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9호 - 2024.02.08. 목요일(음력 : 12. 29.)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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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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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별로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일들을 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 모한다스 K.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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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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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담그셨어요?
가뭄에도 불구하고 올해 배추와 무의 작황이 나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장철을 앞둔 재배 농가의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배추 파동으로 김치가 금치가 되는 해가 있는가 하면 어느 해에는 수확도 하지 않은 밭을 갈아엎기도 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소비자도 농민도 올해는 모두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은 우리 민족의 중요한 연중행사이다. 그런데 ‘김치를 담그다’와 ‘김치를 담다’ 중 어느 것이 맞는지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다. 김치나 술, 젓갈, 장 등의 재료를 버무리거나 물을 부어서 익거나 삭도록 두는 것은 ‘담그다’이다. ‘담다’는 그릇 등에 뭔가를 넣는 것을 말하므로 ‘담그다’와 구별해서 써야 한다. ‘담그다’가 원형이기 때문에 ‘담아’ ‘담으니’ ‘담았다’가 아니라 ‘담가’ ‘담그니’ ‘담갔다’ 등으로 쓴다. 이렇게 기억하면 쉽다. “담근 김치를 독에 담았다”.
파나 무채, 젓갈 같은 것을 고춧가루와 잘 버무린 것을 절인 배추 사이사이에 넣어 주는 ‘김칫소’는 수육과 곁들이면 별미 중의 별미이다. 김장하는 날이 동네 잔칫날이 되는 이유이다. 흔히 ‘김칫속’이라 하는데 이는 ‘김칫소’의 잘못이다. 송편이나 만두. 김치 등의 속 재료는 ‘소’이다. ‘오이소박이’는 오이 사이사이에 소를 박아 넣은 김치다. ‘오이소배기’는 틀린 말이다. 마찬가지로 ‘차돌배기’가 아니라 ‘차돌박이’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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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가 200 가지가 넘는다는 김치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치는 총각김치다. 잘 익은 총각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 무청의 생김새가 총각이 머리를 땋은 것과 비슷해서 ‘총각무’가 되었단다. ‘알타리무’ ‘알무’ ‘달랑무’라고도 하는데 ‘총각무’만 표준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금수저 흙수저
정직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옛이야기들은 대부분 가난하더라도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잘살게 되리라는 교훈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런 얘기를 믿지 않는 것 같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노력보다 부모의 배경에 따라 장래가 결정된다는, 젊은이들의 현실 자조적인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다. ‘금수저’는 돈 많고 능력 있는 부모를 둔 사람을 가리키는 반면, ‘흙수저’는 돈도 배경도 변변찮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 말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라고 하는 영어 관용 표현으로부터 나왔다. 은은 값진 귀금속이면서 독극물에 닿으면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어 예로부터 고급 식기로 사용돼 왔다. 이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은수저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날 때부터 ‘은수저를 물고’ 있었다는 것은 곧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되었다.
여기서 유래하여 처음 ‘은수저’라는 말이 집안 좋은 이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다가 은보다 금이 더 가치가 높다는 데서 곧 ‘금수저’란 말로 대체되었다. 이어서 ‘금수저’에 대비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흙수저’라는 말이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터넷에는 금수저 연예인 명단과 함께 자신이 흙수저 계층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표까지 돌아다니고 있다.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특히 유행하는 신조어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을 꾸밈없이 비춰준다. 그것이 ‘금수저’와 ‘흙수저’로 상징되는 부의 편중과 대물림 현상이라는 것이 가슴 아프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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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약수터 - 천상병
내가 새벽마다 가는 약수터 가에는
천하선경이 아람드리 퍼진다.
요순이 놀까말까할 절대비경이라네.
하긴 그곳에 벌어지는 사물은 평범하지만
그 조화미의 화목색은 순진하다네
반드시 있을 곳에 자리잡고 있고
운치와 조화와 빛깔이 혼연일치하니
이 세계의 극치를 이루었다.
∼∼∼∼∼∼∼∼∼∼∼∼∼∼∼∼∼∼∼∼∼∼∼∼∼∼∼∼∼∼
타고르의 詩(GARDENISTO)를 읽고 - 한용운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있는 작은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나는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에서 사무치는 백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花環)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해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 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
이른봄 아침 - 정지용
귀에 설은 새소리가 새여 들어와
참한 은시계로 자근자근 얻어맞은 듯.
마음이 이일 저일 보살필 일로 갈러져,
수은방울처럼 동글 동글 나동그라져,
춥기는 하고 진정 일어나기 싫어라.
*
쥐나 한 마리 훔켜 잡을 듯이
미닫이를 살포-시 열고 보노니
사루마다 바람 으론 오호 ! 치워라.
마른 새삼넝쿨 새이 새이로
빠알간 산새새끼가 물레ㅅ북 드나들 듯.
*
새새끼 와도 언어수작을 능히 할가 싶어라.
날카롭고도 보드라운 마음씨가 파다거리여.
새새끼와 내가 하는 에스페란토는 휘파람이라.
새새끼야, 한종일 날어가지 말고 울어나 다오,
오늘 아침에는 나이 어린 코끼리처럼 외로워라.
*
산봉오리-저쪽으로 돌린 푸로우피일-
패랑이꽃 빛으로 볼그레 하다,
씩 씩 뽑아 올라간, 밋밋하게
깎어 세운 대리석 기둥인 듯,
간ㅅ뎅이 같은 해가 이글거리는
아침 하늘을 일심으로 떠받치고 섰다.
봄ㅅ바람이 허리띠처럼 휘이 감돌아서서
사알랑 사알랑 날러 오노니,
새새끼도 포르르 포르르 불려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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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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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지앙(池魚之殃)
池:못 지. 魚:고기 어. 之:갈 지(…의). 殃:재앙 앙.
[동의어] 앙급지어(殃及池魚). [출전]《呂氏春秋》〈必己篇〉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이란 뜻. 곧
① 화(禍)가 엉뚱한 곳에 미침.
② 상관없는 일의 재난에 휩쓸려 듦의 비유. 언걸 먹음.
춘추 시대 송(宋)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사마(司馬:大臣) 벼슬에 있는 환퇴라는 사람이 천하에 진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자 보석을 가지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환퇴의 보석 이야기를 듣고 탐이 난 왕은 어떻게든 그 보석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은 측근 환관에게 속히 환퇴를 찾아내어 보석을 감춰 둔 장소를 알아보라고 명했다. 환관이 어렵사리 찾아가자 환퇴는 서슴없이 말했다.
“아, 그 보석 말인가? 그건 내가 도망칠 때 궁궐 앞 연못 속에 던져 버렸네.”
환관이 그대로 보고하자 왕은 당장 신하에게 그물로 연못 바닥을 훑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다 쳐낸 다음 바닥을 샅샅이 뒤졌으나 보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연못의 물을 퍼 없애는 바람에 결국 애꿎은 물고기들만 다 말라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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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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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11. 되찾은 황제위
관영이 전투태세를 풀고 형양으로부터 돌아왔으므로 중신들은 부랴부랴 비밀회의를 소집했다. 진평, 주발, 하후영등이 그들이었다. 진평의 저택이 회의장소였다. 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의 어린 황제를 비롯해 제천, 회양, 상산이 세 왕은 모두 효혜제의 친자식이 아니오. 간사한 여태후가 유씨 핏줄하고는 전연 관계도 없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후궁에서 키운 뒤 실자라고 속임수를 쓴 데 불과하오."
다른 중신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식으로 여러 나라 왕으로 삼아 여씨들을 강대하게 만든 게 아니겠소. 지금은 여씨 일당들이 일단은 주멸되었지만 여씨가 세운 그들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나중에 그들이 성장해 우리들까지 몰살시킬 것이오!"
하후영이 맞받았다.
"그러니까 유씨의 여러 왕들 중에서 황제로 세우자는 얘기 아니겠소."
"그렇소이다."
"그렇다면 누가 좋겠소."
"가장 현명하고 덕이 있는 인물이어야 하오."
"그가 누구이겠고?"
진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나라 왕 유양은 어떻겠소? 원래 제나라의 도혜왕은 고조의 장자이며 유양은 바로 도혜왕의 장자가 아니오. 바로 고조의 적장손이 유양을 황제로 세우는 것이 어떨까 하오."
