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1호 2023.6.02 금요일 (음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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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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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버릇을 고치려면 남들에게 아이들 칭찬을 하되 아이들이 엿듣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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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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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부끄’ ‘쓰담쓰담’
연예ㆍ오락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막이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자막 없이는 그 방송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과도한 자막 사용은 시청자에게 시각적 피로감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부적절한 자막도 다수 등장했다.
출연자의 감정이나 행동을 나타내기 위해 ‘ㅠㅠ’ ‘^^’ 등의 이모티콘과 ‘부끄부끄’ ‘쓰담쓰담’ 등의 음성 상징어를 자막으로 사용한다. 이 가운데 음성 상징어인 ‘부끄부끄’ ‘쓰담쓰담’은 각각 ‘아주 부끄러워하는 모양’ ‘손으로 살살 쓰다듬는 모양’을 흉내 낸 말로, 둘 다 새로 만든 말이다.
‘부끄부끄’는 형용사 ‘부끄럽-’을 ‘부끄’와 ‘럽’으로 분석해 ‘부끄’를 반복적으로 결합하여 만든 말이다. 그런데 ‘부끄럽-’이 ‘부끄’와 ‘럽’으로 분석되는 말이 아닌데도, 우리말 어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임의적으로 분석하여 새말을 만들었다. ‘아주 쑥스러워하는 모양’을 흉내 낸 ‘쑥스쑥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형용사 ‘쑥스럽-’을 ‘쑥스’와 ‘럽’으로 임의적으로 분석해 만든 새말이다.
반면 ‘쓰담쓰담’은 동사 ‘쓰다듬-’을 ‘쓰담-’으로 줄여 그것을 반복적으로 결합해 만든 말이다. 동사 ‘쓰다듬-’을 반복적으로 결합하여 새말을 만들었는데, 이는 우리말 어법에 어긋난다. ‘욕심 사납게 마구 먹는 모양’을 흉내 낸 ‘처먹처먹’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동사 ‘처먹-’을 반복적으로 결합하여 만든 새말이다.
방송에서 자막의 효과는 크다. ‘부끄부끄’와 ‘쓰담쓰담’이라는 자막은 일부 시청자의 눈길을 끌 수도 있다. 그러나 공공성이 강한 방송의 성격을 고려할 때, 우리말 어법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만든 새말을 자막으로 사용하는 건 부적절하다. 방송 제작진의 재치로 가볍게 봐 줄 일이 아닌 것이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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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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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의 침묵
비 - 한용운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비는 해를 가리고 하늘을 가리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비는 번개와 무지개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번개가 되어 무지개를 타고,
당신에게 가서 사랑의 팔에 감기고자 합니다.
비오는 날 가만히 가서 당신의 침묵을 가져온대도,
당신의 주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비오는 날에 오신다면, 나는
연잎으로 웃옷을 지어서 보내겠습니다.
당신이 비오는 날에 연잎옷을 입고 오시면,
이 세상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비 가운데로 가만히 오셔서 나의 눈물을 가져 가신대도
영원한 비밀이 될 것입니다.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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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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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7. 군인은 군인의 임무에 따른 뿐이다(위청, 곽거병)
2) 불패의 젊은 영웅(곽거병)
곽거병은 위청의 여동생인 소아의 아들로서, 그녀가 무제의 귀여움을 받아 후궁이 되자 일찍부터 궁궐에서 살았다. 그리고 무제 7년의 정벌 때에는 18세로 종군하여 유격대를 지휘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로로 관군후로 임명되고 또 3년 후에는 표기 장군에 임명되었다. 고난 속에서 자람 숙부 위청에 비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귀족 장군으로서 유달리 눈을 끄는 화려한 존재였다. 곽거병의 부대는 언제나 정선된 정예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참 부장의 부대의 병졸, 군마, 병기 등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그리고 곽거병은 그 강력한 기병과 함께 언제나 본대보다 앞장서서 대담하게 적진 깊숙이 진공해 들어갔다. 게다가 그의 부대는 행운도 따라 한번도 곤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장군들은 언제나 불운에 휘말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문에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신임이 나날이 두터워지더니, 드디어 대장군 위청도 능가할 기세가 되었다.
