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5호 - 2024.05.10. 금요일(음력 : 04. 03.)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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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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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란 한두 주일 뒤면 기분이 전처럼 좋아지겠지 하는 생각을 언제나 하면서 지내는 때.
― 돈 마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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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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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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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매년 12월에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일 것이다.
‘크리스마스(성탄절)’는 본래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그보다는 연인의 날이나 가족의 날로 인식하고 있다. 이날에 즈음하여 연인 또는 가족 간에 서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을 건네며 선물을 주고받는다. ‘Merry Christmas!’라 적힌 크리스마스카드를 친한 이에게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메리 크리스마스’는 영어 인사말이다. 이로 인해 어떤 이는 이 말을 ‘즐거운 크리스마스(성탄절) 되세요’로 직역해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세요’로 의역한 말이 우리말로 좀 더 자연스럽다.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곧바로 새해가 된다. 이때에는 젊은 사람들끼리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라는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 말 또한 영어 인사말이다. 이전에는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에게 고마움을 베풀어 주었던 사람에게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 적힌 연하장을 보냈다. 설날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인사말보다 ‘해피 뉴 이어!’란 인사말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올 12월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나 ‘해피 뉴 이어!’ 등의 영어 인사말보다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세요!’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과 같은 자연스러운 우리 인사말을 더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주책이다/ 주책없다
상황에 맞지 않게 실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은 “주책이다” 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책없다”라고 말한다. 같은 의미로 전혀 상반된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얘기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에 맞춰 적절히 해석하겠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혼란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일정한 줏대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여 몹시 실없다’는 뜻의 형용사는 ‘주책없다’이다. ‘주책이다’는 ‘주책없다’의 잘못이다. ‘주책없다’가 바른 표현이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혼란이 온 것일까? 명사 ‘주책’은 ‘①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 ②일정한 줏대가 없이 되는 대로 하는 짓’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①은 긍정적 의미, ②는 부정적 의미이다.
‘주책을 떨다’ ‘주책을 부리다’ ‘주책이 심하다’ 와 같이 쓸 때의 ‘주책’은 ②의 뜻, ‘주책없다’에서의 ‘주책’은 ①의 뜻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②의 뜻을 생각한다면 ‘주책이다’도 맞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올 수 있겠다. 표준어 규정에서는 의미가 똑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주책이다’를 버리고 ‘주책없다’를 취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안절부절하다’와 ‘안절부절못하다’가 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안절부절’이라고 하는데 동사형은 ‘안절부절하다’를 버리고 ‘안절부절못하다’만을 표준어로 삼았다.
‘칠칠하다’와 ‘칠칠치 못하다’는 모두 맞는 말이지만 뜻을 반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깨끗하고 단정하며 일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진 경우 ‘칠칠하다’ 반대의 경우 ‘칠칠치 못하다’라고 쓰는 것이 맞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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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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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음악 - 천상병
이것은 무슨 음악이지요? 새벽녘 머리맡에 와서 속삭이는 그윽한 소리. 눈물 뿌리며 옛날에 듣던 이 곡의 작곡가는 평생 한 여자를 사랑하다 갔지요? 아마 그 여자의 이름은 클라라일 겝니다. 그의 스승의 아내였지요? 백 년 이백 년 세월은 흘러도 그의 사랑은 아직 다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녘 멀고먼 나라 엉망진창인 이 파락호의 가슴에까지 와서 울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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莖草(경초) - 한용운
나는 소나무 아래서 놀다가
지팡이로 한줄기 풀을 무찔렀다.
풀은 아무 반항도 원망도 없다.
나는 무러진 풀을 슬퍼한다
무러진 풀은 영원히 이어지지 못한다.
내가 지팡이로 무질지 아니하였으면
풀은 맑은 바람에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은(銀) 같은 이슬에 잠자코 키스도 하리라.
나로 말미암아 꺽어진 풀을 슬퍼한다.
사람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
인인지사(仁人志士) 영웅호걸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나는 죽으면서도 아무 반항도 원망도 없는 한줄기 풀을 슬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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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선 - 정지용
이 아이는 고무뽈을 따러
흰 산양이 서로 부르는 푸른 잔디 우로 달리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범나비 뒤를 그리여
소스라치게 위태한 절벽 갓을 내닫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내처 날개가 돋혀
꽃잠자리 제자를 슨 하늘로 도는지도 모른다.
(이 아이가 내 무릎 우에 누온 것이 아니라)
새와 꽃, 인형, 납병정, 기관차들을 거나리고
모래밭과 바다, 달과 별 사이로
다리 긴 왕자처럼 다니는 것이려니,
(나도 일찍이, 점두록 흐르는 강가에 이 아이를
뜻도 아니한 시름에 겨워
풀피리만 찢은 일이 있다)
이 아이의 비단결 숨소리를 보라.
이 아이의 씩씩하고도 보드라운 모습을 보라.
이 아이 입술에 깃들인 박꽃 웃음을 보라.
(나는, 쌀, 돈셈, 지붕 샐 것이 문득 마음 키인다)
반딧불 하릿하게 날고
지렁이 기름불만치 우는 밤,
모와드는 훗훗한 바람에
슬프지도 않은 태극선 자루가 나부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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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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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淸談)
淸:맑을 청. 談:말씀 담.
[유사어] 청언(淸言), 청담(淸譚).
[출전]≪晉書≫ <?超傳(극초전)> <王衡傳>.≪宋書≫ <蔡郭傳論>. ≪顔氏家訓≫
① 명리(名利)/명문(名聞)을 떠난 청아(淸雅)한 이야기. 고상한 이야기.
② 위진 시대에 유행한 노장(老莊)을 조술(祖述)하고 속세를 떠난 청정무위(淸淨無爲)의 공리공론(空理空論).
위진 시대(魏晉時代:3세기 후반)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사회가 혼란해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난세였다. 게다가 정치적 권력자와 그에 추종하는 세속적 관료들의 횡포도 극심했다. 그래서 당시 사대부(士大夫) 간에는 오탁(汚濁)한 속세를 등지고 산림에 은거(隱居)하여 노장(老莊)의 철학이라든가 문예 등 고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중에서도 죽림 칠현(竹林七賢), 곧 산도(山濤)/완적(阮籍)/혜강/완함(阮咸)/유령(劉伶)/상수(尙秀)/왕융(王戎)은 도읍 낙양(洛陽) 근처의 대나무 숲에 은거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술에 취한 채 ‘청담’-청신기경(淸新奇警:산뜻하고 기발함)한 이야기, 곧 세속의 명리(名利)/명문(名聞)/희비(喜悲)를 초월한, 고매한 정신의 자유 세계를 주제로 한 노장(老莊)의 철학-을 논하며 명교(名敎:儒敎) 도덕에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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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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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권오석
