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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5호 2023.1.9 월요일 (음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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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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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나가 있을 때에는
큰손님을 맞는 것 같이 하고,
방에 들어 있을 때에는 사람이
함께 있는 것 같이 하라.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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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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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함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예술가들이 그 감정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아이디어나 목표, 감당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였을 때
나는 텅 빈 공간으로 간다.
그러면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다.
그 안에서 나는 몹시격렬해져 있다.
< 조던 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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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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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헛걸음’ ‘헛소리’ 따위에 붙는 접두사 ‘헛-’은 한자 ‘빌 허(虛)’에서 왔다. 사전에선 ‘이유 없다’거나 ‘보람 없다’는 뜻이 덧붙는다고 새기고 있는데, ‘가짜, 잘못, 거짓’의 뉘앙스가 더 강하다. ‘나이를 헛먹다, 헛것을 보다, 헛똑똑이’ 같은 말이 그렇다. 매사를 투입 대비 산출로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행동강령이다. 적게 투입하고도 목표를 달성하면 박수를 받는다. ‘헛-’이 붙은 말들은 비능률, 비생산적인 상황을 지목한다. ‘헛-’이 빠지면 실속 있고 원하던 게 이뤄진 것이겠지. 힘을 썼으면 그에 맞는 성과를 얻어야 하리. ‘헛심(힘)’ 쓸 바엔 차라리 가만히 있으라. 눈에 보이는 성과(아웃풋)가 없는 일은 헛수고. 장사도 그렇고 배움도 그렇다. 돈 안 되는 일은 그만둬.
하지만 헛짓이 쓸모없지만은 않다. 헛기침은 민망함을 표시하거나 눈치주기의 용도로 요긴하다. 스산한 세상에서 헛웃음이라도 웃어야지. 상대의 턱에 주먹을 날리는 것보다 헛주먹질이 멀리 보면 낫다. 입덧이 심한 임신부의 헛구역질은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의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난다. 3할대 야구선수도 얼마나 많은 헛스윙을 했겠는가.
우리 대부분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며 산다. 헛물만 켜는 경우가 허다하다. 삶은 헛바퀴 돌듯 하고, 걸음을 헛디뎌 넘어진다. 그래도 지금 당장의 헛고생이 어떻게 굴절되어 나에게 쌓일지 모른다. 풍진세상에 살지만, 그래도 더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은 꼭 온다는 헛꿈이라도 꿔야 견디지. 그러니 헛되어 보이는 일도 잠자코 할 수밖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헛꽃도 예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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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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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 김수영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美製 磁器)스탠드가 울린다
마루에 가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옆에 놓은
찬장이 울린다 유리문이 울리고 그 속에
넣어둔 노리다께 반상세트와 글라스가
울린다 이따금씩 강건너의 대포소리가
날 때도 울리지만 싱겁게 걸어갈 때
울리고 돌아서 걸어갈 때 울리고
의자와 의자 사이로 비집고 갈 때
울리고 코 풀 수건을 찾으러 갈 때
三八線을 돌아오듯 테이블을 돌아갈 때
걸리고 울리고 일어나도 걸리고
앉아도 걸리고 항상 일어서야 하고 항상
앉아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詩를 쓰다 말고 코를 풀다 말고
테이블 밑에 신경이 가고 탱크가 지나가는
연도(沿道)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가만히 있어도 울린다
미제 도자기(美製 陶磁器) 스탠드가 울린다
방정맞게 울리고 돌아오라 울리고
돌아가라 울리고 닿는다고 울리고
안 닿는다고 울리고
먼지를 꺼내는데도 책을 꺼내는 게 아니라
먼지를 꺼내는데도 유리문을 열고
육중한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울리고
울려지고 돌고 돌려지고
닿고 닿아지고 걸리고 걸려지고
모서리뿐인 形式뿐인 格式뿐인
관청(官廳)을 우리집은 닮아가고 있다
철조망(鐵條網)을 우리집은 닮아가고 있다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
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
돌음길만 남은 난삽(難澁)한 집으로
기꺼이 기꺼이 변해가고 있다
<1968.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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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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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근착절(盤根錯節)
盤:서릴/쟁반 반. 根:뿌리 근. 錯:섞일 착. 節:마디 절.
