나즈막’이 헷갈릴 수 있다. ‘으’가 ‘이’로 바뀌는 전설모음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으나 뚜렷하지는 않다. 비슷한 형태의 말 중에 ‘큼지막하다’ ‘높지막하다’를 생각하면 쉽다. ‘-즈막하다’로 끝나는 말은 표준어에는 없다. 따라서 ‘느지막한 출근’ ‘나지막한 목소리’ 등과 같이 써야 한다.
‘-하다’가 붙는 말이기 때문에 부사형에는 ‘히’가 붙어 ‘느지막히’ ‘나지막히’가 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느지막이’ ‘나지막이’가 맞다. 마찬가지로 ‘큼지막’ ‘높지막’에도 ‘이’가 붙어 ‘큼지막이’ ‘높지막이’가 된다.
‘늘그막’이라는 말도 ‘늙다’는 뜻 때문에 ‘늙으막’이라고 혼동하기 쉬우나 ‘늘그막’이 바른 표현이다. 흔히 ‘널찍하다’와 비슷한 뜻으로 ‘널찌막하다’ 라는 표현도 많이 쓰는데 ‘널찌막하다’는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
있음, 없음, 닫혔음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는 1989년 2월의 어느 날 TV 뉴스를 통해 맞춤법과 표준어 개정 소식을 다루었다. 뉴스를 보던 고등학생 선우가 동생의 공책에 쓰인 ‘있읍니다’를 얼른 ‘있습니다’로 고쳐 주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1988년 개정 이전에는 ‘읍니다’와 ‘습니다’를 둘 다 쓰도록 했다. 즉 ‘읍니다’보다 ‘습니다’가 더 깍듯한 표현이라고 하여 둘을 구분해서 썼다. 그러나 점차 둘 사이에 의미 차이가 없어지게 되어 ‘습니다’ 하나로 통일해서 쓰도록 한 것이다. 이에 ‘있읍니다, 먹읍니다, 입읍니다’ 등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있습니다, 먹습니다, 입습니다’로만 적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개정 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있음, 없음’ 등도 모두 ‘있슴, 없슴’으로 바뀐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있음, 없음’을 ‘있습니다, 없습니다’의 준말로 알고 ‘있슴, 없슴’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은 동사나 형용사를 명사로 만들어주는 명사형 어미로, ‘습니다’와는 상관이 없다. ‘지금 여기 있음은 없음만 못하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음으로써 잡귀를 쫓는다’ 같은 문장을 살펴보자. ‘있다, 없다, 먹다’ 같은 형용사나 동사를 명사처럼 기능할 수 있게 바꾸어주는 역할을 ‘음’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습니다’는 서술형으로 문장을 끝낼 때 쓰는 어미 ‘ㄴ다’의 높임말이다. ‘아침에 밥을 먹는다’ 대신 ‘밥을 먹습니다’로 쓰면 상대를 높이면서 문장을 끝맺게 된다. 이 ‘습니다’ 형태는 따로 준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변에서 흔히 보는 ‘있슴, 없슴, 닫혔슴’ 등은 모두 잘못된 표기다. ‘있음, 없음, 닫혔음’으로 적어야 맞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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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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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동창 - 천상병
지금은 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얼마나 출세를 했을까?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점심을 먹고 있을까?
지금은 이사관이 됐을까?
지금은 가로수 밑을 걷고 있을까?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마는
그들은 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
비바람 - 한용운
밤에 온 비바람은
구슬 같은 꽃 수풀을
가엾이도 지쳐 놓았다.
꽃이 피는 대로 핀들
봄이 몇 날이나 되랴마는
비바람은 무슨 마음이냐.
아름다운 꽃밭이 아니면
바람 불고 비 올 데가 없더냐.
∼∼∼∼∼∼∼∼∼∼∼∼∼∼∼∼∼∼∼∼∼∼∼∼∼∼∼∼∼∼∼∼~~~~∼∼
홍춘 - 정지용
춘나무 꽃 피뱉은 듯 붉게 타고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간다.
어린아이들 제춤에 뜻없는 노래를 부르고
솜병아리 양지쪽에 모이를 가리고 있다.
아지랑이 졸음조는 마을길에 고달퍼
아름 아름 알어질 일도 몰라서
여윈 볼만 만지고 돌아 오노니.
~~~~~~~~~~~~~~~~~~~~~~~~~~~~~~~~~~~~~~~~~~~~~~~~~~~`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 김수영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 있다
이것은 먼 바다를 건너온
용이하게 찾아갈 수 없는 나라에서 온 것이다
주변없는 사람이 만져서는 아니될 책
만지면은 죽어버릴 듯 말 듯 되는 책
가리포루니아라는 곳에서 온 것만은
확실하지만 누가 지은 것인줄도 모르는
제2차대전 이후의
긴긴 역사를 갖춘 것같은
이 엄연한 책이
지금 바람 속에 휘날리고 있다
어린 동생들과의 잡담도 마치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괴로운 잠을
이루울 준비를 해야 할 이 시간에
괴로움도 모르고
나는 이 책을 멀리 보고 있다
그저 멀리 보고 있는 듯한 것이 온당한 것이므로
나는 괴롭다
오오 그와 같이 이 서적은 있다
그 책장은 번쩍이고
연해 나는 괴로움으로 어찌할 수 없이
이를 깨물고 있네!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여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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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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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他山之石)
他:다를 타. 山:메 산. 之:갈 지(…의). 石:돌 석.
[원말] 타산지석 가이공옥(可以攻玉).
[유사어] 절차탁마(切磋琢磨), 공옥이석(攻玉以石).
[출전]《詩經》〈小雅篇〉
다른 산의 거친(쓸모 없는) 돌이라도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 곧
①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됨의 비유.
② 쓸모 없는 것이라도 쓰기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음의 비유.
이 말은《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학명(鶴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시(일부)의 한 구절이다.
즐거운 저 동산에는 [樂彼之園(낙피지원)]
박달나무 심겨 있고 [爰有樹檀(원유수단)]
그 밑에는 닥나무 있네 [其下維穀(기하유곡)]
다른 산의 돌이라도 [他山之石(타산지석)]
이로써 옥을 갈 수 있네 [가이공옥(可以攻玉)]
[주]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돌[石]을 소인(小人)에 비유하고 옥(玉)을 군자(君子)에 비유하여 군자도 소인에 의해 수양과 학덕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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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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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31
과거와 화해할 수 없다면 정신의 안정과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과거의 상처나 갈등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라. 그리하여 그것이 스스로 사라지도록 하라.
32
우리 앞에 펼쳐진 하루하루는 새롭고 신선하다. 그 시간들은 우리가 지금 당장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맞이할 수도 있으며 과거의 상처와 원한, 두려움으로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그 선택은 바로 우리가 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택의 순간들을 일상화된 관습에 포함시켜서 습관에 따라 행동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지금 당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33
인생의 확고한 목적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의 비난이나 칭찬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목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34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은 살아가는 일에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부정적인 판단을 적극적인 사고로 바꾼다면 우리의 인생은 긍정적인 결과를 보증한다.
35
사교적인 모임에는 자신의 빈약한 실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허위적이며 독단적이고 인습적인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선량한 풍모와 고상한 행동, 점잖은 말씨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이런 허위적인 우월은 진정한 우월을 만나게 되면 금세 그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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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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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10. 곡! 제2공화국
밤 10시.
