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0호 - 2024.02.17. 토요일(음력 : 01. 07.)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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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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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낭비해 보는 것은 대단히 유쾌한 일.
그것은 습관이라는 무감각한 타성에 의해 절제하는 것을 막아 준다. ― 서머셋 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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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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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에게?
나는 매주 한 번 이상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다. 그렇게 본 영화에는 독립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2006)도 있다. 그런데 영화 제목을 처음 접하자마자 아주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청춘에게’의 ‘에게’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에게’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다” “개에게 먹이를 주다” 등처럼 사람이나 동물을 나타내는 말 뒤에 붙는 격 조사이다. “본부에 상황을 알리다” “나는 꽃에 물을 주었다” 등처럼 식물이나 무생물을 나타내는 체언 뒤에는 ‘에게’ 대신 ‘에’가 붙는다. 체언의 의미에 따라 ‘에게’와 ‘에’를 구분해 쓰는 것이다. 물론 동시나 동화에서 식물이나 무생물을 의인화한 경우 “나무에게 말하다”처럼 식물이나 무생물이라도 ‘에게’를 쓸 수 있다.
그런데 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에서 ‘청춘’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로서 무생물이다. 무생물인 ‘청춘’을 의인화한 것으로 볼 수도 없다. 따라서 ‘청춘’ 뒤에는 ‘에게’가 아닌 ‘에’를 써야 한다.
한편 그 의미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몇몇 체언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 세대에/에게 바치다”의 ‘세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세대’ 뒤에 ‘에게’를 써야 할지 ‘에’를 써야 할지 헷갈릴 수 있다. ‘세대’는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부모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약 30년 정도 되는 기간’(무생물)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 전체’(사람)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세대’ 뒤에는 그 의미에 따라 ‘에’를 쓸 수도 있고 ‘에게’를 쓸 수도 있다. ‘계급’이나 ‘계층’도 그런 체언에 해당한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장장 138일간에 걸쳐 5만여 명이 출연한 역사적 방송, 분단이 빚어낸 슬픈 감동의 드라마였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이산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금강산에서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60년이 넘는 세월도 혈육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다시 느꼈다.
흔히 인연을 얘기할 때 ‘뗄래야 뗄 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러나 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의 잘못이다. ‘떼려야’는 ‘떼다’의 ‘떼’와 ‘려야’가 결합한 말로 ‘-려야’는 ‘-려고 하여야’가 줄어든 것이다. 즉 ‘떼려고 하여야 뗄 수 없는’이 줄어 ‘떼려야 뗄 수 없는’이 된 것이다. ‘떼’에 ‘ㄹ래야’가 결합한 ‘뗄래야’는 풀어 쓰면 ‘뗄라고 해야’가 되는데 이는 표준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갈래야 갈 수 없는 고향’도 ‘가려야 갈 수 없는 고향’으로 쓰는 것이 맞다. ‘가려야’는 ‘갈라고 해야’가 아니라 ‘가려고 해야’가 줄어든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먹을래야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아니라 ‘먹으려야 먹을 수 없는 음식’, ‘볼래야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니라 ‘보려야 볼 수 없는 광경’, ‘할래야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하려야 할 수 없는 일’로 쓰는 것이 맞다.
많은 사람들이 ‘떼려야’가 맞는 표현이라고 해도 ‘뗄래야’가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아마도 입에 익지 않아서일 것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뗄래야’를 계속 고집한다면 언젠가는 규정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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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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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비 - 천상병
1
부슬부슬 비 내린다.
지붕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도
멀고먼 고향의 소식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득한 곳에서
무슨 편지라든가
나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저 하나님 생각에 잠긴다.
나의 향수여 나의 향수여
나는 직접 비에 젖어보고 싶다.
향이란 무엇인가,
선조의 선조의 선조의 본향이여
그곳은 어디란 말이냐?
그건 마음의 마음이 아닐런지--
나는 진짜가 된다.
2
저 구름의 연연한 부피는
온 하늘을 암흑대륙으로 싸았으니
괴묵은 그냥, 비만 내리니 천만다행이다.
지금 장마철이니
저 암흑대륙에 저 만리장성이다.
우뢰소리 또한 있을 만하지 않은가.
우주야말로 신비경이 아니냐?
달과 별은 한낮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비는 그 청신호인지 모르지 않느냐?
3
새벽같이 올라와야 했던
이 약수는
몇월몇일의 빗물인지도 모르겠다.
산과 옆의 바위는 알 터이나
하늘과 구름은 뻔히 알겠지만
입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약수를 마시는 데는 지장이 없고
맛이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니
재수형통만 빌 뿐이다.
4
상식적으로 비는 삼라만상 위에 내린다.
그런데 지붕뿐인 줄 알고
내실의 꽃병은 아니 맞는 줄 안다.
생각해보라
삼라만상은 이 우주의 전부이다.
그러니 그 꽃병도 한참 맞고 있는 것이다.
생리는 그 꽃병을 안 맞게 하지만
실존은 그 꽃병의 진짜 정신을
지붕 위에 있게 하여 비를 맞는 것이다.
5
물의 원소는
수소 두 개와 산소이지만
벌써 중학생 때 익혀 알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수소와 산소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
공포할 만한 야수가 들어 있다.
수소 뒤에는 수소폭탄이
산소 뒤에는 원자폭탄이.
6
나는 국민학교 때는
비가 오기만 하면
학교에 가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천국에 가신 어머니에게
한사코 콩을 볶아달라고 하여
몸이 아프다고 핑계했었다.
이제는 나가겠으나
이미 나이가 사십이니
이 세계를 거꾸로 한들 소용이 없다.
7
팔월 장마비는 늦은뱅이다.
농사에는 알맞아 들 테지마는,
인간에겐 하찮은 쓰레기일 것이니.
먼데 제주도 생각이 불현듯 나니
아직 한 번도 못 가본 제주도여
마치 런던 옆에나 있는 것이 아니냐.
애오라지 못 갈 바에야
바닷가로나 가서 먼데까지 가야지
그러면은 그 섬 향기가 날지도 모른다.
8
백두산 천지에는
언제나 비가 쏟아진다드냐
단군 할아버지께서 우산을 쓰셨겠다.
압록강의 원류가 큰소리를 칠 것이니
정암이 소용돌이 쳐
법조차 그 공포에 흐늘흐늘일 것이다.
백운을 읊는 고전시는 있어도
이 산을 읊는 고전시는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읊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9
나뭇잎이 후줄근히 비를 맞는다.
둥치도 맞고 과일도 그러하다.
표면이란 표면은 같은 운명이다.
냇물도 맞으니
이건 손자가 할아버지하고 악수하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보고 흐뭇할 수밖에.
숲속 부락은 축제나 마찬가지다.
아낙네들은 내일 일을 미리 장만하고
남편들은 아람드리 술 퍼먹기에 바쁘다.
11
빗물은 대단히 순진무구하다
하루만 비가 와도
어제의 말랐던 계곡물이 불어오른다.
죽은 김관식은
사람은 강가에 산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그게 진리대왕이다.
나무는 왜 강가에 무성한가.
물을 찾아서가 아니고
강가의 정취를 기어코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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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久遠) 2 - 한용운
항하사겁(恒河沙劫)의 시간(時間), 천억광년(千億光年)의 공간(空間),
무량수무량수(無量數無量數)의 만유(萬有), 찰나변동(刹那變動)의 무상(無常).
--이것이 합(合)하여 우주의 체(體)가 되며 우주의 생명이 되며,
우주의 가치(價値)가 되는도다.
이러한 우주와 우주의 모든 것은 일념(一念)의 위에 건립(建立)되나니
그럼으로써 유심(唯心)을 부인하는 유물론도
종교를 배척하는 반종교운동도 모두가 일념에서 건립되는 것이어든
「일념(一念)은 기하수(幾何數)의 점(點)이요 회화의 소(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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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가와 - 정지용
가모가와 심리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원치도 않어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ㅅ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가모가와 십리ㅅ벌에
해가 저물어... 저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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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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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知:알 지. 彼:저 피. 己:몸/자기 기. 百:일백 백. 殆:위태하 태.
[출전]《孫子》〈謀攻篇〉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 곧 상대방과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알아보고 승산(勝算)이 있을 때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말.
춘추 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패업을 도운 손무(孫武)는 전국 시대에 초(楚)나라의 병법가로서《오자(吳子)》를 쓴 오기(吳起)와 더불어 병법의 시조라 불리는데 그가 쓴《손자(孫子)》〈모공편(謀攻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아니하다[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리고 적의 실정은 모른 채 아군의 실정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 또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실정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만 번에 한 번도 이길 가망이 없다.”
[주] 여기서 말하는 ‘백(百)’이란 단순한 숫자상의 ‘100’이 아니라 ‘삼(三)’‘칠(七)’‘구(九)’‘천(千)’‘만(萬)’등과 같이 ‘많은 횟수’를 가리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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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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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12. 반역의 상
황제 유항의 명을 받은 정위는 장안의 옥리를 시켜 주발을 체포해 고발된 반역혐의를 취조하게 했다. 주발은 봉국인 강현으로부터 속절없이 압송되어 왔다. 원래 강후 주발은 우직할 만큼 외골수였다. 일찍이 고조 유방이 한실의 뒷일을 위탁할 만한 충신으로 여겼던 바도 그의 인품을 통찰했기 때문이었다. 실상 여씨 일족을 주벌해 한실을 무사히 지켜낸 것만 보아도 유방의 기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주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림으로써 엉뚱한 방어책을 강구하다가 오히려 반역죄로 고발당한 사실은 자신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반한 사실도 없는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고문은 더욱 심하게 가해졌다. 말솜씨도 어눌한 데다 글도 신통찮은 그로서는 어떻게 변명해야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급했다.
"여보게, 옥리, 내가 천금을 그대에게 주면 나를 좀 살살 다룰 수 있겠나?"
효과는 금새 나타났다. 천금을 받아챙긴 옥리는 주발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옥리는 목찰 뒷면에다 무슨 글씨인가를 써서 슬쩍 주발에게 넘겨주었다.
ㅡ황녀를 증인으로 삼으시오.
'아 참 그렇지! 황녀야말로 내 큰며느리가 아닌가!' 실제로 주발의 장자인 주승지의 아내가 효문제의 딸이었다. 살아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주발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누구에게 줄을 대어야 가장 확실하게 구명될 수 있겠다는 궁리도 생겼다.
"옥리, 박후의 동생 박소를 좀 만날 수 있게 해주시게."
박소가 옥중으로 찾아왔다.
"내가 증봉될 때 받은 하사금 모두를 그대에게 주겠소. 박태후께 그대가 부탁하여 폐하께 나를 위해 호소해 주도록 해주오. 실상 나는 아무 죄가 없소."
결국 주발은 백방으로 손을 쓴 꼴이었다. 때마침 효문제 유항이 모후인 박태후궁으로 문안차 들게 되었다. 박태후는 쓰고 있던 모서(노인의 두건)을 벗어 황제에게 집어던지며 소리질렀다.
"폐하의 현명함이 겨우 그 정도요? 강후 주발을 체포하다니! 그는 여씨 일족을 주벌하고 그대가 즉위할 때까지 옥새를 지키고 있었소! 무엇보다 그는 북군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이었단 말이오! 모반하려면 그 때 해치웠지 그래 권세도 잃고 작은 시골에 틀어박혀 있는 그가 지금에 와서 무엇 때문에 모반을 한단 말이오!"
황제 유항은 모후 박태후의 호통에 백배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강후 주발이 옥중에서 진술한 바를 모두 듣고 있으니 옥리의 취조가 끝나는 대로 곧 석방하겠습니다."
"아니되오! 지금 당장 석방시키시오! 은혜를 모르는 자는 황제도 아니오!"
"즉시 절모(칙사의 표시)를 사자에게 들려보내 강후를 석방하고 작읍을 회복시키겠습니다!"
주발이 석방되고 나서 알게 된 일이지만, 주발이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황족이나 대신들 누구도 주발을 위해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오직 원앙만이 주발의 무죄를 증명하느라 동분서주했다는 것이다.
"고맙네...."
