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2호 - 2024.03.26. 화요일(음력 : 02. 17.)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아이들이 자라면, "우리는 왜 태어났어요?" 라고 묻는 때가 닥쳐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부모 자신이 그때까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 헤이즐 스코트
|
|
글나눔 → 말글
|
|
|
온나인? 올라인?
외국어에서 차용한 외래어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이러한 외래어의 한글 표기를 위해 ‘외래어 표기법’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한글 표기만으로는 외래어의 발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외래어 발음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온라인’이다. ‘온라인’은 영어 ‘on-line’을 차용한 외래어이다. 그런데 ‘온라인’을 [올라인]으로 발음하는 사람도 있고 [온나인]으로 발음하는 사람도 있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적절한지도 불분명하다.
영어에서는 자음 연쇄 ‘nl’를 그대로 발음할 수 있다. 반면 우리말에서는 자음 연쇄 ‘ㄴㄹ’을 그대로 발음할 수 없다. ‘ㄴㄹ’은 ‘신라[실라]’처럼 ‘ㄹㄹ’로 바꾸거나 ‘결단력[결딴녁]처럼 ‘ㄴㄴ’로 바꾸어 발음해야 한다. ‘온라인’도 한글 표기 그대로 발음할 수 없고 [올라인]이나 [온나인]으로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ㄴㄹ’을 ‘ㄹㄹ’로 바꾸어 발음하거나 ‘ㄴㄴ’으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은 얼마간 구분된다. ‘신라’와 ‘결단력’은 각각 ‘신-라’와 ‘결단-력’으로 분석되는데, ‘신-라’의 ‘신’처럼 앞말이 홀로 쓰일 수 없으면 ‘ㄹㄹ’로, ‘결단-력’의 ‘결단’처럼 앞말이 홀로 쓰일 수 있으면 ‘ㄴㄴ’으로 바꾸어 발음한다.
‘온라인’도 ‘온-라인’으로 어원적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온-라인’의 ‘온’이 홀로 쓰일 수 있는 말인지 여부를 결정하기 쉽지 않다. 영어에서 ‘on’은 전치사로서 홀로 쓰일 수 있는 말로 볼 수 있으나 우리말에는 전치사가 없다. 우리말에서 ‘온’을 별개 단어로 볼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사견이긴 하나 ‘온라인’을 [올라인]으로 발음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웃어른/ 윗집/ 위층
걸 그룹 EXID의 ‘위아래’라는 노래가 인기다. “위아래 위 위 아래~” 흥겹고 반복적인 리듬에 묘한 중독성이 있어 나도 자주 흥얼거린다. ‘위’와 관련된 말 중에서 ‘웃-’ ‘윗-’ ‘위-’는 헷갈리기 쉽다.
웃어른? 윗어른? 표준어 규정에서는 ‘웃-’과 ‘윗-’은 ‘윗’으로 통일하고 있다. 다만 위아래의 대립이 없는 것은 ‘웃-’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윗목(아랫목), 윗도리(아랫도리), 윗마을(아랫마을), 윗집(아랫집), 윗니(아랫니)가 표준어가 되는 것이다. 어른의 경우 ‘웃어른’은 있지만 ‘아랫어른’은 없으므로 ‘웃어른’으로 쓴다. 마찬가지로 ‘웃풍’ ‘웃통’ ‘웃돈’이 표준어이다. 그러나 요즘은 ‘웃어른’이라는 말보다 ‘윗어른’이, ‘웃풍’이라는 말보다 ‘위풍’이 훨씬 많이 쓰이는 듯하다.
‘윗옷’과 ‘웃옷’은 무엇이 맞을까? 둘 다 표준어이지만 뜻이 다르다. ‘윗옷’은 위에 입는 옷, ‘상의(上衣)’의 뜻이 되고 ‘웃옷’은 맨 위에 입는 옷, 즉 ‘외투’의 뜻이 된다.
‘윗-’과 ‘위-’는 어떻게 구분하여 쓸까? 명사 ‘위’에 관형의 뜻을 지닌 사이시옷이 결합한 ‘윗-’이 붙는 것이 원칙이지만 된소리나 거친 소리 앞에서는 ‘위-’를 쓴다. 따라서 위층, 위쪽, 위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웃풍’ ‘웃통’도 ‘우풍’ ‘우통’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윗’은 명사 ‘위’에 사이시옷이 결합한 형태이지만 ‘웃-’은 그 자체가 ‘위’의 뜻을 가진 접두사이므로 ‘웃풍’ ‘웃통’이 맞다.
이것만 기억하자.“위아래 위 위 아래~” 위아래가 있으면 ‘윗-’, 위만 있으면 ‘웃-’으로 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
|
시나눔 → 우리시
|
|
|
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심신록1 - 천상병
신심이 보통인데
나는 왜 거꾸로 심신인가?
유다른 까닭은 다음에.
믿는 마음이 아니고
나는 마음을 믿는다.
마음을 굳게 굳게 믿는다.
내게는 믿는 마음밖에 없고,
천부도 없고
가진 것이 없는 바이다.
∼∼∼∼∼∼∼∼∼∼∼∼∼∼∼∼∼∼∼∼∼∼∼∼∼∼∼∼∼∼
칠석 - 한용운
「차라리 님이 없이 스스로 님이 되고 살지언정 하늘 직녀성은 되지 않겠어요. 녜녜」
나는 언제인지 님의 눈을 쳐다보며 조금 아양스런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견우(牽牛)의 님을 그리는 직녀(織女)가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칠석을 어찌 기다리나 하는 동정의 저주였습니다.
이 말에는 나는 모란꽃에 취한 나비처럼 일생을 님의 키스에 바쁘게 지내겠다는
교만한 맹세가 숨어 있습니다.
아아,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이요,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맹세입니다.
나의 머리가 당신의 팔 위에 도라질을 한 지가 칠석을 열 번이나 지나고
또 몇 번을 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뿐이요,
무슨 복수적(復讐的) 저주(詛呪)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밤마다 밤마다 은하수를 새에두고 마주 건너다 보며 이야기하고 놉니다.
그들은 해쭉해쭉 웃는 은하수의 강안(江岸)에서 물을 한 줌씩 쥐어서
서로 던지고 다시 뉘우쳐 후회합니다.
그들은 물에다 발을 잠그고 반 비슥이 누워서 서로 안 보는 체하고 무슨 노래를 부릅니다.
그들은 갈잎으로 배를 만들고 그 배에다 무슨 글을 써서 물에 띄우고 입김으로 불어서
서로 보냅니다. 그리고 서로 글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잠자코 있습니다.
그들은 돌아갈 때에는 서로 보고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아니합니다.
지금은 칠월칠석날 밤입니다.
그들은 난초(蘭草) 실로 주름을 접은 연(蓮)꽃의 웃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한 구슬에 일곱 빛 나는 계수나무 열매의 노리개를 찼습니다.
키스에 술에 취할 것을 상상하는 그들의 뺨은 먼저 기쁨을 못 이기는
자기의 열정에 취하여 반이나 붉었습니다.
그들은 오작교를 건너갈 때에 걸음을 멈추고 웃옷의 뒷자락을 검사합니다.
그들은 오작교를 건너서 서로 포옹하는 동안에 눈물과 웃음이 순서를 잃더니
다시금 공경하는 얼굴을 보입니다.
아아,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이요,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맹세입니다.
나는 그들의 사랑이 표현인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나의 사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신성(神聖)은 표현에 지나지 않고 비밀에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하늘로 오라고 손짓을 한대도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칠월 칠석날 밤입니다.
∼∼∼∼∼∼∼∼∼∼∼∼∼∼∼∼∼∼∼∼∼∼∼∼∼∼∼∼∼∼∼∼~~~~∼∼
슬픈 인상화 - 정지용
수박냄새 품어 오는
첫여름의 저녁 때...
먼 해안 쪽
길옆 나무에 늘어 슨
전등. 전등.
헤엄쳐 나온 듯이 깜박어리고 빛나노나.
침울하게 울려 오는
축항의 기적소리... 기적소리...
이국정조로 퍼덕이는
세관의 기ㅅ발. 기ㅅ발.
세멘트 깐 인도측으로 사폿사폿 옮기는
하이얀 양장의 점경!
그는 흘러가는 실심한 풍경이여니...
부질없이 오량쥬 껍질 씹는 시름...
아아, 애시리,황
그대는 상해로 가는 구료...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천고마비(天高馬肥)
天:하늘 천. 高:넢을 고. 馬:말 마. 肥:살찔 비.
[원말] 추고마비(秋高馬肥). [동의어]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
[유사어] 천고기청(天高氣淸). [출전]《漢書》〈匈奴專〉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 곧
① 하늘이 맑고 오곡 백과(五穀百果)가 무르익는 가을을 형용하는 말.
② (흉노에게 있어, 전하여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활약(동)하기 좋은 계절을 이르는 말.