주발이 반발했다.
"그건 아니되오. 외척의 횡포를 생각하시오. 오늘의 변란도 외척 여씨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겠소. 한 마디로 말해서 유양의 외가 사씨 네 집안이 문제요. 사씨 집안의 장로 사균의 악독함에 대해서 얘기 못들었소. 유양을 황제로 즉위시킨다면 우리가 여씨한테 당했던 꼴이 사씨로 인해 다시 벌어질 것이오."
"그럼 또 누가 있소?"
진평이 되묻자 관영이 말했다.
"회남왕 유장려는 어떻소?"
그러자 하후영이 한 마디로 잘랐다.
"그 역시 외가쪽이 좋지 않은 데다 너무 젊소."
"너무 젊어요? 그렇다면 고조의 친자식으로 가장 연장자인 대왕 유항밖에 더 있겠소."
관영이 하후영에게 막연히 반발하느라고 뱉아낸 소리였는데 뜻밖에 모두가 안도하는 기색이 되어 똑같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진평이 나서서 덧붙였다.
"아주 좋은 판단이오. 유항은 인효관후하며 태후 박씨 역시 근직선량하오. 덕있는 연장자를 세운다는 것은 마땅한 순서이며 외척에 허물이 없다는 점은 금상첨화요."
중신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유항을 황제로 모실 것을 결의한 후 은밀히 사람을 대땅으로 보내어 유항을 불렀다. 그런 유항의 모친은 박후다. 위표가 진나라에 반기를 들면서 위왕이 되었을 때 박희는 위나라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 허부에게 우연히 관상을 보았는데 허부는 박희한테 이렇게 말했다.
"낭자는 나중에 시집가서 천자를 낳을 것이오!"
위표가 나중에 한나라 유방을 배반하고 조참에게 사로잡힐 때 박희는 마침 옷감짜는 방으로 가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유방이 우연히 옷감짜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박희의 아름다운 용모를 보았다.
"한나라 후궁으로 들어와!"
그렇지만 박희는 한 해가 지나도록 유방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박희가 어렸을 때였다. 동네 친구 관부인과 조자아와 사이좋게 지냈는데 그들끼리 약속해 둔 게 있었다.
"우리 나중에 누가 부귀하게 되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
그후 셋 모두가 한나라 후궁으로 들어갔는데, 관부인과 조자아는 유방의 총애를 받았으나 박희는 잊혀진 여자로 지내고 있었다. 유방이 하남궁의 성고대에 앉아 있을 때였다. 두 여자가 까르르 웃고 있어 뒤를 돌아보았더니 관부인과 조자아였다.
"그대들 두 미인은 무슨 일로 그토록 유쾌하게 웃고 있느냐?"
그래서 그녀들은 전날 박희와의 약속을 생각하고 웃었노라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금 박희는 어디에 있느냐!"
"궁내에서 독수공방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이로구나! 오늘 밤 당장 내 앞으로 보내어라!"
그날 밤 박희가 유방의 총애를 받게 되었을 때였다.
"어젯밤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푸른 용이 저의 배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유방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 참 귀한 징조로군. 짐이 그대를 위해 용꿈을 현실로 성취시켜 주도록 하지."
이렇게 해서 박희는 한 차례의 총애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대왕 유항이다. 그 후로도 박희는 아주 드물게 유방을 만났을 뿐이었다. 고조 유방이 붕어하자 총애받던 여러 희들과 척부인 같은 경우는 여태후의 노여움을 사서 모두 유폐되어 궁중에서 살아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희는 아주 드물게 유방을 만났으므로 여태후의 질투로부터 피할 수가 있었고, 아들을 따라 대땅으로 가서 왕의 어머니로 무사히 지낼 수가 있었다. 그 때 박후의 동생 박소도 함께 갔었다. 여태후가 붕어했을 때 중신들은 여씨들이 강대함으로써 미움 받았던 그만큼 연약하고 어질고 착한 박후를 칭찬했다. 중신들이 유항을 새황제로 지목하게 된 배경에는 박후의 그런 소박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쨌건 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 등의 이름으로 대왕 유항에게 사신을 보내어 황제로 모신다고 했을 때 유항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 황제가 하필 과인이겠소! 필히 무슨 음모가 있는 게 아니오?"
낭중령 장무가 대답했다.
"한나라 대신들은 모두 옛적 고조 때의 장군들로서 병법에도 능숙하고 정치에는 잔꾀가 많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바는 대왕을 맞이하는 데에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음모가 있어 과인을 부른다는 얘기가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고조황제나 여태후의 위세에 눌려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지만 기왕에 여씨 일족을 멸했으니 그 여세로 장안에서 유씨들을 불러 유혈극을 벌이려 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대왕을 황제로 맞이하겠다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좋겠소?"
"왕께서는 병을 빙자하여 일단 가지 마시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한 후에 조심스럽게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에 한나라 조정에서 보낸 사신들을 돌려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한나라로부터 다시 추대사절이 왔다. 이번에는 중위 송창이 나서서 대왕 유항을 설득했다.
"저번에 논의한 군신들의 판단은 옳지 못합니다. 대체로 진나라가 정도를 잃자 정권을 잡으려고 일어나 제후와 호족들이 수만을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황제위에 오른 것은 유씨뿐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이제 황제가 될 희망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논의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이유의 첫째입니다."
"과연 그렇겠소?"
"고조께서 자손들을 왕으로 봉하자 그들의 영토는 개의 이빨처럼 서로 교차되듯 물고 물려서 상호 견제하고 있으므로 이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반석같이 견고한 종가가 되었습니다. 천하는 이미 그 강력함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씨를 넘볼 수 없는 둘째 이유입니다."
"그럼 셋째 이유는 뭐요?"
대왕 유항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중위 송창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한나라가 홍기해 진의 가혹한 정치를 제거하고 법령을 간략하게 하는 등 덕혜를 베풀었으므로 결국 백성들은 안정이 되어 동요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글세, 저들의 추대가 음모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이유는 혹시 없겠소?"
"대체로 여태후는 자신의 위엄을 가지고 여씨 일족으로 3인의 왕까지 세우고 정권을 마음대로 장악해 전제했습니다만, 태위 주발이 한 개의 부절을 가지고 북군으로 돌입해 한 번 소리지르니 병사들은 모두 왼쪽어깨를 드러낸 채 모두 유씨 편에 가담했습니다. 그 때 여씨를 배반하고 여씨를 멸망시킨 명분은 무엇이겠습니까. 천하는 유씨의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말이오. 그대의 판단대로라면 지금 중신들이 변란을 일으키더라도 백성들이 그들을 위해 사역되지는 않는다는 얘기 아니겠소?"
"물론입니다. 또한 그들 도당들이 일치 단결될 턱도 없습니다. 안으로는 주허후 유장이나 동모후 유흥거와 같은 친족이 있으며 밖으로는 오, 초, 회남, 낭야, 제, 대등 유씨 성의 강대국들이 즐비해 있는데 그들이 무슨 배짱으로 반란을 도모한단 말입니까!"
"옳거니!"
"현재 고조의 아들로는 회남왕과 대왕뿐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왕께서는 연장자인데다 현성인 하시다는 사실을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이 천하 인심에 따라 대왕을 황제로 영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만 의심하시고 장안으로 출발하십시오."
그래도 유항은 의심의 먹구름이 걷혀지지 않았다. 모후 박후에게로 가서 이제까지의 전말을 고했다. "며칠만 기다려 주오. 그대가 가야 좋을지 가지 않아야 되는지를 점쳐 보겠소."
박후는 아들을 위해 귀갑(거북의 등껍데기)을 불에 그슬리어 그 튼 금으로 점을 쳤다. '대횡'이라는 괘조가 나타났는데 점괘는 이러했다.
ㅡ 대횡이라는 점괘가 똑바로 가로질러 나타났으니 나는 천왕이 될 것이다. 하왕조의 우왕을 계승해 제위에 오른 그의 아들 계처럼 부업을 빛낼 것이다.
점복관한테서 점괘를 전해들은 대왕 유항은 어리둥절했다.
"과인은 이미 왕이 되었거늘 또 무슨 왕이 된단 말인가?"
"천왕이란 천자를 뜻하고 있습니다."
