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0호 2023.2.5 일요일 (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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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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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
- 한시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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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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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동료를 구한 사람은
동기가 의무감 때문이었든
자신의 수고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는 기대 때문이었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한 겁니다.
자신을 믿는 친구를 배신한 사람은
자신이 더 큰 도움을 받은 또 다른 친구를 도와주기 위함이어도
죄를 지은 겁니다.
- 존 스튜어트 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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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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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시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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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깨고서 - 한용운
님이면 나를 사랑하련마는
밤마다 문 밖에 와서 발자취 소리만 내이고
한 번도 돌아오지 아니하고 도로 가니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러나 나는 발자취나마 님의 문 밖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사랑은 님에게만 있나 봐요.
아아, 발자국 소리가 아니더면
꿈이나 아니 깨었으련마는
꿈은 님을 찿아가려고 구름을 탔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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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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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5. 천하가 붙잡아도 나의 길을 가련다(노중련, 추양)
1) 지혜로운 자는 때를 잃지 않는다(노중련)
동해에 빠져죽을지언정 굴복할 수는 없다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으로 특이하고 탁월한 계획을 짜기 좋아했으나, 벼슬에는 도대체 뜻이 없었다. 당시 조나라는 진나라 백기의 공격을 받아 장평에서 군사가 전멸하여 40여만 명이나 죽었다. 그러고도 진나라는 다시 한단을 포위했기 때문에 조나라 왕은 공포에 질렸다. 그런데도 제후의 원군들은 진나라를 구하려고 했으나, 진나라가 두려워서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군인 신원연을 한단에 잠입시켜, 조나라의 평원군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진나라는 전에 제나라의 민왕과 세력을 다투며 제왕이라 칭했고, 그 우에 이 칭호를 서로 안 쓰기로 했는데, 이제 제나라 왕은 그 세력이 약해지고 진나라만이 천하에서 옹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나라가 갑자기 조나라 도읍을 포위한 것은 꼭 한단을 손에 넣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시 한번 제왕의 칭호를 쓰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파견해서 진나라왕을 받들고 제왕의 칭호를 써 주게 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기뻐하며 포위를 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평원군은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포위하고 있는데, 위나라 왕이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칭하라고 권유한다는 말을 듣자, 노중련은 평원군을 만나서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에 평원군이 대답했다.
"내가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앞서 40만의 대군을 나라 밖에서 잃고 지금 또 나라 안에서 한단을 포위당했건만 격퇴시킬 수조차 없습니다. 위나라는 신원연을 파견하여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칭하라고 권하는데, 나로서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중련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나으리를 천하의 현공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천하의 현공자가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위나라의 신원연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나으리를 위해 그 사람을 만나서 책망하고 쫓아버릴까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소개하여 선생과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평원군은 바로 신원연을 만나서 말했다.
"조중련이란 사람이 지금 이 곳에 와 있습니다. 내가 소개하여 장군과 만나시게 하고 싶습니다."
이에 신원연이 말했다.
"노중련 선생은 제나라의 높은 선비라고 들었는데, 저는 남의 신하로서 사명을 띠고 있는 몸입니다. 직분이 있는 몸인지라 노중련 선생과 만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평원군은 계속 고집했다.
"나는 이미 선생과 약속을 해 두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원연은 하는 수 없이 만나겠다고 승낙했다. 그런데 노중련은 신원연을 만나고도 입을 열지 아니했다. 신원연이 먼저 노중련에게 말했다.
"내가 이 포위된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보아하니, 모두 평원군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의 풍모를 뵈오니, 선생께서는 조금도 평원군에게 의지하려는 사람 같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이 포위된 성 안에 머무르시는 겁니까?"
그러자 노중련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포초( 주나라의 선비로 세상을 한탄하며 나무를 안은 채 말라죽었다)를 보고 너그럽지 못하고 성질이 까다로워서 죽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모르고 그저 한 몸을 위해 죽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예의를 돌보지 아니하고 적의 목을 많이 베는 것만을 능사로 아는 나라로서, 권모술수로 군사를 부리고, 노예처럼 백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진나라가 소원대로 제왕이 되어 천하의 정치를 그릇되이 하려고 한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참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장군과 만나자고 한 것도 그러한 진나라를 누르고 조나라를 도와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에 신원연이 물었다.
"선생께서 도우시겠다니, 대체 어떤 방법으로 도우시겠단 말씀입니까?"
