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소년 황제
네로가 황제에 즉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 10개월에 불과했다. 30세가 넘어야 책임 있는 공익에 앉을 수 있는 로마에서는 이례적으로 젊은 황제가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로마에 메스 미디어가 존재했고, 그 언론매체가 활용하는 무기의 하나인 여론조사가 존재했다면, 즉위했을 당시 네로가 얻은 지지율은 역시 젊은 황제였던 칼리굴라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굴라가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지지율이 높았던 것은 선황의 실책으로 평화가 위협받고 경제가 위기에 빠져 사람들의 불만이 높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황제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안전'과 '식량'의 확보인데, 이것은 둘 다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문제가 없으면 불만을 느끼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사소한 문제라도 찾아내서 그것을 불만거리로 삼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이런 인간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는 고도의 속임수'라는 말도 나온다. 일반 시민이 네로의 등극을 환영한 것은 단지 분위기가 쇄신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원로원이 환영한 이유는 해방노예로 이우러진 비서관 정치가 폐지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새로워진 것은 당연했다. 환갑이 지난 꼴사나운 노인네, 연설을 시키면 고사를 인용하며 강의하는 느낌을 주는 역사가 황제 대신, 영리하고 발랄한 십대 소년이 등장한 것은 신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서관 정치에 대한 원로원의 불만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클라우디우스가 마음을 써서 이 해방노예들을 '기사계급'으로 격상시키긴 했지만, 로마 사회에서 기사계급은 어디까지나 제2계급이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방 근무를 중요시한다. 나르키소스를 비롯한 비서진이 아무리 격무에 시달려도, 그들의 일터는 황궁이다. 그러나 비서진 정치는 상당히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후세에는 이 비서관 정치가 관료제의 시작으로 여겨질 정도다. 황제는 다방면에 걸쳐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었다. 황제 혼자서는 도저히 그 많은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 원로원은 비서관 정치를 싫어했지만, 원로원 의원으로 이루어진 보좌관 정치는 허용했다. 세네카는 아버지 때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젊은 황제를 보좌하게 된 세네카는 이런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세네카가 초를 잡고 네로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낭독한 새 황제의 '시정 연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돌아간다.
(2)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한다.
(3) 황제는 사법 집행에 관여하지 않는다.
(4) 도무스(사저)와 레스 푸블리카(직역하면 국가, 이 경우에 맞게 의역하면 관저)를 분리한다.
17세도 안된 황제는 네 항목을 동판에 새겨 보존하고, 매년 초에 새집정관이 취임할 때 낭독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시대 로마인이라면, 동시대인이 아니더라도 제국이 존재하고 있을 당시의 로마인이라면 이들 항목의 의미를 당장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부터 2천 년 뒤에 살고 있다. 로마 제국은 멸망한 지 오래다. 따라서 로마인에게는 불필요했던 해설이 필요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우선 첫 번째 항목부터 살펴보자. 네로가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란 무엇일까. 이 말을 들은 원로원 의원들은 그것을 '정체는 공화정이지만 진두에 서서 실제로 통치를 지휘하는 책임은 로마 시민 중의 제일인자에게 맡기는 체제'로 받아들였다. 현대의 연구자들 중에도 그것을 '원수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까, 당시 로마인들 중에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한 '교묘한 속임수'-겉모습은 공화정이지만 실체는 제정-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카이사르의 말마따나, 인간은 대부분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는 보려고 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네로는 원로원 의원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티베리우스도, 칼리굴라도, 클라우디우스도 첫마디는 언제나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돌아간다'였다. 그런데도 원로원은 그들 세 사람, 네로를 포함하면 네 사람 모두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그들의 통치가 당초의 선언에 어긋났기 때문이라면 간단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를 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본질인 '교묘한 속임수'를 전개하는 데 필요한 냉철함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냉철함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세네카는 17세도 안된 애제자에게 이론 무장을 시킬 필요를 느꼈는지 관용에 대하여 (de Clementia)라는 책을 출판했다. 