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39호 》 2022.8.27 (음 8.1) 》 발송인:
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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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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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결과만을 알고 싶어 한다. 남에게 産苦를 말하지 말고 거기서
얻은 아기만 보여줘라. ―A.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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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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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져도 완벽해
캡슐의 발명으로 가루약 먹기가 쉽듯이, 장바구니 하나면 여러 물건을 한 손에 들 수 있듯이, 단어도 문장이나 구절로 흩어져 있는 걸 한 그릇에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축약 방식의 단어 만들기에 욕심을 부린다. 순간순간 벌어지는 무수한 일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움켜쥐고 싶은 마음. 날아가는 새를 잡았다는 느낌. 전에 없던 개념 하나를 탄생시켜 세계를 확장시켰다는 뿌듯함. 부질없는 만큼 매력적이니 멈출 수가 없다.
문장은 단어를 나열하여 사건이나 상태를 설명한다. 단어가 많아지면 기억하기가 어렵다. ‘하늘이 흐려지는 걸 보니 내일 비가 오려나 보다’라는 문장을 한 달 뒤에 똑같이 되뇔 수 있을까? 이걸 ‘하흐내비’라 하면 쉽다. 매번 속을 까보지 않아도 되는 캡슐처럼 복잡한 말을 단어 하나에 쓸어 담는다.
게다가 이전에 없던 개념을 새로 만든다. ‘시원섭섭하다’, ‘새콤달콤하다’ 같은 복합어가 별도의 감정이나 맛을 표현하듯이 ‘웃프다’, ‘소확행’, ‘아점’도 전에 없던 개념을 선물한다. ‘갑툭튀, 듣보잡, 먹튀, 낄끼빠빠, 엄근진(엄격+근엄+진지)’ 같은 말로 새로운 범주의 행태와 인간형을 포착한다. 애초의 말을 원상회복시켜도 뜻이 같지 않다. 발음만 그럴듯하면 독립한 자식처럼 자기 갈 길을 간다. 닮은 구석이 있어도 이젠 스스로 완전체이다.
언어를 파괴한다는 항의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호소가 있지만 축약어 만들기를 막을 도리는 없다. 말이 있는 한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걱정이라고? 말은 지켜야 할 성곽이 아니라 흐르는 물. 지키거나 가둬 둘 수 없다.
“999 대 1”
어떤 언어든 ‘반드시’ 표시해야 하는 게 있다. 프랑스어는 모든 명사에 남성, 여성 중 하나를 꼭 표시해야 한다. ‘사과’는 여성, ‘사과나무’는 남성. ‘포도’는 남성, ‘포도나무’는 여성. 독일어는 남성, 여성, 중성 셋이다. ‘태양’은 여성, ‘달’은 남성, ‘소녀’는 중성! 이곳 사람들은 명사에 성 표시하기를 피할 수 없다. 페루의 어떤 원주민은 과거를 최근 한 달 이내, 50년 이내, 50년 이상 등 세 가지 기준으로 나눠 쓴다. 셋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 써야 한다.
이렇게 반드시 표시해야 하는 요소들은 어릴 때부터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한국어에는 단연 ‘높임법’. 만만하면 반말, 두렵다면 높임말. 위아래를 항상 따져 묻는 사회, 위계 표시가 습관인 언어이다.
하지만 사회적 다수가 쓴다는 이유로 습관처럼 잘못 자리 잡은 것들도 많다. 이런 말들도 무조건 반사처럼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의식하면 알아챌 수 있고 다른 언어를 쓰는 의인을 만나면 고칠 수도 있다. 책 한 권 써서 출판하는 수업에서 있었던 일. ‘애인’을 쓰겠다는 남학생을 예로 들면서 ‘여친’이라고 부른 것이 문제였다. 한 학생이 내게 꾸짖기를, “당신은 그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겠지만 성소수자들은 ‘남자의 애인’을 곧바로 ‘여친’으로 치환하는 게 매우 불편하다. 999명에게는 자연스러운 ‘추리’지만 1명에게는 ‘배제’의 말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만나는 일상이다. 일상언어는 매 순간 우리를 소수자라고 확인시켜 준다.” 말에 반드시 표시해야 할 건 의외로 적다. 대부분은 통념과 편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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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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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黃昏) - 김수영
電話를 걸고 그는 떠나갔다
공연한 이야기만 남기고 떠나갔다
그의 이야기가 絶望인 것이 아니라
그의 모습이 絶望인 것이 아니라
그가 돈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犯罪者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더우기나 그가 外國地洋服이나
지 아이 가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아니라
그가 나갔을 때
洋盤伴奏曲이 感傷的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더우기나 푸른 창가에
黃昏이 걸터앉아있었다는 것이
더우기나 아니라
나의 周圍에 말짱 「反動」만 앉아있어
객소리만 씨부리고 있었다는 것이
더우기나 더우기나 아니라
이런 黃昏에는 시베리아의
어느 이름없는 개울가에서
들오리가 서투른 앉음새로
병아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심해서 아아 심심해서
<1961.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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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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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학려(風聲鶴唳)
-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에도 놀람의 비유.
