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 최명희
13. 어둠의 사슬(3/3)
"오유끼."
오유끼가 대답 대신 눈빛으로 웃는다.
"노래를 불러라."
강모는 노비에게 명령하듯 짧게 말했다. 오유끼는 다소곳이 이마를 숙여 절을 하고는 샤미센의 줄을 고른다. 그네의 흰 손가락이 강모의 가슴에 닿는다. 강모는 머리를 털어낸다.자완무시와 떡국, 은어 요리들이 어지럽게 상 위에서 뒤섞이고, 함께 앉은 사람들은 이미 샤미센의 가락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거나한 취기를 옆자리의 젊은 여자에게 부리며 허리를 끌어안고 낄낄거린다. 방안에는 자욱한 담배 연기가 전등 불빛을 가리워 모든 것이 몽롱하게 보인다. 귀밑에서 들리는 희롱의 소리도 아득하고 멀어, 꿈결인가 저승인가 싶었다. 그런 와중에서 오유끼는 홀로 샤미센을 퉁기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가락을 듣고 있지는 않았다. 그네도 누가 들으라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가락은 저 혼자서 금빛으로 번쩍이다가 유순해지고, 그러다가 또 혼자서 명랑한 물 소리를 냈다. 물 소리가 귀를 젖제 한다. 그는 오유끼와 더불어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용소에 부서지는 검푸른 달빛은 물배암처럼 소용돌이를 휘감고 있었다. 그것은 신비롭고도 광기 어린 빛깔이었다. 청동으로 빚은 것 같은 오유끼가 강모에게 손짓을 한다. 무너질 듯한 암벽의 검은 그림자와 짙푸른 육도목 수풀이 어우러져 숨막히는 향기를 입김으로 뿜어낸다. 그리고 오유끼와 강모는 푸른 달빛 속에서 벗은 몸으로 시리게 찬 물살에 곤두박질치고 자멱질을 하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웃었다. 속이 허해질 만큼 웃었다. 웃음은 바람인 모양이었다. 하품처럼 웃음을 토해 냈다. 눈귀에 눈물이 배어났다. 귓가에서는 샤미센의 음률과 물 소리와 웃음 소리가 서로 엉키켜 젖은 눈물에 반죽이 되고 있었다.
"너...,나하고 살래?"
새벽에 눈을 뜬 강모는 어슴푸레한 허둠 속에서 오유끼에게 물었다. 오우끼는 그 말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다만 나이답지 않게 그늘진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주인이 있어요."
"주인?"
"저는...팔린 몸입니다."
오유끼는 가까스로 웃으며 모찌즈끼의 주인 남자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묵묵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올가미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네의 목소리는 낮았다. 강모의 머리 속에는 입술이 두툼하고 번질거리는 남자의 천박한 면상이 떠올랐다. 낙지의 빨판 같던 붉은 손가락이 공중에서 열 개의 다리를 너울거린다. 그것은 오유끼의 목덜미에 흡착되어 감겨들었다. 오유끼는 비명도 없이 그 빨판이 붙은 다리에 목을 감기운 채 진을 빨리우고 있었다. 어찌 보면 빨판은 야마시따의 입술이기도 했다.
"도망을 치지."
"평생 쫓기면서 살게 되겠지요."
"얽매여서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다?"
"그렇지도 않아요. 저는 다시 이런 데로 가게 될 걸요. 어디서나 마찬가지예요. 먹고 살 길이 없답니다."
"굶는다는 말이냐?"
"죽고 말겠지요. 거리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는데?"
"저는 이미 물이 들어 버렸어요. 지워지지 않을 텐데요, 뭐....그냥 이 웅덩이에서 썩어 버리고 말 거예요."
"너는 아직 꽃도 피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썩을 궁리를 하고 있단 말이냐."
그때 오유끼는 체념과 포기에 길든 늙은 기녀처럼 말했다.
"피지 않고 시드는 꽃도 있지요."