KBS에서는 대통령 윤보선의 특별담화가 방송되고 있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나라는 지금 중대한 시국에 놓여있습니다. 오늘의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수습하느냐 하는 것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태를 무사히 수습해야 하고 공산주의를 막는 힘에 약화를 초래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 전세계는 우리를 주시하고 냉정하게 이 나라의 일을 판단해야 하며 희생 없이 최선의 방법으로서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우리의 성의와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중대한 사태에 처해서 혼란방지와 질서유지에 국민 여러분들이 특별히 노력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장 총리 이하 전국무위원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중대한 사태를 성의있게 합법적으로 처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말에 의하면 국무회의에 출석하는 모든 국무위원들의 신변은 보장된다고 합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일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라는 것이 무슨 소리였을까? 사령관한테 명령해서 쿠데타를 진압하는 일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정권이 호헌을 위해서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는 것만이 합법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윤보선의 특별담화 방송을 듣고 있던 장면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쿠데타를 당해야 한다는 거야?) 종일 이 한 가지 생각에 얽매여 번민을 해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윤보선이 한시바삐 나와서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윤보선의 이 말은 <어서 나와서 쿠데타 쪽에 정권을 넘겨 주라>는 간접적인 권고 이외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내가 민주주의에 입각해서 정치를 해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해위>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쿠데타를지지하는 방송을 해?) 장면의 속이 부글부글 끓을 만도 한 일이었다. 윤보선의 특별담화가 방송된 지 5분도 안 되어 청와대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부흥부장관 주요한(朱耀翰)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사태수습을 위해서 청와대로 오라면 가겠으나 신변을 어떻게 보장한다는 것입니까?"
"계엄사령관 장도영 총장한테 직접 확약을 받았으니 안심하고 협력해 주시오."
윤보선은 대꾸했다.
"없습니다. 장도영의 말을 누가 믿는단 말씀입니까?"
주요한은 비꼬듯이 반문했다. 이 말에 윤보선은 짜증을 부렸다.
"그럼, 이 판국에 뭘 어쩌겠다는 거요? 달리 수습할 방법이 없지 않소?"
"신변보장을 장도영한테 미루지 말고 각하께서 책임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나가서 사태수습에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대통령 각하!"
그리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목숨은 두려워할 줄 알면서 책임을 질 줄은 모르니 쿠데타를 당할 밖에.)
"김준하 비서를 들라고 해!"
윤보선은 주요한의 통화를 끝내자 비서관 김준하를 들라고 했다. 김준하가 들어오자 윤보선은 지시했다.
"야전군의 이한림 장군하고 각 군단장한테 보낼 친서를 준비하게."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을 위시해서 각 군단장에게 보낼 친서를 마련하라는 윤보선의 지시를 받은 비서관 김준하(金準河)는 몇 사람의 동료들과 함께 끙끙거리며 밤을 새다시피 해서 친서 원고를 마련했다. 김준하는 윤보선이 침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원고를 보여 주었다.
"잘됐군먼, 속히 서둘러 정서하도록 하게."
김준하는 원고가 잘됐다는 칭찬을 듣자 그것을 서둘러 정서했다. 그때, 미8군 사령관이 진압작전을 펼 모양 같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진상은 어떠했던가?
5월 17일 오전 8시.
매그루더는 미8군 사령부 회의실에서 <야전군을 주측으로 한 서울진압작전회의>를 위한 참모회의를 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진압작전>을 위한 참모회의를 연 것은 제1군에 출동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유일한 헌법기관으로 남아 있는 대통렬 윤보선이 진압작전을 반대하고 있는 데다가 장면의 요청이 없기 때문에 출동명령을 내리는 것만은 보류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대신 이날 아침 미8군 사령부를 방문한 계엄사령관 장도영에게 매그루더는 명령했다.
"제너럴 장, 본관은 귀관에게 본관의 작전지휘권을 침해한 한국군의 처사에 대해서 강경하게 항의하는 동시에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6군단 포병단과 해병여단의 원대복귀를 강력하게 명령하오."
어제까지만 해도 매그루더와 장도영의 우정은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짙었다. 갔다. 장도영에 대한 매그루더의 차거운 <명령>이 그것을 웅변으로 입증해 주고 있었다. 매그루더로부터 6군단 포병단과 해병여단의 원대복귀 명령을 수령한 장도영은 여간 입장이 난처하지가 않았다. 만일 이 명령에 복종치 않을 경우 분노한 매그루더는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로 돌아온 장도영은 이 문제를 박정희와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좋겠소, 박 장군? 매그루더의 태도가 저토록 강경하니 만일 저 사람의 명령을 거부했다간 한.미군의 충돌로 발전할지도 모르겠으니 말이오?"
얘기를 듣고 난 박정희도 난처하기만 했다.
"혁명 거사군에게 원대복귀를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더러 손을 들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상황은 아직도 유동적인데 거사군은 모조리 원대복귀시키게 되면 우리는 팔 다리를 잘리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박정희는 매그루더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박 장군, 지금 이때에 매그루더와 감정적인 대립을 보이는 것은 우리한테 불리하면 불리하지 결코 이로운 것이 못 될 것 같소."
장도영은 어떻게 해서든 박정희를 설득하려 들었으나 그는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려 하지 않았다. 청와대에는 참의원 의장 백낙준을 위시해서 윤보선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민의원 부의장 이영준(李榮俊), 신민당 당수 김도연(金度演),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생 신태환(申泰煥), 고려대학교 교수 남흥우(南興祐) 등이었다. 윤보선이 이들 몇 사람을 초지한 것은 야전군에 친서를 보내는 데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윤보선은 야전군에 친서를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매그루더가 어떤 방법을 쓰든 쿠데타를 진압해서 장면 정권을 그대로 유지시켜 놓을 경우, 야전군에 친서를 보내 진압부대의 출동을 저지하려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황에 따라서는 윤보선의 행위에 법적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고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동족간에 피를 흘리지 않기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야전군 사령관한테<자제를 요청하는 친서>를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내놓거나 잘못된 처사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취하려는 조처는 가장 적절하고 옳은 처사올시다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찬성해주는 것이었다. 윤보선은 거듭 만족스럽기만 했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대한민국의 불행을 혼자의 힘으로 막아내고 있다는 긍지도 있었다. 인사들이 돌아간 직후였다.
"장 장군, 지금 곧 야전군에 밀사를 보내려고 하니 장 장군이 그들이 무사히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시오."
이 전화를 받은 장도영은 무척이나 기뻤다. 그는 박정희에게 그 말을 전했다.
"여보 박 장군, 대통령이 야전군에 밀사를 보내겠다고 알려왔소. 밀사의 삼여이 출동만류에 있는 것인즉, 매그루더 장군의 명령을 이행해도 되지 않겠소?"
박정희는 한동안이나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럼, 6군단 포병단만 원대복귀시키도록 합시다."
한참만에 그는 일부 병력의 철수에만 동의를 했다. 사령관들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게 아니오? 그러니 매그루더 장군의 명령대로 해병여단도 원대복귀시키도록 합시다."
"해병여단만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박정희는 해병여단의 원대복귀만은 동의하려 들지 않았다.
"하여간에 대통령께서 일선에 보낼 밀사가 무사히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편의제공을 요청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박 장군이 알아서 조치해 주시오."
그리고 장도영은 밖으로 나갔다.
오후 2시.
