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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8호 2022.10.6 (음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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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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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배우는 길은 그 일을 하는 것. ― 에스토니아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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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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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코로나(2)
나는 ‘단계적 일상 회복’과 ‘위드 코로나’ 중에서 뭐가 더 좋은지를 묻지 않았다. 뭐가 더 친숙하냐고 물었다. 취향이 아니라 말의 습관을 물었다. 취향도 습관에서 나온다. 다만, 취향이나 호불호가 결과라면, 습관은 과정에 주목한다.
중국에는 ‘코로나’가 없다. ‘코로나’의 공식명칭은 ‘신형관상병독폐렴’, 줄여서 ‘신관폐렴’, 더 줄여 ‘신관’이다. ‘위드 코로나’도 ‘여신관병독공존’, 줄여서 ‘여신관공존’이다. 코로나와 공존하기. 아름답도다, 중국어.
우리는 왜 ‘코로나와 함께 살기’가 아니었을까? 범인 찾듯 ‘얼빠진’ 전문가나 정부 당국, 언론을 ‘잡아 족치는’ 게 편한 일이겠지만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나. 정치체제나 언어정책, 외국어를 대하는 언어공동체의 문화나 감수성, 언어와 문자의 차이 같은 것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내 말을 알아듣게 써야 한다. 문제는 이 당연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왔느냐다. 보통은 이랬다. 누군가 새로운 문물이나 현상을 소개하며 외국어를 그대로 쓴다. 언론에서는 그걸 그대로 쓴다. 정부 당국자들도 그걸 그대로 쓴다. 널리 퍼진다. 한글단체나 국립국어원에서 어렵다며 대체어를 제안한다. 안 바뀐다. 개탄한다.
비 그친 뒤 우산 펴기, 뒷북치기. 이미 퍼졌으면 낙장불입이다. ‘위드 코로나’도 ‘이른바’라는 말로 강등되었지만 계속 쓰이리라. 그럼 쉬운 말 쓰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찜질방에서 옷 갈아입히듯이, 중국처럼 아예 길목을 지켜 서서 말 고치기를 해볼 텐가?
'-다’와 책임성
뭐든 반복을 하다 보면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한 궁리를 할 때도 있고, 적당히 넘길 요령을 찾을 때도 있다. 나도 매주 돌아오는 칼럼에서 가끔 느껴지는 무료함을 어떻게 달래볼까 잔머리를 굴리곤 하지. 그 무료함의 맨 앞줄에는 문장을 끝맺을 때마다 어김없이 쓰게 되는 ‘-다’가 있다. ‘-다’를 피하는 몇가지 잔꾀. 동사가 아닌 단어로 끝맺기, 도치법 쓰기, 괜히 질문하기(‘분명한가?’ ‘않겠나?’), 다른 종결어미 쓰기(‘얼마나 정겨운지’ ‘먹으란 뜻이렷다’).
‘-다’를 쓰면 문장이 중성화가 되어 시공과 상하귀천을 넘나드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이야기일 것만 같다. 특히 글쓴이를 감출 수 있다. ‘단풍이 들었더라/들었다더라’라고 하면 글쓴이가 문장 속에 숨어 있다. ‘단풍이 들었다’고 하면 글쓴이보다 정보가 도드라진다.
<독립신문>(1896년)만 봐도, 사설(논설)에는 ‘-노라’(‘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단신(잡보)에는 ‘-더라’(‘종을 아침에 조련하였다더라’), 정부 공고(관보)에는 ‘-다’(‘방윤극이가 삼월 십일에 죽다’), 광고에는 ‘-오’(‘보시고 단골로 정하시오’)를 쓰더군. ‘-노라’와 ‘-더라’ 모두 1인칭 주어를 요구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글에 대한 책임이 글쓴이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기입해 놓았으니.
우리 문장이 ‘-다’로 정착된 과정은 글쓴이를 경험의 증언자에서 진리의 전달자로 승격했다는 뜻. 식도 역류만 아니라면, 역류(레트로)도 아주 나쁘진 않아 보인다. 글의 책임성 강화를 위해 주체가 드러나는 ‘-더라, -노라’도 유행하기를 꿈꾸노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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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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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 김수영
나에게 三十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대견하다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무수한 돈을 만졌지만 결국은 헛만진 것
쓸 필요도 없이 한 三, 四일을 나하고 침식을 같이한 돈
―어린놈을 아귀라고 하지
그 아귀란 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갈 돈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돈
그러나 내 돈이 아닌 돈
하여간 바쁨과 閑暇와 失意와 焦燥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
아무도 正視하지 못한 돈―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196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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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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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이하(瓜田李下)
瓜:오이 과. 田:밭 전. 李:오얏 리. 下:아래 하.
