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29호 》 2022.8.14 (음 7.17)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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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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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이란 귀먹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눈먼 사람이 볼 수 있는 언어. ―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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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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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을 위한 변명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막말’이란 없다. 누가 나에게 쌍욕을 하더라도 그 말을 누가 하냐에 따라 막말이 되기도 하고 정겨운 말이 되기도 한다. 겉보기에 아무리 ‘점잖은 말’도 모욕감을 느끼거나 구역질 날 때가 있다. 말보다는 말의 주인이,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상황이 중요하다. 그 덕에 말은 끝없이 변화하고 원래의 의미에서 탈선한다.
어떤 말도 그 자체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어원이 속되고 차별적이더라도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효과를 미치지도 않는다. 권력이 개입될 때, 다시 말해 권력을 확인하거나 획득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이용될 때 말은 언어권력이자 경멸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때 말은 누군가를 대변하고 누군가를 동원한다. 그래서 막말은 (눌려 있던 무의식이 드러나는) 말실수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권력이 없다. 비슷한 크기의 상징자본도 없고 파급력 있는 미디어에 쉽게 접근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막말이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않도록 권력을 회수하는 것,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회수하는 것, 말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막말 생산 집단에 그 말을 되돌려주어 자신들이 한 말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푸념이 되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다시는 국가가 국민을 내팽개치지 않도록 ‘우리는’ 4·16 세월호 참사, 5·18 광주, 4·3 제주, 그리고 위험의 외주화와 비정규직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무수한 죽음의 비극과 부조리를 ‘징글징글하게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 뼈까지 발라 먹을’ 것이다.
뉴 노멀
‘자본주의4.0’, ‘패러다임 전환’, ‘아침형 인간’이란 말의 위성정당 같은 단어. 세상이 뿌리부터 바뀌고 있으니 ‘새로운 표준’에 맞춰 살라는 시장의 명령. 소비자의 생활 방식과 구매 패턴이 바뀌자 새롭게 떠오른 마케팅 전략.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 이후 지속가능성과 공생의 가치가 부각되고 개인도 현재의 삶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반영하면서 생긴 말. ‘새내기’란 말에 ‘헌내기’가 된 2학년처럼 어제의 습관은 냄새나는 ‘올드 노멀’이 된다. 어제와 결별함으로써 새 시대의 맨 앞줄에 선 듯 착각하게 만드는 마약 같은 말.
새말이 유행을 타면 지하실에 곰팡이 피어나듯 널리 퍼진다.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이때구나 하고 이 말을 쓴다. 코로나로 야구장에서 침을 못 뱉는 것도 뉴 노멀이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도, 온라인 강의와 배달문화가 확대되어도 뉴 노멀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번 총선을 평하며 ‘민주당 주도의 1.5당 체제’로 굳어지는 상황을 ‘뉴 노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쓴다.
당최 시공간의 연속성을 찾기 힘든 한국에서는 오늘 당면한 문제를 당면하기 위해 매일 아침 어제와 결별해야 한다. 못나고 늦된 사람들이 고유한 습관 한두 개를 고안해낼 즈음, 그건 이미 ‘올드’하니 버리라 한다. 아뿔싸, 우리는 매일 새로 태어나야 하는 아기이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인 나그네 신세. 하지만 사람은 단골집이 사라졌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그 앞을 서성거리듯 기억과 미련의 존재. 이 불온한 세계는 혁명적 단절보다는 누더기옷을 기워 입듯 과거를 수선하여 쓸 수밖에 없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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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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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잡이 - 김수영
폴리호태풍이 일기 시작하는 여름밤에
아내가 마루에서 거미를 잡고 있는
꼴이 우습다
하나 죽이고
둘 죽이고
넷 죽이고
..........
야 고만 죽여라 고만 죽여
나는 오늘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
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
정말 어제의 네 남편이 아니라니까
<196.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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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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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마고우(竹馬故友)
① 어렸을 때의 벗.(소꼽동무)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 오랜 친구.