흉노의 혼야왕도 서부 지역에서 번번이 한군에게 패하여 수만의 병졸을 잃었는데, 모두 곽거병의 군대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흉노의 선우는 격노하여 그 해 가을, 혼야왕을 처벌하기 위해 출두를 명했다. 이에 대해 혼야왕은 휴도왕 등과 공모하여 한나라에 항복할 결심을 하고 사자를 보내어 우선 변경의 수비를 맡고 있던 한군에게 그 뜻을 전했다. 때마침 한나라의 이식 장군이 황하 유역에 성채를 쌓고 있었다. 장군은 혼야왕의 사자를 맞이하자 즉각 무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무제로서는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항복을 가장하고 들어와 변경을 습격할 우려는 충분했다. 그리하여 무제는 곽거병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라고 했다. 곽거병의 군사는 황하를 건너 흔야황의 부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혼야왕의 장들이 등을 보이며 도망갈 기색을 보았다. 그것을 보자 곽거병은 혼야왕 진영에 뛰어들어 도망가려는 자 8천여 명을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이어 혼야왕만을 말에 태워서 무제에게 먼저 보내고, 자기는 항복한 군을 통솔하고 황하를 건너 귀로에 올랐다. 이때에 항복한 흉노는 수만을 헤아렸다.
장안에 도착한 곽거병에게 무제는 거액의 상금을 하사하고, 혼야왕에게는 1만 호의 봉지를 주어 탑음후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무제는 곽거병의 공을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 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서역왕 혼야왕과 그 부하를 모조리 우리 한나라에 귀순시켰다. 군량은 적의 양식을 빼앗아 충당하고 병졸을 강궁 1만여 명을 편입했다. 포악하고 강한 자는 죽여서 수급과 포로를 합쳐 8천여를 얻었고 더구나 우리 장병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 우리 장병은 거듭되는 토벌전을 잘도 견디어 주었다. 이리하여 황하 연안으로부터 요새밖에 이르는 땅에서 백성의 고초는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려 하고 있다. 이로써 표기 장군 곽거병에게 1천 7백 호를 하사함과 동시에 주둔군을 반감하고, 백성들의 노역을 경감하노라."
그로부터 얼마 후 한나라는 귀순해 온 흉노를 변경의 옛 요새 바깥 땅에 분산 이주시켰다.그들은 모두 오르도스의 땅에 있으면서 옛날 풍습을 유지한 채 한나라에 귀속해 살았다.
치열한 사막전
기원전 119년 봄, 무제는 대장군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 2명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의 흉노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기병은 각각 5만, 여기에 보병, 수십만이 후속부대로 뒤따르고 있었다. 이때에도 정선된 정예 부대는 모두 곽거병 군에 배속되어 있었다. 원래 곽거병은 정양을 근거지로 삼고 선우와 대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 출정하려 할 때 포로를 잡아 문초하여 선우가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무제는 급히 작전을 변경하여 곽거병에게는 더욱 동쪽에서 출격하라고 명령했다. 대신 정양에는 위청의 군대를 보냈다. 이리하여 위청은 곽거병과 협력하여 흉노에 공격을 가하려고 사막 깊숙이 진격을 개시했다. 그 병력은 5만 명이었다. 이때 전에 흉노에 투항했던 조신이 선우에게 말했다.
