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7호 - 2024.01.09. 화요일(음력 : 11. 28.)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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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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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자유롭고 국민 모두가 글 읽을 줄 아는 나라에서라면 만사가 안전할 것이다.
― 토마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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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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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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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리는 맞춤법
이성이 맞춤법을 자주 틀리면 호감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나온 결과이다. 인터넷과 SNS에서는 맞춤법을 일부러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정겹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도가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일부러 틀리는 것과 모르고 틀리는 것은 구별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든다.
헷갈리는 맞춤법 중에 어미와 관련된 것이 많다. ‘-데요’와 ‘-대요’는 뜻이 다르다. ‘-데(요)’는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회상할 때 쓰는 반면에 ‘-대(요)’는 남이 말한 내용을 전달할 때 쓴다. “모스크바는 날씨가 춥데(요)”라고 하면 “모스크바에 가봤더니 날씨가 춥더라”는 뜻이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날씨가 춥대(요)”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모스크바 날씨가 춥다고 하더라”는 뜻이 된다.
‘-에요’와 ‘-예요’는 발음상의 편의에 따라 구분된다. 받침이 있는 체언 뒤에서는 ‘-이에요’, 받침이 없는 체언 뒤에서는 ‘-이에요’가 줄어든 ‘-예요’를 쓴다. “연필이에요” “책이에요” “ 물이에요” “학교예요” “어디예요” “누구예요”와 같이 쓴다. 그렇다면 ‘아니에요’가 맞을까? ‘아니예요’가 맞을까? ‘아니다’는 용언이므로 어간‘아니’에 ‘에요’가 붙어 ‘아니에요’가 된다.
‘되’와 ‘돼’도 쓸 때마다 고민하게 된다. ‘되어’로 바꿀 수 있으면 ‘돼’가 맞다. ‘되어요’ ‘되어서’ ‘되었고’ ‘되었다’가 줄어서 ‘돼요’ ‘돼서’ ‘됐고’ ‘됐다’가 된다. ‘되’는 자음으로 시작하는 어미와 붙어 ‘되고’ ‘되니까’ ‘되는데’처럼 쓴다. ‘되’는 어간으로 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안 되”가 아니라 “안 돼”가 맞는 것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거칠은 들판’ ‘낯설은 타향’
지난 한글날에는 가수 김태원이 작사ㆍ작곡한 우리말 사랑 노래가 아나운서들의 합창으로 처음 공개되었다. 방송에서는 노래를 만든 동기와 과정이 함께 소개됐는데, 그 중 노래 가사와 관련한 일화가 눈길을 끌었다. ‘날아가는 새들의 노래가 되고’라는 가사가 있는데, 처음에는 ‘날으는 새’였다고 한다. 그러나 ‘날으는’은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아나운서들의 지적에 따라 ‘나는 새’로 하였다가, 가락에 맞추어 다시 ‘날아가는 새’로 수정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날으는 원더우먼’(옛날 TV 프로그램 제목), ‘날으는 돼지’(만화영화 제목), ‘세상 속을 날으는 우리 두 사람’(노래 가사) 등 ‘날으는’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나는’이 올바른 표현이다.
‘날다, ‘놀다, 살다’ 등 어간이 ‘ㄹ’ 받침으로 끝나는 동사나 형용사는 ‘ㄴ’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받침의 ‘ㄹ’이 탈락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놀이터에서 놀으는 아이’ 대신 ‘노는 아이’라고 하거나 ‘우리 동네에 살으는 사람’ 대신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속담에 ‘난다 긴다 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같은 말들이 있는데, 여기서도 ‘날은다, 날으는’ 대신 ‘난다, 나는’을 쓰고 있다.
‘날다’뿐 아니라 ‘거칠다, 녹슬다, 낯설다’ 등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노래 가사 에 나오는 ‘거칠은 들판’, ‘녹슬은 기찻길’, ‘낯설은 타향’ 등은 모두 ‘거친 들판’, ‘녹슨 기찻길’, ‘낯선 타향’으로 해야 한다. 노래 가사나 영화 제목 등은 한번 정해지고 나면 잘못된 표현이라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한글날을 맞아 특별히 만들어진 ‘우리말 사랑 노래’가 잘못된 가사 없이 나오게 되어 다행스럽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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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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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새소리 - 천상병
새는 언제나 명랑하고 즐겁다.
하늘 밑이 새의 나라고
어디서나 거리낌없다
자유롭고 기쁜 것이다.
즐거워서 내는 소리가 새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를
울음소리일지 모른다고
어떤 시인이 했는데, 얼빠진 말이다.
새의 지저귐은
삶의 환희요 기쁨이다.
우리도 아무쪼록 새처럼
명랑하고 즐거워하자!
즐거워서 내는 소리가
새소리다.
그 소리를 괴로움으로 듣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놈이냐.
하늘 아래가 자유롭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새는
아랫도리 인간을 불쌍히 보고
아리랑 아리랑 하고 부를지 모른다.
∼∼∼∼∼∼∼∼∼∼∼∼∼∼∼∼∼∼∼∼∼∼∼∼∼∼∼∼∼∼
계월향에게 - 한용운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은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별을 받치고
매화가지에 새 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
숨 ㅅ기내기 - 정지용
나-f 눈 감기고 숨으십쇼.
잣나무 알암나무 안고 돌으시면
나는 샅샅이 찾어보지요.
숨ㅅ기내기 해종일 하며는
나는 슬어워진답니다.
슬어워지기 전에
파랑새 사냥을 가지요.
떠나온지 오랜 시골 다시 찾어
파랑새 사냥을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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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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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석몰촉(中石沒鏃)
中:가운데/맞을 중. 石:돌 석. 沒:잠길 몰. 鏃:화살 촉.
[원말] 석중석몰촉(射中石沒鏃).
[동의어] 석석음우(射石飮羽), 석석몰금음우(射石沒金飮羽), 웅거석호(熊渠射虎).
[유사어] 일념통암(一念通巖),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출전]《史記》〈李將軍專〉,《韓詩外專》〈卷六〉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① 전한(前漢)의 이광(李廣)은 영맹한 흉노족의 땅에 인접한 농서[감숙성(甘肅省)] 지방의 무장 대가(武將大家) 출신으로, 특히 궁술(弓術)과 기마술이 뛰어난 용장이었다. 문제(文帝) 14년(B.C. 166), 이광은 숙관(肅關)을 침범한 흉노를 크게 무찌를 공으로 시종 무관이 되었다. 또 그는 황제를 호위하여 사냥을 나갔다가 혼자서 큰 호랑이를 때려잡아 천하에 용명(勇名)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이광은 숙원이었던 수비 대장으로 전임되자 변경의 성새(城塞)를 전전하면서 흉노를 토벌했는데 그때도 늘 이겨 상승(常勝) 장군으로 통했다. 그래서 흉노는 그를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며 감히 성해를 넘보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황혼 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신념으로 활을 당겼다. 화살은 명중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꼼짝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화살이 깊이 박혀 있는 큰돌이었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쏘았으나 화살은 돌에 명중하는 순간 튀어 올랐다. 정신을 한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한시외전(韓詩外專)》에도 초(楚)나라의 웅거자(熊渠子)란 사람이 역시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화살 깃까지 묻힐 정도로 돌에 깊이 박혔다[射石飮羽]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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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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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10. 여씨천하(1/2)
효혜제가 서거했다. 나이 불과 23세였다. 모후와의 갈등으로 고민하다가 술과 여자와 동성연애에 탐닉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단축시킨 결과였다. 예법에 따라 여태후는 대성통곡했다. 그러나 여태후의 그런 울음소리를 예의 주시하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장벽강이었다. 나이 겨우 15세였으나 부친 장량을 닮아 현명했다. 그때 장벽강은 시중(궁중에서 황제를 모시는 관리)이었다. 장벽강은 승상 진평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승상, 태후한테는 효혜제 한 분 뿐으로 그분만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의 방법이야 잘못되었더라도 어떻게 외아들을 잃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시지요."
"이상한 일이오. 그런데 그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소?"
"효혜제한테는 장성한 아들이 없습니다."
"장성한 아들이 없다는 것과 태후께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근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관계가 있지요. 폐하께선 적자 없이 붕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되자 태후께선 조정의 중신들한테서 권력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진평은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그렇다면 당장 어떤 조처를 취하는 게 가장 좋겠소?"
"어린 소견이지만 피비린내를 피할 수 있는 작금의 상황으로는 우선 태후의 집안 사람들인 여태. 여산. 여록을 장군으로 임명해 남북 양군의 병권을 맡기도록 하시고, 나아가 여씨 일족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확실하게 권력을 잡도록 조치하십시오."
"그건 무슨 뜻이오?"
"조정의 중신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무어요?"
"그렇게 하셔야 태후는 중신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풀 것이며, 따라서 여러 중신들은 안심하고 때를 기다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진평은 무릎을 쳤다. 장벽강의 제언을 즉각 실천에 옮겼다. 그러자 태후는 몹시 기뻐하는 기색을 띠었으며, 그 후로부터 효혜의 죽음에 대해 정작 슬퍼하는 분위기가 어렸다. 태자가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너무 어렸다. 그때부터 천하의 법령은 모두 태후에게서 나왔으며 자신이 내리는 호령을 제 라했다. 사실상의 황제가 된 것이다. 원래 효혜제의 황후는 장오의 딸이었는데 아이를 낳지 못했다. 여태후는 오래 전부터 그 점을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다. 효혜의 후궁한테서 난 자식을 효혜의 실자라 속이고 제위에 오르도록 해야지!' 여태후는 일을 섣부르게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우선 효혜제의 황후에게 명령했다.
"모든 것이 너를 위해서이다. 일단 임신한 것처럼 세상을 속여라."
며느리를 닥달한 태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효혜의 후궁한테서 태어난 사내아이를 황궁으로 데려왔다. 결국 빼앗아온 것이다. '이런 사실이 들통나면 곤란하다. 태자의 생모를 죽여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어린 새 황제는 일단 효혜제의 황후가 낳은 것으로 공표 됐다. 태후는 완벽하게 세상을 속인 것으로 짐작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태후는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조정에서 회의를 주재했다. 먼저 우승상 왕릉에게 물었다.
"여씨들도 고조께서 천하를 평정할 때 크게 도움을 주었으니 마땅히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대 생각은 어떻소?"
왕릉은 전날 유방이 한중에서 되돌아나가 항우를 공격할 때 병사를 이끌고 유방에게 귀속한 인물이었다. 항우는 그런 왕릉의 모친을 잡아 군중에 두고 있었다. 마침 왕릉의 사자가 왔으므로 항우는 왕릉을 회유하기 위해 그의 모친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는 것처럼 꾸몄다. 그러나 왕릉의 모친은 강직한 여인이었다. 아들의 사자가 떠날 때 몰래 말했다.
"내 아들 왕릉에게 전해주시오. '한왕(유방)을 삼가 섬겨라. 덕이 있는 장자이시다. 이 어미 때문에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나는 죽어서 너의 사자를 돌려보내는 것이다'라고 그러고는 칼에 엎드려 죽었다. 그때부터 왕릉은 절치부심 유방을 도와 천하평정 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왕릉 역시 강직한 인물이었다. 여태후의 하문에 머믓 거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고조께서는 백마를 잡아 저희들과 함께 그 피를 입에 바르면서 맹세 하셨습니다. '유씨 외의 다른 사람이 왕이 되거든 천하가 협력해 그자를 치겠다'고 말입니다. 이제 여씨를 왕으로 삼는 일은 분명히 그 맹약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그래요?"
