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79호 2022.10.21 (음 9.26)
|
|
글나눔 → 오늘의 어록
|
|
|
나는 총칼을 든 10만 대군보다 한 장의 신문을 더 두려워한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
글나눔 → 말글
|
|
|
국가 사전을 다시?(2)
지난주 칼럼을 보고 <미친 국어사전>, <국어사전 혼내는 책> 등으로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를 속속들이 파헤쳐온 박일환 선생님이 댓글을 다셨다. “국가 사전을 없애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을 포기할 리 없다. 어차피 개정할 거면 방향이라도 제대로 잡고 숱한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국어사전이 가야 할 길’, ‘국어사전 이렇게 만들자’는 내용을 담은 책을 서둘러 내야겠다.” 하지만 차마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다시 에둘러 설득해본다.
산불이 휩쓸고 간 숲은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2000년 최악의 피해를 본 강원도 고성은 처음으로 피해지를 반씩 나눠 인공 조림과 자연 복원을 진행했다. 인공 조림지엔 소나무를 들입다 심었다. 자연 복원지는 숲이 스스로 복원하도록 놔두었다. 그랬더니 조림지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생물량을 축적해 20년이 지나니 ‘풀-떨기나무-작은키나무-큰키나무’로 이뤄진 전형적인 숲 구조를 갖췄다(정연숙 강원대 교수).
국가 사전은 인공 조림을 닮았다. 전쟁으로 전국이 민둥산이었을 땐 인공 조림이 산림녹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인공 조림은 불에 취약하고 자생력과 다양성이 떨어진다. 자연 복원은 산불에 대한 저항력뿐만 아니라 생물종 다양성, 수자원 보호, 토양 보전, 수려한 경관 등 공익적 가치가 더 높다.
옷깃을 여미며 제안한다. ‘사전 생태계, 어떻게 복원할까’란 주제로 토론회를 열자. 국립국어원, 사전 편찬 전문가, 글로 밥벌이하는 사람들, 시민 독자들이 모이면 좋겠다(그 자체로 생태적이겠군). 한겨레신문이 주최해주길.
국가 사전을 다시?(3)
일본의 <산세이도 국어사전>은 짧고 간결하며 객관적인 뜻풀이가 특징이다. 편집자 겐보 히데토시는 ‘사전은 거울’이라는 신념으로 일본어의 ‘현재’를 반영한 사전을 만들기 위해 당대의 낱말과 용례를 집요하게 수집한다. 잘못 쓰이는 것도 있는 그대로 실었다. 반면에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은 주관적이고 독특한 뜻풀이가 특징이다. 편집자 야마다 다다오는 ‘사전은 문명비판’이라는 신념으로 색다르고 장난기 넘치는 뜻풀이를 했다. 두 사람의 신념은 전혀 다른 성격의 사전을 탄생시켰고, 4천만부가 팔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사사키 겐이치,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사람들은 상상하지. 국립국어원에도 좋은 사전을 만들려고 평생 낱말들을 찾아 모으고 어떻게 뜻풀이할지 골머리를 앓는 학자들이 즐비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 없다!(있어서도 안 된다.) 국립국어원은 다양한 언어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국책연구기관’에서 탈피하여, ‘사업의 외주화’에 익숙해진 ‘사업관리기관’으로 승격하였다. 사업의 외주화는 말과 관련한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단, 예산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단기간에! 개정판 사전도, 지난 사전처럼 국립국어원이 ‘사업 관리자’가 되어 마치 조각보 만들듯이 전국의 언어학자 수백 명을 동원해 표제어 나눠주고 뜻풀이와 용례 제시를 맡길 것이다. 지난번에 7년이 걸렸는데, 이번엔 5년 만에 주파 목표. 놀라운 속도전이다.
‘편찬 지침이 있으니 문제없다’고? 물론이겠지. 다만, 말의 본질은 왜곡되고 사전엔 개성이 사라지며 말을 국가가 통제하는 꼴을 21세기에도 봐야 할 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
|
시나눔 → 우나라詩
|
|
|
말 - 김수영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寒氣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價値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告해야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無言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無誠意)를 자행하고 있다
이 無言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1964. 11. 16>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기화가거(奇貨可居)
奇:기이할 기. 貨:재물 화. 可:옳을?허락할 가. 居:살?있을 거.
[출전]《史記》〈呂不韋列傳〉
진귀한 물건을 사 두었다가 훗날 큰 이익을 얻게 한다는 뜻. 곧
① 좋은 기회를 기다려 큰 이익을 얻음.
② 훗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돌봐 주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림.
③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음.
