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 최명희
그물과 구름 (1/3)
"어머니, 창씨개명을 하기로 문중에서 결정이 됐습니다."
이기채는 단도직입으로 말을 던진다.
"혈손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허울뿐인 성씨만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우선은 급한 불을 끄고, 강모, 강태, 목숨을 보존하고 있자면 언젠가는 일본이 망허지 않겠습니까? 그놈들이 오래 간다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몇 백 년 몇 천 년을 갈 것인가요? 아이들이 제 근본만 잊지 않고 정신을 놓지만 않는다면, 성씨야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나, 자손이란 한 번 맥이 끊어지면 다시 잇기는 어려운 법이라, 강물 같은 시세를 어찌 손바닥으로 막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징병 문제만 해도, 한 번 출병허면 그 목숨은 개나 도야지 값도 못허는 형편인지라, 기표가 손을 써 보겠다고 했구만요. 우선 이렇게 창씨개명을 허지마는, 이것은 사람이 옷만 바꿔 입는 것이나 한가지라서 근본은 그대로 남는 게지요. 어머니, 너무 심려는 하지 마십시오. 때가 이와 같으니 참아야지 어쩌겠습니까."
이기채는 자신에게 타이르듯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청암부인은 그런 이기채를 바라보지도 않고,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더니, 한참만에야
"별 도리 없는 일이지."
하고, 한 마디만 말하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질식할 듯한 침묵의 무게에 눌린 이기채가 고개를 들자 청암부인도 이기채를 바라보았다. 그때, 이기채가 본 것은 그네의 눈매였다. 그 눈매에는 이미 서리가 걷혀 있었다. 무심코 이야기하다가 부인의 눈매에 부딪치면, 보는 사람을 서늘하게 하였던 허연 서릿발은, 지금 습기처럼 축축한 물기로 번져나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이기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은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그는 노안의 늙은 주름 갈피로 번지는 습기를 보면서, 지금까지 보아온 청암부인의 어떤 모습에서보다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거대한 기둥처럼, 혹은 질긴 힘줄처럼 버티고 긴장시켜 오던 무엇인가가, 순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탄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끝이 차게 식어들었다. (이 일을 어찌하랴) 그는 심장이 거멓게 죽어드는 것을 가까스로 견디며 허리를 곧추세우려 하였으나, 한쪽 어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청암부인은 소리 없이 낙루한다. 눈물이 옷섶으로 떨어져 젖는다.
"한 생애가 허사로다..."
청암부인의 허리가 앞으로 꺾인다. 삭은 나무토막이 부러지는 것처럼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진 그네는 두 팔로 몸을 버티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었다. 이기채는 감히 그 앞에서 아무 말도 더는 잇지 못한 채, 자실하여 넋이 나간 얼굴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티끌처럼 형체도 없이 흩어지는 것을 느낀다. 자기 몸을 이루어 주던 단단한 껍질을 잃어버리고 나니, 남는 것은 티끌뿐이었다. 아아, 내가 이 어른에게 지금까지 이대도록 마음을 의지하고 살아왔었단 말인가. 어찌 사람이 태산이며 하해이리요. 한낱 생물에 불과한 것을,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를 사람이 아니시라고 생각했었다. 이기채는 자신의 심정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물이란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좁은 통에 들어가면 좁아지고 넓은 바다에 쏟으면 넓어진다. 낮으면 아래로 떨어지고 높으면 그 자리에 고인다. 더우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추우면 얼어 버린다. 그릇과 자리와 염량에 따라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순응하지만, 물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 있지 않은가. 모습과 그릇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땅 속으로 스며들어간 물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마는 지하수가 되어 샘물을 이루고, 하늘로 증발한 물은 이윽고 구름이 되어 초목을 적시는 비를 이룬다. 