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9호 2023.2.4 토요일 (음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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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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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마음 속 개념으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는 개인만이 있다.
Society exists only as a mental concept;
in the real world there are only individuals.
- Oscar Wi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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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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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사이가 벌어졌을 때,
남이 그대에게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일 때,
남이 그대를 배반하였을 때,
그가 나쁜것이 아니라, 그대의 선(善)이
부족하였다고 생각하라.
- 톨스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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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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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시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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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존재 - 한용운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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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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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4. 장한 그 이름을 어찌 빛내지 않으리오(섭정)
섭정은 전국 시대 한나라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어머니, 누나와 함께 몸을 피해 백정 노릇을 하며 살았다. 한편 당시에 엄중자라는 대신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재상인 겹루와 사이가 좋지 않아 항상 불안해 하였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그에게 죽음을 당할 뻔했다. 그러자 엄중자는 그 원수를 갚기 위해 협객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에 섭정이라는 용감한 선비가 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몸을 피해 백정일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사람이 매우 현명하고 의리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엄중자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인사하고, 그 후에도 몇 번 찾아가 사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중자는 섭정을 찾아가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그는 황금 백 냥을 받들고 섭정의 어머니 앞으로 나아가 오래 사시길 빌었다. 그러자 섭정은 너무나 많은 선물에 깜짝 놀라면서 거듭 사양했다.
"저는 집이 가난해 객지로 떠돌면서 백정 노릇을 합니다만, 아침 저녁으로 부드러운 음식을 얻어 늙으신 어머님을 봉양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 봉양할 음식은 넉넉히 마련했으니,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엄중자가 주위 사람들을 잠시 옆방으로 보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제게 피 맺힌 원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수를 갚아 줄 사람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이 곳에 와서 당신의 용기가 매우 높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드린 것은 단지 어머니 봉양에 보태 쓰시라는 뜻에 불과합니다. 서로 친교를 더하자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자 섭정은,
"제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 시장바닥에서 백정 노릇이나 하는 까닭은 오직 연로하신 어머님을 봉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이 계시니 아직 제 몸을 남에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엄중자가 한사코 주려는 선물을 끝내 받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섭정은 정례를 마치고 상복도 벗은 후 이렇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아! 나는 시장 바닥에서 칼을 휘둘러 개, 돼지나 잡는 백정일 뿐이다. 그런데 엄중자 그 분은 높은 신분으로 천리길도 마다 않고 찾아와 나를 만났다. 나는 아무것도 그에게 해준 일이 없는데도, 그는 황금 백 냥을 받들어 어머님의 장수를 빌었다. 비록 내가 받지는 않았지만, 그는 진정으로 나를 알아준 분이다. 어찌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전에 그 분이 부탁했을 때는 나는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에 사양했었다. 이제 어머님께서 천수를 다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나는 지금부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이 목숨 아끼지 않겠다."
그리고는 곧장 길을 떠나 엄중자를 만났다.
"전에 제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은 어머님이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머님께서 천수를 다 누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당신께서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누구입니까? 제게 알려 주십시오."
이에 엄중자가 자세히 대답했다.
"저의 원수는 이 나라의 재상인 겹루입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사람을 시켜 그 자를 죽이려 했으나 워낙 경비가 심해 매번 실패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다행히도 나를 버리지 않았으니,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수레와 말, 그리고 장정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섭정이 말했다.
"이런 일에는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실패합니다. 또 사람이 많으면 반드시 생포되는 경우도 있어 비밀이 누설되고 맙니다."
그러면서 엄중자가 주는 모든 것을 사양하고 혼자 떠났다. 섭정은 칼을 지팡이 삼아 겹루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의 집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섭정은 단숨에 담을 뛰어 넘어 집에 있던 겹루를 단칼에 찔러 죽였다. 그러자 주위에서 호위병들이 몰려 들었는데, 섭정은 큰 소리로 꾸짖으며 수십 명이나 쳐죽였다. 이렇게 되니 나라에서도 이 시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체를 시장 바닥에 가져다 놓고는 현상금까지 걸었다.