[원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동의어] 과전리 이하관(瓜田履 李下冠), 이하관 과전리.
[출전] 《列女傳》, 《文選》〈樂府篇〉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받을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말.
전국 시대인 주(周)나라 열왕(烈王) 6년(B.C. 370),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周破湖)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던 탓에 나라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다못한 후궁 우희(虞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北郭)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오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위왕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으나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내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그 조사 방법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우희를 불러 직접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 신첩(臣妾)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애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신첩의 부덕한 점이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시오소서.”
위왕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위왕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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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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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선물을 주어라
선물을 지닌 자는 열린 문을 발견하리라. - 토마스 풀러
'미국의 사업가'에서
가정 주부를 설득하여 집안에 들어가는 일은 방문 판매원에게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풀러의 전설적인 '가정집 들어가기'기술에 대한 노하우는 1915년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 그는 풀러 칫솔 판매원에게 선물용 칫솔을 나눠줬다. 풀러 칫솔 판매원은 샘플 가방에 넣고, 그것을 샘플이라는 말 대신 '선물'이라 부르고, 그 선물을 현관문이 아니라 집안에 들어가서 주도록 교육받았다. 풀러 칫솔 판매원은 샘플만 받고 싶어하는 가정 주부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즉, 그는 문 밖에서 샘플 가방을 펼칠 수 없다는 몸짓을 해 보이는 것이다. 만일 가정 주부가 너무 바쁘다고 말하면, 그는 잠깐 기다리겠노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 '선물'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선물을 나눠줄 책임이 있답니다."
이익에 호소하라
절대로 인간의 더 좋은 본성에 호소하지 마라. 인간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항상 그의 이익에 호소하라. - 라자루스 롱
퍼시. H 화이팅
이 방법을 처음 광고에 응용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 그는 그 일화를 자서전에 밝혔는데, 그 책은 야심만만한 판매원의 필독서이다. 프랭클린은 1755년 4월 브래독 장군으로부터 네 마리의 말이 달린 사륜 마차 150대를 구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브래독 장군이 사륜마차를 필요로 했던 이유는 두케스네 항구를 봉쇄하기 위한 출병 때문이었다. 프랭클린은 1755년 4월 26일 랭카스터로 가서 광고를 냈다. 광고의 주목적은 농부들에게 마차를 내놓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브래독 장군에 대한 언급을 딱 한 줄이었고, 나머지 여섯 줄은 모두 농부들이 얻게 될 이익에 대한 것이었다. 뛰어난 세일즈맨이었던 프랭클린은 농부들에게 마차를 내놓는 대가로 어떤 혜택을 얻게 될 것인지 말했다.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그 광고는 대단하고 폭발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했다.
"삼 주일 내로 150대의 마차와 259마리의 수송마가 줄지어 군 캠프로 향했다."
프랭클린이 농부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그들의 이익을 언급하는 대신 브래독 장군의 요청을 말했다면, 그와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뭐라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브래독 장군은 그전에 메릴랜드에서 그런 시도를 했었다. 그것은 '군대가 수송 마차를 원한다'는 식이었고, 그 결과에 대해 프랭클린은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25대의 마차가 고작이고, 한결같이 사용 불가능한 상태였다."