제1권 영웅대망 편
예산에서
이것 역시 매우 암시적이다. 어쨌든 영조는 그 즉위 초에는 왕위마저 몹시 불안했다. 그리하여 노론 네 대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서원봉사'를 하게 하고 '사충서원'이라는 현판가지 내렸다. 그러나 무신년(영조4:1728),김일경(소론파)일파인 이인좌 등이 청주에서 난을 일으켜 위기를 맞는다. 급류정 김흥경은 한정,한좌,한우, 그리고 한신 4형제를 두었다.막내인 한신은 열두 살 때인 임자년 (영조8:1732),정빈 이씨 소생의 화분옹주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라는 궁호가 내려졌다. 옹주와는 동갑이었다. 영조의 월성위에 대한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김흥경이 우의정에 발탁된 것도 한신이 부마가 된 다음해의 일이었다. 영주는 이름이 자는 광숙으로, 양성헌이라는 호를 썼다. 그가 호학의 군주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 사람의 인격은 우소년 시절에 형성된다. 여러 가지로 보아 소년 시절은 불우했고 다감했던 성격인 듯싶다. 그는 즉위하던 해 압슬법을 폐지하였지만, 갖가지의 선정을 베풀었다. 지방 수령으로 세금(주로 곡물)을 유용한 자의 금고법을 제정하는가하면 정규의 억이 아니면 수용하지 못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당시의 뇌옥(감옥)이란 일단 갇히게 되면 살아 나오기가 어려웠다. 토굴과도 같은 어둠이 낮에도 계속되고, 첫째로 위생 시설이 미비하여 옥사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인권이란 말은 물론 없었고 고문은 일반적이었다. 일반 사대부집에서도 노비 학대나 사형이 공인되던 시대이므로 왕명이 얼마나 실천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말물림이라는 것이 있었다. 곡식을 계량하는 네모진 나무틀 상자에 무릎을 꿇게 하여 억지로 앉히는 사형이다. 이것은 주로 성질이 고약한 마나님이 여자종에게 가하는 벌인데, 이런 벌로 불구자가 되는 예도 있었다. 임금은 다으해(즉위 2년)에도 신임,곧 경종의 즉위 초인 신축년과 임인년에 억울하게 죽은 죄인의 가족을 등용하라는 비망록(왕명)을 형조에 지시하고 있다. 또 관절,팔이나 무릎 관절을 상하게 하는 고문을 엄금시킨다. 그기고 당쟁의 폐단을 한탄하고서 붕당,사치,숭음(술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세 가지를 타이르는 교서를 팔도에 내린다. 정미년(영조3:1737)에도 장법(장물죄)과 세미화수(벼를 적셔 무게를 늘림)을 엄금했고, 갑변(곱으로 이자를 받음)을 금하는 법을 정한다. 대체 이런 성격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영조는 숙종 20년(1694)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고,재위 52년에 춘추 83세로 병신년(1776) 3월 5일 경휘궁 집경당에서 승하한다.어미니는 숙빈 최씨였다. 야사로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숙종이 어느날 밤 후원을 거닐고 있는데 나무 사이로 부인이 보였다. 왕은 이상히 여기고 다가가서 보았더니 한 소녀가 바위 아래 촛불을 켜놓고 간단한 음식을 차려 좋고서 열심히 빌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왕의 물음에 소스라치게 놀란 소녀는 궁중에서 가장 신분이 천한 무수리였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러자 무수리는 떠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폐비가 된 중전마마의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종이옵니다. 오늘이 마침 중전마마의 생신날이라 이렇듯 변변찮은 음식을 차리고 만수 무강을 빌고 있었습니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여기서 폐비란 인현왕후 민씨를 말한다. 숙종에게는 원래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다닌 인경황후가 있었지만, 숙종 6년(1680)춘추 20새로 승하한다. 그래서 계비로 맞은 분이 민유중(1630~1687)의 따님인 인현왕후인데, 장희빈이 원자 (겨옹)를 낳자 숙종 15년(1689) 22세의 나이로 폐비가 된다. 그 몸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는 이리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연잉군보다 앞선 첫애가 있었고 일찍 죽었다. 따라서 영조가 태어난 숙종 20년에 인현왕후를 복위(27세)토록 하고 있어, 이것은 노론파의 사람들이 지어냈다고 여겨지며 신빙성이 없다. 장희빈은 이때 폐위되어 유폐되어 있었는데 그로부터 7년 뒤인 숙종 27년 (1701) 중전이 35세로 승하하자 그녀도 교살된다. 이를 보면 숙종은 매우 냉혹하거나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한편 숙빈 최씨는 연잉군 후에도 아들을 한 명 더 낳았으며 언제 죽었는지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숙종은 이른바 호색 군주로서 숙빈 최씨를 몇 년 초애했는지 몰라도 연잉군에 대해선 애정이 없었다고 추측된다. 더욱이 숙빈 최씨가 일찍 죽었다고 가정하면, 영조는 어려서 개밥의 도토리처럼 천대를 받았던 게 아닐까? 이것은 결코 상상만도 아니다. 당쟁이 심해지면서 얼마나 많은 왕자들이 비명으로 죽고 원혼이 되었는지 모를 정도이다. 역모 때는 추대자가 필요하므로 선조의 왕자들 이후로는 그렇게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 더욱이 영조는 그 생모가 무수리였으니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멸시와 차별의 편견을 받았으리라. 불쌍하게 자란 것은 경종도 마찬가지였으나 이들은 당시의 궁중제도로 보아 격리되어 있었으리다. 형제라 해도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대궐이나 민가나 마찬가지로서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 서로 만나는 정도였을 것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왕자, 다만 현재의 왕을 아버지로 가진 왕자는 궁밖에 내보내지 않는 게 원칙이므로 연잉군은 글을 배우는 기회가 있었으리라. 그리고 저녁이면 그래도 숙빈 최씨와 친했던 늙은 상궁이 그에게 세상 이야기도 들려주는 일도 있었을 터이다. 어쨌든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육상궁을 짓고 어머니의 제사를 올리며 그리움을 달래게 하는 효심을 가졌다. 육상궁은 현재 헐렸지만,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궁정동의 그 집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으리라. 월성위 집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김한신의 모습을, 바로 어제의 일처럼 번암은 떠올렸다. 그러기에 홍주가지 내려온 김에 번암은 그의 산소가 있는 이곳 용궁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첫인사로 성명,본관,학통 등을 일일이 말했을 때 월성위는 말했다.
"아, 당신이 번암이시구려. 수재라는 소문은 내 일찍부터 들었지요."
"과분하신 말씀을..."
지금도 서로 미지의 사람이 처음 만나면 이름과 고향을 묻는 게 보통이다. 예날엔 그것에 조상의 이름난 분까지 묻는 게 예의였다. 당시는 지금처럼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알아 둘 필요가 없었지만,이름의 돌림자만 확인하고도 상대평의 10내 조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었다. 각 가문마다 정해진 항렬이란게 있고, 그것을 알면 조상에 대해 환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화영편>이라는 책이 있다. 건각적 언어학자이고 문명비평가였던 정동유 선생의 저술이다. 교관(나라에서 지정한 선생)이었다는 것 뿐 자세한 경력은 불명이나 대체적으로 볼 때 영조 때 사람이다. 그 글제목으로 <지극히 졸렬한 것 세 가지, 지극히 어려운 것 두가지>가 있다. 졸렬한 것은 조선에만 있고 다른 나라에는 없는 결점이고 어려운 것도 유별나고 희귀한 것이라는 뜻이다. 첫째는 바늘이 없다.-그러므로 장에서 바늘을 구하지 못하면 의복도 지어 입지 못한다. 둘째는 가축 중에서 소와 양이 중요한데 우리나라에선 소를 기를 줄 모른다고 잘라 말했다. 소가 그만큼 귀했다는 반증이다. 셋째는 수레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다른 선각자도 지적한 일이지만, 수레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다음은 지난한 것 두 가지. 첫째는 우리나라에선 4백 년 이래로 사대부의 부녀자로서 재혼이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는 족벌을 말할 때 안팎(친가와 외가)10대의 조상까지 따진다는 지적이었다.1대를 30년으로 계산한다 하여도 3백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대체 이런 관습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사견이지만 역시 인조 이후 우암 송시열(1607~1687)부터라고 추정된다. 그것보다 번암은 조금 전부터 감탄하고 있었다. 회식은 사랑방에서 열렸는데, 많은 서적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예의상 그것을 하나하나 살펴보지는 않았으나, 다만 장식용으로 가지고 있는게 아님은 알 수 있었다. 어떤 책은 수십 번을 읽었는지 겉장을 다시 장정한 것도 있다. 술이 한 잔씩 돌고 나자 월성위는 말했다.
"조종에서도 나를 월성위라 부르지 말고 자로 불러 주시오, 내 자는 유보입니다."
선비들 사이에선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를 부르는 게 예의였다. 그러나 상대편이 정승이난 부마라면 역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월성위는 자청해거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한다. 역시 교양, 그것으로 닦인 인품을 엿보게 만들었다. 화순옹주의 생모 정빈 있는 연잉군 시절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리하여 연잉군과는 일찍부터 그 고난의 세월을 한께 했던 셈이다. 정빈은 경의군(진종)을 낳았고 이어 딸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으며 차녀로 화순옹주를 낳았다. 그러므로 화순은 영조의 맏딸이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빈에게 연고궁이라는 궁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왕세자이던 경의군은 영조 4년(1728)동짓달, 이인좌의 난이 형정되어 한숨을 돌렸을 대 10세라는 나이로 죽었던 것이다. 이때 화순을 아홉 살이었다. 화순은 동생으로 몇살 아래인 화평옹주가 또 있었다. 화평옹주는 뒷날 금성위 박명원(1725~1790)과 혼인한다. 아홉 살이라면 이미 부마감을 고를 나이였다.
"옹주야,네 신랑감으로 어떤 도령이 좋겠니?"
"첫째로 부모님의 마음에 드실 분이면 좋아요."
"첫째라는 것을 보니 또 소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네에. 둘재로는 썩 잘생긴 도련님이어댜 해요."