[출전]《後漢書》〈虞?傳〉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으로, 얼크러져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사건의 비유.
후한(後漢) 6대 황제인 안제(安帝: 106~125)때의 일이다. 안제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태후(太后)가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하고 태후의 오빠인 등즐(鄧?)이 대장군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그 무렵, 서북 변경은 티베트계(系) 유목 민족인 강족(羌族)의 침략이 잦았다. 그러나 등즐은 국비 부족을 이유로 양주(凉州:감숙성)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낭중(郎中) 벼슬에 있는 우허(虞?)가 반대하고 나섰다.
“함곡관(函谷關)의 서쪽은 장군을 내고 동쪽은 재상을 낸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양주는 많은 열사와 무인을 배출한 곳인데 그런 땅을 강족에게 내준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중신들도 모두 우허와 뜻을 같이했다. 이 때부터 우허를 미워하는 등즐은 때마침 조가현(朝歌縣:안휘성 내)의 현령이 비적(匪賊)에게 살해되자 우허를 후임으로 정하고 비적 토벌을 명했다. 친구들이 모여 걱정했으나 우허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盤根錯節]’에 부딪쳐 보지 않고서야 어찌 칼날의 예리함을 알 수 있겠는가.”
현지에 도착한 우허는 우선 전과자들을 모아 적진에 침투시킨 다음 갖가지 계책으로 비적을 토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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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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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민간요법이 사람잡네 - 한승섭(남,서울시 동작구 본동)
제 고향은 충남 온양의 외곽으로 과수원만 쭉 붙어 있는 조그만 마을입니다. 땅은 넓지만 집은 몇 채 없고, 이웃간에 담도 없이 지내는 사랑의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아주 옛날 있었던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옛날, 진짜 뭘 잘 모르던 시절, 시골에서 있었던 엄청나고 어이없는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절대로 흉내내지 말라는 말씀을 먼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집엔 매일 새벽 5시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동네 아저씨가 한 분 계셨습니다. 우리집 대청마루에 걸터앉아서 하는 말도 일년 365일 똑같습니다. 컴컴한 꼭두새벽에 남의 집 마루에 걸터앉아서 하시는 첫 말씀은 이랬습니다.
"흠, 흠, 자남...? 자는겨...?"
그 소리에 우리 식구들이 일어나 아침을 맞이 합니다. 새벽부터 술 한잔 하러 건너오시는 거예요.
"한잔 혀"
"흠, 흠. 식전부터 과헌디..."
그리고는 동네 한바퀴를 두루 살펴 보러 나갑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아저씨가 오셨는데 그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다리는 양쪽으로 쭉 벌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었으며 얼굴은 벌레 씹은 표정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로더군요.
"치질이 아주 심해져서 걷지도 못하니... 워쩐디야."
"술을 그렇게 좋아하니 치질이 낫겄나... 쯧쯔."
아무튼 마을 사람들은 서로 걱정하면서 그 고약한 병을 고치는데 특효라고 저마다 한가지씩 민간요법을 내놓았습니다. 첫 번째 요법은 목에 띠없는 지렁이를 설탕과 함께 재워서 공복에 한 수저씩 먹으면 직빵이라는 순덕이 아버지 처방이었습니다. 그날부터 그 아저씨는 열일을 제쳐놓고 시궁창에서 살았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동네 또랑이란 또랑은 죄다 뒤집어졌고, 하수도 또한 모조리 파헤쳐져서 동네가 완전히 시궁창 동네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정성이 부족했는지 그 목에 띠없는 지렁이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비슷한 것 몇 마리를 정성스럽게 설탕에 재웠습니다. 그리고는 잡수셨죠. 그러나 효험이 있을리가 있남유. 엉터리 민간요법 덕에 동네만 시궁창 됐다니께유.