《出典》'世說新語' / '晉書'
진(晉 : 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 : 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楊州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동의어】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유사어】기죽지우(騎竹之友), 죽마지호(竹馬之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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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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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5장
공자의 비유:에식에 쓰이는 신성스러운 그릇
인간이 금수나 무생물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과(능동적인 자기 계발의) 힘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공자는 예를놀랄만큼 적절하고 유의미한 이미지로 제시하고 잇다. 그러나 아무리 최근년의 비판적 연구의 경향이 (공자에 의한) <개인의 발견>을 강조하고 있다 해도, 의례와 예식에는 언뜻 보기에 개인이 강조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발견>이라는 이 특별한 어구를 쓴 휴즈는 바로 <인간이란 (더불어 사는) 자기 동료들과 연관을 맺고 그 속에 자신을 융합시키려는 시각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 있는 구벌을 덧붙이고 있다.
진영첩은 유사한 방식으로 <공자 철학 전체는 자아의 실현과 사회 질서의 창출>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휴즈와 진영첩이 <개인>-<사회>라는 두 개의 축을 제시하고 있지만, 유무기는 <개인>이라는 축을 더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결국 개인이 우주의 중추이다 공자께서는 정말 천재적인 멋진 솜씨로 윤리적 개인을 (인간의 본질로) 보게 되었다 이제 개인은 (공자의 관점에 의해) 바로 사회의 기본 단위가 되는 새로운 처지로 격상된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존엄성이 주장되기에 이른 것이다. 개인의 계발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크릴은 물론 공자의 사회적 관심의 방향을 공들여 논의하고 있지만, 그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맥에서 공자 사상에 들어 있는 <개인의 제일의적 중요성이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임어당은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도는 참으로 인간 자신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 문필가들의 대표적인 글에서 나온 이러한 구절에서, 우리는 광범위하게 되풀이되는 해석 방식을 보게 된다. 이런 간결한 어구를 인용할 때, 이들 어구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밑바침해 주고 풍부하게 해주는 앞뒤 문맥에서 일탈하여 (자의적으로) 의미를 왜곡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러한 위험 부담이 있다 해도, 이런 어구들을 인용하려는 나의 의도는 (그 어구들에 대한 많은) 주석들을 총괄하여 원융무결한 해석을 해내려는 것이 아니다. (공자의 핵심 사상에 대한) 개괄적 도식이 피치 못하게 요구될 경우, 나는 차라리 <사회>와 <개인>이라는 관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개인>에 우선적인 강조를 두면서 종종 도식화해 왔음을 명기해 두고자 한다. 자아 실현, 자기 완성, <자아의 완숙한 계발>, <개인의 궁극적 가치> 등 이런 (개괄적인) 말들은 공자가 발견한 아이디어들의 특성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공자는 <개인>과 <사회>라는 양극적 두 개념에 보다는 차라리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는 논의가 현재 이 책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주제이다. 개인과 사회라는 (상호 대립적) 관계로 논의를 구성하는 것은 오히려 서구인들의 선입관이나 사고틀들 또는 (본래 공자의 생각과 배치되는) 아마도 도가적, 불교적, 그리고 성리학자들의 관심 사항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더고 하겠다.
