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7호 - 2024.05.31. 금요일(음력 : 04.24)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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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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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위기에 처한 경우엔, 고비를 넘길 때까지만은 악마와 함께 가도 좋다. ― 불가리아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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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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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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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 “고기떡” “왈렌끼”
광복 70년이자 분단 70년을 맞는 올해 KBS 아나운서실에서는 ‘통일시대를 맞이하는 남북한 방송언어’를 주제로 한국어연구논문집을 냈다. 체제와 문화의 차이만큼 지난 70년간 남북한의 언어도 많이 달라졌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통일의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논문집에 실린 북한이탈주민들을 대상으로 남북한 언어의 차이를 조사한 권순희 이화여대 교수의 ‘방송인이 알아야 할 남북한 생활언어 차이’는 흥미롭다. 발음, 억양, 문법의 차이도 있지만 어휘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 논문에 따르면 ‘오징어’를 북한에서는 ‘낙지’라고 한다. 거꾸로 ‘낙지’는 ‘오징어’라고 한다. 북한에서 ‘번지다’는 ‘넘기다’, ‘다그치다’는 ‘힘쓰고 있다’는 뜻이다. “책장을 번지다” “정비를 다그치다”와 같이 쓴다.
어감의 차이가 있는 말들도 있다. ‘방조하다’는 남한에서는 불법 행위를 도와준다는 뜻이 있지만 북한에서는 긍정적인 뜻이다. 북한에서 ‘거래’는 불법적인 경제관계를 일컫는다. ‘버르장머리’는 남한에서 부정적인 뜻으로 쓰지만 북한에서는 습관이나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쓴다. ‘소행’ 도 북한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쓰는 말이다.
한자어는 어순이 다른 경우가 있다. ‘왕래(往來)’ ‘창제(創製)’‘상호(相互)’를 북한에서는 ‘래왕’ ‘제창’ ‘호상’과 같이 쓴다. 많은 한자어를 고유어(문화어)로 대체한 북한에 비해 남한에서는 훨씬 많은 한자어가 쓰이고 있다. ‘홍수’라고 하면 북한 주민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북한에서는 ‘홍수’를 ‘큰물’이라고 한다.
남한은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반면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외래어에도 차이가 있다. ‘소시지’는 북한에서 ‘칼파스’ 혹은 ‘고기떡’이라고 하며 ‘샌들’은 ‘산따’, ‘롱부츠’는 ‘왈렌끼’라고 한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사겨라” “바꼈어요”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이 나란히 토크쇼에 출연했다. “이 참에 둘이 아예 사귀는 게 어때요?” 사회자가 이 말을 하자마자 화면에는 ‘사겨라’라는 자막이 나타났다. ‘사귀어라’의 준말이 ‘사겨라’ 맞나?
‘사겨’뿐만 아니라 ‘바뀌어’의 준말을 ‘바껴’로 쓴 것도 여러 번 본 것 같다. 포털 검색창에 ‘바꼈어요’를 입력하니 ‘번호 바꼈어요’ ‘밤낮이 바꼈어요’가 연관 검색어로 자동 추천된다.
‘사귀다, 바뀌다’의 어간이 어미 ‘어’와 결합한 ‘사귀어, 바뀌어’의 음절이 줄어드는 현상이 우리말에 있다. 즉 우리는 때때로 ‘사귀어, 바뀌어’처럼 3음절이 아니라 2음절로 발음한다. 그런데 이것을 한글 문자로는 나타낼 방법이 없다. 만약 ‘ㅜ’에 ‘ㅕ’가 합쳐진 글자가 있다면 그 소리를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런 글자는 지금은 물론 옛 문헌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 소리로는 존재하지만 적을 방법이 없어서 표기할 때는 항상 ‘사귀어, 바뀌어’처럼 줄어들기 전의 형태로만 써야 한다. ‘뛰다, 쉬다, 나뉘다’ 등 어간이 모음 ‘ㅟ’로 끝나는 용언은 모두 마찬가지다.
‘사겨, 바껴’ 등은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가져다 쓰는 표기형일 테지만 맞지 않다. 국어 문법에서 허용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모음 ‘ㅕ’는 ‘ㅣ’와 ‘어’가 합쳐져서 줄어든 소리를 나타내지 ‘ㅟ’와 ‘어’ 소리의 결합을 나타내지 못한다. ‘신을 신기다’의 ‘신기어’가 ‘신겨’가 되거나 ‘끼어들다’가 줄어서 ‘껴들다’가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사귀어’의 준말이 ‘사겨’로 발음되지도 않으므로 그런 표기는 실제 소리를 온전히 반영하지도 못한다. 입말로는 가능한 소리가 글로는 표현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으므로 불편하더라도 ‘사귀어, 바뀌어’ 등으로 써야 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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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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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내집 - 천상병
누가 나에게 집을 사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목터지게 외친다. 들려다오
세계가 끝날 때까지 나는 결혼식을 몇주 전에 마쳤으니 어찌 이렇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천상의 하나님은 미소로 들을 게다. 불란서의 아르투르 랭보 시인은
영국의 런던에서 짤막한 신문광고를 냈다. 누가 나를 남쪽나라로 데려가지 않겠는가.
어떤 선장이 이것을 보고 쾌히 상선에 실어 남쪽나라로 실어주었다.
그러니 거인처럼 부르짖는다. 집은 보물이다. 전세계가 허물어져도 내 집은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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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村의 夕陽(해촌의 석양) - 한용운
석양은 갈대지붕을 비쳐서
작은 언덕 잔디밭에 반사되었다.
산기슭으로 길을 물 길로 가는 처녀는
한손으로 부신 눈을 가리고 동동걸음을 친다.
반쯤 찡그러진 그의 이마엔 저녁 늦은 근심이 가늘게 눈썹을 눌렀다.
낚싯대를 메고 돌아오는 어부는
갯가에 선 노파를 만나서
멀리 오는 돛대를 가리키면서
무슨 말인지 끊일 줄을 모른다.
서천에 지는 해는
바다의 고별음악을 들으면서
짐짓 머뭇머뭇한다.
∼∼∼∼∼∼∼∼∼∼∼∼∼∼∼∼∼∼∼∼∼∼∼∼∼∼∼∼∼∼∼∼~~~~∼∼
조약돌 - 정지용
조약돌 도글 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앓는 피에로의 설움과
첫길에 고달픈
천제비의 푸념겨운 지줄댐과,
꾀집어 자즉 붉어 오르는
피에 맺혀,
비 날리는 이국 거리를
탄식하며 헤매노나.
조약돌 도글 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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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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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록자불견산 (逐鹿者不見山)
逐:쫓을 축. 鹿:사슴 록. 者:놈 자. 不:아니 불. 見:볼 견. 山:뫼 산.
[동의어] 축수자목불견태산(逐獸者目不見太山).
[출전]《淮南子》〈說林訓篇〉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 곧
① 명예와 이욕(利慾)에 미혹(迷惑)된 사람은 도리도 저버림.
② 이욕에 눈이 먼 사람은 눈앞의 위험도 돌보지 않음. 또는 보지 못함.
③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음.