"아닙니다. 강후께서는 모반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석방된 것뿐입니다."
주발이 다시 봉국으로 돌아가면서 중얼거린 말이 있었다.
"나는 일찍이 백만의 군사를 이끌었지. 그런데 옥에 갇히고 보니까 일개 옥리의 존재가 그렇게 까지 존귀한 줄 몰랐어!"
화남왕 유장은 효문제 유항의 살아있는 유일한 아우였다. 유장을 두고 원앙이 황제 유항에게 간언했다.
"야단났습니다. 회남왕께선 벽양후 심이기를 멋대로 죽였습니다!"
"무어? 벽양후를 무엇 때문에?"
"일찍이 여태후한테서 사랑받던 자라 하여 그것이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짐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사람을 죽여?"
"오 만방자한 행위입니다. 제후가 지나치게 교만해지면 반드시 근심할만한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를 견책하시고 봉령을 삭감함으로써 미리 경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단 하나밖에 없는 형제다. 짐은 그에게 죄를 줄 수없다."
유항은 원앙의 충고를 듣지 않고 유장의 심이기 살해사건을 흐지부지 넘겨버렸다. 얼마 후였다. 회남국 재상 시무의 아들이 모반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취조해 본즉 유장과 연계되었던 것이 드러났다.
"아아, 친동생인 그대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는가!"
이번에는 유항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기회에 유장을 촉땅으로 귀양보낸다! 그것도 수레를 몰아 호화롭게 유람 보내듯 할 게 아니라 함거(죄인 호송차)에 실어 역참마다 마차를 갈아태워 급송키로 한다!"
중랑장으로 있던 원앙이 펄쩍 뛰었다.
"그것은 아니 되십니다!"
"무엇이 아니 된단 말이오! 원래 회남왕 유장을 벌주자고 했던 게 그대가 아니오!"
중랑장 원앙의 반발에 황제 유항은 발끈했다.
"평소에 폐하께서는 화남왕의 교만을 허용하시어 조금도 제지시키지 않으시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식으로 그분의 기를 완강하게 꺾으려 하시니 그분의 강인한 회곬수 성품으로 보아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단 말이오?"
"귀양을 보내실 게 아니라 여기서 단호하고 엄격한 처단을 내리시는게 옳을 듯합니다."
"짐은 그대의 설득을 이해할 수 없소. 가장 단호한 엄단은 촉땅으로 귀양보내는 일이 아니겠소!"
"촉땅까지는 상당히 고된 여정이옵니다. 가는 도중 안개나 이슬을 맞거나 혹은 열병으로 돌아가실 수도 있는 험로입니다. 그럴 경우 폐하께서는 광대한 천하를 소유하시고도 아우 하나를 포용 못해 죽게 했다는 오명을 쓰시게 됩니다."
황제 유항은 잠깐 흔들리는 기색이었지만 곧장 단호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애초의 결정대로 하라!"
결국 황제는 원앙의 간언을 듣지 않고 유장을 촉땅으로 보내고 말았다. 열흘 후였다. 옹땅으로부터 소식이 날아들었다.
"회남왕께선 옹땅에 이르시어 병사하시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황제 유항이 펄쩍 뛰었다.
"무엇이? 그가 왜 그토록 빨리 병들어 죽었단 말인가!"
"역참마다 계속 인계해 즉시 호송하라는 폐하의 지엄하신 분부로 미처 진지 올리는 일을 잊어버려 굶어서 돌아가신 듯합니다."
"아아, 이를 어쩌나!"
유항은 대성통곡했다. 식사까지 폐하고는 며칠을 슬피 울었다. 원앙이 입조했다.
"소신이 강력하게 간하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벌 주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그대에게 무슨 죄가 있겠소. 짐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꼴이 되었지!"
"그토록 자책하지 마십시오. 지난 일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폐하께는 기왕의 실수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한 세상의 뛰어나 덕행이 세 가지나 있지 않습니까. 그만한 일로는 폐하의 명예가 훼손되지가 않습니다."
유항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원앙을 굽어보았다.
"짐의 세 가지 덕행이란 무어요?"
중랑장 원앙이 황제 유항을 우러러보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아직 대왕으로 계실 때 황태후께서 삼 년 간이나 병환으로 고생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폐하께선 의복도 벗지 않은 채 뜬눈으로 밤을 새셨고, 탕약도 폐하의 입으로 직접 맛보지 않고서는 진상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한 효행이겠거늘 그게 무슨 덕행까지 되겠소."
"이는 저 효로 유명한 증삼(공자의 제자)도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왕자의 고귀한 신분으로서 그것을 실행하셨습니다. 이것은 폐하의 첫 번째 덕행입니다."
"그럼 두 번째 덕행은 뭐요?"
"여씨 일족이 정권을 전단할 때 폐하께서는 대국으로부터 겨우 여섯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장안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태연히 달려오셨습니다. 이는 저 맹분이나 하육(모두 전설적인 용사)같은 용자의 용기도 폐하한테는 미치지 못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렇지도 못하오. 짐은 한없이 두려웠기로 몇 차례씩 장안으로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점검한 후에야 입경한 겁쟁이에 지나지 않았소."
"세 번째의 덕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폐하께서는 장안의 대국 저택으로 도착하시어 서향해 세 차례나 천자위를 사양하셨고, 남향해서는 두 번이나 사양하셨습니다. 저 덕행으로 유명한 허유도 단 한 차례만 사양했습니다. 허유보다 다섯 차례나 더 많은 사양을 하셨습니다. 회남왕을 귀양보낸 것은 그의 심기를 흔들어 잘못을 고쳐주려는 호의에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의 죽음은 폐하의 본래 의도와는 전연 상관이 없습니다."
유항은 그제서야 응어리가 풀어졌는지 가볍게 한숨을 쉰 뒤에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
"회남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폐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 그렇구려!"
효문제는 결국 유장의 세 아들 모두를 왕으로 세웠다. 그런 일들로 해서 조정에서의 원앙의 무게는 날로 무거워져갔다. 그토록 명성이 자자해지자 원앙을 모함하는 자가 생겼다. 바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환관 조동이었다. '그놈은 하루 종일 황제 곁에 있으면서 외출할 때에도 배승해 날 모함하느라 속닥거리고 있으니 저놈을 어찌한다?' 원앙은 머리가 아팠다. 원앙의 조카 원종은 황제의 상시기(시종무관기병)였다. 황제의 권한을 표시하는 절을 가지고 승여 옆에서 항상 황제를 모셨다. 그런 조카 원종에게 원앙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환관 조동이 나를 모함하지 못하게 하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원종은 곰곰 생각하고 나서 귀띔했다.
'결국 그놈의 중상모략이 통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겠지요.'
"어떻게?"
"삼촌께서 어전에서 공공연히 조동과 다투십시오. 그리고 기회있을 때마다 모욕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폐하께서 조동이 삼촌을 어떻게 모함해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묘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원앙은 마침 황제 유항이 외출을 하는데 조동이 배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수레 앞에 넙죽 엎드렸다.
"무어요?"
유항은 놀란 눈으로 원앙을 내려다보았다.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자고로 천자의 사방 여섯 자 승여에 배승이 허용된 인물은 모두가 천하의 영웅 호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데도 지금 한나라에서는 아무리 인재가 없다지만 폐하의 승여에 하필 거세당한 환관 따위를 동승시킵니까!"
"그렇소!"
멋쩍어진 유항은 웃으면서 조동에게 말했다.
"그대는 내리도록 하라."
그러자 조동은 훌쩍이면서 마지못해 승여에서 내렸다.
어느날 유항이 패릉에서 승여에 탄 채 서쪽 험준한 언덕길을 직접 말을 몰아 달려 내려갔다. 그 때 말을 타고 있던 원앙이 승여 옆으로 말을 바짝 대면서 승여를 몰던 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유항이 불평했다.
"짐은 괜찮은데 오히려 그대가 겁이 난 모양이구려!"
원앙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천만장자의 아들은 당의 가장자리에 낮지 않으며, 백만장자의 아들은 난간에 기대지 않으며, 성천자는 위험을 무릅써 가며 행운을 바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천자인 페하께서 이토록 자신을 가벼이 여기시다니! 만에 하나 말이 놀라 수레가 파손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고조의 묘와 황태후(효문제 생모 박태후)에게 무슨 명목으로 대하실 것입니까."
"듣고 보니 짐의 몸이 짐의 것이 아니구려."
화창한 봄날이었다. 황제 유항은 상림원(장안에 있음)으로 행행하는데 두황후와 애첩 신부인을 대동했다. 그런데 원중으로 들어가 좌석을 정할 때였다. 원의 위서장이 두 여인의 자리를 동렬에다 놓았다. 궁중에서는 언제나 좌석이 동렬이라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위서장은 별 생각없이 그렇게 배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앙은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얼른 달려가 신부인의 자리를 한 칸 뒤로 물려버렸다. 신부인은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놀이고 뭐고 그만두겠어요!"
토라진 신부인이 자리를 뜨자 유항도 덩달아 화를 냈다.
"중랑장 그대가 무엇이길래 좌석을 교란시켜 유쾌한 놀이를 망치려 하는 거요!"
황제 유항 역시 놀이를 포기하고 궁중으로 돌아가버렸다. 원앙은 즉시 어전으로 달려들어갔다.
"폐하, 높고 낮은 지위에 질서가 잡혀 있으면 상하가 모두 평화롭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선 오래 전에 두황후를 세우셨습니다. 신부인께서는 첩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황후와 첩실이 동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안 될 건 또 뭐가 있소!"
"오늘 상림원에서 하신 폐하의 행위는 신부인에게 화를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설마 여태후가 척부인을 '사람돼지'로 만들었던 경우를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정작 폐하께서 신부인을 사랑하신다면 차라리 후한 금품을 내리십시오. 그것은 높낮은 지위의 분별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폐하의 이번 처사는 능력은 없는데 총애하는 가신이라 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 나라 망치는 사단을 만드는 일과 다를 바 없는 행위입니다."
유항은 묵묵히 듣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듣고보니 그대의 말이 옳소."
유항은 몹시 기뻐하며 신부인을 불러 원앙의 간언을 전했다. 신부인 역시 고마워하며 원앙을 불러 황금 50근을 내렸다.
"그렇지만 황제께 너무 직간을 자주하면 경원당하기 쉽습니다!"
신부인도 충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결국 원앙은 궁중에 오래 있지 못하고 농서(감숙성)의 도위로 전임되었다. 원앙은 거기서도 사졸들에게는 자애롭게 대했으므로 그를 위해 생명을 던지겠다는 자들이 많았다. 소문을 들은 황제는 원앙을 곧 제의 재상으로 전임시켰다가 다시 오의 재상으로 전보했다. 오나라로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조카 원종이 서둘러 원앙을 찾아왔다.
"삼촌, 오나라 재상으로 다시 발령을 받으셨다면서요."
"글쎄 말이다. 오왕 유비는 성격이 교만한데다가 그의 수하에 또한 간사한 무리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내가 재상 일을 잘 처리해 낼지 그게 걱정스럽구나."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오왕의 성격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삼촌의 성격 때문에 화를 입지 않을까 저는 그게 더 걱정스럽다는 뜻입니다."
"내가?"
원앙은 조카의 뜻하지 않았던 충고에 화들짝 놀랬다.
"삼촌께서는 만사에 모든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성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다간 필히 일을 각박하게 처리하게 되지요."
곰곰 생각에 잠겨 있던 원앙은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 충고가 옳아. 나한테 그런 성격이 있지. 그래 내가, 오나라로 가서 어떻게 처신해야 좋겠나?"
"우선 오왕의 성격으로 보아 삼촌을 필시 폐하께 중상모략하든가 그나마도 모자라 심하게는 자객을 시켜 삼촌을 척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그러니까 삼촌이 오나라로 가시거든 남의 일에 결코 간섭하지 마시고 업무에 진력하지도 마십시오."
"날더러 무능하고 기백도 없는 인간이 되라는 말이로구나."