황제에게 왜 관용의 정신이 필요한가를 서술한 이 책은 선정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60세 지식인의 열의가 담긴 명저다. 이 책은 네로에게 바쳐졌고, 네로와 문답을 나누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역사가 타키투스와 더불어 제정 로마를 대표하는 문장가답게, 그의 라틴어 문제는 품격있고 간결하고 우아하다. 내용은 황제의 책무인 관용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인데, 관용의 정신을 계속 유지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냉철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세네카는 에스파냐 태생이지만 본국에서 태어난 로마인 이상으로 로마인이었다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 있다. 동정과 관용의 차이를 서술한 대목에서 세네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정이란 현재 눈앞에 있는 결과에 대한 정신적 반응이고, 그 결과를 낳은 요인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반면에 관용은 그것을 낳은 요인까지 고려하는 정신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지성과도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
네로는 정말 대단한 스승을 만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교육의 성과는 '가르치는' 쪽의 자질보다 '배우는' 쪽의 자질에 좌우되는 법이다. 또한 이것은 일종의 군주론이지만, 1천 400년 뒤에 씌어진 또 다른 군주론과는 다르다. 세네카의 '군주론'은 이미 획득한 권력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를 이야기한 글이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어떻게 하면 권력을 얻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그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냉철하게 분석한 글이다. 전자는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 후자는 성악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그런데 서양 문명 3천 년 역사에 군주론-즉 지도자론-의 고전으로 남은 것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었다는 게 재미있다. 그렇긴 하지만, 젊은 황제 네로의 술로건은 세네카의 이론에 따라 '관용'으로 결정되었다. 네로 시대의 화페에 가장 많이 새겨진 낱말이 바로 'Clementia'(클레멘티아)이다. 네로 황제의 시정 연설의 두 번째 황목은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공화정 시대부터 '원로원 권고'(세나투스 콘술툼)라는 이름으로 인정된 원로원의 입법권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의 권리가 된 '긴급조치령'(데클레툼) 발동을 줄이고, 입법부의 지위를 원로원에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원로원이 환영한 것도 당연하다. 세 번째 항목도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법권 독립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다. 로마의 법정에서는 그해의 법무관이 재판장을 맡고, 전문 검사를 두지 않기 때문에 원고나 그 대리인이 검사 역할을 맡고, 피고도 변호인을 선임하여, 원고측과 피고측이 서로 증거와 증인을 내세워 논전을 벌이고,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이후로는 황제가 재판에 관여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래서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자주 법정에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이 모든 재판에 얼굴을 내민 것은 아니다. 그들이 참석하려고 애쓴 재판은 대부분 속주민이 원고가 되어 속주 총독이나 장관을 고발한 경우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속주에 근무하는 총독이나 장관이 직권 남용으로 부정을 저지르거나 공갈 행위로 속주민을 등치는 것이 속주 통치의 가장 큰 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날카롭고 가차없는 질문을 퍼부어 피고를 궁지에 몰아 넣었고, 클라우디우스는 자세한 증거를 늘어놓아 피고를 꼼짝 못하게 했다. 황제의 이런 적극적인 관여가 배심원들의 판결에 영향을 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배심원이 되려면 일정한 재산을 갖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배심원은 로마 사회의 제1계급과 제2계급인 원로원 계급과 기사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직권 남용으로 고발당한 속주총독이나 장관들도 원로원 계급이나 기사계급 출신이었다. 피고와 그 피고를 재판하는 사람들이 한통속인 셈이다. 이 방식의 문제점은 부정축재를 한 속주 총독이 면죄부를 받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공화정 말기에는 속주에 근무하는 동안 큰 재산을 모은 속주 총독이 본국으로 돌아온 뒤 속주민에게 고발당해도 로마 법정에서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로마 사회의 계급을 초월한 존재-그가 즐겨 쓴 표현을 빌리면 '제일인자'-가 재판에 관여하는 것을 법제화했다.