"사막을 건너온다면 한나라 군사는 지쳐 있기 마련이니 작전을 잘 쓰면 무난히 적을 생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우는 정예군을 골라서 사막의 북쪽 기슭에 포진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도 한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위청 휘하의 군대는 국경에서 천여 리 진격한 지점에서 선우를 발견하여 즉각 진형을 정비했다. 위청은 무강거(판자로 에워싸고 포장을 씌운 차량)를 고리 모양으로 늘어놓아 본영으로 하고 5천 기를 적진으로 돌격시켰다. 흉노군도 약 1만 기를 내보내 이에 맞섰다. 마침 해가 저물 무렵이었는데 질풍이 모래를 휘말아 올리며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양군이 모두 거의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군은 좌우 양 날개의 병력을 투입해서 차츰 포위의 태세를 갖추어 갔다. 선우는 한군이 병력으로도 우세할 뿐 아니라, 투지도 왕성하여 이대로는 자기네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황혼 속을 노새 6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부하 수백 기와 함께 단숨에 한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도주했다. 양군이 뒤섞인 혼란된 격전은 날이 저물어도 계속되어 양군이 거의 같은 숫자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다가 사로잡은 포로의 입에서 선우가 이미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지체 없이 가볍게 무장한 기병이 어둠을 뚫고 선우를 추적했다. 대장군 위청도 직속 부대를 이끌고 추적했다. 그리하여 흉노는 대열이 흩어지며 도주하였고 새벽녘까지 2백 리 쯤 진격했으나 선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위청은 여세를 몰아 계속 흉노를 몰아붙이면서 전군에게 넉넉하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 후 철수했는데 이때 성을 다시 쓰지 못하도록 완전히 불태우고 나머지 군량은 모두 가져왔다. 한편 대장군 위청이 선우와 대전하고 있을 때, 전장군인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가 이끄는 부대는 본대와 떨어져 동쪽으로 진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고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었다. 두 장군이 본대에 합류한 것은 본대가 사막의 남쪽까지 철수해 왔을 때였다. 위청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부관을 보내어 해명을 요구했다. 이때 이광은 보고서 작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결했으며, 조이기는 속죄금을 내고 평민으로 되었다. 이 전쟁에서 위청 휘하의 군대가 귀환하기까지 올린 전과는 포로, 수급을 합해 1만 9천에 이르렀다. 한편 흉노측에서는 선우가 열흘씩이나 행방불명이었기 때문에, 우욕여왕이 자립하여 선우를 자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의 선우가 나타나자 우욕여왕은 깨끗이 본래의 지위로 돌아갔다.
패배란 없다
표기장군 곽거병의 군대는 위청군과 같은 규모였다. 다른 점은 휘하에 부사령급 막료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천리도 넘게 진격하는 전과를 올려 그 성과가 대장군 위청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개선한 후 무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을 통솔함에 있어 포로의 정예를 더하여 얼마 안 되는 장비를 가지고 대사막을 넘었다. 그리하여 획장거(강 이름)를 건너 흉노의 왕 비차기를 참살하고 좌대장의 군과 싸워서 그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둔두왕, 한왕 등 3인과 장군, 대신을 비롯하여 83명을 사로잡았다. 아울러 낭거서산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고연산에서는 땅에 제사지냈으며, 한해(고비사막이라고도 하고, 바이칼호라고도 함)를 굽어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포로의 총수는 7만 4백 43명, 적군의 3할을 격멸시켰다. 더구나 군량은 적에게 뺏어 오지 깊숙이 침공하면서도 보급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로써 표기 장군에게 5천 8백 호를 하사한다."