은(殷)나라 초기에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흉노는 주(周)/진(秦)/한(漢)의 삼왕조(三王朝)를 거쳐 육조(六朝)에 이르는 근 2000년 동안 북방 변경의 농경 지대를 끊임없이 침범 약탈해 온 표한(剽悍)한 유목 민족이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늘 고심했는데 전국시대에는 연(燕)/조(趙)/진(秦)나라의 북방 변경에 성벽을 쌓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기존의 성벽을 수축(修築)하는 한편, 증축 연결(增築連結)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북방의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으로 살아가는 흉노에게 우선 초원이 얼어붙는 긴 겨울을 살아야 할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지는[天高馬肥]’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戰戰兢兢)했다고 한다.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추사 김정희 - 권오석
제1권 영웅대망 편
저자의 말
추사 김정희하면,누구나 글씨로서 떠올린다. 저자도 고백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쓰기 시작하면서,<완당집>을 읽게 되자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참으로 놀랍게도 추사는 유학은 물론이고 불교,그리고 금석학,시인으로서도 탁월한 선각자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예를 금석 하나만을 들어 생각해 보았더니 거기엔 역사가 있었다. 추사의 사상 바탕이 유학이었다면, 당연히 불교도 관련되고 금석은 필연적으로 서화와도 역관이 있다. 시인으로서의 추사를 생각하려면 언어,문자,음악도 알아야만 했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한 나라,한 민족,한 시대의 기록만이 아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이해된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여도 모두 시대 정신의 담당자였다. 저 헤겔도 그의 철학 바탕을 역사에서 찾았다. 추사의 경우 그것은 마음에 있었다. 주자학에서 말하는 성리도 천성(마음)과 천리(도리)로 집약되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서화는 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바탕에서 발전되며 전승되게 마련이었다. 나 개인이 있고,확고한 정신(철학)을 가지며 주어진 인생을 살아간다. 거듭 말해서 사람은 누구나 부모가 있고 조상이 있으며 역사가 있었다. 이것을 부정하면 하늘에 침뱉는 것이다. 아울러 추사처럼 그 일생이 불우했고 물운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운,가난에도 지지 않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추사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추사학'은 이미 말했다시피 고중이 생명이었다. 진실된 것만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불가불 다람쥐 쳇바퀴처럼 되지만, 역사를 알고 동북아 5천 년의 자취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대담하게 생락하고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수박 겉핥기식이 되고, 무엇보다도 추사의 진수라고 할 치열한 학문정신의 참뜻이 실종딘다. 아니,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터이다. <완당집>을 보면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생전 보도 듣도 못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아호나 자로 표기되어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그 배경이나 윤곽을 알아야 할텐데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곧 추사의 광범위한 교양과 지식, 깊은 역사관을 반증한다. 특히 추사는 광법위한 교양과 지식, 깊은 역사관을 반증한다. 특히 추사는 왜국에 대한 지식도 깊고 넓었다. 후생으로서 그때보다 훨씬 많은 자료를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옳게 하악하고 옳게 젊은이한테 전달하니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후사의 학문이라는 것이 겉핥기 식이 얕은 것이 아니었음은, 불과 25세의 백면 서생으로 연경에 갔을 때,당시의 쟁쟁한 청유들이 고작 두 달 남짓한 교유를 통해 그토록 감탄하고 종생불변의 우정을 가질 수 었던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옹방강(담계),완원(운대) 같은 스승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큼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증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선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끝으로 이 이야기는 전 10권,원고지로 1만 5천 매가 소요되었는데 좀더 자세한 것은 후기에 쓰기로 하고, 자료의 아쉬움만은 말씀드리고 싶다. 그러나 자료는 부족하더라도 20세기의 오늘을 사는 우리라도 매일처럼 홍수와 같이 쏟아지는 정보가 있건만 진실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감안할 때, 비록 2백 년 전의 그것이라도 보다 객관적이고 신빙성이 있어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했다. 이 책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명문당 김동구 사장의 넓은 이해와 격려 덕분이며 기타 편집 일체와 아낌없는 질정을 해주신 안길환씨, 그리고 알게 모르게 힘써주신 분들게 감사하고 싶다. 물론 독자 재현의 눈이 더 무서운 것이겠지만,저자로선 배운다는 입장으로 이 글을 썼다는 것만을 아뢰이고 각필하겠다.
병자 중복 개풍 오석 기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41
인간은 목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과 같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한 양이기 때문에 어느 양을 잡아먹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 도살 자가 바로 우리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비록 지금은 행복하다고 해도 우리는 언제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재난과 질병, 박해, 빈곤, 죽음 등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42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반란의 연속이었다. 평화로운 세월은 짧은 휴식처럼 순간적이었다. 개인의 생활도 끊임없는 갈등과 다툼의 연속이다. 그 다툼은 권태와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싸움도 의미한다. 우리는 도처에서 적을 발견하고 처참하게 싸우다가 무기를 손에 쥐고 죽어 간다. 인생을 싸움터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진실이며 여기에 인생의 비극이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과 싸운다. 나이를 먹어서는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기 위해 그들과 경계선을 긋는 갈등을 한다.
43
용기도 지나치면 만용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용기를 내어야 하는 순간에도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반드시 필요하다. 비겁은 지나친 두려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중하게 행동하기 위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비겁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있다.
44
자연이 우리에게 두려운 마음을 부여한 것은 우리가 보다 안전하게 삶을 유지하면서 삶이 주는 여러 가지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두려움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45
지혜의 나라에는 겨울이 없다. 청년기에 고독 때문에 적막이나 외로움울 느끼는 일이 있더라도 노년기에는 그런 모든 경험이 삶의 중요한 재산으로 남게 된다. 노년기에는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해도 노년기에는 삶이 주는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늙고 병든 몸에 재산과 명예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는 유일한 재산은 바로 지혜이다. 그 지혜의 소중함을 얼마나 빨리 깨닫는가에 따라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6장 매장문화재
새롭게 시작한 조사 및 발굴
8.15 해방 후 한국인 조사 연구팀에 의한 최초의 문화재 조사 발굴은 1946년 5월에 경주 노서리의 파괴된 고분에서 실시되었다.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이 지휘하고, 현지에서 경주 분관장이 협력한 시험발굴이었다. 실측은 과거 총독부박물관 때부터 경험이 많은 유일한 전문가인 임천, 그리고 사진 촬영은 이건중이었다. 발굴은 의외의 성과를 거뒀다. 뒤에 '호우총' 으로 명명된 이 고분에서는 뜻밖에도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특별히 만든 청동합형용기가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굽 밑에 '을묘년구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이라는 명문이 양각돼 있었다. 이 호우는 삼국시대 신라고분의 연대 고찰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을묘년은 서기 415년으로 추정되었다. 호우총에서는 그 밖에도 순금 귀고리 한 쌍과 '목심칠면' 같은 특이한 유물이 출토됐다. 인접한 또 하나의 고분에서도 순금 귀고리 한 쌍과 목걸이 한 쌍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그 후 '은령총' 으로 명명되었다. 1947년 5월엔 개성 남쪽의 장단군 진서면 법당방의 고려 벽화고분이 두 번재로 발굴 조사되었다. 이때의 조사 발굴팀은 경주 고분 발굴후 국립박물관 연구원으로 들어온 이홍직 김원룡을 중심으로 임첨과 이건중이 이번에도 실특과 모사 그리고 사진을 담당했다. 현지에서는 당시 개성분관원이었던 최순우가 참가했는데, 법당방 벽화고분의 최초의 조사 발견자가 바로 그였다. 그는 그해 3월 18일, 지방의 고미술 애호가인 강필운과 함께 고적조사를 나갔다가 우연히 3기의 고려고분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중 가운데 것이 석실내부에 귀중한 벽화를 지니고 있었다. 동서남북의 네 벽에 그려진 벽화의 주제는 관을 쓴 인물 초상이었고, 천장에는 천체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는 1916년에 역시 개성 남족인 개풍군 청교면 양릉리 수락암동의 석실고분에서 발견된 이후 두 번째인 고려 고분벽화의 출현이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당하고 없었다. 마을의 노인들의 증언은
