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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3호 2023.1.7 토요일 (음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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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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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적인 사람이 되려면 남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더라도 아무 소리 말고 배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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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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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이 예쁜 그릇 속에 담긴 물은
고운 빛을 띠고 맑아 보이지만, 맑은 물이라도
바닷속 깊이 있을 때는 어둡게 보인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로 깊고
큰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침묵을 지키나
지식이 얕은 이는 몹시 아는 척한다.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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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누구에게도,
과거가 현재를 가두는
감옥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해소할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용서는,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감옥 문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여준다.
용서하고 나면, 두려워
할 일이 적어진다.
- 프레드 러스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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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小寒)
24절기 가운데 스물세 번째 절기로 작은 추위라는 뜻의 절기.
소한(小寒)은 양력 1월6일 무렵이며 음력으로는 12월에 해당된다.
태양이 황경(黃經) 285도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이름 상으로 보았을 때 대한의 시기일 때
가장 추울 것 같지만 소한의 시기 일 때가 한국에서는 1년 중 가장 춥다.
소한은 해가 양력으로 바뀌고 처음 나타나는 절기이다.
소한 무렵은 정초한파(正初寒波)라 불리는 강추위가 몰려오는 시기이다.
농가에서는 소한부터 날이 풀리는 입춘 전까지 약 한 달간
혹한(酷寒)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둔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에서는 문밖출입이 어려우므로
땔감과 먹을거리를 집안에 충분히 비치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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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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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 -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槪觀)하고
잇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憐憫)의 순간이다 황홀(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을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1968.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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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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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봉(彌縫)
彌:더할/많을 미. 縫:꿰맬 봉.
[유사어] 고식(姑息). 임시변통(臨時變通).
[출전]《春秋左氏傳》〈桓公五年條〉
빈 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그때 그때 임시 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해서 꾸며 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환왕(桓王) 13년(B.C. 707)의 일이다. 환왕은 명목상의 천자국(天子國)으로 전락한 주나라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정(鄭)나라를 치기로 했다. 당시 정나라 장공(莊公)은 날로 강성해지는 국력을 배경으로 천자인 환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은 우선 장공으로부터 왕실 경사(卿士)로서의 정치상 실권을 박탈했다. 이 조치에 분개한 장공이 조현(朝見:신하가 임금을 뵙는 일)을 중단하자 환왕은 이를 구실로 징벌군을 일으키고 제후(諸侯)들에게 참전을 명했다.
왕명을 받고 괵/채(蔡)/위(衛)/진(陳)나라 군사가 모이자 환왕은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정나라를 징벌하러 나섰다. 이런 일이 곧 천자(天子)의 자장 격지(自將擊之)는 춘추 시대 240여년 동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윽고 정나라의 수갈(繡葛:하남성 내)에 도착한 왕군(王軍)은 장공의 군사와 대치했다. 공자(公子)인 원(元)은 장공에게 진언했다.
“지금 좌군(左軍)에 속해 있는 진나라 군사는 국내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전의(戰意)를 잃고 있습니다. 하오니 먼저 진나라 군사부터 공격하면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환왕이 지휘하는 중군(中軍)을 혼란에 빠질 것이며 경사(卿士)인 괵공이 이끄는 채/위나라의 우군(右軍)도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 때 중군을 치면 승리는 틀림없습니다.”
장공의 원의 진언에 따라 원형(圓形)의 진(陣)을 쳤는데 이는 병거(兵車:군사를 실은 수레)를 앞세우고 보병(步兵)을 뒤따르게 하는 군진(軍陣)으로서 병거와 병거 사이에는 보병으로 ‘미봉’했다. 원이 진언한 전략은 적중하여 왕군은 대패하고 환왕은 어깨에 화살을 맞은 채 물러가고 말았다.
[주] 자장격지(自將擊之) : 남을 시키지 않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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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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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2장 슬프도다, 관중이여
2. 배신과 학정
세자 신생 묘의 이장
진혜공은 가군을 겁탈한 죄가 있는지라 그녀의 말처럼 하겠노라고 승낙했다. 그러고 나서 극예의 종제 극걸과 태사에게 각각 명했다.
"경은 곧 곡옥에 가서 좋은 자리를 골라 전 세자 신생을 천장하고 오너라. 그리고 전 세자에게 시호를 내려야겠으니 태사는 잘 상의해서 정하라."