태후가 곳으로 좋아할 리가 없었다. 어쨌건 태후는 멋 적었지만 내친김에 옆의 좌승상 진평과 강후 주발에게 동시에 물었다.
"그대들 생각도 우승상의 것과 같으시오?"
진평이 나섰다.
"아닙니다. 저희들 생각은 우승상의 생각과는 상치됩니다."
태후는 그 보란 듯이 갑자기 기고만장해졌고 왕릉은 기가 찬 듯 진평과 주발을 노려보았다. 조정회의는 끝났다. 분개한 왕릉은 진평과 주발을 뒤따라 나와 물고 늘어졌다.
"여보게들! 고조께서 입에 피를 바르시며 맹세할 때 그대들도 옆에 있지 않았는가! 고조께서 붕어하신 후 태후가 황제가 되어 여씨들을 왕으로 삼으려 하는데 글쎄 그대들은 태후의 비위를 맞추느라 고조와의 맹약을 헌신짝 버리듯 하니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난중에 지하에서 뵙겠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주발이 대꾸했다.
"그대가 이 자리에서 우리들의 그름을 따지고. 또한 조정에서 논쟁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대를 반박할 여지가 없었을 만큼 그대가 옳았지만 글쎄, 조금만 더 신중히 생각해 보게."
"무얼 어떻게 생각하란 말인가!"
"한나라의 사직을 보호하고 유씨 자손을 안정시키는 데 있어서는 우리들 생각이 그대의 것보다 월등 낫네."
"무어? 그렇다면 내 판단이 옳지 못하다고?"
태후가 왕릉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우승상에서 파면시켜 버리고 어린 황제의 태부로 전격 발령냈다. 물론 그의 실권을 박탈하기 위함이었다. 왕릉은 병을 핑계대고 두문불출했다. 진평이 우승상으로 옮겨 앉고 뜻밖에도 심이기가 좌승상에 임명되었다. 심이기는 여태후의 애인이었다. 때문에 좌승상으로 서의 국정은 돌보지 않고 황궁에 노골적으로 거주하면서 마치 자신이 황제나 된 것처럼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이게 아닌데! 글쎄, 저자의 권력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두고 보자!' 백관들은 생각을 그렇게 하면서도 아무도 입 밖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여수는 여태후의 동생이었다. 전날 진평이 남편 번쾌를 묶어 죽이려했던 사실을 두고 아직 원한에 사무쳐 있었다.
"언니, 진평을 죽여줘요!"
여수가 참소 한다는 소문을 진평도 들었다. '가만 있자! 어떻게 해야 내가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문득 장벽강이 생각났다. 어리지만 부친 장량을 닮아서인지 영특했다. 여태후의 생각을 먼저 헤아려 여씨들을 중용 하도록 계략을 준 것도 장벽강 이었다. 진평은 밤을 선택해 장벽강을 방문했다.
"태후께서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 같소."
"그야 진승상의 권세가 태후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르는 불안 때문에 그렇지요."
"사실은 나로선 아무 힘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태후가 문제 아니겠소."
"그보다 제가 듣기로는 임광후(여수)가 진승상을 참소 한다지요."
"승상이 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날마다 여인들이나 끼고 앉아 향기로운 술이나 마신다는 식으로 나를 비방한다는 구려. 그래서 내 딴에 요즘 일체의 그런 즐거움을 끊고 지내지요."
"아닙니다. 그건 승상께서 잘못 판단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태후를 안심시키려면 승상께서는 더욱 주색을 즐기시며 정사를 게을리 하셔야 됩니다."
"무어요? 그게 무슨 논리요?"
"진승상한테 그런 너저분한 소문이 파다해야 태후께서 진평이란 인간이 두려워할 인물이 못된다는식으로 안심하실 거거든요. 두고 보십시오. 여수의 참언이 심하면 심해질수록 승상께서는 안전해집니다. 아마 진승상을 안심시키느라고 곧 태후의 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진평은 장벽강의 말이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일리 있는 설득이다 싶어하던 짓거리를 더욱 심하게 요란을 떨며 지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여태후는 진평을 궁으로 불렀다.
"진승상, 소문에 듣자니 요즘 정사는 돌보지 않고 향기로운 술이나 마시며 부녀자나 희롱하고 지내신다면서요."
진평이 대꾸를 못하고 머리를 수그리고 서있자 태후는 웃음끼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신 말했다.
"속담에 '어린애와 부녀자의 고자질은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했소이다. 그런 참소가 들어왔기에 내가 그대를 부르긴 했소이다만 굳이 신경쓸 건 없소이다. "
"황공할 따름입니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할 뿐이지 여수의 참언 따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요."
진평은 그 순간 이런 결과를 예언한 장벽강의 지혜에 감탄했다. '과연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어린 태자에게 얼마만큼의 소견이 생겼을 때였다. 태자가 창지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우연히 전날의 유모를 만났다.
"마침 잘 만났소. 전부터 묻고싶은 게 많았는데 어디 유모를 만날 수가 있었어야지. 지금 유모는 어딜 다녀가시느니 길이오?"
"미앙궁에 마침 잔치가 있어 초대되어 갔다가 돌아가는 길입니다."
유모도 술을 몇 잔 마셨는지 불그레한 얼굴에 적당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에게는 왜 어머니가 없소?"
어린 태자의 느닷없는 질문에 유모는 후딱 술이 깨는 느낌이 들었다. 태자 출생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사실은 목을 내놓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어머니가 없다니요. 그럼 지금 계신 모후는 어머니가 아니고 누구이십니까!" "내가 모를 줄 알고! 선제의 황후는 내 생모가 아니오! 어서 바른대로 얘기해 주시오. 마침 이곳에 아무도 없지 않소. 비밀을 지켜줄 테니 슬쩍 귀띔해 주오. 내 생모는 어디 있소?"
"저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태자의 모친은 지금의 장황후이십니다."
"저엉 이럴 건가! 장황후께서는 임신을 못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는 줄아오! 틀림없이 내 생모가 어디에 계실 거요. 어서 바른대로 대시오!"
유모는 태자의 질문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묘안을 짜냈다.
"결코 이 말은 밖으로 발설해선 안 됩니다. 태자께선 위험에 처해지게 되십니다. 생모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유모는 아무렇게나 대답해버렸다.
"태자를 낳으시고 산후 조리를 잘못하셔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내 생모를 돌본 의관은 누구요? 그리고 그 의관의 집은 어디 있소?"
태자는 집요했다.
"저는 모릅니다."
태자는 결국 이런 방법으로는 유모의 입에서 진실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좋소. 그럼 내가 이렇게 하겠소. 그대의 입으로 사실을 고할 게 아니라 내가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거려 주오. 그렇게 되면 내 생모 사망 비밀에 대해 어떤 소문이 나더라도 그대는 발설한 적이 없는 게 되오."
취했기 때문이었는지 유모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나는 장황후 소생이 아니라 선제의 후궁한테서 낳은 아들이오. 맞소?" 유모는 고개를 끄덕했다. "후궁은 나의 모친이며 내 생모는 병으로 사망하신 게 아니라 누구한테선가 살해되었소."
"제발 그것만은!"
유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린 뒤 비틀했다.
"내 생모를 살해한 배후는 바로 태후일 것이오. 맞소?"
갑자기 유모는 안색이 하얘지더니 통곡하는 얼굴처럼 일그러지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드디어 어린 황제는 생모를 죽인 자가 여태후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제아무리 태후라지만 내 생모를 죽인 뒤 나를 황후의 친아들이라 거짓말했단 말인가! 내 지금은 어리고 실권도 없는 처지이지만 때가 오면 태후를 그냥 두지 않겠다!"
"누구한테서 그런 얘기를 들었느냐!"
한 궁녀로부터 새 황제가 그렇게 중얼거리더라는 얘기를 들은 태후는 깜짝 놀랐다. 궁녀는 서슬퍼런 태후의 협박에 속절없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은 궁녀들은 많습니다. 환관들도 들었답니다. 그것도 여러 번씩이나...."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폐하께 직접 여쭤 보시지요."
궁녀의 뺨에 찰싹 대쪽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화가 난 태후가 뺨을 때린 것이다.
"그런 얘길 어떻게 직접 물어본단 말이더냐!"
태후는 걱정이 되었다. 어리지만 황제를 그대로 두었다간 장래에 큰 화근이 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랜 날이 지나도록 새 황제가 묘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태후가 쥐도 새도 모르게 황제를 영항에다 가두어버린 것이다. 대신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태후도 무슨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회 때 태후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승상 이하 대신들이 몇 차례 알현하기를 요청했으나 폐하께선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라 나로서도 그 점을 허락할 수 없었던 바요."
"폐하를 뵐 수 없는 이유라도 설명해 주십시오."
좌승상 심이기가 시침 뚝 딴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로 천하를 움직이는 권세를 장악하고 만민의 운명을 다스리고 있는 자는 그 덕량이 하늘을 덮고 만물을 포용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어야 하오. 위에서는 봉사하고 아래로는 마음으로 백성을 안태하게 하며, 또한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위를 섬김으로써 위의 봉사하는 마음과 아래의 즐거운 마음이 교통해야 비로소 천하가 자연스럽게 다스려지는게 아니겠소. 그런데 지금 황제께서는 오랜 병환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정신착란까지 일으키게 됐으니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천지가 화합하는 덕화로 다스려질 수가 있겠소. 한 마디로 황제의 위를 계승해 종묘의 제사를 받들 만한 능력을 잃고 말았으니 부득이 황제를 교체해야 될 것 같소. 그에게 천하를 통치할 권력을 맡길 수가 없다는 얘기요."
여태후의 태도가 너무나 표독스러웠으므로 대신들 아무도 어린 황제의 폐위에 대해서 이의를 달지 않았다. 좌승상 심이기가 다시 나서서 여태후를 거드는 발언을 했다.
"듣고보니 태후께서는 천하 만민을 위해, 또 종묘 사직을 안태시키기 위해 헤아리는 바가 매우 깊으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저희들 군신들은 머리 조아려 태후의 조칙을 무겁게 받들고자 합니다."
황제의 위를 폐하자마자 태후는 어린 황제를 유폐시킨 뒤 그를 굶겨 죽였다. 다음 황제가 필요했다. 여태후는 곰곰 생각하다가 역시 효혜제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다른 황자를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했다. 그가 유홍이었다. 여전히 여태후는 천하 정사를 제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3대 황제처럼 어린 유홍에게도 신제 원년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어느날 여태후는 막 나들이를 하려 하고 있는데 조나라 왕 유우의 왕후이며 친정 조카인 여원이 징징 울면서 태후궁으로 달려들었다.
"아니, 네가 웬일이냐! 무엇 때문에 울고불고 법석을 떨며 멀리 조나라에서 여기까지 달려왔느냐?" 여원은 한차례 더욱 곡성을 높인 뒤 푸념아기 시작했다.
"들어보십시오. 조왕의 괄시가 심해 도무지 견디지 못해 이렇게 쫓겨온 게 아니겠습니까."
"쫓겨왔다고? 괄시가 심해?"
"여씨 문중의 딸이니 괄시가 족히나 심하겠습니까.
" "여씨 문중이라 괄시를 해?"
태후는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왕후인 저를 후려치면서 '여씨 일족이 무슨 연유로 왕위에 오를 수가 있는가. 태후가 죽으면 난 반드시 여가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까지 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분했던지 여태후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여봐라, 조왕 유우를 즉시 상경토록 해라!"