"수십 년 전(한일합방 전 후)에 수명의 일본인 도굴꾼이 총을 메고 와서 마을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위협하면서 모두 파 갔다"
는 것이었다. (이홍직, 고려벽화분발굴기, 1954년). 국립박물관 연구관에서 일할 사람들이 짜여지면서 한국인들에 의한 민족문화재의 연구 조사 및 발굴 활동이 차차 기틀을 잡게 되었다. 1948년에는 세 번째로 경주 황오리 고분이 조사 발굴 되었다. 이 해엔 또 국립박물관의 첫 고적조사 보고인 (호우총 은령총)이 간행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직국과의 정보교환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5월의 국보특별전 기획 등으로 더욱 틀리 잡히던 국립박물관은 북한 공산군의 불의의 남침으로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금제드리게]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고신라시대의 고분 유적에서 출토된 금제드리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관 안에서 발견 된 것으로 장신구가 피장자가 착장하였던 상태대로 출토되었는데, 피장자는 여성으로 판단된다.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전쟁 중, 국립박물관 소장 유물의 보호는 모든 박물관 직원에게 부과된 최대의 사명이었다. 다행히 박물관 문화재들은 9·28 수복까지의 공산 치하 3개월 동안 무사했고, 그 후 1·4 후퇴를 전후한 5차에 걸친 부산으로의 비밀철수작전으로 성공적인 보호가 이루어졌지만 거기엔 위험이 따랐다. 한국전쟁 중 부산에 임시 건물을 빌려 기능을 재 수습하는 동안에도 국립박물관은 제한된 연구 조사 활동을 수행했다. 1952년 3월엔 경주 금척리의 신라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경주-대구간 도로확장공사로 파괴 노출된 2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 발굴이었다. 다음해 6월과 7월에는 역시 경주 노서리에 위치하는 신라 고분 제 137호와 제 138호가 발굴되었다. 138호분에서는 희귀한 반형토기와 골호 및 뚜껑이 있는 장경호 등이 출토됐다. 국립박물관의 활동은 다시 차근차근 본궤도를 되찾고 있었다. 1955년 11월에는 경주 황오리에서 두 번째 발굴이 시도되었다. 이때의 발굴 책임자는 당시 경주 분관장이었던 진홍섭 교수 였다.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공사중 처음으로 드러난 이 고분에서는 순금 반지와 팔지 마구 무기 기타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문화재 보호법의 제정. 공포
한국전쟁 후에 새로운 보물을 탄생시킨 가장 사건적인 문화재 보수공사가 1959년에 있었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림사의 쓰러져 가던 통일신라시대의 오층전탑(당시 국보 제313호, 지금은 보물 제 189호)에 정부예산으로 보호의 손길이 미친 것은 그때 4월의 일이었다. 탑을 해체 수판으로 오려 만든 금빛 찬란한 작은 사리탑은 그 안에 새파란 유리로 된 너무나 아름다운 형태의 사리병을 안치하고 있었다. 또 은판을 투각한 섬세한 나무 모양의 상징적인 금구엔 금실로 고정시킨 무수한 영락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밖에도 수십 점의 각종 유물이 들어 있었다. 다만 12세기의 고려청자 합 하나가 따로 발견되었는데, 이 뜻밖의 유물은 고려 중엽의 중수 사실을 말 해주는 증거였다. 현재 이 귀중한 송림사 전탑유물들은 보물 제 325호로 일괄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같은 해 12월엔 경주 동남쪽 동해안께의 감은사터(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의 삼층석탑(현재 국보 제112호) 2기를 해체 수리하다가 이번에도 통일신라시대의 놀라운 미술문화를 재확인시키는 걸작 사리장치 유물들을 발견했다. 유물들은 동서 쌍탑 중 서쪽 탑 속에 들어 있었고, 청동제 사리기와 사각감이 나왔다. 특히 정방형의 기단을 가진 보탑형의 사리기를 중심으로 난간 네 귀통이에 배치한 주악천인들과 높직한 기단의 사면을 파고 넣은 팔부신장은 일찍이 볼수 없었던 최고의 의장이었다. 이 감은사 석탑유물들도 보물 제 36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960년을 전후한 시기는 정부 당국은 물론 매스컴을 포함한 일반 국민들의 민족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높아지던 때였다. 동시에 지난날 일본인 도굴꾼과 악질적인 수집가들의 앞잡이 혹은 하수인으로서 매장 문화재에 관한 지식을 쌓았던 일부 골동상인과 그들의 조직망에 의한 불법적인 도굴이 곳곳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였다. 그들의 배후에는 돈 많은 장물아비와 수집가가 있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 시급산 문제에 강력히 대응한 것이 문화재보호법의 제정, 공포였다.
1962년 1월 10일자로 공포된 전문 7장 73조, 부칙 3조의 이 문화재보호법은 처음으로 문화재의 개념과 종류를 설정하고( 1)유형,무형문화재 2)기념물 3)민속자료), 정부 자문기구로 전문적인 문화재위원회의 설치를 규정했다. 이 문화재보호법은 또 매장문화재의 처리규정과 발견 혹은 신고자에 대한 표창(보상) 그리고 불법적인 도둑이나 임의의 취득자, 그밖에 문화재의 불법적인 국외반출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도 규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량한 매장 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응분의 표팡과 보상규정은 획기적이었다. 밭을 일구다가, 혹은 토목공사장에서 우연히 출토시킨 문화재를 지방 행정계통을 통하거나 문화재 관리국 또는 국립박물관에 직접 신고했을 때, 물건의 귀중성과 가치평가에 준해서 정부가 적절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이 규정은 골동상인들에 의한 중간 탈취와 귀중한 발견 문화재가 또 다시 종적을 감추는 악폐를 막을 수 있을뿐 아니라 선량한 발견 및 신고자를 위해서도 지극히 고무적인 조처였다.
가령 시골의 한 주민의 국보나 보물급의 유물을 우현히 출토시켰다고 할 때, 만일 뜨내기 골동상인에게 적당히 처분하려 든다면 최소의 가격으로 빼앗기기가 일쑤다. 그리고 공돈이라고 몇 푼 받고 물건을 거저 빼앗겼다가 매장문화재 발견의 신고를 이행하지 않은 사실이 적발되면 그는 법에 규정된 처벌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실제로 수없이 있었다. 대개 법을 모르는 시골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다. 또 그전까지는 매장문화재를 발견한 사람이 그 사실을 당국에 신고한 경우에도 국가에서 적절한 표창이나 정당한 보상이 없어 섭섭히 여긴 일이 많았다. 그런 일은 발견자로 하여금 굳이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결과를 빚고 있었다. 그런 모든 부당한 처사에 정부가 현실적으로 대처한 것이 '표창과 보상'의 명혹한 규정이었다.
매장문화재를 발굴한 사람들
1963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경남 밀양읍 용평일에 살던 김락화(당시 23세) 들 3명의 청년이 가까운 호성리의 형원사 절터 쪽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부도탑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반쯤 흙에 묻혀 있는 기단부 석재를 호기심으로 들춰보다가 깜짝 놀랐다. 밑에서 석실이 나타나고, 그 안에는 온갖 무늬를 가진 파란 빛깔의 눈부신 옛날 그릇들이 들어있었다. 세어 보니 사기 그릇이 모두 8점, 그리고 유기그릇이 하나였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희한한 옛날 그릇들이었다. 청년들이 발견한 그릇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상감청자로 '죽조화초문매병'하나, '운봉문'과 '모란학국연화문'의 대접이 둘, 나머지는 팔각접시들이었다. 유기그릇은 뚜껑이 있는 합이었다. 순간적인 호기심에 발견해낸 이 매장문화재들이 어떤 경로로 신고됐는지는 상세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후 경북대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문화재 관리국이 출토경위를 조사 확인한 후 국가 귀속물로 접수했다. 그리고 정부는 1년후 발견자인 3명의 청년에게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보상규정'에 따라 물건의 가치평가로 책정한 10만원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후 중요한 매장문화재의 발견자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큰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된 후 중요한 매장문화재의 발견자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큰 액수의 보상금을 받은 매우 고무적인 사례의 하나였다.
앞의 경우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정상적인 귀착이고 보상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매장문화재의 발견을 큰 횡재로 여기고 몰래 숨겨 갖고 있다가 많은 돈을 받고 팔아먹으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밀양에서 나무를 하러 다니던 가난한 청년들이 귀중한 고려자기들을 출토시킨 지 50일후인 6월 22일에 경북 월성군 천북면 북군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높이 44cm에 둘레가 46X50cm나 되는 최초의 대형 가형토기를 우연히 발견한 황모 노인의 경우가 그러한 예의 하나였다. 황노인은 장마비가 쑤셔놓은 저수지 북쪽의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한참 걷다보니 눈앞에 시커멓고 이상한 물건 하나가 모래 위로 솟아나와 있었다.다가가서 조심스럽게 파내어 보니 완전한 형태의 큼직한 기와집 토기였다. 노인은 크게 값나갈 옛날 물건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꿈을 잘 꾼 횡재라 생각하면서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경주의 골동상을 찾아갔다. 경주에서는 윤아무개(그 후 수차 문화재 도굴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구속되었고, 한때는 복역까지 한 골동상)가 4만 원을 집어주고 물건을 잡았다. 물론 불법적인 거래였다. 법적으로 그것은 장물이었다. 귀중한 대형 가형토기의 출토 사실과 그것이 불법적으로 거래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당시 박일훈 경주박물관장이 장물을 산 윤아무개를 찾아가 문화재 보호법의 매장문화재 규정에 입각한 국가 귀속을 주장했으나 그는 그 자리에서 15만 원을 요구했다. 마땅히 국가에 귀속돼야 할 물건을 움켜쥐고 흥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법을 냉소하고 있었다. 경찰에 고발할 수 있었지만 경주박물관은 좋게 물건을 입수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일단 문제의 가형토기를 인수하여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갖고 왔따.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 그것을 불법적인 장물 취득자로부터 살 수는 없었다.