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도 그것을 충실히 답습했다. 실제로 황제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독한 탓도 있어서, 제정 시대에 접어든 뒤로는 속주 근무자의 직권 남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공화정 동조자인 타키투스조차도 "몰라볼 만큼 깨끗해졌다"고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고권력자가 법정에 얼굴을 자주 내미는 것은 로마의 특권층이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에게 반발하는 이유가 되었다. 네로 황제는 사법 집행에 '제일인자'가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흉내는 내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사법권 독립은 누가 생각해도 옳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실정을 생각하면 이것은 한통속끼리의 재판을 방치하는 상태로 돌아간 것을 의미했다. 네로가 시정 연설에서 네 번째로 거론한 것은 도무스(사저)와 레스푸블리카(관저)를 분리하는 문제였다. 이것도 분명 클라우디우스와의 차별화를 노린 선언으로, 비서관 정치 폐지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 세 번째 항목과 함께 이 네 번째 항목도 원로원의 호감을 산 것은 물론이다. 클라우디우스의 비서관들은 비록 말투는 정중하지만 원로원 의원들을 얕잡아보는 태도가 역력했다. 해방노예 나부랭이한테 그런 수모를 당하고 있던 원로원 의원들로서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서관 정치를 폐지하고 보좌관 정치로 바꾸었다 해도, 제국 통치의 실무를 보필하는 역할은 누군가가 맡아야 한다. 결국 비서관은 클라우디우스 시대처럼 공식적인 존재가 아니라,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 시대처럼 비공식적인 관료 시스템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석하면, 즉위했을 당시 네로의 정책이 얼마나 원로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세네카는 원로원 의원이었지만, 그보다는 지식인이고 저술가였다. 그는 원로원이라는 존재가 입법기관이자 인재 풀(pool)일 뿐 아니라, 요즘 말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실제로 로마 역사상 저술활동을 한 사람은 대부분 원로원 의원이다. 또한 원로원에서 토의된 내용은 티베리우스 시대부터는 정기적으로 '악타 세나투스'(원로원 의사록)라는 이름으로 제국 전역에 배포되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같은 '대중매체'가 아니면 '미디어'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후세의 우리가 로마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고고학적 업적을 제외하면 대부분 원로원 의원들의 저술에서 얻은 것이다. 저술가이기도 했던 세네카가 여론의 호감을 사려면 우선 원로원의 호감을 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옳았다.
빈곤 상태에 있는 유서깊은 명문 출신 원로원 의원에게 해마다 5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연봉을 지급하는 법안은 세네카가 발의하여 네로 황제의 이름으로 제출한 것이었다. 원로원은 이 법안을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연봉 지급 대상은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원로원 의원에게 어울리는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신참 의원들 가운데 이런 의미의 빈곤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1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이 있어야만 원로원에 들어갈 자격을 갖는다. 그러니 연봉을 받지 못하면 원로원 의원의 품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신참 의원들 중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네로의 원로원 편향 정책은 그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이 "네로의 5년 동안의 선정"이라고 평가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은 원로원이 곧 '미디어'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원로원이 곧 '미디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또 한 사람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원로원 체제를 타도하려 한 카이사르는 '원로원 미디어'에 저항하여, 그 체제의 타도 과정을 자기 손으로 썼다. '내전기'라는 제목으로.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네로의 성의는 인정한다 해도,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한 로마식 제정은 단순한 원로원 편향이 아니라. 그 제정을 실시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냉철함을 요구하는 '교묘한 속임수'였다. 이 복잡미묘한 성격을 지식인인 세네카는 이해하고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즉위한 직후의 네로와 그의 보좌역인 세네카의 통치능력을 평가하는 시금석은 원로원 대책이 아니라 파르티아 문제였다. 서기 54년 가을도 깊어갈 무렵, 파르티아군이 아르메니아 영토에 침입했다는 소식이 로마로 전해졌다.