실상 여원의 남편 유우에 대한 무고는 질투 때문이었다. 유우가 여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측실들만 사랑했기 때문에 여태후한테 거짓말을 꾸며댄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절없이 조왕 유우가 장안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태후는 유우를 만나보지도 않고 위사들을 불러 명했다.
"너희들은 즉시 장안의 조왕 저택으로 달려가 포위해라!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조나라 군신들의 출입까지도 철저히 봉쇄해라!"
여씨의 권력 장악을 방해하거나 비방하는 자까지도 여태후는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조왕 유우는 굶어죽게 되었다. 태후궁의 위사들이 유우의 집을 포위해 출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밤을 택해 조나라 신하들이 탈출하여 음식을 훔쳐가지고 들어오다가 잡히면 위사들에게 끌려간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혹은 조왕이 굶는 것을 알고 누군가가 음식을 보내면 즉시 여태후에게 보고되어 음식 보낸 자는 죄인에게 음식물을 제공했다 하여 엄하게 논죄되었다. 속절없었다. 참다 못한 유우가 저택의 담장 너머로 소리질렀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예 굶겨죽일 작정을 했느냐!"
위사들이 멀뚱멀뚱 쳐다보다 말고 대꾸했다.
"그건 우리들이 알 바 아니오. 우린 태후의 명령으로 저택을 경비하고 있을 뿐이오."
살아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유우는 그래서 원한에 사무친 목소리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여씨 일족이 정권을 잡더니 유씨가 위태롭다. 왕이라는 건 이름뿐. 나를 협박하여 계집을 맡기더니 계집은 질투하여 나를 팔아넘겼다. 계집의 무고가 나라를 어지럽혀도 황제는 깜깜 깨닫지 못한다. 나의 충신들은 어디 있느냐. 어찌하여 나를 버리고 떠나갔는가. 차라리 황야에서 자결한다면 하늘은 나의 올바름을 도와주겠지. 왕이 굶어죽는데 도와주는 자도 없으니 차라리 늦게나마 자살해버릴까. 하지만 무도한 여씨들이여. 하늘의 힘을 빌려 복수하고 말리라!
결국 조왕 유우의 군신들이 모두 끌려나간 후 유우 혼자 남겨진 채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상태에서 굶어죽었다. 유우가 죽던 날에 일식이 있었다. 대낮인데도 천지가 깜깜했다. 여태후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게 무슨 징조냐? 기분이 좋지 않구나!' "죽은 자의 어떤 혼령이 태후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근신 하나가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그러나 태후는 뜻밖에도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럴 것이다! 내가 잘못해 천하에 어둠이 깔리도록 하는 것이다!"
태후는 여씨 중심으로 왕을 선임하는 방법은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지않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죽은 유우의 후임으로 양왕 유회를 옮겨 조왕으로 앉혔다. 그대신 여산의 딸과 강제로 혼인시켜 유회를 감시하도록 했다. 유회는 그런 여산의 딸이 고울 리가 없었다. 정비 여산의 딸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측실들을 총애하기 시작했다. 조나라 왕실에 다시 어둠이 깃들었다. 조왕 유회는 애첩 주매를 껴안고 정사도 돌보지 않은 채 벌써 며칠 때 침실에서 뒹굴고 있었다.
"대왕, 소첩도 배가 고프옵니다. 이젠 일어나셔서 수라상을 받으시지요."
그래도 유회는 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대꾸없이 천장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디 걱정스런 일이라도 있습니까?"
"무어라고?"
"식음을 전폐하시면 병이 됩니다."
"될 대로 되라지. 왕후인 여씨의 딸이 저토록 과인을 감시하고 있으니 속마음이 편할 리 있겠느냐. 그러니 입맛까지 떨어지지. 그런데 말일세. 그대가 위태롭다!"
"예에?"
"심복한테서 들었는데 여태후가 그대를 틈만 있으면 해친다더라!"
주매는 벗은 몸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소첩을 해친다고요?"
"과인이 그대를 사랑하니 태후의 친정조카이며 여왕후인 여귀인들 그대가 고울 리 있겠는가. 그게 걱정되어 이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너를 살릴 궁리를 거듭하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
주매는 몇 번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생각에 골똘하더니 불쑥 말했다.
"대왕, 일어나십시오. 저는 살고 싶습니다!"
"과인이 일어나는 일과 그대가 사는 일이 관계라도 있다는 말이냐?"
"관계가 있습니다. 소첩을 잠시동안이나마 멀리하시고 여귀 왕후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여귀를 사랑하란 말이냐."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십시오. 그래야만 소첩이 살아남습니다."
잠시 궁리하던 유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대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
때마침 왕후궁으로부터 주매를 초청하는 연락이 왔다. '마침 잘 됐다! 이런 기회에 왕후에게 사죄하고 살아날 방도를 찾아야겠다!' 주매가 들어서자 왕후 여귀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는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때마침 대왕께옵서 옥체가 불편하시어 소첩이 간병하느라 이렇게 왕후를 뵙는 일이 늦었습니다."
연적의 관계로 한을 품고 있는 여귀로서는 주매의 그런 변명이 이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침 뚝 딴 표정으로 대꾸했다.
"고맙소. 대왕의 옥체를 돌본다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그대와 더불어 차나 마실까 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오."
마침 그 때 여태후가 보낸 궁녀가 여귀의 옆으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한편 조왕 유회는 애첩 주매가 왕후 여귀의 방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래, 주매는 아직도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다더냐!"
시중 드는 환관 하나가 대답했다.
"왕후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화기애애라?"
그렇지만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랬는데 조금전의 그 환관이 밖으로 나갔다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오더니 소리치는 것이었다.
"대왕, 주미인께서 왕후궁에서 독살되셨다 하옵니다!"
"무어라고?"
"태후께옵서 짐독을 보내시어 몰래 찻잔 속에다 독을 풀어넣으셨다 하옵니다."
"아아, 다 틀렸다.!"
유회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인데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는지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이토록 불의한 세상! 그토록 악독한 여태후! 이름만 왕일 뿐 실권도 없느니 이 자리! 사랑하던 여인마저 뺏아갔으니 나 혼자 외롭게 어찌 살아가란 말인가!' 유회는 그 순간부터 말문을 닫아버렸다. 그러고는 사흘 후에 스스로 짐독을 마시고는 죽어버렸다. 한나라 대신들이 군데군데 모여서서 쑥덕거렸다.
"이래도 좋단 말인가! 조나라 왕으로 책봉되었던 고조황제의 아들 여의. 우. 회 셋 모두가 하나같이 여태후의 손에 죽음을 당하지 않았는가 말일세!"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여태후는 재빨리 조정 회의를 열어 여론을 돌이켜보려는 시도를 했다.
"조나라에 왕이 없어서야 되겠소. 지금 대왕으로 있는 유항을 조왕에 앉히고 싶은데 대신들의 생각은 어떻소?"
조나라 왕으로 부임하는 족족 죽음을 맞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승상 진평은 얼른 계책 하나를 마련했다. 그것은 유항을 죽음에서 구해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황공하오나, 대땅은 한나라 변경입니다. 그 중요성으로 보아 유항이 그대로 지키게 하는 일이 옳은 줄로 압니다. 그 대신 무신후 여록장군은 그 위차가 제일이오니 여록을 조나라 왕으로 앉히시지요." 여태후가 듣기에는 여씨를 왕으로 앉히자는 제의가 뜻밖이었지만 내심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씨 일족을 융성케 하기 위해서는 여씨를 한 명이라도 왕위에 오르도록 하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여록을 조나라 왕으로 삼자고?"
진평의 조언에 여태후는 입이 함지박만해져서 지체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좋은 의견이오! 여록을 조왕에 봉하도록 하겠소!"
즈음에 연왕 유건이 죽었다. 왕후한테서는 아들이 없고 미인한테서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없애버려라!"
여태후는 역시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유건의 아들을 죽여버렸다.
"유건한테는 후사가 없으니 여통을 연왕으로 삼는다."
여씨를 왕으로 삼는 결단에 관한 한 여태후는 쾌도난마였다.
한나라 소제(유홍) 8년이었다. 여태후는 패수 기슭에서 액막이 제사를 지낸 뒤 장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수레에 몸을 싣고 지도정(섬서성)을 지나고 있는데 갑자기 검은색 개같은 괴물이 훌쩍 뛰어오르더니 여태후의 옆수리를 할퀴면서 사라져버렸다.
"앗! 이네 막 그 짐승이 무엇이더냐?"
수레 바깥을 내려다보며 시종관에게 물었으나 시종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짐승이라니요?"
"시꺼먼 괴물 말이다! 내 옆구리를 물어뜯고는 이리로 지나쳤다!"
"꿈을 꾸셨나 봅니다. 이토록 경비가 삼엄한데 개미새끼 한 마리인들 태후의 마차를 침범하겠습니까."
"닥쳐라! 여기 이렇게 상처가 나 있지 않느냐!"
심상치가 않았다. 시종관의 설명도 일리가 있었다. 군사들이 겹겹으로 호위해 가는 백주 대로를 정작 쥐새끼라도 지나갔다면 수많은 자들의 시야에 잡혔을게 분명했으나 아무도 짐승같은 것을 본 호위사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앖다! 분명 시커멓고 커다란 개였어! 이렇게 물어뜯긴 자국만 보아도 그게 꿈이었을 턱이 없어!"
과연 여태후의 겨드랑이에는 금새 할퀸 상처가 있었다.
"심상치가 않다! 어서 점관을 불러라!"
결국은 점을 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에 수레 곁으로 다가온 점관은 이상한 보고를 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점괘에는 분명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죽은 조왕 여의가 태후께 앙갚음을 하고 있습니다!"
여태후의 얼굴에는 붉으락푸르락하는 기색이 엇갈렸다. 점관이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부드러운 대답이 여태후의 입에서 떨어졌다.
"점관의 점괘가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죽을지도 모르겠다."
여태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안으로 돌아온 여태후는 조왕 여록과 여왕 여산을 불렀다. 친정 조카들이었다. 일단 여록을 상장군으로 삼아 북군을 장악하게 하고 여산에게는 남군의 지휘를 맡긴 뒤 가만히 타일렀다.
"너희들 잘 듣거라.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뒤 신하들과 약속하기를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는 자가 있으면 그대들이 협력하여 그들을 치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여씨들이 여럿 왕이 되었으니 신하들의 마음이 평온하지 않을 게다. 결국 중신들은 마음속으로는 복종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더구나 지금의 황제는 어리니 내가 죽는 날에는 대신들이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병권을 쥐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태후께서 돌아가시면 어린 황제를 처치하라는 말씀입니까?"
여산의 대꾸에 여태후는 발끈했다.
"바보같은 소리! 황제를 철저히 보호함으로써 너희들의 권력도 지키라는 얘기가 아니냐!"
유장은 고조 유방의 손자이다. 유방이 젊었을 적 여태후와 결혼하기 전에 낳은 아들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인 셈이다. 유장은 나이 20세로 적극적이며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여록의 딸과 결혼했으므로 더욱 당당할 수가 있었고 그 때문에 여태후를 모신다는 핑계로 동생 유흥거와 함께 장안에서 살 수가 있었다. 결국 여태후의 입장에서는 유장이 여씨집안의 사위였으므로 궁중연회에 자주 참여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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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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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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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에 대한 문제는 한 순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계획과 행동, 선택 그리고 반성을 엮어 가면서 조금씩 이루어진다. 지혜란 구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에 대한 지식이다.
