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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7호 2022.12.11 일요일 (음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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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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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질질 끌면서 하는 자살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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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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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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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의 알리바이 - 김수영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
하룻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먹들먹한다
꾸루룩거리는 배에는 푸른 색도 흰 색도 敵이다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性도 倫理도 약이
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
여름이 끝난 벽저쪽에 서 있는 낯선 얼굴
가을이 설사를 하려고 약을 먹는다
性과 倫理의 약을 먹는다 꽃을 거두어들인다
文名의 하늘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나는 지금 규제(規制)로 詩를 쓰고 있다 他意의 規制
아슬아슬한 설사다
言語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性의 倫理와 倫理의 倫理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이행이다 우리의 行動
이것을 우리의 詩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1966.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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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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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록망촉(得롱望蜀)
得:얻을 득. 롱:땅 이름 롱. 望:바랄 망. 蜀:나라 이름 촉.
[준말] 망촉(望蜀). [동의어] 평롱망촉(平롱望蜀), 망촉지탄(望蜀之歎). [유사어] 계학지욕(谿壑之慾), 차청차규(借廳借閨), 거어지탄(車魚之歎), 기마욕솔노(騎馬欲率奴). [참조]계륵(谿肋). [출전]《後漢書》〈光武記〉〈獻帝記〉.《三國志》〈魏志〉
농을 얻고 나니 촉을 갖고 싶다는 뜻. 곧
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
② 한 가지 소원을 이룬 다음 또다시 다른 소원을 이루고자 함을 비유.
③ 만족할 줄 모름의 비유.
①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赤眉之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농서(롱書:감숙성)에 외효, 촉(蜀:사천성)에 공손술(公孫述), 수양:하남성)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안휘성)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산동성)에 장보(張步)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중 유분자.유양.이헌.공손술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修好)하고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년(32), 광무제외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아들 외구순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롱望蜀].’”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년(37),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을 이루었다.
② 광무제 때로부터 약 200년 후인 후한 헌제(獻帝:189~226)말, 즉 삼국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의 일이다. 헌제 20년(220), 촉을 차지한 유비(劉備)가 강남의 손권(孫權)과 천하 대사를 논하고 있을 때 조조(曹操)는 단숨에 한중(漢中:섬서성 서남쪽 한강 북안의 땅)을 석권하고 농땅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조조의 명장(名將) 사마의[司馬懿:자(字)는 중달(仲達),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의 할아버지]가 진언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진격하면 유비의 촉도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만족할 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농을 얻었으니 촉까지 바라지 않소.”
이리하여 거기서 진격을 멈춘 조조는 헌제 23년(223), 한중으로 진격해 온 유비의 촉군(蜀軍)과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계륵(鷄肋)’이란 말을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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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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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1장 재편되는 북방
2. 진목공의 꿈
두씨의 노래
백리해와 건숙을 기용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게 된 진목공은 타국에서 더 많은 인재를 등용할 생각이었다. 이에 공자 칩은 서걸술이 어진 것을 알고 천거했다. 진목공은 서걸술을 등용했다. 백리해는 전부터 진(晋)나라 사람인 유여가 큰 경륜을 품은 인물이란 걸 들었으므로, 공손지에게 그의 현재 상태를 물어봤다. 공손지가 대답했다.
