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25호
2022.8.6 (음 7.9)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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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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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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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은 연애와 같다. 어떤 바보라도 시작할 수 있으나 끝마무리를 짓는 데는 꽤 기술이 필요하니까.
― 맨로크프트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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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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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거래하는 냄새
이름을 안다는 건 애정의 문제다. 나처럼 회색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분하지 못한다. 처제의 고양이가 페르시안이란 것도 오늘 알았다. 무디고 무정하면 ‘꽃’이나 ‘고양이’ 정도로 세상을 성기게 기억한다.
추상은 공통점을 찾으려는 마음의 습관이다. 감각도 추상을 거친다. 다른 감각은 신경세포에서 느낀 감각을 시상(視床)이라는 중계장치를 거쳐 대뇌에 전달하는데, 후각만이 중계장치 없이 바로 전달한다. 게다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감정과 기억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딴 감각보다 냄새가 오래 기억나는 이유다.
이러한 후각의 직접성 때문에 냄새를 언어로 추상화할 필요가 적었을 것이다. 시각, 청각, 미각어는 사물과 분리되어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물 없이 ‘하양, 검정, 빨강, 노랑, 파랑’의 색깔을 떠올릴 수 있다. 음식 없이도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의 감각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냄새는 다르다. 냄새를 감각하더라도 그것을 담는 어휘가 모자란다. 기본 어휘를 정하기도 어렵다. ‘구린내? 지린내? 비린내? ‘쩐’내? 노린내? 퀴퀴하다? 매캐하다?’ 잘 모르겠다. 추상화가 덜 된 냄새는 주로 사물과 직거래한다. ‘입냄새, 발냄새, 방귀냄새, 짜장면냄새, 곰팡이냄새…’ 끝이 없다. 추상보다는 구체에 가까우니,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직접 겨냥한다. 그래서 우리는 늦은 밤 옆 사람이 뭘 먹고 마셨는지를 쉽게 알아차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도 맡는다. 미국인들은 봉준호 감독에게서 ‘마늘냄새’를 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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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가라앉히기
사람들이 질병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알려면 말을 둘러보라. ‘감기, 골병, 멍’은 ‘든다’고 하지만, ‘배탈, 종기, 욕창’은 ‘났다’고 한다. ‘노망’은 나기도 하고 들기도 한다. 질병을 무서운 인물로 의인화하여 ‘암, 심장병, 대상포진, 감기, 에이즈’에 ‘걸렸다’고 하기도 한다. 몸의 안팎을 드나들거나 괴롭히는 존재.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거나 주변을 떠돌다가 몸 안으로 불쑥 기어들어 오는 존재. 이런 표현들은 모두 은유이다. 인격체가 아닌데도 마음대로 몸을 드나들며 괴롭히는 존재로 상상한다.
코로나에는 ‘감염되다’라는 말을 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녀석은 우리를 몰래 ‘물들여’ 며칠 숨었다가 모습을 드러내니 더 두렵다. 그래도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기만 하면 감기 대하듯 할 것이다.