17
행복과 쾌락의 추구는 단념하고 번민과 고뇌에 대한 예방에 힘을 기울여라.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고자 한다면 행복과 쾌락에 대한 욕구를 줄여야만 한다. 큰 불행을 회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너무 큰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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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르기 쉬운 잘못 중의 하나는 자기의 인생에 대해 너무나 엄청난 설계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소원은 몇 가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뜻하는 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그 소원을 이루기 위래 노력한다고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획했던 일은 대개 우리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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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힘들었던 과거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다. 설계했던 인생의 모든 계획을 이루게 되었다고 해서 기뻐하지 마라. 설계도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중이라도 스스로에게 커다란 면화가 일어날 수 있다. 가치관이나 느낌, 정서가 달라지면 인생의 계획은 자연히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목적은 현재의 나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또한 인생의 계획이 변경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많은 세월을 보내는 도중에 그 일을 완성할 만한 의지와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위험과 고난의 세월을 견디면서 재산을 모았지만 막상 돈을 쓰려고 하자 체력과 의지가 전부 소모되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간절하게 원하던 지위를 얻었지만 자신의 두뇌나 기력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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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으로 올라간 후에야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삶의 끝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어떤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시도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일의 결과가 드러났을 때에야 비로소 지금까지 일어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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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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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백제유적 약탈로 악명 높은 가루베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일본인 교사이자 고고학자, 도굴꾼. 공주시에서 백제 고분과 문화재를 연구해 펴낸 저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벌인 도굴과 문화재 반출 행위로 비판을 받는다.]
낙동강 하류와 경주 일원에서 가야고분과 신라고분이 끊임없이 도굴되고 있을 때, 부여와 공주지역에서는 또 백제고분이 같은 수난을 겪고 있었다. 말한 것도 없이 배후의 조종 및 교사자는 수집가를 자처한 돈 있는 일본인 악당과 골동상이었다. 1927년에 공주 송산리 고분들을 조사한 총독부(고적조사보고)에 당시의 도굴실태가 언급돼 있다.
"1927년 3월께 마을사람들의 도굴로 제1호분에서 곡옥·유리옥·철검·도끼 둥의 잔결이 출토됐다는데 현재 그것들은 공주 읍내의 모 일본인이 갖고 있다고 한다. 또 제2호분에서도 순금귀고리 한 쌍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지금 나이치에 있는 아무개의 소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번에 조사산 고분들은 예전에 혹은 최근에 도굴당하고 있어 발견된 부장품은 극히 적었다."
공주와 부여 일원의 백제유적이 처음으로 조사되기는 1909년에 세키노일행이 표면상 구한국 탁지부 위촉으로 한반도 전역의 고적조사를 실시할 때였다. 그들은 1915년의 두번째 학술조사 때엔 공주산성 부근에서 백제고분을 시굴하여 내부 구조도 파악하고 부장품도 꺼냈다. 우아한 문양의 백제와당이 이때 처음으로 주목되었다. 일본인 골동상과 악질적인 도굴꾼들에겐 모두가 고맙기 짝이 없는조사 정보들이었다. 그들은 또 하나의 지하보고에 눈독을 들이고 암암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1923년 6월 공주고등보통학교 동북쪽에서 배수로 공사가 착수됐을 때 땅속의 약 1.5m 지점에 약 100여 장이 전돌을 쌓아 우물처럼 만든 속에 토기 항아리 하나가 들어 있는 신비로운 백제 유구가 발견되었다. 그때 재빨리 그 전돌들과 토기 항아리를 가로챈 자가 있었는데 그가 일본인 골동상 구라모토였다. 진작부터 공주에 정착하여 백제유물의 약탈 및 도굴품을 서울과기타 지역으로 전매하던 구라모토는 측면에 장식적인 문양과 문자가 나타나 있는 전돌들을 불법적으로 독점한 뒤, 서로 긴밀한 일당이었던 서울의 골동상 아미이케에게 내밀히 연락을 취했다.
구라모토의 연락을 받은 아마이케는 당장 공주로 달려 갔다. 그는 약 100여 장의 전돌 가운데서 장식문양과 문자가 들어 있는, 곧 갑이 많이 나갈 10여 장을 골라 잡고 서울로 올아갔다. 그리고 그는 그중의 8장을 즉각 총독부박물관에 팔아넘겼다. 나머지는 당시 서울 남대문로 3가에서 '조선고미술 공예품 진열관' 이란 간판을 걸고 있던 대규모의 고미술상 도미다에게 들어갔다. 세키노 박사가 총독부박물관에 팔린 공주 출토의 진기한 백제 전돌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깜짝 놀란 것은 10월의 일이었다. 그는 박물관측으로부터 "서울의 골동상 아마이케에게 샀는데 출토지는 공주란다" 라는 말을 듣고는 즉시 현지조사를 떠났다. 그러나 공주에 도착하여 문제의 전돌과 토기를 불법으로 점유했다가 팔아먹은골동상 구라모토를 찾아 나머지를 보여달라고 했던 그는 또 한번 놀랐다. 같은 날, 세키노를 한발짝 앞질러 공주로 달려온 아마이케가 전에 고르고 남겨놓았던 전돌들을 깨진 조각까지도 몽땅 묶어가버렸던 것이다. 눈치 빠른 골동상의 무법의 매점 행위였다. 어디서나 출토유물을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그것들을 암거래하여 치부하는 자는 모두가 일본인들이었다. 공주에서는 1920년에 이미 송산리고분의 1호에서 5호까지가 깡그리 도굴되고 있었다. 그렇듯 고분 속의 모조리 약탈된 후, 5호 고분의 텅 빈 현실에는 당시의 마코라는 일제 담뱃갑 하나가 남겨져 있어 도굴꾼의 여유작작했던 범행을 말해주고 있었다(현장을 목격한 공주 고인의 증언). 1926년 8월에 개최되었던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회의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래, 조선에서는 고분은 선조의 영역으로 신성시하였고, 그 부장품과 같은 것에 손을 대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타인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도 고래로 대죄로 여겼다. 따라서 본부(총독부의)의 학술적 조사 때에도 지방민(현지 주민)의 반감을 초래한 적조차 있었다."
이 무렵 공주에는 중학교 교사로서 백제고분을 연구한답시고 여우처럼 부장품을 파먹은, 참으로 악질적인 일본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가루베, 1945년에 일제 패망과 함께 한 트럭 분량의 백제유물 컬렉션을 갖고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간 후, (백제미술)(백제유적의 연구) 등의 저서를 출판하여 백제통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지금도 공주에 가면 지난날의 그의 고분 도굴 사실과 악질적인 유물수집의 내막을 잊지 못하고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나쁜 놈이었다. 연전에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그속에서 수천 점의 부장품이 쏟아져나와 국내외에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소개되었지만 바로 그 앞 왼쪽으로 붙어 있던 제6호분을 완전히 파먹은 자가 바로 가루베였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로써 이미 명백히 입증돼 있다. 공주 시민이 잊지 못할 최고로 악질적인 도굴꾼이요, 유물 약탈자였다. 당시 같은 일본인 사회에서도 그 자는 용서할 수 없는 못된 자로서 말해졌을 정도다."
이는 공주의 여러 증언자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토록 악명높은 가루베가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은 1924년이었다. 그는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10여 년 재직했다. 그동안 그는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백제유물을 수집 혹은 도굴했다. 그는 백제문화를 연구한답시고 심지어 학생들까지 동원했었고, 유적지를 알아 오는 일과 유물 수집을 숙제로 내주는 일조차 있었다 한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그는 부산의 일본인 골동상과 늘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또 교토에서 골동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1927년에 송산리 제1호 고분에서 도굴된 유물들이 공주 읍내의 모 일본인에게 들어가 있다는 당시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의 도굴품 소장자가 가루베였을 가능성도 있다. 가루베 자신은 어떤 글에서도 그의 도굴품에 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으나 불상을 입수했던 일은 약간 밝히고 있다. 공주읍 부근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상'(높이 약 7cm)과 이인면 목동리 부근에서 출토된 '동조보살상'(높이 약 18.2cm), 그리고 부여군 규암면 내리에서 출토된 '금동협시보살상'(높이 약 5.7cm)등이다.
그보다도 가루베는 송산리 제6호분의 단독 도굴과 부장품의 독점적인 약탈에서 최고의 악명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1933년의 일이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제5호 고분 바로 옆에 위치하는 제6호분을 연도 입구의 천장께에서 곧바로 파들어가서 모든 부장품을 깨끗이 약탈해먹은 것이 확실하다. 어떤 증언자는 그가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개를 집어넣었다는 내막까지 말하고 있다. "당시 나이 서른 안팎이었던 가루베는 중학교 교사의 탈을 쓴 천하의 고얀 놈이었다" 고 공주의 증언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제가 도굴해놓고도 그 사실을 공주경찰서에 신고하여 완전범죄를 꾀했을 정도로 대담했다. 공주경찰서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급히 내려갔던 총독부박물관 촉탁 고이즈미(뒤에 평양박물관 역임)는 뒷날 "그것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벌써 "저 가루베가 아무래도 수상쩍다" 는 말이 나돌았는가 함은 얼마 후에는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루베 자식, 이번에 한 20만 원 벌었을 거야" 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고 한다. 논 상답 한 마지기에 70∼80원 할 때 20만 원이라면 그때 가루베가 도굴해 먹은 송산리 제6호분의 유물 내막이 어느 정도였을까가 어림된다. 전문가들은 1971년에 무령왕릉에서 나온 부장품을 염두에 두고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가루베는 공주에서 강경의 중학교로 전근해 가서 이번엔 호남 일대의 유적을 조사·연구한다고 유물을 수집 혹은 탈취하다가 일제 패망의 8·15해방을 맞았는데, 그 겨를에도 그는그의 온갖 불법행위를 컬렉션을 모조리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8.15 직후, 가루베는 강경에서 트럭 1대에다 그의 컬렉션을 몽땅 싣고 재빨리 대구로 도망쳤다. 대구에서 같은 악당이었던 오구라와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으로의 비밀 반출 루트를 물색할 수 있었다. 해방과 함께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으로 취임했던 유시종 관장이 미군정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간 가루베에게 과거의 컬렉션을 어떻게 했느냐고 문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화신이 "공주박물관에 모두 갖다놓고 왔다" 는 것이었다. 뻔뻔스런 거짓말이었다. 유관장은 공주지구 미군정관과 함께 강경까지 가서 가루베가 살던 집도 뒤져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제3장 서양인의 수집
구한국시대의 서양 외교관들