"나는 위나라와 연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도와주도록 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나라와 초나라로 틀림없이 도울 것입니다."(물론 이 말은 실현성은 약하지만 절대 진나라에 무릎 꿇을 수 없다는, 일종의 호기로운 선언이었다) 그러자 신원연이 다시 물었다.
"연나라는 그렇다치고 위나라 일이라면 저도 위나라 사람이니 조금은 그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위나라를 설득하여 조나라를 도우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노중련이 이 말을 받았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제왕의 칭호를 쓰게 되면 어떤 해독이 있는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이 해독을 위나라에 알려 주면 반드시 조나라를 도울 것입니다."
"선생, 저 하인들을 보십시오. 열 명의 하인이 한 사람의 주인을 따르는 것은 힘으로 이길 수 없어서가 아니고, 지혜가 미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주인이 무서워서입니다."
그러자 노중련이,
"아아! 위나라는 진나라와 비교할 때 하인과 같다는 말씀이오?"라고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소이다."라고 신원연이 대답했다. 그러자 노중련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진나라 왕에게 위나라 왕을 삶아서 젓을 담그라고 해야겠소이다."
신원연은 불유쾌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의 말씀은 좀 지나치십니다. 선생이 무슨 방법으로 진나라 왕에게 위나라 왕을 삶아서 젓을 담그게끔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노중련이 말을 이었다.
천하 제1의 현사
"노여워하실 것이 아니라 들어 보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하려고 했었소. 옛날 구후, 악후, 서백창은 주왕을 섬기던 삼공의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오. 그런데 구후에게 미모의 딸이 있어 주왕에게 바쳤던 바, 주왕은 그 딸이 추녀라며 구후를 죽여 젓을 담갔었소. 악후가 이것을 보고 굳이 말리며 간하자, 주왕은 악후도 죽여서 건포를 만들었소. 문왕(서백창)은 이 말을 듣고 탄식했기 때문에 유리 지방에 백 일이나 유폐되었다가 죽을 뻔했었소. 위나라 왕은 지금 똑같은 왕의 처지이면서 무슨 까닭에 갑자기 젓이나 건포가 되려고 하는 것인가요? 지금 진나라가 천하의 대국이면 위나라 역시 대국이오. 똑같이 대국으로서 다같이 왕이라고 부르는데, 한 번 싸워서 진나라가 이겼다하여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고 부른다면 삼진의 대신들을 종이나 첩만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오. 더구나 진나라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제왕의 칭호를 받게 되면, 그 즉시로 제후의 대신들을 갈아치울 것이오. 진나라가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의 관직을 빼앗고 진나라에게 잘 보인 사람에게 관직을 줄 것이며, 미운 자의 관직도 빼앗아 아끼는 자에게 줄 것이오. 또 자기들의 자녀 또는 천첩을 제후들에게 아내로 삼으라고 하여 위나라 궁중에도 들여 보낼 것인즉, 이렇게 되면 위나라 왕인들 어찌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겠소. 그리고 장군도 어찌 총애를 계속 받을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신원연은 일어나서 재배하고
"선생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이제야 선생께서 천하의 현사이심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곳을 떠나면 두 번 다시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말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사과했다.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전해 듣자 두려워하여 50리쯤 군사를 후퇴시켰다. 또 때마침 신릉군이 조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서 진나라 군사를 공격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그 후 평원군은 노중련에게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노중련은 거듭 사양하여 사자가 세 번씩이나 왕래했건만 끝내 받지 아니했다. 그래서 평원군은 잔치를 베풀고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서 노중련의 건강을 축하하면서 천금을 바쳤다. 그러자 노중련은 웃으며 말했다.
