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 최명희
8. 바람닫이 (4/5)
그러나 그것은 말하기가 좋아 지원병이지 강제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통하여 지원병 지원을 권유하였으며, 그 응모를 보다 효과적으로 권유하기 위하여 설전부대를 조직하고, 지원병 후원회 및 행정력, 경찰력을 동원하여 계몽선전을 하였는데, 그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지원병에 응모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영문 모를 전장에서 탄알받이로 죽어갔다.
"일본놈들이 볼 때, 조선 사람이 어디 사람같이 뵈겠습니까? 마소보다 더 노동력이 월등 유효헌 짐승이올시다. 거기다가 조선땅이 그저 병참기지 정도가 아니에요. 조선 사람 모두가 전력원이 되는 겁니다. 조선의 자식놈들은 모두 다 끌려 나가서 남의 나라 전쟁에 개죽음, 탄알받이로 죽게 될 것이란 말씀이올시다. 강모가 지금 열일곱 살 아닙니까? 물론 만으로는 아직 안됐지만."
그때 기표는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이기채를 향하여 들이대듯 다가앉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도 같은 말을 한다. 다만 강모가 열아홉인 것이 다른 뿐. 이기채는 아무 말도 아지 않고, 논쇠 재떨이를 장죽으로 끌어당긴다. 일꾼들과 하인, 머슴, 집안의 노복들과 거멍굴 사람들에게, 이기채의 모습이 저만치서 얼핏 비치면
"고추바람 분다."
는 암호를 만들어 냈을 정도로 매사에 각단지고, 매차고, 여지없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는 초췌해 보인다. 그의 작은 체수를 탈수된 사람처럼 더욱 깡말라, 과민한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이기채는 마음이 천근이나 무겁다. 재떨이를 끌어당기며, 한숨을 좀 돌리려고 숨을 들이쉬니, 갑자기 마당으로부터 불어오는 뙤약볕에 익은 더위가 헉, 가슴에 얹힌다. 그러더니, 금방 속이 어지러워진다. 미슥미슥 하면서 토하고 싶은 것이 서체인가도 싶다. 그는, 들었던 담뱃대를 재떨이 위에 얹어서 밀어 버리고 죽침을 찾는다.
"왜, 속이 거북하십니까?"
이기채의 얼굴은 어느새 샛노랗게 질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개를 젓는다.
"이리 좀 누우시지요."
"괜찮어."
이기채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노래진 얼굴을 날카롭게 찡그리며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막 누우려고 하는데, 마당에서 안서방의 목소리가 터진다.
"서방님 오시능교?"
잔뜩 반가워서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목소리다. 이기채는 보료 위에 누우려다 말고 몸을 일으키며, 마당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잘 있었어?"
안서방에게 대답하는 것은 한결 의젓해진 강모의 목소리였다. 이기채는 안석에 등을 기대면서 한쪽 팔을 의침에 올려놓아 몸의 중심을 가눈다. 그 몸짓이 몹시 힘들어 보인다.
"강모가 오는 모양입니다."
기표의 말에 이기채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하절기 방학을 맞은 모양이었다. 밖에서 몇 마디 주고받던 강모가 마루로 올라와 서는 것 같더니, 목외로 들어선다. 목외란, 사랑의 가운데를 장지로 막아 아래위칸으로 나눈 위칸을 이른다. 보통 주인은 아래칸 아랫목에 앉아 있고 손님은 위칸으로 들어와, 문턱을 사이에 둔 채 거기서 인사도 하고 대화도 나눈다. 물론, 주인과 무관한 사이거나 문중의 어른들, 그리고 집안의 권속들은 목외를 통하여 들어온다 하여도 바로 주인이 앉은 자리 옆으로 오지만, 아랫사람이거나 하인, 또는 주인의 허락이 없는 손님들은 대개 목외에 머물다가 간다.
"강모 오느냐?"
기표가 먼저 아는 채를 한다. 강모는 한참 성장할 나이라서 그런지 지난 봄에보다 훨씬 몸집도 충실해진 것 같고, 거뭇거뭇 수염자리가 잡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여름 햇볕에 그을리기도 했을텐데 얼굴ㅂ은 희다. 글쎄, 희다기보다는 창백해 보인다고 할까, 어깨가 벌어지고 키가 자라서 언뜻 보기에는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싶은데, 얼굴빛이 마치 여름 창호지같이 바래있어서 웬일인지 불안해 보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검은 가방을 내려놓고 이기채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숙부 기표에게 절을 한 자리 더 한다.
"그래 그간 별고는 없었느냐?"
이기채가 의침에 몸을 의지한 채 강모에게 묻는다. 아직도 그는 노랗게 질린 안색이 풀리지 않아, 괴로운 듯 미간을 좁힌다. 이기채는 잠시 괴로움을 가라앉히려는 듯 침묵하였다가 강모에게 시선을 건넨다.
"몸도 충실허고?"
"예."
"강태는 같이 안 왔드냐?"
"예."