1971년 6월에 나는 구미 각국의 유수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천 점의 한국문화재와 미술품 내막을 10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 소개했다. 편의상 몇몇 경우를 여기에 다시 인용하면, 먼저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초상화 '수각수로도' 는 윌리엄 앤더슨이라는 영국인이 가져간 것을 1881년에 박물관에서 인수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또 고려시대의 '은입사향로'(1358년명) 하나는 인버네언 부인이 갖고 있다가 1945년에 대영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호놀롤루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말의 목각동자상과 고려청자 '상감연화문주전자' 는 1927∼1928년에 개인(미국인)이 기증했다고 카탈로그에 명기돼 있다. 보스턴미술관에는 1910년대 중엽에 한국에 와서 수집한 찰즈 B.호이트의 고려자기 컬렉션이 모두 유증돼 있다. 보스턴미술관은 또 1910년대에 일본인 오카구라가 입수해 갖고 있다가 미국인 에드워드 J.흄즈에게 팔아넘긴 신라시대의 걸작 '금동약사래입상'을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고, 그외에도 국내에서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11세기 고려시대의 은제도금 주전자와 승반을 갖고 있다.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미술관은 1910년대 중엽에 르 브롱드의 한국 도자기 컬렉션을 기증받았고, 덴마크의 국립박물관에는 구한말에 건너간 것으로 믿어지는 신라시대의 청동불 2구와 고려말의 목불, 그리고 각종 민속자료가 진열돼 있다. 1950년대 후기에, 그전까지의 소장자인 일본인으로부터 신라시대의 금동관(고분 도굴품)을 입수해 갖고 있는 파리의 기메미술관엔, 1887년에 서울에서 한·프조약을 체결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한국명 갈임덕)가 1903년까지의 재임기간 중 서울에서 수집한 고려자기 등이 기증돼 있다. 파리에 있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한국문화재로서 체르뉘스키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자그마한 동종은 미술관 창설자인 앙이체르뉘스키가 1871년에서 1837년까지 중국·일본으로 미술품을 수집을 떠났을 때 일본에서 사 간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이 종에는 1311년 마들어졌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서독의 쾰른동양미술관에 있는 한국 도자기들은 "1910년에 아돌프 피셔가 현지(한국)에서 출토품을 수집한 것을 1차세계대전 직후에 입수했다" 고 미술관 카탈로그에 소개돼 있다. 또 이곳에 진열돼 있는 고려청자 '표형주전자' 는 1928년에 런던에서 공개된 호브슨의 컬렉션에 들어 있던 물건이다. 이상은 현재 구미 각국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천 점의 한국문화재와 미술품 중 반출 시기와 경위가 확실한 극히 일부의 내용이지만, 그 나머지는 한국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약탈 혹은 불법적으로 수집한것들이 일본을 통해 각국으로 팔려 나간 것들이다. 다만 앞에서 몇 사람의 서양인 이름이 언급됐듯이 1883년의 인천 개항 이후 서울에 등장한 구미 각국의 외교관·기술자·정부고문·선교사·외국어 교사 등 여러 분야의 서양인 가운데 한국의 옛 미술품을 수집한 사람이 더러 있긴 했으나 그 수는 역시 제한돼 있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 일본인 무법자들처럼 이땅의 문화재를 폭력적으로 약탈하거나 도굴한 무법의 수집가는 별로 없었다. 1894년에 서울의 프랑스어 학교 교장으로 초빙돼 왔던 에밀 마르텔의 회고담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한국에 오던 무렵에 고려자기를 수집하고 있던 서양인은 미국 공사 알렌(한국명 안연)과 프랑스 공사 플랑시 등이었는데, 플랑시의 수집품들은 현재 파리의 기메미술관에 보존돼 있다. 그중에는 내가 그에게 기증한 것도 있다."((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 1934년)
마프텔 자신도 서울에서 약 50년 사는 동안 상당히 안목 있는 수집을 했었는데, 그의 컬렉션이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텔의 회고담
에밀 마르텔은 자신이 서울에서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하던 때의 일화를 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골동 수집을 몹시 좋아하여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1894년)의 이야기지만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 때에는 이렇다 할 재미있는 골동품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프랑스공사 플랑시 씨의 집이라든지 미국 공사 알렌 씨 집에서 처음으로 고려자기를 관상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그러한 고려자기의 꽃병이나 항아리·접시·사발 같은 것은 서울 거리를 아무리 걸어도 어느 골동상에서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구하려 해도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 해 후가 되니가 스스로 구허려고 하지 않는데도 조선인이 자꾸 팔러 오는 바람에 차차 수집을 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이 골동품을 팔러 오는 광경은 매우 재미있었다. 그들은 골동품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아주 소중하게 들고 오지만 그 태도가 도무지 심상치 않고 시종 주위를 살피는데 어딘가 불안에 쫓기는 듯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엇던 것 같다. 즉, 양반의 소장품을 몰래 부탁받고 팔러 오는 경우와 고분의 도굴품을 밀매하러 오는 경우였다. 당시 가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팔러 오던 측이 골동에 관해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던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마르텔은 도 구한말의 골동 가격을 말하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갖고 온 물건들 속에서 눈부신 것 서너 개를 집어 들고 하나씩 가격을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4개를 모두 사준다면 10원만 받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건 좀 비싸니까 8원으로 하자고 교섭하나 그들은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나느 할 수 없다는 듯이, '내일이면 8원으로도 살 사람이 없을 거다, 7원밖엔 못 받을 거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내일 가서 보라' 고 말해서 돌려 보낸다. 그러면 그들은 잠시 떠나갔다가 곧장 되돌아와서 '그러면 8원으로 하자' 고 한다. 결국 그런 식으로 물건을 팔고 갔다. 나는 당시 값이 너무나 싸기도 했으므로 그렇게 상당수를 수집하였고, 나 외에도 그런 방법으로 산 사람이 상당수 있었던 걸로 안다."
일본에서 건어론 무법자들이 고려고분에서 고려자기를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인 가운데에도 어느덧 도굴한 유물을 외국인에게 들고 가서 몇푼 받고 팔아넘기는 불쌍한 행상이 하나씩 둘씩 나타나던 때를 마르텔은 말하고 있다. 한편, 나중에 도자기류의 수집품을 모두 파리의 기메미술관에 넣었다는,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1903년까지의 재임기간 중 고서도 적잖이 수집했다. 오랫동안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비장돼있다가, 1970년대 초 유네스코 주최 '책의 역사' 전시회에 처음으로 나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크게 뉴스가 되었던 고려의 활자본 (직지심체요절)(1377년, 청주 흥덕사 간본)으 서울에서의 입수자가 바로 플랑시였다. 그 사실도 1970년대에 와서야 밝혀졌는데, 당시 파리의 국립도서관 동양도서 책임자인 세귀 여사의 증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진 내막은 이러하다.
콜랭 플랑시는 서에서 프랑스 공사로 있으면서 수집한 수백 권의 고서를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 그는 1930년에 사망했는데, 그 전에 그 한국고서의 일부를 파리의 동경대학에 기증했고, 나머지는 옛 책과 미술품 경매장이던 드루오호텔에 내다 경매에 붙여 팔았다. (직지심체요절)은 뒤의 경매품 속에 들어 있었다. 동양고서 전문가의 평가에 따라 파리국립도서관이 (직지심체요절)을 입수하려고 했을 때엔 이미 그 진본은 앙리 베베르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그러나 베베르는 도서관측의 간곡한 교섭을 받자 "내가 죽은 후에 기증하겠다" 고 약속했다. 이때에 약속은 이행 되었다. 1950년, 베베르가 사망하자 (직지심체요절)은 약속대로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플랑시가 (직지심체요절) 같은 귀중본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것은 그가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던 것 같다. 쿠랑은 1890년부터 1년 반 동안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옛 책들을 연구했는데, 그의 권고에 따라 플랑시 공사는 많은 귀중본을 수집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귀국한 후 프랑스어로 된 (한국서지)를 발간했는데, 그 속에 이미 (직지심체요절)이 소개돼 있다. 쿠랑의 (한국서지)는 1894년부터 1901년까지 4권으로 묶은 한국 고서목록르로 약 3,821종을 다루고 있다. 뒤에 플랑시가 그의 한국 고서 컬렉션 일부를 파리의 동야대학에 기증했다는 것도 쿠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1880년대에 들어와 서울엔 외국 공관이 다투어 등장하면서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 반도가 세계로 향해 문이 열릴때의 급격한 시대적 변화였다. 서양인들은 극동의 작은 '은둔의 나라, 조선'(1882년에 미국인 그리피스가 지은 영문 (한국사)의 표제)의 지리.풍속과 역사.문화에 처음으로 접촉하면서 각자 취미껏 이 땅의 전통적인 공예품.미술품 기타 골동품을 수집하였고, 조선 연구를 위해 귀한 책들도 입수해 가졌다. 그중에서도 교양 있는 서양인들 사이에 가장 환영을 받은 것은 역시 개성 근처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도굴되기 시작했던 고려자기였던 것 같다. 미국 공사와 프랑스 공사를 위시해서 많은 서양인들이 서울에서 그것을 사 갖고 있었다고 에밀 마르텔은 그의 회로록에서 말하고 있지만, 당시의 독점적인 수집 및 매수자는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1902년에 한국에 건너와서 고건축물과 미술문화를 조사했던 세키노의 (한국건축 조사보고)(1904년 간행)에 이런 말이 나온다.
"도기에 이르러서는 근년에 개성 부근의 고분을 발굴(도굴)하여 그것을 얻는 일이 빈번한데 모두 부장품이다. 그러나 분묘를 파는 것은 나라가 금하는 행위로서 범법자는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데 그것을 얻으려 면 다소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나는 서울과 개성에 거류하는 일본인 동포에게서 그와 같은 많은 도기를 보았다. 야마요시 씨도 전에 주한 일본공사관에 근무할 때에 그것을 수집하여 거의 수백 점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도쿄 제실박물관에 방을 하나 얻어 그것들을 진열하고 있다."
한편,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이른 봄께, 달성군 팔공산 속의 한 절에서 모종의 비밀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일본인 특무대원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가토, 그는 병을 정양한다는 구실로 신분을 감추고 약 3개월간 절에 머무르면서 특무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는 금당암의 수미단 밑에 이상한 나무궤짝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속을 조사해 보자고 노승들에게 제의했다. 일본인 특무대원의 요청을 노승들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수백 년 동안 누구도 건드린 적이 없는 궤짝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엔 뜻밖에도 커다란 고려청자 항아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뒷날 가토가 일본의 잡지에 밝힌 바로는 그때의 도자기는 높이가 약 80cm에 우아한 연화당초문이 양각돼 있고, 그 굽 밑에는 유약이 칠해져 있지 않은 태토에 관기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뒤에 들으니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 그 고려자기 항아리는 어느덧 대구의 거주하는 서양인에게 팔려 나갔고, 그 뒤 다시 인천을 거쳐 외국으로 반출되었다"고 하더라고 가토는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절에서 그것을 팔았다는 말이 없고, 오히려 그런 일이 발생하자 절에서는 한때 난리가 났었다는 전문도 있는 것을 보면 가토 자신이 소문을 낸 이후 일본인 무법자들이 그것을 뺏어다가 서양인에게 팔아먹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토가 말하는 대형 고려청자 항아리를 궤짝 속에 전래시키고 있던 절은 현재 대구시 도학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어 있는 동화사였다. 그는 또 이런 얘기를 적고 있다.
"그와 비슷한 또 하나를 나는 본 적이 있는데, 1915년 10월 말에 총독부에서 경남 양산군의 통도사 출장을 명령받았을 때다. 그것은 대종형의 고려청자 향로였는데, 한 선방의 불단 밑에 있던 오랜 궤짝 속에 많은 파경과 함께 들어 있던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가 그것을 목격하던 당시엔 저 유명한 십불골탑(금강계단을 말한 듯) 좌측에 위치한 작은 불전의 향로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후 수년이 지나서 그것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까, 오래 전부터 부산에 살고 있던 일본 왕래의 상인(일본인 골동상을 말한 듯)이 오사카에서 만든 커다란 진유향로를 갖고 가서 그것과 바꾼 후 어디론가 가지고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은 통도사의 희귀한 전세품 고려자기 향로도 결국 일본인 악당이 악랄한 수법으로 탈취해 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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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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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가슴이 답답했다. 꼭 질식해 버릴 것만같은 느낌이었다. (장도영, 그런 자를 믿고 쿠데타 지도자로 모시느니 어쩌니 하면서 비밀을 털어놓다니.......) 박정희는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이일정도로 후회만이 일었다. 그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계획했던 것은 장도영이 예뻐서 업으려고 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장도영, 그를쿠데타 지도자로 초대할 생각 같은 것은 애시당초 털끝만큼도 없었다. 다만, 그가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했기 때문에 그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뿐이었다. 위해서 발벗고 나섰다면 박정희는 자기 자신의 착오를 아프게 반성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는 반성은 커녕 장도영만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박정희의 애증(愛憎)은 좀 남달랐다. 한번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미워하는 감정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하더라도 그는 그 감정을 버리려 하지를 않았다. 그러한 성격 형성은 그의 찌든 가정 환경에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연방 장도영에 대한 증오심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남을 미워하는 만큼 자기도 거기에 때문이다.