꽃. 썩어들어가고 있는 꽃의 다리. 이리도 저리도 갈 수 없는 자리에서 서서히 뭉그러지고 있는 살과 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오유끼의 낮은 한숨 소리. 그는 순간 그 꽃뿌리를 다가봉 아래 굽이치며 흘러 시퍼렇게 소용돌이 일으키는 용소에 담그어 주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물살에 씻기는 흰 다리가 푸른 물그림자에 어려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정이라면 내 어쩌지 못하겠다만."
돈이라면 내가 너한테 줄 수가 있다. 너를 풀어 주고 싶다.
"풀어 주고 싶다."
그는 진심으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마치 자기 자신의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오유끼는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팔려 올 때는 보리쌀 한 말이나 치마 저고리 한 감 값이었으나 이제는 짐짝보다 무거운 빚무더기가 등을 짓누르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털어내 버릴 수가 있을까. 다만 오유끼는 잠깐 미소를 띄웠다.
"자주 오세요."
그것으로 고마운 일이었으므로 그네는 그렇게 말했다.
"나랑 살자."
그러나, 그 말에는 대답을 안하고 그네는 엉뚱한 질문을 한다.
"몹시 속이 상하셨던가 봐요?"
"언제?"
"어제."
"왜?"
"많이 취하셨어요. 쥐어 짜면 주루루 술국이 쏟어지게. 술자리 파할 때까진 그냥 앉아 계시기는 했는데요. 일어서질 못하시데요."
"토했어?"
"많이."
그러고는 무어라고 말을 이으려다 그만둔다. 어슴푸레하던 방안의 빛이 어느 사이 희어졌다. 그래서 오유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또 어쨌는데?"
"아니예요."
"무슨 일이 있었구나. 말을 해라."
그러나 그네는 아니라고만 하며 돌아 눕는다. 성급하게도 이 여자는 꽃값을 계산하려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밤새도록 소릴 지르셨어요."
"소리?"
그럴 리가.
"다 부서 버리겠다구, 다 소용 없다구 그랬어요. 막 으르릉거려서 무슨 말인지 들을 수는 없었는데요, 늑대가 우는 것 같던데요? 그러구는..."
강모는 의아하여 반쯤 일어나 앉았다.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두통이 번개를 친다. 쇠꼬챙이 같은 통증이었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마지막엔, 차라리 날 잡아먹어라, 차라리 날 뜯어먹어라, 그러셨어요. 벗어 젖히구는, 새빨간 몸뚱이 하나뿐이라구, 이거뿐이라구, 이게 다아라구, 마음대로 하라구 그러시더니요... 왜 가만 있느냐구, 너이 년, 왜 가만 있느냐구... 나를 짓밟으라구... 안 그러면 내가 널 죽여 버리겠다구 그러면서."
생각난다. 그랬었다. 내가 이 여자를 움켜쥐었다가 방바닥으로 패대기를 쳤지. 나가떨어지는 오유끼를 일으켜 세워 다시 벽 쪽으로 메다붙였다. 그리고 몰매질하듯 후려쳤다.
"꿈인가 싶더니만, 그게 너였느냐?"