이 말에는 임금도 연고궁도 크게 웃었다. 영조는 어려서 부정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따님에게 쏟는 애정은 각별했으리라. 그런 임금의 눈에 든 것이 월성위 김한신이다. 영조는 호학 군주로서 서적도 많이 간행한다. 실록을 보면 기유년(영조5:1729)에 <감한록>을 출판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책의 이름으로 보아 이인좌와 박필몽 등이 청주와 거창에서 각각 거병하고 도한 당시의 평안 병사 이사성도 공모하여 남북에서 한양을 공격하려던 일대 음모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리라. 그러나 애당초 김일경의 추종 세력과 여기에 몰락한 오인들이 가담한 반란이므로,경종 때의 노소론 양파의 음모 전말도 기록되었다고 여겨진다. '나라가 망했다'는 통탄의 소리가 나온 이 사건은 영조 임금 일대를 두고서 잊을 수 없는 한이었다.그리하여 그는 앞서 노론파와 타협하여 '사충서원'의 현판까지 내렸으나. 그런 소원을 중심으로 다시 붕당의 움직임이 보이자 김창집의 관직을 재차 추탈하고 그 서원을 때려부수게 한다. 그러나 영조는 숙종처럼 옥사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역시 명군이라 불리는 이유다. 영조의 그런 자세는 그런 옥사 -붕당의 생겨남-당파 싸움의 고리를 끊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창집 (1648~1722)은 안동 김씨로, 청음 김상헌의 손자이며 영상을 지낸 김수항의 아드님인데 명문 거족이었다. 이인좌 역시 영의정 이준경(광주 이씨로 호는 동고, (1499~1572)의 후손이며 어찌하여 그런 명신들의 후예가 그와 같았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명문 거족이라 하여 조금도 믿을 게 없잖은가.' 영조는 서민,특히 노비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노비 대책은 시대적 요청이었고 숙종도 관심을 보였던 일이다.한마디로 노비 문제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문제를 들여다 보면 남마처럼 얽혀 있고 간단치가 않았다. 그리고 참으로 명군 소리를 들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으리라. 또 사대부의 이익과 관련되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란 매우 어려웠다. 경술년(영조 6:1730)섣달,오랜 심의 끝에 공사천의 양처 (처녀로서 사대부의 본처가 된 신분) 소생은 모계를 따른다는 결정을 내린다. 비록 양처일망정 그 신분은 노비와 같다는 결정이다. 한편 사윗감을 신중히 고르다 보니 가례는 임자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경술년 6월 왕대비 어씨가 춘추 26세로 승하한것도 혼사가 늦어진 이유였다. 어대비는 경종의 계비로 어유귀의 따님이었다. 이 완대비 역시 불행한 일생을 마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기년은 1년이기 때문에 옹주의 혼인에 큰 영향은 주지 않았다. 다만 12세의 동갑내기 신랑 신부는 지금으로선 조혼 이었으나 당시로선 신부가 늦은 편이었다. 특히 왕실로서는 말이다. 또 이 무렵 영조는 여빈 이씨를 총애했다고 추정된다. 연고당은 이미 서른이 가까운 나이였다고 짐작된다. 세자가 살았다면 임자년에 14세였다. 그러만큼 용색도 쇠퇴했고 무엇보다도 왕은 후사가 급했다. 계축년(영조 9:1733)에는 <오례의>가 간행된다. 이는 특히 혼인법에 대한 규정이 강조되고 있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혼인은 통일 신라 이전은 차지하고 고려 왕실은 혈족 결혼이었다. 태조 왕건이 중국에서 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김종서의 <고려사>를 보면 송악 사람으로 금성 태수였던 왕륭의 장자로서 병술생이며 어머니는 한씨였다. 왕건은 17세 때 도선을 낳았고, 고려 초기엔 도선이 국사로서 건국의 기틀을 닥는다. 태조 왕건(877~943)은 재위 26년으로, 혜종(911~945)이 그 뒤를 이었는데, 어머니는 오씨였다. 처음에 왕건 태조는 대광인 왕규의 딸로 제16왕비를 삼아 아들을 낳았고 이를 광주부군에 봉했었다. 왕건 태조는 그 뒤에 또 왕규의 딸을 후비로 삼아, 왕수의 세력은 자못 강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규는 왕과 그 동생 요, 소 등을 죽이고 광주부궁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혜종은 왕규와 대향하기 위해 자기의 장공주를 동생 왕소(이복동생)에게 출가시키고 이에 맞선다. 이것이 고려 왕실의 혈족 결손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를 계승했던만큼, 이런 혈족 결혼은 긴라 때부터의 풍속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실제는 왕씨였지만, 장공주는 출가시 와가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고 했다. 이때부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동성 혼인일 경우에 외가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참조). 고려의 제 4대 광종(925~975)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과거 제도를 시작했는데, 그는 자기의 친누이를 왕후로 책봉했었다. 이밖에도 그런 예는 많았었다. 그러나 고려의 이런 동족 결혼에 대해 조선의 학자 의견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익은 그의 <성호사설>에서 말했다.
"고려의 동족간 혼인은 혜종이 장공주를 동생 소의 처로 삼게 함으로써 시작된 것인데 사신은 말한다. '남녀가 같은 성씨이면 그 자녀는 번성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려 육친에 있어서이랴! 5백년을 전해오면서 그 가지가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으니, 이로써 선왕(성인)이예를 정한 깊은 뜻을 알 수 있도다'라고.그 무질서한 혼인은 추악하고 도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번성에 이르지 못한 것은 모두 까닭이 있어서이다. 나라의 제도로써 궁인(희빈)이 다행히도 자식을 얻게 되면 곧 삭발케 하여 승려를 만들고 적출 왕자라 할지라도 또한 다수가 출가하여 그와 같이 된 것이다. 사거를 보지 않고 헐뜯는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이 말대로라면 그것이 끊기거나 하지 않았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성호의 이 말에 굳이 설명은 펠요 없지만,자손이 많아 오히려 적서를 차별한 조선조보다 나았다는 뜻도 있어 보인다. 사실 성호는 <모족위혼:왕가 쪽과는 혼인한다는 것)>이란 항목에서,"모족위혼은 우리 동국의 풍속이다. 모족과 대대로 화목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동종(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형제 숙질간이라면 혼인하지 않았다."고 고증했다. 이런 성호의 설에대해 이종휘란 유학자는 <수산집>에서 동성 결혼은 무조건 안된다는 식으로 논했다.
"신라,고려 2대의 혼인으로 동성을 피하지 않고 이고써 기공(기년복과 대공복을 입는 친척)의 친마저 범했으며,윗사람이 이를 실행하자 아랫사람이 그것을 본받았고 백성에 이르러선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고려 덕종(재위 1032~1034)은 하루 사이에 그 두 누리을 비로 삼았고, 광종과 문종(재위 1046~1085)은 모두 그 누이로 비를 삼았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갰는가. 세상에서 전하기를 왕씨는 용종이로 그 겨드랑이 아래 비늘이 하나씩 있다고 하지만, 왕건 태조는 나쁜 것을 밖으로 후손에게 전하여 마침네는 자손이 서로 혼인케 만들었다...."성호의 견해와는 크게 다르다. 성호는 실학자이지만 성리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다. 같은 우학을 배워도 그 편견이 심하면 이런 말도 하게 되는가 싶다. 그러나 고려도 충선왕(재위 1309~1313) 즉위 초에 이런 조서를 내리고 있다.'동성으로서 혼인하지 않음은 천하를 통리요, 하물며 우리나라는 문자를 알고 부자지도(유교)를 행하고 있으니 동성으로서 가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친(앙의 일족)으로서 동성자를 취하고 있다면 마땅히 누에의 재상가 딸로서 아내를 삼으며, 재상가의 남자라면 종친의 딸로서 혼인하되 만일에 가계가 미비하다면 이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신라 왕손 김흔의 집은 순경태후(원종비)가 된지라 숙백지종(백,숙부의 종가임)이오,언양 심씨 일종,정안 임태후도 일종,경원 이태후,안산 심태후,철원최씨,해주 최씨,공암 허씨,평강 채씨,청주 이씨,당성 홍씨,황려 민씨,회천 조씨,파평 윤씨,평양 조씨는 모두가 누대에 걸친 공신 재상의 종가이니 대대로 혼인을 할 수 있으리라. 남상종녀(왕족의 사위가 됨)로서 하고 문무 양반 가문도 같은 성씨로서 혼인하지 말 것이며, 외가의 사촌간이라도 반드시 조정에 묻고 나서 구혼하라...'이것이 곧 동성으로 금혼케 한 제도의 시작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오자 남자는 15세,여자는 14세로 허혼하고 혼인할 수 있게 했는데 종실의 여자와 혼인하려면 그 가장의 관직과 성명을 종부시에 신고토록 했었다. 이는 국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있라면 신고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 초기엔 명나라의 법률인 대명률을 그대로 준용했고 백성으로서 동성 혼인자는 곤장 각 60대에 이혼토록 하였다. 세종 9년(1427),예조에서 색다른 문의가 있었다.
"회회인과의 혼례는 어떻게 하오리까?"