"여보, 한 장군. 이거 미치겠구려. 우리 어디 가서 대포나 한잔 합시다."
박정희는 정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디 가서 대포나 한잔 하자고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장경순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 양반이 정신이 있나 없나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동지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텐데 6관구 사령부로 나가봐야 하잖겠습니까?"
"이미 탄로가 났다는데 나가 본들 무엇하겠소?"
박정희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장경순은 울컥하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라왔으나 의지로써 그것을 지그시 누르며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이 아닙니까? 일단은 나가 봐야 할 줄로 압니다."
"그렇긴 하오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도저히 이대로는 갈 수가 없구려. 한잔 하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합시다."
박정희는 다음의 대꾸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앞장서 나갔다. 한웅진, 장경순 두 사람도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여관에서 나온 세 사람은 청진동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주모가 꽤나 반기며 맞아주었다. 술상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마치 기갈들린 사람 모양으로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대폿잔을 비웠다. 15일 밤 11시. 해병 제1여단 여단장 숙소.
"여단장님, 여단장님."
누군가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김윤근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부관 홍경식의 얼굴이 김윤근의 동공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김윤근은 얼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11시였다.
"지금 옆방에서 문성태 중령하고 최용관 소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관 홍경식이 귀띔하자, 김윤근은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김윤근이 들어서자 두 사람은 벌떡 일어서며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출동 준비를 끝내고 출발시간이 되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용관의 대꾸였다.
"그래, 수고들 했군. 그런데 혹시 김동하 장군이 오시지 않았던가?"
"김동하 장군께서는 9시경에 여단장실에 오셨습니다. 여단장님께서 눈을 붙이셨다고 말씀드렸더니 오정근 대대로 가신다면서 나가셨습니다."
부관 홍경식의 보고였다.
"그런데 저어......."
문성태가 조금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뭔가?"
"밤 9시에 전화선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서울과의 전화선은 절단된 상태로 있습니다만, 군단과의 전화선은 끊은 지 가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에 다시 끊지를 못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거듭해서 끊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었다.
"고문단의 동태는?"
"이상이 없습니다. 조용하기만 합니다."
김윤근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었다. 자꾸 흔들려지는 마음을 꽉 붙들기 위해서였다. 밤 11시 30분. 청진동 대폿집. 박정희는 취했다. 취하자 그의 사고력이 한골수로만 파고 들었다. 그리고는 자꾸 그 한 가지 생각만 곱씹었다. (쿠데타를 꿈꾸어 오기 10년, 이제 거사하려는 마당에 탄로났다고 해서 내가 수는 없지 않은가?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쿠데타 지휘본부로 가는 것이 떳떳한 장부다운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6관구 사령부로 가자!) 마침내 박정희는 결심을 했다. 취기 덕분이었다. 알콜이 마비시켜 놓은 두뇌는 사고력이 감퇴되고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술이란 그래서 사나이들의 세계에 없어서는 아니될 마약인지도 모른다.
"한 장군, 장 장군, 상황이 어찌됐든 우리 지휘본부로 갑시다. 여기서 이렇게 앉아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릴 수야 없는 일 아니겠소?"
박정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별 한 개가 더 많은 육군 소장이 지휘본부로 사람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장경순의 표정은 순간 비장한 각오가 서렸지만 한웅진은 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장 장군, 장 장군도 눈치 챘으리라 생각하오만 아까 우리 집에서 나올 때 우리 뒤를 검은 지프차가 미행하지를 않았소? 그들은 우리를 또 미행할 것이 틀림없소. 그러니 장 장군이 그 지프를 맡아서 따돌려 주시오. 그리고 나서 지휘본부로 와 주시오."
"알겠습니다."
박정희는 두 사람에게 쿠데타가 실패했을 경우에는 장부답게 어쩌구 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거리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가리지 않고 발을 묶어 버렸던 것이다. 통행금지시간은 밤 12시 자정에서 새벽 5시까지였다. 고요에 묻혀 있는 거리를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린다는 것은 참으로 상쾌하고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지금 그러한 기분을 만끽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속력을 낼 수 있는 한 힘껏 달려."
박정희의 명령에 운전병은 그런 명령을 기다리고 있기나 했던 것처럼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100, 120, 130, 속도계는 쭈욱쭉 뻗어 올라갔다. 박정희의 지프가 속도를 올리는 것과는반비례로 장경순의 지프는 처음에는 박정희의 지프에 보조를 맞추어 달렸으나 죽을 지경인 것은 미행하는 지프였다. 미행 지프는 박정희의 뒤를 따르는 지프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박정희의 지프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의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미행 지프도 덩달아 속도를 냈다. 그것을 장경순의 차가 훼방을 놓았다. 미행 지프가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려 하면 장경순의 차가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어 진로를 방해했고 왼쪽으로 꺾으면 왼쪽으로 꺾어 훼방을 놓았다. 이날 밤 세 대의 지프가 연출해내는 곡예는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해주고 있었다. 장경순은 미행 지프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훼방만 놓다가 박정희의 지프가 모습을 감추자 그는 미행 지프를 엉뚱한 길로 심야의 추격전 같은 이 한 장면은 결국 장경순이 미행 지프를 엉뚱한 길로 유도해 놓고 어디론가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 H아워는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꿩 구워먹은 소식이었다. 도대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소재조차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은 출동부대에 전화를 걸어 독려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뭐, 장애에 부딪혀 있다고?"
제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은 출동준비를 갖추어 놓고 H아워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출동할 수 없는 장애게 부딪혀 무엇이었을까? 제30사단의 작전참모 이백일하고는 숫제 전화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박원빈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쿠데타는 여기에서 좌절돼 버리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곁에서 박원빈이 혼자서 애쓰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송찬호가 옆에 있는윤태일에게 나직히 속삭였다.
"여보 윤 장군, 우리가 언제가지나 이렇게 앉아서 박 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총장을 찾아가 그분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고 한번 설득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요? 그럼, 그래 봅시다. 어차피 쿠데타가 실패했다면 이판사판이 아니오? 두 사람은 함께 제6관구 사령관실을 나섰다.
"아차! 이 노릇을 어쩌지?"
박정희의 지프가 서대문 로터리를 돌아 서울역 쪽으로 달리고 있을 때 박정희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부르짖었다.
"왜 그러십니까?"
한웅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한 장군의 여관방에 권총을 놔두고 깜빡 잊고 그냥 왔구려."
박정희는 한웅진의 여관방에서 대폿집으로 갈 때, 권총을 풀어 놓고 갔던 것이다. 대폿집에서 여관에 들르지 않고 그냥 제6관구 사령부로 향하고 있던 박정희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몸에 무기를 것이다.
"한 장군, 여관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소. 가서 권총을 가지고 와야겠소."
어쩌면 진압군과 한바탕 붙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무기를 꼭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들과 같은 범인(犯人)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정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니었다. 박정희는 체포의 손길을 뻗쳤을 경우를 대비하여 자결용으로 권총이 필요했던 것이다. (패자는 군말이 있을 수 없다. 자결로써 깨끗이 최후를 마칠 뿐이다.) 박정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를 돌려!"
운전병이 속도를 늦추며 급회전했다. 송찬호, 윤태일 두 육군 중장이 506방첩대에 도착한 것은 박정희가 대폿집을 떠나던 그 무렵이었다. 두 사람이 대장실로 들어서는 것을 본 이희영은 조금 굳어졌다. 그 두 사람은 이희영과는 육사 5기 동기였으나 쿠데타에 가담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희영은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우리는 총장 각하를 뵈려고 왔소."
송찬호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총장 각하는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우리가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는데 안 계시다는 것은 무슨
"안 계시니까 안 계시다는 것 아닙니까? 계시는데 뭐가 무서워 안 계신다고 한단 말입니까?"
윤태일이 나섰다.
"이 대령, 왜 우리를 따돌리려는 거요?"
"따돌리다니요? 따돌릴 이유가 없는데 뭣 때문에 따돌린단 말이오?"
육군사관학교 5기 동기생이지만, 지금은 적대관계에 서 있는 이들 세 사람. 한쪽은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막으려 애쓰고 있는 이들. 그들은 지금 506방첩대 대장실에서 묘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의 와중에 있었던 또 한 토막의 해프닝이 있었다. 이 무렵이었다. 도대체가 매일 얼굴을 맞대는 참모차장이요, 정보참모부장이다. 무슨 해야 할 얘기가 그리도 많기에 장도영은 자정이 넘도록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더란 말인가? 참으로 배포 한번 유한 장도영이었다. 박정희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요정에 질펀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어? 일찍이 세계 역사상에 이런 육군 참모총장이 있었을까? 하기야 장도영으로서는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모두 취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마음을 탁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하, 육군본부에 비상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이희영도 건의를 했고 이철희도 건의를 없어!> 하고 한마디로 잘라 거부했다. 그리고는 다만 헌병감 조흥만에게 전화로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본부 헌병을 전부 비상대기시키고 제6관구 사령부로 긴급 출동해서 쿠데타 음모자들을 전원 체포하라."
이 명령만을 내리고 506방첩대에서 다시 은성으로 돌아온 것이 9시 넘어서였으니까, 그는 은성에서 3시간 가까이를 낭비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3시간 사이에 쿠데타군을 진압할 진압군 이동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진압군 출동은 또 그렇다 치고 은성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참모차장 장창국이나 정보참모부장 김용배한테는 어째서 박정희 등의 쿠데타 거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참모차장 장창국과 정보참모부장 김용배가 누구인가? 바로 육군본부의 핵심 인물들이 아닌가. 이들 두 사람에게 쿠데타에 대해서 눈꼽만큼이라도 털어놨던들 두 사람은 그 어떤 비상대책을 세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을 장도영은 이 두 사람에게 단 한마디도 귀띔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오오! 하늘이여! 하늘은 어째서 장도영과 같은 인간을 이 당에 내리셨는지 해명하소서. 역사는 한 인간이 얼마든지 나라를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을, 장도영을 통해 분명하게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은성에서 술자리가 파하자, 장도영은 두 사람을 집으로 보내고 그 자신은 16일 자정 0시. 찌르릉 찌르릉....... 야전용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해병여단장 김윤근은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단장님, 지금 막 부대의 선두가 출발했습니다."
전화보고를 해온 사람은 대대장 오정근이었다. 순간, 가슴의 고동이 딱 멎으며 숨이 콱막혀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주사위는 던져졌구나! 하는 체념이 번갯불처럼 머리를 두드렸다. 김윤근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0시에서 1분이 지나고 있었다. 예정돼 있었던 대로 해병대는 0시에 출발했던 것이다.
"행운을 빈다."
김윤근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해병대 지휘부는 주력부대의 후미에 붙어 진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지휘반의 출발까지는 다소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김윤근은 기다리는 동안 군종참모(軍宗參謀)를 찾아보고자 숙소를 나섰다. 해병여단에는 신교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군종참모를 모셔 오게."