《出典》'晉書' 謝玄傳
동진(東晉)의 명장 사현(謝玄)은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직접 이끌고 내려온 백만에 가까운 군사를 맞아 겨우 10분의 1밖에 안되는 적은 군사로써 이를 회하(淮河) 상류인 비수에서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사현(謝玄)이 대승을 하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진(晉)의 재상 사안(謝安)은 동생 사석(謝石)과 조카인 사현(謝玄)을 선봉으로 삼아 8만의 군사로 서진(西秦)의 백만 대군을 맞이했다. 그리고 사현은 적의 총지휘관인 부융(符融)에게 사자를 보내 이렇게 청했다.
"귀하의 군대를 조금만 뒤로 후퇴시켜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물을 건너가 한 번 싸움으로 승부를 하겠습니다."
군사의 수(數)를 믿고 상대를 깔보고 있던 부견과 부융은 얼마 안되는 적이 물을 반쯤 건너왔을 때 기습작전으로 간단히 이를 해치울 생각으로 사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융의 북군이 후퇴를 개시하고 남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을 때 북군 내에서 뜻하지 않은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은 북군은 남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 을 보자 싸움에 패(敗)해서 물러나는 것으로 오인하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기 때 문이다. 뒤쪽에 있던 군사들은 앞의 군사가 허둥지둥 도망쳐 오는 것을 보자 덩달아 겁을 먹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이리하여 북군은 자기 군사가 모두 적군으로 보이는 혼란 속에서 서로 짓밟으며 달아나 다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남은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밤을 새워 달아나며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진(晉)나라 군사가 뒤쫓아 온 걸로 알고 길도 없는 가시밭 속을 헤매며 한데서 밤을 보냈다. 거기에다 굶주림과 추위까지 겹쳐 죽은 사람이 열에 일곱 여덟은 되었다. 청각적인 착각과 아울러 산천의 풀과 나무까지 다 적의 군사로 보였다는 초목개병(草木皆兵)이라는 시각적인 착각도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堅衆奔潰 自相答藉 投水死者 不可勝計 ?水爲之不流 餘衆棄甲宵遁 聞風聲鶴? 皆以爲王師已至 草行露宿 重以飢凍 死者十七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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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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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남 따라한 시도가 가져온 성공 - TV 프로듀서 카를라 모건스턴
당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이든 시도하고, 당신이 꿈꿀 수 있는 무엇이든 시작하라. 대담속에는 힘과 마법이 존재한다.-괴테
나는 항상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고, 끊임없이 프로듀서가 된 내 모습을 그려 왔다. 나는 진정으로 그것을 원했다. 어느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서 '오늘의 LA'프로를 봤다. 마침 글로리아 스테이넘이 출연해서 '비범한 행동, 그 일상의 반란'이라는 저서를 홍보했다. 그녀는 모든 이가 바로 오늘 비범한 일을 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아질 거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세시간 후, 나는 비범해지기로 결심했다. 나는 전화 수화기를 들고 글로리아의 사무실로 전화해서 그녀와 만날 약속을 했다. 20대의 풋내기에 불과한 내가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이다. 나는 글로리아 스테이넘에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 다음에 나는 그 당시 '투데이 쇼'의 제작국장이었던 스티브 프레드맨을 찾아가 글로리아가 아침 쇼의 고정 출연자가 되는 아이디어를 팔았다. 우리는 2년 동안 그 쇼를 맡았고, 나는 그렇게 프로듀서로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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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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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5. 중원의 한복판에도 순풍이 불고(2/3)
숙첨의 배신
드디어 돌과 빈수무는 대릉(大陵) 땅을 야습했다. 이에 정나라에선 부하(傅瑕)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양편은 서로 크게 싸웠다. 부하는 도저히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제군에게 항복했다. 정여공 돌은 부하를 보자 17년 동안이나 자기에게 항거한 부하에 대해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속히 부하를 참하도록 호령했다. 부하가 끌려나가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주공은 정나라로 돌아가 군위에 오르실 생각이 없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고만 하십니까?"