대국의 조정회의를 다시 거친 유항은 박후의 아우 박소를 일단 한나라 태위 주발한테로 파견했다.
"가서 어떻게 영립하려는지를 자세히 알아가지고 오시오."
한편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왕 유항이 몇 차례나 황제 등위를 사양하자 다시 회의가 열렸다. 동모후 유흥거가 발언했다.
"그동안 여씨들을 주멸하는 데 저는 아무 공로도 세우지 못했소이다. 그래서 누가 해도 해야 될 일이겠기에 제가 나서고자 하오. 궁중으로 들어가 청소하는 일을 제가 맡겠소이다."
"청소를?"
"대왕께서 천자되시기를 꺼리는 바도 궁중안이 너저분하기 때문이오."
그제서야 중신들은 유흥거의 말뜻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후영이 나섰다.
"소제를 데리고 나오려면 태복인 내가 필요할 것 같소이다. 동모후와 함께 다녀오지요."
그렇게 되어 하후영은 유흥거와 함께 청궁으로 들어갔다. 어린 황제는 멋모르고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애처로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유흥거가 불쑥 말했다.
"그대는 유씨가 아니오. 때문에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부당하오!"
어린 황제 유홍은 무슨 말인가 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나갑시다!"
유흥거가 황제의 팔을 붙들려 하자 좌우에서 극을 잡고 있던 위사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후영은 얼른 소리쳤다.
"그대들은 무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거라!"
몇 명은 무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갔지만 몇 명은 여전히 버티며 황제를 옹위했다. 난처했다. 그 때 혼자령인 장택이 딱하게 생각했는지 위사들에게 설명했다.
"새 황제께서 오실 거요."
그제서야 남은 위사들도 눈치를 챘는지 슬그머니 무기를 버린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후영이 황제의 승용거를 불러 소제 유홍을 태웠다.
"짐을 데리고 지금 어디로 놀러가는 거요?"
하후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마침 날씨가 좋기로 소풍이나 갈까 합니다."
그날 밤이었다. 관헌에서 부서를 나눈 무사들이 각각 흩어져가서 소제는 물론 양왕, 화양왕, 상산왕 즉 진짜 유씨가 아닌 왕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한편 한나라의 형편을 살피고 돌아간 박소는 곧장 왕궁으로 가서 대왕 유항을 만났다.
"믿을 만합니다. 의심되는 점이라곤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유항도 웃으면서 중위 송창에게 말했다.
"과연 귀공의 예측이 맞는 구려!"
유항은 중위 송창을 배승케 하고 낭중령 장무 등 6명을 역전거에 실어 동행하게 했다. 장안으로 향하다가 고릉(섬서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송창이 유항에게 말했다.
"그래도 안전을 미리 도모하는 것이 초선입니다. 소신이 먼저 장안으로 가서 사태를 한번 더 살핀 후에 입경하도록 하시지요. 그동안 대왕께서는 여기서 휴식하고 계십시오."
딴은 옳은 의견일 듯 싶었다. 송창이 위교(장안 북쪽 3리에 있는 다리)에 미쳤을 때였다. 승상이하 모든 대신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영접하러 나와 있었다. 그런 환영 행렬을 바라본 송창은 벌써 감동하고 있었다. 그 때 승상 진평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송창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왜 오시지 않소이까?"
"지금 고릉에서 휴식 중입니다. 돌아가 곧 모시고 오지요."
한편 고릉에서 유항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왕후가 뵙기를 청했다. 왕후의 본래 이름은 두희였다. 여태후 때에는 양갓집 처녀들을 선발해 각각 5명씩 여러 제후 왕들에게 하사하는 제도가 있었다. 두희도 여태후에게 뽑혀와 왕의 궁녀로 떠나야 될 몸이었다. 두희의 집은 조나라 청하에 있었다. 어차피 궁녀로 아무 나라나 떠나야 될 처지라면 집 가까이에 있는 조나라로 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부모 형제 자매의 얼굴을 간혹이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꾀를 낸 두희는 궁녀 파견을 주관하는 환관한테 간청했다.
"기왕에 보내주실 바에야 조나라로 보내주십시오."
"그건 왜?"
"집이 청하에 있거든요. 그래야만 부모님 얼굴이라도 간혹 뵐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기특한 간청이로군. 네 이름이 뭐냐?"
"두희입니다. 꼭 조나라로 가는 궁녀 명단에 넣어주셔야 합니다!"
"걱정 말어. 그렇게 해줄게."
두희는 안심하고 있었다. 궁녀 파견을 주관하는 환관은 명부를 주상했고 조명이 내려와 명단은 확정되었다.
"앗차!"
환관은 깜짝 놀랬다. 두희의 부탁을 깜박 잊고 그만 두희를 대로 가는 명단에다 집어넣고 만 것이다.
"이를 어쩌나!"
"난 조나라가 아니면 차라리 죽고말겠습니다!"
"어허, 일이 난처하게 됐군!"
두희는 소리내어 울었다. 담당 환관을 원망하면서 떠나는 날까지 통곡했다.
"어쩌겠느냐. 너의 운명인 것을!" 모친도 울면서 딸을 달래어 보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에 도착하자 대왕은 여러 궁녀들 중에서 유독 두희만을 총애했다. 딸 표를 낳은 뒤 연달아 세 아들을 낳았다. 원래 대왕의 왕후는 네 아들을 낳았는데 차례로 병들어 죽고 왕후 또한 병들어 죽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두희가 왕후의 자리에 올랐고 큰아들이 세자가 됐다. 그런 두희였다. 그녀가 대왕 유항과 함께 장안으로 가는 길목에서 왕을 뵙기를 간청한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 생겼기에 그토록 간절한 알현을 원했소이까?"
유항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왕후 두희를 바라보았다.
"대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친정을 떠나온 뒤로 부모님 모두가 세상을 뜨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요."
"그런데 제가 처음 조나라 청하에서 장안으로 불려갈 때 너댓 살 먹은 남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빠도 있었지 않소."
"나중에 인편으로 친정집 소식을 알아보니 어린 동생이 유괴되어 장안 쪽으로 팔려갔다는 소식입니다."
"지금은 많이 자랐을 것 같구려. 그애 이름이 뭐요?"
"두광국입니다. 어렸을 때 집을 나갔으니 제 이름이나마 기억하고 있을지. 막상 장안 가까이 오니 광국이 생각이 나서 보고싶어 미칠 것 같습니다! 모두가 가난이 죄였기에 일어난 일이었지요."
"걱정 마시오. 처남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만날 날이 있을 거요."
"그래서 대왕께 청원을 드리는 겁니다. 만일 천하를 얻는 뜻을 펴시게되면 저의 동생을 찾게 해주십시오."
"여부 있겠소."
바로 그 때 장안으로 갔던 송창이 돌아왔다.
"영접 절차는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대왕 유항 일행이 위수가에 이르자 군신들이 마중 나와 있다가 길가에 엎드렸다. 승상 진평이 말했다.
"신 승상 진평, 태위 주발, 대장군 진무, 어사대부 장창, 종정 유영, 주허후 유장, 동모후 유흥거, 전객 유게 등 여덟 신하가 폐하를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항은 얼른 수레에서 내려 대신들과 맞절하면서 말했다.
"아직 폐하라 지칭하지 마시오. 과인은 아직 그대들의 황제가 아니오. 승낙한 바도 없소."
"그렇다면 그 내막을 말씀드리지요. 일단 사람을 물리쳐주십시오."
태위 주발의 말에 중위 송창이 얼른 나섰다.
"대왕을 호위하는 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지요. 말하려는 것이 공사라면 공중 앞에서 말씀하시고 사사로운 것이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왕자는 사사로운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실텐데."
그러자 주발은 말이 필요없다는 듯 얼른 유항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천자의 옥새입니다.!"
"그렇지가 않소. 일단 장안에 있는 대나라 저택으로 가서 다시 의논합시다."
유항의 육두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한나라 대신들도 우루루 뒤를 따랐다. 대나라 저택에서 유항 일행과 한나라 대신들이 다시 모였다. 주허후 유장이 나서서 설명했다.