아저씬 두 번째 요법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번 민간요법 아이디어는 더 황당 했습니다. 그곳(항문)에 양잿물을 주사하면 감쪽같이 낫는다는 피난엄마의 처방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양잿물을 갖고 와서 제 어머니께 사정사정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간호사 교육을 받은 분이라 절대로 안된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양잿물은 독이여, 그걸 주사 논다구? 그건 안돼유."
그러나 아저씨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어머니께서 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주사를 집어 들면서 아저씨께 말씀하셨습니다.
"아저씨 죽으면 전 몰라유. 증말 몰라유."
"죽어도 지가 죽는 구먼유."
아저씨는 얘기하시며 궤타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불보듯 뻔했습니다. 양잿물을 투입하는 순간, '윽' 하는 비명과 함께 양팔은 허공을 저었고, 두 다리는 사시나무 떨 듯했으며, 순식간에 벌어진 입에선 신음소리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두 눈은 초점을 흐린 채 흰자위가 점점 넓어만 갔습니다. 그 아저씨 엉덩이가 궁금하지유? 말두 마유, 가관이유 가관, 아니 가관두 아녀유. 그 아저씨 엉덩이께가 글쎄 시장바닥으로 변했다니께유. 그후로 아저씨는 목발로 허리 아래를 지탱하며 다녔습니다. 그래두 워쩐대유 새벽은 오는디... 지의 집에 와야쥬. 이 소리를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나 봐유.
"흠, 흠, 자남. 자는 겨?"
왠만하면 나아질 법도 한데 그놈의 치질은 더욱 악화만 되었습니다. 그날도 새벽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저녁 해는 뉘엿뉘엿 평온한 마을 뒷산으로 숨어가고 숨러가고 있었습니다. 그 저녁 무렵. 깔린 땅꺼미를 걷기라도 하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앰블런스 한 대가 아저씨 집앞에 섰습니다. 이유는 그 다음 요법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요법은(낚시를 환장하게 좋아하는 덕배삼촌 처방이어유) 요강에 물과 카바이트를 넣으면 부글부글 끓으며 연기가 발생합니다. 가스지요. 그 김을 쏘이면 치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뚝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엉터리 처방이건만 아저씨는 또 실행에 옮겼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요강에 걸터앉았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료했겠습니까? 아저씨는 하염없이 앉았다가 무심코 담배 한 대를 물었습니다. 담배를 다 피운 뒤 진짜 무심코 아저씨는 그놈의 담배 꽁초를 엉덩이 한쪽을 슬며시 들고 던져 넣었는데, 그 순간 쾅 하는 폭발소리와 함께 요강은 산산조각이 났고 아저씨는 넋놓고 있다가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온양 그 산골에 앰블런스가 나타난거지요. 그 아저씨 엉덩이가 또 궁금하시지유? 물어보나 마나유. 아주 절단나 버렸데유. 온양 온천 장날에 어떤 이가 그러더구만유. 볼장 다 봤다고... 그 이후 한참 동안은 '흠, 흠, 자남.'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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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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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상옥편"(1920~2004)
시조 시인. 호는 초정. 경남 충무 출생. 학교 교육은 별로 받지 않았고 인쇄소 문선공 등으로 소년기를 보냄. 광복 후 부산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상경하여 표구사 아자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음. 16세 때에 시조 "청자부"로 가람 이병기를 놀라게 한 바 있으며 한국 현대 시조를 꽃피운 공로자 중의 하나로 "백모란" "이조의 흙" 등 많은 시조 작품이 있다.
