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1호 - 2023.12.29. 금요일(음력 : 11. 17.)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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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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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저녁 모든 근심걱정을 하느님께 넘겨 드린다. 어차피 하느님은 밤에도 안 주무실 테니까.
― 메리 C.크라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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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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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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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런’
며칠 전 텔레비전을 보다 ‘의심스런’이라는 방송 자막을 접했다. 용언 어간 ‘의심스럽-’에 어미 ‘-은’이 결합할 때에는 ‘의심스럽-’의 말음 ‘ㅂ’이 ‘우’로 바뀌기 때문에 ‘의심스러운’으로 써야 한다. 그럼에도 일반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대신 ‘의심스런’을 더 많이 쓰고 있다.
우리말에서 ‘ㅂ’으로 끝나는 용언은 ‘잡-’(잡다·잡은·잡으니)처럼 어떤 부류의 어미와 결합하든 늘 어간의 말음 ‘ㅂ’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있고, ‘덥다’(덥다·더워·더우니)처럼 자음으로 시작하는 어미와 결합할 때는 어간의 말음 ‘ㅂ’을 그대로 유지하나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와 결합할 때는 ‘ㅂ’이 다른 소리로 바뀌는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ㅂ 규칙 용언’이라 하고 후자를 ‘ㅂ 불규칙 용언’이라 한다. ‘의심스럽-’은 ‘ㅂ 불규칙 용언’에 속한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부터 일상 구어(입말)에서는 ‘의심스럽-’처럼 ‘-스럽-’이 결합되어 파생된 형용사에 어미 ‘-은’을 결합할 때 ‘~스러운’ 대신 ‘~스런’을 써 왔다. ‘의심스런’, ‘자랑스런’, ‘장난스런’ 등이 모두 그렇다. 간결성을 추구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발생한 듯하다. 그렇지만 ‘가렵-’, ‘정답-’ 등의 다른 ‘ㅂ 불규칙 용언’의 경우에는 이런 현상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가려운’, ‘정다운’ 대신 ‘가련’, ‘정단’ 등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스러운’ 대신 ‘~스런’으로 쓰는 것은 잘못되거나 아주 예외적인 것이다.
과거의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도 ‘자랑스런’이 버젓이 쓰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처럼 ‘자랑스런’을 ‘자랑스러운’으로 수정하였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뒤치다꺼리
대학수시모집 원서접수가 막바지다. 작년 이맘때 고3엄마로 초조하고 정신 없이 보내던 날들이 떠오른다. 수험생을 둔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을 것이다. 부모의 자식 뒤치다꺼리는 도대체 언제까지일까? 유독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헌신은 끝이 없어 보인다.
뒤에서 일을 보살펴 도와주는 일을 ‘뒤치다꺼리’라고 한다. 그런데 ‘뒷치닥거리’ 혹은 ‘뒤치닥거리’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뒤치다꺼리’는 명사 ‘뒤’와 ‘치다꺼리’가 합하여 생긴 말로 ‘치다꺼리’는 어떤 일을 치러 내는 것, 혹은 남의 자잘한 일을 보살펴 주는 일을 말한다. ‘치다꺼리’가 거센소리로 시작하기 때문에 ‘뒤’에 사이시옷을 붙이지 않고 ‘뒤치다꺼리’가 되는 것이다. ‘뒤치닥’과 ‘거리’가 합하여 ‘뒤치닥거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뒤치닥’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다.
‘-거리’와 ‘-꺼리’는 헷갈리기 쉽다. 하지만 ‘꺼리’는 한 낱말이 아니다. ‘거리’는 의존명사로 국거리, 반찬거리, 자랑거리, 얘깃거리, 고민거리, 마실 거리 등 ‘어떤 내용이 될 만한 재료’라는 뜻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또한 ‘한나절 거리(한나절 동안 해낼만한 일)’ ‘한 시간 거리(한 시간 동안 해낼만한 일)’처럼 시간 뒤에 쓰이거나 ‘한입 거리(한입에 처리할만한 것)’ ‘한주먹 거리(한주먹에 처리할만한 것)’처럼 수를 나타내는 말 뒤에 쓰이기도 한다. 이 경우 모두 ‘꺼리’로 발음되기 때문에 혼동이 오기 쉽다.
굿을 뜻하는 ‘푸닥거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푸닥거리’는 ‘푸닥+거리’가 아니다. ‘푸닥’이란 말은 없다. ‘치다꺼리’와 마찬가지로 ‘푸닥거리’ 자체가 한 단어이다. 단어의 형태가 비슷하지만 하나는 ‘꺼리’이고 하나는 ‘거리’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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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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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나의 가난함 - 천상병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
선사의 설법 - 한용운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붂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지기는 하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고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습니다.
∼∼∼∼∼∼∼∼∼∼∼∼∼∼∼∼∼∼∼∼∼∼∼∼∼∼∼∼∼∼∼∼~~~~∼∼
별똥 - 정지용
별똥 떨어진 곳,
마음해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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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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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처(糟糠之妻)
糟:술재강 조. 糠:겨 강. 之:갈 지(…의). 妻:아내 처.
[원말] 조강지처 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
[출전]《後漢書》〈宋弘專〉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
전한(前漢)을 찬탈한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씨(劉氏) 천하를 재흥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일이다. 건원(建元) 2년(26), 당시 감찰(監察)을 맡아보던 대사공(大司空:御史大夫) 송홍(宋弘)은 온후한 사람이었으나 간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광무제는 미망인이 된 누나인 호양공주(湖陽公主)를 불러 신하 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그 의중을 떠보았다. 그 결과 호양공주는 당당한 풍채와 덕성을 지닌 송홍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광무제는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앉혀 놓고 송홍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런 질문을 했다.
“흔히들 고귀해지면 (천할 때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가난할 때의) 아내를 버린다고 하던데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소?”
그러자 송홍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 하며[貧賤之交 不可忘],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들었사온데 이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나이다.”
이 말을 들은 광무제와 호양 공주는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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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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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5. 토사구팽 (1/2)
한신은 봉국에 도착했다. 초왕으로 금의환향하게 된 것이다. 그는 도착 즉시 일찍이 밥을 얻어먹은 빨래터의 여인부터 찾았다.
"아랑낭자, 그대는 나를 알아보겠소?"
그러나 아랑은 눈앞의 어마어마한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뵌 적이 없기로 알 수가 없습니다."
"허어 그것 참. 낭자는 지난 날 내가 너무 가난할 때 마침 냇가로 빨래하러 나왔다가 한 달 동안이나 밥을 먹여주지 않았소."
"아, 그분!"
"내가 성공하면 그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소."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때 그대는 왜 날 보고 벌컥 화를 내었소?"
"용서해 주십시오. 당시에는 이토록 극귀하게 되실 줄은 몰랐습니다."
"왜 화를 냈었냐고 묻고 있잖소!"
"실상은 백정 우두머리가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 제가 대왕과 친하다는 사실을 알면 그자가 가만 있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짐짓 화를 내었던 것입니다."
"그대로 믿어주겠소. 그대는 결혼을 했소?"
"예 했습니다."
"물론 그 난폭한 백정과 했겠지."
"아닙니다. 저는 다른데로 시집갔습니다."
"그럼 그 백정은 요즘 어디 있소?"
"여전히 도살장에 있겠지요."