두 대의 지프가 청와대 본관 앞으로 올라왔다. 야전군으로 떠날 밀사들을 군사혁명위원회에서 보낸 차량이었다. 밀사의 임무를 띠고 야전군으로 떠나도록 되어 있는 청와대 비서관은 김준하를 위시해서 김남(金楠), 윤성구(尹聖求), 홍금선(洪金善) 등 네 명이었다. 김준하와 김남을 1개조로 한 비서관들은 제1군 사령관 이한림과 그의 휘하의 군단장 민기식, 최석을 만나는 것이 주어진 사명이었고 윤성구, 홍금선 1개조로 한 비서관들을 박임항, 김응수, 임부택을 만나는 것이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들이 여의도에 도착해 보니 이미 그들을 태우고 야전군으로 날아갈 L-19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비행기에 오를 때 네 명의 비서관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
오후 2시 같은 시각.
해병대 사령관 해병 중장 김성은이 미8군 사령부로 매그루더를 방문했다. 이미 쿠데타 지지로 돌아서 있던 김성은이 매그루더를 방문한 것은 미8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김성은을 맞은 매그루더는 노여움부터 터뜨렸다.
"제너럴 김, 내 명령은 해병여단이 김포에 있도록 되어 있는데 서울 진입은 누구 명령이오? 귀관은 한국 해병대가 본관의 작전지휘권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시오? 해병여단을 즉시 원대복귀시키시오."
이 명령에 김성은은 매그루더의 감정을 목소리로 응대했다.
"장군, 쿠데타를 하는 사람들이 상관의 의향을 물어가면서 쿠데타를 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한 장병들입니다. 내가 명령한다고 따를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해병사단을 동원하면 될 게 아니오? 해병사단을 동원해서 야전군과 함께 쿠데타군을 서울 외곽으로 내몰도록 하시오. 병력 수송은 우리가 책임지겠소."
그 말을 듣자 김성은은 그만 풀썩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장군, 해병사단을 끌어들여 쿠데타군으로 둔갑시키란 말씀입니까. 해병사단을 동원할 경우 쿠데타군에 합류하려 들지언정 동료 해병대를 문책하는 아십니까? 해병대는 단결을 가장 소중히 하고 있는 군대니 말씀입니다."
한데, 박정희가 해병대의 원대복귀엔 한사코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장도영은 창경원에 주둔해 있는 해병여단 사령부로 찾아와 직접 윈대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평상시라면 해병대가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계엄사령관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또 순진하게 명령에 따를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해병대 지휘관들은 숙의 끝에 명령에 따르는 체 흉내만 내기로 했다. 어떻게 했던가? 태반의 해병대 병사들은 동원한 해병대 수송차량 30대에 대당 6명씩의 병사를 태운 다음 포장을 늘리고 철수하는 척만 했던 것이다. 30대의 트럭에 대당 6명씩의 병사를 태워봐야 모두 180명이면 족했던 것이다.
5월 17일 저녁, 창경원 정문 앞에서 30대의 트럭이 열을 지어 김포로 향했다. 누가 봐도 어김없는 해병대의 철수작전이었다. 이렇게 일단 김포로 철수하는 척 장도영의 눈을 속여 180명만 철수시켰던 것이나, 이들은 5월 18일 새벽까지 각개 약진으로 180명 전원이 다시 창경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상황이 유동적이었던 5월 17일 오후 6시경의 일이고. 희극적인 쇼도 벌여야 했던 것이다.
5월 17일 오후 2시 40분경. 김준하, 김남 두 비서관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제1군 사령부였다. 원주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제1군 사령부 안에 있는 미 고문단실로 안내되었다. 거기에는 이한림이 헌병참모를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쿠데타 지휘관들의 정체를 당신들은 알고 있소?"
알고 있느냐 하는 질문 같았다. 두 사람은 얼른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우선 이한림의 위엄에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군복이란 어지간한 사람은 압도해 버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다 어깨에 번쩍거리는 별이라도 달고 있고 보면, 괜히 외경심이 일게 마련이다. 이한림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습이 아니라 영화배우를 연상케 할 정도의 미남이었다. 그런데도 오 세월 지휘관으로서 갈고 닦은 위엄이 몸에 배어 있었던 탓인지 초대면의 보통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위엄에 압도당하기가 일쑤였다. 이한림이 말을 이었다.
"쿠데타는 당연히 진압돼야 하오. 그렇기는 하되 우리는 진압군을 출동시킨다 해도 유혈사태 없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오."
김준하는 간신이 입을 열었다.
"장군님, 여기 윤 대통령 각하의 친서를 휴대해 왔습니다. 각하께 전해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김준하의 안주머니에서 친서를 꺼내 이한림 앞에 놓았다. 이한림은 그러한 김준하를 한번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편지를 집어 들어 알맹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한림은 친서를 읽고 나서도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동안 두사람의 가슴속은 조마조마하게 타들어 갔다. 이한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이윽고 이한림이 입을 열었다.
"잘 알았소. 대통령 각하의 지시에 따르겠다 전해 주시오."
순간,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3시.
한편 제1군 사령부를 방문한 윤보선의 밀사가 미 고문단실에서 이한림과 마주앉고 있는 그 시각. 군사혁명위원회는 삼군 참모총장 회의를 소집했다. 이것이 아마도 세번째의 삼군 참모총장 회의였을 것이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삼군 참모총장 회의를 소집한 것이 <군사혁명을 지지한다>는 그들의 공식적인 지지성명을 얻어내고자 해군 중장 이성호, 공군 중장 김신은 육군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놓고 오라가라 하는 데에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렇다고 <군사혁명위원회의 지시>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육군측에서 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살해해 버릴 계획까지세워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는, (이놈의 쿠데타 분쇄해 버려?)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들이 쿠데타를 분쇄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해군은 그만두고라도 공군에서 전투기 몇 대만 띄워도 고작해야 제6군단 포병단과 해병여단의 탱크 몇 대를 거느리고 있는 쿠데타군쯤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에 분쇄해 버릴 수가 있었다. 참혹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 감정대로 행동하기도 어려웠다. 김신이나 이성호는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이 자리를 잡고 앉자 박정희가 그들의 앞에 나섰다.
"삼군 참모총장의 공개적인지지성명이 늦어져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지지성명을 직접 녹음 방송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이 자리에서 태도를 결정해 성명을 발표해 주십시오."
그는 요청했다. 그들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이 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쿠데타 주체자들이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출동부대의 한 사람으로서 묻겠습니다. 우리의 혁명을 지지하는 겁니까, 아니면 반대하는 겁니까?"
이성호와 김신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장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 모인 삼군 총장은 모두가 혁명을 지지한다고 했잖았소. 그러니지지냐 반대냐 하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젊은 중령들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녹음을 해주시오!"
누군가가 소리쳤다.
"한데, 이런 친구들을 봤나."
그들은 녹음기를 준비해 놓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서 빨리 가서 녹음기를 가져와!"
누군가가 또 소리쳤다.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망할 놈의 자식들, 너희놈들이 강제로 우리한테 지지성명을 얻어내려 해? 그런다고 우리가 너희놈들 강요에 못 이겨 움직일 것 같냐?) 이성호의 얼굴에는 어느 사이엔가 분노가 역력히 어려 있었다. 그는 젊은 중령들의 말투, 행동에 적잖이 분개했던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걸어나갔다. 누구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성호가 일어나 나가자, 잠시 뒤 김신도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돌아갈 때에도 누구도 <안 된다>고 그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이성호와 김신, 이 두 사람은 5월 17일 전혀 없었던 것이다. <쿠데타는 민주주의의 적이다>라는 데 대해서 두 사람의 신념은 일치돼 있었던 것이다.
