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1호 - 2023.11.21 화요일(음력 :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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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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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예술가도 한때는 초심자였다. ― 「파머스 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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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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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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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씨가 말했다
생존자 이주현씨는 10·29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이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이 짧은 5분 안에 제 마음과 생각을 다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못다 한 말들은 그냥 다 없는 말이 되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분향소보다는 이태원을 자주 갔습니다. 그 참사 현장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고 저라도 선명히 계속 기억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억의 벽 앞에도 자주 갔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메모지에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말 몇 마디로, 몇 줄의 문장으로 어떻게 이 마음을 다 표현합니까.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분향소 앞에서 그분들의 영정을 마주 볼 때는 한 가지 말을 되뇔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겠느냐’고. 그 질문만을 갖고 영정 앞에 섰습니다. 꿈에서조차 그 답을 들려주는 분은 없었어요. 그래서 살아 계실 적에 그분들이 제일 원했던 것, 이태원의 핼러윈을 제대로 즐기는 것, 그거라도 대신 해 드리고자 어제 이태원을 방문했습니다.
새벽에 밤하늘을 봤는데 보름달이 굉장히 밝더라구요. 달이 그렇게 밝은데, 별이 너무 잘 보였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 느꼈어요. 저는 그분들과 함께할 겁니다. 외면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 서 있을 거고, 생존자로 계속 남아 있을 거고, 그때 상황이 어땠는지 계속 기억할 것입니다. 함께해 주세요.
생존자로서 다른 생존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자리 그대로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이 춥습니다. 모든 분들, 따뜻하게 잘 챙겨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부터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삶은 우리를 죽지 못하도록 막는다.(루카치)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군색한, 궁색한
내 탓은 없었다. 남의 탓, 조상 탓 만 있었다. 잘한 것도 있단다. 반성인 듯 반성 아닌, 반성 같은 모호한 수사만 있었다. 사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안다. 때려 놓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끝이 아니다. 피해자가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것이 진정한 사과요, 사죄이다. 우리에게는 광복 70주년, 일본에게는 패전 70주년인 올해, 일본의 총리가 내놓은 담화는 ‘군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필요한 것이 없거나 모자라서 옹색할 때 ‘군색하다’는 표현을 쓴다. ‘군색한 감 장수는 유월부터 감을 판다’는 속담이 있다. 얼마나 형편이 다급하고 옹색하면 유월에 익지도 않은 감을 팔까? ‘군색(窘塞)하다’는 또 자연스럽거나 떳떳하지 못해서 거북하다는 뜻도 갖고 있다. ‘군색한 표현’, ‘군색한 변명’ 등이 그 예이다. 씁쓸하지만 아베 총리의 담화가 좋은 보기가 됐다.
비슷한 말로 ‘궁색(窮塞)하다’가 있다. ‘궁색하다’가 ‘아주 가난하다’의 뜻일 때는 ‘군색하다’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뜻이다. ‘군색한 살림’보다는 ‘궁색한 살림’이 훨씬 가난한 상태를 말한다. 말이나 행동의 이유나 근거가 부족할 때에도 ‘궁색하다’라고 한다. ‘궁색한 대답’ ‘궁색한 변명’ 과 같이 쓰인다.
‘군색한 변명’과 ‘궁색한 변명’은 같은 뜻일까?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군색한 변명은 앞뒤가 맞지 않고 떳떳하지 못해서 거북한 변명, 즉 다분히 나쁜 의도가 느껴지는 변명이다. 궁색한 변명은 근거가 부족한 변명임은 같지만 임시방편으로 둘러대는 느낌이 강하다. 애초부터 사죄에는 관심이 없고 책임 회피와 정치적 이득만을 노린 아베 총리의 담화는 진정으로 ‘군색한 변명’이었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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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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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아침 - 천상병
아침은 매우 기분 좋다
오늘은 시작되고
출발은 이제부터다
세수를 하고 나면
내 할 일을 시작하고
나는 책을 더듬는다
오늘은 복이 있을지어다
좋은 하늘에서
즐거운 소식이 있기를.