니체는 ‘질병 자체보다 자신의 질병을 생각하느라 고통받지 않도록 병자들의 상상력을 가라앉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는 곤경에 처해 있지만, 이 곤경을 신의 심판이나 인과응보로 볼 일은 아니다. 이 일이 다 지나간 뒤에 우리는 어떤 언어로 바이러스의 창궐을 생각하게 될까. 어떤 이들은 질병을 친구로, 삶의 여정에 오는 손님으로, 삶의 일부로 대하자고 한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질병을 침략자로 보고 삶과 죽음을 적대적 관계로 보는 언어를 몰아내지 않으면 삶과 죽음을 제대로 대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은유 없이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제하고 피하려 애써야 할 은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수전 손택)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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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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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법전서와 혁명(六法全書와 革命) - 김수영
旣六法全書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불상한 백성들아
불상한 것은 그대들 뿐이다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는 그대들 뿐이다
최소한도로
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
혁명정부가 구육법전서를 떠나서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한
혁명을-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 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보라 금값이 갑자기 팔천구백환이다
달걀값은 여전히 零下二八환인데
이래도 그대들은 悠久한 公序良俗精神으로
위정자가 다 잘해줄줄 알고만 있다
순진한 학생들
점잖은 학자님들
체면을 세우는 문인들
너무나 투쟁적인 신문들의 보좌를 받고
아아 새까맣게 손때묻은 육법전서가
표준이 되는 한
나의 손 등에 장을 지져라
4.19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
허기야
혁명이란 단자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
신물하고
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
쓰는 말밖에는 아니되지만
그보다도 창자가 더 메마른 저들은
더 이상 속이지 말아라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
<1960.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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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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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자기(自暴自棄)
- 절망 상태에 빠져서, 자신을 버리고 돌보지 않음. 《出典》'孟子' 離婁篇
전국시대를 살다간 아성(亞聖) 맹자(孟子)는 '자포(自暴)'와 '자기(自棄)'에 대해《맹자(孟子)》'이루편(離婁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自暴)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自棄)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禮義道德)을 헐뜯는 것을 '자포(自暴)'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인(仁)이나 의(義)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한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원래 선(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仁)'은 편안한 집[安宅]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의(義)'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로(正路:正道)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孟子曰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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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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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4장
보수적 전통주의자인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사람인가?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노나라의 예 역시 본질적으로는 (다른 변방 지역의 관습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특정 생활 방식의 총체인 것이요, 따라서 당시 세계의 여러 실제적인 도전들을 해결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증성을, 그렇다면 공자는 어떻게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논어>에서 이런 문제를 꼭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더 말할 나위 없이 공자는 상고 시대에 완벽했던 원래의 예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덕적, 정치적으로 타락한 결과 이런 혼란이 야기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가 제기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왜 이런 식의 대답이 그 어떤 다른 대안적인 문제 제기를 아예 차단해 버릴 수 있을 만큼 (공자에게는) 그렇게 강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었던가? 당시의 일상적 삶에서 분명하게 도출될 수 있는 적어도 (공자가 제시한 대답과) 같은 수준의, 아니 (우리 현대인들의 눈에는) 그것보다 훨씬더 강한 설득력이 있을 수 있는 다른 여러 가지 대안의 가능성을 제쳐두고, 어ㄷ게 해서 공자는 오직 이러한 대답에만 도달할 수 있었던가? 우리가 이것을 (공자라는 개인의) 한정된 사고력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위대한 사상가요, 교육자인 공자가 핵심적으로 생각했던 문제들의 구성이나 대답의 방식안에 있을 수 있는 그 어떤, 보다 설득력과 보편성이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 하는 점을 적어도 이제 우리는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근거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공자를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자의 가르침을 단지 당대의 시대작 위기의 본질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하여 아무런 창의력을 제시하지 못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갈등과 혼란에 새로운 비젼을 제시했던 창의적인 대안으로 보아야만 한다. 앞으로의 서술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제시하지 않고 오직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얘기를 새롭게, 내가 희망하는 바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정말 계발적인 방식으로 주장해 보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공자를 단순히 과거의 제도와 문화의 현상 유지만 고집스럽게 변호하는 고풍스런 사람이라기보다는 위대한 문화 개혁가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앞의 어딘가에서 공자가 예의 기존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 지적했듯이, 공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개념 전체를 변혁시켰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는 새로운 이상의 창조자이지 결코 낡은 이상의 변호인은 아니었다. 우리는 잠시 그를 새로운 이상의 제안자로 보기로 하자. 적어도 무엇보다 먼저 공자의 안목이나 그가 구사한 상투어의 표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갖는 역사적 역할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고대에 있었던 조화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지니는 실제적인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대 중국에서의) 지역적 전통을 다시 해석해 보고 이를 재창조할 수 있는, 새롭고도 보편적인 질서를 산출해 내려는 데 있었다고 하겠다.
