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36호 》 2022.8.21 (음 7.24)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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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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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려움의 홍수에 버티기 위해서 끊임없이 용기의 둑을 쌓아야 한다.
― 마틴 루터 킹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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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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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라고
타협이 아닌 파국의 선택. 한 줌의 여지나 온기도 담지 않고 날리는 회심의 카운터펀치. 싸늘하다. 기병대처럼 옥죄어오는 상대의 논리를 이 말 한 방이면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다. ‘그래서’라는 접속사로 받아주는 척하다가 ‘어쩌라고?’라는 물음으로 대화는 끝. 상대방에게도 뾰족수가 없고 그저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려주는 신호.
논리를 비논리로 종료시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논리’는 인과관계의 문제다. 벌어진 사건의 원인을 어딘가에서 찾아 이어붙일 때 ‘논리’가 생긴다. 사람들이 찾는 원인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사회적 상식이나 억견, 편향, 수지타산을 반영한다.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갖는 힘은 이런 인과관계를 비슷비슷한 다른 인과관계로 대체하지 않고, 인과관계 자체를 싹둑 잘라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리는 급진성에서 나온다. 역사와 경험의 축적물이든, 고결한 사유에서 나온 것이든 ‘당신 논리는 똥’이라고 야유한다. 당신의 때 묻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 꺼지라.
처세술이나 정신 승리법이 아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미디어가 난무하고 진실보다는 진영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 찢어진 세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방편이다. 어른이 없고 세대는 단절되고 소문은 난무하되 공통의 감각과 인식은 옅어진 시대에 자신을 지키고 옹호하는 말. 부모든, 친구든, 역사든 무엇이든 의심하겠다는 주체 선언.
물론 이 말을 밥 먹듯이 하다간 전후좌우 가로세로를 분간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예리한 칼일수록 나를 벨 수도 있는 법.
‘사흘’ 사태
사과가 두 쪽 나듯 세상은 ‘사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뉘었다. 몰랐던 자들은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8월15일부터 17일까지 이어지는 휴일을 ‘사흘 연휴’라는 제목으로 뽑자 일군의 무리가 ‘3일 연휴인데 왜 사흘인가?’라는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흔한 ‘3일’ 대신 ‘사흘’이라는 말을 곳간에서 꺼내 쓰니 어휘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4일 쉰다’는 기대와 착각을 했다.
잘못 알고 나흘을 쉬었다면 몇 명은 직장을 잃거나 ‘창피하다’란 외마디와 함께 애인에게 버림받는 시련을 겪었을지 모른다. 구글 번역기도 ‘사흘’을 ‘four days’로 번역해 혼란을 가중시켰고, 몇 년 전에 ‘사흘’을 ‘4흘’로 쓰거나 ‘나흘’의 뜻으로 ‘4흘’이라고 쓴 기자의 이름이 알려졌다.
말은 어머니로부터 평등하게 배우지만 어휘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독서량의 영향을 받고 얼마나 반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3년 안에 ‘이레 만에’나 ‘여드레 동안’이란 말을 쓴 적이 있는가? 하물며 ‘아흐레’를? ‘섣달’이 몇 월이더라? 삼짇날은? 망각은 낱말의 세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말은 거저 배우는 것이지만 기억하고 자주 써야 자란다.