"재상 겹루를 죽인 이 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에겐 천 금을 주겠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리길을 달려와 나란히 이름을 빛내다
한편 섭정의 누나인 섭영이 이 소문을 들었다. 예전부터 동생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섭영은 '동생이 분명하다.' 생각하고는 그 즉시 길을 떠났다. 섭영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시체가 있는 시장 거리로 갔다. 가서보니 과연 동생 섭정이었다. 섭영은 동생의 시체 위에 엎드려 슬픔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이 사람은 내 동생 섭정입니다."
그러자 모여든 사람들이 말했다.
"이 사람은 재상을 죽인 자로써 나라에서 천 금의 현상금을 거고 그 이름을 알려 하고 있소. 부인은 그 죄가 얼마나 큰 지 알면서 이자의 이름을 밝히는 거요?"
이에 섭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원래 섭정이 온갖 모욕을 무릅쓰고 백정 노릇을 하며 산 것은 늙으신 어머님이 살아 계시고, 내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엄중자는 동생을 알아보고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건만 개의치 않고 사귀었습니다. 선비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입니다. 이제 동생은 누나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 몸을 몰라보게 해쳐서 내가 연루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찌 내 한 몸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동생의 의로운 이름을 그냥 없어지도록 하겠습니까!"
이 말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 세 번, 마침내 섭정의 곁에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섭정은 의로운 사람인데, 그 누나 섭영 또한 장한 여인이다. 만약 섭정이 자기 누나가 반드시 천 리 험한 길을 달려와서 이름을 나란히 하여 누나와 동생이 시장 바닥에서 함께 죽게 될 줄 알았다면, 그는 엄중자의 부탁을 들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엄중자 또한 인물을 잘 알아보고 뛰어난 사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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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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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駙馬)
駙:곁말 부. 馬:말 마.
[원말] 부마도위(駙馬都尉). [출전]《搜神記(수신기)》
임금의 사위. 공주의 부군(夫君).
옛날 농서[감숙성(甘肅省)] 땅에 신도탁(辛道度)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이름 높은 스승을 찾아 옹주(雍州)로 가던 도중 날이 저물자 어느 큰 기와집의 솟을대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하녀가 나와 대문을 열었다.
“옹주로 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재워 줄 수 없겠습니까?”
하녀는 잠시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그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잘 차린 밥상이 있었는데 하녀가 사양 말고 먹으라고 한다. 식사가 끝나자 안주인이 들어왔다.
“저는 진(秦)나라 민왕(閔王)의 딸이온데 조(曹)나라로 시집을 갔다가 남편과 사별을 하고 이제까지 23년 동안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처럼 찾아 주셨으니 저와 부부의 인연을 맺어 주세요.”
신도탁은 그런 고귀한 여인과 어찌 부부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겠느냐고 극구 사양했으나 여인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사흘 낮 사흘 밤을 함께 지냈다. 다음날 아침에 여인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좀더 함께 지내고 싶지만 사흘 밤이 한도예요. 이 이상 같이 있으면 화를 당하게 되지요. 그래서 헤어져야 하지만 제 진심을 보여 드릴 수 없는 게 슬프군요. 정표로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여인은 신도탁에게 금베개[金枕]를 건네주고는 하녀에게 대문까지 배웅하라고 일렀다. 대문을 나선 신도탁이 뒤돌아보니 그 큰 기와집은 간데 없고 잡초만이 무성한 허허 벌판에 무덤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품속에 간직한 금베개는 그대로 있었다.