"천하의 선비된 자가 귀한 까닭은 남을 위하여 걱정을 덜어주고 어려움을 없애주며,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고도 보상을 받는 일이 없기 때문이오. 보상을 받는 것은 장사꾼이나 할 일이지,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중련은 평원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난 다음, 평생에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한 장의 편지로 성을 함락시키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 연나라의 장군이 제나라를 쳐서 요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요성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장군을 연나라 왕에게 모함했다. 이에 장군은 문책받을 것이 두려워 요성을 지키고 본국에 귀국하지 않았다. 그 뒤 제나라의 전단이 요성을 쳤는데, 1년여 동안 수많은 전사자만 내고 요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노중련이 나서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거역하여 불리한 처지에 빠지지 아니하며,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사람은 제 몸만을 생각하여 임금을 저버리지 아니한다'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장군은 모함을 당한 한때의 노여움 때문에 연나라 왕을 배신하고 임금 밑에 믿을 만한 신하가 없음을 알면서도 조국을 돌보지 않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충신이라 할 수 없소. 또 목숨을 걸고 요성을 함락시켰으면서도 제나라에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다면, 용사라고 할 수는 없소. 그리고 명성을 허물어뜨리게 되면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소. 이와 같은 사람은 세상 임금들이 신하로 삼지 아니하며, 유세객들도 입에 올리지 않는 법이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잃는 일이 없고,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오. 장군에게는 지금이야말로 생사영욕, 귀천존비의 분수령이니,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도록 하시오. 장군에게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여 세상의 속인들과 행동을 똑같이 하지 않도록 하시오. 지금 장군이 피폐한 요성의 백성을 가지고 제나라의 전군을 막는 것은 마치 묵적의 수비와 비슷하고, 인육을 먹고 인골로 불을 때면서도 병졸들이 두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손빈의 군사와 똑같아서 장군의 재능은 천하에 드높으오. 그러나 내가 장군을 위해 생각해 볼 때, 아직 거마와 무기가 완전 할 때 이대로 귀국하여 연나라 왕을 위하여 힘을 다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오. 거미와 무기를 온전히 갖추어서 연나라로 돌아가면 연나라 왕은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오. 병사들을 무사하게 데리고 돌아가면 백성들은 귀공을 부모와 같이 볼 것이며, 친구들은 팔을 걷어 붙이고 업적을 밝힐 것이오. 그래서 위로는 고립되어 있는 임금을 도와 뭇 신하를 제어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유세객을 도와 국정을 바르게 하며 풍속을 고쳐나가면 공명은 자연히 이룩될 것이오. 만약 귀국할 뜻이 없어 연나라와 세상을 버리고 등쪽의 제나라에서 지내려 한다면, 제나라는 장군에게 땅을 떼어 주고 봉지를 정해 줄 것이니, 자손은 제후가 자칭할 것이고 제나라와 함께 오래도록 존속 할 수 있을 것이오. 이것 또한 한 가지 계책이 될 것이오. 이 두 가지 계책은 이름을 드러내고 실속을 채우는 일이오. 바라건대 공은 스스로 깊이 생각하여 그 중 한 가지를 택하시오. 나는 '조그마한 절개를 꾀하는 사람은 큰 이름을 드러낼 수가 없고, 조그마한 부끄러움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는 말을 들었소. 옛날 관중이 환공을 활로 쏘아서 띠의 정면에 붙어 있는 장식을 맞춘 일은 실로 반역 행위였고, 자기가 받들던 공자 규를 버리고 함께 죽지 아니했던 것은 비겁한 일이며, 잡힌 몸이 되어 수갑과 차꼬를 차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소. 대개 이러한 세 가지 행실이 있는 자는 세상의 군주가 신하로 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향리의 사람들도 사귀기를 싫어할 것이오. 그러나 당시에 만약 관중이 유폐되어 다시 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옥사해서 제나라에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치욕에 가득찬 오명을 뒤집어 써서 노비들도 그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니 세속인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런데 관중은 옥중에 있는 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천하를 바로 잡지 못함을 부끄러워 했으며, 공자 구를 위해 죽지 않았음을 부끄럽게 생각지 아니하고 위세가 제후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소. 그러기에 관중은 세 가지 행실의 과오를 겸했으면서도, 환공을 도와서 오패의 으뜸으로 만들었고, 그 이름은 천하에 높아졌으며, 그 위광은 이웃 나라까지 비쳤던 것이오. 조말은 노나라의 장군이 되어 세 번 싸워서 세 번 패하고 땅을 잃기 5백 리에 이르렀었소. 당시에 만약 조말이 뒷일을 생각지 않고 결심한 대로 목을 찔러 죽었다면 패군지장이 되어 그 오명은 영원히 씻을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조말은 세 번 패한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노나라 임금과 계략을 꾸미어, 환공이 천하의 제후를 모아 회합할 때 단지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단상에 올라가서 환공의 가슴을 겨누며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 한 마디 헛되이 하지 않고 끝내는 세 번 싸움에서 잃었던 치욕을 하루 아침에 회복했소. 이 두 사람이 조그마한 부끄러움을 모르고 조그마한 절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아니오. 그들은 다만 자기 몸을 죽이고 집안과 자손의 뒤를 끊고 공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므로 울분의 원한을 버리고 일생 동안 공명을 세웠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버림으로써 여러 대에 걸친 공을 이룩했던 것이오. 바라건대 장군은 그 중 한 가지를 골라서 실행하시오."