회회인이란 아라비아인으로 중국에는 소주나 복건성에 당나라 때부터 수천명이 살고 있었으며, 고려와의 무역에도 이들이 활약했음은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데 세종때만 하더라도 그들이 종종 들어왔고 조선 여자와의 혼인 문제가 제기된 샘이다. 이때 누구의 발상인지는 모르나 회회인이라도 우리의 의상을 입고 우리 식대로 대례를 올리면 혼인을인정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양성지(1415~1482)는 호가 눌재로 세조 때의 학자인데 저서로 <해동성씨록><팔도지리지>가 있다. 그는 여진인과의 혼인 문제를 제기했다.
"야인(여진족)은 나라가 평안,무사하다 싶으면 변경을 침입하여 우리 백성과 가축을 끌고 가며, 군을 일으켜 토벌하려면 멀리 산 속으로 도망쳐 이를 막고 평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중국에서 이들의 대책으로 다수의 자들과 혼인을 하게 하고, 이런 야인으로서 토항자는 예컨대 천민의 여자로 출가케 하여 좋은 장부(건강한 장정)를 낳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나라의 원대한 시책으로서 타산지석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예약문물이 중국과 더불어 비슷하다고는 하나 역시 동해의 바깥에 위치하니 (여기서의 동해는 곧 서해이다.)어찌 이런 북인을 천대만 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댜인의 투항자는 그 족속과 강약으로 삼등분하여 일등자는 무문(무명 가문),음사(조상으로 공있는 자손이나 등용되지 못한 자),대부집에,이등자는 잡직,사대부집에, 삼등자는 평민집에 통혼케 하십시오."
조선은 '사대주의'로 명나라에 굴종했을 뿐 아니라 야인(뒷날의 만주족)을 '오랑캐'라고 하여 멸시했다. 그런데 한족은 우리를 동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자가당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는 물론이고 선비도 말갈도 이른바 구이의 하나로서 뿌리는 같았던 것이다. 동이의 이는 대십보궁의 회의문자로, 큰 활을 쏘는 민족이란 의미이고, 중국에 활을 전해 준 것이 우리였던 것이다. 그런 것을 떠나서 줄재는 참으로 대담한 제의를 했다고 하겠다. 여진족은 그 이전에 금이라는 나라를 대륙에 가졌었고, 또 눌제 이후 곧 나타날 청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눌재의 제의는 무시되었다. 우리 민족은 몽골, 그보다 앞서는 거란(굴안)이, 혹은 의적이 쳐들어와 수십 만 또는 수백 만의 생명이 죽었음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이들은 철천지의 원수이고 백 대를 두고도 잊을 수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자세히 읽어 보면 영원한 적도 원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선조의 사대주의자들이 종주국처럼 생각한 명나라의 주원장 역시 그야말로 고려를 쑥밭으로 만든 홍건적 출신이고, 주원장이 얼마나 우리를 말과 금을 탐했으며 빼앗아 갔다. 그것을 분하게 여기고 이기자면 실력밖에 없는 것인데, 우리는 겨우 여진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만족했던 것 같아 씁쓰름할 뿐이다.
회식이 끝나고 헤어질 때 월성위는 대문 밖까지 배웅을 나왔었다. 그리고 그는 진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사양하실 필요 없습니다. 틈이 나거든 언제라도 놀러 오시구려."
그러면서 월성위는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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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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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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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것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뒤를돌아보라. 그대가 그대의 기준으로 그 사람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을 그 사람이 가진 보습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람의 객관적인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라.
7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 긍정적인 경험에서 얻게 되는 교훈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다.
8
우리는 욕망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건 틀린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확실히 다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욕망이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욕망을 다스리는 비밀의 열쇠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
9
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가로 현명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
희망은 마치 독수리의 눈빛과도 같다. 항상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곳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망이란 바로 나를 신뢰하는 것이다. 행운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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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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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8. 장도영, 그는 야누스였는가?
"그러니 이번만은 민주당 정부에 충고하는 정도로 하고 병력을 철수시켜 주시오. 거사는 불문에 붙이도록 하겠소."
참으로 별난 쿠데타도 다 있었다. 쿠데타를 진압하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준 장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십보백보라고나 할까? 쿠데타란 폭력으로 정권을 뒤집어 엎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은 흥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박정희는 어째서 장도영한테 흥정을 걸었던가? 그것은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매그루더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매그루더의 결심 여하에 따라 쿠데타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박정희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매그루더의 관여를 배제하자면 누구보다도 가장 친근한 사이인 장도영을 끌어들여야만 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다고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쿠데타 진압을 결심하고 있는 장도영은 어째서 <민주당 정부에 충고>또는 <거사 불문> 운운했던 것인가? 쿠데타가 실패한 경우 그 자신이 박정희와 나란히 군법 재판정에 서야 한다는 것을 장도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쿠데타를 <없었던 일>로 해결하고자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고나 거사불문을 운운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미 장도영의 마음을 읽고 있던 박정희는 좀 거칠게 말했다.
"각하, 젊은 장교들이 목숨을 걸고 일으킨 혁명입니다. 그런 젊은 장교들이 이쯤에서 물러날 성싶습니까?"
더구나 불문에 붙인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장도영도 언성을 높였다.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다고 하잖았소? 여러 여건으로 보아서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어찌 쿠데타를지지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박 장군, 여러 말 말고 젊은 장교들을 설득해서 원대복귀시키도록 하시오."
장도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번에는 박정희가 수그러지며 애원하듯이 말했다.
"각하, 저희들의 지도자가 돼 주십시오. 저희들은 각하를 모시고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를 재건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장도영은 단호하게 한마디로 잘랐다. 박정희는 도저히 장도영을 설득할 수 없다고 단념했는지, 침통한 표정으로 그와 엇갈리듯이 이번에는 장면의 정치고문인 도널드 워태커가 총장실로 들어왔다. 이 도널드 워태커는 1945년 9월 8일 맥아더 휘하의 제24군단이 한국에 진주할 때 CIC 요원으로 들어왔다. 이때의 그의 계급은 육군 소령이었다. 그는 하지의 미군정 시절, 미군정의 정책과는 달리 좌익 소탕을 위해서 헌신했었다. 미군정하에서 이른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 民主議員)>이 개설된 것은 1946년 2월 14일, 이때 장면이 민주의원의 의원으로 피선되자 이때부터 워태커와 장면의 친교는 맺어졌던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일단 미국으로 물러갔다가 6.25 한국전쟁 때 것은 1952년이었다. 이미 예편해 있던 그는 UNKA 직원으로 한국에 나왔던 것이다. 이때 그는 한 한국 여성을 지독히도 사랑하게 되어 끝내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부인인 임수영(任秀英)이다. 워태커가 임수영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이화여대 법과 2학년 때였다. 워태커는 무척이나 임수영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국제결혼을 사안시하고 있을 때였던 만큼 그녀는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랬으나 결국엔 너무나 뜨거운 워태커의 사랑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워태커는 총장실로 들어서자 불문곡직하고 소리쳤다.
"장 총장, 속히 군을 동원해서 쿠데타를 진압하도록 하시오. 대한민국 육군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오. 만일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가 중단된다는 것은 장군도 익히 알고 있을 게 아니오?"
장도영이 워태커의 위세에 눌렸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서실장 김병삼을 향해 소리쳤다.
"즉시 참모부장 회의를 소집하라!"
참모부장 회의는 곧 열렸다. 그러나 참모부장 회의를 열어봐야 뭐 뾰족한 신통수도 없었다. 누구 한 사람 이 위급한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명안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장도영이 참모부장 회의를 열고 있는 그 시각, 상황실로 돌아온 박정희는 제1군 사령관 이한림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도와줘야겠소. 내가 왜 혁명을 일으켰는지는 이 장군도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박정희의 쿠데타 요청에 이한림은 엉뚱한 말을 했다.
"방송은 나도 들었소. 혁명위원회에 장도영은 왜 참여시켰소?"
"거기에 대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어쩌겠소 이 장군. 나를 도와주겠소, 못 도와주겠소?"
"혁명사령부를 이곳으로 옮기시오. 그러면 도와드릴 테니!"
"여보 이 장군, 동기생끼리 정말 이러기요?"
이한림과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이었다. 나이는 박정희가 4살이나
"좋소. 그럼 마음대로 하시오."
박정희는 씹어뱉듯이 소리지르고는 쾅 하고 송수화기를 내던지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박치옥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한림, 그 새끼가 말을 들어먹어야지! 개 같은 새끼!"
"그럼 체포해 버리죠?"
"그게 그리 쉬워야 말이지! 하여간에 이한림은 체포해야 돼!"
유진산(柳珍山)이 쿠데타 소식을 들은 것은 5월 16일 아침 6시, 일본의 옛 서울인 교토(京都)의 요시다(吉田)라는 산장호텔에서였다. 그가 교토로 온 것은 하루 전이었다. 16일 아침 하꼬네(箱根)로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는데 호텔 여종업원이 올라와 서울에서 국제전화가 걸려왔으니 받으라는 것이었다. 비서가 뛰어내려가 전화를 받고 올라왔다.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뭐 쿠데타?"