"대왕, 소제 유홍은 효혜제의 실제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땅히 종묘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 이에 신들이 음안후(유방의 형 유백의 처)와 경왕의 후(유중의 처)와 낭야왕 종실의 대신들, 열후, 질록 2천석 이상의 고관들과 더불어 오래 상의하여 '대왕께서는 생존자 중 고조의 장손이니 마땅히 고조의 후사가 되셔야 한다'는 사실에 만장일치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황제의 위에 오르십시오."
유항이 대답했다.
"고조의 종묘를 받든다는 것은 중대사요. 나같은 비재는 종묘를 받들 자격이 없소. 어찌하여 초왕(유방의 아우 유교)에게는 여쭤보지 않았소. 그에게 청하여 다시 적임자를 고르시오."
승상 진평이 다시 나섰다.
"초왕께서는 고령이시어 구태여 여쭤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쭤보나마나 대왕께서 적임자라 말씀하셨을 겁니다. 천하의 제후들이나 만민들 역시 대왕께서 황제위에 오르시는 것을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신등은 기왕에 소홀한 판단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오니 부디 천자의 옥새를 받아주십시오!"
군신들이 모두 엎드려 유항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서향하여 대신들에게 유항이 사양하기를 세 차례, 남향하여 군신들에게 또 세 차례 사양했다. 그렇지만 신하들은 물러날 생각들이 전연 없었다. 드디어 대왕 유항은 마지못한 듯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좋소, 과인도 사양할 만큼 했소. 그러나 종묘의 장, 상, 왕, 열후중에서 과인보다 적임자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나도 구태여 사양하지는 않겠소!"
만세소리가 대왕의 저택 안을 진동했다. 태복 하후영과 동모후 유흥거는 기왕에 궁중을 청소한 후 전자의 법가(임금이 타는 수레)를 받들고 대국의 저택으로 황제를 맞이하러 갔다. 그날 밤 황제 유항은 미앙궁으로 들었다. 유항은 밤에 송창을 위장군으로 삼아 남북군을 진무케 하고, 장무를 낭중령으로 임명해 궁전 안을 순행하도록 했다. 그들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앞에 앉힌 뒤 조서를 내렸다.
ㅡ 여씨 일족들이 정권을 장악해 권세를 마음대로 하더니 대역을 도모해 유씨의 종묘를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장, 상, 열후, 종실, 대신들이 그들을 주멸했다. 그래서 짐이 비로소 천자 위에 오른 것이다. 이에 천하에 대사령을 내린다.
유항은 황제의 즉위식을 올린 뒤 곧 고조의 묘에 배알했다. 우승상 진평을 좌승상으로 옮기고 태위 주발을 우승상으로 했다. 대장군 관영을 태위로 삼았다. 거기장군 박소를 파견해 황태후(박씨)를 대에서 모셔오게 했다. 첫 어전 회의가 열렸다. 황제 유항이 문제를 제기했다.
"법이란 천하를 다스리는 정도인 것이오. 포악을 금지하고 선인을 인도해 더욱 선행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오. 그런데 지금의 법에서 범법자를 논단하는 것은 옳지만 죄없는 부모, 처자, 형제까지도 연좌제로 다루어 노예로 삼는 등 부당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소. 이 점에 대해 논의해 보시오."
우승상 주발이 나섰다.
"백성들은 자치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재정해 포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연좌법을 제정해 일족을 노예로 삼는 것은 범법이 중대사라는 점을 백성들의 가슴에 새겨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제도는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이니 종전대로 그냥 두는 것이 편리합니다."
황제 유항이 이의를 달았다.
"법이 정당하다면 백성이 삼가며 죄에 대한 벌이 정당하다면 백성은 복종한다고 했소."
"법에 엄격함이 없으면 기강이 해이해진다는 사실은 고금의 진실입니다."
우승상 주발의 주장에 황제 유항의 안색이 변했다.
"백성을 길러서 선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또 잘못된 법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도리어 백성을 해치고 백성에게 포악을 가하는 것이오. 이래서야 어떻게 백성의 위법을 금지하겠소. 짐은 연좌법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좌승상 진평은 눈치가 빨랐다.
"폐하께서는 백성에게 그토록 큰 은혜를 드리우시니 그 거룩한 덕은 신들이 감히 미칠 바가 못됩니다. 과연 폐하께선 성군이십이다. 신들은 조칙을 받들어 노예로 삼는 등의 여러 가지 연좌법을 철폐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 유항은 몹시 만족해 했다. 그대신 주발은 진평의 약삭빠른 동조에 약이 올랐다. 퇴청하면서 투덜댔다.
"그대는 항상 나보다 한 수 앞을 바라보며 달려간단 말이오!"
얼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유항이 효문제로 등극하던 날 심이기는 승상에서 물러났다. 그 때 진평은 태위 주발의 공로가 자신보다 크다고 생각해 유항에게 상주했다.
"고조의 시대에는 주발의 공로가 신 진평만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씨 일족을 주멸한 후부터는 신의 공로가 주발에 미치지 못합니다. 원하오니 우승상의 자리를 주발에게 넘겨주십시오."
그렇게 되어 주발이 관위 서열 1등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유항이 황제위에 오른 지 며칠이 지났다. 국사를 익히기 위해 우선 좌우 승상을 불러들인 후 특히 우승상 주발에게 물었다.
"천하에서 1년 동안 판결하는 재판은 몇 건이나 되오?"
주발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모르옵니다."
"천하에서 한 해동안 출납하는 화폐나 곡식은 얼마나 되오?"
역시 알 리가 없었다. 진땀을 빼다가 대답했다.
"좌승상은 아시오?"
"그것을 알고 있는 담당관이 있습니다."
"담당관이란 누구요?"
"폐하께서 만약 재판에 관하여 아시고 싶으시면 정위에게 물어주시고, 화폐나 곡식에 관하여 아시려면 치속내사에게 물어주십시오."
"만사에 각각 담당자가 있는 거라면 그대는 대체 무엇을 담당하고 있소?"
"폐하께서 신의 우둔함을 모르시고 재상으로 임명해 주셨지만, 모름지기 재상의 임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조화시키고 춘하추동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밑으로는 삼라만상을 순리대로 양육하고, 밖으로는 사이와 제후를 진무하고, 안으로는 백관과 인민이 친근하여 따르게 하며, 뭇 관리들에게 각자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지고 있습니다."
진평의 대답이 몹시 흡족했는지 황제 유항은 큰 목소리로 웃었다.
"훌륭한 대답이오!"
주발이 진평에게 불평하는 것은 전날 어전에서 있었던 그일 때문이었다. "그대는 어째서 내가 폐하께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를 미리 가르쳐 주지 않았소?"
"그대는 우승상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 임무를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가령 폐하께서 장안의 조난 건수를 물으셨다 해서 그대는 그것까지 대답해야 된다고 생각했소?"
주발은 자신의 능력이 진평한테는 미치지 못한다고 내심 생각했다.
즈음이었다. 주발의 식객 중에 조북이란 선비가 있었다. 어느날 조북은 주발이 한가한 틈을 타서 말했다.
"승상께서는 이미 여씨 일족을 주멸하고 대왕을 황제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그 위엄과 세력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승상께선 후한 상까지 받았으며 존귀한 지위에 앉아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계십니다."
"그게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얘기요?"
"물론 잘못 되어가는 상황이지요. 이런 상태로 세월이 조금만 흐르면 몸에 화가 필히 미칩니다."
주발은 겁이 덜컥 났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뭔가 위태롭다고 느껴저 승상의 인수를 반환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낭중 원앙이 황제 앞에서의 주발의 몸가짐을 두고 시비를 벌인 일어었다. 원앙은 여태후 시절에는 여록의 식객이었다. 여씨 세력이 일소되고 효문제가 즉위하자 주발의 친구인 형 원쾌의 힘으로 낭중에 발탁된 인물이었다. 주발의 세력은 절정에 있었으므로 조정에서의 몸가짐에서도 그것이 나타났다. 조회를 마치고 퇴청할 때에는 주발의 걸음걸이는 의기양양했다. 그런 주발에게 황제도 손수 배웅을 나가서는 정중하게 목례까지 하면서 내보냈다. 원앙은 견딜 수가 없었다. 황제 유항한테 따져 물었다.
"폐하께선 승상을 어떤 인물로 보십니까?"
"사직지신이오."