연나라 장군은 노중련의 편지를 읽고 사흘 동안이나 울었다. 그리고 이모저모로 궁리하면서 자신의 나아갈 바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연나라로 돌아가자니 이미 왕과는 불화한 사이가 되었으므로 죽음을 당할 지도 모르겠고, 제나라에 항복을 하자니 이미 제나라 군사를 수 없이 죽였으므로 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탄식하며,
"남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내 칼로 죽자."고 하더니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성 안이 혼란해졌고 전단은 마침내 요성을 함락시켰다. 전단은 돌아와서 왕에게 노중련에 관한 일을 보고하고 벼슬을 주려고 했지만, 노중련은 몸을 피하여 바닷가에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귀한 몸이 되어 주인에게 눌려 살기보다는, 오히려 빈천한 몸으로 세상을 가볍게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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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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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焚書坑儒)
焚:불사를 분. 書:글 서. 坑:묻을 갱. 儒:선비 유.
[출전]《史記》〈秦始皇紀〉,《十八史略》〈秦篇〉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는 뜻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가혹한 법[苛法]과 혹독한 정치[酷政]을 이르는 말.
기원전 222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 시대를 마감한 진나라 시황제 때의 일이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 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복서(卜筮)/종수(種樹: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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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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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굳세어라 큰 바위 - 이민호(남.대구 달서구 성당동)
얼마 전, 이종환씨가 1등 못했다고 자살한 학생이 있고, 뚱뚱하다고 자살한 학생이 한둘이 아니라며 걱정스런 말씀을 방송에 하는 걸 듣고, '아니, 나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하는 생각에 제 얘기를 편지로 보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저희 집은 대대로 아들이 귀한 집으로 제가 4대 독자가 될 뻔했는데, 제 어머니의 예상을 뒤집는 눈부신 활약으로 3형제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저희 집에 손님이 오시면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 머리이야기였습니다. 3형제의 머리가 특이하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이 유별난 머리는 집안 내력입니다. 먼저 저희 아버지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네사람들이 "드디어 이씨집안에 장군 났네. 장군 났어. 대갈 장군 났네." 할 정도로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셨고, 저희 어머니 역시 아기 때 두돌 지나고부터는 뒤통수만 보고는 애인지 어른인지 분간을 못했답니다. 아! 이 두 분의 운명적 만남 끝에 짜잔! 저를 낳았으니 드디어 일은 벌어졌겠지요. 3대 독자가 낳은 아들, 이씨 문중에 4대 독자인 저를 할머니께서 처음 보셨을 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통곡을 하시면서 첫마디가 "에이고... 뭐 저런 기 다 인노, 저거 인간 안된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때 저의 모습은 눈을 기준으로 위로는 머리, 아래로는 하체였다 나요. 산파가 놀라서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다고 법석을 떨었던 그날 그렇게 세상을 놀래면서 저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자라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특히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수업시간마다 제 머리와 관련된 얘기들이 끝이 없었습니다. 국어를 공부하면 '큰 바위 얼굴 소설'이 나와 웃음거리가 되고, 수학을 공부하면 '가분수'가 나와서 시선 집중을 시키고, 사회를 공부하면 무슨 무슨 사건이 '대두'되고 있다며 떠들어대니 공부가 제대로 됐겠습니까? 모두 잊고 TV를 보니 '모여라 꿈 동산'이 괴롭히고 특히 무엇보다도 성질나는 일은 제 머리 절반만한 연예인들이 나와서는 머리가 크다고 불평하고 웃고 떠드는 걸 보면 TV를 확 부숴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10여 년 애들에게 놀림 받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두발검사를 왜 그리 자주 하는지 박박 밀어도 머리가 커서 멀리서 보면 텁수룩하게 보였던 거지요.
"너 머리 깎어. 머리 깎고 오란 말야, 알겠어!"