"아무튼 내가 성공하면 그대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내 입으로 약속했으니 그것을 이행하겠소. 그대는 이미 시집을 갔다니 나와 함께 살 수는 없고 대신 천금을 내릴 터이니 가지고 가시오. 그런데 떠나기 전에 한마디 하겠소. 은혜를 베풀 때에 은혜입는 사람의 고맙다는 말을 그토록 몰인정스럽게 받는게 아니오."
아랑은 몸둘 바를 몰라하다가 한신이 나가라는 신호를 하자 도망치듯이 대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번에는 남창의 정장이 불려왔다.
"여보시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있소?"
"물론 알고말고요!"
"내가 밥을 얻어먹으러 왔을 때 그대는 아내와 짜고 일찌감치 설거지까지 해놓던 일도 기억하오?"
"죽여주십시오!"
"그대는 소인배요. 은덕을 베풀 때는 중간에서 그만두는 게 아니오. 그러나 적어나마 나한테 은혜를 베풀었으니 백 전을 주겠소. 어서 가지고 나가시오!"
정장이 종종걸음쳐서 나간 뒤 이번에는 백정 우두머리가 불려왔다.
"그대는 내가 누구라는 걸 알고 있는가?"
"예,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백정은 사시나무 떨 듯 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지난 날 기 기고만장하던 모습은 도무지 없었다. 한신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나를 자네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세 함으로써 나를 놀림감으로 만든 사실도 알고 있겠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백정은 이미 살아남을 것을 포기했는지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그토록 기죽을 것까진 없네."
"예에?"
"자네는 쓸 만한 인물이야."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날 일을 다시 생각해 보게. 자네가 나를 욕보였을 때 내가 자네를 죽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죽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대왕께서는 칼만 가지고 다녔지 소인을 결코 죽일 수가 없는 겁쟁이로만 알았습니다."
"내가 그 때 왜 자네의 배를 찌르지 않았는가를 알고 있나?"
"용기가 없었겠지요."
"아닐세. 충분히 죽일 수도 있었지. 그러나 내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네를 죽였을 때 나는 무엇이 되었겠는가."
"살인자이겠지요."
"맞았네. 내가 자네를 죽여도 명예롭지 않고, 용기있는 자라며 칭찬 받기는 커녕 죄수밖에 더 되었겠는가. 나는 그 순간 모욕을 꾹 참으며 인내를 배우고 있었지. 참을성이 있어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일세."
"소인이 어떻게 그런 뜻까지야 알겠습니까."
"어쨌건 나는 그대를 통해 모욕을 참는 방법을 배웠고 그 때의 은인자중으로 오늘의 공업을 성취한 걸세. 그 모든 것이 자네의 덕일세."
"예에?"
"자네에게 벼슬자리를 주고싶다는 얘기일세."
"결국 전날의 원한으로 소인을 처벌하신다는 뜻입니까?"
"아닐세. 그날이 자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지금 자네에게 갚겠다는 뜻이네. 자네를 초나라 중위(수도경비관)에 임명하겠네."
한편 한나라에서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초왕 한신이 모반하고 있습니다. 경계하십시오. 그렇게 상서한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방이 여러 장군들한테 대책을 물었지만 그 대답들은 한결같았다.
"빨리 군사를 일으켜 한신을 잡아 구덩이에 묻어 죽일 뿐입니다!"
유방은 고민스러웠다. 한신의 모반이 확실치도 않았거니와 설사 사실일지라도 그 처리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진평을 조용히 불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
"밑도 끝도 없이 밀고자의 이름도 없는 종이 한 장 가지고 한신을 모반자로 단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장군들 모두가 한신의 모반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소."
"무슨 근거가 있습니까?"
"초나라 전국을 순시한다면서 수십 만 군사들을 데리고 출입하고 있다는 건 심상치않은 일이오."
"그렇다면 한신은 자신이 모반했다고 밀고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아직은 알 턱이 없겠지요."
"폐하께서 생각하시기에 초나라 병사와 우리 한나라 병사를 비교해서 어느 병사가 더 정예롭습니까?"
"초나라 병사가 더 정예롭다고 보고 있소."
"한나라 장군들 중에 용병술에 있어 한신보다 다 나은 자가 있습니까?"
"없소."
"결국 초의 병사보다 정예롭지도 못하고 쓸 만한 장군도 없는 한나라가 초나라를 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모른 척하고 한신을 그냥 두자는 얘기요?"
"아닙니다. 어차피 그가 모반한 사실이 없다해도 그의 세력을 방치한다는 건 위험합니다. 그를 잡아와서 폐하 곁에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자를 어떻게 묶어온단 말이오. 소문이 나면 금새 그자는 군사를 일으킬 텐데."
"옛날에 천자들은 곧잘 천하를 순행하면서 제후들과 회동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순행하십시오."
"그래서는?"
"남쪽지방에 운몽(호북성)이란 호수가 있습니다. 그 옆을 진이라 부르는데 바로 초나라 서쪽 경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는 운몽으로 순행한다고 속이고 제후들을 진에 회동시키십시오."
"과연 한신이 오겠소?"
"한신도 폐하께서 병사가 아닌 일도 출유하셨다고 들으면 자연히 안심하고 교외로 나와 폐하를 맞을 것입니다. 페하께서는 한신이 알현할 때 그 순간 사로잡으십시오. 이 일은 군사를 풀 필요도 없이 힘 좋은 단 한명의 장정이면 족합니다."
"절묘하다!"
유방은 무릎을 쳤다.
ㅡ모두 진(하남성)으로 회동하라. 남방 호수지대 운몽으로 순행하겠다.
한편 황제 유방의 조서를 받은 한신은 기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어쩐지 이상하다! 갑자기 순행하겠다는 자체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혹시 내가 체포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황제가 초나라에 도착하는 때를 계기로 선수를 쳐서 모반해 버려? 아니다. 그만두자. 내 자신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폐하께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거든.' 그렇게 안심을 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불길한 예감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음식 맛도 떨어지고 밤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 때 한신의 고민을 눈치챈 초의 낭중 진신이 은근히 한 마디했다.
"무얼 그렇게 괴로워하십니까. 한 사람의 목을 베어 바친다면 만사가 해결될 텐데요."
한신은 궁전의 뜰을 거닐다 말고 진신의 목소리를 듣고는 돌다리 중간에 우뚝 서버렸다.
"자네는 언제부텨 거기에 있었는가?"
"대왕께 며칠 전부터 몹시 고통스러워 하시길래 필시 가까운 장래에 급히 하명하실 일이 있을 것 같아 줄곳 뒤따라 다녔습니다. 다만 대왕께서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 소신의 수행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셨을 뿐입니다."
"음, 항상 뒤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자네가 중얼거리듯 뱉아 낸 말은 무슨 뜻인가?"
"대왕께선 분명히 황제폐하의 조서를 받고난 후부터 좌불안석이셨습니다."
"사실은 그렇네!"
"혹시 체포되실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겠지요."
"그토록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 어찌하나."
"그러니까 확실한 대비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대왕의 식객으로 전날 항우한테서 도망쳐나온 종리매 장군이 있지요."
"종리매가 왜? 날개 꺾인 새가 되어 나를 찾아와 지금 나에게서 보호받고 있는 절친한 친구인데."
"종리매가 대왕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인지는 모르나 폐하한테는 원수입니다."
"그래서?"
"그의 목을 들고 가서 폐하를 맞으십시오."
"무어!"
"지금 작은 인정에 사로잡혀 계실 때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이렇든 저렇든 대왕께 가득 의심을 품고 계십니다!"
"아아, 이를 어쩌나!"