"그러지 않으셨다간 삼촌께선 목숨을 잃습니다. 남방은 저지대인데다 습한 지방이니 술이나 자주 마시는 게 몸에도 좋습니다. 그저 오왕께 간혹 '모반은 하지 말아주십시오'하고 권하기만 하면 다행히도 삼촌께서는 위험은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토록 말썽꾼인 오왕 유비는 고조 유방의 형 유중의 아들이다.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뒤 형 유중을 대국의 왕으로 삼았는데 흉노에게 쫓겨 낙양으로 잠행도주해 들어왔다. 유방은 차마 형을 벌줄 수가 없어 왕위만 박탈한 채 후로 떨어뜨리는 것에 그쳤다. 나중에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유중의 아들 유비는 나이 20세로 기력이 흘러넘치는 기병대장이었는데, 경포군을 무찌를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오나라 지방 주민들의 특성은 날래고 사나웠다. 그래서 유방은 이들을 다스릴 경험많고 용맹한 인물을 골랐으니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다. 유방의 아들들 역시 모두 어려서 왕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 때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인물이 유비였다. '가만 있어 보자, 유비 그 놈이 젊지만 용감무쌍하지. 오왕으로 임명하고 3군 53성시를 다스리도록 해야겠구나.' 유방은 즉각 유비에게 오왕의 옥새를 넘겨주었다. 유비가 오나라로 떠나기에 앞서 고조 유방한테 인사를 하러 왔다. 그때 찬찬히 유비의 얼굴을 뜯어보던 유방은 깜짝 놀랐다. '아 이놈 보게나! 얼굴에 반역의 상이 있구나!' 옥새를 넘긴 상황이었으므로 취소할 수도 없었다. 후회하면서도 굳이 유비의 등을 두드리며 부탁했다.
"앞으로 50년 안으로 한나라 남동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너일 것이다!"
"예에?"
"그러나 어차피 너도 유씨가 아니냐. 꿈에서라도 부디 모반할 생각일랑 말아라."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믿겠다."
효혜제와 여태후의 치세시대는 천하 평정의 초기인지라 유비도 별 탈없이 넘어갔다. 수중의 백성들 어루만지기에 급급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런데 오나라 예장군(강서성)에는 구리 광산이 있었다. 이를 기화로 유비는 동전을 무진장 만들어내고, 동쪽 바닷가 쪽에서는 바닷물을 끓여 수만 섬의 소금을 만들어냈다. 세금을 걷지 않아도 나라 재정이 튼튼하니 오왕 유비는 점차 기고만장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효문제 유항의 치세 때가 되었을 때 오왕 유비는 아들인 태자를 입조케 해 황제를 알현하도록 했다. 그런데 유비의 아들 오태자는 아비를 닮아서인지 사납고 무례하고 경박스럽고 교만했다. 황태자와 쌍륙을 치면서도 그 놀이방법을 가지고 사사건건 무례하게 다투었다. 참다 못한 황태자가 쌍륙판을 들어 오태자의 머리를 내려치자 그만 오태자의 머리통이 깨지며 즉사했다. 태자의 유해는 오나라로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아들의 유해를 맞은 오왕 유비는 노발대발했다.
"무어야!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례지낼 일이지, 같은 유씨 천하 일가라면서 굳이 여기까지 돌려보내 장례를 치루게 할 건 뭐냐!"
유비는 오태자의 유해를 받지 않고 한사코 장안으로 되돌려보냈다. 그것이 한조에 대한 유씨 원한의 발단이었다. 오왕 유비는 그 이후부터 한조에 대해 번신의 예를 노골적으로 지키지 않았다. 입조하라는 연락이 와도 병을 핑계로 장안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장안에서는 오나라 사자를 번번이 잡아 옥에 가두며 힐책하고 심문했다.
"도대체 너희 오나라 왕은 무엇 때문에 장안으로 입조하지 않는다더냐!"
사자들 역시 변명함 말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오왕 유비도 슬며시 겁이 났다. 원앙에게 대놓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기왕에 목이 잘릴 바에야 모반하는게 낫지 않겠소!"
그럴 때마다 원앙은 유비를 달랬다.
"제발 모반만큼은 하지 마십시오."
달랠 뿐만 아니라 한나라 조정과 오왕 유비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나섰다. 원앙은 황제 유항에게 서둘러 상소했다.
ㅡ사실 오왕께서는 병들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오나라 사자들을 계속 투옥 심문하셨기에 오왕은 겁이 나 더욱 병이라 핑계댄 것입니다. 차제에 말씀드리오니 폐하께서도 연못 속 물고기를 들여다보듯 아랫나라 사정을 너무 자세히 들추려 하시는 바도 상서롭지 못한 일인 듯 싶습니다. 폐하께서는 기왕지사를 버리시고 오왕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원앙의 생각이 옳다.' 유항은 즉시 오나라 사자를 석방하면서 안석과 지팡이를 주어 보내며 말했다.
"오왕 유비는 나이가 많으니 입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라."
유비는 황제로부터 죄를 용서받자 그제서야 꾀하려던 음모도 그만두게 되었다. 오나라는 그 때부터 잘 다스려졌다. 구리와 소금의 수입으로 백성들에게 부세를 받지 않아도 배불리 먹일 수 있었으며, 남을 대신해 병역에 복무하는 자에게도 그에 따른 보수를 주었으니 장정들은 몹시 좋아했고, 타국에서 망명자나 범법자를 체포하러 와도 숨겨주어 잡아가지 못하게 했으니 백성들은 모두 오왕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모두 원앙의 보이지 않는 보필 덕택이었다. 임기가 끝나 드디어 원앙이 장안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가는 도중 한나라 승상 신도가를 만났다. 수레에서 뛰어내린 원앙은 얼른 신도가에게 배례했다. 그러나 승상은 수레 위에서 고개만 끄덕거리며 지나가버렸다. 원앙은 분했다. 더구나 부하들 보기에도 부끄러웠다.
"수레를 돌려라!"
원앙은 신도가가 자나간 쪽으로 서둘러 수레를 몰게 했다. '장안의 예절도 많이 변했구나! 하지만 나로선 저런 풍습은 용서할 수없다!' 승상 신도가의 수레를 정지시킨 원앙은 다시 수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소리질렀다.
"승상, 주위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제게 잠시 틈을 내어주십시오!"
신도가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그럴 틈이 없소. 귀관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공무라면 관계관청으로 그대가 직접 가서 장사나 연(모두 승상의 속관)에게 상의하시오. 그러면 내가 나중에 황제께 상주하겠소. 만일 사적인 일이라면 그이야기는 아예 듣고싶지도 않소."
신도가가 움직이려 하자 원앙은 다시 수레를 막아서며 전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글쎄, 승상께서는 진평이나 주발보다 나은 인물이라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요?"
"우선 대답해 주십시오."
"내가 어찌 그분들과 감히 견주겠소."
"스스로 못하다고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실상 진평과 주발은 고조황제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장군이나 재상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여씨 일족을 주멸해 황족 유씨를 존속시켰습니다. 그에 비해서 승상께선 무슨 업적을 남기셨지요?"
"업적?"
"승상으로 말씀드리자면 강궁이나 쏘던 무졸 출신으로 약간의 공을 쌓아 대장으로 승진하여 운좋게도 회양군 태수로 전격 발탁되었을 뿐이지 않습니까."
"순전히 운만으로 오늘의 자리에 앉게 된 건 아니오."
"아닙니다. 운 때문이었습니다. 승상에게는 기발한 계략으로 성을 공격했던가 야전에서의 군공이 유별나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재수가 좋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신도가는 분노하는 기색이 만면했다.
"그래서 어떻다는 얘기요?"
"폐하께서는 조정으로 나오실 적마다 낭관이 상주문을 올리면 그것을 받지 않으신 적이 없고, 길을 가다가도 신하가 상주를 요청하면 수레를 멈추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 내용이 쓸 만하면 칭찬 역시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폐하께선 천하의 현명한 사대부들을 불러 모을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건 폐하께선 듣지 못했던 사실을 날마다 듣고, 알지 못했던 바를 즉시에 밝혀 성지는 날로 더해 가셨던 겁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자진하여 천하 사람의 입을 봉하고 스스로 귀를 막아 날로 우매해질 것을 자청하고 있으니 제가 보기에 총명하신 우리 폐하께서 우매한 승상을 견책할 날도 머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겁니다."
그날 신도가는 원앙의 논리정연한 힐책을 받고는 우울한 얼굴로 승상관저로 돌아갔다. 실상 신도가가 승상이 된 것은 우연이었다. 효문제 유항이 즉위하고는 한동안 장창을 승상의 자리에 두었는데 황제의 조칙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황후의 동생 두광국을 승상으로 몹시 바꾸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또한 대신들의 반대가 열화같았다.
"아니 되옵니다! 비록 두광국이 현명하고 덕행이 높은 사람이기는 하나 황후의 동생이라는 인척이어서 결국 폐하께선 사사로운 정으로 외척을 등용했다는 비방을 면키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유항은 두광국 등용도 포기하고 말았다. 고조 유방의 대신들이나 장군들도 모두 죽고 없었다. 그 외에도 승상에 앉힐 만한 마땅한 적임자도 없었다. 그 때 유항은 다만 사람됨이 청렴 강직하다는 이유만으로 고심 끝에 어사대부로 있던 신도가를 승상에 앉힌 것이다. 그런 신도가가 크게 능력있는 인물은 되지 못했으나 그의 강직함은 알아줄만했다. 사사로운 청탁 따위는 결코 용서 못하는 위인이었다. 원앙에 대한 그의 태도도 실상 강직한 성품에서 나왔을 뿐이지 그의 무능이나 교만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태중대부 등통은 유항의 남색상대였다. 황제의 대단한 총애를 입고 있으니 은상이나 하사금품이 등통의 집에 거만으로 쌓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유항은 등통의 집에서 자주 주연을 즐길 만큼 그를 총애했다.
즈음에 승상 신도가가 입조했다. 그랬는데 등통이 자신의 직위와 처지를 망각한 채 황제의 등 뒤로 바짝 붙어서 있었다. 물론 승상에 대한 예의도 차리지 않았다. 신도가는 분했다. 일단 황제에게 주청드릴 일을 끝내고나서 말했다.
"폐하, 신하를 총애하시어 그를 부귀하게 만드시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가 총애를 믿고 무례하게 조정의 기강까지 흐트러뜨리는 행위까지는 용서해선 안 됩니다!"
유항은 눈치를 챘다.
"승상이 등통을 두고 하는 말인지를 알겠소. 그러나 그대가 참아주오. 짐이 그를 사랑하고 있지 않소. 그 대신 다시는 등통을 공식석상에 내보내지 않겠소."
신도가는 일단 그 정도에서 조정으로부터 퇴청했다. 그러나 승상부로 돌아오자 신도가는 등통을 소환하는 공문을 곧 띄웠다.
ㅡ등통은 승상부로 즉시 출두하라.
등통은 덜컥 겁이 났다. 승상부로 가는 대신 궁으로 달려가 황제에게 하소연했다.
"폐하, 승상이 소신을 죽이려 합니다!"
황제 유항은 징징거리는 등통을 보자 짜증이 났다.
"무어 그 까짓걸 가지고 울고짜고 앉았느냐! 짐이 그대를 곧 구출할테니 걱정 말고 승상부로 가라니까!"
별 수 없었다. 등통은 여전히 징징거리며 불안에 떨면서 승상부로 갔다. 승상 신도가가 무서웠다. 그래서 등통은 승상부 문앞에 이르러 관을 벗고 맨발인 채로 기어들어가 머리를 조아려 무조건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음부터는 결코 궁중의 기강을 흐리게 하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신도가는 못들은 체하면서 일방적으로 꾸짖기 시작했다.
"이놈아, 한나라 조정은 고조황제의 조정이야! 네깐 놈이 뭔데 일개 말단 신하가 전상으로 올라가 감히 폐하를 희롱해. 이건 대단한 불경죄다!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참수에 해당한단 말이다. 형리들은 즉각 참수해라!"
등통은 대경실색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머리를 땅에 찧으며 빌었다.