1주일이 멀다 하고 이발소를 들락거렸고, 친구들이랑 당구 치다가 학생 주임선생님께서 들이닥쳐 쪽문으로 도망 갈 때 맨 먼저 나가려다 벽 모퉁이에 부딪히며 나자빠지는 바람에 친구들까지 다 잡혔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주 수업에 들어오신 그 학생주임선생님은,
"니 머리 때문에 그 날은 수확이 컸다."고 하시며 놀리셨고, 어쩌다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이 있으면, "야! 저기 봐. 민호도 저 큰 머리 쳐들고 공부하는데 조는 놈들은 뭐야?"하시며 조는 애들을 웃음으로 몰았었죠. 그러나 이런 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간 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면 어머니께선 제 얼굴을 만지시며 말하셨죠. "아이고, 우리 아들 공부한다꼬 얼굴이 고마 반쪽이 되삣네. 우짜꼬." 하시며 속을 확 뒤집어 놓으시기 일쑤였습니다. 걱정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대들 수는 없고 방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저는 속으로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엄니, 내 얼굴이 아무리 반쪽이라캐도 다른 애들 두 배다 두배! 흑흑흑.' 대학에 와서는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의외로 저는 시력 때문에 방위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자 모두 의심을 하며 저의 머리만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니가 방위병 판정을 받은 건, 니 시력 때문이 아니고, 머리 때문아이가? 니가 전방에 배치되면 완벽한 적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국방부가 니를 살린 기다."
또 다른 녀석은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그래. 맞다. 니 머리에 맞는 철모가 어디 있겠나. 푸하하."
아,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교양과목을 드으러 강의실에 들어가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더군요.
"저 학생은 머리가 커서 면제래."
"입대했다가 철모가 안 맞아서 쫓겨났대."
그래도 남학생들은 농담으로 여겨 웃으며 넘기는데 정작 여학생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어쩌다 저를 만나면 진짜인 줄 알고 저마다 위로를 하는데 정말 난감하더라 구요.
"사실 머리가 아니고 시력 때문이야."
하며 몇 번이나 말하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제가 맘속에 찍어두었던 저만의 연인, 귀여운 저의 천사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어갔을 땐 그 날로 그 여학생을 포기했고 또 한번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가족끼리 모여 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더 가관입니다. 하지만 머리 큰 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제 바로 밑의 동생은 머리가 커서 덕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나요. 무면허일 때 운전면허를 따러 시험장에 50cc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200m앞에서 의경들이 단속을 벌이고 있었답니다. 자동차 사이로 숨어가 봐야 큰머리 들킬 것 뻔하니 아예 1차선으로 달려보자, 어쩌면 자동차만 단속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는데 의경 하나가 1차선으로 뛰어들어 세우더라는 겁니다.
"아저씨! 1차선으로 막 달리면 우짭니꺼. 면허증 좀 보입시더. 어 이 아저씨 헐멧도 안 썼네."
동생은 시험시간은 다가오는데 사정을 말할 수도 없고, 다소곳하게 말했답니다.
"제가 보시다시피 머리가 좀 커서 헬멧 쓰기에는 많이 불편합니다. 어떻게 사정 좀 봐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사정을 하고 빌어도 봤지만 의경의 마음은 좀처럼 돌아서지 않자 갑자기 머리 때문에 놀림당한 기억이 살아나서 헬멧을 던져주며 소릴 질렀답니다.
"누가 쓰기 싫어 안 쓰는 교?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직접 씌워줘 보소?"
하며 소함을 질러대자 놀란 의경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어떻게 할 지 몰라 당황하다가 헬멧을 들고 억지로 씌워 보려고 덤비자 또 엄포를 소리쳤대요.
"씌우는 건 좋은데 다시 벗겨줘야 되구마! 알겠는교?"
더 분노에 찬 절교를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슬슬 꼬리를 내리면서 조심해서 가라고 하더가는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한창 외모에 관심이 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남들보다 조금 이상하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고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였지만, 조금 더 성숙해진 지금은 행복은 머리 작은 순이 분명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의 비교조차 불가능한 어려운 신체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그리고 훌륭히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계셔서 오늘의 제가 있듯이 이 부족한 편지가 외모와 성적 때문에 비관하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 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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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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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전혜린편"(1934~1965)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삶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일종의 필수적인 비애의 기록으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10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교외 림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 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던 그 날 오후의 첫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니나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돈을 다 내어 보이고 그 중에서 1마르크만 가져가게 한 일, 힘없이 혼자서 하숙을 찾아 갔던 일-나는 정말로 내가 파리에 있는 말테나 된 듯한 서글픈 마음이었다.