전한(前漢)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중앙 정권에 대항적인 입장을 취했던 왕족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 ? ~ B.C.122)은 문하(門下) 식객(食客)의 도움을 받아 많은 서책을 저술했는데, 그중 특히 도가(道家)사상을 중심으로 엮은《회남자(淮南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逐鹿者 不見山(축록자 불견산)]
돈을 움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攫金者 不見人(확금자 불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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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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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16
때를 얻은 침묵은 지혜이며, 그것은 어떤 웅변보다도 낫다.
17
우리는 불행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굶주림에 빠진 짐승처럼 신의 도움과 위안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험이 다가오면 자기가 신봉하고 있는 영혼의 세계를 향해 귀중한 시간과 소중한 정신을 기도나 제물을 바치는 일에 소비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해결책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18
어떤 상황을 만날 때마다 이것이 최초의 경험이라고 생각하라. 왜냐하면 그 상황들은 모두 새로운 상태에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
말은 사상의 표현이다. 깊은 지혜를 담고 있으면 생각을 나타내는 말은 더욱 단순해진다.
20
어떤 사람이 죄악을 저지르려고 했다면 그는 벌써 순수한 의미에서 덕을 어긴 것이다. 설사 죄악을 범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결과보다 동기가 우선 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것은 종교적 양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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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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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8.9
아침 9시 10분. 청와대 비서실장 이재항이 2층에 있는 이때의 시간이 9시 40분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각하, 현석호 국방장관하고 삼군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그 밖에 쿠데타에 관련돼 있는 듯한 사람들이 각하를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이재항의 전갈에 윤보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했나? 현석호 국방장관이 삼군 참모총장들하고 같이 들어왔다구?"
"네, 각하."
"현석호 장관이 삼군 참모총장들하고 같이 들어왔다?"
윤보선은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감을 잡기가 어려웠느냐 하면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을 때 장도영이 뭐라고 했던가? <지금 반란이 일어나 진압작전을 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가 불과 한 시간 뒤에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혁명공약>인가 하는 것을 방송하고 있었다. 그런 장도영의 둔갑을 보고 윤보선은 현석호 역시 쿠데타군 쪽으로 둔갑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때 현석호가 삼군 참모총장들과 같이 청와대에 들어오게 됐던 것은, 장도영이 육군본부에서 청와대로 들어오는 도중에 서울 시청에 들러 현석호와 같이 들어왔던 것이다. 반도호텔에서 506방첩대로 향하다 무장군인들한테 체포당했던 현석호는 시청 시장실로 연행되어 연금당해 있었던 것이다. 윤보선은 이재항을 앞세우고 접견실로 내려왔다. 그는 접견실로 들어서면서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올 것이 왔구먼."
올 것이 왔다니 뭐가 왔단 말인가? 그가 이때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던 이 한마디는 뒷날 두고두고 말썽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불씨가 된다. 접견실로 들어온 그는 의자에 앉으며 빙 둘러서 있는 면면들을 한 사람씩 유심히 살펴보았다. 장도영 옆에는 작달막한 키의 박정희가 서 있었으나 윤보선은 그가 누군지 처음에는 알아보지를 못했다. 처음 대하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가 주모자요?"
그랬더니 키가 작달막한 인물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접니다."
"그대도 장군이요?"
"그렇습니다. 육군 소장입니다."
"희생자는 없었소?"
"없었습니다."
"어째서 쿠데타를 일으켰소?"
"대통령 각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몸으로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일념에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서울은 혁명군 수중에 들어와 있고 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박정희의 다음 말을 유원식이 냉큼
"각하, 계엄령을 승인해 주십시오."
"계엄령을 승인해 달라고?"
"네, 각하!"
윤보선은 한동안이나 우람한 체구의 유원식을 쏘아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통령의 승인은 계엄을 선포하기 전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이미 선포한 계엄을 승인하라니 순서가 뒤바뀌지 않았소?"
"그야 물론 각하, 정상적일 때는 대통령의 승인을 얻은 다음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이 순서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혁명을 했단 말씀입니다. 혁명을 하는 마당에 순서 같은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내 승인을 받으려 할..."
"따지고 보면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혁명 대상은 장면 정권이지 대통령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각하께서는 주어진 권한만 행사해 주시면 됩니다."
"이왕 계엄이 선포되었다 하니 그대들의 말이 법이요? 생사가 그대들 말 한마디로 결정될 것 아니오? 굳이 승인이니 뭐니 할 게 뭐가 있겠소?"
이치로 따지면 윤보선의 말이 옳았다. 쿠데타란 어김없는 폭력이었다. 폭력으로 정권을 뒤집어 엎으려는 마당에 굳이 선포해 놓은 계엄령의 추인을 받으려 할 필요는 없었다. 윤보선이 계엄령 추인을 해주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접견실 내에 갑자기 냉기가 감돌았다. 윤보선도 그는 늘어서 있는 면면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그대들이 만일 애국하기 위해서 혁명을 했다면 애국하는 방향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소? 오늘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물론 우리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나는 보고 있소. 민주당 정권이 무능했던 것도 사실이오. 사회가 하도 혼란스러우니까 결국은 그대들이 목숨을 걸고 거사하기까지 이르렀을 것이오. 필경 이런 일이 일어나고야 말리라고 나도 보고 있었소."
윤보선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현석호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민주당 정권을 무능한 정권으로 매도하고 쿠데타를 찬양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듣자
"군의 책임자로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께서 헌정을 문란케 한 행위를 찬양하는 듯한 말씀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대통령께서는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각도에서 지금의 비상사태를 잘 수습해야 옳다고 봅니다."
그는, 더 이상 쿠데타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 놓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합법적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정권 인수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현석호는 결코 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한 목숨 버릴 각오가 돼 있지 않고는 감히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 앞에서는 도저히 뱉아낼 수 없는 말이었다. 험악해지는 것이었다. (장도영이 이놈의 새끼, 현석호란 놈을 어째서 이 자리에 데려온 거야? 다된 밥에 재를 뿌리자는 수작이야 뭐야?) 험악해진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장도영을 매섭게 노려보는 폼으로 보아 박정희는 현석호보다는 장도영을 더 나무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데, 윤보선도 현석호의 말이 귀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나라를 구하는 길이 이 길밖에 더 있겠소?"
거칠게 대꾸했다.
"이 길밖에 없다니요?"
현석호도 지지 않고 되물었다. 그러면 쿠데타를 지지하겠다는 그 소리냐고 물었던 뜻밖이었다.
"그럼 군사혁명이 일어난 이 마당에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윤보선은 쿠데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태도였다. 현석호는 더욱 울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대들듯이 억양을 높였다.
"물론 우리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민주당 정권은 합헌정부인 만큼 합법적 절차가 아니고는 정권을 넘길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밝힌 것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께서도 우리가 군부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근원적 과오가 뭐란 말씀입니까?"
윤보선도 억양을 높였다.
