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 최명희
8. 바람닫이 (3/4)
"바닥에 물을 닦아야지."
청암부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안서방네는 그 말에 당황하여 부뚜막과 살강을 둘러보았으나 눈에 뜨는 것은 행주뿐이었다.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딸린 뒷방문을 열고는 방걸레를 지어 들었다.
"허허어, 살림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로고, 방에 쓰는 것, 부엌에 쓰는 것, 마당 헛간에 쓰는 것이 다 용도가 있고 자리가 있는 법 아닌가. 어찌 방걸레로 부엌 바닥을 훔칠까."
안서방네는 부인의 말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황망히 행주치마를 벗어 닥의 물을 찍어냈다. 그때 청암부인의 나이는 안서방네와 별반 차이 나지 않는 이십 중반이었다. 안서방네는 그 일을 오래 잊지 않았다.
"상전은 다르시다."
그네의 가슴속에는 이 생각이 깊숙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청암부인은 그때 같지가 않으시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눈에 띄게 초췌하여지는데다가, 전에 않던 말씀도 힘없이 하시지 않는가.
"여보게, 인제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네."
한 번은 부인이 대청마루에 앉아, 붙들이가 마당 쓰는 것을 보며 안서방네에게 그렇게 탄식하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안서방네는 민망하여 아무 대답도 못하였지만, 청암부인은 바로 며칠 전에도 이기채를 앞에 하고 또 그 말을 뇌었다.
"인제 두고 보아,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니."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반박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마당에 와서 창씨개명이라니, 이기채는 밤이면 잠을 못 이루었다. 특히 곡성의 유건영과 고창의 설진영이 비장하게 죽어간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어찌하면 좋을꼬. 과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이기채의 생각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옆에서 기표가 말을 던진다.
"사람은 죽어 버리고 성씨만 남으면 뭘 합니까? 몸뚱이도 없는데 빈옷껍데기만 너울거리는 격이지요."
그러더니 답답한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사실 이와 같은 시국에 이만큼이라도 별 탈없이 집안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은, 기표의 덕분이랄 수가 있었다. 그는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도 단순히 그냥 친분이 있는 정도의 사람도 있었지만, 상당한 권한이 있는 사람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하였다. 그래서 이기채도 기표의 권유에 따라 기부금이며 군량을 내기도 하였다.
"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형님, 한푼을 아끼다가 때를 놓치면 아차 집칸을 잃는 수도 있습니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수도 있고, 반대로 가래로 막을 걸 호미로 막는 수도 있으니까요."
기표는 민활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기채는 한치도 빈틈없이 어긋남도 없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야 하는 성격이다. 그 성격은 이재에서도 그대도 드러났다. 한 번 움켜쥔 것은 놓지 않으려 하고, 마음이 질긴 사람이어서 쉽게 무슨 일을 포기하거나 새로 시작하지 못한다.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면, 그것이 어디로 갈 것인가? 결국에는 내 앞으로 모이지 않겠느냐."
그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마치 그런 이기채의 뜻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위장이 실하지 못하였다. 실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무기력하다는 쪽이 옮을 것이다. 본디 체수도 작고, 위장까지 좋지 않으니, 그는 오로지 강단 하나로 자신을 버티면서 집안을 관리해 나갔는데, 그는 언제부터인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었다. 주식으로는 녹말가루를 멀겋게 쑤어서 먹고, 좀 괜찮을 때는 마음이나 죽을 끓였으며, 밥은 그야말로 어쩌다 한 번밖에는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심기가 좀 언짢을 때는 아예 아무것도 소용 없어서 율촌댁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대신 이기채의 사랑 마루에는 언제나 웬만한 약재가 갖추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약재를 자르고 써는 작두, 갈아서 가루를 내는 정교한 맷돌, 빻아서 가루를 내는 약절구와 작은 공이가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이어 있었다. 거기다가 물론, 약을 밭치는 체와 비상도 달 수 있는 약저울이며 약 탕관도 늘 약장 위에 얹혀져 있었다. 웬만한 선비 사인의 집에는 크고 작은 간에 하나씩 갖추기 마련인 이 약장은, 그 서랍이 적게는 여남은 개에서부터 많게는 칠팔십여개에 이르기까지 층층으로 빼곡하여, 그 안에 칸칸마다 썰어 넣어 놓은 약재가 가득 담기어 있었는데. 사랑에만이 아니라 안방에서도 약재를 쓰이어, 머리맡에 내방 약장을 두기도 하였다. 그래서 집안 안팎 식구들이 용도가 있을 때, 혹은 일가와 문중, 마을 사람들이 아플 때, 화제를 내어 약을 지어 주었으니, 선비라면 누구라도 스스로 화제를 낼 줄 알았다. 이기채는 의서를 두루 갖추어 가까이 두고 읽으며, 음식을 멀리 하였다. 그러니 자연 다른 집안 사람들도 따라서 소식을 하게 될 수밖에, 그래서 이 집에 찾아왔던 손님들이 마침 끼니 때가 되어 함께 상을 받으면 그 소반에 우선 놀라 버린다. 그러기에 율촌댁이 마늘 한 쪽을 반으로 잘라서 아침에 반절, 저녁에 반절 나누어 양념 무친다는 소문이 돌 정도인 것이다. 물론 율촌댁이 살림 규모가 또 그만큼 알뜰하고 인색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기표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수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는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어느 때는 기표의 옷자락 끄트머리에서 칼빛이 번뜩이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혈색과 풍신 때문에 그것은 쉽게 누구의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표를 보고 어쩌다 기응이 미간을 깊이 찡그리는 일이 있었는 데, 그 기색을 기표도 놓치지 않고 반박하였다.
