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9호 - 2024.06.21. 금요일(음력 : 05.16)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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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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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적이어서 해로울 것은 없다. 나중에도 얼마든지 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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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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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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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와 ‘사스’
며칠 후 메르스 사태 종식을 공식 선언할 것이라고 한다. 메르스 감염자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됐다는 소식이 보도될 무렵, 왜 SARS는 ‘사스’인데 MERS는 ‘메르스’로 읽느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SARS, MERS는 각각 이 질환들의 공식 명칭인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과 ‘중동 호흡기 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의 영어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약자로부터 온 말이다. 영어 약자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유엔(UN)’이나 ‘아이엠에프(IMF)’처럼 알파벳 이름을 낱낱이 나열하는 것과 ‘유네스코(UNESCO)’처럼 철자를 연결해서 하나의 단어처럼 읽는 방식이다. 이 중 어느 것을 택할지는 대개 영어의 관례를 따른다.
SARS와 MERS는 모두 한 단어처럼 발음된다. 이에 SARS는 영어 발음에 따라 ‘사스’로 적게 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원칙에 따르면 MERS는 ‘머스’로 적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처음 우리말에 들어올 때 관계 기관에서 ‘메르스’로 표기를 했고, 그것이 언론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원칙에 맞지 않는 표기가 굳어진 것이다. 이미 ‘메르스’로 표기가 통일된 뒤에는 ‘머스’로 되돌리는 게 불가능하여 관용 표기인 ‘메르스’를 추인하게 되었다.
그러니 외국어에서 온 말은 처음 들어올 때 올바른 표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 ‘바흐’나 ‘고흐’의 경우에도 이 말을 쓰기 시작할 초기에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바하’ ‘고호’라고 표기했던 것이 아직도 일부 쓰이고 있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치맥’ ‘치느님’
많은 사람들이 ‘치킨’을 무척 좋아한다. ‘치맥’과 ‘치느님’이라는 말이 새로 만들어져 쓰일 정도이다. ‘치맥(치킨과 맥주)’은 ‘치킨’과 ‘맥주’을 줄인 말이고, ‘치느님(치킨을 하느님처럼 숭배하는 일)’은 ‘치킨’과 ‘하느님’을 합성한 말이다. 그런데 둘 모두 우리말의 어법에 다소 어긋난다.
‘치맥’은 ‘치킨’과 ‘맥주’ 각각의 첫 음절을 따서 만든 준말이다. 이런 준말을 ‘두자어’라 한다. 우리말에서는 일반적으로 한자어 각각의 첫 음절을 따서 두자어를 만든다. ‘노동조합(勞動組合)’에서 ‘노조’라는 두자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뜻글자인 한자로 이루어진 한자어에서 첫 음절을 따서 만들어 냈기 때문에 두자어의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치킨’은 한자어가 아닌 외래어이다. 그 의미도 쉽게 짐작할 수 없다. ‘프로필 사진(profile寫眞)’의 두자어인 ‘프사’도 그런 예이다.
‘치느님’은 ‘치킨’의 앞부분인 ‘치’와 ‘하느님’의 뒷부분인 ‘느님’을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이런 말을 ‘혼성어’라 한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이런 방식의 합성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다. 이는 영어권에서 유래한 합성 방식이다. ‘스모크(smoke)’의 앞부분과 ‘포그(fog)’의 뒷부분을 합성한 ‘스모그(smog)’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말에서는 이러한 합성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 또한 짐작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고기느님(고기+하느님)’ ‘유느님(유재석+느님)’의 ‘~느님’류 혼성어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새말의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어 사람들 간에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원활하려면 우리말의 어법을 고려해 새말을 만드는 게 좋겠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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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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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수락산하변 5 - 천상병
우리집도 초가요 옆집도 초가야
우리집 주인은 서울 백성
옆집 사람과는 인사한 적이 없다.
길을 건너고 대하고 있으니
옆집의 위치는
아프리카 대륙이다.
우리집에는 주인말고도 세 가구가 있다.
그러니 인구밀도가 국제적이다.
무려, 열네 사람이나 되니.
우리집은 한 마리밖에 없는 개를 팔다니
신문에 나는 개발도상국가인가?
옆집은 TV 안테나가 섰으니
선진국이다.
나는 우리집 주인의 이름도 알고
친절하기가 극진하지마는
옆집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인가?
∼∼∼∼∼∼∼∼∼∼∼∼∼∼∼∼∼∼∼∼∼∼∼∼∼∼∼∼∼∼∼∼∼∼∼∼
일출 - 한용운
어머님의 품과 같이
대지를 잠재우던 어둠의 장막이
동으로부터 서으로
서으로부터 다시 알지 못하는 곳으로
점점 자취를 감춘다.
하늘에 비낀 연분홍의 구름은
그를 환영하는 선녀의 치마는 아니다.
가늘게 춤추는 바다 물결은
고요한 가운데 음악을 조절하면서
붉은 구름에 반영되었다.
물인지 하늘인지
자연의 예술인지 인생의 꿈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햇님의 얼굴은
거룩도 하고 감사도 하다.
그는 숭엄.신비.자애의 화신(化身)이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바라보는 나는
어느 찰나에 햇님의 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데서인지 우는 꾸꾸기 소리가
건너 산에 반향된다.
∼∼∼∼∼∼∼∼∼∼∼∼∼∼∼∼∼∼∼∼∼∼∼∼∼∼∼∼∼∼∼∼~~~~∼∼
따알리아 - 정지용
가을 볕 째앵 하게
내려 쪼이는 잔디밭.
함빡 피어난 따알리아.
한낮에 함빡 핀 따알리아.
시약시야, 네 살빛도
익을 대로 익었구나.
시약시야, 순하디순하여다오.
암사심 처럼 뛰여 다녀 보아라.
물오리 떠 돌아 다니는
흰 뭇물 같은 하늘 밑에,
함빡 피어 나온 따알리아.
피다 못해 터져 나오는 따알리아.
~~~~~~~~~~~~~~~~~~~~~~~~~~~~~~~~~~~~~~~~~~~~~~~~~~~`
공자의 생활난 -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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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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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지재(七步之才)
七:일곱 칠. 步:걸음 보. 之:갈 지(…의). 才:재주 재.
[동의어] 칠보재(七步才), 칠보시(七步詩).
