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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3호 2022.9.24 (음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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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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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라도 좋으니 당장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 그것은 많은 엉터리 조치를 낳는 어머니. ― 대니얼 웹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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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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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페미니즘
곁다리가 결정적일 때가 많다. ‘3개 천원’보다 ‘2개 천원인데 1개 더 줌’이 탐심을 더 자극한다. 차의 기본 성능보다 선팅, 블랙박스를 얼마나 좋은 걸로 끼워주느냐로 차를 살지 말지 정한다. 자주 가는 식당 주인장은 뭘 시켜도 서비스로 두부볶음을 내온다. 단골이 안 될 도리가 없다.수
수식어는 ‘서비스 상품’ 같은 존재다. 크게 중요하지 않아 허투루 넘기는데, 판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수식어의 의미는 수식 받는 말에 기대어 천방지축 뒤바뀐다. ‘좋은 아버지’, ‘좋은 차’, ‘좋은 책’을 생각해보라. 각각 무엇이 ‘좋은가?’에 대한 판단은 ‘아버지, 차, 책’이 갖는 특성이나 우리의 경험이 결부된다. 좋은 아버지는 좋은 차와 다르다. ‘쌩쌩 잘 달리고, 연비 좋고(?), 부딪쳐도 안전한(푹신푹신한?)’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 리 없다.
수식어가 무서운 건 말하는 사람이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는지가 수식어에 담기기 때문이다. 수식어는 대상을 한정하고 분류한다. 수식어 때문에 본심과 밑바닥이 드러난다. ‘착한 소비’가 우리의 소비를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듯, ‘건강한 페미니즘’도 페미니즘을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나눈다. ‘건강한’ 페미니즘이란 ‘건전한(?), 온건한, 무해한, 전복적이지 않은, 불온하지 않은, 고분고분한’ 페미니즘이겠지.
수식어를 빼고 말하는 게 대인배의 풍모다. ‘페미니즘이 남녀 간의 건전한 교제를 막는다!’ 얼마나 많은 토론거리를 던져주는 주제인가. 아차차, 수식어를 더 빼야겠군. ‘페미니즘이 교제를 막는다.’
몸짓의 언어학
말을 안 하면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아냐고? 하는 짓을 보면 알지.친한 친구를 10년 만에 만난다면 당신은 어떤 몸짓을 할까? 꼴도 보기 싫은 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다면? 우리는 마음속에 일렁이는 기분이나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몸으로 나타낸다. 몸짓은 기분의 표출이자 태도의 표명이다.
사람은 말보다 몸짓이 전하는 메시지를 훨씬 더 빠르고 정확히 알아차린다고 한다.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지만, 몸짓은 ‘척 보면 안다’. 200여개의 짤막한 영상을 보여주고 배우의 감정을 판단하는 실험을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쉽게 맞혔다고 한다. 노출 시간을 점점 줄여봤더니, 놀랍게도 24분의 1초(0.04초)만 보아도 3분의 2 이상을 맞혔다.