거절을 열망하라 - 릭 겔리나스
지난 10년 동안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 요청을 승낙하고 2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했다. 종종 나는 '예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그때마다 초창기를 떠올리고 웃음 짓는다. 나는 22살 때 승낙과 거절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생명보험 판매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제 더 이상 없는 '보험 수금'이라는 판매법을 사용했다. 나는 '보험 수금' 판매원으로 우편 배달부처럼 매일 정해진 길을 걷고, 매주 보험료를 수금하고, 정중한 고객에게 계약 보험금을 올리거나 다른 상품을 팔려고 노력했다. 판매 실적의 대부분은 사망 보험과 사고 보험이 차지했고, 주 고객층은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수수료는 고작해야 일주일에 50센트에서 2달러에 불과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판매술 교사는 판매 한 건을 올리려면 일곱 번의 거절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즉, 일곱 번의 거절을 당한 다음에야 한 번의 승낙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와!나는 이 보장된 판매술에 흥분했고 어서 '노우'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나는 거절을 당할 때마다 거의 하늘로 날아오를 듯 좋아하며 더 빨리 다음 거절을 당하기 위해 옆집으로 달려갔다. 왜냐하면 매번의 거절이 더욱 달콤한 승낙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길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여덟 번째나 아홉 번째의 거절이 내 기를 꺾어놓았을까? 어림도 없었다!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의 거절은 일종의 저축과 같았다! 14번째의 거절 후에 두 번의 위대한 승낙을 얻게 될 테니까! 그리고 21번째의 거절을 기록하면, 세 번의 승낙이 잇달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거절이 좋은 소식일 수밖에!
이런 태도로 열심히 일한 결과, 나는 여섯 달만에 신참과 고참을 포함한 총 2천 명의 판매원이 겨루는 전국 판매 대회에서 1 등을 차지했다. 지금도 그 공식은 변함이 없다. 1/7의 비율은 변했지만, 그 개념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각인되었고 실패를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오늘 이 시간에도 나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면 거기에 '예스'라는 대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러므로, 거절은 여전히 좋은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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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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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9장 초나라로 쳐들어가다
4. 세 가지 공적을 쌓다
형나라의 수난
제환공이 관중에게 물었다.
"형나라부터 도와야 할 것인지요?"
"모든 나라 제후가 우리 제나라를 섬기며 존경하는 것은 우리 제나라가 천하의 재앙과 환난을 구제하기 때문입니다. 전번엔 위를 돕지 않았고, 이번에 또 형을 돕지 않는다면 주공의 패업(覇業)에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럼 형과 위 두 나라 중에서 어느 쪽을 먼저 도와야 위신이 서겠소?"
"급한 형나라부터 도와 준 후에, 위나라 성을 쌓아 주면 이는 백세(百世)의 공업(功業)입니다."
"옳은 말씀이오."
제환공은 즉시 송(宋), 노(魯), 조(曹) 등 열국에 격문을 보냈다. 그 격문 내용은, 곧 형나라 섭북( 北) 땅으로 각기 군사를 보내어 우리 제군(齊軍)과 합세한 후 오랑캐의 침략을 받고 있는 형나라를 구조하자는 것이었다. 제나라 군대가 섭북에 당도했을 때, 송, 조 두나라 군대는 이미 와 있었다. 관중이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북적의 세력은 점점 뻗어 오지만 형나라는 아직도 힘이 좀 남았습니다. 적군의 세력이 클수록 우리도 싸우기에 더욱 힘들 것이며, 아직도 힘이 남아 있는 형나라를 도우면 나중에 우리의 공로도 과소 평가되기 쉽습니다. 앞으로 반드시 형나라는 적군 앞에 무너질 것입니다. 또 오랑캐가 처음에 형나라를 이기면 반드시 피로할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려서 죽어 가는 형나라를 돕고 지칠대로 지친 적군을 치면 우리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많은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제환공은 관중의 계책대로 했다. 우선 노, 주 두 나라 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겉으론 주장하고, 안으로는 세작을 보내어 형나라의 전쟁 상황을 은밀히 수소문했다. 제나라와 송, 조 연합군이 섭북 땅에 주둔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적군(狄軍)은 밤낮없이 형나라를 공격했다. 기진맥진한 형나라는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작은 급히 돌아와 사세가 다급함을 보고했다. 제환공은 이윽고 출동 명령을 내렸다. 제나라 군 영채의 문은 활짝 열렸고 병차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정연하게 서서 명령을 기다렸다. 그 때 들판 가득히 피난민 떼가 나타났다. 그들은 형나라 백성들이었다. 피난민은 속속 제나라 병영 안으로 들어갔다. 그 피난민 중에 한 사람이 대성 통곡하면서 영채 안으로 들어오며 쓰러졌다. 그 사람은 형후(邢侯) 숙안이었다. 제환공이 형후를 부축해 일으키고 안으로 모신 후 위로했다.
"귀국을 일찍 구원하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도록 한 것은 모두 과인의 잘못이오."