전국시대 말, 한(韓)나라의 큰 장사꾼인 여불위(呂不韋:?~B.C.235)는 무역을 하러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에 갔다가 우연히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손자인 자초(子楚)가 볼모로서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이 장사꾼의 머리에는 기발한 영감이 번뜩였다.
‘이것이야말로 기화로다. 사 두면 훗날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여불위는 즉시 황폐한 삼간 초가에 어렵게 살아가는 자초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귀공의 부군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 멀지 않아 소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빈(正嬪)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소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귀공을 포함하여 20명의 서출(庶出) 왕자 중에서 누구를 태자로 세울까요? 솔직히 말해서 귀공은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소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소생에게는 천금(千金)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하여 환심을 사고, 또 널리 인재를 모으십시오. 소생은 귀공의 귀국을 위해 조나라의 고관들에게 손을 쓰겠습니다. 그리로 귀공과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로 책봉되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그대와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겠소.”
여불위는 자기 자식을 회임한 조희(趙姬)라는 애첩까지 자초에게 양보하여 그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뒤 재력과 능변(能辯)으로 자초를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초가 왕위에 오르자[장양왕(莊襄王)] 그는 재상이 되었으며, 조희가 낳은 아들 정(政)은 훗날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
|
글나눔 → 추천글
|
|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 로이드 웨인트럽, 빈 디 보나 프로덕션의 부사장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비디오'라는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에피소드는 마흔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도착한 테이프 가운데 단 1%만이 방송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약 4천개의 후보작을 필요로 했다. 우리들은 종종 이러한 할당된 몫을 미국의 2천 7백만 시청자들에게 특정한 주제, 이를테면 아이의 첫 번째 이발이라든지, 달걀을 깨는 재미있는 방법, 또는 스파게티를 먹을 것 등에 대한 적절한 테이프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는 주제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처음 곧 이빨 없는 노신사가 마지막 스파게티 줄기를 빨아들이는 것부터 아기가 생전 처음 먹는 스파게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천 종류의 테이프를 받아볼 수 있다.
시청자들은 지시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요구는 특정화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주제에 대해 보내달라고 하면 그들은 그렇게 해준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놔두면 시청자들은 스스로 판단하게 되고 판단하게 되고 결국 범위가 너무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대상을 받았던 참가자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비디오 테이프에 대해서 의심스러워했느지 아는가? 그들은 그 테이프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 2년 동안이나 그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가끔 그들이 인정받을 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정말 대단한 가치가 있다.
화성인을 자처하라 - 빈 디 보나 회사의 프로그램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 비디오>의 제작자
많은 텔레비전 리포터들은 단지 대본에 쓰여 있는 질문만을 하며 거의 대답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대답을 듣지 않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시청자들도 그 사람이 이야기한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렇게 된 것은 경제학자인 존 K.칼브레이스와 인터뷰했던 이후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초기 17세기의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개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부탁했다.
"이봐요, 저는 지금 막 지구에 착륙한 화성인이라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군요. 내가 화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그뒤로 나는 어려운 상황이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화성인'이라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나는 스포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사람들은 나의 인터뷰 방식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반시간짜리 방송원고를 가지고 로스엔젤스 풋볼팀 킥커를 만났다. 당시에는 축구를 하는 것처럼 공을 차는 선수인 프랭크 코럴이 활약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스포츠에는 깡통이었다. 얼마나 몰랐나 하면 지금까지 한 번도 프로 풋볼 게임에 가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프랭트씨,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 번 해봅시다. 어떻게 공을 차나요?"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라고 불리는 시리즈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87명의 올림픽 선수들과 인터뷰했고 계속 어떻게 하는 건지 한 번 보여 달라고 질문했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점들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누군가 멍청하다고 생각할까봐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는 것을 나는 모릅니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
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
|
|
관자요록
제10장 교만해지는 제환공
1. 수지 동맹
신후, 처형당하다
초군이 허성(許城)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이 소식은 곧 전해졌다. 마침내 모든 나라 제후는 허나라가 초군에게 포위됐다는 보고를 받자 과연 정나라를 버리고 허나라를 구원하러 갔다. 제환공이 이끄는 연합 군대가 정나라 포위를 풀고 서둘러 허나라에 당도했을 때 이미 초나라 군사는 자기 나라로 물러가고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한편 신후는 기세 좋게 정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이번에 정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을 다 자기 공로라고 자랑하며 은근히 벼슬과 상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문공은 지난날 신후가 제.초 우호 동맹을 맺을 때 제환공에게 아첨하여 호노 땅을 받은 것만 해도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후에게 벼슬과 상을 더 주지 않았다. 신후는 마음속으로 정문공을 깊이 원망했다. 그 이듬해 봄이었다. 제환공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치러 정성으로 향했다. 이 때 진(陳)나라 대부 도도가 정나라 대부 공숙에게 서신을 보냈다. 공숙이 도도의 서신을 펴서 읽었다.