신도탁은 금베개를 팔아 음식을 사 먹었다. 그후 왕비가 금베개를 저잣거리에서 발견하고 관원을 시켜 조사해 본 결과 신도탁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왕비는 그를 잡아다가 경위를 알아본 다음 공주의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보니 다른 부장품(副葬品)은 다 있었으나 금베개만 없어졌다. 그리고 시체를 조사해 본 결과 정교(情交)한 흔적이 역력했다. 모든 사실이 신도탁의 이야기와 부합하자 왕비는 신도탁이야말로 내 사위라며 그에게 ‘부마도위(駙馬都尉)’하는 벼슬을 내리고 후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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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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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뛰는 놈 위에 나는 자슥
이 사연은 14년 전인 1983년의 한 일화입니다. 제 나이 한창이던 21세. 머나먼 제주시에서 대학에 다닌다고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하양읍이란 곳까지 와 2년째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군입대 전이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 모가지만 빨고 인근에 있는 여대생들과 미팅도 자주하며 맘껏 수컷임을 과시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결과로 이미 확실한 애인이 생겼고, 그 후론 돈이 지출되는 미팅은 참석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친구들이 주선하는 미팅에 참석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피팅'일 경우만 아르바이트 삼아 참석했고, 다른 어떠한 방식의 미팅도 거절하며 지냈습니다. 피팅이란 것을 아시는 지요? 혹시나 하는 노파심으로 간단히 언급해 둡시다. 미팅에는 기팅, 베팅, 소개팅, 폰팅... 등 종류도 부지기수지만 피팅이란, 남자가 여자보다 한 명 더 많게 참석하여 여자가 남자를 지명하는 식으로 파트너가 되고, 맺어지지 못한 남자에게 위로금조로 얼마씩 주는 방식입니다. 일부지역에 따라 '피보기 미팅'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본 사건 이전에도 이미 여성이 선택권이 있어 당시 한창 유행하던 피팅에 아르바이트로 두 번 참가해 조금은 치사한 수법으로 지명 받지 못한 남자가 되어 매회 1-2만원 정도의 순 수익인 짭짤한 위로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애인과 함께 당시의 저에겐 최고급 요리인 통닭을 먹곤 했습니다. 괜찮은 아르바이트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한 친구로 부터 피팅 참석을 요청 받아 애인에게 저녁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번 피팅은 5팀의 커플이 탄생하여 위로금으로 쌍 당 5천원씩 주기로 돼 있으니 커피 값을 계산하고도 2만원은 족히 올릴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였습니다. 드디어 약속시간이 임박해짐에 따라 서서히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세면 청소를 하지 않아 텁수룩한 뒷머리에는 큼지막한 까치 집이 하나 지어져 있었고, 분장을 통해 입가에는 침이 조금 말라붙은 자국, 그리고 왼쪽 속눈썹엔 누르티티한 눈곱이 힘겹게 붙어 있었으며, 런닝띠가 조금 보이도록 목이 푹 패인 T셔츠, 이 꾀죄죄한 모습은 확실한 자신감을 주었고, 일 마치고 막을 통닭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정각 오후 5시. 저는 발걸음도 가볍게 다방 문을 열고 다섯 명의 남자 친구들이 얘기하고 있는 널찍한 구석 자리에 앉았습니다. 주선한 친구가 저를 보고 말하더군요.
"니, 꼴이 그게 뭐고?"
"으응, 강의도 없고 해서 자다보니 지금 일어나서 달려오는 거야, 하마터면 못 올 뻔했어."
침도 안 바르고 능청을 떠는 저의 모습에 저 자신도 투철한 직업의식은 참 무시 못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슥, 세수라도 좀 하지. 내 체면도 있는데...."
"흐흐흐...."
이윽고 우리들의 파트너가 될 여대생 다섯 명이 우르르 앞 자리로 와 "좀 늦었어요." 하며 여성들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앉았습니다. 주선자인 친구는 상대를 둘러보더니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 싱글벙글하며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자- 다 모였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요? 아가씨! 여기 커피 돌리세요."
"아니, 아가씨! 제꺼 한잔은 소젖으로 주소."