"그대들의 처사가 옳다고 보오? 거국내각을 제대로 한 것도 없고,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정치를 해온 것도 없으니 일이 이렇게 벌어지게 된 게 아니오? 이번에는 단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윤보선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장면에 대한 묵은 감정을 이 자리에서 털어 놓고야 말 속셈인 것 같았다. 뒤에 구체적으로 소개하게 되겠지만 윤보선은 장면에게 수차 <거국내각을 조각하라> 권고했던 것이다. 그것을 장면이 거부하자 윤보선은 이때부터 장면 정권 타도를 구상하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석호는 윤보선의 지탄을 되받았다.
"대통령은 우리가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정치를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있었으면 있었다고 말씀해 보십시오!"
"내가 뭐라고 했어? 그렇게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 말을 안 듣더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정쟁(政爭)이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정쟁이 쿠데타의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윤보선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마당에 너희들이 잘했다 못했다 논쟁을 해봐야 속된 말로 스타일만 구길 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현석호가 따지듯이 다시 이었다.
"이제 계엄령이 선포된 비상사태의 수습을 대통령께서 잘 처리하셔야 할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현석호가 <합헌적> 운운한 것은 물론 <네가 헌법을 지켜야 할 대통령으로서 탈권을 하려 드는 쿠데타를지지해서야 되겠느냐?> 하는 간접적인 경고였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윤보선과 현석호의 논쟁을 듣고 있던 박정희는 윤보선의 속마음을 헤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제 저희들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각하."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앞장서 나가자 여타의 인물들은 윤보선과 더 나눌 얘기가 없었다. 장도영을 위시한 해.공군 참모총장들도 일제히 거수경례를 붙이더니 박정희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28년 만인 1989년 5월 16일자부터 [동아일보]에 <외로운 선택의 나날>이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을 집필한 바 있다. 이때 현석호와의 논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현석호 국방장관이 삼군 재휘관들과 함께 들어왔을 때다. 내가 계엄령의 추인을 거부하고 난 직후, 현 장관은 그 경황중에서도 혁명이 벌어진 책임문제를들고 나왔다. 사실 당시 현 장관에게 격한 어조로 말을 했던 것 같다. 당시 현 장관이 혁명군에게 체포된 상태에서 끌려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격한 어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정이 격해진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의 어느 날 밤, 나는 장면 총리와 자정이 넘도록 시국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학생들의 데모가 연일 벌어졌다. 그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불안심리는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장 총리에게 어떤 비상대책이라도 세워 시국을 수습할 것을 권유했다. 장총리는 눈을 감은 채 내 얘기를 듣기만 했다. 잠시 후 장 총리는 자리에서 벌떡일어났다. 표정이 창백했다.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던지고 방을 나섰다.
"이승만 씨도 10년 집권을 했는데..."
어디 지금 생각해도 몹시 언짢은 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현석호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데모가 아침 저녁으로 끊일 줄 모르고 일부 과격학생들은 남북회담을 하겠다고 하고 있소. 또 일부에서는 장 정권 파괴를 목표로 해서 음모를 꾸미는 모양이오. 무슨 비상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현 장관은 여유만만했다.
"비유를 하겠습니다. 자동차가 언덕 위에서 고장이 나서 굴러 내려간다고 합시다. 굴러 내리는 중간에서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밑으로 완전히 내려가 요행히 서든지, 전복이 되든지 해야그때 가서 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습니까? 도중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던 현 장관을 5월 16일 아침 청와대에서 군인들과 함께 만났던 것이다....... 장도영도 84년 9월호 [신동아]에 기고한 <나는 역사의 죄인이다>라는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현 장관은 윤 대통령의 말이 불법행동에 한 단호한 반대 표시로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어 윤 대통령과 현 장관은 사태가 벌어지게 된 데 대한 민주당과 정부의 책임에 관해 서로 엇갈린 말을 주고받았다.
박정희 등이 접견실을 물러날 때 맨 마지막에 나간 사람은 유원식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 대령, 박 소장하고 단 둘이 좀 만날 수 없겠소?"
박정희와의 단독회담을 요구했다.
"알겠습니다. 박 장군을 곧 모시고 오겠습니다."
유원식은 일단 물러났다가 잠시 후 박정희와 함께 다시 들어왔다. 유원식은 윤보선 앞에 서자 거수경례를 붙이고 나서 이렇게 주워 섬기는 것이었다.
"각하, 우리들은 대통령 각하께 과거에도 충성을 다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앞으로도 그 충성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윤보선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유원식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그럴싸한 비유였다. 유원식이 말을 끝내자 박정희가 그 뒤를 이었다.
"각하, 각하께서 이 혁명을지지하는 성명을 내주십시오."
윤보선은 혁명을 지지해 달라는 박정희의 요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계엄령 선포는 잘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그 말을 듣자 박정희는 보일 듯 말 듯 빙긋 회심의 비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면 윤보선은 어째서 박정희와 단 둘이 만나기를 바랐던가? 그것은 말할 것도 때문이었다. (쿠데타를 한 자들이 나를 어찌 처리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대통령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와 단 둘이 만나기를 요청했던 것인데, 다시 만나자 유원식이 박정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각하, 우리들은 대통령 각하께 과거에도 충성을 다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어쩌고 하며 대통령 자리에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지를 않았는가. 윤보선이 입이 헤에 하고 벌어졌을 것은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윤보선은 대통령 자리에 변동이 없다면 쿠데타 쪽에 협력을 하는 것이 현명한 그래서 조금 전에 계엄령 추인을 거부했던 처지라 당장에 뒤집어 엎기는 체통도 서지 않을 것 같고 해서, <계엄령 선포는 잘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했던 것이다. 이것을 뒤집으면 쿠데타를지지하고 협력하겠다는 그 뜻이었던 것이다.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직이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는 받을 수 있어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주어져 있지 않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정치인은 윤보선이 대통령직에 미련을 갖고 박정희를 불러들여 흥정하는 듯한 언행을 한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좋게 해석되어지지가 않는다.
청와대에서 윤보선이 박정희를 불러들여 밀담을 나누고 있는 그 시각. 서울시 경찰국장에는 출동부대의 지휘관들이 모였다. 해병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을 위시해서 제6군단 포병단당 육군 대령 문재준, 그리고 공수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 등과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대대장급 지휘관들이었다.
"제관들을 이 자리에 소집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일단 정부 각 기관을 장악함으로써 혁명의 제1단계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제1군이라든지 또 미 8군의 동태가 애매한 이상에는 수도 방위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윤근으로부터 회의 소집의 목적을 듣자 끄덕였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도방위사령부를 설치해야 한다는 김윤근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수도방위사령부 설치문제가 이의 없이 통과되자 각급 지휘관들은 출동부대 중 제일 계급이 높은 김윤근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이에 김윤근은 사령관 취임을 흔쾌히 승락하고 제6군단 포병단의 대대장인 육군 중령 신윤창을 수도방위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수도방위사령부는 반혁명군의 출동에 대비해서 방어의 목적에서 임시적으로 설치됐던 것이나 쿠데타가 성공하자 그것이 기정사실화되어 뒤에 수도경비사령부로 개칭되었다.
