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15호
2022.7.25 (음 6.27)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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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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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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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보다 특권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곧 둘 다 잃게 된다. ―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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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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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이중성
낮엔 천사, 밤엔 악마. 이중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삶을 수련에 비유한다면 삶의 수련은 선의 편에 서서 악을 증오하는 일이 아니다. 선악이 엉망진창 뒤범벅된 수렁 한가운데에서 뭔가를 추구하는 일이리라. 이게 진실에 가깝다는 걸 언어가 보여준다.
하나의 말 속에 정반대의 뜻이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다.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이런 기막힌 일을 당하다니…’라 할 때 쓰인 ‘기막히다’는 그 일이 너무 놀라워 할 말을 잃을 정도라는 뜻이다. 반면에 ‘음식 맛이 기가 막히네’라 할 땐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좋다는 뜻이다. 이런 예가 적지 않다. ‘괄호 안에 적당한 답을 고르시오’에 쓰인 ‘적당하다’는 거기에 꼭 알맞다는 뜻이지만,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해’라 하면 대충 하라는 뜻이다. ‘적당주의’가 여기서 나왔다. 목숨을 뺏는다는 뜻의 ‘죽이다’는 멋지거나 좋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춥거나 무섭거나 징그러울 때 돋던 ‘소름’이 요새는 굉장히 감동적인 장면에서도 돋는다.
놀랍게도 모든 말은 ‘반어적’으로 쓰일 수 있다. 당신도 ‘멋지다, 훌륭하다, 잘났다, 잘했다, 착하다, 꼼꼼하다, 배포가 크다’ 같은 ‘좋은’ 말로 앞사람을 순식간에 ‘열 받게’ 할 수 있다. 겉으로 들리는 말 뒤에 숨겨둔 의미를 눈치 있게 해석해내기 때문이다. 말을 듣는 순간, 아니 듣기 전부터 맥락을 파악하고 가능한 의미들 중 하나를 정확히 집어낸다. 소통이란 겉과 속, 표면과 뒷면이 배반적인 말 사이를 작두 타듯 위태로우면서도 날렵하게 헤엄치는 것이다. 이중성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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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마나 한 말
‘책상이란 뭔가?’라 물으니 ‘책상이 책상이죠!’라 답한다. 선생은 실망한다. 어떤 말이 항상 참일 때 이를 항진명제라고 한다. ‘오늘 비가 오거나 오지 않았다’고 하면 항상 참이다. 참이 아닐 수 없어 허무하다. ‘책상이 책상이죠’라는 말도 ‘3 = 3’이라는 말처럼 늘 참이다. 거짓일 가능성도 없고 새로운 정보를 보태지도 못하는 항진명제는 본질적으로 공허하고 하나 마나 한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곧잘 쓴다. 미끈하고 냉정한 논리와 달리 말에는 다양한 때가 묻어 있고 여지도 많기 때문이다. ‘여자는 여자다’와 ‘남자는 남자다’만 봐도 사회적 통념의 때가 말에 짙게 묻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君君臣臣 父父子子)이라는 말도 하나 마나 한 얘기다. 그럼에도 신분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반동의 언어로도 혁명의 언어로도 읽을 여지가 생긴다. 늙은 선승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는다. ‘너는 너야’라는 말에 위로와 자신감을 얻고, 떼를 쓰는 아이를 보며 ‘애는 애다’라 하면서 화를 삭인다.
하느님도 자신을 처음 소개하면서 “나는 나다”라고 했으니, 하나 마나 한 이런 말들이 의외로 큰 힘을 발휘하나 보다. 거론되는 대상의 고유성을 강조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깨닫거나, 대상에 대한 이해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하는 여러 전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말은 논리가 아니다. 말에는 말하는 사람(들)의 심장과 시간이 박혀 있다. 그나저나 가을은 가을이다.
이 독특한 언어습관은 이웃 일본말에도 똑같이 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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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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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밭 가에서 - 김수영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 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앟고
젖어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있을 때
북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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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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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각지쟁(蝸角之爭)
// 매우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 또는 좁은 범위 안에서 싸우는 일.