"유여는 진나라에 있을 때 불우했습니다. 지금 서융에서 벼슬을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리해는 자신의 과거가 생각나 너무나 애석해 하며 거듭거듭 탄식했다. 한편 백리해의 아내와 아들은 그 후 어찌 되었는가? 백리해의 아내 두씨(杜氏)는 남편이 출세의 길을 찾아 타국으로 떠난 뒤 날마다 베틀에 올라 베를 짜서 팔아 생계를 이으며 세월을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그 뒤 흉년을 당하자 이제는 살아갈 길이 아득했다. 두씨는 어린 아들의 손목을 이끌고 타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별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타국 땅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며 잡일을 하여 입에 풀칠을 하거나 걸식을 했다. 뜨내기 신세로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던 그들은 마침내 진(晋)나라로 들어갔다. 두씨는 빨래꾼이 되어 그날 그날을 유지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시(視)며 자(字)는 맹명(孟明)이었다. 이 땐 아들 시도 장성한 연후였다. 그러나 시는 날마다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사냥이나 하고 씨름이나 할 뿐 도무지 생계를 위해 힘쓰려 하지 않았다. 두씨는 누차 아들을 타일렀으나 아들은 도무지 모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백리해가 진(奏)나라 재상이 되자, 두씨는 비로소 남편 이름을 소문에 들었다. 그래서 두씨는 아들을 데리고 진나라로 갔다. 마침내 두씨는 거리에 나가서 재상이 수레를 타고 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유심히 봤다. 그러나 수레의 규모도 대단하려니와 수많은 구종배들이 감싸고 가는지라 수레 속에 탄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수레 속의 백리해는 설마 아내가 길거리에 서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궁으로 들어갔다. 그 후, 때마침 정승의 부중에서 빨래하는 여자를 모집했다. 두씨는 그 기회에 빨래하는 여자를 자원하여 남편의 부중으로 들어갔다. 부중에 들어간 두씨는 다른 여자들보다도 부지런히 일했다. 부중 사람들은 나이도 많은 두씨가 남보다 배나 일을 잘한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두씨는 한 번도 백리해와 직접 얼굴을 대면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백리해가 당상에 앉아 있었고, 악공들이 당 아래서 음악을 연주중이었다. 두씨가 부중 사람에게 말했다.
"이 늙은이는 음악을 잘 압니다. 원컨대 한 번만 저 악공들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부중 사람은 두씨를 데리고 가서 악공들에게 소개했다. 그 중 악공 한 사람이 물었다.
"할머니는 전에 무슨 악기를 배웠나요?" 두씨가 대답했다.
"거문고도 하며 노래도 부릅니다."
악공은 두씨에게 거문고를 내줬다. 두씨가 거문고를 안고 탄주하니 그 소리가 참으로 애절하고 처량했다. 악공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악공들은 두씨가 거문고를 마치자 노래를 청했다.
"이번엔 노래를 해보세요, 할머니." 두씨가 대답했다.
"제가 이 곳에 온 뒤로 한 번도 노래를 부른 일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상군께 말씀드려 당 위에 올라가서 노래하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악공이 당 위에 올라가서 그 뜻을 백리해에게 품했다. 백리해는 머리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두씨는 당 위에 올라가서 기등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두씨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노래를 불렀다.
백리해. 염소 가죽 다섯 장이여
이별하던 그 옛날을 잊으셨는가
알 밴 암탉을 삶고 양념을 찧고
문짝으로 밥을 끓이던 그날을
오늘날 부귀하시니 나를 잊으셨는가
백리해. 염소 가죽 다섯 장이여
아버지는 좋은 음식을 먹건만
자식은 배가 고파서 우는도다
남편은 좋은 비단 옷을 입고 있건만
아내는 품삯받고 빨래하는 천한 몸일세
슬프다. 부귀하시니 나를 잊으셨는가
백리해. 염소 가죽 다섯 장이여
지나간 그 옛날, 그대 떠날 때 나는 울었소
지금 그대는 높이 앉았건만 나는 섰으니 슬프도다
오늘날 부귀하시니 나를 잊으셨는가
백리해는 그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두씨를 자기 앞으로 불렀다. 틀림없는 자기 아내였다. 자나깨나 잊지 못하던 아내였다. 마침내 백리해와 두씨는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 겨우 울음을 진정하고 백리해가 물었다.
"우리 아자(兒子)는 어디 있소?"
두씨가 흐느껴 울면서 겨우 대답했다.
"마을에서 사냥을 하고 있습니다."