신하들은 전 세자의 효와 경을 참작하여 시호를 공세자(共世子)라고 지었다. 그리고 공세자를 새로 이장하고 나면 즉시 호돌이 그 곳에 가서 제사를 올리도록 결의했다. 이에 극걸은 곡옥 땅에 가서 가장 좋은 재료로 널과 옷과 이불과 명기와 목우 등속을 마련하고 무덤을 팠다. 역군들은 관 속에서 끌어낸 신생의 시체를 보고 모두 놀랐다. 죽은 신생의 얼굴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체에서 흉악한 냄새가 났다. 역군들은 그 냄새에 견딜 수 없어 코를 움켜쥐고 먹은 걸 토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체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극걸이 시체 앞에 향을 피워 올리고 재배하고 아뢰었다.
"세자께선 살아 생전에 그다지도 결백하시더니 죽어선 어찌 이다지도 불결하시나이까. 이 불결한 냄새가 세자의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모든 역군들을 놀라게 하지 마옵소서."
극걸이 말을 마쳤을 때였다. 지금까지 코를 들 수 없던 악취가 씻은 듯 없어지면서 아름다운 향내로 변했다. 극걸은 신생에 다시 염하고 입관까지 마친 뒤 고원으로 모셨다. 이날 곡옥 백성들은 성 안을 비우다시피 성 밖까지 따라나가 세자의 상여를 전송하면서 울었다. 공세자를 고원에다 천장한 지 3일이 지났다. 호돌은 모든 제기를 갖추어 가지고 고원에 갔다. 그리고 호돌은 진혜공의 명의로써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마치고 호돌은 산을 내려갔다. 호돌의 눈앞에 저편 산 모퉁이에서 양편으로 정기를 쌍쌍이 들고 갑옷을 입고 창검을 든 군졸이 일대 거마를 모시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호돌은 그들이 웬 군대인지 알 수가 없어서 황망히 길을 피하려 했다. 그 때, 군대들의 행진 속에서 수레 한 대가 달려나왔다. 그 수레 위에 탄 사람은 모발이 반백이고 말쑥히 도포를 차려 입고 단정히 홀을 들고 있었다. 머리가 반백인 사람이 조용히 수레에서 내려와 호돌에게 읍하며 말했다.
"세자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모시러 왔소. 청컨대 국구는 잠시 나와 함께 갑시다."
호돌이 보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태부 두원관이었다. 호돌은 정신이 황홀해서 두원관이 이미 죽은 사람이란 것도 잊고 물었다.
"세자가 어디 계시오?"
두원관이 뒤편의 큰 수레를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저것이 바로 세자의 수레입니다."
호돌은 두원관을 따라 그 수레 앞으로 갔다. 세자 신생이 구슬을 꿴 갓끈을 매고 허리에 칼을 차고 수레 위에 뚜렷이 앉아 있지 않은가! 그 얼굴은 완연히 생전과 같았다. 신생이 어자에게 분부했다.
"내려가서 국구를 이 수레 위로 모셔라."
호돌이 수레에 오르자, 세자가 추연히 말했다.
"국구는 그간 이 신생을 잊지나 않았소?"
호돌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세자의 원통한 원한을 길 가는 사람도 다 슬퍼하고 울었거늘, 이 호돌이 어찌 잊었겠습니까?"
"천장 옥제(玉帝)께서 내 살아 생전에 인(仁)하고 효(孝)하였음을 어여삐 여기사 이미 나에게 교산의 주인이 되라는 명을 내리셨소. 전번에 이오가 서모 가군(賈君)에게 무례한 짓을 하였음이라. 나는 그의 짐승 같은 소행이 미워서 이번에 이장되는 것을 거절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섭섭해 할까 해서 참았소이다. 오늘날 진(秦)나라 군후가 매우 어진지라, 내 이제 진(晋)나라를 떠나 진(秦)나라로 가서 장차 그 곳 백성들이 올리는 제사를 받을 생각이오. 국구의 뜻엔 어떠하오?"
"세자께서 아무리 진군(晋君)이 미우실지라도 진나라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제 세자가 동성을 버리고 타국에 가서 제사를 받겠다 하시니 이는 인(仁)하고 효(孝)하신 덕에 어긋남인가 합니다."