우리는 이 점을 추상적으로 논의하기보다는 공자 자신이 직접 우리들에게 제시한 많은 시사성이 있는 비유 중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를 깊이 생각해 봄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터득해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공이 물었다. <저는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너는 그릇이다>
<어떤 그릇입니까?>
<제사에 쓰는 옥 그릇이다>
이 구절은 대개 <논어>에서 다른 구절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와 대비되어 읽혀진다. 주석가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는, 위의 <위정> 2:11에 비추어 볼 때, 공자는 처음에는 그에게 합당한 자리매김을 해준 것이고, 그 다음 대답에서는 그에 대한 (첫번째 대답의 노골적인) 충격을 완화시켜 준 것이라고 여겨 왔다. 이러한 해석가들은 아마도 아래의 문단에서 개진될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오류를 범한) 내용으로 (위의 그 짤막한 대화의) 속뜻을 읽어 내려갔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선생님! 이상과 연관해서는 제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자공을 우리는 우선 상상할 수 있다. 공자는 대답했다. <너는 여전히 단지 특별한 목적에만 사용되는 그릇에 불과하다. 너는 도덕적으로 자각한 사람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 (즉 노동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의 특수한 (기술적인) 능력을 다스리거나 부릴 수 있는 폭넓은 (도덕적)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공자의 이런 뜻밖의 말에 자공은 진정한 군자가 되려는) 그의 열망과 평소의 낙간론이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자공은 단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은 저에게 더 큰 희망을 줄 수 있는 완곡한 말씀을 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온정적이며 격려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자공아, 그것에 대해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 비록 너는 여전히 부림을 받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너는 너와 같은 사람들 속에서응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사실 너는 가장 훌륭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나의 견해로서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와같이 줄을 따라 읽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다고 본다. 이런 해석으로부터 받아들일 만한 유일한 요소는 공자가 처음으로 자공의 지나친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으려고 했다는 것뿐이다. 공자는 그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하고, 그를 동요시키고, 그를 흔들어 놓고,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자기의 수양을 너무나 자만하고 있는) 자공으로 하여금 새로운 통찰을 통해 그의 삶의 방식을 반성해 볼 필요를 느끼게끔 해야만 했다. 공자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공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가장 잘 배려한 그런 방식으로 대답을 한 셈이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자공은 가장 잘 배려한 그런 방식으로 대답을 한 셈이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자공은 가장 쉽게 성공했으며 상당히 세속적인 면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학식이나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면에서 자공이 그의 개인적 성취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자공은, 그릇의 비유와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비유에 담긴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처음 대답은 그가 했던 다른 대답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적 효과를 고려한 역설법 중의 첫째가는 요소이다.
그러나 <너는 옥으로 된 제사 그릇이다>라는 공자의 두번째 진술은 앞의 충격에 대한 단순한 감정적 완화만은 아니다. 이 말은 앞의 역설법을 완결짓고 동시에 문제를 해소시킨다. 그것은 공자가 구변 좋고 자만에 빠져 있는 자공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깨닫게 해야 할 고도의 압축된 이미지 속에 포함된 핵심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무엇이 이런 핵심적인 가르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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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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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6장 포숙아, 관중을 추천하다
5. 천하 절색 식부인
채애공의 실수
관중이 국내 정치에 있어서 경제를 우선하여 산업 부흥 시책을 펼쳤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관중의 부중에는 각국에서 제나라로 오는 무역 상인(商人)들이 특히 많이 드나들었다.
"정승의 부중에 대부들보다 장사치들이 더 많이 찾아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관중은 이런 이야기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면 아예 무시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관중은 특히 남방에서 오는 상인들을 만나기 좋아했다. 웬만큼 바쁜 일이 있어도 남방에서 온 상인이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만나는 그였다. 이런저런 장사 이야기나 각 나라마다의 제후들 식성(食性)을 묻는가 하면, 경제 사정이나 백성들의 생활 모습 하나하나에 대해서까지 세세히 물어봐서 알아두곤 했다.
-제나라 관정승은 호색가(好色家).
이런 소문이 각국에 돌았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관중이 슬쩍슬쩍 규방의 일을 적당히 재미있게 꾸며 말하곤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했다.
"채나라 채애공(蔡哀公)도 상당한 호색가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관중이 상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던 사실이었다.
"식나라의 식후(息侯) 부인 규씨는 천하 절색이다."
이 이야기도 이들 남방에서 온 상인들이 관중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마침내 초나라 임금이 규씨 부인을 탐내어 식나라로 쳐들어갔다는 소문도 상인들이 관중에게 먼저 전해 줄 정도였다.
-초 임금의 식나라 침공.
그 전말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채나라 임금인 애공 헌무(獻舞)는 원래 진후(陳侯)의 장녀와 혼인을 했고, 식나라 임금인 식후(息侯)는 진후의 차녀, 그러니까 그 동생과 혼인했다. 따라서 채애공과 식후는 서로 동서지간이었다. 그런데 식후의 부인인 규씨는 천하 절색으로 그 명성이 사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채애공은 평소에도 이것이 항상 속으로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언니가 시집가면 동생이 잉첩으로 따라가는 습속도 있었으므로 동생까지 데려왔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한번은 식후의 부인 규씨가 친정인 진나라로 근친을 가게 되었다. 규씨 부인은 친정으로 가는 길에 이웃한 채나라에 들러 언니를 만나보고 갈 생각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채애공은 속으로 몹시 기뻐했다. '천하 절색 처제가 이번에 우리 나라에 온다 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대한 잔치를 열고 손목이라도 한번 잡아 봐야 되겠도다.' 그는 즉시 국경 부근까지 안내하는 사람을 보내어 식부인(息夫人)을 영접하게 하는가 하면, 별궁에다 그녀를 위해 크게 잔칫상을 차리도록 지시했다.