김윤근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부관 홍경식에게 말했다. 잠자리에 들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홍경식이 그를 깨워 <여단장님이 부르신다>고 하자, 김광덕은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하는 표정을 짓고 달려왔다.
"한밤중에 깨워서 미안하오."
김윤근은 김광덕을 대하자 사과부터 했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김광덕은 여단장의 기분부터 살피려 했다.
"우선 좀 앉으십시오."
김광덕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김윤근은 말을 꺼냈다.
"실은 오늘 밤 우리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되어 있소. 선발부대는 이미 0시 정각에 떠났소."
휘둥그래졌다. 쿠데타라는 말을 그는 생전 처음 들었던 것이다. 김윤근은 왜 쿠데타를 계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잘하는 일이라고 믿고 하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잘못된 일이라면 우리가 하려는 일을 깨뜨려 주시겠지요. 다만 출동 목적을 모르고 나가는 많은 장병들이 피 흘리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얘기를 듣고 난 김광덕은 조용히 일어나더니 마루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는 차분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 "박정희 장군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장도영은 506방첩대장실로 들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10시경가지는 자택에 있었습니다."
이희영의 대답이었다.
"지금은?"
"10시경에 한웅진 장군하고 자택을 나서자 감시조가 미행을 했습니다만 놓쳤다는 보고였습니다."
"뭐 놓쳐?"
장도영은 꽤나 착잡한 모양이었다. 의자에 털썩 앉으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박정희 장군이 오셨습니다."
경비병이 큰 소리로 외쳤다.
"뭐, 박정희 장군이?"
김재춘이 먼저 복도로 달려나갔고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쿠데타 르룹의 장교들도 달려나갔다. 얼결에 이광선도 달려나갔다. 복도를 걸어오다가 우르르 몰려나온 장교들에게 둘러싸인 박정희는 그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찬찬히 훑어보았다. 김재춘의 얼굴도 있었고 오치성의 얼굴도 있었다. 또 송찬호의 얼굴도 있었고 윤태일의 얼굴도 있었다. (아직은 무사하군.) 박정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부사령관실 앞으로 다가와 호기있게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천경, 군수참모 육군 중령 김종호(金鐘鎬) 등 사령부 참모들이 모여 앉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관이었을 때 이 부사령관실이 사령관실이었다. 아마도 박정희는 아직도 이 방이 사령관실인 줄로 알고 이리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박정희를 에워쌌던 장교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부사령관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박정희의 거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입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역겨워할 정도로 심하게 술냄새가 풍겨지고 있었다. 그는 부사령관실로 모여든 장교들이 모두 그 자신의 혁명동지라는 착각이라도 들었는가? 그들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 후 그래도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박정희가 입을 열 때마다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국무총리라는 사람을 비롯해서, 장관들까지도 멋대로 호텔 방을 잡아 나라 일을 본답시고 돈보따리로 뒷거래하는가 하면 이권운동, 엽관운동에 여념이 없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입니까? 과거의 자유당 정권을 뺨치는 부패와 무능으로 이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게 어디 될 말입니까? 데모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안을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러한 절망적 상황을 보다 못해서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 궐기한 것입니다. 동지들도 이제부터 구국혁명의 대열에 서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전력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박정희가 쿠데타의 명분을 공개적으로 밝힌 제일성이었다. 쿠데타의 지도자로서의 연설 내용치고는 좀 치졸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었다. 웅변대회에 나간 중학생의 쿠데타 명분론이었다면 꼭 알맞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사령관실에서 숨을 죽이고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연설 내용이 너무 치졸하구나> 하고 느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긴장된 멤버들은 <꼭 쿠데타를 성공시키고야 말겠다> 하고 새삼 결의를 다졌고 쿠데타의내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엄청난 사실 앞에 넋을 잃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오늘의 현실과 대비해 보기로 하자.
노태우(盧泰愚) 정권하의 사회상은 장면 정권하의 사회상과 비교가 안 된다. 적어도 장면 정권하에서의 데모에서는 화염병이 날고 공공기물을 기습, 파괴하는 일은 없었다. 정당 당사를 점거해서 며칠씩 농성을 벌였던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지금이야말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야 할 때라는 얘기가 된다. 정권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고자 내세우겠는가. 하여간에 앞의 박정희의 연설 내용이 군사 쿠데타의 구실이었던 명분론이었다는 것을 독자는 분명히 기억하기 바란다. 연설을 끝내고 나자, 박정희는 김재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 대령, 장도영 참모총장이 어디 계신지 아시오?"
"506방첩대에 계신 줄로 압니다."
"그러면 전화를 걸어서 나한테 연결시켜 주시오."
"알겠습니다."
김재춘은 명령을 받기가 무섭게 전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장도영과는 곧 연결되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506방첩대에 그대로 앉아 대체로 비대한 사람은 알콜기가 있으면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잘도 존다. 장도영은 비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른 편도 아니었다. 혹시 그는 취기에 못이겨 꾸벅꾸벅 졸기라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자정에 박정희와 통화할 때까지 1시간 남짓 움직임은 전혀 정지상태였으니 말이다. 그가 은성에서 506방첩대로 돌아와서 취한 조치란 박정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탐지해서 보고하라는 이 한 가지뿐이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두 사람은 전화기 옆에서 마주 섰다.
"각하......."
박정희는 장도영과 연결되자 쿠데타의
"저희들은 각하를 혁명의 지도자로 모시고 궐기했습니다. 각하께서도 그리 아시고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 장군, 무엇인가 잘못 판단한 모양인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합시다."
장도영은 박정희한테 사정을 하고 있었다. 좀더 기다려 보자니 뭘 기다려 본단 말인가? 육군의 총수가 풀이 죽어 있다는 감을 잡았던가? 박정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계획단계를 넘어서 행동할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명령 일하에 총궐기하여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여러 말 마시오. 이번에는 장면 정권에 자세히 얘기해 보는 것이 어떻소?"
"내일 다시 만나자구요? 오늘 밤은 어두워서 뜻대로 안 되니까 내일 환할 때 모조리 잡아 넣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있소? 박 장군 좀 취한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만나자는 겁니다."
찰카닥, 송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너무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빈 전화기에 대고 계속 퍼부어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혁명군은 이미 출동을 개시했습니다. 각하께서는 그저 보고만 계십시오."
옆에서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는 것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는 CID 수사요원이 아니라 어디선가 진압군이 출동해서 제6관구 사령부를 덮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박정희를 격리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체포돼도 박정희만은 체포돼선 안 된다.) 이런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김재춘은 박정희에게 진언을 했다.
"각하, H아워보다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혁명군의 사기가 염려됩니다. 한시바삐 공수단으로 떠나셔야 되겠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촌각을 아껴야 할 결정의 순간입니다."
"알겠소."
박정희는 김재춘의 건의를 순순히 김재춘은 사전에 제6관구 수송근무대 중 2개 수송중대를 급유시켜 대기시켜 놓은 바 있었다. 그는 서둘러 책임 장교를 불러 박정희가 떠날 때 그 뒤를 따라가도록 지시했다. 공수특전단에는 자체 수송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수송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박정희는 편지 한 장을 썼다. 장도영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는 사령부를 떠나기에 앞서 이 편지를 김재춘에게 주었다.
"이 편지를 꼭 참모총장에게 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김 대령, 내가 떠난 후에는 김 대령이 계속해서 혁명군을 지휘해 주시오."
이렇게 당부를 하고 박정희는 한웅진과 더불어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났다.
한편, 506방첩대장실에서 장도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송찬호와 윤태일은 장도영이 나타나자 박정희와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통화를 통해서 두 사람은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부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와 동시에 장도영이 쿠데타에 대처하는 태도가 미온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생각했다. (굳이 장도영을 자극하게 될지도 모르는 설득 같은 것은 안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들 두 사람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부 기록에는 송찬호와 윤태일이 박정희의 편지를 가지고 506방첩대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라 김재춘의 명에 따라 박정희의 편지를 가지고 506방첩대로 간 사람은 제6관구 작전처에 근무하고 있던 육군 중위 송정택(宋正澤)이었다. 송정택은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에 있는 동중학교(東中學校) 출신이었다. 장도영이 신의주 동중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김재춘은 일부러 그의 후배인 송정택에게 이 중요한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편지는 장도영의 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도영이 육군본부로 떠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또, 이 편지는 서울 장악과 동시에 장도영에게 전달키 위해서 김종필이 미리 대필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필적으로 볼 때 박정희의 친필인 것 같은 심증이 간다. 장도영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박정희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헤아리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에 그 전문을 소개한다.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충성스러운 육군은 금 16일 3시를 기하여 해.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하였습니다. 각하의 사전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와 민족을 구하고 명일의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이 길 하나밖에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민족적인 사명감에 의하여 결사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우국지성을 촌탁하시오 쾌히 승락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 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로서 전두에서 지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총장 각하를 중심으로 굳건히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다시 한번 맹세합니다. 소관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사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여불비 재배.
5월 16일
소장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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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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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칼리굴라 황제 (재위:서기 37년 3월 18일~41년 1월 24일)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예기치 않은 등극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고 칼리굴라의 숙부인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 8월 1일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웅)에서 태아났다. '토가의 갈리아', 즉 로마화(로마인의 표현으로는 문명화)가 진행된 남프랑스가 아니라, 로마화가 뒤늦게 시작된 프랑스 중북부의 이른바 '장발의 갈리아'가 그의 출생지인 셈이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을 총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지위에 있었고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속주 전체의 총독이기도 했기 때문에, 총사령관 겸 총독의 가족은 갈리아 속주의 수도인 루그두눔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안토니아,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잡고 로마에 도전했다가 아우구스투스한테 패하여 죽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아들딸을 가족으로 키워서 각자 자리잡고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 안토니우스의 딸 안토니아도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인 드루수스와 짝을 지었다. 공화정 말기에 벌어진 권력투쟁의 두 주역 가운데 안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는 외조부가 되고, 아우구스투스는 외조모의 남동생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에게도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로고 있었지만, 나이어린 칼리굴라가 먼저 황제가 된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 고대 역사가들이 말하는 클라우디우스의 신체적 결함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제6권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만년의 아우구스투스는 제위를 물려줄 예정이었던 혈육을 모두 잃고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맞아들일 때, 티베리우스에게는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게 했다. 티베리우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이니까, 아우구스투스와는 혈연이 아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와 혈연관계에 있다. 혈통에 집착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삼아서, 티베리우스의 다음 제위가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하는 바람에 티베리우스의 다음 제위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칼리굴라에게 돌아갔다. 황제 자리는 양자 결연을 통해서나마 율리우스 씨족의 남자들이 차지해온 셈이다.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들어가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클라우디우스가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에 남은 유일한 남자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클라우디우스는 율리우스 씨족과는 다른 클라우디우스 씨족에 속해 있었다. 이 클라우디우스에게 제위에 대한 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야심을 이룰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뿐이다.