"국구의 말도 그럴 성하오. 그러나내 이미 이 일을 옥제께 아뢴지라, 그럼 다시 한 번 아뢰어 보겠소. 국구는 앞으로 7 일간만 이 곳에 더 머물렀다가 돌아가오. 신성 서쪽 마을에 귀신과 말할 줄 아는 무당이 살고 있소. 내 장차 그 무당을 통해서 국구에게 차후 경과를 자세히 알리겠소."
이 때, 수레 밑에서 두원관이 호돌을 수레 밑으로 끌어내리며 말했다.
"이제 국구는 세자와 이별할 때가 되었소."
호돌은 수레 밑으로 내려서다가 실족하여 그냥 땅바닥에 넘어졌다. 순간 군대도 수레도 말도 간 곳이 없었다. 동시에 정신을 잃고 호돌은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호돌이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신성 외관에 누워 있었다. 그가 크게 놀라 좌우 사람에게 물었다.
"내가 어째서 이 곳에 누워 있느냐?"
좌우 사람이 대답했다.
"국구께선 제사를 마치고 축문을 불사르고 마지막 절을 하시다가 갑자기 자리에 쓰러지셨습니다. 저희들이 부르고 주물러도 깨어나지 않기로 수레에 싣고 이 곳까지 돌아왔습니다. 천만 다행히 별고 없으신 듯하니 저희들도 이제야 맘을 놓겠습니다."
호돌은 속으로 짐작이 갔다.
'내가 꿈을 꿨구나.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만 대고서 드러누웠다. 외관 뜰에 호돌의 수레가 머문 지도 7일이 지났다. 그러니까 바로 7일째 되던 날이었다. 미시와 신시 중간쯤 되었을 때였다. 아랫사람이 들어와서 호돌에게 아뢰었다.
"지금 문밖에, 성 서쪽에 사는 무당이라면서 국구를 뵙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호돌은 두말 않고 그 무당을 데리고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좌우 사람을 다 물러가게 했다. 무당이 들어와서 호돌에게 절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귀신과 서로 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 교산의 산신은 지난날의 진(晋)나라 세자 신생이십니다. 그 태자가 국구께 말씀을 전해달라기에 제가 왔습니다. 그 전하란 말씀은 다름이 아니옵고, '이제 상제(上帝)께 다시 아뢰었으니 다만 그 자의 몸을 욕되게 할 것이며, 그 자손을 참함으로써 그 죄에 대한 벌을 내릴 것이다. 진(晋)나라엔 해가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 하시더이다."
호돌이 일부러 모르는 체하고 물었다.
"어떤 사람의 죄를 벌하신다더냐?"
"세자께선 이 말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전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일체 입 밖에 내지 말아라."
호돌은 주의를 시키고 좌우 사람을 불러 무당에게 황금과 비단을 주도록 분부했다. 무당은 무수히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갔다. 호돌은 귀국하자, 비정부의 아들 비표를 자기 집으로 청하고 몽사와 무당에게서 들은 것을 말했다. 비표가 말했다.
"임금의 거동이 사리에 어긋나니 어찌 천명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진나라 주인은 바로 공자 중이인가 합니다."
호돌과 비표가 서로 앞날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섬돌에 닿는 발소리가 났다. 바깥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면서 문지기가 아뢰었다.
"진(秦)나라에 가셨던 비정부께서 돌아오사 지금 궁성에서 경과를 보고중이라고 합니다."
비표는 부친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호돌의 집을 나와 돌아갔다. 이야기는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 한편 비정부는 진나라 대부 냉지와 함께 예의로 보내는 패물을 실은 수레들을 거느리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비정부는 강성 교외까지 당도했을 때 비로소 이극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비정부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섣불리 들어갔다가 자기도 죽는 거나 아닐까. 그는 진나라로 다시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다. 강성엔 아들 표가 있다. 내가 진으로 달아나면 아들 표는 어찌되겠는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아무 결정도 못하고 주저하는 중에 마침 교외에 나온 대부 공화와 만났다. 그들은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눴다. 비정부는 이극이 죽음을 당한 연유를 물었다. 공화는 그 동안에 있었던 자초지종을 일일이 말했다. 비정부가 물었다.
"내가 강성으로 들어가야겠소, 타국으로 달아나는 게 좋겠소?"