정여공 돌은 이 말을 듣고 형의 집행을 잠시 미루었다. 이어 부하를 불러들이고는 물었다.
"어찌 군위를 들먹이느냐. 너는 그 동안 과인의 입국을 방해만 하지 않았더냐?"
부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이제부터 주공으로 모시고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우선 저를 풀어 주시면 지금 곧 성 안으로 달려가 지금의 임금 목을 끊어 바치겠습니다."
정여공 돌이 다시 물었다.
"네가 무슨 계책이 있기에 능히 의(儀)의 목을 잘라 오겠다고 하느냐. 거짓말로 과인을 속이고 이 곳을 벗어나려는 얕은 죄로다. 아니 그러하냐?"
부하가 열심히 말했다.
"지금 정나라의 정사(政事)는 숙첨이 맡아 보고 있습니다. 신은 원래부터 숙첨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주공께서 신을 용서해 주시면 곧 몰래 정성으로 돌아가서 숙첨과 상의하여 지금의 임금 대신에 주공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습니까. 굽어 살피소서."
정여공 돌이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었다.
"이 노옴! 네 어찌 감히 과인을 속이려 드느냐. 과인이 너를 풀어 주면 곧 성으로 들어가서 숙첨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과인에게 또다시 항거할 것이 뻔한 놈이 거짓말을 잘도 하는구나. 이 놈, 날 속이려거든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고 하거라 알겠느냐!"
곁에 있던 빈수무가 말했다.
"지금 부하의 처자(妻子)가 대릉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그 가족을 볼모로 잡아 놓고 부하의 하는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하가 거듭 아뢰었다.
"만일 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거든 신의 처자를 죽이십시오. 하늘을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정여공 돌은 부하를 풀어 주도록 했다. 부하는 즉시 밤을 도와 정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남의 눈을 피하여 숙첨의 부중으로 갔다. 숙첨이 부하를 보더니 질겁하여 크게 놀랐다.
"그대는 대릉 땅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로 여기에 찾아왔단 말이오?"
부하가 좌우를 물리치게 하고는 은근한 말씨로 숙첨에게 겁을 주었다.
"제나라에서 우리 군위를 바로잡으려고 대장 빈수무에게 대군을 거느리게 하고 공자 돌을 지원하여 귀국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이미 제가 지키던 대릉은 함락되었소이다. 나는 겨우 포위망을 뚫고 야밤을 이용해 도망쳐 이 곳까지 왔으나 조만간에 그들이 이 곳까지 밀려올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지금의 임금을 폐하고 성문을 열어 공자 돌을 다시 군위에 세운다면 부귀를 보전하는 동시에 또한 백성들을 가난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복이 재앙으로 바뀌어 이 곳이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때는 지금인즉 시기를 놓치어 나중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숙첨이 한참 만에 물었다.
"옛날에 나는 옛 주공을 임금으로 세우고자 상주하다가 제족에게 제지를 당했었소. 이제 제족이 죽고 없으나 지금 임금이 있는지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그리고 세상 일이란 하늘의 뜻을 어기면 죄를 짓는 법이오. 그러나 마땅한 계책이 서지 않는구려."
부하가 속삭였다.
"속히 역성으로 밀서를 보내어 여공으로 하여금 쳐들어오게 하는 동시 그대는 성 밖에 나가서 거짓으로 항거하는 체 하시오. 그러면 의가 반드시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볼 것이오. 내 그때 기회를 보아 그 자를 죽이겠소이다. 그러면 그대는 옛 임금을 영접하여 모시고 들어오면 될 일이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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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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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진섭편" : 김진섭(1930~?)