"강후(주발)께선 공신이긴 하나 사직지신은 아닙니다. 모름지기 사직지신이란 그 군주와 함께 존망을 함께하는 몸입니다."
"그런 해석도 있소?"
"여태후가 실권을 잡았을 때를 기억하십시오. 여씨들이 승상과 왕의 지위를 독점하자 유씨 명맥은 실낱같이 끊어질 듯했습니다. 그 때 강후는 태위(오늘의 국방장관)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태를 조금도 시정치 못했습니다."
"그랬소?"
낭중 원앙은 황제 유항에게 끈질기게 따졌다.
"여태후가 붕어하자 여러 대신들이 협력해 여씨 일족에게 항거했으며 태위 주발은 오로지 병권을 장악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연히 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공신이긴 하나 사직지신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렇겠구려."
"그런데 그런 승상께서 폐하께 교만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폐하께선 또한 지나치게 겸양하십니다. 이것은 군주와 신하간의 예의를 잃는 일입니다!"
듣고보니 그럴듯했다. 그 이후로 원앙의 충고를 의식한 황제 유항은 주발에 대하여 일부러라도 강경하고 위엄있게 대했다. 자연히 주발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원앙을 원망했다.
"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 네 형과 내가 막역한 사이인데, 네가 조정에서 나를 헐뜯다니!"
"헐뜯은 게 아닙니다. 원칙을 폐하께 주장했을 뿐입니다."
원앙은 끝내 사과할 기색이 없었다. 주발은 겁도 나고 달리 방법도 없다고 판단했다. 승상의 인수를 반환할 것을 청원했더니 황제는 얼른 이를 받아들였다. 주발은 속절없이 봉국으로 떠났다. 즈음이었다. 두희가 있는 황후궁으로 이상한 상소문 한 장이 올라왔다.
ㅡ황후께옵서 제 누님인 듯합니다. 저를 부르시어 제가 황후의 동생이 아닌가를 확인해 주십시오.
"어서 이사실을 폐하께 알려라!"
황후 두희는 혹시 동생 두광국이 아닌가 하고 미리 흥분했다. 두광국이 유괴범들에게 유괴되어 간 것은 나이 다섯 살 때였다. 집에서 먼 곳으로 팔려가 버렸기 때문에 광국은 탈출해 집으로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다. 광국의 집에서도 아이의 소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린 두광국은 10여 차례 주인이 바뀌며 계속해서 팔려나가고 있었다. 의야(하남성)으로 팔려갔을 때의 주인은 숯을 굽는 사람이었다.
"넌 주막으로 가서 술이나 두어 말 사서 지고 오너라."
주막은 먼 곳이었다. 시오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지게 양쪽에다 한말씩 지고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안부 백여 명이 낭떠러지 밑으로 모두 떨어져 이미 흙 속에 파묻히고만 상태였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새 지진이 일어났던 것이다.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두광국은 주인으로부터 탈출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주인도 인부들과 함께 매몰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두광국은 문득 주막 근처에서 보았던 '점'이라는 글자를 떠올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몸이니 난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다! 앞으로 내 운수가 어떠한지 어디 점이나 한 번 쳐보자.' 그렇게 생각한 두광국은 터덜터덜 걸어서 어제 저녁에 술사러 나왔던 주막거리로 돌아갔다. 점치는 사람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한참 동안을 대나무 꼬챙이와 씨름을 하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앗! 세상에 이런 일이!"
"왜 그러십니까?"
노인은 대답 대신 넙죽 엎드려서 절을 했다.
"결국 죽을 운수입니까?"
"아니오, 젊은! 그대는 후가 될 분이오! 그나마도 며칠 안으로 말이오!"
"저같이 무식한 게 무슨 후가 됩니까. 더더구나 그토록 심한 농담까지 하시다니!"
"복채는 받지 않겠습니다. 귀한 자리에 오르시거든 한 번이라도 이 노인네를 찾아와 주시구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어 막막한 기분으로 일어나려는데 노인은 다시 한 번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서쪽으로 가시오. 곧장 서쪽으로!"
"서쪽이라니요?"
"장안도 의양에서는 서쪽이오."
유달리 정해진 곳도 없었으므로 노인과 헤어진 두광국은 무턱대고 장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안으로 들어선 두광국은 아무 일거리나 얻겠다는 요량을 하며 우선 밥집으로 들어섰다. 그때 몇 명의 밥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가 우연히 두광국의 귀에 들어왔다.
"글세 말이여, 두황후께서는 고향이 조나라 청하라고 하는데, 어렸을 때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 계시다더구먼. 그러나 그런 앨 어딜 가서 찾는담. 장강에서 바늘 찾기지."
두광국의 귀에 '두씨'라는 말이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래서 그 손님한테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 좀 물읍시다."
"물어보슈."
"황후께서는 두씨라고 하셨습니까?"
"분명히 그렇게 말했소."
"저도 두씨이며 고향이 조나라 청하입니다. 관진이라고도 하죠."
"청하 사람치고 두씨가 어디 한둘이겠소. 그래, 당신이 어렸을 때 집을 나가기라도 했소?"
"유괴되었지요. 다섯 살 때."
"뭐요? 난 미앙궁 소속 위사요. 혹시 당신이....!"
두광국의 상소문이 황후한테 전달된 경위는 바로 그 미앙궁 소속 위사에 의해서였다. 두광국은 이튿날 위사에게 인도되어 미앙궁으로 들어갔다. 뜻밖에도 전상에는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광국은 황후를 유심히 바라보았고 황후 두희는 두광국을 미심쩍은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황제 유항이 직접 심문했다.
"잘 듣거라. 너같은 백성이 벌써 다섯 명이 다녀갔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사기꾼이었다.너 역시 황후의 동생이라 속여 팔자나 고쳐볼 생각에서 상소하여 궁으로 들어왔다면 미리 이실직고해 그나마 짐을 속인 죄나 면하도록 해라."
"아닙니다. 소인이 유괴될 때가 다섯 살 때였기에 이름과 고향은 알고 있습니다. 황후께옵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으신다기에 혹시 소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상서한 것뿐이옵니다. 폐하를 속일 생각은 전연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질문에 대답해 보아라. 네 이름이 뭐냐?"
"두광국입니다."
"집을 나간 것은 인신매매범한테 유괴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맨 처음에 소인을 키워 밭일을 시키려고 했답니다. 그 다음에는 푸줏간 심부름꾼으로 팔렸고 그 다음에는 주막의 허드렛 일꾼으로 팔려갔고.... 그런 식으로 열 차례나 팔려나갔다가 얼마 전까지는 숯을 굽는 인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다른 인부들과 함께 주인이 지진으로 매몰되는 바람에 그제서야 저는 자유의 몸이 되어 장안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됐다. 그만해라. 그런데 너에게는 형이 있었다는데 형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형이 계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름은 모릅니다."
"그럼 누나 이름은?"
"누나 역시 누나라고만 불렀기 때문에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참다 못한 황후 두희가 앞으로 나섰다.
"너에게 누나가 있었다면 누나와의 어렸을 적 기억같은 게 있을 게다. 무슨 생각나는 게 없느냐?"
두광국은 곰곰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누나와 함께 뽕밭으로 가서 뽕을 딴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제가 멋모르고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딛고 떨어져 기절한 적도 있습니다. 그 때 누나는 저를 업고 의원집까지 뛰었습니다."
갑자기 두희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 밖에 다른 추억은 없느냐?"
"누나가 영영 어딘가로 떠나게 되었을 때 소인은 역사까지 나가 눈물로 전송했습니다. 아 참, 그날 아침 누나는 면도기를 빌려와서 마지막으로 제 머리를 밀어주고는 또 밥까지 얻어와 먹인 후 떠나갔습니다."
그때 황후 두희는 벌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너에게는 두광국이란 이름 말고 어릴 때 부르던 이름 따로 있었다. 기억나느냐?"
"예, 기억나고말고요. 소군이라 불려지기도 했지요."
그 순간이었다. 두희는 전상에서 달려내려와 두광국을 껴안았다.
"소군아! 너는 틀림없이 나의 동생이렸다!"