9. 윤보선, 쿠데타를 지지하다
오전 10시. 제1군 사령관 육군 중장 이한림은 휘하부대의 출동태세를 점검한 뒤, 근 1시간 동안이나 번민에 거듭했다. (출동명령을 내려서 쿠데타를 진압해야 하나? 아니다. 북한 괴뢰군의 재침입에대비하고 있는 제1군이 통수권자의 명령 없이 진지를 이탈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놓고 어느 쪽을 택해야 좋을지 몰라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5시 2분에 쿠데타가 방송됐으니만큼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 만큼 만일 휴전선에서 북한 괴뢰군하고 대치하고 있는 부대를 빼돌렸다가 북한 괴뢰군이 구멍 뚫린 곳이 어디라는 것을 알고 또다시 기습남침을 감행하는 날에는 쿠데타 진압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한림이 고민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1시간 동안이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이한림은 한 통의 편지를 쓰고 난 다음 부관을 불렀다.
"귀관, 귀관은 즉시 사복으로 갈아입고 서울로 가서 이 편지를 장면 총리에게 전하라. 만일 장면 총리의 거처를 알 수 없거든 명동 성당으로 가서 노기남(盧基南) 주교를 찾거나 경향신문사로 가서 지금 막 쓴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는 장면에게 보내는 밀서에서, <제1군 사령부의 임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군의 지휘관은 통수권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의무가 있으니만큼 국무총리 각하의 명령이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의 이한림의 처지로 보아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이한림이 처했던 처지를 이해는 하면서도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이는 것을 금할 길이 없다. 이 무렵 그에 대한 세평이 군인다운 군인이라는 칭송의 소리가 높아져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청와대를 물러나오자 장도영은 현석호를 주고 육군본부로 향하다가 도중에 생각을 고쳐먹고 미8군 사령부로 향했다. 매그루더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장도영이 사령관실로 들어서자 매그루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너럴 장, 나는 지금 합법적으로 수립된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소. 그와 함께 쿠데타군은 지체없이 원대복귀하라는 명령도 말했소. 내가 성명을 발표하자 마샬 그린 대리대사도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소. 아시겠소?"
유엔군 총사령관 겸 미8군 사령관인 매그루더의 성명이 발표된 것은 오전 10시 18분이었다. 한국방송인 KBS, MBC, TBC 3개방송은 이미 쿠데타군에 의해 접수되었기 8군 소속의 방송과 일본 오끼나와에서 방송을 하고 있던 VUNC, 곧 유엔군 총사령부의 방송을 통해 방송되었다. 매그루더의 성명내용은 이러했다.
본관은 유엔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휘하의 모든 장병에게 장면 총리가 수반인 정당하게 인정된 한국 정부를 지지할 것을 요구한다. 본관은 한국군 삼군 총장들이 그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해서 통치권이 즉각 정부당국에 이얗하고 군의 질서가 회복되도록 해줄 것을 기대한다.
또한 미국 대리대사 마샬 그린의 성명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정부를 지지함에 있어 유엔군 총사령관이 취한 입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조한다. 나는 지난 7월 한국 국민이 선출했으며, 지난 8월 총리 선출에 의해 구성된 한국의 합헌정부를 미국이지지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명백히 하고 싶다.
두 사람이 미 8군 방송과 유엔군 총사령부의 방송을 통해 이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의논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제너럴 장, 우리 두 사람의 성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소? 그것은 곧 미국 정부는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매그루더는 덧붙이며 눈을 부라렸다. 단정했다. (미국이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나선 이상에는 박정희의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확인한 장도영은 다시 육군본부로 돌아왔다. 참모총장실에 들어서니 박정희와 유원식 등이 이미 와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각하, 속히 계엄사령관 취임을 승락하시고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정희의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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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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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서기 51년, 날씨가 좋지 않아서 수입이 중단되는 바람에 수도 로마의 테베레 강변과 외항 오스티아의 창고에 비축된 밀이 보름치밖에 남지 않는 사태가 일어났다. 시민들은 공황에 빠졌다. 무상으로 밀을 배급받고 있는 빈민들까지도 배급이 중단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했다. 비축량이 보름치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밀의 시중 가격이 폭등했다. 이런 경우 책임자로 비난받는 것은 으레 황제였다. '안전'과 '식량'을 보장하는 것이 황제의 2대 책무였기 때문이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주곡을 외부에 의존한 국가 정책의 실패라고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이때는 황제의 명령으로 여러 곳에서 밀이 수집되고 날씨도 좋아졌기 때문에, 식량을 달라는 시위까지는 일어나지 않고 사태가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어서, 황제가 임시 대응책을 취해야 하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이런 식량 위기는 주곡인 밀을 외부에 의존하는 국가 정책의 실패라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 로마는 그라쿠스 형제가 앞장서서 제창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실현한 '농지법'에 이미 나타나 있듯이, 공화정 시대부터 자작농을 장려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소기업 보호육성에 열심이었다. 빈민층에 대한 사회복지정책인 '소맥법' 역시 그라쿠스 형제가 시작한 정책이지만, 이 법에 따라 빈민에게 무상으로 밀을 배급하는 것은 이미 국가 정책으로 정차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 중시된 것은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만이 아니라 종신독재관으로 제정의 토대를 쌓은 카이사르의 지지층도 중류층과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원로원에 의석을 가진 원로원 계급에 속한다. 미국인 학자들 중에는 전자를 '민주당', 후자를 '공화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후자에는 공화정 지지파가 많았기 때문에, 의역하면 '공화당'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양대 정당을 다른 선진국 정당처럼 간단히 좌파와 우파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고대 로마의 '양대 정당'도 정책상으로 간단히 양분할 수는 없다. 로마인의 태반이 이데올로기보다는 통치 능력을 더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로원 체제 고수파 중에는 설령 본심은 기득권 유지에 있다 해도 이론에서는 공화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이데올로기의 주창자는 키케로였고, 이를 받들어 카이사르를 암살한 것이 브루투스다. 그러나 공화파는 우선 카이사르에게 패했고, 카이사르를 죽인 뒤에는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권력구조가 바뀌었다. 미국에 비유하면, '민주당'의 연속 집권 시대에 접어든 셈이다. 고대 로마의 '공화당'은 원로원에서 과반수를 계속 유지하여, 황제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 머무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황제도 단순한 좌파 정권은 아니었다.