그날로 제환공은 송후(宋侯)와 조백(曹伯)에게도 알려 세 방면의 군사가 형나라를 향해 진격해 갔다.
한편 적주(狄主) 수만은 형성에 들어가 노략질을 하고 있다가 삼국 연합군이 온다는 보고를 받자 곧 곳곳에 불을 지르게 하고는 달아나 버렸다. 3국 군대가 형성(邢城)에 이르렀을 때는 온통 불길이 천지였고 오랑캐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삼국 군대는 오랑캐와 싸우러 갔다가 때아닌 불을 끄느라 진땀을 흘렸을 뿐이었다. 제환공이 형후 숙안에게 물었다.
"장차 이 성에서 사시려는지요?"
형후 숙안이 대답했다.
"피난간 백성이 대부분 이의(夷儀) 지방에 모여 산다고 하니, 그리로 가서 백성과 함께 지내고 싶소이다."
제환공은 3국 군대에 명해 이의성을 쌓게 하여 형후 숙안을 그 곳으로 옮겨가 살게 하고, 조묘(朝廟) 및 여사도 지어 주고 소, 말, 곡식, 비단 등을 제나라로부터 수송을 해 원조하니 이의성은 질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형나라 군후와 모든 신하는 기뻐했다. 백성들이 제환공을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위성을 쌓아 주다
사명이 끝난 송후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환공을 찾았더니 제환공이 송후를 보고 간청했다.
"위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형나라만 성을 쌓아 주고 위나라의 성을 쌓아 주지 않으면 위나라 사람들이 나를 원망할 것입니다. 군후께서 도와 주십시오."
송, 조 두 군후가 대답했다.
"우리는 다만 패군(覇君)의 지시를 바랍니다."
이에 제환공의 전령을 받고 연합군은 다시 위나라로 갔다. 삼태기와 삽 따위 연장을 준비하여 가지고 갔다. 위문공은 성 밖 멀리까지 나가서 연합군을 영접했다. 제환공은 영접 나온 맏사위 위문공이 베옷을 입고 거친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쓰고 상복으로 나온 것을 보자 마치 불행을 겪는 친자식처럼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과인이 모든 제후의 힘을 빌어 군후를 위해 도읍을 정해 줄 생각인데, 어느 곳이 좋겠소?"
"이미 좋은 곳을 잡아 두었습니다. 바로 초구(楚邱)란 곳입니다. 쑥대밭이 되어 버린 이 나라에선 도성을 쌓으려 해도 비용을 마련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일은 과인에게 맡기시오."
제환공은 그날로 3국 군대에게 명하여 함께 초구로 갔다. 초구에 당도한 연합군은 공사를 일으키고 문재를 운반하고 조묘를 세웠다. 그 조묘 이름을 봉위(封衛)라고 했다. 당시 세상에서는 제환공이 망하는 나라 셋을 구했다고 칭송했다. 즉 노희공(魯僖公)을 군위에 세워 노나라를 안정시켰고, 둘째는 이의성(夷儀城)을 쌓아 형나라를 구했고, 셋째는 초구(楚邱)에다 도성을 쌓아 위나라를 도와준 것이었다. 이를 삼대 공로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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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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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윤오영편"
윤오영(1907~1976)
수필가. 서울 출생. 양정 고보 졸업. 장기간 교편 생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시선에 잡히는 모든 사물을 고전의 세계에 접합시켜 독특한 아취를 자아내곤 하였다. 정묘한 문장을 추구하였고 역대 문장가들의 글을 깊이 연구하여 "연암의 문장" "노계 가사의 재평가" 등의 논저를 남겼다. "한국의 창 연구"는 특히 주목을 끈 논문이다.