한신은 길게 탄식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진신의 충고는 그럴듯해 보였다. '종리매의 목을 바치고 나의 우환을 제거한다?' 그래도 한신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자 진신은 거듭 재촉했다.
"폐하께 충성심을 보이지 않는 한 대왕께서는 십중팔구 체포되실 겁니다."
결국은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차를 놓아라!"
한신은 괴로운 가슴을 부여안은 채 이려(호북성)로 마차를 몰았다. 종리매가 이려의 한적한 곳에 숨어 한가로운 세월은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리매는 한신의 방문을 멋모르고 반겼다.
"어서 오시오. 대왕께선 국사로 바쁘실 텐데 어인 일로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셨소?"
"의논할 일이 있어 왔소이다."
한신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논할 일? 저같은 사람한테 무슨 의논할 일이 다 있습니까. 참, 페하께서 운몽으로 순행하신다지요."
"바로 그 일 때문에 의논할 일이 생겼소이다."
"설마 내 처지가 대왕께 거추장스러워 잠시 피하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소이까. 폐하께서 장군이 초나라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체포하려고 안달이십니다."
"그렇다면 저도 대왕과 당장 결별해야 되겠구려."
"일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소이다. 장군을 숨겨준 죄로 나까지 체포하겠다는 데에 문제가 있소이다." "무어요? 그렇다면 대왕이 살아나기 위해 내 목을 폐하께 바치겠다는 그런 얘기요?"
한신은 차마 그렇다는 말은 못하고 고개만 두어번 끄덕거렸다. 종리매의 눈에서는 불이 일고 있었다.
"여보시오 대왕, 한나라가 초나라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모르겠소."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오? 그건 당신 밑에 이 종리매가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당신을 치지 못하고 속임수로 불러내어 당신을 묶으려 하는 것이오."
"그렇지만."
"정작 당신이 나를 잡아 한나라로 보내어 폐하께 곱게 보일 수만 있다면 그동안 나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스스로 죽겠소.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당신 차례요. 내 목을 바침으로 해서 당신도 죽게 된다는 얘기요. 그래도 내 목을 들고 태평스럽게 폐하를 뵈러 갈 작정이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어서 결정하시오!"
종리매가 갑자기 소리질렀다. 한참만에 한신을 면목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역시 내 생각에는 그대의 목이 필요할 것 같소."
"당신은 역시 소인배구려! 좋소. 죽어주겠소. 그러나 내 목은 당신께 은혜갚는 뜻으로 주는 게 아니오. 당신의 어리석음이 분통터져 스스로 죽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의 그 허망한 우정에 복수한다는 의미도 있소. 잘 사시오!" 그런 다음 종리매는 벽에 걸린 장검을 빼서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종리매가 자결할 동안 한신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자, 이젠 됐다! 나의 후환도 사라졌다!' 며칠 후였다. 고조 유방이 운몽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들고는 정작 태평스럽게 찾아갔다.
"폐하, 그토록 미워하시던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황제의 수레 밑으로 한신이 마악 꿇어앉는 순간이었다. 한 떼의 건장한 무사들이 달려와 한신을 간단하게 묶어버렸다.
"이거 왜 이러나!"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묶인 후였다. 게다가 한신의 몸에는 차꼬와 수갑과 옥사슬까지 채워졌다. 그런 다음 황제의 뒷수레에 실리었다.
"폐하를 뵙게 해 다오!"
한신이 소리질렀지만 주위로부터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신으로서는 정작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과연 세상 사람들의 말이 맞구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니 훌륭한 사냥개는 삶겨 죽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니 좋은 활은 소용이 없고, 적국이 격파되니 지모 많은 신하는 죽는다'고 했다던가.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팽살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유방은 유방대로 쾌재를 불렀다. '눈속의 티같고 목 안의 가시같은 자를 제거했으니 이제사 짐은 베개를 높이 베고 잠을 잘 수 있겠구나!" 기분 좋은 날이었다. 유방은 그날로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유방의 흡족해 하는 기분을 알아차린 전긍이 유방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폐하, 폐하께서 한신을 체포하신 일과 또 진중(관중)에 도읍하신 일은 참으로 잘하신 일입니다. 진은 원래 지형이 유리한 땅입니다. 험준한 산하가 둘러싸여 있고 제후국들과도 천 리나 떨어져있습니다."
유방은 무슨 말인가 하고 수레 밖의 전긍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진나라는 무장군사가 백만이고 국력은 제후국의 백 배입니다. 지세 또한 편리해 병력을 제후국으로 출동시킬 경우에도 그릇의 물을 지붕에서 아래로 내리붓는 것처럼 수월합니다."
"그런데?"
유방은 짜증을 내었다.
"그런데 제나라로 말하라 치면 동쪽으로는 낭야와 즉묵이라는 풍요한 땅이 있고, 남쪽으로는 태산이라는 험고한 자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탁하(황하)로 국한되고, 북쪽으로는 천연의 이가 있습니다. 땅도 사방이 2천리이고 무장병도 백만입니다. 타국과도 천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국력도 제후국의 10배여서 제나라를 일컬어 동쪽의 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얘기요?"
"그래서 한신을 제나라로부터 얼른 초나라로 옮긴 것이 백 번 잘 되었다는 얘기 옳습니다."
유방은 그제서야 응어리진 마음이 풀렸다.
"좋은 의견이군. 그대에게 황금 5백 근을 하사하겠소."
유방은 아무리 한신을 묶어왔지만 천하 인심이 두려워 차마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대가 모반했다고 밀고한 자가 있었으니 어쩔 수가 없는게 아니겠나!" 유방은 한신의 죄를 용서하는 형식을 취한 뒤 회음후로 삼고 가까이 두었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이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해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병이라 핑계대면서 참조하지도 않았고 황제의 출어시에 수행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새까만 부하였던 주발과 관영이 같은 동렬의 후라는 사실도 자존심이 상해 미칠 지경이었다.
즈음에 한신은 어떤 일이 있어 번쾌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번쾌는 담백한 인물이었다. 한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때문에 무릎을 꿇고 한신을 맞아들이면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어떻게 누추한 신의 집에까지 왕림해 주셨습니까."
"신?"
"한 번 신은 대왕께 대하여 영원한 신입니다."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지만 짐짓 밖으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그대와 동렬일 뿐이잖소. 그토록 자세를 낮출 필요는 없는거요."
그런저런 한신의 근황에 대한 얘기들이 유방의 귀로 들어갔다. 한신을 달래는 게 옳다 싶었다. 그래서 유방은 한신을 위로하는 잔치를 궁에서 열었다. 몇 순배씩 돌아 술이 거나해졌을 때였다. 한신의 기분도 많이 풀린 것 같아 유방은 안심하고 그에게 농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짐의 능력으로 보아서 몇 명의 군사를 부릴 수 있을 것 같소?"
한신은 빙그레 웃고나서 대답했다.
"폐하의 능력으로는 10만 명이면 되겠습니다."
"무어?"
"왜 그러십니까?"
유방은 몇 번 씩씩거리다가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능력으로는 몇 명의 군사를 부릴 수가 있겠소?"
"소신은 많을수록 좋지요."
"많을수록 좋다니, 그 많다는게 얼마나 되오?"
"백 만이나 이백 만이나...."
"뭐요? 그런 그대가 10만 병사를 거느릴 정도밖에 안 되는 나한테는 왜 사로잡혔소?"