육군본부 쿠데타 지휘본부에서 앞서와 같은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제1군 사령부 미 고문단실에서 이한림을 만나고 난 대통령 밀사 김준하과 김남은, 헬리콥터 편을 이용 제1군단으로 군단장 민기식을 찾아갔다. 군단장실로 안내된 두 사람이 민기식과 수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민기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면 정권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렇다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과연 옳은 처사라 할 수 있을는지......."
듣자 속으로 (이거 야단났구나) 하고 걱정을 했다. 군단장인 민기식이 쿠데타에는 반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준하는 민기식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점쳐 보았다. 이한림의 출동명령이 있으면 지체없이 출동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얼른 친서를 꺼내 건네 주려는데 야전복 차림의 철모에 별을 하나 단 장군이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그는 민기식 휘하의 사단장인 박춘식(朴春植)이었다. 그는 마치 상급자인 민기식에게 대들 듯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장면 박사 군단장께서는 군의 거사를 지지해야 할 줄로 압니다."
박춘식의 이 한마디로 방안 공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졌다. 김준하는 친서를 내놓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얼른 안주머니에서 친서를 꺼내 민기식의 앞에 놓았다.
"장군께 드리라고 대통령 각하께서 보낸 친섭니다." 민기식은 친서를 찬찬이 읽고 나자,
"잘 알겠소. 대통령 각하께 각하의 뜻에 따르겠다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아주 조용히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김준하는 속으로 (아주 조용한 분이군) 하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기식에 이어 두 사람이 찾아간 두 사람을 맞은 최석은 대통령 친서를 읽고 나자, 그 부리부리한 두 눈을 굴리며 호통치듯이 말했다.
"반란은 진압돼야 하오."
"하지만 장군, 대통령 각하께서는 동족간에 피흘리는 것을 염려하신 나머지 저희들을 장군께......."
"아니 잠깐!"
최석은 김준하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잠깐> 하고 말을 가로막고 도도히 자기 주장을 폈다.
"우리 대한민국 육군사에 쿠데타라는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쿠데타는 당연히 진압돼야 하오."
다시 또 그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려 말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을 염려하고 계시지만, 그런 염려를 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단숨에 엮고난 다음, 한번 숨을 몰아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분쇄하느냐? 의정부, 불광동, 한강 등에 야전군 부대를 출동시켜 서울 일원을 봉쇄한단 말이오. 일주일 또는 열흘만 봉쇄해 놓고 있어 보시오. 서울시내의 반란군은 자연 궤멸되고 만단 말이오. 아시겠소? 그런데 유혈은 무슨 놈의 유혈?"
최석은 아주 자신만만했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두 사람의 반응을 살폈다. 그렇다고 밀서를 전달하는 뭐라 반응을 보이겠는가. 어쩔 수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최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육군의 명예를 더럽힌 쿠데타는 일단 제압하고 나서 그 뒤에 쿠데타군들이 뜻했던 바를 논해야 하는 거요. 대통령 각하께 우리의 입장을 그대로 보고해 주시오."
한편 박임항과 임부택을 찾아가 전달한 윤보선의 밀서에 대한 두 군단장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우리는 설혹 누가 쿠데타를 진압하러 서둘러 출동하라고 명령을 해도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오."
오후 4시라는 이 시간은 확실치가 않다. 다만 관계자들의 기억을 근거로 해서 얘기를 진행시켜 나가기로 한다. 장면의 전속 운전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총리 각하께서는 칼멜수녀원에 은신해 있습니다."
장면의 은신처를 실토했던 것이다. 한창우는 그 즉시로 칼멜수녀원으로 달려가 장면을 만났다. 반가움보다도 울분이 앞섰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숨어 계실 데가 여기밖에 없더란 말씀입니까?"
한창우는 소리를 질렀다. 장면은 대꾸가 없었다. 그저 침통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저희들한테 연락이라도 취해 주셨으면 정권이 무너지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게 아닙니까?"
한창우는 장면을 계속 질책했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통분했던 것이다. 어제는 그만두고라도 오늘 오전중에만 은신처를 알려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기만 했어도 정권유지는 무난했을 것 같았다. 그런 아쉬움이 짙었기 때문에 한창우는 체면불구하고 장면을 몰아세웠던 것이다. 장면은 한창우의 아우성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한창우가 분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천주님의 뜻인지도 모르지. 이게 맹세하거니와 나는 쿠데타를 당해야 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네. 내가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내게 잘못이 있었다면 민주주의대로 할려고 한 잘못밖에 더 있겠나?"
오후 7시.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김종필과 줄곧 행동을 같이하고 있던 최영택은 문득 쿠데타 출동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데타가 벌어진 지 40시간이 넘도록 아직도 쿠데타가 확고하게 굳혀지지를 못하고 있자 출동부대의 사병들 사이에서 은연중 동요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상황실 한켠 구석에서 생각에 잠겨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김종필에게 다가가그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김 형, 출동부대 병사들의 사기를 좀 북돋워 줘야 할 것 같소."
김종필이 번쩍 눈을 떴다.
"최 형, 지금 뭐라고 했소?"
최영택이 경어를 쓴 탓이었을까? 김종필도 경어로 반문했다. 최영택이 김종필에게 경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순간부터였다. 김종필이 쿠데타의 실질적인 제2인자인 이상에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 자신부터 깍듯한 예우를 해야만 여타 동료들도 그 예우에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최영택은 되풀이했다.
"내가 보기엔 출동부대 병사들의 사기가 같습니다. 그러니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단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야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있겠소?"
"혁명군 완장을 만들어서 차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혁명군 완장?"
"혁명군 완장을 만들어서 차게 해주면 나는 다른 병사들하고는 다르다는 긍지가 일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긍지가 일게 되면 사기가 충천해질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김종필은 무릎을 탁 쳤다.
"갑시다, 최 형!"
김종필은 옳다는 판단이 서면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다. 그는 벌떡 일어나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지프를 세운 곳은 을지로 2가에 있는 조그마한 깃발 제조업체였다.
"이 밤 안으로 완장 7천 장만 만들어 주시오."
