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21호
2022.8.2 (음 7.5)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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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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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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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평생을 두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
― 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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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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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오는 게 맞나
문법은 세계를 이해하는 마음의 습관이다. 문장이 ‘주어’와 ‘서술어’로 짜여 있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주체’(참여자)와 ‘작용’으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건을 ‘주체’와 ‘작용’으로 나눈다고 해서 모든 언어가 같은 방식을 택하지는 않는다. 경험을 언어화하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한국어는 ‘비가 온다’고 하지만 이탈리아어에서는 ‘피오베’(piove; rains)라는 동사 하나면 된다. 홍콩 부근의 광둥어에서는 ‘하늘이 물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틴록수이’(天落水)라고 표현한다.
사건을 주체와 작용으로 나누는 문법에 길들여진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대상이 외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비가 오다’가 자연스러워 보이겠지만, 이미 오고 있는 비가 다시 온다고 하니 이상하다. ‘얼음이 얼다’라는 말을 곱씹어보라. 이미 언 것(얼음)이 다시 얼어야 한다는 이상한 말이다. ‘낙엽이 떨어지다’라는 말도 벌써 떨어진 것(낙엽)이 다시 떨어져야 한다. ‘천둥번개가 친다’라는 말은 더욱 이상한데, 마치 ‘천둥번개’란 놈(주체)이 구름 뒤에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번쩍 콰르릉 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와 ‘작용’으로 나누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그 결과 자꾸만 ‘없는 주체’를 만들게 된다. 버려서 쓰레기인데 ‘쓰레기를 버리다’라고 하면 쓰레기가 될 본성을 타고난 놈이 따로 있는 것처럼 된다. 동시적이어서 조각으로 분리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 시시때때로 주체는 만들어졌다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주체는 허깨비 아니겠나. 비는 오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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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타
‘현실 자각 타임, 현자 타임’의 준말. 같은 듯 다른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욕구 충족 이후에 밀려오는 후회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헛된 꿈이나 망상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현타’는 욕망을 채워도 밀려들고 채우지 못해도 밀려드는 마음이다. 침대 위든 명품점이든 골방 안이든 거리든 버스 안이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욕망도 임시직이다. 하기야 고용도 임시적이니 소유나 사랑도 임시적일 수밖에. 시장의 모든 변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제는 개인을 언제든 손쉽게 재배치할 수 있도록 임시화하고 유연화시켰다. 모든 잉여들을 수시로 제거하고 불필요한 오물들은 갖다 버린다. 이 시대의 욕망도 투입 대비 성능을 최대화하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모든 걸 거머쥘 기세로 솟구치다가도 손을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이내 사그라든다. 모으기보다 탕진하고 참기보다 발산한다. ‘자신을 재발명하라’는 시장의 명령은 스스로 좋은 사냥감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만들었고, 반대로 좋은 먹잇감이 나타나면 직선으로 달려들어 덮친다.
메뚜기처럼 분주히 ‘튀어’ 다니다가도 문득 ‘이게 사는 건가’, 물을 때면 이내 허탈감이 밀려든다. 내가 하는 일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자각, 내가 너무 멀리 와 있을지 모른다는 자각은 개인의 성장이나 사회적 건강성 면에서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지금 알아차린 현실이 허탈감, 상실감, 고립감, 무기력, 분노와 같은 병리적 감정 상태에 가깝다면, 그 현실은 자각되어야 할 게 아니라 극복되어야 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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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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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더불어 - 김수영
다병한 나에게는
파리도 이미 어제의 파리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일과를 전폐해야 할
문명이 오늘도 또 나를 이렇게 괴롭힌다
싸늘한 가을바람소리에
전통은
새처럼 겨우 나무그늘같은 곳에 정처를 찾았나보다
병을 생각하는 것은
병에 매어달리는 것은
필경 내가 아직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비애를 갖고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여유를 갖고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저 광막한 양지쪽에 반짝거리는
파리의 소리없는 소리처럼
나는 죽어가는 법을 알고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196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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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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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전심(以心傳心)
- 말이나 글로 전하지 않고 마음으로 마음에 전함.
《出典》'五燈會元' / '傳燈錄' 無門關 / '六祖壇經'
송(宋)나라의 중 도언(道彦)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를 기록한《전등록(傳燈錄)》에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以心傳心'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眞髓)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의 중 보제(普濟)의《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拈華]'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 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微笑]'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世尊在靈上會上 拈華示衆 是時衆皆寂然 惟迦葉尊者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
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磨訶迦葉.