∼∼∼∼∼∼∼∼∼∼∼∼∼∼∼∼∼∼∼∼∼∼∼∼∼∼∼∼∼∼
고대 - 한용운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해가 저물어 산 그림자가 촌집을 덮을 때에,
나는 기약없는 기대를 가지고 마을 숲 밖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를 몰고 오는 아이들의 풀피리는 제소리에 목메입니다.
먼, 나무로 돌아가는 새들은 저녁 연기에 헤엄칩니다.
숲들은 바람과의 유희를 그치고 잠잠히 섰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동정하는 표상입니다.
시내를 따라 굽이친 모랫길이 어둠의 품에 안겨서 잠들 때에,
나는 고요하고 아득한 하늘의 긴 한숨의 사라진
자취를 남기고, 게으른 걸음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어둠의 입이 황혼의 엷은 빛을 삼킬 때에,
나는 시름없이 문 밖에 서서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다시 오는 별들은 고운 눈으로 반가운 표정을 빛내면서
머리를 조아 다투어 인사합니다.
풀 사이의 벌레들은 이상한 노래로, 백주(白晝)의
모든 생명의 전쟁을 쉬게 하는 평화의 밤을 공양(供養)합니다.
네모진 작은 못의 연잎 위에 발자취 소리를 내는 실없는 바람이
나를 조롱할 때에 나는 아득한 생각이 날카로운 원망으로 화합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일정한 보조로 걸어가는 사정없는 시간이 모든 희망을 채찍질 하여
밤과 함께 돌아갈 때에, 나는 쓸쓸한 잠자리에 누워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가슴 가운데의 저기압은 인생의 해안에 폭풍우를 지어서,
삼천 세계(三千世界)는 유실되었습니다.
벗을 잃고 견디지 못하는 가엾은 잔나비는
정(情)의 삼림에서 저의 숨에 질식되었습니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대철학은
눈물의 삼매(三昧)에 입정(入廷)되었습니다.
나의 '기다림'은 나를 찿다가 못 찿고 저의 자신까지 잃어버렸습니다.
∼∼∼∼∼∼∼∼∼∼∼∼∼∼∼∼∼∼∼∼∼∼∼∼∼∼∼∼∼∼∼∼~~~~∼∼
홍시 - 정지용
어적게도 홍시 하나.
오늘에도 홍시 하나.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게 웨 앉었나.
우리 옵바 오시걸랑.
맛뵐라구 남겨 뒀다.
후락 딱 딱
훠이 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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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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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전심(以心傳心)
以:써 이. 心:마음 심. 傳:전할 전.
[동의어] 염화미소(拈華微笑).
[유사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출전]《五燈會元》〈傳燈錄〉,《無門關》,《六祖壇經》
-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말.
송(宋)나라의 중 도언(道彦)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法語)를 기록한《전등록(傳燈錄)》에서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眞髓)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의 중 보제(普濟)의《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微笑].’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덕(妙德-매우 뛰어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煩惱)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진리를 아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 불립문자(不立文字 敎外別傳:모두 언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뜻. 곧, 진리는 마음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함)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주]《오등회원》:《전등록》외 4부의 ‘등록’을 합친《오등록(五燈錄)의 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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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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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9장 도래종교
1. 오르페우스
[짐승들에 둘러싸여 있는 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Orpheus)는 그리스에서 독자적인 신앙 오르페우스교를 정립하고 교리교본을 낸 최초의 교주이다. 또한 그리스 신하에 등장하는 최고의 음악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오르페우스에 관한 신화는 매우 모호하고 윤색이 심하여 상징화되어 있으며, 먼 옛적부터 내려오던 전승이 큰 규모의 신화로 확대되고 문학적으로 대중화되었다. 오르페우스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그리스도교의 초상화에도 그 양식이 도입되었다. 오르페우스는 오이아그로스와 칼리오페의 아들이다. 그러나 모친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어 폴류흄니아 혹은 드물게는 타뮤리스의 딸 메니페라는 설도 있다. 오르페우스 자신도 아폴론의 아들 또는 제자라는 설이 있는데, 수금을 아폴론이 주었다고 한다. 오르페우스는 원래 트라키아인으로, 뮤즈와 마찬가지로 올림포스 접경에 살며 트라키아인 옷차림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그림과 조상에 나타난다. 신화작가는 오르페우스를 비스토니아, 오아류세스, 마케도니아의 왕이라고 하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노래와 음악의 거장이자 시인이다. 수금 류레와 옛 하프인 키타라를 잘 켰는데 특히 키타라는 오르페우스의 창작품이라고 전한다. 혹 창작품은 아니라 하더라도 악기의 현을 7본에서 9본으로 확장하였으며 이는 9명의 뮤즈에 현 수를 맞추었다고도 전한다. 진부야 어떻든 간에 오르페우스의 노래 솜씨는 신묘하고 매우 부드러우면서 향기를 느끼게 하여 야생의 금수들이 모여들고 산천초목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격류는 흐름을 멈추었다. 포악한 인간조차도 온순해졌다.
