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4호 - 2024.05.08. 수요일(음력 : 04. 01.)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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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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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나운 폭풍우에 미쳐 날뛰는 바다를 보았고, 조용하고 잔잔한 바다, 그리고 어둡고 침울한 바다도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변덕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마틴 벅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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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놈’과 ‘숫놈’
‘수놈’과 ‘숫놈’을 사이에 두고 아나운서실에서 격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맞춤법 표기는 수놈으로 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숫놈[숟놈→순놈]이라고 발음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수소(황소)’도 마찬가지였다. ‘수소’는 어색하게 느껴지고 ‘숫소’가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나운서들은 원칙과 현실 발음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많이 있다.
현행 맞춤법 규정은 수컷을 이르는 접두사는 ‘수-’로 통일하기로 하고 있다. 이 원칙에 따라 ‘숫놈’을 버리고 ‘수놈’이 표준어가 되었다. ‘숫소’가 아니라 ‘수소’, ‘숫꿩’이 아니라 ‘수꿩’, ‘수나사’, ‘수은행나무’가 된 것이다.
모두가 ‘수-’로 통일됐다면 쉽겠다. 그런데 다음의 경우는 ‘수-’ 뒤의 거센 소리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암수’의 ‘수’가 ‘숳’에서 왔기 때문에 그 흔적이 남아 굳어진 것들이다. 수컷, 수캉아지, 수캐, 수키와, 수탉, 수탕나귀, 수평아리, 수퇘지가 그것이다. 암컷을 이르는 접두사 ‘암’의 경우도 이에 준해 암컷, 암캉아지, 암캐, 암키와, 암탉, 암탕나귀, 암평아리, 암퇘지를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수’ 뒤의 거센 소리가 굳어진 것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기준이 모호하다. ‘개미’나 ‘거미’ ‘벌’의 경우 ‘수캐미’ ‘수커미’ ‘수펄’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도 많지만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맞춤법 규정은 ‘수개미’ ‘수거미’ ‘수벌’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숫-’을 인정하는 것은 ‘숫양’ ‘숫염소’ ‘숫쥐’ 뿐이다.
그래도 ‘수놈’ ‘수소’는 어색하다. 고백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수놈’이라 쓰지만 ‘숫놈’[순놈]이라 읽는다. ‘수소’라 쓰고 ‘숫소’[숟쏘]라고 읽는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서거, 별세, 타계
일요일 새벽,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에는 ‘서거’ 외에 ‘별세’, ‘타계’ 등이 있다.
‘서거’는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위대한 예술가 등 비범한 인물의 죽음에 대해 쓴다. 사전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로 풀이하고 ‘조모의 서거, 선생의 서거 50주기를 맞아’ 등의 예문을 ‘왕의 서거’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에 한해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별세’는 세상과 이별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의 죽음을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말이다. 고인의 사회적 지위나 명망에 관계없이 존경의 뜻을 담아서 쓴다. ‘돌아가시다’와 거의 같은 정도의 존대 표현으로 권위적이지 않아 고인에 대한 개인적인 추모 감정이 더 잘 묻어난다. ‘직원 000의 부친 별세’처럼 부고를 전할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타계’는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계로 간다는 뜻으로 국어사전에는 ‘귀인’의 죽음을 이르는 말로 풀이돼 있다. 쓰임을 분석해 보면 ‘서거’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잖은 기여를 했거나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인다는 점에서 ‘별세’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표현들이 언제나 엄격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장면이나 말하는 이의 뜻에 따라 혼용이 가능하다.
얼마 전 만났던 팔순의 어르신 말씀이 떠오른다.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일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고민하셨단다. ‘타계’는 공적인 느낌이 강해서 벗을 잃은 슬픔이 드러나지 않고, ‘별세’를 쓰자니 윗사람이 아니어서 꺼려지고. 여러 날 궁리 끝에 ‘영원히 잠들다’는 뜻의 ‘영면’을 생각해내고는 만족스러우셨다고 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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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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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8월의 종소리 - 천상병
저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땅의 소리인가?
하늘 소리인가?
한참을 생각하니 종소리
멀리 멀리서 들리는 소리,
저 소리는 어디까지 갈까?
우주 끝까지 갈지도 모른다.
땅속까지 스밀 것이고,
천국에서도 들릴 것인가?
∼∼∼∼∼∼∼∼∼∼∼∼∼∼∼∼∼∼∼∼∼∼∼∼∼∼∼∼∼∼
山居(산거) - 한용운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깍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샘을 팠다.
그름을 손인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언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에 노래라 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 것은
옛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고 가지 않는 근심은
오직 작은 베게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의 적막이여
어데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오는가.
차라리 두견성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의 적막이여.
∼∼∼∼∼∼∼∼∼∼∼∼∼∼∼∼∼∼∼∼∼∼∼∼∼∼∼∼∼∼∼∼~~~~∼∼
갑판 우 - 정지용
나지익 한 하늘은 백금빛으로 빛나고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짠바람에 뺨마다 고운 피가 고이고
배는 화려한 짐승처럼 짓으면서 달려나간다.
문득 앞을 가리는 검은 해적 같은 외딴섬이
흩어져 날으는 갈매기떼 날개 뒤로 문짓 문짓 물러나 가고,
어디로 돌아다보든지 하이얀 큰 팔구비에 안기여
지구덩이가 동그랗다는 것이 길겁구나.
넥타이는 시원스럽게 날리고 서로 기대 슨 어깨에 유월 볕이 스며들고
한없이 나가는 눈길은 수평선 저쪽까지 기폭처럼 퍼덕인다.
바다 바람이 그대 머리에 아른대는구료,
그대 머리는 슬픈 듯 하늘거리고.
바다 바람이 그대 치마폭에 니치대는구료,
그대 치마는 부끄러운 듯 나부끼고.
그대는 바람보고 꾸짖는구료.
별안간 뛰여들삼어도 설마 죽을라구요
빠나나 껍질로 바다를 놀려대노니,
젊은 마음 꼬이는 구비도는 물구비
둘이 함께 굽어보며 가비얍게 웃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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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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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일우(千載一遇)
千:일천 천. 載:실을/해 재. 一:한 일. 遇:만날 우.
[동의어] 천재일시(千載一時), 천재일회(千載一會), 천세일시(千歲一時). [유사어] 맹귀부(우)목[盲龜浮(遇)木].
[출전]《文選》〈袁宏 三國名臣序贊>
천 년[千載]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란 뜻으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이르는 말.
동진(東晉)으 학자로서 동양태수(東陽太守)를 역임한 원굉(袁宏)은 여러 문집에 시문 300여 편을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문선》에 수록된〈삼국 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이다. 이것은《삼국지》에 실려 있는 건국 명신 20명에 대한 행장기(行狀記)인데, 그중 위(魏)나라의 순문약(荀文若)을 찬양한 글에서 원굉은 ‘대저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면 천 년이 지나도 천리마[驥] 한 필을 찾아내지 못한다[夫末遇伯樂則 千載無一驥]’고 적고, 현군과 명신의 만남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만 년에 한 번의 기회는 이 세상의 통칙이며
[夫萬歲一期 有生之通途(부만세일기 우생지통도)]
천 년에 한 번의 만남은 현군과 명신의 진귀한 해후다
[千載一遇, 賢智之嘉會(천재일우 현지지가회)]
[주]
순문약 :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의 참모로 활약했으나 조조에게 역심이 있음을 알고 반대하다가 배척당한 강직한 인물.