대저 형식에 집착한다는 것이 무엇이랴. 보이는 것에 연연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오히려 형식에 본질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리라. 작금은 시세가 불운하여 내가 조상을 욕되게 하고 가문의 문을 닫는다마는, 이것은 다만 형식일 뿐이다. 얼음이 아무리 두꺼운들 실낱 같은 봄바람을 어찌 이기며,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지를 한 입에 삼킬 것 같아도, 구름이란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무게를 못 이기어 빗방울이 되고 마는 법. 기다리면 때가 안 오랴... 내 대에 안 오면 강모가 있고 가모 대에 안 오면 그 다음 대가 있지 않은가. 그러고도 자손은 면면히 대를 이어갈 것이니, 아무러면 때가 안 오랴...)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어거지에 불과한 이론이었다.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심중을 편히 하려고 생각을 고쳐 보아도 (잃어버렸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는 허전한 절망감은 어떻게도 메울 길이 없었다. (무엇으로 보상을 받으리오. 내가 무슨 부귀영화와 복락을 누리려고 이런 욕된 일을 하고 말았을까. 무엇인가 이 일에 합당한 대용의 결과가 있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기채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서서 서성거렸다. 자신의 내부에서 허물어져 버린 맥락의 기둥을 어떤 것으로든지 떠받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가문이고 재산이고 그냥 그대로 쓰러져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 빈 곳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채워 넣어야만 이 허전함이 다스려질 것 같았다. "한 생애가 허사로다..." 청암부인의 사그라지는 한숨 소리가 이기채의 가슴에 흙더미 무너지듯 무너져 얹힌 것이, 숨을 들이쉬어도 내쉬어도 뱉어지지가 않는다. (한번 잃어버리면 그뿐, 어찌 다른 것으로 채워 넣을 수 있으리오. 내가 믿느니 다음 대라고 하지만, 강모가 어디 실한 사람인가. 제 심중 하나를 이기지 못하여 비틀거리는 허약한 놈이고, 그놈이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어찌 그 아들을 또 믿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 저러다가 힘없이 돌아가시면, 나도 성치 않은 몸 언제 덜컥 죽을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누가 다시 성씨를 찾아 줄 것인고. 어허어. 이 노릇을, 허망한 이 노릇을 어디 가서 하소연을 헐 수 있을꼬) 확실히 이기채는 평정을 잃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노랗게 졸아들었다. 본디도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기채의 곤두선 신경 때문에 그의 소맷자락까지도 손이 스치면 베일 정도로 날이 서 있었고, 기표는 이기채의 사랑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이기채는 문갑 속에 쟁여져 있는 문서들을 빈틈없이 점검하고, 산판으로 계산을 맞추고, 때때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 결엔지 가슴이 무너진 자리에는 불안이 소리 없이 스며들어 조금씩 이기채를 삼키고 있었다.
"대실 사가에서는 별반 거조할 기미가 없지요?"
이기채가 문서를 접어 봉투에 넣는 것을 보며 기표가 무심히 지나가는 말로 묻는다.
"허가들이 뭐 언제는 거조를 했는고?"
이기채의 말꼬리가 아니꼬움을 참지 못한다.
"참, 내색을 드러내 놓고 헐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웬만하면 그만헌 살림 몇 천 석씩 가지고 있다면서 여아를 출가시키는데 그래 한 백 석 거리 논 문서 한 장을 농지기에다 못 끼워 보냅니까? 다 그만 못해도 사오십 석의 문서 정도는 으레 예의로 따라오는 거지요. 쓸모없는 장롱 이부자리에 온갖 가구 집기만 바리바리 싣고 오면 뭘 합니까? 실속이 있어야지요. 더구나 며느리가 또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하나 외며느리 인데, 그 사장 어른도 어지간히 변통이 없으신 분이구만요."
이기채가 마른 기침을 돋우어 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
"뭐 며느리 맞어들여 치부를 허자는 것은 아니올시다만, 이쪽에서 바라지 않더라도 그리허는 것이 저쪽 인사가 아니겠습니까? 혼인 당시에야 어찌어찌 사정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씨 문중 대종가의 외며느리가 자신의 눈치나 수완으로 그만한 일을 못해내고 맙니까. 부혼이라고 남들이 부러워했던 일도 다 빛 좋은 개살구고, 남보기만 민망하게 되었지요."