마침내 식부인이 왔다. 아름다운 처제를 보자 채애공은 그만 넋이 나가 어쩔 줄 모르더니 점차 흑심을 품었다. 그는 식부인을 끔찍이 환대하고 서로 마주 앉아 친절히 굴었다. 식부인은 곧 언니를 만나게 해주려니 하고 형부 채애공의 환대를 고맙게 받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채애공은 형부로서의 체통을 잃고 농지거리를 서슴치 않는 언동을 보였다. 은근히 음담 패설을 놓아서 식부인에게 추파를 던지고 부끄러움을 자극했다. 식부인은 마침내 화가 폭발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행원들과 함께 채나라를 떠나 버렸다. 그런데도 채애공은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라 마치 잡았던 물고기를 놓친 듯이 애석해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처제가 근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다시 한 번 수작을 부려 볼 기회가 있으려니 하고 기다렸다. 참으로 채애공의 음욕은 끝이 없었다. 그 후 식부인 규씨는 친정인 진나라에서 근친을 마치고 식국으로 돌아갈 때 아예 채나라를 거치지 않고 먼길을 돌아 자기 나라로 갔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자 남편인 식후에게 채애공의 무례함을 일일이 고했다.
식후의 고자질
식후는 채애공이 자기 부인을 모욕한 데 대해서 장차 앙갚음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초나라로 사자를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동시에 초문왕(楚文王)에게 비밀리에 고자질을 했다.
"채후(蔡侯)가 제국 힘을 믿고 기꺼이 초나라를 섬겨 대왕께 조공을 바치지 않건만 어찌하여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만일에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시어 이를 징벌하실 의향이 계시다면 제가 기꺼이 앞장을 서겠습니다. 방법으로 좋은 게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대왕께서 병사를 일으켜 우리 식국을 치는 척하시면 우리는 즉시 채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겠습니다. 원래 채후는 경망하기 때문에 반드시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올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나라와 초군이 합세하여 도리어 채군을 포위한다면 그까짓 채후쯤이야 어디로 도망쳐 달아나겠습니까. 손쉽게 사로잡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하면 어찌 대왕께서 채나라 때문에 노심 초사 근심할 일이 있으리오. 모든 나라가 대왕의 뜻을 높이 받들 것입니다."
'바라던 바로다!' 초문왕 웅자는 이 서찰을 받자 크게 기뻐했다. 사실 그 동안 초나라는 한동(漢東)의 모든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었다. 다만 채나라만이 여식(女息)을 제환공의 셋째 부인으로 들여 보내고 그 위세를 빌어 초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있어 마치 앓던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 앓던 이를 빼내게 되었으니 초문왕은 신바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초나라 군사는 계책대로 식국으로 쳐들어가고 이에 식국은 채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과연 채애공은 식부인 생각이 나서 멋도 모르고 병차를 일으켜 식국을 도우러 갔다. 그러나 채군은 영채를 세우고 휴식할 여가도 없이 초나라 복병에게 공격을 당했다. 채애공은 급히 식성(息城)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식후는 성문을 굳게 닫고 채군을 영접해 들이지 않았다. 이에 채군은 크게 패해서 달아나고 초군은 그 뒤를 추격했다. 채애공은 달아나다가 기진맥진해서 드디어 초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에 식후는 초문왕의 승전을 축하하며 부고를 열어 뇌물을 바친 후 초군을 배불리 먹이고 초문왕이 회군(回軍)할 때 국경까지 가서 전송했다. 채애공은 그제야 식후의 속임수에 빠져 이런 처지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포로가 된 채애공에게 식후에 대한 원한은 뼈에 사무칠 정도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초문왕은 귀국하자 즉시 분부했다.
"채후를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삶아라. 그 고기를 태묘(太廟)에 바치겠노라."
초나라 대부 육권이 곁에서 간했다.
