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6호 - 2023.12.18. 월요일(음력 : 11. 06.)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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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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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 못된 심술장이. 그러나 대담한 사람이 이 심술장이에게 대들어 그 수염을 움켜잡으면 놀랍게도 수염이 힘없이 뽑혀진다. 그것은 겁장이들을 쫓아 버리려고 살짝 붙여 놓은 가짜수염이니까. ― 올리버 웬델 홈스(1809 94, 美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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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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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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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와 인공
사는 게 가짜 같을 때가 있다. ‘가짜’는 ‘진짜가 아닌 것’이다. 맞다. 하지만 어떤 게 진짜가 아니어야 가짜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진짜 총’의 자격은? 총의 모양을 띠고 손잡이와 방아쇠가 있고 쇠로 만들었으며 총알이 날아가 사람을 죽이는 데 쓴다. 그렇다면 ‘가짜 총’은 모양은 같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기능이 없거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이리라.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대. 모양이 달라도 ‘가짜 총’이 될 수 있다. 강도가 ‘지갑을 내놓지 않으면 쏴 버릴 거야’라고 하면서 뒤통수에 총 대신 볼펜을 들이댄다면, 지갑을 꺼내지 않을 재간이 없다. 볼펜이 총. 주먹을 쥔 채로 엄지와 검지를 곧게 뻗어 ㄴ자를 만들어 ‘빵’ 하고 소리를 내면 총이 된다. 손가락이 총. 모양이 달라도 ‘진짜 총’인 경우도 있다.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에게 온갖 무기를 만들어주는 큐(Q)는 겉보기엔 우산인데 총알이 발사되는 총을 선물한다. 우산이 총.
사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쓰는 것에는 ‘가짜’보다는 ‘인공’이나 ‘인조’라는 말을 쓴다. 진짜가 아니라는 점에서 가짜가 분명하지만, 인간이 계획적이고 인위적으로 이 세계에 개입한다는 걸 강조한다는 점에서 인간적 의지가 묻어난다. 인공위성, 인공관절, 인공강우, 인공폭포, 인조잔디…. 모두 원래의 것과는 다르지만, 기능이 비슷하고 인간 세계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환호하기도 한다. 게다가 ‘인공호흡’은 얼마나 간절한 인간적 몸부림인가.
나고 죽는 게 자연의 본질인데, ‘인공’은 그런 성격이 없다. 낡아 폐기할 뿐,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의 힘으로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의 무엇에 육박하고 있는지 묻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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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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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촌놈 - 천상병
나는 의정부시 변두리에 살지만
서울과는 80미터 거리다
그러니 서울과 교통상으로는
별다름이 없지만
바로 근처에 논과 밭이 있으니
나는 촌놈인 것이다
서울에 살면
구백만 명 중의 한 사람이지만
나는 이제 그렇지 않다.
촌놈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노래불러야 한다
이 대견한 행복을
어찌 노래부르지 않으리요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의 노래는 하늘의 것입니다.
∼∼∼∼∼∼∼∼∼∼∼∼∼∼∼∼∼∼∼∼∼∼∼∼∼∼∼∼∼∼
당신은 - 한용운
당신은 나를 보면 왜 늘 웃기만 하셔요. 당신의 찡그리는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
나는 당신을 보고 찡그리기는 싫어요.
당신은 찡그리는 얼굴을 싫어하실 줄을 압니다.
그러나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에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 찡그러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
병 - 정지용
부엉이 울든 밤
누나의 이야기-
파랑병을 깨치면 금시
파랑바다.
빨강병을 깨치면
금시 빨강 바다.
뻐꾸기 울든 날
누나 시집 갔네-
파랑병을 깨트려
하늘 혼자 보고.
빨강병을 깨트려
하늘 혼자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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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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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자기(自暴自棄)
自:스스로 자. 暴:사나울 포. 棄:버릴 기.
[준말] 자포(自暴), 포기(暴棄), 자기(自棄). [출전]《孟子》〈離婁篇〉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돌보지 아니함.