순간 유진산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하꼬네행은 취소야. 동경으로 돌아가세."
그는 서둘러 짐을 챙겨가지고 정거장으로 향했다. 교토 역으로 나오자 유진산을 알아본 많은 일본 기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데 선생의 소감 한 말씀만. 불러올 정도로 문란했다고 보십니까?"
"선생은 앞으로 거취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기자들은 그들의 궁금증을 풀려고 한꺼번에 질문을 퍼부어댔으나 유진산은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본국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도쿄 역에 내리자 이번에도 또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어 그를 에워쌌다. 교토역에서와 똑같은 질문이 되풀이됐지만 역시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비통한 마음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도쿄 역에서 주일대표부(駐日代表部)로 직행을 했다. 모두가 넋 나간 사람들처럼 역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지를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쿠데타를 일으킨 자는 누구야?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유진산을 속이 탔다.
다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은 아침 7시에서 7시 30분 사이에 벌어진 상황들이었다. 각기 5분에서 30분까지의 차이를 두고 다음의 상황들은 벌어졌었다. 이 상황들은 물론 1군 휘하부대인 군단사령부, 또는 사단사령부 등에서 벌어졌던 상황들이다. 제1군 사령관 관저에서 긴급 소집되었던 제1군 휘하의 각급 지휘관들은 회의가 끝나자 서둘러 소속부대로 돌아갔다. 1분 1초라도 빨리 소속부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경비행기와 헬리콥터를 총동원해서 돌아가도록 조치해 주었다.그것만으로도 이한림이 쿠데타에 분명하게 대응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서울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박정희가 이한림에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군단장 최석은 그 자리에 있었다. 이때 이한림은 지휘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아침 8시.
장도영이 육군본부 참모들을 거느리고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쑤셨다. 그들의 뒤를 따라 미 군사고문 단장인 하우즈도 따라 들어왔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제의했다.
"박 장군, 우리 육군본부 일반 참모들과 혁명군측과의 합동회의를 열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박정희는 즉각 응낙했다. 회의는 곧 열렸다. 이 또한 세계 쿠데타 사상 보기드문 진풍경이었다. 아니 희극이라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마주앉아연 회의. 여기서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자리에 참석한 쿠데타군의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장경순, 김윤근, 유양수, 한웅진, 문중섭,윤태일, 송찬호 등이었다.
대령으로는 오치성, 박치옥, 문재준,유승원, 박창암, 이종태, 전두열, 김창파,이원엽, 서봉희, 유원식, 방원철, 최재명,한국찬, 이병엽, 김재춘, 정세웅, 홍종철 등이다.
중령급으로는 옥창호, 길재호, 신윤창,이석제, 김종필(예비역), 김형욱, 조남철,오정근, 구자춘, 박배근, 백태하, 윤필용,김인화, 이형주, 정오경, 이지찬, 장수영,김성룡, 강상욱, 김동환, 김제인, 정문순,정치갑, 김재후, 박순권, 최홍순, 김원희,이창희 등이었다.
그런데 여기 이름을 든 장성급이나 대령급, 또는 중령급 인물들 중에는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 인물들은 하루아침에 쿠데타군으로 급조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거느린 일반 참모들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는데 반해 쿠데타군측을 50여 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살기등등한 형편이었고 하여간에 양측이 마주앉은 가운데 회의는 열렸다. 장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의 사태는 사전에 알지 못했소. 그러나 여러분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궐기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오. 혁명을 일으켰다는 그것만으로 여러분의 뜻은 충분히 표시되었다고 보오. 그러니여러분의 행동은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좋겠소."
"뭐가 어쩌구 어째?"
쿠데타군 쪽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도영은 그들의 분노를 말살하고 말을이었다.
"그러니 이것으로 민주당 정부에 충고하는 것으로 하고 모두 철수해 주십시오. 이 사태는 내가 꼭 책임지고 불문에 붙이도록 하겠소."
"뭐요? 뭐가 어째?"
"우리를 어린애로 아는 거요? 우리가 부대를 철수했을 때 민주당 정부가 이 사실을 불문에 붙이리라 생각하십니까?"
"총장! 우리가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유혈사태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시오?"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어요! 총장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저기에서 고함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별자리들은 역시 장군이라는 체면 때문이었는지 위신을 지키고 있었고, 고함소리는 주로 대령과 중령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박정희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지금 심각한 고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의 권고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냥 밀고 나가야 하느냐 해서. 장도영으로 볼 때에는 대령, 중령은 새까만 하급장교에 불과했다. 그러한 대령, 중령 등이 아우성을 치자 장도영은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그는 한동안이나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하오. 치안유지에 만전도 기해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윤 대통령이나 기타 정치인들하고 타협할 시간적 여유를 주시오."
그러자 벌떡 일어서서 권총으로 탁상을 쾅 내리치며 고함을 지르는 자가 있었다.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백태하였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어. 말을 듣지 않으면 쏴 버릴 테야. 지금에 와서 누구와 타협한단 말인가?"
백태하의 고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쿠데타군측 테이블 뒤에 서 있던 소령 대위급 무리 쪽에서 찰칵찰칵 하고 권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 상황실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질 판국이었다. 번쩍 들더니 손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각하, 각하께서는 치안유지를 걱정하시는데 치안유지를 위해서는 계엄 선포가 필요합니다. 총장께서 동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소? 합법적인 수속을 하자면 대통령과 협의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박 장군은 모르시오?"
장도영은 계엄령 선포도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일축해 버렸다. 영관급들이 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려는 지연작전이다!"
"쏴 죽여 버려!"
장성 중에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치는
"조용들 하시오!"
장경순이었다. 거구의 장경순이 조용하라고 일갈하자 잠시 조용해졌다. 좌중을 침묵시키고 난 그는 호통치듯이 말했다.
"혁명은 혁명이오, 혁명을 했는데 대통령이니 정치인이니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그대로 밀고 나가는 길밖에 없어요."
장도영은 도저히 이 자리에서는 그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박 장군, 나하고 단 둘이 얘기 좀 합시다."
그래서 곁에 앉아 있는 박정희에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정희도 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상황실 밖으로 그러자 문재준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야아! 총장이 박 장군을 납치해 간다!"
그는 이어서 명령했다.
"빨리 육본을 엄중 포위하라!"
포병단장의 명령에 대대장들인 신윤창, 구자춘이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의 손에는 어느 사이엔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뛰쳐나간 뒤 백태하는 더는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들고 있던 권총을 천장을 향해 <탕! 탕! 탕!> 세 발을 쏘며 외쳐댔다.
"말을 듣지 않는 총장은 내가 쏴 죽여 버리고 말겠어."
백태하는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사람이 허리를 껴안는 등 간신히 진정시켰다. 밖으로 뛰쳐나온 신윤창, 구자춘은 어찌했던가? 그들은 급히 육군본부를 경비하고 있는 제6군단 포병단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사격준비!"
명령 일하에 1개 중대 가량의 병사들이 사격준비를 갖추었다.
"하늘로 쏴!"
백여 명이 넘는 쿠데타군의 소총에서 뿜어내는 화약 터지는 소리가 육군본부의 연병장을 때렸다.
"쏴!"
"쏴!"
명령은 계속 떨어졌다. 쏘라는 명령이 쏘아댔다. 연발로 계속해서 쏘아대는 총소리에 용산 구민들은 기어이 유혈의 참극을 빚어내고야 말았구나 하며 가슴을 졸였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날 이들이 허비한 탄환이 무려 1만 발이나 되었다. 국민의 혈세로 마련한 총알을 이런 식으로 허비해도 된단 말인가? 상황실 밀실에서 박정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장도영도 연병장에서 쏘아대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는 총소리가 자신을 겁주기 위해서 쏘아대는 총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 부관이 들어와 이한림에게 서울 육군본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전갈했다. 이한림이 전화를 받기 위해 안으로 들어갈 때 최석도 뒤따라 들어갔다. 전화로 주고받는 말을 통해서 최석은 전화를 건 사람이 박정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이한림이 전화를 끊고 나자, 한 번 더 강조했다.
"당장 출동해야 합니다. 서울 외곽의 통로만 차단하면 쿠데타는 아주 가볍게 진압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최석은 쿠데타는 물론이고 박정희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록 집요하게 <즉시 출동>을 건의했는지도 모른다. 최석은 군단사령부로 돌아오자 예하 양찬우(楊燦宇), 김희준(金熙俊)과 그리고 참모장 육군 준장 이준성(李準晟)을 불러 서울 사태를 전해 주었다.