《出典》'莊子' 則陽篇
전국시대, 양(梁:魏)나라 혜왕(惠王)은 중신들과 맹약을 깬 제(齊)나라 위왕(威王)에 대한 응징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혜왕은 재상 혜자(惠子)가 데려온 대진인(戴晉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진인(戴晉人)은 도가자류(道家者流)의 현인(賢人)답게 이렇게 되물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微物)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촉각 위에는 촉씨(觸氏)라는 자가, 오른쪽 촉각 위에는 만씨(蠻氏)라는 자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들은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시작했는데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도망 가는 적을 추격한 지 15일 만에야 전쟁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하오면, 이 이야기를 사실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전하, 이 우주의 사방상하(四方上下)에 제한(際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오면, 마음을 그 무궁한 세계에 노닐게 하는 자에게는 사람이 왕래하는 지상(地上)의 나라 따위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으음, 과연."
"그 나라들 가운데 위(魏:梁)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대량(大梁:開封)이라는 도읍이 있으며, 그 도읍의 궁궐 안에 전하가 계십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에 비한다면 지금 제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려는 전하와 달팽이 촉각 위의 촉씨, 만씨가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과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소."
대진인(戴晉人)이 물러가자,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싹 가신 혜왕(惠王)은 혜자(惠子)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성인(聖人)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원 말】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
【동의어】와우각상(蝸牛角上), 와각지쟁(蝸角相爭), 와우지쟁(蝸牛之爭)
【유사어】만촉지쟁(萬觸之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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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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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2장
공자에게서 이 <자기-송사>는 임시적인 은유에 불과하며, 그의 주요한 방향성과 양립할 수 없고, 오직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목적들을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근거들이 있다. <논어>전반에 흐흐는 정신이 소송 '형벌, 규제 등등'에 대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자는 드러내 놓고 <반드시 필요한 것은 송사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송>이라는 말은 도덕적 태도라기보다는 소송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이 표준적이라는 점, 소송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 도덕적인 뉘앙스로는 여기에서 유일하게 쓰였다는 점 등등은 감정이 듬뿍 실린 아래와 같은 영탄조의 문장을 반어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요즘 사람들은 끊임 없이 서로 사소한 문제로 다툼을 벌이며 다른 사람이 실재로 한 잘못은 물론 상상해 낸 잘못까지도 고발한다. <상대를 고발하는 데 그렇게 신속한 반면에 자기의 잘못을 바라보고 그 자신을 송사할 수 있는 사람은 어찌 그리 찾아 볼 수 없는지!>
지금까지 우리는 <논어> 원문을 해석하면서, 공자가 그 자신 실제로 선택, 책임, 도덕적 응보로서의 벌, 죄책감, 회개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보았다.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도라는 이미지의 중심에서 선택의 관념이 명백하고 풍부하게 발전할 기회가 내재되어 있지만, 그 기회는 (공자에게서는) 눈에 띨 만큼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그리고 도덕적인 병듦, 자기-송사, 내적 성찰에 대한 고립된 언급들은 있지만-그 각자는 책임, 죄책감 그리고 회개에 대해 관심 있는 이에 의해 그렇게도 풍부하고 적절하게 쓰일 잠재적인 가능성은 있지만-이 중에 어떤 것도 공자에 의해서 발전되거나 혹은 어쨌든 조금 더 (깊게) 천착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고립된 채로, 임시적인 은유들로 남아 있다. 그 은유들은 아마도 지금은 잊혀진 그들의 원래 맥락에서는 반어적인 혹은 시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끝으로 수치심에 대해서는 좀더 자주 그리고 체계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외적인 소유, 행동 혹은 지위와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오염되고 부패한 자아에 대한 내면의 고발이라기보다는 외부 세계와 관련된 자신의 지위와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도덕 감정이다. <논어> 원문의 맥락에서 보이는 선택-책임-죄책감이라고 하는 개념 체계의 결여는, 그가 그처럼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대한 통찰력이 넘치는 철학자였음을 고려한다면, 문제의 개념들과 그것들에 연관된 이미지들이 공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거부되었다기보다는 단지 단순하게 그의 사고 속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이 그 타당함을 입증하였다.