전국 시대를 살다간 아성(亞聖) 맹자(孟子)는 ‘자포’‘자기’에 대해《맹자》〈이루편(離婁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自暴: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自棄:스스로를 버림)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을 헐뜯는 것을 자포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인(仁)이나 의(義)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한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원래 선(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은 편안한 집[安?]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의’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정로(正路:正道)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주] ‘자포자기’란 말은 맹자가 어느 때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학대(虐待)하고 돌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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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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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2
3권
1. 반간계
"이러다간 우리 한군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고스란히 굶어죽는게 아니오?" 유방은 진평을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그동안 유방은 형양의 남쪽에다 포진하고는 용도를 구축해 황하까지 연결한 뒤 오창의 미곡창으로부터 식량을 보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초군이 용도를 습격해 식량을 자주 탈취해 가고부터는 한군의 식량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항우한테 사자를 보냈다.
-한나라 영토를 형양 이서로 국한하겠으니 우리 화해합시다.
항우도 전쟁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곧 유방한테 사자를 보낼 차비를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군사 범증이 달려들어 왔다. "안됩니다! 한나라는 이제 겁낼 것이 없습니다. 이런 기회에 깨끗이 해치우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후회하실 날이 옵니다!" 항우가 이럴까 저럴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방은 유방대로 살아날 방도를 찾느라고 진평을 불러 한탄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토록 지겨운 전쟁이 언제라야 끝날 것 같소?"
진평은 양무(하남성)사람이다. 젊어서 비록 집안은 가난했지만 책읽기를 몹시 즐겼다. 밭 30무가 재산의 전부였기로 형 진백을 도와주며 자신은 총각으로 살았다. 그런데 진백은 동생 진평이 책읽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가급적 농사일을 덜어주며 자유롭게 공부하도록 했다. 진평은 체구가 장대하면서 용모까지 아름다웠다. 어떤 사람이 진평에게 물었다. "그토록 집은 가난하다면서 무얼 먹었길래 이토록 살결은 희고 살집도 좋소?" 형수가 농사일을 돕지 않는 시동생이 미웠는지 옆에 있다가 대신 대답했다. "겨우 쌀겨를 먹는데도 이토록 피둥피둥한걸 보니 혈통이 돼지 집안인가 봐요!" 그 말을 어디선가 전해들은 진백은 제 처를 때렸다. 진평이 성장해 장가갈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부자는 딸을 주려 하지 않았고 가난한 집 딸은 이쪽에서 얻기를 꺼렸다. 진평은 노총각이 되었다. 그 때 인근에 장부라는 부자노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시집을 다섯 번씩이나 갔다온 손녀딸이 있었다. 그토록 그녀가 자주 혼인했던 이유는 시집을 가자마자 몇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신랑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니 아무리 가난뱅이지만 누가 나서서 감히 그 부자 손녀딸을 데려가려고 하지를 않았다. 진평은 그런 소문을 들었다. 진평은 평소 마을에 상사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장례일을 도와주고 또한 제일 늦게 귀가함으로써 사람들의 칭송을 듣고 있었다. 어느날 부자 장부가 어떤 상가에 들른다는 소문을 듣고 진평은 서둘러 그 상가에 들러 성심성의껏 일을 돌봐주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런 진평이 장부의 눈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의 상가에 와서 소득도 없는 일을 가지고 저토록 몸을 아끼지 않고 열성을 다하는 것을 보니 대단한 젊은이로구나! 풍모 또한 훌륭한 걸 보니 금상첨화다!' 장부는 기다렸다가 귀가길의 진평을 뒤쫓았다. 그런데 진평이 성곽 밖의 빈민촌에 살고 있는 데다가 골목 어귀의 토굴같은 집에서 문에다 헌가마니를 치고 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차라리 잘됐다!' 집으로 돌아온 장부는 아들 장중을 불러놓고 말했다. "내 손녀를 진평에게 주었으면 한다." 장중은 펄쩍 뛰었다. "아버지, 진평 그자에 대한 소문이나 듣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자가 어때서?" "그토록 가난한 주제에 집안 일은 돕지 않고 밤낮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는 그런 놈한테 어떻게 내 딸을 주겠습니까!" "그것은 그에게 흠이 되지 않는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그는 농사꾼이 아니다. 선비일 뿐이다. 더구나 내 손녀딸에게도 다섯 번씩이나 이미 시집을 갔던 흠이 있지 않느냐." "그것이 흠이라면 차라리 내 딸을 혼자 살도록 하겠습니다." "억지 부리지 마라. 내 손녀딸이 벌써 다섯 번씩이나 살부한 바도 남자쪽에서 보면 오히려 더 큰 여자의 흠이다. 누가 그런 집안으로 장가오려 하겠느냐." "그렇다면 아버지는 진평을 죽이려고 제 딸년과 결혼시키려는 겁니까?" "내가 다 보는 바가 있다. 손녀사위놈들이 모두 죽어나간 것은 아직 손녀가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이다. 진평이야말로 인연이다. 진평처럼 당당하고 미끈한 장부 쳐놓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 아직 본 적이 없으며, 또 진평처럼 생긴 인물 치고 장수하지 못한 사람 아직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내 손녀딸에게는 과분하다." 장중은 아버지 장부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써 반발했다. "그렇지만 진평이 내 딸년을 취할 것을 거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부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튿날 장부노인은 가만히 진평을 찾아갔다. 혼례를 올릴 것을 다짐받고 넉넉하게 돈을 꾸어주면서 말했다. "이 돈으로 처가집에 대한 예의도 차리고 잔칫날 손님들을 대접할 음식도 마련하도록 하게." 집으로 돌아온 장부노인은 손녀를 조용히 불러놓고 경고했다. "남편이 본래 가난하다 해서 감히 우습게 대했다간 넌 살아남을 수 없을 줄 알아라! 그리고 남편의 형은 부친처럼 섬기고 형수 역시 모친처럼 섬겨라."