말처럼 몸짓도 대화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몸짓에 대해선 의식을 못 한다. 상대의 몸짓이 나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특성이라고만 생각한다. 몸짓이 나와 너의 상호작용이라면, 거기에는 무언의 권력관계가 새겨져 있다. 따로 배우지 않았을 텐데도, 힘 있는 사람은 얼굴에 온갖 표정을 숨김없이 짓고, 상대방의 코앞까지 자신의 얼굴을 디밀고, 눈을 빤히 쳐다볼 수 있다.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칠 수도, 뒷짐을 지거나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수도, 다리를 쩍 벌리고 의자를 좌우로 돌릴 수도,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거나 팔이나 어깨를 툭 칠 수도 있다. 이걸 아랫사람이 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니 몸짓을 개인의 습관이나 남녀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돌려선 안 된다. 그가 속한 계급이 갖는 집단 무의식이다. 목소리를 지우고 보면 더 잘 보인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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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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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용에게 - 김수영
收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너나 나나 매일반이다
모이 한 가마니에 四百三拾圓이니
한달에 十二, 三萬원이 소리없이 들어가고
알은 하루 六十개밖에 안 나오니
묵은 닭까지 합한 닭모이값이
一週日에 六日을 먹고
사람은 하루를 먹는 편이다
모르는 사람은 봄에 알을 많이 받을 것이니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봄에는 알값이 떨어진다
여편네의 계산에 의하면 七割을 낳아도 만용이(닭 시중하는 놈)의 학비를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한다
나는 點燈을 하고 새벽모이를 주자고 주장하지만
여편네는 지금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니 四百三拾圓짜리 한 가마니면 이틀은 먹일 터인데
어떻게 된 셈이냐고 오늘 아침에도 뇌까렸다
이렇게 週期的인 收入騷動이 날 때만은
네가 부리는 독살에도 나는 지지 않는다
무능한 내가 지지 않는 것은 이때만이다
너의 毒氣가 예에 없이 걸레쪽같이 보이고
너와 내가 半半―
「어디 마음대로 화를 부려보려무나!」
<196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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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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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군일학(鷄群一鶴)
鷄:닭 계. 群:무리 군. 一:한 일. 鶴:학 학.
[원말]계군일학(鷄群一鶴)
[동의어]군계일학(群鷄一鶴). 계군고학(?群孤鶴).
[출전]《晉書》〈紹傳〉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 여러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의 비유.
위진(魏晉)시대, 완적(阮籍)완함(阮咸)혜강산도(山濤)왕융(王戎)유령(劉伶)상수(尙秀) 곧 죽림 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老莊)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淸談)을 즐겨 담론했다.
그런데 죽림 칠현 중 위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되는 아들 혜소(~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중신(重臣) 산도가 그를 무제[武帝: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에게 천거했다.
“폐하,《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부자간의 죄는 서로 연좌(連坐)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나이다. 혜소가 비록 혜강의 자식이긴 하오나 총명함이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으로 기용하시오소서.”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 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가 입월하던 그 이튿날, 어떤 사람이 자못 감격하여 와융에게 말했다.
“어제 구름처럼 많이 모인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입궐하는 혜소를 보았습니다만, 그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우뚝 선 한 마리의 학[鷄群一鶴]’같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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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신중하게 요청하라
이 이야기는 리 아이아코카와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인수하기 며칠 전, 크라이슬러 자동차가 당장 파산할 것처럼 보였을 당시에 그 회사의 판매 대리점을 갖고 있었던 사내에 대한 것이다. 크라이슬러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 때문에 자동차 판매율은 뚝뚝 떨어졌고, 판매원의 사기도 이와 평행선을 그렸다. 그는 인생의 모든 꿈을 사업 성공에 걸었기 때문에 그 즈음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의 아내는 참다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났다. 가정 생활의 실패로 그의 절망감이 더욱 깊어졌고, 마침내 그의 대리점도 결국 파산했다. 그는 다시 재기하고 그의 인생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로 이주했다. 그는 또 다른 업계에서 새로 시작하지 못하고 그곳의 포드 자동차 대리점에서 일을 구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때는 더 경제성을 가진 외국 차종이 미국 자동차 시장을 잠식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그의 새로운 경력은 미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렸다. 그래서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인생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그는 산타 모니카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모래사장에 고개를 처박고 죽을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가 적당한 절벽가에서 막 뛰어내리려는 순간,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병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그 병은 금이라도 담긴 양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는 호기심이 발동한 나머지 일시적으로 자살 기도를 잊어버렸다. 그는 서둘러 절벽을 내려가서 그 병을 건져내어 이상하게 보이는 병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펑하고 요정이 나타나더니 한 가지 소원을 빌라는 것이 아닌가. 요정은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소원을 빌라고 제안했다.
"아니에요."