이기채는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강모가 일어서며 위칸으로 가 검은 가방을 들고 아랫칸으로 내려온다. 가죽 가방인 모양인데 몹시 딱딱해 보이고, 여느 것처럼 네모진 것이 아니라 제법 부피가 있는 그것은, 대가리 쪽이 더 둥글게 퍼져 있고 꽁지는 둥글기는 하되 훨신 좁다. 그리고 허리께가 잘록한 것이었다. 강모는 그 가방을 이기채 앞에 공손히 놓으며 자신은 완초 방석 위에 앉는다.
"이것이 무어냐?"
이기채가 의아하다는 듯 강모를 본다. 기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 빛이 심상치 않다.
"바이올린입니다."
"바이... 뭐라고?"
"서양 악기예요. 바이올린... 이라고... ."
"형님, 이것이 바이룽이라는, 그, 왜, 깡깽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뭐 서양 앵금 같은 거지요."
기표가 책상다리를 한 발바닥을 쓸면서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상체를 좌우로 미동하듯 흔든다.
"그래서?"
이기채는 검은 가방 쪽으로는 힐끗 한 번 눈을 주다가 말고 강모에게 다그치듯 묻는다. 말끝이 툭 떨어지며 잘리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기색이다. 그의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마의 주름과 좁혀진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은 날이 서 있었다. 강모는 그런 이기채에게 얼른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 강모의 바랜 듯한 낯빛이 더욱 바래는 것 같더니
"저... ."
하고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어 버린다. 이기채는 채근하는 대신 강모를 쏘아본다. 그 눈길에 얼핏 붉은 핏발이 돋는다. 번뜩 화광이 비치는 것 같다. 그는 금방 터지려는 무엇인가를 지그시 눌러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디 하는 양을 좀 보자, 하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아버지한테 좀 뵈드리려고요."
강모는 이기채 앞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가방의 고리를 벗긴다. 젊은 사람의 손등답지 않게 가방을 여는 강모의 손등은 말라 있었다. 그 마른 손이 떨리는 품으로 보아, 강모는 이기채의 시선과 침묵에 잔뜩 짓눌려 주눅이 든데다가 지금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의 크고 둥근 눈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기채가 그렇게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기표도 따라서 얼굴빛이 무겁다. 이윽고 가방 고리가 벗겨지면서 뚜껑이 젖혀지자, 그 속에 누워 있는 바이올린이 날렵하고 작은 몸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부드럽고 윤택이 나는 다갈색 몸통의 잘록한 허리에는 단단한 단풍나무로 된 줄받침이 야무지게 버티고 서서, 팽팽한 네 가닥의 줄을 받치고 있다. 그 팽팽함은 손가락으로 퉁기지 않아도 저절로 팅, 소리가 날 것 같다. 그것은 이기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신경가닥과 힘줄들은 당길 대로 당겨진 활시위처럼 푸르르 떨린다.
"강모가 동경에 있는 음악학교를 가고 싶다고 허는데... ."
이기채는 청암부인이 한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연전에, 며느리가 신행 올 무렵, 대실로 떠난 강모를 두고 청암부인이 이기채에게 그런 의논의 말을 꺼냈었다.
"동경에 보내 주지 않으면 저도 대실에 안 간다고 정색을 허길래, 내, 애비와 의논헌다고 그랬다. 동경행이 쉽게 결정될 일이 아니나, 내 마음에 인륜의 일이 급하여 그쯤 대답해 두었으니 네가 잘 타이르거라. 제 딴에는 혹시 동경 가 있는 강호를 생각하고, 거기 같이 있어 볼까 하는지도 모르지. 강호하고 강모는 처지가 다르니 네가 알아듣게 잘 타일러 보아."
"타이르기는 무얼 타이릅니까? 도대체 그놈은 제 분수도 모르고 앞가림도 할 줄 모르는 놈이올시다. 물렁하기가 묵나물 한가지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이 집안을 이끌어가고, 장차는 종손의 도리를 다할 것인지, 지금부터도 앞길이 캄캄합니다. 솔직한 말씀이 제가 강모란 놈 때문에 요즈음 통 잠을 못 이룹니다."
잠을 못 이룬 것이 어찌 그때뿐이랴. 날이 갈수록 그만큼 더 깊은 불면의 늪으로 잠겨들어가, 발길은 끝도 없는 허방을 헤매고, 머리 위로는 짓눌려 오는 진흙덩이의 무게, 그리고 문득 자다 깨면 덮쳐 오던 그 암담한 어둠. 그때마다 이기채는 재떨이를 끌어당겼다. 어둠이 바닷물처럼 집안을 침몰시키고 있는 한밤중, 큰사랑에서 울리는 마른 기침 소리와 재떨이 두드리는 새된 놋쇠 소리는, 마치 어둠을 깨뜨리고 쫓아내려는 경쇠 소리 같았다. 그 소리에 누렁이가 펀 듯 귀를 세우며 짖기 시작하면 위아랫집, 건넛집의 개들이 꼬리를 이어 짖어댄다. 그러다가 온 마을의 개들이 짖는다.
"율촌양반 오늘 밤에도 또 못 주무시는가 부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돌아누우며 그렇게 잠결에 중얼거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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