백락 : 주(周)나라 시대에 준마(駿馬)를 잘 가려냈다는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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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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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권오석
제1권 영웅대망 편
예산에서
사인교는 어느덧 방죽을 지나 산길로 들어섰고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억만이와 덕보의 길없는 수작이 도 번암의 귀에 들린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대감마님께선 이대로 온양까지 가실 작정일까?"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나? 나는 한양 '본가'를 떠나고서 오늘까지 한 끼니는커녕 하루 이틀 굶더라도 배가 부를 만큼 든든하다네."
"뭐라고? 하루 이틀 굻어도 배가 절로 불러!"
덕보는 억만이의 조롱에 또 걸려들었다.
"정말?"
"난 거짓말하지 않아."
"거짓말이면 가만두지 않겠다. 죽여 버릴테다."
"정말일세. 사람이란 돈이 있다 보면 배가 고파도 배도 고프지 않는 법일세."
덕보는 억만이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어떨지 당혹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눈빛이 달라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역시,넌 이르는 곳마다 손을 벌렸구나. 대체 얼마나 벌었지?"
억만이는 싱글벙글했다.
"그러니까 넌 바보 녀석이야."
"흥, 얼버무리지 마라.그러지 않고서는 어떻게 배도 고프지 않을 만큼 돈을 가졌겠어? 실토해!"
"덕보, 넌 대감마님이 한양을 떠날 때 우리한테 엄격히 타이르신 말씀을 잊지는 않았을 테지?"
"엉?"
덕보는 억만이의 말이 또 비약했지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경계하듯 대꾸한다.
"음,작게 말하게. 대감마님이 들으셔."
억만이는 거침없다.
"대감마님은 귀를 잡수셨어. 또 들으신다 하여도 상관없지.난 조금도 그른 말을 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작게 말하라구."
"아무튼 대감마님은 엄하게 말씀하셨네.이번에 시골로 내려가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니까 절대로 관이고 민이고 폐를 끼치지 말라. 그러니 너희들의 밥값은 매일 저녁에 열푼씩 주겠다... 알겠니,이 돌대가리야! 나는 그런 돈을 꼬박꼬박, 고스란히 모았네."
덕보는 억만이의 말에 다시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처음의 충격이 사라지자 필사적으로 억만이에게 반격할 구실을 찾았다.
"흥,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게 그것 아냐?"
"뭐가?"
"넌 대감마님의 이름을 팔아 손을 벌리지는 않았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공짜로 술밥을 얻어먹었다면... 그게 그거잖아?"
"어째서 같아?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쪽에서 주었다. 주는 것도 받아먹지 않는 바보가 있겠어?"
"?"
덕보는 또 말문이 막혔다. 억만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럴 듯 싶었다. 그러나 그대로 굴복하기에는 너무도 약이 올랐다. 어딘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 같았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도 덮어놓고 승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었구나.돈을 많이 모았을 테지.얼마나 되니?"
"글세. 말하면 꿔 달라고 하겠지?"
하고 억만이는 싱글싱글 웃었다. 덕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억만이는 자기보다 한 수 높은 것 같았다. 그러나 덕보는 끝가지 지고 싶지는 않았다. 꾀를 내어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 돈을 악착같이 벌어 무엇을 할 작정이니? 뛰어 보았자 개구리라고. 너나 나나 기껏해야 종놈인데."
억만이는 진지한 얼굴빛이 되었다.
"돈이 모이면 장가를 들겠어."
"장가?" 하고 덕보는 되물었다.
"장가는 때가 되면, 대감마님이든 안방마님이든 알아서 집에 있는 여종을 하나 짝지어 줄 게 아냐?"
"그렇지만 돈이 있는 것과 없는 것하고는 입장이 다르다."
"어떻게?"
억만이는 잠시 생각하고서 대답했다.
"첫째, 내 돈이 있다면 언제라도 대감마님께 말씀드릴 수 있네. 그것도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을 수 있을 게 아니겠어?"
덕보는 진정 놀랄 판이다. 억만이는 생각이 연상 더오르는 모양으로 또 말했다.
"그뿐인다. 또있네."
"또 있다구? 그게 뭐지?"
"사람은 자기 하기에 달린 거야."
"글세, 그게 뭐지?"
"그것은 비밀이다."
억만이는 덕보가 아무리 졸라도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사인교는 마침내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마루터기에 올라서자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두 하인의 목소리를 뒤로 날려 버렸다. 가마의 앞채를 멘 가마꾼 하나가 그제야 산 아래를 가리키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저곳이 용궁리입니다. 저 삼태기 안처럼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고, 그 가운데 우뚝한 것이 월성위의 고택 (옛집)이옵지요."
"으음."
번암은 처음인 곳이지만 감개가 무량한 듯이 눈길을 보냈다. 멀리서 보아도 영조대왕이 그 사랑하신 맏사위에게 이곳의 땅을 내려 준 뜻을 알 만했다.
"용궁 마을이라고 했나?"
그 이름처럼 나뭇가지 사이로 흰 뱀과도 같은 등을 보이면서 냇물이 굽이돌고 있었다. 무한천이 분명했다. 무한천은 홍주에서 흘러나오는 여양천의 하류로,예날엔 거대한 뱀처럼 자주 홍수를 일으겨 사람과 가축을 해쳤다는 기록을 <여지승람>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곳도 용궁리의 이름처럼 바다와 관계가 있고, 처음엔 갯벌이라 척박한 땅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갯벌을 막아 방죽을 쌓고 그 안에 논을 만들었다. 번암은 조금 전 방죽의 넓은 길을 가마로 지나면서,길! 도대체 조선에 길이란 게 있었던가? 하며 생각한 젊었을 적의 반발이 생각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 하고 번암은 뇌까렸다.
"방죽 길이 넓고 논두렁길도 가마를 내내 타고 지났으니 이곳의 인심이 후한 것을 알겠구나."
"예,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까의 가마꾼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니다,아무것도 아니다. 나 혼자 한 소리다."
번암은 가마에서 용궁리를 굽어보고 또 하늘을 우러른다. 때는 해거름이었다. 마을의 집들에선 쇠죽을 쑤는지 굴뚝에서 휜 연기가 오르고 있다.
"나도 담배 한 대 피고 싶구나. 여기서 좀 쉬었다 가도록 하자."
번암은 그렇게 말했지만,모처럼의 기회를 틈타 엣날의 회상을 하고 싶어던 것이다. 번암의 아버지는 원래 무인으로 오랜 무인으로 오랜 근무를 하고서야 현감을 지냈던 탓인지 아들에게는 늘 입버럿처럼 말했다. 조선에서는 말이 양반이지 무관에 대한 멸시가 심했었다.
"글을 열심히 읽어라. 그리고 선비가 되는 거다. 호주공도 구봉 할아버지도 모두 글로써 가문을 빛내셨다."
그러자 번암의 당숙이 이런 말을 듣고 비아냥거렸다.
"형님댁은 그래도 좋겠수.하지만 조카님을 너무 들볶지는 마시오. 글이란 알맞게 알면됐지, 열심히 읽어 뭣 합니까?"
이때는 물론 턍평책이 발표되기 이전이다. 말이 몇번 들리기도 했지만 흐지부지된 일도 있었다.
"허허,이 사람 정신 나간 소리 하네. 선비의 자식이 글을 않고서 뭘 하겠는가?"
"그야 형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지요. 하지만 요즘에는 선비가 차라리 중인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이죠."