백리해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자기 아들을 불러오게 했다. 이날, 백리해는 여러 해만에 늙은 아내와 장성한 아들과 만났다. 진목공은 백리해가 처자와 만났다는 걸 듣고서 곡식 백 수레와 황금과 비단 한 수레를 그들에게 하사했다. 이튿날 백리해는 아들 백리시(百里視)를 데리고 궁에 들어가서 진목공께 사은했다. 진목공은 백리시에게 대부 벼슬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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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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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마지막 기도
-요산 김정한 선생님 고별식에서
기도하는 이에게
항상 산이 되어 오시는 생명의 주님
산이 좋아
그 이름도 산이라 하고
한평생 고고한 지혜의 산으로 살다
이제 마침내
깊고 그윽한 산이 되어
여기 누으신 분
요산, 요셉 선생님을
흠도 티도 없는 당신의 그 나라에
받아 주십시오
낙엽 타는 향기 속에 저무는 11월
그분이 이승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함께 괴로워하셨던 주님
임종의 머리맡에서 함께 기도하던 저희에게
소리의 언어 대신 침묵의 눈물로
마지막 작별을 고하던 고인의
미처 쏟아내지 못한 눈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회한도 받아 주십시오
이별의 슬픔 속에
할말을 잃은 이들에게
끝없는 강이 되어 오시는 구원의 주님
길고 긴 낙동강을 고향의 벗으로
한평생을 정의의 강이 되어 살았기에
그만큼 괴로움도 길었던 당신의 사람
거룩한 의인 성요셉처럼
어떤 시련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과 인내와 용기로
의연하고 꿋꿋하게
진리와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이 시대의 의인, 요셉 선생님을
아름다운 하늘나라에 받아주십시오
어둠이 없는 빛의 나라
미움이 없는 사랑의 나라
절망이 없는 희망의 나라에서
편히 쉬게 하여 주십시오
지상에 두고 가는 가족, 친지들과
더 깊이 결합하여 함께 머무는
환한 빛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진정 당신이 계시기에 죽음이 끝이 아님을
오늘 더욱 새롭게 알아들으며
별처럼 빛나던 당신의 사람
저희의 가장 소중했던 한 분을
이제 영원히 당신께 봉헌합니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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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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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이삭주이
책을, 이것저것 주워 읽어 온 데서나 또 번역을 해 온 가운데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상스레 뇌리에 남아 있는 말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술인이나 그 밖의 사람이 종신하는 자리에서 남긴 말에 관한 것들이 그것이다.
오랜 동안 병석에서 심신이 쇠약해진 환자이고 보면 방 안의 채광이 너무 밝아도 정신적 피로를 가져오기 쉽다. 이럴 때는 창문의 차광막을 내리어 채광을 조절하게 된다. 괴테가 종신하는 마당에도 이렇듯 커튼이 내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꾸만 의식이 흐려져 가고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문득 자기의 주변이 점점 어두워져 오는 것만 같아졌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커튼을 좀 올려요. 빛이 좀더 들어오게!' 이렇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일렀던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대시인의 임종을 대시인다운 임종의 말로 미화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커튼을 좀 올려요. 빛이 좀 들어오게!'를 '좀더 빛을! 좀더 빛을!'으로, 평범한 아무렇지도 않은 산문조의 말을 운문 격조로 다듬어 고친 것이 아닐까, 이것은 어느 외국의 평론가도 꼬집어댄 바 있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 비슷한 종신의 장면으로는 O. 헨리의 경우를 또 들 수 있다. 그는 한평생을 두고 뉴욕시를 그렇게도 좋아한 사람이 또 없었을 만큼 사랑했다. 그러한 그가 임종이 가까워 오자 조용히, '차광막을 올려요. 뉴욕 시를 내다보게. 어두운 데서는 죽고 싶지가 않아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괴테의 경우처럼 O. 헨리의 임종 장면에도 차광막이 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끌어올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O. 헨리의 경우는 대시인이 아닌 산문가다운 격조로 임종의 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점은 두 작가가 다 같이 죽음에 임하는 자세가 초연하고 드디어 오고야 말 것이 왔다는 달관의 경지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탐험가 스코트의 마지막 일기를 보면 감히 범인들이 침범하지 못할 인간의 숭고한 존엄성을 엿볼 수 있다.
1911년 아문센은 스코트를 앞지르기 위해 북극으로 탐험길을 떠나는 것으로 위장하고 실은 남극으로 향했던 것이다. 스코트가 사력을 다해 간신히 남극의 극지에 도달했을 땐 그의 눈앞에는 노르웨이의 깃발이 휘날리며 서 있었다. 순간 모든 걸 알게 된 스코트에게는 좌절감이 밀어닥쳤다. 그러나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영하 37도의 눈보라 속으로 죽음의 귀로에 접어들었다. 일행 4명 중에서 오트스란 대원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일행의 행진을 지체시킬까 염려하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노라, 한 마디 남기고는 텐트 밖으로 세 사람도 북극의 미이라가 됐지만 그들 누구도 당황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한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 보려 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몸이 점점 약해져만 가고 있다. 최후가 머지않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상 더 일기를 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스코트는 조용히 붓을 놓았다. 이것은 달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력을 보여 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의 하나이다.