(<논어>에서) 공자 사상의 주된 틀을 형성하고,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말과 이미지는 우리 (서양인)에게 상이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조화로운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다.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은, 실재의 선택항들 중에서 선택하여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에게 고유한 내적이고 결정적인 힘을 갖고 있는, 궁극적으로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대신에 인간은 <원자재>로 태어났다. 그는 교육에 의해 개명되어야 하며 그래서 진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도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도는-그것의 고귀성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고매성을 통해-그 사람을 틀림없이 사로잡을 것이다. 이런 사유의 결과는 사회 혹은 물리적인 환경에 대립하여 그것을 압도하는 인간의 힘을 증강시키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 차라리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 하나인 참된 도를 빗나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그 지점으로 향하는 그 사람의 <목표> 혹은 방향성을 예리하게 인식시키고 꾸준하게 이끌어 나가는 그런 것이다. 그는 개명한 인간 존재인 것이다. 그 도를 걸어간다는 것은 그 도에 담겨 있는 거대한 정신적 존엄성과 힘을 그 사람 속에서 체현한다는 것이다. 도에서 벗어 나가는 사람보다는 도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그리고 억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개인적인 존엄성과 성취의 삶을, 그리고 서로에게 바로 그러한 삶을 허용하는 상호 존중에 기초하는 타인과의 사회적 조화의 삶을 사는 것이다.
때문에 공자에 있어 주된 도덕적 문제는, 어떤 사람 자신의 자유 의지에 선택한 행위에 대해 그 사람의 책임 소재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도에 대하여 적절한 교육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그 도를 열심히 배울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이다. 도덕 질서'예'를 따르지 못하는 행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비록 결과가 사악한 것이 될지라도 자유롭고 책임이 따르는 선택에 대한 자기-유죄 판결이 아니라, 단순한 결점, 힘의 부족, 요컨대 자기의 <(인격) 형성>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재교육인 것이다. 이런 점에 관해서도 서양인들은 부지런한 노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 개인적 책임이라는 문제로 역설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하게 <논어>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문제는 한번도 제기된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좀 도식적인 방식으로 요약을 한다면, 공자에게서 도덕적인 문제들은 다음의 네 가지 형태들 중의 하나로 귀착된다. (1)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무엇이 도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를 인식하고 또 적절하게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잘 교육받지 못했다. (2)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어떤 면에서는 그 도를 따라가는 데 필수적인 노련함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3)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요구되는 노력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힘의 문제로 이해된다' (4)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어떤 행동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고는 있으나 그 도에 전적으로 마음을 쏟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쉽게 잘못을 범하거나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예의 외적인 형식을 체계적으로 오용하거나 왜곡시키고 있다.
공자의 철학적 견해는 인간을 비극적 존재, 내적인 위기와 죄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는 면에는 아무런 기초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마련하는, 사회 지향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 게다가 우리가 여기에서 언급한 논의들을 공자의 인간관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이 맥락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좀더 토론할 것이다-에 놓고 본다면, 내적인 인간과 내적인 갈등이라는 (서양인들에 익숙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인간 개념에는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공자가 이상화한) 인간의 존엄성은, 신묘함과 세련미가 있는 그런 삶, 그 안에서의 인간의 행위가 자연의 맥락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동시에 성스러움과도 조화될 수 있는 그러한 삶, 그리고 그 안에서 실천적, 지적 그리고 영적인 것들이 동등하게 외경되며, 하나의 행위-즉 예의 행위-속에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그러한 삶의 모습들의 절정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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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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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5장
피 튀기는 옥좌
한편 공자 규의 부중에서 집사장(執事長)일을 하고 있던 소홀(召忽)이 달려와 관중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제양공의 신상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변을 당한 듯싶습니다."
관중은 보고를 받자 미리 대비해 둔 듯 신중하게 상황을 살피며 대처하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요. 어서 공자 규를 이 곳으로 모셔오고 부중의 모든 이들은 단단히 무장시켜 다음 분부를 기다리게끔 조치하시오."
관중은 소홀에게 당부한 후에는 부양에게 일렀다.
"아무래도 군부(軍部) 쪽에서 일어난 사건일 것이다. 만일 에 도성의 병사들이 난을 일으켰다면 제양공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도성 밖에서 누가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켰다면 제양공이 살해당했을 것이다. 너는 지금 궁문으로 가서 누가 드나드는지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거라. 그리 고 누구든 궁문을 점령하거든 어느 쪽 사람인지를 알아보고 내게 알려다오."
조금 있다가 공자 규가 관중의 집으로 급히 달려왔다. 그는 불안한 듯 도망칠 곳부터 찾으려했다.
"우리도 국외로 피신해야 되지 않겠소?"
관중이 공자 규를 안심시켰다.