"이 사람 듣기 싫네."
중인은 영조 이후에 두드러지기 시작한 새로운 계층이다. 당시엔 아마도 그런 개념은 없었으리라. 없었지만, 실체로서 느껴졌을 터이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파악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같았지만. 중인은 주고 청나라를 드나드는 통사(통역)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시대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란 소수의 선각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당숙의 말엔 가시가 돋혀 있었다.
"벼슬을 못하는 양반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한낱 토반이지요. 상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양반으로서 벼슬을 3대 못하면 땅이나 파먹는 농군이 되고,그래서 토반이라 하지요.벼슬도 못하니까 자식들의 공부도 제대로 못시켜 무식쟁이가 되어 버리고 상인이 되기 십상이지요..."
"자네는 쓸데없는 자격지심으로 말하겠지만, 아무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하제."
번암은 그때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여겨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당숙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졌다. 사인교는 고갯길을 천천히 내려간다. 번암은 계속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나는 사물의 이치로서의 도와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서의 그것을 참으로 알았다고 자신하는가? 성현들의 말씀인 도나 인간이 발명한 길을 같은 것이지만,그 길을 거저 똑바로 걸었다는 데 그친 것은 아닐까?' 노재상의 깊은 주름살엔 그런 고뇌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나라의 길이 좁고 꼬불꼬불한 것은 오랜 옛날부터의 것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은 역사 이래 숱한 외침을 당했다. 그리서 길을 좁게 만들었다. 길도 말을 타고 그래로 지나갈 수가 없었다. 비상시에는 성문의 흙을 파내고 말 타고 지날 수가 있었지만, 곧 다시 메워 버렸다. 그리하여 수레가 발달되지 못했다. 그런대 논틀길마저 좁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간의 욕심탓이다. 서로 자기의 논두렁을 깎아먹어 길은 뾰족한 칼날처럼 되어 버렸고, 가마는 커녕 지게를 지고 지날 수도 없게 만든다.
"좁은 길은 사람의 마음에도 있었어. 젊었을 적의 내가 그랬으니까."
젊어서의 채제공은 스스로 아무런 배경도 없고 믿는 것이란 오로지 자기의 능력뿐이라고 자부했다. 벼슬을 하고 몇 년 지나고 보니,번암은 승문원 정자를 거쳐 예문관 시교(종8품)로 올라 있었다. 이것도 엘리트 코스이다. 본디 예문관은 중국의 한림원을 본딴 것이며, 요즘의 말로선 아카데미였다. 하는 일은 매우 단조롭다. 본인의 능력을 키워 주는 데는 다시 없는 기회가 된다. 늘 고문서에 파묻혀 있고 어쩌다가 옛 문헌의 조회를 받아, 그것을 찾아주는 소임이었지만 젊은 벼슬아치는 이 기회에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공부는 주자의 말이지만, 학문에 정진하여 인격을 도야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번암이 예문관의 응교가 되었을 대 아직 살아 있던 아버지는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이것으로 우리 가문도 빛나게 되었다. 구봉 할아버니도 천하(저승)에서 기뻐하실 거다."
부모 형제의 기쁨은 당연했지만, 본인도 우쭐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번암이 월서위 김한신을 처음으로 만남 것은 정묘년(영조20,1747)정월이었다. 번암과는 동갑이었으나 예문관 제한(종2품)으로 왔던 것이다. 제학은 당상관이며,그 아래로 직제학,응교,봉교와 같은 단계가 있고 요늠 말로선 차관급이다. 그러나 제학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제학 위로는 대제학이고, 대제학이라는 것은 홍문관과 예문관에만 있는 직제이다.대제학을 일명 문형이라 하는데,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당대의 최고 석학이 임명되며 누구라고 수긍라 수 있는 학문과 덕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조선조에 있어 정승을 지낸 인물은 수백 명이나 되지만,대제학은 고작 80명에 이르렀을 뿐이고 초기엔 겸직도 많았다. 이를 테면 태조 대의 양촌 권근,태종 때의 춘정 변계량,세종때의 지재 권제와 학이재 정인지등이 있었다. 지재는 <용비어천가>를 찬했다. 이 중에서 춘정이 주목된다. 그는 포은 정몽주의 제자로 전 왕조의 충신으로 기피했던 포은을 유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세조 때는 보한재 신숙주와 태허정 최항드으이 이르밍 보이고,예종 때는 사가정 거거정,그리고 유교가 바아흐로 '우리의 것'으로 탈바꿈되기 시작한 성종 때는 서천어세겸이었고 연산군 때는 용재 성현이었다. 그리고 중종 때는 양곡 소새양과 모재 김안국을 들 수 있다. 중종을 비록 반정이라는 방법을 썼으나 명분은 있었다. 그리하여 모재는 한훤단 김굉필의 제자로 사림을 대변했다. 모재는 소시적에 이웃집 처녀가 담을 넘어와서 통정을 강요하자 채찍으로 종아리를 때려 좇아 버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실 여부는 둘째로 시사되는 바가 있는 이야기다. 다시 명종 때는 호음 정사룡이,그리고 선조 때 퇴계와 율곡이 대제학을 지냈다. 유교의 열매가 결실되고 수확기에 접어들었던 것이며 사실 선조 때는 기라성 같은 인물이 무리의 눈길을 끌었다. 서애 류성룡,월정 윤근수,소재 조수신 등이 그런 인물이다. 이때 '시색 당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이는 자연스런 현상이고 어쩌면 학문,사상의 다양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냉엄하여 왜란이 일어나고 우리 민족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번암은 지금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도 희망이 있었다. 시련이 커면 클수록 일어날 수 있는 저력이 우리 조상들에겐 있었다.''아니,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길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선묘(선조)이전은 너무나 옛날의 일들이다. 지금 돌이켜본들 무엇하겠는가.'인조반정은 중조의 그것과는 구별된다. 그별되어 마땅하다. 명분이란 약했고 다분히 사감이 얽힌 것이었다. 한 번 있었던 일은 두 번 있기가 쉽다. 그렇지만 다시 반복해선 안될 일이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호된 서리을 맞고서도 정신을 못차렸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대제학으로서만 말한다면 계곡 장유,택당 이식과 같은 분을 들 수 있겠지만, 이들은 전에 없었던 천주(추천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즉 반정의 주체였던 김유나 서인의 영수 김상헌이 추천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번암의 고조부 채진후도 효종 때의 대제학으로 당시의 권신 이경석이 천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추천받은 인사의 덕망이나 학식과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당파의 색채가 그만큼 강했다는 증거였다. 월성의 김한신은 아마도 자기가 예문관의 신임 재학이라는데,동교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리라.
"아무것도 몰는 젊은 내가.그것도 느닷없이 제학이라니 여러분도 의아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할 일이 있어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된 겁니다."
번암은 그가 임금의 '부마'라는 점에서 다소의 반발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참으로 부드럽다는 데 놀란다. 왕자나 부마는 별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으나 오히려 오만하지 않고 지나치게 겸손할 정도이다.
"일이래야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오는 봄에 '사육신'의 묘비를 노들에 세울까 해서지요."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데,월성은 키가 크고 썩 잘생긴 얼굴이었다. '역시 훌륭해.' 번암의 엷은 반발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의 인상도 같은 모양이다. 월성은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읽은 듯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오늘 여러분을 저희 집에 청할까 합니다. 마침 정월이고 음식도 있을것이니 융금을 털어놓자는 생각이지요. 호식에 대해선 대제학님의 승낙도 받았습니다."