이 같은 저의 외침은 쪼다가 되기 위한 기선제압이었습니다. 상대 여대생들은 밖에서 짜고 온 것 같은 모습으로 가위.바위.보를 하여 지명 순서를 1분도 채 걸리지 않고 결정했습니다. 차가 나온 직후 상대에게 잘 보이려 흘러내린 머리칼 하나라도 끌어올리려 노력하는 친구, 점잖게 보이려 받침접시까지 들고 커피를 마시는 친구, 지그시 웃음만을 흘리고 있는 친구 등등 제각기 지명 받으려는 몸짓은 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급기야, 눈이 작으면서도 귀엽게 보이는 첫 번째 아가씨가 6명의 후보 중 1차 지명을 하려는 순간 옆자리 친구들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얼굴이 호형이고 아담한 체구를 가진 친구가 선택당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저쪽 끝에 앉아 있던 친구 하나가 은근히 생각했던 아가씨의 지명이 자신을 피해가자 돌연 제 영업에 심상치 않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커피잔 옆에 씹던 껌을 놓아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 이 놈이 글쎄 그 껌을 손가락으로 넓게 펴서 '따다닥'소리를 몇 번 내더니 다시 입에 넣어 씹는 게 아닙니까? 앞 자리의 지명권자들은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있었습니다. '아니 강적이군. 그러나 흥, 손가락으로 껌 장난하다 다시 씹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야? 혹 콧구멍에 놓였다 다시 씹는다면 모르겠지만. 만반의 준비를 해온 나에게 도전을 하다니 어림도 없지.' 이렇게 생각하며 저는 그 정도엔 개의치 않고 새로운 작전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런닝끝을 조금 더 당기며 태연히 성냥개비로 귀를 후비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윽고 2차, 3차, 4차. 지명이 저와 그 친구를 피해간 후 미간이 꽤나 넓고 인자하면서도 조금은 어리숙하게 생긴 여대생이 마지막으로 지명할 차례가 남았을 때 그 강적이 엄청난 내공으로 공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잠깐만요, 긴장하니까 갑자기 소변이 마렵네요. 화장실에 갔다 와서 합시다."
이렇듯 저의 경쟁자는 급히 뛰어갔습니다. 2분이 지났을까? 다시 자리에 돌아온 그는 의자 뒤로 몸을 최대한 젖혀 앉아 있었고, 앞 좌석 지명권자의 얼굴이 갑자기 당황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왜 저럴까?' 순간 불길한 예감이 저의 뇌리를 스쳤고, 옆에 앉은 경쟁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앗! 그가 남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것도 안이 누리끼리 하게 비치는 팬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취하며 빨래하기 싫어 속옷을 보름 입고 다시 뒤집어 보름 입은 뒤 버려버리는 그의 습성에서 오늘은 뒤집어 입은 날이었습니다. '앗, 졌구나!' 이렇게 깨닫는 순간 그 느낌은 신음소리로 변해 '으으...'하는 소리가 이 사이를 비집어 나오고 있었고, 다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임기응변 식 흠집내기로 다리를 꼬아 앉아 양말을 반쯤 내리고 발 뒤꿈치를 서너 번 힘차게 긁어 보았지만 이미 대세는 결정 난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마지막 지명권자의 손가락이 결국 저를 가리킬 때 저의 눈은 졸지에 사팔이 되었고, 이내 쏟아지는 참패의 허망함 그것은 생돈 5천원의 지출이었습니다. 그것도 다행히 낙승을 예상하고 그냥 나올까 하다 만원 권 한 장을 갖고 왔으니 만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개망신당할 뻔했습니다. 돈을 챙겨 찻값을 계산하고 여유 있게 지퍼를 올리며 사라지는 그를 부러운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다 웬수 같은 앞 자리의 아가씨에게 미소를 억지로 띠우며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다음에 보자고 한 후 맥 풀린 저의 발걸음은 자취 방을 향했습니다. 결국 그날 애인과 함께 통닭 대신 닭 똥집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끝으로 사연을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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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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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박완서편"