게다가 말소리와 뜻은 틈만 나면 딴 데로 튈 생각만 한다. 소리만 비슷하면 무작정 엉겨 붙는다. ‘엉뚱한’이란 뜻의 ‘애먼’이 비슷한 소리인 ‘엄한’에 속아 ‘엄한 사람 잡지 마’라고 잘못 쓰는 것도 같은 이치다. ‘디지털 포렌식’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엔 ‘방식’의 ‘식(式)’이 떠오른다. 소리는 의리가 없다. 바람둥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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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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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 김수영
요 詩人
이제 抵抗詩는
妨害로소이다
이제 영원히
抵抗詩는
妨害로소이다
저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보시오
저 山허리를
돌아서
너무나도 좋아서
하늘을
묶는
허리띠 모양으로
맴을 도는
눈송이를 보시오
요 詩人
勇敢한 詩人
―소용 없소이다
山너머 民衆이라고
山너머 民衆이라고
하여둡시다
民衆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
웃음이 나오더라도
눈 내리는 날에는
손을 묶고 가만히
앉아계시오
서울서
議政府로
뚫린
國道에
눈 내리는 날에는
「삑」차도
찦차도
파발이 다 된
시골 빠스도
맥을 못 추고
맴을 도는 판이니
답답하더라도
답답하더라도
요 詩人
가만히 계시오
民衆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
요 詩人
勇敢한 錯誤야
그대의 抵抗은 無用
抵抗詩는 더욱 無用
莫大한
妨害로소이다
까딱 마시오 손 하나 몸 하나
까닥 마시오
눈 오는 것만 지키고 계시오…….
<1961.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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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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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兎死狗烹)
-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出典》'史記' 淮陰侯列傳 十八史略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創業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 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고조(高祖)는 지난날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高祖)에게 '한신은 반심(反心)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諸侯)들은 초(楚) 땅의 진(陳:河南省 內)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이 나오면 진(陳)에서 포박하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진(陳)에 집결한 다른 제후들의 군사로 한신을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反旗)를 들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서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拜謁)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 당하자 한신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한(漢)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조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果若人言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원 말】교토사 양구팽(狡兎死 良狗烹)
【도의어】야수진 엽구팽(野獸盡 獵狗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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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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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그녀의 항아리가 안겨준 교훈 - 데브 맥크러리
샤논 래스트와 그녀의 남편은 새집의 진입로 양쪽 끝에 점토 꽃 항아리를 놓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샤논은 교외의 폐업한 산 안토니오 모텔 밖에 놓여진 네 개의 점토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녀는 최저 가격으로 그것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모텔 주차장 간판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가구가 들어찬 300여개의 방이 달린 모텔에 곧 헐릴 것이고, 집기는 단 한가지도 팔지 않겠노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점토 항아리를 손에 넣을 방법을 찾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방팔방으로 전화를 한 결과, 모텔을 매물로 내놓은 캘리포니아의 한 회사와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회사의 허락 하에 모텔 집기를 무료로 치워주는 책임을 맡았다.
샤논은 가출하고 학대받은 어린이를 위한 '청소년 대책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곳에서 비용 마련을 위해 운영하는 알뜰 가게는 독지가의 기탁을 목마르게 원했다. 그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구세군과 정박아 시민 협회를 비롯한 수 십개의 다른 기관에 전화했다. 열흘 내에 트럭이 모텔에 들이닥쳐 가구를 전부 싣고 갔다. 그 결과, 청년 대책회의 알뜰 가게에 상품이 가득 찼고 다른 협회의 사정도 엇비슷해졌다. 샤논 래스트의 원래 의도는 개인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힘을 합해서 일할 생각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부심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오늘 래스트 부부의 저택 진입로 양쪽에는 각각 두 개의 점토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단도적입적인 접근이 일궈낸 사랑
사랑을 구함은 곧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죤 그레이 박사
나는 보니가 처음으로 안아 달라고 청했던 때를 기억한다. 그 요청은 우리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녀는 내가 안아 주지 않는 것을 유감스러워하는 대신 그냥 요청했다. 그것은 나에게 대단한 사랑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길이, 내가 그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관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도 그녀가 안아 달라고 청했던 첫 순간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내 방에 서 있었고, 그녀는 피곤해 죽겠다는 말을 했다.
"아아, 정말 힘든 하루였어."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 몸짓은 안아 달라는 그녀의 언어였다. 하지만 내 눈과 귀에는 피곤한 안색과 긴 한숨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혼자 있고 싶어하리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녀는 나름대로 원하는 바를 명백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반응하지 못한 나의 부족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우리 사이의 넓은 골을 훌쩍 넘어 원하는 것을 직설적으로 요청했다.
"죠, 나를 껴안아 줄래요?"
내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나는 말했다.
"그럼."
나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서 곧장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다시 한숨을 내뱉고 안아 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언제든지 말만 해."