[유사어] 의마지재(倚馬之才), 오보시(五步詩).
[출전]《世說新語》〈文學篇〉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라는 뜻으로, 아주 뛰어난 글재주를 이르는 말.
삼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위와(魏王) 조조(曹操)는 문장 출신이었지만 건안(建安) 문학의 융성을 가져왔을 정도로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비(丕:186~226)와 셋째 아들인 식(植)도 글재주가 출중했다. 특히 식의 시재(詩才)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식을 더욱 총애하게 된 조조는 한때 비를 제쳐놓고 식으로 하여금 후사(後嗣)를 잇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비는 어릴 때부터 식의 글재주를 늘 시기해 오던 차에 후사 문제까지 불리하게 돌아간 적도 있고 해서 식에 대한 증오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조조가 죽은 뒤 위왕을 세습한 비는 후한(後漢)의 헌제(獻帝:189~226)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220~226)라 일컫고 국호를 위(魏)라고 했다.
어느 날, 문제는 동아왕(東阿王)으로 책봉된 조식을 불러 이렇게 하명했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번치 못할 것이니라.”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자두연두기)]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심히 핍박(逼迫)하는가’라는 뜻의 칠보시(七步詩)를 듣자 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주] 이후 ‘자두연두기’ 약하여 ‘자두연기’는 ‘형제 혹은 동족간의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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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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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26
사람은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 심지어 자기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재산을 모조리 파괴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이기주의자는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피해를 입히려고 한다.
27
본질적이고 불가피한 고통의 원천은 바로 전쟁이다. 현실에서 전쟁의 형태는 아주 참혹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본능적으로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적이나 사회적으로 고통에 저항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간구한다. 하지만 고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28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지위는 사회적인 기관을 운영하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나 지위는 인습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가식적인 면이 많다. 따라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꼭 진정한 존경일 수는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은 지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지위에 의존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한편의 희극에 불과하다.
29
명예는 누구나 그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우리는 자신이 사회의 유용한 일원이며 당당한 인격을 갖추고 공동생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훌륭하게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 한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런 과정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명예는 그렇게 싹트는 것이다.
30
내 영혼의 버팀대가 될 수 있는 것은 나의 의지와 결심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나는 행운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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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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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9
오후 2시.
제1군 사령부 사령관실. 이한림이 참모회의를 소집한 것이 이 시간이었다. 서울로 보낸 밀사한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는 참모회의를 소집해서 참모들의 의견을 물었다.
"제관들, 군사 쿠데타에 우리 것인지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해 주기를 바라겠소. 우리 제1군은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오?"
"야전군의 동의 없는 군사혁명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야전군 사령부로 옮겨 오지 않는 한 혁명을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유혈사태만은 절대로 막아야 합니다. 유혈사태를 일으키게 되면 내란으로 확대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도 어렵습니다."
"유혈방지에는 동의하지만 쿠데타는 지지할 수 없습니다."
참모회의의 대체적인 흐름은 쿠데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유혈을 방지해야 한다면서 쿠데타는 써야 한단 말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쿠데타를 분쇄하자면 어쩔 수 없이 진압군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유혈사태를 빚지 않고 과연 쿠데타군을 진압시킬 수가 있을까?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 나자 이한림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야전군의 태도 결정을 보류해 두겠소."
서울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또 서울로 밀파한 밀사가 어떤 회신을 가지고 오는지 그 결과를 봐 가지고 이한림은 그 자신의 결단을 내릴 결심을 했다.
청와대를 물러나온 장도영은 다시 미8군 사령부로 매그루더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쿠데타측의 요구대로 내가 계엄사령관직 취임을 승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쿠데타를 진압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데 제너럴 장이 계엄사령관직 취임을 승락해 가지고 뭘 어쩌겠다는 거요?"
매그루더는 다분히 힐난하는 말투였다.
"장군, 내가 끝까지 버티고 있다가는 육군본부 안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제하고 그는 육군본부 안의 공기가 얼마나 험악한가를 대충 설명했다. 그런 다음 그의 이해를 촉구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윤 대통령하고도 상의를 해서 그분의 동의를 얻었으니 장군께서도 양해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매그루더는 한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쿠데타를 진압해야겠다는 내 결심은 확고하오. 그러니 그리 알고 장군 문제는 장군이 알아서 처신하시오."
오후 3시 30분.
경향신문사 사장실에서는 장면의 운전수에 대한 고문이 벌써 1시간 30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이놈아, 지금이 중대한 고비란 말이다. 우리가 장 총리의 은신처를 알아야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러나 노영균이 장면의 전속 운전수를이리 데려온 뒤부터 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기위해서 닥달을 했으나 장면의 충직스러운 이 운전수는 그저 <모릅니다> 이 한마디 대답뿐이었다. 참다 못한 한창우, 선우종원, 조연하는 체면불구하고 주먹을 날렸으나 전속 운전수는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에주먹만한 혹을 달면서도 여전히 그저<모릅니다>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창우는 닥달을 하다 그만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선우종원도 지쳤고 조연하도 지쳤다. 같은 시각. 을지로 입구에 있는 장면의 공보비서관인 박춘거(朴春拒)의 집. 인사동 김영태의 송원영이 박춘거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 조금 전이었다. 영어가 능통한 박춘거는 장면의 외국인 담당 공보비서였다. 그는 키가 훤칠하게 큰 데다가 눈이 움푹 들어가고 눈썹이 굵어 한국인이면서 꼭 서구인 인상을 풍기는 미남형이었다. 송원영이 박춘거를 찾아온 것은 그가 영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매그루더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송원영은 박춘거를 대하자, 오전에 미8군 사령관과 통화를 했던 내용을 설명하고 그에게 다시 미8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도록 일렀다. 박춘거는 전화를 걸었다.
"지금 우리가 그곳으로 가겠는데 쿠데타군의 검문을 뚫고 용산의 사령부까지 갈 방법이 없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은 부관이 묻는 것이었다.
"지금 당신들 위치가 어딥니까?"
"을지로 입구에 있습니다."
"그럼 이쪽에서 차를 보내겠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어디서 대기하겠습니까?"