이 말로 좌중에 웃음소리도 들렸다. 당시의 관아란 식구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번암은 동료들과 함께 적선방에 있는 월성위궁을 찾았다.이때 한양은 '문안'이라고 하여 성 안은 5부로 나눠져 있었다. 중부는 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경복궁'의 점면 청계전 건너편까지인데 서린,수진 등 8방(동네)이었다. 동부는 창경궁 이동 낙산 아래까지로 숭인,연화,덕성 등 12방이나 되었다. 그리고 남부는 대채로 목멱산(남산)자락으로 남대문 일대도 포함된다. 광통,태평,성명 등 11방이며,서부는 경복궁 이서로 직선,인달,양생 등 8방,북부(북촌)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및 서북부의 북악 자락 일대로 가회,안국,순화 등 10방이었다. 41방으로서,현재 이름이 남겨진 것은 몇 개에 지나지 않지만, 유교적 덕목을 따서 동네 이름을 정했다는 데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성밖에 따로 있었다. 예컨대 남대문밖에 호수가 있었는데 (서울역 부근)그곳은 무수리 (대궐의 하녀)가 살았고,북문 밖 수유리 일대엔 내시촌이 있었다. 월성위는 혁혁한 가문인 경주 김시(경김)이였고 그의 아버지 급루정 김홍경은 자를 숙기라 했는데 성격이 원만했던 것 같다. 숙종 때 기묘년(1699)에 문과에 급제하고,숙종이 그 말년에 자주 병석에 눕자 양신(마음의 수양)을 진언한다. 그는 당파로선 노론이고 소론의 영수 최석정이 예기유편을 경연에서 강의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특별히 모나는 성격은 아닌 듯 임자년(영조8:1732)에 우의정이 되고 이어 영상에 오른다. 숙종의 승하와 그에 뒤이은 장희빈의 경종 즉의에는 애매모호한 점이 많다. 우선은 공식적인 기록으로 정리한다면 대강 이런 줄거리이다. 옥사를 일으켜 희빈을 죽게 만든 노론파는 정권 연장을 꾀하고자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봉했다. 그러자 소론파인 조태구 등의 부추김을 받은 도승지 김일경 등은 왕세제를 무고했을 뿐 아니라 자객까지 보내어 암살을 시도했고 노론의 제 대신을 죄 주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선비의 타락이다. 이것은 당쟁이 아닌 전쟁이고 파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더욱이 김일경을 편드는 소론파의 선비들이 조저으이 곳곳에 있었다고 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심지어, "나라가 망했어.망국 일보 전일세." 하며 임진왜한이나 병자혼란 때에도 들을 수 없던 한탄이 뜻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 영조의 한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일방적으로 노론파의 주장만이 전하고 있다. 가장 책임있는 세력이 노론파인데 그뒤에도 깨뜨려지지 않고 마침내 일제에 의한 망국까지 이어진다. 영조,정조는 물론이고 저 대원군도 그것을 깨뜨리지 못했다. 집권 세력은 더러 달라지긴 했지만, 그 벽은 너무나 두껍고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생각나는 대로 들추어 보니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신우년(1681:이른바 남이느이 몰락을 가져온 경신년 대출척의 다음해) 감시(향시)때에 빈 겉봉(서명이 없는 것)에 올닐 답안지를 시험관이 펴 보았더니 고변서 (역적 모의를 고발한 것)였다. 고발된 사람은 오인의 이름있는 열세 가문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것은 익명으로 고발한 것이니 불태워 버리세."
"아닐세,예사롭니 않은 일이니 상부에 보고해야 하네."
이래서 다시 엄중히 밀봉되고 왕에게가지 올라갔다. 숙종은 이를 읽어 보고 김석주에게 조사를 명했다. 김석주는 바로 경신 대출척을 연출한 공신 제1호 였다. 김석주는 왕명을 받자 숭리한다. 무조건 때려잡을 수는 없으니 머리을 쥐어짠 셈이다. 한 사나이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김환이란 자로 남이느이 도움으로 벼슬을 한 자리 얻은 무변(무인)이었다.석주는 김환을 비밀히 집에 불러 꾀었다.
"아직도 반역을 꾸미는 자가 있는데 증거가 없단 말일세.자네는 허새,허영 형제와 친하니 그들에게 접근하여 정탐하게."
"대감,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너를 죽일 테다. 만약 성공만 한다면 부귀영화는 따놓은 당상이지."
김환은 귀협에 못이겨 승낙한다.
"그런데 대감, 어떻게 하면 될까요?"
"너는 피접(돌림병이나 꺼리는 일이 있을 때 잠시 거처를 옮기는 일)을 왔다면서 허새의 집 근처에 방을 얻고 접근하는 거다. 그리고 장기를 두어라. 장기에서 장을 불러가머 적의 장기 쫏을 모조리 먹어치우면서 슬쩍 한마디 하는 걸세.'네가 남의 나라를 뺏는 것도 마당히 이럴 테지?' 만일 그가 이상한 낌새를 보였다면 밖에서 함께 자면서 역모를 하자고 꼬이는 것이다."
"하지만 대감, 그가 만인 나를 역적질하는 놈이라고 고발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걱정을 말아라.모두 너에게 달렸으니 시키는 대로만해."
이것을 읽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당시 아무리 순박한 백성이라도 이런 증거라면 완전한 우격다짐이다. 그러나 역적 모의라는 것이 실제로 이와 샅이 조작되고 국문(고문)으로써 자백을 얻는 것이었다.' 같은 <연려실기술>을 보면 이런 기사도 많이 발견된다.
'허새는 네 번 형문(곤장,단근질 등)과 한 번 압슬(무릎뼈를 부숴버림)로 자백했다. 허영은 세 번 형문에 자백했다.'
그래서 영조는 즉위하자 바로 이 압슬법부터 폐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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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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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1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삶의 방식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내가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은 단지 나에게만 중요할 뿐이다.
2
침묵을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말하는 방법을 배우고 신으로부터 침묵을 배웠다.
3
다양한 인생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성찰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교훈들을 그 당시에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4
사회가 보여주는 환상에 속아서 단지 사회에 이로운 일을 자신의 행복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회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는 사회가 품고 있는 의도를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생존에 대한 의지는 사회가 요구하는 본능 중의 하나이다. 종족의 번식을 통해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은 자신의 행동을 사회적인 의도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라고 믿는다.
5
진정한 행복에 대해 자원과 인력이 풍부해서 수입이 필요하지 않은 나라가 안정적이고 부유한 것처럼 내면 세계가 부유해서 외부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대부분의 수입품은 값이 비싸고 물건의 품질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은 것을 기재해서는 안 된다. 외부의 도움을 받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부의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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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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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7. 국무총리 장면, 숨어버리다
제1군 사령관 관저에서의 회의는 KBS에서 이른바 <혁명방송>을 한 직후였다.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쿠데타 소식이 있은 지 1시간 남짓해서야 지휘관들이 다 모였다는 것은 실랄한 비판을 받아 마땅한 줄로안다.
"조금 전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장창국 참모차장이 알려왔소.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고 있다 했소. 그러나 아직 정확한 소식은 모르겠소."
모든 지휘관이 다 모이자 이한림은 간단하게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돌아가서 예하부대를 장악하고 출동준비를 갖추어 주시오."