그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빌어왔는걸요. 나는 대도시의 외국 자동차 판매점 주인으로 내일 아침에 눈을 뜨고 싶어요."
꽝! 다음날 아침 그는 도쿄의 크라이슬러 대리점 주인이 되어 있었다.
요청에도 정도가 있다 - '화자 근원서'에서
한 사내가 저녁을 먹으러 가서 웨이트리스에게 주문했다.
"클럽 샌드위치를 하나 주세요. 한쪽은 호밀빵을, 그리고 다른 쪽은 통밀빵을 살짝 구워서 베이컨과 치즈를 맨 아래에 깔고, 그 위에 닭고기와 양상추와 토마토를 순서대로 포개 주세요. 참! 마요네즈를 빵 두쪽에 모두 발라 주세요. 그리고 빵가장자리 부분을 다 자르고, 나머지 부분을 정확하게 사등분한 다음에 각각의 위에 피클을 살짝 얹고 흐트러지지 않게 이쑤시개로 고정해 주세요. 알았습니까?"
"알았어요."
웨이트리스가 말했다. 그 다음에 그녀는 주방에 대고 소리질렀다.
"창조주 양반을 위한 클럽 샌드위치 하나!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게"
마음을 다 바쳐 요청하라 - 브래드 윈치
당시 나는 작품의 11장을 쓰고 있었다. 나는 채권자들에게 다시 한 번 도와 달라는 요청을 이런 말로 시작했다.
"이것은 나의 사명입니다. 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정열로 이것을 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출판한 책의 결과입니다. 저쪽에 있는 책들은 한때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우리는 저 밖의 수 백만 명에게 감동을 선사하게 될 겁니다."
채권자 중 한 사람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 자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겠네. 나는 자네의 일을 믿네."
다른 채권자가 말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군. 나는 자네에게 속옷까지 벗어 줄 용의가 있네. 자, 내 돈과 당장 착수할 수 있는 영화 대본이 한권 있네. 이것을 자네 마음대로 하게."
당신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입지를 취하려면, 당신의 다른 의견을 모두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금전과 원조가 가져올 결과를 보여줘라. 그리고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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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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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9장 초나라로 쳐들어가다
1. 노나라의 내란
경부의 반란과 애강의 망명
한편 노민공이 제나라에 갔다온 이후 정승에 공자 계우가 앉는 등 군위가 점차 안정되어 가자 공자 경부는 매우 초조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애강의 성화도 대단했다. 그녀는 어서 빨리 어린 노민공을 해치우고 경부가 임금이 되라고 앙탈을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경부에게 문지기가 들어와 대부 복의(卜義)가 왔음을 알렸다. 경부는 복의를 서실로 영접했다. 복의는 얼굴에 잔뜩 노기를 띠었으므로 경부가 찾아온 뜻을 물으니 복의가 대답했다.
"내 땅은 태부(太傅: 군후의 스승) 신불해(申不害)의 전장(田莊)과 인접해 있는데 나는 까닭없이 신불해에게 전답을 빼앗겼소. 억울해서 주공께 호소하니, 주공은 태부만 편애하여 나에게 그 땅을 양도해 주라고 하셨소. 내 참을 수 없어 공자를 찾아왔으니 주공께 잘 말씀해 주기 바라오."
공자 경부는 이 말을 듣자 좌우를 물리고, 복의와 단둘이 속삭였다.
"주공은 나이 어리고 철이 없어 내가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인즉 만일 큰일을 한번 해볼 생각이라면 대부를 위해 내가 신불해를 죽여 버리겠소. 대부의 뜻은 어떠시오?"
"그런 일은 공자 계우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아마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오."
"주공은 아직 어리므로 밤이면 무위문을 나가서 거리로 돌아다니며 놀지요. 대부는 무위문 밖에 사람을 매복시켰다가 그 어린 것이 나오면 단칼에 처치해 버리시오. 그러고 나선 도적의 소행이라 하면 누가 이 일을 알겠소? 임금이 없으니, 국모의 명에 의해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공자 계우를 외국으로 추방하면 그 때부터는 모든 것이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지요."