"곤색 싱글을 입고 흰 모자를 쓴 차림입니다. 저는 키가 6척입니다. 그만하면 알아보시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지금이 3시 30분이니까 4시 정각에 을지로 입구 남쪽가도에서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해서 송원영과 박춘거는 미8군 사령부로 갈 수가 있었다. 한국인이 운전하는 덮개로 씌운 지프가 그들을 태우러 왔던 것이다. 매그루더의 옆에는 건장한 인상의 50대 대령이 배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대하자 매그루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귀하가 대동한 통역을 쓰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시오. 나에게도 통역 장교가 있기는 하지만."
매그루더는 먼저 통역문제를 제기했다. 그때 마침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해맑은 한국군 중령이 들어왔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 한국군 육군 중령의 이름은 한상국(韓相國)이었다. 그가 바로 매그루더의 통역담당이었던 것이다. 한상국이 사령관실로 들어온 것을 보자 순간 송원영의 마음이 꺼림칙해졌다. 우리들이 찾아온 목적을 그가 알게 되면 때문이었다. 그래서 송원영은 이 자의 감정을 건드려 놓는 일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장군의 통역에게 수고를 부탁하겠습니다."
매그루더는 한시바삐 장면 총리를 만나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지금 서울에 진주한 반란군은 3,600명밖에 안 되며 우리는 실력으로 그들을 격퇴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오늘 오전 윤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는 유혈참극을 원치 않는다고 하는 게 아니겠소. 그리고 지금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군 총사령관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그것도 사실이 아니오. 조금 전에도 나한테 다녀갔는데 그는 아직도 쿠데타를 인정치 있다면 이 사태는 쉽게 수습될 수가 있는 거요."
한시바삐 장면과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매그루더의 말을 듣자 송원영의 가슴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매그루더가 쿠데타를 진압할 결심을 굳히고 있는 이상 쿠데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장 총리를 속히 찾아서 장군께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송원영과 박춘거는 사령관실을 물러 나왔다.
오후 4시 30분.
청와대와 미8군 사령부를 방문하고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윤보선과 주고받은 대화내용을 소개하고 쿠데타측에 가담할 것을 선언했다.
"지금의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은 내가 계엄사령관직을 맡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 믿어져 계엄사령관직을 맡기로 했소."
그는 윤보선을 만나서 주고받은 대화내용에 대해서는 소개했으나 매그루더를 만난 사실에 대해서는 덮어버리고 말았다. 매그루더를 만나서 주고받은 대화내용을 소개했다가는 참모들이 동요하게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참모회의에서 자기의 태도를 밝히고 난 장도영은 박정희와 단 둘이 만나 역시 주고 말했다.
"혁명과업 수행을 위해서 계엄사령관직을 맡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박정희는 입으로 잘 생각했다고 반가운 듯이 말을 했으나 그의 표정은 <네가 이 직책을 맡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하고 조소하는 듯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박 장군. 혁명을 한 이상에는 정권을 인수해야만 혁명정부를 출범시킬 수가 있을 텐데 박 장군한테 무슨 좋은 구상이라도 있소?"
장도영이 물었다.
"총장 각하께서도 익히 아시다시피 지금 장면 총리가 도피중에 있지 않소? 장면 인수할 수가 있겠소? 그러니 정권 인수문제는 총장 각하가 윤 대통령하고 상의해서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그 문제에 한해서 나한테 전권을 위임해 주겠소?"
"물론입니다."
"알겠소. 그러면 다시 청와대를 방문해서 대통령하고 상의하도록 하겠소."
장도영이 다시 청와대를 방문할 뜻을 비추자 박정희는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총장 각하, 기왕에 청와대를 방문하시려거든 대통령께서 사태수습을 위해서 대 국민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해 주십시오."
"대 국민방송?"
"하셨으니 그건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알겠어요. 부탁해 보겠소."
장도영은 다시 또 청와대로 달려갔다. 이때가 오후 5시 반에서 6시 사이였다.
"어찌 또 들어왔소?"
장도영을 대하는 윤보선의 태도는 어딘가 좀 냉랭했다. 4시간 전쯤에 만났을 때하고는 그의 태도가 사뭇 달랐다.
"대통령 각하, 지금의 사태를 한시바삐 수습하자면 장명 총리를 위시한 전 각료들이 속히 나와주어야만 하겠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을 불러내 올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건 옳은 말이오만, 겁을 먹고 숨어버린 사람들이 신변에 대한 보장도......"
"대통령 각하, 장면 박사나 내각의 각료들 신변안전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절대 책임을 질 테니 안심하고 나오라 해주십시오."
장도영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신변보장을 책임질 것을 강조했다.
"알겠소이다. 장 총장이 그들의 신변보장을 책임을 지겠다면 내 그들더러 속히 나와서 사태수습에 전력하라 권해 보겠소이다."
윤보선이 수락을 했다. 그러나 그 말투가 그리 자신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을 주었다.
같은 무렵.
장면 수색작전에 나서 있던 노영균이 조인호와 우연히 딱 마주쳤다.
"아니 조 경감 아니오?"
노영균이 조인호의 어깨를 툭 치자 뒤돌아본 조인호는 무척 당황하는 것이었다. 노영균은 그러한 조인호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노영균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장 박사의 측근들이 장 박사를 찾느라 총동원이 돼 있소. 장 박사께서는 지금 어디에 은신해 계시오?"
"노 계장님, 저는 모릅니다."
조인호는 시침을 뚝 뗐다.
"몰라?"
"예, 모릅니다."
"아니 여보, 조 경감, 오늘 새벽에 조 경감이 모시고 반도호텔을 떠났다던데 노영균은 따지듯이 되물었다.
"장 박사님을 모시고 반도호텔을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만, 저는 도중에서 내렸기 때문에 어디로 가셔서 은신했는지 모릅니다."
"그게 사실이오?"
"예, 사실입니다. 제가 왜 노 계장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노영균이 다시 한번 따졌다.
"분명 모른단 말이지?"
"예, 모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운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노영균이 조인호를 만난 5월 16일 오후 6시. 이 시간까지는 아직도 희망은 있었다. 그러므로 조인호가 장면의 은신처를 제자리로 수정해 놓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것을 조인호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이다. 곤두박질하려는 역사를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가 조인호의 고지식함으로 해서 또다시 그 기회가 잃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날, 장면과 함께 칼멜수녀원에 은신해 있던 조인호는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을 딸아이를 걱정했다. 조인호 자신이 고아로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혈육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 조인호가 하도 딸아이 때문에 근심에 싸여 있자 보다 못한 장면은 외출을 허락했다.