본국 이탈리아의 자작농을 덮친 최초의 위기는 카르타고와 벌어진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시칠리아 섬에서 밀이 본국으로 대량 수입되면서 일어났다.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시칠리아에는 큰 농장이 발달하여 시칠리아산 밀이 이탈리아산 밀보다 값이 쌌다. 본국의 밀 농업은 경쟁력을 잃는다. 그라쿠스 형제가 강행하려다가 살해당했기 때문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농지법'은 존망의 위기에 놓인 본국 자작농을 구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대 로마인은 선택권을 하나로 좁혀서 그것 외에는 생각지않는 융퉁성 없는 민족은 아니다. 밀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다른 생산물로 바꾸어 승부할 정도의 유연성은 갖고 있다. 이탈리아 반도의 밀의 대량생산에 적합한 넓은 평야는 없지만, 포도나 올리브를 생산하기에는 적합한 지형을 갖고 이TEk. 품종은 달라도 농산물이 다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자 본국 이탈리아의 농업도 되살아났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성립시킨 '농지법'에 따라 중소 규모의 자작농을 핵심으로 하는 본국 이탈리아의 농업이 재건되었다. 다만 주곡인 밀을 수입에 의존하는 체제는 그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시장 원리에 맡긴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그것을 제국의 통치 전략으로 생각했다. 뭐든지 자기들끼리만 하려 들지 않고, 능력있는 남에게 맡기는 것이 로마인의 뛰어난 점이었다. 밀 생산에 적합한 땅이 다른 데 있으면 밀은 거기서 생산하고 자기들은 그걸 수입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상,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을 고려해야 하는 제정 시대가 도래하면서 주곡의 자급자족이 더욱 요원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본국의 자작농을 정책적으로 장려한 것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이들이 유권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거대책이었다. 그러나 속주민은 유권자가 아니다. 로마인이 현지인을 고용하여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속주의 지배적인 농업 형태가 된 것도 속주에서는 유권자를 배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정 시대의 로마에도 현대의 다국적 기업이 탄생하게 된다. 속주의 대농장은 노임이 싼 노예나 현지인을 대량으로 고용하여 경영하는 일종의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의 만년에 발생한 금융위기도 요즘으로 말하면 '대출경색'이다. 금융업자가 속주의 대농장에만 돈을 빌려주고 본국 이탈리아의 자작농한테는 대출을 꺼렸기 때문에 돈줄이 막힌 것이다. 그때 티베리우스는 본국 농업의 공동화를 막기 위해 본국의 중소기업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했다. 융자의 일부는 반드시 본국에 투자하도록 규정한 카이사르의 법을 엄격하게 시행하고, 1억 세스테르티우스의 공공자금을 도입하여 3년간 무이자로 빌려준 것이 그의 대책이었다.
농산물의 종류를 바꾸고 품질 향상에 노력한 것도 본국 농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데 도음이 되었다. 로마에 후추 따위의 향신료를 수출하는 인도 왕의 식탁에는 이탈리아산 고급 포도주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은 대경제권이기도 했다(로마 제국과 유럽 연합(EU)을 비교한 오른쪽 지도를 참조할 것). 통치전략상의 문제도 있어서, 주곡인 밀을 수입해 의존하는 방식을 바꿀 수는 없었다. 늘 거기에 마음을 쓴 티베리우스처럼, 또는 밀 수송선의 손해를 보상해준 칼리굴라처럼, 또는 오스티아 항구를 개선하기 위해 대규모 항만공사를 결행한 클라우디우스처럼, 로마 황제들은 본국에서 필요로 하는 밀을 확보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타키투스의 비난은 이런 국제정치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식량불안이라는 현상밖에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인구 100만 명에 이르는 수도 로마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고, 본국 이탈리아에서도 식량을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는 일어난적도 없었다. 만약 그런 시위가 일어났다면 황제의 목쯤은 간단히 날아가버렸을 것이다. 안전보장과 식량확보 이외에 로마인들이 황제의 책무, 즉 국가의 책무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회간접자본의 정비였다. 안전도 보장하고 식량을 확보하는 데에도 소흘하지 않았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시민에게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한 것은 국가 재정 건전화를 목표로 긴축재정을 실시하여 공공사업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도 칼리굴라의 방만한 재정을 뒤처리하는 일을 떠맡아야 했지만, '평화' 덕분에 제국 경제력이 증강되어 있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만큼 강력한 긴축재정을 실시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역사가이기도 한 클라우디우스는 위정자의 책무인 공공사업의 중요성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칼리굴라가 착공한 수도공사는 클라우디우스가 이어받아 서기 51년에 완공했다. 로마의 사회간접자본에서는 착공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칼리굴라는 누구나 잊고 싶어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수도는 '아쿠아 클라우디아'(클라우디우스 수도)라고 불렸다. 2천 년 뒤인 지금도 로마 근교의 평원에 길게 이어져 있는 구조물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오스티아 항만공사도 완공을 앞두고 마지막 '끝손질'만 남아 있을뿐이었다. 이것이 완성되면 지중해 최대의 물동량과 지중해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는 항구가 출현한다. 본국 이탈리아에서 클라우디우스가 벌인 또 하나의 공공사업은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피치노 호를 간척하여 경작지로 바꾸는 공사였다. 그러나 이 사업만은 실패로 끝났다. 운하를 충분히 파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 범람하여 사망자까지 나오는 참사로 끝나버렸다. 황제를 모시고 운하 완공을 축하할 예정이었던 행사는 황제 앞에서 나르키소스와 아그리피나가 말다툼을 벌이는 싸움판으로 변했다. 아그리피나는 공사전반을 책임진 나르키소스가 공사비의 일부를 착복하여 부실공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따. 나리키소스는 해방노예지만 오랫동안 황제의 실무를 대행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아그리피나의 그런 비난을 잠자코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황후에게 여자가 뭘 안다고 주제넘게 나서느냐고 쏘아붙였다. 클라우디우스는 말다툼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허둥댈 뿐이었다. 카이사르 기획에 바탕을 둔 이 토목사업이 완성된 것은 그로부터 1천 800년 뒤인 19세기 말이었다. 오늘날에는 광활한 경작지가 되어 있어서, 한때 거기에 드넓은 호수가 있었다고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고대 로마에도 생태학자가 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르키소스가 아그리피나에게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고 대꾸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그리피나가 아들(네로)을 원로원에 데뷔시키는 데 전념하든 말든, 비서실장인 나르키소스는 주군인 클라우디우스를 도와서 수수하고 통상적인 정치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공공사업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제국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금 감면을 요청해온 비잔티움 주민에게 속주세를 면제해준 것도 그런 일 가운데 하나였다.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영어로는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스탄불이라고 불리는 비잔티움은 서기 1세기에는 제국의 일개 소도시에 불과했다. 특색이 있다면 흑해 출입구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곳 주민들이 황제에게 세금 감면을 요청한 것은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화재가 일어났기 때문도 아니다. 원인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경제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5년 동안 속주세를 면제해주기로 결정했다. 세금은 몇 년 동안 면제해줄 테니까 그동안 자력으로 재기하라는 것이 이런 경우에 로마의 중앙 정부가 취하는 기본방침이었다. 세금을 낼 수 없게 된 원인이 지진이나 화재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든, 경제 부진 같은 인위적인 재해든 관계없이 면제조치를 취해준 모양이다.