"국가에서 안 사주겠다면 딴 곳에 팔겠다."고 호언하는 윤아무개가 물건을 다시 찾아가자. 박물관 측에서 할 수 없이 경찰에 협조를 의뢰했다. 끝가지 버티려던 윤아무개는 뒤잡은 가형토기를 경주에서 다시 서울로 갖고 올라와서 팔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서울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희귀한 물건을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수집가들에게 안전하게 팔아주고 구전을 먹는 이를테면 거물급 골동상인들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윤아무개는 그들과 접선하고 있었다. 반면 경주박물관측에선 그의 행동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서울로 뒤쫓아온 한 박물관 직원이 그의 거처를 찾아냈을 때에는 모처에 50만 원을 받고 팔기로 이미 계약이 돼 있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지명수배하고 있는 사실을 알자 그는 기가 죽었다. 그는 체념한 듯이 물건을 내놓았다. 7월 19일의 일이었다. 결국 국가가 매장문화재로 압수한 그때의 대형 가형토기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있다.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칠순 고령의 시어머니와 5남매를 거느리고 막벌이 가장 노릇을 하던 가난한 강갑순 여인(당시 41세)이 18세의 큰아들 전병철 군을 데리고 마을 밖의 도로공사장에 나가 돌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사장은 야산 비탈이었다. 강여인이 아들과 둘이서 묵묵히 돌무더기를 헤치고 있을 때였다. 곡괭이에 널찍한 잡석하나가 덜컥 걸려 젖혀지면서 무심히 그 밑으로 시선을 보내던 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금빛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반듯이 눕혀져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눕혀져 있는 공간은 폭 30cm, 길이 40cm, 그리고 깊이가 30cm가량이었다. 잡석으로 급히, 그러나 정성껏 꾸며진 작은 석실이었다. 부처님은 배모양의 광배를 뒤로 붙이고 있는 높이 약 16cm의 완전한 '금동여래입상'으로 광배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발견자인 촌부와 소년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값진 옛날 유물인지를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금으로 만든 부처님인가보다고 속으로 마음을 설레고 흥분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수상쩍은 흥분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날의 품일이 끝났을 때 강여인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품속에 소중히 품고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강여인은 부처님을 집안 깊숙한 곳에 꼭 간직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법에 따라 경찰에 가서 발견경위를 신고하고 물건도 바쳐야 할 것이라고 타일렀다. 가난했으나 그지없이 순박하기만 했던 강여인은 동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대의면 지서에 신고된 강여인 발견의 매장문화재 금동불은 곧 경남 도당국에 보내진 후, 즉각 문교부에 보고 되었다. 그리고 수차에 걸친 전문가들의 현지 조사와 불상의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유일한 고구려불로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뛰어난 조각미와 균형을 가진 이 의외의 고구려불은 특히 광배에 새겨진 '연가 7년' 으로 시작되는 4행 47자의 아주 귀중한 명문을 지닌 최대의 국보급이었다. 관계학계는 해방 후 땅 속에서 출현한 불상으로는 가장 큰 발견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다만 출토지가 그런 불상이 나타날 만한 절터도 아니며, 그럴 수 있는 불교 유적지도 아닌 점이 수수께끼로 남았다.
불상은 그해 12월 4일, 서울로 올라와 즉시 국보 제 119호로 지정된 후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동안의 법적 공시기간이 지난 1964년 10월 14일, 발견자인 강여인은 생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특별히 문교부 장관이 수교하는 보상금 20만원을 받았다. 그때 불상이 출토된 땅의 임자였던 전형진(당시 56세)도 20만 원을 보상받았다. 지하 출토유물인 매장문화재의 국가 귀속과 함께 정부가 책정한 40만 원을 법에 따라 발견자와 반씩 나눈 금액이었다. 그것은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된 후 최대 액수의 보상이었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한편 강여인이 즉각 국보로 지정될 만큼 참으로 귀중한 '연가 7년명'의 고구려 불상을 돌더니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키던 무렵, 같은 의령군의 봉수면 서암리에서도 높이 12.5cm의 '금동여래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다. 서암리에 사는 농부 엄필섭(당시 50세)이 강우술 소유의 논바닥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헤치다가 뜻밖에 발견했던 것인데, 발견자는 마땅히 자기 소유물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 불상을 2년 이상 집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자, 경찰이 매장문화재의 불법 점유를 들어 법적으로 압수하기에 이르렀다. 1966년 2월의 일이었다. 불상은 곧 서울로 보내져 국립박물관에 들어갔다. 국가 귀속이었다. 비록 스스로 신고하지 않았던 압수물건이긴 했으나 정부는 법을 몰랐던 발견자와 출토지 임자에게 12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중요한 매장문화재를 출토시켜 정부로부터 10만 원 이상의 보상금을 받는 사례가 날로 잦아졌다. 그것은 일반의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반증이었다. 정부 행정망과 매스컴의 계몽도 컸다. 1964년 4월 12일에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향교리의 논에서 고려시대의 청동범종 하나와 기타 청동향로, 쇠솥,고려청자 등 모두 6점을 출토시킨 윤성복, 박광선 등 4명은 발견 유물을 곧장 당국에 신고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후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같은해 5월 27일엔 대구 시내의 육군 503방첩대 건물의 대장실 마루밑에서 전기 누전방지공사를 하던 전기공 백승원 씨가 8.15때 일본인들이 숨겨두고 갔던 삼국시대의 와당과 토기, 그밖에 고려자기 조선자기 청동자기 등 142점의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여 1년 후에 14만 4천 원의 정부 보상금을 받았다. 백씨가 발견한 물건들은 지난날 대구의 그 건물에 살았던 악명높은 일본인 수집가 오구라가 8.15을 전후해서 중요한 것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갖고 가고, 미처 가져갈 수 없었던 나머지를 마루밑에 감쪽같이 감춰두었던 것으로 해방 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가지 일본에 살아 있던 오구라(당시 96세)의 반응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예전에 내가 살고 있던 집에서 찾아냈다는 물건들 중 일본 그림을 포함한 59점을 돌려달라"는 수작이었다. 그해 10월에 그런 뻔뻔스러운 요구를 적은 오구라의 편지를 친절하게도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에 전해준 재일 교포가 있었다. 그때 "일본 물건을 돌려받고 싶으면 오구라 자신이 일본에 반출해 간 수천 점의 중요한 한국문화재부터 먼저 돌려 보내야 할 게 아니냐?"고 누가 반문하자 이아무개라는 쓸개 없는 교포는 자기가 답변할 성질이 아니라고 회피하여 빈축을 샀다. 20년 가까이 교묘하게 은닉돼 있던 오구라 수집품의 일부는 그것들이 발견됨과 동시에 과거의 적산문화재로 국가에 귀속되어 경주박물관에서 모두 인수했다.
고철수집상이던 윤태진, 윤석진 형제가 휴전선 가까운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원당리의 영농지역에서 높이 약 37cm의 고려동종과 1369년에 만들어 졌다는 44자의 귀중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 '청동반자'를 철물탐지기로 출토시킨 것은 1966년 1월 17일이었다. 경기도 파주에 주소를 둔 잡상인이었던 윤씨 형제는 비록 생활은 가난했으나 마음씨가 착했다. 그들은 철물탐지기에 걸려 나온 옛날 유물인 동종과 반자를 들고 자진해서 서울의 덕수궁미술관(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됨)을 찾아갔다.
"보통 고철로 팔아넘기기엔 좀 아까운 귀중한 옛날 물건 같아서 갖고 왔으니 중요한 것이면 나라에 바치겠다."
윤씨 형제의 선량하고 소박한 말이었다. 미술관엔 마침 이호관 연구관이 있다가 물건을 인수하고 그들에게 국가 보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1년 후, 그들은 35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윤씨 형제가 고려동종과 반자를 출토시킨 지 8개월 후인 9월 6일에는 또 전남 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서 돌담을 헤치던 정병임이란 사람이 역시 고려시대의 동종 하나를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한 수 1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5월 9일에는 '연가 7년명' 의 고구려 불상과 또 하나의 '금동여래입상' 을 출토시킨 경남 의령지방의 칠곡면 외조리 뒷산에서 조선 중종 23년(1528)에 꾸며졌던 왕자 숭수아지씨의 태실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왕실의 백자항아리와 태의 주인공을 기록한 태지판이 2장이 나타났다. 발견자는 마을의 전용중 씨였다. 그는 산을 개간하다가 우연히 태신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 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고스란히 당국에 신고하여 12만원의 보상금을 탔다. 1964년 10월에 서울의 김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박아무개 등의 도굴꾼을 시켜 전국의 조선 왕실태릉을 계획적으로 도굴, 수십 점의 품질 좋은 백자항아리를 불법적으로 꺼내 암매해 먹다가 적발당해 모두 구속되었던 사건을 상기할 때 잊혀졌던 의령태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법적인 수습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매장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기록적인 보상은 1967년 1월 28일에 서울 성북구 삼양 1동 108번지의 산비탈에서 백제불로 추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었을 때였다. 발견자는 6년 전에 제기동 집을 화재로 잃은 후 삼양동 골짜기의 국유지에 집을 마련하고 살던 박용출 씨(당시 52세)였다. 전날 밤 꿈에 집 뒤의 비탈이 무너져 내리면서 온 식구가 깔려 죽는 일을 당했던 박씨는 아침에 눈을 뜨고도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아 장남과 함께 새삼스럽게 위험이 느껴진 쪽으로 깊게 하수도 공사를 착수했었다. 1m쯤 땅을 파 내려갔을 때였다. 괭이 끝이 금속물에 닿는 예리한 음향이 울려 나왔다. 출토되자마자 국보 제 124호로 지정되어 120만 원이라는 기록적인 보상금을 책정케 한 삼국시대의 걸작 불상인 높이 20.7cm의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던 순간이었다. 박씨가 꿈 때문에 출토시킨 금빛 찬란한 보살상은 괭이로 맞은 옷자락 부분이 약간 부서졌을 뿐 완전한 상태였다. 떨어졌던 부분도 흙속에서 찾아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박씨는 며칠간 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가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불상전무가인 황수영 교수를 찾아가 평가를 요청했다. 황교수는 그 자리에서, '국보급의 놀라운 불상' 이라고 경탄하고, 속히 법적 절차를 밟아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발견자는 황교수의 말을 따랐다.