복의는 마침내 동의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물색해서 추아(秋亞)란 자를 얻었다. 복의는 추아에게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를 내주어, 무위문 밖에 매복하게 했다. 밤이 됐다. 무위문에서 어린 노민공이 나왔다. 추아는 자기 앞까지 노민공이 오길 기다려 나는 듯이 뛰어나가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휘둘렀다. 노민공은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피를 뿜고 쓰러지니, 그제야 좌우 시중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를 추적하면서 사방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놈 잡아라!"
검은 그림자는 곧 사로잡혔다. 그 때 복의가 거느린 무장한 부하들이 나타나 추아를 구해 달아났다. 한편 공자 경부는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가서 태부 신불해를 그의 집에서 소리없이 처치해 버렸다. 공자 계우는 이러한 변을 듣자 즉시 공자 신(新)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려 자고 있는 공자 신을 발길로 차서 깨우며, 경부가 난을 일으킨 것을 알리고 그날 밤으로 둘이 집을 떠나 주나라로 달아나고 말았다. 임금이 피살되고, 공자 계우가 타국으로 망명했다는 소문을 들은 노나라 백성들은 복의와 경부를 원망하였다. 이날 노나라 시장은 모두 철시를 하고, 천여 명의 군중이 복의의 집으로 몰려가 에워쌌다. 순식간에 복의와 그 가족은 분노한 백성들에게 몰살당하고 그의 부중은 불타고 말았다. 성난 군중들은 공자 경부의 부중으로 몰려갔다. 사람들의 수효도 점점 늘어났다. 백성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안 경부는 도망칠 생각을 했다.
'일찍이 거나라 힘을 빌어 제후(齊侯)가 나라를 차지한 일이 있었다. 그렇다. 제와 거 두 나라는 서로 은혜를 입고 있는 사이다. 거나라로 하여금 제나라에게 나의 형편을 변명해야겠다. 그렇지. 더구나 지난날 문강(文姜)은 거의(拒醫)와 서로 정을 통한 일이 있지 않은가! 나와 보통 사이가 아닌 애강은 바로 문강의 질녀다. 이러나 저러나간에 이건 예사 인연이 아니다. 이런 연줄로 일을 꾸며 나가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공자 경부는 그날 밤 백성 옷으로, 마치 마구간지기처럼 가장하고 뇌물로 쓸 금은 보배를 헙수룩한 수레에 잔뜩 싣고서 거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궁에서 과부 애강은 공자 경부가 거나라로 달아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정부(情夫)를 잃은 애강은 몹시 불안했다. 아니 좌우가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애강도 정부의 뒤를 쫓아 거나라로 달아날 준비를 했다. 좌우 사람들이 간했다.
"부인께선 공자 경부 때문에 백성에게 죄를 저질렀은즉, 이제 또 거나라에 가서 모두 한곳에 합치면 누가 이를 용납하리이까. 백성들은 지금 주나라에 가 있는 공자 계우를 신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인은 차라리 주나라에 가서 공자 계우에게 의지하고 동정을 비십시오."
이에 애강은 주나라로 갔다. 애강은 주나라에 가서 공자 계우와 만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공자 계우는 애강을 만나 주지 않았다. 공자 계우는 이제 본국에 공자 경부와 애강이 다 없다는 걸 알았다. 마침내 공자 계우는 공자 신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동시에 사람을 제나라로 보내어 이번에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고하도록 했다. 한편 제환공은 노나라에서 또다시 임금이 죽고 변란이 터졌다는 보고를 받자 관중에게 물었다.
"아예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우리 제나라와 합치는 것이 어떻겠소? 이거 자꾸만 신경 쓰이게 해서 될 일이오?"
관중이 대답했다.