"사람의 한평생이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어. 기회와 수단, 이것이 서로 잘 맞어 주면 뜻을 한 번 이루어 볼 만도 하지."
기표는 오류골 동생 기응에게 그렇게 말한 일도 있었다.
"분북대로 살지요."
기응은 중형 기표의 하는 일이 오히려 걱정스럽다는 투로 대답했다.
"분목? 그것도 다 사람이 짓는 대로 몫이 돌아오는 게야. 큰집의 농토며 소작미만 해도 그것이 가만히 앉아서 지켜지는 것인가? 분복대로 산다고 하늘만 쳐다보고 앉어 있었더라면, 진즉에 무슨 일이 났을 것이야. 이 어지러운 세상에." 그렇게 말하는 기표가 큰집을 위하여 여러 모로 힘 쓰고 있는 것은 기응도 알고 있었다. 일본은 최근, 양정 계획으로 일만자족정책을 세우고, 지난 1937년부터 연간 천만 석 이상의 미곡을 조선에서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동안 일본의 식량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자, 제7대 조선 총독 남차랑은 작년 1939년부터는 양곡 반출에 대한 계획을 다시 세웠다. 즉 조선에서 나는 양곡의 총 수확량을 지금까지 책정하였던 실 수확량보다 이할 오푼이나 높여서 허위로 책정한 것이다.
"인자는 조선사람한티는, 일년 양식으로 한 사람 앞에 쌀 서 말 여덜되 여덜 홉만 냉겨 놓고, 나머지는 다 공출헌다네."
"아이고매, 쥑일 놈들. 호랭이 물어가고 자빠졌네. 깟낫애기 암죽만낄일라도 그께잇 거 갖꼬는 어림 택도 없겄다."
"아니, 지어 바치라는 것은 숫짜가 눈깔이 돌아가게 엄청나고, 먹으라고 냉게 놓는 것은 싸래기만큼배끼 안된디, 그나마 아홉 말에서 서말 여덜 되 여덜 홉으로 먹을 양석을 깎어 내리머언, 우리는 기양 앉아서 비툴어져 죽으라는 말이구만잉."
"아홉 말썩 쳐서 냉게 놀 때도, 그거이 어디 사람 먹는 거이였간디. 밀지울 섞어 먹고, 깻묵 섞어 먹고, 똥이 안 빠져서 똥구녁 찢어진 놈이 어디 한둘이었가니? 인자는, 똥구녁끄장 갈 것도 없이 창새부터 짝짝 찢어지겄네."
"나무 껍닥 벳게 먹고, 풀뿌랭이 캐 먹고, 또랑물 퍼 마시고 살어야제잉.... . 개 짐생만도 못허게."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미곡 수급 계획에 의하여 각 농가마다 할당량을 정해 주고, 할당 수확량에서 정해 준 소비량을 뺀 나머지 양곡은 모조리 곡출해 가 버렸다. 그러니 농민들은 실제 수확량보다 엄청나게 높은 할당량 때문에 기가 질렸고, 거기다가 도저히 그것만으로는 입에 풀칠하여 살 수조차 없는 적은 양곡 때문에, 헤어날 길 없는 빈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부황이 났다. 오래 굶주린 사람들, 그들은 살가죽이 누렇게 붓고 들떠서 밀룽밀룽해져, 서로 얼굴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이 젊은 축은 좀 나았지만 병약한 노인이나 어린 것은 버치어 내지 못하고, 허깨비처럼 픽픽 쓰러져 힘없이 죽어 나갔다. 말이 천만 석이지, 평년작을 전제로 할 때, 오백만 석 이상은 조선에서 반출할 능력이 없었음에도, 일본 본토로부터 배정받은 공출 할당량은 요지부동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때 총독부에서는 단 한 평의 땅이라도 놀리지 말자고, 소위 '일평원예'라는 것을 실시하였다. 학교 마당, 가정집의 뒤뜰, 그리고 도로변이나 자갈밭까지도 개간을하여 식물을 심게 하고는, 농업 생산 책임제를 강행하여 쌀과 보리 종류, 잡곡, 소채, 누에고치 할 것 없이 책임 품목을 지정하고, 그 책임수량을 할당하였으니, 조선인은 설령 자기가 굶어 죽은 한이 었어도 서슬이 시퍼렇고 찰거머니 같은 공출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임실의 중농인 한 남정네는 넋이 나간 사람 모양으로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마른 입술이 쩍쩍 달라붙는 담뱃대 꼭지를 연방 빨더니
"에에이 벌어 처묵을 노무 시상."