부끄러움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애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아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의 몸매며 옷매무새는 제법 색시꼴이 박히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시골서 좀 범절 있다는 가정에서는 열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 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너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은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너방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 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반쯤 닫힌 안방 문 사이로 경대 반짇고리들이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막 건너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배기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날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본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마고자
나는 마고자를 입을 때마다 한국 여성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한다. 남자의 의복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가 마고자다.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같은 다른 옷보다 더 값진 천을 사용한다. 또, 남자옷에 패물이라면 마고자의 단추다. 마고자는 방한용이 아니요 모양새다. 방한용이라면 덧저고리가 있고 잘덧저고리도 있다. 화려하고 찬란한 무늬가 있는 비단 마고자나 솜둔 것은 촌스럽고 청초한 겹마고자가 원격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노인네가 겨울에 소탈하게 방한 삼아 입으려면 그 대신에 약식인 반배를 입었던 것이다. 마고자는 섶이 알맞게 여며져야 하고, 섶귀가 날렵하고 예뻐야 한다. 섶이 조금만 벌어지거나 조금만 더 여며져도 표가 나고, 섶귀가 조금만 무디어도 청초한 맛이 사라진다. 깃은 직선에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둥글어도 안 되며, 조금 더 파도 못쓰고, 조금 덜 파도 못쓴다. 안이 속으로 짝 붙으며 앞뒤가 상그럽게 돌아가야 하니, 깃 하나만 보아도 마고자는 솜씨를 몹시 타는 까다로운 옷이다.
마고자는 원래 중국의 마괘자에서 왔다 한다. 귀한 사람은 호사스러운 비단 마괘자를 입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청마괘자를 걸치고 다녔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마고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고자는 마괘자와 비슷도 아니 한 딴 물건이다. 한복에는 안성맞춤으로 어울리는 옷이지만, 중국 옷에는 입을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한 옷이다. 그리고 그 마름새나 모양새가 한국 여인의 독특한 안목과 솜씨를 제일 잘 나타내는 옷이다. 그 모양새는 단아하고 아취가 있으며, 그 솜씨는 섬세하고 교묘하다. 우리 여성들은 실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받아 온 안목과 솜씨를 지니고 있던 까닭에, 어느 나라 옷을 들여오든지 그 안목과 그 솜씨로 제게 맞는 제옷을 지어 냈던 것이다. 만일, 우리 여인들에게 이런 전통이 없었던들, 나는 오늘 이 좋은 마고자를 입지 못할 것이다.
문화의 모든 면이 다 이렇다. 전통적인 안목과 전통적인 솜씨가 있으면 남의 문화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든다 할지라도 이를 고쳐서 새로운 제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송자에서 고려의 비취색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남의 문물이 해동에 들어오면 해동 문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탱자가 아니라 진주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의 것이 들어오면 탱자가 될 뿐 아니라, 내 귤까지 탱자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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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 마더 데레사께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상처 입고, 자기를 비워내야 합니다."
마디마디 힘주어 천천히 말씀하시는 당신의 그 조용하면서도 신념에 찬 음성이 바로 가까이서 들리는 듯합니다. 데레사 수녀님, 평안하신지요? 이젠 캘커타의 어머니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머니가 되신 데레사 수녀님, 오늘, 우리 나라 신문의 해외토픽난에서 당신의 모습을 뵙고 반가웠습니다. 미국을 방문중인 당신이 신생아와 유아들을 위한 집 봉헌식에 참석하시어 어느 주교님과 대통령 부인 힐러리 여사 사이에서 활짝 웃고 계신 사진이었습니다. 한 살에서 세 살까지의 아기들을 그들이 입양될 때까지 돌보아 주는 그 집 이름은 당신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고 하더군요. "원치 않고, 먹이고 교육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을 내게 주십시오. 어떤 아이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늘 당당히 말씀하시며 낙태 반대운동에 앞장서시는 수녀님. 오늘 저는 미지의 카톨릭신자인 독자로부터 반가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첫아기를 낳고 10년 만에 다시 아기를 가졌는데 임신인 줄 모르고 계속 감기약을 먹어서 장애아를 낳을까 걱정되고,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낙태를 해 버릴까 생각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지요.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젼에서 수녀님과 함께 마더 데레사를 보게 됐는데 거기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그분의 삶을 보고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태어나서 버려진 장애아를 거두어 보살피시는 것을 보고 흐르는 눈물 속에 용기를 안고, 믿음이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습니다. 곧 태어날 우리 아기를 위해 꼭 기도해 주세요.`