"군대의 반란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그는 덧붙여 명령했다.
"나는 이 반란은 당연히 진압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러므로 참모장은 즉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명하고 기갑부대는 군단사령부를 경비하라 하시오."
쿠데타가 하나의 반란행위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쿠데타와 반란행위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르다. 최석은 박정희의 쿠데타를 반란행위로 규정했다. 쿠데타라는 낱말 대신에 반란이란 낱말을 쓴 지휘관은 오직 최석 한 사람뿐이었다. 막상 군단사령부로 돌아왔으나 심정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쿠데타라는 사실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그는 군단장실에서 서울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전화선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미 군사고문단실로 가서 고문단실 전화를 이용하여 연합참모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본부장 육군 소장 김점곤(金点坤)하고는 곧 연결이 되었다.
"임부택이올시다.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데 도대체 서울의 상황이 어찌 돼 있습니까?"
"글쎄요. 쿠데타가 일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나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임부택은 이번에는 연합참모본부 총장 육군 소장 김종오(金鐘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한림 사령관으로부터 서울 외곽으로 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만, 서울의 상황을 모르니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김 장군의 의견을 들었으면 합니다."
"글쎄올시다. 나도 뭐라 하기가 어렵군요. 당신이 알아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런 반응으로 보아 김점곤이나 김종오나 사태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는 짜증이 일었다. 안타깝기만 했다. 생각 끝에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서울의 소식과 사령관 이한림으로부터 수령한 명령 내용을 밝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참모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대해서 참모들은 모두가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여기에서 임부택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방침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작심했다. 그래서 육군 준장 김병길(金炳吉)을 불렀다.
"김 장군, 수고스럽겠지만 서울엘 좀 다녀와 주시오."
김병길을 서울로 밀파하고 난 임부택은 연합참모본부에 전화를 걸어서 정보제공을 부탁했다.
"여기는 일선지구라 서울의 상황이 캄캄하기만 하니 쿠데타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았으면 하오."
이 부탁을 받은 연합참모본부에서는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곧 알려주겠다는 대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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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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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역사가 황제의 진면목을 뚜렷이 보여주는 연설이었다. 과연 후대 역사가들한테 로마 문명이 인류에게 남긴 교훈의 하나로 칭찬받을 만한 고결하고 관대한 정신의 결정체다. 게다가 이 정신이 고립된 이상으로 끝나게 하지 않은 로마인도 훌륭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연설이 끝난 뒤 갈리아인을 원로원에 받아들이는 문제를 표결에 부친 결과, 찬성표를 던진 의원이 다수였다. 다만 '장발의 갈리아'의 모든 부족장에게 원로원 의석이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반대파가 찬성 조건으로 수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수정안은 우선 로마와 오래 전부터 동맹관계에 있는 하이두이족한테만 그 권리를 인정하고, 다른 부족장들을 원로원에 받아들이는 것은 그후 단계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중북부 갈리아에서는 가장 강대한 부족인 하이두이족이 로마와 오래전부터 동맹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알레시아 공방전에서는 베르킨게토릭스 편에 붙어서 카이사르와 싸운 부족이다. 승리한 카이사르는 이 배신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해주었다. 이런 하이두이족한테도 원로원에 들어갈 권리가 인정되었으니, 다른 갈리아인한테까지 인정된 권리가 에스파냐인과 그리스인, 북아프리카나 이집트 출신에서부터 동방 출신한테까지 확대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것도 이제는 이념 문제가 아니라 시간 문제가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조국(파트리아)의 개념을 이탈리아 반도에만 한정하지 않고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대하려 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신을 부활시킨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중추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 것뿐이라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쇄국론을 외치는 본국 출신 의원들을 절망시키고, 대부분 속주 출신인 개국론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의 대단한 점은, 한편으로는 개국 노선을 추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노선에 제동을 걸기 위한 법안도 성립시켰다는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개국론자인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그의 정책을 거의 다 답습했지만, 거기에 제동을 걸고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기원전 2년과 서기 4년에 노예해방을 제한하는 법률을 성립시킨 것이었다.
노예해방 규제법
고대 로마의 노예제도를 논할 경우, 노예제도는 인권에 어긋나니까 폐지하는 게 당연하다는 근대적 관점에 서면 논의조차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노예제도는 고대 로마가 붕괴하고 기독교 세계가 된 뒤에도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다. 기독교라는 신앙에 눈을 뜨지 못한 자는 기독교도와 대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교회의 묵인 아래, 비기독교도인 노예는 계속 존재했다.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인권 존중을 제일의 가치로 내건 계몽주의 시대였다. 따라서 모든 나라의 노예제도 폐지 선언은 18세기 말에 집중되어 있다. 고대에는 소크라테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제 사회에 의심조차 품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고대인은 노예가 자신들과 같은 종교를 믿지 않으니까 자기네와 동등해질 권리가 없는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고대의 노예는 전쟁에 지거나, 해적한테 붙잡히거나, 빚을 갚지 못해 담보로 잡히거나, 아니면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거나, 부모가 노예로 팔았거나 하는 따위의 '불운' 때문에 노예 신세로 전락한 사람을 가리켰다. 따라서 주인이 온정을 베풀거나 빚을 갚거나 몸값을 내고 노예에서 풀려나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어TEk. 노예로 태어난 사람도 몸값을 내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해적한테 붙잡힌 사람이나 전쟁터에서 포로가된 사람과 같은 처지였다. 자유민과 노예의 구별은 믿는 종교의 차이가 아니라 이런 '불운'을 당했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불과했다.
그리스인(헬라스)과 야만인(바르바로이)을 차별하여 그 경계선을 고수한 그리스인보다는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 국가로 변모하는 길을 선택한 로마인이 이런 생각을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 아테네에도 스파르타에도 해방노예라는 사회계급은 끝내 생겨나지 않았지만, 로마에는 생겨나서 존속했따. 게다가 로마인은 이들 가운데 자격이 있는 자에게는 로마 시민권까지 주었다. 로마인의 가정은 노예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았다. 국가 지도층인 원로원의 의원의 가정을 예로 들면, 아침마다 주인의 수염을 깎아주는 것도 노예다. 요리를 하고 식사 시중을 드는 것도 노예다. 자녀의 교육을 맡는 가정교사도 대부분 노예다.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도 주부가 아니라 노예다. 전쟁터에서 무기를 나르는 것도 노예다. 원로원 의원에게는 체면상 허용되지 않는 장사에 이름을 빌려줄 뿐 아니라 실무까지 맡아서 처리하는 것도 노예다. 주인이 불러주는 편지를 받아적는 것도 노예다. 국영 우편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편지를 가지고 먼 오리엔트까지 가서 답장을 받아오는 것도 노예다. 해외에 살면서 주인의 재산을 운용하는 것도 노예다. 그런데도 노예 반란이 거의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세계가 태어나면서부터 신분 차이가 생기는 자유민의 사회보다 훨씬 치열한 경쟁사회였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출신이 아니라 기능이다. 교양이 많거나 어학에 소질이 있거나 예능면에 뛰어나거나 장사에 뛰어난 재능이 있거나 특수한 기능을 가진 노예는 데려가려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노예들이야말로 해방노예가 되는 지름길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수한 재주를 타고나지는 못했다 해도, 날마다 함께 살고 있으면 정이 든다. 그래서 고대 로마에서는 뜻밖에 노예해방이 성행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노예해방을 규제하기 전에는 사실상 방임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실정에서는 위험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반란을 일으키기보다는 해방노예가 되려고 애쓰는 편이 훨씬 현실적인 선택이다.
현대의 연구자들 중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노예해방 규제법을 그의 보수성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것도 아우구스투스의 현실주의를 보여주는 증거로 생각한다. 카이사르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었듯이,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을 로마 시민으로 만드는 것, 즉 자기들과 동화시키는 것에 대한 로마인의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우수한 인재 등용, 둘째는 병역 등으로 로마 제국의 안전보장에 이바지한 사람들에 대한 논공행상이다. 그러나 해방노예가 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길이 열린 것과 마찬가지인 이상, 노예해방을 계속 방임하면 저질 노예들까지 로마 시민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게 되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 전체의 질이 떨어지는 동시에,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될 우려도 있다. 현대의 국가들이 불법 이민이 늘어나는 현상에 신경을 곤두세우는것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도 이 문제에 대처해야 했다.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서술할 때 '노예와 로마 시민권'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도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해방이 로마 시민권 획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년에 '푸리우스 카미니우스 법'을 성립시킨다. 법의 명칭은 이 법안을 제출한 집정관 두 명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실제로는 아우구스투스가 입안자였다. 자기 이름을 붙인 법안만 제출하면 독재로 여겨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남의 이름을 빌린 것인데, 이런 수법은 카이사르도 곧잘 이용했다. '황제'가 아니라 '제일인자'로 통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경우에는 이 방식을 더 많이 활용했다. '푸리우스 카미니우스 법'은 요컨대 유언에 따라 노예해방을 규제한 법이고, 5년 뒤인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역시 그해의 집정관 두명의 이름을 빌려서 성립시킨 '아일리우스 센티우스 법'은 생전의 노예해방을 규제한 법이었다.