빛과 그림자
표기장군 곽거병의 부하들은 부장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상금을 받거나 승진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이에 반하여 대장군 위청에게는 아무런 상금도 없고 부하에게도 영광을 얻은 자가 없었다. 이때부터 위청의 권위는 나날이 쇠퇴하고, 곽거병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위청은 친구나 식객들까지 썰물처럼 사라져 곽거병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의 추천만 있으면 쉽사리 관직, 작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임안만은 그것을 옳게 생각지 않고 위청 밑에 머물러 있었다. 곽거병은 과묵하고 기골에 넘친 인물이었다. 무제가 그에게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배우라고 권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 순간순간에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또한 그에게 커다란 저택을 하사하며 무제가 한번 가서 보고 오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흉노가 망할 때까지는 저렇게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겠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무제는 더욱 더 그를 존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곽거병은 젊었을 때부터 무제의 측근에서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부하를 위로할 줄을 몰랐다. 그가 출진할 때에는 무제가 친히 수레 10대 분의 좋은 음식을 내렸다. 그 식량은 개선할 때까지 남아돌아서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사졸들은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또한 요새 바깥 땅에서 병사들이 굶주림 때문에 걸을 기력조차 잃고 있을 때에도 그는 장수들과 함께 공차기를 즐겼다. 곽거병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이 출중한 장군은 불과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한편 위청은 인품이 인정스럽고 겸허하여 부하들의 인심을 사로잡는 정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망은 곽거병을 따르지 못했다. 언젠가 위청에게 그의 부하 소건이 물었다.
"왜 장군께서는 천하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그 이름을 빛내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위청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전에 몇몇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 인물들을 초빙하자, 황제께서는 이들을 매우 미워해 그들을 결국 극형에 처하셨다. 사대부를 가까이 하거나 어진 사람을 불러들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을 물리치는 것은 처자께서 하실 일이다. 신하된 사람은 오직 법을 따르고 직책을 지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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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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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약고구(良藥苦口)
良:좋을 량. 藥:약 약. 苦:괴로울/쓸 고. 口:입 구.
[원말]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동의어] 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간언역어이(諫言逆於耳), 금언역어이(金言逆於耳). [참조] 약롱중물(藥籠中物).
[출전]《史記》〈留侯世家〉,《孔子家語》〈六本篇〉.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
① 천하를 통일하고 동아시아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진(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천하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간 학정에 시달려온 민중이 각지에서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중 2세 황제 원년(元年:B.C. 209)에 군사를 일으킨 유방(劉邦:훗날의 한고조)은 역전(歷戰) 3년 만(B.C. 206)에 경쟁자인 항우(項羽)보다 한 걸음 앞서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입성했다.
유방은 3세 황제 자영에게 항복을 받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호화찬란한 궁중에는 온갖 재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꽃보다 아름다운 궁녀들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원래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유방은 마음이 동하여 그대로 궁중에 머물려고 했다. 그러자 강직한 용장 번쾌(樊?)가 간했다.
“아직 천하는 통일되지 않았나이다. 지금부터가 큰일이오니 지체없이 왕궁을 물러나 적당한 곳에 진을 치도록 하시오소서.”
유방이 듣지 않자 이번에는 현명한 참모로 이름난 장량(張良)이 간했다.
“당초 진나라가 무도한 폭정을 해서 천하의 원한을 샀기 때문에, 전하와 간은 서민이 이처럼 왕궁을 드실 수 있었던 것이옵니다. 지금 전하의 임무는 천하를 위해 잔적(殘敵)을 소탕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입정하시자 재보와 미색(美色)에 현혹되어 포악한 진왕(秦王)의 음락(淫樂)을 배우려 하신다면 악왕(惡王)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옵니다. 원래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忠言逆於耳利於行], 독약(양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다[毒藥苦於口而利於病]’고 하였나이다. 부디 번쾌의 진언을 가납(嘉納:권하는 말을 기꺼이 들음)하시오소서.”
유방은 불현듯 깨닫고 왕궁을 물러나 패상(함양 근처)에 진을 쳤다.