"그럼 잠시 집에 다녀오게. 집에 다녀오는 길에 정세도 좀 살펴보고 것일세."
그래서 혜화동에서 전차를 타고 을지로 4가에 와서 내렸던 참이었다. 그러면 조인호는 장면의 전임 경호대장인 노영균에게 어째서 장면의 은신처를 가르쳐 주지를 않았던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그것은 그의 고지식한 성품 때문이었다. 천주교 주교인 노기남의 보살핌으로 잔뼈가 굵은 조인호는 장면이 거두어 경호원으로 측근에 둠으로써 경감에까지 승진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장면의지시 없이 그 자신의 의사로 문제를 처리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영균을 만났을 때에도 장면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일단 <모른다>로 일관했을 것이다. 이것이 이미 정해진 <국가적 운명>이 어찌 이다지도 자꾸 일이 꼬일 수만 있었겠는가! 인간에게 운명이 있듯이 나라에도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자꾸 안개 퍼지듯 일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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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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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처세의 시작
그러나 젊음을 발산하는 데에도 열심인 젊은 황제를 모시고, 이 시기의 원로원은 로마 제국의 장래를 결정하게 될 몇 가지 정책을 진지하게 토의하여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해방노예에 관한 문제였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해방노예 3인방'의 활약에 대한 반동으로, 원로원 의원들 중에는 네로의 비서관 정치 폐지 선언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해방노예 자체의 사회진출을 크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예 신분에서 자유를 얻어 '해방노예'로 격상된 뒤에도 잘못을 저지르면 원래의 노예 신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이것을 정책화하자고 제의했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 반대하는 의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해방노예들 중에는 노예 신분으로 되돌려보내고 싶은 자들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개개인에게 잘못이 있었다는 이유로 전체를 규제하는 것은 잘못이다. 해방노예의 사회 진출은 이미 기정 사실이고, 그들은 로마 사회의 중류층과 하류층의 중요한 성원으로 정착해 있다. 속주에 주재하는 사무관료, 수도 로마의 하급 공무원,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 자치단체 공무원, 축제 행사으 실무를 맡고 있는 사무직, 소방관이나 경찰관 등에 해방노예 출신이 많이 진출해 있다. 해방노예를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한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해방노예 등용 정책은 국가 로마의 전통이라고 해도 될만큼 정착되어 있다. 지금은 원로원 계급이나 기사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도 해방노예의 후손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에는 예로부터 선거권까지 갖는 '로마 시민권'과 선거권이 없는 '라틴 시민권'의 두 가지 종류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노예에도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자유를 얻은 뒤에는 옛 주인과 인연을 끊을 수도 있는 공식 해방노예가 있는가 하면, 자유를 얻고도 옛 주인 집에 계속 눌러사는 사적 해방노예도 있다. 다만 사적 해방노예라도 심사에 통과하면 공식 해방노예가 될 수 있었다. 심사기준은 로마 시민이 되기에 어울리는 실적을 쌓았느냐 여부였다. 따라서 'Libertus'(자유)라는 공공선을 공유하기에 적합한 인물인지의 여부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사례별로 대처해야 할 문제이고, 법률화하여 일괄적으로 다루어버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로도 참석한 회의에서 이 문제를 표결에 부친 결과, 후자의 의견이 다수표를 얻었다. 패자 부활을 용인하는 국가는 건전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로마는 바로 그런 국가였다. 그러나 해방노예의 인권을 인정한 원로원 의원들도 노예의 인권까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에는 예로부터 노예가 주인을 죽이면 한지붕밑에 사는 모든 노예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살인자만이 아니라 노예 전원을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법률이 있었다. 하지만 이 법률은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아서 사문화된 상태였다. 그동안에는 줄곧 주인을 살해한 자만 사형에 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도 경찰청장이 노예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살해된 세콘두스의 집에는 무려 400명이나 되는 노예가 있었다. 원로원은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일반 시민들은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시위까지 벌이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원로원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법이 시대에 맞지 않을 경우, 그 법을 새로운 법으로 개정하면 시대착오적인 법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원로원은 그것을 거부했다.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원로원 의원의 저택에는 수백 명의 노예가 있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는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개입하지 않았고, 세네카도 개입을 권하지 않았다.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즉위 당시의 선언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민들이 눈물로 지켜보는 가운데, 아녀자까지 포함된 400명의 노예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사건이 그후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대책임을 재인식시킨 것이 억지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인지. 법률 적용이 좀더 유연해졌기 때문인지, 황제가 개입하게 되었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듬해인 서기 57년의 담당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은 네로였다. 네로가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55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자격 연령이 43세인 집정관에 십대 젊은이를 선출한 것은 원로원 의원 대다수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최고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은 아니다. 국가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지위가 높은 집정관 자리에 앉힘으로써 '제일인자'라는 비공식적인 직책을 공화정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서였다. 공화정 체제에 편입시켜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생각도 그 뒤에 깔려 있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한 로마식 제정은 '교묘한 속임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정치체제다. 엄밀히 말하면 '황제'(임페라토르)는 로마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의미밖에 갖지 않는다. 따라서 장병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대상일 뿐, 일반 시민이 충성을 맹세할 의무는 없다. 원로원 의원이라도 군대 요직인 사령관이나 군단장을 맡으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속주를 책임지는 총독도 군무를 겸하고 있으니까 황제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일 뿐 다른 공직을 겸임하지 않는 사람은 '제일인지'(프린켑스)한테는 충성을 맹세할 의무가 있어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의무는 없었다. 