- 신후는 전날 제.초 우호를 맺을 때 정나라를 팔아 제에게 아첨하고, 홀로 호노 땅을 상 받았으며, 이번엔 또 정나라를 팔아 초나라에게 아첨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귀국 군후로 하여금 배은망덕하게 하고 스스로 싸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렇듯 불행이 정나라 백성과 사직에까지 미치게 된 것은 누구의 탓입니까. 반드시 간악한 신후를 죽여야만 제나라 군사는 돌아가리이다.
대부 공숙은 그 서신을 정문공에게 가져다가 보였다. 정문공은 전날 수지 땅에서도 공숙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동맹하기 전에 달아나듯 돌아왔던 생각을 했다. 그 후 두 번이나 제군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정문공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정문공은 마음속 깊이 신후의 행동을 믿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문공은 단단히 마음을 다지고 분부했다.
"신후(申侯)를 불러 오너라."
한편 정문공의 부름을 받은 신후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을까 하고 기세 좋게 궁으로 들어갔다. 정문공이 꾸짖었다.
"너는 전날 과인에게 말하기를, 오직 남방의 초라야 능히 제나라를 당적할 수 있다고 거듭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 제나라 대군이 다시 우리 나라를 치고 있다. 초나라 구원병은 어데 있느냐?"
신후는 속으로 뜨끔했으나 그럴 듯한 구변으로 변명하여 이 어려운 국면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는 얼굴을 들어 무슨 말인가 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문공은 그에게 말 한마디를 해 볼 여가조차 주지 않고 좌우의 무사에게 분부했다.
"속히 저 놈을 끌어내어 참하여라."
구변 좋고 수단 많은 신후도 드디어 운이 다했다. 무사에게 끌려나간 신후는 얼마 후 머리만 나무 함 속에 담겨 들어왔다. 공숙은 신후의 머리가 들어 있는 함을 가지고 제환공에게 가서 바치며 간청했다.
"우리 주공께서 지난날 신후의 간특한 꼬임에 빠져 맹회를 배반하고 군후를 저버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주공께서 깊이 뉘우치며 간악한 자를 참하여 신으로 하여금 이렇듯 죄를 청하게 하셨습니다. 군후께서 우리의 허물을 살피시고 용서하소서."
제환공은 원래 공숙의 현명함을 알고 있던 터라 이를 용서해 줬다. 그 후 모든 제후는 제나라 영모 땅에 모여 회합하기로 했는데, 정문공은 주혜왕의 밀서 때문에 태도를 확고히 정하지 못하고 세자 화를 자기 대신 보냈다.
|
|
글나눔 → 읽어둘문학
|
|
|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피천득편"
피천득(1910~2007)
수필가. 시인. 영문 학자. 서울 출생. 중국 호강 대학 영문과 졸업. 하버드 대학 수학. 피천득은 한국의 서정적 수필의 대표자이다. 생활 속에서 명상의 표적을 찾아 내어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문장으로 그려 낸 그의 수필은 '수필의 전형'으로 지목되고 있다.