두희는 두광국을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흘렀지만 두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좌우에서 이런 정경을 눈여겨보고 있던 시종들 모두가 땅에 엎드려 울며 황후 두희의 비애를 돋우었다. 이런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관영이 하후영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들이 살아있는 한 우리들의 운명은 두황후의 오빠와 두광국 두사람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앖을 것이오. 그건 엄연한 외척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전날 여씨들의 횡포에 시달렸던 일처럼 우리가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미천한 출신인 황후의 오빠와 동생에게 훌륭한 사부를 선택해 주고 쓸 만한 빈객들과 사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오."
하후영도 몇 마디 거들었다.
"맞소.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똑같은 여씨의 대란이 일어날 것이오. 관장군의 말씀처럼 덕행이 높고 온후하며 절의를 지키는 인물들을 뽑아 두 사람과 같이 생활하게 하면 두 분은 겸양할 줄 아는 군자가 되어 존귀한 신분이 되어서도 감히 남에게 교만하지 않을 것이오."
한편 봉국으로 쫓겨간 주발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우승상 지위에서 당한 권고사직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즈음에 하동군 태수와 위가 주발이 있는 강현으로 순시차 왔다. '이크! 나를 죽이러 왔나보다!' 주발은 서둘러 갑옷을 챙겨입고는 장검을 허리에 찼다. 가신들에게도 모두 완전무장시키고 그제서야 태수와 위를 만났다. 적군 대하듯하는 주발의 행동을 살핀 태수 일행은 어이가 없었다. '무언가가 있다! 심상한 행동이 아니다!" 태수 일행은 황제에게 즉각 상주했다
.ㅡ주발이 모반할 것 같은 의도가 엿보입니다.
일단 그런 글을 받은 황제 유항으로서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위는 주발의 모반행위를 철저히 조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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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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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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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은 미래 적인 개념이다. 막연한 미래 때문에 현재의 평화로운 사태를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은 없다. 현재의 평안을 유지한다면 재앙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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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아픈 기억들은 우리의 삶 속에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든지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머리고 마음에 여유와 안정을 되찾게 되면 이번에는 소망과 욕구와 의욕이 우리의 안정을 교란시킨다. 그러나 진정한 안정이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모든 헛된 망상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면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정신적인 안정을 느낄 때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만날 수 있다. 정신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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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고 병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현재의 평안을 오래 유지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편하고 건강할 때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귀중한 시간을 그대로 흘려 보내다가 걱정과 근심이 생겼을 때에야 비로소 지난날을 되새긴다. 현재의 행복한 시간을 무관심하게 보내지 마라. 현재의 시간은 언제나 과거라는 전당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현재의 시간에 몰두할 수 있을 때 과거는 기억 속에서 불멸의 빛을 뿌리게 되는 것이다. 만약 미래를 풍요롭게 만들고 싶다면 과거의 기억이 가르쳐 주었던 그 무엇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라. 지금 지나가고 있는 오늘 하루는 제외할 수 없는 인생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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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권태는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어느 사이에 권태가 나타나서 우리를 유혹한다. 권태에 싫증을 느끼게 되면 고통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외면적인 세계와 내면적인 세계가 서로 대립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외면적인 세계에서는 궁핍과 부족함이 고통을 주는 반면에 내면적인 세계에서는 안전과 풍요가 권태를 안겨준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과 싸우고 있을 때, 부자들은 권태와 씨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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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의미 있는 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삶을 의미 있는 일로 채우는 것은 인생을 성숙하게 만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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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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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구미미술관에 들어가 있는 한국불화들
1970년대초 국립중앙박물관은 구미 각국의 주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불화들 가운데 현재 국내에선 하나도 확실한 것이 보존돼 있지 못한 고려시대의 것들이 적지 않음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71년 7월, 미국의 여러 미술관을 시찰하러 떠났던 황수영 관장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둥양관의 일본인 불화전문가 호리오카로부터 한국 전문가의 평가와 의견을 듣고 싶다는 구미미술관 소장의 한국 불화 약 50점의 사진을 복사해 받았다. 황관장이 미국에서 가져온 한국불화의 사진을 검토한 박물관의 전문가 최순우·정양모 학예연구관은 그중의 적어도 5∼6점은 분명히 고려 때 것이고 다른 10여 점은 조선 전기 것으로 보았다. 호리오카가 조사한 구미의 한국불화 소장 미술관은 그가 연구원으로 있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비롯해서 미국 안의 프리어미술관, 클리블랜드미술관, 필라델피아미술관, 호놀룰루미술관 외에 영국의 대영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미술관, 독일의 베를린미술관, 벨기에의 브뤼셀미술관 등이었다.
언제 어떤 경로로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기왕에 한국에서 유출된, 국내에도 없는 귀중한 불화들이 구미의 큰 미술관에 잘 보존돼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오늘의 국내 학도로서 우리의 옛 불화를 연구하려면 불가피 일본이나 구미로 찾아가야 하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외국의 미술관 혹은 개인에게 유출돼 있는 한국불화의 대부분이 구한말 이후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약탈당했거나 일부 어리석은 중들이 그들에게 매수되어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중의 일부가 일본을 통해서 구미로 전매돼 나간 것이다. 구한말 이후, 이 땅에서 각종 역사 문화재 약탈로 일확천금을 꿈꾸던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가장 손쉽고 가벼운 약탈대상의 하나가 불화였다. 큰 불상이나 석탑 같은 것을 불법반출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불화는 돌돌 말면 한 손에 잡히는 가벼운 물건이었다. 한 예로 양산 통도시의 불화들이 일본인 무법자에게 약탈당한 것은 1900년을 전후한 때였다. 1903년 2월에 일본에서 발행된 (고고계)란 잡지에 당시 도쿄 제실박물관에서 전시되었던 불법반출의 통도사 불화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조선불화는 본시 경남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본존 2체외에 성상 혹은 천부수호신 같은 것도 있다. 또 악기를 갖고 있는 보살상 같은 것도 있다. 시대는 3백 년 전쯤 되어 보이며 착색이 선미하고 뵤법도 훌륭하여 한번 볼 만하다."
한국에서의 일본인들의 문화재 약탈과 일본으로의 불법반출은 구한말에 서울에 와 있던 서양인 외교관과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소릿가 높았던 것 같다. 1906년 12월의 황태자 혼례식에 특사로 왔던 당시 일본 궁애상 다나카가 새성 남쪽의 풍덕에서 경천사 십층섭탑을 일제의 무력과 일본인 골동상을 앞세워 약탈해 갔던 사건은 이미 앞에서 소개했지만, 1907년 5월 28일자 일본의 (후쿠오카 일일신문)에 보도되었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1970년대초 서울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에서 발견되었다.
"과반, 한국의 황태자 전하 어혼례 때 특사로 파건되었던 다나카 궁내상은 그때 한국의 역사상 국보인 백옥제(흰 대리석) 다층탑이 둘이나 있는 것을 보고, 그 진품에 침을 흘린 나머지 둘 중의 하나인 경기도 풍덕에 있는 것을 지난 2월 4일 서울에 거주하고 고물상(일본인)으로 하여금 군민의 저항을 물리치고 다소의 무력도 사용하여 무난히 인천으로 빼내고, 3월 15일 도쿄에 도착시켰는데, 이 탑은 값으로 치면 200만 원을 호가할 만큼 희귀한 진품인데다가 다나카가 그것을 반출해 오는 과정의 수속이 의심스러워 목하 미국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 비난의 소리가 높다는 것이고, 그곳(미국)에 체재 중인 구로키 대장 같은 이가 매우 난처한 처지에 몰려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한국문화재 약탈 내막을 폭로한 미국의 신문보도에 당시 일본정부는 몹시 당황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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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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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나자 여기에 와 있던 쿠데타 그룹 멤버들 중 길재호, 유승원, 강상욱 등은 소사에 있는 제33사단으로, 오치성, 김형욱, 이석제 등은 수색의 제30사단으로 달려갔다. 출전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제33사단의 전투단장 육군 대령 H아워에 맞추어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태세를 갖추고 시간이 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소에서 장도영의 전화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단장 안동순이 가로막는 바람에 H아워에 맞춰서 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61년 당시 우리 국군의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쿠데타란 목숨을 내건 반란행위다. 그렇듯 비장한 각오하에 결행하려는 쿠데타를 훼방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쏴 죽이고라도 출동할 것 같았으나 우리 국군은 그렇게까지 무자비하지가 않았다. 제33사단의 전투단장 이병엽이나 오학진은 그런 무자비한 수단을 속수무책으로 난감해 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에 길재호, 유승원, 강상욱 등이 독려차 들이닥친 것이다.