【동의어】염화미소(拈華微笑)
【유사어】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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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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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3장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자리:인
사람은 인성의 다듬어지지 않은 원재료만을 가지고 태어남으로 인은 <먼저 어려운 일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아직 깎이고 닦이지 않은 원재료, 즉 성숙한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으나 아직은 조야한 충동들이나 잠재력에 불과한 것이다. 짜임새 있는 인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은 예가 계발되는 한에서만 계발된다. 인은 예 안에서 자기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사회 정치적인 관계와 문제들에 대해서 알게 되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들 문제에 대해 상당히 폭넓은 경험을 가질 때까지는, 요컨대 실제 정치에 참여해서 행정적인 일의 특정한 성격을 배울 때까지는, 그는 그의 군주에 대해서 심오하고 지적인 충성심을 가질 수 없다. 어린 아이의 단순 소박하고 미숙한 집착이나 의뢰심과 위대한 (경륜을 가진) 정치가의 깊고도 세련된 군주에 대한 충성심 사이의 간극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인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전자의 미숙한 단계로부터 후자의 성숙한 단계까지의) 틈새를 건너오는 동작이란 예를 배워서 달통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아무리 처음에 그것이 강렬했다 하더라도, 여러 번의 위기나 좋은 운수 그리고 틀에 박힌 일상 생활을 통한 수년간의 결혼 생활 뒤에 나타날 수 있는 상태와 비교해 보면, 내용면에서 상대적으로 무정형적이며 빈약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타인에 대한 각각의 개인적인 자세는 새로운 행위의 규범, 새로운 의무, 새로운 양보와 취득을 요구하는 일련의 상황을 겪지 않고서는 계발되고 심화되고 풍부해질 수 없다. 고통(고전적 의미에서)과 행위는 인간(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배울 때까지는 인은 실현될 수 없다. 인과 예는 동일한 존재의 다른 국면일 뿐이므로 그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성숙해질 수 없다.
인은 <어려운 일을 한 뒤에> 온다. 물론 예를 배우는 데는 시간과 노력,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인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안하지 않는 사람은 예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자신을 예에 귀의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인하다. 이렇게 인과 예는 상호적으로 작용한다. 인은 당장이라도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예 대한 대답은 좀더 복잡하며 또한 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는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몸짓, 즉 시간과 공간을 통한 일련의 동작들을 강조한다. 이러한 몸동작은 여러 단락들, 즉 일련의-각각의 단계가 그 다음 단계에 필수적인-그런 단계들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수행하는 방법(즉 일련의 단계들)이 있지만, 인은 그렇지 않다. 행위자의 관점에서 자기 몸짓을 보자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로 따로따로 분석될 수 있는 복잡한 행위 패턴이 아니라 <단순한> 몸짓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행위하는 사람의관점에서 자기 행위를 본다는 것은, 외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서 그 대신 오로지 내심의 신비스런 영역을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행위를 공개적으로 노출된 행위로만 규정하려는 범주들의 백락으로 규정지으려는 것이다. 이 경우 이것이 당장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사할 것을 결정하고 그렇게 한다.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예이다. 어떤 특정 맥락에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드러난 연속된 몸동작-즉 복잡한 일련의 손과 팔로 움직임, 규정된 인사말과 교환, 요컨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행위적 요소와 언어적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일련의 잘 조화된 행위들과 수행-을 보는 것이다. 그런나 누구에게 인사하기로 결정하는 일은, 또한 몇 단계의 정신적 행위로 반드시 나눠질 수 있는 <정신적>행위, 즉 또 다른 <내심의> 행위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내재적, 본질적인 길 또는 방법은 없다. 사람은 간단히 결정한다. 물론 결정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는 있다. 즉 우리의 숙고는 시간을 끌 수도 있다. 때에 따라 우리의 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한두 가지 손쉬운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이런 것은 어떤 것도 결정을 내리는 데 본질적이지 못하다. 즉 이런 (마음 속의) 결정은 결코, 남의 손을 잡고 흔드는 행위가 그 인사행위에서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는 그런 식으로 결정을 내리는 데 구성적인 요소가 되지 못한다. 숙고가 이전과는 다른 (심리사의) 경로를 취했다고 해도 우리는 (인사라는) 똑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논지의 요점이다. 