수필가, 독문 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 서울대 교수. 6.25사변 때 납북됨. 저서로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한국 수필 문학의 개척자. 생활의 예지와 감흥을 가지 넘치는 생활 철학의 발견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생활인의 철학
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왜냐 하면 그만큼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사람에게 인생의 지식을 교시하려 하는 의도를 거의 방기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하고 관외에 은둔하여 고일한 고독경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에만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부단히 인생의 예지를 추구하는 현대 중국의 '양식의 철학자' 임어당이 일찍이 '내가 이마누엘 칸트를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석 장 이상 더 읽을 수 있었을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논리적 사고가 과도의 발달을 성수하고 전문적 어법이 극도로 분화한 필연의 결과로서, 철학이 정치, 경제보다도 훨씬 후면에 퇴거되어, 평상인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철학의 측면을 통과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기묘한 현상을 지적한 것으로서 사실상 오늘에 있어서는 교육이 있는 사람들도, 대개는 철학이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이 없는 대표적 과제가 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물론 여기서 소위 사변적, 논리적, 학문적 철학자의 철학을 비난,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체계적인 철학에 대해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을 유지해 주는 현철한 일군의 철학자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자만이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로 인간적 통찰력과 사물에 해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생활인은 그 특유의 인생관, 세계관, 즉 통속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다음에 말하고자 함에 불과하다.
철학자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과 같이 속인에게도 철학은 필요하다. 왜 그러냐 하면, 한 가지 물건을 사는 데에 그 사람의 취미가 나타나는 것같이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그 사람의 세계관, 즉 철학은 개재되어야 할 것이요, 자기의 직업을 결정하는 경우에도 그 근본적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인생관이 아니어서는 아니 되겠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들이 결혼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볼 때, 한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 상대자를 물색함에 있어서 실로 철학은 우리들의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지배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우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을 설계하느냐 하는 것도 결국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들이 부지중에 채택한 철학에 의거하여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활권 내에 취하게 되는 모든 행동의 근저에는 일반적으로 미학적 내지 윤리적 가치 의식이 횡재하여 있는 것이니, 생활인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어느 종류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소위 이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이상이 각인의 행동과 운명의 척도가 되고 목표가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상이란 요컨대 그 사람의 철학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일반적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온 규범의 한 파생체를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선택의 주인공이 된 이래 그것이 그대를 천 사람 속에서 추려 내었다.'고 햄릿은 그의 우인 호레이쇼에게 말하였다. 확실히 우인의 선택은 임의로운 의지적 행동이라고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인생 철학에 기초를 두는 한, 이상의 지배를 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햄릿은 그에 대하여 가치가 있는 인격체이며, '천지지간만물'에 대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 인생 생활을 저 천재적이나 극히 불운한 정말의 공자보다도 그 근본에 있어서 보다 잘 통어할 줄 아는 까닭으로, 호레이쇼를 우인으로서 택한 것이다. 비단 이뿐이 아니오, 모든 종류의 심의 활동은 가치관의 지도를 받아 가며 부단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운명을 형성하여 가는 것이나, 적어도 동물적 생활의 우매성을 초극한 모든 사람은 좋든 궂든 하나의 철학을 갖는 것이다. 