우선 고국에서부터 연락해 놓았던 아스타라는 학교 사무국에 가서 벽에 붙은 벽보를 찾아야 했다. '빈 방 있음'의 광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모두 값이 비쌌다(내 생각보다). 또 학교에서 멀었다. 그리고 뮌헨은 나에게 마치 라비린트 그 자체처럼 보였었고, 학교에서 5분 이상 더 가는 곳에 가서 살 자신은 나에게 없었다. 그 중에서 나는 겨우 '빈 방 있음, 전기 있음, 학교에서 도보로 5분, 월세 50마르크'라는 꼬불꼬불한 연필 글씨로 쓰인 광고 용지를 찾아 냈다. 그 집은 정말로 학교에서 5분쯤 가면 있는 영국 공원이라는 광대한 공원에 임해 있었다. 첫인상이 포의 어셔 가를 연상시켰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수가 어디 있으랴? 다른 빈 방들은 대개가 '미국인에게 한함'이거나 또 엄청나게 비쌌던 것을...
나는 다시 들어서는 발을 억지로 닫혀진 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60세 가량 된 극단적으로 비만한 흰 단발 머리의 할머니가 나왔다. 키는 작았고 차림새는 누추했다. 나는 '방을 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거나 '방을 빌릴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상냥했고 입가에는 구수하다고 형용할 수 있는 미소를 띄어 보였다. '학교 광고를 보셨습니까?' 할머니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악의는 없는 말투였다. '방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네, 네, 어서 들어오세요.' 방, 내 방인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서 긴 낭하를 지나갔다. 낭하는 어두웠고 방이 많았고 방마다 사람의 이름이 작게 써 붙여 있었다. 맨끝에서 할머니는 멎어서더니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여기 살던 사람이 이틀 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페르시아 사람이었지요."
열쇠가 돌려지고 문이 열렸다. 나는 주저하면서 할머니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도 마루처럼 어두웠으나 의외로 깨끗했다. 초록빛 도자기로 된 커다란 난로가 한편 구석에 서 있었고, 전기 곤로가 놓인 대와 흰 요와 이불이 덮인 침대가 하나, 그리고 경대와 찬장이 딸린 콤모데가 있었다. 창은 두개가 영국 공원과 반대 되는 포도로 나 있었고 이중창에 이중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하시겠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네.' '방세는 한 달분 미리 내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나간 후 나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은 완전히 잿빛 안개로 덮여 있었고 물기가 촉촉히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어제까지나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안 지나가고 여기는 뮌헨에서도 가장 오래 된 지역이고 폭격도 안 맞은 1920년대 그대로의 문명의 이기만을 쓰고 사는 마을인 것 같았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 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다섯 시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여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유럽을 그리 원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는 근처의 생활 필수품점에 가서 빵 두개와 마가린 한 통을 샀다. 전기 곤로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빵을 먹었다. 학교의 개강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원래 돌아다니거나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외국서는 더구나 무서웠다. 그러나 낮에 나는 큰 마음을 먹고(사실 도착 이래 식사다운 식사를 못 해서 배도 고팠다.) 바로 근처에 있는 제로제라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았으나 별로 눈에 익은 게 없었다. 단 왜지 커틀릿이라는건 나도 알 것 같아 그걸 시켰다. 그러나 프로일라인(하인)이 가져온 것은 우리 개념의 커틀릿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째로 그냥 삶은 것 같았다(실제로 그렇게 요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힘없이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실 것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의 뜻도 파악 못 하고 그냥 웃어 보였더니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서 갖다 주는 것이었다. 난 그냥 잠잠히 앉아 있었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그 때 여러 명의 틴 에이저들이 들어오더니 주크 박스 앞으로 다가가서 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힐끗 나를 보더니 무슨 판을 눌렀다. 그에 이어서 뜻밖에도 일본말 노래가 새어나오는 데는 아연하여 보고 있었더니 일본의 이별의 노래라고 그 중의 하나가 나에게 알려 주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 때만 해도 뮌헨에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더구나 여자는 구경하려 해도 없었을 때니까 아마 그렇게 짐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역시 웃어 보였을 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서글퍼졌고 덜 혼자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후나 저녁때 그 집을 자주 찾아갔다. 거리도 내 방에서 가까웠고 음식값도 다른 데보다 싼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일라인도 친절했다.늘 말없이 호의를 보여 주었고 주간지도 내 테이블에 갖다 주곤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음식점이 보통 음식점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합숙소인 것도 알게 되었다. 목요일에는 '시의 밤'이 있고 화요일에는 '화가의 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한편 벽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사진이며 편지며 분필 사인이 토마니 링겔나츠니 캐스트너니 좀마니... 하는 쟁쟁한 작가나 화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인 것도 점점 알게 되었고 이 집이 한때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제 아이힝가라는 여류 시인의 존재를 그 여자의 특이한 용모와 매력적인 긴 흑발과 함께 알았다.