최영택의 주문에 주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7천 장은 고사하고 7백 장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주인의 대꾸였다. 깃발 제조업체라는 것이 거의가 재봉틀 한두 대 놓고 영업을 하는 영세업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7시라 어느 업체를 막론하고 재봉공을 일찍 시간을 당겨 귀가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일이었기 때문에 주인이 난색을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에 최영택은 손수 지프의 핸들을 잡고 여공을 데려온다, 시장에 가서 닫힌 문을 두드려 광목을 끊어 온다 하면서 한동안이나 법석을 떨어야만 했다. 여공들이 광목을 잘라 완장을 만들고 있는 사이에 최영택은 또 도장공집을 소문해서 도장공을 데려다가 <군사혁명위원회>라는 도장을 새기도록 했다. 그것을 완장에 찍기 위해서였다. 이런 법석을 떨면서 18일 새벽 5시가지 겨우 4천 장의 완장을 만들어 그것을 가져다 출동부대 병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어 차게 했다. 하얀 바탕에 하늘색으로 <혁명군>이라 시뻘건 도장이 찍혀진 완장을 찬 출동부대 병사들의 사기가 금방 치솟아 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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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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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아르메니아 전선
아르메니아 왕위를 빼앗은 파르티아 황제를 쫓아내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다시 로마의 패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명을 띠고 있던 코르불로는 로마에서 전략을 변경했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소식은 오지 않았다. 파르티아 대책의 지휘계통은 여전히 양분된 채였고, 파르티아 왕과의 휴전 교섭조차 시리아 속주 총독인 콰드라투스와 코르불로가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력도 콰드라투스와 코르불로가 양분하고 있었다. 코르불로에게 주어진 군사력은 콰드라투스가 네로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나누어준 2개 군단과 도나우 강 중류의 모이시아에서 동방으로 이동 명령을 받은 1개 군단을 합하여, 3개 군단 1만 8천 명이었다. 여기에 모이시아 군단에 딸린 보조병이 6천 명, 동맹국에서 참가한 병사와 속주민 지원병이 합해서 1만 명 남짓, 이들은 모두 합해도 3만 4천 명밖에 안된다. 하지만 코르불로는 이 3만 4천 명도 전력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시리아 속주에서 온 2개 군단이 도저히그대로는 전쟁터에 내보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유일한 가상적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파르티아 왕국과 대치해 있는 최전선인 만큼, 경제가 발달한 지역인데도 시리아 속주만은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황제 속주'로 분류되어 있었다. 4개 군단이 상주해 있는 곳은 제국 동방에서는 시리아뿐이다. 시리아에 주둔한 4개 군단은 제국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국경 방위라도,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 브리타니아나 북아프리카 사막에서는 야만족을 상대하게 된다. 부족장은 제쳐놓는다 해도, 일반인은 짐승가죽을 걸치고 다니는 야만인이다. 주둔지도 변방의 군단 기지이기 때문에 불편함을 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야만족의 동향은 선진국 군대보다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변경을 지키는 병사들은 늘 긴장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리아만은 달랐다. 당시 로마 제국의 3대 도시는 세계의 수도라고 일컫는 로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였다.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다. 안티오키아도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다. 게다가 이 '변경'은 국경인 유프라테스 강 동쪽에 사는 사람들과의 교역으로 번영을 누려온 것이 특징이다. 적이라 해도 일반인에게는 교역 상대다. 쳐들어 왔을 때만 '적'으로 일변한다. 게다가 로마 시민으로 이루어진 4개 군단의 시리아 주둔군은 번영을 만끽하고 있는 상업도시 안티오키아 안에 병영을 두고 있었다. 이 지방에서도 '평화'는 벌써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군단병의 사기가 떨어진 것은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이 초래한 결과이기도 했다. 현지인과 손잡고 장사에 열을 올리는 병사들까지 있었다.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고 시리아에 근무한 지도 오래인 콰드라투스 총독과는 달리, 아직 50대 중반이고 문자 그대로 변경에서 온 코르불로는 이런 상태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전임자는 라인 강 방위선중에서도 지리적 조건과 기후 조건이 가장 열악한 저지 게르마니이다. 라인 강 중류에서 하류에 걸쳐, 육지만이 아니라 바다에서도 침입해오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이 무인은 동방에 부임하자마자, 서방과 질적인 차이는 있지만 동방에도 악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게 분명하다. 소아시아에서 아르메니아까지는 험준한 산악지대가 이어져 있고, 시리아 동쪽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는 바다 같은 사막이 가로놓여 있었다.
남프랑스 속주 출신이지만, 무인에게는 좋은 시절이었던 옛날 로마의 장수를 연상시키는 코르불로는 우선 안티오키아의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2개 군단 병사들이 지붕 밑에서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막사가 아니라 천막 생활을 강요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건강에 문제가 있는 병사나 제대가 가까워진 노병들을 군무에서 제외시켜 후방에 배치했다. 로마에서는 17세부터 45세까지 현역으로 복무하도록 규정되어있다. 노병이라 해도 40대 중반에 불과하다. 다만 이것은 일반 군단병한테만 적용된 연령 제한이고, 백인대장 이상의 지휘관들은 연령 제한을 받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온 2개 군단을 선별하는 작업이 다 끝났을 무렵, 모이시아 속주에서 동방으로 이동 명령을 받은 도나우 강 방위군 1개 군단이 도착했다. 같은 시기에 동맹국에서 참가한 병사들도 도착했다. 다국적군으로 싸우는 것이 로마군의 전통이지만, 로마군의 본체는 군단병이라고 불린 중장비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국 참가병은 기병이거나 궁수 같은 경장비 보병이다. 사령관 코르불로는 부적격자를 후방 근무로 돌린 뒤에 생긴 구멍을 카파도키아나 갈라티아의 산악지대에서 온 동맹국 참가병으로 보충했다지만, 그래도 황제한테서 받은 3만 4천 명보다는 줄어들었을게 분명하다. 저지 게르마니아군을 지휘할 당시에는 4개 군단과 보조병을 합하여 5만 명 가까운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대국 파르티아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전선에 게르마니아의 야만족을 상대할 때보다 적은 병력밖에 주지 않다니, 로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코르불로는 생각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라면 당장 자비로-자기 돈이라 해도 결국 남에게 빌린 돈이지만-새 군단을 편성하여 재빨리 문제를 해결했겠지만, 세상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을 허용하는 공화정 시대가 아니었다. 제정시대에는 최고사령관인 황제와 휘하 사령관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화고해져 있었다. 코르불로는 수중에 있는 병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서 네로와 원로원의 '공방'이 다소 희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서기 57년부터 58년에 걸친 겨울, 코르불로는 모든 장병을 험준한 산악지대로 데려갔다. 맹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다. 다만 지형과 기후가 험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코르불로는 소아시아 동쪽 끝에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산악지대를 훈련장으로 골랐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로마의 위세를 과시하는 동시에, 맹훈련을 끝낸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아르메니아 영토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발 2천 미터에 이르는 고지대에서는 천막을 치려 해도 우선 지표면을 덮고 있는 얼음을 깨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동상 환자가 속출하고, 야간에 보초를 서다가 동사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사령관 코르불로는 일반 병사들과 같은 군장 차림으로 훈련중인 병사들을 시찰하고 다녔다. 로마의 군장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드러낸 갑옷이다. 그 갑옷만 입은 채 눈과 얼음과 삭풍 속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다. 낙오자가 많아서, 이미 선발 과정에서 줄어든 병력이 더욱 줄어들었다. 키가 남달리 크고 우람한 체격을 가진 코르불로는 절대로 난폭한 행동은 하지 않는 사내였고, 말수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찬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가기만 해도 그 자리의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다른 군단에서는 지각이 두 번까지 용납되었지만, 코르불로의 군단에서는 한번만 지각해도 처벌을 받았다. 군단기를 버리고 달아나면 즉결처분을 당했다. 이렇게 맹훈련을 받으면 탈영병이 아노게 마련이다. 다른 군단에서는 탈영했다가도 돌아오면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코를불로의 군단에서는 돌아와도 사형을 면치 못했다. 이런 맹훈련을 받은 결과, 봄이 될 무렵에는 안티오키아의 도시 생활로 해이해져 있던 병사들까지도 정예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전사로 탈바꿈했다.