알같이 생긴 연적
조선 시대 자기 중에 그 생김새의 종류가 많기로는 아마 연적을 두고 달리 당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원형, 그 둥근 가운데도 떡 모양이 있고, 또 중심이 뚫린 환형, 곧 또아리 모양이 있다. 물형으론 복숭아 모양, 고기 모양, 새 모양, 두꺼비 모양, 그 밖에도 지붕 모양, 초롱 모양, 부채 모양, 무릎 모양 등, 별의별 것이 다 있다. 골동을 수집함에 있어서도 벽이 있어, 어느 분은 병만을 모으고, 어느 분은 사발이나 대적 같은 주방 그릇들을 모으고, 또 어느 분은 문방구, 그 문방구 중에도 필통이나 연적만을 따로 모으는 기호가들이 더러 있다. 내게도 네모꼴에 청화로 보상화문을 그린 것이 하나 있고, 원형에 호접 한 쌍을 역시 청화로 그린 것이 있다. 이들 둘이 다 연대도 얕고, 그나마 네모 꼴은 입이 깨어져 도무지 실용으론 쓸모가 없다. 그래서 이미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마침내 조그만, 신라의 도금불 하나를 구해서 그 위에 올려놓았더니 아주 안성맞춤 잘 어울린다. 이제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연적이 불상 받침으로서 더욱 값진 구실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쇠붙이와 조선 시대의 질그릇! 이것이 천여 년을 격한 오늘, 외로운 문인의 서실에 와서 그 연분의 기나긴 실끝이 이토록 맺어질 줄이야! 이리하여 이 신라불은 조선조의 꽃무늬를 깔고 나의 방 안을 항시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호접 무늬 있는 것은 빛깔은 그리 좋지 않지만, 금 간 데 하나 없이 완전하다. 이것은 몇 해 전 어느 골동 가게에서 거저 얻은 것인데, 노상 책상에 놓였다가 벼루에 물방울을 떨구는 제 본디의 타고난 구실을 아직도 그냥 되풀이하고 있다. 요 며칠 전, 어느 고물 가게를 지나다가 나는 또 담청을 곁들인 무릎 모양의 백자 연적을 하나 샀다. 그러나 이도 입이 깨어졌다. 이것을 때우려는데 그 조그마한 입을 때우는 품삯이 이 몸뚱이 전체를 산 값보다 더하다. 얼른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사람도 만약 입이 없고 몸만 있다면 폐물이 되고 말 것이니, 연적 또한 이와 마찬가지리라. 그러나 때우는 데는 먼저 몸에 밴 때를 뽑아야 한다 하기에, 때를 뽑으려고 탈지면에 과산화수소를 묻혀 환부를 온통 싸 두었었다. 과산화수소는 환부를 소독하는 약이지만, 자기의 상처에서 때를 뽑는 데도 그만이다. 나의 이러한 거동을 보고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킥킥거리고 웃는다. 꼬마놈은 방 안에서 병원 냄새가 난다고 야단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탈지면을 들어 보고 마음을 죄어도 때는 좀처럼 빠지지 않더니 하루는 거짓말같이 말갛게 때가 빠졌다. 이것을 맑은 물에 헹구어 내어 화대로 쓰는 소반 위에 올려놓았었다. 소반의 검은 칠 빛과 이 담백의 연적 빛이 서로 대조되어 더욱 희고 더욱 검게 보인다. 더구나 형광등 불빛 아래 이 볼록한 무릎 모양의 연적을 보고 있노라면, 홀연히 어느 끝없는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윽고 곁에 앉았던 딸애가,
'사람의 발자국이 아직 한 번도 닿지 아니한 어느 먼 심산 유곡, 그 깊숙한 숲 속에 이름 모를 백조가 있어, 그가 품었다가 놓아두고 간 신비한 알과 같다.'고 하며, 제법 그럴싸한 환상의 날개를 펼쳐, 그 비경에 혼자 찾아든 양 조용히 경이의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아내는 독백으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뇌며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론 딸의 환상에 또한 딸애처럼 경이의 눈빛으로 못내 흐뭇해했다. 사실, 이 연적은 구만리 장천을 난다는 저 대붕의 알은 아니라 해도, 거위나 백조의 알보다는 조금 크고, 타조의 알보다는 약간 작은 것이다. 눈도 코도 없이 다만 물을 머금고 물을 배앝는 두 개의 구멍이 있을 뿐, 이 수수께끼 같은 단순한 형태, 그러나 이는 다름 아닌 지난날의 어느 도공이 그 천명에 순종하던 마음을 태반으로 하여 낳은 한 개 무념의 알, 백자 연적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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