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3호 - 2023.11.24. 금요일(음력 :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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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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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세상에서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위험한 영역이 있다.
그것은 대륙이나 해양이 아닌 사람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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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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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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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색
얄궂다. ‘내-색(色)’. 색을 냄, 색을 내보임, 마음에 느낀 걸 얼굴에 드러냄. 그런 뜻이라면 ‘색내’나 ‘색냄’이라 해도 됐을 텐데, 굳이 동사 ‘내다’를 ‘색’ 앞으로 보냈다. ‘놀토, 먹방’ 같은 말이 만들어질 조짐이 오래전부터 있었나 보다.
무술에서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격동을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고 한다. 두렵지만 두려운 내색을 하지 말고, 즐겁지만 즐거운 내색을 하지 말라는 것. 평정심과 항구여일의 풍모를 잃지 말라는 것. 무표정한 얼굴(포커페이스)을 하라는 게 아니다. 변함없는 얼굴을 하라는 것이다. 평소에 웃는 얼굴이라면 싫은 사람이 나타나도 웃고, 늘 째려보는 얼굴이라면 두려운 사람이 나타나도 째려보라는 것. 상대에게 나의 촐싹거리는 마음을 낯빛으로 티 내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의 격랑은 얼굴에 미세한 변화를 가져와 눈 밝은 사람은 금방 눈치를 챈다. 그만큼 위험해진다. 평정심을 잃었을 때도 평정심을 잃은 내색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율배반적이고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세상’인데, 뭘 그리 억누르며 사냐고 면박을 줄 수도 있겠다. 게다가 이 시대는 감정과 행동을 일치시키라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라는 구호가 드높다.
하지만 우리의 운명은 순간순간 ‘내색하기’에서 결정난다. 싫은 내색을 할지 말지, 좋은 내색을 할지 말지, 두려운 마음을 내색할지 말지. 내색을 하여 운명의 축이 바뀔지, 내색하지 않아 인연의 끈이 뒤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내색할지 말지’를 생각한다는 건 마음속에 검색대 하나를 세우는 일이다. 지금 당신 마음에 일렁이는 감정을 타인에게 내색할지 헤아려 보라. 나는 오늘도 분하지만, 비겁함이 습관이므로 내색하지 않는 쪽으로 살련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개덥다’고?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날씨를 일러 젊은이들은 ‘개덥다’고 한다. ‘아주 덥다’는 뜻이다. ‘개(-)’가 널리 쓰이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9년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광고 카피가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 카피에서 ‘개고생’은 ‘어려운 일이나 고비가 닥쳐 톡톡히 겪는 고생’을 뜻하는 말인데, 실질적으로는 비속어에 가깝다. 이때의 ‘개-’는 ‘개수작’, ‘개망신’, ‘개지랄’ 등처럼 ‘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해 주는 말이다. 주로 ‘수작’, ‘망신’, ‘지랄’ 등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몇몇 말(명사) 앞에 붙는다.
이 광고 이후로 ‘개(-)’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개이익’처럼 명사뿐만 아니라 ‘개덥다’, ‘개싫다’, ‘개예쁘다’, ‘개웃기다’ 등처럼 동사, 형용사 앞에도 ‘개’를 붙여 쓰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때의 ‘개덥다’의 ‘개’는 ‘개고생’의 ‘개’와는 크게 다르다. 게다가 ‘개고생’의 ‘개’가 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말과 어울리는 데 반해, ‘개덥다’의 ‘개’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말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말과도 어울릴 수 있다. ‘개덥다’의 ‘개’는 현재 유행어로서, 표준어가 아니다.
내 제자들도 스스럼없이 ‘개덥다’, ‘개웃기다’ 등의 ‘개’를 남발한다. 그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나에게 ‘개(-)’는 비속어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다 큰 어른이 아무 때나 이런 유행어를 남발하는 게 부적절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여 또 어쩔 수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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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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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빛 - 천상병
태양의 빛 달의 빛 전등의 빛
빛은 참으로 근사하다
빛이 없으면
다 캄캄할 것이 아닌가
세상은 빛으로 움직이고
사람 눈은 빛으로 있다
내일이여 내일이여
빛은 언제나 있으소서.