장씨의 딸을 얻은 진평은 곧 씀씀이가 좋아지면서 교우관계도 넓어졌다. 진평은 이(25가)가운데에 있는 사(봄 가을에 제사지내는 사당)의 재(제육을 주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제육을 분배하는 솜씨가 매우 공평하자 장로들이 다투어 칭찬했다. "진평은 젊은 사람이면서도 재노릇을 정말 곧잘 하네!" 그러자 진평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아아, 나 진평에게 천하를 주관하라고 해도 이 고기를 나누는 것처럼 공평하면서도 멋지게 해낼 터인데!" 진승이 봉기했을 때 진평은 그의 형 진백과 작별한 뒤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임제로 가서 위왕 구를 섬겼다. 위구는 그를 태복에 임명했다. 그런데 진평이 위구의 사랑을 받자 주위에서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위구의 아내가 미남 진평을 유혹하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무어라고? 그자가 내 아내를 유혹해!" 왕비가 오히려 진평에게 완전히 뒤집어씌운 꼴이었지만 변명이 통할 리가 없었다. '도망치고 볼 일이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가 없지.' 오랜 후 항우가 황하가로 진출했을 때 진평은 그에게로 가서 귀속하고 진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항우가 동진하여 팽성에서 초왕에 오르는 동안 유방이 한중에서 나와 삼진을 멸한 뒤 동진해 왔다. 이 때 은왕 사마왕이 배반해 한으로 붙자 노한 항우가 진평을 보내어 은왕의 항복을 받아오도록 했다. 진평은 성공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이 다시 은을 공격해 항복시켰는데, 이때 항우는 지난날 은을 공격할 당시의 장군들이 음모해 한과 내통한 사실이 있다하여 은나라 공격군 장군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다. '항우한테는 아무리 변명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사받은 황금과 장군의 인장을 밀봉해 항우에게 돌려보낸 후 도망칠 밖에!' 진평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며 칼을 지팡이처럼 위장해 도망쳤다. 진평이 황하를 건널 때였다. 뱃사람들이 진평을 건너다보며 수군거렸다. "저자같은 미장부가 일행도 없이 서둘러 강을 건너는 것을 보니 필시 도망가는 장군인 듯하다. 어쩐다?" "틀림없이 수중에는 금은보화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죽여서 그것을 뺏자!" 진평은 위험을 감지했다. 옷을 얼른 훌훌 벗어버린 뒤 뱃사람들에게 소리쳤다. "힘드신 것 같은데 저도 도와드리죠." 진평은 뱃속을 뚜벅뚜벅 걸어가서 노를 잡았다. 그러자 뱃사람들은 고맙다는 말이 없이 투덜거리기만 했다. "쳇! 완전히 알거지였군!"