공자가 그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서 파악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인 접촉 관게를 통해서 (과거 변방과 중심의 제후국들간의 문화적 이질성이 사라지고, 점차) 새로운 유사성의 출현, 말하자면 일찍이 노나라를 포함한 좁은 지역에만 한정되었던 가치 개념들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새로운 공유의 현상이 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는 문학, 음악, 법률, 정치의 여러 형식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확대 공유되는 현상이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역사적 증거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을 판단해 보면, 과거에 위대했던 문명의 퇴화가 아니라 새롭고도 보편성을 지닌 문명으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그 당시에 막대한 인구의 급증이 있었다. 그리고 생산 기술과 교통 수단의 확대에 있어서도 일대 약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지역적으로 고립되고, 상이한 문화를 가졌던 다수의 민족들이 이제는 보다 더 긴밀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관념, 생활 양식, 관습, 언어의 교류와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공자는 (당대의 시대적 전환을) 퇴화의 과정으로 보고 당대의 혼란을 세쇠도미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실상 낡고 소규모적이며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보다 원시적이고 촌스러운 여러 집단들이 이제 새로운, 좀더 거대한 단일 사회로 통합되는 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부수되어 나오는 혼란과 무질서였던 것이다. 과거에 많건 적건 서로 고립되어 이질적이었던 (변방의 반 야만적) 사회들, 그렇지만 (당시의 사회적 대변혁 덕분에 비로소 문화 수준이 높은, 중심의 노나라와 더불어) 거대한 하나의 지정학적 공동체로 성장하는, 면적도 넓고 인구도 많은 (변방 지역들의 저급) 문화들에 대하여, 이제 공자가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몇몇 제후국의 (고급스런 중심) 문화의 지배에 주목했다는 사실은 정말 너무나도 자연스런 것이라고 하겠다. 면적이 적은 노나라의 상대벅으로 약한 국력을 감안할 때, 노나라 사람 공자가 (사회적) 질서와 통합을 위한 일차적 근거로서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문화적 정복에 눈을 돌린 것은 오히려 당연한 책략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공자는 주변의 강대한 제후국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많은 갈등들을 둘러보았고, 동시에 또한 그들 사이에서 노나라 지역의 고급 문화에서 연원하는 (새로운) 문화 수용의 징후들을 보았음을 우리응 상정하지 ㅇ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공자가 모든 민족들이 이제 하나의 단일한 인간적인 실천과 이상의 체계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들 모두가 단합하여 천하가 태평성대할 수 있는 가능성-즉 하나의 이상-을 보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침내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새로운 사회의 기본 구조로 노나라 문화의 수용이라는, 이미 명백히 드러난 경향을 더욱 자극하고 극대화하는 정력적인 계도 작업을 통해서야만 그러한 이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생각된다.