가을은 깊어만 갔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학우들(오스트리아 여학생이나 프랑스 학생)과 같이 근처의 다방에 가서 크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는 방법도 배웠다. 주립 도서관도 자기 집 내부처럼 환히 알게 되고 뮌헨 시내의 고서점이란 고서점은 다 환히 알게 되었다. 헌 책방 주인과도 친해지고 이미륵 씨 얘기도 듣게 되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파는 군밤 장수의 군밤을 50페니히쯤 사서 교실에서 먹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고국에까지 뛰거나 걸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심연을 내 마음 속에 열어 놓을 줄은 나도 몰랐었다.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비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해도 좋다. 강의실 내의 교수의 방언과 노령에 의한 발음의 불명료에 그리고 '생활 필수품점' 속에 진열돼 있는 셀로판지로 담긴 이탈리아 쌀에... 어디서나 그 비전은 나를 따랐다.
뮌헨 대학에서 내 하숙에 이르는 레오폴드 통은 거대한 꼿꼿하게 높기만 한 포플러 가로수로 줄지어져 있었다. 그 길은 온갖 빛의 낙엽으로 두껍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의 가을이 아름다웠다. 그 거리에는 작은 어항같이 생긴 '유리 동물원'이 있었다. 유리로 기막히게 정교하게 만든 온갖 작은 짐승들, 도자기 발레리나들...안데르센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5분 이상이나 진열장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갖고 싶고 애무하고 싶은 유리 동물들이었다.
그 가게 뒤에 쓰러져 가는 '노아 노아'라는 집이 있었다. 거기는 다다이스트의 집합소로서 늘 해괴하고도 기상천외인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화가들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떠들며 담론하는 살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에리카 만의 낭독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제로제보다 더 싼 음식점을 발견했다. 서서 먹는 집이었다. 흰 소시지를 불에 구워서 겨자를 발라 먹는 소시지 집이었다. 거기다가 신 오이 한 개와 리모나데 한 컵을 먹어도 1마르크가 안 되니 싸기도 하려니와 냄새만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맛이 있었다. 먹는 것은 간단히 빨리...그리고 나는 걸어다녔다. 학교에서 내 집까지 사이의 골목 그리고 영국 공원 속...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 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을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이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 속을 뒤흔들린 편지를 매장한 곳도 이 호수였고 내 꿈과 동경-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을 던져 넣어 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이 호숫가의 가스등 밑에서 나는 안개에 감싸이는 쾌감과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맛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귀로에 서곤 했었다. 도자기 난로 속에서 석탄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 보고 있으면 쓸쓸하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붉은 불의 혓바닥...이러한 것과 함께 있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길을 지켜 보면서 언제나 어떤 시의 구절을 생각했다.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 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 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공기에서는 서리와 안개와 낙엽 냄새가 섞여서 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공원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11월 중순-아직 한국에서는 가을이지만 여기서는 눈이 큰 송이로 내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눈이 와도 무섭게 왔다. 세원 둔 자동차가 눈에 폭 파묻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한국서 가져온 얇은 천으로 된 학생용 검은 오버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학교에 다녔다. 점심은 커피 대신 그로크(펄펄 끓인 포도주)와 수프로 했다. 그래도 추웠다. 때로는 눈이 멎고 다시 영원한 뮌헨의 하늘빛인 회색 구름장이 덮이거나 안개비가 촉촉히 내렸다. 나는 두꺼운 색양말을 신고 두꺼운 머릿수건을 쓰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라고는 없고 나뭇가지가 앙상한 해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검은 나뭇가장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변함없는 회색일까? 하고... 아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하나만 있어도 이 하늘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고 황색 비전을 나는 좇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와 백일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다녔고 절망적인 '고국까지의 거리감'에 나는 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 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일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이 나고 그리운 것은 그러나 웬일일까? 뮌헨이 그 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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