"살려 주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만 한 번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딱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사죄행위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등통의 머리통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황제 유항은 따로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등통에게 충분히 고통을 주었으리라 생각되는 즈음에서야 사자에게 부월을 주어 신도가에게 보냈다.
ㅡ짐이 귀여워하는 신하이니 그를 용서하기 바라오.
목숨을 건진 등통은 다시 징징 울면서 입조해 유항에게 고자질했다.
"승상이 진짜로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제 그만 징징거리라니까!"
유항은 이번만큼은 등통의 호소를 못들은 척했다. 그런데 그런 등통을 애초에 유항이 만난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어느날 유항은 꿈을 꾸고 있었다. 하늘로 오르려고 애를 쓰는데 도무지 오를 수가 없었다. 그때 황두랑(누런 모자를 쓰고 황제의 배를 젓는 선장)하나가 뒤를 밀어주어 그제서야 승천할 수 있엇다. 그 때 뒤를 밀어준 사내를 돌아보니 황두랑 복장 뒤쪽에는 실로 꿰맨 자국이 있었고 허리 뒷부분은 터져 있었다. '그 참 괴이한 꿈이로구나!' 꿈을 꾼 이튿날 유항은 우연히 창지로 나갔다. 호숫가에는 누대가 있었는데 어좌선 근처에 황두랑 복장의 사내 하나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랍쇼! 바로 어젯밤 꿈에서 본 그자가 아니냐!"
황제 유항은 깜짝 놀랐다. 얼굴이 닮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황두랑 복장에다 등 뒤로 실에 꿰맨 것하며 허리 뒷부분이 터진 것까지 어젯밤 꿈에서 본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신기해서 유항은 그를 불렀다.
"그대 이름이 무엇인고?"
"예에, 성은 등(한서에는 효문제가 鄧은 登과 같다고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음)이고 이름은 통입니다."
"이쁜 얼굴에 배신을 모르는 착한 관상을 가졌구나. 오늘부터 궁으로 들어와 짐의 측근에 있어라." 등통은 성실 근면했다. 궁중 밖 사람들과는 교제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휴가를 주어도 외출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이 더욱 이뻐서 유항은 많은 돈을 상으로 등통에게 내렸다. 관위는 이미 상대부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주가 없어 좋은 인재를 추천할 줄도 모른 채 그저 한 몸 바쳐 공손하게 황제만 위해 살뿐이었다. 그런 등통에 대해 유항은 관상으로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시험삼아 관상 잘 보는 자를 불러 등통의 관상을 보게했다. 관상가는 등통을 살피더니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송구스러워하며 말했다.
"궁상이라 굶어죽을 상입니다."
유항은 깜짝 놀랐다.
"무어라고? 짐이 생각만 있다면 그를 얼마든지 부유하게 만들 수 있거늘 어째서 그가 가난으로 굶어죽는단 말인가!"
"알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가난으로 굶어죽을 관상입니다."
황제 유항은 관상가의 확신에 찬 말에 오기가 났다.
"좋다! 오늘 당장 등통에게 촉의 엄도(사천성)에 있는 동산을 주어 동전을 마음대로 주조할 수 있는 특허를 주겠다. 그래, 등통이 주조한 돈이 천하에 퍼질 텐데 그래도 그가 엄청난 부자가 안 된단 말인가! 그래도 그가 가난해서 굶어죽어?" 하루는 유항이 종기를 앓아 괴로워하고 있는데 등통이 들어왔다. 등통은 두말 않고 유항의 종기 고름을 입으로 빨았다.
"천하에서 짐을 가장 사랑하는 자가 바로 너인 것 같구나!"
그러자 등통은 예사롭게 대꾸했다.
"저보다는 황태자이시겠지요."
"그럴까?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시험해 보자."
태자가 불려들어왔다. 유항이 종기의 고름을 빨도록 명했으므로 태자는 오만 상을 찌푸리면서도 별 수 없이 빨았다. '오냐! 등통 너 이놈, 나중에 두고 보자!' 등통으로서는 태자가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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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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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31
삶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연속적으로 제공한다. 단지 그 첫걸음이 어려울 뿐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인생이 펼쳐지는 시간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의 가능성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기회가 찾아오면 두려움에 떨지 말고 용감하게 첫발을 내딛어라.
32
어리석은 사람은 재물을 탐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을 정신을 어지럽히는 번거로운 짐으로 생각한다. 재물이나 사교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대는 평생토록 진정한 자유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정신의 산물이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물질적인 욕심을 절제하고 정신적인 수양을 통해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자유를 느끼게 될 것이다.
33
우리의 인생에 동기와 목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각자 무엇인가를 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미세한 희망을 움켜쥐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삶에 목적과 동기가 없었다면 인생은 권태로 가득 할 것이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도 삶의 목적과 동기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벌이거나 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어떤 사람은 음모를 꾸미거나 사냥을 한다. 이런 행동은 권태와 정지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한 몸부림이다.
34
절망의 노예가 되기를 포기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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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것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우리의 삶을 세밀하게 분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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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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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4장 8.15해방 직후
일제 패망 후의 적산문화재들
1945년 8월 15일, 일본 군국주의는 드디어 패망하고 한국의 그들에게 36년간이나 강점당했던 국토를 되찾았다. 감격스런 조국의 광복, 민족의 해방, 그동안 이 땅에서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군림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일본인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히자 당장 기가 꺾였다. 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겁내며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고 전전긍긍했고, 온갖 추태로 과거를 사죄하려고 들었다. 그런가 하면 그 판국에도 귀한 물건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고 치밀하게 움직인자도 많았다. 그들의 귀한 물건이란 금불이 패물과 이 땅에서 약탈 혹은 수집해 가지고 있던 역사유물과 미술품들이었다.
9월 들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해 와서 일제 조선총독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서 미군정장관에 취임한 아놀드 소장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에게 1인당 고리짝 2개씩 허용한다고 1차 군정령을 발표했다. 그렇게 되면 작은 불상이라든지 고려자기 같은 것들은 꽤 숨겨 갖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처음의 군정령은 "육색 1개 이상 안된다"로 변경되었고, 미술품 수장자와 공동상이었던 일본인들의 속셈은 좌절되었다. 사태가 그렇게 되자 할 수 없이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여 현품과 함께 덕수궁미술관과 전의 총독부박물관(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갖다 바치고 떠나는 사람이 나타났는가 하면, 끝까지 물건을 포기하지 않은 부류들은 평소 친했던 한국인 친구에게 뒷날 적당한 시기까지 물건을 맡아 보관해 달라고 교섭하거나 싼 값으로라도 모두 처분하려 들었다.
한편 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한 김재원 박사는 미군의 협조로 과거에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미술품과 기타 모든 한국 유물들을 적산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하루는 서울 남산동에 있는, 전에 사이토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던 집 창고 속에 각종 미술품이 가득히 쌓여 있다는 정보가 박물관에 들어왔다. 김박사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정보 그대로였다. 술장사로 큰 부자였던 사이토의 수집품이었던가 본데 그는 그것들을 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지 창고 속에 모두 모아놓고는 그대로 급히 일본으로 떠난 것 같았다. 김박사는 일단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그 엄청난 분량의 물건들을 박물관으로 운반 운반하려던 트럭과 인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날 즉각 운반수단을 강구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며칠 후 다시 남산동을 찾아갔을 때엔 누군가가 깨끗이 실어내 가고 창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불법적인 반출자는 사이토의 컬렉션 내막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어떤 약삭빠른 한국인 골동상인이었거나 그와 손을 잡은 폭력배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 자가 누구였는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말았다. 해방 직후 무법의 혼란기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남산동의 적산문화재 접수엔 실패했지만 그 대신 김박사는 수집가와 연구들 사이에서 보통 '니와세불상' 으로 통하고 있던 유명한 백제불인 '금동관음보살입상'(높이 21.4cm)을 입수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것은 1907년에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 사람이 우연히 출토시킨 것을 일본인 헌병이 강제로 빼앗아 갖고 있다가 당시 이미 서울에 정착해 있던 니와세라는 일본인에게 팔아먹었던 한 쌍의 완전한 걸작 백제불상 중의 하나로 해방 당시의 소장자는 경성제국대학의 의학부 교수 시노자키였다. 미군정청으로 박물관장직을 위촉받았던 김재원 박사에게 '니와세불상'의 소장처를 알려준 사람은 총독부박물관 때의 책임자였던 아리미쓰 교수였다. 그는 별안간 박물관을 인수하게 된 한국인들에게 박물관 유물과 기타 내막을 상세히 파악하게 해주기 위해 약 1년간 귀국을 보류하고 있었다. 아리미쓰의 정보 제공으로 김재원 관장은 아직 일본으로 떠나지 않고 있는 시노자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이 다 아는 그 백제불상은 일본에 갖고 가지 못할 테니 다른 생각 말고 박물관에 보내라" 고 넌지시 찔러보았다. 그랬던니 대답이 꽤 당당했다. "나도 많은 돈을 주고 산 물건이니 그 액수의 돈을 갖고 오라"는 배짱이었다. 그것도 "현찰을 갖고 오지 않으면 내놓을 수 없다" 고 끝까지 버틸 듯이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김관장은 미군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몇 시간도 안되어 지프를 타고 출동했던 미군 헌병이 그 백제불상을 들고 박물관에 들어섰다. 현재 보물 제195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금동관세음보살입상 보물195호]
해방 직후의 위급한 상황 하에서도 부산·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돈 많은 일본인 수장가, 가령 대구의 오구라나 이치다 같은 악명높은 수집가들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독점하고 있던 부지기수의 한국문화재들 가운데 알짜들은 모두 묶어 갖고 밀선을 이용하여 유유히 한국을 탈출했다. 이치다는 서울에서 김재원 박물관장이 미군 헌병의 협력으로 일본으로의 출발 직전에 극적으로 압수할 수 있었던 이른바 '니와세불상'과 함께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출토되었던 또 하나의 보물급 백제불상을 갖고 있었다. 1922년 니와세에게서 양도받은 것이었다. 서울에서 하나를 붙잡은 김관장은 마땅히 대구 것도 속히 손을 써서 접수해닥 다시 짝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에도 미군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땐 이미 늦어 이치다는 벌써 문제의 백제불상은 물론, 모든 알짜 수장품을 몽땅 꾸려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친 뒤였다. 결국 그 백제불상은 영영 놓치고 말았다. 믿을 만한 후일담을 빌리면, 호눌룰루미술관이 일본에서 그것을 사 가려고 애썼으나 끝내 못 사고, 이치다도 그 뒤 노령으로 죽었다고 한다. 세상이 다 알던 악질적인 일본인 수장가는 끝까지 악질적이었다. 그들은 이제 때에도 말기에도 총독부의 승인 없이 이 땅의 중요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할 수 없었건만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면서 쫓겨가는 마당에서도 한가닥 속죄삼의 표시는커녕 그들의 수장품을 거의 모조리 일본으로 불법반출했다. 그것은 최대의 마지막 악질행위였다. 공주의 송산리 백제고분을 깨끗이 도굴해 먹은 가루베의 경우도 앞의 '백제유적 약탈로 악명높은 가루베' 항목에서 이미 언굽했지만, 도쿄의 미극동사령부에까지 협조를 의뢰하여 미군 헌병으로 하여금 일본의 어느 시골로 돌아가 있는 그를 찾아가, 한국에서의 수장품들을 어찌 했느냐고 추궁케 했었으나 "현지엔 모두 두고 왔다" 는 거짓말로 불법반출을 부인하더라는 통보가 서울의 미군정청을 통해 박물관에 전달됐을 뿐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 이른바 조선총독부 시정기념관 주임으로 있던 가토 간가쿠의 경우가 있다. 가토는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인류학과 고고학 연구를 빙자하여 소련을 드나듯 전신 스파이로서 1905년엔 경북 팔공산의 동화사에 숨어 있으면서 그곳에 정착하여 총독부 관리로 오래 있다가 시정기념관 주임이라는 중요한 직책에까지 올랐던 것인데, 그땐 나이도 많았던 탕이었겠지만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보자 그렇게도 하루아침에 표변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 가토가 경복궁의 박물관으로 김재원 관장을 찾아와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하면서 애원했다.