제가 직접 뵙고 이 소식을 전해 드리면 약간은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그 특유의 굵은 음성으로 "베리 굿 (Very good)!" 하시며 활짝 웃으시겠지요? 이렇듯 당신은 먼 곳에까지 깊은 영향력을 뻗치고 계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겸허한 사람, 오직 이웃 사랑을 위해 전존재를 투신하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예수, 마리아가 전부인 기도의 사람. 많은 이들이 그토록 가까이 뵙고 싶어하는 수녀님과 두 번의 인터뷰를 하고, 바로 곁에서 사흘 동안이나 미사에 참여하며 함께 성가를 부르던 일이 제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쁨으로 그 고운 빛깔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성당 안에서 당신의 그 주름진 얼굴과 손, 닳고 닳아 뭉툭해진 발, 구김살이 펴지지 않는 청색 스웨터와 빛깔이 바랜 낡은 사리. 오래된 기도시를 보는 순간 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 없었습니다. 그 눈물은 값싼 감상이 아니었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참사랑을 실천하는 분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해지던 저 자신을 돌보아주는 참회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약 50년의 긴 세월 동안 오직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깊게 패인 사랑의 주름살도, 깊고 푸른 눈빛도 모두가 성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저를 압도하며 주눅들게 했었답니다. 몇 달 전 그곳을 다녀온 후 늘 벼르기만 하던 문안편지 한 번 올리질 못했습니다. 인도에 다녀와 저는 꽤 여러 날 몸도, 마음도 앓으며 지냈는데 그것은 어쩌면 너무 큰 사랑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 앞으로도 계속 앓아야겠지요.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오늘도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헌신해야 함을 행동으로 일러주시는 어머니. 당신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리오며 일러주신 다음 말씀을 늘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많은 사랑을 실천에 옮기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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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서사문 쓰기1 - 살아있는 말은 어디서 오는가
일하는 삶에서 글감을 얻고
글쓰기는 무엇을 쓰나 하는 문제와 어떻게 쓰나 하는 문제로 크게 나눌 수있다. 또 글에 담긴 글쓴이의 생활 태도며 생각의 문제와 표현의 문제로 나눌 수도 있다. 다음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팝콘'이란 제목으로 쓴 글의 전문이다. 이 글에서 글쓰기의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팝콘 - 강석
1학년 겨울방학 때의 이야기이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방학동안에 고생을 해 보겠다고 집을 나선 나는 이미 정해 놓은 목적지인 부산을 향해 부산행 기차를 탔다. 도착해 보니 해가 질 때쯤이다. 전에 한 번 친구들과 와본 적이 있었던 나는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남포동으로 갔다. 한 달 동안 지낼 데를 찾던 중 '아르바이트생 구함' 이란 쪽지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 사람이 꽤 많이 오가는 길목의 분식점이었다. 이때부터의 부산생활의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음식을 나르고 배달하는 게 재미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배달한 음식을 사람들이 먹는다는 게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점심때가 되면 잊지 않고 오는 아주 예쁜 누나가 눈에 띄었다. 빨간 파카에 청바지를 입고 비비화를 신고 있는 모습은 귀여울 정도였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연필 스케치의 단발머리에 눈이 아주 큰 소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누나가 올 때면 시킨 음식을 가져다 주고 먹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예쁜 소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다는 건 때론 나에게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떤 때는 그 누나가 오면 물 주전자를 엎지르기도 하고 걸리지도 않던 탁자에 걸린다던가 하는 하지 않던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그 며칠 후에 주방에 있는 아줌마로부터 그 누나가 멀지 않은 곳에서 팝콘을 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는 그쪽으로 가는 배달은 대부분 내가 갔고, 가끔 부산에 있는 친구가 오면 함께 팝콘을 사 먹기도 했다. 그 누나는 대학생인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돈 벌면 부자가 되겠다고 하더군. 밤늦게 자고 아침이라 하기엔 늦고 점심때라 하기엔 이른 때에 일어나면 하루가 알게 모르게 지나가더니, 어느덧 한 달이 되어 이젠 친근해진 부산생활을 청산해야 한 아쉬움이 되었다. 분식점 문을 나선 후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지하 상가를 거닐고 태종대에 가서 앞 바다를 바라다보니 나를 덮고 있는 모든 것이 씻겨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가기 전에 누나에게 갔다. 여전히 빨간 파카를 입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만 두었냐고 하면서 볼 수 없겠다고 하더군. 나는 선물이라며 작은 인형과 책 한 권을 주었다. 누나는 줄 게 없다면서 대신 팝콘을 정성스럽게 두 봉지 싸 주었다. 누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향한 기차를 탔다. 이것이 나의 첫 객지 생활 이야기이다. 가끔 빨간 파카에 청바지를 입은 소녀를 보면 그때 그 거리에서 팝콘을 팔던 예쁜 누나를 생각하게 한다.