여류 소설가. 경기도 출생. 서울대 문리대 중퇴. 1970년에 장편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나온 후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등으로 일약 각광을 받아, 가장 설득력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평판을 얻었다. 감각적인 묘사가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분석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소도구로 쓰인 결혼 사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었다. 마침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날이라 나는 부부 동반한 2박 3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나선 길이었다. 실로 얼마만인지도 모르게 오래간만에 우리는 완행 3등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골에 내리는 비는 도시에 내리는 비와 그 풍취가 전연 다르다. 빗속에 바라보는 봄의 농촌은 싱그럽고 산뜻하고 흥겨워 보였다. 물을 흠뻑 먹은 땅이 검고 부드럽게 보이는 들판으로 도랑물이 흐르는 게 가을 들판 못지 않게 풍요로워 보였다. 문자 그대로 감우로구나 싶었다. 들과 풀과 나무와 내와 배꽃, 복숭아꽃이 달디 달게 목을 축이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이는 듯했다. 얼마나 좋은 고장인가 이 땅은, 나는 제법 감동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 속이었다. 쉴새없이 장사꾼이 드나들며 연설을 해댄다. 백 원에 자그마치 빗이 다섯 개에 칫솔을 세 개나 껴 주겠다는 장수서부터 바늘장수, 책장수, 사이다, 콜라, 사과, 삶은 계란, 김밥, 호두과자 장수들이 서로 다투어 목청을 돋우고, 물건을 떠맡기고 했다.
나중에는 한푼 보태 달라는 사람까지 찻간에 들어서자마자 유창하게 일장의 연설을 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골병이 들고 회사까지 해고 당해 제 입 한 입 굶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나섰으니 신사 숙녀 여러분의 동정을 바랄 따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개별적으로 승객 한 사람 한사람에게 구걸 시작했다. 차마 거지라고 부를 수 없게 의젓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구걸하는 경우 단정한 옷차림이란 눈에 거슬리면, 거슬렸지 보탬이 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좀 이상한 걸 갖고 다니고 있었다. 꾸벅 절을 하고는 무슨 증명서를 꺼내 보이듯이 그걸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 보이는 거나를 똑똑히 보면 구걸에 응하게 될 것 같아 겁이 나는 것처럼 누구나 그 사람 쪽은 거들떠도 안 보고 차창 밖만 열심히 내다봤다. 나는 그게 뭔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내 앞에 그가 오거든 그게 뭔가 똑똑히 봐 두리라 벼르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뜻밖에도 그건 낡은 결혼사진이었다. 족두리 쓰고 연지 찍고 다소곳이 서 있는 신부 옆에 사모 관대의 사랑이 의젓하게 서 있는 촌스럽고 낡은 구식 결혼 사진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신랑은 지금 구걸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걸 보여 주며 구걸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상해하면서도 어느만큼은 감동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고 결혼을 했다. 천지신명께 백 년 해로를 맹세했고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을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그 무겁고 무서운 지아비 노릇이다 하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했다.
웬일인지 이 결혼 사진도 구걸 행각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약고 똑똑한 생각은 안 했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풀기에는 좀 많은 돈을 꺼내서 얼른 그 사람의 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남편이 알까 봐, 또 딴 승객들이 눈치챌까 봐, 나쁜 짓이라도 하듯이 몰래 재빠르게 그 짓을 하고, 하고 나서도 얼굴을 붉혔다. 아마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이어서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의문이 안 풀리는 건 그가 왜 하필 결혼 사진을 꺼내 보이며 구걸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거다. 내가 보기엔 그게 조금도 구걸에 도움을 주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말이다. 어쩌면 결혼의 의미를 남보다 더 잘,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이 아닐까. 비 오는 날 있었던, 사건이랄 것도 없는 몇 가지 얘기를 적어 놓고 보니 문득 서글프다. 빗속에서 같이 받은 우산이 인연으로 싹튼 로맨스가 한 컷쯤 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없는 걸 어찌하랴. 이래 저래 40대의 비 오는 날의 사건은 재미없을 수밖에 없나 보다.