사망
서기 54년 가을. 클라우디우스는 이제 63세가 되어 있었다. 황제에 즉위한 지 13년이 지났다. 예상치도 않게 굴러든 황제 자리였지만, 그는 그 13년 동안 성심성의껏 임무를 수행했다고 자부했다. 피치노 호수의 간척사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가장 신경을 쓴 오스티아 항만공사는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63세의 클라우디우스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도 준비가 끝나 있었다. 바꿔 말하면 황제로서의 클라우디우스를 필요로 하는 일은 모두 끝났다는 뜻이다. 황제의 섭정이 되어 스스로 국정을 관리하러면, 황제가 될 사람이 너무 성숙해도 곤란하다. 때마침 그 무렵, 건강을 해친 나르키소스가 나폴리 근교에서 요양하기 위해 수도 로마를 떠났다.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스런 나르키소스가 없는 지금이야말로 아그리피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버섯요리를 무척 좋아하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독버섯을 먹였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 때문인지 클라우디우스는 식사를 한 뒤에 곧바로 증세를 보이지 않고 한밤중이 지났을 때 갑자기 용태가 나빠져서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황제의 죽음은 즉시 공표되지 않았다. 이튿날인 10월 13일 정오, 황궁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고, 네로가 근위대장인 부루스와 나란히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황제를 경호하는 역할을 맏고 있는 1개 대대 1천 명의 근위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때 비로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네로는 그 길로 곧장 로마 근교에 있는 근위대 병영으로 가서, 근위병들한테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받았다. 네로는 병사들에게 일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증여금을 약속했다. 13년 전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할 때와 똑같았다. 근위대가 네로를 지지한 사실을 안 원로원이 재빨리 네로에게 전권을 부여하기로 결의한 것도 13년 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의 기분은 13년 전과 같지 않았고, 네로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안 시민들의 반응도 13년 전과는 달랐다. 원로원 의원들과 일반 서민들은 아직 17세도 되지 않은 젊은 황제의 출현을 환영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이제 해방노예 나부랭이가 우쭐대는 꼴도 보지 않게 되었다고 기뻐했고, 일반 서민들은 마누라 엉덩이에 깔려 꼼짝 못하는 클라우디우스를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에서는 세네카가 쓴 추도사를 네로가 낭독했는데, 네로의 추도사가 클라우디우스의 신중함과 사려깊음을 찬양하는 대목에 이르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원로원에서 네로가 맨 먼저 꺼낸 말은 클라우디우스를 신격화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신격'이 되었다. 하지만 네로에게 이런 제안을 시킨 아그리피나의 속셈은 클라우디우스가 살해된 게 아닐까 하는 의혹으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돌리는 데 있었다고 한다. 신격화라는 파격적인 영예를 주었으면서도,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은 공표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네로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신격이 되면, 그 신격에게 바치는 선전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를 모신 신전은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처럼 도심인물이 없는 첼리오 언덕이 신전 건축부지로 결정되었다. 게다가 건축공사도 얼마 후에는 중단되었다. 책임지고 공사를 추진할 의무가 있는 네로 황제가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황제의 직무에 몰두한 클라우디우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를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와 동격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로마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로마 역사상 '신격'으로 남은 것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뿐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신격 클라우디우스가 된 뒤에도 사람들의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치명적인 독화살을 날린 것은 네로의 가정교사이고 네로가 황제에 즉위한 뒤에는 보좌관 역할을 맡게 된 세테카였다. 로마 제국 최고의 철학자이자 비극작가일 뿐 아니라, 네로 황제의 보좌관이 되어 로마의 지식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세네카는 'Apokolokyntosis'라는 제목의 글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실컷 비웃었다. '아포콜로킨토시스'가 무슨 뜻인지는 현대의 연구자들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15쪽 남짓한 이 글의 내용은 '거부당한 신격'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좋다는 느낌을 준다. 죽은 뒤 신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된 클라우디우스가 얼마나 신격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인지가 폭로되고, 마지막에는 신격 아우구스투스한테도 단죄를 당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본문보다 긴 '주석'을 붙여서 간행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낭송되는 것을 듣기만 해도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네카는 타키투스에게 "유쾌한 재치와 당대의 취향에 가장 잘 들어맞는 감성의 소유자"라는 평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풍자문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쓰거나 아니면 영원히 쓰지 않는 게 보통이니까, 10월 13일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직후에 씌어져, 12월 17일부터 시작되는 로마인의 '바캉스' 기간인 사투르누스 축제 때 네로가 참석한 잔치자리에서 낭송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들으면서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나는 2천 년 뒤에 읽었기 때문인지, 인간성에 대한 상냥함이 결여되어 있는는 느낌밖에는 받지 못했다. 이것은 재기 넘치는 지식인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향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자신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존경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존경받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실제적인 '플러스 알파', 즉 파급 효과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심성의껏 해나가면 남들도 알아줄 거라고 믿어버린다. 유감이지만 인간성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인간이란 존재는, 마음속으로는 남에게 기분좋게 속기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나는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든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기분좋게 남을 속이는 재주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재주의 달인이었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인에게는 두말할 여지없는 '신격'으로 자리잡고, 세계 역사에서도 제일급 스타라는 사실이 인간성의 이 진실을 증명해 주는 건 아니까.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아내 아그리피나의 야망에 희생되어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벌여놓은 사업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만년의 클라우디우스가 노화현상을 보였다고 말했지만, 나이가 들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노화현상이라기보다 13년 동안 황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피로가 쌓인탓이 아닌가 싶다. 티베리우스는 갑절에 가까운 23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렸지만, 그것은 카프리 섬에 은둔하여 자기에게 편리한 환경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카프리 섬에서 10년 동안 살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무려 40년 동안이나 황제 자리에 있지 않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단순히 성심성의만으로 황제의 직무를 수행한 사람은 아니었다. 반대로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회의에도 성실하게 참석하여 충분히 토의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법정에도 배심원들이 싫어할 만큼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황제한테는 그밖에도 중요한 임무가 있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비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법률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데 신경을 썼다. 이런 생활을 10년 이상 계속하면 기력이 쇠진하는 것도 당연하다. 살해된 것은 딱하지만, 그때 죽은 게 차라리 다행이 아니었을까. 죽어서 신들의 법정에 끌려나갔다 해도, 로마의 신들이라면 그를 동정해주었을 테고, 아우구스투스라면 클라우디우스를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시종일관 도와준 해방노예 나리키소스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소식을 전해주는 확실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역사가는 그가 전재산을 바치는 조건으로 남부 이탈리아에서 일개인으로 살아가는 게 허용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옥사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클라우디우스를 풍자한 세네카의 글이 네로를 비롯한 궁정인들 앞에서 낭송되었을 때, 그의 동료였던 팔라스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르키소스의 모습은 없었다. 현대 연구자들 중에는 그가 나폴리 근교로 요양하러 가게 된 원인은 보통 질병이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주인인 클라우디우스도, 그의 노예였던 나르키소스도 기력이 쇠진한 것은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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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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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들 - 작은나무(리틀 트리) - 체로키 족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를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하며, 또한 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을 사랑할 수도 없다..."
나의 이름은 작은나무(리틀 트리)이고, 나는 체로키 족 출신 인디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 만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고, 그날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날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버스를 타고 할아버지의 오두막이 있는 테네시 산중으로 갔다. 버스를 내려서도 긴 띠처럼 풀이 자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는데, 멀리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그때 내 뒤에서 오시던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여보, 작은나무가 지친 것 같아요."