오르페우스는 아르고 호의 원정대원으로 가담하여 타 대원보다는 힘이 약해 노를 젓는 대신 키잡이 역할을 하며 폭풍을 만나면 노래로 선원을 안정시키고 파도를 잠재웠다. 신앙심이 두터워 독자적으로 사모트라케 섬에서 비의를 시작하고 대원들을 위하여 카바리(곡물의 여신으로 데메테르의 별칭)에게 제사를 올렸다. 후에는 먼 항해에 황망하고 거칠어진 동료들도 비의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 신앙이 발전하여 오르페우스교의 효시가 되었다. 콜키스로 항해하는 도중 죽음을 부르는 세이렌의 달콤한 노래를 능가하는 감동적인 노래로 위험한 유혹을 차단하고 선원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트라키아에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에우류디케와 결혼하여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으나 얼마 후 아내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지하세계까지 내려가 다시 아내를 데려오게 되는데 이 부분이 오르페우스 신화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이다. 알렉산드리아 시대에 문학적으로 윤색되어 전재된 것 같다. 특히 베르길리우스가 지은 '농경가' 속에 가장 풍부히 수식되어 완전한 이야기로 시렸다.
에우퓨디케는 물의 요정 나이아스 또는 숲의 요정 드류아스라 하고 때로는 아폴론의 딸이라고도 한다. 하루는 트라키아의 개울 근처를 거닐던 중 그녀에게 반한 아리스타이오스(아폴론과 요정 큐레네의 아들)의 추적을 받았다. 그를 피해 도망치던 에우류디케는 풀밭에 도사린 뱀을 밟아, 발 뒤꿈치를 물리고 결국 그 독으로 생명을 잃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어찌할 바 몰라하던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다시 찾을 일념으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수그모가 노래로 하데스 나라의 사공 카론과 지하세계의 문을 지키는 괴물 개 케르베로스는 물론 명계의 모든 신들까지 매혹시켰다. 그뿐 아니라 이 황홀한 음악과 노랫소리에 모든 사물이 그만 시적 환상의 절정에 잠겨 버렸다. 익시온의 수레바퀴(헤라를 범하려다 영구히 회전하는 불의 수레바퀴에 묶임)가 회전을 멈추었으며 사슈포스의 바윗돌도 굴러 내리다 멈추었다. 탄탈로스는 갈증과 허기를 잊었으며, 다나이데스(신랑을 죽인 죄로 지옥에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노역을 함)는 물긷기를 잊어버렸다. 복수의 여신조차 마음이 누그러지니 명계의 왕 하데스와 왕비 페르세포네는 오르페우스의 애절한 아내 사랑에 감동되어 에우류디케를 남편에게 보내기로 승인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단 대신 하나의 조건이 있었는데, 지하세계를 다 지날 때까지 오르페우스는 뒤를 쫓아오는 처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여기에 순종하기로 약속하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거의 해가 있는 지상에 다가왔을 때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와 한 약속을 잊고, 또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혹 페르세포네가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닐까? 정말로 에우류디케가 쫓아오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그만 돌아보고 말았고, 이에 뒤따라오던 에우류디케는 기절하여 쓰러지고 영혼은 안개같이 명계로 사라져 결국 다시 죽고 말았다.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다시 살리려고 애쓰나 사공 카론은 막무가내로 명계의 강을 건네주지 않았다. 비통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홀로 인간세계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르페우스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도 전하는 이야기가 많다. 가장 보편적인 설은 트라키아의 여인들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유는 많고 복잡하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후 세상을 등진 채 오직 죽은 에우류디케의 추억에만 골몰하며 트라키아 여인들을 멀리하자 이에 여자들이 모욕당한 것으로 느끼고 분개하였다. 게다가 오르페우스는 여자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젊은 남자와 같이 다녔는데, 심지어 동성연애에 빠져 남색의 효시가 되었다고도 하며 상대는 미소년인 칼라이스(보레아스의 아들)였다고 한다. 더 믿을 만한 설은 오르페우스가 지하세계를 다녀와 그 곳의 경험을 토대로 비의를 올리는데 여자의 참여를 금하였다 한다. 젊은이들은 무기를 밖에 풀어놓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건 다음 의식에 참여하였는데, 어느 날 밤 여자들이 몰려와 그 무기를 집어들고 남자들이 나타나자 오르페우스와 함께 죽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디오뉴소스를 신봉하는 젊은 여자들과 마주쳐 박살당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설에는 아프로디테의 저주에 연유한다고 한다. 즉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 때문에 페르세포네와 다툴 때 제우스의 지시로 칼리오페(오르페우스의 모친)의 중재를 받아야 했다. 이 때 칼리오페는 두 여신에게 아도니스를 계절에 따라 교대로 데리고 있으라는 결정을 내렸다. 아도니스를 독차지하고 싶어했던 아프로디테는 이 결정에 화가 났으나 칼리오페에게는 직접 복수할 수 없어 그 아들 오르페우스를 괴롭혔다. 