공자의 비젼은, 사실 다른 어느 것보다도 중국이 실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참된 것이었다. 그것은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중심 지역의 통일된 문자, 언어와 여러 예식 형태들로부터 전체적으로 영감을 받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 조직에 기초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통합 문화의 출현에 대한 비젼이었다. 당시의 정황속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이상이 어떻게 정립되어 설득력 있게 설파될 수 있었던가? 당장 드러나는 것은 불가사의한 역설뿐이다. (당대의 사회적 대전환이라는 와중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이상이란 바로 누구나 다같이 동일한 이념과 실천의 체계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거대한 사회에 대한 이상이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이 자기들 관습대로 각기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다양한 방식들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런 방식들은 어떻게 생겨 났고, 어떻게 정당성을 획득했으며, 유지되어 왔는가?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이중적이다. 첫째는 전통에 대한 강조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다양한 인습적 행위들이 확립되는 데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효력 있는 명령, 공동의 합의, 그리고 수용된 전통의 계승이 그것들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공자에 의하여 그 중요성이 암묵적으로 인정된 것들이다. 진실한 왕이 길을 선도하고, 백성들이 동의하여 자발적으로 따르는, 즉 가르쳐지고 따르게 되는 것이 곧 전통이며 이는 선인들의 생활 방식이다. 전통의 내용이 하늘의 의지 즉 <명령>의 다른 형식)라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그 전통은 곧 선인들의 도와 일치한다. 왜냐하면 하늘의 의지는 멋대로 (새롭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자는 역시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 선인의 도, 즉 전통에 첫째가는 우위성을 인정하였다. 왜 공자는 궁극적으로 전통을 일차적으로 강조해야만 했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몇 가지 중요하지만, 부차적 이유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은 (남의 가르침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결코 남들을 지도하지는 못한다. 이 점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지식과 문화가 결여되어 있고, 타인들에게 바람직하게 행동할 것을 계도할 수 있는 아무런 전통도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공동의 합의는 배경적인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그 당대의 통치자들은 흔히 전제주의적이었고 권력 추구에 매몰되어 있었음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선한 통치지가 필요했으며, 그래서 그런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하기 위해서 통치자는 선에 대한 비인격적인(객관적인) 기준을 가져야만 했다. 비인격적안 가준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전통이나 천명이었다.
공자가 <논어>에서 천에 대하여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 역할은 분명하지도 않고 그다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논의된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공자 철학의 결정적 영향력은 그의 정치에 대한 통찰에 있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통찰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신학>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현세에서의 인간의 삶에 보다 깊은 관심을 쏟았다. 공자의 가장 내용적인 철학적 통찰의 하나는 바로 사람의 인간성은 예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동물이나 무생물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관습을 잘 배워서 실천하는 일 때문이라고 보았다. 폭력, 협박, 명령에 의한 (강제적, 수동적 행위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잘 배워 익힌 관습의 실천 속에는 얼마나 신비스러우며 얼마나 인간적인 (즉 자발적 능동적인) 힘이 깃들어 있는가를 공자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공자는 인간만이 지니는 존엄성과 관련된 힘이 신성한 의식이나 예식들과의 관계에서 특정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예식은 행위 자체 안에 생리적인 조화와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강조되는 관습화된 실천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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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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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6장 포숙아, 관중을 추천하다
3. 관중의 경제 정책
제 . 송 연합군의 노나라 침공
관중은 바닷가의 여러 고을들을 순찰하느라 도성을 떠나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대사마(大司馬) 왕자 성부(成父)가 그를 수행하고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제환공에게 간했다.
"지금 중부께서 지방 순시중이고 대사마 역시 도성을 떠나 있습니다. 군사를 일으키심은 당분간 뒤로 미루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환공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중부(仲父)가 이 곳에 있어도 송(宋)과 연합하여 노(魯)를 치는 일이라면 적극 찬성할 것이 틀림없소. 그러니 모두들 다른 말들은 마시오."
다른 사람들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한편 송나라 송민공은 예전부터 늘 제나라와 협력해 왔기 때문에 제나라 사신의 청을 듣자 즉시 승낙했다. 이리하여 제 . 송 두 나라는 6월 초순에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낭성(郞城) 땅에서 만나 연합하기로 했다. 어느덧 5월 말이 되었다. 송나라에서는 남궁장만(南宮長萬)이 장수가 되고, 맹획(猛獲)이 부장(副長)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했다. 제나라에서는 포숙아가 장수가 되고 중손추가 부장이 되어 출발했다. 이에 제군은 낭성 땅 동북쪽에 영채를 세우고, 송군은 동남쪽에 영채를 세웠다. 포숙아가 중손추에게 말했다.
"이번에 또 다시 패하면 어찌 얼굴을 들고 주공을 뵈오리오. 그러니 매사에 조심하고 군율을 엄히하여 군심(軍心)이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오."