그것은 당연하다. 국가 로마의 양대 주권자는 'Senatus Populusque Romanus'(원로원과 로마 시민), 약자로 'S.P.Q.R'이었기 때문이다. '제일인자'는 로마 시민 가운데 으뜸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황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이 '제일인자'는 다음과 같은 권력을 아울러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사령관'-군단병과 보조병을 합하여 30만 명에 이르는 군사력을 명령 하나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호민관 특권'-공화정 시대에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호민관직을 계승한 것인데, 법안이 원로원에서 부결되어도 민회에서 가결되면 정책화할 수 있다고 규정한 호르텐시우스 법에 따라, '제일인자'는 원로원의 의향과 반대되는 정책도 실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원로원에서 다수결로 결정된 사항까지도 호민관 특권을 발동하여 무효화할 수 있는 거부권까지 부여받고 있었다.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가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은 상임 이사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부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거부권은 오늘날에도 라틴어인 'VETO'(베토, 영어로는 비토)로 통용된다. 따라서 거부권이 없는 상임 이사국은 의미가 없다. 거부권은 강력한 권한이다. '최고제사장'-로마 종교계의 최고책임자. 나라가 결정한 축제일에는 앞장서서 제사 의식을 거행할 의무가 있다. '국가의 아버지'-원로원이 시민들의 뜻에 따라 결의하여 증여하는 존칭.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것을 거부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잘못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받은 이 존칭에는 로마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원로원 계급이나 일반 평민 같은 각계층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국민 전체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은 공정하고 유능한 '아버지' 밑에서 안심하고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 '자식'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가부장권'이 강했다. 로마인에게 '국가'(파트리아)는 '가정'(파밀리아)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최고사령관'도 '호민관 특권'도 '최고제사장'도 '국가의 아버지'도 공화정 시대부터 이미 존재한 관직이거나 존칭이었고, 따라서 완벽하게 합법적이었다. 이런 '합법'이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그 사람은 유일한 최고권력자로 변모하게 된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로마 국법에 비추어보면 '비합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사람을 시민 가운데 으뜸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밖에 없는 '프린켑스'라고 부르다니, 이보다 더한 속임수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광대한 로마 제국은 한 사람이 통치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한 아우구스투스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이 '교묘한 속임수'밖에 없었다. 합법기관인 원로원은 거것이 비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합법을 합법으로 돌려놓는 길이 바로 '제일인자'를 집정관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40년에 걸친 치세 가운데 4분의 1을 집정관으로 지냈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23년의 치세 가운데 세 번밖에 집정관을 지내지 않았지만, 이것도 그가 원로원을 무시한 증거라하여 평판이 나빴다. 제3대 황제 칼리굴라는 4년이 채 못되는 치세 동안 네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지만 취임 기간은 짧았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도 13년의 치세 가운데 집정관을 겸임한 해를 모두 합하면 5년에 이르렀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한 로마식 제정이라는 '교묘한 속임수'를 둘러싸고 물밑에서 벌어진 공방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원로원으로서는 최고권력자를 집정관 자리에 앉혀 손아귀에 잡아놓을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십대 젊은이라는 것 따위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사정을 원로원 의원인 세네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방'인 만큼, 양쪽 다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려고 허허실실의 책략을 부린다. 서기 58년, 원로원은 '종신 집정관'(콘술 페르페투아)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창안하여, 20세가 된 네로에게 그 자리를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네로는 그것을 받지않았다. 원로원의 손아귀에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거부가 네로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세네카의 진언을 받은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네로는 이제까지의 원로원 편향 정치에서 명백한 황제 정치로 옮아가게 된다. 우선 평민들에게 1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의 증여금을 네로의 이름으로 나누어주었다. 로마의 평민은 전통적으로 원로원 계급과 대립하는 계층이었다. 이어서 네로는 만기 제대한 군단병들의 정착지를 오랜만에 본국 이탈리아로 바꾸었다. 카이사르 이후, 퇴역병들의 정착지는 주로 속주였다. 게다가 네로는 군단별로 한꺼번에 모아서 한곳에 이주시키는 종래의 방식을 버리고, 병사 개개인이 원하는 지방에 땅을 주어 이주시키는 방식으로 돌아갔다. 퇴역병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본국의 인적 공동화를 막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만기 제대한 뒤 고국에 땅을 받고 만족한 병사들이 그 일을 해준 네로를 지지할 것을 계산에 넣은 시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로마 시민인 군단병을 한꺼번에 이주시키지 않으면 속주를 로마화 할 수 없는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경제 정책
시대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 네로는 '피스쿠스'(fiscus, 황제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 가운데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융자하여 '에라리움'(erarium, 원로원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의 부족을 메워주었다. 이로써 그는 둘로 나뉘어 있던 국고를 일원화하는데 성공한 듯싶다. 합병은 상대가 적자를 보고 있을 때가 더 하기 쉬웠다. 원래부터 이 두 가지는 동일하다. 직접세인 속주세와 관세를 비롯한 간접세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황제 속주나 원로원 속주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것을 양분했을 뿐 아니라, '피스쿠스'와 '에라리움'으로 이름까지 다르게 한 것은 원로원을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아우구스투스의 심모원려였다. 원로원 속주를 통치하는 총독은 원로원 의원의 호선으로 선출되지만, 황제 속주를 통치하는 총독이나 장관은 황제가 임명한다. 따라서 '에라리움'은 원로원이 관리하고, '피스쿠스'는 황제가 관장하게 했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제일인자 통치'로 넘어가던 시기에 원로원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다. 제6권에서도 말했듯이,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의 차이는 군단을 상주시킬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군단은 외적을 막기 위해 상주시키는 것이니까, 파르티아 왕국과 맞서 있는 시리아 속주를 제외하면 나머지 황제 속주는 모두 변경에 있고, 따라서 문물의 발전이 낙후된 저개발 지역이었다. 