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 최명희
그물과 구름 (3/3)
드디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이다지도 순식간에 닥쳐 오다니. 이기채는 오한이 났다. 그리고 그 오한을 감추려고 짐짓 심상한 체 꾸미었으나, 청암부인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암부인의 와병 소식은 그날로 거멍굴에까지 번져갔다. 그리고 전주에 있는 강모에게도 다녀가라는 전보가 날아갔다. 바이올린 일이 있고 나서, 다시는 매안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강모가, 급한 연락을 받고 단걸음에 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데. 기표는 미리 안서방한테 귀띔을 해 두었다가 강모를 수천 댁으로 불러서, 이기 채와 논의하였던 일을 말한 것이다. 본디 강모는 수천 숙부 기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까닭 없이 어색하고 마음에 경계심을 품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표는 이야기를 하다가 도중에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의 눈 속을 지그시 들여다볼 때가 있었다. 그것은 어쩌다 한번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이 고비에 이르거나 꼭 관철시키고 싶은 확신이 전신에 팽팽하게 차 오를 때, 마치 상대방의 속셈을 한눈에 캐내려고 하는 것도 같고, 자기의 계획을 상대방에게 심지 박으려고 하는 것도 같은 지긋함이었다. 지긋함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눈빛은 오히려 바늘 끝같이 예리하여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런 눈빛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눈까풀로 눈동자를 가리는 형국이라는 편이 옳았다. 계산과 집념. 강모는 기표의 그런 눈빛에서 자갈의 차가운 번뜩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파충의 비늘이 자신의 살갗에 밀착하여 휘감기는 섬뜩한 감촉을 어쩌지 못하였다. 허나 강모는 누구에게라도 허심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기표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
"대실 질부한테는 네가 눈치껏 운을 띄워 봐라. 할머님 저렇게 실섭하여 누워 계신데 핑계야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않으냐? 약차 하시라는 친정의 성의라고 해도 좋고 다른 무슨 구실이라도 좋겠지. 그 질부가 남달리 명민하다면 이런 일쯤은 본인이 먼저 나서서 일을 추진하련만, 그 사람 마음이 곰살가운 데가 없어 무뚝뚝하기가 쇠망치 같은 성품이 아닌가. 기왕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대대로 내려오던 성씨마저 잃어 버린 마당인데, 무엇으로든지 집안의 기둥을 탄탄하게 붙들어 매야 할 것이 아니냐."
말을 하고 있는 기표와 말을 듣고 있는 강모는 서로 시선이 빗겨 있었다. 물론 그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의례적인 인사말고는 할 말이 별로 없었던 강모로서는, 이런 자리의 이런 이야기가 더욱이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너도 잘 알다시피, 이씨 문중 대종가가 그리 평탄한 명맥을 이어온 거 아니지 않느냐. 까딱하다가는 다시 풍비박산 되고 말 것이야. 네 아버님의 심기를 편안케 해 드리고, 실섭하신 할머님께도 위안을 드릴 수 있는 길이라면 오직, 가산이 느는 일이니라. 언뜻 생각한다면 선비의 집안에 비럭질 같은 해괴한 일이라고 비난하겠지마는 세상 일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우왕좌왕 혼란에 혼돈이 겹쳐 있는 판국이야. 이럴 때일수록 민첩해야 헌다. 수단을 다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어야지. 너도 나이 한두 살이 아니다. 이 집안을 이끌어 갈 종손 된 입장으로 그만한 안목쯤은 네게도 있을 것인즉, 내 말을 허수로이 듣지 마라. 내가 내 임의로 이 말을 너한테 허는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의 뜻이고, 너로서도 집안을 돕는 일이 된다. 결국 누구를 위해서 이런 일을 획책하는 것인고. 따지고 보면 너를 위하는 것이고, 집안을 위한 것이고, 문중의 번성을 위한 것이니라."
기표는 조근조근 말을 해 나갔다. 그러나 막상 기표의 말을 들은 강모는 다만 난감하고도 어이없는 낯색으로 일언반구 아무런 대꾸 한 마디 하지 않았다."내일 아침 아버님께 문안 여쭐 때 달리 묻지 않으시더라도 네가 자세히 말씀 여쭈어라. 대실 질부가 어찌 하겠다고 허는지를 말이다.