강국 파르티아
기원전 21년, 네로가 즉위한 해로부터 74년 전, 아우구스투스는 파르티아 왕국과 평화조악을 맺었다. 유프라테스 강을 국경으로 정하고, 상호불가침을 약속한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에 떠 있는 섬에서 황제 대리로 이 조약을 체결한 것은 당시 21세였던 티베리우스였다. 하지만 이것은 평화와 우호관계 유지를 약속한 것일 뿐, 동맹조약은 아니다. 오리엔트인의 머리속에는 동맹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겨서 지배하거나 져서 굴종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지 않고 계획대로 파르티아 침공을 실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카이사르라면 당연히 파르티아에 승리했을 테고, 그후에 동맹조약을 맺었을 것이다. 로마인은 우선 상대를 이기고 나서, 패배한 상대와 동맹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쓰라린 경험-기원전 53년에 일어난 크라수스 군대의 전멸, 기원전 36년에 일어난 안토니우스 군대의 원정 실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로마군은 파르티아에 대해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군사력에 호소하여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평화조약을 맺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동맹국을 '아미쿠스'(친구)라고 부른 것이 보여주듯이, 동맹관계라면 우방이다. 하지만 평화조약만 맺은 상대는 적도 아니지만 우방도 아니다. 그래서 로마는 북쪽과 서쪽과 남쪽에서 파르티아를 에워싸는 형태의 포위망을 형성하고, 언제 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파르티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 네트워크는 시리아 속주나 이집트 같은 직할 토이 지역과 아프메니아나 카파도키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대 같은 중소 군주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마는 동방의 중소 군주국들과는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동맹국은 로마에 속주세를 낼 의무는 없지만, 로마가 군사행동을 일으킬 경우에는 병력을 제공하거나 군량과 무기를 지원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체제라도 반드시 단점을 갖게 마련이다. 로마가 오리엔트에 형성항 방위망의 아킬레스 힘줄은 파르티아와 접경하고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이었다. 이 나라를 우방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포위망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는 아르메니아한테는 져본 적이 없다. 공화정 말기에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싸웠지만 매번 승리를 거두었다. 루쿨루스는 카스피 해까지 진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와는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런 관계를 유지하기에 편리하도록, 로마가 원하는 군주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힐 수도 있었다.그러나 다른 동맹국보다 지리적으로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르메니아는, 언어도 풍습도 주민들의 사고방식도 파르티아를 맹주로 하는 페르시아 문명권에 속한다. 페르시아 민족이 아르메니아는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했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파르티아인은 로마와 싸우면 항상 이겼다는 자신감도 갖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인 이상, 로마의 아르메니아 대책-다시 말하면 파르티아 대책-이 임기응변의 미봉책으로 일관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의 서방에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동방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역사에는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가 되풀이 발생한다. 그때마다 로마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혔지만, 그런 미봉책도 수십 년 동안은 문제 발생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로마가 단순한 대화로 문제 발생을 억제한 것이 아니라, 군단을 배경으로 한 힘의 외교로 대처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파르티아가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여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로마 황제의 힘이 약해졌다고 판단했을 때라는 사실이다. 지난번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서기 34년, 카프리 섬에 은둔한 지 오래인 티베리우스 황제가 75세 되던 해였다. 파르티아는 노쇠한 황제가 단호히 대응할 수는 없으리라고 판단하고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어느 연구자의 말을 빌리면 "늙어서도 여전히 테러블"했다. 파르티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것을 안 티베리우스는, 나중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좋은 협력자가 되는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를 급파하여, 아르메니아를 지키겠다는 로마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제국 동방의 로마군 총사령관으로서 전권을 부여받은 비텔리우스는 동방에 있는 로마군을 모두 아르메니아로 집결시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파르티아 왕은 아르메니아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러부터 20년이 지난 서기 54년, 이번에도 파르티아는 이제 갓 즉위한 젊은 황제가 단호히 대응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로마에는 티베리우스만큼 '테러블'하지는 않았지만, 속주 출신인데도 제국의 안전보장에 열의를 갖고 있는 세네카가 있었다. 세네카는 티베리우스만큼 과감하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발생한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대처는 티베리우스 못지않게 신속했다.