"그렇다고, 가서 내놓으라겠나?"
"형님이 그러실 수야 없는 일이고, 강모를 시켜서 제 안(아내)한테 말하랄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게 속보이는 일이 아닌가? 집안의 체면도 있는 것이고."
"속은 무슨 속이 보인다고 그러세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백모님은 저렇게 맥을 놓아 버리시고, 강모는 나이만 스물 몇이지 그 소견이나 언행이 유아를 벗지 못하였습니다. 시국 또한 심상치 않어요. 이런 고비에 집안 고삐 단단히 틀어쥐지 않으며 어느 귀신이 와서 채갈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형님."
아기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 속에는, 대실에 혼행 갔을 때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대실의 허담은 기표의 예언을 무색하게 하고 말았었다. 기표는 그쪽의 살림형세로 보아 상당한 인사가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시속으로 보아,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행세하는 집안의 혼수에 논 문서가 끼여오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만만치 않은 재산이 여식을 통하여 시댁으로 건네지기도 하였으니까. 그것은 무슨 과잉 혼수라든가 허세가 아니라 비록 여식으로 나서 삼종지도와 여필종부의 법도를 따라, 연한이 차면 자라던 집과 낳아 주신 부모를 떠나 시집으로 가는 자식이지만, 그도 소중한 자식이 분명한 까닭에 재산 있는 부모로서는 아들에게 그러한 것과 꼭같이 딸에게도 상속을 해 주었으니, 아들은 부모 임종 후에 그 재산을 분배받고, 딸은 시집갈 때에 미리 받는다고 생각하면, 논 문서란 천박한 시속의 오랑캐짓이 아니라, 어쩌면 자식이 부모에게서 받는 당연한 지분일는지도 몰랐다. 근자에는 같은 자식일지라도 남녀를 엄히 구분하여 출가하는 여식을 남 된다, 치부해 버리는 것이 시속으로 퍼져 있으나, 거슬러 선대로 올라가 선조 임금 때까지만 하여도, 부모의 재산을 상속하여 문서로 남길 때, 출가한 딸이라 하여 조금도 차별하지 않았으니, 시속이 변했다뿐이지 근본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강모의 혼담으로 매파가 바쁜 걸음을 치며 안채에 드나들 때, 가장 돋보이는 자리에 대실의 효원이 올려진 내면에는, 이러한 계산이 어느 정도 숨겨져 있었던 것은 사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막상 혼인은 이루어졌으나 그 인사라고 하는 것이 빠진 채 짐꾼, 일꾼, 하인, 하님들이 엄청나게 기다란 행렬로, 살림살이 농지기만을 싣고 온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어찌 내색을 할 수 있겠는가? 사돈이 딴전만 보면서 고담준론으로 자신의 청빈을 자랑하는데야 난들 어찌하겠어? 양천 허씨 가문에 청백리가 몇몇이며, 허씨 선조들은 치부나 벼슬보다 낙향은자로 시서화에 능하였다, 하는 선비 앞에서 무슨 흉금을 털어놓아, 털어놓기를, 혼자서 마않이 청백허고 혼자서 도도허게 고상헌 사람한테 말이야."
대실에서부터 내내 심기가 편치 않던 이기채는 매안으로 돌아와 기표에게 내뱉았다.
"농인 척허고 흉금을 좀 털어놓으시지 그랬습니까?"
하는 기표에 대한 대답인 셈이었다.
"형님 성품이 너무 깐깐허신 탓이올시다."
"깐깐허지 않으면 어쩌라고?이런 일이 어지 말로 해서 될 일인가?"