중손추는 스스로 몸을 바르게 하고 조심하니 제군의 영채는 정연하고 기세가 크게 올랐다. 한편 남궁장만은 자신의 용력(勇力)을 크게 믿는지라 별 방비없이 진을 치고 있었다. 노장공은 제 . 송 두 나라 군사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낭성 땅에 도착해서 진을 치고 곧 공격해 올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모든 신하들과 대책을 상의했다.
"포숙아가 장작 땅의 패전에 이를 갈고, 송나라 군사까지 데리고 왔으니 이를 어떡하면 좋겠소? 더구나 송나라 남궁장만은 촉산(觸山)에 있는 가마솥을 들어올렸다는 천하 장사인데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공자 언(偃)이 아뢰었다.
"신이 가서 그들의 동정을 한 번 살펴본 후에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노장공은 이를 허락했다. 공자 언이 야밤을 이용하여 제 . 송 양 진영을 은밀히 살펴 보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포숙아는 매사에 심히 조심하여 제나라 진세가 매우 정연하고, 보초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살피고 있더이다. 그런데 송나라 남궁장만은 기고만장하여 행오가 어지럽고 군진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더이다. 그러니 우리가 일지군을 남쪽 성문으로 몰래 내보내서 방비 없는 송군을 기습하면 가히 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대군으로 덮치면 남궁장만의 송군은 크게 패하여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송군이 패하면 제군 혼자서 우리와 싸우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자기 본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노장공이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남궁장만의 괴력(怪力)을 어찌 당할 것인가?"
공자 언이 간청했다.
"신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의 용력이 뛰어나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그제서야 노장공이 허락했다.
"그대가 기습 공격을 한다면 과인이 그대 뒤를 따라 대군(大軍)으로 접응하리라."
이에 공자 언은 기습 준비를 하는데, 호랑이 가죽을 백여 장 가져다가 말에다 둘러 씌우고, 기(旗)를 눕히고, 말발굽에다 천을 감싸 소리가 안 나게 했다. 그러고는 남문을 열고 은밀히 나갔다. 그들은 조용조용 발소리를 숨기고 송군 영채로 가까이 갔다. 송군의 진지는 그야말로 기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공자 언은 군사들에게 명해서 일제히 횃불을 들게 했다. 시뻘건 불길이 사방을 대낮처럼 밝혔다. 이번에는 일제히 금고(金鼓)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그 때 송나라 군사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가 요란한 금고 소리에 질겁을 하고 일어났다. 사방에는 시뻘건 불길이 오르고, 울리는 북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요란한데 불빛 사이로 보니 수십 마리의 호랑이 떼가 맹렬하게 덮쳐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에 크게 놀란 말들은 미친 듯이 고삐를 끊고 달아나고, 병사들은 질겁하여 모두 제 살길을 찾아 이리 몰리고 저리 뛰었다. 남궁장만이 고래고래 소리치고 외쳐도 이미 흐트러진 군세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남궁장만은 겨우 병차 한 대를 찾아 타고 도망쳤다.
도망치는 남궁장만
그 때 노장공이 이끄는 본대가 공자 언과 합세하여 송군을 시살하고 들어오니 송나라 군대는 열의 아홉이 죽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나머지 송군과 남궁장만은 밤새 도망쳤다. 마침내 국경 지대인 승구(乘邱) 땅까지 왔다. 남궁장만이 뒤를 돌아보니 노나라의 추격병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남궁장만이 병차를 멈추고 부장 맹획을 돌아보면서 탄식했다.
"이기든 지든 노나라 놈들과 양단간에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도다."
맹획은 즉시 찬성하고 말고삐를 돌려 추격해 오는 노나라 군대 쪽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맹획과 공자 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남궁장만은 분기 탱천해서 죽을 힘을 다해 장창을 높이 들고 바로 노장공의 본대에 달려들었다. 남궁장만은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둘러 노군을 쳐죽였다. 노군은 남궁장만의 용맹에 질겁을 하고 놀라서 감히 근접 하지를 못했다. 노장공이 전손생에게 말했다.