"지금 상황은 극히 유동적이고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식별이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가만히 은신하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자칫 서둘러 국외로 피신하다가 상대방 측의 인물로 오해받으면 오히려 큰 피해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경 거 망동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공자 규가 다시 물었다.
"무지가 군위에 오를까? 아니면 누가?"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위험한 것은 무지 쪽이 아닐 때입니다. 만일 무지가 군위에 오른다면 제 생각으로는 공자께 협력을 청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엉뚱한 인물이 군위에 오르 면 우선 공자부터 해치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정세가 확연 해지기 전까지는 부중으로 가지 마시고 여기에 계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궁문을 살피러 나갔던 부양이 남문 쪽 상황을 보고하러 돌아왔다.
"연칭이 난을 일으켜 제양공을 죽였고 무지를 새 군위에 모신다고 합니다."
부양이 관중에게 그간의 파악한 사실을 보고했다. 관중은 보고를 받자 혼자 중얼거렸다.
"무지가 군위에 오른다면 더 이상 피 흘리는 일은 없겠구나. 다만 우리 공자의 입장이 더욱 난감하게 되었다."
추천받은 관중 무지는 군위에 오르자 지난날 언약한 대로 연비를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 이어서 연칭을 정경(正卿) 벼슬에 임명하고 관지부를 아경(亞卿)으로 삼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벼슬은 그대로 두었다. 모든 대부들은 외견상 동요하지 않고 새 임금을 따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대부 옹름은 무지에게 무릎을 꿇고 아첨했다. 고국(高國) 같은 이는 아예 병들었다. 칭하고 조례에도 나오지 않는 등 실제로는 상당한 혼선이 있었다. 관지부가 무지에게 권했다.
"지금의 신하들만으로 백성의 신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널리 방(榜)을 내걸어 어진 인물을 모으고 또 찾아야 합니다.그래야 새 임금의 권위가 생깁니다."
무지는 곧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다. 관지부가 아뢰었다.
"관중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저와는 성이 같지만 친척도 아니고 친분도 없는 사이입니다. 그는 지금 저잣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출중한 총명과 재주가 있습니다. 사람을 시켜 청하면 주공을 위해 큰 몫을 하리라 봅니다."
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분부했다.
"매우 좋소이다. 경이 알아서 초대토록 하시오."
이렇게 해서 궁중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이 관지부의 명을 받고 관중을 찾아왔다. 관중은 깜짝 놀랐다. 자신은 무지와 일면식도 없다. 연칭과도 마찬가지였다. 관지부라고 하면...... 언젠가 포숙아의 소개로 한 번인가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성이 같다고 해서 항렬을 따져 본 적이 있지만 그 이상은 아는 바가 없었다.
"분명히 이 관중을 청했단 말씀이오?"
관중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틀림이 없습니다. 저잣거리에서 장사하시는 관중 선생이 바로 맞지요?"
"그렇소. 바로 나요."
관중은 궁으로 가지 않았다. 오히려 심부름 온 사람에게 급한 집안일을 끝마치고 며칠 후 궁으로 찾아뵙겠다는 뜻을 전해달라고 간곡히 당부하면서 돌려보냈다. 심부름 온 사람도 별 뜻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관중은 곧 공자 규와 소홀, 부양을 청하고 서둘렀다.
"아무래도 국외로 피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자 규가 물었다.
"이제부터는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무지가 사람을 보내어 그대를 청하는데 좋은 기회가 아니겠소? 궁중 사정을 알 수도 있을 테고 말이오. 그런데 어찌 이제서야 외 국으로 달아나자고 하시는 것이오?"
관중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지가 하는 걸 보면 임금 자리가 쉽사리 안정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 하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어진 이를 구한다 하고서 행동으로 옮길 때는 마치 무뢰배를 모으듯이 해서는 어진 사람을 구할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모두의 신세를 망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장차를 기약하기 위해 우선 제나라를 떠나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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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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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가득히 사랑을 - 노은
로미오와 줄리엣
엄마, 아빠를 닮아 재문이도 음악 감상을 꽤 좋아한다. 공부할 때도 헬스 자전거를 탈 때도 컴퓨터 게임을 할 때도 항상 음악과 함께 한다. 그리고 종종 이종 사촌 동생 진석이나 친구 우일이와 함께 시내에 나가서 음악 테이프나 CD를 사 오기도 한다. 아빠와 함께 클래식을 듣는 것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한 재문이는 초등학교 때만 해도 유행하는 가요에 민감하더니,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영화 음악과 뉴에이지 음악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동훈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팝이나 록에도 부쩍 관심을 갖게 되었다. 팝 테이프를 모아 죽 늘어놓은 게 제법이다.