코르불로 기용
세네카는 동장에 파견한 총사령관을 제대로 골랐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는 8년 동안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을 지내면서, 4개 군단에 보조병을 합하여 4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라인 강하류 일대를 성공적으로 지켜온 장수다. 게다가 제정 로마가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에는 라인 강 앞에 가만히 앉아서 적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무시로 강을 건너 공격함으로써 게르만족에게 로마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이 방위의 요체로 여겨지고 있었다. 코르불로의 적극 전술이 효과를 거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적극 전숙에 지나치게 박차를 가하여 게르만족 땅으로 너무 깊숙이 쳐들어갔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라인 강까지 철수한 적도 있었다. 남프랑스 속주 출신인 코르불로는 그밖에도 동료들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부하 병사들만이 아니라 적에게도 인망이 높았던 것이다. 코르불로가 온후한 성격이라서 누구나 따뜻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코르불로는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군만이 아니라 적에게도 인망이 높았던 이유인지 몰랐다. 나이는 확실치 않지만, 동방 파견이 결정괸 서기 54년 말에는 5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 변경을 지킨 사령관들 가운데, 강대국 파르티아와 맞서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동방 주둔군 총사령관을 맡을 만한 인물은 코르불로밖에 없었다. 세네카의 잘못은 코르불로에게 전권을 주지 않은 것이다. 서기 55년 봄, 라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먼 길을 달려간 코르불로는 체면을 구기고 기분이 상해 있는 시리아 속주 총독 콰드라투스의 영접을 받았다. 하지만 장수들 사이의 경쟁심은 늘상 있는 것이니까, 이것이 로마의 동방대책에 장애가 된 것은 아니다. 파르티아 전쟁에 돌입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코르불로의 지위는 동방 주둔군 총사령관이 아니라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 속주의 총독으로 되어 있었다. 동방에 주둔해 있는 로마군의 계급에서는 4개 군단을 지휘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이 가장 지위가 높다. 속주화되긴 했지만 군단도 배치하지 않은 소아시아 동부의 카파도키아와 칼라티아 총독은 지휘계통상 시리아 속주 총독보다 밑에 있었다. 그래서 콰드라투스가 로마에서 받은 훈령은 휘하의 4개 군단 가운데 2개 군단을 코르불로에게 떼어주고, 콰드라투스는 남쪽에서, 코르불로는 서쪽에서 파르티아군을 공격하여 아르메니아에서 몰아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군무 경험이 없는 세네카의 군사적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훈령이었다. 지휘계통이 확립되지 않으면 군사행동은 일으킬 수 없다. 그래도 일으키면 조만간 파탄이 난다. 코르불로는 현지에서 정황을 냉철히 관찰했을 것이고, 그 결과 파르티아 왕이 동생인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힌 뒤에는 군사행동을 중지해버린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실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는 로마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로마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군대를 진격시켜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코르불로도 때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콰드라투스가 코르불로에게 보내온 2개 군단은 그대로는 도저히 전쟁터로 데려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한 결과, 코르불로는 엄한 규율로 병사들의 군기를 잡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을 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때까지는 로마에 있는 황제-실제로는 세네카-가 지휘계통을 확립할 필요성을 깨달아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전략을 변경했다는 통보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파르티아군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로 쳐들어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절박감이 적었던 탓도 이TEk. 하지만 동방을 방치한 진짜 이유는 네로도 세네카도 이 시기에는 다른 문제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