∼∼∼∼∼∼∼∼∼∼∼∼∼∼∼∼∼∼∼∼∼∼∼∼∼∼∼∼∼∼
군말 - 한용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니찌의 님은 이탈리아이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어가는 길을 잃고 헤메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삼월 삼질 날 - 정지용
중, 중, 때때 중,
우리 애기 까까 머리.
삼월 삼질 날,
질나라비, 훨, 훨,
제비 새끼, 훨, 훨,
쑥 뜯어다가
개피떡 만들어.
호, 호, 잠들여 놓고
냥, 냥, 잘도 먹었다.
중, 중, 때때 중,
우리 야기 상제로 사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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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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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거양득(一擧兩得)
一:한 일. 擧:들 거. 兩:두 량. 得:얻을 득.
[준말] 양득(兩得). [동의어] 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二鳥).
[반의어] 일거양실(一擧兩失). [참조] 조명시리(朝名市利).
[출전]《春秋後語》,《戰國策》〈秦策〉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 이익을 거둔다는 뜻.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錯)는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朝名市利)에 부합하는 패업(?業)’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張儀)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데 힘써야 하고, 강병(强兵)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富)에 힘써야 하며, 패자(覇者)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데 힘써야 한다고 하옵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 지는 법이옵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하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蜀)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이옵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고 무엇이오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周)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韓)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齊)나라와 조(趙)나라를 통해서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오며, 더욱이 주나라의 구정(九鼎)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이옵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惡名)만 얻을 뿐이옵니다.”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혔다.
[주] 구정 : 우왕(禹王) 때에 당시 전 중국 대륙인 아홉 고을[九州]에서 바친 금(金, 일설에는 구리)으로 만든 솔. 하(夏)/은(殷) 이래 천자(天子)에게 전해 오는 상징적 보물이었으나 주왕조(周王朝) 때에 없어졌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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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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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9장 도래종교
3.미트라
미트라(Mithras)는 페르시아의 아베스타 경전에 연유된 신으로 그리스에서는 빛의 신, 로마에서는 광명과 진실의 신, 죽음의 구세주, 최고의 행복을 내리는 주, 승리와 역전의 용사라는 존칭으로 예찬되어 널리 숭배되었다. 미트라교는 원래 아후라마즈다를 최고신으로 모셨는데, 기원전 7~6세기에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오르마즈다(아후라마즈다)를 선과 빛의 지고신, 아흐리만은 악마의 신으로 대칭시키고 인류역사는 선과 악 두 원리에 대립과 항쟁의 역사라고 가르쳤다. 그 내용을 담은 경전을 젠드 아베스타라 한다. 3세기 사산 왕조는 이를 페르시아의 국교로 삼았다. 이슬람교 이전에는 페르시아의 지배적 종교였으며 마즈다미즘이라고도 한다.
로마에서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 4세기 동안 월등한 교세를 자랑하며 크게 성행하였고, 미트라를 황제의 보호신으로 모셨다. 미트라는 정복 불가능한, 페르시아 모자를 쓴 젊은 신으로 표현되고, 쓰러뜨린 황소 위에 무릎을 대고 한 손으로는 뿔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단도로 목을 찌르는 상으로 묘사되었다. 이 숭배는 서기 2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원으로 막강해져 로마 병사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미트라 숭배에서는 독신 남자만이 사제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여자는 신전 출입도 금지당하였다. 대신 여성은 데메테르, 이시스, 헤라 또는 디오뉴소스 신전에 모여 의식과 축제를 참여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세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미트라 비교를 모방하였다. 이 유사성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예의 득의 논법으로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악마가 진실된 신앙을 선취해서 흉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교는 여러 점에서 매우 흡사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도 미트라 사제는 자신과 같은 신을 숭배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복할 수 없는 태양 미트라'의 탄생일로 정한 12월 25일은 서기 4세기에 그리스도교도에 의하여 그리스도 탄생일로 계승되었다. 일설에 미트라는 태양신과 그 어머니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그리스도와 흡사하다. 다른 설에서는 미트라의 어미는 인간 처녀라 하고, 또 다른 설에서는 미트라에게는 모친이 없고 '천계에 있는 아비'의 남근 벼락으로 수정된 여성바위 페트라 게네트릭스(탄생바위)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 탄생을 양치기와 예물을 가져온 현왕이 목격하였으며 미트라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며, 눈먼 자를 보이게 하고, 다리 못 쓰는 자를 걷게 하며 또한 악마를 쫓는 등 성왕 전설에 나오는 여러 기적을 행하였다. 미트라의 승리, 승천 및 부활에의 축하는 태양이 가장 높은 지점에 오르는 춘분날 행해졌다.