"폐하께서야 군사를 그 정도밖에 이끌 수 없지만 병사들을 거느리는 장수들은 잘 거느리시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신이 폐하에게 잡힌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유방은 한신의 명쾌한 답변에 호탕하게 웃었다.
"그대는 언변도 출중하구려!"
"그런데 이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황제라는 지위는 하늘이 주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신을 폐하의 자리를 결코 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방은 다시 궁전 내부가 온통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한신은 혼자 뜰을 거닐고 있었다. 유방의 그런 하찮은 배려에 기분이 흡족할 리는 결코 없었다. 여전히 불만스러웠고 원망스러웠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록군 태수로 임명되신 진희장군께서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주인님께 작별 인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가신의 기별에 한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진희장군께서 오셨다고? 어서 안으로 영접하라!"
진희는 오래 전 즉 대장군 시절부터 한신의 심복이었다. 한신은 진희가 목숨을 대신 버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진희가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한신을 갑자기 깊은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신을 진희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은 특별히 부르지 않는 한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대장군께서 좌우를 물리치시는 걸 보니 저에게 은밀히 하명하실 일이 계실 것 같습니다?"
"실상은 그렇소.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아, 걱정 마시고 무슨 내용이든 하명하십시오. 소장은 대장군의 명령이라면 언제든지 목숨이라도 바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심이오.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그대가 태수로 부임하는 거록군에는 천하의 정병들만 모여있는 곳이오."
"과연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폐하께로부터 절대로 신임받는 총신인 거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대가 모반했다며 누군가가 밀고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쉽사리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세 번쯤 밀고가 들어오면 그제서야 폐하께선 그대를 의심하게 될 거요."
"지금 말씀하시는 핵심인즉슨...?"
"바로 그거요! 그대를 위하여 내가 안에서 일어나면 우리는 쉽사리 천하를 도모할 수가 있소!"
"예에?"
"싫소?"
"아닙니다. 소장은 대장군의 능력을 믿습니다. 익히 알고 있지요. 단 한번의 실패도 없는 전지전능의 책략가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식으로 일을 도모해야 옳겠습니까?"
그날 밤 진희는 한신의 집에서 묵으며 세밀한 작전계획서를 받았다.
"삼가 가르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부임후 얼마있지 않아 진희는 과연 모반했다. 싫었지만 유방은 스스로 대장군이 되어 친정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절호의 기회닷! 이번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닷!' 한신은 무릎을 쳤다. 친정길에 앞서 유방은 한신을 불렀다. 그러나 한신은 병을 칭탁해 종군하지 않았다. 속으로 유방을 비웃었다. '저 어리석은 자가 뭐 나와 함께 진희를 치자고? 네놈도 이젠 끝장인줄 알아라!" 대신 한신은 진희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냈다.
ㅡ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은 벌써 들었소. 폐하께서 그대를 징벌하러 떠나긴 했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여기서도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그대를 도우러 즉시 떠날 것이오. 한신은 모든 음모를 가신들과 더불어 치밀하게 짰다. "우선 관아의 관노를 조칙이라 속이고 풀어 그들로 하여금 궁으로 쳐들어가 여후와 황태자를 습격해 죽여야 한다. 궁궐만 제압하면 천하는 우리의 수중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한신의 가신들은 소리지르지는 않았지만 환호작약하는 표정이 얼굴에서는 역력했다. 바로 그 때였다. 문 밖으로부터 아뢰는 가신이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께 죄를 짓고 도망쳤던 악열이 방금 잡혀 들어왔습니다."
악열은 한신의 애첩을 겁탈하려다가 현장에서 들통나 도망쳤던 자였다. 한신은 대사를 앞둔 상황에서 그런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수고했다. 내일 아침에 그자의 목을 베어버려라."
그런데 악열의 동생 악근이 그 소리를 들었다. '아, 어떡하나! 형을 살려야 되는데!'
악근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형을 살려낼 방법이 없었다. 눈물로써 한신에게 호소해 보았자 형의 죄는 용서받을 내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법으로써 정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형을 살려내려면 주인을 잡는 길밖에 없지!'
악근은 궁으로 향해 뛰었다. 달려가 여후에게 한신 모반의 상황을 상세히 일러바쳤다.
"무어야? 한신이 그랬었다고!"
여후는 여후대로 고민이었다. 황제 유방이 없는 상태에서 한신을 소환할래도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부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곰곰히 생각하다가 역시 상국과 의논하는 게 최선이겠다 싶어 급히 소하를 불러들였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몹시 다급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여후의 얘기를 들은 소하는 한참 궁리한 뒤에 대답했다.
"이렇게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선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폐하로부터의 소식이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어떤 내용으로 말입니까?"
"이미 진희를 사로잡아 벌써 사형에 처했노라고 말입니다. 그쯤이면 적어도 한신이 일단 거사는 못할 테니까요."
"급한대로 우선 그 방법밖에 없겠습니다."
소하가 한신에게 사람을 보냈다.
"대장군께 아룁니다. 폐하께옵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진희를 잡아 목을 베었답니다."
"무어"
"지금 뭇신하들이 장락궁에 모여 축하연을 열고 있습니다. 대장군께서도 잠깐 얼굴을 내미시지요."
상국 소하가 보낸 사자의 전갈을 받은 한신은 낙담했다. '아, 그렇다면 하늘이 내 편을 들지 않는구나. 진희가 죽었다면 나의 모반도 없었던 일로 할 수밖에!' 한신은 축하연에 참석할 기분이 도무지 아니었다.
"가서 상국께 말씀드려라. 마땅히 가서 축하해야 할 것이나 병이 위중해 일어날 수가 없다고 말일세."
한편 여후와 소하는 다시 의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요? 한신을 그대로 두었다간 언제 변고를 일으킬 것인지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상국께서 직접 한신에게 가서 장락궁의 축하연에 얼굴이라도 내밀도록 권유하시는 게."
여후가 조르자 소하도 별 수가 없었다. 한신을 찾아가 말했다.
"신하로서의 도리가 이래선 안 됩니다. 아무리 병중이라고는 하나 모반했던 진희의 목을 벤 축하연에 잠깐이나마 얼굴은 내미셔야지요."
그쯤되자 한신도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무리해서라도 일어나 축하연에 참석하겠습니다."
장락궁은 대장군으로 임명된 황태자가 있는 곳이었다. 여후는 벌써 한신이 나타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무사들을 이미 배치해 둔 상태였다. 한신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수레를 몰아 장락궁으로 향했다. '그렇지, 내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진희 참수의 축하연에 나타나야 모반했던 사실이 묻혀지겠지.' 한신이 장락궁의 때를 알리는 종이 걸려있는 종실 앞을 지날때였다. 네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달려들어 삽시에 한신을 묶어버렸다.
"무슨 짓이냐!"
"그건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알 텐데!"
무사 중의 한 명이 씹어뱉듯이 소리쳤다. 한신은 묶인 채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 때 소하가 다가왔다. "승상, 내가 왜 이렇게 묶여야 하오?"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렇다면 나는 끝장이오?"
"남의 탓 하지 마오.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 자랑하지 않고 능력 역시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한왕조에 대한 그대의 공훈은 누구의 공훈과도 비길 데 없이 컸을 텐데 말이오. 천하가 이미 통일된 후에 반역을 기도했으니 이게 무슨 꼴이오. 그래도 그대 할 말이 있겠소?"
곧바로 장락궁에서 한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유방이 안 것은 정작 진희를 토벌하고 돌아온 뒤였다.