강모는 기표가 오금을 박는 말에 일종의 표기와 체념 같은 것이 어둡게 얽히는 얼굴로
"말을 해 보지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버리고 말았다. 그런 강모의 뒷등에 대고
"단단히 일러 두어야 헐 것이다. 적당히 네 생각대로 얼버무려서 말씀드렸다가는 아버님 노여움만 사고 말 게야. 말이 서로 앞뒤가 다르다가 실없이 되면 안된다. 그랬다가 공연히 집안 분란 일으키지 말고. 지난번 일도 있고 하니, 각별히 유념해라."
기표는 다시 한번 단서를 붙였다. 지난번 일이란 바이올린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강모의 표정이 구겨진다.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강모는 자신을 가누어 견디기가 어려운 데다가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더러, 무슨 절실한 문제로 느껴지지도 않는 일이 짐덩어리처럼 자기를 짓누르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비릿하게 한 것은 비루하다는 느낌이었다. (무엇이라고 발라붙여도 이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더러운 비럭질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것인가? 아무리 할머니께서 실섭을 하셨다고 그 어른 눈앞에서 당장에 이렇도록 비천해질 수 있을까. 있는 위에 더 있게 하여 기왕에 있던 것을 더 공고하게 다지고자 하는 것은, 없어서 기진맥진 위태로운 지경을 면하고자 무엇을 원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이것은 오직 욕심이다. 탐욕, 그것도 남의 것을 빌어서 내 것을 채우고자 하는. 아아, 참으로 역겨운 일이로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말을 끝내 입밖에 내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강모는 어떤 일에 부닥쳤을 때 그것을 간추리는 힘이나 강단, 혹은 맞서서 싸우는 담력, 아니면 그런 것들이 아닐지라도 질기고 뻔뻔한 당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한없이 무기력한 사람... 나는 왜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 그저 나는 키우는 대로 자라났다. 그리고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나는 없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살아 보기도 전에 왜 나는 이다지도 미리 지치는 것일까...) 그의 가슴에는 무엇이라고 집어 내어 말하기 어려운 허무가 안개처럼 자욱하였다. 그리고 엷은 얼음 조작이 녹아 스러지듯, 심정 한 구석이 그 허무의 안개에 잠식당하면서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자리의 살도 뼈도 그렇게 스러져 강모는 빈 가슴을 지탱할 길이 없었다.
그는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종잇장처럼 하얗게 말리며 이글거리고 있는 마른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 자신도 내리쬐는 뙤약볕에 그대로 말리어 버릴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굴레를 쓰고 태어난 것을 어찌하랴. 나는 나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무서운 집념의 조직 속에 한 수단으로 세상에 난 것을.) 강모는 대낮의 폭양에 희부연 회색으로 빛이 바래 버린 골기와 지붕을 올려다본다. 암키와 수키와가 이를 맞물고 골을 만들어 빈틈없이 엉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웠다. 울컥 토할 듯한 어지러움이었다. 기왓장의 한 조작 한 조작이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짓고 자리를 지키면서, 몇 십 년 몇 백 년을 두고 그렇게 그물코처럼 얽혀 짜여져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본 것 같았다. (그물. 저 그물에 걸려 꼼짝없이 나포되어 버린 불쌍한 사람. 내가 저 치밀한 그물코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속절없는 몸부림을 뿐이다. 날마다 저 그물을 머리에 쓰고, 자고, 깨고, 먹고... 저 속에서 숨진다.) 강모는 하늘로 머리를 치켜 올린 용마루의 탐욕스러운 대가리를 본다. 거대한 검은 몸뚱이를 서리 틀고 앉은 채로 그것은 목에 힘줄을 돋우고 줄기차게 무엇인가를 탐식하려 하고 있다. 그 용마루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허망할 만큼 텅 빈 하늘이 무심하고 아득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 조각의 구름이 아무뜻없이 떠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였다. (차리리 내 저 하늘을 떠도는 바람 같은 구름이나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리.) 방랑과 자유. 그 말은 사무친 음향으로 강모의 가슴에 울려 왔다. 그것은 어쩌면 신음 소리와도 같았다. 아니면 반란의 음모처럼 숨막히게 그리고 음험하게 숙덕이는 것도 같았다.