그러나 바로 똑같은 (일련의 행위의) 단계를 밟지 않고서는 똑같은 인사를 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일련의 행위의) 단계들이 실제의 인사 행위를 구성한다. 그러나 (인사하려는 마음의) 결정을 구성해 주는 (일련의 심적인) 단계들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시공적으로 어떤 단계도 없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결정 행위의 기적적이고 마술적인 성격의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공자가 의도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아니면 <결정하는 일>(<인하기로 결정하는 일>)을 어떤 심비한 내심의, 개인적인 <정신적>영역에서-아마도 그곳에는, 우리 서구인들이 특히 데카르트 이래로 자주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기계>, <구조틀> 또는 <대행자>가 있으리라고 상정되는 영역에서-발생하는 어떤 과정이나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마음의) 결정>과 <(실제의) 인사>라는 그런 행동들 사이의 이런 유형의 대조를 그 개념들이 수행하는 <논리적> 역할에서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이득을 보았다>라는 말이 그 사람이 실제 사고 파는 눈에 보이는 행동과 명백하게 구별되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행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존에게 인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말 또한 내적인 심리 영역의 신비적인 행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익을 본다>는 문장과 <결정을 한다>는 문장이 일련의 공간적이고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의 국면들을 지적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정하거나 이익을 만드는 그런 행위를 구성해 주는 일련의 <단계적>행위를 우리가 (이들 어구만으로는) 묘사하거나 결코 보여줄 수는 없다는 사실은 그 어떤 형이상학적 신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들 어휘는) <문법적>인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시에든 아니면 위에서 말한 일종의 언어 분석에 호소함에 의해서든, 우리가 서구의 전퉁적인 정신적 편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과 그와 관련된 개념들에 대한 공자의 의도를 보다 더 자유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현대의 철학적 분석을 그가 가르치거나 사용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처신에 대한 정신적 해석 또한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그가 배제했다거나 반대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가 정식화한 것은-정신적인 개념이나 모형에 대해서는 무언의 언급 또는 암시조차도 없는-공자 그에게만 특유한, 그 자신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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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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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5장
4. 새 임금이 누구냐
6. 관중의 구사일생
관중의 탈출
노장공은 곧 함거를 호송하는 대장을 불러 성 밖으로 나가면 곧 함거를 부수고 관중의 목을 베어 제나라 사신에게 넘겨 주라는 분부를 했다. 시백은 참으로 현명한 처사라고 노장공에게 극구 거듭 치사하고 궁에서 물러났다. 한편 습붕은 궁으로 오다가 노나라가 직접 관중을 죽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황급히 노장공에게 달려가 말했다.
"지난날 관중은 우리 임금을 죽이려고 독화살을 쏘았습니다. 그것이 다행스럽게도 허리띠 갈고리에 맞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임금께 관중은 철천지 원수입니다. 지금 만약 손수 관중의 목을 참하여 관중의 목을 보낸다면 우리 임금은 원수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를 살려서 내어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임금께 원수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노장공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보검을 내밀며 분부했다.
"이 검을 내보이면 호송대장이 함거를 내줄 것이오.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 제후에게 과인의 안부를 전해 주시오."
습붕은 노장공에게 숙배하고 보검을 받아쥔 채 곧바로 함거 뒤를 뒤쫓았다. 벌써 함거는 성 밖으로 나갔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아차, 늦은 게 아닌가?'
습붕은 기겁하고 놀라 달려나갔다. 그 때였다. 멀리 함거가 보였다. 함거는 멈춰 서 있고 벌써 죄인의 목을 베려고 하고 있었다.
"멈추시오. 군명(君命)이오!"
습붕이 보검을 흔들며 달려가자 노나라 군사들은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이 검을 내리시며 전하라 하셨소. 함거를 제나라 사신에게 넘기라고 말이오."
병사들은 보검을 확인하자 함거를 내줬다. 습붕은 함거를 인수받자 곧 제나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함거 속에서 관중은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질기도다. 관중의 목이여!' 관중은 달리는 함거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만감에 젖어 있었다. '시백은 뛰어난 인물이다. 그가 과연 이대로 나를 내보네 줄까? 이 노나라에서...... 그가 다시 병사를 보내 나를 해치고자 한다면 그 때는 살아날 길이 없구나.' 생각할수록 답답해지고, 달리는 말은 왜 이리 늦는지.......관중은 곧 노래를 하나 지어 함거를 모는 일행에게 가르쳤다.