"왕은 고정하십시오. 만일 채후를 지금 죽이면 이 소문을 들은 모든 나라 제후는 다 우리를 겁내고 두려워하여 마음속으로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돌려보냄으로써 모든 제후에게 우리의 덕을 보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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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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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민태원편" 민태원(1894~1935)
소설가, 번역 문학가. 호는 우보. 충남 서산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졸업. '페허' 동인. 번안 소설로 많은 감명을 준 작가로서 동아 일보 사회 부장 역임. 강건체, 화려체의 문장이 두드러진다.
청춘 예찬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이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피고 새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 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의 새가 운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안간은 사막이다.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 보이는 끝끝까지 찾아다녀도, 목숨이 있는 때까지 방황하여도 보이는 것은 거친 모래뿐일 것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 남는 것은 영락과 부패뿐이다. 낙원을 장식하는 천자만홍이 어디 있으며,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과실이 어디 있으랴?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간에 이상이 있음으로써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에서 고행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황야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하였는가? 밥을 위하여서, 옷을 위하여서, 미인을 구하기 위하여서 그리 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커다란 이상, 곧 만천하의 대중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밝은 길을 찾아 주며, 그들을 행복스럽고 평화스러운 곳으로 인도하겠다는 커다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지 아니한 목숨을 사는가시피 살았으며 그들의 그림자는 천고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현저하여 일월과 같은 예가 되려니와 그와 같지 못하다 할지라도 창공에 반짝이는 뭇 별과 같이, 산야에 피어나는 군영과 같이, 이상을 실로 인간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라 할지니, 인생에 가치를 주는 원질이 되는 것이다.
이상! 빛나는 귀중한 이상! 그것은 청춘의 누리는 바 특권이다. 그들은 순진한지라 감동하기 쉽고, 그들은 점염이 적은지라 죄악에 병들지 아니하고, 그들은 앞이 긴지라 착목하는 곳이 원대하고,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은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보라, 청춘을!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는 생의 찬미를 듣는다. 그것은 웅대한 관현악이며, 미묘한 교향악이다. 뼈끝에 스며들어가는 열락의 소리다. 이것은 피어나기 전인 유소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시들어 가는 노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오직 우리 청춘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청춘은 인생의 황금 시대다. 우리는 이 황금 시대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 이 황금 시대를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하여 힘차게 노래하며 힘차게 약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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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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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일기
봄꽃들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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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하다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지. 손질을 많이 해도 비가 새는 낡은 인간의 육신도 오래 쓰고 나면 고장나게 마련이다. 짧아지는 겨울 오후의 햇빛처럼 갈수록 짧아지는 나의 시간들. 당연히 해야 할 일도 자주 잊어버리는 건망증도 웃음으로 받아들이며 기쁘게 살자. 불안과 초조함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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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랑 안에선 누구나 가족이 됨을 느낀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가끔은 아기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해서 지어 준 고운 이름들 - 시내, 단비, 은비, 서인, 이슬, 보리, 아린, 수아 등을 불러 보며 기도 안에 아기들을 자주 안아 준다. 아직다 자라지도 않은 머리에 아증스런 꽃핀을 꽂아 찍어 보낸 아기의 사진들을 보면 내가 그애들의 대모가 된 듯한 마음이다. 언젠가 나와 같은 이름의 딸을 가진 시인 승희가 `수녀님은 우리 아이의 `엄마 요정(fairy-godmother)`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어린 딸을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 라고 써 보낸 편지의 한 구절도 떠오른다. 아직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으로 가깝게 이어지는 고운 인연이 많음을 오늘은 새삼 고마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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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눈이 빠지게 널 기다렸다."고 내게 눈을 흘기며 마실 물을 건네 주던 고운 친구야,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안에서 찰랑이는 물소리를 내는 그리운 친구야. 네 앞에서만은 항상 늙지 않은 어린이로 남아 있고 싶다. 내가 가끔 싸움을 걸어도 싸움이 되지 않는, 넓은 대지 같은 친구야. 네가 가끔 `돌깍쟁이` 라고 부르는 나도 네 앞에서만은 늘 솔직하지 않을 수 없다. 네 앞에서만은 피곤하고 목마르다는 투정도 좀 부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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