떳떳한 가난뱅이
뭐는 몇십 %가 올랐고, 뭐는 몇십%가 장차 오를 거라는 소식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 산다. 몇 %가 아니라 꼭 몇십% 씩이나 말이다 이제 정말 못 살겠다는 상투적인 비명을 지르기도 이젠 정말 싫다. 듣는 쪽에서도 엄살 좀 작작 떨라고, 밤낮 못 살겠다며 여지껏 잘만 살았지 않느냐고 시큰둥하게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백성들의 생활력이 질기다는 게 모멸에 해당하는 일인지 찬탄에 해당하는 일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기다는 것만 믿고 너무 가혹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 같아 뭉클 억울해진다. 더 억울한 건 물가가 오를 때마다 상대적으로 사람값의 하락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가난이 비참한 건 가는 그 자체의 물질적인 궁색을 견디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부의 지나친 편재로 배고파 죽겠는 처지에서 배불러 죽겠다는 이웃을 봐야 하는 괴로움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금전의 다과를 인간을 재는 척도로 삼는 풍조 때문에 가난뱅이는 어디 가나 기죽을 못 펴고 위축돼서 사람이 지닐 최소한의 긍지도 못 지키고 비굴하게 한구석으로 비켜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 봉급 수준과 물가 수준으로 볼 때 우리의 생활이 궁색하다는 건 지극히 정당하고, 잘 산다면 그게 오히려 부당한 거다. 그런데 왜 정당하게 사는 사람이 위축되고 부당하게 사는 사람이 당당한가? 이거 엄청난 비리다. 어차피 비리가 판을 치는 세상인걸 무력한 백성이 새삼 뭘 어쩔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죽은 듯이 비리에 굴종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과감히 도전해 봄직도 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의 사람값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무능이나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이 아닌, 우리가 속한 사회가 가난한 것만큼의 정당한 가난은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여 한점 부끄러움도 없어야겠다. 의연하고 기품 있는 가난뱅이가 돼야겠다.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치부한 사람, 우리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 수준에서 동떨어지게, 엄청나게 잘 사는 사람을 준엄한 질책의 시선으로 지켜 보고, 경멸까지도 사양치 않음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많이 쓰이는 말로 상류층이란 말처럼 듣기에 민망한 말이 없다. 거액의 밀수 보석을 사들인 사람도 상류층, 위장 이민도 상류층--. 이 타락할 대고 타락한 정신이 어째서 우리의 상류층일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대들보건 기둥뿌리건 가리지 않고 갉아서 치부를 하고, 그 부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환물 투기를 일삼아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고, 일신의 안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위기 의식만 예민해져, 보다 전쟁의 위험이 없는 나라로 도피할 궁리나 하는 게 이들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열심히 떳떳하게 사는 교포들의 정신 생활까지 해치는 게 이들이다.
쥐는 영감이 발달돼 난파할 배를 미리 알고 떠나 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쥐새끼만한 영감도 없는 채 처신은 꼭 쥐처럼 약게 하다가 조국을 떠나는 것도 쥐새끼가 난파선 버리듯한다. 그러나 가난하나마 정신이 건강한 백성들은 조국을 난파선의 운명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고난의 현장에서 피신하지 않고 끝내는 목숨을 걸고 난의 운명을 극복하고야 말 최후의 용기가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난뱅이는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신적인 상류층'을 자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제 부흥에 안간힘을 쓰면서 우리는 '잘 살아 보자'를 외쳤었다. 이 '잘 살아 보자'가 차츰 '어떡하든 잘 살아 보자'가 되고 종당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잘 살아 보자'로 돼 버렸다. 물질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 위에 군림하고 인간은 이제 완전히 물질의 노예로 타락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 인간의 타락을 구할 새로운 싹이 틀 고장이 있다면, 아직까지는 양심을 물욕에 팔지 않고 살아 온 떳떳한 가난뱅이들의 고장밖에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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