교묘히 술수를 부려 아들 네로를 제위에 앉히는 데 성공한 아그리피나는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만사가 그녀 뜻대로 진행되어, 원로원도 일반 시민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독버섯 중독으로 죽었다는 공식 발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조금은 의심했을지 모르지만, 아무도 그 문제를 파고들지 않았다. 그리고 선황의 유언장을 공표하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선황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양자인 네로가 제위를 계승하는 것을 승인했다. 아직 십대인 새 황제의 섭정으로 사실상 제국을 다스리겠다는 아그리피나의 야망은 완벽하게 실현된 듯싶었다. 사시 아그리피나는 황후였을 때보다 황태후가 된 뒤에 자기 존재를 더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다. 공식 석상에서는 늘 네로 옆에 자리를 잡았고, 원로원 회의도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 의사당이 아니라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황궁에서 열게 했다. 아그리피나가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나마 의원들의 발언을 듣기 위해서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로마 제국의 화폐는 액면가치와 실질가치를 일치시키려고 애씀으로써 제국이라는 대경제권의 국제통화 역할을 맡는 동시에, 역대 황제의 옆얼굴을 새겨 최고통치자의 존재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리는 '선전수단' 역할도 맡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바뀌어도, 선황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를 모두 회수하고 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로 바꾸지는 않았다. 국제통화의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액면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몇 대 전의 황제 얼굴이 새겨진 화폐, 심지어는 공화정 시대의 화폐가 시중에서 계속 유통되어도, 액면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면 문제될 게 없었다. 이것이 후세의 지폐와는 다른 점이다. 이런 사정으로 로마 제국에서는 로마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인물들이 얼굴이 새겨진 화폐가 계속 유통되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 황제가 된 사람이 발행하는 화폐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아그리피나는 아들과 자기가 마주보고 있는 구도의 그림을 화폐 도안으로 채택했다. 여자의 옆얼굴을 새긴 화폐는 그전에도 있었다. 국가 로마의 표상은 원래 여신의 얼굴인 경우가 적지않다. 하지만 황제와 어머니가 같은 화폐에 함께, 게다가 평등한 지위를 과시하듯 마주보는 형태로 새겨진 것은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금화(아우레우스)뿐이지만, 금화보다 유통량이 많았던 은화(데나리우스)에도 이 도안이 채택되지 않았다고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발굴될지 모르는 게 고고학이다. 어쨌든 아그리피나의 권세는, 적어도 네로가 즉위한 직후에는 그녀가 바란 대로였다. 황제의 포고령에도 'Augusta, Mater augusti'(황후이자 황태후)라고 쓰게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마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자기 뜻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한 아그리피나는 터무니없는 오산을 하고 있었다. 네로는 그녀의 피를 받은 아들이고, 따라서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까지는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한다면, 아들 역시 그러고 싶어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십대 초년이니까 아직 그렇게까지 자립하지는 않았을 것라고 생각했다면,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오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네로에게 지성이 있었는지 여부는 제쳐두고, 네로는 당대 제일의 재주꾼인 세네카가 사랑한 제자다. 네로는 영리하고 재기가 넘치는 젊은이였다. 아그리피나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그녀는 자기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아들에게 날마다 '네가 황제가 된 건 엄마 덕분'이라는 말을 되풀이했을 게 분명하다. 그 결과, 여느 가정의 십대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태가 일어났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반항은 어머니가 경멸할 게 뻔한 여자를 사랑한 것이었다. 네로는 아크테라는 여자 노예한테 홀딱 반해버렸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머니한테 그것을 감추려고 애썼고, 세네카에서 도움을 청했다. 네로가 울며 매달리자, 세네카는 제 사촌이고 황궁 경호대장인 안니우스에게 아크테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아크테를 해방노예의 신분으로 만들고 안니우스의 애인으로 위장하여 네로와 밀회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눈을 계속 속일 수는 없었다. 노예였던 여자와 아들의 관계를 알게 된 아그리피나는 무자비한 어조로 비난했다. 옥타비아라는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와 관계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은 아니다. 