'푸리우스 카미니우스 법'에 따르면, 3명 이하의 노예를 가진 자는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하고 싶으면 전부 해방할 수도 있다. 그밖에 유언에 노예해방을 명시하는 경우, 4명 이상 100이하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노예의 절반까지 해방할 수 있고, 100명 이상 500명 이하의 노예를 가진 자는 5분의 1까지 해방할 수 있다. 그렇기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의 유언으로 100명 이상의 노예를 해방할 수는 없었다. '아일리우스 센티우스 법'은 유언에 따른 노예해방을 규제한 '푸리우스 카미니우스 법'을 생전의 노예해방에도 적용했고 해방할 경우의 각종 제한도 명시하고 있다. 국가나 주인에게 처벌을 받은 적이 있는 전과자 노예는 해방될 수는 있지만, 다른 노예나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수도에서 100로마마일(약 150킬로미터)이상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하고, 재산 사유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만 포기하면 거주지 제한은 해제되고, 재산 소유권도 인정된다. 해방노예에서 로마시민으로 신분이 상승될 길이 그들에게는 막혀 있었던 셈이다. 또한 주인이 20세 미안인 경우, 이 나이에는 판단력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노예해방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이 20세 이상이고 해방 대상인 노예가 30세 이상인 경우에는 전과 마찬가지로 법무관 앞에서 해방 선언만 하면 된다는 규정이 재확인되었다. 다만 해방되는 노예의 수가 법률로 정해진 범위를 넘어서면 안되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주인이 20세 이상이라도 해방 대상인 노예가 30세 미만일 경우에는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심사위원회의 재가가 필요하다. 심사위원회의 위원은 10명이다. 수도 로마에서는 5명의 원로원 의원과 5명의 '기사계급' 출신으로 구성된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위원을 맡았다. 재가가 내려진 경우에도 해방노예가 30세 미만이면 재산을 사유할 수는 있어도 그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 권리는 인정받지 못했다. 해방노예가 로마 시민권을 얻으려면 3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이 규제는 해방노예의 자손이 로마 시민화하는 데 제동을 거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인이 생각한 '시민권'은 자신들과 피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로마인이 생각한 '시민권'은 자신들과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인의 '노예해방 규제법'은 정신을 공유한다는 로마의 전통을 지키면서 열등분자가 섞여들어 로마의 정신이 희박해지는 것만 막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노예해방을 '금지'하지 않고 '규제'하는 데 그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렇긴 하지만 규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노예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노예해방을 규제한 뒤에도 50명 내지 100명의 노예가 해방되는 일은 끊이지 않았다. 해방노예라는 사회계급이 존속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생각은 그대로 티베리우스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는 달리 무인의 자질을 겸비한 사람이다. 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한 경험이 풍부했던 만큼, 재능이 풍부한 무인을 알아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그래서 남프랑스만이 아니라 '장발의 갈리아'에서도 지휘관급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일반화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기껏 출세해봤자 보조부대 대장을 맡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티베리우스 시대에는 로마군의 주력인 군단 지휘까지도 맡게 되었다. 양질의 이질분자를 받아들이는 면에서라면, 로마의 개국 노선은 꾸준히 진전되고 있었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의 문호를 개방한 것도 이 선상에서 해석되어야 할 정책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혁명적인 일을 이룩한 게 아니다. 그가 스스로 밝혔듯이 로마인의 전통에 따랐을 뿐이다. 로마 시대의 그리스인이자 '영웅전' 저자인 플루타르코스도 말했다.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패자조차 자기들과 동화시키는 로마인의 생활방식에 있었다고, 이렇게 말한 플루타르코스의 고국 그리스에는 노예계급은 있었지만, 소크라테스가 살았고 페리클레스가 활약한 전성기에도 해방노예라는 사회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정 로마의 최고 역사가로 알려진 타키투스는 오현제 시대에 집필활동을 한 탓도 있어서, 그 이전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까지 포함하여 전부 다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종합적으로 정리할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지만, 그런데도 타키투스가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충실하게 소개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다만 행적을 소개한다 해도 그 일을 한 주인공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행적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타키투스의 소개 방식도 달라진다. 연설이나 정책이 '선'일 경우, 타키투스는 그 행적을 소개한 뒤 자신의 논평을 덧붙이지 않는다. 마치 사람은 싫지만 이것만은 인정해주겠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반대로 '악'인 경우에는 행적을 소개하기도 전에 이미 무자비하게 붓을 휘둘러 일도양단으로 비판한다. 속주민이 원로원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재확인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연설은 전자였다. 하지만 앞으로 서술할 일은 타키투스의 소개 방식으로는 후자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타키투스는 이것을 '악'으로 단정했다. 어쨌든 그는 처음부터 "클라우디우스란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아내의 지배를 받는 데 익숙한 사내였다"고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변명할 수도 없다.
아그리피나의 야망
메살리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클라우디우스는 다시 홀몸이 되었지만 벌써 60세의 나이다. 결혼은 세 번이나 경험했고, 1남2녀의 아버지다. 이미 시집간 안토니아를 비롯하여 옥타비아와 브리타니쿠스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 혼자 살 수 없다면, 애인을 가지면 된다. 알려진 것만으로도 애인은 둘이나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황제가 재혼하면 제위 계승 문제가 복잡해질 뿐이라면서 독신을 고수한 티베리우스와는 달랐다. 평소에는 아내를 귀찮게 여기면서도, 정실 배우자가 없으면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 타입의 사내였다. 아내에게 지배당하는 데 익숙한 사내라기보다, 독신으로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기 때문에 재혼했지만 결국 재혼 상대의 손아귀에 잡혀 이리저리 휘둘려버리 느낌이다. 그렇다 해도 상대를 고르는 일쯤은 스스로 해야 마땅했다. 아무리 클라우디우스가 여자에게 인기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해도, 그는 황제다. 로마 제국의 퍼스트 레이디를 꿈꾸는 자천타천의 후보자는 수두룩했다. 또한 메살리나의 경우를 보아도,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면 이중결혼 같은 비상식적인 일만 저지르지 않으면 제멋대로 살 수 있었다. 이것은 여자 쪽에서 보면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는 여자를 고르는 일조차도 하지 못했다. 여자에게 인기를 얻은 경험이 없는 사내는 여자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게 되어도 그만 주눅이 들고 만다. 그래서 아내를 고르는 일조차 비서진에게 맡겨, 그들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서진을 구성하고 있는 해방노예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하여 검토한 결과, 각자 한 사람씩 세 명의 후보를 추천했다. 나르키소스가 추천한 여자는 아일리아 페티나, 클라우디우스의 두 번째 아내였지만, 딸 안토니아를 낳은 뒤에 이혼한 여자다. 칼리스투스가 추천한 여자는 롤리아 파올리나, 칼리굴라의 세 번째 아내였지만 얼마 못 가서 이혼했다. 칼리굴라와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팔라스가 추천한 여자는 율리아 아그리파나, 역사학자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어머니와 구별하기 위해 어머니를 대 아그리피나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팔라스가 황후 후보로 추천한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와 대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딸이니까 칼리굴라의 누이동생이고, 남편 아해노바르부스를 사별한 과부였다. 세 여자 다 로마의 상류층 여자다. 집안도, 용모도, 30대 중반이라는 나이도 엇비슷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하여 세 명의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을 고르는 일조차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세 비서관에게 각자 추천 이유를 말해보라고 명령했다. 나르키소스는 페티나가 적당한 이유를 설명했다. 과거에 아내였던 여자를 다시 집안에 들여놓는 것이므로 가정에 변화를 초래하지 않아도 된다는. 클라우디우스와 사이에 이미 성장한 딸이 있으니까, 메살리나가 남긴 두 아이도 어머니로서 잘 양육해주리라는 것. 파올리나를 추천한 칼리스투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파올리나는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으니까 두 의붓자식의 어머니 역할을 하기에 적합하다. 칼리굴라와 이혼한 것은 칼리굴라의 변덕 탓이고, 그녀의 성격은 아주 좋다. 게다가 로마 최고의 미인으로 평판이 자자한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또한 전처였던 페티나를 다시 아내로 삼으면, 우쭐해진 그녀 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깨질 우려도 있다. 아그리피나를 내세운 팔라스의 추천 이유는 참으로 교묘한 것이었다. 아그리피나는 아직도 인기가 시들지 않은 게르마니쿠스의 딸이다. 그런 아그리피나를 아내로 맞아들이면, 율리우스와 클리우디우스라는 두 명문 씨족의 관계를 좀더 밀접하게 만든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자식이 없는 파올리나와 결혼하면 자식을 얻지 못할 우려가 있지만, 이미 아들을 낳은 아그리피나와 결혼하면 그럴 염려도 없다면서, 클라우디우스의 은밀한 소망에도 넌지시 대답했다. 그래도 클라우디우스는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각 후보자의 저극성이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황족에 속해 있는 아그리피나는 황궁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TEk. 하지만 그녀에게도 불리한 점은 있었다.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피나는 숙부와 질녀 사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러 로마역사에도 권력자의 아내가 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정치를 하기로 작심한 여자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해 34세였던 아그리피나는 어머니인 대 아그리피나를 닮아서 자기가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는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을 통치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가 확신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로마 역사상 여자로는 처음으로 회상록을 썼을 정도니까, 어머니보다 훨씬 머리도 좋았다. 