"죽은 이극과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이 다 남아 있소. 나 같은 사람도 살아 있질 않소. 상감은 이극 한 사람만을 죽이고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 두는 모양이오. 더구나 그대는 진나라에 사자로 갔다왔으니 그 동안에 일어난 일과 관련될 것이 없소. 만일 미리 겁을 먹고 타국으로 달아나면 이건 스스로 자기 죄를 만들고 탄로시키는 것밖에 안 되오."
비정부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수레를 재촉해서 강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궁성에 들어가서 진나라에 갔다온 보고부터 마치고, 다시 진나라 대부 냉지를 데리고 진혜공 앞에 가서 국서와 예물을 바쳤다. 진혜공이 진(秦)나라 국서를 받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 진(晋)과 진(秦) 두 나라는 인척간입니다. 그러니 우리 두 나라는 네 땅이니 내 땅이니 하고 다툴 처지가 아닙니다. 모든 대부가 각기 자기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음이라, 과인이 어찌 귀국의 땅을 굳이 얻어 귀국의 모든 충성스런 대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야 있으리오. 다만 과인이 앞으로 천하사를 생각하는 바 있으니 귀국의 여이생과 극예 두 대부와 만나 서로 간곡히 의논하고 싶소이다. 청컨대 일간 그들 두 대부를 보내어, 이 과인의 간절한 뜻을 위로해 주기 바라오. 지난날 귀국이 과인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에 대한 지권을 돌려보냅니다. 앞으로 우리 두 나라가 더욱 가까이 우호 친선을 맺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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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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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춘발이를 구하라!
지난 어린 한 시절의 추억을 고백함에 있어 이 방송으로 자칫 개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있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시효가 지난 사건으로 이해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방송으로 오래 전부터 연락이 두절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기억됩니다. 그 시절엔 어느 곳이나 비슷했습니다만, 제 고향인 안동에서는 특히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예절교육이 대단했습니다. 학교에서의 선생님은 곧 염라대왕이요, 저승사자였습니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 속의 수많은 선생님들 중 그 시절부터 유행했던 '슈퍼맨' '베트맨' 보다도 더 대단하셨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별명이 임꺽정이었는데 처음엔 이름이 비슷해서 붙였지만, 서서히 그 명성이 이름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3학년 2학기가 되던 때 별안간 우리반의 담임이셨던 우영방(우리의 영원한 우방- 실제 이름임) 선생님이 개인사정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임꺽정 선생님이 저희반의 담임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우리반을 버린 것입니다. 대책회의는 반장을 중심으로 무수한 의견이 제시되어 반 전체가 참가하는 투표에 부치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수업거부!'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대학부속 초등학교로 사립의 교육분위기가 매우 강했으며, 당시에 이미 선거와 교내 서클 등이 장려되어 일반화 되어 있었고, 학교 일정및 행사는 학생들의 의견과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임꺽정 선생님은 별명 그대로 임꺽정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우리의 사정을 아셨는지 2학기가 시작되던 첫날이었습니다.
"만나서 반갑다. 내일 임시시험을 보겠다. 이제까지 너희들의 영원한 우방이었던 우선생님의 노고에 흠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히기 바란다. 만약 80점 이하인 경우는 '개별면담'을 하겠다."
