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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4호 2023.1.8 일요일 (음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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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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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잃기가 쉽다. 행복이란 항상 분에 넘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알베르 카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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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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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최대의 불행은
농사가 잘 안되었다거나 화재를 만났다거나 또는
나쁜 사람으로부터 받은 타격에서 온다기보다는
우리 개인 개인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자기의 이웃과 전인류를 적대시하고 나서
그 누가 행복될 수 있을 것인가?
자기 주위 사람,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그리고 친구와 이웃과 화목한 것이 행복의 출발점이다.
- 힐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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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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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元曉大師)-텔레비를 보면서 - 김수영
성속(聖俗)이 같다는 元曉大師가
텔레비에 텔레비에 들어오고 말았다
배우이름은 모르지만 大師는
大師보다도 배우에 가까왔다
그 배우는 食母까지도 싫어하고
신이나서 보는 것은 나 하나뿐이고
元曉大師가 나오는 날이면
익살맞은 어린놈은 활극(活劇)이 되나 하고
조바심을 하고 食母아가씨나 가게
아가씨는 연애가 되나 하고
애타하고 元曉의 염불소리까지도
잊고- 罪를 짓고 싶다
돌부리를 차듯 서투른 元曉로
분장한 놈이 돌부리를 차고 풀을
뽑듯 罪를 짓고 싶어 罪를
짓고 얼굴을 붉히고
罪를 짓고 얼굴을 붉히고
聖俗이 같다는 元曉大師가
텔레비에 나온 것을 뉘우치지 않고
춘원(春園) 대신의 원작자(原作者)가 된다
원효대사의 민활성(敏活性) 바늘끝에
묻은 罪와 먼지 그리고 모방(模倣)
술에 취해서 쓰는 詩여
텔레비 속의 텔레비에 취한
아아 元曉여 이제 그대는 낡지
않았다 他動的으로 自動的으로
낡지 않았고
元曉 대신 元曉 대신 마이크로가
간다 <제니의 꿈>의 허깨비가
간다 연기가 가고 연기가 나타나고
마술(魔術)의 元曉가 이리 번쩍
저리 번쩍 <제니>와 大師가
왔다갔다 앞뒤로 좌우로
왔다갔다 웃고 울고 왔다갔다
파우스트처럼 모든 상징(象徵)이
象徵이 된다 聖俗이 같다는 元曉
大師가 이런 기계(機械)의 영광을 누릴
줄이야 <제니>의 덕택을 입을
줄이야 <제니>를 <제니>를 사랑할 줄이야
긴 것을 긴 것을 사랑할 줄이야
긴 것 중에 숨어있는 것을 사랑할 줄이야
제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긴 것 가운데
있을 줄이야
그것을 찾아보지 않을 줄이야 찾아보지
않아도 있을 줄이야 긴 것 중에는
있을 줄이야 어련히 어련히 있을
줄이야 나도 모르게 있을 줄이야
<1968.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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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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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지신(尾生之信)
尾:꼬리 미. 生:날 생. 之:갈 지(…의). 信:믿을 신.
[동의어] 포주지신(抱柱之信).