그러자 그녀가 키득키득 웃어댔다. 나는 반문했다.
"왜 그러지?"
"당신은 안아 달라는 요청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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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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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3. 군후가 오시어 영척을 반기니(2/2)
제환공이 좌우 사람에게 분부했다.
"저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시신(侍臣)들이 달려가 그 사람을 데리고 왔다. 제환공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성은 영이며 이름은 척이라고 합니다. 그저 들에서 소 먹이는 일꾼입니다."
제환공이 정색하고 꾸짖었다.
"너는 한갖 소 먹이는 신분으로서 어찌 시국과 정사(政事)를 풍자하여 노래하느냐?"
"신은 시골 촌부에 불과하거늘 어찌 시국과 정사를 비방할 리 있겠습니까?"
"천자께서 지금 위에 계시고 또한 과인이 모든 제후를 거느리고 천자를 도와 이제 만백성은 모두 맡은 바 직업에 만족하고 산천 초목도 봄빛의 혜택을 받고 있도다. 요순 시대라 할지라도 이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요순의 선위를 만나지 못했다'느니 하고 노래하는 것은 시국을 빗대어 풍자하고 있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고?"
영척이 대답했다.
"신이 시골 사람이라 선왕의 정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나 감히 요순 시대의 일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열흘마다 한 번씩 바람이 불고 닷새마다 한 번씩 비가 내려 백성은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금의 덕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기강은 떨치지 않고 교화는 실행되지 않건만 걸핏하면 요순의 세상과 다름없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소인은 참으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또 들으니 요순 시대에는 백관이 바르므로 제후들이 순종하고, 오랑캐는 평정되고, 천하는 태평하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서로 믿고 의지하여 마침내 관리들이 노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위엄이 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군후께선 어떠하십니까? 한 번 거사함에 송나라가 맹회를 배반하고, 두 번 거사에 노를 협박하여 억지 동맹을 맺었습니다. 군사는 쉴 새가 없고 백성은 피로하고 재정은 어지럽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생업을 만족하고 산천 초목도 혜택을 받고 있다 하시니 소인은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또 요나라 임금은 그 아들 단주(丹朱)에게 위(位)를 물리지 않고 순에게 전했건만, 순은 받지 않고 남하(南河)에 피했으나 모든 백성이 달려가 성심껏 받들어 모셔서 할 수 없이 제위에 오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군후는 형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했으며, 주나라 천자를 방패삼아 모든 제후를 호령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인은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천하를 양도한 풍습을 오늘날 결코 보지 못했습니다."
제환공이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촌부의 몸으로서 어찌 이다지도 경망하단 말인가. 여봐라! 저 놈을 끌어내어 참하거라!"
좌우 군사들이 즉시 영척을 끌어내어 묶고는 칼을 뽑았다. 그러나 영척은 조금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옛날 폭군 걸(桀)은 충신 용방을 죽였고, 주(紂)는 비간을 죽였다. 오늘 영척은 죽는다만 그들과 함께 이름 하나는 천추에 빛나겠구나!"
습붕이 영척의 이런 모습을 눈여겨 보고 있다가 즉시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저 시골 사람의 기상을 살펴본즉 죽음에 임해서도 전혀 두려움 없이 늠름합니다. 결코 평범한 목자가 아닌 듯합니다. 주공께서는 그를 한번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환공도 사실 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 호령했던 것이므로 곧 노기를 풀었다. 좌우에 다시 명하여 그 결박을 풀도록 했다.
"과인이 그대를 잠시 시험했을 따름이다. 그대는 진실로 훌륭한 선비인지라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이렇게 말하며 제환공은 예를 갖추었다. 영척은 그제서야 품속에서 한 통의 서신을 꺼내어 제환공의 시자에게 내주는 것이었다. 제환공이 받아 그 서신을 보니 중부의 것이라 놀라며 읽었다.
- 신이 군명을 받잡고 출사하여 요산에 이르러 위나라 사람 영척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보통 평범한 목자가 아니며 진실로 어진 인재입니다. 주공께서는 그를 우리 제나라에 머무르게 하고 벼슬을 내려 도움을 받으십시오. 만일에 그가 다른 나라로 간다면 다음날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제환공이 다 읽고 나서 서둘러 물었다.