진평이 한나라에 귀순한 것은 수무(하남성)에서였다. 진평이 한왕 유방한테로 불려갔을 때였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유방은 진평에게 말했다. "물러가서 숙사로 드시오." 진평은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한왕을 만날 일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신이 뵈러온 것은 한끼 식사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것도 오늘 중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평의 태도가 하도 결연하므로 유방은 그를 불러앉혔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 유방은 진평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대가 초나라에 있을 땐 어떤 벼슬자리였소?" " 도위였습니다." 유방은 진평을 물끄러미 쳐다보다말고 그 자리에서 도위에 임명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었다. 참승(왕과 함께 수레를 타는 무관)에다가 호군중위(장군들의 감찰무관)의 직책까지 내렸다. 그렇게 되자 여러 장군들이 아우성쳤다. "대왕께선 초나라 도망병 하나 얻으시곤 그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시면서 하루만에 수레에 태우시는 데다가 그나마도 모자라 한참 고참들인 우리 한나라 장군들까지 감찰케 하십니까!" "시끄럽소. 과인에게도 인물을 보는 눈이 있소." 유방의 진평에 대한 총애가 더욱 깊어지자 이번에는 주발과 관영이 나섰다. "진평은 미장부이긴 하나 관을 장식하는 옥과 같아서 거죽은 번지르르하지만 그 속이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신이 듣기론 진평이 집에 있을 땐 제 형수를 훔치고, 위를 섬기다가는 뜻을 얻지 못하자 초로 귀속했습니다. 초에서도 용납되지 못하고서는 다시 도망해 한으로 귀속한 것입니다." 유방은 주발과 관영이 번갈아가며 떠드는 소리를 여전히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오늘날 대왕께서는 진평 그자를 존관에 임명하여 군을 감찰케 하셨습니다. 신들이 듣기로는 진평은 여러 장군들한테 금품을 받고 또한 많은 금품을 보낸 자에게는 좋은 자리를 주고 금품을 조금 보낸 자에게는 나쁜 자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토록 진평은 반목무상한,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입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이 점을 명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믿고 있던 신하 주발과 관용의 진언이라 유방은 전연 무시할 수가 없어 위무지를 불러들였다. 위무지는 진평을 왕 앞에 서게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방 앞으로 불려온 위무지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말하는 바는 진평의 재능입니다. 대왕께서 문책하는 바는 행실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다가 물 속에 빠져 죽은 미생이든가, 효행으로 유명한 은나라의 효기같은 훌륭한 덕행의 소유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대왕의 승패 운수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뜻입니다. 차제에 폐하께서는 미생이나 효기같은 인물을 수하에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진평같이 실리적인 인물을 곁에 두시겠습니까?" "글세...?" "지금 초나라와 한나라는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왕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기모지사인 진평을 추천했던 것입니다. 제딴엔 그의 계략이 진정 국가에 이익이 되기에 충분한게 아닌가만 고려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그가 형수를 훔쳤다든가, 실제로는 그 반대였지만, 혹은 남에게서 금품을 받았다던가 하는 따위는 거론할 만한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유방은 위무지를 내보낸 뒤 끝으로 진평을 직접 불렀다. "그대는 위나라를 섬기다 뜻을 얻지 못하자 도망쳐 가서 초나라를 섬겼소. 그러다간 다시 초를 떠나서 과인한테로 온 것이오. 한 가지 묻겠는데 과연 신의있는 사람이라면서 이토록 변화무쌍한 처신을 해도 괜찮은 거요?"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던 진평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신은 분명히 처음에 위왕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위왕은 아예 신의 언설을 채용할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떠나 초왕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초왕에겐 남을 신용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항우가 신임하고 총애하는 인물들은 항씨 일족 아니면 처가쪽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진평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유방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항우는 기모지사가 있다 하더라도 기용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초에서 떠났던 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왕께서는 능히 인재를 기용할 만한 능력과 도량이 있다고 들었기에 대왕께 귀속했던 것입니다. 신은 맨손으로 왔습니다. 금품을 받지 않고서는 생활 수단을 삼을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신의 계략에 채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신다면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신을 써주십시오. 무가치하다고 생각되신다면 그동안 신이 받은 금품은 그대로 있사오니 청하옵건대 봉인하여 당국으로 보내드리고 사임하게 해주십시오." 유방은 진평의 솔직한 대답에 감동을 받았다. 때문에 더욱 진평에게 후사했으며 호군중위로 임명하기까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군에게 위기가 닥치자 유방은 기회라 생각하고 진평을 쓰기 위해 급히 불렀다. "어떻소. 천하가 이토록 난분분하니 언제나 안정이 되겠소!" 진평은 미리 준비라도 해온 듯이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항우는 사람됨이 공손하며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의를 좋아하는 선비들이 많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공로에 대해 상을 주고 작읍을 내리는 데 있어서는 턱없이 인색하여 그로 인해 따르는 인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에 비하여 대왕께서는 오만하고 예의가 없어 예절을 좋아하는 선비는 오질 않았으나 작읍을 내려 사람들을 풍요하게 해줌으로써, 완고하고 둔한 인물이든가 이익을 좋아하는 후한무치한 무리들은 떼를 지어 몰려왔습니다. 