2월 7일, 서울지역에서 출토된 놀라운 삼국시대 불상은 발견자의 자진 신고에 따라 매장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되었고, 이어서 즉각 국보로 지정되었다. 발견자 박씨는 문화재보호법 제 47조(매장문화재) 규정에 의한 1년동안의 유실물 공고기간이 지나자 책정 보상액이었던 120만 원의 절반인 60만 원을 받았다. (나머지 절반은 법적으로 출토지의 땅임자가 받게 돼있다). 1967년엔 100만원대의 보상금을 받은 매장문화재의 발견 신고자가 잇달아 나왔따. 정초에 서울에서 국보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된 데 뒤이어 4월 18일에는 고철수집상 이영주 씨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철물탐지기로 동종 하나와 기타 유물을 출토시켜 당국에 신고하고 1년후 1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7월 6일에는 충남 대전시 괴정동 244-4에서 밭을 일구던 손용갑 씨가 땅 속에서 뜻밖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발견 신고하여 12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11월 10일엔 또 경북 금릉군 부항면 사등 1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주목할 만한 '금동보살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이때의 발견 신고자인 마을의 이관하 씨와 땅임자에게는 새로운 보상기록인 140만 원이 1년 후에 지급되었다.
문화재 관리국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61년부터 1996년 7월 현재가지의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 건수는 모두 4,304건이고, 보상 총액은 6억 4,850만 8,595원에 이르고 있다. 그중 한 사례로 1970년대 초반에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고양리에서 13세의 어린이가 통일신라시대의 작은 '금동여래입상'(높이 13cm)을 출토시켜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인 80만 원을 보상받은 일을 들 수 잇다. 행운의 어린이는 임계국민학교 6년생이었던 이춘달군으로 불상을 출토시킨 날짜는 1971년 6월 21일이었다. 이군은 그날 마을 뒷산에서 놀이터를 만드느라 땅을 파다가 불상이 나타나자 소중히 들고 산을 내려와서 아버지(당시 62세)에게 가져다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 불상이 얼마나 중요한 문화재인지를 알지 못했다. 당국에 신고하면 정당한 보상금이 나온다는 문화재보호법 상식도 없었다. 이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우연히 캐 온 불상을 갖고 있다가 엿장수에게 단돈 2천 원을 받고 팔았다. 그 사실이 강원도 공보실에 뒤늦게 신고되었다. 도 공보실에서는 즉시 불상의 행방을 수배한 끝에 마침내 그것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불상은 곧 서울의 문화재 관리국으로 올라왔고, 평가심의회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불상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발견자인 이군과 땅임자에게는 80만 원의 보상액이 책정되었다.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7. 국무총리 장면, 숨어버리다
한동안 멍청해져 있던 장도영이 다시 군용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30사단 사단장을 연결해!"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과는 곧 연결이 되었다.
"귀관, 지체없이 귀관의 휘하부대를 시청 앞으로 진입시켜!"
장도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 다음 그는 제6관구 사령부와 제33사단과의 통화를 시도했으나 전화선이 끊겼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장도영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석호는 도무지 가슴이 조여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육군본부가 접수되었다는 무전보고를 듣는 순간 앞으로 이 쿠데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쿠데타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러나 현석호 역시 군사지식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장면의 신상도 걱정이 되었다.
"장 총장, 나는 반도호텔로 가서 장 총리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올 테니 장 총장은 즉시 육군본부로 달려가 사태수습에 만전을 기해 주기 바라오."
현석호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도 사태수습을 해놓고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장도영은 그의 사태수습을 지켜보고 있는 현석호가 꽤나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그가 반도호텔로 가겠다고 하자 표정이 밝아졌다. 현석호는 국방부 사무차관 김업에게 따라나서라고 눈짓을 했다. 같은 시각, 새벽 3시 30분. 국무총리 장면은 아직도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지를 못했다. 아니 그는 더 오겠다던 장도영이 한 시간 반이나 됐는데도 꿩 구워먹은 소식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산란해져 가기만 했다. (오겠다고 했으면 와야지. 와서 상황이 어찌됐는지 보고해 줘야 할 게 아닌가? 어디서 뭘하고 있기에 여지껏 나타나질 않는 거야?) 불안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때의 장면의 처신을 또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506방첩대와 반도호텔은 지척이었다. 150미터 내지는 200미터쯤 거리였을까? 장도영이 잠자리에 들어 있는 장면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비서관이나 아니면 하다못해 경호원이라도 506방첩대로 보내서 상황을 체크시켰어야 옳았다. 매그루더나, 미국 대리 대사 마샬그린한테라도 전화를 걸어 일련의 정치적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장도영이 나타나기만을 목을 늘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는 <만약에>라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 허나, 한번 가정을 해보자. 만약에 장면이 이런 일련의 조치를 취했더라면 역사의 궤도는 어느 쪽으로 향해서 놓여지게 되었을까? 어디에서 쏘아대는 총소리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총소리가 아련하게 울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장면의 부름을 받고 검찰총장 이태희가 반도호텔에 나타난 것은 이 시간이었다. 이태희가 모습을 나타내자 장면은 꼭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멀리서 총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박사님, 일단 피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태희는 피신을 권고했다.
"아니야, 참모총장이 오기로 돼 있어."
장면은 아직도 장도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장면이 지금으로선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장도영밖에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사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여기서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생각 탓인지 총소리가 자꾸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일단 아래로 내려가세."
장면이 마침내 응낙하고 방을 나섰다. 아래층 로비로 내려왔다.
"박사님, 세단은 눈에 띄니까 제 지프를 타고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사건을 많이 다루어 오고 있는 검찰총장다운 두뇌회전이었다. 장면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었다. 이태희는 급히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한데,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의당 지프 운전대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운전수가 없었다. (어찌된 노릇이야? 총소리에 겁을 먹고 이태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으나 행방이 묘연하기만 했다. 이 사이에 국방장관 현석호와 사무차관 김업 그리고 체신장관 한통숙(韓通淑)이 함께 반도호텔로 들어왔다. 장면을 먼저 발견한 것은 현석호였다.
"박사님!"
"아아, 현 장관!"
장면은 현석호의 출현이 꽤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덥석 그의 두 손을 잡는 것이었다.
"여기서 긴 말씀 올릴 수는 없고 일단 피신하셔야겠습니다."
"음."
장면은 짧게 대꾸했다.
"어디 가실 만한 곳이라두?"
그러면서 장면은 그때 로비로 들어선 이태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됐습니다. 저는 육군본부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박사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래, 수고를 좀 해주오."
장면은 떠날 생각으로 잡고 있던 현석호의 손을 놓았다.
"이거 운전수가 어딜 갔는지......?"
이태희는 꽤나 당황해져 있었다. 집으로 모시겠다 해놓고 운전수가 행방을 감춰 버렸으니 당황할 법도 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장면의 경호원들이 이태희의 운전수를 찾느라 헤매었다. 호텔 안팎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으나 끝내 운전수의 그림자조차도 발견하지를 못했다. 이때, 장면의 머리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옳지, 일단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그 생각을 진작 했더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주한 미국 대사관은 바로 반도호텔 길 건너에 자리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장도영의 보고를 받은 직후 일단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만 했더라도 역사는 다시 또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장면은 경호대장인 조인호를 미국 대사관으로 급히 보냈다. 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는 속담 그대로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간 조인호가 아무리 셔터를 두드려도 안에서는 전혀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장면의 운명이었을까. 새벽 4시. 원주에 있는 제1군 사령관 육군 중장 이한림(李翰林)도 요란한 전화벨 때문에 눈을 떴다. 그는 침대 머리맡의 전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이한림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이 장군이십니까? 나, 장창국입니다."
"아, 장 장군, 무슨 일이오. 이 된 새벽에?"
전화를 건 사람은 육군 참모차장 육군 중장 장창국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뭐, 쿠데타?"
"쿠데타라니 무슨 소리오?"
"공수단과 해병대가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진입했어요.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고 있소. 장 총장은 진압에 나서고 있고."
장창국은 다급하게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쿠데타가 일어났으니 제1군에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없이 장창국은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보아 서울의 상황이 상당히 급박해져 있는 모양이라고 이한림은 판단했다. 그는 사령부 당직 장교에게 전화를 걸어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을 모두 사령관실로 긴급소집하라고 명령했다. 휘하의 군단장, 사단장들이 모두 원주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5월 15일은 제1군 창설 기념일이었다. 이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1군 휘하의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이 모두 원주에 와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념식이 끝났는데도 소속부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은 5월 16일에는 지휘관회의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주의 각 여관에 유숙하고 있던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은 곧 사령관 숙소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 중에는 1시간 이상이나 늑장을 부리다가 나타난 지휘관도 있었다. 아마도 어젯밤에 퍼마신 술 때문인것 같았다. 만약에 또다시 6.25 때와 같이 김일성이 긴급소집에 1시간씩이나 늑장을 부리는 지휘관이 있다면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새벽 4시 5분. 장면은 애꿎은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조인호는 계속해서 미국 대사관 정문의 셔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군인들이다앗!"