"그대는 원래 천하 장사로 이름을 날렸으니 능히 남궁장만과 승부를 겨룰 수 있겠느냐?"
이에 전손생은 즉시 달려나가서 남궁장만과 싸웠다. 노장공은 높은 대(臺)에 올라가서 그들의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전손생은 힘이 남궁장만에 미치지 못했다. 노장공이 좌우 사람에게 분부했다.
"과인의 금복고(金僕姑)를 가지고 오너라!"
좌우에서 화살을 바치자, 노장공은 화살을 시위에 먹여 남궁장만을 겨누고서 쏘았다. 화살은 번개처럼 날아가 남궁장만의 오른편 어깨를 뚫었다. 남궁장만은 손으로 화살을 뽑아 버렸다. 이 순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손생은 창으로 남궁장만의 왼편 허벅지를 찔렀다. 남궁장만이라해도 어찌 견딜 것인가? 고목나무 쓰러지듯 병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일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 때 노나라의 전손생이 달려와 얼른 남궁장만의 손을 묶었다. 아무리 힘이 장사라한들 그대로 묶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맹획은 싸우다가 남궁장만이 적에게 사로잡히는 걸 보고는 병차까지 버린 채 달아났다. 장수를 잃은 송나라 군은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었다. 노나라 군사들은 크게 이긴 후 돌아갔다.
제 . 노 . 송 삼국의 화해
포숙아는 송나라 군대가 참패하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곧 군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는 관중이 해안가 순시를 마치고 도성에 귀환해 있었다. 관중이 소식을 듣고, 집안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않는 포숙아를 찾아가 위로했다.
"싸움터에서 한번 이기고 한번 지는 일은 비일비재한 것, 더욱이 충분한 군비 지원없이 원정군을 이끌었으니 어려움이 많았을 걸세. 이번 일에 너무 자책하지 말게나."
포숙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책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네. 내 어찌 그런 시정 잡배만도 못한 자들과 함께 대사를 도모했는지 그게 참으로 딱할 따름일세."
관중이 은근히 물었다.
"그대가 말하는 시정 잡배란 누구를 말함인가?"
"송나라의 남궁장만이란 놈 말일세."
관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환공에게로 가서 앞으로의 대책을 함께 상의하자고 일렀다.
"공(功)이 없음이라 당분간 자숙하고 싶네. 그대가 알아서 해주게."
포숙아는 사양했다. 이에 관중은 제환공에게 송 . 노 양국과 화평하기를 건의하고, 그 우선으로 습붕을 주왕실에 보내어 제환공이 즉위했음을 보고한 후 제환공과 왕진(王珍)의 결혼을 추진토록 했다. 주장왕은 이 혼사를 노장공에게 주관토록 하여 마침내 제환공과 왕진의 혼사를 성립시켰다. 자연히 노나라와 제나라는 화합하고, 싸웠던 감정을 버리고 형제의 의를 맺었다.
그 해 가을이었다. 송나라에 큰 홍수가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 위로하고 구제 물품을 보냈다. 노장공도 이 소문을 듣고서 사자를 보내 위문했다.
"우리는 이미 제나라와 우호를 맺었거늘 어찌 송나라만을 미워할 수 있으리오."
송나라는 이에 감격하여 다시 노나라로 사자를 보내 고마움을 표하고 더불어 남궁장만을 살려 보내 주시면 더욱 고맙겠다고 청했다. 노장공은 쾌히 승낙하고 그를 송나라로 돌려 보냈다. 이후 제·노·송 세 나라는 서로 화친하여 평화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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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신채호편"
신채호(1880__1936) 사학자. 호는 단재. 충북 청주 출생.