하면서 연기 대신 한숨을 내뿜었다.
"저노무 외양깐, 팍 뿌수거 부러라. 체다뵈기도 싫다. 하이고오, 웬수엣 노무 시사앙. 두 눈꾸녁을 이렇게 버언히 뜨고 자빠져서 황소가 끄집혀 가는 것을 체다만 보고 있었이니... ."
그 남정네의 안사람이 짚북더미 같은 머리에서 꾀죄죄한 수건을 벗겨 내리며 따라서 한숨 쉰다.
"글 안허면 어쩔 거이요? 생우 공출이 머 어지 오널 일이간디? 넘 다 당헐 때는 넘 일인가 싶드니마는 참말로 발 등에 베락 떨어졌소. 인자 이 동네에는 소새끼라고는 씨알머리도 없응게, 농사 질라면 재 너머로 황소 빌리로 가야겄구만요."
"재 너머에는 무신 소가 남어 있다간디? 거그도 다 진작에 씨가 말러부린 지 오래여... . 이러다가는 조선 팔도에 송아치새끼 씨종자가 멜종을 허고 말 거이네."
"아, 재 너머에 왜 황소가 없당가? 이런 난리 속으서도 황소 암소 짝맞춰서 키우는 집이 있는디."
그것은 청암부인댁을 이름이었다. 그 말소리 속엔ㄴ 미처 다 토하지 못한 억하심정이 꼿꼿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그렁게 어쩔 거이여? 임자가 쫓아가서 한 마리 끄집고 올랑가?"
남정네가 담뱃대를 토방에 탁, 탁, 치며 비꼰다.
"폭폭헝게 안 그러요오, 폭폭헝게. 누구는 머 배가 아퍼서 매급시 해꼬지 허는 말인 중 아능게비. 아, 농사꾼이 소가 없어농게 곰배팔이 도치질 허능 거이나 똑같제잉."
농부의 발등은 단순히 햇빛에 그을러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못 먹고 속만 끓인 탓인지, 묵은 소나무 뿌리가 억세게 솟구쳐 오른 것 같은 힘줄이 거멓게 돋아 있었다.
"그 소는 그렇게 다 잡어다가 대관절 머엇에다 쓴당가요?"
"내가 알어? 왜놈 군대 멕일라고 괴기국 낄이고, 까죽은 벳게서 그놈덜 구둔가 장환가 맨들어 신는다고 허대."
"천벌을 받을 놈들. 차라리 산 사람 살가죽을 벳게다가 신짝을 삼어신고, 이 말러붙은 살뎅이를 비어서 처묵제. 그러먼 이 한 많은 노무 시상, 이 꼴 저 꼴 안 보고 저승길이나 어서 가제."
두 내외는 넋을 흘린 듯 앉아서, 밥때가 되었는지 지났는지를 모르고 하염없는 탄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자식같이 애중한 황소가 뒷발굽으로 마당을 차며 안 가려고 안 가려고 버티면서 움메에에, 끌려가던 그 모습이 숨넘어가게 떠올랐다. 아아, 그 황소 한 마리의 목숨이 어떤 것이었던가. 지지리 못나서 핏속에다 한숨만 절여 넣던 아부지가 한평생 소원하던 황소, 그 아부지 죽고 나서 송아지 한 마리 강아지만 헌 것 마련하고는 죽어도 좋을 만큼 뿌듯하여 돌아앉어 코를 풀었었지.
... 그 황소가 집채만큼이나 커 주었는데, 바로 그 황소가... .
돌이켜 보면 1920년 봄부터 반출되기 시작한 생우는 1940년 올 봄에 이르러 물경 사십여 만 마리에 달하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농사철이 닥친 어떤 농가에서는, 소 대신에 사람이 가래질을 하였다.