"안되는 일을 되게 해야지요. 세상 일이 어디 말로 해서 된다면야 오죽 좋겠습니까?그렇다면 그게 무릉도원이지 누가 인간 세상이라 허겠습니까?"
"답답한 일이야."
"가문, 가문 하지만 그도 다 선대쩍 말입니다. 팔한림에 열 두 진사가 나고 정승, 판서 즐비하게 했다는 족보가 자랑이 아닌 것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당장에 그 후손인 우리는 무엇으로 가무을 빛냅니까? 벼슬을 하려니 조정이 있기를 합니까아, 충신이 되자니 임금이 계시기를 합니까. 거기다가 선비로서 갈고 닦은 학문으로 후학을 기르자니 학동이 있기를 합니까. 죽림칠현이 되자 해도 대밭이 없는 세상 아닌가요?도대체 무얼 가지고 이 가문을 번창하게 할 수 있게습니까? 체면, 체면,지금 이 세상 돌아가는 난국이 어디 체면 있는 세상인가요? 상놈이 상전 되는 세상 아닙니까아. 왜놈들이 상감노릇 허는 것을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백성이라면, 솔직히 무력헌 것을 인정하고 쓸데없는 양반 체면 따위에 매이지 말 일입니다. 힘도 없는 주제에 정신만 살어 가지고 앉은 방석을 못 돌리면 결국 앉은뱅이 노릇밖에 더 헐게 무에 있단 말입니까?이럴 때는 시대를 이용해야 합니다. 시대를 거슬러 산 사람치고 성명 삼 자 온전허게 보존헌 사람이 없습니다. 형님. 도대체 지금 이 가문에 구체적인 힘이 될 수 있는 게 무업니까? 형님 당대에 와서 무얼로 대종가의 명맥을 이어 놓으실 겁니까?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에 무엇으로 반석을 만들어 강모한테 물려주시려고 하시는 건가요? 큰집 재산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찍도 다 청암백모님 자수로 이루신 것인데, 형님 대에 와서 얼핏 안심한다면, 이런 난세에는, 그 재산이 하루아침에 남의 것 되기란 일도 아닙니다. 가세란, 명성으로든지 재물로든지 창성해 나가야지, 기울기 시작하면 그도 또한 순간의 일이올시다."
기표의 음성은 꼬챙이처럼 이기채의 심정을 아프게 쑤신다. 그럴수록 이기채는 정신이 헛갈릴 만큼 어지러워 저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송두리째 누구에겐가 떠맡겨 버리고 싶어진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일세를 풍미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내가 나이 마흔여섯이라 오십을 바라보는 이 마당에, 공명을 떨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라지게 가세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유야무야 한평생이 허퉁하기 짝 없는 일인데. 무엇으로 이 세상에 왔다 갔다 갔다는 점을 찍으리. 그것도 명맥이 끊기다시피 된 종가에 종손으로 들어와서 제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어찌 나라고 생각이 없고 중정이 없겠는가......? 다만 선조에게 누가 되지 않고 사람 사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가산을 늘리자니,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는 게 제일이라. 피가 나게 절약하여 살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는 모르겠더니만 이제 나도 나이 오십 줄에 들어 서려니. 몸 속에서 가랑잎 소리가 나.......어디 평지를 걷다가 허방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현기증이 나게 초조한 생각이 나서, 나도 내 정신이 아닐 때가 많다."