오유끼는 온몸이 멍이 든 채로 새벽녘에야 강모에게 옭죄이게 안겨 잠이 들었다. 강모가 때린 것은 오유끼가 아니었다. 메다붙이고, 후려치고, 패대기치며, 물어뜯으며, 짓이긴 것은 오유끼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실의 혼행에서 맞닥뜨린 태산 같은 효원의 그림자였다. 집어삼킬 듯 우뚝하던 효원의 어깨였다. 어찌 보면 그것은 강실이이기도 했다. 무너지며 괭괭거리는 징소리가 귀에 울려, 그 소리를 몰아내려고 길길이 뛰어로를 때, 텃밭에 낭자하던 꽃대 부러지는 소리와 강실이의 등뼈가 내려앉던 소리. 방바닥에 쓰러지는 오유끼는 안개마냥 자욱한 강실이였다. 그런가 하면 강실이가 아니라 청암부인이기도 했다. 서리 맺힌 눈매를 서늘하게 뜨고 있는 할머니의 허이연 머릿결이 가슴에 얹힌다. 암키와 수키와가 서로 이를 맞물고 그물코같이 단단하게 얽혀 단번에 덮어 씌울 듯 거대한 날개를 펼치던 지붕, 괴조의 주둥이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솟구치던 용마루가 순식간에 자기에게로 내리꽂히는 아찔함에 강모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날카로운 아픔은, 수천 숙부 기표의 눈빛이 쏘는 화살을 맞은 자리가 찢기는 통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부친 이기채의 놋재떨이 두드리는 금속성. 네 이노옴. 네이 천하에 못된 놈, 뒤통수를 때리는 퇴침. 산산 조각이 난 채로 튀어오르던 바이올린의 몸통. 그 몸통에 맞아 흩어진 담배통과 타구. 강모가 오유끼를 두들겨 팬 장작은 샤미센이었다. 노래를 불러라. 덕석에 말어라. 짐승만도 못한 놈. 몰매를 쳐라. 나는 떠나고 싶었어요.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덜미를 잡지 마시오. 내 목을 매지 마십시오. 동경으로 보내 주세요. 생긴 대로 노래 부르며, 악기를 두드리며, 떠돌아 다니며 살게 해 주세요. 제발.
"도망가지 왜 밤새도록 맞었느냐."
강모는 가까스로 오유끼에게 묻는다. 목이 잠긴 소리다. 그는 몹시도 무안하였다.
"우시길래."
"많이 울더냐?"
오유끼는 대답 대신 누이처럼 강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오히려 밤새도록 맞은 쪽은 강모였던 것같이. 강모는 그네를 와락 끌어안는다. 끌어안은 그의 팔에 눈물이 돈다.
"내가 망령이 씌었던가 보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도 가해 가학한 일이 없었다. 네가 나를 믿을는지는 모르겠다만. 허나 이상한 일이구나. 웬일로 아무 잘못 없는 너를 그리했을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나를 받아준 다 한사람은 바로 오유끼, 너 하나뿐이었다. 주는 시늉 하면서 갈고리로 나를 찍으려는 사람뿐인데, 애오라지 너 하나가 엉뚱한 내 갈고리에 찍혀 주었다. 내 속을 풀어 내게 해 주었다. 너는 너를 풀어 주리라. 나한테 맞은 매를 갚아 주리라. 결국,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공금을 덜어 냈다. 그래서 모찌즈끼의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번질거리는 붉은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 하였다. 삼백 원. 그리고 그녀는 그의 것이 되었다. 유곽근처에서 일감을 얻어 빨래하고 옷을 지어 주던 삯바느질 여인들이 여자 저고리 하나에 삼십 전, 치마는 육십 전을 받고, 두루마기 하나를 짓는 데는 양단이나 합비단일 경우 삼 원이나 사 원을 받았으니, 매일 빨래하고 매일 푸새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 이십 원을 넘기 어려운 형편인 것을 생각하면, 삼백 원이란 하늘 같은 돈이어서 오유끼는 강모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강모는 오유끼를 모찌즈끼의 대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날 그네는 몹시 두려운 듯한 몸짓으로 주춤거리며 강모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대문을 경계선으로 그네가 한 발을 길목으로 내디뎠을 때, 강모는 순간적으로 새로운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색정신지 관재구설어머니 율촌댁이 강모의 손 안에 쥐어 주던 종이 조각에 조생원의 달필이 꿈틀거리며 음험하게 눈동자를 번득이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대, 그 구절이 펀듯 떠오른 것이다. 