관계한 여자가 해방노예라는 사실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아그리피나는 아크테를 경멸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하지만 아들이 사랑한 여자를 경멸하는 것은 그 여자를 선택한 아들을 경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아그리피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세네카도, 근위대장으로 본국 이탈리아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부루스도, 어머니에 대한 네로의 반항을 지지했다. 아니, 뒤에서 은밀히 지지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네로의 두 번째 반항은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해방노예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경제 비서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팔라스를 해임한 것이었다. 선황의 비서관 정치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네로에게는 팔라스를 해임할 명분이 있다. '3인방' 가운데 나르키소스와 칼리스투스는 실각했는데 팔라스만 유임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팔라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재혼 상대로 아그리피나를 추천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황후가 된 아그리피나가 네로를 황제로 옹립하기위해 음모를 꾸밀 때도 적극적으로 도와준 사람이다. 아그리피나가 해임시키는 대신, 팔라스의 동생을 유대 장관에 유임시키고 팔라스 자신의 안락한 여생을 보장하겠다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 모양이다. 그것으로 팔라스 해임을 저지하려 들 게 뻔한 아그리피나와 팔라스의 공동 전선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해임을 순순히 받아들인 팔라스는 수도를 떠났고, 아그리피나는 혼자서 분노를 폭발시켰다. 화가 복받친 여자가 기승을 떨기 시작하면 말을 홍수처럼 쏟아내기 마련이다. 누구 앞이든, 누가 듣고 있던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아들방으로 쳐들어간 아그리피나의 입에서는 온갖 언사가 쏟아져나왔다. 네놈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인지 아느냐. 네놈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고 내가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아느냐.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불효막심한 놈. 배은망덕한 놈. 병신(외팔이 없는 부루스를 가리킴)과 추방자(유배당했다가 돌아온 세네카를 가리킴)의 보좌만 받으면 이 대제국을 통치할 수 있을 성싶으냐! 아헤노바르부스 씨족 출신인 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인 나를 통해 율리우스 씨족의 피를 물려받은 덕분이다.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너보다 차라리 브리타니쿠스가 훨씬 낫다. 그 아이도 이제 열네 살이다.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나는 브리타니쿠스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으로 갈 작정이다. 근위병들도 게르마니쿠스의 딸이하는 말에는 귀를 귀울여줄 것이다. 브리타니쿠스는 선황의 적자다. 제위 계승권에서는 중간에 밀고들어온 양자보다는 적자가 정통을 주장 할 수 있다. 황제로 만들어준 은혜도 잊어버리고 어머니를 업신여길줄밖에 모르는 너 같은 놈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런 식으로 아그리피나는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을 기쁘게 해주기에 충분한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것이 네로의 가슴에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는 그저 어머니와 되도록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고작이었지만, 이제 어머니 같은 여자는 한바탕 퍼부어대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그 말을 실행에 옮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고개를 든 것이다. 건강도 좋지 않고 재능도 성격도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가 희미했던 브리타니쿠스의 운명은 이것으로 결정되었다. 세네카와 부루스를 좋게 평가하고 싶은 역사가들은 브리타니쿠스 살해에 이들이 관여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방조라는 형태로나마 관여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옹립하여 네로와 대립하는 입장에 섰다면, 병사들 사이에 아직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살아 있는 현실에서는 자칫하면 내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젊고 자식도 없는 경우, 제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자는 후계자라기보다는 경쟁자가 된다. 그자를 없애는 것은 곧 경쟁자 제거를 의미한다. 칼리굴라도 선황 티베리우스의 친손자인 게멜루스를 죽였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리온(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 관계해서 낳은 아들이라고 주장한 인물)을 죽였다. 그러나 같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라도 안토니우스의 자식들은 그가 친히 맡아서 키워주었다. 