[출전]《史記》〈蘇秦列傳〉.《莊者》〈盜?篇〉
미생의 믿음이란 뜻. 곧
① 약속을 굳게 지킴의 비유. ②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춘추 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尾生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었다. 어느 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전국 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연(燕)나라 소왕(昭王)을 설파할 때 신의 있는 사나이의 본보기로 미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같은 전국 시대를 살다간 장자(莊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장자는 그의 우언(寓言)이 실려 있는《장자》〈도척편〉에서 근엄 그 자체인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의 입을 통해 미생을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책형(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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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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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먹는 게 퇴직금이구만유
지금으로부터 약 십년전. 제 부모님께서는 아현동에서 중국집을 하고 계셨습니다. 자장면 집은 신속배달이 생명이고 철가방이 마스코트이기에 저희도 '철가방'을 우대했습니다. 많은 철가방이 거쳐갔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날으는 철가방', '환상의 철가방', '전천후 철가방', '오토매틱 철가방', 그리고 우리집 '홍보석'의 최장수 철가방이자 마지막 철가방인 대경이 형을 떠올리며 자칭 '영업부장' 타칭 '터미네이터 철가방'인 대경이 형에 대해 몇 자 쓸까 합니다. 형의 고향은 어머니의 고향인 충남 당진이었습니다. 먼 친척뻘이라 했는데 촌수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사돈의 육촌 정도는 되었겠지요. 초등학교 6년을 하루는 결서, 하루는 조퇴, 다음날은 가정학습, 그 다음날은 야외학습하며 3년도 채 안 다니고 졸업을 한 나름대로 '수재'였습니다. 어쨌든 형은 첫날부터 수상했습니다. 가게로 막 들어선 형을 본 순간 전 '민속씨름'선수인 줄 알았습니다. 형은 신장 185센티미터에 9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를 자랑하는 나이트클럽 어깨를 연상케 했습니다. 우선 요기부터 시켰습니다. 어머니 말처럼 사람 구하기 힘든 때에 그야말로 극비리에 스카우트 해온(물론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귀한분 이었으니까요. 형은 슬쩍 본 주방장 아저씨는 볶음밥 곱빼기, 왕특자장면, 군만두 3인분을 내놓았습니다.
"쩝쩝, 후루룩."
정말 잘 먹더군요. 열심히 먹고 있는 형에게 주방장 아저씨가
"어때 자장면 맛이 괜찮으냐?"
하며 은근히 자기자랑 비슷한 질문을 하더군요. 한입 가득 자장면을 씹고 있던 형은 알사탕만한 큰 눈을 껌벅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리고는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글씨유, 모르겠구만유. 자장면이 자장면 맛이지, 괜찮은 건 또 뭐래유?"
여하튼 다음날부터 형은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카운터에서 전화받으랴 계산하랴 바쁜 어머니에게 형은 철가방을 들고 그 느린 말투로
"아줌니이-, 지 수진부동산 댕겨 오께유." 하며 배달을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아줌니이-, 지 수진부동산 댕겨 왔구만유." 하는 겁니다. 처음 몇 번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계속 그러자 어머니가 "대경아, 이제 어디 간다고 또 왔다고 그런 말 안해도 돼. 그냥 갔다와." 하자 형은 큰 눈을 껌벅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글씨유, 뭔 말인지 모르겠그만유. 사람이 나가면 나간다, 들어오면 들어온다, 말을 해야지, 어찌 그런대유, 휙 나가고 휙 들어오는 그런 경우가 어딨대유. 진 그리는 못하는구만유."
어쨌든 너무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형은 기운이 넘쳐 일도 잘했습니다. 완행열차 추풍령고개 넘어가듯 말은 느렸지만, 몸은 불곰이었지만, 동작은 물찬 제비였습니다. 가랑이 사이로 비파 소리가 나도록 부지런히 움직였고, 철가방을 들고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휙- 하는 바람소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기운좋게 일 잘하니 먹는 것도 대단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돼지고기 두 근 정도는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는 식으로 먹었습니다. 하루는 점심으로 볶은밥 4인분을 먹고 있던 형에게 "대경아, 그렇게 많이 먹고도 소화가 되니?" 하며 어머니가 묻자 형는 숟가락을 내려 놓더군요. 그리고 또 큰 눈을 껌벅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아줌니이-, 물어볼 게 있구만유."
"뭔데."
"저기유, 여기 퇴직금 주남유?"
"애는 중국집에 퇴직금이 어딨어."
어머니가 대답하자 형은 물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더니 물컵을 턱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거봐유, 안 주는 거 맞쥬. 내 다 알쥬."
하고는 목을 곧게 세우고 눈에 힘을 주며 비장한 목소리로
"나유, 서울 올라올 때 우리 엄니가 그랬슈, 즉 먹는 게 퇴직금이다 이 말이쥬. 어때요, 내 말이 맞쥬?"
하고는 남은 볶음밥을 마저 먹더군요. 그 뒤로 어머니는 대경이 형이 뭘 먹든 얼마나 먹든 신경 안 쓰셨지요.