서기 58년 5월, 사령관은 병사들에게 천막을 걷으라고 명령했다. 54년 말에 동방 전근을 명령받은 코르불로에게는 3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다. 하지만 코르불로는 병력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가면서도, 군사밖에는 생각지 않는 군인은 아니었다. 부임하자마자 파르티아 왕과 휴전을 교섭할 때, 시리아 총독 콰드라투스는 하급 장교를 대리로 보낸 반면, 코르불로는 고급 장교를 보냈다. 코르불로는 상대의 감정을 배려해줌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줄도 아는 남자였다. 아르메니아로 진격해 들어간 뒤에도 그는 당장 전투에 돌입하지 않았다. 선두에 서서 말을 몰면서도 그는 전투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과 대화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저울질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로마의 패권 아래 들어간 뒤에도 지리적, 문명적 조건 때문에 항상 로마파와 파르티아파가 대립한 나라다. 파르티아 왕제가 왕위를 빼앗은 뒤로는 당연히 파르티아파가 우세해졌다. 아르메니아 영토로 진격하는 것은 적지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징였다. 코르불로는 3만 명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파르티아-아르메니아 연합군을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코르불로는 파르티아군이 본격적으로 출동하기 전에 파르티아 왕제인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와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소규모 접전을 몇 차례 치른 뒤, 코르불로는 티리다테스에게 사절을 보내 회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회담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젊은 왕 티리다테스는 회담 요청을 받아들으고도 막상 때가 되면 망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르불로는 자신의 제안을 사절에게 주어 왕에게 보냈다. 총사령관을 전선으로 보낼 때는 백지 위임장을 주는 것이 로마의 전통이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코르물로의 제안은 실로 대담한 것이었다. 코르불로는 동방에서 3년을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동안 그는 파르티아 왕이 아르메니아 왕위를 빼앗은 진짜 이유를 찾고 있었다.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서기 51년에 파르티아 왕위에 오른 볼로가네스는 첩의 자식이었다. 티리다테스는 그의 동생이지만 본처 소생이다. 하지만 이 왕자는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 첩의 소생이라도 나이가 위인 형에게 파르티아 왕위를 양보했다. 이에 감동한 형은 동생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탔다. 파르티아 왕의 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아르메니아 왕위밖에 없었다. 그래서 즉위한 이듬해인 서기 52년에 로마가 승인한 왕이 있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임명한 시리아 총독이 재빨리 파르티아군을 맞아 싸울 태세를 취했기 때문에, 파르티아는 겨울에 군대를 철수한 채 군사행동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마 쪽에 약점이 보이면 파르티아는 그것을 놓친 적이 없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죽음과 네로의 즉위가 파르티아에는 기회로 여겨졌다. 서기 54년, 파르티아군은 다시금 행동을 개시한다. 이번에는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약체인데다 백성한테도 인기가 없었던 왕을 몰아내고 티리다테스를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이런 사정을 코르불로는 알아차렸다. 우선 로마 쪽에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힐 만한 카드가 없었다. 게다가 파르티아왕은 로마와 싸울 생각이 전혀 없고, 동생을 위해 아르메니아 왕위를 확보하는 것만이 목적이다. 코르불로는 이것을 이해했다. 코르불로가 파르티아 왕과 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에게 제안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로마 황제 네로에게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어떠냐, 티리다테스가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로마 황제한테 아르메니아 왕위를 선물로 받는 게 어떠냐. 로마 황제로부터 왕위를 하사받는 것은 로마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뜻이고, 오리엔트인의 생각으로는 종속을 의미한다. 이것은 코르불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파르티아가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한다면 로마는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고 파르티아 왕에게 전했다.
루쿨루스의 원정과 폼페이우스의 재패 이후 120년이 넘도록 지속된 로마의 아르메니아 정책을 180도로 전환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는 대담한 제안이었다. 코르불로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현지 사정을 제 눈으로 본 코르불로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로마를 좋아하는 왕자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계속 앉혀두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꿰뚫어 본 게 아닐까. 나중에 생각해보면 선견지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제안은 그러나 당장은 실현되지 않았다. 볼로가세스에게는 동생을 로마에 종속시킬 수 없다는 파르티아인의 긍지가 있었다. 또한 그런 일을 인정하면 파르티아 국내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날 게 뻔했다. 볼로가세스로서는 그것도 두려웠을 것이다. 코르볼로에게 돌아온 것은 제안을 거절한다는 회답이었다. 코르불로에게는 이제 군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사령관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향했다. 코르불로의 목표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인 아르탁사타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수도 공략
흑해와 카스피 해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아르탁사타는 옛 소련의 남쪽 끝에 있고, 지금은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도 이 지방에는 아르메니아인이 많이 살지만, 2천 년 전에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로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르불로는 단숨에 아르탁사타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마주치는 각지의 성채를 각 부대에 공략 목표로 할당하고, 융단 폭격처럼 성채를 격파하면서 진격했다. 마치 확대된 전선 자체가 전진을 계속하여, 아르탁사타를 향해 반원형의 고리를 좁혀가는 것 같았다. 아르탁사타를 쉽게 공략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게 분명하다. 실제로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는 수도 방위를 일찌감치 포가하고, 로마군과 한번 싸워보지도 않은 체 도망쳤다. 코르불로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르탁사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로마군이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를 점령했다는 소식은 그해 말에 로마에도 전해졌다. 시민들은 기뻐 날뛰었고, 로마군 최고사령관인 네로에게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보냈다. 제정 로마에서는 승자의 영광에 빛나는 것은 전선의 사령관이 아니라 황제였다. 네로와 원로원,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이제 아르메니아도 다시 로마의 패권 안으로 들어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선의 코르불로는 그처럼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을 수 없었다. 도망친 티리다테스의 배후에 있는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가 이대로 물러설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르불로는 전투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공략한 아르탁사타도 지키고 싶었지만, 이곳 받위에 할당하기에는 휘하 병력이 너무 적다는 점을 고려하여, 주민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않더라도 시가지는 전부 불태우기로 했다. 적이 돌아와도 금방 사용하 f수는 없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서기 58년부터 59년에 걸친 겨울을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에서 보낸 로마군은 봄이 오자 시가지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목적지는 아르메니아 왕국 제2의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였다.
티그리스 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는 티그라노케르타는 오늘날에는 터키 영토로 되어 있다.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은 서쪽으로 흑해, 동쪽으로는 카스피 해, 남쪽은 티그리스 강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왕국이었다. 아르탁사타에서 남서쪽의 티그라노케르타까지는 직선거리로 800킬로미터나 된다. 사령관의 책무 가운데 하나인 군량 확보는 여간 어렵지 않았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다. 코르불로의 전략은 아르탁사타를 공략하러 갈 때와 마찬가지로 융단 폭격식이었다. 그리고 역시 왕국 제1의 수도인 아르탁사타를 함략시킨 것은 선전 효과가 있다. 수비군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왕국 제2의 수도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점령할 수 있었다. 로마군은 아르메니아 왕국의 주요 도시를 두 개나 공략하여,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로마의 중앙정부가 강경한 태도로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네로는 아우구스투수 방식아라도 불러도 좋은 종래의 동방 적책에 따라, 아르메니아 왕위에 로마가 고른 왕자를 앉히기로 결정했다. 선택된 왕자의 이름은 티그라네스였다. 티그라네스는 오리엔트의 모든 왕가와 혈연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혈통에는 문제가 없지만, 로마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과는 친숙하지 않은 왕자였다. 기반도 없고 자기편도 없는, 말하자면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왕이다. 네로는 티그라네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1천 명의 로마 군단병과 1천 명의 보조병, 그리고 500명의 기병을 떼어 티그라네스에게 주라고 코르불로에게 명령했다. 이 정도 병력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네로는 22세가 되도록 군사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조치는 1년도 지나기 전에 파탄이 나지만, 콰드라투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시리아 속주 총독에 코르불로를 임명해놓은 것은 네로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네로는 또다시 지휘계통을 이원화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이 시점까지 네로의 통치는 '네로의 초기 5년'이라 하여, 폭군으로만 알려진 네로가 선정을 베푼 시기로 되어 있다. 그가 선정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세네카와 부루스가 잘 보좌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정설이다. 더구나 이렇게 말한 사람이 오현제 가운데 하나인 트라야누스 황제였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지만, 나에게는 의문이다. 선정이라는 것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임자들의 공과 행운이 크게 작용했다. 이 시기의 로마 제국에는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남긴 조직과 인재가 건재했고, 덕분에 제국 자체도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제국의 안전보장에서 중요한 과제는 아르메니아 문제 정도였고, 이것도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지만 네로가 군사전략상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해결하는데 10년 세월이 걸렸다. 이 5년 동안의 통치를 실제로 담당한 사람이 정말로 세네카와 부루스라면, 근위대를 네로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최대 임무였던 부루스는 제쳐두고라도, 세네카의 외교와 군사적 재능에는 합격점을 주기 어렵다.