순수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당시의 식민주의적인 일체의 학설들을 배격하었으며 항일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로 언론계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1
한 사람이 떡장사로 득리하였다면 온 동리에 떡방아 소리가 나고, 동편 집이 술 팔다가 실패하면 서편 집의 노구도 용수를 떼어 들이어, 진할 때에 같이 와~하다가 퇴할 때에 같이 우르르 하는 사회가 어느 사회냐. 매우 창피하지만 우리 조선의 사회라고 자인할 수밖에 없다. 삼국 중엽부터 고려 말일까지 염불과 목탁이 세가 나, 제왕이나 평민은 물론하고 남은 여에게 권하며, 조는 손에게 권하여 나무아미타불한 소리로 팔백 년을 보내지 안하였느냐. 이조 이래로 유교를 존상하매, 서적은 사서오경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서오경을 되풀이한 것뿐이며, 학술은 심, 성, 이, 기의 강론뿐이 아니었더냐. 이같이 단조로 진행되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예수교를 믿어야 하겠다 하면, 삼두락밖에 못 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에 바치며, 정치 운동을 한다 할 때에는 이발사가 이발관을 뜯어 가지고 덤비나니, 이같이 뇌동부화하기를 즐기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2
개인도 사회와 같아 갑종교로 을종교를 개신하거나, 갑주의로 을주의에 이전할 때에 반드시 주먹을 발끈 쥐고 얼굴에 핏대가 오르며 씩씩하는 숨소리에 맥박이 긴급하며, 심리상의 대혁명이 일어나 어제의 성사가 오늘의 악마가 되어 무형의 칼로 그 목을 끊으며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구적이 되어 무성의 총으로 그 전부를 도륙한 연후에야 신생활을 개시함이 인류의 상사어늘, 근일의 인물들은 그렇지도 안하다. 공자를 독신하던 자가 이제야 예수를 믿지만 벌써 36년 전의 예수교인과 같으며, 제왕의 충신으로 자기하던 자가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존봉하지만, 마치 자기의 모복증에서부터 민주의 혼을 배워 가지고 온 것 같으며, 그러다가 돌연히 딴 경우가 되면 바울이 다시 안연도 될 수 있으며, 당톤이 다시 문천상도 될 수 있으며, 바쿠닌의 제자가 카이제르의 시종도 될 수 있으니, 이것이 무슨 사람이냐. 그 중에 아주 도통한 사람은 삽시간에 애국자, 비애국자, 종교가, 비종교가, 민족주의자, 비민족주의자의 육방팔면으로 현신하나니 어디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그 원인을 소구하면, 나는 없고 남만 있는 노예의 근성을 가진 까닭이다. 노예는 주장은 없고 복종만 있어, 갑의 판이 되면 갑에 복종하고, 을의 판이 되면 을에 복종할 뿐이니, 비록 방촌의 심리상인들 무슨 혁명할 조건이 있으랴.
3
손일선의 삼민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을 혼동하여 그리 찬탄할 가치는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주의는 주의다. 우리의 사회에는 수십 년 동안 지사, 위명자가 누구든지 한 개 계시한 소주장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시의 활용에는 썩 편리하였다. 실업을 경영하는 자를 보면 나의 의견도 실업에 있다 하며, 교육을 실시하려는 자를 보면 나의 주지도 교육에 있다 하며, 어깨에 사냥총을 메고 서북간도의 산중으로 닫는 사람을 보면 나도 네 뒤를 따르겠노라 하며, 허리에 철추를 차고 창해역사를 꿈꾸는 자를 보면 내가 너의 유일한 동지로다 하고, 외인을 대하는 경우에도 중국인을 대하면 조선을 유교국이라 하며, 미국인을 대하면 조선을 예수교국이라 하며, 자가의 뇌 속에는 군주국, 비군주국, 독립국, 비독립국, 보호국, 비보호국, 무엇이라고 모를, 집을 수 없는, 신국가를 잠설하여 시세를 따라 남의 눈치를 보아, 값나가는 대로 상품을 삼아 출수하는도다. 애재라. 갑신 이후 40여 년 유신계의 산아들이 그 중에 시종 철저한 경골한이 몇몇이냐.