칼리굴라 황제의 누이동생인 그녀는 당분간은 황제의 아내가 되고, 언젠가는 황제의 어머니가 되어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로 결심한다. 클라우디우스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는다는 건 처음부터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녀가 섭정이 되어 조종할 황제 후보자는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해 12세가 된 아들 도미티우스다. 이런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숙부와 결혼하는 것도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의 맹렬한 공세에 마침내 굴복했다. 하지만 숙부와 질녀의 결혼에는 뭔가 구실이 필요했다. 이때도 오랜 협력자인 비텔리우스가 나서서 지원 사격을 맡아주었다. 원로원 의원과 시민들을 관객석에 모셔놓고 희극을 상연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고, 클라우디우스의 동료 재무관이 되어 국세조사를 함께 실시한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국 통치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최고지도자의 일상은 일반인으롯는 상상할 수도 없는 노고의 연속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집안의 온갖 걱정거리를 도맡아 처리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집안의 걱정거리라는 사소한 일에서 해방되어야만 비로소 제국을 통치하는 큰일에 전념할 수 있는 법이다. 이런 일을 맡아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내뿐이다. 국사에 전념하는 남편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날마다 고락을 함께하는 아내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항상 국법을 지키고, 황제가 된 뒤에도 쾌락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국사에만 전념해온 사람이 그 신분 때문에 남에게는 밝힐 수 없는 일까지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 아직 어린 딸과 아들의 양육을 맡길 수 있는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원로원 의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비텔리우스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의원 여러분, 아그리피나의 몸 속을 흐르는 피가 고귀하다는 사실은 세삼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친형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전례럾는 일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금지되었던 사촌끼리의 결혼도 이제는 드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숙부와 질녀의 결혼은 그 자체도 문제지만, 두 당사자의 신분 때무에 개인의 사사로운 일로는 끝나지 않는다. 원로원 의원들의 마음은 웬지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줄거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의원 한 사람이 회의장 밖으로 나가자, 거기에는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소집되어 있었을 게 분명한 시민들은 의원이 황제의 결혼에 찬성해달라고 호소하기도 전에 일제히 삼촌과 조카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하라고 요구했다. 회의장 밖에서 들려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회의장 안에 있던 의원들에게 곤혹스러움을 떨쳐버릴 구실을 주었다. 비텔리우스는 마지막 마무리에 착수한다. 클라우디우스를 향해 그는 이렇게 물었다.
"원로원과 시민들이 아그리피나와 결혼하라고 요구하면, 그 요구를 받아들이겠습니까?"
클라우디우스는 대답했다.
"나는 로마 시민의 한 사람에 불과하오, 따라서 나에게는 로마의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들의 요구를 거절할 권리가 없소."
희극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 고대에는 무엇 때문인지 아테네에서도 로마에서도 희극과 비극이 같은 날 잇따라 상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람의 일생이 희극이나 비극 가운데 하나로만 끝나는 경우는 드물고, 대다수 사람의 인생은 희극과 비극의 되풀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고대인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아내가 된 아그리피나는 옆에서 성가시게 졸라대면 그만 귀찮아져서 잘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해버리는 클라우디우스의 버릇을 충분히 활용한다. 그녀은 우선 자신을 '아우구스타'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더불어 '황제'를 뜻하는 칭호가 되었다. 아우구스타는 아우구스투스의 여성형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유언에서 비로소 아내 리비아에게 이 칭호를 주었다. 그런 존칭을 아그리피나는 일찌감치 손에 넣은 것이다. 다음에는 여자의 몸으로 도시에 제 이름을 붙이는 일까지 해치웠다. 이것은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는, 아니 로마 역사만이 아니라 고대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고대는 본질적으로 도시 문명이었기 때문에, 통치의 '핵'이 되는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위정자의 중요한 임무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도시라는 뜻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을 딴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만이 아니다. 카이사르의 도시를 뜻하는 카이사레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도시의 이름이다. 티베리우수의 도시는 티베리스이고, 클라우디우스의 이름을 형용사처럼 사용한 도시 이름도 많다. 특히 로마의 경우에는 퇴역병을 이주시켜 건설한 식민도시를 제국 통치의 '핵'으로 삼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었다. 황제 이름을 붙인 도시는 대부분 만기 제대한 병사를 보내 건설한 도시다. 여자 이름을 붙인 도시가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그리피나는 서기 15년에 콜로니아(오늘날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당시 게르마니아 전쟁을 치르고 있던 8개 군단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쾰른은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가 우군으로 끌어들인 게르만의 유력 부족 우비족의 근거지여서, 이 우호적인 부족의 땅이라면 가족을 놔두어도 안심할 수 있었다. 이 땅을 로마군의 겨울철 숙영지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그리피나의 외조부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다. 하지만 외조부나 아버지와 인연이 깊고 자신의 출생지이기도 하다는 이유만으로 한 도시에 자기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퇴역병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세워야만 비로소 그 일을 수행한 사람의 이름을 도시에 붙이는 것이 로마의 전통이다. 그래서 아그리피나는 출생지인 쾰른에도 만기 제대한 고참병들을 이주시켜 로마의 식민도시(콜로니아)로 격상시켰다. 따라서 쾰른의 옛 이름은 아그리피나의 식민도시를 뜻하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다. 쾰른은 식민도시를 뜻하는 라틴어 콜로니아를 독일어식 발음으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 자기 이름을 딴 도시를 갖는 제정 시대로 접어든 뒤에는 오직 황제에게만 허용된 영예다. 아그리피나는 이 영예까지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사건은 요란한 비난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원로원과 시민들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첫째 이유는, 아그리피나라는 말 자체에 '아그리파의'라는 뜻도 있어서, 사람들은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를 '아그리피나의 식민도시'가 아니라 '아그리파나의 식민도시'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그리파가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라인 강을 제국 방위의 최전선으로 삼는 것이 로마의 전략인 이상, 라인 강 연안의 쾰른은 전략적 가치가 높았고, 이 도시를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중심을 이루는 '콜로니아'로 격상시켜 전방 기지로 만드는 것은 로마의 국익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쾰른이 식민도시로 격상된 것은 현지인인 우비족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우비족은 게르만족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어서 로마 병사와 결혼한 여자도 많았고, 사실상은 이미 로마화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쾰른이 식민도시가된 것은 이 상태가 공인된 것에 불과했고, 게다가 로마의 식민도시가되면 더욱 많은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다.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야심을 만족시킬 때도 국익과 일치시키는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자 특유의 방자함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보다 뛰어난 여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황후를 간택할 때 그녀와 경쟁한 두 여자, 그 중에서도 특히 미모로 평판이 자자한 롤리아 파올리나를 아그리피나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는 롤리아 파올리나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결혼할 가능성을 점성술사에게 물어보았다는 혐의를 날조하여, 클라우디우스가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한 고발장을 원로원에 제출했다. 본국 이탈리아에서 점성술사가 돈을 받고 점을 쳐주는 것은 티베리우스의 명령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원로원은 아그리피나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음을 간파했지만, 고발장에 엄연히 황제의 서명이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가련한 파올리나에게는 5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만 갖고 수도를 떠나라는 추방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그리피나의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위협했는지는 모르지만, 파올리나를 자살로 몰아넣은 뒤에야 겨우 만족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메살리나가 아니었다. 황후가 메살리나에서 아그리피나로 바뀐 뒤에도 황후의 전횡은 여전했지만, 아그리피나의 전횡은 메살리나처럼 변덕이나 서방질의 결과가 아니라 야망을 실현하기위한 냉철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아그리피나는 서방질도 하지 않았고, 가정도 완벽하게 꾸려나갔다. 아이들 양육에도 열심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2세가 된 친아들 도미티우스의 교육에는 주도면밀한 베려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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