"비록 임금을 죽이는 소동이 계속되지만 아직 노나라는 옛 주공의 인심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지켜보시면 수습이 될 것입니다."
제환공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때 뒤쪽에서 묻는 이가 있었다.
"우리 제나라에서는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돌아보니 상경 벼슬의 고혜였다.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시면서 말했다.
"마침 대부께서 수고해 주실 일이 있어 사람을 보내 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떤 일인지 하명만 하시면 즉각 분부대로 하지요."
관중이 계교를 일러 주었다.
"무장병 3천을 거느리고 노나라에 가셔서 동정을 보아가며 형편에 따라 처리해 주시오. 즉 공자 신이 과연 노나라 사직을 담당할 만한 자격이 있거든 곧 그를 군위에 세워 제, 노 양국간에 우호를 맺으시고, 그렇지 못하거든 아예 노나라를 우리 제나라에 합병시키도록 일을 진행시켜 주십시오."
고혜가 노나라에 당도했을 때였다. 마침 주나라에 가 있던 공자 신과 공자 계우도 노나라에 돌아온 참이었다. 고혜는 공자 신의 얼굴을 보자 의젓한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것저것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보니 생각 외로 의식이 조리가 정연했다. 고혜는 마음속으로 공자 신을 노나라 군위에 올려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고혜는 공자 계우와 함께 의논하고 공자 신을 군위에 올려 모셨다. 공자 신이 바로 노희공(魯僖公)인 것이다. 고혜는 다시 3천 명 병사로 하여금 노나라 사람을 도와 녹문성을 쌓아줬다. 즉 주, 거 두 나라에 대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공자 계우는 공자 해사(奚斯)에게 고혜를 따라 제나라에 가서 제환공에게 나라를 바로잡아 준 은공을 감사드리게 했다. 동시에 공자 계우는 사람을 거나라로 보냈다. 거나라에 당도한 사자는 극악무도한 경부를 처치해 주면 많은 뇌물을 보내겠다는 공자 계우의 뜻을 전했다. 지난날 공자 경부는 거나라로 도망갔을 때 노나라 보물을 싣고 가서 거의의 손을 거쳐 거후( 侯)에게 다 바쳤었다. 거후는 그 보물을 받았건만 또 노나라 뇌물에 탐이 났다. 그래서 사람을 공자 경부에게 보냈다.
"거나라는 보잘것 없는 조그만 나라입니다. 공자 때문에 우리 나라와 노나라 사이에 의가 상해서 혹 싸움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구려. 그러니 미안하지만 공자께서는 다른 나라로 속히 떠나 주십시오."
그러나 공자 경부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거후는 마침내 공자 경부를 국외로 축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공자 경부는 지난날 자기가 제나라 수작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서로 친했던 일이 생각났다. 추방령을 당한 공자 경부는 거나라를 떠나 주나라를 거쳐 제나라로 갔다. 그러나 국경선에서 제나라 관리들은 원래부터 공자 경부의 나쁜 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입국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붙잡으려고 했다.
여덟 살 행부의 지혜
공자 경부는 도망쳐 문수 근방에 머물렀다. 때마침 공자 해사가 제환공에게 제나라의 보살핌에 대한 은덕을 감사하고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문수가에 당도해 보니 초라한 꼴의 공자 경부가 있었다. 그래서 함께 귀국할 것을 권하니 경부는 울상이 되어 머리를 숙이고 간곡히 말하였다.
"계우가 나를 용납치 않을 것이오. 그대가 이번에 나를 위해 계우에게 말좀 잘해 주기 바라네. 우리가 어머니는 다르지만 선군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가 아닌가. 원컨대 이 목숨만 살려 주면 백성이 되어, 죽어도 그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고 꼭 좀 전해 주기 바라네."
해사는 경부와 작별하고 귀국해서 제나라에 다녀온 경과를 보고하고, 도중에서 경부를 만났던 일과 그의 말을 전하니 노희공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공자 경부의 과오를 용서하려 했다. 그러나 공자 계우가 극구 반대를 했다.