무슨 일이야 있을라고. 그까짓 삼백 원. 물론 삼백 원이 어찌 적은 돈이랴. 그러나 그로서는 얼마든지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자기가 관리하고 회계하는 금액의 일부를 우선 잠시 꺼내 쓰는 것에 불과하다. 공금을 사사로이 쓴다는 불안이나 죄의식은 없었다. 바다처럼 질펀한 논과 밭이 등뒤에 드리워져 있는 강모가 입을 벌리기만 하면, 돌아서지도 않아서 주머니 돈을 빌려 줄 전주만 해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자마저도 재촉하지 않는다. 장부에 적어 두는 것만으로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때문이었다. 누구의 손자인데 오죽할까. 그 말 한마디면 더 이상 덧붙일 말이 필요 없었다. 강모는 떠오른 글귀를 머리에서 털어 버리고 공금을 꺼내 쓴 사실도 따라서 잊어 버렸다. 훔치는 것이 아닌데 무슨 죄가 되리. 곧 귀를 맞추어 챙겨 넣으리라. 그는 방심하였다. 거기다가 그는 남의 것과 내 것을 칼로 자른 듯 반듯하게 셈하면서 살아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말만 하면 되었다. 그보다 새로 시작된 생활에 골몰하여 옆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고 할까. 그는 늘, 한 발은 오유끼 바깥에 내놓고 금방이라도 빠져 나갈 궁리를 하면서 다른 쪽 발은 늪 속에 잠긴 것처럼 점점 더 깊숙이 묶여 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몸은 기우뚱 가파른 경사를 이루어 위태로웠다. 여자가 생겨서 쓰임새가 늘어나, 필요할 때마다 변통하여 빌어 쓰는 돈은 어느 틈에 지게 짐이 되어 더욱이나 그를 기울어지게 하였다. 혼몽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해가 바뀌면서 노곤한 봄이 이울고, 초하의 여울이 한여름 폭염으로 고꾸라질 때, 강모는 느닷없는 감사에 걸리고 만 것이다.
"공금유용"
"공금횡령"
거기에는 변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야마시따가 어느 술자리에서 큰 소리로 농담하던 끝에 발설한 말이 빌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강모는 일이 발등에 떨어진 다음에도 무엇 때문에 혼이 나는지 얼른 실감이 나지 않아 의아할 정도였다. 그는 구속되었다. 그리고 파면되었다. 접에는 절대로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강모를 대신하여 결국, 강태가 나선 긴급한 연락을 받고는, 그 길로 선걸음에 달려온 기표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그를 끄집어내 주었다.
"하필이면 천하에 어디 계집이 없어서 그런 요물한테 잡어먹힌단 말이냐. 남자 일신 망신하고 패가허는 것은 순간의 일이다. 무엇이든 요령껏 다루고 거느리고 해야지, 이게 무슨 일이냐?"
쩟. 기표는 입맛을 다셨다. 그의 얼굴에 모멸의 빛이 역력했다.
"여자한테 잘못 물리면 그 못된 아가리는 사람도 삼키고 집채도 삼키고, 남자의 한평생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둘러 삼키는 법이다. 계집을 다루는 데도 요령이 있어야지. 이번 일은 각골 명심해라."
아까 골목 어귀에서 기표는 다시 한번 오금을 박았다.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를 이고 서서 아직도 온 정신이 안 돌아와 하깨 비처럼 넋을 놓고 서 있는 강모에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러고오, 할머님이 위독허시다. 오늘 내일을 기약 못허는 형편이야. 내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집에 가서 허기로 허고, 내일 새벽 첫차로 같이 가자. 이번 기회에 부청이고 뭐고 다 깨끗이 청산허고, 집에 가서 아버님 일이나 마음잡고 착실히 보아 드려라. 아버님도 경황 중에 득병을 하셔서, 이거 까딱하면 쌍초상 나게 생겼다. 기왕지사 한번 지나간 일은 그렇다고 허고, 뒷수습을 잘해 놓았으니 마음잡고 이제부텀이라도 착실허게 살면 되지. 내일 새벽에 내가 이리로 오겠다."
강모는 물끄러미 검은 냇물만 바라보았다. 머리 속에 부연 먼지가 날아앉아 모든 것은 그 형체가 분명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암담하였다.
"재가 정거장으로 나가지요. 여기까지 오실 거 없습니다."
그러나 기표는 짤막하게 말했다.
"아니다. 내가 오겠다."