"살려주십시오. 박물곤 어디에라도 써주십시오. 일본인 망하고 조선이 독립한 것은 정말 잘된 것입니다. 저는 조선에 그대로 살겠습니다. 저의 아내는 조선 여성입니다. 일본의 침략정치 때엔 조선인들에게 일본이름으로 창씨를 강요했습니다만 이번엔 제가 조선 이름으로 창씨 하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저를 이관각으로 불러주십시오."
참으로 흉물스런 표변이었다. 그의 부인은 사실 한국 여성이었고 그녀의 성이 이씨였다. 그리고 그는 과연 부인의 이씨 성을 따른 이관각이란 한국인 이름으로 내내 서울에 숨어 있었고, 나중엔 세검동 밖으로 나가 살다가 한국전쟁 직전에 거기서 죽었다. 그동안 그는 한국에서의 연명의 수단으로 진귀한 '은제탑' 을 유력한 미군 장교에게 선물했더라는 얘기도 있었고, 또 숱한 미술품과 기타 골동품들을 내다 팔면서 생활을 유지했는데, 그 물건들은 가토가 한국에 계속 눌러 산다는 바람에 급히 귀국하던 일본인 친구들이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을 부탁한다고 맡겨두고 간 것들이었다. 현재 이화여대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07호의 조선백자 '철사포도문항아리' 의 8·15 전의 수장자는 1916년 이후 총독부 철도국에 근무하다가 뒤에 조선척도 주식회사 전무가 되었던 시미즈라는 일본인이었다. 앞의 항아리 외에도 그는 상당수의 도자기를 수집해 갖고 있었다. 드디어 일제의 패망으로 한반도에서 쫓겨가게 되자, 그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그 '철사포도문항아리' 만은 숨겨 갖고 가려고 하였다. 높이 53.3cm의 당당한 크기인데다 철사의 포도덩굴이 멋지게 그려진 최대의 걸작어었기 때문에 만일 무사히만 갖고 갈 수 있었다면 말할 것도 없이 거액의 신용수표나 다름없었다. 미군정청의 처음 군정령이 한 사람 앞에 고리짝 두 개까지 혀가한다고 했을 때 시미즈는, '그렇다면 갖고 갈 수 있다' 고 생각하고 치밀한 은닉수단을 강구했다. 그는 한지를 한 아름 사오게 해서는 항아리의 안팎을 겹겹으로 싸 발라 깨지지 않게 한 후 누가 봐도 귀중한 조선백자 항아리라고는 도저히 깨닫지 못할 만큼 위장시켰다. 그러나 처음 군정령이 다시 바뀌어 육색 한 개로 대폭 통제되자 그의 치밀한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한국인 친구를 찾아가서 특히 그 백자항아리를 적당한 시기까지 잘 좀 보호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의 모든 수장품을 맡겼다.
[국보 제107호 - 백자철화 포도문 항아리]
시즈미가 일본으로 떠난 지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일제 때부터 골동품 중개인이었던 조아무개란 사람이 큰 물건 하나를 잡았는데, 바로 시미즈가 한국인 친구에게 보관을 부탁하고 간 '철사포도문항아리' 였다. 그것을 골동가로 들고 나와 판 청년은 다름아닌 보관자의 아들이었다. 항아리가 골동가에 나왔을 때 조아무개는 당장 큰 물건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급히 돈을 마련하여 그것을 붙잡아놓고는 같은 골동가의 중개인으로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던 유모·한모를 통해 고미술품 수집가이며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에게 가지고 갔다. 물론 상당한 액수를 불렀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불의의 병고로 죽었다(수집가 선우인순의 증언).결국 장택상 컬렉션에 들어간 국보급의 '백자철사포도문항아리' 는 1950년대 말까지 소장자의 시흥 별장에 애장되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물건을 보고 몹시 반했던 김활란 박사(당시 이화여대 총장)가 그때 돈 1,550만 환으로 인수하여 이화여대박물관에 넣었다. 국보 지정이 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지금 이화여대박물관은 앞의 국보 백자항아리 말고도 보물 제237호로 지정돼 있는 높이 35cm의 청자항아리를 갖고 있는데, 고려 초기인 '순화 4년'(993년)에 만들어졌다는 관명의 굽 밑에 새겨져 있어 과거의 조선총독부 때 이미 보물로 지정됐던 물건이다. 해방 전까지의 소장자는 역시 일본인이었다. 잠사회사의 중역이었던 이도라는 사람으로 그는 꽤 안목이 있는 수집가였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도는 지정보물을 포함한 그 진귀한 수장품들을 빨리 돈과 바꾸어야겠다고 정세를 판단하자 조선인 광산왕으로 미술품 수집가였던 최창학을 찾아가서 모두 인수하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최창학은 자기 나름의 기호가 강했다. 그는 아무리 보물로 지정된 물건이라도 색깔과 기형이 별로 아름답지 못한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는 비싼 값에 비해 감상할 가치가 너무 없다고 거절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지정보물인 고려청자 대접과 그밖의 아름다운 감상용 도자기들을 일괄해서 사들였다.
해방과 함께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가 어떤 경로로 이도의 집에서 흘러나왔는지, 그리고 한국전쟁을 어디에서 무사히 견디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세인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유전하던 그 항아리가 서울 화신백화점 뒤의 한 골동가게에 방긋이 나타난 것은 1955년께의 일이었따. 그러나 가게 주인은 그 물건의 과거의 내력이나 진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 가게에 들었다가 '국내에서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흥분하며 부르는 값을 적당히 지불하고 재빨리 입수한 구안자는 당시 이화여대박물관 창설을 맡고 있던 장규서였다. 그것은 눈의 승부였다. 몇 해 후, 장씨는 그가 개인돈으로 샀던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를 이화여대박물관으로 들여보냈다. 8·15전까지 군산에서 큰 지주로 군림하면서 가나한 농민들을 수탈하여 부와 취미를 마음껏 즐기던 미야자키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지금의 서울 시청 근처에 위치한던, 조선인 경영으로는 최대의 골동상이었던 '문명상회' 주인 이아무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당수의 일품 고려자기와 불상 등을 수집하고 있었다. 증언자들의 말을 빌리면 문명상회가 입수했던 물건 가운데 값나가는 알짜들은 대부분 군산으로 보내져 미야자키의 컬렉션 속에 들어갔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이아무개는 미야자키의 그동안의 수장품들을 몽땅 뒤잡아 서울로 올려 왔다. 그중에 희귀한 오리형 청자연적이 하나 포함돼 있었다. 현재 국보 제74호로 지정돼 있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자압형수적' 과 거의 모양이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약간 다른 특질을 갖는 걸작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소장자는 해주 동중학교의 다나카라는 일본이니 서무주임이었다. 그것을 1934년에 당시 해주 황해도청에 근무하고 있던 조선인 수집가 선우인순이 처음으로 보고 그때 돈으로 1,600원이란 거액으로 인수했었는데 출토지는 연평도란 얘기였다. 말할 것도 없이 도굴품이었다. 그후 오랫동안 이 명품 '청자오리형연적' 은 선우씨가 애장하다가 사정으로 서울의 문명상회에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엔 이 또한 문명상회의 주인 이아무개의 손으로 군산의 미야자키에게 넘겨졌었다. 해방과 함께 다행히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 이 '청자오리형연적' 은 뒤에 손아무개에게 들어갔고, 지금은 또 다른 수장가에게 넘어가 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돼 있지 않다. 뒤의 수장가는 또 과거에 서울 충무로에서 '오사카야' 라는 책방을 열고 있던 이토라는 일본인의 수장품이었던 뚜껑이 붙은 흑백상감무늬의 대형 걸작 고려자기 항아리도 여러 다리를 거쳐 입수해 갖고 있다고 고미술상가에선 말하고 있으나 역시 확인돼 있지 않다.
[국보 제326호 -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일본인 수집가들이 급히 처분하려고 허겁지겁 내놓은 미술품들을 계획적으로 긁어 모은 사람은 많았다. 장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마포에 있던 그의 집 창고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 한 증언자는 트럭으로 수십 대 분량의 쌓여 있었는데, 내용도 온갖 것이 다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회를 민첩하게 포착하고, 모든 방법으로 적산문화재들을 독립적으로 긁어 모았던 장아무개는 미군정 말기까지 서울의 골동사회에서 가장 활발한 실력자로 군림했다. 그러다가 수완 좋게도 미군 군용기에 상당량의 값진 물건들을 싣고 일본으로 출국했는데, 증언자들은 그가 밀선도 이용하여 다른 일본인들의 수장품과 기타 문화재들까지 불법 유출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미군을 매수했던 것 같고, 일설엔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에게 유명한 일본도 '마사무네' 를 바치는 등 대단한 술수를 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문화재 밀수와 불법 출국 사실은 곧 당국이 알게 되었고, 대한민국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당장 그를 잡아오라고 지명 체포령까지 내렸었다는 얘기가 있다. 조국의 해방이나 독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골동상인이었다. 그는 방금 이 땅에서 쫓겨간 과거의 침략자인 일본으로 자진해서 빠져나간 후 불법반출해 간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처분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1970년 무렵에 죽었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던 테일러 중령과 과거 일본인 수장가의 얘기도 전해진다. 서울 남산 밑에 상당수의 물건들을 그대로 남겨놓고 급히 떠나버린 일본인이 있었다. 그 집에 테일러 중령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전의 일본인 집주인이 수집해놓은 도자기와 기타 미술품을 발견하자 견물생심의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그것들을 몽땅 실어 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불법반출품들을 미굴에서 금세 문제가 되어 출처를 추궁받은 후 외국재산의 불법취득 및 반입죄로서 처벌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그때 서울의 미군정청에도 조회가 왔었다고 한다(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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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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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7. 국무총리 장면, 숨어버리다
0시 정각, 해병여단의 선두부대가 행동을 개시한 시각. 여기는 휴전선 근방의 포천 제6군단사령부 포병단. 북한 괴뢰군의 도발을 막고 있는 제6군단의 사명은 막중했다. 군단장은 육군 소장 김웅수(金雄洙). 제6군단 휘하 부대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자들은 참으로 묘하게도 보병장교들이 아니라 포병장교들이었다. 단장인 육군 대령 문재준을 위시해서 제636대대장인 육군 중령 신윤창, 제933대대장 육군 중령 제99대대장 육군 중령 김인엽, 제6중포 대대장 육군 중령 정오경, 포병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홍종철 등이 바로 박정희에게 아니, 김종필에게 포섭당한 쿠데타 멤버들이었다. 제6군단 포병단에 주어진 임무는 새벽 3시 40분에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일이었다. 정각 0시, 자정이 되자 포병단장 문재준은 명령을 내렸다.
"출발!"
군단장 김웅수가 부재중인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 그는 군단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금 제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原州)에 체류중이었다. 포병단장 문재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1개 대대 300명씩 편성된 5개 대대 1,500명의 올라탔다. 이 80대의 트럭 꼬리에는 각기 육중한 대포들이 달려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한 괴뢰군과 대치하고 있는 제6군단의 임무는 막중했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제6군단 포병단이 쥐도새도 모르게 전선(戰線)을 이탈한 것이다. 만일 이 사실을 김일성이 알기라도 했다면 또 어떤 광기를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전전 북방에 배치돼 있는 북한 괴뢰군은 김일성의 명령 한마디만 떨어지면 단 1초의 여유도 두지 않고 남침을 개시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그것을 쿠데타 멤버들이 모르고 있을리가 없었다. 알고 있어도 너무나 잘 알고 쿠데타를 위해서 후방으로 빼돌린 것이다. 참으로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서울을 향해서 경원가도를 달려 남하하고 있던 제6군단 포병단은 헌병 초소에서 정지당했다.
"어느 부대입니까?"
초소 헌병이 물었다.
"제6군단이다. 야간작전 훈련중이다."
지프차에 올라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단장 문재준이 헌병의 질문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초소 헌병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부에서 제6군단이 야간작전 훈련을 한다는 통보가 없었습니다."
"이놈아, 그럼 상부에 물어보면 될 일이 아냐? 어서 비켜."