카이사리온을 죽였다는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를 비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리굴라도 게멜루스를 죽였다는 이유로 비난받지 않았다. 브리카니쿠스는 지병인 천식 발작으로 죽은 것으로 공표되었다. 의심을 품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납득했다. 1천 600년 뒤인 17세기에 프랑스 극작가 라신이 쓴 '브리타니쿠스'는 이때 죽은 브리타니쿠스를 주인공으로 한 비극이다. 그러나 브리타니쿠스의 죽음으로 누구보다 타격을 받았을 터인 아그리피나는 체념이라는 것을 모르는 여자였다. 브리타니쿠스의 죽음은 확실히 큰 타격이었지만, 그것은 이 의붓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권력을 상실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40세였던 아그리피나는 맹렬한 반격을 개시했다. 우선 자금을 모아야 한다. 그녀만한 혈통과 지위를 갖고 있으면, 유산 상속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 재산은 사유지나 투자자산의 형태로 대리인을 통해 관리하고 있었다. 아그리피나는 그것을 팔아서 현금을 마련했다. 다음에는 이렇게 마련한 자금을 라인 강 연안에 주둔해 있는 게르마니아 군단에 투입했다. 뿐만 아니라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였을 때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오늘날의 쾰른에 퇴역병들을 이주시켜 식민도시(콜로니아)로 승격시키고, 그 도시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자기 이름이 붙은 지역을 명실공히 도시화하기 위해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므로 명분은 충분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라인 강 주둔 군단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7개 군단이니까 4만 2천 명이다. 이 정예를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아그리피나는 황궁에 살면서, 라인 강 주둔군 군단장들과 은밀히 연락하기 시작했다. 셋째, 남편 네로에게 소박을 맞고 동생 브리타니쿠스마저 세상을 떠나 우울증에 빠진 옥타비아를 위로한다는 구실로 며느리에게 접근했다. 로마의 일반 시민들은 수수하고 얌전한 이 여인을 동정하고 사랑했다. 옥타비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서민층에 인기가 없었던 아그리피나로서는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아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우선 황태후의 신변 경호를 맡고 있던 병사들을 그 임무에서 철수시켰다. 아그리피나를 '황후이자 황태자'에서 보통 여자와 다음없는 신분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리고 황궁에서도 쫓아냈다. 아그리피나는 같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할머니 안토니아 저택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밀 기회도 크게 줄어들었다. 아들이 어머니를 초대손님 명단에서 삭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들은 어머니가 호되게 비난한 또 한가지 일을 전보다 더욱 당당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년배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밤마다 로마 시내로 몰려나가는 것이었다. 몰려나갈 때는 황제나 유력한 원로원 의원의 아들로 보이지 않도록 평범한 젊은이 차림으로 변복한다. 쾌활한 젊은이들은 거리로 몰려나가 멋대로 즐긴다. 한번은 너무 난폭하게 굴다가 주민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야경꾼들과 난투극까지 벌인 일도 있었다. 간신히 제압한 젊은이들 틈에 황제가 끼여 있는 것을 야경꾼 반장이 알아차렸기 때문에 경찰 신세는지지 않고 무사히 끝났지만, 이튿날 아침 원로원 회의에 참석한 네로의 얼굴에는 얻어맞은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네카도 부루스도 젊음을 발산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눈 밑에 검푸른 멍이 든 얼굴로 원로원에 등원하는 것도 내버려두었다. 네로는 아직 17세였다. 어쨌든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가 즉위한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모든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7세의 나이로 이렇게 멋진 수완을 보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그리피나의 권력을 꺾을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세네카와 부루스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얌전히 물러날 여자가 아니었다. 자금을 모으는 것도 그만두지 않았고, 라인 강 연안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과도 접촉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제 옥타비아의 가장 강력한 보호자가 되었다. 게다가 회상록까지 쓰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역사가 타키투스가 그 회상록을 참고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로마 역사상 저술까지한 여자는 아그리피나를 빼고는 전무후무하다. 자립심이 왕성한 아들에게는 성가신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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