우린 순식간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공중분해였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우려했던 '개별면담.' 결코 들어서도 보아서도 안될, 그 전설적인 '개별면담'을 그것도 2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에 듣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선배들이 이슬 같은 눈물로 대신했다는 전설. 교내에 구전되어 온 '영남선'의 전설 주에 가장 비인간적인 무시무시한 전설이 바로 임꺽정의 '개별면담'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없엇습니다. 집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과는 물론 저는 80점 이상으로 '개별면담'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인 박충신(별명 춘발)이는 50점으로 '특별면담' 코스까지 가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춘발이는 거의 삶을 포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했스빈다.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장기 입원하는 방법,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장기 결석하는 방법, 전학가는 방법 등 많은 의견이 있었지만 실행가능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지난해 임꺽정 선생님의 '개별면담'에서 면죄를 받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쁜 시험성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이미 종아리를 맞은 후 '개별면담'을 하게 되었고, 종아리의 멍자국을 본 임꺽정 선생님은 너그러이 대화로 면담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3, 4 명이 더 모여 '춘구위(춘발이 구제 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방법을 찾아보니 간단했습니다. 싸리비를 꺽고, 적당한 몽둥이를 구해 우리집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춘발이를 패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무리 때려도 멍이 들지 않았습니다. 춘발이는 어금니를 물고 참았습니다만, 조금 빨간색으로 상기될 뿐 자국이 남지 않았습니다. 춘발이는 가끔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참아야 했습니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멍자국은 남지 않기에, 우리는 좀 비위생적인 방법이지만 멍자국이 남아야 할 춘발이의 종아리를 빨기 시작했습니다.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고 또 빨았습니다. 때리고 빨고, 또 때리고 빨고, 하지만 결국 멍자국은 생기지 않았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춘발이는 우리의 의리에 울었고, 아파서 울었습니다. 다음날 결전의 면담이 춘발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춘발이는 복날 끌려가는 뭐 마냥 그렇게 끌려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임꺽정 선생님의 눈이 커지면서 부들부들 떨고 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춘발이의 종아리가 온통 피멍으로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전날 '춘구위'가 춘발이를 위해 실시했던 공작이 하루가 지난 당일날 표면화되면서 서서히 그 결과를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인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춘발이의 종아리는 단순히 멍자국을 넘어서 무슨 전쟁에서 입은 상처같았습니다. 임꺽정 선생님의 첫말씀이 "춘발이, 니네 부모가 친 부모 맞나? 혹시 웬수지간 아이가?" 학교가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양호실로... 교무실로... 한동안 떠들썩하더니, 결국 일은 더욱 커졌습니다. "공범자 나와! 아니, 주범자 나와!" 의리없는 놈. 집으로 전화해서 부모와 면담을 하겠다는 임꺽정 선생님의 말에 춘발이는 자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날 냉장고에서 열이 나도록, 장마에 먼지 나도록 특별면담 코스를 거쳐야 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동창들과 함께 자리를 하는 자리에서 앞의 사건으로 혼절이 되도록 웃어 봅니다만, 춘발이라는 친구는 4학년 그때 서울로 전학을 간 뒤 소식을 알 수 없답니다. 그리고 임꺽정 선생님은 현재 저희 고향인 모초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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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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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연현편" (1920~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 전문 수료. 한양대 문리대학장, 문인 협회 이사장 역임. 초기에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평론과 수필을 주로 썼다.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여 좌익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바 있으며 순수 문학의 옹호에 공적을 세웠다. 후기에는 현대 문학사의 정립에 힘썼으며 엄청난 양의 평론을 통하여 정력적인 평론가로 정평을 얻었다.
친절한 사람들
1971년 여름, 나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 팬 대회에 참석하게 된 기회에, 약 40일 동안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다 알다시피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신생 공화국인 에이레의 수도다. 갈 때에는 자유 중국의 타이베이로 해서 홍콩,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에 들렀고, 올 때에는 미국에 들러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시카고를 돌아 보고, 일본의 도쿄를 거쳤다. 그 중, 자유 중국과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퍽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같은 아시아 국가들일 뿐만 아니라, 전에도 가 본 일이 있기 때문에, 해외 여행이라는 데서 오는 흥분이나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선 적잖은 흥분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아니, 흥분보다 불안이 앞섰다고 하는 거시 옳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을 느낀 데엔 몇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언어 때문이었다. 외국을 여행할 때에는 그 나라의 말을 잘 할 수 있거나 혹은 비교적 널리 쓰이는 외국어를 한둘쯤 알아야 의사 소통이 이루어질 텐데, 나는 외국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연히 벙어리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건강 때문이었다. 기후와 음식이 다른 여러 나라를 한 달 이상이나 여행한다는 것은 웬만큼 건강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잘 앓는 병약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다.