초소 헌병은 움찔했다. 문재준이 고급 장교의 위엄으로 일갈하거나 말거나 초소 헌병으로서는 제6군단 휘하부대의 야간작전 훈련 통보가 없는 이상에는 부대의 남하를 저지해야 옳았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초소 헌병은 주어진 임무를 포기했다. 문재준의 위세도 위세려니와 1개 분대의 병력으론 포병부대 1개 연대에 해당되는 병력을 저지하기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임무에 투철한 헌병이어서 기를 쓰고 저지하려 들었다면 문재준이나 그 밖의 쿠데타 멤버들은 초소 헌병을 가차없이 쏴 버렸을지도 모르는 쿠데타를 위해서 궐기한 그들이 한두 명의 생명 따위는 안중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증언부언 하나마나한 일이다.
"출발!"
문재준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얼이 빠진 듯한 초소 헌병은 그저 멍한 표정이 되어 포병단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초소 헌병들은 포병단의 차량행렬이 꼬리를 감춘 뒤에도 상부에 보고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여전히 멍청해져 있을 뿐이었다. 제6군단 포병단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캄캄한 채 사령부를 떠났었다. 설마하니 제6군단 포병단이 쿠데타 있었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제6군단 포병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령이나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캄캄하기는 해병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서울 상황에 대해서는 캄캄한 채 부대를 출동시켰던 것이다. 하기야 해병대는 육군 참모총장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별도의 부대였다. 그러므로 장도영이 해병여단이 쿠데타의 행동부대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金聖恩)에게 통보를 하고 협조 요청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할 방법은 없었다. 쿠데타 행동부대로 유일하게 제동이 걸려 있는 것은 오직 육군 공수단뿐이었다. 준장 장호진(張好珍)이 단장실이 턱 버티고 앉아서 부대출동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어차피 목숨을 걸고 쿠데타에 참가하기로 한 이상에는 그까짓 장호진 하나쯤 단한방에 거꾸러뜨리고 출동하면 그만이었다. 거칠고 용감하기로 말한다면 공수단만한 용사들이 또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백 개의 입을 가지고 칭찬해도 모자랄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 한국 육군 공수단 용사들이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육군 공수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명하복을 절대적인 신조로 삼고 있는 공수단 용사들은 상관을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이 노릇을 어쩌면 좋지?) 공수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출동 예정시간인 시보다 벌써 30분 이상이나 지나 있었다. 쿠데타 제1선봉부대로 지목되어 있는 공수단이 출동을 하지 못할 경우 쿠데타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박치옥이 그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에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이 급히 단장실로 뛰어들어 왔다. 그는 단장실로 뛰어들어 오자 박치옥의 귀에 대고 나직이 보고했다.
"단장님, 지금 중대장, 소대장 등 위관급 장교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야단입니다."
박치옥은 힐끗 장호진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부대 무기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보니 중대장 육군 대위 차지철(車智徹)이 도끼로 무기고의 자물쇠를 부수고 있는 중이었다. (됐다. 위관장교들이 저렇듯 혈기에 차 있다면.) 박치옥은 이제는 더 주저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놈의 자물쇠가 꽤나 단단했다. 황소 같은 몸집을 한 차지철이 아무리 힘을 다해 내리쳐도 연방 불꽃만 튀길 뿐 좀처럼 부서지지를 않았다. 해병여단 사령부 안에 있는 예배당에서 군종참모인 김광덕의 뜨거운 기도를 듣고 몰았다. 주력부대를 태운 트럭 종대도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어둠이 깔린 김포 통진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부대 이동차량대를 목격한 사람들은 참으로 장엄하다고 느꼈으리라. 사실 한밤중의 부대 이동차량대는 장엄한 느낌보다는 머리칼이 쭈뼛하고 곤두설 정도의 공포감을 자아내게 해준다. 김윤근은 차를 세우고 한동안이나 차량대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믿음직스럽다는 느낌과 함께 영문도 모르고 출동하고 있는 병사들한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몇몇 지휘관을 제외한 해병용사들은 그들이 왜 한밤중에 그저 야간 연습을 위해서 출동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차량대를 지켜보고 있던 김윤근은 차량대가 행진해 오는 반대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그가 찾아간 곳은 탱크 중대였다. 정문 보초가 차를 세웠다. 용건을 물으려 다가서다가 범퍼 위의 별판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놀라서 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경례를 받고나자 김윤근은 중대장을 만나려고 하니 깨우라고 지시했다. 중대장 막사에 들어서자, 해병 대위 김현호(金鉉浩)가 옷을 입고 있다가 김윤근을 맞아 주었다. 그는 김현호에게 쿠데타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자 김현호는 주저치않고 말했다.
"여단장님이 나선 이상에는 저도 나서겠습니다."
역시 동지애로 뭉쳐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었다.
"오전 4시에 출동할 수 있겠소?"
김윤근이 물었다.
"네. 명령만 내리시면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습니다."
김현호의 대답은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있는 해병여단 탱크 중대였다. 그들은 24시간 언제나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좋소! 그러면 오전 4시에 여단을 출발, 서울로 진군해 오시오."
김윤근은 이 한마디 명령을 남기고 그때 마침 여단 지휘반이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김윤근은 그 여단 지휘반에 끼여 여단본부를 나섰다. 그때가 1시. 그러니까 날짜는 5월 15일에서 16일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청진동 대폿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이고 있던 박정희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제6관구 사령부로 달려온 바로 그 시간이었던 것이다.
새벽 1시 30분. 장도영이 진치고 있는 506방첩대 대장부속실에는 참모총장의 부관과 보좌관들이 공연히 서성거리고 있었고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이철희와 이희영도 앉아 있었다. 장도영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소형 권총이 놓여 있었다. 모젤 4호권총이었다. 이때 제5범죄수사대 대장 육군 중령 방자명이 대장실로 들어왔다. 그를 본 장도영은 반색을 했다.
"벌써 갔다 왔나?"
"네. 이상국 사단장하고 헌병차감하고 같이 갔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방자명의 보고를 듣고 나자, 장도영은 문득 생각난 듯이 군용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제30사단의 사단장을 연결해!"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과는 곧
"총장이다. 신임할 수 있는 병력으로 4개 소대를 편성해서 대기시켜라. 내 명령 외에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말라."
장도영은 명령했다. 이게 도시 무슨 소리인가? <신임>할 수 있는 병력이라니? 그럼, 제30사단에는 사단장인 이상국이 <신임할 수 없는 병력>도 있단 말인가? 더구나 1개 사단 병력 중에서 신임할 수 있는 4개 소대 병력을 빼내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4개 소대 병력이라면 1개 중대 병력밖에 되지 않는다. 1개 중대 병력으로 쿠데타군을 저지하겠다는 말인가? 아아, 장도영은 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김포에 있는 해병대가 출동했다는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아마도 이 같으나 그 경위는 확실치가 않다. 장도영은 다시 군용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헌병감 조흥만하고 즉시 연결되었다.
"6관구 사령부에 집결해 있는 반란 음모자들의 처리가 어찌 됐나?"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에게 수사요원 70명을 붙여서 보냈습니다만, 지금껏 아무런 보고도 없습니다."
조흥만의 대꾸였다.
"지금 몇 신데 아직 보고가 없단 말야!"
장도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헌병감이 직접 헌병중대를 이끌고 6관구 사령부로 출동해! 그리고 해병대가 출동한 모양이니까 헌병으로 하여금 저지선을 구축해 놓도록 해."
이렇게 미온적인 저지책을 명령하고 있었는지 또다시 의문을 품게 된다. 알고 있는 사람은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헌병은 전투요원이 아니다. 전쟁이 터졌을 경우 헌병은 독전대로서 투입되는 경우가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전투부대와 똑같이 전투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장도영은 어째서 전투부대도 아닌 헌병대로 하여금 한강 다리에 저지선을 구축할 생각을 했던가 말이다. 서울 근교에도 신속히 동원할 전투부대가 없지는 않았다. 제30사단이 있었고 제33사단이 있었다. 물론 쿠데타 그룹이 행동군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지만 이미 사전에 그 계획이 탄로나 사단장들이 부대를 장악하고 있지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이 두 사단을 동원해서 한강 다리에 저지선을 구축해야 옳았다. 그것을 장도영이 그렇게 하지를 않고 헌병대를 출동시켜 저지선을 구축하도록 명령을 내렸던 그 속셈은 무엇이었던가 말이다. 그는 진정으로 쿠데타를 저지해야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장도영은 조흥만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이번에는 일반전화를 이용, 반도호텔에 묵고 있는 장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도영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장면의 경호대장인 경감(警監) 조인호(趙仁鎬)였다.
"웬일이십니까, 총장께서 이 밤중에?"
"해병대가 장난질치는 것을 막도록 조처해 놨으니 안심하라고 총리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여간에 그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조인호도 쿠데타설이 한창 나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는 예감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장도영이 수화기를 놓으려는 눈치를 채자 다급히 소리쳤다.
"기다리십시오, 총장. 그건 중대한 문제인 만큼 총리께 직접 보고토록 하십시오."
조인호는 급히 침실로 뛰어들어가 잠들어 있는 총리를 깨웠다.
"전화입니다."
"이 밤중에?"
눈을 뜬 장면은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맡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요. 무슨 일이오, 장 장군!"
"각하, 30사단에서 반란하려는 것을 막아 놨습니다. 그리고 해병대가 술에 취해 가지고 장난을 하려고 해서 헌병대를 보내 막도록 조치했습니다."
장도영의 보고는 조인호한테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었지만, 장면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며칠 전에 말하던 그것 아닌가?"
장면은 다그치듯 물었다.
"아닙니다. 별것 아닙니다. 총리 각하께서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하겠습니다."
"이보게, 그게 무슨 소리야? 별일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내게 직접 와서 진상을 보고해!"
장면이 거칠게 소리쳤다.
"예, 알겠습니다. 조치를 취하고 바로 그리 가 뵙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장도영이 먼저 전화를 툭 끊었다. 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윗사람이 먼저 전화를 끊기도 전에 앞질러 전화를 끊는 이런 불손한 행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장면은 감정이 언짢았으나 참았다. (30사단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고 해병대가 장난질을 하려 했다? 그렇다면 이게 쿠데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장면은 장도영의 애매모호하기만 한 전화를 끊어버렸으니 구체적으로 꼬치꼬치 따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내려와 평복으로 갈아 입었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난 박정희가 한참 김포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불빛의 행렬이 보였다. 출동부대의 차량행렬 불빛이라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공수단이 드디어 출동했구나!) 박정희의 가슴에 감격과 희열이 일었다. 그는 염창교 입구에서 차를 세우도록명했다. 이윽고 불빛의 대열이 박정희의 눈앞으로 두 개를 단 장군이 손을 든 것을 보고 운전병이 차를 세웠다. 차량의 대열이 서자 이상하게 생각한 김윤근이 차를 앞으로 몰아 달려왔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환하게 드러난 박정희의 모습을 발견하자, 김윤근이 재빨리 차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장군!"
두 사람은 얼싸안았다.
"고맙소. 수고가 많소, 김 장군!"
박정희는 얼싸안았던 두 팔을 풀고 이번에는 김윤근의 두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공수단은 출동했습니까?"
김윤근이 물었다.
"아니오, 30사단에서 기밀이 누설되어 해병대가 선두부대가 됐소."
그 말을 듣자 김윤근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30사단에서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공수단이 발이 묶였다? 그렇다면 쿠데타는 실패란 말인가?) 순간,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 장군, 어서 진격해 주시오. 김장군만 믿겠소. 나는 이제부터 공수단으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출동을 독려할 생각이오."
박정희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들리기조차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김윤근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다. 쿠데타 지휘본부인 제6관구 사령부. 장도영의 명령을 받은 헌병감 조흥만이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과 함께 쿠데타 지휘본부인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친 것이 바로 이 시간이었다. 제6관구 사령관인 서종철은 그때까지 줄곧 헌병감실에서 죽치고 있다가 조흥만이 헌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제6관구 사령부로 출동한다고 하자 따라 나섰던 것이다. 헌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든든해서였을까? 두 사람은 호기있게 사령관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사령관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살기가 돌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다시 복도로 나갔다.