"그대는 이미 중부의 서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과인에게 내보이지 않았는가?"
"듣건대 어진 군후는 사람을 가려서 쓰는데 항상 믿으며, 어진 신하는 주인을 골라서 섬기는데 목숨으로 모신다고 하더이다. 만일 군후께서 바른말을 싫어하고 아첨하는 것만 좋아하시어, 오로지 노기로써 신을 대하셨다면 신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상군의 서신을 군후 앞에 결코 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환공은 감동한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영척에게 말했다.
"뒷수레에 타시오."
제환공은 계속 행군하다가 날이 저문 뒤에야 하채하고 군사를 쉬게 했다. 제환공이 횃불을 밝혀 대낮처럼 밝게 하라고 분부하고 수작에게 명령했다.
"속히 일체의 대부 의관을 준비하여라."
수작이 물었다.
"주공께서는 영척에게 대부 벼슬을 주시려 하십니까?"
제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작이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위나라까지는 여기서 과히 멀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사람을 보내어 그 사람의 옛날 일을 조사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과거가 더럽혀지지 않았고 과연 어진 사람이면 그 때에 벼슬을 줘도 늦지 않습니다."
제환공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 사람은 사소한 범절에 구애될 성격이 아닌 대범한 인재인 듯싶다. 혹 그가 위나라에 있을 때 조그만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걸 들추어내고 나서 벼슬을 주면 그의 영광이 빛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은 허물이라도 찾아내 벼슬을 안 준다면 이는 마땅한 대접이 결코 아니니라."
제환공은 영척을 대부로 삼았다. 이리하여 그는 관중을 도와 제나라 국정을 돌보았다. 이는 나중의 일이고.......마침내 제환공이 이끄는 제나라 대군이 송나라 경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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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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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심훈편" - 심훈(1901~1936)
소설가, 시인. 본명은 대섭. 서울 출생. 상해 원강 대학 중퇴. 중앙 일보 학예 부장 역임. 오늘날도 널리 읽히는 농촌 계몽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 그는 당시의 선각자들이 거의 그러했듯이 '조선 만중의 구원'을 늘 염원했던 민족주의자였다. 3.1운동에 참가하여 복역한 후 상해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귀국 후 신문 기자 생활을 하다가 영화에 투신, 1926년에 "먼동이 틀 때"를 각색, 감독하는 정력적인 활동을 보여 주었다. "상록수"는 충남 당진으로 잠적하여 쓴 것으로 동아 일보 현상모집의 당선작인데, 당시의 시대상을 여실히 반영시켜 크게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7월의 바다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도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다가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한 절해의 고도다. 나는 굴 껍데기가 닥지닥지 달라붙은 바위를 짚고 내렸다. 조수가 다녀나간 자취가 뚜렷한 백사장에는 새우를 말리느라고 공석을 서너 잎이나 깔아 놓았다. 꼴뚜기와 밴댕이 같은 조그만 생선이 섞인 것을 해쳐 보려니,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외로운 섬 속에도 사람이 사나 보다.' 나는 탐험이나 하듯이 길로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인가를 찾아 섬 가운데로 들어갔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잡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려서 부르던 노래를 휘파람 섞어 부르며, 뱀이 지나간 자국만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과연 집이 있다! 하늘을 꿰뚫을 듯 열 길이나 까마아득하게 솟아오른 백양목 그늘 속에서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하였다. '저기서 사람이 살다니 무얼 먹고 살까?' 나는 단장을 휘두르며 내려갔다. 추녀와 땅바닥이 마주 닿은 듯한 그나마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속에서 60도 넘어 보이는 노파가 나왔다. 쑥방석 같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면서 맨발로 나오더니,
"아, 어디서 사시는 양반인데... 이 섬 구석엘 이렇게 찾아 오셨시유?"하고, 바로 이웃집에서 살던 사람이나 만난 득 얼굴의 주름살을 펴면서 나를 반긴다.