'영등포상고 2학년 8반 학급문집 '타오르는 영산강'에서'
이글은 아마도 누구나 재미있게 읽게 되리라 생각한다. 방안에 앉아 허황한 공상을 한 이야기가 아니고, 어른들이 흔히 쓰는 어떤 생각이나 주장을 흉내낸 것도 아니다. 자기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자기 말로 하나의 이야기처럼 적었으니 재미있게 읽히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한 편의 소설이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을 이어 놓았다. 그래서 마치 옛날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글이 그 정도로 읽히는 까닭이 이런 문장의 특이함에 있다고 본다. 한 편의 소설이 될 수도 있었겠다고 말한 것은 소설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고, 좀더 재밌게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한 까닭은 글을 쓰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간 때문이다. 그것은 단락이 거의 없는 것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단락이 없이 이야기를 끌어갔다는 것은 어떤 장면을 그림을 그리듯이 그려 보여주지 않고 설명만 해버렸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좋은 체험이라면 몇가지 이야기의 장면을 나누어서 그 장면들을 좀 자세히 그려 보이면 얼마나 좋겠나. 장면과 장면을 차례로 이어 놓으면 꽉 짜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소설이란 별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해서 씌어진다. 도 굳이 소설을 쓰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겪은 일을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 되게 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미리 얼거리를 잡아서 몇 가지 장면을 자세하게 그려 보이면 저절로 이 글은 앞에서 써 놓은 것보다 더 길어질 것이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 아마도 처음 쓴 분량의 배는 되겠지. 그렇게 써야 이 글에서 나타내고 싶었던 글쓴이의 느낌이나 생각이 제대로 나타나리라 본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어떻게 쓰나 하는 표현의 문제였다. 다음은 이 글이 무엇을 썼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겠다. 사실은 어떤 글을 두고 논평할 때는 문장표현보다 그 글에 나타난 글쓴이의 생각이나 삶의 태도를 먼저 따지고 평가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글에서는 표현 문제가 우선 더 드러나 보이기에 먼저 말했던 것이다.
이 글을 쓴 학생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방학 동안에 고생을 해 보겠다고 혼자 부산에 가서 한 달 동안 분식점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했다. 참 좋은 생활태도다. 방학동안에 산에 올라간다든지, 바닷가에 가서 지낸다든지, 무전여행이란 것을 한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온갖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인데 이 학생은 아주 별나게, 고생을 해 보겠다고 큰 도시에 가서 노동생활을 한 것이다. 노동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에 나오는 낭만 이라고 본 것이 아니라 정말 고생 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한데, 그러면서 그 고생을 해 보겠다고 나서서 또 실제로 그런 생활을 아주 잘 견디어 내었다. 견디어 낸 정도가 아니라 음식을 나르고 배달하는 게 재미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배달한 음식을 사람들이 먹는다는게 즐거웠다 고 할 정도로 그렇게 일하는 것을 보람있게 여기고 기뻐했다. 이것은 참으로 사람다운 건강한 태도다. 요즘같이 입신출세를 위한 점수따기 공부에 모두가 빠져서 세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감정도 병들고 행동은 더구나 잘못되어 있기가 예사인 청소년 가운데 이런 학생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학생은 이런 삶의 태도를 어디서 배웠을까? 부모님이 부산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고 했지만 아마도 부모님한테서 평소에 이런 삶을 배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어보면 이 학생의 심성이 참 착해 보인다. 마음이 착하지 않고는 이렇게 살 수 없고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이런 착한 심성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기르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학생의 부모님은 일하기를 즐기면서 살아가시는 분들이라 여겨진다. 글은 이렇게 해서 써야 살아 있는 글이 된다. 보고 듣고 일한 것, 실제로 몸으로 겪은 삶 속에서 나와야 생명이 있는 글이 된다. 방안에 않아서 책만 보고 생각만 해서는 절대로 살아 있는 글을 쓸 수 없다. 학생이고 소설가고 시인이고 다 그렇다. 소설가는 방안에서 글만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소설가들이 쓴 작품은 재미있게 읽히는 문학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른다.