반대로 원로원 속주는 로마화가 진행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도 많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황제 속주가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에라리움'에서 남는 돈을 '피스쿠스'로 돌려 그 적자를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평화가 정착하고 인프라가 정비됨에 따라 이 경제력의 차이는 조금씩 줄어들어, 아우구스투스 시대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네로 시대에는 양쪽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실제로 네로는 원로원 속주 총독에게만 경비 절감을 명령했다. 이 변화의 원인은 원로원 속주의 경제력이 쇠퇴했기 때문이 아니라 황제 속주의 경제력이 향상했기 때문이다. 생산성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는 수렵민족보다는 한곳에 정착하여 농업이나 목축업에 종사하는 농경민족이 훨씬 높다. 적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황제 속주의 주민들은 안심하고 농업이나 목축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생산도 크게 늘어났다. 그에 따라 세금도 늘어났다. 그러나 네로의 국고 일원화 정책은 '피스쿠스'가 '에라리움'을 흡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황제의 권력이 더욱 강대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는 세금까지도 전부 다 황제가 관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 정책만 살펴보면 네로는 14년에 걸친 치세에서 세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국고 일원화다. 둘째는 간접세 폐지, 셋째는 화폐 개혁이었다. 서기 64년에 실시된 화폐 개혁은 개혁이라기보다 '손질'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지만, 이것은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국고 일원화를 실시한 이듬해에 제출된 간접세 폐지안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기로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첫 번째와 세 번째 개혁은 네로가 악평을 받고 자살한 뒤에도 오랫동안 제국의 정책으로 계승된 반면, 두 번째 개혁만은 처음부터 원로원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알맹이가 빠진 형태로 겨우 성립되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그 문제를 다루는 까닭은, 간접세 폐지를 둘러싸고 대립한 네로와 원로원이 세금과 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서기 58년, 종신 집정관직을 거절했지만 지난해에 이어 집정관에 취임한 20세의 네로가 원로원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에 참석한 400여 명의 의원들은 모두 그보다 연장자였다. 그 자리에서 의장 역할을 맡은 네로 황제가 간접세 폐지안을 제출했다. 제6권(235쪽)에서도 도표로 설명했듯이, 로마 시민과 속주민이 내야하는 간접세의 세율이 5퍼센트인 관세와 1퍼센트인 매상세로 이루어져있다. 다만 동양에서 들어오는 보석이나 비단이나 향신료 같은 사치품에 대한 관세는 25퍼센트였다. 이 세제가 확립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경제력이 뒤떨어진 지역에 대해서는 감세 정책을 취하여, 일부 속주의 관세율은 1.5퍼센트나 2퍼센트였다. 황제 속주에 편입된 지방이 이런 세금 우대를 받는 대상이 되었다. 본국 이탈리아를 포함한 나머지 지역은 모두 5퍼센트의 관세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네로의 국고 일원화에 대해 원로원이 거의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네로 시대에는 황제 속주의 경제력이 향상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황제 속주에 대한 관세 우대 정책도 철폐되어 있지 않았을까. 이를 입증하는 사료는 없지만, 네로가 관세 폐지를 제안했을 때 사람들의 발언 내용을 보면 '20분의 1세'(비케시마)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황제 속주의 경제력이 향상함에 따라 관세도 동양에서 들어오는 사치픔 외에는 모두 5퍼센트로 통일되었을 게 분명하다. 네로는 이 5퍼센트의 관세를 철폐하자고 제안했다. 관세를 철폐하면 경제활동이 더욱 활발해질 테고, 그러면 경제력도 향상하여 '10분의 1세'인 속주세도 더 많이 들어오리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원로원은 반대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이기 때문에 속주세를 낼 의무도 없고, 관세가 철폐되면 그 세금도 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득일 터인데 왜 반대했을까. 그들은 말했다. 관세를 철폐하면 속주세가 늘어나는 것은 나중 일이고, 당장은 조세 수입이 줄어든다. 철폐된 관세를 대신할 만한 재원이 어디에 있느냐, 줄어든 조세 수입을 충당하려면 속주세 세율을 올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제국 통치에 큰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현대 연구자들이 온갖 사료를 참고하여 계산한 바에 따르면, 관세를 완전히 철폐했을 때 발생되는 조세 수입 감소는 1억 세스테르티우스 안팎이고, 그것은 국고 수입의 15분의 1정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낙관적 예측이 옳으냐 그르냐는 별문제로 하고, 우선은 그 구멍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게 선결 문제라는 주장은 옳은지도 모른다. 그렇긴 하지만 네로는 적극경제론자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관세 철폐는 네로가 직접 입안하여 법제화를 요구한 정책이었다. 표결에 부치면 틀림없이 부결되겠지만, 그래서는 황제의 체면이 구겨진다. 그래서 의원들은 수정안을 냈다. 생필품인 밀에 대해서는 '20분의 1세'를 폐지한다는 타협안이다. 네로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관세 철폐 문제에서는 정론을 내세워 황제의 개혁안을 물리쳤지만, 속으로는 의욕이 왕성한 20세 풋내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네로가 1년쯤 전에 그들에게 명령한 어떤 일에 대한 불쾌감에서 비롯되었다. 테베레 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는 바티카누스(오늘날의 바티칸)에는 칼리굴라 황제가 개인용으로 지은 경기장(스타디움)이 있었다. 네로는 그것을 개축하여 시민들의 오락장으로 개방하고 있었다. 그 당시 로마에는 경기장이라고는 대경기장 하나밖에 없었다. 칼리굴라가 일부러 이집트에서 운반해온 25미터 높이의 오벨리스크 덕분에 바티칸 경기장도 대경기장 못지않은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네로는 여기서 열리는 체전, 요즘 말로 하면 육상대회에 로마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는 원로원 의원과 기사계급이 출전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관중석에는 일반 시민을 초대했다. 헐렁한 토가를 입고 있으면 불룩 튀어나온 배도, 축 늘어진 몸매도 눈에 띄지 않는다. 토가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옷이어서 당당한 인상마저 준다. 목욕을 하거나 마사지를 받을 때는 알몸이 되지만, 그 알몸을 보는 것은 고용인인 노예들이다. 운동장에서 몸을 거의 다 드러낸 채, 관중석을 가득 메운 일반 시민의 시선을 받는 것과는 달랐다. 게다가 뛰거나 던지는 운동은 젊은 시절에 그만두어버렸다. 로마인은 그리스인과 달리, 운동은 청소년의 신체 단련을 위한 것이고 국가의 운명을 걱정해야 하는 성숙한 남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이니까 마지못해 출전했을 뿐이다.물론 관중은 무척 기뻐했다. 생각해보라. 국회의원이나 고위 관료나 재계의 거물들이 반나체의 몸으로 육상경기를 한다면, 신문과 방송은 졸졸 따라다니며 보도할 테고, 일반 대중도 입장료를 내고라도 구경하러 갈 게 분명하다. 네로는 정말 멋쟁이야 하면서, 원로원 의원들이 네로를 건방진 풋내기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의 동쪽 변방에서는 성숙한 사내가 성숙한 사내만이 할 수 있는 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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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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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 서있는곰(스탠딩 베어) - 테톤 수우 족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을 살았다. 첫 숨부터 마지막 숨까지..."