어느 날 텔레비젼에서 권투 중계를 하더군요. 주방 식구들은 서로 내기를 걸었지요. 주방장 보조인 김씨 아저씨가 야 대경아, 흰 빤스 입은 애가 이길 것 같냐? 파란 빤스 입은 애가 이길 것 같냐? 며 대경이 형에게 묻더군요. 전 형이 이번에는 또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했습니다.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던 형 왈,
"글씨유, 몰라유. 내가 그걸 어찌 안대유."
김씨 아저씨가 재차
"임마 그래도 예상은 할 수 있잖아. 예측도 못하냐?"
하자 형은 바쁘게 씹던 사과를 꿀꺽 삼키더니 큰 눈을 껌벅거리며 또 뭔가를 깊이 생각하더군요. 이윽고,
"글씨유, 지가 볼 때는유 많이 맞은 놈은 아플 거고, 때린 놈은 지치겠쥬."
하는 겁니다. 어는 월말 수금문제로 형은 또 한번 웃기더군요.
"수금 왜 못했니?" 라는 어머니 물음에 형은 말하더군요.
"글씨유, 안 주네유."
"달라고 했어?"
"했는디, 돈이 없대유."
"그럼 언제까지 줄 수 있는지 물어봐야지."
"글씨유, 곧 주겠쥬."
"참 답답해라."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자 형은 눈을 껌벅거리며 또 뭔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렇지유. 답답하쥬. 지는 환장하겠슈..."
사건도 많았지요.
어느 겨울날 배달을 나간 형이 빙판에 미끄러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깨진 그릇과 짬뽕국물이 질질 흐르는 철가방을 들고 절뚝거리는 형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형 미끄러졌구나. 많이 다쳤어?"
"아녀, 내가 미끄러진 게 아녀. 오토바이가 미끄러졌다니께..."
"조심하지 그랬어."
"나야 조심하지. 근디 오토바이는 조심 안혔어. 그러니 오토바이가 미끄러졌지. 나야 잘못 없어."
형은 말하면서 행주로 철가방을 닦더군요. 그러다가 형도 선을 볼 나이가 되어서 어머니가 미장원 아가씨를 소개시켜주었지요. 그런데 나간지 한시간도 채 안되어 형이 들어오더군요. 전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냐고 하며 형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한참을 끙끙 앓던 형이 말하더군요.
"아, 글씨. 다방에서 코피 마시는데, 코피 좋아하냐구 가시나가 묻잖여. 그래서'시키니까 마시지유.' 혔지. 그리그 오늘 어떻게 할 거냐구 묻잖여. 그래서 '나가봐야 알쥬.' 혔지 한참을 있다가 '점심은 어떻게 하죠?' 하길래 '배고프믄 묵쥬.' 혔지. 그러니까 이 가시나가 톡 쏘잖여, '오늘 여기 왜 나왔어요?' 하고 말여. 그래서 '선 보러 가라 해서 왔지유.' 혔지 그러더니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살거냐고 묻길래 '결혼혀봐야 알쥬.' 그랬지. 그러니까 코맹맹이 소리로 '실례했어요.' 하고 나가잖여. 햐튼 서울 아들은 싸가지가 없어."
휴... 저는 그냥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요. 시간은 잘도 흘러 저희 중국집도 남에게 처분했지요. 형은 그간 모은 돈을 갖고 당진으로 내려갔습니다. 논밭도 많이 장만하고 소, 돼지, 개, 닭도 굉장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재작년 가을에는 결혼도 했고, 올초에 아들을 낳았다고 집으로 전화를 했더군요. 어머니가 애는 이쁘고 건강하냐고 묻자, 형은 이러더랍니다.
"글씨유, 잘 몰라유. 지 눈엔 이쁜데, 아줌니가 봐야 이쁜지 안 이쁜지 알지, 그걸 어떻게 아남유. 그럼 들어가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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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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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상옥편"(1920~2004)
시조 시인. 호는 초정. 경남 충무 출생. 학교 교육은 별로 받지 않았고 인쇄소 문선공 등으로 소년기를 보냄. 광복 후 부산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상경하여 표구사 아자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음. 16세 때에 시조 "청자부"로 가람 이병기를 놀라게 한 바 있으며 한국 현대 시조를 꽃피운 공로자 중의 하나로 "백모란" "이조의 흙" 등 많은 시조 작품이 있다.