"무어요! 한신을 죽였어!"
유방은 여후에게 신음처럼 내뱉었다.
"그자의 모반사실은 확실했습니다."
"가공할 상대가 죽었으니 기쁘긴 하오. 그러나 한나라가 제국을 건설하는 데 그의 공로가 엄청나게 컸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오. 그런 그의 말로가 저토록 비참하니 또한 불쌍하기 그지없구려. 그런데 말이오. 한신 그자가 죽으면서 뭐 남긴 말은 없었소?"
"왜 아무 말이 없었겠습니까. 저를 일컬으며 '일개 아녀자에게 속아 죽게 됐으니 억울하기 그지없네.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겠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뿐이오?"
"이상한 말을 덧붙입디다. '괴통의 계략을 진작 쓰지 못한 것이 원망스럽네! 라고 말입니다."
"무어요! 당장 괴통을 잡아들여야 되겠소!"
거지 몰골로 돌아다니던 제나라 변사 괴통이 잡혀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때 고조 유방은 괴통을 직접 심문했다.
"알고 봤더니 네놈이 한신을 들쑤셔 모반하도록 했다며!"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제가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자가 제 헌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자멸해 버린 겁니다. 만약 그자가 제 계략을 썼던들 폐하께서는 결코 그를 멸망시킬 수가 없었을 겁니다."
유방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저놈 보게나! 그딴 소리를 그토록 태연하게 지껄일 수 있다니! 저자를 당장 팽살해 버려라!"
"팽살이라니요! 아, 억울합니다!"
"억울하다니, 무어가?"
"진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산동의 땅이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영웅호걸로 자처하는 믓 성씨들이 까마귀떼처럼 일어났습니다. 진나라는 그 사슴(황제권)을 잃으니 천하에서는 모두가 그사슴을 쫓아다녔습니다."
"요점을 말하라."
"이 때 키가 크고 발이 빠른 한 자(유방)가 그 사슴을 낚아챘습니다."
"쉽게 얘기하라고."
"도척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요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개란 놈은 원래 자기 주인이 아닌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짖습니다. 당시의 저는 오로지 한신을 알았을 뿐으로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 또 천하에는 예리한 무기를 든 자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 모두는 능력이 모자랐습니다. 폐하 말고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으니까요. 어쨌건 폐하께 대항했던 그들 모두를 삶아 죽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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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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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41
스스로 판단하거나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만이 권위를 존중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 좋은 틀 속에 갇힌 채 그곳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러한 틀은 권위와 편견이라는 다른 틀을 만든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활짝 열어 놓는다. 그들은 어떤 일에도 성급하게 뛰어들지 않으며 논리적이고 침착한 태도로 그 일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42
베토벤의 교향곡은 외면적으로는 어지럽고 복잡해서 듣는 사람에게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음악 속에는 놀라운 균형이 스며들어 있다. 교향곡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교향곡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느끼려고 하다. 음악은 비록 형태는 없지만 순결 무구한 천상의 모습도 그려낼 수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은 우리의 정신을 맑게 정화시킨다. 음악을 통해 우리는 정신의 모든 오물을 씻어 버리고 사악한 요소들을 제거할 수가 있다. 음악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다.
43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을 그 사람의 수준에 맞도록 낮춘다. 그는 자신의 훌륭한 자질을 상대방에게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방보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44
사소한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우리를 깊은 수렁에 빠뜨린다.
45
시간과 공간은 무한하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존재는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허무를 느낀다. 현재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사물은 서로 의존하고 상대적이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언제나 희망을 품고 있지만 만족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허무를 느끼도록 만든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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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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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무법자들에게 유린된 석물들
1916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정 공포한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과 고적조사위원회 설치규정은 그전까지 방임되었던 일본인 무법자와 그들에게 나쁜 짓을 배우고 혹은 매수되어 움직였던 일부 조선인의 문화재 약탈 및 반출행위에 다소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범행은 조금도 중단되지 않았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던 깊은 산골짜기의 절터라든지, 한두 명의 허약한 중이 지키고 있던 몰락한 명찰, 그밖에 교통이 불편하고 외진 유적지에서 그들은 여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물을 빼냈고, 그것을 딴 데 팔아 큰 돈을 버는 불법행위를 감행했다. 당시 일본인 사회에서 그들의 만행은 대개 뒤탈 없이 성공했다. 또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불법적인 이익과 귀한 유물의 소유욕을 충족시켰다.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이 공포된 후 몇몇 경우가 적발돼도 일본인 관련자들은 이렇다 할 형벌을 받는 일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경우와는 달리 일찍부터 생활주택의 정원과 조경에 배치하는 석물로서 불교 문화의 고색 짙은 석탑과 석등을 진중히 여겼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세력으로 이 땅에서 부를 누리게 되었던 많은 일본인들이 그들의 정원에 조선의 아름다운 옛 석탑과 석등 혹은 부도를 들여놓으려고 한 것은, 말하자면 자연스런 생심이었다. 그리고 이 생심이야말로 실제 불법적인 약탈행위들과 공범 관계를 맺게 했고, 동시에 배후조정 혹은 요청자로서 공모하게 한 것이다. 충남 보령의 이름을 잃은 절터에세 인천의 고노라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중간에 내세워 감쪽같이 오층석탑을 반출해내던 무렵, 같은 인천에 살고 있던 우에하라라는 도 다른 일본인은 경기도 용인에서 삼층석탑을 실어다놓고 있었다. 1919년의 총독부 고적조사 서류에서 그 사실이 짝막하지만 명확하게 씌어 있다.
"그 탑은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창리 탑골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작년 말(1919년)에 인천 축현으로 이전한 것으로 그 뒤 다시 현재의 장소인 산수정(지금의 송학동) 우에하라의 택지 안에 옮겨진 것임."
혹시 이탑이 1970년 초까지 인천경찰서 앞의 은행 관사 안에 있었던 삼층석탑과 같은 물건인지도 모르나 이미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시 인천에서 삼층석탑을 조사한 서울의 전문가들은 고려시대의 비교적 우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옛 절터의 석탑이나 부도 같은 역사 유물은 어떤 경우라도 개인이 임의로 처분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불법적인 매매와 반출 또는 약탈이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모두가 일본인들이 직접 간접으로 감행한 것이었다. 다음은 1930년대에 적발된 몇몇의 확실한 사례이다.
1936년에 서울 돈압동 424에 살고 있던 닛타(혹시 뒤에 남대문께에 살며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을 사 갖고 있던 신전의각과 동일 인물인지도 모르겠다)가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원리 절터에 있던 우수한 석탑 하나를 서울 자기집 마당으로 반출했다가 불법행위로 걸렸다. 같은 해 2월에는 군산에 살던 다케다라는 일본인이 이 모라는 조선인 앞잡이와 짜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삼층석탑을 100원으로 몰래 사서 군산으로 반출했는데, 불법적으로 그것을 팔았던 백철현이란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매매를 취소한 후 원위치로 다시 옮겨다 놓았다. 또 같은 무렵에 전북 옥구군 개정면 발산리에 살던 시마다니라는 일본인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각대리의 절터에서 우수한 오층석탑을 무단 반출했다가 적발되었으나 석탑은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방전까지 군산의 어느 농장에 이건돼 있었다는 은산면 숭각사터의 삼층석탑과 관련이 있음직하다.