"어째서 여지껏 출동치 않고 있는 거야?"
길재호가 호통치듯 힐난하자, 오학진이 풍이 죽어 대꾸했다.
"사단장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
그 말을 듣자, 강상욱이 사단장 안동순을 협박했다.
"20여 분 후에는 서울에 3개 사단이 진주합니다. 해병대하고 공수단도 이미 출동했구요. 전군의 영관장교가 모두 참여했기 때문에 몇 사람이 방해해도 성사가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입장이 곤란하면 가만히 계셔도 좋습니다. 이제는 결심할 시기가 왔습니다."
이렇게 사단장 안동순을 붙들고 설득을 펴고 있는 사이에 유승원이 오학진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사단장을 붙들고 있을 테니 부대를 이끌고 나가라!"
제30사단의 경우도 사정은 제33사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은 사단장, 부사단장, 참모장이 부대를 떠난 후 서둘러 출동태세를 갖추었다. 이미 탄약까지도 지급해 놓고 H아워에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H아워가 되기도 전에 부사단당과 참모장이 귀대를 아니라 사단장 이상국은 귀대할 때 혼자가 아니었다. 헌병 1개 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장도영은 이상국에게 귀대명령을 내릴 때 어딘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지 김시진과 이강배에게 헌병 1개 분대를 이끌고 가서 제30사단의 반란 주모자를 체포해 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아상국 등은 부대에 도착하는 즉시 이백일 체포명령을 내렸다. 다급해진 작전참모 이백일은 작전참모실 뒤 창문을 열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던 제30사단은 완전히 이상국의 손아귀에 쥐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전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예정대로 거사진행을 시킬 수 있었던 부대는 제6군단 설치해 놓고 있던 이 부대는 정각 새벽 1시에 출병, 1시 15분에 X지점에 집결, 서울로 진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6군단 포병단의 거병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文在駿) 등 5개 대대장이 이끄는 포병대는 1시 15분, 예정된 X지점에서 합류했다. 이들 포병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포병들은 그 육중한 포차를 이끌고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서울을 향해 진군해 나갔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 박정희가 떠나고 쿠데타 그룹 멤버인 8기생들이 제30사단과 제33사단으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참모장실에 있던 송찬호, 돌아왔다. 그들은 쇼파에 헌병차감인 이광선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거동은 마치 서부극에서 보는 총잡이들처럼 권총을 빼드는 솜씨가 민첩했다. 김재춘이 미소를 담뿍 담고 일어서며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헌병차감도 협력하기로 했어요."
그제야 두 사람은 다소 안심이 된 듯 권총을 도로 권총집에 집어 넣는 것이었다. 이광선의 처남 역시 군인이었다. 그의 처남 김성구(金聖九)는 육군 중위 시절 박정희의 부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 이광선은 처남 김성구를 통해서 <군인다운 군인>, <청렴결백한 장군> 등으로 박정희를 그 처남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는지 이광선은 박정희를 존경할 만한 장군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쿠데타의 지도자로 추대를 받았다면 협력할 가치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다. 송찬호, 윤태일 두 사람이 사령관실로 들어선 지 채 5분도 안 되어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과 헌병감 조흥만이 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조흥만은 제6관구 사령부로 올 때, 헌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왔다. 사령관실로 들어서자 조흥만은 소파에 앉아 있는 이광선을 보자, 신경질을 부렸다.
"당신 어떻게 된 거야?" 했다. 반란 음모자들을 체포하라고 보낸 헌병차감과 수사관 70명이 꿩 구워먹은 소식이요, 함흥차사가 되어 버려 가슴을 조이고 있다가 급기야는 그 자신이 출동을 했으니 어찌 핏대가 서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잠깐만!"
이광선은 눈짓을 하며 서종철, 조흥만을 복도로 끌고 나갔다.
"왜 그러는 거요?"
조흥만이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때가 늦어? 때가 늦다니?"
"해병대가 이미 출동했습니다. 공수단도 출동했다는 소식입니다."
"했으면 했지 그게 어쨌다는 거요?"
"나도 박 장군에게 협조하기로 했단말입니다."
이광섭이 씹어 뱉듯이 선언했다.
"뭐?"
조흥만은 놀라서 한동안 멍해져 이광선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체포하든 말든 그것은 헌병감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이광선을 이렇게 말했다. 조흥만은 그 말을 들은 둥 마는 둥 말없이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서종철도 따라 들어갔다. 사령관실로 들어오자, 그는 506방첩대로 전화를 걸었다.
"각하, 해병대와 공수단이 출동했다고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출동 했다는 보고를 나도 받았어. 하지만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여간 좀 두고 기다려 보자."
장도영의 태도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었다. 반란진압의 총책임을 지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이 이 모양이니, 서슬이 시퍼런 기세를 가지고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쳤던 조흥만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체포해야 하나? 아니면 방관하고 있어야 하나?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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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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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북아프리카
우선 마우리타니아 문제부터 살펴보자. 이 문제는 단지 북아프리카의 일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르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우리타니아와 마주보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의 안전과도 관련된 문제인 만큼, 해결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칼리굴라의 경솔함 때문에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지만, 칼리굴라가 죽인 왕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반란은 군단을 투입하여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디우스도 평화적인 해결은 고려하지 않았다. 마우리타니아 쪽에 교섭 상대가 없었다기보다, 로마는 절대로 로마에 반대하여 봉기한 자들을 교섭 상대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만이 있으면 사절단을 보내거나 하여 로마의 중앙정부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을 시도해보지도 않고 힘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는 상대한테는 로마도 힘으로 대응한다. 이것이 로마의 방식이었다. 칼리굴라가 죽을 때 남겨놓고 간 마우리타니아 왕국의 반란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즉위한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진압되었다. 하지만 같은 '제국주의'(임페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어도 후세의 제국주의자와는 다른 로마 통치의 독특한 특징이 여기서 나타난다. 반란을 일으킨 지역에 대한 통치상의 이유 때문에 옛 마우리타니아 왕국은 둘로 분할되었다. '마우리타니아 팅기타나'(탕헤르의 마우리타니아)와 '마우리타니아 k이사리엔시스'(셰르셸의 마우리타니아)가 그것이다. 둘다 로마의 속주가 된 것이다. 전자의 수도는 팅게(오늘날의 탕헤르), 후자의 수도는 카이사레아(카이사레아가 아랍식으로 바뀌어 지금은 셰르셸)였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파견되는 장관이 다스리게 된 이 두 속주에 일찍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북아프리카에서 실시한 통치방식을 도입했다. 군단에서 만기 제대한 사람이나 로마인 지원자를 대거 파견하여 건설한 식민도시(콜로니아)들을 핵으로 삼고, 그 사이를 로마식 가도로 연결하여 산업을 진흥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두 속주와 그 동쪽에 있는 옛 누미디아 왕국인 '누미디아 속주', 옛 카르타고인 '아프리카 속주', 그리고 크레타 주재 장관이 관할하는 '키레나이카 속주'를 포함한 북서 아프리카 전역이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필요한 밀의 3분의 1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집트가 본국에 필요한 밀의 3분의 1일 조달한 것은 클라우디우스가 북아프리카 서부 지역 전체를 본격적으로 재개발한 뒤의 일이다. 그 전에는 로마로 수입되는 밀에서 이집트산 밀이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식인 밀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가 한 지방에만 생명줄을 매달고 있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북아프리카가 본국에 필요한 밀의 3분의 1을 보장하게 되자 로마의 생명줄은 세가닥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본국 이탈리아 및 본국이나 다름없는 시칠리아 섬을 합하여 세 가닥이 된 것이다. 북아프리카-정확히 말하면 남쪽에 펼쳐진 사막을 경계로 한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 지방-일대에서 진행된 로마화는 산업 진흥에만 머물지 않았다. 경제력이 향상되면 인재를 등용할 필요가 생기게 마련이다. 인재는 경제면에서도 필요하지만, 풍요로워지는 경제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군사면에서도 재능있는 인재에 대한 등용문이 활짝 열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경제와 군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행정면에도 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리하여 카르타고계 주민이 로마의 통치체제로 침투하게 되었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3년 동안 공격한 끝에 함락한 카르타고의 수도에는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어버렸다.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일찍이 지중해 최고의 번영을 자랑한 이 황무지에 도시를 재건했다. 게다가 카르타고라는 이름까지 부활시켰다. 카르타고는 로마인에게 잊을 수 없는 옛 숙적의 수도 이름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90년 뒤, 비록 로마의 속주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농업대국이고 통상대국인 과거의 카르타고가 되살아난 것이다. 로마의 이런 '제국주의'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로부터 150년 뒤에 이 지방은 로마 황제까지 배출하게 되었다.