강모는 유유한 구름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그의 커다란 눈에 구름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불안은, 강모의 내부에서 두꺼운 각질을 뚫고 터져 나오는 욕망이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만큼, 질기고 끈끈하게 내리누르는 어떤 힘과 부딪치면서 뒤흔들리는 파문이었다. 강모는 그 불안을 지그시 참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의 한복판에 깨진 거울 조각같이 날카로운 태양이 메마른 빛을 내뿜고,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한 조각의 구름은 망설이며 유유히 부드럽게 나훌나훌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든지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 이 질긴 그물의 코를 물어 뜯고, 저 한 조각의 구름처럼 나는 방랑하고 싶다.) 강모는 홀린 듯이 구름을 바라보았다. 구름은 그 어떤 그물로도 잡을 수 없는 흰 바람이었다. 으아아앙. 넋을 놓고 서 있는 강모의 귀에 난폭하고도 순간적인, 숨이 깔딱 넘어가는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가 터지는 것이 들려왔다. 중문간에서 나는 소리였다. 강태의 아들 희재다. 다섯 살인 희재는 세 살바기 제 동생 영재와 큰집 중문간의 그늘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희재는 두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버둥개질을 하며, 엉거주춤 서 있는 붙들이에게 정신없이 흙을 내뿌린다. 붙들이는 지고 있던 물지게를 벗어 내려놓더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럴수록 희재의 울음 소리는 앙칼지게 찢어지고 붙들이는 울상이 된다.
"이께잇 거 흙인디 멋 땀새 그렇게 우요? 내가 아까맹이로 새로 맹글어 주면 되잖어요오, 예에?"
"으아아앙. 죽어. 너 죽어."
붙들이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다. 희재 앞에 쭈그리고 앉은 담살이 새끼머슴 붙들이의 면상에다가 희재는 홱 홱 흙을 뿌린다. 물지게를 지고 오느라고 땀투성이가 된 붙들이의 얼굴은 황토흙을 함빡 뒤집어 써서 호물호물한 늙은이처럼 보였다. 아직 중머슴이 되지 못하고 물을 지어 나르는 물담살이 노릇을 하는 그는 열네 살이 되었건만 몸집이 작고, 무엇이 시원치 않아 그런지 물외 꼭지 마른 것 모양으로 힘이 없이 시들어져 보이는 아이였다.
"죽어. 너 죽어."
희재가 흙을 끼얹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가, 흙더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붙들이의 엉덩이를 발로 찬다. 다섯 살바기의 조그만 발길질이라지만 약이 올라 차는 것이라 등판까지 울리는데, 붙들이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 준다.
"이라 와서 보랑게 그러네요. 이것 봐요. 내가 새로 맹글어 준당게요. 이께잇 거 천지에 쌔고 쌨는 거이 흙뎅인디. 흙무데기가 무신 황금단지간디요오... 이렁 거 다아 장난으로 집 짓고 노는 거이제, 참말로 집이고 참말로 곡석이간디요...?"
"내 놔. 내 꺼 내놔. 내 놔아."
희재는 발길질을 멈추고 두 주먹으로 붙들이의 등을 두드린다.
"그렁게 내가 시방 새로 맹글어 주잖어요오. 인자, 그만 우시요. 이께잇 노무 흙데미, 내가 산에 가서 바지게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지어다 부서 디리께요. 기양 이 마당에다 아조 산꼭대기를 파다가 그들먹허게 부서 디리께요. 예? 울지 마시요. 아앗따아, 그만 울어요오."