극적으로 구출된 보화각의 무도와 석탑
지금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보화각) 뒤뜰에는 지난날 일제 밑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유린당했다가 간송 전형필 선생의 극적인 보호를 받은 행운의 '석조부도' 와 석탑이 세워져 있다. 먼저 부도. 원위치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이름을 잃은 절터에서 고려 중엽 이전의 양식을 갖춘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도를 본 일본인 악당들은 마을사람 하나를 매수하여 그것을 공공연히 빼돌렸다. 시기는 1930년대말. 곧 이 부도는 인천으로 옮겨졌고, 배에 실려 일본 본토로 팔려나가게 되는 최악의 수난에 직면해 있었다. 그것을 인천 항구에서 붙잡은 사람이 간송이었다. 민족문화재 수호와 해외유출 방지를 위해 막대한 사재를 아낌없이 그리고 가치 있게 투입하던 간송의 민족적 사명감은 당장 그 일본인 무법자와 대결하게 했다. 그는 일본인이 제시한 엄청난 액수를 즉석에서 지불했다. 부도를 실은 배가 인천에서 출항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극적으로 구출된 괴산 부도는 인천에서 보화각이 있는 숲 속에 옮겨져 소중히 복원되었다. 지금의 상태는 한국전쟁 때 쓰러졌던 것을 1964년 2월 3일에 부도의 은인인 간송의 대기일을 기념하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가 재차 복원한 것이다.
다음은 삼층석탑. 언제 어디서 어떤 일본인 악당이 반출했던 것인지 일체의 기록을 상실한 고려시대의 유물인데. 이미 일본 본토로 팔려갔었다. 그 뒤 오사카에서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을 때 서울에서 간송이 그 정보를 입수했다. 이번에도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되사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사람을 놓아 가격에 구애받지 말고 낙찰시키도록 당부했다. 오사카 경매장에서의 응찰 경쟁자는 당시 일본의 어느 재벌이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막판에 가서 손을 들었다. 온갖 오욕을 당하던 석탑은 간송의 민족적 결의와 대담한 돈의 지원으로 다시 고국에 돌아와 역시 보화각 뒤뜰에 조용한 안신처를 얻었다. 간송은 평소 그가 손댄 장한 일의 내막이나, 거기에 쓴 돈의 액수를 조금도 밝히려고 하지 않은 고매한 인격자였다. 따라서 앞의 괴산 부도나 일본에서 되사온 삼층석탑에 정확히 얼마나 많은 돈을 지출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간송은 자신만의 지출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 대신 과거의 그의 너그러운 인품을 말해주는 일화는 많다. 오사카 경매장에서 만난을 무릅쓰고 한번 보지도 않은 삼층석탑을 무조건 되사오게 했던 일에 대해 간송은 뒷날 한 가까운 연구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 재벌과 경쟁이 붙는 바람에 생각했던 이상으로 엄청난 값으로 낙찰을 보았으나 막상 일본서 실어다놓고 보니 기대했던 거와는 딴판이라. 허나 하는 수 없었지 어쩌나."
그뿐이었다.
일제 밑에서 간송처럼 이땅의 문화유산을 철저한 사명감과 신념으로 사랑하고 행동으로 지킨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면 악질적인 일본인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의 수법을 배워 민족문화재를 도굴 혹은 불법반출하여 일본인 사회에 팔아먹는 딱한 조선인 무뢰한과 그 앞잡이들이 1930년대엔 부쩍 늘고 있었다. 1935년 8월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적발되고 있다.
"경북 문경군 신북면 관음리의 폐사지에 서 있던 석탑을 서울 신용산에 사는 임장춘이란 자가 사서 운반 중이라는바, 그러한 매매와 운반은 법령 위반임. 조사보고 요망. 판사람은 현지 관음리의 이아무개. 손아무개임. 임장춘은 석탑류 매매의 상습자인 배성관이란자와 전부터 긴밀한 사이이나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임이었고, 배는 뒤에서 자금을 융통해준 간접적인 관계에 있음."(총독부에서 경북도지사 앞으로 보낸 서류)
현재 문경읍 경찰서 갈평지서에 세워져 있는 관음리 오층석탑이 바로 그때 임장춘이 불법반출하려다 실패한 석탑이다.
[관음리 오층석탑]
중흥산성에서 해체된 걸작 쌍사자석등
일제 밑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며 약탈 혹은 불법반출한 석탑·석등·부도의 수효와 그 만행의 형태, 그리고 그것들의 행방을 낱낱이 조사·집계한 자료는 아직 없다. 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석탑·석등·부도가 인천·부산·군산·목포 기타 여러항구에서 일본 본토로 실려 나갔지만 1966년의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따른 협정) 후의 반환문화재 가운데 석탑류는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 개인 소유로 돼 있다는 이유로 일본정부는 그것들을 제외시켰다. 일제 때 얼마나 많은 석탑류가 일본에 유출되었는가를 알려주는 몇 가지 구체적인 자료가 있는데, 그 하나는 1930년대에 오사카에서 주기적으로 경매가 벌여졌을 때의 목록들이다. 그것을 보면 한 번 경매 때 보통 50∼60점의 조선 석탑·석등·부도가 모여지고 있다. 8·15 직전까지 도쿄의 어느 백화점 아래층에는 일본인 골동상과 공모하여 이 땅의 문화재 반출과 판매에 성공한 이아우개란 반역적인 조선인 골동상이 각종 석물을 즐비하게 진열해놓고 일본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현재 국내에서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돼 있는 석조물 가운데에도 앞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수난의 내력을 가진 것들이 많다. 한 예로 국보 제103호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은, 1930년에 전남 광양군 옥룡면 운평리 중흥산성의 폐사지에서 불법반출되어 대구에 살던 일본인 수집가 이치다의 집 정원으로 들어가게 돼 있던 것을 총독부가 용케 중간에서 접수하여 서울의 박물관으로 운반해 온 것이다. 그 정확한 내막이 1932년 5월에 총독부 고적조사과 기수였던 오가와가 작성한 현지 조사보고서에서 확인된다.
"전남·북지방에서 석탑·석등 등이 매매되어 부잣집 마당에 놓이고, 혹은 바다를 건거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됨이 심하고, 천여 년을 유존한 국보적 고탑을 넘어뜨리고 파괴하여 내부에 수장하고 있던 유보를 훔쳐 팔아먹는 자가 있다는 풍문을 가끔 들었었고, 그런 유물로 믿어지는 것을 수삼차 본일도 있음. 작년 가을에 대구에 사는 이치다가 어느 시골에서 석탑과 석등을 산후, 대구로 운반해도 괜찮겠느냐는 것이어서 소재지와 매매의 이유를 물으니,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 보통학교 후원회가 기금 자산을 만들 목적으로 중흥산성 내에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을 매각했다. 시골 산중에 고대의 유물을 두었댔자 보호가 되지 않는다. 대구로 이전하여 마당 안에 두고 싶다' 는 희망이었음.
3월 17일. 광주에서 도지사관사 마당에 옮겨져 있는 석등을 보았음. 지금까지 3개밖에 발견되지 않은 일품임.
3월 20일 밤에 옥룡 경찰관 주재소를 찾아 중흥산성 내의 폐탑 매매의 건을 들었음.
'소화 5년(1930년) 8월게 옥룡보통학교 후원회가 기본금 조성을 위해 산성 안의 석탑 및 석등의 매각처를 변정섭이라는 자에세 의뢰했음. 변은 부산에 있는 성명 미상의 매수인 2명을 동반하고 와서 물건을 보게 하였음. 그리하여 일금 750원으로 매매의 약속이 성립되었음. 학교 후원회 쪽에서는 100원 정도면 팔릴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너무나 고가인 관계로 놀래어 군 당국에 상담하니, 유물의 매매는 고적·유물 보존규칙에 의해 불가하다는 지시를 받았음. 그 뒤에 여러 가지 문제가 연속되었음.'