유대 문제
칼리굴라가 죽을 때 남기고 간 또 다른 과제는 유대 문제였다. 로마화를 거부한 이들에 대해 클라우디우스는 현실에 바탕을 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대처하기로 했다. 유대인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과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그리스계 도시에 사는 유대인으로 나누어 대처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 방식을 답습하고, 그리스계 도시에 사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티베리우스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땅에 대해서는 35년 만에 같은 유대인왕에게 통치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현지법인 사장을 본사에서 파견하지 않고 현지인 중에서 기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유대 통치를 맡게 된 인물은 헤롯 왕의 자손으로, 서양식 이름으로는 율리우스 아그리파, 유대식 이름으로는 헤롯 아그리파였다. 그는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풍부한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어렸을 때 로마에 볼모로와서 자랐기 때문에 칼리굴라의 친구였고, 클라우디우스와도 깊은 신뢰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만 티베리우스는 풍부한 재능을 타고난 이 유대 왕자를 믿지 않았다. 티베리우스가 그를 유대 왕위에 앉힐 작정이었다면 얼마든지 앉힐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은 동맹 상대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50세까지 '책상물림'으로 지냈다. 남을 쉽게 믿는 것이 클라우디우스의 성격이기도 했다.
칼리굴라는 유대인과의 대결을 강행했고, 그를 본떠 제작한 유피테르 신상을 예루살렘 신전에 세우는 것은 그 대결의 상징이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되어버렸다. 칼리굴라의 명령에 태업으로 저항한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도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적대관계는 유대 쪽이 철학자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로마에 보내 칼리굴라에게 직접 호소했을 만큼 심각했다.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 방식을 채택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로마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우위에 서서 철저히 중재자 역할만 맡는 방식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즉위하자마자 '알렉산드리아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의 제목부터가 이 문제에 대한 로마 황제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수신인은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그리스인도 아니고,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도 아니다. 수신인이 '알렉산드리아인'으로 되어 있는 것은, 동지중해의 최대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 전체가 민족의 차이를 초월하여 '알렉산드리아 주민'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산업과 통상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공존공영이 이루어져야만 번영할 수 있고, 로마는 그것을 위해 중재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요컨대 불만이 있으면 상대에게 폭발시키기 전에 로마에 와서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클라우디우스는 두 민족의 공존공영이 성립되느냐의 여부는 종교와 생활습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클레멘티아)의 정신을 가질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으며,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양쪽 다 상대에게 관용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3년 전에 일어난 폭동으로 재산상의 손실을 본 유대인에 대해 손해배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손해배상을 하려면 가해자인 그리스계 주민에게 배상을 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런 것을 문제삼으면 폭동 재발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러나 유대계 주민에 대해서는 티베리우스가 인정한 권리를 모두 재확인했다.
(1) 알렉산드리아의 5개 지구 가운데 2개 지구에 거주할 권리.
(2) 종교의 자유 및 예루살렘 신전에 매년 헌금할 권리.
(3) 유대인 거주지역 안에서의 재판권, 다만 사형만은 이집트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4)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지킬 권리.
(5) 군무를 비롯한 공직의 면제.
티베리우스 방식을 채택했으니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에 인정된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사업상 평등관계도 재확인된 것은 당연하다. 로마는 유대교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5)의 병역 면제를 인정했지만, 그리스계 주미은 로마가 인정하니까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관용'을 베풀어준 느낌이었다. 사막에는 강도가 출몰한다. 홍해에는 해적이 출몰한다. 이런 무법자를 격퇴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패권국가인 로마의 임무다. 이집트에 주둔해 있는 2개 군단은 로마인 군단장과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병사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군은 주력인 현지인을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실제로 이집트의 '평화'를 지키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는 보조명, 특히 소대나 중대급 지휘관은 그리스계 이집트인이 맡고 있었다. 그리스계 주민이 보기에, 사업에서는 평등을 누리면서 종교적 이유를 방패삼아 '평화' 유지에는 관여하지 않는 유대계 주민은 요즘 말로 하면 '안보 무임승차'를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동지중해를 양분하고 있는 그리스계와 유대계의 적대의식은 '관용'으로 해겨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했다. 그래도 클라우디우스의 공식적인 태도 표명으로 알렉산드리아는 일단 정상을 찾았다. 그것은 그리스계와 유대계를 포함하는 '알렉산드리아인'이 클라우디우스가 말하는 이치를 납득했기 때문이라기보다 편지말미에 적혀 있는 로마 황제의 위협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이치를 이해하고 납득하는 사람은 항상 소수파이게 마련이다. 다수파한테는 위협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자의 위협에 다수파가 굴복하면, 이치를 이해하는 소수파의 입장도 강해지는 이점이 있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쓴 '알렉산드리아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로마의 '제일인자'가 앞으로도 계속 이해심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응할 것인지의 여부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손을 댄 유대인 대책은 이것으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잘못 계산한 것이 하나 있었다. 생전의 티베리우스가 꿰뚫어보았듯이, 해롯 아그리파의 야심은 역시 로마 동맹국의 군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 컸던 모양이다. 이웃인 시리아 속주에 주재하는 로마 총독은 유대 왕의 행동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할 수 없게 되었다. 헤롯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인정한 해롯 왕 당시의 영토를 거의 다 물려받았지만, 클라우디우스와의 개인적인 친교를 너무 믿었는지도 모른다. 상대는 심약한 클라우디우스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해롯 왕이 죽은 뒤 아우구스투스는 예루살렘 성벽을 짓는 것을 금지했지만, 해롯 아그리파는 마음대로 예루살렘 성벽을 짓기 시작했다. 이것을 안 시리아 총독은 단호한 태도로 유대 왕에게 성벽을 파괴하라고 '진언'해야 했다. 헤롯 아그리파는 작전을 바꾼다. 로마 제국 동방에 있는 모든 왕국의 왕들을 회의에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 총독의 보고를 받은 클라우디우스의 엄중한 권고로 이 계획도 실현되지 못했다. 로마는 가상적국 제1호인 파르티아 왕국과 로마 제국 사이에 완충지대가 되어 있는 동방의 왕국들과 개별적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 왕국들이 자기들끼리 동맹관계를 맺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유대인 왕의 유대 민족 통치는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헤롯 아그리파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디우스는 낙담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지 않았을까. 헤롯 아그리파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잇기에는 너무 어렸고, 따라서 유대인 왕을 내세워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 것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처럼 매사를 오로지 유능한 헤롯 아그리파는 벅찬 상대였다. 결국 서기 41년부터 44년까지 3년 동안 유대인 왕의 지배를 거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지방은 다시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게 되었다. 황제가 임명하는 유대 장관이 직속상관인 시리아 총독의 감독을 받아 다스리는 체제다. 클라우디우스는 체제를 티베리우스 방식으로 돌려놓았을 뿐 아니라, 내용도 티베리우스 방식으로 되돌렸다. 유대에서 지배자 로마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나 물건은 최대한 배제했다. 유대 장관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이사레아에 주재한다. 로마군 병영도 카이사레아에 있다. 로마황제를 나타내는 것은 우상숭배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상은 물론 군단기조차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몇 년마다 바뀌는 장관들 중에는 무지하고 무신경한 장관도 없지 않았고, 그래서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에 전혀 마찰이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항상 중동의 '화약고'였던 팔레스타인 땅은 그후 20년 동안 평화를 누리게 된다. 해롯 왕이 죽고 유대가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게 된 서기 6년부터 헤아리며, 이교도인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무려 60년 동안이나 평화를 유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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