"임금을 죽인 자를 죽이지 않으면 무엇으로 뒤에 오는 사람들을 경계하시렵니까?"
그날 계우는 해사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곧 문수로 가서 공자 경부에게 내 말을 반드시 전하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뒤 이을 자손을 세워 대대로 제사라도 지내 주겠다 하더라고."
계우의 명을 받고 문수로 간 해사는 경부에게 차마 그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해사는 경부가 거처하는 집 문 앞에 가서 소리 높이 통곡하니 경부는 방 안에서 울음소릴 듣고 해사가 온 뜻을 직감하고 크게 통탄을 했다.
"해사가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슬피 울기만 하니, 죽음을 면치 못하겠구나!"
마침내 경부는 띠를 끌러 나무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해사는 경부의 시체를 관에 넣어 돌아왔다. 노희공은 그 소식을 듣고 길이 탄식해 마지 않았다. 그 뒤 노희공은 급한 보고를 받았다.
"거후( 侯)의 동생 영나가 군사를 이끌고 우리 나라 경계에 와서 공자 경부가 죽었으니 이제 약속한 뇌물을 내놓으라 억지를 부립니다."
그 말을 듣자 불쾌한 기색으로 공자 계우가 아뢰었다.
"거나라가 경부를 잡아 보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공을 내세우니, 말로는 해결이 되지 않겠습니다. 신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적절히 상대하겠습니다."
노희공은 재상 계우에게 허리에 차고 있던 보도를 끌러 주며 말했다.
"이 칼의 이름은 맹로(孟勞)라 하오. 길이는 1척이 못 되나 날카롭기는 천하에 다시 없소. 숙부는 이 칼을 소중히 간직하여 노나라의 위엄을 떨치기 바라오."
칼을 받아 옷 속에 찬 계우는 성은에 감사한 후,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해 역이란 곳에 당도해 보니, 거나라 공자 영나가 진을 치고 있었다. 계우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했다.
'우리 노나라는 임금을 새로 세워 아직 국사가 안정되질 않았으니, 만약에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민심이 동요할 것이다. 욕심만 많고 죄가 없는 곳이 거나라이니, 내 마땅히 계략으로 영나를 무찌르고 말리라.'
계우는 이렇게 생각하고 적진 앞에 나가 영나에게 수작을 걸었다.
"공자는 힘이 세고 씨름을 잘한다 하니 우리 둘이 각기 맨 손으로 자웅(雌雄)을 겨루는 것이 어떻겠소?"
"그것 아주 좋은 말이오."
계우의 제안에 영나는 선뜻 응하며 나섰다. 두 나라 군사들은 물러서서 구경만 하기로 했다. 계우와 영나는 서로 어울려 싸웠으나 씨름은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이들은 무려 50여 합을 싸우고 있었다. 계우의 아들 행부(行父)는 여덟 살이었다. 그가 옆에서 싸우는 것을 보니 아버지가 이길 것 같지 않았다. 행부는 앉아서 부르짖었다.
"맹로(孟勞)야! 맹로야! 너 어디 있니!"
계우는 이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났다. 계우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뒤로 슬슬 물러서며 칼이 들어 있는 속옷 사이로 손을 돌려 칼을 잡았다. 영나는 계우가 물러서자 좋다구나 하고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순간 계우는 몸을 피하면서 속옷 허리에서 맹로를 꺼내 번개같이 찔렀다. 칼은 영나의 이마를 지나 어깨까지 들어갔다.
"으악!"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거나라의 영나는 그 자리에 고꾸라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 거군(拒軍)은 주장(主將)이 무참히 죽어 자빠지자 싸울 겨를도 없이 각기 달아났다. 계우는 이렇게 하여 개선가를 부르면서 돌아갔다. 노희공은 친히 교외에까지 나가서 군사를 영접하고 계우를 상상(上相)으로 삼고 비읍(費邑) 땅을 주어 녹을 더 받게 했다. 그러나 계우는 이를 사양했다.