승천하기 전에 미트라는 황도 12궁을 상징하는 12제자와 '최후의 만찬'을 가졌는데, 숭배자들은 이 전통적 의식에 모여 십자가를 색인한 빵을 성찬으로 들었다. 그 의식은 미트라의 7비적 중 하나로, 그리스도교의 7비적의 모델이 되었다. 미트라의 조각상을 어미의 자궁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혈묘에 묻으면 미트라가 묘에서 나와 재생한다고 믿었다. 창조신화에는 여성적 원리를 제외시키기 위하여 태초에 독자적으로 창조된 수소를 원초의 낙원에 놓고 이 수소가 여성을 모방해서 남성의 상대가 되었다고 한다. 모든 생물은 수소의 피에서 생겨났는데, 거세되어 희생공양된 수소의 피가 달까지 흘러서 마적인 결실을 가져왔다. 달은 여성의 매달 출현하는 마적 '생명의 피'의 근원이며 이 피로 인해서 지상에는 어린이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트라의 종말론에 의하면 물에서 시작된 것은 불로 끝나는데 최후의 날에 일어나는 빛과 어둠의 격전으로 지상은 대변동이 일어나 파괴 소각된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지고신과 인간 사이에 조정자로 미트라 사제를 개재시켜, 사제의 교시에 따르는 덕망 있는 사람들은 빛의 정령에게 구원되나, 다른 교리에 따르는 죄 많은 자는 악의 신인 아흐리만 및 타락한 천사와 같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구제개념도 페르시아의 이 종말론에서 연유한다. 미트라교의 엄한 규율과 활기찬 전투정신은 병사들에게 합당한 것으로 인정되어 로마 군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미트라는 콤모두스(161~192), 율리아누스(331~363) 황제 통치하에서 로마군의 최고 수호신이 되었다. 그리고 미트라교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폭적으로 유입되었다. 바티칸의 미트라 동혈신전은 376년에 그리스도 교도에 의하여 점거되고 미트라교 최고사제의 직명인 파테르 파토룸은 교황의 명칭인 파파(Papa) 혹은 포프(Pope)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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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라(Mitra / Mithra) 또는 미트라스(라틴어: Mithras)는 브라만교, 조로아스터교, 미트라교의 태양신으로, 인도-이란 제어로 ‘서약’이라는 뜻인 단어 *mitra에서 유래한 계약과 태양의 신이다. 기원전 1400년 경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후르 왕국과의 평화 조약에서 협정의 증인이며 유지자로 기원되는 5신 중의 하나로서 처음 등장하였다.
토럭터니 장면과 만찬 장면: 위 양면 부조는 축을 따라 회전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위쪽의 앞면 부조에는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즉 토럭터니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아래의 뒷면 부조에는 죽임을 당한 황소에 기대앉아 미트라와 태양신 솔이 만찬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 양면 부조, 로마 근처의 피아노 로마노, 기원후 2~3세기.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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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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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1
철학을 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첫째, 어떠한 의문이라도 주저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둘째, 명백한 사실도 의문을 품는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한다. 정신은 아무것도 뒤쫓지 말고 의지에 유혹 당하지 말아야 하며 직관적인 세계가 알려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2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지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눈이 착시 현상을 일으키면 똑바른 사물이 삐뚤어져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거꾸로 보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지혜야말로 삶의 구원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세상의 올바른 가치를 알게 된다.