나는 테톤 수우 족의 추장이다. 우리 수우 족에는 여러 지파가 있었으며, 서쪽에 사는 지파를 통틀어 라코타 족이라 불렀다. 나는 나의 아버지들 외에는 누구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지 않았으며, 나의 아버지들은 대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당신이 당신의 신을 갖고 있듯이 나의 부족은 위대한 정령 와칸탕카를 믿었다. 와칸탕카는 이 세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의 라코타 부족의 신이었다. 위대한 정령 와칸탕카께서 이 세계의 모든 산 것들에게 생명의 힘을 심었다. 평원에 핀 꽃, 그곳에 불어가는 바람, 바위와 나무와 새, 들짐승 - 이 모두가 똑같은 생명의 힘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그리고 똑같은 힘이 최초의 인간에게도 숨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신비'라 불렀다. 모든 것은 한 부족이었다. 대지와 하늘 사이에서 숨쉬는 모든 생명체가 한 혈족이었다. 우리는 이른 새벽마다 미명을 헤치고 들판으로 나가서 지켜보곤 했다. 들짐승과 새의 세계에는 형제의 감정이 존재했다. 그들 사이에서 나의 라코타 족이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라코타 족은 언제나 이들 날개 달리고 털 달린 친구들에게 형제애를 갖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하나의 언어로 말했다. 동물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보호를 받을 권리, 삶을 누릴 권리, 번식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 그리고 인간의 어깨에 기댈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 권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코타 족은 결코 동물을 노예처럼 부리지 않았으며, 음식이나 의복에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는 함께 삶을 공유했다. 라코타 족은 바로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생명과 생명의 관계를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보았다. 이 마음은 라코타 족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심어 주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안을 삶의 기쁨과 신비로 채웠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모든 생명을 외경심으로 보도록 만들었다. 라코타 부족과 함께라면,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이 대지와 하늘의 틀 안에서 저마다 똑같은 중요성을 갖고 저마다의 살 장소를 차지할 수 있었다. 라코타 족은 어떤 창조물도 속일 줄 몰랐다. 모두가 같은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위대한 신비'로 채워진 한 혈족이기 때문이었다. 라코타 족은 영혼이 겸허하고 온유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대지를 물려받을 것이다.' - 이것이 라코타 족에게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대지로부터 그들은 오래 전에 잊혀진 비밀들을 물려받았다. 그들의 종교는 지극히 건강하고, 자연적이고, 인간적이었다.
인디언의 대지에 뿌리내린 이 '위대한 신비'에 대해 문명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그들의 파괴의 손길을 막지 못한다. 베어넘기지 않은 숲, 우리 안에 가둬 넣지 않은 들짐승, 네 발 달린 인간에게 착취 당하지 않은 대지에 대해서 그들은 참지 못한다. 문명인들에게는 그것들이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나의 라코타 부족에게 야생이란 없다. 나의 라코타 족에게 자연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더없이 우호적인 것이었으며, 금지된 구역이 아니라 한 형제였다. 라코타 족의 철학은 그만큼 건강했다. 두려움과 독단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여기서 나는 인디언 부족과 백인 부족의 신앙의 큰 차이를 발견한다. 인디언 신앙은 인간과 환경과의 조화를 추구했다. 반면에 백인 신앙은 환경의 지배를 추구했다. 나눔으로써, 모두를 사랑함으로써 인디언 부족은 자연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었다. 반면에 백인 부족은 두려워함으로써 정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인디언 부족에게 있어서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백인 부족에게는 이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갈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 온갖 죄와 추악함으로 가득 찬 곳이다. 다른 세상에 가면 그들은 날개를 달고서 반은 인간처럼 반은 새처럼 살게 된다고 믿는다. 백인 부족은 신에게 이 세상을 바꾸라고 끝없이 요구한다.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신이 만들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부족 중의 악한 사람을 벌하라고 신에게 끝없이 애원한다. 또한 지상으로 신의 빛을 보내 달라고 끝없이 조른다. 하지만 나의 라코타 족은 이 지상이 늘 와칸탕카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 새벽의 빛, 낮의 빛, 밤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우리가 눈꺼풀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빛을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따라서 백인 부족은 인디언 부족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라코타 부족은 지혜로웠다. 우리는 자연에서 멀어진 인간의 마음은 금방 딱딱해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잃으면 자연 속에 살아 있는 것들 역시 인간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라코타 부족은 아이들을 늘 자연에 가까이 가도록 해서 딱딱하지 않은, 부드러운 심장을 갖도록했다. 인디언 부족은 동료 피조물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틈이 없었다. 라코타 족에게 있어서 산과 호수, 강, 실개천, 계곡, 덤불숲은 모두 그 자체로 완성된 아름다움이었다. 바람, 비, 눈, 햇빛, 낮, 밤, 계절의 변화 등은 끝없는 매혹 그 자체였다. 새, 벌레, 들짐승들은 인간의 지식에 조금도 뒤지지 않은 놀라운 지식과 이해로 자기들의 세계를 채우고 있었다.