생전의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클라우디우스를 제위 계승 후보자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도 클라우디우스가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씨족의 남자들이 제위를 이어야 한다는데 집착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티베리우스가 클라우디우스를 후계자 후보로도 고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4년 동안에 걸친 칼리굴라의 통치가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을 빗나가게 해버렸다. 게다가 율리우스 씨복에는 다른 남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공화정으로 복귀하지 않고 제정을 계속하려면 누군가를 제위에 앉혀야 한다. 군무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때문에, 근위대 대대장인 카이레아의 머리속에는 자기가 충성을 맹세할 황제는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넘이 박혀 있었을 게 분명하다. 클라우디우스는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와 핏줄이 이어져 있었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의 공식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다. 티베리우스는 개인 이름(프라이노멘). 클라우디우스는 씨족 이름(노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황제가 계승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황제 이름'으로 생각해도 좋고, 게르마니아를 제압한 자라는 의미의 게르마니쿠스는 원래 그의 아버지 드루수스에게 주어진 별명이지만, 스키파오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를 제압한 스키파오)의 아프리카누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는 자손에게까지 계승권이 인정된 이름이었기 때문에 오늘날로 치면 성, 고대에는 가문 이름(코그노멘)을 나타낸다.
카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티베리우스도, 칼리굴라도 모두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클라우디우스한테만은 그 이름이 없다는 점에 유념해주기 바란다. 그의 씨족 이름은 '클라우디우스'로 되어 있다. 카이사르가 그린 청사진에 따라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제정 로마의 역사에서도 초대 항제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되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에 이어 제5대 황제 네로에서 끝나는 한세기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불린다. 율이우스 씨족과 클라우디우스 씨족에서 나온 황제들이 다스린 시대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까지가 율리우스 씨족이고,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양자인 네로가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 황제다. 하지만 이 두 씨족이 아무 연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티베리우스의 본가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이고, 클라우디우스와 네로는 각자 어머니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와 핏줄이 이어져 있었다. '율리우스 왕조'와 '클라우디우스 왕조'로 나누지 않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리고 '율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깊은 명문 귀족이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가 하면, 로마 제정에서는 바로 이런 관계가 통치의 정당성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치의 정당상이란 통치받는 것을 피통치자에게 납득시키는 이유다. 오늘날의 대통령이나 수상은 직접선거에서는 득표수, 간접선거에서는 국회의 지명투표로 통치의 정당성을 얻는다. 이런 선거가 없었던 제정 로마에서도 황제가 되려면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것은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통치의 정당성이 중시되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참으로 간단명료하다. 어떤 정치체제에서든, 통치받는 쪽의 콘센서스(이 낱말의 어원은 라틴어로 동의나 승인을 뜻하는 콘센수스다)가 없으면 통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콘센서스는 '납득'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혈통에 집착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정국의 안정과 지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는데도, 클라우디우스의 즉위가 뜻밖일 만큼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도 클라우디우스가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제정이 된 지 70년,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제정이라는 체제 자체에 대한 콘센서스는 원로원에도 일반 시민에게도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근위대가 클라우디우스의 제위 계승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해도 그의 통치가 그후 13년 동안이나 계속될 리는 없었다.
역사가 황제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시대, 로마인들은 명백한 신체적 결함을 가진 인물을 제국의 통치자로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은 탓이 아닐까 싶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걸을 때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곤 했다. 체형도 좌우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신체를 단련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허약한 체격이었고, 무릎이 건들거리는지 걸음걸이도 건들거리는 느낌이다. 머리를 움직이는 버릇을 끝내 고치지 못했고,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 버릇도 있었다. 키는 작은 편이고, 자세도 좋지 않았다. 머리는 작고, 얼굴은 역삼각형이고, 턱은 빈약하고, 좁은 이마에는 세 가닥의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구자는 아니지만 볼품없는 용모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몸차림에 신경을 쓰면 불쾌감을 다소 누그러졌겠지만,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클라우디우스는 본디 그런 데에는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황족 여자들이 이런 클라우디우스를 귀여워하지 않은 것도 납득이간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23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외손자인 클라우디우스의 장점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천성적으로 혈육에 대한 정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서 조카인 클라우디우스를 특별취급하지 않았지만, 매정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의 최대 보호자는 형인 게르마니쿠스였다.
황족으로 태어나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학우겸 놀이친구는 같은 저택에 기거하는 동맥국 왕자들이다. 이들은 볼모로 로마에 와 있었지만, 실제로는 마음대로 귀국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옛날 대영제국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온 식민지 유학자의 자제나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공부하러 간 유학생에 가까웠다. 아이들은 뜻밖에 잔인한 법이다. 신체적 결함을 가진 클라우디우스 같은 아이는 자칫하면 '구박'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런데 다섯 살 위인 형 게르마니쿠스가 그를 철저히 지켜주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도 귀여움을 받았고 여자들한테도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책임감이 강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아버지를 여윈데다 신체적 결함까지 가진 동생은 자기가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형의 보호 아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유년기에도 사춘기에도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불건강한 육체에도 건전한 정신이 깃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클라우디우스 통치의 토양을 형성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를 공직에 앉히려 하지 않았다. 군대 지휘관에 임명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쳐도, 정치적인 직책조차 주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클라우디우스가 소년 시절부터 정열을 쏟은 역사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는 것은 인정해주었다. 칼리굴라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클라우디우스의 일생은 '역사'에 묻힌 채 끝났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가 역사 연구와 저술에 전념할 때, 그의 스승은 만년의 티투스 리비우스였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에 대해서는 제1권(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의 참고문헌에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리비우스(Titus Livius, BC 59-AD 17):(로마사)를 32세 때부터 10권씩 모아서 간행하여 142권 전체를 간행하고 생애를 마친 인물. 로마인이 쓴 로마 역사의 금자탑. 내용은 로마 건국부터 기원전 9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전체의 3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의 상당 부분이 중세에 소실된 것은 로마사 연구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통탄할 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리비우스가 청년기의 클라우디우스에게 역사 연구와 저술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로마인인 티투스 리비우스는 그리스 역사의 금자탑을 세운 투키디데스와 마찬가지로 격동기에 태어났기 때문에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회고 취미가 아니다. '인간성'에 관심을 갖느냐 이나냥가 그것을 결정한다. 격동기에 태어나면, 평온한 시대에 사는 것보다 인간의 온갖 언행을 좌우하는 인간성에 더 많은 흥미를 갖게 마련이다. 특히 관찰력과 분석력을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도 시대의 키잡이가 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라면 더욱 그렇다. 리비우스가 10세 때-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나다, 내전이 시작되다. 11세 때-원로원 주도의 공화파가 옹립한 품페이우스의 군대와 원로원 체제 타도파인 카이사르의 군대가 그리스의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격돌,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다가 살해된다. 12세 때-카이사르가 독재관이 취임하다. 13세 때-도망친 폼페이우스파를 뒤쫓아 북아프리카로 전선을 이동한 카이사르가 탐수스 전투에서 또다시 승리. 공화파 논객인 소카토가 자결하다.
14세 때-카이사르가 에프파냐의 문다 회전에서 승리하여 공화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다. 15세 때-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에 취임. 사실상의 제정이 시작되다. 3월 15일. 브루투스를 주모자로 하는 14명의 원로원 의원이 원로원 회의장에서 카이사르를 암살하다. 16세 때- 카이사르 암살 주모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그리스로 달아나, 카이사르파인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맞아 싸울 준비를 한다. 로마에서는 공화정 신봉자인 키케로가 살해된다. 17세 때-반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파가 그리스의 필리피 들판에서 격돌, 카이사르파가 승리하고, 패배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결하다. 그후 카이사르파(원로원 체제 타도파)도 안토니우스파와 옥타비아누스파로 분열하여 권력투쟁이 시작되지만, 이것도 리비우스가 28세 되던해에 악티움 해전에서 결말이 난다. 이듬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자살로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최후의 승자로 남다. 리비우스가 32세 되던 해-아우구스투스로 이름을 바꾼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 복귀를 선언. 그러나 그 내용은 제정을 확립하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에 태어나 서기 14년에 죽었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59년에 태어나 서기 17년에 죽었다. 황제와 역사가는 시대의 인사이어더와 아웃사이더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동시대인이라고 해도 좋다. 리비우스는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강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팍스 로마나' 확립까지 직접 알 수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로마 건국부터 기원전 9년까지 744년간의 역사를 서술한 (로마사) 142권 가운데 저자 리비우스의 동시대 역사, 즉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대한 저술은 일부 단편을 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로마사 연구자에게는 통탄할 일이다. 리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 서술이 남아 있었다면, 공화정을 부활시키는 척하면서 제정으로 이끌어간 아우구스투스의 절묘하기 짝이 없는 정치를 공화주의자의 관심에서 파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에는 142권이 모두 건재했다. 그것을 읽은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우스를 '폼페이우스 동조자'라고 부르면서 놀렸다고 한다. 놀리기는 했지만, 제정 수립의 으뜸 공로자인 아우구스투스는 '폼페이우스 동조자'가 쓴 역사서를 판금할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않았다. 공화정 신봉자였던 키케로의 전집이 간행된 것도 아우구스투스 시대였다. 로마의 명문 귀족은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가장이자 황제의 친척인 클라우디우스가 '폼페이우스 동조자'를 스승으로 모셔도, 그것이 항간에 물의를 일으킬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50세에 황제로 끌려나올 때까지 클라우디우스가 쓴 저술을 보면, 역시 리비우스한테 받은 영향이 엿보여서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그는 우선 20권에 달했다는 (에트루리아 역사)를 썼다. 이어서 모두 8권이었다는 (카르타고 역사)를 썼다. 에트루리아 민족은 로마가 소년기일 때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권자였지만 서서히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가 결국 로마에 흡수되었다. 카르타고는 청년기에 접어든 로마와 정면으로 격돌하여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거쳐 결국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민족은 패배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역사 서술에 전념했던 시기에 클라우디우스는 승리자인 로마를 대표하는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면서도 패배자와 역사에 관심을 가진 듯싶다.
다음에 쓴 것이 정치가로서는 역시 패배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키케로의 전기였다. 키케로를 변호한 것이 이 전기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이 전기의 연장인지, 아니면 스승의 영향 때문인지, 클라우디우스는 동시대 역사에도 손을 댔다. 카이사르 암살로 재개된 동란의 역사를 (내전기)라는 제목으로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2권까지 썼을 때 붓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안토니아의 충고로 중단했다고 한다. 이 내전의 주역인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는 둘 다 클라우디우스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패배자를 좋아하는 클라우디우스는 브루투스나 안토니우스에 대해 호의적으로 썼을 테고, 안토니우스의 딸인 안토니아는 이 저술이 간행되면 아들의 처지가 난처해질 것을 우려하여 그만두라고 충고한 모양이다.
클라우디우스는 동시대 역사인 (내전기)는 쓸 수 없게 되었지만, 동시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 없었는지, 모두 41권으로 이루어진 (평화기)를 썼다. 평화로운 시대에 대한 기록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상, 아우구스투스가 '팍스 로마나'를 확립해가는 과정을 서술한 게 분명하다. '평화'(팍스)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가 그 이전의 로마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가 쓴 역사라는 점에서 이 저술은 역사적 가치로는 일급사료가 되었을 게 분면하지만, 모두 소실되어 단편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학자들은 클라우디우스가 남긴 연설이나 비문 등의 문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자료 조사도 충분하고 지식도 풍부하지만 역사 저술을 문학작품으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번득이는 재치와 날카로운 맛은 부족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요컨대 그의 저술은 '학자의 저술'이었기 때문에 후세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자들의 평가니까 믿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후세에까지 남을 만한 역사책은 쓰지 못했다 해도, 역사 연구와 저술에 바친 반생은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황제로 끌려나올 때까지 그는 칼리굴라가 깊이 생각지도 않고 지명해준 덕에 몇 달 동안 집정관을 지낸 것을 빼고는 군대 경험도 정치 경험도 전혀 없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일에 대처하려면, 비록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 해도 50세까지 축적된 지식이 효과를 나타내는 법이다. 역사가 황제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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