수필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 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 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 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읽는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띄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심정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룻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 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
|
글나눔 → 읽어 둘 문학
|
|
|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설명문 쓰기 -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까(2/4)
싱싱한 입말로 쓰고
지금가지 글의 내용을 정리해서 일곱가지로 나누어 적어 보였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몇 가지 판단을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이 학생이 아버지가 한 말이나 행동을 바로 그대로 적어 놓지는 않고 설명하듯이 써 놓았지만, 이 학생이, 아버지 이야기를 써 놓은 것이 사실이라고 믿어 진다. 그리고 이 글에는 쓰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날마다 끊임없이 꾸지람을 하고 잔소리를 한 것 같다. 그래서 이 학생이 요즘에 와서 공부 성적이 떨어진 까닭은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이렇게 아이를 괴롭히고 속을 밟아 놓는 말을 마구 하는데 어떻게 공부를 제대로 하겠는가? 이런 아버지 밑에서는 어떤 아이도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학생이 지금까지 이 정도라도 견디어 왓다는 것이 내가 보기로는 참 놀랍다. 정말 장하고 훌룡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아버지는 인권을 짓밟는 말과 행동을 자식 앞에서 태연하게 한다. 그래서 이 학생이 아버지를 비판한 말은 모두 정확하다. 아빠의 말은 100% 틀렸어요 란 말이 조금도 기분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생각으로는 해결하는 길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다. 이 학생의 성적이 나빠진 까닭, 지금은 학교에 가는 것조차 끔찍하게 되고, 살아갈 의욕을 잃어 버리고 아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잇는 것이 모두 아버지 때문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아버지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생쯤 되면 이제는 아주 어린 아이와는 다르니까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제 생각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 말씀은 무엇이든지 덮어놓고 따르니까 이렇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은 이 학생 혼자서는 어려운 것이다. 누가, 어느 어른이 도와주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하기로는 학교 선생님이다. 그리고 그 밖에 친척 어른이나 이웃 어른, 아니면 이 편지로 도움을 요청받은 쪽지 의 아저씨가 학생편이 되어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이렇게 힘들 때 부모님이 좀 도와주시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텐데... 하고 제 능력을 믿고 있는 이런 훌룡한 학생을 도와주지 못하고 기를 죽이고 열등감만 갖게 하는 아버지는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가, 그것을 충고해서 깨닫게 하는 일은 둘레에 있는 어른들이 할 일이다. 다른 도 한가지 길은 대학을 가지 않는 것이다. 이 학생의 고민과 절망, 잘못된 아버지의 행동, 이 모든 문제는 대학 진학만이 오직 한 가지 살아가는 길이라고 복 있는 데서 일어나는 비극이다. 과연 대학 진학만이 학생들의 갈 길인가? 대학 진학이 그런 끔찍한 비극을 겪고 목숨가지도 걸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인가/ 인생의 황금기에 온갖 잡동사니를 암기하는 일로 시달리고, 벗들은 죄다 적으로 만들고, 그래도 안되어 더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런 살벌한 경쟁에 이기고 살아 남아도 대개는 몸과 마음이 다 병들어 있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여전히 대학이요 대학만이 사람이 가야 할 단 하나 최상의 길인가? 나는 그렇게 안 본다. 그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뒤집혀진 관점이다. 대관절 대학을 나와서 모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취직을 못 해서, 대학원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다고, 외국에 가서 또 무슨 학위를 따 와도 놀고 있기가 예사다. 내가 갈이고 이런 실업자들을 가장 많이 구제해 주는 곳이 온갖 과외공부를 시키는 학원이다. 이래서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에서부터 책읽기 공부로 영어 공부로 시달리는 판이 되었다. 어느 초등 학교 1학년 아이는 과외를 열 다섯 군데나 다닌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와같이 잘못된 교육의 결과는 다시 또 더 잘못된 교육의 씨를 뿌리고, 이래서 우리 아이들의 불행은 끝없이 되풀이되고ㅡ 역사의 비극은 끊어질 줄 모른다.
그런 말은 꿈 같은 이상론이다. 그래도 대학을 가야 사람 노릇을 한다. 그래도 또 이런 말을 한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이렇게 되면 어떤 종교집단에서 보여주는 광신자들의 행태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른들이야 그와 같은 무더기 미친 증세에 빠지든지 말든지 젊은이들만은 제 정신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구나 고등학생들은 부디 자기 목숨 자기가 지켜서 아끼고 살아가라고 부탁하고 싶다. 사람의 목숨이란 얼마나 귀한가! 이 목숨을 오늘날에는 선생님도 부모조차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학은 고사하고 초등 학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 훌룡한 일을 한 보기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나는 대학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할 사람이라면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지. 그런데 오늘날 우리 나라의 학생들이 죽자 사자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거의 모두 취직 수단을 얻기 위해서다. 그 취직이란 것을 보장받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이 학생에게 더 자세한 말을 해줄 자리가 없기에 이만 쓰고, 부디 좀 자유스럽게, 자기 목숨과 삶을 귀하게 가꾸면서 살아가라고만 말하고 싶다. 끝으로 문장과 낱말에 대해 잠깐 적어 둔다.
이 글은 참으로 싱싱한 입말로 썼다. 하고 싶은 절실한 말을 그대로 쏟아 놓았기에 이런 좋은 글이 되었다. 그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쓴 글이 아니기에 유식해 보이는 말이나 말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학생이, 성적이 떨어졌다고 부모들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다만 두가지 잘못 쓴 말이 있다. 첫머리에 부쳤었는데 했었는데 라고 해서 과거형을 겹으로 쓴 것과, 좀 뒤쪽에 가서 땅바닥 쳐다보는 이라고 쓴 것이다. 발 밑에 있는 땅은 내려다보는 것이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이토록 싱싱한 말로 쓴 글에도 틀린 말이 나오는 까닭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말이 벌써 입말까지도 잘못된 글의 영향을 받아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