"신은 경부와 숙아와 함께 세상을 떠나신 환공(桓公)의 아들입니다. 신은 사직을 위해서 숙아를 참살하고 경부로 하여 금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했습니다. 결국 대의를 위해 형제를 죽인 것은 부득이한 일이라고 합시다. 이제 그 두 사람은 죽고 자손도 없는데 신만 홀로 외람되게 영화와 벼슬을 누리고 큰 고을을 받는다면, 장차 지하에 돌아갔을 때 무슨 얼굴로 아버지 환공을 뵈오리까."
노희공이 고개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반역하고 스스로 죄를 지었소."
계우가 다시 옷깃을 가다듬고 아뢰었다.
"두 사람은 반역하려고 했을 뿐 실지로 반역한 건 없으며 또 정정당당한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마땅히 그 뒤를 이을 자손이나 세워주소서. 주공께선 형제를 사랑하는 높은 덕을 베푸십시오."
노희공은 계우의 말에 감동하고 그 말대로 했다. 이리하여 공자 경부(慶父)의 아들 공손 오(公孫 敖)로써 경부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성을 맹손씨(孟孫氏)로 고쳐 성읍(成邑)의 녹을 받게 하고, 또 공손 자(公孫 玆)로써 공자 숙아(叔牙)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성을 숙손씨(叔孫氏)로 고쳐 후읍의 녹을 받게 했다. 그리고 계우는 비읍(費邑)의 녹을 받은 동시, 문양(汶陽)의 전답을 더 받고 성을 계손씨(季孫氏)로 고쳤다. 그후로 계(季), 맹(孟), 숙(叔) 세 집이 솥발처럼 서서 노나라 정권을 잡았다. 그들 세 집을 세상에서 삼가(三家) 또는 삼환(三桓)이라고 불렀다. 이건 나중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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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마음의 주림
시골서 서울로 와서 벌써 1년 넘어 여관살이를 하는 P군의 이야기다. 무슨 사연인지 이집저집 여관으로 굴러다니는 P군의 신세도 처량하거니와 P군이 들려 준 이 얘기도 그지없이 처량하다. 찾아드는 손님의 반수 이상이 값을 깎거나 시계, 만년필 등속을 잡히고 간다(P군이 묵는 이 여관은, 도심 지대의 소위 일류 축에는 못 가도 서울서는 그래도 표준 클래스는 된다는 얘기다.). 방마다 하나씩 걸어 두는 거울-백 원도 못 가는 그 거울이 없어지는 것은 보통 일이다. 물주전자에 하나 가득 오줌을 채워 두고 사는 손님도 있다. 저 혼자가 여관 하나를 독차지나 한 것처럼 밤중 한 시 두 시까지 떠들어대는 손님, 통금 시간에도 절제를 받지 않는 특권 계급(?)들이 밤중에 와서 여자를 데려오라고 호통을 칠 때는 으레 전치사가 있다. '우린 직무상 그래도 좋게 돼 있단 말야!' 그것을 증명이나 하려는 건지 이런 '손님'들은 걸핏하면 순경을 불러오라고 호령이다(이런 것들을 손님이라 '님'자를 붙여서 부르기는 좀 곤란하지마는--하는 것이 P군의 어투다.). 사흘들이 임검이란 명목으로 단골 순경들이 찾아온다. 이럴 때 주인 마나님이 살며시 쥐어 주는 지폐도 정찰제마냥 액수가 마련되어 있다. 관 내의 어느 순경이 장가는 간다, 어느 형사의 장인 회갑이다, 그런 길사 때면 으레 '청첩장'이 온다. 서원의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골 사돈댁에 상사가 생겨도 등사판으로 찍은 부고가 돌려진다. 이런 종잇장을 쉽사리 알고 괄시했다가는 결과적으로 몇 갑절 더 부가세가 딸려 오기 마련이다.