철학자이자 문인인 세네카는 군사도 외교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황제 보좌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직접 경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두른다는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현대의 우리도 대통령이나 수상을 지낸 경험이 없는 사람을 대통령이나 수상으로 선출하지 않는가, 세네카는 철학자나 비극작가나 풍자작가로는 일류였지만, 정치에서는 이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류'는 돌발사태에 대처해야할 경우를 제외하면 웬만큼은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록을 남기는 사람은 지식인이자 문자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권력과는 관계가 없는 계층에 속한다. 따라서 자기와 동류인 지식인이자 문인한테는 무의식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마련이다. 신랄한 타키투스조차도 세네카한테는 너그러운 걸 보면 재미있다. 나는 '네로의 초기 5년' 동안 세네카가 네로에게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일찌감치 벗어난 사실이 보여주듯, 네로는 스승한테도 일찌감치 떠나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바꿔 말하면 '초기 5년' 동안에도 네로는 상당 부분 제 머리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행동에 옮긴 게 아닌가 싶다. '초기 5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건은 스승 세네카의 영향력이 건재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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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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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영혼 - 작은나무(리틀 트리) - 체로키 족
"다행히 당신이 영혼으로 이르는 문을 열었을 경우 이때부터 당신은 이해의 길에 들어서게 되며..."
실개천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숨쉬고 있다. 만일 당신이 거인이라서 실개천 구석구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면, 당신은 그곳이 거대한 생명의 바다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바로 그 거인이었다. 키가 육십 센티가 넘는 나는 거인처럼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실개천 물이 휘어도는 작은 물웅덩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개구리들이 알을 까놓았다. 속에 검은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는 투명한 덩어리들... 그 점들 하나하나는 부화되어 밖으로 나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실개천 속에는 열목어들이 수면을 가로지르며 흩어지는 물방개들을 사냥하기 위해 번개처럼 날쌔게 움직인다. 물방개를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그것은 정말로 짙은 향내를 발산한다. 어느 날 나는 물방개를 잡느라 한나절을 고스란히 바쳤다. 그렇게 애썼지만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건 몇 마리 되지 않았다.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향기로운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물방개를 갖다 드렸다. 할머니는 잿물비누를 만들 때도 늘 거기다 인동꽃을 섞으시곤 했으니까. 내가 그걸 갖다 드리자 할머니는 나보다 더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이렇게 향기로운 냄새는 생전 처음 맡아 본다며, 향기나는 물방개가 있다는 걸 왜 이제까지 잊고 지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저녁식사 시간에 할머니는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할아버지께 물방개 얘기를 꺼내셨으며 그렇게 향내가 짙은 물방개는 생전 처음 본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도 얘기를 들으시더니 놀라운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할아버지께 그 물방개를 갖다 드리고 냄새를 맡아 보시게 했다. 할아버지는 칠십 평생을 살았지만 그렇게 희한한 냄새는 처음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좋은 것을 얻게 되면 먼저 곁에 있는 사람과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좋은 것은 말없이 퍼져가게 된다." 라고 하시면서 내가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나는 하루 종일 실개천 속을 첨벙거리고 다녔기 때문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것에 대해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체로키 부족은 아이들이 숲 속에서 아무리 심한 장난을 치고 놀아도 절대로 그걸 갖고 나무라는 일이 없었으니까. 나는 때로 실개천 위쪽으로 한참 거슬러올라가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다가 그 비밀장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은 실개천 너머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가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월계수나무들로 빙 둘러싸여 있었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으나 사방에 풀들이 자라고, 특히 허리가 굽은, 향내나는 늙은 고무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그곳을 처음 발견한 순간 나는 그곳을 나만의 비밀장소로 정했으며 그 뒤로도 곧잘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으로 갈 때면 나는 으레 늙은 개 마우드를 데리고 가곤 했다. 마우드 역시 그곳을 좋아했으며, 우리는 늙은 고무나무에 기대 앉아 사방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가 하면 또 여기저기를 바라보곤 했다. 마우드는 그 비밀장소에만 가면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우드 역시 그곳이 비밀장소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늦은 오후, 나와 마우드가 고무나무 아래 앉아 여기저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내 비밀장소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 비밀장소가 그곳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신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말이고 나한테 한 마디 건네셨을 테니까. 할머니는 속삭임 소리보다도 더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숲 사이를 걸어다니실 수 있었다. 뒤를 따라가 보니 할머니는 식물 뿌리를 캐시는 중이었다. 나는 할머니 일을 거들어 드리기 위해 곧장 할머니를 따라잡았다. 나와 할머니는 바닥에 쓰러진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뿌리들을 분류했다. 나는 비밀을 지키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서 결국은 참지 못하고 할머니께 내 비밀장소에 관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할머니는 내 얘기를 들으시고도 전혀 놀라지 않으셨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놀라게 했다.