제3사단장 육군 중장 최석(崔錫)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서 당장 출동할 것을 완강히 주장했다.
"출동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 출동해서 서울의 외곽 통로를 차단해야 합니다."
제1군 휘하에는 폭동이나 쿠데타 같은 사건에 대비해서 따로 예비군단을 마련해 둔 부대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예비군단에 대해 <즉시 서울로 출동하라> 하고 명령만 내리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일까? 이한림도 다른 지휘관들도 최석의 건의에 단 한 사람도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돌아갈 수 있는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각급 지휘관들이 돌아가자 이한림은 부사령관 육군 소장 윤춘근(尹春根), 참모장 육군 소장 황헌친(黃憲親)을 불렀다.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놔야 할 것 같소. 수송자동차 대대는 2군단 예하사단의 출동에 대비해 놓도록 하고 전차대대도 출동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즉시 지시하시오."
8. 장도영, 그는 야누스였는가?
새벽 5시 15분. 소위 <혁명방송>이라는 것이 끝났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얼마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정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이 <혁명공약>은 김종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쿠데타를 모의할 때나 이 혁명공약을 작성할 때만 해도 김종필의 마음은 순수했으리라. 하여간에 이 혁명공약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박정희는 얼마나 감격에 몸을 떨었는지 쿠데타였다. 그는 이제 그것을 해낸 것이다. (나는 해냈다. 기어이 해냈다.) 44세의 박정희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는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때 비서실장 김병삼이 총장실 라디오를 켜놓았던 것일까? 하기야 김병삼이도 바깥 소식이 궁금해 뉴스라도들으려고 라디오를 켜놓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장도영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라디오의 볼륨을 작게 줄여 놓고 있었던 것이나 장도영도 소위 <혁명방송>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 끝머리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하는 끝말이 흘러나오자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뭐? 나를 의장이라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김병삼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를 위원장이라고 추대했으니 좀 나가도 되겠군. 비켜라!"
그는 의연한 자세로 총장실을 나갔다. 경비 장교들은 누구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묻지도 못했다. 그들도 방송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엇는 경비 장교들은, 장도영이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이라는 소리를 들었기에 그에게 어떤 불손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박종세가 원고를 읽고 있는 동안 줄곧 그의 등 뒤에 지켜서 있었던 것이다. 그가 스튜디오를 나서자 복도에는 많은 쿠데타 주체자들이 서 있었다. 육군정보학교장 한웅진은 어젯밤부터 줄곧 박정희와 행도을 같이 했던 사람이고, 그밖에 해병 준장 김윤근, 육군 준장 윤태일,예비역 육군 중령 김종필, 육군 중령 이석제, 육군 중령 정문순(鄭文淳), 육군 중령 이형계(李亨桂), 육군 중령 박순권(朴順權), 육군 소령 이낙선 등이 언제 모여들었는지 방송국 복도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육본으로 가야겠지?"
스튜디오를 나서면서 박정희는 그래야 한다고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괴이한 일이었다. 이미 육군본부가 쿠데타군의 한 가닥인 제6군단 포병단의 손에 들어가 있고 해병대와 공수단이 이미 행동을 개시해서 점령목표를 모조리 점령해 놓고 있는 지가 거 의 1시간이나 가까워지고 있는데 육군본부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어찌된 노릇이란 말인가? 사실은 그들 모두가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여기로 와 있는 사이에 육군본부에서 어떤 상황 변화가 있었는지 전혀 가늠하기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장도영이 쿠데타를 저지한다면 얼마든지 저지할 수 있다고 지키며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자 한웅진이 입을 열었다.
"육본으로 가시더라도 일단 육본의 상황을 알아보고 나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육본의 상황을 알아본다면 어떤 방법으로 알아본단 말이오?"
그렇다. 육군본부의 상황을 알아본다면 어떤 방법으로 알아봐야 한단 말인가? 정찰병이라도 보내본단 말인가? 한웅진은 박정희의 이 질문에 대해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김재춘과 한국찬(韓國贊)이 KBS로 달려온 것이다. 일행이 복도에 서있는 것을 보자 김재춘이 덤비기 시작했다. 워낙 성질이 급한 인물이라 더듬기까지 했다.
"큰일났는데 여기서 뭣들 하고 있습니까? 지금 장도영 총장이 하우즈 소장과 혁명군진압계획을 세우고 있단 말입니다. 빨리 육본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미 육군 소장 하우즈는 미 군사고문단의 단장이었다. 장도영이 하우즈와 진압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쿠데타는 도리없이 진압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누구나가 입 밖에 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과연 미군 수뇌부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 점을 가장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든 살든 육본으로 가서 결판냅시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먼저 걸어 나갔다. 쿠데타의 최고지도자가 <죽든 살든 비겁하게 꽁무니를 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행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박정희의 뒤를 따랐다. 육군본부에서 KBS로 달려온 최영택은 정문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허리총을 한 공수단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최영택이 정문을 들어서자, 그때 막 박정희 일행이 현관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박정희가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최영택은 말없이 거수경례를 붙였다. 박정희는 걸음을 멈추더니 최영택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경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최영택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주색 바지에 야전잠바 차림이었다. 그는 탈모한 자기의 이마로 최영택의 이마를 가볍게 툭 하고 받았다.
"봤지? 우리는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어!"
그러면서 김종필은 씽긋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우리 서로 협력해서 하는 거야! 어때, 같이 하는 거지?"
김종필이 덧붙였다.
"그래, 해야지 해야 하구말구. 정말이지 수고가 많았어."
이 순간 최영택은 쿠데타 편에 서서 일할 마음을 굳혔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소개할 기회가 있을 줄로 알지만 쿠데타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가 결과적으로 중도에 탈락하다시피 했던 것은 그의 직책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HID 본부의 첩보과장이라고 하면 대공 첩보관계는 모두 관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특히,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로 북한 김일성 집단의 도발이 워낙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쿠데타도 국가안보를 유지하고 난 이후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래서 최영택은 탈락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차 가지고 왔어?"
"응!"
"그럼 난 최 형 차로 가야겠네."
최영택은 김종필을 자기 차에 태웠다. (이 친구한테 무엇보다도 먼저 차하고 호신용 권총부터 마련해 줘야 되겠군.) 최영택은 핸들을 잡으며 생각했다. 박정희의 지프를 두 대의 드리쿼터가 호위하며 밝아 오는 남산 길을 달렸다. 육군본부에 도착하자 최영택은 김종필을 내려놓고 HID 본부로 향했다. 공작처장 육군 중령 김영민(金永旼)이 그를 맞아주었다. 그는 상황이 꽤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쿠데타지?"
조급히 물었다.
"응."
최영택은 짧게 대답하고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도와줘야겠어. 그러니 뒷일을 좀 부탁하겠어."
"응, 좋아.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구 나서라구. 그래,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어?"
김영민은 아주 시원스럽게 물었다.
"종필이가 차가 없어. 권총두 없구."
"그럼 내 차를 가져다 줘."
그는 권총 한 자루를 내주는 것이었다. 최영택은 권총을 받자 자기 차는 놔두고 김영민의 차와 운전수를 인계받은 다음 휘발유를 만탱크 시킨 다음 다시 육군본부로 향했다. 김종필이 호신용 권총과 전용으로 쓸 수 있는 차가 생긴 것을 무척 기뻐하리라 생각하니 그의 마음도 그지없이 흐뭇하기만 했다. 하나 사이를 두고 이웃하고 있는 미 8군 사령부로 갔던 것이다. 그때쯤에는 유엔군 사령관 겸 미 8군 사령관인 매그루더도 사태의 긴박한 소식을 듣고 사령관실로 나와서 분초를 다투며 들어오는 쿠데타군의 동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미 여러 정보 경로를 통해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던 매그루더는 장도영이 찾아왔는데도 반겨 주지조차 않았다.