백자 이제
학이 받쳐 든 술잔
여기 술잔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술잔은 적어도 백유여 년을 창공에 높이 떠 물 흐르듯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언제까지나 떠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정말 술잔이 창공에 떠서 물 흐르듯 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떠 있는 바에야 어찌하랴. 일찍이 이 땅에 한 무명 도공이 있어, 그 도공의 슬기가 능히 이러한 이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 눈앞에 선연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술잔은 정작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이는 그 무명 도공이 나고 살고 또 죽고, 그리고 죽어서 묻혀 있을 그 어느 외딴 산골짜기의 흙임에 틀림없다. 종생토록 고된 노역으로만 다루어진, 그 곰의 발같이 생긴 무디고 억센 손, 그 손으로 이 흙을 빚어 구워 낸 것이 바로 이 백옥보다 흰 술잔이다. 아니, 차라리 희다못해 눈이 시리도록 연푸른 술잔이다.
이러한 도자기의 빛을 애도가들은 영청이라 일컫기도 한다. 과연 그냥 희거나 그냥 푸른빛이 아니라, 오직 푸르름의 잠영, 푸르름의 그리메가 다시 그늘져 비쳐지는 빛이다! 이렇게 희고 푸른 영청 빛을 살리자면 어떻게 하랴? 그것은 파란 하늘빛이 노상 서리고 배어 있을 저 동방의 서조, 학의 날개를 새길 수밖엔 없다. 드디어 도공은, 아니 그 이름 없는 명장은 잔받침에 두 마리 학을 새겼다. 목과 부리는 입체적인 도법, 날개는 음양각에 투각까지 겸했다. 그 솜씨도 자못 빼어나 학과 같이 청수하다. 암놈은 목을 휘어 수놈의 다리 위에 얹고, 수놈은 또 암놈의 뻗은 다리 위에 그렇게 서로 목을 휘었다. 아예 인위란 모르고 오히려 한 자연으로 살아 온 도공, 그는 그가 태어난 골짜기의 흙을 파서 그 골짜기의 물로 빚고, 그 골짜기의 나무를 찍어 구워 낸 것이기에, 정녕 미도 미한 줄 모를 만큼 그저 그대로 자연스럽다. 그가 언제 미를 배웠으며 또 미를 익혔으랴. 그러나, 어찌 미를 모르고서 이같이 지묘한 의장을 구상해 내었을까? 인색한 일인들은 이를 그냥 '우연의 소산'이라 한다. 설령 우연이라면, 그 우연은 누가 닦고 누가 가꾼 우연이란 말인가? 받침으로 새겨진 학은 또 그냥 있지 않다. 좌우에서 마주 보며 활짝 죽지를 펴고 있다. 그리고 또, 펴고만 있지 않고 저 끝없는 창공을 향하여 하냥 날고 있다. 이렇게 날고 있는 두 마리 학의 날개는 말할 것도 없이 오직 한 개의 술잔을 받쳐 들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이 술잔은, 가령 술상 위에 놓였거나, 또 누가 들어서 뉘게 권작하거나 해도, 이미 학은 받침하고 있는 바에는 분명히 어느 심령의 하늘을 날고 있다 하리라. 예로부터 학은 십장생의 하나, 학이 하늘로부터 술을 실어 온다면, 아니, 어떠한 술이라도 이 잔에 한 번 담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장수를 축복하는 불로의 선주! 또 하늘로부터 술을 긷는다면, 이 술잔은 그대로 끝없는 설화의 샘을 길어 올리는 선녀들의 두레박! 이미 내게는 이 술잔으로 장수를 빌어 드릴 어버이도 없고, 나 또한 일적불음이라 대작할 친구도 없다. 그러면서 연전에 이것을 사서 내내 수장하고 있다. 문갑 위에 놓인 이 술잔은 이제 술을 마시는 연모가 아니다. 갈수록 속진에 물들어 가는 마음, 이제 그런 마음을 세례하는 하나의 조촐한 정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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