초년에는 귀족처럼 화려한 생활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렘브란트는 부인을 잃은 뒤를 이어 재물까지 잃어버리고는 구걸하다시피 하는 생활의 구렁창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림에 대한 정열만이 사랑과 재산을 앗아간 그의 여생을 지탱해 주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극에서 극으로의 희비고락에 찬 일생을 마치는 마당에 그는 '공허하고도 또 공허하다. 모두가 공허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그가 살아 온 인생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내재성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우선 외적인 생활과 싸웠고 자기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새로이 구축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발견했을 땐 세상은 모두가 '공허'한 것으로 느껴졌으리라고 본다.
이와는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임종에 인생을 말한 작가가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헵벨이다.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느 작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빈과 갖은 고난 속에서 작품 제작에 목숨을 걸었건만 늘 거지와 같은 구차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만년에야 "니벨룽겐"(1862)이란 대작으로 실러 상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미 종신이 가까웠던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술이 있을 때는 술잔이 없고 술잔이 있을 때는 술이 없더라!'고. 그처럼 인생의 무상과 부조리를 실감하고 개탄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희극은 끝났다!' 이것은 일생이 불운으로 가득 찬, 단 한 번만 있었던 결혼의 기회마저 잃어버린, 그런 생애를 마치는 마당에 친지 하나 없이 외로이 가는 베토벤의 마지막 말이었다. 느끼는 자는 울고 깨달은 자는 웃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베토벤의 '희극'은 그가 가장 잘 웃는 최후의 웃음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임종의 짧은 말들은 무엇인가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는 바 크다고 여겨진다. 그것들은 여유 있게 도사리고 앉아 금언이나 좌우명을 쓰는 마음과는 달리 인생이 종착하는 자리에서 우연이 아니라 그들에게 한평생 축적되었던 체험적 진실의 토로이기에 더욱 의의가 크다. 이러한 말들이 지니는 무게는 금언이나 좌우명보다도 우리들을 한층 일깨워 주는 힘이 크고, 또 이러한 말들을 수집 연구해서 집대성하는 일도 결코 무의미한 노력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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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 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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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3부 국어공부, 무엇이 문제인가
국어 공부, 어떻게 해 왔나(1/2)
우리가 지금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눈으로 읽고 글자로 쓰고 있는 우리말의 참 모습을 제대로 알아 내려면 그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터이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 공부란 것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대단히 좋은 방법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말하고 읽고 쓰고 있는 말이 결국 국어 공부를 해서 익힌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국어 공부란 것을 대충 살펴보기로 한다. 국어 공부는 국어 교과서로 하도록 되어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을 읽고 쓰고 외우고, 교과서에서 하라는 문제를 푸는 것이 국어 공부의 거의 전부다. 따라서 국어 공부를 어떻게 해왔는가를 알려면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글이 어떤 말로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국민학교 1학년 국어책(1-1 말하기 듣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온다.
-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하여 봅시다.
- 몸짓과 표정으로 생각을 나타내어 봅시다.
- 친구가 말한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비교하며 들어 봅시다.
여기 이렇게 나오는 장소 표정 비교한다 와 같은 말들은 중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날마다 보통으로 쓰는 말이라 여길 터이지만, 이제 막 학교에 들어온 초등학생들에게는 어렵고 맞지 않는 말이다. 장소 는 곳 이라고 해야 되고, 표정 은 낯빛 이라든지, 이 글에서는 얼굴 이라고만 해도 된다. 비교하며 는 견주며 나 대어보며 라 해야 된다. 표정 이란 말은 또 여기서는 잘못 쓴 말이기도 하다. 몸짓 도 표정인데 몸짓과 표정으로 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어쩌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 같다. 좀 어려운 말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국어 공부가 아닌가 하고. 사실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어려운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을 국어 수업이라고 생각해 왔고, 학생들은 모두가 어려운 말 배우는 것을 국어 공부라 알고 있고, 그래서 모든 어른들이 국어 공부라면 당연히 어려운 한자말과 그 한자말로 된 문장을 읽어서 풀어 내는 공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이래서 우리말이 한자말, 곧 중국글자말에 밀려나서 버려지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다.