"어찌 찾아왔소?"
매그루더는 차갑게 물었다.
"장군께서도 보고를 받았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알고 있소. 장군의 태도요. 장군은 이 쿠데타를 어찌할생각이오? 받아들일 생각이오?"
"받아들이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장도영이 펄쩍 뛰었다.
"받아들일 생각이 아니라면 왜 즉각 쿠데타 분쇄를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소?"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나는 제너럴 장이 쿠데타에 대한 보고를 몇 시에 받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장군은 보고를 받은 즉시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그것은 동족간에 피를 흘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제너럴 장, 잘 들으십시오. 대한민국은 없습니다. 미국은 그동안 모든 피원조국들에 대해서 대한민국을 본받으라고 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성장을 얼마나 자랑해 왔는지 모릅니다. 그런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쿠데타는 반드시 진압돼야 합니다."
매그루더의 쿠데타에 대한 태도는 완강했다. 그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미국은 45년 8월 15일 이래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었던가. 더구나 김일성 집단이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야기되었던 6.25한국전쟁 때는 3만여 명의 미국의 아들들을 희생시켜 가며 민주주의 국가로 자라고 않았던가. 매그루더는 문제가 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라는 인물의 사상이 불투명한 점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를 예편시켜 버리라고 그렇듯 한국군부에 대해서 압력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붓자식 끼고 돌듯이 하고 있다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박정희, 그를 끼고 돈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장도영 이 사람이 아니던가. <쿠데타는 절대 용납 못합니다. 결단코 쿠데타는 분쇄돼야만 합니다.> 매그루더의 마지막 이 한마디는 장도영으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말이었다. <나는 네가 박정희에게 업혀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일 박정희에게 업혀져 않겠다>는 간접적인 경고이기도 했던 것이다. 새벽 5시 45분. 장도영은 다시 육군본부로 돌아왔다. 그가 매그루더의 방을 나서자, 미군사고문단장인 하우즈가 뒤따라왔다. 참모총장실로 들어오자 장도영은 하우즈와 단 둘이 밀담을 나누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장군?"
장도영은 답답했다. 쿠데타군은 이미 육군본부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에 있는 전기관을 장악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았다. 거기에 그놈의 혁명방송이라는 것이 이미 방송되었다.
"만일 군사행동이 필요하다면 매그루더 사령관이 작전 지휘권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경우이고 우선은 쿠데타군더러 원대복귀를 명할 것으로 봅니다."
쿠데타 진압계획으로서는 다시 없는 온건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궐기한 쿠데타군이 그렇게 선뜻 원대복귀 명령에 순응하려 들까? 아무래도 이 점은 미심쩍기만 했다. (매그루더가 쿠데타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상엔 쿠데타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하고 만다.) 이런 판단이 서자 장도영은 결심을 했다. 쿠데타를 진압하기로.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도영이었다. 그는 소극적, 너무나 소극적이기는 했지만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 왔었다. 그런 그가 매그루더를 만나고 하우즈와 의논하는 사이에 새삼스럽게 쿠데타를 진압할 결심을 굳혔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면 그는 지금껏 건성으로 쿠데타 진압을 취해오고 있었다는 얘기밖에 더 되는가?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는 건성으로 쿠데타 진압조치를 취해 오고 있었떤 것이다. 제2군단 사령관 시절, 그는 번번이<이놈의 나라 쿠데타로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도 했었다. 또 박정희는 그를<쿠데타의 지도자로 추대하겠다>고도 했었다. 그래서 요행 대권을 잡아볼 기회가 그는 쿠데타를 저지하는 척만 해왔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새벽 5시 45분에 쿠데타를 진압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그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있을 때에 갑자기 밖이 꽤 시끄러워졌다. 그것은 박정희가 육군본부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쏴라! 쏴라!"
박정희 일행이 별관 건물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는 것을 본 육군본부 교육처장 송석하는 경비병에게 쏘라고 명령했다. 이때가 새벽 6기. 날이 훤하게 밝아 있어 사람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이때 무엇 때문에 별관 현관에 쿠데타 주동자들이 별관 현관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는 것을 보자 덮어놓고 그들을 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육군본부 경비병들은 이 또한 제6군단 포병단 병사들로서 쿠데타군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는 아직도 적과 내편을 구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쏘라니 누굴 쏘라는 거야?"
현관으로 들어서는 박정희는 매서운 눈초리로 송석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더 이상 송석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2층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때 마침 내려오고 있던 하우즈와 마주쳤다. 하우즈도 박정희의 모습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박정희와 마주치자 노기를 띠고 힐난했다.
"엎으려 하는가?"
박정희는 영어가 짧았다. 아니 짧다기보다는 캄캄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는 사범학교 시절에 조금 배운 영어를 모조리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어는 모르나 그는 하우즈가 뭐라고 힐난하는지를 그의 눈빛을 보고 알아차렸던 것이다.
"너 이놈! 네놈이 뭔데 남의 나라 일에 내정간섭을 하려 드느냐?"
박정희는 목청껏 소리쳤다. 박정희는 너무나 긴장돼 있었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목젖이 떨어져라 하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러자 하우즈는 뭐라 중얼중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휘잉하니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예비역 해병 소장 김동하를 비롯해서 육군 대령 유원식(柳原植), 박창암(朴倉岩), 박치옥, 장면 체포조장이었던 육군 소령 박종규 등이 앉아 있다가 박정희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었다.
"수고들 많았소."
박정희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풀어 박종규에게 주고 노크도 없이 참모총장실로 들어갔다. 이때 장도영은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정희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각하, 출동 전에 미리 보고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일을 저질러 죄송합니다. 그러나 계획 당초부터 각하와 함께 일을 결행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이 순간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충성을 이해하시고 지금부터 선두에 서서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도영은 한참 동안이나 박정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결코 미워하는 증오의 빛은 아니었다. (이 친구야, 네가 이럴 수 있어?) 그런 눈빛이었다. 장도영의 그 눈빛에 박정희는 안심하는 마음과 자신감이 겹쳐졌다. (됐다. 너는 결코 쿠데타에 반대는 아니었구나!)
"박 장군, 나는 지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다만, 내가 박 장군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지금은 사태를 수습할 때라는 말밖에 못하겠소."
짝이 없었다. 사태를 수습할 때라니 어떻게 사태를 수습하자는 말인가? 쿠데타는 이미 기정사실화돼 있는데? 장도영이 덧붙였다.