이상이 경찰관에게 들은 대요임. 부산의 매수인은 대구의 이치다에게 전매할 약속을 했었고, 이치다는 후지다 촉탁(총독부 소속)에게 상담이 있어 이번에 출장·조사를 하게 된 것임."
걸작 '쌍사자석등' 은 부산의 악질 골동상(일본인이었을 듯함)과 대구의 간접적인 유물 약탈자였던 이치다의 손이 뻗치면서 당장 중흥산성에서 해체되어 옥룡면사무소 앞에 반출됐었다. 그러나 그들의 파격적인 매수 수법에 놀란 주민들이 뒤늦게 불법행위임을 깨닫고, 이어서 당국이 개입하자 일본인 무법자들의 음모는 결국 실패했다. 석등은 한동안 광주의 전남 도지사 관사로 옮겨졌다가 1937년 1월 5일에 서울 박물관으로 올라와 그해 11월에 경복궁 안에 복원되었다. 그 공로자는 오가와였다. 그후 아마누마라는 일본인이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오가와가 그 석등을 일차 조사하고 서울로 올라와 총독부에 복명하여 유물 등록수속을 마치고, 그해 12월에 재조사한 끝에 서울로 운반해왔다. 하마터면 골동상의 손을 거쳐 대구의 부호의 소유로 돌아가 우리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을 살려 지금 총독부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당시 대구에는 이치다 외에도 또 한사람의 악명 높은 일본인 수집가가 있었다. 남선전기 사장 오구라 다케노스케였다. 그런데 이오구라는 이치다가 걸작 석등의 불법 입수를 꾀했다가 실패한 전남 광양지방의 어느 절터의 탑 속에서 약탈된 작은 '금동팔각사리탑' 하나를 말썽없이 입수하고 있었다. 그는 또 경주 부근의 어느 석탑 속에서 훔친 작은 '금동삼층탑' 도 취득하고 있었는데 모두 희귀한 걸작이었다. 8·15해방 전후해서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둘 다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돼 있다. 오구라는 일제가 패망할 때가지 대구 시내의 자기 집에 온갖 종류의 풍부한 도굴 및 약탈문화재 컬렉션을 향유하고 있었는데 그때 정원에 놓여 있던 고려시대의 걸작 '석도부도' 둘은 8·15해방 이후 귀속재산으로 대구시가 압류하고 있다가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 보물 제135호와 제258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언제 어느 절터에서 반출된 것인지는 배후의 장본인이었던 우구라가 약탈과 입수 경위에 대해 일절 함구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부도들은 과거의 총독부 때에도 이미 주목되어 1942년 6월에 모두 중요한 유물로 지정돼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경주 근처인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하는 국보 제40호의 '정혜사터 십삼층석탑'(통일시라시대)은 1911년에 약탈될 뻔했었다. 수명의 반출음모자들이 밤중에 나타나 상륜부와 위로부터 세 층을 해체하여 땅에 내려놓았을 때, 마침 한 마을사람이 지나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어느놈들이냐?"고 호통을 쳐 범인들은 도망치고 석탑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했던 것이다. 그후 이 십삼층석탑은 땅에 내려진 탑재들을 되올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십층탑 꼴로 서 있었다. 그통에 상륜부는 아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서울 경복궁의 국립중앙박물관 석물군 속에 들어 있는 보물 제357호의 '정도사터 오층석탑' 에 대해서는 1968년에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이 발행한 (문화재 대관) (보물편) 상권에 '1924년에 원위치(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에서 현위치로 이건한 것' 으로 기록돼 있지만 1912∼1913년에 일본인 조사가 세키노가 발표한 논문 (조선의 석탑파)에는 '그전에 벌써 칠곡 절터에서 불법반출되어 오야라는 철도관리국장 관사에 들어가 있다' 고 밝혀져 있다. 그후에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 왔던 것 같다.
[정혜사터 십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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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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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육군 사관학교를 나온 인물이다. 일본군에선 사관학교든 졸병이든 먼저 군대에 들어오면 생사관을 확립하는 정신교육부터 <충군애국(忠君愛國).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인가!> 이런 정신교육을 반복해서 실시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전장에서 적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면 <천황폐하, 만세> 하고 소리높여 외치고 숨을 거두는 장졸들이 부지기수였다. 박정희도 그런 일본군의 정신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목숨 하나쯤 개같이 버릴 수 있는 생사관은 확립돼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마음을 그렇게 읽었다. 그렇다고 쿠데타에 동조할 수는 없다고 장도영은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제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쿠데타 같은 위험한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장도영은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혀둬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래서 장도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협력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박정희는 조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관자놀이가 불근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금니를 질근질근 씹으며 활활 타는 눈빛으로 장도영을 쏘아보았다. 장도영도 너한테 꺾일 수는 없다는 듯이 박정희를 마주 쏘아봤다. (여기서 약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장도영은 수없이 마음 속으로 뇌까렸다. 끝내, 박정희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말았다. 그리고 애원 어린 목소리로
"그렇다면 묵인이라도 해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협력 이상의 숨은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딱한 주문이오. 어쨌거나 나로서는 밀고 따위의 그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소. 그 점만은 안심하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니? 도대체 이게 육군의 총수인 참모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수작인가? 박정희가 <우리 혁명동지들은 이미 각하를 혁명의 최고 영도자로 모시기로 합의를 해놓았습니다>라고 한 말에 감격한 나머지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지껄였던 것일까? 장도영이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박정희는 그 말에
"잘 알겠습니다, 각하."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들의 지도자가 돼 주시겠다고 약속한 걸로 이해를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이것이 1961년 4월 10일의 일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 36일 전의 일이었다. 이상은 박정희의 진술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 4월 10일 이날에 있었던 일을 진술했던가? 바로 <장도영 일파 반혁명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검찰관에게 진술했던 것이다. 소위 <장도영 일파 반혁명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61년 7월 3일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지 한 달 반대해서는 뒤에 구체적으로 소개하겠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자 장도영은 물론이고 그의 추종자 모두가 구속되게 되었다. 이때 이 사건을 다루었던 혁명 검찰부의 검찰관 배명인(裵命仁)은 의장공관으로 찾아가 박정희로부터 장도영과 관련된 모든 증언을 들었던 것이다. 형사 사건의 증인신문을 집으로 찾아가 듣는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지만 하여간에 박정희는 4월 10일의 일에 대해서 검찰관 배명인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던 것이다.
"4월 10일경이라 생각되는데, 그때는 계획이 상당히 진전된 때인데 우리가 논의하여 기록해 놓은 혁명위원회의 구성, 정부기구의 개편, 임시헌법 등을 적은 서류를 장 장군에게 보이며 4.19가 무사히 등의 이야기를 한 끝에 그 서류를 장 장군에게 교부하고 돌아왔다. 최초에 우리가 계획한 정보가 누설되어 거사를 중지하고 최종적으로 거사일자가 결정된 것이 5월 16일이며 따라서 장 장군이 군사혁명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러한데 장도영은 4월 10일경에 박정희가 참모총장실로 찾아왔던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4월 10일경이 아니라, 4.19 일주년을 한 4,5일 앞둔 일요일 아침에 참모총장 공관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때 장도영은 정복으로 단장을 하고 육군본부 교회로 나가려고 막 현관으로 내려서려고 하는데
"각하, 2군 상황과 4.10 일주년 기념일에 대비할 계획에 대해 보고할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습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십시오."