때문에 누구든 한나라와 초나라의 단점을 제거하고 장점만 선택해 따른다면 천하는 그의 지휘로 안정될 것입니다." "그 참 옳은 소리이긴 하나 꽤 어려운 방법이겠군."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초나라에는 쓸만한 인물이라곤 범증과 종리매 정도만 남았습니다. 그나마도 첩자를 보내 반간계를 쓰면 초나라는 쉽게 무너집니다." 유방은 눈이 번쩍 떠졌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보시구려!" "군신 사이를 이간시켜 서로 의심을 품게만 만든다면 벌써 초나라는 망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항우는 사람됨이 남을 잘 의심하므로 참언을 믿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내부에서 서로를 죽이기에 바빠질 것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되도록 일을 꾸며 보겠소?" 그러자 진평은 유방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온데 일을 제대로 하자니 수만 근의 황금이 필요합니다." "수만 근!" "반간계로 내분을 일으키자면 그만한 자금은 뿌려야 합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유방은 홀연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좋소! 4만근의 황금을 드리리다. 이 돈은 마음대로 쓰시오 그 출납이나 용도를 묻지는 않겠소." "고맙습니다." 초나라로 들어간 진평은 첩자를 풀어 특히 초군의 부장급 장교들에게 집중적으로 자금을 뿌렸다. "글쎄 말이오. 종리매를 위시한 여러 장군들이 초왕을 받들어 엄청난 공로를 세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들에게 영토를 전연 할애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한 나머지 군사인 범증과 짜고 한나라와 내통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내통이라뇨?" "아, 한왕과 짜고 항씨 일가를 전복시킨 후 그 영토를 할양받아 왕이 되겠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황금을 듬뿍듬뿍 뿌려가며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온 진중이 그런 얘기들로 소란스러웠다. 동시에 그 소문이 항우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종리매 등이 범증을 업고 나를 배반하고 있다고!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워낙 여러 경로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소문들이 들어오자 항우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확인은 해보아야지. 유방이 휴전을 요청해 온 마당에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한나라로 사자를 보내보면 알겠지.' 진평이 초나라의 내부사정을 들었다. 첨자 하나를 불러 서둘러 한나라로 서신을 보냈다. -반간계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왕이 금일 중으로 사자를 한나라로 보내 그쪽 사정을 탐지할 것 같으니 미리 감지하시고 그쪽에서도 초나라의 의도를 역이용 하시면 범증도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옳지 됐다!" 유방은 진평의 서신을 받아본 후 무릎을 쳤다. 그래서 유방은 정(제위의 상징인 세 발 솥)을 준비하고 태뢰(소, 양, 돼지고기를 만든 성대한 요리)까지 마련한 뒤 초왕의 사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진평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초왕 항우의 사자가 한나라에 도착했다. "어서오시오. 원로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 그래, 아보(범증)께선 평안하시오. 곧 왕이 되신다지요?" 유방의 말에 항우의 사자는 너무 놀랐던지 한동안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이제 막 범증군사께서 왕이 되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아니오?" "대왕께 지금 소신이 여쭙고 있는 중입니다." 그제서야 유방은 몹시 당황해 하는 척하며 태도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범증군사께서 보낸 축하사절이 아니란 말이오?" "아닙니다. 초나라 대왕의 사자들입니다." "원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그대들이 아보께서 보낸 사자들이 아니라면 문제가 다르지. 과인으로선 아무 할 말이 없네. 여봐라, 어서 세 발 솥과 성대한 요리들을 치워버려라. 저기 앉은 초의 사신들은 범증군사의 사자들이 아닌 것 같으니 다른 요리상으로 다시 차려 내오너라." 그러면서 형편없는 요리상을 다시 내왔다. 항우의 사자들은 기분 나빴지만 감히 한왕 앞에서 그런 불평을 말할 수는 없었다. 초의 사자들은 귀국해 항우에게 그렇게 당한 사실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렇다면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범증과 종리매 등을 조심해야지!' 그런 줄도 모르고 범증은 형양성 함락 방안을 들고 급히 항우를 찾아갔다. "한나라 군사는 지금 극도로 피폐해 있습니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도 항우는 범증을 반쯤 외면한 채 돌아앉아 있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만두시오. 한왕과는 화해하기로 이미 결정했소!" 하릴없이 물러난 범증은 숙소로 돌아와 맥을 놓고 앉아 있는데 부관이 들어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무얼?" "대왕께서 군사님을 의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를 의심해?" "종리매장군 등을 꼬드겨 초왕께 반기를 든 후 군사님이 초왕이 되신다는 소문이 지금 진중에 파다합니다." "한나라에서 반간계를 썼구나! 그렇지만 그걸 사실로 믿어버린 초왕이 더욱 한심스럽구나!" "어쨌거나 군사께선 몸조심하십시오." "일 없다! 천하대사는 이미 결정났다. 앞으로의 일은 대왕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나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너무도 분했던지 범증은 미처 팽성에 미치지 못해 등에 악성 종기가 돋아나 그로 인해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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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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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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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해 속박을 당하지만 독서와 달리 자신의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 사람의 성격에 맞는 사색을 하기 위한 소재와 기회가 된다. 