② 이 ‘양약고구’란 말은《공자가어(孔子家語)》에도 실려 있는데 요약해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 은나라 탕왕(湯王)은 간하는 충신이 있었기에 번창했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따르는 신하만 있었기에 멸망했다.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이, 형이 잘못하면 동생이, 자신이 잘못하면 친구가 간해야 한다. 그리하면 나라가 위태롭거나 망하는 법이 없고, 집안에 패덕(悖德)의 악행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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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우덜은 선녀가 아니구만유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오는군요. 제겐 꼭꼭 숨기고 싶은, 솔직히 말하면 깨끗이 잊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몽이 또 되살아나는군요.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연일 36-7도를 기록하던 8월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더위를 피해 오토바이를 타고 조용한 바닷가를 찾았지요. 그 바닷가는 흙먼지 펄펄 날리는 농로로 가야하기 때문에 그때까진 외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백사장 깨끗하죠, 물 맑죠, 거기다 게, 고동, 바지락, 해삼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아무튼 며느리도 모르고(?) 우리만 아는 곳이 있었죠. 그 넓고 넓은 바닷가를 우리 네 식구가 전세냈으니 격식 차릴 것 있나요. 옷은 벗어서 바위에 올려놓고 물속으로 풍덩! 남편은 그냥 보통 집에서 입는 흰팬티 하나 걸치고 풍덩! 왜? 1년에 몇 번 입는다고 그런 걸 사냐며 못 사게 해서 애당초 남편은 수영 팬티가 없었거든요. 물속은 언제 더웠느냔 듯이 내장까지 서늘한 게 참 시원하데요. 아이들을 튜브에 태우고 온 바다를 밀고 당기며 휘젓고 다녔습니다. 쏴아-. 밀려오는 파도소리! 끼루룩 끼룩! 하늘을 나는 갈매기! 하하하, 호호호, 행복한 웃음 소리! 그날 무지무지 행복했습니다. 사는게 이런 거구나 하구요.
한바탕 놀고 나니 배꼽시계에서 태엽 풀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들은 민생고를 해결하려고 물에서 짐보따리가 있는 바위로 나왔습니다. 수박을 가르고 열무김치에 삼겹살 지글지글 지져 마늘 고추장 상추에 싸먹는 그 맛, 두 번 씹을 것도 없이 그냥 넘어가데요. 전 점심 먹은 그릇을 대충 챙기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놀라서 소리치더군요.
"얼랄라, 옷이 없어졌다아-."
"거기께 워디 있겠찌-이."
"증말루 없다니께에-."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아무리 찾아봐도 옷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우덜은 성녀가 아니구먼유. 나무꾼 아저씨 옷 돌려주세유...”
그러나 대답은 커녕 메아리도 없더군요.
“해마다 맡아놓고 다녔어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워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디야아?”
우린 그 어떤 도둑놈 중에서도 제일 치사한 도둑놈이 옷도둑놈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이들은 어리니까 괜찮고 지도 수영복이 야하긴 해도 가릴 덴 다 가렸는데, 문제는 남편이었지요. 내려다보니 그림 참 좋데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흰팬티는 몸에 착 달라붙어 영 보기에 망측스러웠습니다. 왕솔밭 그림자가 거므스름하게 비추고 거기에 꼬불꼬불 삐집고 뭔가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도 겉옷만 훔쳐가길 망정이지 쫓아와서 팬티 안벗겨간 게 천만다행이라는 속 넓은 남편 말에 우린 한바탕 웃었습니다. 거기다가 남편은 젖은 흰팬티를 바위에 널어놓고 이러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누드로 왔지 실오라기 하나라도 걸치고 나온 놈 있음 나와 보라 그래.” 하며 하늘을 향해 두손 번쩍 들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겁니. “나는 자연인이다.” 저요 결혼해서 애 둘 낳고 살았지만요 깜깜한 밤에만 봐서 대충 그러려니 짐작만 했었는데 자세히 보긴 그 날이 처음이었다니깐요. 그나저나 바다에서 집까지 오토바이로 30분 이상이 걸리는데... 어떻게 해야 소문 안 내고 갈 수 있나 고민을 했지만, 결론은 천상 야밤에 폭주족이 되는 도리가 없더라구요. 남은 해 채우느라 고동, 게, 해삼, 바지락 잡어 저녁까지 거기서 해결하고 시간을 끌었더니 드디어 해가 지고 어두워졌습니다.
“아! 집에 가는구나. 집에 가서 옷을 입게 되었구나.”
빨리 가서 옷을 실컷 입어보고 싶습니다.