라코타 족은 진정한 자연주의자,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라코타 족은 대지를 사랑했으며, 대지 위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 애착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더 깊어지곤 했다. 늙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흙을 사랑했다. 그들은 땅 위에 앉거나 땅에 기대곤 했다. 어머니의 힘에 더 가까이 간다는 느낌으로. 대지에 맨살이 닿는 것은 좋은 일이다. 늙은 라코타 족 사람들은 모카신(인디언들이 신는 뒤축 없는 신)을 벗고 맨발로 신성한 땅 위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천막(티피)을 흙 위에 세웠으며, 제단 역시 흙으로 만들었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대지 위에 내려와 날개를 쉬듯이, 대지는 모든 산 것들의 최종적인 휴식처였다. 흙은 부드럽고, 힘 있으며, 정화의 힘과 치료의 힘을 갖고 있었다. 늙은 인디언들은 의자에 앉기를 거부했다. 흙 위에 그대로 앉았다. 의자에 앉으면 생명을 주는 대지의 힘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기 때문이었다. 얼굴 흰 문명인들은 그것을 야만과 무지라 여겼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땅 위에 눕는 일이 인디언에게는 더 깊이 생각하고, 더 깊이 느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삶의 신비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며, 자기 주위의 다른 생명들에게 더 가까운 혈족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백인 부족은 강제로 나의 인디언 부족을 변화시켰다. 그 결과 큰 혼란이 찾아왔다. 이유가 무엇인가? 대지의 근본 법칙, 영적인 법칙을 백인 부족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디언 거주지역에 몰아넣어진 날로부터 '문명'이라는 것이 우리를 덮쳤다. 그것은 나의 정의감, 삶의 권리에 대한 나의 존경심, 진리와 정직과 자비에 대한 나의 애정, 또는 라코타 족의 신 와칸탕카에 대한 나의 신앙의 어떤 것에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끝없이 설교를 하고 해설을 하지만, 위대한 학자들이 수없이 들춰내지만, 또 좋은 책에 아름다운 언어와 멋진 표지로 표현되지만 인간은, 인디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여전히 위대한 신비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얼굴 흰 문명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메리카 대륙과 인디언 부족의 오랜 역사에 비하면 얼굴 흰 부족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불과 하루 이틀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얼굴 흰 부족의 나무 뿌리는 아직 바위와 흙을 움켜쥐지 못했다. 문명인들은 아직도 원시적인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아직도 대륙을 개척한다는 위험 의식을 갖고 있다. 아직도 의심하는 눈초리와 더듬는 발걸음을 버리지 못했다. 문명인들은 여전히 떨고 있다. 뜨거운 사막과 금지된 산꼭대기 위에 서 있던 자신의 조상들의 기억 때문에 몸을 떨고 있다. 유럽에서 이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아직도 외국인이고 이방인이다. 아직도 그들은 이 대륙을 횡단하려고 길을 묻는 자들을 미워한다. 하지만 인디언은 아직도 대지의 혼과 하나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 혼의 맥박을 느끼고, 그것을 신성하게 여기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대지에 소속되려면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무수히 반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육체가 그들 조상의 뼈와 먼지로 만들어져야 한다.
칭찬이나 아첨, 과장된 매너, 또 세련되고 목청 높은 말 따위를 나의 라코타 족은 더없이 무례한 것으로 여겼다. 지나친 예절은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으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야만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곧바로 대화가 시작되는 법이 없었다. 바쁘게 시작되는 대화는 금물이었다. 먼저 침묵의 대화가 앞섰다. 아무리 중요한 경우라도 성급히 질문을 하지 않았으며, 대답을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대화를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인디언 부족의 예의였다.
아이들에게 진정한 예의는 말보다 행동에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모닥불 앞이나 나이 먹은 어른들과 방문객 앞을 가로질러 다니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불구자나 못생긴 사람을 놀리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만일 한 아이가 생각없이 그렇게 하는 경우엔 부모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 자리에서 아이를 바로잡았다. 백인 부족이 너무나 가볍게, 또 쓸데없이 자주 사용하는 '미안하다' '고맙다' '실례한다' 등의 말은 라코타 족의 언어에는 없었다. 모르고서 다른 사람을 치거나 가로막았으면 '와눈헤쿤'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모르고 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일부러 무례하게 군 것이 아니며, 우연한 실수임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라코타 족의 예의범절 아래서 자란 젊은이는 절대로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끝없이 떠들어대거나 상대방과 동시에 떠들어대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뿐 아니라 바보스런 일이었다. 나의 라코타 족은 마음의 조화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으며, 침묵은 마음의 조화의 표현이었다. 라코타 부족에게 있어서 침묵은 언제나 우아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불편하거나 당황스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침묵은 라코타 족에게 의미 깊은 것이었다. 라코타 족은 대화를 시작함에 있어서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을 진정한 예의로 알았다. '말 이전에 생각이 먼저다'라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슬픈 일이 닥쳤거나, 누가 병에 걸렸거나, 또는 누가 죽었을 때 나의 부족은 먼저 침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떤 불행 속에서도 침묵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유명하거나 위대한 사람 앞에서도 침묵은 곧 존경의 표시였다. 라코타 부족에게는 말보다 더 힘있는 것이 침묵이었다. 라코타 부족이 말과 행동을 엄격히 절제하는 것을 보고 얼굴 흰 문명인들은 그것을 극기라고 잘못 해석했다. 그들은 라코타 족 사람들을 벙어리이고, 어리석고, 무관심하고, 느낌이 없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사실은 라코타 족이야말로 가장 느낌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의 깊이와 진실성의 조화를 잃지 않았다. 라코타 족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침묵은 진리의 어머니다." 왜냐하면 침묵하는 사람은 신임받을 수 있지만, 언제나 입을 열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진지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말할 때 라코타 족의 어른들은 땅 위에 한 손을 얹고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우리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자. 어머니로부터 우리 모두가 나왔으며, 다른 모든 생명체들도 나왔다. 우리는 곧 떠날 것이지만 우리가 지금 앉아서 쉬고 있는 이 장소는 영원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땅 위에 앉거나 눕는 법을 배웠으며, 수만 가지 모습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생명들에 대해 자각했다. 때로 우리 부족의 소년들은 가만히 앉아서 새들을 지켜보곤 했다. 작은 개미들을 관찰하곤 했다. 또는 작업중인 어떤 작은 동물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근면함과 지혜를 배웠다. 아니면 우리는 바닥에 누워서 멀리 하늘을 응시하곤 했다. 별들이 나타나면 여러 집단으로 모양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모든 생명체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오직 모습에 있어서만 우리와 다를 뿐이었다. 모든 것들 속에 지혜가 전수되어져 있었다.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었으며, 그 속의 책들이란 돌과 나뭇잎, 풀, 실개천, 시와 들짐승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지의 성난 바람과 부드러운 축복을 나눠 가졌다. 자연의 학생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배웠는데,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 그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폭풍이나 난폭한 바람, 차가운 서리와 폭설에 악담을 퍼붓지 않았다. 따라서 무엇이 우리 앞에 오든지 우리는 필요하다면 더 많은 노력과 힘으로 우리 자신을 적응시켰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번개조차도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것이 가까이 올 때마다 모든 천막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모닥불 속에 삼나무 이파리를 던졌으며, 그 마술의 힘이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켰다. 밝은 날과 어두운 날은 둘 다 위대한 신비의 표현이며, 인디언 부족은 위대한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기뻐했다.
관찰은 분명히 그 보상을 가져다 주었다. 흥미와 놀라움과 경탄의 마음이 커지고, 생명 현상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수천 가지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놀라운 그 무엇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라코타 족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삶은 생동감있게 맥박쳤으며, 세상에는 우연하거나 진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인디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살았다. 첫 숨부터 마지막 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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