즉 트라키아 여인들로 하여금 오르페우스와 사랑에 빠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연정을 갖지 않고 또 가까이 하지도 않자 자존심이 상한 여인들은 무시당한 원한으로 오르페우스를 박살내었는데 이 때 떨어진 머리에서는 계속 에우류디케를 부르고 있었다 한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오르페우스가 제우스의 벼락으로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즉 오르페우스가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되자 이에 화가 나서 그랬다고 한다. 때로는 디오뉴소스와 같이 엘레우시스의 비교를 창설하였다고도 한다. 오르페우스 죽음에 대한 정설에 따르면, 트라키아 여인들에게 박살을 당한 후 그 시체는 개울에 던져져 바다로 떠내려 갔다고 한다. 머리와 수금이 레스보스에 와 닿자 주민들은 정중히 장례를 치르고 묘소를 만들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레스보스 사람들은 그 보상으로 음악과 시적 재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 예를 들면 중동지방의 멜레스 강구에도 오르페우스의 묘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오르페우스의 신체 조각은 뮤즈가 모아 피에리아에 매장하였다. 오르페우스 살해 후 트라키아 전역에는 역병이 번져 나갔다. 신탁을 받아 보니 음악의 장인을 죽인 벌이니 역병에서 벗어나려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찾아 응분의 제사를 올려 영예롭게 추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먼 곳까지 널리 찾은 바 멜레스 강구의 모래 밑에 매장된 머리를 어부들이 발견하였다. 피가 묻어 있는 머리에서는 그 때까지도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살리아에는 그 무덤에 대해 또 다른 괴이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즉 레이베트라 지방에 있었던 일인데 트라키아의 디오뉴소스의 신탁에 의하면, 오르페우스의 재(유골)에 햇빛이 닿으면 그 도시는 한 마리의 돼지 때문에 패망한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돼지 때문에 도시가 파괴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며 그 예언을 비웃었다. 그런데 여름철 어느 날 한 목동이 오르페우스 무덤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 오르페우스의 혼이 깊이 스며들어 아름다운 음성으로 오르페우스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이 노래를 듣자 일을 멈추고 소리 나는 무덤 주위에 모여들어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그 때문에 묘소와 기념비가 무너지고 위인의 석관을 덮쳐 유골이 햇빛에 노출되었다. 다음 날 밤 격렬한 폭풍우가 일어 슈스(그리스어로 돼지라는 의미) 강물이 넘치고 다시 둑을 넘어 도시를 덮쳐 버렸다. 설명할 수 없던 기이한 신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오르페우스의 음악은 죽은 다음 천상에서도 인정되어 수금은 별자리에 올랐다. 오르페우스의 영혼은 지하세계의 낙원에서 지내며 원삼을 두르고 축복받는 영혼들을 위하여 계속 노래를 불렀다. 오르페우스 신학의 형성과 정립의 배경에는, 오르페우스가 지하세계에 다녀왔기 때문에 축복받은 영혼이 지내는 낙원에 갈 수 있는 방법과 죽은 다음에 영혼을 위협하는 어려운 과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믿는 데 있다. 사람들이 죽은 사람과 같이 여러 시문 특히 송사, 신통기나 아르고 원정 서정시의 구절을 색인한 명지를 묻는 습관은 오르페우스의 그러한 속성 때문이다. 초기 오르페우스 시문은 유실되고 후기에 가서 오르페우스 종파의 재료를 토대로 아리스토텔레서는 '오르페우스 서사시'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고, 또한 피시스트라토스 왕실에서 지낸 오노마크리토스는 '오르페우스 시'를 썼는데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많은 후기 작가들은 오르페우스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선조라는 설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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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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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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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육체적 욕망의 만족, 재물에 의한 소비의 자기 충족,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순간적 자유 등의 형태로 우리의 눈을 자극 한자에 지나지 않으며 곧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57
우리가 마시는 물이 산소와 수소의 일정한 비례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사건이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개인의 주관에 따라 현실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게 된다. 야상곡은 매우 아름다운 음악이지만 마음이 우울할 때 그 음악을 듣는다면 보잘 것 없는 소음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날씨가 나쁜 날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또한 고장난 카메라로 멋진 풍경을 찍는다면 우리는 그 사진을 인화할 수 없다. 현실의 모습들은 주관성과 객관성에 의해 우리의 주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58