너무 많은 양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의 탄력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것은 오랫동안 용수철에 무거운 짐을 매달아 놓으면 용수철의 탄력이 없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런 여과 장치도 없이 무조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독특하고 확실한 사상을 갖는 일에 방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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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경험을 쌓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경험은 우리의 삶에 유익함과 지혜를 안겨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경험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경험하지 않아도 좋은 일들을 경험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간직한 채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책도 역시 조심스럽게 골라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선별할 수 있을 때, 그 사상을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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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사고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닌 모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색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으며 책을 집필할 수도 있다. 그는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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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독서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디딤돌로 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책은 세상의 고통을 일깨우거나 그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오류의 위험들을 피상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사색하는 사람은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나침반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샘이 고갈되었을 경우에만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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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쉽게 추방한다면 그 행동은 성스러운 정신에 대한 반역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타인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만족감을 얻는다. 그러나 지식을 자랑하면서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은 책에서 읽은 구절이나 사상을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그리고 때때로 그 사상들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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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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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고려청자 최대의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일본인 무법자들이 고려고분에서 약탈해 온 고려자기의 대대적인 장물아비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한편으로 친일매국의 앞잡이였던 이완용(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창덕궁의 고종 황제를 정신적으로 위로해 드린다고 동물원과 함께 박물관을 창설하게 함으로써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한 고려자기와 기타 고분유물들을 고가로 팔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국권을 상실하는 을사보호조약을 앞장서서 이토와 체결했던 매국노 이완용은 그때 이미 허수아비였고, 미술품과 유물 수집을 실제로 맡은 자는 이토의 지시를 받는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이었다. 결국 일제 통감부 시절에 한반도에 상륙해 있던 일본인 호리꾼과 골동상들은 한국땅에서 빈손으로 갈취하고 도굴한 고려자기들을 통감부 관리들을 통해 한국 왕실에 고가로 팔아 넣음으로써 이중의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일본인의 한 증언기록을 빌리면 한 개에 보통 5원, 비싸야 10원에서 20원 정도가 그 시절의 고려자기 값이었는데 당시 화제가 되었던 최고 기록은 창덕궁박물관에서 사들인'청자진사포도동자문표형병' 으로 정확히 950원이 지불되었다. 그런 식으로 벼락부자가 된 일본인이 당시 서울에 얼마나 많았을까 능히 상상된다.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것을 불법으로 파 온 그 자들에게 그런 식의 거액의 돈을 왕실에서 지불하도록 한 이중의 역적이 또한 당시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하고 있던 이완용 총리대신이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창덕궁 이왕가박물관(해방 후엔 덕수궁미술관으로 불리다가 1969년 5월에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됨) 컬렉션의 고려자기 6,562점의 출토지를 보면 99%가 개성 부근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앞서와 같은 경위로 일본인들로부터 사들인 도굴품들이었다. 이완용이 어지러운 국운에 처한 고종황제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 박물관을 꾸미게 되었다지만, 거기에 어떤 물건들이 수집된다는 것을 임금으로선 알 리도 없었고 도 그 시기에 그런 일을 원했을 리도 없다. 그것은 이완용이 이토 통감의 문화적 음모에 맞장구친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고종황제에게 생색을 내려고 한 자는 다음의 일화에서 확인되듯이 이토였기 때문이다. 본래 조각가로 1913년에 이땅에 건너와서 한국의 옛 도자기문화를 연구했던 일본인 아사가와가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쓰에게 들었다는 확실한 기록이다.