박정희의 간청이었다.
"보다시피 지금 예배당으로 가려고 나선 길인데 시간이 다 됐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속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정희의 재간청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현관에서 응접실로 돌아와 둘이 마주앉았다고 한다. 당시 육군은 이미 3월에 서울지구 주둔부대와 일선 제5사단의 출동을 포함한 서울지구 폭동진압과 질서유지를 위한<비둘기 작전> 계획의 지휘부 연습을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업무를 모범적으로 철저히 수행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둘이 마주 앉았다.
"4.19에는 꼭 무엇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2군 사령관도 부재중이고 해서 제가 대략 계엄시행 계획을 작성하여 보았습니다."
박정희가 접은 원고지 몇 장을 내놓더란다. 당시 제2군 사령관은 최경록, 그는 이때 도미시찰 여행중에 있었다. 사령관 부재중에는 부사령관이 대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장도영은 당연히 그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잘했소, 시간이 있을 때 읽어 보지요."
박정희가 내놓은 원고를 부관에게 주어 박정희가 내놓은 원고의 표지에는 <서울지구 계엄실시 계획안>이라는 표제가 붙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장도영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울지구 계엄실시 계획안을 훑어보았다고 한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계엄이 선포되면 그 해당지역에 군정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며, 전국 혹은 수도 서울지역의 계엄일 경우에는 현행 헌법에 의해 육군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며 계엄업무를 육군의 일상 업무와 분리하기 위해 별도로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별개의 참모진으로 그 업무를 수행케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 근교에 주둔하는 부대를 서울 시내에 배치하고 일선사단을 예비대로 첨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이날에 있었던 전부인데 언제 박정희가 검찰관에게 진술한 내용과 같은 일이 있었느냐고 장도영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럴 경우 역사를 더듬는 사람은 어느 쪽의 말을 믿어야 옳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쿠데타를 일으킨 5월 16일 그날까지 정부기구 개편, 임시헌법 따위의 안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날에 이르기까지 마련된 것이 있었다면 <국가 재건 최고회의> 기구표 정도였으나 이것 역시 김종필의 호주머니에 간직돼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4월 10일에 있었다는 박정희의 진술은 아무래도 <창작>이었다는 심증이 일기만 한다. 왜냐하면 이미 박정희는 장도영을 내치고 모든 실권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창작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을 쥔 자의 차이는이렇듯 엄청나기만 한 것이다.
4. 장도영, 양다리 걸쳤는가?
군사 쿠데타.
한국인은 정권욕에 사로잡힌 장군이 부하 장졸들을 동원해서 총칼로 합헌정부를 뒤엎어 버리는 이른바 군사 쿠데타라는 것이 중미나 남미, 또는 동남아시아 등에서나 일어나는 것이지 한국에서 그와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1961년도에 들어서면서 한국에서도 쿠데타에 대한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기 시작했다.
"확 뒤집어 엎어야 돼, 이놈의 장 정권!"
쿠데타에 대한 소문과 함께 그놈의 하고 기대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장면은 자유민주주의 원칙만 고집하고 혼란을 야기시켜 놓고 있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전혀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이 지구상에서 제일 좋은 주의와 사사이라 하겠지. 그러나 한국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어!"
태반의 지식인들은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상에 환멸을 느껴 이렇게 자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쿠데타를 기대하는 심리가 싹트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지식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군부의 일부에서 쿠데타가 모의되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 CIA 한국 아마도 1961년 2월경이었던 것 같다. 서울 506방첩대장이었던 이희영이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그 무렵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국 CIA 해외정보 담당책임자로 있다가 1973년에 은퇴한 피어드 실봐가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한국군의 한 장교를 통해서 박정희와 그에게 동조하고 있는 무리들이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정보를 제공해 준 그 장교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박정희의 측근 참모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 참모는 미국 CIA의 한국 분실의 한 요원과 친한 사이여서 이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 정보를 장면 국무총리에게 알려주고 경각심을 촉구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협의를 받은 매카나기는,
"그게 좋겠지요" 하고 미지근한 태도를 취했을 뿐이었다. 실봐는 매카나기가 그 정보를 가늠해 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실봐는 매카나기의 허락이 떨어지자, 즉시 장면의 숙소인 반도호텔로 찾아가 군사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즉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장면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장면은 꽤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정보를 제공해 준 쪽이 민망하기 마련이다. 실봐는 한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는데야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칫 잘못하면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는 비난이나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는 장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권고도 하지 않기로 작심을 하고, 다만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실봐의 정보제공이 있었을 때, 군 수사기관을 강화해서 군부의 동향에 대한 감시를 철저하게만 했던들 한국의 현대사는 지금쯤 다른 궤도 위를 달리고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가실 길이 없다.
박정희가 육군 참모총장실로 장도영을 찾아갔다고 주장하는 그날에서 한 열하루쯤 지나 4월 21일 아침,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정복차림의 한 고급 장교가 서울 506방첩대에 들어섰다.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장님을 좀 뵈려고 찾아왔습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의 장세현 중령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장세현(張世顯)은 곧 대장실로 안내되었다. 이희영이 그의 앞에 나섰다.
"제가 이희영 대령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세현 중령입니다. 실은 오늘 아침에 엄청난 정보를 입수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신고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엄청난 정보라니요? 우선 좀 앉으십시오."
이희영은 그를 쇼파로 안내해서 마주 앉았다.
"엄청난 정보라는 게 뭔가요?"
"쿠데타에 대한 정보입니다."
"쿠데타에 대한 정보?"
쿠데타에 대한 정보라는 말에 이희영의 두 귀가 쫑긋 곤두섰다. 그의 말마따나 엄청난 정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족청계(族靑系)의 쿠데타설의 진상이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족청계 쿠데타설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참모장이었던 이범석(李範奭)은 난립해 있는 청년단을 하나로 묶을 계획을 세워놓고 모든 청년단체를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통합시켜 버렸었다. 이때 민족청년단 단원들 중 여전히 청년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은 기꺼이 대한청년단 깃발 밑으로 들어갔지만 통합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대거 군으로 들어갔는데, 군으로 들어간 족청계 장교들이 주동이 돼서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은 대구 제2군 방첩대장이었던 이희영이 서울 506방첩대장으로 자리를 바꿔앉은 바로 (이거 원, 무슨 놈의 팔자가 이 모양이야? 내가 가는 곳마다 쿠데타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이희영은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그가 대구에 있을 때는 공군 쿠데타설이 빈번하겐 나돌고 있었다.
1961년 2월의 일이었다. 이희영은 이 공군 쿠데타설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런 흑색선전을 퍼뜨린 것은 박정희의 쿠데타 그룹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은폐하고자 해서 이런 흑색선전을 마구 만들어내 퍼뜨렸던 것이다. 그는 공군 쿠데타설의 진상을 캐내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었는데 이번에는 나돌고 있는 게 아닌가.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족청계는 족청계대로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단 말인가? 이희영은 이번에도 족청계 쿠데타설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해서 506방첩대의 정보와 수사의 총역량을 여기에 집중시켜 캐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족청계 쿠데타 음모설로 인해 국무총리 장면의 아내 김윤옥과 철기(鐵驥)이범석이 전화로 대판 싸운 일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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