“지금 출발허면 집에까지 집행으로 가니께 단단히 꼭 붙잡아라이?”
남편이 흰팬티만 걸친 채 오토바이 탑승규칙을 강조하면서 시동을 걸었습니다. 우린 떨어지면 끝장이다 싶어 매미처럼 착 달라붙어 팔에 젖먹던 힘까지 꼬옥 붙들었습니다.
“자아- 간다이. 부릉 부릉 앵앵애애앵-.”
바퀴에 가속도가 붙은 오토바인 뵈는 게 없이 겁나게 달렸습니다. 해수욕 철이라 꼬리를 문 차량 사이를 곡예하듯 쌩- 하며 달려가는데 지나가는 우릴 보고 “바음 지나간 사람 벗었어? 입었어?“ 그날 여러 사람 햇갈렸을 겁니다. 15년 전 번개처럼 달리덩 누드 오토바이에 놀란 분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러나 해수욕장에서 남의 옷 슬쩍하는 도둑님들, 올부턴 삼가주십시오.
우덜은 선녀가 아니구먼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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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4장 올림포스 신 시대 및 그 외 신들
8. 하데스
하데스(Hades, Pluto)의 원 뜻은 영계이며, 별칭인 부를 뜻하는 플루토는 지하계 땅 속에 금은보화가 간직되어 있다는 데서 연유한다. 올림포스 12주신의 한 신으로 명계를 지배하고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왕비로 삼았다. 매우 냉혹한 신이지만 지하계의 법을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하였으므로 결코 사악하거나 악마적인 신은 아니다. 지하계는 크게 두 곳을 나뉘는데, 죽자마자 가는 곳이 에레보스이고 밑이 없는 깊은 연못인 지옥이 타르타로스이다. 명계에는 비통의 강으로 불리는 아케론 강과 통곡의 강이라는 코큐토스 강이 흐르고, 카론이라는 매우 고집센 늙은 사공이 있어 죽은 자의 혼을 피안으로 건네주었다. 카론은 죽을 때 통행료를 내놓고 제대로 장례를 치른 영혼만 배에 태웠다. 강을 건너면 견고한 문이 서 있고 문에는 머리가 셋 달린 케르베로스가 지키고 서서 영혼을 들여보내기는 하되 아무도 나가지는 못하게 하였다. 영혼이 도착하면 각자 세 심판관인 라다만토스, 미노스, 아이아코스의 앞에서 선고를 받는데 악인은 지옥에서 끝없는 고문을 받고 착한 사람은 낙원으로 보내졌다. 또한 이 곳에는 지상에서 지하계로 흐르는 플레게톤(불의 강), 스튝스(증오의 강으로 저승을 굽이굽이 돌고 흐르며 이 강에 걸고 하는 맹세는 제우스도 어기지 못하였다), 레테(망각의 강)라는 세 강이 있었다. 넓은 지하계 어딘가에는 플루토 궁전이 있었으며, 복수의 여신 에리뉴에스(푸리아이)도 나타나 악한을 가차없이 냉혹하게 처벌하였다. 명계에서 살아나온 자로는 프슈케, 시슈포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오르페우스, 아이네아스, 시뷸레가 있다.