"박 장군도 익히 알다시피 작전지휘권은 유엔 사령관한테 있소. 그런데 매그루더 장군은 쿠데타에 대해서 한사코 반대가 아니겠소? 쿠데타는 절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장도영은 <그러니> 하고 말하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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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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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메살리나의 몰락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로서의 책무는 성실하게 수행했지만, 또다시 집안의 불상사가 그를 괴롭혔다. 공사의 진척 상황을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오스티아에 가 있던 클라우디우스에게 로마에 남아서 정무를 처리하고 있던 비서진이 한 가지 소식을 전해왔다. 젊은 황후 메살리나는 여전히 난잡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배우나 난봉꾼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남편 클라우디우스가 문제삼지 않았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집안일을 생각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메살리나의 방종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번 상대는 미남으로 평판이 자자한 실리우스였다. 원로원 의원일뿐 아니라, 이듬해 집정관에 이미 선출된 신분이다. 황족이 아닌 경우에는 40세가 넘어야만 집정관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으니까, 단순히 젊은 혈기로 난봉을 피우는 잘생긴 건달은 아니다. 하지만 독신이고 자식도 없었다. 이런 실리우스에게 23세가 된 메살리나가 홀딱 반해버렸다. 바람을 피우는 정도로 그쳤다면 입방에에 오르는 것으로 끝났겟지만, 메살리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실행했다. 로마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면 우선 새점으로 길일을 택하고, 그날이오면 신랑 신부 앞에서 재물을 바쳐 혼인서약을 한 다음 친구와 친지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인다. 메살리나는 남편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진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이중 결혼이다.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 단지 젊은 여자의 무분별함 때문일까. 하지만 상대는 장년의 남자다. 둘 다 어쩔 셈이었을까. 역사가들의 말처럼 클라우디우스를 죽이고 황제 자리를 가로챌 계획이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순서가 반대다. 죽이는 게 먼저고, 결혼은 그 다음에 해야 한다. 메살리나에게도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조금은 흐르고 있었으니까 제위 계승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황후의 이중 결혼을 알게 된 나르키소스와 팔라스와 칼리스투스는 이번만은 그냥 둘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무엇보다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알리는 게 선결문제였다. 이 보고서는 하루라도 빨리 수도로 돌아와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불과 2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도 당장 로마를 향해 떠나지는 않았다. 무슨 묘책을 궁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오스티아에 남아서 여느 때처럼 날마다 공사현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동안 메살리나도 클라우디우스에게 소식이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사태의 중대함을 깨달은 모양이다. 간통뿐이라면 유배형이지만, 혼인서약을 어긴 아내에게 남편이 가부장권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으면 처벌은 사형이다.
메살리나는 자기가 직접 오스티아에 가서 남편과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만나서 이야기만 하면 클라우디우스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매번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티아로 가기 위해 마차를 준비하라고 명령해도, 그 명령에 따르는 하인이 하나도 없었다. 노예들까지도 메살리나를 저버린 것이다. 메살리나는 딸 옥타비아와 아직 일곱 살밖에 안된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불러, 아버지가 귀가하면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걸하라고 말했다. 또한 로마에서는 유일한 전문 사제인 여제사장한테도 황제에게 황후의 구명을 탄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만 해두고 그녀 자신은 아시아티쿠스한테 빼앗은 별장에 틀어박혔다. 이 별장은 첫 주인의 이름을 따서 아직도 '루쿨루스의 정원'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로마로 돌아온 클라우디우스는 비서관들의 재촉을 받고 이미 체포된 실리우스를 심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클라우디우스는 시종 말이 없었고, 심문은 비서관들이 대신 진행했다. 실리우스는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판결은 자살이라는 형태의 사형이었고, 이 판결은 당장 집행되었다.
메살리나에 대해서는 공적인 범죄로 처리하느냐 아니면 집안 문제로 처리하느냐를 놓고 클라우디우스도 망설인 모양이다. 아직 소녀인 딸과 어린 아들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구명을 간청했다. 여제사장도 메살리나에게 변명할 기회는 주어야 한다고 권했다.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르키소스에게 내일 아침에 그 불행한 여자의 변명을 들을 테니 메살리나에게 그렇게 전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르키소스는 황제의 말을 황후에게 전하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이 해방노예는, 메살리나를 만나기만 하면 클라우디우스가 분노도 수치도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상태로 돌아갈 것을 걱정했다.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메살리나의 방종한 생활이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비서실장이라 해도 좋은 나르키소스는 근위대 백인대장을 은밀히 불러서 항제의 명령이니 황후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백인대장은 한 무리의 병사를 거느리고 '루쿨루스의 정원'으로 갔다. 메살리나로서는 예상치도 않은 결말이었다. 백인대장이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내민 단검을 받아들긴 했지만, 자살할 용기는 전혀 없다. 눈물을 흘리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찌르려고 하지만, 찌를 수가 없다. 기다릴 마음이 없는 백인대장이 황후를 칼로 찔렀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 23세의 죽음이었다. 아내의 죽음을 전해들은 클라우디우스는 그때도 그후에도 오랫동안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슬픔도 분노도 드러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딸과 아들한테도 특별한 배려는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배신당한 60대 남자는 묵묵히 정무에만 몰두했다. 비서관들은 메살리나의 조상들을 은밀히 제거하고 폐기했다. 입회한 가족도 엇이 화장된 메살리나의 유해는 '황제묘'에 매장되지도 못했다. 무덤이 어딘지는 당시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클라우디우스는 아내한테도 업신여김을 당한 황제라는 평가가 서민들의 가슴에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게 이미지가 손상되면 공인인 클라우디우스에게 여간 큰일이 아닐 터인데, 그런 일도 얼마 후에는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클라우디우스라는 남자의 특징이었다. 건망증이 심해서라기보다는, 50세까지 남에게 존경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다. 바꿔 말하면 경외라는 문자가 두뇌에 입력되지 않은 채 황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황제는 남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실제 효용성과 연결되는 경우가 누구보다 많다. 하지만 그것이 두뇌에 입력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로운 면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맷집이 강해지는 것이다. 남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정무에만 몰두했던 클라우디우스는 이무렵 유명한 연설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정책을 실시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연설을 로마 문명이 인류에게 남긴 교훈의 하나라고까지 칭찬하게 된다.
개국 노선
일은 원로원의 결원을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를 둘러싼 토론으로 시작되었다. 원로원의 정원은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이래 600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파견 근무로 수도를 비우는 의원도 많았기 때문에 정원에 대한 생각은 그리 엄격하지 않아서 결원이 생겨도 당장 보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기 48년에는 그 결원이 상당수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원로원에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가 마음만 먹으면 그의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원로원에 받아들여 자신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50세까지 파벌을 갖지 않은 채 지냈고, 황제가 된 뒤에도 그런 배경이 없이 정치를 계속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원로원 안에 자기 세력을 확립하는 것보다 로마제국 원로원으로서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는 쪽에 더 관심이 끌렸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독자적으로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자극제 구실을 했다. 많은 의원이 보충될 예정인 것을 알게 된 갈리아 부족장들이 로마 원로원에 청원서를 보냈다. 자기네한테도 원로원 의석을 달라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요직에 출마하려면 원로원에 의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원로원 의석을 달라는 것은 로마 제국 중앙정부에 자기들도 참여하고 싶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나르보 속주'(갈리아 나르보넨시스)라고 불린 남프랑스는 로마의 속주가 된 지 오래여서 원로원 의원은 물론 집정관까지 배출했기 때문에, 이 지방의 부족장들은 청원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로마에 청원서를 보낸 것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된 북부 갈리아의 부족장들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는 의미를 담아 '장발의 갈리아'(갈리아 코마타)라고 부른 지방의 유력자들이었다. 여기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청원서를 보낸 이들은 100년 전에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사람들의 자손이라는 점이다. 갈리아를 정복한 뒤에도 부족을 그대로 유지하고, 부족장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준 것이 카이사르의 전후 처리 방식이었다. 둘째, 로마의 군사력에 굴복한 갈리아인은 광복을 마음 속으로 맹세하고 그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속주민으로 만든 로마의 중앙정부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에 인도인들이 대영제국 정부에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지 않고, 대영제국 의회에 의석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석을 받는 것에서 시작하여 대영제국 중앙정부에도 참여하고 싶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피지배자의 이런 요청에 대해 지배자인 로마의 원로원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참석해 있었다. 예상된 일이지만 반대가 심했다. 정확히 말하면 93년 전,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의 권력으로 '장발의 갈리아' 부족장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었을 때에도 본국 이탈리아 출신 의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일반 시민들조차 원로원 의원이 라틴어도 제대로 못한다느니, 원로원 회의장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 남에게 물어본 원로원 의원이 있었다느니, 토가 밑에서 바지(갈리아인 특유의 복장)을 입고 있는 모양이라느니 하면서 비판을 쏟아냈다.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가담한 사람의 수가 많았는데도 비밀을 유지된 것은 브루투스를 비롯한 행동대에 낄 마음은 없어도 암살 계획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 의원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암살당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아우구스투스는 '장발의 갈리아' 출신을 더 이상 원로원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상태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도 원로원의 문호개방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원로원 회의장에서 나온 반대 의견을 열겨하면 다음과 같다.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는 원로원 의원을 배출할 수 없을 만큼 인재가 모자란 상태는 아니다."