그 말씀에 저만치 앞에 가시던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셨다. 할아버지는 나를 내려다보셨다. 큰 모자에서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에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소중한 걸 잃었을 때는 녹초가 되는 것도 괜찮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할아버지를 따라잡기가 좀 쉬웠다. 할아버지의 걸음이 느려졌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역시 지치신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걸은 뒤 우리는 이번에는 차도 다닐 수 없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곧장 산의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가다가는 꼭 그 산과 부딪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우리가 계속 걸어감에 따라 산은 소리없이 열리면서 우리를 제 품안에 맞아들였다.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나는 서둘러서 바지를 입고 윗도리의 단추를 채운 뒤 할아버지와 함께 산 위쪽으로 산칠면조 사냥을 나갔다. 밖은 아직 어둡고 추웠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새벽바람조차도 나뭇가지를 흔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시고 오솔길 한쪽을 가리키셨다.
"여기를 보렴. 산칠면조가 지나간 자국이 보이지?"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채, 흙 위에 찍힌 작은 새발자국을 여럿 찾아냈다.
"덫을 놓기로 하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오솔길을 벗어나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구덩이 하나를 찾아내셨다. 우리는 구덩이 안에 들어찬 낙엽을 걷어냈다. 그런 다음 할아버지와 나는 둘이서 구덩이 속의 흙을 밖으로 퍼내기 시작했다. 내 키 높이만큼 구덩이가 깊어졌을 때 우리는 나뭇가지와 낙엽을 끌어모아 구덩이를 위장했다. 그리고 나서 할아버지는 구덩이 있는 데서부터 아까 산칠면조 발자국들이 있는 곳까지 좁다란 길을 내셨다. 길이 완성되자 할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붉은 인디언 옥수수 알들을 꺼내 그 길 위에 점점이 뿌려 놓으셨다. 구덩이 안에도 한 줌 던져 넣으셨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흙을 뚫고 솟아오른 얼음들이 우리의 발 아래서 부서졌다. 이윽고 아침해가 건너편 산 위에서 솟아올라 눈부신 빛으로 대기를 가득 채웠다. 얼음으로 덮인 나뭇가지들이 그 빛을 반사하는 바람에 눈이 아렸다. 이제 산은 일시에 깨어 일어나 대기중에 엷은 숨을 내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지켜보셨고, 나무들 사이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부는 아침 바람소리와 더불어 점점 뚜렷해져 가는 산의 숨결에 귀 기울이셨다.
"산이 살아나는구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요, 할아버지. 산이 살아나고 있어요."
이렇게 할아버지의 말씀을 받는 그 순간 나는 알았다. 할아버지와 내가 사물에 대한 똑같은 이해의 순간을 체험했다는 것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으나 문득 바라보니 한 귀퉁이에서 작은 점 하나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커져갔다. 커다란 새였다. 새는 자기 앞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으려고 해를 마주보는 자세로 날아오다가 번개같이 산허리의 풀밭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날개를 반쯤 접은 채 화살처럼 메추라기떼를 향해 내리꽂혔다.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셨다.
"저게 늙은 매 탈콘이다."
메추라기들은 혼비백산 숲 속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동작이 굼떴다. 매는 그놈을 강타했다. 깃털이 공중에 흩날리면서 메추라기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조금 뒤 매는 메추라기를 두 발로 움켜쥐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슬픈 표정까지 어찌할 순 없었다. 이런 나를 보더니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슬퍼할 필요없다. 작은나무야, 이것이 자연의 이치란다. 매는 느린 놈을 잡았고, 그 때문에 느린 놈들은 자기를 닮은 느린 자식들을 세상에 내보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 매는, 빠른 놈의 알이거나 느린 놈의 알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메추라기 알을 먹어치우는 들쥐 수천 마리를 잡아먹지. 이런 식으로 매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메추라기를 돕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칼로 흙 속에 묻힌 어떤 달콤한 식물 뿌리를 캐내어 절반을 잘라 나한테 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필요한 만큼만 갖는 것,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사슴 사냥을 할때도 가장 훌륭하고 멋진 놈을 잡아선 안 된다. 그중 작고 느린 놈을 잡아야지. 그러면 사슴들은 더욱 강해지고, 그래서 늘 우리에게 고기를 마련해 주게 되지. 표범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너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자연의 이치를 지켜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소리내어 웃으셨다.
"그런데 꿀벌만이 저한테 필요한 것 이상을 모아둔다. 그러니까 결국은 곰이나 사람한테 꿀을 빼앗기고 말지. 인간들 중에도 그런 자가 있다. 제 몫 이상을 저장하고 저 혼자만 잘 먹고 지내려는 자들이지. 결국은 빼앗기기 마련이야. 그 때문에 전쟁도 하게되고... 그들은 필요도 없는데 제 몫 이상을 차지하려고 별별 허튼 소리를 다 늘어놓는다. 또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자기가 더 많이 가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사람들은 그런 명분과 허튼 소리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다고 해서 자연의 이치가 바뀌어지진 않아."
할아버지와 나는 산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우리가 산칠면조 덫 있는 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와 있었다. 덫을 들여다 보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산칠면조들이 내는 소리로 그것들이 그 안에 잡혀 있음을 알았다. 산칠면조들은 놀라서 산칠면조 특유의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푸드덕거렸다.
"할아버지, 나가지 못하게 막는 문도 없는데 왜 저것들은 머리를 낮추고 기어나오지 않을까요?"
내가 묻자, 할아버지는 구덩이 안으로 한껏 팔을 뻗어 연신 꽥꽥거리며 난리를 치는 큼직한 산칠면조 한 마리를 끌어냈다. 가죽끈으로 그 놈의 다리를 묶은 다음 할아버지는 날 쳐다보며 씩 웃으셨다.
"이 늙은 산칠면조는 어딘가 사람을 닮은 구석이 있지. 이 놈들은 제가 뭐든지 다 안다는 듯이 생각하고는 고개를 낮추어 네 주위를 살펴보려고 하는 법이 없어요. 언제나 목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대가리를 치켜세우고만 있으니 무얼 알 턱이 없지. 그렇게 하고 다니자면 그 머리가 여간 무거운 짐이 되지 않지. 우리 체로키 부족이야 우리 머리가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또 다른 산칠면조들을 꺼내 다리를 묶고는 땅바닥에 눕혔다. 모두 여섯 마리였다. 할아버지는 그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모두 나이가 비슷하다. 머리 벼슬의 두께를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지. 작은나무야, 우리는 세 마리밖에 필요없으니 네가 한번 골라 보거라."