"이보오, 조 장군. 이거 아무래도......"
"그러게 말입니다."
조흥만도 처음의 호기와는 달리 어정쩡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재춘 참모장이 지휘를 하고 있는 것 같고, 거기에 이광선 차감도 동조하고 있는 것 같은 눈치인데, 그렇게 보이지 않았소?"
아마도 서종철은 방안 분위기를 통해서 그런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사령관실로 들어왔다.
"참모장, 이거 어찌된 거요?"
서종철이 김재춘에게 물었다.
"지금 사령부는 혁명군에 의해서 완전히 점거되고 있습니다."
김재춘은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나서 덧붙였다.
"각하께서도 지지하고 나서는 것이 좋을 김재춘의 말을 듣고 나자, 서종철이 허탈한 표정이 되며 중얼거렸다.
"이젠 막을 길이 없게 됐구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그대로 총장한테 보고할 수밖에 없겠어."
새벽 1시 45분. 멍청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던 장도영이 방첩부대장 이철희를 향해 물었다.
"저들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 같은가? 어떤 방법으로 막아야 하지?"
이철희는 큰 두 눈을 껌벅이고 있을 뿐 이희영에게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이희영도 대꾸가 없었다. 그에게 뾰족한 묘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방자명이 답답해 못 견디겠다는 듯 참견했다.
"각하, 빨리 결단을 내리십시오. 몇 개 부대가 움직이는 모양인데 마침 남산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야전증병단이 있으니 이들을 동원하면 웬만한 일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자명의 건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군용 전화벨이 울렸다. 해병대 1개 대대가 진격해 온다는 보고였다. 이 보고에 장도영은 그제야 이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옆에대기하고 있는 비서실장
"육본에 비상을 걸어라!"
그는 진작 육군본부에 비상을 걸어야 옳았으나, 이 시간에 이르러서야 비상을 걸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국방장관 현석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쿠데타가 일어났음을 알리고 다시 또 국방정무차관 우희창(禹熙昌)에게도 전화를 걸어 사태가 급박함을 알렸다. 이어서 그는 육군본부 헌병대에 전화를 걸어 헌병 대위 김석률을 찾았다. 그와는 곧 연결이 되었다.
"병력이 얼마나 있나?"
"백 명 가량 됩니다."
"그 중 50명을 한강에 배치, 한강 다리를 폐쇄하라. GMC를 가지고 가서 막아라."
김석률과 통화가 끝나자 장도영은 근처에
"귀관도 7중대와 같이 한강으로 가서 지휘하라."
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 그러면 중화기로 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방자명은 자기 의견을 구신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헌병은 전투부대가 아니었다. 4.19 일주년을 앞두고 위기설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육군본부 헌병대에도 수류탄, 최루탄, 기관총과 철조망 등이 지급되어 있었다. 방자명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출동 헌병대를 중화기로 무장시키겠다고 구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너무나 뜻밖이었다. 장도영의 명령이었다. 쿠데타군이 어떤 무기로 무장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칼빈 총만 가지고 가라니, 방자명은 어이가 없었다. 칼빈 총의 유효 사격거리가 고작 50미터였던가? 6.25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출정했던 필자는 칼빈 총의 유효 사격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6.25 한국전쟁 때인 1950년 8월 19일 대구 제일모직 공장 마당에서 달랑 칼빈 총 한 자루만으로 무장을 하고, 바로 이날 팔공산 전투에 투입됐던 필자는 전투에 있어서는 칼빈 총이 쓸모없는 무기라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 장도영은 방자명에게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하면서 아무 쓸모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은 니것만이 아니다. 장도영은 또 이렇게 명령했던 것이다.
"한강 다리를 GMC로 막되 차가 한 대 정도 통과할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두라."
장도영은 어째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명령들만을 내렸던 것일까? 행여 서울로 들어오는 민간차량이 통행에 불편을 겪을까 고려해서였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 장도영이 곁에 있다면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렸느냐고 묻고 싶다. 하여간에 명령을 수령한 방자명은 있는 힘을 다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덕분에 조선호텔 앞 506방첩대에서 삼각지의 육군본부로 달려오는 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헌병들이 왁자지껄하고 있었다. 방자명을 발견한 김석률이 앞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김석률이 답답한 듯 물었다. 방자명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도 않고 출동을 재촉했다.
"어서 한강 다리로 출동하세."
두 사람은 육군본부의 헌병대를 두 대의 GMC에 나누어 태우고 즉시 출동했다. 한강 다리에 이르자 헌병들을 내리게 한 다음 GMC를 한강 다리 한복판에 여덟팔자 형으로 벌려 놓았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이시간에 이르러서야 엉성하나마 쿠데타군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셈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김석률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 대위, 귀관은 여기서 끝까지 막아야 한다. 고전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만 한단 말이다. 알겠나?"
방자명은 다지듯이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육척 거구인 김석률은 호기있게 대꾸하고 그 명령을 복창했다.
새벽 2시 같은 시각. 염창교에서 김윤근과 헤어진 박정희는 출동한 해병대와는 반대쪽으로 차를 몰아 공수단 정문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때 바로 공수단 장병들은 차지철 등 실탄을 꺼내 완전무장을 하느라 법석을 떨고 있었다. 박정희의 출현에 놀란 박치옥이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무기고를 부순 차지철 등 위관급 장교들도 달려와서 박정희를 빙 둘러쌌다. 별을 두 개나 단 장군의 출현에 위관급 장교들은 무척 고무된 듯한 눈치였다.
"왜 이리 출동이 늦나?"
박정희는 역정부터 냈다. 공수단 단장 박치옥은 늦은 데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기엔 출동시간이 너무나 늦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역정을 귓등으로 흘려 버리고 차지철을 불렀다.
"차 대위, 귀관은 지금부터 박 장군의 경호를 책임져라!."
"즉시 승차하라!"
그는 명령한 다음 크게 호령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하지만 이 순간에 박치옥이 내뱉은 명령 한 마디가 한국의 현대사를 또 한 번 바꾸어 놓는 결과가 되리라고는 신아닌 인간들이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차 대위, 귀관은 지금부터 박 장군의 경호를 책임져라!> 박치옥이 차지철헤게 이 한마디 명령만 내리지 않았으면 박정희와 차지철의 유착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기이하기만 한 인간의 운명이여! 박치옥의 호령 한마디에 공수단 병사들은 앞을 다투다시피 하며 박정희가 끌고온 두 대의 트럭에 나누어 탔다. 박정희는 그러한 앞서 공수단을 떠났다. 박정희의 마음은 어느덧 해병대한테로 쏠려져 있었던 것이다. (귀신잡는 해병대가 아니냐! 지금쯤은 그들한테 주어진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겠지.) 새벽 2시, 같은 시각. 아니 정확하게는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국방장관인 한석호가 정무차관인 우희창을 거느리고 506방첩대 대장실로들어왔다. 이때 장도영은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부관이 총장 관사로 달려가 가져온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한동안이나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장도영이 옷을 갈아입고 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장 총장, 청와대엔 연락을 했나?"
"아직 못했습니다."
"아직 못했어?"
되묻는 현석호의 말투가 좀 거칠었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쿠데타 정보가 입수되었을 때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장도영이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그걸 생각하면 현석호는 장도영의 뺨이라도후려갈기면서 단단히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끓는 심정을 누르고 있는 것만도 장도영으로서는 고맙게 여겼어야 했다. 장도영이 일반 전화의 송수화기를 들고 청와대에 거는 눈치였다. 신호가 떨어졌는가?
"지금 군부에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헌병을 보내서 저지하도록 대책을 세워 놨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장도영이 황급히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대통령 각하께는 일단 그렇게만 말씀드려 주십시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탁 끊는 것이었다. 이때 한강으로 보냈던 방자명이 대장실로 들어와 경례를 붙였다.
"어찌 됐나?"
"네. 저지선을 구축해 놓고 병력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방자명은 간략하게 보고를 했다.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으나 국방장관이 서 있고 또 그가 지나치게 걱정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을 목구멍에서 삭여 버리고 말았다.
"매그루더 장군한테는 연락했나?"
현석호가 또 물었다.
"아직 못했습니다."
"도대체 장 총장은 그동안 뭘하고 있었다는 거야? 연락을 해야 할 사람한테는 하나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
현석호의 꾸중에 그제야 장도영은 다시 또 생각이 난 듯이 매그루더에게 연락하기 위해 전화기를 집어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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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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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브리타니아 원정
칼리굴라가 남기고 간 마지막 과제는 브리타니아 문제였다. 칼리굴라가 대군을 도버 해협에 소집해놓고는 배도 띄우지 않고 철수했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50년 전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브리타니아 문제에 대처할 필요도 없었지만, 1세기 중엽인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대처할 필요도 생겼다. 이것이 클라우디우스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결행한 진짜 이유였다. 로마는 현재의 영국을 브리타니아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브리튼이 된다. 브리튼이라는 지명은 라틴어의 브리타니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영국은 국토의 4분의 3이 로마 제국 경계선 밖에 있었던 독일과는 달리 로마에 정복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영국 학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면, 영국인은 로마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게르만족(독일인) 같은 야만족의 신세에서 벗어났다. 브리타니아와 로마가 처음 접촉한 것은 기원전 55년과 그 이듬해인 기원전 5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두 차례에 걸쳐 브리타니아를 원정했을 때였다. 클라우디우스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10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카이사르의 의도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갈리아 전역을 재패하고 있는 카이사르로서는 갈리아에서 도버 해협만 건너면 갈 수 있는 브리타니아가 로마에 반대하는 갈리아인들의 도피처가 되는 것을 저지할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또한 갈리아인의 한 갈래인 벨가이족(벨기에인) 중에는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정착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갈리아 북동부에 사는 갈리아인과 브리타니아에 정착한 갈리아계 브리타니아인이 공동투쟁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미리 저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카이사르는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족을 공격했다. 이것도 브리타니아를 공격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제패를 목적으로 하는 공격이 아니라, 적의 움직임을 미리 봉쇄하기 위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와는 달리 브리타니아의 경우에는 궁극적을 정복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게르마니아 땅은 동쪽으로 계속 퍼져 있지만, 브리타니아는 섬이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는 카이사르의 이 전략이 주효하여, 갈리아 전역(오늘날의 프랑스,벨기에,록셈부르크,네덜란드 남부,독일 서부,스위스)은 완전히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왔다. 이 상태를 아우구스투스가 그대로 물려받는다.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린 40여 년 동안 로마의 갈리아 지배는 점점 확고해졌고, 그동안 브리타니아인의 불온한 움직임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갈리아와 마주보는 켄트 지방의 주민들과 로마의 속주가 된 갈리아의 주민 사이에는 로마가 제패하기 전과 다름없이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브리타니아에 굳이 군대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티베리우스 시대가 된 뒤에도 로마와 브리타니아는 여전히 간접적으로만 접촉하는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시대에는 아직 표면화하지 않았지만, 수면 밑에서는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갈리아인이라고 부른 민족은 켈트족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에는 켈트(그리스어)와 갈리아(라틴어)를 구분하여, 로마에 정복당하기 전을 가리킬 때는 켈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정복당한 뒤를 가리킬 때는 갈리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모양이다. 또한 아일랜드인처럼 로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경우에는 켈트라고 부른다. 이 켈트족의 민족종교는 드루이드교였다. 드루이드교에는 전문 사제계급이 있는데, 이 사제들은 종교만이 아니라 사법과 교육도 지배하며, 갈리아 부족들의 지배층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신교였지만, 종교와 신자들의 관계는 일신교인 유대교와 비슷했다. 전문 사제계급을 두지 않고 사법과 교육 및 정치와 근사는 모두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여 처리하는 거라고 믿는 로마인이 켈트족 사제의 이런 방식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켈트족의 종교에는 인신공양의 관습이 있었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민족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인신공양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마인이 카르타고인을 혐오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카르타고에서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가 갈리아인의 민족종교인 드루이드교 자체를 탄압한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 주곧 사제계급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빼앗았을 뿐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기한테 굴복한 갈리아 부족장들에게 로마시민권을 주었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이 인정되어 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이 된 이상, 민족이나 부족에 관계없이 로마법에 따를 의무가 있었다. 이로써 적어도 갈리아인의 상층부는 법적으로 로마인과 동등해졌다. 카이사르는 갈리아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뒤에도 갈리아 부족장들의 구성원들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아닌데도 실질적으로 로마법에 따르게 되었다. 현실주의자인 로마인답게 참으로 교묘한 정략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민족 지배층에 대한 영향력과 부족 구성원에 대한 사법권이 드루이드교 사제들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이어서 드루이드교 사제들은 교육권마저 빼앗기게 된다. 아우구스투스가 갈리아 중부의 비블라크테(오늘날의 오툉 부근)에 고등교육기관을 성치했기 때문이다. 갈리아 전역에서 부족장 예비군인 청소년들이 여기에 모여 그리스-로마식 교양과목을 배우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로마나 아테네에 유학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었다. 사제들에게 남은 교육권은 초등교육뿐이었다. 하지만 부족장들은 로마 시민권을 얻는 데 열심이었고, 보조병으로 로마군에 지원하는 사람부터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갈리아인이 라틴어를 말하는 세상에서는 사제들도 켈트족의 전통교육보다 좀더 현실에 도움이 되는 읽기와 쓰기 및 산술을 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읽고 쓰는 것은 라틴어였고, 산술에 쓰이는 숫자도 라틴 숫자다. 그래도 사제계급이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종교에만 한정할 작정이었다면 하층 갈리아인들 사이에서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제들이 느낀 위기의식은 자신들을 거기까지 몰아넣은 로마인에 대한 반항으로 타올랐다. 티베리우스의 치세가 시작도리 무렵에 일어난 반란이 갈리아 땅에서는 드루이드교 사제들의 마지막 저항이 되었다. 반란은 당장 진압되었지만, 티베리우스 황제는 드루이드교 사제들이 오툉의 학생들을 반란에 끌어들인 것을 중시했다.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는 요인이라는 이유로 드루이드교 사제들은 갈리아 전역에서 추방되었다. 이들이 도망쳐간 곳이 바로 로마인의 지배가 미치지 않은 브리타니아였다.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갈리아와 마주보고 있는 브리타니아가 켈트족의 민족종교인 드루이드교의 메카가 되는 데에는 2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것을 방치해두면 로마의 갈리아 지배에 중대한 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로부터 한 세기 뒤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브리타니아 원정이 제개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에 즉위했을 때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가 자기한테는 곧 '법'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정치를 충실히 본뜨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도 로마인이다 유대인은 법에 인간을 맞추지만, 로마인들은 인간에게 법을 맞춘다. '법'이란 필요에 따라 손을 보는 대상이다. 게르마니아 땅을 엘베 강까지 정복하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평생의 꿈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그에게 주도권이 돌아오자 로마의 방위선을 엘베 강까지 확대하는 계획을 백지화해버렸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는 더 이상으 영토 확장을 금지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을 어기고 브리타니아 정복을 결행한다. 그래도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에 따르지 않았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 제국은 무엇보다도 방위를 우선한다는 아우구스투스의 기본노선에서는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 도버 해협 연안에 대군을 지결했을 당시 칼리굴라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이것을 칼리굴라의 변덕으로 간단히 처리하고 있지만, 칼리굴라는 미치광이도 아니고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칼리굴라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 자신의 낭비로 말미암은 국가 재정의 파탄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에 즉위한 지 2년 뒤에 브리타니아 원정을 시작했다. 그것은 클라우디우스의 국가 재정 재건책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게다가 유리한 조건이 또 하나 있었다.