그리고 기표는 힐끗 강모가 살고 있는 골목 어귀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엉긴 그 어귀에는 아까부터 사람의 흰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녀는 오유끼였다. 크으 어흐음. 마치 침을 뱉기라도 하는 것 같은 큰 기침 소리를 남기고 기표는 갔다. 기표가 사라져간 다음에도 한동안 오유끼와 강모는 각각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옴짝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강모는 유치장에서 열하루 만에 풀려 나왔던 것이다. 어둠은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침묵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각질로 굳어지는 침묵을 부수지 못하고, 강모는 방천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냇물만을 내려다보았다. 오유끼는 강모가 돌아오지 않던 날로부터 밤마다 골목 어귀에 나와서 그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막상 돌아온 그의 곁으로 오지 못하고 골목 어귀에 그림자처럼 서 있기만 하였다. 그녀는 그가 불러주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러나 강모는 오유끼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여지껏 이렇게 밤 냇물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들어가자."
강모는 방천에서 일어선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오유끼도 따라 일어서며 강모의 바지를 털어 준다. 캄캄한 어둠 속에 구부린 오유끼의 등허리가 여위어 보인다. 어둠 속에서는 그래도 잘 모르겠더니 방안의 불빛 아래 드러난 강모의 얼굴은 누렇고 초췌하다. 부스스 일어선 머리카락이 땀과 먼지에 엉켜 부옇게 보이고, 그의 뒤통수에는 새집마저 엉성하게 지어져 있었다. 불안하고 외롭다. 강모는 오유끼가 떠온 냉수를 벌컥벌컥, 소리가 나게 마신다. 오유끼는 조심스럽게 강모의 안색을 살핀다. 아까부터 감히 입을 못 여는 것이다. 그만큼 강모의 얼굴은 차갑고 초췌하여 낯선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언제인가처럼 그네의 귀에는 추운 솜털이 허옇게 일어선다.
"수천 숙부님은 내려가셨어요?"
강모가 내미는 물대접을 받으며, 오유끼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듯 묻는다.
"아니, 내일 새벽에 이리로 오신댔다."
"저..."
오유끼가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하며 강모 곁에 앉는다. 강모는 오유끼를 돌아보았다. 그 눈이, 왜...라고 묻고 있었다. 순간 오유끼는 대접을 내던지고 강모의 목을 휘감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몹시 북받치는 서러운 울음이었다.
"왜 그래...? 왜 울어, 오유끼?"
그러나 오유끼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더욱 조이며 흐느낀다. 강모는 엉겁결에 오유끼의 팔목을 풀어 내려고 하였다. 그럴수록 그네의 팔은 동아줄처럼 질기게 또아리를 감는다.
"당신... 나를 버리실 거지요?"
순간, 강모의 몸에서는 공포에 가까운 소름이 일었다. 그는, 살갗을 찬 손으로 씻어내리는 소름을 털어 내지 못하였다. 오유끼의 땀에 젖은 손바닥이 강모의 입술을 더듬어 찾는다.
"그렇지요?"
마치 말이 없는 그의 입술에서 손끝으로 대답을 읽어 내리는 것 같았다. 강모의 입술은 나무조각처럼 단단하고 메말라 있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언제고 당신이 나를 버릴 것이라고요... 나는 ... 아무것도 아닌 여자거든요... 당신을 만났을 때는 몸도 깨끗하지 못했어요... 나는 늘 그것이 부끄러웠어요... 지울 수 없어서 더 그랬어요... 이제는, 이제는... 정말로 버리실 거지요?"
그러나 강모는 여전히 말이 없다. 한참만에야 겨우
"어린애 같기는."
하고 간신히 밀어내어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오유끼는 그렇게도 정신없이 가구를 사들였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다가정으로 함께 온 이후에 일어난 오유끼의 변신이었다. 처음의 그녀는 의외에도 단순하고 검소하였다. 그래서
"우리, 날 풀리거든 다가봉 기슭에 움막이든지 초막이든지 하나 구해서 얻어 살자."