소방서원도 소화기 비치를 빙자로 번번이 얼굴을 내민다. 물론 그런 '손님'들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P군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황홀할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화든 사실-십수 년 만에 제 나라로 돌아온 나 같은 숙맥이나 아니고는 이런 정도의 얘기에 놀라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인정이 서울보다야 순박하려니 했던 시골살이도, 듣고 보면 서울 뺨칠 정도로 대단하다는 얘기다. 버스칸에서 조사를 한다는 젊은 군인들의 그 등등한 기세-쥐꼬리 같은 권력이자 직무를 앞장세워서 설치고 덤비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그 안하 무인의 행패를 두고는, 낚시터를 찾아서 자주 원행을 하는 P씨며 H교수들이 입담 섞어서 진담, 기담들을 수두룩이 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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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너무 늦지않게
오래전,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공부하던 수업시간마다 담당 교수님이 하시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비극의 주인공들이 모든 것을 너무 늦게야 깨닫게 된 비극적 결함 (Tragic fault)과 상황이 우릴 슬프게 한다"는. 우리의 삶에도 종종 우리 자신의 결함과 실수로 빚어지는 `회복하기엔 너무 늦은 상황`들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충격을 준 서울 성수대교의 붕괴도, 대구 가스폭발사고도 일을 맡은 이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의 성실과 책임을 다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인 것입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는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종종 우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을 좀더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을 끝까지 미루다가 그들이 병들어 저 세상으로 떠난 후에야 너무 늦었다고 가슴 치며 후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수녀님, 우리의 삶은 왜 이리 바쁘지요? 하루, 한 해가 너무 빨리 가버려요. 수녀님이 서울에 오실 때마다 만난다 해도 그게 앞으로 몇 번이나 될까 싶어요` `행여나 하고 수녀님의 답을 기다리다가 지치고 말았습니다...` 라는 친지들이 보내 온 이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늘 미루어 둔 만남과 해야 할 숙제가 많음을 절감하며 초조해지기까지 합니다. 아우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때그때 해결하지 못하고 미루어 둔 일들이 널려 있음을 보는 것은 우울한 일입니다. 제때에 이행하지 못한 이웃과의 약속들을 기억해 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며칠 전 나는 아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투병을 시작한 어느 신부님을 방문했는데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었고, 작은 꽃병에 담아 들고 간 은방울꽃 몇 송이를 내미는게 고작이었습니다. 꽃향기가 좋다는 인사를 잊지 않던 그 신부님과 헤어질 때 나는 `이분이 병들기 전에 꽃을 들고 찾아왔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진작 찾아뵈려고 했습니다만...""진작 연락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하고 핑계를 대듯이 우리는 가끔 하느님 앞에서도`이 일이 끝나면 당신을 찾으려고 했습니다만...` 하는 식으로 염치없는 고백을 할 때도 많은 듯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바쁜 것을 핑계로 정작 중요하고 의미있는 만남의 순간들을 놓쳐 버리거나 꼭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순간들을 잃어버리고, 건성으로 지나칠 때도 많다고 생각됩니다. 때로는 나중에 후회할 줄을 뻔히 알면서도 `당장은 힘들지만 유익한` 지혜로운 선택보다는 `우선 쉽고 편하지만 무익한` 어리석은 선택을 해 버릴 때도 있습니다.
남들이 우두커니 몽상에 빠져 있거나 방종과 쾌락에 탐닉되어 있을 때도 한눈을 팔지 않고, 삶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은 슬기롭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가끔 높은 담 너머 갇힌 공간에 사는 수인들로부터 단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고 더 많이 기도하려는 열망과 노력이 가득한 글들을 받을 때마다 내 적당주의의 삶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힙니다. 항상 때를 놓치지 않는 지혜를 구하며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이라는 시를 읊어 봅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건이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일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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