사람은 대개 이 인생에 대하여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를 알며, 그의 염원이 어느 정도로 당위와 일치하며, 혹은 배치될지를 아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사람이 인간 생활의 의의에 대하여 사유하는 능력을 갖기 때문에 오직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생활 철학은 우주 철학의 일부분으로서 통상적인 생활인과 전문적인 철학자와의 세계관 사이에는,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와 트라지엔의 목양자의 사이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현저한 구별과 거리가 있을 것은 물론이나, 많은 문제에 대하여 그 특유의 견해를 갖는 점에서는 동일한 철학자인 것이다. 나는 흔히 철학자에게서 생활에 대한 예지의 부족을 인식하고 크게 놀라는 반면에는, 농산어촌의 백성 또는 일개의 부녀자에게 철학적인 달관을 발견하여 깊이 머리를 숙이는 일이 불소함을 알고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나에게는 필부필부의 생활 체험에서 우러난 소박, 진실한 안식이 고명한 철학의 난해한 글보다는 훨씬 맛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현실적 정세를 파악하고 투시하는 예민한 감각과 명확한 사고력은 혹종의 여자에 있어서 보다 더 발달되어 있으므로 나는 흔히 현실을 말하고 생활을 하소연하는 부녀자의 아름다운 음성에 경청하여, 그 가운데서 또한 많은 가지가지의 생활 철학을 발견하는 열락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좋은 경구는 한 권의 담론서보다 나은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인생의 지식인 철학의 진의를 전승하는 현철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무명의 현철은 사실상 많은 생활인의 머릿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생활의 예지-이것이 곧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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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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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흰구름 단상
18
그동안 노환으로 고생하시던 수녀님 한 분이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 선종하셨다. 안구 기증을 하시고 나니 시신이 되어서도 하얀 붕대로 두 눈을 가리시고, 흰옷 차림으로 백장미 향기 속에 고요히 누워 계셨다. 약간은 푸른빛을 띤 얼굴. 십자고상과 묵주를 든 차가운 침묵의 손. 수녀님은 이제 오래 계속될, 누워 있는 침묵 자체였다. 깊고도 긴 침묵. 이 침묵 앞에서 우린 대체 누구이며 무엇인가? 조종을 치고 모든 장례 예절을 질서정연하게 진행하던 우리였지만 입관, 하관 예절을 할 때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7통 1반인 우리 수녀원의 세대주이기도 했던 순애 수녀님의 그 이름을 지우려니 참으로 서운합니다."라고 한 총원장의 슬픈 고별사를 들을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19
나는 오늘 `하관`이란 시 한 편을 썼다.
삶의 의무를 다 끝낸
겸허한 마침표 하나가
네모난 상자에 누워
천천히 땅 밑으로 내려가네
이승에서 못다 한 이야기
못다 한 사랑 대신하라 이르며
영원히 눈감은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
흙을 뿌리며 꽃을 던지며
울음을 삼키는 남은 이들 곁에
바람은 침묵하고 새들은 조용하네
더 깊이, 더 낮게 홀로 내려가야 하는
고독한 작별인사
흙빛의 차디찬 침묵 사이로
언뜻 스쳐가는 우리 모두의 죽음
한평생 기도하며 살았기에
눈물도 성수처럼 맑을 수 있던
노수녀의 마지막 미소가
우리 가슴속에 하얀 구름으로 떠오르네
20
가까운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그 느낌을 시로 쓰고 나면 며칠은 시름시름 몸이 아프고 마음은 태풍에 쓰러진 나무와 같다. 간밤엔 때아닌 추위가 느껴져 꽁꽁 싸두었던 이불을 다시 꺼내 덮고 잤다. 슬픔을 일으켜 세우는 건 언제나 슬픔인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실컷 슬픔을 풀어내고 나면 나는 어느새 용감해져서 일상의 길을 걸어 들어가 조금씩 웃을 수 있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으니 그들을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약간의 위로를 받고 싶은, 살아 남은 자들의 조그만 욕심인지도 모른다. `수녀님도 하느님 만나실 그날까지 예쁜 일 많이 하시다가 깊은 잠 자는듯 그렇게 떠나십시오` 라고 어느 지인은 내게 글을 보냈지만 죽음에 대해서만은 정말 아무 계획도 미리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을 임종하는 이들 곁에서 절감한다.
21
예년보다 더디 오는 가을을 반기며 오늘 내 마음을 스쳐갔던 흰구름 단상.
가을바람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달려오는가.
함께 있을 땐 잊고 있다가도 멀리 떠나고 나면
다시 그리워지는 바람.
처음 듣는 황홀한 음악처럼 나뭇잎을 스쳐 가다
내 작은 방 유리창을 두드리는 서늘한 눈매의 바람.
여름 내내 끓어오르던 내 마음을 식히며
이제 바람은
흰옷 입고 문을 여는 내게
박하내음 가득한 언어를 풀어내려 하네.
나의 약점까지도 이해하는 오래된 친구처럼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더 넓어지라고 하네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더 맑게 더 크게 웃으라고 하네
- 나의 시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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