"야, 우리 박진영의 '그녀는 예뻤다' 살래?" 내가 사기에는 좀 그렇고 해서 재문이 신세를 지려고 했더니, 뜻밖에도 고개를 내젓는다. "너도 좋아하잖아." "노래는 잘해. 곡도 잘 만들고." "춤도 기막히잖니." 그런데 정작 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떴다' 하는 가수의 노래는 모두 사 모으더니, 이제는 아니다. 사서 모으는 데는 자신만의 기준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조금 더 있으면 재즈의 바닥에 푸욱 빠져들게 될까. 아니면 정통 클래식 쪽으로? 어쨌든 재문이는 대체로 시끄럽고 번잡하게 때려 부수는 음악보다는 조용하고 로맨틱한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 넓지도 않은 집안에 전혀 다른 빛깔의 음악들이 꽝꽝 울려댄다면 그야말로 괴로운 소음 공화국이 돼 버릴 테니 말이다.
재문이 방에서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면 나는 우선 고개를 들이밀며 묻는다. "뭐니? 듣기 좋은데, 분위기도 괜찮구." 내가 물으면 씨익 웃고 만다. 엄만 몰라도 돼, 그런 표정으로. "뭐야?" 거듭 물으면 테이프나 CD의 재킷을 슬며시 내놓고 마는데, 정말 모르겠다.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음악 중에도 이처럼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음악이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내 귀에도 괜찮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며칠 전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화 음악을 사 들고 왔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 영화를 나는 중학교 삼학년 때 보았다. 올리비아 허시와 레오날드 화이팅이 나온, 프랑코 제필렐리가 만든 영화. 여름방학 때 동생을 데리고 서울 외할어버지 댁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다가 괜히 심술이 나서 혼자 영화관에 갔었다. 집에서 가까운 시민관이라는 영화관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참 맹랑한 여학생이었던가 보다. 사복을 차려 입고 혼자 그 영화를 보러 갔으니 말이다. 게다가 표를 끊어 마악 들어가려는데, 의자에 우리 학교 학생주임 선생님이 턱하니 앉아 계시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잽싸게 돌아섰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근처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서 사촌들이랑 한참을 놀았다. 그러다가 다시 영화를 보러 갔다. 그때만 해도 영화표에 시간이나 좌석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표만 있으면 아무때나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나도 참 엉뚱하고 배짱이 두둑한 소녀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내가 한없이 귀엽다. 덕분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영화를 보았으니까. 그것도 혼자 쓸쓸히. 그리하여 두고두고 그 시절의 일을 추억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재문이가 사 들고 온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옛날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다. 그야말로 신세대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세익스피어의 고전을 현대 도시로 옮겨 놓은 극단적인 사랑과 우정이라고나 할까.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 음악을 듣고 재문이가 영화도 보고 싶어하길래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뭐 이래?" "현대판이야." 현대판. 그야말로 신세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문이와 함께 보기 시작했다. 신세대인 재문이는 신세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에 금세 동화되는 것 같았지만, 난 역시 구세대가 분명하다.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매력에는 동조하면서도, 뮤직비디오처럼 화려한 영상과 빠른 편집에다가 지극히 현대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느낌까지 풍기는 루어만 감독의 그 영화를 나는 과감히 중간에서 포기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녀 시절의 로맨틱한 추억마저도 서글프고 어두운 비극의 그림자에 물들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떠냐?" "유치해." 끝부분이 유치하다는 것이다. 끝부분이 어떻게 유치하다는 것일까? 나는 모른다. 끝 부분을 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유치하다는 느낌마저도 우리 재문이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유치하다는 것은 그만큼 순순하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로맨스란 어차피 유치한 것이니까. 유치한 만큼 한없이 순수한 것이니까 말이다. 내가 보았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재문이가 본 로미오와 줄리엣의 분위기가 영 다르듯이 내 삶과 재문이의 삶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연애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듯이 우리들 삶의 본질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듣는 음악의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의 결은 서로 닮아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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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일기
사랑할 땐 별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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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수술 뒤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환자가 회복실에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새삼 감격스러워하듯이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나에겐 새날이요, 보물로 꿰어야 할 새 시간이요,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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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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