노란 따옥새여, 노란 따옥새여
왜 날개를 접고 가만히 있나
발이 비트러 매어 있기 때문이다.
날지도 울지도 못해 새장 속에 엎드려
높은 하늘 보며 쭈그리고 있으니
땅은 두터운데 왜 누워 있는 거냐
불행히도 액년을 맞아
목을 뽑고 길게 부름이여
마침내는 울음으로 바뀌는도다.
노란 따옥새여, 노란 따옥새여
하늘이 날개를 주셨기에 능히 날며
하늘이 발을 주셨기에 능히 달리는도다
액난에 사로잡혀 있음에 누가 구할까
하루아침에 울을 부수고 나감이여
내 어떻게 여기서 벗어나야 할지
슬프다, 저 새잡는 사냥꾼이 따라오도다.
함거를 끄는 수행인들은 이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어느새 신바람이 나서 박차를 가했다. 박자에 맞추어 흥얼대다 보니 피로한 줄도 몰랐다. 꼬박 이틀이 걸릴 노정이 단 하루로 단 축되었다. 그렇게 달려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수(汶水)를 넘어 문양 땅으로 가는 관도에 들어섰을 때였다. 멀리 뒤에서 먼지 구름이 산처럼 피어올랐다. 노나라의 추격병이었다.
관중과 포숙아의 재회
관중이 걱정한 것처럼 시백이 관중을 살려준 사실을 알았다. 시백은 곧 궁으로 달려가 노장공에게 관중을 도로 잡아오든가 아니면 처치하라고 간했다. 노장공은 더럭 의심이 났다. 습붕의 태도가 어딘지 어색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당장 공자 언을 불러 분부했다.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라. 관중에게 죄를 씌워서 잡아와라. 만일 관중을 다시 데려올 수 있다면 몰라도 여의치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라."
습붕은 뒤따라오는 먼지 구름을 보고 상황을 눈치챘다. 그는 이대로 가다가 추격병에 잡힐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함거를 부수고 관중을 끌어내서는 자신들의 날쌘 수레에 태우고 급히 속도를 더해 도망쳤다. 노나라 추격병이 달려와 깨어진 함거를 발견했을 때, 관중을 실은 수레는 다행히도 습붕을 마중나온 포숙아의 진영에 때 맞춰 당도할 수 있었다. 포숙아가 관중을 맞이했다.
"자네를 영 못 보는 게 아닌가 염려했는데 하늘이 도와 이렇듯 만나는구려."
포숙아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이렇듯 초라한 몰골로 잡혀온 것이 부끄럽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가? 천하를 품에 안아도 시원찮을 그대가......."
"내 원래 공자 규를 받들었으나 임금 자리에 올려 모시지 못했고, 소홀처럼 능히 신하된 자의 절개를 지켜 죽지 못했으니 어찌 할 일을 다했다고 할 것인가? 그러니 자네의 대접을 받을 분수가 되겠는가. 그저 하늘 향해 쳐다보기가 부끄럽고 친구 보기가 민망하고 쑥스러울 뿐이네."
포숙아가 달랬다.
"큰일을 하는 자는 작은 일에 결코 구애받지 않으며, 큰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작은 절개에 절대로 연연하지 말라고 내게 말한 것은 자네일세. 더구나 그대는 천하를 다스릴 영걸이라, 누가 제나라 임금이 되든 자네의 재주가 우리 제나라에 절실히 필요하네. 그대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말게."
관중은 포숙아의 위로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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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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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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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일기
사랑할 땐 별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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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이 주는 고즈넉한 평화와 기쁨. 주일만큼이라도 평일에 숨차게 뛰었던 자신을 쉬게 해주고, 필요한 영적 활력을 채워 주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나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야 남을 위한 배려나 봉사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탁 트인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보는 내 마음엔 그래로 푸른 시와 기도가 흐르네. 수평선을 바라보며 매일을 사는 것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특권이요. 기쁨인지! 오늘은 바닷가 산책중에 손을 씻으려다가 실수로 발목까지 다 적시게 되었지만 그 느낌이 매우 좋았다. 강물, 시냇물,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
짜디짠 소금물에 발을 담갔으니 내 마음에도 조금은 소금물이 들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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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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