하데스와 수문장 케르베로스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9. 데메테르
데메테르(Demeter, Ceres)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둘째딸로 헤스티아와 헤라의 가운데다. 종교상으로나 신화상으로 성격은 가이아(우주의 관점에서 대지여신)와는 판이하여 농사 특히 곡물의 지모신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 세계 도처, 특히 밀이 자라는 고장이면 이 여신의 전설이 많다. 로마인은 이탈리아의 풍요의 여신 케레스와 동일시하였다. 데메테르 여신 숭배와 전설의 중심지는 엘레우시스와 시칠리아이며 그밖에 크레타, 트라키아 및 펠로폰네소스에서도 성행하였다. 여신 숭배와 전설은 데메테르와 그녀의 딸로 후에 코레라고만 불린 페르세포네가 긴밀히 연계되어 각지에서는 단순히 이주여신으로 존경하는 경우가 많고, 대중신화는 전승된 두 모녀의 특이한 사건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엘레우시스 비의의 시작은 여신 속에 태로된 깊은 의미를 발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우스와 데메테르 사이에 태어난 페르세포네는 이복자매인 아테나 및 아르테미스와 함께 행복하게 성장하였고 결혼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페르세포네에게 눈독을 들인 숙부 하데스가 제우스의 동의를 받아 그녀를 유괴해 버렸다. 시칠리아의 엔나 초원에서 유괴하였다 하나 막연히 뉴사 초원이라고도 한다. 다른 설에는 엘레우시스 혹은 아르카디아의 큐레네 산록 케피소스 강변에 하데스의 나라로 통하는 동굴이 있는 들 혹은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근처 동굴이 있는 초원이라고도 한다. 그 곳이 어디였든간에 땅이 열리고 동굴에서 나타난 하데스는 꽃을 따고 있던 페르세포네를 불문곡직한 채 끌고 지하계로 내려가 버렸다. 딸의 실종을 알게 된 데메테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 세상을 수소문하여 딸을 찾아나섰다. 구렁으로 끌려가면서 계속 절규하는 페르세포네의 울부짖음을 얼핏 듣고 데메테르는 깜짝 놀라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딸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9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목욕도 하지 않고 의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양 손에 횃불을 들고 실성한 채로 딸의 행방을 찾아 세상을 헤맸다. 열흘째 되던 날, 헤카테를 만나 물었으나 여시 딸의 울음소리는 들었지만 행방은 모른다고 하였다. 결국 납치 정황을 모두 지켜본 바 있는 헬리오스가 데메테르의 딱한 모습을 보고 사건 전모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전승된 이야기로는 아르골리드의 주민인 헤르미오네가 하데스가 범인이라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화가 치민 데메테르는 천계로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지상에 남아 딸이 돌아올 때가지 곡물 여신의 역할을 포기하였다. 그리고는 노파로 변장하여 엘레우시스로 가서 바위에 앉아 쉬었는데 그 후 이 바위는 '즐거움없는 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이어서 그 나라 왕 켈레오스를 만나러 가던 길에 한 아낙네와 어울리게 되는데 이암베라는 이 여자는 익살스런 농으로 오랜만에 데메테르에게 웃음을 찾아주었다.
데메테르는 왕궁에 가서 왕비가 막 출산한 아들 데모폰(혹은 트립톨레모스 라고도 한다)의 유모가 되었다. 왕과 왕비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므로 여신은 그 대가로 아기를 불사신으로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인간 부분을 불에 태우는데 마침 왕비가 나타나 이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아기를 빼앗았다. 그제서야 여신은 신분을 밝힌 후 자신의 본 뜻을 알리고 왕자 데모폰에게는 이 세상 어디에 가든 밀을 뿌리라고 지시하였다. 다른 설에는 시큐온 왕 플렘나이오스의 유모역을 하였다고도 한다. 여신이 이렇듯 자진하여 천공에서 지상으로 망명하여 귀양살이를 하자 땅이 메말라 황폐해지고 온 세상은 황무지가 되어 인간에게 끼치는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제우스는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이미 지하세계에서 단식을 지키지 않고 석류씨를 먹었기 때문에 하데스에게 몸을 의지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제우스는 지상과 지하 사정을 절충하여 1년의 반은 어머니가 있는 올림포스 산에서, 나머지 반은 지하계에서 살게 하니 데메테르는 딸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엇다. 이렇게 해서 매년 봄 밭고랑에서 첫 싹이 솟아나면 페르세포네는 지하계에서 탈출하여 천상에 올랐고, 결실기에는 다시 지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페르세포네가 데메테르와 헤어져 있는 동안 땅은 말라붙고 음산한 겨울철이 되어 지상은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