누가 먼저 보고 외쳤는지 모른다. 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서울 시청 쪽으로 던져졌다. 군인들을 실은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너무나 눈부셨다. 당황한 장면의 경호원들은 장면을 국무총리 전용차에 밀어넣었다. 그러는 바람에 장면의 안경이
"이 총장도 함께 가야지!"
그러나 운전수를 찾느라 이태희는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장면의 운전수는 그대로 속력을 내며 질주했다. 현석호 등이 506방첩대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예비역 해병 소장인 김동하(金東河)가 506방첩대에 나타났다. 그의 출현에 누구보다도 크게 놀란 사람은 506방첩대장 이희영이었다. (아니 저 자가 여기엔 어떻게?) 어이가 없어도 너무나 없었다. 쿠데타 주동자의 한 사람인 김동하가 다른 곳도 아닌 쿠데타 저지 지휘본부에 모습을 나타냈으니 어리벙벙해질 수밖에 없는 이 시간 김동하는 한강에서 쿠데타군과 저지 헌병의 총격전이 멎자 곧장 이리로 달려왔던 것이다.
"이제는 도리 없이 육본으로 가야 할 것 같소."
장도영은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본은 이미 쿠데타군의 손에 들어갔다는데 거기로 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육군 참모차장 장창국은 장도영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에 의심의 검은 구름이 인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은성에서의 그의 행동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506방첩대로 달려나와서야 찾아온 이철희가 쿠데타에 대한 보고를 했을 때 왜 참모차장인 자기에게는 귀띔 한마디 해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때 이 한마디만 귀띔을 해주었더라도 상황이 이 지경으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게 아니냐 하고 줄곧 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또 쿠데타군이 장악해 버린 육군본부로 가야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장도영의 몸가짐을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장도영은 일어서 나가려다가 말고 일반전화의 송수화기를 들고 다이알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청와대에 전화를 해두어야 되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전화가 적막을 깨뜨리며 요란하게 울려퍼진 것은 새벽 4시 조금 지나서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대통령 비서실장 이재항(李載沆)이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자, 잠깐 기다려 달라 해놓고는 대통령 침실이 있는 2층으로 단숨에 뛰어올라 갔다. 그리고는 세차게 노크했다. 얼마 만에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대통령 윤보선이 나왔다.
"무슨 일인가?"
"장도영 참모총장의 전화입니다. 각하께 직접 보고드려야 할 급한 일이라고 합니다."
비서실장 이재항은 쿠데타 운운했다가 노인이 놀라면 어쩌나 해서 차마 바른 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급한 일이라고 윤보선은 다시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 머리맡의 전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 대통령일세. 이 된 새벽에 급한 일이라니 무슨 일인가?"
"각하, 지금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뭐? 쿠데타?"
그러나 이재항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윤보선은 걱정할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다. 장도영의 다급한 목소리는 계속 송수화기 안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각하, 헌병을 동원해서 한강 다리에서 저지했으나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저지선이 무너졌습니다. 이미 서울 장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쉽게 진압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날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은신했습니다. 각하께서도 신변안전에 극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가 뚝 끊겼다. 장도영의 그러한 무례한 행동을 통해서 윤보선은 그가 꽤나 서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윤보선은 선 채로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이럴 땐 대통령인 나는 쿠데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도무지 그 어떤 적절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실장."
그는 이재항을 불렀다.
"국무총리한테 전화를 해보게."
윤보선의 명에 따라 이재항은 반도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울리고 있었으나 받는 사람이 없었다. 보았다. 연결이 안 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하, 우선 피신부터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재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이 사람아, 피하기는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그렇다. 명색이 대통령인 사람이 피신하겠다고 법석댈 수는 없었다. 그는 조용히 청와대에 버티고 앉아서 사태의 귀추를 지켜보고자 마음에 다짐을 주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장면 체포조>가 반도호텔로 들이닥친 만일 운전수를 찾고 있는 이태희를 태워 가고자 해서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장면은 여지없이 장면 체포조에 체포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은 장면의 운전수가 이태희도 태워가자고 장면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동을 걸기가 무섭게 발차를 시켰기 때문에 장면은 체포당하는 수모를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장면 체포조는 모두 11명의 공수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휘책임자는 육군 소령 박종규(朴鐘圭)였다. 박종규, 차지철 등 11명의 장면 체포조는 미리 반도호텔을 답사, 장면을 체포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국무총리가 도망친 것 같습니다. 체포에 실패했습니다."
국무총리 장면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고 박치옥에게 보고를 한 사람은 차지철이었다.
"국무총리를 놓치면 어쩌는 거야? 이거 야단 아냐?"
박치옥은 장면 체포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닌게 아니라 야단은 야단이었다. 만일 장면이 원주로 도망쳐 제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출동을 명하기라도 했다간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장면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이 장군, 이 장군만 믿겠소. 즉시 장면이 원주로 피신해서 이한림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날엔 쿠데타는 도로 아미타불이 돼 버리고 말 것은 눈으로 보나마나 뻔한 일이었다. 장면이 미국 대사관이나 미 제8군 사령부 영내로 피신했을 경우도 가상할 수 있었다. 이 두 군데 모두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이곳의 전화를 이용해서도 얼마든지 이한림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있었다. 이럴 경우에는 차선책이라도 써야 한다고 박치옥은 생각했다. 그 차선책이란 장면 정권의 요인들을 모조리 수중에 넣어두는 것이었다. 제1군이 반격전으로 나왔다 하게될 것 같으면 이 인질들을 미끼로 협상도 벌일 수 있는 일이다. [삼국지 연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략이었다.
"체포조?"
박치옥은 요인 체포조를 찾았다. 공수단에게 맡겨진 요인 체포는 오직 한 사람 장면뿐이었다. 나머지 장면 정권의 요인들에 대한 체포는 육군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쿠데타 멤버들한테 맡겨져 있었다.
"요인 체포조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어?"
박치옥은 시청앞 광장 일대를 두리번거리면서 요인 체포조를 찾았으나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박치옥의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때에 육군본부 근무자인 육군 중령 김원희(金元熙)가 나타났다. 그를 보자 박치옥은 다그치듯이 물었다.
"됐소?" 한데, 김원희의 대꾸는 너무나 엉뚱했다.
"요인 체포요? 집을 알아야 요인을 체포할 게 아닙니까?"
"뭐, 집을 알아야?"
박치옥은 하도 기가 막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이런 놈들을 동지라고 믿고 그런 중책을 맡겨?)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분노가 물 끓듯이 끓었다. 요인 체포를 책임졌으면 미리 집부터 알아둬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미리 집도 알아두지를 않았으니 이런 놈들을 어떻게 동지라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해병대와 공수단이 한강의 있은 지가 언제인가? 겨우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요인들의 집을 몰라 체포를 하지 못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다른 놈들은 다 어쩌고 김원희 혼자만 나타났느냔 말이다. (이놈들이 장도영이 진압작전에 나섰다는 것을 알고 모조리 발뺌을 하려고 숨어 버린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김원희 혼자만 나타났느냔 말이다.) 그런 의심도 들었다. 박치옥이 분노가 끓을 만도 했다.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쿠데타가 일어난 이날 아침까지 체포된 장면 정권의 요인은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위시해서 체신부 장관 한통숙, 국방부 사무차관 김업 뿐이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 3시경, 부산에 조재천(曺在千)과 무임소장관 오위영(吳慰永)은 각기 동래온천 대성관과 자택에서 체포했을 뿐이었다. 이들 두 요인을 체포한 부대는 육군 준장김용순(金容殉)이 이끄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부 소속의 부대였다.
한편, 장면이 떠나자 현석호는 체신부 장관 한통숙과 국방부 사무차관 김업을 먼저 지프에 오르게 했다. 그런 다음 자기는 앞자리에 앉았다.
"506방첩대로 가세."
진압상황이 마냥 궁금하기만 했던 현석호는 다시 506방첩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프가 서울 시청 앞 로터리를 돌 세웠다.
"뭣하는 사람이오?"
무장병사 하나가 물었다.
"나 국방장관일세."
현석호는 아주 조용히 대꾸했다. 국방장관이라는 말에 무장병사는 일순간 찔끔해 하는 것 같았다. 다른 병사가 끼어들었다.
"국방장관이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도 모른단 말이오? 어서 차에서 내리시오."
현석호는 감히 국방장관에게 거친 말투를 쓰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반란군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며, 아무 소리 앉고 차에서 내렸다. 현석호가 내리자 한통숙과 김업도 따라 내렸다.
"따라 오시오."
그들은 서울 시청 뒤로 끌려갔다.
"여기 서 계시오."
무장군인들이 세 사람을 세워 놓은 곳은 시청 뒤의 담벼락 앞이었다. 현석호 등 세 사람이 무장군인들한테 이끌려 서울 시청 뒤로 가고 있는 바로 그 시각, 장면의 차는 중학동 한국일보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 직원숙소 앞에서 정차했다.
"미스터 실바를 찾게. 미국 대사관의 정보책임자일세."