어떤 사건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감수성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운이나 재앙은 그 사건 자체가 보여주는 객관적인 의미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59
우리의 인생은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우리의 소유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운명은 우리의 물질적인 재산과 가족, 사랑에 대해서까지 절대적인 권리를 행사한다. 행복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손짓하고 있다. 그 거리를 좁히면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하면 어느 사이에 행복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불행은 우리에게 아무런 환상도 심어 주지 않는다. 불행이 우리에게 안겨 주는 것은 바로 불행 그 자체이다. 그러나 행복이 우리에게 안겨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또다른 불행이다.
60
의지는 우리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바로 존재하는 것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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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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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 제1장 선각의 인맥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 엮어낸 위창 오세창
[청년시절 오세창]
위창 오세창은 4∼5대에 걸친 집안의 전통을 이어서 20세 때에 역관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사역원 역관이 됐다. 3년 후인 1886년에는 조정의 인쇄 출판기관이었던 박문국의 주사로서 (한성순보)(최초의 근대적인 신문) 기자를 겸했다. 이후 1896년에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도쿄의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1년간 가 있게 될 때까지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02년에는 개화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 5년만에 귀국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손병희·양한묵 등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이렇듯 개화운동의 적극적인 참가자였던 위창은, 망명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인 1906년에는 천도교를 배경으로 손병희·권동진·이인직 등과 민족적 개화사상을 계몽하기 위해 (만세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했고, 1909년에는 다시 대한협회를 배경으로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대한민보) 창간에 협력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가서 국운은 마침내 기울고 국토는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당하고 말았다. 통탄스런 시대의 격변과 망국의 암흑기를 목격하면서 위창은 집안의 민족문화 컬렉션을 새로운 감회로써 되만지기 시작하였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그는 떠돌아다니는 민족문화의 유산들, 특히 서화를 힘 자라는 대로 더욱 찾아 모았다. 위창의 서화 수집은 여유를 즐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역대 서화가의 이름과 확실한 관계기록 및 진적을 조사·정리하여 우선 후학들을 위해 이 땅의 서화가 인명사전을 펴낼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910년대 중엽에는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매일신보) 기자가 위창댁을 방문하여 그의 서화 컬렉션과 연구·정리 생활을 보고 쓴 (별견서화총)이라는 기사가 있다.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에 오세창 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가히 경하할 일이로다. 씨는 십수년 이래로 조선의 고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275점에 달하는데, 그중 1,125점은 글씨요 150점은 그림이다. 세종·선조·숙종·영조·정조 시대의 것이 많고, 신라·고려 때 것도 적잖이 모았으니 명현석유와 고래화가의 필적을 망라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로다. 씨는 앞으로 100여 점만 더 구득하면 조선의 명서화는 누락됨이 없으리라 하여 고심 수집 중이며, 다만 서화를 수집함에 그치지 않고 그 필자·별호·연대·이력 등을 상세히 조사하여 참고케 하였는데, 그 목록만 하여도 세상에서 가히 구득치 못할 가치가 있겠더라. 기자는 씨에게 그를 사진판으로 출판하여 조선의 고미술 동호자에게 할애할 것을 권유했고 씨도 그런 계획이 있어 그 기회를 엿보는 중이라며 우선 그 목록을 정리·출판하여 서화 동호자의 참고자료가 되도록 하리라더라."