하고 강모가 이야기했을 때, 오유끼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심정 같아서는 비록 겨울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집을 구하고 싶었다. 오는 이, 가는 이도 없는 산기슭에 풀잎으로 지붕을 엮은 한 칸 띠집을 짓고 아랫목이 따끈하게 군불을 때면, 갈자리 방바닥에서 따뜻한 흙냄새가 피어오른다. 이따금 귀를 기울이면 골짝기를 피리 삼아 불고 가는 바람 소리. 얼어붙은 용소의 빙판에 미끄러지는 눈보라의 경쾌한 몸짓은 또 얼마나 보기 좋은 것이다. 그리고 몸에서 갓 피어난 연기 냄새를 풍기며 안겨 오는, 아무 욕심없는 어린 여자와 어울려 꽃잎처럼 희롱하는 아늑한 평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밤과 낮을 보낸다는 것. 강모는 오유끼에게서 그런 길들여지지 않은 즐거움을 얻고자 하였다. 또한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얼음이 녹은 냇물에 발을 잠그고, 청류벽 저쪽 숲정이에서 불어오는 꽃바람을 들이켜리라. 여름에는 캄캄한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 시원하고 감미로운 용소의 물살에 몸을 잠그고, 하늘의 달빛보다 요요한 인광을 번뜩이며 자멱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봄 가뭄이 길어지면서 냇물이 마르기 시작하고 부연 황사가 하늘을 메웠다. 다가봉의 육도목은 나무의 크기와 굵기가 몇 십 년, 몇 백 년을 넘는 것이었건만, 벼랑에 선 채로 말라 죽어 갔다. 그 잎사귀나 가지 줄기들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감나무로 속아 넘어가기 알맞았는데 그것은 입하 무렵이면 하얗게 피어났다. 벼랑으로 쏟아지는, 실로 낭자한 신록을 뒤덮는 육도화는 흡사 백설 같은데, 그 품의 높고 맑고 깨끗한 향기와 더불어 반공을 휘황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여름에는 이상하게도 빛 바랜 누르께한 꽃잎을 날리다가 말았다. 어른들은 누런 다가봉을 바라보며
"무슨 변이 나도 날 것이다."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메마른 암벽이 돌가루를 부스러뜨리고 육도목은 누렇게 시들어 병색이 짙은데다가 냇물마저 바닥이 앙상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심지어는 용소의 물굽이조차도 기세가 잦아들어 물 밑바닥에 잠겨 있는 거북바위의 검은 등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강모는 뙤약볕 아래 빠작빠작 말라드는 용소의 물을 내려다보며 피할 길 없는 예감을 느꼈다.
"당신... 나를 버리실 거지요?"
오유끼는 강모의 목을 감은 채,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묻는다. 강모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끈끈하게 땀이 배어난 그녀의 몸뚱이가 차갑게 느껴진다. 섬찟, 손목에 와서 닿던 수갑의 금속성이, 그 감촉이 되살아나서 그는 소름을 털어내듯 오유끼의 팔을 풀었다. 오유끼는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몸을 동그랗게 고부려 버린다. 사람의 손가락이 닿은 배추벌레처럼. 그리고"나는 다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하고 중얼거렸다. 오유끼가 사들인 오동 기름을 먹인 화각장과 사방탁자, 의걸이장 들이 불빛에 번들거린다. 강모의 눈에는 그것들도 금속성으로 보인다. 그는, 손목에 남아 있는 수갑의 차디찬 감촉을 거기서도 느낀다. 울고 있는 오유끼에게서도, 쩟, 입맛을 다시던 기표에게서도 그것은 느껴진다. 여름밤의 무거운 더위마저도 그는 시리기만 하다. 덜커덕, 철창을 잠그던 자물쇠 소리. 그 무거운 쇠통 소리. 써늘하게 가슴 살에 와서 닿던 그 소리. 그 소리를 속 시원하게 지워 줄 용소의 소용돌이는, 이미 물줄기가 잦아들어 바닥을 드러낸 메마른 입술로, 빠작빠작 타들어가는 제 가슴을 밤이 겹도록 깎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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