그러나 희재는 동그란 얼굴을 위로 발딱 제끼고 목청을 놓아 운다. 그 소리에 놀란 붙들이의 얼굴이 샛노래진다. 애기 노련님 희재의 여린 목에 푸른 힘줄이 돋아 이마빡에까지 뻗친다. 한자리에 앉아 있던 영재는 덩달아 따라 울고 있다. 붙들이는 희재의 조부인 기표가 사랑채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조바심에, 마당에 흩어진 흙더미를 쓸어 모으느라고 정신이 없다. 두 어린 것들은 큰집의 집 그늘에 앉아 담 밑의 흙무더기에서 흙을 떠다가 집짓기를 하고 놀고 있는 중이었다. 손아래인 영재는 공연히 제 형의 본을 따라 흙장난만 하고 조막손에 흙을 쥐었다 놓았다 헤적거리기만 하였으나, 희재는 달랐다. 행여 흘릴세라 조심스럽게 깨진 사기대접에 흙을 담아 들고 중문간 그늘 밑으로 날라다가 부어 놓고, 다시 또 가서 퍼 오고 하는 품이 실제로 그 흙대접이 무슨 곡식 노적가리나 황금인 양하였다. 몇 수십 차례를 그렇게 되풀이하여 흙을 퍼 날라다가 드디어
"이거 내 땅이야. 너 오지 마."
하고 영재한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 사금파리 조각으로 제 양껏 넓은 자리를 잡아 둥그렇게 금을 그어 경계를 삼았다. 그리고 그 금을 따라 도도록하게 흙담을 둘러 놓고 담 안에 칸을 나누면서, 이거는 안채, 이거는 사랑채, 이거는 곳간, 이거는 헛간, 이거는 행랑채 이거는... 하고 일일이 구분을 지었다. 그 중 곳간이 제일 넓었다. 영재는 영문도 모르고 희재가 만드는 것들을 재미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앙징스러운 손을 뻗어 곳간이며 사랑을 쥐어 보려 한다. 그럴때 희재는 번개같이 덤벼들어 영재의 손을 쳐냈다. 희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으면 크게 넓게만 만들었다. 그런 뒤에, 곳간의 네모 벽안에다가 수북이 흙을 부었다. 금방 소담스러운 흙봉우리가 솟았다. 희재는 옆에 있는 흙을 두 손으로 떠다가 주르르 쏟아 붓고, 다시 떠다가 쏟아 부었다. 그리고는 부을 때마다
"이거는 쌀."
"이거는 콩."
"이거는 보리."
하고 말했다.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송 돋아나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은 곳간에 쌓인 흙더미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희재는 떨어진 땀방울 위에 다시 흙을 부었다. 흙이 더미를 이루고 봉우리가 높아질수록 희재의 손은 더욱 빨라지고 신명이 나서 벙글벙글 웃음이 번져났다. 희재는 지금 막 이제 거의 바닥이 나 버린 흙을 아쉬워하였다. 그리고 영재가 헤적거리며 놀고 있는 흙사발이 눈에 들어와 그것을 제 앞으로 채 오려고 하는 찰나였다. 낡은 짚신발이 우왁스럽게 희재의 집을 밟아 버린 것이다. 으아아앙. 발에 밟힌 담이 무너지고, 박살이 난 곳간의 산더미 같은 곡식들이 우르르, 쏟아져 버리는 순간 희재의 울음이 터져나왔다. 물지게를 지고 뒤뚱뒤뚱 무엇엔가 골몰하여 중문간을 넘어서던 붙들이는 갑자기 발 밑에서 터지는 희재의 울음 소리에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의아하여
"왜 그렇게 우요?"
하고 꼬마 도령을 내려다보았다.
"죽어. 너 죽어."
그때에도 영문을 몰라 붙들이는 엉거주춤 서 있기만 하였으나, 이윽고 자기가 희재의 살림살이를 밟아 뭉개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물지게를 벗어 놓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이께잇 거 흙인디 머엇을 그렇게 운다요? 내가 금방 새로 맹글어 주께 울지 마시요. 이거 다 흙이요, 흙."