1910년대 중엽의 위창의 생활내막과 컬렉션을 가장 상세히 알려주는 글은 1916년 12월 7일부터 5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위창댁 방문기인 (고서화의 삼일)이다. 3년 후의 3·1독립운동 때에 가선 다같이 33인 민족대표에 끼지만 만해와 위창이 만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작부터 서로의 존재와 민족사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만해의 위창 방문기를 쉽게 풀어 긴요한 대목의 요지만 인용해 본다.
"11월 26일(1916년) 하오, 박한영·김기우 두 분과 동행하여 조선 고서화의 주인되는 위창 오세창 선생을 돈의동으로 방문하다. 나는 그가 조선 고화를 수집한다는 말을 들은 지 이미 오랜지라, 일찍부터 구경하고 싶었으나 여러 일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기우의 소개로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다."
"위창댁에 이르러 중문을 들어서니 마당에는 국화분 몇이 놓여 있다. 응접실에 들어가 앉으니 기우가 나를 위창에게 소개하여 지면의 예를 나누었다. 그런 후 위창은 그의 오랜 친구인 기우를 시켜 별실에서 서화 축을 가져오도록 하였는데, 그전에 벽에 걸린 서화를 보라 한다. 나는 머리 들어 사벽을 돌아보았다. 북쪽 벽에는 '주정의 명' 을 탁본한 것이요, 서쪽 벽의 것은 석각을 탁본한 5폭을 이어서 표구한 것이다. 첫 번째 행의 '물하소형' 4자는 성벽의 각자이니, 위창은 내가 그것을 보고 있었을 때에 나무상자 하나를 열더니 한 조각의 돌을 보여주는데, '물하소형'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성석이라. 나머지 4행은 '통격석비' (백제의 유허 비문), '동우불광청' (단곡사의 신라 신행선사 비문), '대사유악장' (정토사의 고려 자등탑비 비문), '일시동인실개유지' (승암사의 이조 무학선사 비문)이었다."
"어느 겨를에 기우는 일곱 축의 화첩을 가져다 놓고 열람을 독촉하는지라, 벽에서 눈을 돌리니 (근역화휘)라고 표제가 적혔는데 위창이 직접 화첩을 꾸미고 쓴 것이라. 제1축은 31인의 그림 41점으로 되었는데 첫장은 고려 공민왕의 양 그림이요, 그외 신사임당의 '초충도' 등이 들어 있다. 제2축은 30인의 41점, 제3축은 31인의 41점, 제4축은 20인의 29점…. 나는 눈으로는 그림을 보고 손으로는 화가의 이름을 짚어 나가기에 바빴다. 이렇게 그리워하던 영예스러운 우리 고인의 수택을 접촉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계속해서 29인의 그림 32점을 모은 제5축, 24인의 34점이 들어 있는 제6축, 26인의 33점이 든 제7축을 모두 보았다. 도합 191인의 역대 화가가 그린 250점의 그림을 5시간 반이나 걸려 배람하였다. 다시 서첩까지 보려 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되고 하여 다음날로 미루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에는 오래 전부터 약속이 있었던 김남천, 강도봉 두 스님을 청하여 동행하려던 차에 마침 광문회에 머무르고 있던 김노석이 찾아왔길래 동행 여부를 물으니 그도 좋은 기회라고 흔연히 나서는지라, 4인이 동행하여 서첩을 보기 시작한 것이 하오 1시 반이었다. 표구는 화첩과 똑같고, 표제는 (근역서휘)니, 모두 23축으로 되어 있었다. 제1축에는 조선 최고의 명필 김생의 금니서와 최고운의 은니서가 있는데 이것이 진적(진짜)인지 아닌지 약간 의심의 여지가 있다지만, 그 밖에 정몽주의 글씨는 어제 공민왕의 그림을 보던 감회가 그치지 않았던 터라 더욱 감명을 받았다. 제2축 이하에는 성삼문·이황·정철·허난설·송운대사·한석봉·이괄·송시열·허미수·정약용·김정희의 각체 각종 내용의 글씨들이 모아져 있는데, 모두 692인의 진묵이라, 그것들을 불과 3시간에 다 보고 나니 속첩이 또 있단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 또 보기로 하고 일어섰다."