"어느날 이태왕(고종황제) 전하께서 처음으로 구경을 하시게 되었을 때,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들어진 거요?' 하고 묻자, 이토 통감이 '이것은 이 나라의 고려시대의 것입니다' 하고 설명을 하니, 전하께서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거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토는 말을 못하고 침묵해버렸다. 알다시피 출토품(굴총해서 꺼낸 물건)이라는 설명은 그 경우 할 수가 없었으니까."(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 1945년)
결국, 고종황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궁중에도 전래품이라곤 없던 고려청자를 처음 보고, "저런 것은 어디서 가져왔느냐?" 고 의아해 했을 때 이토는 아마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는 결국 대답을 못하고 쩔쩔맸다. 만일 그때에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보는 그 신기하게 아름다운 고려청자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왕릉을 포함한 귀인의 무덤들이 모두 굴총되어 나온 물건들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1년 후에 가서 영영 나라를 빼앗기게 될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비애와 망국의 한을 통감했으리라.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의 한국혼 말살 및 국가 병합 음모를 확고히 굳히는 동안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도굴한 수천 점 이상의 고려자기를 무더기로 수집했었다. 그중에서 그는 일품 103점을 골라 저희 메이지천황에게 진상했고, 그 외에도 당시 일본의 권력사회와 귀족들에게 한 무더기씩 보내어 한국에서의 최대의 선물로 삼았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다른 숱한 경로를 통한 도굴품의 대량 반출과 병행됨으로써 일본 본토의 상류층과 돈 있는 수집가들에게 고려자기 수집의 대유행을 일으켰다. 그때의 정황을 말해주는 구체적인 사례의 하나로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가을에 도쿄에서 열렸던 대대적인 고려자기 경매전시를 들 수 있다. 여기 얇은 가죽과 비단으로 장정된 고급 카탈로그가 하나 있다. 표제는 '고려소', 곧 고려자기란 뜻이다. 앞의 경매전 때의 출판물인데, 서문에 이런 말의 씌어 있다.
"이 고려자기는 옛날에 외국으로 건너간 것을 제외하면 한국 안에서는 단 1점도 지상에서 그것을 볼 수가 없었고, 모두 고분에서 파내고 있다."
"고려자기의 미술상의 가치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일본)의 호사가들 사이에 애완돼 왔고 또 귀중시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송도(개성)를 중심으로 구워진 본고장의 참으로 정교한 물건은 아직도 세간(일본 사회)에 널리 소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번에 고분 속에서 나온 고려청자와 백자들을 여기서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물건들이 '나이치'(일본 본토)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년 이래(이 점은 주목할 만한 증언이다)의 일이다."
"다음에 고려자기의 출토지를 보면, 특히 정교한 것들은 송도를 중심으로 하여 100여 리 안팎의 분묘에서 나오고 있고, 강화도의 고려 귀인묘에서도 나오고 있다. 해주 등지에서도 때때로 나온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나오는 것들은 고려자기임에는 틀림없으나 질이 좀 다르다."
이 서문의 필자는 일찍이 한국에 건너와서 고려자기 도굴을 진두 지휘한 자였거나 아니면 뒤에서 적극적으로 조종했던 악질적인 장물아비였던 듯, 당시의 실태와 정보에 너무나 환하다. 거기에 죄의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비치지 않고 뻔뻔스럽게도 이런 말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지금은 우리 일본인들이 (한국의) 어디라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만일 있는 물건(고분 속의 고려자기)이라면 반드시 출토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필자는 또 저들이 고려자기를 도굴하면서 하수인으로 부려먹은 몇몇 한국인의 행동을 고의적으로 과장시키면서 정작 저희 일본인들의 죄과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의 무덤들은 모두 오랜 세월의 풍우 속에 꺼져버려 우리들(일본인) 눈에는 분별할 수가 없으나 한국인은 막대기(쇠꼬챙이)로 그것들을 찔러보고 그 속의 음향으로 감정을 하고 파내는 것이다."