1년 전인 서기 42년, 브리타니아 부족들 중에서 가장 강대한 부족을 오랫동안 잘 다스리던 크노벨리누스가 세상을 떠났다. 이 황의 수도는 론디니움(오늘날의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카몰로두눔(오늘날의 콜체스터)이다. 크노벨리누스의 죽음은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해온 브리타니아를 쁘리부터 뒤흔들게 되었다. 동생과 아들들이 후계자 싸움에 말려들어 내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서로 군대를 동원한 이 싸움은 갈리아 북동부(벨가이) 해안지대까지 확대되었다. 싸움에 가담한 한 사람의 영토가 그 땅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동부라 해도 갈리아 땅인 이상, 로마 제국의 패권 밑에 있는 지역이다. 이 영주들은 로마의 피보호자(클리엔테스)였고, 로마는 그들의 보호자(파트로네스)였다. 피보호자는 보호자를 따를 의무를 갖고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도와줄 의무를 갖는 로마식 상호안전보장체제다. 이로써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공략할 대의명분이 생기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느 군무에 종사한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전쟁을 군사전문가에게 맡길 만한 양식은 갖고 있었다. 브리타니아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였다. 53세인 클라우디우스와 동년배였고, 브리타니아 원정을 명령받을 때까지는 판노니아 총독을 지내면서 도나우 강 방위선을 확립하는 어려운 일을 훌륭하게 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총사령관 플라우티우스에게 주어진 병력은 4개 군단 2만 4천 명에 갈리아 및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오와 에스파냐 출신 보조병을 합한 4만 명의 정예였다. 97년 전에 카이사르가 두 번째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의 병력은 5개 군단 3만 명에 보조병을 합하여 3만 2천 명이었다. 병력은 비슷하지만 목적이 달랐다. 97년 전에는 적을 공격하여 움직임을 미리 분쇄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서기 43년의 원정은 정복이 목적이다. 역시 정복을 목적으로 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에게 주어진 병력은 4개 군단뿐이었지만, 카이사르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2개 군단을 새로 편성하도록 명령했고 그후 4개 군단을 더 편성하여,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에 동원된 것은 10개 군단 6만 명의 병력이었다. 물론 간리아는 브리타니아보다 세 배나 넓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정복을 추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최고사령관이다. '전쟁터의 사람'인 카이사르는 병력을 집중 투입하여 단기간에 일을 끝내는 전략을 채택했지만, '서재의 사람'인 클라우디우스는 무리하지 않고 투입할 수 있는 병력만 동원하여 천천히 일을 추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결과 갈리아 전쟁은 전후 처리까지 포함하여 8년 만에 끝낼 수 있었지만, 브리타니아 전쟁은 20년이나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의 방식을 군사에 대한 무지로 돌릴 수만은 없다. 카이사르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로마는 제국의 모든 방위선에 군대를 상주시켜야 했다. 이런 현실에서 '무라하지 안고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4개 군단뿐이었다. 사실 클라우디우스는 4개 군단의 정예를 브리타니아에 투입하기 위해 위험한 줄타기를 했다. 우선 총사령관에 임명된 플라우티우스의 전임자인 판노니아에서 1개군단으 브리타니아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도나우 강 방위선을 지키는 군단은 7개에서 6개로 줄어들었다. 또한 라인 강 방위선을 지키는 8개 군단 가운데 3개 군단을 브리타니아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과 맞서서 로마 제국을 지키려면 5개 군단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2개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 새로 편성된 2개 군단은 라인 강 연안으로 보내졌다. 브리타니아 원정군의 주력인 4개 군단을 전투에 익숙한 정예부대로만 편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고육책을 쓴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25개 군단에 2개 군단을 늘린 27개 군단만으로 방위선을 지키면서 브리타니아를 정복하여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편입시킨 뒤에도 3개 군단은 브리타니아에 상주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의 가장 중요한 방위선인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은 각각 1개 군단씩이 줄어든 병력으로도 충분히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방위체제 확립이 착실히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클라우디우스도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방위체제는 티베리우스의 방식을 충분히 답습했다.
플라우티우스가 이끄는 4만 명의 로마군은 무사히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 남동부에 상륙했다. 브리타니아인은 무장도 싸우는 방식도 카이사르 시대와 별 차이가 없었다. 총사령관 플라우티우스는 죽은 크노벨리누스의 두 아들이 지키는 카물로두눔을 우선 공략하기로 했다. 브리타니아에서 가장 막강한 부족을 먼저 쳐부수면, 브리타니아 전역을 제패하기도 훨씬 쉬워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본격적인 전투는 템스 강 남쪽으로 벌어져 로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로마군은 승리한 뒤에도 곧장 템스 강을 건너지는 않았다. 로마에서 올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에서 그를 이해해주는 소수의 유력 의원 가운데 하나인 비텔리우스에게 뒷일을 맡긴 뒤, 배를 타고 마르세유로 갔다. 갈리아에 상륙한 뒤에는 고향인 리옹에 들리기도 하면서 느긋한 여행을 계속한 끝에, 로마군이 기다리고 있는 템스 강변에 도착했다. 황제를 모시고 템스 강을 건널 때도, 거기서 카물로두눔까지 갈 때도, 적지를 통과한다기보다는 정복이 끝난 지역을 행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크노벨리누스의 두 아들 가운데 하나는 템스 강 근처의 전투에서 죽었고, 또 하나는 웨일스 지방으로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카물로두눔 입성도 순조롭게 끝났다. 클라우디우스는 이곳에서 브리타니아를 속주화하는 데 필요한 기본정책을 결정했다. 이 시점에서 로마가 정복한 것은 브리타니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본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황제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은 장수들의 임무였다. 또한 브리타니아를 속주화하는 기본정책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다. 만기 제대한 병사들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원주민 도시에는 '지방자치권'을 주고, 이 '핵'과 로마식 도로망으로 이루어지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속주 통치의 기본노선이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카물로두눔에 로마 시민의 퇴역병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것만 결정한 뒤, 뒷일은 장수들에게 맡기고 브리타니아를 떠났다. 수도를 떠나 있었던 6개월 동안, 그가 브리타니아에 머문 것은 16일뿐이었다.
수도 로마로 돌아온 클라우디우스에게 원로원은 개선식 거행을 허락한다고 통보했다. 정식 개선식이었기 때문에 개선장군인 클라우디우스는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몰아야 한다. 그 몸으로 과연 전차를 몰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그 일은 시종에게 맡기고, 클라우디우스는 군중의 환호에 손을 흔드는 정도로 끝냈을지도 모른다. 원로원은 또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외아들에게 브리타니아를 제패한 자라는 의미인 '브리타니쿠스'라는 이름을 주었다. 브리타니쿠스는 당시 세 살바기 어린애였다. 황제가 떠난 뒤 브리타니아에서는 플라우티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진격이 재개되었다. 유능한 지휘관 밑에은 유능한 부하가 모인다. 플라우티우스 휘하의 군단장들 중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베스파시아누스도 끼어 있었다. 로마군의 브리타니아 공략은 카물로두눔이 있는 에식스 지방에서 복쪽의 노퍽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 일대를 재패한 뒤에는 전선을 템스 강 남쪽으로 옮긴다. 오늘날의 캔터베리,런던,바스를 잇는 선의 남쪽 지방에 대한 파상 공격이 벌어졌다. 로마군의 두 번째 물결이 브리타니아를 덮친 것이다. 로마 시대에는 아콰이 솔리스라고 불린 오늘날의 바스에서 온천을 발견한 로마 병사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로마인은 온천을 좋아한다. 그리고 역사가 타키투스의 말은 아니지만,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에게 브리타니아는 "하늘도 땅도 습기가 많은 곳"으로 느껴진다. 지금도 이탈리아제 구두를 신고 영국에서 며칠만 지내면 구두가 망가져버린다. 그런 땅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로마인에게 온천은 정신까지 치유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브리타니아 전쟁이 시작된 지 4년이 지난 서기 47년, 아울루스 클라우티우스는 총사령관직을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로마로 돌아왔다. 클라우디우스와 원로원은 이 사실상의 승리자에게 약식 개선식을 허락했다. 개선장군이 말을 타고 행진하는 개선식이다. 프라우티우스가 떠난 뒤,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군은 웨일스 지방으로 전선을 옮긴다. 이 지방에 거의 달라붙어 있는 느낌을 주는 모나 섬(오늘날의 앨글시)이야말로 드루이드교 사제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로마 세력에 저항하여 도망친 곳이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한 반감으로 불타는 사제들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추방하여 아일랜드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 것은 다음 황제인 네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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