"다음날엔 혼자서 찾아가다가 중로에서 김노석을 만나 돈의동 위창댁에 이르니 조선 제일의 호고가인 최남선과 최성우가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오랜만의 인사를 나누고 곧 (근역서위.속)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 속첩은 모두 12축으로 408인의 글씨를 보충한 것인데 그 속엔 고려 때의 금니자를 비롯하여 임경업·이삼만·민영익 등의 필적이 수집되어 있었다. 본첩것과 합치면 실로 1,100인의 글씨가 모아졌고, 화첩이 그림까지 치면 도합 1,291인의 수적이라. 더구나 그것들이 신라의 김생으로부터 현대까지 1,200여 년에 걸쳤으니 이렇듯 잔편단간의 고서화를 채집하는 데 성공한 위창에게 그 동안의 고로를 위로하기보다 그 행복을 축하하겠도다."
만해는 그 외에도 미처 표구를 하지 못한 채로 있는 고서화와 탁본, 그밖에 살아 있는 서화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끝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의 고서화를 이렇듯 수집함은 실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며, 그 가전의 사업인데, 그가(위창이) 전력으로 수집을 착수하기는 7년전의 일로써 그 애씀과 성의는 누구도 동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도다. 서화의 원본을 수집함에 있어 어떤 땐 힘겨운 값으로 사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의 기증도 있었다. 그렇게 얻은 후에 필주(작가)의 역사기록을 찾아 연구하고, 그 연대를 찾아내어 순서를 정리하느라 정신과 체력을 모두 바쳤도다. 조선의 고인의 수적을 이같이 모음은 누구를 위함인가. 고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조선인의 안목으로는 이상하게 보이기 쉬우리로다. 나는 그 나라의 고물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듣고 있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을 점할 만하도다."
위창의 컬렉션에서 민족의 정신적 생명의 줄기를 본 만해는 크게 감동했던 모양이다. 불교계의 거인으로 독립투사였고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민족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1916년 가을에 컬렉션에서 보고 감동한 (근역화휘)와 (근역서휘)는 그보다 10년 후에 이루어지는 위창의 필생의 업적인 (근역서화징)(한국 최초의 역대 미술가 사전)의 기본 자료였다. 위창은 그의 컬렉션의 분류·정리와 편저에서 '조선' 이란 말 대신에 이 땅의 상징적 명칭의 하나인 '근역' 으로 표기했다. 그는 (근역인수)라 하여 역대 서화가와 명인들이 직접 사용한 각종 도장의 인영도 체계적으로 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서화사 자료의 입체적인 조사와 개척적인 정리는 위창의 생애를 영광되게 한 문화적 업적이지만, 반면 민족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집착은 그가 3·1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개를 보인 투철한 독립정신과 함께 당시 조선사회에 참으로 값진 영향을 끼쳤다. 많은 뜻있는 학도와 인사들이 그의 주변에서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고, 또 이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과 긍지를 높였다. 그러한 위창의 영향력은 한국 근대문화 초기의 커다란 사회적 공헌이었다.