"여기서 혼자 사우?" 나는 그 노파가 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길 지경이었다.
"아들허구 손주새끼허구 살어유."
"아들을 어디 갔소?"
"중선으로 준치 잡으로 갔슈."
노파는 흐릿한 눈으로 아득한 바다 저편을 건너다본다. 그 정기 없는 눈동자에는 무한한 고적에 속절없이 시들어 가는 인생의 낙조가 비치지 않는가? 백양목 윗가지에는 바람이 씽씽 분다. 이름도 모를 물새가 흰 날개를 펼치고 그 위를 난다.
"쓸쓸해서 어떻게 사우?"
나는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여북해야 인간 구경두 못 허구 이런 데서 사나유. 농사처가 떨어져서 죽지 못해 이리루 왔지유."
나는 차마 더 묻기 어려워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는데, 노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침침한 부엌 속으로 들어간다. 수숫대로 엮은 울타리 밖에는 마늘과 파를 심었다. 북채만한 팟종에는 씨가 앉아 알록달록한 나비가 쌍쌍이 날아다닌다. 조금 있자, "이거나 하나 맛보시유."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다보니 노파는 손바닥만한 꽃게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 어찌 불쌍한 노파의 친절을 물리치랴. 나는 마당 구석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짭짤한 삶은 게발을 맛있게 뜯었다. 그대로 돌아 설 수가 없어 백동전 한 푼을 꺼내어, 한사코 아니 받는 노파의 손에 쥐어 주고 나왔다.
"아아, 인생의 쓸쓸한 자태여!"
나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그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응아, 응아"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가 우는구나? 그 늙은이의 손주가 우나 보다.' 나는 발을 멈추었다. 불현듯 그 어린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한번 안아 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발을 돌렸다. 토굴 속 같은 방 속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달라붙어 젖을 빠는 것은 이 집의 옥동자였다. 그 침침한 흙방 속이 이 어린애의 흰 살빛으로 환하게 밝은 듯, "나 좀 안아 봅시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살이 삐죽삐죽 나오는 배옷 한 벌로 앞을 가린 젊은 어머니는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한다. 노파는, "이 더러운 걸..."하며, 손주를 젖에서 떼어나간 내 팔에 안겨 준다. 어린것은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사지를 바둥거리며 내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본다. 울지도 않고 낯도 가리지 않고 반가운 인사나 하는 듯 무어라고 옹알거린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제 힘껏 감아쥐고는 놓지를 않는다. 까만 눈동자의 별같이 영롱함이여! 조그만 코와 입 모습의 예쁨이여! 나는 가슴에 옮겨드는 어린 생명의 따스한 체온에서 떨어지기 어려웠다. 이 고도의 어린 주인을 떼치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바다 위에는 저녁 바람이 일어 성낸 물결은 바윗돌에 철썩철썩 부딪친다. 내 얼굴에는 찬 빗발이 뿌리고 백양목은 한층 처창한 소리를 내며 회색빛 하늘을 비질한다. 내가 그 집에서 나오자 어린애는 다시 울었다. 걸어오면서도, 배를 타면서도, 등 뒤에서 '응아, 응아' 하는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들렸다. 머리 위에서 날으는 물새의 소리조차 그 어린애의 애처로운 울음 소리인 듯.
'그 어린애가 잘 자라는가?'
'그들은 그저 그 섬 속에서 사는가?'
그 뒤로 나는 바람 부는 아침, 눈 오는 밤에 몇 번이나 베갯머리에서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병없이 자라기를 빌어 주었다. 그 애처로운 울음 소리가 언제까지나 내 귓바퀴를 돌며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1년이란 세월이 꿈결같이 흘렀다. 며칠 전에 나는 마을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숭어 잡는 구경을 하려고 나갔다가 '가치내'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 노파와 젊은 며느리는 전보다도 갑절이나 반가이 나를 맞아 주었다. 그들은 1년에 한두 번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인듯... 그러나 어린애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어린애 잘 자라우?"하고 묻는데, 때묻은 적삼 하나만 걸친 발가숭이가 토방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오지 않는가? 작년에 내가 대접을 받은 꽃게 발을 뜯어먹으며, 두 눈을 깜박깜박 하고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오오, 네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나는 그 어린애를 끌어안고 해변을 거닐었다. 어린애는 1년 동안에 몰라보도록 컸다. 오래 안아 주기가 힘이 들 만치나 무거웠다.