장면이 앞자리에 앉은 조인호에게 명했다. 미국 대사관으로의 피신에 실패한 장면은 미국 대사관 직원숙소에 은신할 생각을 했다. 조인호는 차에서 내리자 숙소 정문 앞으로 달려갔다. 굳게 잠긴 철문을 한동안이나 두들기고 나서야 수위가 손전등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한국말이었다. 수위가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인호는 수위가 한국 사람인 것이 조금은 꺼림칙했다.
"급한 사정이 있어서 그럽니다. 미스터 실바한테 조인호라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잠깐 기다리십시오."
수위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다시 또 어슬렁어슬렁 안으로 사라졌다. 몸가짐이 꼭 굼벵이 같았다. 여기서 한 5분은 지체했을까? 아니 10분 이상을 들어간 수위한테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조인호는 속이 탔다. 장면도 속이 탔다. 군용 지프의 내왕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는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 가세."
장면은 조인호를 불렀다.
"일단 내 집으로 가세."
장면의 집은 명륜동에 있었다. 운전수는 속력을 낼 수 있는 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런데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원남동 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트럭의 행렬이 보였다. 이제 더는 우물쭈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여기 장면의 머리에 번갯불처럼 떠올랐다.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장면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메살리나 황후
클라우디우스는 50세에 황제에 즉위할 때까지 세 번 결혼했고 두 번 이혼했다. 첫 아내인 우르굴라닐라와는 이혼했고, 두 번째 아내인 아일리아 페티나와의 사이에는 딸이 하나 태어 났지만 이혼으로 끝났다. 클라우디우스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자가 좋아할 타입이라 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원해서 이혼한 게 아니라 여자한테 버림받은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큰아버지인 티베리우스와 형 게르마니쿠스가 양자로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이 된 뒤로는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의 명문 중에서도 명문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력이 없다 해도 아내감은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 번째 아내는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인 메살라 집안의 딸 메살리나였다. 그녀는 클라우디우스보다 35세나 젊었다. 메살리나는 어머니인 도미티아 레피다를 통해 율리우스 씨족과도 혈연관계를 갖고 있었다. 외조모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아버지 이름의 여성형을 딸의 이름으로 삼는 것이 보통이라서, 딸이 둘이면 둘 다 같은 이름을 갖게 된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연애로 유명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사이에 태어난 딸도 둘 다 안토니아다. 하지만 이래서는 혼동이 되기 때문에, 역사 연구자들은 언니를 큰(대) 안토니아, 동생은 작은(소) 안토니아로 구별해 부르고 있다. 메살리나의 외조모는 큰 안토니아이고, 작은 안토니아는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와 결혼하여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를 낳았다. 따라서 메살리나와 결혼한 클라우디우스는 메살리나의 어머니와는 사촌간이고, 메살리나에게는 외종숙이 된다. 메살리나의 외삼촌이자 큰 안토니아의 아들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딸이자 칼리굴라의 누이인 작은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여 제5대 황제인 네로를 낳았다.
서른다섯 살이나 나이가 많은 외종숙에게 시집갔을 당시, 메살리나는 자기가 이제 곧 황후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등극한 서기 41년, 50세의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처럼 들뜨지는 않았지만, 16세였던 메살리나는 하늘에 오른 기분이었다. 남편이 황제가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한테는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르지 있다는 이유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우쭐해졌다. 대 아그리피나와 그 딸인 소 아그리피나한테서도 볼 수 있듯이, 남자보다 오히려 여자가 핏줄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여자는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피'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게다가 메살리나는 황후가 된 직후에 그동안 딸밖에 얻지 못한 클라우디우스가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아우구스투스가 규정한 제위 세습제는 제위 계승자를 낳은 여자의 지위를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능력을 인정받고 황제의 양자가 되어 제위를 계승한다면, 그 사람이 누구한테서 태어났지는 문제가 되지않는다. 하지만 세습제는 능력보다 혈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성립되는 제도다. 황족의 여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제위 계승자를 출산한 여자의 지위가 강해지는 것은 이 제도의 숙명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클라우디우스는 비서진을 부리는 방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남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해방노예에 불과한 비서관들도 그를 얕보았듯이, 여자들도 그를 얕보았다. 그리고 학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클라우디우스는 집안일에 무관심했다. 가정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황제가 되기 전에는 역사 연구에 몰두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통치에 열중해서, 다른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 해달라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또한 여자들이 이러쿵저러쿵 귀찮게 굴면 금방 싫증이 나서, 자기를 방해하지 말고 뭐든지 좋을 대로 하라는식으로 행동했을 게 분명하다. 그 결과 메살리나의 언동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방종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메살리나의 방종은 허영심과 물욕과 성욕이라서 여자다운 욕망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흐르게된다.
허영심은 남편의 개선식에 참가하는 것으로 발휘되었다. 서기 44년, 브리타니아 정복-사실 정복은 아직 진행중에 있었지만, 그래도 로마가 새 영토를 획득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을 축하하여 거행된 개선식은 이런 축제를 무척 좋아하는 수도 서민을 열광시켰지만, 사람등은 그 행렬에 메살리나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개선식은 로마 제국이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무력으로 쟁취한 사람들을 공동체 구성원인 시민들이 축하하고, 개선장군과 휘하 병사들은 전공을 올리도록 도와준 신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데 의미가 있다. 개선식에 참가할 권리는 어디까지나 전투에 참가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여자가 개선식에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포로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들과 인간들에게 보여줄 전리품이었다. 개선식의 주인공인 개선장군이 후계자 후보를 일반에게 선보이기 위해 개선식에 참가시키는 경우는 있었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의 개선식에는 소년 아우구스투스가 말을 타고 참가했고, 아우구스투스의 개선식에서는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가 말을 타고 아우구스투스의 전차를 뒤따라 행진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본심이 이들을 일반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 해도, 이들은 전투에 실제로 참가하여 싸운 장수들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아내라 해도 종군하지도 않은 여자가 개선식에 참가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사람드은 이것을 개탄스러운 일로 생각했지만, 19세의 메살리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심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무시한 게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무시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당연히 개선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젊은 아내가 귀찮게 졸라대자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것이다. 메살리나는 당신의 외아들-브리타니쿠스(브리타니아를 제패한 자)라는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고 원로원이 인정한 아들-을 낳아준 내가 개선식에 참가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무지한 아내를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메살리나가 물욕을 추구한 것은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이다. 남편인 클라우디우스는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귀족이었다. 다만 이 젊은 황후에게는 원래부터 낭비벽이 있었다. 황후가 되자 그 낭비벽은 더욱 심해졌다. 남편이 명문 출신의 '책상물림'에 불과했을 무렵에는 본 적도 없었던 온갖 호화로운 선물이 그녀 앞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젊고 무지한 메살리나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했다. 갖고 싶으면, 가질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한 간통죄 처벌법으로 단죄된 자는 재산을 몰수당한다. 그 몰수된 재산을 국고에 넣지 않고 자기 품에 넣으면 되었다. 철학자 세네카도 여기에 말려들어 코르시카 섬에 유배되었다. 국가반역죄 처벌법도 물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법에 따라 유죄판견을 받으면 사형이다. 재산몰수도 간통죄보다 더 철저하다. 메살리나는 마구잡이로 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녀가 이 두 가지 법률을 이용하는 데에는 이렇다할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간통죄로 고발할 수 없는 경우에는 국가반역죄로 고발하는 식이었다. 로마의 재판에서는 고발당한 당사자의 자백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증거가 중시된다. 하지만 황제가 고발자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노예인 고용인들은 동요한다. 따라서 그들의 증언을 얻는 것은 간단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메살리나 혼자서 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메살리나는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해방노예 출신인 비서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의 역학관계르 잘 알고, 힘이 강한 쪽을 도왔다. 게다가 가장인 클라우디우스의 무책임이 아내의 방종을 조장했다. 아내가 귀찮게 조르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고발장을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했을 게 분명하다. 메살리나가 자살로 몰아넣은 포파이아(네로 황제의 아내가 된 포파이아 사비나의 어머니)가 그 좋은 예다. 메살리나는 제 애인인 유명한 배우를 포파이아가 가로챈 데 화가 나서 그녀를 간통죄로 고발했다. 클라우디우스가 고발장에 서명하자 포파이아는 자살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클라우디우스가 만찬회를 열였다. 그런데 남편인 스키피오만 만찬에 참석하고 포파이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클라우디우스가 프키피오에게 아내의 소식을 물었다. 스키피오의 대답은 "죽었습니다"는 한마디분이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클라우디우스는 며칠 전에 포파이아라는 이름이 적힌 무슨 서류에 서명한 것을 생각해냈다. 이런 일이 거듭되는데도 아내를 대하는 클라우디우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력하고 명성도 높은 인물까지 메살리나의 희생자가 되자, 원로원과 일반 서민도 젊은 황후의 변덕을 위험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클리우디우스가 황제에 즉위한 지 7년째인 서기 47년에 일어난 아시아티쿠스의 자살 사건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그해 57세였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이름만 보면 로마인 같지만, 남프랑스의 유력 부족인 알로브로게스족 출신이다. 남프랑스는 로마의 속주가 된 지 오래지만, 로마는 유력 부족의 존속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로브로게스족은 부족으로서 주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로마는 부족 상층부에 로마 시민권을 주고,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석까지 주었기 때문에, 로마와의 융합도 진행되고 있었다. 발레리우스의 성이 아시아티쿠스인 것은 제국 동방에서 거둔 군사적 업적에 대해 주어진 존칭이 그대로 가문의 성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서기 35년과 46년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즉 로마 제국의 중앙정부에서 법적으로는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속주 출신으로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이 그가 처음은 아니다. 카이사르에게 등용된 에스파냐 출신 발부스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남프랑스 속주 출신 집정관은 아시아티쿠스가 처음이다. 이 사람은 남프랑스로 이주한 로마 군단병의 자손이 아니라, 로마가 재패하기 전에는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고 부른 현지인의 자손이었다. 그런데도 로마인들은 인종이나 민족과는 관계없는 순수한 의미에서 국가에 공헌한 아시아티쿠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제 이 야만족 출신은 로마인 이상으로 로마인이었다. 따라서 아시아트쿠스가 공화정 시대의 용장 루쿨루스가 만든 정원을 사들여 더욱 아름답게 꾸몄을 때도 그것을 문제삼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22세의 메살리나는 로마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평판이 난 이 정원을 갖고 싶었다.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그녀는 아시아티쿠스를 국가반역죄로 고발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꾀를 일러주었을 게 분명하지만, 남프랑스 출신인 아시아티쿠스의 친척들 중에는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조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시아티쿠스가 이들과 공모하여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봉기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 고발 이유였다. 이번에도 클라우디우스는 고발장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아시아티쿠스 체포영장에 서명했다. 아시아티쿠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결백을 논리정연하게 입증했다. 클라우디우스도 납득한 것 같았다. 하지만 메살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혐의가 풀렸다고 믿고 있던 아시아티쿠스에게 날아온 것은 자살을 권하는 황제의 편지였다.