서예와 전각, 그리고 서화감식안에서 모두 당대의 대가였던 위창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직후인 1921년 10월에 민족 미술가들의 단체인 서화협회가 기관지 (서화협회 회보)를 창간할 때 그동안 (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비롯한 약 150종의 각종 문헌에서 뽑아 모았던 역대 서화가의 기록들을 '서가열전' 과 '화가열전' 이라는 제목으로 동시 연재를 착수했었다. '탑원초의' 라는 필명으로 '나대편' 을 소개하고, 이어서 '여대편'을 착수했다가 (서화협회 회보)가 제2호로 중단(1922년)되는 바람에 계속 활자화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앞의 두 '열전' 은 한국미술 사료의 최초의 정리 작업이었다. 위창의 역대 서화가의 행적 및 사료정리는 1928년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곧 (근역서화징)인데, 이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방면의 유일한 문헌으로서 학계와 교양인 사회의 긴요한 사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위창의 공적은 너무나 크다. 1959년에 나온 김윤영 편저의 (한국서화인명사서)는 약간의 보충은 있으나 대체로 (근역서화징)을 국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집안의 풍부한 컬렉션과 근대적인 집념의 소산인 위창의 명저 (근역서화징)이 처음으로 출판되었을 당시의 반응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육당 최남선의 표현, '암흑한 운중의 전광' 으로 대표되지만, 삼국시대 이후의 392인의 화가, 576인의 서가, 그리고 서화를 겸했던 149인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수록한 (근역서화징)의 출현에 대해 육당은 또 '참으로 일대경이에 속하는 업적' 이라고 신문에 썼다.
(근역서화징)에 앞서는 것이 있다면 추사에 완전히 심취했던 문도인 우봉 조희룡이 1844년에 기록한 (호산외사)를 꼽을 수 있다. 18∼19세기의 대표적인 명인 41인의 평전인데, 그러나 여기엔 화가로 최북·임희지·김홍도·김영면·이재관·전기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근역인수)는 수집 정리자인 위창이 작고하고 15년 후인 1968년 가을에 서울 국회도서관에서 출판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치는 856명의 서화가가 애용했던 성명, 아호, 별호, 자, 기타 별칭, 이명의 도장 약 3,800종을 실제의 날인본(종이에 찍힌 상태)으로 모았던 이(근역인수)의 방대한 유고는 위창이 한국전쟁 중 대구에 피난하고 있다가 1953년에 90세로 별세한 후 유가족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을 국회도서관의 강주진 관장이 출판을 전제로 인수함으로써 (근역서화징)과 더불어 위창의 필생의 큰 업적으로 쌍벽을 이루는 (근역인수)의 내용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전각예술의 역사적인 전통과 실제 사용을 한눈에 보여주는 최대의 자료 집성이기도 하다.
위창은 이 야심적인 인수(도장의 숲)를 반세기에 걸쳐 수집하는 동안 조선시대의 각종 인보·인집·인첩·인책을 모두 참고, 흡수하고 있다. 한편 역대 서화가의 진필 수집이었던 (근역화휘)의 일부는 3·1운동 이후 위창의 생활이 차차 어려워지던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서울의 부호로서 미술품 수집가였던 다산 박영철에게 넘어갔다가 1940년에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에 기증되어 지금도 대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근역화휘)에선 (천)·(지)·(인)의 세 화첩(도합 67점의 소폭 그림이 들어 있다)이, 그리고 (근역서휘)에선 모두 35첩이 다산의 기증으로 역시 서울대박물관에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었는데, 당시 기증자의 친일색이 개운찮게 뒤따르긴 해도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행선지였다. (근역서휘)와 (근역화휘)에 들어가지 않은 1,116점의 글씨와 그림(주로 근대의 문인화)들은 따로 (근묵)이라는 압축된 표제로 묶어(모두 34권) 위창이 끝까지 간수하고 있다가 유족에게 물려줬다. 그러다 1964년에 성균관대학에 들어가 현재 대학박물관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위창이 직접 쓴 '근묵' 이라는 제자 밑에 '팔십위' 라고 낙관 한 것을 보면 이 속첩이 꾸며진 것은 1943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대로부터 이어졌던 위창의 컬렉션엔 진귀한 책도 많았다. 희귀한 고려본과 조선 초기의 진본들이 포함돼 있는 이 문고는 1962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갔는데, 약 3,200책이었다. 그밖에 낙랑시대의 명문이 있는 귀중한 전 2점(하나는 서기 335년명)과 역시 글자가 들어 있는 삼국시대의 기와조각 44점, 그리고 앞에서 이미 소개한 '고구려 성벽각자' 는 1965년 10월에 이화여대박물관이 위창의 유족으로부터 인수했다.
['근역서휘'에 들어 있는 우리나라 3대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고려 문신 강감찬의 필적 원본. 서울대 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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