3
현명한 사람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성품을 유지한다. 명상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의 연금술사들은 금을 찾기 위해 물질의 화학 공식을 연구하다가 다른 여러 가지 유용한 물건을 발명했다. 우리도 역시 명상을 통해 쾌락 대신에 지혜를, 행복 대신에 인생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4
진정한 사색가는 어느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모든 판단의 근거를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다. 군주가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처럼 진정한 사색가는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직접 인정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승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견이나 권위,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법이나 명령에 묵묵히 복종한다.
5
아름다움의 향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명상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진정한 자아와 만나는 작업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의 순수함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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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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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 제1장 선각의 인맥
한국민속학의 정열적인 개척자 석남 송석하
우현 고유섭은 유형문화재를 연구대상으로 한 한국미술사의 개척자였다. 반면 같은 시기에 무형문화재 쪽의 가면극과 그밖의 전통적인 민속의 조사·연구에 투신했던 또 한 사람의 정열적인 개척자가 있었다. 곧 석남 송석하였다. 두 사람은 1930년대에 마치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민족문화재의 큰 두 갈래를 분할해 갖고 다같이 영예로운 개척자가 되었는데, 우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국 민속학계는 석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1904년생의 동갑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민속학 분야에도 미술사의 위창 오세창처럼 조선 말엽에 눈떴던 존경할 만한 선각자는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상현 이능화였다. 1889년에 서울에서 영어학당을 졸업하고 한성외국어학교의 프랑스어 교사, 한성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개화기에 국제적인 시야를 가졌던 상현은 한일합방 이후 위창 등과 민족정신의 계몽 및 선양에 힘쓰면서 종교와 민속에 관한 많은 저서를 집필했는데, 넓은 의미의 무형문화재와 민속학에 관계되는 것으로 (조선무속고)·(조선여속고)·(조선해어화사)(기생의 풍속사)·(조선제례고) 등이 있다. 이 책들은 비록 위창의 (근역서화징)처럼 순한문으로 씌어진 것이긴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새로운 세대의 관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상현 같은 선각자를 배경으로 석남이 이 땅의 민속놀이와 그 원형을 조사·연구하고 또 보호의 중요성을 사회에 인식시키는 근대적인 민속학 운동을 시작한 것은 193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고종황제 때에 시종무관을 지낸 경남 언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의 동경제국대학 상대에 유학, 상학을 전공하다가 민속학에 뜻을 두면서 이미 보장받았던 엘리트 코스를 집어치운 석남은 조선에 돌아오자 각지를 여행하면서 무서운 집념으로 살아 있는 민속의 기초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다 그는, 도쿄의 와세다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와서 민족문화 연구에 착수했던 손진태(석남보다 4살 위, 한국전쟁 때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있다가 납북), 고향 친구로 역시 와세다대학에 유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한 정인섭 등과 더불어 최초의 조선민속학회를 조직하고, 집의 돈을 가져다 (조선민속)(1933년 1월에 1호 발행)이라는 역시 최초의 민속학 연구지를 발행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펴 나갔다.
집에서 가져다 쓸 수 있는 돈이 있었다는 조건은 석남의 민족적인 포부와 이 땅의 민속학 개척을 위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독일제 고급 카메라와 노트가 든 가방을 메고 자유롭게 여러 지방을 답사하면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무시되고 있던 독특한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각종 연중행사와 종교의식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겼다. 풍속적인 민구와 예부터 내려오는 서민문화의 각종 민예품들도 그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또 수집의 대상이었다.
살아 있는 민속의 형태를 조사·파악하는 현지 답사와 함께 석남은 옛문헌들을 뒤져 그것들의 연원과 유래를 찾아내는 학술적인 고찰에도 열중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문·잡지에 민속학의 새로운 의미를 역설하고, 더 많은 관심인과 연구가를 기대하는 글을 계속 기고했다. 그는 연구학자인 동시에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이 조사한 자료와 지식을 독점하려 하지 않았고, 언제나 여러 동학자 및 대중과 관심을 같이하려고 했다. 사재로 '조선민속학회'를 이끌면서 석남은 사라져가는 이 땅의 민속놀이를 세상에 알려 재인식시키는 한편 그 보호에 힘쓰는 행사도 자주 꾸몄다. (조선일보)를 움직여 전국 각지의 농악대를 서울로 불러다 일대 경연대회를 여는가 하면 황해도의 '봉산탈춤' 을 처음으로 서울에 유치하여 '양주별산대놀이' 와 비교하는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봉산탈춤'은 석남을 가장 매혹시킨 민속놀이의 하나였다.