4
어떤 선사가 명종할 때 제자를 불러 가로되,
"누워 죽은 사람은 있지만 앉아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앉아 죽은 사람은 있지만 사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바로 사서 죽은 사람은 있으려니와 거꾸로 사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없습니다. 인류가 생긴 지가 몇만 년인지 모르지만 거꾸로 사서 죽은 사람이 있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선사가 이에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사서 죽으니라. 이는 죽을 때까지도 남이 하는 노릇을 안 하는 괴물이라, 괴물은 괴물이 될지언정 노예는 아니 된다. 하도 뇌동부화를 좋아하는 사회니 괴물이라도 보았으면 하노라. 관악산중에 털똥 누는 강감찬의 후신이 괴물이 아니냐. 상투 위에 치포관을 쓰고 중국으로 선교온 자가 또한 괴물이 아니냐. 이는 군함, 대포, 부자유, 불평등, 생활 곤란, 경제 압박 모든 목하의 현실의 대적이지 못하고 도피하여 이상적 무릉도원의 생활을 찾음이니 무슨 괴물이 되리오.
5
조선인같이 곤란, 고통을 당하는 민족 없음을, 따라서 조선에서 무엇을 하여 보자는 사람같이 가읍할 경우에 있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우가 그렇다고 스스로 퇴주하면 더욱 자살의 혈에만 근할 뿐이며, 남의 용서를 바라면 한갓 치소만 살 뿐이니, 경우가 그렇다고 남의 용서를 바랄까, 치소만 살 뿐이니라. 스스로 퇴거할까, 더욱 자살의-중간 누락-경우가 이러므로 조선에 나서 무엇을 하려 하면 불가불 그 경우에서 얻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안순암이 처음 이성호를 보러 가서 목이 말라 물을 청하였다. 그러나 물은 주지 않고 이야기만 한다. 밤이 으슥한 뒤에, 성호가,
"이제도 목이 마르냐?" 하거늘,
"사실대로 목마른 증은 없어졌습니다."
한즉, 성호가 가로대,
"참아 가면 천하의 난사가 다 오늘 밤의 목과 같으니라."하였다. 이같이 목말라도 참고, 배고파도 참고, 불로 지져도 참고, 바늘로 손, 발톱 밑을 쑤셔도 참아, 열화지옥의 만악을 다 참아 가는 이는 아마 도학 선생 같은 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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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일기
봄꽃들의 축제
3
바깥에 머물던 세월보다 수도원 안에 머문 세월이 더 많아서일까. 잠시 수도원을 떠나 있어도 내 귀엔 문득 귀에 익은 종소리가 들리고, 수녀들이 함께 외우는 기도소리가 들리고, 풀밭에서 함께 웃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어디엘 가나 계속 되는 이 환청을 나는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4
서원반지를 20년이나 끼고 있던 손가락이 어느 날부터 조금씩 부풀더니 매우 아프기 시작했다. 반지를 빼고 나서도 오래 아프고 말을 안 듣는다. 늘 끼고 있으면서도 잊고 살았던 내 동그란 반지처럼 너무 가깝기에 잊고 산 듯한 나의 하느님. 약속의 하느님을 오늘은 죄송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그리워했다. 나는 그분 앞에 늘 염치없는 사람이다.
5
섣부른 충고, 경솔한 판단, 자기 자랑, 가벼운 지껄임 - 하루의 모든 말들이 내가 주어 온 침묵의 돌들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며칠 전 안동에 갔다가 700년 되었다는 용계 은행나무 아래서 기념으로 몇개 주어 온 침묵의 돌들이 밤마다 깊고 고요한 눈길로 나를 길들인다. 침묵으로 노래하라. 침묵으로 기도하라. 침묵으로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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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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