하면서 아까대로 모양을 갖추어 집을 만들고, 대문 중문을 세우고, 곳간에 곡식을 수북이 부어 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희재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며 귀청이 찢어지게 울어댄다. 붙들이가 지은 집과 곳간에 쌓은 곡식은 희재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였다. 마당에는 아까는 없던 노적가리까지도 수북수북 고깔처럼 쌓여졌다. 훨씬 부자가 된 것이다. 붙들이는 이거 보아란 듯이 희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허나 희재의 울음은 그칠 줄 모른다. 그 어린 것의 숨이 넘어가는 울음 소리에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집착과, 탄식에 가까운 통곡이 질기게 섞여 있었다. 강모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종의 증오마저도 느껴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희재는 영재보다 겨우 두 살 위였지만 조부 기표의 풍신을 닮아 벌써부터 키가 제 또래보다는 훨씬 더 컸고 몸집 또한 다부졌다. 강모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 아이고 이께잇 거 흙인디 왜 그렇게 우요... 이께잇 노무 흙, 천지에 쌔고 쌨는 흙무데기가 무신 황금단지간디요오, 이렁 거 다아 장난으로 집 짓고 노는 거이제, 참말로 집이고 참말로 곡식이간디요. 이거 다 흙이요, 흙. 강모는 머리를 흔들어 털어 낸다. 붙들이가 희재를 타이르던 좀 전의 말이 그의 귀에 남아 묻어 있어서이다. 그 말은 끼얹은 흙처럼 귀를 덮었다. ... 이께잇 노무 흙 ... 이거 다 흙이요오, 흙. 그말을 몇 번이고 되뇌어 본다. (어린 것이 그것이 흙인 줄을 어찌 알리오. 제 몫이라고 고깔 봉우리 창고에 쌓아 들일 때, 오직 재물이요 곡식이라 여기면서 애지중지 아끼고 흐뭇해하니, 흙이라도 제가 애착하면 재산이 아니랴. 이제 저의 재산을 잃었다 하면서 저다지도 서럽게 울고 통곡을 그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한살이가 저와 무엇이 다르랴. 흙덩어리를 긁어 모아 산적을 하고, 그 먼지 같은 흙덩어리를 지키다가 속절없이 죽어간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지키려고 파수꾼을 두어 밤을 새우느니...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로다.)
문득 강모의 머리에는 살구나무 아래 차려 놓았던 밥상이 떠오른다. 봄철이면 그렇게도 하염없는 살구꽃 이파리가 눈발처럼 날리고 날리었지. 떨어진 꽃이파리는 꼬막 조가비에 소복하게 담아 꽃밥을 만들고, 꽃잎이 지고 나면 흙밥을 먹었다. 깨진 사금파리의 가장자리를 장독대의 돌멩이에 문질러서 곱게 다듬으면 그것은 또 얼마나 어여쁜 접시였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사금파리 접시를, 강실이는 소중하게, 정말로 금이라도 갈까 보아 조심하면서 옷고름 자락으로 윤이 나게 닦아내곤 하였다. (부질없다. 모든 것이 부질없구나. 지나가 버린 그날에는 꿈엔들 그것이 장난인 줄을 내 알았겠느냐...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목숨조차도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을.) 강모는 자신의 몸이 용마루 너머 아득한 하늘 저쪽으로 흘러가는 한 조각 구름처럼 무중력의 상태로 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이상한 서글픔에 몸이 잦아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실아...) 어찌하여 그 이름은 이다지도 서럽고 눈물겨운가. 가슴의 살 속 가장 그늘진 곳에 가느다란 금실처럼 애잔하게 반짝이는, 보일 듯 말 듯한 그 간절함을 어떻게 차마 말로 할수 있으리. 그것은 때대로 촛불의 심지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그네의 이름이 떠오르면, 그 이름은 부싯돌같이 순간적인 불꽃을 일으키며 심지에 불을 붙이고 만다. 그것은 강모의 힘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다. 아무리 숨을 깊이 들이마시어 꺼보려고 하여도 속절없는 일이었으며, 가슴을 오그려 불꽃을 죽여 보려 하여도 허사일 뿐이었다. 살에 박힌 심지는 살을 태우며 속을 잦아들어간다. 가슴 갈피에 매운 연기가 자욱해진다. 강모는 기침을 토하듯 한숨을 토한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그는 대문간에 이르러 더는 나가지 못하고, 발목을 붙잡힌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선 채로 오류골 작은집의 지붕을 내려다본다. 오류골 작은집은 언제나 고즈넉하다. 사람의 소리도 바깥까지는 들리는 법이 없다. (둥그런 초가지붕. 무지개 같은 강실아. 너 살고 있는 네 집의 정답고 욕심 없는 지붕이야 너에게 그물일 리가 있겠느냐... 저 지붕은 너를 감싸고 덮어 주는 너울일 것이어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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