그 날은 바다 위에 일점풍도 없었다. 성자의 임종과 같이 수평선 너머로 고요히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석조에 타는 붉은 물결을 멀리 보며 느꼈다. 이 외로운 섬 속,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교목과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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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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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흰구름 단상
9
하얀 마가렛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찌 꽃들은 그리도 자기의 때를 잘도 알아 피고 지는 것일까. 늘 조심스럽고 성실하면서도 명랑한 모습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조촐한 꽃. 수도자의 모습도 이와 같았으면 한다. 우리 성당 앞 십자로의 느티나무는 어느새 키도 많이 크고 잎사귀도 많이 달았다. 1991년 9월, 수녀회 60주년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가 해를 거듭할수록 풍채를 자랑하고 있구나. 느티나무야. 너는 매일 성당의 종소리를 제일 가까이 듣고 있지? 수녀들의 인사 이동이 있을 적마다 떠나는 이들과 보내는 이들의 겉모습과 속마음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볼 수 있지? 우리집에 드나드는 다양한 손님들의 표정과 마음도 읽을 수 있지? 네가 곁에 있으므로 우리는 늘 정겨운 느낌이 들고 든든하단다.
10
옷장에 걸어 두었던 옷들을 다 꺼내어 다림질하고, 떨어진 곳은 꿰매고 하는 일이 즐거웠다.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서류를 만지는 일과는 다른 느낌이다. 늘 별것도 없는 빤한 살림인데도 한번 움직이려면 무엇이 그리 많은지. 좀더 깔끔하고 소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미루어 두곤 하는 나를 반성한다. 정신의 소유도. 물질의 소유도 모두 필요 외에 여분으로 갖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방해한다. 예전에 비하면 수도자의 삶의 양식도 많이 편리해지고 부유해졌다고 볼 수 있다. 각 개인이 자기 스스로 절제하고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타락하기 쉬울 것이다. 원내에 새 건물을 짓는 어수선한 틈을 타 30년 만에 도둑이 두 번이나 들어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번은 우리가 깊이 잠든 밤에, 한 번은 우리가 길게 기도하는 주일 아침에 주방의 유일한 철창까지 부수고 들어와 마음놓고 볼일을 본 듯하다. 경리실의 높다란 유리문을 깨고 약간의 현금을 훔친 뒤 의자 뒤에 커다란 발자국까지 남겨 놓고 갔다. 그후로 할 수 없이 곳곳에 쇠창살을 하게 되니 날마다 투명하게 탁 트인 유리창으로 꽃, 나무, 하늘, 바다를 내다보던 나의 기쁨이 절반은 줄어든 셈이다. 30년 전의 이곳 산, 바다, 언덕은 평화로웠고, 문단속을 좀 소홀히 해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인심도 갈수록 각박해지고 이런 속에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도 답답하고 우울하다. 하지만 몇 차례나 우리를 몹시 놀라게 한 밤손님의 그 마음도 편치는 않으리라.
11
"수녀님, 우리 여기 놀이터에서 아주 조금만 놀다 가도 돼요."고 우리가 외출할 때마다 동네 어린이들은 우리 유치원을 가리키며 묻곤 한다. "그래. 조금만 놀다 가라.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응" 하고 대답하며 그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없음을 아쉬워한다. 어린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마음껏 뛰놀아야 어른이 돼서도 구김살없는 사랑을 할 수 있고 인생의 어려움도 잘 헤쳐 갈 수 있을텐데... 아이들의 웃음을 보니 내 마음도 밝아졌다. <시나라고 가는 길>이라는 어린이 시 낭송집도 들으며 동심으로 돌아가 본 날이었다. 어린이들의 순결한 목소리를 들으면 괜히 눈물부터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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