대실에서 돌아온 이기채의 심기가 그러하였으니,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한테서 나온다는 말도 있었으나, 불편하게 구겨진 그의 심정이 쉽게 풀릴 리가 만무하였다. 그때 만일 청암부인이 재촉과 채근만 아니었다면 효원의 묵신행은 삼 년, 혹은 몇 삼 년이 미루어졌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막상 신랑인 강모의 태도도 왠지 대실에 두고 온 신부에 대하여 서먹한 것 같은데다 좀체 어울리려 들지 않아서, 아무리 나이 어려 음양을 모르고 부부의 도리에 서툴다 하나, 그것만으로 보아 넘기기 섬서한 면면이 남의 눈에도 드러났으니. 대실 말만 나오면 강모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기미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알아차린 청암부인이 서둘러서 효원을 불러온 사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집안으로 들어온 며느리인지라, 사사건건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거기다가 며느리는 터무니없이 손만 컸다.(제 구실도 못허는 주제에 대갓집 마나님 흉내부터 배운답시고) 그것은 ,이기채에게는 심히 못마땅한 구석이었다. 지난번 일만 해도 그랬다. 물론 곳간의 열쇠꾸러미는 율촌댁이 지니고 있었지만, 살림을 가르칠 요량으로 논에 내갈 놉밥 양식을 효원에게 맡겨 보았다.
"네가 장차는 이 집안을 꾸려갈 사람 아니냐? 쌀 한 톨이라도 허비하지 말고 규모 있게 살림을 해야 헌다. 아무리 바깥 어른이 천석꾼 만석꾼이라 해도 안에서 살림을 흘려 버리면 모조리 허사가 되고 마느리라. 집안 살림이 불어나고 줄어드는 것은 오로지 안사람 손끝에 달린 것. 손끝이 곧 재산이라. 쓰러져가느 초가 삼간 누옥일지라도 안식구가 바지런하고 아껴 살면 훈김이 나는 법이요, 천하 없는 부호 갑부라도 손끝에서 살림이 새 나가면 빈 집이나 한가지다."
한평생 이 생각을 명념해라. 율촌댁은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면서 곳간을 열어 주었다. 그네의 마음속에는 시험을 해 보자는 심산도 들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주에서 함지에 쌀을 퍼내는 바가지를 보고 놀란 사람은 율촌댁만이 아니라 안서방네도 마찬가지였다. 쌀에 보리와 콩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듬뿍듬뿍 반찬거리를 담아 내줄 때는 아예 율촌댁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날 논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할 만큼 양껏 포식들을 하고 나서 놉들이 신바람이 나, 평소보다 곱절이나 일을 많이 하였다.
"너, 무슨 심산으로 그렇게 양식을 퍼냈느냐? 그렇게도 대중을 못하겠더냐? 그릇 수 따라서 알맞추어 양식 대중하기가 그렇게 어려워?"
율촌댁 음성에 모가 섰다. 효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앉아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야 어디 대궐 살림이라고 견디어 낼 재간이 있겠느냐? 허허어. 네가 시에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구나. 한 끼니 놉밥이 세 끼니 모가치가 넘는 것이 어디세 배운 요량이란 말이냐? 그렇게 네가 표시내지 않어도 천석꾼 만석꾼 대갓집 따님인 것은 내 알지만, 가난헌 집으로 출가해 왔으면 이 집 가풍대로 다소곳이 따러야지, 참으로 괴이하고 알 수 없는 일이로다. 인심을 얻을 데가 따로 있지 놉들한테 인심얻어 무슨 일을 꾀아겠다는 것이냐? 누구는 칭송ㅇ르 들을 줄 몰라서 쌀 한 톨을 애끼는 줄 알았더냐?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효원이 고개를 수그린 채 가만 있자 율촌댁은 할 말을 한꺼번에 다하겠다는 듯이 다긋쳤다.
"우리집은 그런 집 아니다. 수챗구멍에 밥티가 허옇게 쏟아지고, 돼지 구정물토에도 쌀밥 붓는 집이 아니야. 친정에서 그렇게 배웠거든 여기서는 그 버릇 고쳐라. 놉한테 퍼 주고 하인, 머슴, 계집종 멕이자고 농사짓는 거 아니다."
그제서야 효원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은 아래를 보고 있었다. 어른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지 않는다는 공손한 예의로 다소곳이 내리뜨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호원의 꼿꼿한 고개와 곧추세운 허리로 보아 오히려 그렇게 내리뜬 눈이 율촌댁으로서는 불손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
덤으로 귀한 사진도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