할머니는 체로키 부족의 사람들은 모두가 비밀장소를 하나씩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점에 있어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할아버지의 비밀장소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다만 숲 속 오솔길을 한참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산꼭대기 어디쯤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사람은 누구나 비밀장소를 하나씩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사람들을 붙잡고 일일이 물어본 적이 없어서 자신할 순 없지만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나도 비밀장소를 하나 갖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마음의 하나는 육신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과 관계된 것이다. 우리는 그 마음을 사용해 먹을 것이나, 잠잘 곳, 그리고 그밖에 우리의 육신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남녀가 짝을 짓고 아이를 갖는 등의 행위를 하는 데도 그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존해 나가려면 당연히 그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일들과 전혀 무관한 또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것을 바로 영적인 마음, 곧 영혼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삶을 담당하는 마음만을 발달시켜 탐욕스럽고 천박한 생각에만 몰두한다면, 또 만일 우리가 항시 그 마음을 통해 남을 공격하고 남에게서 물질적인 이익을 취할 방법을 계산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마음은 히코리 열매의 크기로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죽으면 우리 육신의 삶과 관계된 마음도 함께 소멸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평생 동안 육신의 마음으로 삶을 이끌었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히코리 열매만한 영혼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다른 모든 것이 죽을 때 결국 살아남는 것은 영혼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 다음에 또 다른 육체로 태어날 때 - 모든 인간은 다시 태어나게끔 되어 있다 - 당신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히코리 열매만한 영혼을 갖고 태어나게 된다. 만일 다시 태어나서도 육신의 삶과 관계된 마음이 여전히 당신의 인생을 지배하게 된다면 영혼은 다시 완두콩 크기만큼 쪼그라들어 버리거나 아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럴 경우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 그 결과 당신은 살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죽은 인간이 된다. 할머니는 우리가 죽은 인간들을 손쉽게 가려낼 수 있다고 하셨다. 죽은 인간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여자를 볼 때도 추잡한 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타인을 볼 때도 나쁜 면밖에 볼 줄 모르고, 나무를 볼 때도 아름다움은 잊은 채 목재나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밖에 볼 줄 모르게 된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세상을 걸어다니지만 사실은 죽은 인간들이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근육과 똑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자주 사용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강해진다. 영혼을 크고 강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를 갖는 것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언제까지나 육신의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계속하고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한, 영혼으로 이르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다행히 당신이 영혼으로 이르는 문을 열었을 경우 이때부터 당신은 이해의 길에 들어서게 되며, 당신이 이해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당신의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해와 사랑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함께 따라가는 것들이다. 그 둘은 다른 것일 수가 없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사랑하는 척하는데, 이런 이율배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랑과 이해가 따로일 수가 없다. 나는 앞으로 내가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리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히코리 열매의 크기만한 영혼을 갖고서 삶을 살아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영혼이 더욱 크고 깊어지게 되면 어느 날엔가 내 과거의 육신들이 거쳐온 삶의 과정을 남김없이 알게 될 것이며 차츰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내 비밀장소에서 그러한 과정의 일부를 엿볼 수 있으리라고 하셨다. 얼음이 풀리고 봄이 되어 만물이 탄생할 때면(그리고 하나의 생각이 탄생할 때도 그렇지만, 모든 것이 새로 탄생할 때는 항시) 거기에는 당연히 진통과 소동이 뒤따른다. 피와 고통 속에서 아이가 탄생하듯이 봄에는 봄의 폭풍우가 찾아오기 마련인 것이다. 할머니는 그러한 폭풍우는 영혼이 다시 물질적인 형태 속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소동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여름이 오면서 우리의 삶은 성숙 단계에 이르게 되고, 다시 가을이 그 뒤를 이으면 우리는 나이가 들어 늙은이가 된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우리의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가리라는 늙은이들 특유의 느낌을 갖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감정을 향수 또는 슬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윽고 겨울이 되면 우리의 육신이 죽듯이 세상 만물은 죽거나 또는 죽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봄과 더불어 어김없이 다시 소생한다. 할머니는 체로키 부족의 사람들은 그러한 이치를 알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그러한 이치를 터득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때가 되면 내가 내 비밀장소에 있는 향기로운 고무나무 역시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다.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나무의 영혼을... 할머니는 할머니의 아버지가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아버지 이름은 '갈색매(브라운 호크)'였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차츰 세상 만물을 깊이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번은 할머니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갈색매는 마음의 산에서 자라는 흰 떡갈나무들이 몹시 흥분해 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갈색매는 평소에 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또 흰 떡갈나무 숲으로 자주 산책을 다녔다. 그 나무들은 키가 크고 줄기가 곧았으며 무척 아름다웠다. 또한 이기적이지 않았다. 산에서 사는 뭇짐승들의 먹이를 대주는 감나무나 히코리 나무, 밤나무들이 자기네들 틈에서 한데 어울려 살도록 자리를 내줄 만큼 마음이 넓고 너그러웠다. 이렇게 이기적이지 않은 태도를 지닌 탓으로 떡갈나무들은 하나의 영혼을 갖게 되었고, 그 영혼은 크고 강해졌다. 할머니의 아버지 갈색매는 흰 떡갈나무들이 너무나 걱정이 되어 밤에도 나무들 주위를 거닐곤 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닥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해가 산 능선 위로 고개를 내밀 때쯤 해서 갈색매는 백인 벌목꾼들이 흰 떡갈나무 숲을 분주히 오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베어낼 나무마다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하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나무를 베어낼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갈색매의 말에 의하면 얼굴 흰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자 흰 떡갈나무들은 슬피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갈색매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갈색매는 주의 깊게 벌목꾼들을 지켜보았다. 다음날 그들은 차가 다닐 수 있게 떡갈나무 숲이 있는 곳까지 도로를 닦았다. 갈색매는 체로키 부족에게 이 사실을 전했으며 이에 그들은 흰 떡갈나무들을 위기에서 구해 주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밤에 벌목꾼들이 산을 떠나 읍내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은 산으로 몰려가 도로를 마구 파헤치고 또 차가 다닐 수 없도록 도로 한복판에 깊은 구덩이를 파놓았다.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이 일에 힘을 합했다. 이튿날 아침 다시 산으로 올라온 백인 벌목꾼들은 망가진 도로를 고치느라 하루를 다 허비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체로키 사람들은 다시 도로를 파헤쳐 버렸다. 이런 일이 이틀이나 더 계속되자 참다 못한 벌목꾼들은 총을 든 경비를 세워 밤에도 도로를 지키게 했다, 그러나 몇 사람이서 모든 도로를 다 경비할 순 없었으며, 체로키 사람들은 감시의 눈이 닿지 않는 곳마다 골라가며 나타나서 도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몹시 힘겨운 싸움이어서 며칠을 하다 보니 체로키 사람들도 지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벌목꾼들이 도로를 고치고 있는데 갑자기 거대한 흰 떡갈나무 한 그루가 그들이 몰고온 차 위로 쓰러져 버렸다. 그 바람에 노새 두 마리까지 깔려 죽고 차는 완전히 파손되었다. 그 흰 떡갈나무는 아직 싱싱하고 건장해서 전혀 쓰러질 이유가 없었는데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벌목꾼들은 도로를 내는 일을 포기했다. 거기다 봄비마저 내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달이 꽉 차 환한 보름달이 되었을 때 흰 떡갈나무들은 노래를 부르고 서로서로 가지를 비벼댔으며 체로키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무들은 다른 떡갈나무들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그 흰 떡갈나무를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는 그때 크나큰 감동을 받아 그곳의 산을 떠난 다음에도 그 감동이 오래도록 마음 속에서 메아리쳤다고 했다. 할머니는말씀하셨다. "작은 나무야, 얼굴 흰 사람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될 테니 이런 얘기는 그저 가슴 속에만 묻어 두거라. 하지만 너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너한테 얘기해 주는 거란다." 그제서야 나는 우리가 벽난로를 지필 때 영혼이 떠난 통나무만을 사용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숲의 생명에 대해서 눈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산의 생명에 대해서도.
할머니는, 갈색매가 그렇게 깊은 이해의 경지에 다다랐으므로 그분이 강해졌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고 했다. 그래서 갈색매는 다음 생을 육신의 삶 속에서도 깊은 이해심을 갖고 살아가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기도 머지않아 자기의 아버지만큼 강해지기를 소망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되면 할머니는 그분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두 분의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게 될 테니까.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이해의 경지에 많이 접근하고 있다고 하셨고, 두 분의 영혼은 항시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늘 함께 머물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머니께 여쭤 봤다. 나 또한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지를. 그래서 나만 홀로 뒤에 남겨진 채 잊혀진 아이가 되는 일은 없겠는지를. 할머니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산길을 걸어내려오기만 했다. 이윽고 할머니는 입을 열어 나더러 항시 이해하려고 애써 보라고 하셨다. 나 역시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어쩌면 내가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 할머니보다 더 앞설 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나는 세상에서 누구를 앞서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고 그저 앞서 가는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로만 뒤쫓을 수 있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뒤에 홀로 남겨져 잊혀진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쓸쓸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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