한편 데메테르가 딸을 행방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에는 지역에 따른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곁들여졌다. 예컨대 시큐온에서는 여신이 물레방아를 발명하여 주민에게 사용법을 알려주고 딴 곳에서는 야채 기르는 법을 일러주었으며 특히 콩과 무화과 재배법을 가르쳤다.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 성역은 그리스 전역에 퍼져 있는데 옛적에 여신이 체재한 곳이거나 은신처라고 전해져 온다. 또한 이 이야기 안에는 데메테르가 페르세포네를 찾고 있을 때 그녀를 사랑하여 열을 올린 포세이돈의 이야기도 가미되었다. 당시 데메테르는 포세이돈의 눈을 피해 암말로 변하였는데 포세이돈 또한 수말로 변신하여 교합하였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아레이온이라는 명마와 그 이름을 언급이 금기된, 그저 여사(mistress)라고만 불리는 딸이 태어났다. 그밖에 데메테르는 이아시온과 밭에서 연애하여 아들 플루토스를 두었는데 커서 부의 신이 되었다. 데메테르는 숭배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시칠리아에서는 헤파이스토스와, 캄파니아에서는 디오뉴소스와 다투었다. 데메테르 여신의 상징 식물은 밀이삭과 수선화 및 앵속이고, 좋아하는 새는 두루미이며 암퇘지를 공양으로 바친다. 조각상은 횃불과 뱀을 갖고 있거나 밀이삭을 가진 상으로 표현한다. 테스모포리아는 테스모포라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데메테르와 딸 페르세포네를 위한 비의 축제로 가을철에 그리스 전역에서 개최되었다. 아테네에서는 퓨아넵시온(10.11월)에 데메테르 축제 퓨아넵시아가 개최되었는데, 제11~13일에는 여성만이 제를 지내며 그 첫날에는 나뭇가지로 천막을 치고 모여 앉는다. 축제는 둘째날에 시작되고 3일째 되는 날에는 땅에 뿌릴 씨앗에 성장과 다산 또한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를 올렸다.
데메테르
엘레우시스 성소용의 원본 그리스 작품의 로마시대 복제품 (기원전 425~420년 경)
10. 브리아레오스
브리아레오스(Briareus)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로 100개의 손과 50개의 머리를 가진 유명한 기가스이다. 인간들은 그를 아이가이온이라 부르고 신들만이 브리아레오스라 불렀다. 헤라, 제우스 및 아테나가 크로노스를 신권에서 몰아내기로 공모했을 때 브리아 레오스가 청공으로 올라와 크로노스 쪽에 대좌하였는데 그의 사납고 위협적인 외모에 기가 질려 공모를 단념하였다. 후에 신권전쟁에서 거인족측에 가담하였다가 에트나 산으로 추방당하였다.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브리아레오스는 큐클로페스로 올림포스 신족이 공모하여 제우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테튜스의 부름을 받고 달려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제우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또 아폴론과 포세이돈이 코린토스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키자 중재에 나서서 아크로코린토스는 아폴론에게, 나머지는 포세이돈에게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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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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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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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애 사건은 인류의 생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 도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멸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전 세대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미래의 세대는 우리의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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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을 살아내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 찬 삶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가 세상을 지탱하면서 견디게 하는 힘이 되어왔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 용기와 무한한 힘을 주었으며, 과거에는 미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지금 당신의 삶을 견디게 하는 것도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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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의 해결책은 언제나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자신의 사랑을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한 사람 중에는 상대를 육체적으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을 품게 된다. 결혼이나 물질을 이용한 강압적인 성교 혹은 폭력에 의한 강간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우리가 비록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남녀 사이의 사랑에서 최종적인 목적은 후손을 낳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한 전제는 육체적인 접촉이다. 사랑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른 모든 일들은 부수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이런 견해를 고결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이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들이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탓이다. 미래에 우리의 뒤를 이어서 사랑을 나눌 후손들에 대해 생각하는일은 연인들의 꿈이나 환상보다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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