다음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안락한 호텔에 들고, 영양 많은 음식을 사 먹으며 여행할 만큼 충분한 여비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헐한 호텔과 값싼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40일 동안이나 낯선 여러 나라와 도시를 큰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대해 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친절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마치고 통관 구역에 들어가,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호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비행기 회사측에 로마의 호텔 예약을 부탁했었는데, 내가 홍콩을 떠날 때, 아직 로마에서 연락이 없으니 호텔 예약은 안 된 것으로 알고 떠나라는 전화를 받았었기 때문에, 나의 호텔 걱정은 퍽 큰 것이었다. 그 때, 내 앞에 와서 '미스터 조'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로마의 세관원이었다. 그렇다고 하니까, 편지 한 통을 내주었다. 우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아마 로마에 사는 사람이 인편으로 보낸 것인 듯한데, 생전 처음 와 보는 낯선 이국 땅,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로마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필시 잘못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뜯어 보았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그것은 내가 탄 비행기 회사의 로마 지사로부터 나에게 온 것으로, 호텔이 예약되었으니 그리 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홍콩을 떠난 후에 호텔이 예약되었기 때문에, 내가 로마에 내려 비행장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것을 알리려고 비행기 회사측에서 온갖 비상수단을 다 썼을 것으로 추축되었다. 비행장의 출입국 수속이 진행되는 장소는 출입금지 구역이므로, 허가된 사람이 아니고는 출입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를 찾아온 한 외국인에게 편지 한 통을 전하기 위하여 회사측과 세관측이 합동 작전을 벌인 셈이다.
다음은 그 호텔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아까 그 세관원에게 떠듬떠듬 그 방법을 물었다. 그는 어디서 로마 시내의 지도를 한 장 가지고 오더니, 내가 가야 할 호텔의 위치에다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는 1. 비행장에서는 택시를 타지 말아라, 2.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라, 3. 테르미니 역에서 호텔까지는 택시를 타라 하고 적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영어를 퍽 잘 하는 것 같은데도, '택시를 타지 말아라' 같은 말은 '노 택시'와 같은 식으로 적었다. 이는 자기를 표준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잘 짐작할 수 있도록만 적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가 준 지도와 쪽지를 가지고 호텔까지 잘 갈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택시를 타면 호텔까지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왜 그 세관원은 택시를 못 타게 했을까? 나는 그 까닭을 곧 알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시내까지는 거리가 퍽 멀고, 택시 요금도 매우 비싸기 때문이었다. 그 세관원은 나에게, 호텔까지 가는 방법만이 아니라,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 준 것이다.
나는 이 일로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영상이 선명하다. 이러한 친절은 물론 이탈리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블린에서 회의를 할 때였다. 회의장에서는 통역해 주는 분도 있고, 우리 대표 중에 외국어를 썩 잘하는 분도 있고 해서 별 불편이 없었으나, 혼자 거리에 나가거나 또는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할 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땐 어디선가 학생들이 몰려와 친절하게 도와 주었다. 어떤 때는 내가 가려는 목적지까지 동행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건 사는 일까지도 도와 주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더블린의 그 친절한 학생들을 생각한다. 나의 눈앞에 떠오르는 더블린은 언제나, 명랑한 얼굴과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 주던 그 어린 학생들의 모습으로 꾸며질 것이다.
시카고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혼자 비행장에 내렸는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마중 나오기로 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전보 연락이 잘못된 까닭이었다. 나는 낯선 비행장 한구석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때었다. 은발의 한 노신사가 다가와 쉬운 말로 사정을 묻고,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들자고 하면서 목적지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노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죄스러웠으나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었다. 나는 아마도 시카고란 말을 들으면 그 은발의 노신사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혹은 미국의 어느 은발의 노신사를 만나면 시카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파리에서는 언어가 더욱 통하지 않아 버스나 지하철을 잘못 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파리의 시민들은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좀 허비하는 일은 있었지만, 목적지를 못 찾아 크게 낭패를 본 일은 없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보다도, 친절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생각이 늘 앞선다. 이 밖에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즐거운 여행을 한 경험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나라의 관리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인사들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그리고 이름 없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러했고, 특히 어린 학생들이 그렇게 친절했다. 그들의 조그만 호의나 친절은 나에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해 주었고, 그들이 사는 나라나 도시에 대한 좋은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다.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외국 사람들이 근래에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우리말을 잘하고 우리 나라의 지리에 밝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개는 우리말을 못 하고 우리 나라 지리에 어두운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불리한 조건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모든 사람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름없이 외국인에게 친절히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외국인을 친절히 대하자는 말을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인정의 아름다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민 외교의 한 구실까지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 사람에 대한 친절은 경우에 따라선 나라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친절은 외국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다.
우리 모두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인정을 베풀어 줌으로써 세계에 우리 나라의 인상을 감명 깊은 것으로 심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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