나는 퍼덕이는 산칠면조들 주위를 돌면서 살펴보다가 마침내 그중 작아보이는 세 마리를 골라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나머지 세 마리의 다리에서 가죽끈을 끌러 주기만 하셨다. 풀려난 놈들은 날개를 휘저으며 허겁지겁 산비탈을 굴러내려갔다. 할아버지와 나는 칠면조를 어깨에 둘러메고 산길을 내려갔다. 산칠면조는 꽤 무거웠지만 어깨에 닿는 그 감촉에 마음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겨울의 늦은 오후였고 바람은 잔잔했다. 나는 이 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나는 이미 자연의 이치를 하나 터득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산짐승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짐승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짐승들을 '쫓아야 할'목표물로서가 아니라 '더불어'사는 존재들로 보셨다. 그러나 얼굴 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매우 거칠고 무례한 자들이었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의 존재를 잘 참아내셨다. 도시인들은 사냥개들을 끌고와서는 시끌벅적하게 온 산을 들쑤시며 다니곤 했다. 그 바람에 산짐승들은 그들만 나타나면 숨을 곳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들은 열두 마리의 산칠면조를 봤다 하면 그 열두 마리를 모조리 잡아죽이려고 덤벼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직성이 제대로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네가 드나드는 산에 점점 짐승들의 씨가 마른다고 연신 불평을 해댔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더러 머리를 흔든 적은 있었으나 언제나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내게만은 말씀해 주셨다. 그들은 체로키 부족의 이치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나 나는 무척이나 말주변이 없었고 말에 대한 감각이 둔한 편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경우 예외가 있다면 산이나 사냥, 또는 날씨 등에 관해 말씀하실 때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말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면 시끄럽고 골치 아픈 일들도 훨씬 덜할 거라고 하셨다. 어느 세상에나 똥 같은 자식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말썽을 불러일으키는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들을 열심히 만들어 내고 있다고 내 생각에도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보다는 그 말이 갖는 '소리'를 더 높이 치셨다. 다시 말해 어떤 말이 어떤 의미를 지녔느냐보다는 그 말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느냐에 더 관심이 있으셨다. 할아버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라도 음악소리를 들을 때는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것에 대해선 할머니도 같은 의견이셨다. 두 분이야말로 대화할 때 말뜻보다는 말소리에 의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분들이셨으니까. 나는 어느 날 밤 늦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아이 킨 예(I kin ye)."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이 말은 그 속에 담긴 느낌으로 볼 때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이었다. 또 할머니는 말씀 도중에 할아버지에게 곧잘 "두 유 킨 미?"라고 물으실 때가 있었으며, 이에 대해 할아버지는 "아이 킨 예."라고 대답하곤 하셨다. 이때의 킨은 '이해한다'는 뜻으로 할아버지의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I understand you)."라는 뜻이었다. 이렇듯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사랑과 이해는 하나로 통했다. 할머니는 곧잘, 이해할 수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를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하며, 또 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을 사랑할 수도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를 진실로 이해하셨고 따라서 서로가 사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이해의 도가 더욱 깊어져 간다고 하셨으며, 그러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이해의 개념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것은 또한 설명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셨다. 바로 그러한 이해의 상태를 그분들은 '킨'이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혈족, 친척이라는 뜻을 가진 '킨폭스(kinfolks)'라는 말이 원래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또는 '함께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란 뜻을 담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되다 보니 본래의 의미와 무관한, 그저 피를 나눈 사람들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굳어지고 말았지만 그건 절대로 그런 정도의 하찮은 뜻을 담은 말이 아니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추한 일들이 생기는 것은 바로 사람들 서로가 '킨'이 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정치가들이야말로 세상에서 '킨'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요, 말썽거리를 불러일으키는 장본인들이라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네가 지나간 일을 모른다면 네게는 앞으로의 일도 없으며, 네 조상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네 부족이 앞으로 어디로 갈지도 모르게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우리 부족의 과거를 알려주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서리가 옥수수 알을 단단하게 만드는 계절이 되면 체로키 족이 사는 마을에서는 추수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겨울 사냥 채비를 시작했으며, 자연의 이치를 따르겠다는 서약을 했다. 그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얼굴 흰 사람들이 쳐들어와서는 종이쪽지를 내밀며 서명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 종이쪽지가, 이 땅에 새로운 백인 정착민들이 들어올 것인데 결코 체로키 족의 땅을 빼앗지도, 가까이 접근하지도 않을 것임을 다짐하는 문서라고 하면서. 이 종이쪽지에 체로키 족들이 서명을 하자 이번에는 더 많은 숫자의 얼굴 흰 사람들이 길다란 대검을 꽂은 총으로 무장을 한 채 다시 몰려왔다. 그 군인들은 먼젓번 서류에 적힌 내용이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내용인즉슨 이제 체로키 족들은 새로운 조약에 의해 지금까지 살던 골짜기와 집과 산들을 몽땅 내놓고 정보가 체로키 족을 위해 마련한 다른 땅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해가 지는 머나먼 땅, 백인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황무지 땅으로. 문명인들은 총칼로 모든 체로키 족을 골짜기 안에 몰아넣은 다음에 말과 포장마차들을 가져다 주면서 체로키 사람들에게 해가 지는 땅끝으로 갈 때 그걸 타고 가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체로키 사람들은 마차를 거부했다. 이제 체로키 사람들은 집과 땅을 빼앗긴 빈 껍질 뿐인 존재들이었으나, 군인들이 준 마차를 타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를 소중히 지킬 수 있었다. 그건 볼 수도,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걸 지켜냈다. 모두 군인들의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말을 탄 군인들이 총을 들고서 체로키 사람들을 앞뒤에서 호위하듯 포위한 채 따라왔다. 체로키 사내들은 똑바로 앞만 보고 걸을 뿐 땅바닥을 내려다보지도 군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체로키 여자들과 아이들 역시 옆으로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앞선 어른 남자들만을 묵묵히 따라갔다. 행렬의 맨 뒤에서 하등 쓸모가 없어진 빈 포장마차들이 요란하게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따라왔다. 체로키 사람들은 그깟 포장마차 때문에 영혼까지 빼앗기지는 않았다. 비록 땅과 집은 빼앗겼지만 말이다. 얼굴 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얼굴 흰 사람들은 체로키 부족이 지나가는 광경을 구경하려고 길가에 떼지어 몰려나왔다. 그들은 체로키 사람들이 마차도 타지 않고 맨발로 걸어가는 광경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러나 체로키 사람들은 그들의 비웃음에도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꼿꼿하게 걸어가자 그들의 웃음소리는 이내 멎어 버렸다. 자기네가 살던 산악지대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체로키 사람들은 하나둘씩 육체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 처음에 백인들은 시신이 나올 때마다 행군을 멈추고 파묻을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하나둘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몇 백, 몇 천이 연속해서 죽어 넘어지자 그대로 행군을 계속했다. 시체는 빈 포장마차에 실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체로키 사람들은 그 명령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들은 시신을 두 팔로 안거나 들쳐업은 채 걸어갔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결국 이 수난의 길에서 전체 체로키 족의 삼 분의 일 이상이 사망했다. 때로는 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백인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체로키 부족의 사람들은 울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문명인들 앞에서 자기네의 영혼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장마차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얼굴 흰 사람들은 이 길을 '눈물의 여로'라고 불렀다. 그러나 체로키 사람들이 울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붙인 건 아니었다. 체로키 사람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눈물의 길'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낭만적인 느낌을 자아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체로키 부족의 행진은 죽음의 행진이었고, 이러한 행진에 낭만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 백인들은 1만 3천 명의 체로키 부족을 집단으로 오클라호마의 수용소(우리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곳)로 강제 이주시켰다. 1천 3백 킬로의 행군중에 추위와 굶주림 등으로 사망자가 속출해 그 숫자는 4천 명에 달했다. 수용소에 도착해서도 나머지 절반이 사망했다. 이것은 다른 인디언 부족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강제 이주로 미국 연방정부는 인디언 말살정책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지만, 아메리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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