"옛날에는 정원이 300명이었는데도 수도 로마의 주민만으로 원로원을 구성할 수 있었고, 그 원로원이 이탈리아의 다른 부족들을 통치해왔다. 그래도 통치에 필요한 역량과 명예심을 가진 사람은 부족하지 않았다."
"신격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에 사는 갈리아인을 원로원에 받아들이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는데,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것인가, 이제 포로라고 해도 좋은 속주민까지 받아들이겠다니,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원로원 의석을 달라고 요청하는 자들은 과거에는 로마의 1개 군단을 궤멸시키거나 신격 카이사르를 알레시아에서 포위 공격한 무리의 자손들이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그리 먼 옛날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그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에까지 쳐들어와 우리 조상을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몰아넣은 갈리아인과 동족에 속하는 자들이다. 이런 과거까지 잊어버리자는 말인가."
"우리 로마는 정복한 갈리아 민족의 유력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거기에다 원로원 의석까지 주고 국가 요직을 맡는 명예까지 줄 필요는 없다."
여기서 클라우디우스가 일어났다. 찬반 양론이 아니라 '반대론'만 전개되고 있었는데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발언 요지는 그로부터 1480년 뒤인 1528년에 프랑스 리옹에서 발굴된 비문으로 실증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악타 세나투스'(원로원 의사록)를 많이 참고했다고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는 타키투스의 '연대기'를 번역하기로 하겠다. 다만 로마인이 동시대의 로마인에게 말한 내용이기 때문에, 2천 년 뒤의 비로마인인 우리가 이해하려면 '주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쓰는 것은 연구서가 아니니까, 그런 '주해'를 본문에 집어넣어 번역하는 것도 허용될 것이다.
"내 조상을 생각해보아도, 시조인 클라우디우스는 사비니족 출신이었다. 그분이 로마로 이주한 기원전 505년, 로마인은 다른 부족 출신인 클라우수스와 그 일족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클라우수스에게는 원로원 의석을 주어 귀족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조상들이 보여준 이런 방식은 우리 시대에도 통치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출신지가 어디든, 출신 부족이 과거의 패배자든 아니든, 우수한 인재는 중앙에 흡수하여 활동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례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으므로 여기서 그치겠지만, 중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 지방이나 남부 이탈리아의 루카니아 지방, 아니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일찍이 로마에 패배한 과거와는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들이 로마로 모여들어 원로원 의석을 차지해온 것이 우리의 역사다. 그리고 신격 카이사르는 국경을 루비콘 강에서 알프스 산맥으로 확대하여, 속주였던 북부 이탈리아를 본국에 편입시켰다. 그때까지는 로마 시민화가 개인에 한정되어 있는 상태지만, 이로써 주민과 토지를 포함한 북부 이탈리아 전역이 로마의 이름 아래 통합된 것이다. 그후에도 국내의 평화가 확립되고 국외로 패권이 확대됨에 따라 이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로마의 주력인 군단병을 지원하는 보조부대에 우수한 속주 출신이 앞다투어 지원하고, 피로를 보이기 시작한 제국은 이 새로운 피를 수혈한 덕에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그런데 우리들의 에스파냐 출신 발부스를 비롯하여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의 대열에 합류시킨 남프랑스 속주의 우수한 인재들에게 로마인과 같은 대우를 해준 것을 후회했던가. 우리 시대에는 그들의 아들이나 손자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국가 로마에 대한 그들의 충정은 옛날부터 로마인인 우리의 애국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 스파르타인도 아테네인도 전쟁터에서는 그토록 강했는데도 단기간의 번영밖에 누리지 못했다. 그 주요 원인은 과거의 적을 자국 시민과 동화시키려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이방인으로 따돌리는 방식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로마의 건국자 로몰루스는 현명하게도 그리스인과는 반대되는 방식을 택했다. 오랜 적도 일단 물리친 뒤에는 로마 시민에 편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나라 출신을 지도자로 삼은 역사까지 갖고 있다. 일곱 명의 왕 가운데 제2대 왕인 누마는 사비니 출신이고, 제5대와 제6대 및 제7대 왕은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다. 또한 기원전 310년에는 그해의 재무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해방노예의 아들들을 국가 요직에 등용한 예가 있다. 해방노예의 다음세대의 공직의 문호를 개방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까운 과거의 일이 아니라, 먼 옛날에 이미 선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여러분의 반대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갈리아의 한 부족인 세노네스족은 기원전 390년에 로마까지 쳐들어와 한때나마 로마의 대부분을 점령한 자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부터 로마인이었다고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는 볼스키족이나 아이퀴족도 로마인과 싸우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 조상들은 갈리아 민족의 포로가 된 일도 있었다. 에트루리아 민족에게 볼모를 보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삼니움족은 기원전 321년에 로마군 2개 군단을 무찌르고, 지금도 '카우디움의 굴욕'으로 어린애들도 알고 있는 굴욕을 우리한테 맛보게 한 자들이다. 그때 우리 로마군은 무장을 해제당한 채, 창을 들고 늘어서 있는 삼니움족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이 삼니움족도 우리와 똑같은 의무와 권리를 지닌 로마 시민이 된 지 오래다. 이제까지 로마와 타민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비교해보면, 갈리아 민족과의 전쟁은 어떤 전쟁보다도 단기간에 결말이 났다. 게다가 그후 갈리아인과 로마인 사이에는 줄곧 평화와 신의가 유지되어왔다. 지금은 '장발의 갈리아'의 주민이라 해도, 생활습관이나 교육이나 혼인을 통해 계속 로마인과 분리하기보다는 그들이 가진 황금과 부를 이탈리아와 로마와 갖고 들어오게 하는 편이 상책일 것이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우리가 오랜 전통으로 믿고 있는 일도 처음 이루어졌을 때는 모두 새로운 것이었다. 국가 요직도 오랫동안 귀족이 독점하고 있었지만 로마에 사는 평민에게 개방되었고, 다음에는 로마 사람들에게 개방되는 식으로 문호개방의 물결이 차츰 확대되었다. 의원 여러분, 갈리아인에 대한 문호개방도, 지금은 우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로마의 전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토의하면서 수많은 선례를 들었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선례의 하나로 인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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