장소 보다 곳 이 낫고, 표정 보다 낯빛 이 더 깨끗한 우리말이고, 비교한다 보다 견준다 든지 대 본다 가 더 좋은 우리말이 되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대학생도 마찬가지다. 농민과 노동자뿐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도 신문기자도 학자도 대학교수도 문필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국어 시간에 교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 벌써 어른들이 모두 쓰고 있어 안배울 수 없다면 장소 표정 비교 란 한자말도 익혀야 하겠지. 그러나 이런 말을 배우기에 앞서,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집에서나 마을에서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말들 - 이곳, 저곳, 그곳 이라든가, 얼굴 이라든가 대 보다 견준다 라는 말들 -을 다시 글자로 읽게 하고 글로 쓸 수도 있게 하여 자기가 어려서 부모와 이웃 사람들한테서 듣고 배운 말이 무식한 사람들이나 쓰는 부끄러운 말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써야 할 우리말이란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낯빛 이란 말을 새로 배워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은 아이고 어른이고 모조리 비교한다 비해서 비교적 이렇게만 쓰는데, 이것은 우리말을 가르치도록 하지 않는 잘못된 국어 교과서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쫓겨난 대 본다 견준다 란 우리말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차츰 죽어가고 있다. 내 생각에는 초등학교 1학년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들, 대학생들, 그리고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어른들까지도 누구 키가 더 큰가, 어디 한 번 대 보자 란 동요부터 새로 읽어서 우리말을 배워야 되지 않겠나 싶다. 글을 쓰는 어른들은 거의 모두 내 말을 비웃겠지만 나는 결코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 다음 낱말을 사용해서 짧은 글을 지어 봅시다. (초등학교 1-1 쓰기)
- 문장을 바꾸어 봅시다. (같은책)
여기 나온 사용해서 도 써서 로, 문장 도 글 로 해서, 이런 쉬운 우리말부터 먼저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그림의 내용과 우리가 겪은 내용을 관련지어 써 봅시다. (국민하교 1-2쓰기)
여기서는 내용 과 관련지어 가 문제다. 이런 말을 안 쓰고도 얼마든지 된다. 이 지시문은 그림을 보고, 자기가 겪었던 일을 생각해서 써 봅시다. 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알기 쉽다. 이번에는 6학년 책을 보자.
-말소리의 바뀜에 주의해서 정확하게 발음하여 보자. (6-1 말하기, 듣기)
이것을 쉬운 우리말법으로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말소리가 바뀌는 데 주의해서 바르게 읽어 보자.
- 길게 소리나는 글자의 발음에 주의하면서 위의 문장을 정확하게 읽어보자.(같은 책)
이것은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 좋다.
길게 소리나는 글자의 발음에 주의하면서 위의 문장을 정확하게 읽어 보자. (같은 책)
여기 나오는 확인하여 보자 는 공연히 어렵게 쓴 말이다. 알아 보자 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
-감동적인 부분을 찾아가면 글을 읽어 보자. (6-2읽기)
이렇게 무슨 -적 라는 말은 일본글을 따라서 쓴 말이다. 감동을 받는 하든지 감동스런 이라고 쓰면 된다. 그런데 이 지시문에서, 글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이 감동을 주는가 하고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면서 읽으라는 말은 잘못되었다. 글을 그런 태도로 읽어서는 영 재미가 없고,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되고, 또 아무도 그런 태도로 읽지는 않는다. 빈 마음으로 읽는 가운데 들어오는 감동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따라서 이 지시문은 이렇게 고쳐야 할 것이다.
읽고 난 다음에 감동을 받은 대문이 어디인지 말해 보세요.
- 우리 글자를 처음부터 한글 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당시에는 훈민정음 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서 정음 이라고도 하였다. 또 그후에는 언문, 암클 등으로 부르기도 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한글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6-2 읽기)
이 글에 불렀던 부르기도 부르게 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말은 모두 말했던 말하기도 말하게 라고 고쳐야 한다.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한글을 두고 하는 말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한글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지 한글아! 하고 한글을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른다는 말을 잘못 쓰는 것도 일제시대부터 일본말을 따라가 우리 글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른다는 말보자 불린다 는 말을 또 더 많이 쓰고 있다. 이 밖에 당시 는 그때 로 써야 하겠고, 등으로 는 따위로 라고 해야 될 것이다.
-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우리말을 있었지만, 그 말을 적는 우리 고유의 글자는 없었다. (같은 책)
같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이라도 한글을 만들기 라 하지 않고 한글이 만들어지기 라고 하여 움직임을 입는 꼴로 쓰는 것, 이것이 또 일본말법 따라가는 짓이다. 교과서까지 이렇게 되어 있으니 우리말이 병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글에 나오는 고유의 는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니 없애는 것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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