이외에도 너무나 뻔뻔스런 말이 많으나 생략한다. 도판들을 살펴보면 5명의 일본 귀족과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21명의 수장가가 출품했던 약 120점의 각종 고려자기가 사진으로 확인되는데, 개중엔 현재 국내의 국보 혹은 보물급에 들어갈 일품들도 수두룩하다. 여기서 또하나 주목되는 것은 당시 서울에 있던 수집가 아유가이와 골동상 곤도를 비롯하여 시라이시 아카보시란 이름의 일본인들이 출품하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의 고분 도굴과 고려자기 약탈행위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을 물러난 지 몇 달 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한국침략에 항거하는 안중근 의사에게 통렬히 사살되는 사건 같은 한국인의 분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2대 통감으로 온 소네아라스케가 한국인들의 눈초리를 두려워하여 다소 신경을 썼던 모양이지만 그도 엄중한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굴욕의 한일합방 후에도 일제 총독부는 일본인의 도굴행위를 한동안 묵인해주었다. 미야케는 (그때의 기억)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발굴(도굴)이 성해짐에 따라 조선인들의 반감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러나 금지시키려고 했을 무렵엔 벌써 수천 명이라는 사람(일본인)이 그 짓으로 생업을 하고 있어 별안간 금지한다는 것은 그들의 사활 문제라서 총독부에서 정책상 서서히 금지하는 방침을 세우고 당분간은 묵인하는 상태였다."
결국 일본인 도굴꾼들은 통감부와 총독부로부터 그들의 식민지 정착과 생활기반이 확고해질 때까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곳곳에서 분노한 한국인에게 혼나는 일도 많았다. 가령 1916년에 강화도의 고려고분을 조사하러 갔던 이마니시 류는 뒤에 이런 말을 기록 하고 있다.
"수년 전에 한 일본인이 도굴하여 유물의 일부를 꺼냈는데, 폭도(분노한 한국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들에게 습격을 받고 도망쳤다고도 하고혹은 무사히 도굴품을 갖고 갔다는 설도 있었다."
이마니시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자고로 조선인은 그 조상의 묘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는데 악질 일본인들이 남의 나라의 조상의 무덤을 그토록 비정하게 도굴하였다."
총독부 초기 이후 조선의 고적조사와 각종 고분 발굴에 참가했던 우메하라 스에지도 과거의 죄스런 사실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들의 학술조사) 고물 수집가(일본인 도굴꾼과 장물아비)들에 의한 유적의 파괴를 조장시킨 좋지 못한 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체로 조선에서의 유적의 파괴, 특히 고분 도굴은 러일전쟁 후 고려청자가 부장되었던 개성지역으로부터 시작되어 대정(일본 연호, 한일합방 후) 연간에 들어와 경북 선산 부근을 주로 하는 낙동강 유역의 유적이 도굴되었고, 1923∼1924년에는 낙랑고분군이 또한 대규모의 도굴을 당하게 되었다."(우메하라 스에지, (한국고대문화), 해방 후 일본에서 집필)
한편 일찍부터 한국의 옛 도자기를 수집·연구한 전문가인 고야마 후지오는 1937년에 이런 증언기록을 남기고 있다.
"1911∼1912년께에는 고려자기의 수집열이 최고조에 이르러 당시 그것들의 도굴과 판매로 생활하는 자가 수백 수천 명에 달했었다고 하며, 그후 금령이 엄해져 한때 발굴(도굴)은 뜸해진 듯했으나 오늘날까지 고려고분의 도굴은 끊인 날이 없고, 그동안 출토시킨 고려 고도기의 수는 몇 십 몇 백만 점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고야마 후지오. 권22의 (고려의 고도기) )
여기서 고야마가 말하는 몇 십만 혹은 몇 백만 점이란 그만큼 엄청난 숫자였다는 뜻이겠으나 어쨌든 그 대다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학자 이홍직 교수는 현재 일본의 민간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자기만 약 2만 점으로 추산했지만( (사학연구) 18집의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 1964), 사실은 그 이상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가령 근년의 어느 일본인 관계전문가의 견해를 빌리면 통틀어 3∼4만 점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보다도 현재 국내의 모든 박물관 소장품과 민간 소장의 고려자기를 합쳐서 약 2만 점으로 칠 때, 배 혹은 그 이상을 지금도 일본인들이 갖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을 거라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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