57세의 남프랑스 출신 로마인은 친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죽는 건 괜찮지만 여자의 사기에 걸려들어 죽는 게 유감이라고 말한다음, 그 자리에서 손목의 동맥을 끊었다. 정원은 메살리나의 차지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메살리나가 허영심과 물욕만이 아니라 성욕도 동시에 추구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성욕이 유난히 강했는지, 아니면 남편이 정무에 몰두한 나머지 아내를 돌보지 않는 밤이 계속되자 반기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황후는 밤마다 황궁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와, 이 언덕 옆에 세워진 대경기장의 관람석 밑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매음굴에서 손님을 받았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서민들이 모이는 대경기장 밑의 매음굴은 로마 전역에서도 가장 싼 값에 창녀를 제공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손님의 질도 가장 낮았다. 다만 이 이야기를 전하는 역사가들 가운데 메살리나의 동시대인인 하나도 없다. 수에토니우스도, 타키투스도, 카시우스 디오도 모두 그녀보다 최소한 반세기 뒤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때쯤에는 소문이 전설이 되었을 테고, 그 전설을 그대로 전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클라우디우스는 온종일 정무에 몰두한 뒤 지친 몸으로 저녁 식탁에 앉으면 마음과 과식을 일삼았고, 공식 연회 석상에서도 손님들을 앉혀둔 채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아내가 옆방에 사내를 끌어들여 무슨 짓을 해도 남편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용인들이 있다. 황궁 안에는 제멋대로 굴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또한 황후라는 신분으로 비천한 사내에게 몸을 맡김으로써 얻을 수 있는 쾌락도 있었을 것이다. 메살리나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항간에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후세에까지 살아남은 이 풍설이 사실었는지, 아니면 단지 사람들의 상상에 불과했는지를 밝힐 방법은 없지만, 한 가지만은 사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메살리나는 자기 억제에 서투른 여자였다는 점이다. 남자들은 자제심이 강한 여자를 여자답다고 평하지 않는 법이지만. 어쨌든 현대 이탈리어의 '메살리나'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의 대명사로 쓰인다. 따라서 이탈리아 남자가 "너는 메살리나 같다"고 말하면, 황후 같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두는 게 좋다. 젊은 아내의 방종 덕택에 원로원 의원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를 보는 눈이 달라졌는데도, 클라우디우스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찬미나 경의보다 경멸과 혐오의 눈길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클라우디우스에게는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국세조사(켄수스)
제국의 통치 내지 경영은 유명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 즉 뉴스가 되지 않는 작업으로 지탱된다. 클라우디우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황제였다. 수수한 정무를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 클라우디우스는 국세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실시한 지 34년 만의 국세조사다. 클라우디우스는 국세조사를 위해 제정 시대가 된 뒤로는 모습을 감추었던 재무관(켄소르) 제도를 부활시켰다. 공화정 시대에 재무관의 원래 임무가 국세조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소한 1년 반의 임기로 정원이 두 명인 이 관직에는 클라우디우스 자신과 그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비텔리우스가 취임했다. 이때의 조사 결과, 병역이 가능한 17세 이상의 남자 가운데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수는 통틀어 598만 4,072명으로 밝혀졌다. 서기 14년엣 lf시한 지난번 조사에서는 493만 7천 명이었다. 34년 동안 100만명 가량이 늘어난 셈이다. 그런데 본국 이탈리아보다 속주의 증가율이 더 높았다. 피정복잗인 속주민도 보조병으로 로마군에 지원하여 만기인 25년을 복무하면 정복자와 같은 로마 시민이 될 수 있게 한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이 거둔 성과였을 것이다. 또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라는 '로마 제국의 등뼈'가 본국의 경계선을 넘어 속주에서도 형성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군사력을 증강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그 군사력을 이용하여 영토 확장에 나서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도, 그런 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클라우디우스의 훌륭한 점이다. 브리타니아에서 진행중인 군사적 재패 외에는 어디에서도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무렵 라인 강 전선에서는 엘베 강까지 이르는 게르마니아 전역을 재패하겠다는 아우구스투스의 꿈도 마음만 먹으면 실현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라인 강 동쪽에 사는 게르만족의 일부 부족이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이 교체되는 시기를 노려 라인 강 서쪽으로 쳐들어온 것이 발단이었다. 한때 밀렸던 로마군은 새로 부임한 코르볼로의 지휘로 게르만족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기세가 오른 로마군은 라인 강을 건너 적지로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코르불로(이 사람도 남프랑스 출신 로마인이었던 모양이다)는 강력한 군율로 병사들을 엄격히 단속하는데도 무슨 까닭인지 병사들에게 인망이 높고 전략과 전술이 모두 뛰어난 장수였다. 그에게 10 군단을 주어 게르마니아 정복을 맡기면, 게르마니아 땅을 완전히 재패할 수도 잇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라인 강을 건너 진격하고 있는 코르불로에게 전달된 황제의 친서는, 적에게 충분한 타격을 주었으니 더 이상 동쪽으로 진격하지 말고 라인 강까지 철수하라는 내용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 지역에서는 티베리우스 방식을 충분히 답습했다. 사령관 코르불로는, 과거의 장수들은 행운아였다는 한마디로 아쉬움을 달래고는 병사들을 모아 라인 강 연안의 방위기지로 돌아왔다. 하지만 공격 일변도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 장수도 그후 10년도 지나기전에 맡게 된 동방 전선에서는 공세보다 방위를 우선하는 제정 로마의 대원칙을 솔선하여 수행하는 사람이 된다. 로마에서는 군인조차도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코르불로를 제지했지만, 이 장수의 열의에 보답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로마인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을 허락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는 또 다른 장수에게도 개선식을 허락했따.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클루티우스 루푸스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군사적 성과에 보답하기 위한 개선식이 아니었다. 그냥 앉아서 적을 기다리고만 있으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루푸스는 광산 개발에 병사들을 동원했다. 광산 개발만이 아니라 도로 부설 같은 토목사업에 군단병을 동원하는 것은 평시에 병사들을 이용하는 로마군의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때 루푸스가 개발한 광산은 산출량이 너무 적어서, 고생만 많고 보람은 없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에 염증이 난 병사들은 몰래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루푸스에게도 코르불로처럼 개선식을 허락해달라고 청원했다. 개선식이라도 하면 그걸로 만족하여 퇴역할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이들 두 장수에게 약식이나마 개선식 거행을 허락했다. 그런데 코르불로도 그랬지만, 루푸스도 이 영예에 만족하여, 퇴역하기는커녕 전보다 더욱 좋은 기분으로 귀대했다. 루푸스는 결국 광산개발은 체념했지만, 토목사업을 통해 국가에 공헌하는 것은 체념하지 않은 듯, 병사들에게 라인 강과 모젤 강을 좀더 효율적으로 연결하기위한 운하 공사를 명령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실망하는 병사들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티베리우스에게 등용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자만, 클루티우스 루푸스는 티베리우스가 등용한 인재였던 게 확실하다. 소문에 따르면 검투사 출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눈에 띄어 아프리카 속주에서 회계감사관을 지냈고, 그후 수도 로마로 불려와 법무관을 지낸 뒤 라인 강 전선에 파견된 모양이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를 나쁘게 평하고 있지만, 그는 성실하고 유능한 인재로 자신의 처지를 분별하면서 로마 제국을 실제로 움직인 수많은 톱니 가운데 하나였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