1930년대 중엽,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석남은 사리원(봉산군청 소재지)을 찾아가서 당시 조선인들의 군중적인 모임을 좀처럼 허락하려고 하지 않던 일본인 책임자를 설득시킨 후, '봉산탈춤' 의 전통적인 기능보유자들을 모아 7월 백중날(음력) 한바탕 놀게 하고는 그 진행과정과 대사를 촬영·기록하는 한편 방송국을 움직여 실황중계의 특별방송까지 시켰다. 또 그때 마침 백두산의 동물 생태를 조사하러 가던 스웨덴의 동물학자 베르그만을 끌어들여 그로 하여금 '봉산탈춤' 놀이를 무비카메라로 촬영케 함으로써 유럽에 이 땅의 고유한 민속놀이 하나를 소개하도록 했다고 한다(교수의 증언, (한국민속고) 서문에서).
앞의 이야기가 혹시 1934년 단오날에 '조선민속학회'와 경성제대 민속조사반이 사리원에서 특별히 '봉산탈춤' 을 실연시켰던 때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때엔 같이 참관하기로 했던 방송국과 신문사측이 사정으로 불참했다고 석남은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속고)에 수록된 (사리원 민속무용에 대하여)에서 ).
조국이 해방을 맞은 뒤, 석남은 그의 평생의 꿈이었던 민속박물관을 발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때 그의 집념을 협조해준 사람은 과거의 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한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이었다. 김관장은 당시 미군정청의 관계관을 움직여 국립민족박물관 간판을 서울 남산 밑에 있던 전의 총독부 소속 건물에 걸게 하고 석남이 관장으로 취임하는 데 협력했다. 이 민족박물관의 내용은 지난날 조선의 민예품에 심취했던 일본인 연구·수집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경북궁의 한 고건물을 빌려 개인적으로 창설했던 조선민족미술관의 컬렉션(도자기·민화·기타 민예품)에 석남 자신이 수집했던 민속 가면 등을 합친 것이었다. 그는 이 민족박물관을 오래 전부터의 꿈이었던 미속의 진작·조사·연구기관으로서의 민속박물관으로 발전시키려 했었다(1936년 1월 1일에 (동아일보) 지상에서 말한 공상계획).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1948년에 45세로 병사함으로써 그 새로운 포부는 좌절되고 말았다.
석남이 작고한 뒤, 국립민족박물관도 열의 있는 적절한 후계자가 없이 우여곡절을 겪다가 한국전쟁 직후에 정부기구 축소 조치로 폐쇄되고, 가면을 포함한 그의 민속애의 컬렉션은 야나기의 그것과 분별이 불가능하게 뒤섞여 국립박물관에 흡수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석남의 또다른 컬렉션으로, 1949년에 서울 보성중고교(전형필 재단)에서 인수했던 진귀한 고서들도 한국전쟁 중 학교 도서관에서 무참히 피해를 받아 상당수가 사라져갔고, 다행히 살아남은 2,359책이 한국민족미술연구소(현재 간송미술관)로 옮겨 보관돼 있다. 진작부터 학계가 알고 있던 귀중본 가운데 (삼국유사)의 잔본과 (매월당 시호)(필사본)는 인멸돼버렸고, 희귀한 계미자본(1403년에 주조된 최초의 조선 동활자 책)의 (동래선생교정 북사상절) 2책만이 기적적으로 수습되어 있다.
한편 석남이 (조선민속)을 비롯한 여러 잡지와 신문에 발표해 남긴 30여 편의 연구논문과 계몽적인 글들은 그가 타계한 지 12년 만인 1960년에 그의 매부되는 양재연 박사가 중심이 되어 (한국민속고)라는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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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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