그렇다. 그래서 지금 우리 나라의 문학작품들은 말장난으로 타락했다. 나는 우리 문학이란 것이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가장 큰 근원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글쓰기로 책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파는 어른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린이와 학생들만은 삶을 정직하게 쓰면서 스스로 삶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이 씌어진다. 그러니까 글쓰기에서는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에서 어떤 생각을 배워서 쓰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 팝콘 을 쓴 학생도 책 속에 빠져 있었다면 이런 글은 못 썼을 것이다. 모든 창조의 근원은 삶이요 현실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한 달 동안 분식점에서 일을 했는데, 그렇게 일한 것이 제대로 안 나타나 있다. 분식점이라도 여러 가지 음식이 있다. 어떤 음식을 나르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처음 그런 곳에서 일을 했다면 여러 가지 어려웠던 일, 실패했던 일, 힘들었던 일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그런 이야기는 아주 없다. 물론 이 이야기는 팝콘을 파는 그 누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분식점에서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밝은 면만을 썼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모처럼 고생을 하러 갔는데, 그렇게 고생을 한 이야기는 안 쓰고 텔레비젼에라도 나올 것 같은 즐거운 이야기만 썼다면 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의 재미가 깊은 감동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글이란 무엇이든지 보기 좋은 것, 듣기 좋은 것을 써야 버젓한 글이 된다고 알고 있다면 글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팝콘 을 쓴 학생이 또 한편의 글 - 분식점에서 일한 이야기를 쓰게 되기를 바란다. 음식을 나르면서 보람을 느끼고 즐거워했던 이야기 뿐 아니라 고달팠던 일들, 속상했던 일들, 힘들었던 일들을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쓴다면 아마도 팝콘 보다 더 훌룡한 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다시 문장표현으로 돌아가, 좀더 뚜렷하게 몇 가지를 들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앞에서 자기가 겪었던 일을 자기 말로 썼다고 했는데, 보기를 들면 나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돈 벌면 부자가 되겠다고 하더군 나를 보더니 그만 두었냐고 하면서 볼 수 없겠다고 하더군 이렇게 글월의 끝을 하더군 으로 맺어 실제로 말을 하는 것같이 쓴 것을 들 수 있다. 또 밤늦게 자고 아침이라 하기엔 늦고 점심때라 하기엔 이른 때에 일어나면 하루가 알게 모르게 지나가더니, 어느덧 한 달이 되어... 라고 쓴 대문이나 분식점 문을 나선 후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지하상가를 거닐고 태종대에 가서 앞 바다를 바라다보니 나를 덮고 있는 모든 것이 씻겨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고 쓴 대문들은 많은 사연이 들어 있는 말을 아주 요령있게 줄여서 쓰거나 자기 감정을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썼다고 본다. 그런데 좀더 글을 다듬어야 할 대문도 여럿 보인다. 두세 군데 지적해 보겠다.
- 이때부터의 부산생활의 객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아주 어수선한 말이 되었다. 더구나 이때부터의 부산생활의 라 하여 의 가 잇달아 나오는 것은 우리말 법에도 없는 이상한 말이라 하겠다. 이 구절은 이때부터 부산의 객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쓰든지, 아니면 이때부터 객지인 부산생활이 시작되었다 고 쓰면 될 것이다.
-예쁜 소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다는 건 때론 나에게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자기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한 말이 되었다고 본다. 때론..될 수도 있었다 고 했으니, 그렇다면 그 예쁜 소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어도 때론 즐거운 일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쁜 소녀의 먹는 모습 은 예쁜 소녀가 먹는 모습 이라고 써야 우리말 법에 맞다. 또 있는다는 건 도 잘못된 말이다. 그래서 이 대문을 글쓴이가 잘 다듬어서 썼다면 아마도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 예쁜 소녀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에게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었다.
-부산을 향해 부산행 차를 탔다.
이 말은 부산으로 가는 차를 탔다. 고 쓰는 것이 좋겠다. 어른이고 아이고 향한다 를 많이 쓰는데, 될 수 있는대로 안 쓰는 것이 좋다. 마지막에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향한 기차를 탔다. 도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고 쓰면 된다. 학교를 향해 갔다. 고 하는 것도 학교로 갔다 고 하면 그만이고 더 깨끗한 우리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지적하고 넘어가자.
-가끔 빨간 파카에 청바지를 입은 소녀를 보면...생각하게 한다.
이 글에서 생각하게 한다 는 생각하게 된다 고 써야 말이 제대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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