"형님, 일본이 조선에서 공출해 가는 일을 위하여 상비해 둔 기관원이 몇인 줄 아십니까? 삼십만여 명이올시다. 거기다가 애국반이 삼십 오만여나 됩니다. 그러고 십삼 개의 병사구 사령부 및 그 소속원이 있어요. 그뿐인 줄 아십니까? 헌병, 밀정, 순사가 개미같이 깔려 있지요. 거미줄 같은 총독부 행정력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대상으로 싸워 본다는 건 계란으로 바우치기올시다. 제 몸만 깨져서 박살이 나지 바우가 움쩍이나 헐 것 같으세요? 어린없는 일이지요. 이럴 때 타협을 해야 허는 거예요, 타협을."
과연 그때 기표는 전주로 나가 술자리를 여러 차례 가진 후, 그 '타협'을 통하여 교묘하게 일을 성사시키고 호기롭게 돌아왔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왕골, 마초, 갈대, 가마니, 멍석, 새끼, 지푸라기까지 긁어 가고 걷어 가고, 헌 쇠, 깡통, 파지, 누더기, 빈 병마저도 깡그리 쓸어 가는데
"걸레, 잡초도 공출한다."
는 영이 떨어지는 판국이었으니, 기표가 아니었더라면, 종가에서도 어떤 난리를 겪을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형님, 다른 문중은 우리만 못해서 창씨개명들을 했겠습니까? 다 문벌 있고 가문 좋은 집안들입니다. 자진해서 했든지 마지못해 했든지 결국은 허고 말었습니다. 제가 형님이라면 진즉에 했겠지만, 이만큼 허셨으면 형님도 도리는 다허신 겁니다. 아, 지금 전국 인구의 팔할이 창씨를 했는데, 자그만치 천육백만여 명이라고요. 그렇게 대다수가 이 일을 행헐 적에는 다 그만헌 명분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아."
나머지 이할도 있지 않으냐? 아직까지도 창씨를 안헌 사람도 사백여 만 명이 그대로 남어 있지 않어?"
"모르면 몰라도, 그 사람들은 기어이 시키고 말 것입니다. 일본 제국이 마음 먹어서 못헐 일이 있습니까? 시간 문제지요."
"요즘 같으면 정말로 괴로워서... . 내가 차라리 지게질을 할망정 종손으로 되지 않었더라면 싶은 마음조차 간절해."
"형님답지 않으신 생각이지오. 기왕에 국운이 비색하여 나라가 망했고, 시운이 뜻과 같지 않은 것을 형님 탓으로 돌릴 사람 아무도 없을 겝니다."
이기채는 놋쇠 재떨이를 끌어당긴다.
"이제 곧 창씨개명이 문제가 아닌 날이 닥칠 겁니다. 그때는 사느냐 죽느냐, 이 문제가 턱에 걸려서 아무것도 뵈지 않을 껄요. 아 왜 거년 칠월에 국가 총동원법 제4조라고 허면서, 국민징용령이 안 떨어졌습니까? 일본 본토는 그렇다 치고, 조선, 대만, 사할린, 남양 군도에까지 그 징용령이 시행되고 있는 판에, 징병령인들 떨어지지 않겄습니까? 지금 지원병 제도는 장차 징병 문제를 경정하려는 시험으로 해 보는 것이라고 허드구만요."
이기채는 가슴이 까닭없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리고 순간 전신에 찬 기운이 끼쳐 자기도 모르게 소름을 털어냈다. 이기채의 가슴 복판을 훑고 지나가는 서늘함은 쉽게 진정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것은 재작년에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육군성, 척무성 및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입안, 검토된 그 안은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로 공포되고, 동년 4월 3일자로 시행되었었다. 전문 5조 및 부칙으로써 구성된 지원병령 제1조에는
"연령 십칠 세 이상의 제국 신민인 남자로서 육군 병역에 복할 자는 육군 대신의 정한 바에 의하여 전형한 다음, 이를 현역 또는 제일 보충역에 편입할 수 있다."
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민사령의 적용을 받는 한국인 청장년들을, 현역 또는 제일 보충역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제도에 대하여 남차랑 총독은 "반도 동포의 충성이 강하게 인천을 움직인 결과이며, 조선 통치상 명확한 일선을 긋는 획기적인 일이다." 고 말했으며, 조선군 사령관 소기국소는 "일시동인의 성려에 바탕을 둔 것이요, 내선일체적 성업을 향하여 가장 강력한 일보를 내어디디는 것." 이라고 기꺼워하였다. 거기다가 윤덕영 같은 적극 친일 추종자는 이 육군특별지원병령에 쌍수를 들어 환영 지지하면서 "이로써 반도 민중들도 전적으로 일본 국민이 되는 것이니, 한층 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고 기염을 토하였다. 그러나 이기채는 그때 아까처럼 가슴이 내려앉고, 소름이 찬 손으로 온몸을 훑으며 지나갔었다. 강모가 만 십륙 세였던 것이다. ...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만 십칠 세 이상의... 제국 신민인 남자... 만 십칠 세 이상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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